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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8

에세이·시론집 나란히 펴낸 원로 문학평론가 유종호 2019

“소수의견 안 보인다면 정상이라 할 수 없어, 작가 삶·작품은 별개…외면 땐 독자도 손해” - 경향신문

“소수의견 안 보인다면 정상이라 할 수 없어, 작가 삶·작품은 별개…외면 땐 독자도 손해”
입력 : 2019.06.24 21:02 수정 : 2019.06.24 21:06이영경 기자

에세이·시론집 나란히 펴낸 원로 문학평론가 유종호




원로 문학평론가 유종호 전 연세대 석좌교수(84·사진)가 책 두 권을 나란히 출간했다.


현시대에 대한 비판적 통찰과 노년의 삶에 대한 성찰이 담긴 <그 이름 안티고네>(현대문학)와 시론집 <작은 것이 아름답다>(민음사)다.




“노년은 삶의 종언이 바로 근접해 있는 시기다. 그것은 먼 우렛소리가 아니라 바로 머리 위에서 나는 포성이요 천둥소리다. 뒤늦은 깨달음처럼 삶이란 죽음으로부터의 도망이요 둔주요 결국 패색 짙고 숨 가쁜 둔주곡(遁走曲)이란 느낌이 든다.”

<그 이름 안티고네>는 노년에 느끼는 위기의식에 대한 토로로 시작한다. 그는 ‘노년의 지혜’는 “노년을 위한, 노년에 의한, 노년의 이데올로기”라며 다만 젊은이들이 살아보지 않은 시대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과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노년의 강점’으로 꼽을 수 있다고 말한다.


리니지M ‘VANGUARD’

‘말년의 글쓰기’의 소산인 책 두 권엔 일평생 문학평론가, 인문학자로 살아온 그의 세월과 경험, 읽어온 책을 바탕으로 바라본 현시대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 녹아있다.


<그 이름 안티고네>에서 그는 편향과 쏠림현상에 대해 지적한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에 대한 동양과 서양 학생들의 견해가 상반되며, 동양의 경우 안티고네를 숭상하는 입장이 절대 다수를 차지한다며 “우리 학생들이 어두운 정치사를 반영하여 권력자를 적대적 타자로 간주함에 반해서 미국 학생들은 그렇지 않음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그는 “주류적 대세만이 압도적이고 있음 직한 소수 의견이 보이지 않는 것은 정상이라 할 수 없다. 그러한 상황이야말로 전체주의적 풍토의 온상이 될 수 있다”고 일침한다.


맨부커상을 수상한 한강의 <채식주의자>에 대한 외국의 평가를 소개하는 글도 실렸다. 미국 소설가 다이앤 존슨이 <채식주의자>에서 광기를 읽어낸 것에 대해 “우리 사회를 미쳐 돌아가는 광기의 사회로 인지하고 있다는 의혹은 충격적이다. 아니라고 반론하기 어려워서 더욱 그렇다”고 말한다.


유종호 회고록 2 합장일랑 말아라 - 충주농업학교의 남봉우 선생, 아들 남기영 이야기

합장일랑 말아라 

<합장일랑 말아라>

알고 보면 세상은 좁다. 한 다리 건너 다시 두 다리만 건너면 다들 아는 사이가 된다. 이번에 다시 한 번 그것을 통감하였다. 전번에 학생 손에 비명으로 간 한 사례로 충주농업학교의 남봉우 선생 얘기를 적은 바 있다. 그런데 최근 그 유족을 통해 불행의 자초지종을 비교적 소상하게 알게 되었다. 흔히 말하는 6•25의 상처가 얼마나 깊고 다양한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고 기록으로 남기는 의미도 있어 전해 들은 대로 적어두려 한다. 6.25 당시 남봉우 선생 일가는 농업학교 사택에 살고 있었고 학교 사택은 열한 채가 있었다 한다. 아무래도 전황이 불리해지는 쪽으로 가자 남 선생은 부인과 자녀 3남매를 충북 음성에 있는 처가로 보냈다. 오랫동안 생활지도 주임을 맡았으나 6.25 나던 해에 교무주임이 된 그는 학교일 정리할 것이 있다며 충주에 남아 있었다. 인민군의 진격 속도가 빨라지자 일단 음성으 로 갔으나 전선은 벌써 음성을 지나 남쪽으로 이동해 있었다. 남 선생은 사정을 알아보기 위해 충주로 돌아와서 칠금리에 있는 믿을 수 있는 제자를 찾아 나섰다가 곧 붙잡히게 되었다는 것이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다.

남편으로부터 아무런 소식이 없자 부인 정인순호 여사가 충주로 나왔다. 충주농업학교에서는 한갑수 선생이 인민위원장직을 맡고 있었던 것 같다. 부인은 우선 한갑수 선생을 찾아가 남편의 행방에 대해서 물어보 았다. 처음엔 걱정할 것 없다면서 안심을 시켰는데 나중에는 벌써 청주로 넘어가서 자신도 모른다고 말했다.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해 다시 찾아가 물어보니 "이렇게 자꾸 찾아다니면 오히려 당사자에게 해롭다"며 역정까 지 내었다 한다. 그러니 다시 찾아가 물어볼 처지도 못 되었다. 처음엔 상황이 그리 나쁘지 않아서 안심을 시킨 것으로 생각되는데 태도가 달라진 것이 모든 것을 알고 난 뒤에 직접 알려주지를 못하고 얼버무린 것인지의 여부는 알 길이 없다. 부역 교사인 한갑수 선생은 충주에 과수원을 가지고 있었고 1950년대 말에는 충북 도의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보신 때문에 부역하기는 했으나 지방 재력가이자 유지였던 그가 적극적으로 협력한 것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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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복이 되고 나서 충주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 경찰서에는 수복 직후 실종신고를 해놓은 처지였다. 두 처남과 열세 살 장남이 경찰서를 찾았다. 거기서 남봉우 선생을 직접 처형했다는 충주농업학교 학생을 만날 수가 있었는데 그는 유병대 내무서장의 지시로 자기가 남 선생에게 총을 쏘았고 시체도 그 자리에 매장했다고 말하였다. 또 그 장소가 호암지 연못 근처 의 구렁이었다고 진술했다. 곧 그곳을 파보았는데 열대여섯 구의 시신이 묻혀 있었고 이미 부패가 심해서 누가 누구인지 분간할 도리가 없었다. 부인은 매고 있던 혁대를 근거로 해서 남 선생 것이라고 생각되는 시신을 수습해서 선산에 안장했다. 현장에는 부인, 두 처남, 어린 아들이 입회하였다. 당시 그 학생을 통해 남 선생이 칠금리에서 붙잡힌 후 하루 정도 유치 장에 있다가 바로 처형되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처형을 지시했다는 유병대도 충주농업학교의 교사였다. 6.25가 터지기 직전에 부임해 왔는데 처와 두 아들이 있었다. 큰아들은 전처의 소생이었고 아주 어린 작은아들 은 후처 소생인데 이 후처는 충주여자중학교의 가사교사였다. 어떠한 경위로 그가 학교에서 내무서로 전근해 간 것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다른 것과 함께 지금으로서는 알 길이 없다. 그는 당연히 수복 직전 월북하였다. (* 가사과는 요즘의 가정과에 해당한다.)

남봉우 선생은 충북 청주 남일면 소재 의령 남씨 집성촌 출신이다. 청주중학을 나온 후 부친의 명으로 의과계의 상급학교 시험을 치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음악이나 스포츠 쪽으로 재주를 보인 터라 적성에 맞지 않아 본인 자신이 별로 입시 준비에 열의를 보이지 않아 크게 낙망하지도 않았다 한다. 낭인생활과 우여곡절 끝에 역시 부친의 의사에 따라 충주군 앙성의 강천초등학교와 음성 수봉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해방 이후 충주농업 체육 교사로 부임하게 된다. 운동에 소질이 있고 특히 축구를 잘 해서 충북 대표팀 선수를 지내기도 했는데 3번을 달고 백을 보았다. 그것 이 계기가 되어 충주농업의 체육 교사가 된 것인데 바이올린과 아코디언 도 잘 켰고 실을 뽑는 새 제사기를 만들어 특허를 받은 것도 있었다. 사변 전부터 교장으로 있었고 남 선생을 초빙해 온 박성범 한 교장은 남 봉우 선생 유족의 처지를 딱하게 여기고 교사용 사택에 머무르게 할 수는 없어 전부 여섯 채가 있었던 학생 기숙사 중의 한 칸에 유가족이 머물도록 배려를 해주었다. 그 덕에 오랫동안 집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1951년 가을 연례행사인 충주고와 충주농고의 친선 축구경기에서 예년과 달리 충주농고가 패배를 하였다. 충고 선수들이 거친 경기를 하는데 심판이 이를 묵과해서 부당하게 패배한 것이라고 농고 선수들이 이의를 제기하며 난동을 부렸다. 마땅히 학생들을 진정시켰어야 할 박 교장이 나서서 학생 편을 들며 은근히 선동을 해댔다. 농고 학생들이 돌을 던지며 충고 학생 집결장소로 진격해 오는 바람에 충고 학생들은 돌을 피해서 도망을 쳐야 했다. 불시에 당한 것이어서 반격할 틈도 없이 학생과 교사가 거의 1킬로 정도 도망쳐서 삼원초등학교까지 이르렀다. 그제야 투석과 추격이 뜸해져서 양쪽 교사들이 나서서 일단 휴전이 된 일이 있었다. 그때의 거동으로 보아 박성범 교장은 교사로서의 기본 자질이 없는 위인으로 치부하게 되었고 그러고 보니 그의 복장이나 코밑의 수염이 꼭 기생오라비 같다 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번에 그가 남 선생 유족에게 보여준 배려에 관한 얘기를 듣고 사람에게는 누구나 장단점이 있고 한 모서리만 가지고 판단 해서는 못쓴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다. 난시에 희생된 교직원의 유족에게 최소한 주거 장소는 제공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 그의 의협심이, 불법적 난동을 통해 패배자에게 울분의 배출구를 열어주자는 파격적 언동과,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사실 사람의 장단점이란 것은 모두 같은 뿌리에서 나온 상이한 줄기인 경우가 많다 

