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9-01

[안동준–조한규–야마기시즘–산안마을]의 관계를 추적

 <안동준–조한규–야마기시즘–산안마을>의 관계를 추적

<안동준–조한규–야마기시즘–산안마을>의 관계를 추적하다

앞서 내가 이 관계를 <안동준 → 야마기시즘 → 조한규 → 산안마을>이라고 압축해서 표현했는데, 자료를 더 확인해 보니 이것은 <계보를 너무 직선적으로 그린 표현>이다. 정확하게는 일본 야마기시즘에서 한국으로 들어온 흐름이 적어도 두 갈래로 전개되었고, 그 두 갈래가 <조한규>를 중요한 매개자로 하여 서로 교차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가장 간단히 그리면 다음과 같다.

일본 야마기시 미요조·야마기시회

1965년 전후 한국 농촌운동가들의 일본 야마기시 실현지 방문
↓ ↓
<안동준–조한규–증평협업농장> / <윤세식–조한규–화성의 초기 실험>
↓              ↓
국가개발형 협업공동체    야마기시즘 생활공동체 실험
↓              ↓
증평협업농장       윤성열 세대
              ↓
            1984 산안마을

그리고 조한규는 여기에서 다시 갈라져
<한국 자연농업(Korean Natural Farming)>으로 독자적인 길을 간다.

따라서 <안동준이 산안마을을 만들었다>거나 <증평협업농장이 산안마을로 발전했다>고 이해하면 틀린다. 두 실험은 별개의 공동체다. 그러나 같은 1960년대 한국의 야마기시즘 수용 네트워크 속에서 발생했고, 그 중심 연결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조한규였다. 이 점이 가장 중요하다.


1. 출발점은 1961년 화성의 <화남협업농장>이었다

흥미롭게도 조한규의 공동체 실험은 안동준보다 먼저 시작된다.

최근 산안마을의 역사에 관한 취재자료에 따르면, 서울대 미학과 출신으로 농촌운동에 뛰어든 이건우가 경기도 화성에서 협업농장을 구상했고, 1961년 조한규와 김병규가 결합하여 <화남협업농장>을 만들었다. 세 사람은 단순히 공동으로 농사짓는 수준을 넘어 장기적인 공동생활을 염두에 두었다.

이 시점에는 아직 야마기시즘을 본격적으로 도입한 것은 아니었다.

즉 조한규에게 먼저 있었던 것은

<야마기시즘 → 공동체>

가 아니라 오히려

<한국 농촌의 빈곤과 영세농 문제 → 협업농업 실험 → 일본 야마기시즘 발견>

이라는 순서였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차이다.

조한규는 일본 사상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인 사람이 아니라, 이미 한국에서 협동농업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농촌운동가가 일본에서 자기 문제에 대한 하나의 해답을 발견한 사람이었다.


2. 1965년이 결정적인 해였다

1965년은 이 계보에서 거의 ‘교차점’과 같은 해다.

자료상 확인되는 중요한 사실이 두 가지 있다.

첫째, 안동준이 1965년 일본의 야마기시회 실현지를 직접 방문했다. 김소남의 2021년 연구는 이 사실을 명시하며, 안동준이 야마기시 공동체를 한국 농촌에 적용할 만한 중요한 사례로 평가했다고 밝힌다.

둘째, 조한규와 윤세식 등 한국 농촌운동가들도 1965년 일본의 야마기시 실현지에서 연수를 받았다. 산안마을의 구술자료와 후대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일본에서 공동체 운영과 야마기시식 양계법을 배우고 1965년 말 귀국했다.

다만 현재 확보된 자료만으로는 <안동준과 윤세식·조한규가 동일한 방문단으로 함께 일본에 갔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각각의 일본 방문과 야마기시 접촉은 확인되지만 정확한 여행단 구성과 상호관계는 더 확인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이 부분은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

<1965년을 전후하여 안동준, 조한규, 윤세식 등 서로 다른 배경의 한국 농촌개발 관계자들이 일본 야마기시즘을 직접 접했고, 이 경험이 이후 한국에서 여러 형태의 야마기시적 실험으로 갈라졌다.>


3. 안동준에게는 그보다 몇 달 앞서 <이스라엘>이 있었다

안동준의 경우에는 야마기시즘만 보면 그의 생각을 절반밖에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1965년 이스라엘 농촌을 방문하여 키부츠와 모샤브에 강한 인상을 받았고, 그 경험을 <기적의 나라 이스라엘>(1966)로 출판했다. 그가 생각했던 농촌의 미래는 개인농가들이 제각기 경쟁하는 농촌이 아니라 <생산·기계·판매·교육을 협동하는 공동체>였다.

