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9-06

1894년, 경복궁을 점령하라! | 나카츠카 아키라 2002

1894년, 경복궁을 점령하라! | 나카츠카 아키라 | 알라딘


1894년, 경복궁을 점령하라!
나카츠카 아키라 (지은이),박맹수 (옮긴이)푸른역사2002-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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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1894년은 청일전쟁이 터진 해다. 그 뒤로 정확히 50년 후인 1945년에 일본은 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항복했다. 많은 일본인들은 청일.러일전쟁까지는 지도자들이 훌륭했으나 만주사변 이후의 태평양전쟁 시기에는 지도자가 무능하여 패전의 쓰라림을 맛봤다고 생각한다. 과연 이러한 역사관은 정당한 것일까?

이 책은 청일전쟁(1894~1895)이 시작된 7월 25일 이틀전인 23일에 일어난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사건이 뚜렷한 목적과 주도면밀한 계획 하에 이뤄졌으며, 그 사실이 일본 육군참모본부가 공식적으로 펴낸 <일청전사>에서 위조된 이야기로 바뀌었다는 것을 같은 기관에서 작성한 바로 그 기록의 초안(初案)을 통해 실증하고 있다.

일본 근대사의 큰 흐름 속에서 경복궁 점령사건은 부분일지 모르나, 지은이인 나카츠카 교수는 이 사건이 일본이 본격적인 제국주의 국가로서 세계사에 등장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 청일전쟁 최초의 무력행사였다는 점에서 빠뜨릴 수 없는 열쇠 중 하나라고 말한다. 지은이는 이 책을 통해 그같은 일본의 역사 위조가 근대 일본에서 조직적으로 이루어져왔음을 보여주고 있다.


목차


한국어판 서문
머리말

제1장 100년만의 발견

풀리지 않는 의문
<일청전사> 초안을 발견하다 / 뜻밖의 기록, '조선왕궁에 대한 위협적 운동' / 위서(爲書)인가 진짜인가

어둠 속에 묻힌 조선왕궁점령사건
침략의도는 없었다? / 사건의 지상과 다른 공식 견해

일본의 풍속도로 읽다 I 조선왕궁점령사건과 청일전쟁에 대한 일본인의 인식

제2장 조선왕궁점령의 실상

청일전쟁의 도화선
최초의 무력 행사 / 명분이 궁색했던 일본 정부 / 청한 종속 문제를 구실로

왕궁점령을 계획하다
왜 왕궁 위협인가 / 작전 계획을 짜다더보기



책속에서


모든 권력은 과거를 자기 정당화에 이용하려고 한다. 정당화에 어울리지 않는 과거를 억압하며, 잘 어울리는 과거만을 문맥에서 떼어내 과장하고, 역사를 허구로 바꾸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권력이 행하는 이러한 과거 재단에 대해 역사가는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가. 권력의 정당화에 봉사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지 모른다.더보기 - 오네긴



저자 및 역자소개
나카츠카 아키라 (中塚明) (지은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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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 출신으로 교토대 사학과를 졸업하였고, 일본근대사를 전공했다. 1960년대부터 근대 일본 역사에서 ‘조선 문제의 중요성’을 자각하여, 청일전쟁을 비롯한 근대 일본의 조선침략사 등 한일관계 역사를 연구했다. 1963년부터 나라여자대학 문학부 강사, 조교수, 교수로 근무하였고 1993년에 정년퇴임하였다. 조선사연구회 간사, 역사과학 연구회 대표위원, 일본학술회의 회원 등을 지냈다. 나라여대 명예교수이며, 일본의 역사왜곡을 비판하는 대표적 지성이다.

저서에 <청일전쟁연구日淸戦爭の硏究>(1968), &l... 더보기

최근작 : <건건록의 세계>,<건건록>,<일본인이 본 역사 속의 한국> … 총 22종 (모두보기)

박맹수 (옮긴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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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 교무이자 한국근대 역사 및 사상 연구자로 오랜 기간 활동했다. 동학농민혁명에 관해 다수의 연구를 발표하고 관련 활동에 참여했다.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 교수와 같은 학교 총장을 역임하고 현재 명예교수로 있다. 저서로 『사료로 보는 동학과 동학농민혁명』 『개벽의 꿈 동아시아를 깨우다: 동학농민혁명과 제국일본』 『생명의 눈으로 보는 동학』 등이 있다.

