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일깨운 중원인 중산 안동준 [5]
기자명 김명기 기자 입력 2025.03.11
보통학교 6학년 때 결혼한 ‘꼬마신랑’
▲ 안동준이 어린 시절을 보내며 꿈을 키웠던 고향 이담리 앞 달천. 동준에게 고향마을 앞 달천은 재미있게 고기잡던 추억이, 그의 아내 조향련에겐 물을 길어 날라야 했던 고단함이 있었던 곳이었다.
● ‘꼬마신랑’이 되다
키가 커지고 몸무게도 늘어나 소년티를 갓 벗어날 즈음, 그를 유심히 지켜보던 중년 신사가 있었다.
몇 해 전 계담리로 이사 온 조관식이라는 이였다. 그에겐 혼기에 가까운 누이동생이 있었다.
조씨는 보통학교를 다니고 있는 소년 안동준을 세심히 살폈다. 마음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그의 나이 14살, 보통학교 6학년이었던 때였다.
당시 시골에선 조혼(早婚)이 흔하던 시절이었다. 2년 동안 그를 유심히 보던 조씨는 어린 나이에도 의젓하고 사려 깊은 동준을 매우 마음에 들어했다. 그는 마음을 결정하고 동준의 집에 통혼을 넣었다.
그리고 1932년 음력 정월 14일 양가의 대사가 진행됐다.
음양의 조화나 운우지정(雲雨之情)을 알지 못할 어린 나이에 그는 결혼했다. 아내는 조향련(趙香蓮), 그보다 세 살 위였다.
조씨는 바느질이나 한글, 한문, 책 읽는 것과 편지 쓰는 것 등에 막힘이 없었다고.
그러나 살림살이를 해 본 적 없는 어린 새색시일뿐. 동준의 손위 누나들은 모두 출가한 터에 집안에선 새며느리를 방안에 고이 모셔두며 책읽기나 글쓰기로 세월을 보낼 수 있도록 하기는 힘든 일이었다. 꼬마신랑의 아내는 시집 온 다음날부터 시댁의 온갖 일을 도맡아야 했다.
특히 강에 가 물을 길어오는 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물동이 다루는 일에 익숙지 않아 출렁거리는 물이 쏟아져 얼굴과 저고리 적삼을 적시는 일이 다반사였다.
● 청주농업학교로 진학
목도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그는 청주농업학교 시험을 봤다. 7대 1이라는 경쟁률을 뚫고 당당히 입학했다.
그는 충주농업학교와 청주농업학교 두 군데에 지원했다. 충농은 을종학교로 2년제였고, 청농은 갑종으로 5년제였다. 충농엔 그를 포함해 5명 중 2명만 합격했고, 청농엔 7명이 지원했는데, 모두 떨어지고 안동준 혼자만 합격했다.
그는 청농에 입학한 뒤 기숙사로 들어갔다. 기숙사는 교실에서 50m도 되지 않는 곳에 있었다. 허투루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 좋았다.
한 달 기숙사비는 4원 80전.
당시 교원은 대부분 일본인이었다.
수학을 전공한 교감은 이히무라로, 청농에 오기 전엔 수원고농(현 서울대농대)에서 교편을 잡다 온 이였고, 농업경제를 가르쳤던 선생은 구메로, 경도제대 출신이었다.
일본어를 가르쳤던 이는 오마다로, 일본 명문대 국문학부 출신이었다.
한국인 교원은 안택수 선생과 조제하 선생 둘밖에 없었다.
● 처가에 효를 다한 꼬마신랑
진학 때문에 고향을 떠나 청주에서 학교를 다니기 전, 그는 자주 처가를 찾았다.
병환 중인 장인 때문이었다. 장인의 약 짓는 심부름으로 괴산과 음성, 충주 등지를 다녀온 적도 많았다.
비록 나이 어린 사위였지만, 그는 효의 도리를 다했다. 그러나 장인 조영호 참봉은 그의 노력도 허사로 돌리며 발병한 지 반년 만에 세상을 떴다.
그는 청주에서 학교를 다닐 때에도 방학이 되면 처가를 자주 찾았다. 손위 처남인 조관식씨는 그를 무척 소중이 여기고 아껴줬다. 손위 처남 조씨는 한학에 능통했고, 붓글씨를 잘 쓰는 선비였다.
처가 쪽 일가는 유력한 가문이었다.
처가 쪽 사람 중 조개옥이라는 이가 있었다. 본명은 인식(麟寔)인데, 개옥(介玉)으로 개명한 까닭이 장개석(將介石)과의 인연 때문이라고 했다. 중국의 장개석과 매우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에 비슷한 이름으로 지었다고 한다.
해방 직후 경찰부장을 맡기도 했던 그는 수천석지기 부자였다고 한다.
품실서 장호원까지 삼십리 남짓 모두가 그의 땅으로, 남의 땅을 밟지 않고 그는 장호원까지 말을 타고 드나들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는 재물보다 독립 운동에 뜻을 둬 중국으로 건너가 보정군관학교(保定軍官學校) 포병과를 졸업하고 중국군에 편입했다.
그런 까닭에 그의 가까운 집안에선 그의 권유에 의해 중국군이 된 이들이 많았고, 그들은 크고 작은 전투에 참여했다 돌아온 이들이었는데, 동준의 처남 또한 그 중의 하나였다.
후일 동준은 조개옥을 찾아가게 된다.
김명기 기자 demiankk@dynews.co.kr
시대를 일깨운 중원인 중산 안동준 [7]
기자명 김명기 기자
입력 2025.03.25
일 중앙대학 합격… 유학길에 오르다

▲ 일본 중앙대학 법대에서 유학하던 시절의 안동준(뒷줄 맨 오른쪽). 당시엔 대학생들도 교복을 입고 교모를 썼다.
● 유보하게 된 유학의 꿈
그는 일단 유학의 꿈을 접기로 했다. 가정 형편을 생각하면 꿈을 꿀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우선 취직이 급선무였다.
여러 친구들과 함께 금융조합에 지원해 시험 절차를 밟고 서울 서대문 네거리에 있는 금융조합연합회(현 농협중앙회)에서 2개월 동안 병종 강습을 받고 서기로 취직했다. 부임지는 옥천군 청산 금융조합이었다.
옥천은 초행길이었다. 원래는 대소원 금융조합으로 내정돼 있었는데, 강원도 철원으로 이사 간 처가를 다녀오느라 하루 지각한 까닭에 옥천으로 변경됐던 것이었다. 대소원은 집과 가깝고 여러 번 가 본 곳이라 익숙해 안성맞춤이었지만, 하루 지각의 페널티를 감당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청산 조합은 이사가 일본인인데 성격이 좋지 않아 도내에서 인화가 불량하기로 이름나 있었던 터였다.