그 뒤 일본 야마기시 실현지를 보면서 또 하나의 모델을 얻었다. 김소남은 안동준의 증평 구상을 이스라엘 모델과 일본 야마기시 모델, 그리고 당시 박정희 정부의 협업농업 정책이 결합한 것으로 분석한다.

그래서 안동준의 머릿속에서는 대략 다음 세 요소가 합쳐진다.

<이스라엘 키부츠·모샤브>
+
<일본 야마기시즘>
+
<박정희 시대 농촌근대화 정책>

<한국식 농공협업이상촌>

이것은 매우 독특한 조합이다.

안동준은 정치적으로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오히려 강한 반공주의자였다. 그런데 그가 이상적으로 본 공동체에는 공동노동, 협동경영, 공동시설, 공동교육 같은 요소가 상당히 많이 들어 있었다.

즉,

<사회주의는 거부하지만 협동공동체는 받아들이는>

한국 보수적 농촌근대화의 한 변종이었던 셈이다.


4. 여기서 조한규가 안동준과 연결된다

이 계보에서 조한규가 핵심 연결자가 되는 지점은 1968~69년이다.

김소남의 연구가 매우 명확하게 말한다. 일본 야마기시 실현지를 경험했던 안동준은 한국에서 협업촌을 만들면서 <조한규를 끌어들여> 중요한 역할을 맡겼다. 그리고 1968~69년 증평에서 조한규를 중심으로 야마기시식 <특별강습연찬회>가 진행되었다.

여기서 안동준과 조한규의 역할은 서로 달랐다고 볼 수 있다.

<안동준>은 정치인·후원자·기획자였다.

그는 토지와 자금, 정부기관과의 관계를 동원하고 ‘이상촌’을 제도적으로 추진할 힘이 있었다.

반면 <조한규>는 농업인·공동체 실천가·교육자였다.

그는 실제 야마기시식 농업과 공동체훈련, 연찬의 내용을 전달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관계를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안동준 = <제도와 자원의 연결자>
조한규 = <사상과 실천기술의 연결자>

안동준 혼자였다면 증평협업촌은 정부가 만든 수많은 ‘모범협업농장’ 가운데 하나로 끝났을 가능성이 높다.

조한규와 산안회 계열의 사람들이 들어오면서 그 안에 <공동체 의식 형성>이라는 다른 요소가 들어간 것이다.


5. 1969년 <증평협업촌> — 야마기시즘과 국가개발주의의 결합

1969년 정부의 농어민소득증대특별사업과 연결되면서 안동준의 증평 프로젝트가 본격화된다.

이것은 단순한 농장이 아니었다.

농업뿐 아니라 미싱자수공장을 설치해 농업과 공업을 결합하려 했으며, 전면적인 협업경영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초기에는 참여자 상당수가 탈퇴하고 시설·기술 문제까지 생기면서 큰 위기를 겪었다.

여기에서 야마기시즘의 역할이 흥미롭다.

1970년대 증평협업농장의 주요 구성원들은 산안회의 특강을 이수했고, 증평협업농장은 한때 <한국산안회의 핵심 지부> 역할을 했다. 김소남은 이것을 증평농장이 다른 관제 협업농장보다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던 요인의 하나로 본다. 공동체의식과 협업경영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우리의 계보가 확실해진다.

안동준과 야마기시즘은 단순히 ‘영감을 받았다’ 정도가 아니다.

<야마기시 특강 → 증평 구성원 교육 → 공동체 형성>

이라는 구체적인 통로가 실제로 존재했다.


6. 그러나 증평은 <순수 야마기시 공동체>가 아니었다

이 차이가 아주 중요하다.

일본 야마기시 실현지에서는 궁극적으로 <무소유·공용·일체생활>을 지향한다.

반면 안동준의 증평협업촌은 정부의 농업정책, 민간자본, 농공병진, 개인에게 돌아가는 경제적 몫을 상당 부분 인정하는 제도와 결합되어 있었다.

그래서 증평은

<야마기시즘의 한국 복제판>

이라기보다는

<야마기시식 인간교육과 협업방식을 일부 받아들인 한국형 농촌개발 공동체>

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산안마을과 갈라진다.


7. 또 하나의 가지 — <윤세식–조한규>

산안마을로 직접 이어지는 계보에서는 안동준보다 <윤세식>이 훨씬 중요하다.