졸지에 가장을 잃은 유족이 그 후 가파른 삶을 살았을 것은 불문가지다. 남봉우 선생의 부친 남상범 씨와 그 부인도 1•4후퇴 직후 세상을 떴고 남봉우 선생의 막내 또한 1•4후퇴 피란 중에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부인 정인순 여사가 가사 도우미와 바느질 품팔이를 비롯하여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해서 어린 남매를 키웠다. 그 과정에 남 선생의 옛 친구나 제자의 도움도 컸다. 1년에 한 번 쌀 한 가마를 꼬박꼬박 도와준 은인도 있었다 한다. 다행히 남매가 모두 명민해서 어려운 가운데도 아들 <기영>은 서울대학 지질학과를 나와 경북대학 교수로 있다가 <호주의 지질 연구소>에 자리를 얻어 1971년 한국을 떠났다. 딸 미영은 숙대 국문과 를 나왔고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부문에서 당선되어 동화작가로 활동 하는 한편 한국교육개발연구원에서 장기간 근무해서 국어교육연구실장 을 역임한 바 있다. 현재는 한국독서개발연구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부인 정인순 여사는 2014년 우리 나이 백하나로 세상을 떴고 말년 이태 동안 은 인지장애에 걸려 있었다. 인지장애가 오기 전 부인은 딸에게 말했다. "혁대로 미루어보아 너희 아버지려니 생각하고 시신을 수습해서 선산에 모시긴 했지만 무언가 의지를 하려고 서두르는 마음이 앞서서 그랬던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 적이 많다. 아무래도 자신이 없고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나 죽은 뒤 합장일랑 말아라. 생판 남일지도 모르거든." 사실상의 유언이 된 셈인데 그 얘기를 듣고 마른가슴이 찡해오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이메일로 전해 들은 남기영 씨의 경험담도 그렇다. 충주농업학교는 봉방리라는 논바닥으로 된 동네 한가운데 서 있었다. 시내에서 완전히 동떨어져 있고 당시엔 인가도 주위엔 없었다. 그런 농업학교 바로 옆의 사택에 서 살았기 때문에 동네엔 친구가 많을 수가 없었다. 부친을 죽음으로 몰아 넣은 것이 분명한 유병대 선생의 아들이 한 살 위였고 함께 삼원초등학교 를 다녀서 친하게 지냈다. 6.25 이후 그의 부친이 월북한 후 만날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1961년 봄에 서울 동숭동 교정에서 그를 먼발치로 보았 다. 처음엔 긴가민가하였다. 몇 차례 보고 나서 틀림없이 그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가 구내식당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용기를 내어 다가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처음 몹시 당황해하였으나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굴면서 자기가 그 이름의 주인이 아니라고 딱 잡아떼었다. 갑자기 무서워 지면서 그 후 그를 만나게 될까 겁이 났다. 학교 가기가 도무지 싫어져 겸사겸사 앞당겨 자원입대하였다. "그의 모친은 너희들이 잘되는 것이 복수 하는 것이다. 딴생각은 말아라"라고 늘 말했다 한다. 그는 유병대 선생 아들 이름만은 절대 밝히지 말아달라고 내게 당부하였다. 가해자의 아들도 희생자의 아들도 윗대의 업고를 이어받아 서로 다른 아픔과 은폐된 기억을 안고 산 것이다. 남선생 장남이 굳이 남쪽 바다 끝의 호주 땅으로 이민을 간 것도 소년기의 악몽과 그 여진 에서 벗어나려는 심층적 충동 때 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전쟁의 상흔이란 지극한 상투어로 일괄 처리하는 그 시대 불행의 세목은 이렇게 모질고 한 없이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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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6

기억으로 복원한 6·25전쟁의 상흔…유종호 '회상기' | 연합뉴스

기억으로 복원한 6·25전쟁의 상흔…유종호 '회상기' | 연합뉴스

기억으로 복원한 6·25전쟁의 상흔…유종호 '회상기'

송고시간2016-05-04 


'망각에 대한 기억의 투쟁' 세번째 책

(서울=연합뉴스) 김보경 기자 = "삶과 역사의 비극적 인식을 통해서 후속세대에게 희망을 안겨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긍정 없는 부정 일변도의 사고에서 창조적인 삶과 사회는 구상될 수 없을 것이다." ('책머리에')

문학평론가 유종호 전 연세대 특임교수가 에세이 '회상기-나의 1950년'(현대문학)을 펴냈다.

'회상기-나의 1950년'은 유 전 교수가 '나의 해방 전후'와 '그 겨울 그리고 가을-나의 1951년'에 이어 펴낸 '망각에 대한 기억의 투쟁' 세 번째 책이다. 책은 작년 1년 동안 월간 '현대문학'에 연재된 글들을 모았다.
그는 1950년 전쟁발발 당시 뒤숭숭한 분위기와 공포에 떠는 사람들의 모습을 가감 없이 그린다
. 당

유 전 교수가 살았던 충북 충주읍 용산리에 전쟁의 소식이 전해진 것은 전쟁 발발 다음 날인 6월 26일이었다.

큰 동요 없이 일상을 이어나가던 마을은 1주일이 지나서야 급박한 전황을 전해듣고 한두 가정씩 피난길에 오른다. 그의 가족들도 먼 인척뻘이 사는 욕각골로 피난하고, 거기서 가족들은 불안하고 불편한 일상과 마주치게 된다.

용산리집과 욕각골을 오가던 유 전 교수는 제트기 공습과 인민군, 시체 등 생각지 못한 공포를 계속해서 마주한다.

그는 눈병을 치료받지 못해 실명의 공포에 시달리고, 겨울을 나려고 나뭇집을 져 나르다 산 주인에 호되게 당하기도 한다. 또 의용군에 자원한 친구와 선배, 학생에게 죽임을 당한 교사 등을 묘사하며 전쟁이 남긴 상처들을 꼼꼼하게 훑는다.

유 전 교수가 아버지에 대해 느끼는 복잡미묘한 감정도 책에서 놓쳐서는 안 될 부분이다.

교사로 일하던 아버지가 전란의 상황에서 상상하지도 못했던 수모를 당하고, 이를 지켜보던 그도 알 수 없는 비애감을 느낀다. "전쟁의 상흔이 규격화된 상투어로 일괄 처리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는 그의 목적의식은 자신의 가족이 감내해야 했던 상처로부터 비롯된다.

그는 "내가 겪은 일은 수많은 개인 경험의 하나일 뿐이다"라며 "하지만 이를 사실에 맞게 적음으로써 시대를 상상하는데 조그만 기여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어 "경험자의 생생한 증언은 많으면 많을수록 역사적 진실의 참모습이 온전히 드러나리라 믿는다"고 했다.



vivid@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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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종호 교수의 1950년대 ‘기억 투쟁’
기자석진희
수정 2019-10-20 17:20
등록 2016-05-05 20:31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742722.html


회상기
유종호 지음/현대문학·1만5000원

역사가 ‘절판된 책들의 도서관’이라고 생각하면 훨씬 재밌다. 괜히 더 애틋하고. 원로 문학평론가 유종호(81) 전 연세대 교수가 1950년의 기억을 써냈다. 1940~49년 기록인 <나의 해방 전후>, 51년 기록인 <그 겨울 그리고 가을>에 이은 세 번째 ‘역사물’이다.

지은이가 15살이던 해 여름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한국전쟁이 난 바로 그때다. “전쟁의 상흔이란 규격화된 상투어로 일괄 처리되는 개개 인간의 불행과 고뇌가 얼마나 모질고 다양한 것인가를 재확인”시키는 게 이 책의 보람이라고 지은이는 쓴다. 매 시대, 곧 현재는 ‘기억’으로 과거를 갱신한다. 그리고 기억의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형태는 문학이다. 지은이는 문학가로서 과거를 진술해 망각을 깨운다. 현재와, 현재의 연장이자 분신인 미래를 위한 작업이다. “삶과 역사의 비극적 인식을 통해 후속 세대에게 희망을 안겨주”고 싶은 노학자의 뜻을 짐작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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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때는 성인뿐 아니라 학생용 자술서도 있었다. 상급반 우익 학생들은 다른 학생들을 모아놓고 자신이 최근 3개월 동안 한 일을 몽땅 적어 내도록 했다. 
  • 서울 수복 이전 좌파 조직에 가담하거나 야간시위에 참석한 학생을 “가두어두고 심문하고 구타”하는 ‘국민학교 지하실’의 존재는 공공연했다. 
  • 좌익 학생을 지도하는 교사들이 우익 학생에게 피살되기도 했다.

어머니는 식구들에게 새 밥을 주고 “쉰 꽁보리밥을 냉수로 씻어 드”셨다. 
교사였던 아버지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부역을 했다. 
서울 수복 뒤 부친은 “관대한 처분을 비”는 자수서를 여러 번 썼다.
 “그까짓 석 달을 못 참아 부역을 한단 말이오?” 
부친을 비난하는 한 어른에게 어린 유종호는 속으로 “격하게 항변”했다.
 ‘석 달일지 30년이 될지 어떻게 압니까?’ 
당시 부친을 비난한 목소리는, 서울로 돌아온 이들이 서울에 남아 있던 사람들에게 가진 대체적 감정과 다르지 않았다. 이승만 정부에서 유통된, 부역자를 대하는 공식 태도가 이런 방식이었음을 지은이는 에둘러 보여준다.

석진희 기자 ninano@hani.co.kr

유종호 “친일행위 규정은 시대 상황 이해해야”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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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종호 원로 교수의 쓴소리 “친일행위 규정은 시대 상황 이해해야”

Vol.528 | Posted on December 2, 2005 
by secureadmin in 정치



▲ 유종호 연세대학 특임교수.