그는 좋은 개 한 마리를 기르고 있었다. 그 개가 강아지 여섯 마리를 낳았는데, 한국인에게는 주기 싫다며 그 이튿날 여섯 마리를 모두 땅에 파묻어 죽여버렸다. 그만큼 그의 성품은 잔인했다.
그러나 막상 부임해 보니 일본인 이사만 빼놓곤 모두 훌륭하고 인성이 좋은 선배들이었다.
유년 시절 강에 나가 하루해가 지는 줄 모르고 물고기 잡는 재미에 빠졌던 것이 여기서 효용이 될 줄은 몰랐다.
청산에 있는 금강 상류엔 피라미떼가 많았다. 그는 물고기 잡을 보쌈을 준비하고 막걸리도 듬뿍 챙겼다. 광당포로 만든 보쌈보 네 귀에 끈을 달고 가운데 구멍을 뚫어 세숫대야를 감싼 뒤 그 속에 술지게미를 넣고 물 속 자갈바닥에 묻어 놓으니 피라미떼가 몰려들었다.
어릴 때부터 보쌈으로 물고기를 잡았으니 가히 베테랑 수준이었다.
주체하지 못할 만큼 잡았다. 선배들은 어린아이들처럼 좋아했다.
냄비에 지져 술안주로 삼고, 어탕국수도 해먹었다. 그렇게 하고도 많이 남아, 햇볕에 잘 말려 고향 아버지께도 보내드렸다.
그는 이후 보은군 마로면 관기지소로 근무지를 옮겼고, 여기서 서기 생활을 마감하게 된다.
● 향학열은 일본 유학으로 이어져
금융조합 서기 생활을 1년 6개월을 하고 그는 사표를 냈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인생 선배들과의 만남은 그에게 소중한 자산이 됐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꿈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35원에서 41원으로 높아진 한 달 월급을 그는 꾸준히 모았다. 유학경비로 쓰기 위함이었다. 그때 한달 하숙비는 4원에서 4원 50전씩 했다.
얼마간은 그동안 학비를 보내주시며 뒷바라지한 부모님께 보냈다.
공부란 때가 있는 법, 그 시기를 놓치면 평생 후회할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일본으로 연락해서 여러 전문대학의 입학 안내책자와 자료를 비교하며 어느 대학을 갈지 가늠해 봤다.
당시 일본에는 동경제국대학 법과가 가장 유명했다. 그러나 그곳에 가려면 인문계고등학교를 나와 영어와 수학에 능통해야 했다. 실업계고를 나온 그로선 욕심이었다.
일본 사립대학으로는 일본대학, 명치대학, 중앙대학, 조도전대학, 전수대학, 척식대학, 경응의숙 등이 있었다. 그 중 중앙대학 법과는 명성이 자자했다. 이왕이면 명문대에 가고 싶었다.
그는 중앙대학 전문부에 입학 원서를 발송하고, 1941년 봄 그 대학에서 보내온 수험표를 받곤 동경으로 향했다.
당시 일본으로 가려면 도항증(渡航證)이 있어야 했지만 수험번호표가 있어 쉽게 취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동경까지의 여정은 쉽지 않았다. 관부연락선이나 일본의 동해도본선 기차 타는 것도 어려웠고, 동경에 도착한 뒤에도 숙소 문제와 학교와 연락 문제 등이 신경 쓰였다.
입학시험은 영어와 일본어, 논문 세 과목이었다. 하루에 다 치렀다.
경쟁률은 5대 1이 넘었다. 조바심이 났다. 시험을 치른 지 1주일 만에 합격자 발표가 났다. 그곳엔 그의 합격 번호가 있었다.
김명기 기자 demiankk@dynews.co.kr
시대를 일깨운 중원인 중산 안동준 <8>
기자명 김명기 기자
입력 2025.04.01
일본인의 민족 차별… 주체성은 깊어지고
1942년 일본 중앙대학 재학 중이던 안동준(오른쪽)이 고향에서 온 친구와 함께 상야공원(우에노) 동물원에서 기념 사진을 찍었다. 친구는 마을 이장을 맡고 있었는데, 당시엔 동네 이장도 군복을 입었다.
● 주경야독 일본 중앙대학 생활
동경에서 사는 몇 몇 지인들은 장한 일을 했다고 격려했다.
“주오(中央)대학은 법과로 유명하니 공부 잘 해서 변호사 되는 사법과에 합격하라”고 응원도 했다.
그는 야간부를 택했다. ‘주경야독’이 아니면 답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길을 택해야 했다.
고학이란 것이 말이 쉽지, 막상 닥치니 너무나 어려운 길이었다. 취직이 제대로 되지 않아 가져온 여비는 다 떨어져갔다. 그렇다고 지인들에게 손을 벌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와중에 운 좋게 그는 아메미아 사진 인쇄 회사에 정식 사원으로 취직을 하게 됐다.
게다가 그 회사 책임자는 자기 아이들을 돌봐주면서 사진 분해 일도 해보라고 권유했다. 가정교사를 겸해 채용한 것이었다.
주경야독의 유학 생활은 그렇게 차곡차곡 쌓여갔다.
● ‘반도인’이라며 차별하던 일본인들
호사다마라고, 1년 뒤 그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주는 일이 발생했다. 민족차별이었다. 그냥 당해선 안 될 일이었다.
1년 가까이 되자 공장 사람들은 그가 조선인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들은 그 꼴을 볼 수가 없었다. 아니꼬운 조선인이 사장집에서 총애를 받아가며 가정교사 노릇까지 하는 것 그들에겐 그것이 배알이 꼬였던 것이다.
그에게 인사를 하지도 않고, 그가 인사를 먼저 해도 받아주는 일 없던 한 청년이 있었다. 의식적으로 무시하는 행동이었다. 내지인보다 사장에게서 총애받는 조선인이 아니꼬왔던 것이다. 동준은 언젠가 그 청년의 버릇을 단단히 고쳐주겠다고 결심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청년이 선을 넘는 말을 했다.
“한또오진노 후세니!(반도인 주제에!)”
참아 넘길 수 없었다. 민족적 우월감을 드러내는 그의 태도를 무너뜨려야 했다. 차별받는 조선인으로서의 자존심도 상했다.
그는 청년을 불러 세운 뒤 말했다.
“너는 일본인이고 나는 조선인이다. 지금 조선은 너희 군국주의자들에 의해 독립을 빼앗기고 강제 합방을 당해 지금은 식민지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우리 문화는 너희를 앞선 것이었다. 일본은 우리가 문화를 전수해 준 후진국이었다. 최근 구라파에서 일어난 과학문명을 우리보다 한 발짝 앞서 받아 우리가 당했는데, 지금 와 보니 너는 일본인 중에서도 섬나라 근성이 아주 강한 협소한 인간이구나! 내가 떠나겠다. 새 직장을 마련하겠다. 내가 퇴사한 후에라도 개과천선하기 바란다.”