최근작 : <개벽사상과 종교공부>,<문명의 대전환과 후천개벽>,<동학으로 가는 길> … 총 30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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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이나 한국사능력시험, 각종 공무원 시험에서 일본의 1894년 경복궁 점령이 중요하게 다루어 지겠군...ㅋㅋㅋ이렇게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니~~~^^
history 2022-06-05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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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전공수업에서 참고도서로 지도교수님이 추전해서 구매합니다. 이게 벌써 10년전에 나왔는데 이제야 봅니다.
잘되는나 2012-10-13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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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양심있는 일본 역사 학자가 밝힌 일제의 만행

이 책은 제목에서도 느껴지듯이 첫인상부터 강렬하다. 마치 작전명같기도 하다. 저자인 나카츠키씨는 일본인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1894년 경복궁 점령사건 때 일제가 자행했던 만행들을 역사적 사료로 조목조목 따져가면서 비판하고 있다.

사실 경복궁 점령사건은 우리나라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교과서에서 잠깐 연표나 한 두줄로 나타났다가 사라진 사건이다. 내가 고등학교 때만해도 경복궁 점령사건은 대략 이러했다.

‘1894년, 일본군은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청의 군대가 조약을 아기고 계속 조선에 눌러앉아 조정을 간섭하기 시작했다. 이에 화가 난 일본군은 청군과 마찬가지로 계속 조선에 주둔해있다가 결국엔 경복궁에 쳐들어가 고종을 사로잡았다.‘

언뜻보면 마치 청나라가 잘못한 것처럼 보인다. 일본은 이에 맞대응했으며 경복궁 점령도 순전히 우연에 따라 일어났다고 말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 놓는다. 그는 당시 군부 기밀문서를 조사하면서 경복궁 사건이 결코 우연이 아니며 예전부터 철저히 계획해 실행한 하나의 ‘작전‘ 중 하나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사건이 일어난 후에 반발하는 조선 측에게 일본은 어이없는 답변을 한다.

˝첫째로, 일본의 경복궁 점령은 조선의 근대화를 위한 일본의 배려차원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두번째로, 경복궁의 직접적인 원인은 우리나라 군이 먼저 발포했기 때문이먀 경복궁 점령은 지극히 우발적이었다.˝

이런 어이없는 주장에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동시에 이런 어처구니 없는 답변이 현재의 일본의 ‘누구 누구‘씨가 생각나서 ‘일본은 참 세월이 지나도 변함이 없구나‘라고 느꼈다.

아무튼, 저자는 이런 일본측 입장을 반박하는 근거로 일본 육군 참모 본부가 공식적으로 펴낸 ‘일정청사‘를 증거로 들어 일본의 경복궁 점령 사건이 ‘조선 정복‘이라는 뚜렷한 목적과 주도면밀한 계획하에 진행되었음을 주장한다.
정확한 사료와 작전계획까지 첨삭해 설명하는 그가 매우 존경스러웠다.

왜 일본은 과거의 잘못을 사과하지 않은걸까?
이런 물음은 아마 우리나라 사람뿐만 아니라 당시 일제의 피해를 받은 다른 국가들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물론 저자만큼 훌륭하고 개념있는 일본인도 있겠지만 나머지는 장담할 수 없다는 게 현실이다. 지금도 정부가 직접 나서서 역사를 위조하는 움직임을 보이는 곳이다. 책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일본의 제국주의 열풍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나이다. 때문에 그만큼 우리도 역사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가져야한다고 생각한다. 아마 일본은 우리가 이런 문제에 지쳐서 떨어져 나가길 기대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아래의 밑줄은 저자가 역사를 알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쓴 글이다. 이 말을 일본의 역사를 왜곡하는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을 지경이다.




모든 권력은 과거를 자기 정당화에 이용하려고 한다. 정당화에 어울리지 않는 과거를 억압하며, 잘 어울리는 과거만을 문맥에서 떼어내 과장하고, 역사를 허구로 바꾸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권력이 행하는 이러한 과거 재단에 대해 역사가는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가. 권력의 정당화에 봉사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지 모른다.