한국의 원로문학평론가인 원로 문학평론가인 유종호(71·사진) 연세대 특임교수가 지난달21일 발간된 문예지에 현 정권의 ‘친일청산’ 운동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서 화제를 모으고 있다. 그는 일제 식민지 40여년 동안 온전하게 항일운동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면서 “일제 부역자들에게 남겨진 죽음, 망명, 부역의 선택지 중 죽음과 망명을 택하는 지사들도 있지만 그런 선택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는 “친일”이란 의미를 ‘일본 정부에 협조하면서 우리민족에게 분명한 해를 끼친 것’으로 보아야 한다면서 예를 들어 친일파로 낙인 찍힌 서정주의 “친일 문서가 아무런 울림이나 영향력을 갖지 못했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며, 그의 유명한 시집 ’화사집’도 “단 백 부를 찍었을 뿐”인 상황에서 “그의 (친일적인) 글을 읽고 군인이나 군속으로 지원해 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유 교수의 글이 발표되자 많은 네티즌들도 이에 동의하고 나섰다. 한 네티즌은 “가슴에 와 닿는 말씀이군요. 삶을 위한 일시적 친일은 그렇게 혹독하게 몰아 부치는 사람들 지금의 친공 친북은 권력(현 기득권층)을 잃은 후의 변명거리는 준비 해놨겠지. 가소로운 사람들 남의 눈에 티는 어찌 그리 잘 찾아 내면서 자기들 눈의 들보는 왜 모르는지 남을 탓하기 전에 너희들 몸이나 좀 깨끗이 하거라. 교수님 종종 자기과오를 모르는 인간들에게 회초리 좀 드세요”라는 글을 올렸다. 

한편 또 다른 네티즌은 “그렇게 사정 다 봐줘서는 국가의 기강이 바로 서지 않는다…유종호 교수 자신이 흠집이 많아서 합리화 시킬려고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찌 친일 시를 만들고 이땅의 젊은이를 선동하여 전쟁터로 몰아낸 자들을 옹호하려는지”라면서 반대의견을 나타내기도 했다.

<편집자 주>


원로 문학평론가인 유종호 특임교수가 문예지 ‘문학과 사회’ 겨울 호에 기고한 ‘안개 속의 길-친일 문제에 대한 소견’을 통해 ‘친일청산’에 대해 뼈아픈 비판을 가하고 나섰다. 유 교수의 글은 조선일보, 동아일보, 연합뉴스 등을 포함 많은 언론들이 중요기사로 다루었다. 동아일보는 “생존 몸부림에 친일낙인 정당한가?”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그는 “최근 친일인사 명단을 작성한다는 움직임을 보면서 문득 과거의 유병진 판사를 떠올렸다”고 했다. 유 판사는 1958년 당시 진보당 강령이 국시에 위반된다며 검찰이 사형을 구형한 사건에 대해 1심에서 진보당원 대부분에게 무죄를 선고해 ‘용공 판사’로 몰렸던 인물이었다. 유 교수는 예전에 유 판사가 쓴 ‘재판관의 고민’이란 책을 인용했다. 책에는 유 판사가 6·25전쟁 중의 부역자들을 재판하면서 느낀 고뇌가 담겨 있다.

“많은 이가 서울을 사수할 테니 안심하라는 정부의 말을 믿고 남았다가 살기 위해 부역했다. 이런 시민들한테 죽음이나 망명을 택하지 않았다고 사형이나 무기 같은 중형을 선고하는 게 과연 바른 것인가?” 유 판사는 인민군의 위협에 마지못해 심부름을 해 줬다가 부역자로 끌려온 열 네 살 소년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유 교수는 “일제 말기 국민총동원 체제의 숨 막히는 분위기를 유년기에 겪어 본 마지막 세대로서 최근의 친일 논쟁에 대해 소회를 밝히는 게 의무라고 생각했다”며 “그 시절은 일본에선 전멸해도 포로가 되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오고, 조선의 아이들은 학교 대신 군용 송탄을 채취하러 다니던 ‘광풍의 시기’였다”고 적었다.

유 교수는 친일문제 연구가 임종국 씨가 펴낸 ‘친일문학론’에 대해 ‘노작’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여기에 거론된 작품은 대부분 ‘국민총동원’ 시기에 나온 것이다. 당시 살았던 거의 모든 문인이 친일문학 명단에 올라 있다. 시국에 끌려 다니며 글 몇 편을 내놓아 친일문인으로 낙인 찍힌 경우도 허다하다”고 주장했다.

유 교수는 “가령 시인 김상용의 경우 꽃집으로 호구지책을 삼다가 일제 말기에 ‘영혼의 정화’ 등 3편의 글을 쓴 것을 놓고 친일 명단에 올리는 게 공정한 일인가”라고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특히 “식량 공출과 징용에 열을 올린 관리들의 친일이 무거운 것은 자명하지만, 거기에 비하면 문학이라고 할 수도 없는 허드레 저급 선전 문건을 쓴 문인들을 중죄인 취급하는 것은 형평성 없는 가혹한 저울질”이라고 말했다.

연합뉴스는 유 교수의 글에서 친일행위를 따지는 작업과 병행해, 혹은 그에 앞서 친일 행위자를 대량 생산한 원천적인 사회적 조건을 성찰하는 일도 중요하다고 한 지적을 꼽았다. 여기서 유 교수는 조선을 붕괴시키고 결국 일제의 강제 병합으로 몰고 간 원인들을 주시할 것을 주문한다.

그는 “고종이나 순종 같은 암주(어리석은 임금)와 부패한 그 수하자들에게 순종할 수밖에 없었던 주민들은 신참 외래 점령군들과 식민주의자들에게도 똑같이 복종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친일행위 이전에 그런 친일행위를 양산한 원인과 그 원인 제공자들에 대한 일종의 ’심판’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 한일병합과 함께 자결하는 바람에 충정공이 된 민영환이 녹두장군 전봉준이 중앙 탐관오리의 대표자로 거론한 3명 중 한 명이며, 
  • 독립운동가로 꼽히는 조명희는 그 자신은 소련으로 망명했으며, 조선에 남겨진 가족들에게는 천추의 한을 안겨다 준 사실을 꼽았다.

유 교수는 나아가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일제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상황에 대한 이해 없이 현재의 잣대로 비방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지적이다. 
이에 따라 친일인명사전 편찬과 같은 지금의 친일행위 청산 운동에 대해서도 시종 비판적인 논조를 유지했다.

특히 문학계의 친일청산 운동과 관련, ’친일문학론’을 저술하는가 하면, ’친일작품집’을 편찬한 고 임종국 씨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했다. 
그는 임종국 씨가 “그나마 두 개의 민족지(조선, 동아일보)와 해방 전 우리 문학지의 최고 수준을 보여준 ’문장’ ’인문평론’이 폐간된 것은 역설적이지만 (임종국 씨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하면서 “그러지 않았던들 ’친일문학론’ 저자의 노력은 한결 고단했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나아가 친일문학가의 대표주자처럼 거론되는 시인 서정주와 관련해서는 “(친일) 잡문 몇 편을 썼다는 것 때문에 (문인들을) 중죄인 취급을 받게 하는 것은 형평성 없는 가혹한 저울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전제하면서 서정주의 “친일 문서가 아무런 울림이나 영향력을 갖지 못했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며, 그의 유명한 시집 ’화사집’도 “단 백 부를 찍었을 뿐”인 상황에서 “그의 (친일적인) 글을 읽고 군인이나 군속으로 지원해 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 교수는 자신과 비슷하게 암울한 일제말 식민지시대를 경험했음에도, 지금에 와서 친일파 청산운동을 벌이는데 사람들에 대해서는 “산전수전 다 겪은 흠집 많은 늙은 혼백들”이라고 혹독한 비판을 가했다. “삶 경험이 얕은 젊은이들이 친일파 규탄에 열을 올리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흠집 많은 늙은 혼백들이 그러는 것을 보면 솔직히 인간에 대해 절망을 느낀다”고 말한 문학평론가 유종호 교수(연세대)가 ’친일청산’ 운동에 대해 매카시즘을 비판하기 위한 ‘逆 매카시즘’이라는 것이다.

이 같은 유 교수의 글에 대해 ‘이용재’라는 네티즌은 “35년으로 길어진 이유를 생각해 보라 이 멍청아. 너희들의 굴종과 부역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 너희들 북한주민에 대해선 뭐라고 하나. 이미 몇 년인데 아직까지 그러고들 있나?”이라고 글을 올렸다.

 ‘박상배’는 “참 좋은 지적이다. OO 같은 지적에 광분하는 무리들보다 훨씬 설득력 있고 알맞은 지적 같다.일제 36년은 한일합방 전후를 합치면 40여년의 세월이다.독립투쟁과 민족을 위한 희생과 헌신을 한 분들이야 우리후세가 길이길이 추앙해야 할 것이지만 자기 일신을 위해 적극적으로 친일을 한 모리배 같은 노~옴들과 그시기에 어느 직위에 있었기 때문에 친일로 질타하는 것은 구별해야 할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또 그는 “혹자들은 독일 괴뢰 정권인 프랑스의 비시 정권 하의 부역자들에 대한 프랑스의 엄격한 심판을 거론하면서 일제 때의 친일인사에 대한 심판을 이야기 하지만 비시정권은 4년 정도 유지되었지만 일제강점기간은 그 시대의 평균수명을 볼 때 40여년은 2세대에 해당하는 기간이다 이 기간동안 막일이나 농사를 짓거나 독립운동을 하지 않고 이 나라에 살았다면 전부 친일파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상봉’이란 네티즌은 “가슴에 와 닿는 말씀이군요. 삶을 위한 일시적 친일은 그렇게 혹독하게 몰아 부치는 사람들 지금의 친공 친북은 권력(현 기득권층)을 잃은 후의 변명거리는 준비 해놨겠지. 가소로운 사람들 남의눈에 티는 어찌그리 잘 찾아 내면서 자기들 눈의 들보는 왜모르는지 남을 탓하기 전에 너희들 몸이나 좀 깨끗이 하거라. 교수님 종종 자기과오를 모르는 인갼들에게 회초리좀 드세요”라고 부탁했다.

한편 ‘한우진’이란 네티즌은 “맞습니다. 그러니 김희선이 같은 인간 말종이 돌연변이처럼 기어 나오는 것 아닙니까… 곧 죽어도 독립군 후손이랍니다. 일제 압박의 40여년 가까이 그 영향을 안 받았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그나마 진정으로 나라를 걱정하고 위하는 분들이 계셨기에 광복이 이뤄졌겠지요… 이 드런 넘들은 왜 과거에 연연하며 목을 걸고 발광을 하는지 제 정신이 박힌 자들이라면 결코 용납이 안 된다”고 지적했다.