그는 그날로 회사를 나와 버렸다. 먹고 사는 문제, 배워서 능력을 키우는 것 모두 무도한 일본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신념 때문에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런 전제가 있었던 그로서는 민족 차별은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큰 후회는 없었다.
이 사건은 그에게 주체적 민족의식을 더욱 강하게 심어 줬다.
●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품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오기 전 그의 마음은 착잡했다. 넉넉지 않은 가정형편에다 일가를 이룬 가장으로서의 책임이 그의 어깨를 무겁게 누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들도 그가 가진 배움의 뜻을 꺾지는 못했다. 1년 간의 금융조합 서기 생활로 비용을 마련한 후 그는 유학을 강행했었다.
유학을 떠날 당시 안동준은 가족에게 알리지도 않았다고 한다. 일본으로 간 뒤 주오대에 합격한 후에야 통지서를 고향에 보냈다고 한다.
처음 목표는 고등고시 합격이었지만 한차례 탈락했고, 1942년 전문부 법과를 졸업한 뒤에는 연구과에 적을 두고 계속 고등문관시험을 준비했다.
● 유보하게 된 유학의 꿈
그는 일단 유학의 꿈을 접기로 했다. 가정 형편을 생각하면 꿈을 꿀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우선 취직이 급선무였다.
여러 친구들과 함께 금융조합에 지원해 시험 절차를 밟고 서울 서대문 네거리에 있는 금융조합연합회(현 농협중앙회)에서 2개월 동안 병종 강습을 받고 서기로 취직했다. 부임지는 옥천군 청산 금융조합이었다.
옥천은 초행길이었다. 원래는 대소원 금융조합으로 내정돼 있었는데, 강원도 철원으로 이사 간 처가를 다녀오느라 하루 지각한 까닭에 옥천으로 변경됐던 것이었다. 대소원은 집과 가깝고 여러 번 가 본 곳이라 익숙해 안성맞춤이었지만, 하루 지각의 페널티를 감당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청산 조합은 이사가 일본인인데 성격이 좋지 않아 도내에서 인화가 불량하기로 이름나 있었던 터였다.
그는 좋은 개 한 마리를 기르고 있었다. 그 개가 강아지 여섯 마리를 낳았는데, 한국인에게는 주기 싫다며 그 이튿날 여섯 마리를 모두 땅에 파묻어 죽여버렸다. 그만큼 그의 성품은 잔인했다.
그러나 막상 부임해 보니 일본인 이사만 빼놓곤 모두 훌륭하고 인성이 좋은 선배들이었다.
유년 시절 강에 나가 하루해가 지는 줄 모르고 물고기 잡는 재미에 빠졌던 것이 여기서 효용이 될 줄은 몰랐다.
청산에 있는 금강 상류엔 피라미떼가 많았다. 그는 물고기 잡을 보쌈을 준비하고 막걸리도 듬뿍 챙겼다. 광당포로 만든 보쌈보 네 귀에 끈을 달고 가운데 구멍을 뚫어 세숫대야를 감싼 뒤 그 속에 술지게미를 넣고 물 속 자갈바닥에 묻어 놓으니 피라미떼가 몰려들었다.
어릴 때부터 보쌈으로 물고기를 잡았으니 가히 베테랑 수준이었다.
주체하지 못할 만큼 잡았다. 선배들은 어린아이들처럼 좋아했다.
냄비에 지져 술안주로 삼고, 어탕국수도 해먹었다. 그렇게 하고도 많이 남아, 햇볕에 잘 말려 고향 아버지께도 보내드렸다.
그는 이후 보은군 마로면 관기지소로 근무지를 옮겼고, 여기서 서기 생활을 마감하게 된다.
● 향학열은 일본 유학으로 이어져
금융조합 서기 생활을 1년 6개월을 하고 그는 사표를 냈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인생 선배들과의 만남은 그에게 소중한 자산이 됐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꿈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35원에서 41원으로 높아진 한 달 월급을 그는 꾸준히 모았다. 유학경비로 쓰기 위함이었다. 그때 한달 하숙비는 4원에서 4원 50전씩 했다.
얼마간은 그동안 학비를 보내주시며 뒷바라지한 부모님께 보냈다.
공부란 때가 있는 법, 그 시기를 놓치면 평생 후회할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일본으로 연락해서 여러 전문대학의 입학 안내책자와 자료를 비교하며 어느 대학을 갈지 가늠해 봤다.
당시 일본에는 동경제국대학 법과가 가장 유명했다. 그러나 그곳에 가려면 인문계고등학교를 나와 영어와 수학에 능통해야 했다. 실업계고를 나온 그로선 욕심이었다.
일본 사립대학으로는 일본대학, 명치대학, 중앙대학, 조도전대학, 전수대학, 척식대학, 경응의숙 등이 있었다. 그 중 중앙대학 법과는 명성이 자자했다. 이왕이면 명문대에 가고 싶었다.
그는 중앙대학 전문부에 입학 원서를 발송하고, 1941년 봄 그 대학에서 보내온 수험표를 받곤 동경으로 향했다.
당시 일본으로 가려면 도항증(渡航證)이 있어야 했지만 수험번호표가 있어 쉽게 취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동경까지의 여정은 쉽지 않았다. 관부연락선이나 일본의 동해도본선 기차 타는 것도 어려웠고, 동경에 도착한 뒤에도 숙소 문제와 학교와 연락 문제 등이 신경 쓰였다.
입학시험은 영어와 일본어, 논문 세 과목이었다. 하루에 다 치렀다.
경쟁률은 5대 1이 넘었다. 조바심이 났다. 시험을 치른 지 1주일 만에 합격자 발표가 났다. 그곳엔 그의 합격 번호가 있었다.
김명기 기자 demiankk@dynews.co.kr
시대를 일깨운 중원인 중산 안동준 <8>
기자명 김명기 기자
입력 2025.04.01
일본인의 민족 차별… 주체성은 깊어지고
1942년 일본 중앙대학 재학 중이던 안동준(오른쪽)이 고향에서 온 친구와 함께 상야공원(우에노) 동물원에서 기념 사진을 찍었다. 친구는 마을 이장을 맡고 있었는데, 당시엔 동네 이장도 군복을 입었다.● 주경야독 일본 중앙대학 생활
동경에서 사는 몇 몇 지인들은 장한 일을 했다고 격려했다.
“주오(中央)대학은 법과로 유명하니 공부 잘 해서 변호사 되는 사법과에 합격하라”고 응원도 했다.
그는 야간부를 택했다. ‘주경야독’이 아니면 답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길을 택해야 했다.