사실, 어제까지 역사가는 자신의 의지로 또는 강제로 ‘사관‘의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학문으로서 역사에 걸맞는 공헌은, 정치적 정당화를 위해 왜곡되어진 역사적 진실을 복원하고, 나아가 권력의 역사적 정당성을 물어 권력을 초월하는 통찰을 미래를 향해 제기함으로서, 권력으로부터 독립된 역사 감각과 비판 정신 등이 뿌리내릴 수 있게 함을 보태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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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네긴 2019-03-01 공감(4)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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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경복궁을 점령하라 / 나카츠카 아키라



"많은 일본 사람들이 청일전쟁을 '조선의 독립'을 위해 치른 전쟁이었다고 배웠을 것이다. 청일전쟁의 목적을 나라 안팎에 밝힌 선전조칙(宣戰詔勅)에도 "조선은 (일본)제국이 처음에 가르치고 이끌어 열국의 대열에 들게 만든 독립된 나라다. 그런데도 청나라는 조선을 속방이라고 칭하여 음으로 양으로 그 내정에 간섭하니·····제국이 솔선해서 제 독립국의 대열에 들게 한 '조선의 지위'와 '그것을 표시하는 조약'을 업신여기는 청조 중국의 잘못된 욕망 때문에 일본은 부득이 전쟁을 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청일전쟁은 조선을 '독립국'으로 여기는 일본과, '속국'이라고 여기는 청나라가 벌인 전쟁으로, 조선을 '속국'이라고 한 청조 중국은 '야만국'이며 일본은 '문명국'이다. 청일전쟁은 '야만'과 '문명'의 전쟁이었다고 곧 떠들썩하게 퍼뜨린 것이다."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일본군이 처음 행사한 무력은 다름아닌 그 독립을 위해 싸운다던 조선의 왕궁을 향해서였다."(59-60)




"당시 일본 국내에서는 자유민권운동이 쇠퇴하면서 중국에 대한 적대적인 강경론이 우세해지고 있었다. 청일전쟁 발발 10년 전인 1884년 일본의 후원을 받은 김옥균 등의 개화파가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서울에 주둔한 중국 군대에게 격파되어 실패로 끝났고, 김옥균 등은 어쩔 수 없이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 갑신정변의 실패 이후 중국에 대한 적대감과 일본의 국권확장 주장이 국민들 사이에서도 급속히 퍼졌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탈아론(脫亞論)'을 외친 것도 갑신정변 다음해의 일이다. 더구나 청일전쟁이 일어난 해인 1894년 3월 김옥균이 상해에서 조선의 자객에게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청에 대한 일본의 적대감정은 한층 높아갔다. 따라서 조선의 농민반란을 이유로 일본군이 출병하자 여론은 점점 더 격렬해졌고 신문도 적극적으로 전쟁을 부채질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무엇보다 두려워했던 것은 구미 열강의 (간섭) 움직임이었다."(61)




"그래서 조선주재 일본공사 오토리 케이스케가 생각해 낸 방법이, 청한 종속문제를 끄집어 낼 것이 아니라 조선 정부에게 터무니없이 무리한 난제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즉 1876년 조선 정부가 일본과 맺은 수호조규(강화도조약)에서 "조선국은 자주의 나라로서·····"라고 약속한 것을 들어, 지금 청조 중국의 군대가 "속방을 보호한다"라는 이유로 주둔하는 것은 조약 위반이다. 조선은 청국의 속국인가 독립국인가, 독립국이라면 청국군을 국외로 몰아내야 하며, 조선에 그럴 힘이 없다면 일본군이 대신해서 몰아낼 것이므로 조선 정부는 일본에게 '청군 구축'을 의뢰하는 공식 문서를 보내라며 정부를 압박하였다." "일본 정부는 이미 7월 12일 청조 중국에 대한 영국의 조정 공작이 실패하자 전쟁을 시작할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19일 대본영(大本營)도 조선에 있는 일본군에게 "청국군이 늘어나면 스스로 결단을 내리도록 하라"며 개전을 허가하였다. 조선왕궁점령은 이렇게 해서 계획되었다."(62-3)