@SundayJournalUSA (www.sundayjournalus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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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종호]‘괴짜’ 많아져야 세상은 풍성해진다 2011

[문화칼럼/유종호]‘괴짜’ 많아져야 세상은 풍성해진다 : 동아사이언스

[문화칼럼/유종호]‘괴짜’ 많아져야 세상은 풍성해진다
2011.01.01
[동아일보]

연하장을 주고받는 시점에 매스컴이 벌이는 공통의 의식(儀式)이 있다. 한 해 동안의 큰 사건을 선정 보도하고 화제를 모은 인물과 세상을 뜬 인물을 돌아본다. 그러는 한편 분야별 전문가의 예측을 보도한다. 한동안 점성술사의 발언까지 보도하더니 요새는 뜸해졌다. 이러한 공적 성격의 행사와 거리가 먼 사사로운 행사를 구상해 본다면 어떻게 될까? 

나의 문화적 대사건은 우선 노벨상과 관련된다. 톨스토이도 릴케도 조이스도 쿤데라도 못 탄 문학상을 크게 평가하지 않는다. 그러나 노벨상이 우리를 보는 타자 시각의 한 지표이며 국력의 반영이란 점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런 맥락에서 이번에도 선전해서 모두 17명의 수상자를 낸 일본의 기록은 큰 사건이다. 정치색이 없는 편인 과학 분야에서 많은 수상자가 배출되었으니 착잡한 심정이다. 옛날처럼 ‘대국’ 행세를 하려 드는 중국과 특히 과학과 기술 분야에서 한참 앞서가는 일본 사이에 끼어 있는 우리 처지가 걱정스럽다. 경제적 도약 이후 우리가 모든 분야에서 많은 성취를 이루고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17명의 기록은 우리의 국력을 가리키며 냉혹한 자기성찰을 요구한다. 아시아 올림픽 2위는 물론 대견하고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거기에 머물러 희희낙락할 처지가 아니다. 휴전 이후 상황 여전히 가혹하지만 우리의 상황은 가혹하다. 휴전 이후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발탄 밑에서 살고 있다는 심정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제 불발탄이 아니라 ‘국산’ 핵폭탄 밑에서 살게 되었다. 이 나이에 새삼 무섬을 타는 것은 결코 아니다. 자라나는 어린 세대들이 걱정스럽다는 얘기다. 17명을 배출한 나라의 어린 세대보다 한결 열악한 상황에 있지 않은가. 

문단에서는 요즘 인터넷 소설이 큰 화제다. 많은 작가들이 참여하여 장편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많은 독자를 갖게 되고 수입도 괜찮다니 뭐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미디어는 메시지가 아닌가. 냉골에서 냉수 마시며 머리띠를 두른다고 좋은 문학이 나올 리 없다. 돈이면 귀신도 부린다는 말이 있다. 천금(千金)이면 죽지 않고 백금(百金)이면 감옥살이 않는다는 말도 있다. 모두 자본주의가 대두하기 이전에 생긴 말이다. 작가도 먹고살아야 한다. 코페르니쿠스는 본래 점성술사였다. 그러나 천문 관측 과정에 지동설을 알게 되었고 그 바람에 천문학자가 되었다. 케플러는 유능한 천문학자였으나 점성술사가 되었다. 점성술사가 위세도 있고 수입도 좋았기 때문이다. 인터넷 연재는 결과적으로 케플러의 길을 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맥락에서는 젊은 세대에 애독자가 많은 무라카미 하루키도 마찬가지다. 천문학자임을 포기하고 점성술사가 되어 돈방석에 앉아 박수갈채를 받고 있다. 

2010년에 세상을 뜬 인물을 선정한다면 우선 6월에 일본에서 작고한 손창섭을 꼽겠다. 고속발전을 이룩한 사회일수록 건망증이 심하다. 1950년대 암울한 시대의 사회사를 담은 수작으로 많은 애독자를 모았던 그는 부인의 나라 일본으로 이주했다. 기독교 계통 이단적 종파의 열렬한 신자가 되어 거리에서 전단을 나누어 주고 또 이따금 한국대사관 건물에 나타나 계단에서 통곡하기도 했다 한다. 그는 괴팍한 작가로 소문나 있었다. 누구에게도 주소를 알리지 않고 각별히 친한 이도 없었다. 그러나 냉소적인 작품 경향에도 불구하고 문학을 대하는 태도만은 엄격했다. 그의 원고는 단 한 자의 오자도 없고 고친 흔적도 없이 정서되어 있었다. 글씨는 달필이면서도 단정했고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았다. 기행과 우국행동을 연출하여 광고효과를 내고 시장에서 실적을 올리는 것 같은 자가선전과 담을 쌓고 주변인으로 살다 갔다. 그 점에서 그는 예스러운 문학 순교자이기도 했다. 

또 한 사람은 친구 귀띔으로 최근 알게 돼 찾아 읽으려는 고무로 나오키(小室直樹)라는 일인이다. 소련이 경제 시스템의 결함으로 붕괴한다는 취지의 ‘소비에트 제국의 붕괴’란 책을 1980년도에 내서 알려지게 되었다. 학부 때 수학을, 미국에서 폴 새뮤얼슨 밑에서 경제학을 공부했고 귀국한 후 정치학 사회학 인류학 등 사회과학을 통합하는 거대이론 구성을 목표로 삼았다. TV나 전화도 없는 하숙에서 고정 수입 없이 연구에 전념하다 갔다는 것이다. 관행에 얽매여서는 발전 없어 에릭 홉스봄은 소련 붕괴를 예측하지 못한 점에 역사가로서의 자괴감을 표시했다. 20세기 말에 사회주의로 남아있을 나라는 중국뿐이라고 말한 저널리스트가 유일하게 선견지명을 보였다는 것이다. 사르트르를 비롯해 주도적 서구 지식인들이 중국 공산당 자체가 부정하게 되는 문화대혁명을 찬양해서 청년들을 오도한 비극적 사실을 감안할 때 고무로 같은 이는 주목받아 마땅하다.

손창섭, 고무로 같은 괴짜 작가나 학자가 많이 나와야 문학도 학문도 깊어질 것이다. 연구자들을 소규모 논문 작성에 매어두는 관행을 철폐하고 획기적인 대책을 세우지 않는 한 노벨 과학상 수상의 가망은 없다. 

유종호 문학평론가·전 연세대 특임교수

유종호 평론집 서정적 진실을 찾아서 | 2001

문학평론가 유종호 교수 평론집 서정적 진실을 찾아서 | 한국경제

문학평론가 유종호 교수 평론집 '서정적 진실을 찾아서'

입력2001.03.20

서정적 진실을 찾아서=문학평론가 유종호 연세대 교수의 평론집.

시 비평은 개별 작품에 대한 철저한 이해에서 출발한다는 시각에 입각해 쓴 글들을 묶었다.


  • 1부에선 신동엽 신경림 서정주 등 시인과 시를 살펴봤으며 
  • 2부에선 문학과 인문학에 대한 반론적 모색을 시도했다.

  • 3부에는 김우창 고려대교수,밀란 쿤데라 등에 대한 경의를 표현한 글들을,
  • 4부에는 현대비평의 문제점에 대한 담론을 각각 담았다.

유 교수는 50년대 평론가로 등단,현역으로 활동 중이다.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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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5년만에 평론집 낸 유종호 교수
업데이트 2009-09-21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010327/7668315/1
 
◇"서정적 진실 없으면 죽은 詩"

“한국 시(詩)에서 가장 시급한 과제는 ‘서정적 진실’의 회복입니다.”

문학평론가인 유종호 연세대 석좌교수(65)가 5년만에 평론집 ‘서정적 진실을 찾아서’(민음사)를 펴냈다. 이 책에서 그는 시 창작과 비평에서 사라지고 있는 ‘서정성’을 화두로 내세웠다. 시의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그의 문제의식은 책이 아니라 강의실에서 싹튼 것이다.

“우리 현대시에 대한 학생들의 발표내용이 너무나 엉뚱한 경우가 많았어요. 이를 추궁해보면 어느 대학의 아무개 교수, 또 누구 누구 교수의 글을 참고했다는 것이죠. 그런 비평을 찾아보면 터무니없는 논리가 전개돼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유씨는 이 책에서 자기 모방, 대량 생산, 형식 홀대를 ‘한국시의 세 공적(公敵)’으로 규정했다. 이 책에 실린 ‘캐주얼의 시학’이라는 글에는 그가 구체적으로 지적한 한국시의 문제점이 담겨 있다.

‘시와 문학의 위엄을 훼손시키는 졸속적 양산주의, 상업주의,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시를 더욱 알 수 없는 소리로 만드는 것이 소임인 해설주의’가 그것이다.

한국시 내외부의 잘못된 행태 때문에 학생들은 좋아하는 시를 대라고 하면 교과서에 나온 시인 밖에 모르고, 심지어 시와 대중가요 가사도 구분할 줄 모르는 데에 이르렀다고 우려했다.

그는 “시에 대한 기초적 이해가 되어있지 않은 채 추상적 논의를 펴는 경향에 대한 반성이 팔요하다”고 이 책에서 말했다. 그는 “중요한 것은 시에 대한 경의와 이에 바탕한 견고한 해석과 이해”라고 말했다.

<윤정훈기자>diga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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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적 진실을 찾아서
유종호 (지은이) 민음사 2001-03-12
452쪽

책소개
1995년에 출간된 <문학의 즐거움> 이후에 발표된 글들을 모았다. 유교수는 1950년대 말부터 반세기가 넘도록 한국 현대문학의 현장을 올곧게 지켜온 평론의 대가로 평가받는다. 한국 문학의 현실에 뿌리를 내린 그의 명쾌하고 날카로운 비평은 그동안 우리 문학의 굳건한 버팀목이 되어왔다.