고학이란 것이 말이 쉽지, 막상 닥치니 너무나 어려운 길이었다. 취직이 제대로 되지 않아 가져온 여비는 다 떨어져갔다. 그렇다고 지인들에게 손을 벌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와중에 운 좋게 그는 아메미아 사진 인쇄 회사에 정식 사원으로 취직을 하게 됐다.
게다가 그 회사 책임자는 자기 아이들을 돌봐주면서 사진 분해 일도 해보라고 권유했다. 가정교사를 겸해 채용한 것이었다.
주경야독의 유학 생활은 그렇게 차곡차곡 쌓여갔다.
● ‘반도인’이라며 차별하던 일본인들
호사다마라고, 1년 뒤 그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주는 일이 발생했다. 민족차별이었다. 그냥 당해선 안 될 일이었다.
1년 가까이 되자 공장 사람들은 그가 조선인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들은 그 꼴을 볼 수가 없었다. 아니꼬운 조선인이 사장집에서 총애를 받아가며 가정교사 노릇까지 하는 것 그들에겐 그것이 배알이 꼬였던 것이다.
그에게 인사를 하지도 않고, 그가 인사를 먼저 해도 받아주는 일 없던 한 청년이 있었다. 의식적으로 무시하는 행동이었다. 내지인보다 사장에게서 총애받는 조선인이 아니꼬왔던 것이다. 동준은 언젠가 그 청년의 버릇을 단단히 고쳐주겠다고 결심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청년이 선을 넘는 말을 했다.
“한또오진노 후세니!(반도인 주제에!)”
참아 넘길 수 없었다. 민족적 우월감을 드러내는 그의 태도를 무너뜨려야 했다. 차별받는 조선인으로서의 자존심도 상했다.
그는 청년을 불러 세운 뒤 말했다.
“너는 일본인이고 나는 조선인이다. 지금 조선은 너희 군국주의자들에 의해 독립을 빼앗기고 강제 합방을 당해 지금은 식민지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우리 문화는 너희를 앞선 것이었다. 일본은 우리가 문화를 전수해 준 후진국이었다. 최근 구라파에서 일어난 과학문명을 우리보다 한 발짝 앞서 받아 우리가 당했는데, 지금 와 보니 너는 일본인 중에서도 섬나라 근성이 아주 강한 협소한 인간이구나! 내가 떠나겠다. 새 직장을 마련하겠다. 내가 퇴사한 후에라도 개과천선하기 바란다.”
그는 그날로 회사를 나와 버렸다. 먹고 사는 문제, 배워서 능력을 키우는 것 모두 무도한 일본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신념 때문에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런 전제가 있었던 그로서는 민족 차별은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큰 후회는 없었다.
이 사건은 그에게 주체적 민족의식을 더욱 강하게 심어 줬다.
●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품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오기 전 그의 마음은 착잡했다. 넉넉지 않은 가정형편에다 일가를 이룬 가장으로서의 책임이 그의 어깨를 무겁게 누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들도 그가 가진 배움의 뜻을 꺾지는 못했다. 1년 간의 금융조합 서기 생활로 비용을 마련한 후 그는 유학을 강행했었다.
유학을 떠날 당시 안동준은 가족에게 알리지도 않았다고 한다. 일본으로 간 뒤 주오대에 합격한 후에야 통지서를 고향에 보냈다고 한다.
처음 목표는 고등고시 합격이었지만 한차례 탈락했고, 1942년 전문부 법과를 졸업한 뒤에는 연구과에 적을 두고 계속 고등문관시험을 준비했다.
그러나 그는 늘 괴로웠다. 정체성이라는 본질적인 문제에 그는 직면해 있었다.
일본은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허울좋은 말로 조선의 강제 병합을 정당화하려 했지만, 본질적으로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일본인들의 우월의식은 늘 민족 차별로 나타나곤 했다.
그리고 그 또한 ‘반도인’에 대한 일본인들의 차별에서 예외가 아니었던 것이다.
김명기 기자 demiankk@dynews.co.kr
시대를 일깨운 중원인 중산 안동준 <9>
기자명 김명기 기자
입력 2025.04.08
침략자들을 위해 피를 흘려야 하다니
▲ 일본 중앙대학 법과 재학시절 친구와 함께 한 안동준(오른쪽).● 민족 차별은 강한 주권의식으로
잘 다니던 회사를 참을 수 없는 민족 차별에 대항해 그만두었던 사건은 그에게 주권의식을 더욱 강하게 심어 줬다. 민족 차별은 도처에 있었다.
우리 민족의 독립과 주권을 찾는 일이 공부 이전에 선행돼야 할 문제라고 생각했다.
안정적인 직장을 그만두고 나니 하숙을 구하는 것부터가 문제였다. 그런데 그것조차도 민족차별이 심했다.
그 당시엔 하숙을 치는 사람들이 많았다. 골목길 여기저기엔 하숙생을 구한다는 내용의 전단지가 붙어있었다. 조선 유학생들은 그것을 보고 찾아가 구두고 먼저 하숙이나 셋방을 예약한 뒤 짐을 꾸려 이사하곤 했다.
그런데 빈방이 있었다고 해놓곤 조선인 유학생이 짐을 꾸려 가면 조선인이라는 것 어떻게 눈치챘는지 방이 나가버렸다는 식으로 퇴짜를 놓곤 했다. 조선인이기 때문에 하숙생으로 들이지 않겠다는 그들의 고얀 심보가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대놓고 거절당하는 입장에선 참으로 울화통이 터질 일이었다.
그렇다고 ‘나는 조선인이 아니다’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 그는 하숙을 옮길 때마다 그런 차별을 많이 겪었다.
방학 때 고향에 왔다가 돌아갈 때면 으레 관부연락선에서 형사들에게 호출 당하기 일쑤였고, 기차를 탈 때에도 검문받는 일이 예사였다.
여순으로 수학여행을 갔을 때 안중근 의사를 생각하며 느꼈던 민족의식은 다시금 살아났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이런 차별을 당하는 마당에 법률공부는 해서 무엇하나 하는 자괴감도 들었다.
식민지 백성이 침략자의 눈으론 노예와 다름이 없다고 보는 것인지도 몰랐다. 여러 차례 차별과 멸시가 이어지면서 그의 민족의식과 저항정신은 더욱 굳건해져 갔다.
● 학도병특별지원병제 실시
1942년 7월, 그는 중앙대학 전문부 법과를 졸업했다.
그는 매일같이 도서관에 틀어박혀 공부를 했다. 그럼에도 고문행정과에 낙방했다.
원칙대로라면 1943년 3월 졸업이었는데, 반년이나 앞당겨 졸업하게 됐다. 중앙대학 뿐만아니라 일본의 모든 대학을 그랬다. 이 같은 조치는 일본의 확전에 있었다.