'공간전사'인 《메이지 이십칠팔년 일청전사》 제1권은 조선 국왕이 일본군에게 포로가 된 상황을 전하고 있는데, "그것은 의도하지 않은 충돌로 서로 사격하게 되어 국왕에게 걱정을 끼친 것을 사죄하고, '국왕을 보호'하겠다고 맹세했다는 내용이다. 이 같은 보도는 사건 직후부터 일본은 물론 나라 안팎에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일청전사》 초안에 분명히 나타난 바와 같이 국왕은 일본군에게 협박당하고 있었으며, 국왕을 지키고 있었던 이들은 조선 병사들이었다. 더욱이 이 위급한 때에 국왕측은 '외무독판이 지금 오토리 공사에게 가서 담판 중이니 그가 돌아올 때까지 문안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해달라고 하며 일본병을 막으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야마구치 대대장은 "문안에 있는 조선 병사의 무기를 인도하면 응할 것이다"라고 대답했지만, 국왕측이 듣지 않자 '칼을 빼들고 군대를 지휘하고 질타하여 일본병을 문안으로 돌입'시키려고 했던 것이다."(76-7)




"일본군이 왕궁을 점령한 7월 23일 오전 11시에 국왕의 부친인 대원군 이하응이 일본군 보병 제11연대 제6중대의 삼엄한 호위를 받으며 왕궁으로 들어왔다. 일본측은 왕비인 민비 일족과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있던 대원군을 추대하여 민씨 일족을 정권에서 배제하려고 했다." "일본 공사관의 스기무라 후카시 서기관은 왕궁으로 들어가는 것을 주저하는 대원군에게 "일본 정부의 이번 거사는 실로 의거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일이 성사된 다음 조선국의 땅을 한 치도 빼앗지 않을 것이다"라는 뜻을 전했다. 어떻게 하든지 대원군을 끌어내서 민씨 일족을 궁정에서 몰아내고, 국왕을 일본 지배하에 두려고 한 것이다. 이것이 조선왕궁점령의 최대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대원군이 마지못해 요청에 응하여 일본군의 보호를 받으면서 왕궁으로 들어간 것이 오전 11시였다. 이어서 오토리 공사도 궁전으로 들어와 조선 정부는 일본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83-4)




"조선 출병 이후 군사 관련 보도는 도쿄 발은 물론, 현지 보도도 일본 정부와 군의 엄중한 관리 아래에 놓여 있었다. 일본 국민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렇게 걸러진 것이었다. 당시 일본의 언론 기관은 신문지조례를 비롯하여 여러 법률에 의해 통제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조선 파병 직후부터는 군사에 관한 기사 게재에 대한 내무성 경보국의 '주의 구두전달'(6월 5일)이 있었고, 또 육군성 제9호·해군성령 제3호(모두 6월 7일) 등에 의해 엄중하게 통제되었다. 〈오사카아사히 신문〉의 기사 가운데 "이상 전보 세 개 중 23일 발은 모두 그날 접수했지만 즉각 독자에게 보도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라든가, 〈오사카마이니치 신문〉의 "위 확실한 보도는 육군성 검열필"이라는 기록은 그 같은 통제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 외 내무성과 육군성·해군성 등은 단순한 통제뿐 아니라 '꾸민 이야기'를 흘려 정보를 조작하기도 했다. 있지도 않은 사실을 마치 사실인 듯이 보도한 7월 25일자 기사는 그 같은 정보 조작의 한 예다."(128-9)




"2차세계대전에서 패배한 후 일본에서는 "미국과 싸운 일은 잘못되었지만, 청일·러일전쟁까지는 좋았다"라고 하는 역사관이 지배적이었다. 태평양전쟁의 책임에 대해서도, 그 주요한 책임은 일본의 군부, 특히 육군에 있으며, 그 군인들이 "위대했던 메이지 시대 선배들의 작업을 엉망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한쪽에는 군도(軍刀)를 차고 위압을 가하는 거친 군인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국가의 앞날을 우려하여 고뇌하는 자유롭고 합리주의적인 시민들이 있는 듯한 역사 인식, 그리고 양심적이지만 정치적으로는 힘이 없는 후자의 사람들이 군인 집단에 맞서 힘으로 지탱하지 못해 굴복하는 가운데 전쟁을 향한 길이 준비되고 있었다는 역사 인식이다." "이러한 역사 인식은 단지 천황과 그의 측근 그리고 일본의 보수 정치가들만의 것은 아니었다. 아시아·태평양전쟁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는 사람들조차 이와 비슷한 인식을 갖고 있음을 현실에서 자주 경험한다."(161-2)