이번 평론집은 지금까지의 문학론을 아우르면서 현재의 왜곡된 문학 교육에 대한 처방까지 함께 제시하였다. 인문학의 위기가 만연한 오늘날 문학평론가로서 한국 문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유교수의 따끔한 일갈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유교수는 기본적인 작품 이해조차 되지 않는 비평문학의 바보 같은 형태를 꼬집는다. 책제목을 '서정적 진실을 찾아서'라고 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서정적 진실' 찾기는 시 자체의 가치와는 관련 없는 문학 외적 논평과는 달리 오로지 텍스트를 빠트림 없이 향수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즉, 언어 조직의 세목을 하나하나 음미하면서 우리말의 서정적 아름다움과 진정성을 느낀 그대로 쓰는 것이다.

제1부는 시 비평에 대한 반성적 검토를 비롯하여 시와 시인을 다뤘다. 제2부는 문학 혹은 인문학의 위기론에 대한 생각을, 제3부는 본 대로 느낀 대로 자유롭게 펼쳐본 소견을, 제4부는 현대 한국문학을 회고하며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주제논문을 엮었다.



목차


1.
서정적 진실의 실종 - 시 비평과 연구와 교육에 부쳐
비평과 연구에 대한 반성 - 시 비평을 중심으로
캐주얼의 시학
의미론적 정의를 위하여 - 엄밀성과 상투성
자기 모방·대량생산·형식홀대 - 시의 세 공적(公敵)
뒤돌아보는 예언자 - 다시 읽는 신동엽
서경 혹은 서정적 풍물 - 신경림 시와 연속성
서라벌과 질마재 사이 - 다시 읽는 미당 시
2.
20세기의 막바지에서 - 회고와 전망
서양의 인문학 - 시초에 대한 고찰
인문학적 노력을 위하여
고전의 매혹
정전의 이모저모
왕도는 없다 - 문학교육에 관한 소견
3.
어느 심미적 이성의 초상 - 김우창 소묘
생각하는 보헤미아인 - 쿤데라를 통한 쿤데라
우화의 세계 - 이솝 우화를 중심으로
세기말의 감상(感傷) 여행
4.
한국의 현대비평
문학사와 가치평가
접기



책속에서

캐주얼의 시학훌륭한 문체란 '제자리에 놓인 적절한 말'이라고 영어 산문의 대가 스위프트는 정의하였다. '최상의 어순 속에 놓인 최상의 말'이란 것은 시인 코울리지의 시의 정의이다. 사실 고전적 성취에 이른 시와 문체는 대체로 이와 같은 정의 안에 포괄된다고 보아 크게 틀리지 않는다.

다만 적절함이나 최상의 강도가 성취의 높낮이에 따라 차이를 보여주는 것일 터이다. 제자리에 놓인 적절한 말은 다른 말로 대체될 수 없는 말이라는 것과 같은 뜻이 된다. 제자리에 놓인 적절한 말을 확인하고 그 대체 물가능성이 빚어내는 팽팽한 긴장을 음미하는 것은 사실 시 읽기가 제공하는 가장 큰 즐거움의 하나다. 외국시를 원어로 읽으면서 갖게 되는 자신감의 결여나 망설임은 이 대체 불가능성의 인지와 확인이 미심쩍고 능력 밖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쨌건 소리와 뜻 사이의 긴장과 조화를 살피면서 제자리에 놓인 적절한 말을 인지하고 그 적정성에 탄복하는 것은 곧 그 시를 이해하는 것이 되고 그러한 한에서 즐기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즐기지 않고 이해할 수 없으며 이해하지 않고 즐길 수가 없다는 지나간 연대의 시인의 말은 순환어법이 수사학이 아니라 향수 과정의 생생한 증언이어서 형식주의라고 논파될 성질이 아니다.
(71-72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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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지은이: 유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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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사라지는 말들>,<작은 것이 아름답다>,<그 이름 안티고네> … 총 70종 (모두보기)
영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 서울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뉴욕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수학했다. 공주사범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가르쳤고, 연세대학교 국문학과에서 석좌교수로 퇴임하면서 교직 생활을 마감했다. 저서로 『유종호 전집』(5권), 『시란 무엇인가』, 『문학이란 무엇인가』, 『서정적 진실을 찾아서』, 『한국근대시사』, 『나의 해방 전후』, 『그 겨울 그리고 가을』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 아이리스 머독의 『그물을 헤치고』, 윌리엄 워즈워스의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 등이 있다.
네이버 ‘문화의 안과 밖’에서 펼친 명강의들은 『고전 강연』, 『예술과 삶에 대한 물음』 등으로 출간되었다. 현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며, 현대문학상, 대산문학상, 인촌상, 대한민국예술원상, 만해학술대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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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페이퍼 (1편)


로쟈 2005-11-07메뉴

제목은 문학비평가 유종호 선생(1935- )의 최근 산문집에서 가져왔다. <내 마음의 망명지>(문학동네, 2004). 얼마전 구내서점에서 우연히 눈에 띈 책을 도서관에서 대출해 읽고 있다. 몇몇비평가들의 산문집을 한때 즐겨 읽었던 듯하다. 책을 읽으며 문득 그런 감각이 되살아옴을 느낀다.일간지 지면에 실린 칼럼 등을 모은 이런 책들은 자투리 시간에 읽기에 가장 적합한데(1부에 실린 글 여러 편을 나는 한 일간지에서 이미 읽었었다),길지 않은 글들에 박혀 있는 적절한 사유들을 해바라기씨 파내먹듯이 따라가보는 재미가 있다.이른바 맛은 좋지만 칼로리는 낮은 책, 그래서군것질로는 아주 유익한.

해서 현재로선 책을 2/3쯤 읽었는데, 이미 연이어 읽을 책들의 목록도 정해두었다. 역시나 '문체의 옹호'란 글에서 저자가 은근히 추천하고 있는 책들이다. 정명환 선생의 <이성의 언어를 위하여>(현대문학, 2003)와 곽광수 선생의 <가난과 사랑의 상실을 찾아서>(작가, 2002)가 그것들이다. 나는 거기에 이 참에 읽어볼 요량으로 이미 갖고 있는 책 두 권, 유종호,<서정적 진실을 찾아서>(민음사, 2001)와 정명환, <문학을 생각하다>(문학과지성사, 2003)를 더 얹었다. 이 가을이 뒤늦게 풍족해진다.

책을 읽으며 새삼 깨달은 거지만 나는 유종호 선생의 책들을 꽤나 많이 읽었다. 더러 꼼꼼하게 공들여 읽지는 않았어도 대부분의 책들이 낯설지 않은 것. 가령, 저자가 '책머리에'에서 "이번 산문집은 십오 년만에 내는 것이다."라고 했을 때, 나는 이 책이 에세이집 <함부로 쏜 화살>(문이당, 1989)에 이어지는 것이란 걸 대번에 눈치챌 수 있다. 그 책을 (이제는 십육 년전) 내가 자주 드나들던 지방도시의 한 서점에서 구해 읽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서문에정지용의 시에서 따온 제목에 대해자세히 언급했다는 기억도. 문학평론가로서 내가 가장 즐겨읽은 이들은 김현, 김윤식 선생이었지만 알게 모르게 읽은 평론가도 따로 있었던 것. 이번산문집을 읽으며 그 이유도대충 챙겨볼 수 있었다.

지금은 과거지사가 됐지만 70-80년대 한국문학 평단을 주름잡던 이들로 주로 '문지'와 '창비' 계열의 평론가들을 꼽는다. 전자의 4인방이 김현, 김주연, 김병익, 김치수이고 그리고 후자의 양 거두가 백낙청, 염무웅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제3의 길을 내던 이들이 '세계의 문학' 편집위원을 오래 역임한 김우창, 유종호이다.이들은 자신들이 각각 몸담고 있던 잡지/출판사(=물적 토대)를 근거로 하여한국문학의 지형도를 주도적으로그려냈었다. 물론 각 진영의 문학적 입장/태도에는얼마간의 차이가있었는데, 그것을(가장확실하게!) 암시해주는 것은 각각 간판으로 내세운 책들이다.







가령 '창작과 비평'의 얼굴은 아놀드 하우저의 <예술과 문학의 사회사>였으며,내가 얼른 떠올리게 되는 '문학과지성'의 책은 김현의 <한국문학의 위상>, 혹은 김현/김주연 편의 <문학이란 무엇인가> 등이다(80년대에 나온 이론서 <소설과 사회>나 <구조시학>은 생각만큼의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지나치게 서구문학(론) 지향적이란 비판도 들었던 문지의 경우, 확실한 외국 이론가를 거명할 수 없는건 일견 아이러니컬하다. 거기에 대하여 '세계의 문학' 곧 민음사 진영에서내세운 건 아우얼바하의 <미메시스>였다. 이번 산문집에 실린 '내 글이 걸어온 길'에서그 내막을 잠시 엿볼 수 있는데, 삼십대 후반에, 그러니까 1970년대 초반에2년간 미국유학("내 평생의 유일한 학생 생활")을 가게 된 저자가 이때 주로 접하고 읽은 이들이 벤야민, 곰브리치, 아우어르바흐, 피터 버거 등등이었다. 김우창 교수와의 공역으로 <미메시스>가 처음 나온 것이 1979년쯤인바 이 유학경험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음미해볼 만한 것은 아우얼바하(아우어르바흐)의 저작이 2차 대전의 포화를 피해 떠난 '망명지' 터키에서 씌어진 책이라는 점. 저자의 베스트셀러였던 <문학이란 무엇인가>나 <시란 무엇인가>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이지만,사회역사적 상상력을 강조하면서도 문학만의 독자적인질서와 규범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유종호의 태도는 '망명문학적 태도'로 가장 잘 특징지어질 수 있다. 산문집의 제목을정하는 데 일조한글이 '내 정신의 망명처'인바, 거기서 저자가 '망명처'로 지목하고 있는 것은 클래식 음악(아트음악)이다. 특히 저자는베토벤과모차르트를 경배하는데, 한 대목을 인용하면 이렇다: "피아니스트 알프레트 브렌델은 최근에 간행된 대화집에서 조금 별나게 피아노 협주곡 9번을 가리켜 '세계의 경이의 하나'라고 부르고 있다. 21세에 작곡한 이 작품이 모차르트 최초의 걸작이라며 덧붙인 것이다. 그러나 모차르트 자신과 그의 음악 모두가 '세계의 경이'라고 해야 마땅하리라."(116쪽)

그러한 예찬을 배경으로 하여 정의하자면, 망명문학적 태도란문학의 표준을 예컨대 음악에 두는 태도, 예술로서의 문학은 '음악의 상태를 지향하여야 한다'고 믿는 태도이다(예술로서 음악이 갖는특장은 아무런 적극적 지시성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음악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바, 김종삼의 시구를 빌면 '내용 없는 아름다움'이다). 비평가로서 유종호가 가장 음악적인 장르로서의 서정시에 유난히 애정을 보이는 이유는 대략 그러한 태도와 상관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그는 우리시의 가장 '눈 밝은', 아니 가장 '귀 밝은' 독자에 속한다).사실, 그러한 태도는 한편으로 작가/비평가의 사회적 책무가 유난히 강조되어온 우리 현대사와는 궁합이 잘 맞지 않는데, 중학교 시절부터 "소설은 김동리를 좋아하고 평론을 김동석을좋아했던" 자신의 취향을 '자기 분열증적인 버릇'이라고 지적하는 것은그 솔직한 고백이다. 하지만, 저자가 보기에 (좌파 비평가였던 에드먼드 윌슨의 경우를 예로 들어) "그것이 정직한 것(태도)"이다. 해서, <비순수의 선언>(1962)으로 평론가로서 첫발을 떼었지만, <문학의 즐거움>(1995)에 탐닉하기를 한순간도 그치지 않았던 것.