중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진주만 기습까지 강행했다. 그러나 이는 패착이었다. 미국의 거센 반격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전선이 확대되고 연합군의 조직적인 반격으로 물적‧인적자원이 부족하자 대학생들을 조기 졸업시키고 전쟁터를 내보려했던 것이다.
그것은 안동준의 일생에 커다란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었다. 일제가 1943년 10월 학도병특별지원병제 실시를 결정한 것이었다.
● 조선 청년들을 전쟁터로 내몰다
대학생 강제동원이라는 일제의 마수는 졸업생 뿐만 아니라 조선인 졸업생들까지 뻗쳤다.
조선총독부는 ‘지원병 제도’라는 미명 아래 보통학교를 졸업한 조선의 청년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다. 그러다 이번엔 대학 재학생들까지 대상으로 한 ‘특별지원제’를 제정했다.
그렇게 강제동원에 착수했던 것이 1944년 1월 20일에 끌고 간 ‘학도병’이었다.
이 당시 특별지원병으로 끌려간 학생들는 4000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중산도 일본 정부의 징발에서 피할 수 없었다.
나라를 빼앗긴 것만 해도 억울하고 분한 일인데, 조선의 침략자들을 위해 피를 흘려야 된다는 것은 피가 거꾸로 솟는 일이었다.
더욱이 참기 힘든 것은 조선 총독이 조선 민족의 지도자로 일컬어지는 춘원 이광수나 육당 최남선 같은 이를 앞세워 전쟁에 참여하도록 종용하는 일이었다.
● 조선 총독에 일갈한 한운사
1943년 말, 4000여 명의 조선 학생들은 서울의 동성상업(혜화동)과 경성제대 예과(동숭동) 두 군데로 수용돼 군 입대를 기다리게 됐다. 이 당시 고이소 총독 주최로 장행회(壯行會)가 열렸는데, 강당 2층에 있던 한 학생이 큰 소리로 총독 이름을 부르며 일갈했다.
“당신은 우리가 끌려나간 뒤를 무엇으로 보상하겠습니까?”
당황한 헌병들이 몰려들어 그 학생을 연행했다가 곧 풀어주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그는 중산과 같은 괴산 출신의 한운사(韓雲史)였다. 게다가 일본 중앙대학 동문이기도 했다.
1961년 그가 쓴 ‘현해탄은 알고 있다’는 일제 학도병 강제 징발과 그 애환을 그리고 있다.
김명기 기자 demiankk@dy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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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일깨운 중원인 중산 안동준 <10>
기자명 김명기 기자
입력 2025.04.15
'나는 조선인'이란 정체성을 마음에 새겨
▲ 학도병 시절의 안동준. 그는 비록 1944년 1월 20일 일본군으로 징집돼 일본 나고야 부대로 투입됐지만, 한시도 ‘나는 조선인이다’라는 민족적 자긍심을 잃지 않았다.● 괴산이 낳은 인물, 안동준과 한운사
한운사(韓雲史‧1923년 1월 23일~2009년 8월 11일)는 안동준과 더불어 충북 괴산이 낳은 걸출한 인물이다. 그는 안동준 보다 네 살 어렸던 동향 후배였다.
시인, 서예가, 극작가, 작사가, 영화 시나리오 각본가, 영화 각색가, 영화배우 등 그가 활동한 영역은 매우 다양했다. 청주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주오대 철학과 중퇴, 서울대 불문학과를 중퇴했다.
1946년 서울대 불문과에 재학 중 KBS 라디오 드라마 ‘어찌하리까’로 방송계에 데뷔했고, 1961년 ‘현해탄은 알고 있다’ 등 소설과 1965년 영화 ‘빨간마후라’ 등 20여 편의 영화시나리오, ‘남과 북’ 등 라디오 드라마 방송대본을 집필했다.
2002년 한국방송 영상산업진흥원 방송인 명예의 전당에 등재됐다.
한국일보 문화부 부장, 한국방송작가협회 이사장, 한국펜클럽 대표, 한국방송공사 이사, 한일친선협회 부회장 등을 맡으며 방송계 발전에 공헌했다.
그를 기리는 한운사기념관이 고향인 청안면 읍내로 45-6에 위치한 생가 터에 사업비 10억 9000만원을 들여 지상 2층 규모로 건립됐다.
● 괴산 장터에서 열린 환송행사
조선의 각 군 단위에선 경찰서장 명의로 일본 군문으로 출발하는 환송행사가 있었다.
안동준은 일본 유학 생활을 끝내고 귀국해 고향에 있었던 차였다.
괴산군 감물면 이담리에선 안동준과 같이 일본 중앙대학 예과 2년을 졸업하고 법학부에 재학하고 있던 집안 동생 안길준(安吉濬)이 대상자였다.
괴산 장터에서 열린 환송행사를 끝내고 그는 준비된 차를 타고 조치원역으로 향했다. 이때 동행한 이는 세 살 난 아들 건일(建一‧현 미덕학원 이사장)과 건일을 등에 업은 아내 조향련, 손위 처남 조관식씨, 의형이었던 홍종만씨였다.
가족들과 함께 조치원에서 부산까지 가는 기차를 탔다. 차창으로 부는 겨울 바람은 매서웠다. 기차엔 그의 같은 운명의 조선인 학도병들이 가득했다.
땅거미가 질 무렵 부산진역에 도착했다. 가족들과 여관방에서 하룻밤을 지새고 이튿날 가족들과 작별한 뒤 연락선에 올랐다. 소리없이 눈물만 주책없이 자꾸 흐르고 있었다.
● 중산과 같이 일본군에 배치된 한운사
안동준은 1944년 1월 20일 징집돼 동생 준길과 함께 나고야(名古屋)에 있는 중부 제2부대의 이사오(勳) 중대에 배치됐다. 훗날 이들 학도병을 ‘1.20 동지’라고 부르게 된 것은 여기에서 기인한다.
괴산에서 안동준과 함께 학병으로 징집된 이들 중에는 한운사도 있다. 한운사도 안동준과 같이 청주, 대전, 부산을 거쳐 나고야로 갔는데, 배치된 부대는 안동준과는 다른 중부 13부대 자동차중대였다.
나고야 성 안에 있었던 중부 제2부대는 보병부대로, 아사오 중대를 비롯해 세 개의 중대에 33명의 조선인 학도병이 있었다.
나고야 성은 일본 막부시대에 각번(各藩)의 장군들이 살던 곳이었다. 주위는 높은 석성으로 쌓여 있었고, 성 밖은 물을 채운 해자(垓字), 가운데는 5층 높이의 목로(木櫓‧성 위의 망루)로 조성돼 있었다.