"오늘날까지도 "일본은 청일·러일전쟁 무렵까지는 국제법을 잘 지켰다"는 목소리는 일본에서 끊이지 않을 뿐 아니라 한층 목청을 돋우기까지 하고 있다. 시바 료타로가 죽고 나서, ('좋은 시대 메이지'로 대표되는) '시바 사관'을 찬미하는 소리가 한층 더 높아진 것도 그런 현상의 하나다." "시바는 정체와 부패로 얼룩진 조선 왕조와 비교하여 일본의 '메이지를 찬미'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특히 시바가 죽은 후 일본의 저널리즘이 조잡하고도 일방적으로 '시바 찬가'를 선전할 때, '메이지 찬미'와 극에 위치한 조선과 중국에 대한 침략 사실 그리고 그에 저항했던 조선과 중국의 민족적 각성의 역사는 일본인의 시야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이러한 일본 현대사상의 동향은 청일·러일전쟁 승리라는 그늘 뒤에서 일본이 조선과 중국에게 무슨 일을 저질렀던가, 그리고 조선과 중국에서는 이러한 침략과 패배에 대항하여 어떤 움직임이 있었는지를 다시 한 번 애써 감추는 역할을 하고 있다."(167-8)




청일전쟁의 선전조칙(詔勅)이 나온 지 채 열흘도 되기 전에 육해군 참모회의에서 남방 작전 구상이 논의된다. "그곳에는 '동아의 평화를 교란할 염려가 있는 영국'을 견제하려면 영국의 '화심을 안고 있는 홍콩'을 제압할 수 있는 팽호도의 영유가 꼭 필요하고, 팽호도의 안전을 위해서는 '타이완을 병유'하지 않으면 안 되며, 다시 마음껏 '구주 열국'과 경쟁하여 '동아시아에서 자웅을 다투기' 위해, 기회를 틈타 필리핀을 점령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구상까지 있었다. 필리핀 점령까지 구상한 이 같은 논의가 참모들 사이에서 오간 것으로 당시 정부의 대외정책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이미 청일전쟁을 시작하자마자 일본군의 중추에서 이러한 논의가 거듭되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무적 황군의 신화'가 생기고, 비합리적인 전략으로 내달린 태평양전쟁으로의 길이 청일·러일 두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갑자기 생긴 것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하기 바란다."(172-3)




"'무적 황군의 신화', 비합리적인 전략 포로의 학대 등 태평양전쟁 때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타락한 일본군의 모습을 보며 더욱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가 있다. 청일·러일전쟁을 치르는 가운데 일본의 침략을 받아 전장이 됐던 조선과 중국의 입장을 고려하는 관점이 거의 무(無)에 가깝다는 점이다. 당시 일본군과 일본 정부 지도자는 물론 저널리즘과 일반 국민여론에서는 일본의 침략에 맞서 조선인과 중국인이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했는가, 일본 정부와 일본군은 그들의 저항에 어떻게 반응했는가와 같은 문제에 대한 고려를 거의 발견할 수 없다. 이런 점이 훗날 무모한 침략과 조선과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여러 국민에 대한 학대로 이어진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을 당했던 조선으로서는 그 나라 군대가 다시 몰려와 나라의 상징인 왕궁을 점령했으니, 조선의 관야에서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겠는가. 조선 민족의 눈으로 그 일을 목격한다면 사건의 중대성을 자연히 알 수 있을 터이다."(17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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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na35 2019-05-20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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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읽고 있는 중입니다만~

현재 일본에서도 거론 되고 있는청일전쟁기의 조선에서 경복궁 습격 사건, 청의 여순 학살 사건, 대만섬의 운림학살 사건 등등 연구하고 있습니다. 저자인 나카츠카 교수는 청일전쟁사 전공자이면일본 근대사의 문제점의 시작이 바로 아시아 침략 및 식민지 정책에서 찾고 있는 연구자이며 청일전쟁이 전공입니다.
잘되는나 2012-11-11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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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재위시 초기 한미관계와 고종의 미관파천(美館播遷)시도

저자인 강원대 장경호 박사의 박사학위 논문을 출판한 책입니다.