그런 그에게 애로는 없었을까? 우리말에 대한 그의 예민한 감식안과 짝을 이루는 것은 주제넘는 거대담론에 대한 거부감인데,그러한 거부감은 이론이나 학문(과학)에 대한 회의로도 이어진다(특히 그가 미심쩍어하는 것은 문학/예술에 대한 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이다): "고전연구는 별개지만 문학연구가 과연 학문인가 하는 점에 대해 여전히 회의적이다.문체 없는 소설이나 무슨 소리인지 분명치 않은 산문을 읽지 않는다." 그의 현재: "내 삶을 정당화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때로 속이 쓰리기도 하지만 열받게 마련인 난세에 책을 읽고 음악을 들으며 젊은 학생들과 살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고 있다. 늙어가는 징조이다. 모차르트도 상전에게 발길질을 당했다는 고사를 상기하면서 삶이 안겨주는 강제를 견디며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다."(179쪽, 강조는 나의 것)

때로 상전(=권력)에게 발길질을 당하기도 했던 게 천재 모차르트의 운명이었으며, 이 운명은 곧바로 예술로서의 문학이 처한 운명이자 비평가 유종호의 운명이기도 했다. 1980년대를 보내면서 낸 <사회역사적 상상력>(1987)의 머리말에 그가 쓴 대목: "그 어느 때보다도 글쓰기에 곤혹스러운 시기였다.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은 처지에서 민족의 좌절과 인간에 대한 믿음의 흔들림은 계속적인 충격이었다. '캄캄한 밤에도 노래는 있는가? 아무렴, 캄캄한 밤에는 어둠의 노래가 있지 않은가'라고 스스로 번안한 시구로 겨우 노여운 무력감을 달래었다."(177쪽) 그가 간혹 굴욕 속에서도, '노여운 무력감' 속에서도삶의 강제를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문학이란 '망명정부'를 현실의 정치권력과는 다른 자리에 놓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어둠의 노래'의 소속은 '어둠'이 아니라 '노래'이다). 내가 평론가 유종호를 즐겨 읽었던 것은 아무래도 이러한 과정이 그에게서 '투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인 듯하다. 나는 잘난 선인(善人)들보다는 못나고 소심했기에 살아남은자들을 더 신뢰하는 버릇이 있다...

05. 11. 07.

P.S. 유종호 선생과는 30년이 넘는 연배의 차이를 갖고 있지만 나는요즘 작가/비평가들보다 오히려 더 친숙함을 느끼는데, 그건 시대적 환경의 산물이 아니라 비슷한 독서체험의 결과인 듯싶다. 그건 내가 선생만큼 책을 많이 읽어서가 아니라 그가 읽은 책들의 상당수가 러시아문학작품이어서이다. 유명한 번역가 콘스탄스 가넷 여사의 번역으로 영역된<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대학 초년생 때 읽은 걸 계기로 해서, 그는 <안나 카레니나>를 읽었고, 연이어 체호프와 투르게네프의 거의 모든 작품을 영역으로 읽었다(요즘에 누가 그렇게 읽는가?). 황동규 선생도 유사한 고백을 한 걸로 보아 아마도 당시의 '풍습'이었을 법한데(영국작가 그레이엄 그린이나 서머셋 모옴에 대한 독서도 그렇다), 이 산문집은 애당초 투르게네프의 <첫사랑>과 이효석의 <메밀꽃 필무렵>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고, '낭만적 망명자' 게르첸에 대한 이야기도 한 꼭지 포함하고 있다(영어명 'Herzen'을 '게르첸'이라고 러시아식으로 정확하게읽는 이는 많지 않다).

게르첸과 관련한 대목은 사실 전공자들을 부끄럽게 하는데, 그의 자서전이 아직 국내에는 번역/소개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직접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나도 작년에 즐겨 찾았었던) '참새고지'(흔하게 부르기론 '참새언덕')에서저자가 떠올리는 이름이 E. H. 카아의 <낭만적 망명자>를 통해서 알게 된 게르첸. 벨린스키 등과 함께 '아버지 세대'(1840년대 인텔리겐챠)의 거두인 게르첸은 <누구의 죄인가>(열린책들, 1991) 외에도 <과거와 사상>(영역본은 'My past and thought')이라는 걸작 자서전을 남기고 있다:"사상사가인 아이자이어 벌린은 정치적 교리에 매이지 않은 그의 <나의 과거와 사색>을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나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 등과 나란히 설 수 있는 자서전의 걸작이라고 칭송하고있다. 참으로 좋은 책이 읽히지 않는 우리 사회에서 이 책은 물론 번역되지 않았다."(54쪽) 작년에서야 비로소 방대한 분량의 원서를 모스크바에서 구했지만(나는 영역본만 갖고 있었다), 그리고 나로선 번역의 적임자도 아니지만 좀 찔리는 건 어찌할 수 없다.

한편, 게르첸은 73쪽에도 등장하는데, 그때 '지상 최고의 회고록'이라고 지칭되면서 홑따옴표가 아닌 (도서명을 나타내는) 겹낫쇠가 쓰이고 있다. 교정상의 실수일 것이다. 또다른 실수는 144쪽에서 '돈후안'의 원어를 'Don Huan'으로 잘못 병기한 것('Don Juan'이 맞다). 또 "외관과 실상이 다르다는 것을 간단없이 설파하는 폭로의 모티브에 향도되는 교양 체험에 감염된 현대인들은 모든 것을일단 의심과 불신의 눈초리로 바라본다."(142쪽) 같이 수식어구가 너무 장황한 문장은다른 저자들의 글에서라면 흔히 볼 수 있을지 몰라도 간명하면서도 유려한 문장을 구사하는 유종호답지 않은문장이어서 눈길을 끈다.

그의 문장들은 튀거나 화려하지 않기에독자를 전혀 놀라게 하지 않지만(물론 꽤 오래전에 도서관에서 초판을 빌려다 읽은 <비순수의 선언>은 20대 신참 비평가의 문장으로선 너무 정연하여 나를 기죽인 바 있다)제 몫의 쓰임을 충실히 수행한다. 주제넘는(오버하는!) 것들에 대한 혐오는 그에게서 특징적이지만, 저자는 문장에 있어서도 '오버'를 경계한다.그것이 그의 온건한 균형감각을 이룬다.그 균형감각은따로 현실감각이기도 하다. 앞에 인용한 대목에서 "내 삶을 정당화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을 저자는 토로하기도 했는데,작년에 그가 낸 책 <나의 해방 전후>(민음사, 2004)는 그러한 '정당화'의 시도로 여겨진다.



'내삶의 소롯길에서'란 글에서 임화의 시집 <현해탄>을 건네주었던 소년시절의 한 친구를 회상하며 그가 내리는 결론: "인간에게 가장 어려운 일의 하나는 살아보지 않은 시대를 참으로 진실 육박적으로 상상하는 일이 아닌가 하고 나는 요즘 생각하고 있다... 그 점 상상의 나래를 펴서 살아보지 않은 과거를 적는 것은 문자 그대로 창작이요 왜곡이지 재현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 점 우리는 모두 살아온 과거를 될수록 정직하게 기록해둘 의무가 있다고 생각된다. 해방전후를 다룬대부분의 소설이나 실록이 내게는모두 황당한 '창작'으로 여겨진다."(166쪽)<나의 해방전후>가 나오게 된 소이연이겠다. 더불어,(육박적)'진실'은 유종호 비평의 또다른 축이다. 그의 비평은 시(=즐거움)와 진실 사이에 있다.

책에는 난생 처음으로 저자가 경험한 '한가하고 자유로운 방학'(막내딸이 머물고 있던 미국의 엠즈라는 대학촌 체류기)의 부산물로 얻은 시 한편이 소개돼 있는데(127-8쪽), 제목이 '서산이 되고 청노새 되어'이다. 알고 보니, 작년에 나온 시집의 표제시이다. 6연으로 된 시의 5연은 이렇다.시끌시끌 막가는 아침의 나라에서/ 시새워 죽을 쑤는 동강난 산하(山河)에서
터벅터벅 육십 년/ 무슨 반딧불을 보자고/
서산이 되고 청노새 되어 숨가뻐온 것인가

서산이는 서산나귀로서 청노새처럼 사람들의 짐이나 나르는 짐승이라 한다. 그렇다면 '시인'에게 시란 다른 무엇보다도 그런 '서산이'와 '청노새'의 삶을 위로하고 ('알게 뭐냐며')초극하는 '반딧불이'에 다름 아니겠다.그리고 그것의 다른 이름이 '내 마음의 망명지'일 것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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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종호 교수의 1950년대 ‘기억 투쟁’

유종호 교수의 1950년대 ‘기억 투쟁’


문화책과 생각
유종호 교수의 1950년대 ‘기억 투쟁’
기자석진희수정 2019-10-20 



회상기
유종호 지음/현대문학·1만5000원

역사가 ‘절판된 책들의 도서관’이라고 생각하면 훨씬 재밌다. 괜히 더 애틋하고. 원로 문학평론가 유종호(81) 전 연세대 교수가 1950년의 기억을 써냈다. 1940~49년 기록인 <나의 해방 전후>, 51년 기록인 <그 겨울 그리고 가을>에 이은 세 번째 ‘역사물’이다.