조선에서 끌려온 학도병들은 각 부대에 배속받은 뒤 본격적인 훈련을 받게 됐다. 학도병 대부분은 중등학교 시절부터 교련 과목을 배웠기 때문에 제식 훈련과 각개전투 훈련, 분대‧소대전투 등 기초 훈련은 어느 정도 몸에 익혀온 터였다.
이사오 중대에 배치된 12명의 학도병들은 일본을 통틀어 가장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특수교육을 받은 장교들이 훈련을 담당한 탓이었다.
● ‘우리는 조선인’이라는 자긍감
봄이 지나고 여름에 접어들자 나고야의 기후도 점차 무더워졌다.
‘1.20 동지’는 모두 안동준을 포함해 12명. 그들은 따로 회합을 갖고 뜻을 모은 것은 아니었지만, 서로의 마음 속에 ‘우리는 조선인이다’는 뚜렷한 민족적 자긍심을 모두 갖고 있었다.
지금은 비록 일본 군국주의에 무릎을 꿇고 식민지 포로로 너희들 앞에 끌려와 훈련을 받고 있지만, 우리는 너희 일본보다 훨씬 오래된 역사와 문화를 가지고 있고, 대대로 나라를 세우고 지켜온 선진국이었다는 자긍심을 그들은 한시도 잊지 않았다.
김명기 기자 demiankk@dy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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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일깨운 중원인 중산 안동준 <11>
기자명 김명기 기자
입력 2025.04.22
나는 망국의 백성으로 포로 신세가 됐다
▲ 일본군으로 나고야로 끌려가 갖은 고생을 했던 안동준은 먼 후일 국회의원이라는 신분으로 일본 거물 정치인들과 교류하게 된다. 사진은 가이후 도시키(76~77대 일본 수상)를 접견하는 안동준(가운데) 선생. 맨 오른쪽은 이재형 전 국회의장으로, 이들 세 명은 모두 일본 중앙대학 동문이다.‘1.20 동지’ 가운데 이호근(李浩根)이 있었다.
그는 예천에서 양조장을 하는 부친 밑에서 고이 자란 귀한 집 아들이었다. 음악과 문학을 좋아했던 친구였다.
키가 작은 데다 다리가 짧아 훈련 때면 땀을 가장 많이 흘렸다. 구보를 하면 으레 맨 꼴찌였다. 그럼에도 그는 중도에 포기하는 적이 없었다. 그만큼 정신력이 강했다.
일본인 교관들도 그의 정신력 하나만큼은 인정해 줬다.
그는 광복 후 고국에 돌아와 청년 운동과 정치에 투신해 2대 국회의원에 당선됐고, 민주당 정부 땐 경상북도 도지사를 역임했다.
‘1.20 동지’였던 이들, 나라 잃은 설움을 함께 했던 이들의 면면은 모두가 훌륭했다.
● 우리는 누굴 위해 싸우고 있나
군사교육이 끝나갈 무렵, 1944년 늦은 가을 어느 날, 조선으로부터 학병 가족 몇 분이 위문 차 찾아왔다.
경성제대 재학 중 학병으로 온 김정진의 백씨인 의학박사 김성진씨가 서울 대표로 왔고, 충북을 대표해선 안동준의 친척 동생인 안길준의 형수, 김병덕씨가 왔다. 그녀는 한 동네에서 둘이나 같은 부대에 배속된 점이 참작돼 충북대표로 오게 된 것이었다.
위문단은 떡과 술, 담배 등속을 가져왔지만, 관심이 가지 않았다. 그들은 우울감에 빠져 있었다. 무력감이 동시에 오기도 했다.
‘우리는 왜 하루 종일 혹독한 군사훈련을 받으며 일본군이 돼 있는가, 우리는 누굴 위해 싸우려 하는 것인가.’
늘 자신의 정체성을 두고 마음이 아팠다.
안동준은 더욱 그랬다.
충절과 의기를 보였던 가계(家系)를 보면 이게 뭐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지조있고 품위있는 가문의 후예로, 자신이 일본군이 돼 있다는 것이 절망스럽기도 했다.
단종 복위를 계획했다가 이슬로 사라진 선조들의 충의 정신,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 휘하 선봉장이었던 안충현공의 호국정신, 사관으로 직필정론을 견지하다 화를 당한 을사명신 안한림공의 정의 정신, 일제의 괴수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의 충혼.
면면히 흐르는 순흥안씨의 남아인데도, 학병 거부도 하지 못한 채 일본군으로 들어와 있는 자신이 처량해졌다.
● “나는 조선인이오”
특별면회엔 조선인 학병 30여 명과 면회를 온 가족들 뿐만아니라 조선군과 총독부 관계자, 나고야부대 관련 군인들이 많이 참석했다.
안동준을 이때다 싶어 발언권을 얻은 뒤 말했다.
“나는 조선인이오. 그런데 난 지금 일본군의 군복을 입고 일본군의 한 사람이 돼 훈련을 받고 있소. 그건 우리 조선의 국력이 약해서요. 특히 군대와 외교력이 약해서 일본과 한 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강제 합병을 당해 주권과 외교권을 빼앗긴 식민지로 전락해버린 탓이오. 그러나 우리 조선은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소. 일본 역사는 2000년에 불과하오. 문화에 있어서도 우리 조선은 일본보다 월등하게 오래되고 앞서 있소. 그럼에도 우리 조선은 오늘날 일본에게 무릎을 꿇고 망국의 한을 품게 됐소. 서구식 과학무기와 전법을 도입해 조련이 잘된 군대를 가지고 우리를 침범했기 때문이오. 그래서 우리 조선은 한 번 싸워보지도 목한 채 손들고 만 것이오. 지금 망국의 백성으로 포로 신세가 된 것이오. 나라를 지켜내지 못한 잘못 때문에 여기에 끌려와 고생하는 것이라 생각하면서 잠못 이루는 밤이 하루 이틀이 아니오.”
주위가 숙연해졌다. 일본군 관계자들은 짐짓 못들은 척 했다.
● 죽음의 길이었던 사이판행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미국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공격했다. 기습 당한 미국은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이는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격이 됐다. 미국이 본격적으로 참전하게 된 계기를 만든 사건이었기 때문이었다.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은 패퇴하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1942년 2월엔 가달가날에서 대접전이 벌어졌는데, 일본군의 완패였다. 이를 기화로 일본의 패색이 짙어졌다.
조선 학도병은 그런 와중에 징집됐던 것이다.