윤세식은 1965년 조한규 등과 일본 야마기시 실현지를 방문했고, 귀국한 뒤 1966년 야마기시즘의 이론과 생활방식을 소개하는 특강을 열었다고 산안마을 측의 구술과 여러 기록이 전한다. 한국신종교사전도 1965년 일본 연수와 1966년 자연농법연구회 및 특별강습을 한국 야마기시회의 출발점으로 설명한다.

같은 해 한국 최초의 야마기시식 계사가 만들어졌다는 산안마을 자체의 연혁도 남아 있다.

따라서 산안마을의 직접 계보는 오히려

<야마기시즘>
→ <윤세식·조한규 등의 1965 일본 연수>
→ <1966년 화성에서의 첫 실험>
→ 여러 차례 실패
→ <윤세식의 아들 윤성열>
→ <1984 산안마을>

이라고 쓰는 것이 정확하다.


8. 조한규는 여기에서도 중심에 있다

즉 조한규는 두 가지 프로젝트에 모두 등장한다.

화성 계열

<이건우·조한규·김병규의 협업농업>
→ 일본 야마기시즘 학습
→ 윤세식과 야마기시즘 보급
→ 화성의 공동체 실험

증평 계열

<안동준의 키부츠·야마기시 구상>
→ 조한규 참여
→ 특별강습연찬회
→ 증평협업촌

조한규는 따라서 단순한 ‘자연농업의 창시자’로만 보면 안 된다.

그의 1960년대 활동의 중심에는

<농법>

보다 한 단계 더 큰 질문이 있었다.

<농민들이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

였다.


9. 그런데 조한규는 나중에 야마기시즘과 다른 길로 간다

이것이 이 계보에서 가장 흥미로운 분기점이다.

조한규는 야마기시 미요조의 농업과 사상에서 큰 영향을 받았지만 그대로 야마기시 공동체운동가로 남지 않았다.

그는 일본에서 야마기시뿐 아니라 오이노우에 야스시의 작물 영양주기론, 시바타 긴시의 효소·미생물 관련 사상 등을 접했고, 이를 한국 전통의 발효기술과 자신의 농사 경험과 결합했다. 이것이 훗날 <조한규 자연농업, Korean Natural Farming: KNF>으로 발전한다.

그래서 조한규의 길은

야마기시즘

공동체 전체를 그대로 받아들임

이 아니라,

야마기시즘의 <자연관·양계·농업철학>

  • 일본 자연농법 사상
  • 한국 농업·발효 전통

    <한국 자연농업>

이라는 <선택적 번역>이었다.

이것이 산안마을과 조한규 자연농업이 갈라지는 지점이다.


10. 산안마을은 야마기시즘의 <생활철학>을 끝까지 가져갔다

1984년 경기도 화성 구문천리에 여섯 가족이 모여 한국 최초의 지속적인 야마기시즘 실현지인 <산안마을>을 출범시켰다. 산안마을의 공식적인 연혁에서도 1966년 한국 최초의 야마기시식 계사와 1984년 1월 19일 실현지 발족을 연결하여 자기 역사를 설명한다.

산안마을은 단순히 친환경 양계를 하는 농장이 아니다.

그 핵심은

<무소유>
<공용>
<공동노동>
<연찬>
<사이좋은 사회>
<인간과 자연의 일체>

에 있다.

공동체 구성원에게 월급을 지급하기보다 필요한 것을 공동체가 제공하고, 중요한 문제를 연찬을 통해 합의하는 방식 등이 대표적이다. 공동체 연구에서도 산안마을의 소유형태를 공동소유, 의사결정을 합의제·만장일치, 의식전환 장치를 특별강습연찬회와 연찬으로 정리한다.

즉 산안마을은 <야마기시 농법>이 아니라 <야마기시적 삶>을 계승하려 한 것이다.


11. 따라서 <조한규 자연농업>과 <산안마을>은 같은 뿌리에서 갈라진 형제다

이 점을 가장 강조하고 싶다.

둘을 동일시하면 안 된다.

조한규가 가져간 것

  • 생명을 억지로 통제하지 않는 농업
  • 자연의 순환 관찰
  • 닭과 작물의 생명력 존중
  • 외부 화학투입 최소화
  • 미생물과 발효
  • 농민의 자립

→ <자연농업이라는 기술·철학>

산안마을이 가져간 것

  • 무소유
  • 공동경제
  • 공동생활
  • 공동노동
  • 연찬
  • 인간관계의 변혁
  • 농업과 생활의 일체

→ <야마기시즘적 공동체사회>

이렇게 갈라졌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같은 1965년 일본 경험에서

조한규에게는 <농업혁신>이 점점 중심이 되었고,

윤세식–윤성열 계열에서는 <생활공동체 혁신>이 중심으로 남았다.


