2026-09-12

신복룡 한국사 새로 보기—항일·독립운동의 실제와 평가

 신복룡 한국사 새로 보기—항일·독립운동의 실제와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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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글의 핵심 주장

신복룡은 한국 근현대사를 설명해 온 두 가지 통념을 동시에 비판한다.

첫째는 대한제국의 멸망을 전적으로 일본의 침략 탓으로만 돌리는 역사관이다.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조선과 대한제국 내부의 정치적 무능, 지배층의 분열, 군사력과 행정력의 취약성, 근대 국제정세에 대한 오판도 함께 살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일본의 책임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한국인 스스로의 역사적 책임을 성찰해야 한다고 말한다.

둘째는 한국이 항일독립운동의 결과로 “자력 광복”을 쟁취했다는 서술에 대한 비판이다. 교과서가 의병전쟁, 3·1운동, 민족실력양성운동이 1945년까지 이어져 결국 광복을 쟁취했다고 설명하지만, 실제로 일제의 패망을 결정한 것은 연합국의 군사적 승리였다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저자는 다음과 같은 수치를 제시한다.

  • 3·1운동 참가자를 약 46만 명으로 보아 전체 인구의 2.76%라고 계산한다.
  • 1907∼1911년 의병투쟁 참가자를 약 14만 명, 당시 인구의 1.1%로 계산한다.
  • 임진왜란 당시 전투 참가율 약 3.5%와 비교해도 항일투쟁 참가율은 높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 따라서 “일제 치하에서 2천만 동포가 한결같이 일제를 거부했다”거나 “우리 힘으로 독립을 쟁취했다”는 표현은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 민족주의적 신화에 가깝다고 본다.

저자가 도달하는 결론은 다소 도발적이다. 대한제국은 내부의 약점을 극복하지 못해 멸망했고, 한국인은 끝내 일본을 자력으로 몰아내지 못했다. 그러므로 일본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것과 별도로 한국 사회 내부의 실패도 반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2. 신복룡의 문제 제기가 타당한 부분

“광복을 자력으로 쟁취했다”는 표현은 사실과 맞지 않는다

1945년 8월 일본이 한반도에서 물러난 직접적인 원인은 한국 독립군이 일본군을 군사적으로 패퇴시켰기 때문이 아니다.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에 패배했고, 소련이 대일전에 참전했으며, 원자폭탄 투하까지 겹쳐 일본이 항복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은 일본에 선전포고하고 연합군과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했지만, 작전이 실행되기 전에 일본이 항복했다. 임시정부도 국제적으로 정식 교전국 정부로 승인받지 못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민족이 무장투쟁으로 일본을 축출하고 국권을 회복했다”는 서술은 정확하지 않다.

광복과 독립도 구분해야 한다. 1945년 8월에는 일본의 식민지배에서 해방되었지만, 즉시 자주적인 통일국가를 수립한 것은 아니다. 미군과 소련군이 각각 남북을 점령했고, 1948년에 서로 다른 정부가 세워졌다. 따라서 1945년의 광복은 “완성된 자주독립”이라기보다 일본의 패전으로 갑자기 주어진 해방이었다.

망국의 내부 원인을 묻는 것도 필요하다

대한제국은 일본보다 압도적으로 약한 국가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 약함의 원인을 모두 일본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세도정치 이후의 국가기강 붕괴, 과세제도의 문란, 지배층의 파벌 대립, 군사제도의 낙후, 농민층의 이탈, 개혁을 둘러싼 혼란은 이미 내부에 존재했다.

특히 청·일·러 사이에서 외세를 끌어들여 다른 외세를 막으려 했던 외교는 결국 국가의 자주적 기반을 약화시켰다. 고종과 지배층이 침략을 원한 것은 아니지만, 위기를 관리할 능력이 부족했다는 평가는 피하기 어렵다. 신복룡이 강조하는 “자성”은 이 점에서 의미가 있다.