김명기 기자 demiankk@dy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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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일깨운 중원인 중산 안동준 <12>
기자명 김명기 기자
입력 2025.04.29
여 교사가 보내온 ‘맑은 편지’
▲ 안동준이 일본군으로 끌려가 주둔했던 나고야 성. 나고야 성 안에 있었던 중부 제2부대는 보병부대로, 아사오 중대를 비롯해 3개의 중대에 33명의 조선인 학도병이 있었다.중남부 태평양에서 패전을 거듭하던 일본군은 조선인 학병들이 입대한 5개월 후인 1944년 6월 15일 남태평양에 있는 사이판 섬에 상륙했다. 그러나 22일 만인 7월 7일 사이판 섬 수비대인 일본군 3만여 명이 모두 옥쇄의 길을 걷게 됐다. 그리고 섬은 연합군으로 넘어갔다.
그 당시 안동준이 소속돼 있던 부대원들은 모조리 사이판 섬 수비대로 파견될 계획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파견할 배편을 기다리던 중 이미 연합군에 의해 섬이 함락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던 것이다.
만약 그때 안동준이 그 배를 타고 사이판으로 향했다면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길이 없었을 것이었다. 일본군의 패전으로 안동준은 다행히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이다.
● 청명한 겨울, 여 교사의 편지
겨울, 청명한 날이었다. 해변이라 쌀쌀한 날씨였다.
그는 점심을 먹은 뒤 그가 묵고 있던 학교로 순찰을 돌았다. 해안 쪽 맨 끝 교실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교실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가니 한 여선생은 피아노를 치고 있었고, 다른 두 사람은 책을 보고 있었다.
‘책 대신 손에 총을 쥐었던 게 언제였던가.’
그는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동안 빌리기로 했다. 여선생이 미소를 지으며 빌려줬다. 월간 잡지였는데 재미있었다.
모두 읽은 뒤, 책을 빌려줘 고맙다는 쪽지를 잡지에 넣어 돌려 주었다. 책을 돌려받은 여선생이 말했다.
“선생님 이름과 나고야 부대 주소 좀 적어 주세요.”
책을 빌려 본 고마움도 있고 해서 적어주었다.
어느 날 부대 내무반에 돌아와 보니 낯선 편지 한 통이 와 있었다. 여선생의 편지였다.
그때부터 편지가 계속 왔다. 시즈오카에 주둔해 있을 때의 그 여선생이었다.
사진과 정성스럽게 쓴 그림엽서였다.
그녀는 이틀이 멀다하고 그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 “나는 조선인 학생, 처자가 있소”
광복을 한 달 남겨두었던 7월 중순, 그녀로부터 온 편지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날마다 쓰는 편지입니다. 우리 마을엔 우체통이 없어 10리 떨어진 해변가 큰 마을로 가 편지를 띄웁니다. 밤새 편지를 쓰고 아침마다 50분 걸리는 해변가 마을 우체국으로 와 또 편지를 부칩니다. 집에 돌아오다 잔잔하게 일렁이는 파도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시즈오카 교실에서 만났던 선생님을 생각합니다. 모래 위에 쓴 선생님의 이름은 파도가 밀려와 지워버립니다. 지워진 선생님의 이름을 또다시 씁니다. 파도는 또다시 밀려와 지워버립니다. 그러다 서산에 기운 해를 바라보며 집으로 발길을 돌립니다.’
문학소녀 같은 그녀의 편지는 안동준의 마음에 잠깐 여울을 만들었다. 전쟁터에서 핀 학도병과 여선생의 사랑, 그쯤으로 보면 될 듯도 싶었다.
그러다 언뜻 정신이 들었다. 아닐 일이었다.
그는 여선생으로부터 오해 살 일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조선인 학생으로, 고향에 부모와 처자가 있소.’
안동준은 그 내용의 편지를 그녀에 대한 마지막으로 삼았다.
● 일왕의 떨리는 목소리 ‘무조건 항복’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 유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무조건 항복’을 이야기했다.
모두가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천황의 목소리를 들었다. 당장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고 싶었다.
그러나 조선 학도병들은 침묵했다. 무슨 화가 다가올지 아무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 곳은 일본이었다. 그저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일본군들의 표정은 사색이었다. 끝까지 본토를 사수하겠다는 육군 측과 항복을 서둘러 희생을 막아야 한다는 해군 측의 알력이 있었다고 했다.
항복으로 결론을 몰고 간 이가 외무대신 도오고 시게노리였다는 후문이 있었는데, 그는 조선인의 후예라고 알려져 있다.
김명기 기자 demiankk@dy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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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일깨운 중원인 중산 안동준 <13>
기자명 김명기 기자
입력 2025.05.06
징병거부운동, 들불처럼 번지다
▲ 학도병 시절의 중산 안동준. 강제로 끌려가 일본군이 됐지만, 안동준은 늘 스스로 조선인임을 잊지 않았다.◆ 징병제 거부한 전국적 저항운동
여기서 일제의 징병과 이에 대한 거부 운동에 대해 살펴본다.
안동준처럼 일제에 의해 강제로 입대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이에 대항해 징병 자체를 거부했던 이들 또한 많았다.
이른 바 조선에서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징병거부운동(徵兵拒否運動)은 일제가 추진한 학도병특별지원병제에 대한 반발에 따른 것이었다. 일제가 조선 청년을 강제동원해 일본군에 투입키로 한 징병제(徵兵制)의 시행에 반대해 일어난 전국적인 저항운동이었는데, 그 연원은 일제가 조선에 징병제를 실시한 1943년 3월 1일자로 개정병역법을 시행한 것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사실 이 징병제가 실시되기 이전부터 일제는 육군지원병·해군지원병·학도지원병 등 ‘지원’이라는 이름 아래 조선 청년들을 병원(兵員)으로 동원하고 있었다.
중일전쟁 이후 태평양전쟁에서 패망할 때까지, 일제가 조선 청년을 군인으로 동원한 과정은 몇 단계로 나뉘어 진행됐다.
◆ 중일전쟁 확전에 ‘황민화정책’
일제는 1937년에 도발한 중일전쟁이 확전되자 조선에 대한 황민화정책(皇民化政策)이 추진되는 상황에서 자질이 우수한 조선 청년들을 병력으로 흡수하고자 했다.
그리고 1938년 2월, 칙령 제95호 ‘조선육군특별지원병령’을 공포했다. 지원병령에 따르면, 만 17세 이상 소학교 졸업 이상의 학력을 가진 자는 육군 특별지원병으로 지원할 수 있도록 했다. 신체검사 합격한 지원자는 조선총독부 육군병지 원자훈련소에서 4개월의 훈련을 받은 다음 현역 입대하거나 제1보충역에 편입됐다.
그러나 말이 지원병일 뿐이었다. 다분히 강제성을 띤 것이었다.
경찰서를 비롯한 각 행정기관과 어용단체, 홍보기관 등이 총동원돼 지원을 강요하고, 또 직장별·지역별 지원경쟁을 부추김으로써, 해당자들은 지원하지 않고 배겨낼 수 없는 상황에 몰리게 만들었던 것이다.