고종의 아관파천(俄館播遷,1896.2-1897.2)만큼 알려져 있는 역사적 사실은 아니지만 고종은 재위시 경운궁에 기거하면서 경운궁 주위의 외국 공관 특히 미국과 영국 그리고 프랑스 공사관에 파천에 대한 문의를 많이 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힘없는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이 때로는 정치적 이유때문에 때로는 본인의 신변 안전을 위해 외국 공사관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사실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미국과는 1871년 발발한 신미양요( 辛未洋擾)를 통해 적대적인 관계로 처음 접했고, 그 이전 미국상선 제너럴 셔먼호(General Sherman)가 1866년 대동강에서 평양군민에게 불탄 사건이 있었습니다.

즉 쇄국정책 시기 조선은 미국을 양이(攘夷)로 인식하고 결코 미국을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청의 주일 참사관이었던 황준헌이 조선책략(朝鮮策略)을 수신사로 일본에 갔던 김홍집을 통해 조선에 전한후 미국에 대한 인식이 전환되었습니다.

일본과 러시아가 영토확장 야심을 보인다고 본 청의 외교관은 먼 곳에 있는 미국은 아시아에 영토적 야심이 없다고 보았으며 중립적이고 평화적인 나라로 보았습니다.

이후 고종은 미국과 구미국가 최초로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 1882)을 체결합니다.

1880년대까지 러시아의 동진과 러시아의 연해주 식민지 추진은 청에게도 일본에게도 안보 상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해양세력인 신흥국 미국과 연대해서 러시아의 남진을 막을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하지만 미국은 공사관이 설치된 이후 일본의 조선 침략에 대해 처음엔 모호한 태도로 일관했으나 점차 친일로 기울게 됩니다.

청일전쟁으로 청국과 일본의 군대가 조선에 진주하게 되고 심지어 일본군은 경복궁에 군사를 둘러싸고 사실상 고종을 경복궁에 가두어 버린 일이 발생합니다 ( 경복궁 점령사건,1894).

청과의 텐진조약에 따라 동학혁명군을 진압하러 온 청군과 함께 조선땅에 온 일본군은 무단으로 경복궁을 점령하고 고종에게 무력시위를 하며 침략을 본격화합니다.

1894년 일본의 경복궁 점령에 대해서는 단독 저서가 있습니다.

나카츠카 아키라 지음, 박맹수 옮김, 1894년 경복궁을 점령하라( 푸른역사,2002)

아무튼 일본의 무력시위에 위협을 느낀 고종의 신하들은 고동을 경복궁에서 피신시키기 위해 춘생문 사건(1895)을 일으켰지만 탈출 시도는 실패로 끝납니다.

이 사건을 통해 미국이 미국공사관으로 도피하려 했다는 주장은 사실 직접적 정황이나 근거는 없습니다. 다만 이후 일어난 아관파천의 전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고종의 러시아 공사관 도피 이후 친일내각을 구성했던 김홍집이 군중에 살해되고 유길준은 일본으로 망명하게 되고 친러파와 친미파가 득세하게 됩니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불행하게도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피한 아관파천 이후에도 특히 미국공사관에 파천에 대한 문의를 지속하고 조선의 중립화 방안에 대해 미국의 거중조정(居中調停)을 요구했다는 점입니다. 한미수호통상조약위 제 1조인 미국의 거중조정 조항을 고종은 진심으로 대하고 낙관적으로 해석한 것이었으나 미국은 단지 의례적 조항으로 보았습니다.

1898년 이후 미국의 외교정책은 고립주의( isolationism)에서 벗어나 점차 아시아의 이권에 눈을 돌리게 됩니다.