독립운동을 도덕적 찬양만으로 다룰 수는 없다

독립운동 내부에는 이념·지역·세대·계급의 갈등이 있었다. 임시정부도 자금 부족과 파벌 분열에 시달렸고, 만주의 무장단체들 사이에도 통합과 분열이 반복되었다. 국내의 다수 주민은 생존을 위해 식민지체제에 적응했으며, 어떤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따라서 “온 민족이 하나가 되어 35년 동안 싸웠다”는 식의 서술은 실제 식민지 사회의 복잡성을 가린다. 저항·순응·협력은 서로 완전히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의 생애 안에서도 교차할 수 있었다.


3. 그러나 신복룡의 논증에도 중대한 문제가 있다

참가율 1.1%, 2.76%라는 계산은 독립운동의 의미를 평가하는 적절한 기준이 아니다

3·1운동 참가자 46만여 명은 일제가 파악한 시위 참가 인원을 기초로 한 수치로 보인다. 식민당국은 모든 농촌 시위와 비공개 저항을 완전히 파악할 수 없었고, 축소 보고할 동기도 있었다. 반대로 흔히 사용되는 “200만 명 참가”도 정확한 개인 명부에 근거한 확정치는 아니다. 어느 쪽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더 중요한 문제는 전체 인구를 분모로 삼는 방식이다. 전체 인구에는 영유아·노인·병자 등 시위나 무장투쟁에 직접 참가할 수 없는 사람도 포함된다. 여러 차례 시위에 참가한 사람을 어떻게 계산할지도 불분명하다. 직접 참가자뿐 아니라 피신처·식량·자금·정보를 제공한 후원자도 있었다.

무장저항은 본래 소수가 수행한다. 프랑스 레지스탕스나 인도 독립운동 역시 전 인구가 직접 지하투쟁이나 시위에 참여한 것은 아니다. 소수였다는 사실은 밝혀야 하지만, 소수였다는 이유만으로 역사적 의미가 작아지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의병투쟁과 임진왜란의 참가율 비교는 조건이 전혀 다르다. 임진왜란은 왕조의 정규군과 관군이 존재한 국가 간 전쟁이었다. 정미의병은 군대가 강제 해산되고 무기·재정·통신망을 일본이 장악한 상황에서 벌어진 비정규전이었다. 두 수치를 단순 비교하면 오히려 억압의 차이를 지워버린다.

“자력 독립에 실패했다”와 “독립운동이 광복에 기여하지 않았다”는 같은 말이 아니다

독립운동은 일본의 항복을 군사적으로 강제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아무런 인과적 기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3·1운동은 조선인이 병합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였다는 일본의 주장을 무너뜨렸고, 독립을 요구하는 집단적 정치의지를 국제사회에 드러냈다. 그 결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졌으며, 이후 독립운동이 공화주의적 국가건설운동으로 발전했다.

해외 독립운동은 중국과 미국 등지에서 한국 문제를 계속 제기했다. 연합국이 카이로선언에서 한국의 독립을 약속한 데에는 국제정치적 이해관계가 가장 크게 작용했지만, 수십 년간 한국인이 독립 의사를 표현해 온 사실도 그 약속의 정당성에 영향을 주었다. 독립운동이 없었다면 한국이 반드시 일본 영토로 남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전후 한국의 독립을 당연한 정치적 목표로 만드는 기반은 훨씬 약했을 것이다.

독립운동은 또한 해방 이후 국가를 세울 사상과 인력을 준비했다. 공화주의, 민족자결, 민주주의, 사회주의, 농민·노동운동, 여성운동 등이 그 과정에서 형성되었다. 그 결과가 분단과 독재로 훼손되기는 했지만, 현대 한국의 정치적 어휘 상당 부분이 독립운동에서 나왔다.

“내부 식민주의가 외세 침략보다 더 경계해야 한다”는 결론은 위험하다

신복룡은 맹자의 말을 빌려 나라가 내부적으로 먼저 망한 뒤 외부 세력이 이를 멸망시킨다고 설명한다. 이는 정치적 교훈으로는 유용하지만, 역사적 인과관계의 비중을 왜곡할 수 있다.