◆ 법문계 재학‧졸업생까지 강제 동원
일제는 1943년 7월 칙령 제108호로 ‘해군특별지원병령’을 공포, 8월부터 시행하면서 다시 해군지원병이 동원됐다. 같은 해 10월에 제1기생 1000명, 1944년 4월에 제2기생 2000명이 진해에 있는 해군병지원자 훈련소에 입소해 6개월의 훈련을 받은 뒤 해병단(海兵團)에 입대했다.
다음 단계로 나타난 것이 이른 바 학도지원병이다. 태평양전쟁에서의 병력 소모가 가속화되자, 일제는 1943년 10월 병역법 일부를 개정했다. 고등·전문학교 이상 재학 중의 법문계(法文系) 학생에 대한 징집유예제도를 폐지했고, 이에 따라 그간 징집유예를 받고 있던 일본의 법문계 학생들이 같은 해 11월 일제히 입대하게 됐다.
육군성령(陸軍省令) 제48호로 ‘쇼와(昭和) 18년도 육군특별지원병 임시채용규칙’을 공포한 것이 그것이다. 병역의무가 없는 조선 학생들에 대해서도 법문계 재학생 또는 졸업생의 병원 동원을 강행했다. 이 조치로 국내외를 통해 4385명의 해당자들이 1944년 1월 20일 일제히 일본군문으로 끌려갔다.
안동준의 경우가 이 케이스에 해당됐다.
◆ 반란과 집단 탈출 모의도
이러한 예비과정을 거치는 한편, 1943년 8월부터 시행한 개정병역법에 의해 전면적 징병제 실시단계로 들어갔다. 이에 따라 1944년 4월 1일부터 8월 20일 사이에 제1회 징병검사가 실시되어 모두 20만6057명이 징병검사를 받았고, 합격자들은 1944년 9월부터 1945년의 일제 패망 때까지 순차적으로 징집됐다. 입대 인원은 최소한 18만4000명 이상인 것으로 추계되고 있다.
일제는 지원병·학도병·징병 등의 동원에 심혈을 기울였지만 결코 그들의 뜻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 계도·권장·강제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기피, 거부하는 저항이 일어났다. 우선 학도지원병의 경우, 적지않은 인원이 지원을 거부, 기피해 응하지 않았다. 그 중에는 산악지대에 은신처를 마련, 동지를 규합해 집단생활을 하면서 무장투쟁을 준비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학도병으로 입대한 경우에도 교육 중 일본군부대에서 반란과 집단탈출을 모의하거나, 일선에서 연합군측으로 탈출해 항일대열에 참가하는 예가 많았다.
김명기 기자 demiankk@dy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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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일깨운 중원인 중산 안동준 <14>
기자명 김명기 기자
입력 2025.05.13
서울 큰 건물엔 일본 군대가 기관총 앞세우고 보초
▲ '무조건 항복' 방송을 하고 있는 히로히토 일왕.◆ 일본군막에서 탈영 감행
8월 15일 대한민국이 광복을 맞이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8월 15일 히로히토 일왕이 항복을 선언한 뒤에도 조선인 학도병의 귀환과 관련해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저 밥만 먹이면서 아침 저녁으로 점호만 계속했다. 조선 학도병들은 쉬쉬하며 정보를 나누었다. 국내 정치 상황에 모든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리고 즉각 돌려보내지 않고 조선 학도병을 억류하고 있는 것은 월권이니 더 이상 기다리지 말고 우리끼리 뜻을 모아 임의로 귀국하자는 의견을 모았다.
장교는 영문을 임의로 출입할 수 있기 때문에 갑간(甲幹) 출신인 염정훈과 을간(乙幹) 출신의 정병회, 그리고 상등병인 안동준, 이렇게 세 사람이 의기투합하게 됐다.
결국 안동준은 염정훈, 정병희와 함께 8월 30일 ‘탈영’을 감행했다. 하루 빨리 조국에 돌아가서 국가 건설에 참여하고 싶다는 열망 때문이었다.
◆ 편지만 챙겨 정문을 유유히 통과
그날 일행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하느라 내무반에 있는 소지품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소중히 간직했던 편지 몇 통만 챙겼을 뿐이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정문을 통과했다.
곧바로 나고야 역으로 가서 시모노세키 행 기차를 탔다.
시모노세키역 인근은 사람들로 들끓었다. 한 달 가까이 부산가는 배가 불통이어서 승객들의 발이 묶여 있었던 탓이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운행을 재개한다는 확성기 소리가 들려왔다. 환호성이 터졌고, 사람들은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고야 역에서 부친 수하물은 도착하지 않았다. 일행은 결국 짐을 포기했다.
군복이 힘이요 계급이 깡패라고, 군복을 입은 일행은 장교와 하사관의 계급장 덕에 시간을 놓치지 않고 배를 탈 수 있었다.
◆ 고향 대신 서울행 택한 중산
나고야를 떠나 시모노세키(下關)에 도착한 안동준은 부관연락선을 타고 부산에 도착한 뒤 경부선을 타고 곧장 서울로 갔다.
부모님과 처자가 있는 고향으로 가려면 조치원역에서 내려야 했다. 그러나 그 전에 들어야 할 것이 있었다. 9월 초 서울에서 있을지도 모를 건국 대통령의 시정연설을 반드시 들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조국을 위해 ‘자신의 일’을 해야겠다는 뜻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조국 광복을 맞아 민족지도자들이 서울에서 독립국가를 선언하고 국가 운영 방침을 밝힐 것이라고 생각했다. 상하이에 살던 매형 최상옥(崔相玉)으로부터 임시정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었다. 미국에서 이승만이 단파 방송을 통해 독립운동을 독려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9월 1일 도착한 서울의 모습은 기대와는 전혀 달랐다.
◆ 서울엔 아직까지 일본군이 상주
안동준은 1945년 9월 1일 새벽 서울역에 도착했다.
그러나 서울은 그가 상상했던 곳이 아니었다. 일본이 망한 지 보름이나 지났건만, 대로변에 우뚝 선 큰 건물엔 아직까지 일본 군대가 기관총을 앞세우고 보초를 서고 있었다.
어찌된 일인가 알아보고 싶었지만, 스스로를 돌아보니 자신 또한 일본 군복을 입고 있었던 것.
서글픈 생각이 밀려왔다. 일단 옷부터 갈아입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현동으로 갔다. 인현동은 손위 처남 조관식씨가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난해 나고야에 있을 때 인현동으로 이사 갔다는 소식을 받았던 터였다.
한나절 걸려 처남집으로 찾아갔지만, 처남이 시골로 가 계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
그날 하룻밤을 묵었지만 오래 있을 처지가 안 됐다.
김명기 기자 demiankk@dy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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