이미 아관파천이후 러시아와 일본의 영향력 아래 조선이 들어가게 된 것을 안 미국은 조선이 중립화를 위해 미국을 끌어들이자 이를 반대하고 미국의 이익을 위해 오히려 일본과 더 밀착하게 됩니다.

미국 러시아 일본 등 열강은 1890년대 당시 모두 조선에서의 이익을 가져가기 위해 혈안이 된 상태였습니다.

미국은 러일전쟁이후 더욱더 일본과 밀착되었고 사실상 조선이 일본의 지배를 용인하게 되고 러일전쟁이 일어났을 당시 미국의 이권이 개입된 중국을 전쟁터로 하지 않기로 일본과 외교적 합의를 하는 치밀한 전략을 추진합니다. 아시아에서 미국의 이권은 중국에서 더 크고 조선은 크지 않아 조선 땅이 전쟁터가 되어도 상관없다는 겁니다.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인종주의자로 알려진 대통령으로 조선은 미개하고 일본은 선진적이기 때문에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는 것이 하등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을 가진 제국주의적 대통령이었습니다. 미국은 러일전쟁의 종전을 위해 포츠머츠 회담을 주선하고 협정을 추진하여 철저한 친일로 일관했습니다.

고종이 미국을 너무 선의(善意)로만 생각하고 대책을 세우지 않은 것이 결국 1905년 을사늑약으로 간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예상은 했었지만 고종 당시 조선에 와 있던 미국인들은 모두 이 미지의 나라에서 철저히 이권을 추구했습니다.

미국은 특히 러시아의 남진에 대비하고 청국에서의 이권을 담보하기 위해 평안도의 의주와 용암포의 개항을 요구하였고, 러일전쟁 와중에 고종은 이를 허가합니다. 평안도에는 미국이 운영하는 운산 광산을 비롯해 많은 미국의 기독교 선교사들이 이미 19세기 말부터 살고 있었습니다.

미국은 고종이 미국에 호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역이용해 이권을 추구했습니다. 미국인들의 이런 성향은 기본적으로 2023년 현재도 변함이 없다고 봅니다.

한국에서 특히 구한말의 중요한 친한인사로 구분되어 온 미국 선교사이자 외교관 알렌 ( Horace Allen)에 대해서는 재평가가 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책애서 나온 인용으로 봐서 그는 철저하게 미국 국무부의 지침을 따르는 미국의 이익을 충실하게 대변하는 외교관일 뿐입니다. 결코 친한인사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지금 한국의 직업 외교관들이 국가이익에 철두철미하게 봉사하는 이 미국 외교관의 모습을 본받았으면 합니다. 현재 한국 외교관들이 정말 국익을 위하는 건지 의심이 됩니다. 대통령부터 국익이 아니라 일본의 이익을 두둔하고 있어 이해가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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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nnis Kim 2023-01-12 공감 (8)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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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역사왜곡의 시작과 일본인의 역사관 형성: 일본 육군 참모본부의 일청전사 (日淸戰史)와 일청전사 결정초안 (日淸戰史 決定草案)의 비교

일본의 역사전문 언론인인 와타나베 노부유키가 저술한 책을 역사학자이신 이규수교수께서 번역하신 책입니다.

청일전쟁사를 일본 육군참모본부에서 공식적인 정사 (正史)로서 1904년 <일청전사>라는 이름으로 간행되는데, 이 책은 이 정사 역사서를 쓰기위한 초고(草稿) 에 해당되는 <일청전사 결정초안>을 발굴해 대조함으로서 청일전쟁 이후 매이지 정부와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県有朋)로 대표되는 일본 육군의 군벌세력들이 청일전쟁의 역사적 사실을 어떤 방침을 가지고 취사선택해 국민에게 보이려고 했는지를 밝힙니다.

그리고 최초로 공식편찬된 이 청일전쟁의 정사가 이후 일어난 러일전쟁의 공식역사서인 <일러전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그리고 더 나아가 일본이 제2차세계대전에서 패전을 하는데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핍니다.