대한제국에 내부 문제가 많았다고 해서 일본의 병합이 필연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내부가 취약한 국가는 세계에 많았지만 모두 식민지가 된 것은 아니다.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쳐 경쟁 세력을 제거하고, 군대를 동원해 조약을 강요했으며, 고종을 퇴위시키고 군대를 해산한 뒤 병합했다. 병합은 대한제국의 자연사나 한국 지배층의 자발적 선택이 아니라 일본 제국의 의도적 국가폭력이었다.

그러므로 “외부 침략보다 내부 식민주의가 더 무섭다”는 표현은 책임의 위계를 뒤바꿀 위험이 있다. 내부의 무능은 침략을 막지 못한 책임이고, 일본은 침략하고 식민지배를 실행한 책임이다. 전자는 실패의 책임이고 후자는 가해의 책임이므로 같은 차원에서 비교할 수 없다.


4. 항일운동과 독립운동은 구분해야 한다

두 용어는 겹치지만 완전히 같지 않다.

구분중심 목표대표적 형태평가
항일운동일본의 침략·지배에 저항의병, 3·1시위, 파업, 학생운동, 무장투쟁저항의 강도와 지속성이 중요하다
독립운동독립국가의 회복·건설임시정부, 외교운동, 교육·언론, 실력양성, 광복군어떤 국가와 사회를 세우려 했는지도 중요하다
생존·문화운동민족공동체와 생활 기반 유지한글교육, 종교·학교·협동조합직접 항일은 아니지만 장기적 독립 기반이 되었다
식민지 적응·협력체제 안의 생존 또는 이익 추구관료·기업·언론·군 복무강요된 적응과 능동적 친일을 구분해야 한다

항일의 강도가 곧 독립운동의 성숙도를 뜻하지는 않는다. 일본인을 공격하는 것과 민주적·평등한 국가를 구상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반대로 무장투쟁을 하지 않은 교육·문화운동도 식민지 동화를 막는 역할을 했다.


5. 종합평론

신복룡의 가장 중요한 공헌은 “망국은 전적으로 외세 탓이고, 광복은 전적으로 우리 투쟁의 성과”라는 대칭적인 민족주의 서사를 흔든 데 있다. 대한제국의 내부적 실패와 독립운동의 실제 역량을 냉정하게 검토하자는 요구는 타당하다. 일본에 대한 도덕적 비난만으로 한국 근현대사의 모든 문제를 설명할 수 없다는 지적도 옳다.

그러나 그의 수정주의는 반대 방향으로 지나치게 나아간다. 인구 대비 참가율이라는 단순한 수치로 저항의 깊이를 재고, 군사적으로 일본을 몰아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독립운동의 역사적 효과를 축소한다. 이는 약소민족의 운동을 강대국의 정규전과 같은 기준으로 평가하는 결과가 된다.

가장 균형 잡힌 결론은 다음과 같다.

대한제국은 일본의 침략으로 멸망했지만, 내부의 취약성 때문에 침략을 효과적으로 막지 못했다. 한국의 독립운동은 일본을 자력으로 패퇴시키지 못했으며, 1945년 해방의 직접 원인은 연합국의 승리였다. 그러나 한국인의 지속적인 저항은 식민지배에 정당성이 없음을 입증하고 민족공동체와 독립국가의 가능성을 보존했으며, 해방 후 국가건설의 인적·사상적 기반을 마련했다.

따라서 항일·독립운동을 “우리 힘으로 광복을 쟁취한 영웅사”로 미화해서도 안 되고, “소수의 무모하고 실패한 저항”으로 축소해서도 안 된다. 군사적으로는 패배했지만 정치적·도덕적·역사적으로는 한국이 일본에 자발적으로 동화되지 않았음을 남긴 운동이었다. 이것이 사진 속 신복룡의 주장보다 더 정확하고 균형 잡힌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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