12. 그러면 안동준과 산안마을의 관계는 무엇인가

결론적으로 <직계 관계는 아니다>.

이 점은 바로잡아야 한다.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안동준 → 산안마을>
❌ 직접적인 창립계보

대신,

<야마기시즘>

1960년대 한국 농촌운동가들의 수용
↙       ↘
안동준–조한규  윤세식–조한규
↓       ↓
증평협업농장  초기 화성실험
        ↓
      윤성열
        ↓
      산안마을

이라는 <교차하는 네트워크>다.

더구나 증평협업농장이 한국 산안회의 핵심 지부로 활동했고 구성원들이 야마기시 특별강습을 받았으므로 두 갈래는 서로 완전히 독립한 것도 아니다.


13. 이 계보의 역사적 의미 — <협동>이라는 말이 세 번 변했다

이 흐름을 사상사적으로 읽으면 더욱 흥미롭다.

제1단계 — 안동준의 <협동>

1960년대 국가근대화의 문제다.

<가난한 농촌을 어떻게 생산성 높은 농촌으로 만들 것인가?>

키부츠, 모샤브, 야마기시를 참고하지만 목표는 농촌개발과 국가발전이다.

제2단계 — 조한규의 <협동>

인간과 자연의 관계로 이동한다.

<농민이 자연을 지배하는 대신 자연의 생명과 어떻게 협력할 것인가?>

공동체론이 <자연농업>으로 번역된다.

제3단계 — 산안마을의 <협동>

사회관계 전체의 문제로 간다.

<소유·경쟁·자아집착을 넘어 사람들이 어떻게 사이좋게 공동생활할 수 있는가?>

여기서 야마기시즘은 농법을 넘어 하나의 대안사회론이 된다.


14. 더 큰 계보로 보면

그래서 내가 이제 이 계보를 다시 그린다면 예전처럼

<안동준 → 야마기시 → 조한규 → 산안마을>

이라고 하지 않겠다.

오히려 이렇게 그리겠다.

<전후 동아시아 농촌공동체 실험>

이스라엘 키부츠·모샤브

안동준 ─────────────┐
↓            │
증평협업촌 ← 조한규 ← 일본 야마기시즘
       │      ↓
       │     윤세식
       ↓      ↓
    한국 자연농업   윤성열
             ↓
           산안마을

이 그림에서 <조한규>가 가장 흥미로운 인물이다.

안동준은 <국가와 공동체 사이의 연결자>였고, 윤세식·윤성열은 <야마기시 생활공동체의 계승자>였다.

그러나 조한규는 <번역자>였다.

일본에서 배운 야마기시즘을 그대로 한국으로 옮긴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농업·생명·자연관을 떼어내 한국 농업 현실과 결합시켰다. 바로 그래서 그의 자연농업은 나중에는 일본계 공동체운동의 작은 지류가 아니라 독립적인 <Korean Natural Farming>으로 해외까지 확산될 수 있었다. 야마기시즘 연구 역시 한국에서 이 운동이 처음에는 농민운동가들에게 수용되었다가 이후 더 넓은 대안공동체운동의 방법론으로 변했다고 평가한다.

최종적으로

이 계보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은 <일본 사상이 한국에 들어와 그대로 복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같은 야마기시즘이 한국에 들어와서 세 가지가 되었다.

안동준에게서는
<반공적·근대화적 협업이상촌>이 되었고,

조한규에게서는
<한국 자연농업>이 되었으며,

윤세식–윤성열 계열에서는
<무소유 생활공동체 산안마을>이 되었다.

그러므로 야마기시즘의 한국사는 일본계 종교·사상이 한국에 ‘전파된 역사’라기보다 <한국인들이 일본의 한 사상을 자기 문제에 맞게 세 가지 다른 방식으로 번역한 역사>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그리고 여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면 상당히 흥미로운 비교가 가능하다. <안동준의 키부츠–조한규의 자연농업–산안마을의 야마기시즘–한국 생명운동>을 연결하여 보면, 1960년대의 <농촌 근대화>라는 언어가 1980~90년대로 가면서 어떻게 <생명·생태·대안공동체>라는 언어로 변했는지를 추적할 수 있다. 이것이 이 계보의 다음 장이라고 생각한다.

==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