한마디로 일본은 최초 청일전쟁사를 편찬하면서 자신들에게 불리하거나 일본군이 어려움에 처했던 역사적 사실은 모두 정사에서 뺐습니다. 여기엔 일본군이 청나라 군대에 행한 무모한 작전과 인명을 경시한 사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청전사 결정초안>에서 보여준 청일전쟁 당시 평양성 전투는 사실 두 군대간의 싸움이 백중세였고, 청국 군대가 평양성을 버리고 나오다가 죽게된 건 당시 도입된 만국공법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에도 공식 <일청전사>애는 일본이 압도적으로 청나라를 이겼다고 서술된 것이 한 예입니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서 미래에 같은 일이 재발되지 않으려면 역사적 사실을 모두 제대로 기록하고 평가를 해야할텐데 매이지 육군 군벌둘은 자신들의 군대가 저지른 실수와 만행은 모두 삭제하고 전과(戰果)를 부풀린 겁니다.

1894년 일본이 조선땅에 들어와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하고 국왕을 위협한 사건은 일본군이 치밀하게 작전을 세운후 실행한 ‘군사작전’으로 학자들 사이에서는 발생한 날을 따서‘7월 23일 전쟁’으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있을만한 사건인데도 공식 <일청전사>에는 내용이 누락되었습니다.

일본의 나카츠카 아키라 (中塚明)교수가 1997년 <역사의 위조를 묻다-전사에서 지워진 일본군의 ‘조선왕궁점령’>이라는 책을 펴냈고, 한국에는 2002년 원광대 박맹수 교수 번역으로 출판되었습니다.

나카츠카 아키라 지음, 박맹수 옮김, 1894년 경복궁을 점령하라! ( 푸른역사,2002)

작은 책인데 아직도 발행이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러일전쟁과 관련해서는 시바 료타료의 <언덕위의 구름坂の上の雲)>과 일본에서 군신으로 추앙받는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가 뤼순공방전애서 승리한 이면에 어떤 진실이 있는지 파헤칩니다. 러일전쟁에서 가장 많은 일본군 전사자가 나온 이 전투를 지휘한 사령관이 군신 노기 마레스케가 아니라 당시 만주군 총참모장 고다마 겐타로(児玉源太郎)일수도 있다는 정황을 설명합니다 (pp168-182).

총평으로 이책을 보면서 편견일수 있겠지만 좀 발칙한 개인적 의견을 말해보고 싶습니다.

청일전쟁사를 일본 육군에서 편찬하려고 준비한게 청일전쟁 직후이고 최초 공식역사서가 나온게 1904년이니 이미 120여년전 일입니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조상뻘인 조슈(長州)의 육군군벌 야마가타 아리토모 (山県有朋)와 그 추종자들은 애초부터 역사를 사실(史實)대로 기록할 의지가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위대한 대일본제국은 전쟁에서 이겨야 하며 어떠한 실수나 반문명적인 행동, 집단학살이나 강간 등 전쟁범죄 그리고 전술과 전략의 부재, 그리고 병참문제로 전쟁에서 어려움을 겪는 모든 일본군의 약점은 일본의 국민들이 알아서는 안되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항상 이기는 줄 알았던 일본은 제2차세계대전에서 미국에 대항해서 싸우다 그 결과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을 맞고 패배했습니다.

20세기초부터 1945년까지 일본은 ‘집단최면’ 상태였고 그 원인은 물론 일본이 처음 행한 국제전인 청일전쟁과 그 이후러일전쟁 등 초기 전쟁에 대해 공과를 왜곡하고 역사를 위조하도록 지시한 일본의 육군군벌에게 있는 것이죠.

과문하지만 이들의 영향력이 아직도 일본의 군국주의와 맥이 닿아있는 일본의 극우 정치인과 역사수정주의자들에까지 마치고 있다고 추정합니다.

일본의 국민소설이라고 불린 <언덕위의 구름(坂の上の雲 )>이 3대에 걸쳐 읽힌 문제작이고 이책을 통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안 일본인들도 많다하니 그 내용을 봐야할 것 같습니다. 더구나 2009-2011년 일본 NHK에서 드라마로 만들어 방영한 작품입니다.

특히 시바 료타로의 우익적 역사관은 ‘일본과 중국은 근대화에 실패한 나라이고 일본은 성공한 나라‘라는 것으로 이 글을 쓰는 저를 비롯한 한국인들에게 특히 문제적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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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nnis Kim 2023-10-07 공감 (7)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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