지은이가 15살이던 해 여름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한국전쟁이 난 바로 그때다. “전쟁의 상흔이란 규격화된 상투어로 일괄 처리되는 개개 인간의 불행과 고뇌가 얼마나 모질고 다양한 것인가를 재확인”시키는 게 이 책의 보람이라고 지은이는 쓴다. 매 시대, 곧 현재는 ‘기억’으로 과거를 갱신한다. 그리고 기억의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형태는 문학이다. 지은이는 문학가로서 과거를 진술해 망각을 깨운다. 현재와, 현재의 연장이자 분신인 미래를 위한 작업이다. “삶과 역사의 비극적 인식을 통해 후속 세대에게 희망을 안겨주”고 싶은 노학자의 뜻을 짐작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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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성인뿐 아니라 학생용 자술서도 있었다. 상급반 우익 학생들은 다른 학생들을 모아놓고 자신이 최근 3개월 동안 한 일을 몽땅 적어 내도록 했다. 서울 수복 이전 좌파 조직에 가담하거나 야간시위에 참석한 학생을 “가두어두고 심문하고 구타”하는 ‘국민학교 지하실’의 존재는 공공연했다. 좌익 학생을 지도하는 교사들이 우익 학생에게 피살되기도 했다.

어머니는 식구들에게 새 밥을 주고 “쉰 꽁보리밥을 냉수로 씻어 드”셨다. 교사였던 아버지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부역을 했다. 서울 수복 뒤 부친은 “관대한 처분을 비”는 자수서를 여러 번 썼다. “그까짓 석 달을 못 참아 부역을 한단 말이오?” 부친을 비난하는 한 어른에게 어린 유종호는 속으로 “격하게 항변”했다. ‘석 달일지 30년이 될지 어떻게 압니까?’ 당시 부친을 비난한 목소리는, 서울로 돌아온 이들이 서울에 남아 있던 사람들에게 가진 대체적 감정과 다르지 않았다. 이승만 정부에서 유통된, 부역자를 대하는 공식 태도가 이런 방식이었음을 지은이는 에둘러 보여준다.

석진희 기자 ninano@hani.co.kr

유종호 문학평론가 "힘든 시대일수록 서정시 절실히 요구" < 방송 < OBS플러스 < 기사본문 - OBS경인TV

[OBS '명불허전'] 유종호 문학평론가 "힘든 시대일수록 서정시 절실히 요구" < 방송 < OBS플러스 < 기사본문 - OBS경인TV

[OBS '명불허전'] 유종호 문학평론가 "힘든 시대일수록 서정시 절실히 요구"
기자명 조연수
입력 2017.05.11 




[OBS플러스=조연수 기자] 유종호 문학평론가가 사람은 빵만 가지고 살 수 없다는 정신을 심어주는 교육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14일 오후 방송되는 고품격 명사토크쇼 OBS '명불허전'에 유종호 문학평론가가 출연해 그동안 들을 수 없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유종호 문학평론가는 1935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문리대 영문과와 뉴욕주립대(버팔로) 대학원에서 수학했다.

또한 그는 한국문학이 세계 수준에 이르기 위해서는 외국문학에도 관심을 가져야 하고 또 사회와 역사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잡지 편집에 임하며 계간지 세계의문학 편집위원으로 장기간 활동한 경력이 있으며 2006년 연세대 특임교수직에서 퇴임함으로서 교직생활을 마감했고 제 36대 예술원 회장을 역임했다.

1957년 이후 비평 활동을 해왔으며 저서로 '유종호 전집』'전 5권) 이외에 '시란 무엇인가', '서정적 진실을 찾아서', '다시 읽는 한국시인', '나의 해방전후' 등이 있다. '그물을 헤치고', '파리대왕' 등의 번역서가 있고 2004년에 유일 시집 '서산이 되고 청노새 되어'를 냈다. '현대문학상', '대산문학상', '인촌상', '만해학술대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 기억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일본어 교과서로 배우다 광복을 맞고 사춘기인 10대 중후반에 참혹한 6·25전쟁을 겪은 뒤 황폐한 전후에 청춘기를 보낸 유종호 문학평론가는 영어 공부를 하면 번역되지 않은 책들도 읽을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영문학을 전공했고 영문학을 공부하면서 문학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그것을 우리나라 말로 우리 문학에 적용하면서 한국 문학 발전에 기여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공을 들인 것은 바로 기억의 복원이다. 일제강점기 시대와 광복, 그리고 6.25 한국전쟁을 몸소 겪은 그가 대한민국 근현대사 중 가장 아프고 처참했던 역사를 다시 기억해 내 책으로 내게 된 이유는 무엇인지 명불허전에서 밝힌다.

# 대한민국에서 문학인으로 산다는 것

영문학자이면서 한국문학을 편향 없이 공정하게 논평해온 것으로 정평 있는 유종호 교수는 한국문학이 세계 수준에 이르기 위해서는 외국문학에도 관심을 가져야 하고 또 사회와 역사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밝혔다. 또한 문학평론가로 평생 서정시를 탐구한 그는 최근 서정시가 외면 받고 서정시를 쓰기가 힘든 시대일수록 서정시가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시대라고 지적하며 서정시의 필요성을 명불허전에서 밝혔다.

민주화 이후부터 외면받기 시작한 문학의 위기를 언급하며 문학의 위기를 타계할 방법과 문학인으로 한평생을 살아올 수 있었던 원동력을 명불허전에서 공개한다.

한편 유종호 문학평론가의 이야기는 5월 14일 오후 9시 10분 OBS '명불허전'을 통해 방송된다.

(사진=OBS)

문학평론가 유종호의 내가 반복해서 읽은 고전 5 - 2016

[당신의 리스트] 문학평론가 유종호의 내가 반복해서 읽은 고전 5



[당신의 리스트] 문학평론가 유종호의 내가 반복해서 읽은 고전 5
조선일보
입력 2016.06.04.

예술원 회장을 지낸 문학평론가 유종호(81) 선생은 이런 극단적 제안을 한 적이 있다. "모든 필자가 문학 생산을 중단하고 기존 고전을 재음미하자"는 것. 소포클레스부터 카뮈까지, 공자부터 니체까지 너무나 많은 걸작과 수작이 있지만 현대인은 그것을 향유할 시간적 여유조차 없지 않느냐는 것. 스스로는 '겸허한 제안'이라는 꼬리표를 붙이긴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고전 예찬이기도 하다. 물론 신자유주의의 속도와 물량 공세에 허우적대는 현대예술에 대한 반어(反語)이기도 하고. 그에게 가장 많이 읽은 고전 5를 물었다.





유종호 "한국사회 보수와 진보는 어울리지 않는 이름…" 2020

유종호 "한국사회 보수와 진보는 어울리지 않는 이름…현실적 잣대 필요"

유종호 "한국사회 보수와 진보는 어울리지 않는 이름…현실적 잣대 필요"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 기사승인 : 2020-01-05 

[2020 새로운 10년을 말하다] ③문학평론가 유종호

"보수는 박근혜 정부 때 자멸…그때 그 사람들 태도로는 보수 유지할 수 없어"
"보수 진보 프레임 우리 사회에 안맞아...진보라는 쪽, 과연 진보냐 하면 그것도 아냐"

▲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해방공간을 거쳐 산업화, 민주화 시기를 두루 관통해온 원로 인문학자 유종호. 그는 "이즈음 한국사회는 제가 살아온 시대 중 가장 극렬하게 분열돼 있다"면서 "이대로 가다가는 모두 어려워질 것"이라고 걱정했다. [정병혁 기자]


대담=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유종호 교수에 대한 존경심이 당혹감으로 -2002

유종호 교수에 대한 존경심이 당혹감으로 - 오마이뉴스

유종호 교수에 대한 존경심이 당혹감으로
30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절반 개표, 고대비극의 지혜'을 읽고
02.12.30 
임명현(epismelo)


필자는 유종호 교수에 대해 좋은 추억을 갖고 있다.

대학 2학년이던 1998년, 국문과에 개설된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수업을 통해 유종호 교수를 만났다. 문학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던 당시의 필자에게 일생을 문학 연구에 바친 노 교수의 수업은 때때로 어렵다 못해 지루하기까지 하였으나, 당시 그가 직필한 수업교재 '문학이란 무엇인가'가 남긴 인상만큼은 실로 대단했다.

이 책을 읽은 다수의 문학전공자들은 필자의 말에 어느 정도 공감하리라 생각된다. 일반인들에게는 다소 생소할 문학의 존재론과 가치론에 대해, 풍부한 설화와 원형을 들어 친절하게 설명한 그의 저작물은 으레 따분하게 여겨져야 할 중간/기말 시험 준비마저도 즐겁게 만들었을 정도로 훌륭한 것이었다.

이렇게 저작물에 대해 받은 좋은 인상은 저자에게 그대로 투영되었다. 이런 지혜를 가진 사람이라면, 이런 학문적 친절함을 가진 사람이라면 진정 존경할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일 것이다라는 생각이 바로 그것이었다.

4년이 넘는 시간이 흘러, 동아일보에서 '절반 개표, 고대 비극의 지혜'라는 제목이 달린 그 분의 글을 다시 읽게 되었다.

유종호 교수에 대해 좋은 추억과 인상을 가지게 된 동기가 그의 글이었던 만큼, 오랜 시간 후에 만난 그의 글에서 느껴지는 이 황당한 느낌은 실로 필자를 당혹케한다.

유종호 교수는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고대 그리스 비극을 원용한다. 고대 그리스의 디오니소스를 기리는 축제에서 일어난 경연을 심사하는 방법으로 '절반개표'라는 방법을 이용했다는 내용이다.

'10명의 심사원이 경연에 참가한 이들 가운데서 우수작가를 투표하고, 집정관은 10개의 표 가운데 아무렇게나 5개를 골라 우수작가를 선정한다. 이때 나머지 5표난 사표가 된다'는 것이다.

'절반 개표를 통해 우수작가를 선정하는 것은 확실히 우리에게는 낯선 관행'이나, 이것은 <매수>로 드러나는 사전 부정을 방지할 수 있는데다 결과적 측면에서도 우승자로 하여금 자신의 행운에 감사하게 하고 패자들을 과도한 열패감으로부터 자유롭게 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그는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는 '운'이 좋아 승리했던 월드컵 축구 경기로 연결되면서 '패자 앞에서의 동물적 환희는 치사스럽게 느껴진다. 다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라는 말로 끝을 맺는다.

필자가 4년 전 유종호 교수의 글을 높이 평가했던 이유는, 문학에 대해 '문외한'에 가까웠던 이에게도 너무나 명료하고 깔끔하게 '문학의 존재론'이라는 추상적 소재를 전달할 수 있었던 그의 학문적 능력 때문이었다.

지금 이 글은? 수 차례를 읽어봐도 도대체 '왜 이런 글을 썼는지'이해를 못하겠다. 모름지기 신문에 실리는 칼럼은 문학과는 달리 '필자의 의도'를 명확히 드러내며 그것에 근거를 보태 독자를 설득하고 여론을 형성하는 기능에 충실하여야 할텐데, 그의 글은 이러한 기능과 동떨어진 듯이 보이고, 더욱이 이것을 유종호 교수가 모를 리가 없다는 점이 당혹스럽다.

좀 더 솔직하게 풀어 말하자면, '명시적으로는'알지 못하겠지만 비극의 원용 뒤에 숨겨진 의도를 '짐작할 수는' 있겠다는 것이 필자가 느낀 당혹감의 근거이다.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이번 유 교수의 글은 지나간 대선을 연상케 한다. 16대 대선은 57만여표라는 1, 2위간 후보의 표차가 지난 15대 대선에 비해 더 벌어지긴 했지만 선거가 양강 구도로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근소했다고 볼 수 있다.

이회창 후보는 선거 결과에 깨끗이 승복했지만, 그의 일부 지지자들은 대선 개표에 최초로 도입된 전자개표기에 문제가 많았기 때문에 다시 손으로 재검표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한나라당 역시 이러한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고 현재 대법원에 '당선 무효소송'을 제기한 상태이다.

글의 말미의 '다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에서 '다른 분야'란 이 대선을 말함이 아닐까?

유 교수는 '표차가 이렇듯 근소하였기에', 고대 그리스 식으로 유효투표의 절반만 임의적으로 선정해 개표하였다면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렇게 했다면 이길 수도 있었던 패자 앞에서 지나치게 환희하는 모습을 보이는 노 당선자의 주변 세력과 지지자들에게서 꼴불견스러움을 느꼈던 것일까? 보기 역겨우니 좀 자제하라는 말인가?

'오이디푸스왕'을 언급한 부분은 더 가관이다. 그의 비극적 결함은 '모든 것을 다 알아내려는 의지'에서 기인한 것이기에, '절반 개표'는 미지의 부분이 수두룩한 인간사를 함의하고 있기에 합리적이라는데, 그렇다면 지금 대선에서 유효투표 모두를 개표하고 그것을 통해 당선자와 패배자를 가려낸 것이 '오이디푸스식'의 비극을 초래하기라도 한다는 이야기인가? 이긴 쪽과 진 쪽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민주주의식 선거 개표의 원리가 '미지의 인간사'를 제대로 함의하지 못한다는 것인가?

필자의 해석이 너무 나아간 것이라면 유 교수께 사과의 말씀을 드릴 용의도 있다. 학문적으로 존경하는 분이기에 이런 글을 쓰는 것도 조심스럽다. 그러나 모든 글, 그 중에서도 신문에 실리는 글이 발생 시기의 사회적 맥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면, 유 교수의 이번 글은 위와 같은 의도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기에 충분했다. 다시 한 번 묻고 싶다. 도대체 이 칼럼을 왜 쓰신 것인가?

이런 상황 속에서 필자는 신문의 필자 위촉진들이 학계의 명망 있는 원로급 교수들에게는 칼럼을 위촉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까지도 하게 된다. 이런 실망을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첫번째 이유이고, 실망스러움을 표출하지 않을 수 없고 그 표출 과정에서 존경하던 분을 스스로 욕보이게 될 수 있다는 것이 두번째 이유이다.



덧붙이는 글 | 

유종호 - 문학평론가 유종호의 인생 2014

유종호 - 문학평론가 유종호의 인생 : 네이버 블로그

유종호 - 문학평론가 유종호의 인생 화제의인물 / 열린마당

2014. 8. 25. 13:12

https://blog.naver.com/ddmpark4_st/220102861456



문학이 좋아 영문학을 시작했고 글이 쓰고 싶어 평론가의 길을 선택한 문학평론가 유종호. 심도 있는 통찰력을 바탕으로 사회현상을 바라보고 그것을 문학으로 이끌어내는가 하면, 정직한 눈으로 작품을 선별해 치밀한 독해와 분석을 통해 문학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그를 만나보자.


문학평론가 유종호 인터뷰 영상




충청북도 진천 읍내로부터 십 리 정도 떨어진 산골에서 자랐어요. 근처에 중국인들이 경영하는 큰 채소밭이 있긴 했지만 작은 동네였고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은 아니었죠. 철도도 지나가지 않는 지역이었어요. 신기하게도 가끔 기적 소리가 들리곤 했는데, 그럴 때면 어머니께서 “비가 오려는 모양이다.”라고 말씀하셔서 급히 빨랫줄에 널어둔 빨래를 걷었던 기억이 나요. 기적 소리가 들리는데 왜 빨래를 걷냐고요? 정지용의 <무서운 시계>라는 시에 '산모루 돌아가는 차, 목이 쉬여 이 밤사 말고 비가 오시랴나?'라는 시구(詩句)가 있는데, ‘산모루 돌아가는 차’는 기차를 의미하고 ‘목이 쉬여’는 평소에 들리지 않던 것이 들린다는 것을 의미하거든요. 그래서 어머니가 그렇게 기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면 비가 오려나 보다 말씀하신 거였어요. 어릴 적부터 어머니께서는 저에게 그런 식으로 문학 이야기를 해 주셨죠. 아마도 제 안에 있는 문학적 소양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 같아요. 사실 <무서운 시계>는 어려운 시인데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려운 시를 읽으면서도 전혀 어렵지 않았어요.

일제 말기에는 제가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지금 학생들이나 혹은 젊은 사람들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그런 시대였어요. 아주 어려운 시기였기 때문에 쌀밥은커녕 설탕이나 엿 같은 것도 구경할 수가 없었어요. 저희 세대 사람들은 대개 어릴 적에 충치를 앓았던 경험이 없을 겁니다. 이가 상할 만한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으니까요.

일제 강점기에 학교를 다녔는데 학교에서는 우리말 대신 일본말만 사용할 수 있었어요. 가끔 실수로 우리말을 하게 되면 선생님들께 야단을 맞았는데, 그때 일본인 교사보다는 한국인 교사들이 더 혼을 냈어요. 한국인 교사들이 그런 이유는 더 잘해야 한다는 의식도 강했고 그런 것을 묵인하다 걸리면 자기들이 피해를 입을까 봐 그런 거였죠.

초등학교 5학년이 되었을 때는 정말 최악이었어요. ‘지옥의 계절’이라 부르고 싶을 정도로요. 늦봄부터 솔뿌리를 캐러 산행을 했는데, 전쟁 말기에 일제가 연료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송근유(松根油: 침엽수의 뿌리에서 얻는 기름)를 군용 대체 연료로 정하고 한반도 전역에서 송진과 솔뿌리 채취를 강요했기 때문이었죠. 처음에는 학생들에게 여름방학 숙제로 송진 달린 솔가지를 일정량 내도록 했는데, 나중에는 수업까지 전폐하고 아침부터 산에 가서 솔뿌리를 캐게 했어요. 산야가 황폐해서 쉽게 솔뿌리를 구할 수 없어서 점점 깊은 산골로 갈 수밖에 없었는데 톱과 괭이 혹은 도끼를 준비하고 채취한 솔뿌리를 운반하기 위해 새끼줄로 멜빵을 해서 가마니를 지고 갔죠. 점심때까지 채취하는데 채취량을 검사해서 일정 수준에 이르지 못하면 도시락을 못 먹게 했어요. 점심 먹고 잠시 휴식을 취한 후 군가를 재창하고 하산하는데 그때부터가 진짜 고역이었죠. 열 살에서 열서너 살 아이들에겐 가마니 무게도 수월치 않은 데다가 솔뿌리 때문에 얼마나 따가웠는지 몰라요. 새끼줄이 어깨에 배기는 고통이 만만치 않았는데 이를 악물고 그걸 참으며 십오 리 길을 걸어갔던 기억이 나요. 지금 생각해도 또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는지 생각하고 싶지 않은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유종호 평론가는 문학이 좋아서 문학을 시작했다. 미군 부대에서 힘겹게 일을 하면서 받은 돈으로 서정주 시인의 시집을 사기도 하고, 시를 습작하기도 했다. 배고프고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막막함 속에서도 미지의 세계를 갈망했다. 유 평론가는 1995년 환갑이 지나서 시인으로 등단했다.

6·25 사변은 저에게 있어 피난의 기억이에요. 당시 충주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충주 근처 달천으로, 달천에서 다시 원주로 미군을 따라다니며 전전했죠. 국도를 꽉 메운 인파, 고갯길을 넘을 때 내리던 함박눈, 스물 댓 명이 한 방에 움츠리고 자다가 들었던 포성 소리. 저는 그 당시 문학 지망생이었는데 전쟁의 아수라장 속에서 겪은 아픔이 큰 흉터로 남아있습니다. 사실 저뿐만 아니라 전쟁은 우리 모두의 꿈을 빼앗아 간 슬픈 역사라고 할 수 있겠죠.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전쟁터가 되었다는 것이 그때는 굉장한 충격이었어요. 많은 사람들이 눈앞에서 다치거나 죽는다는 게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니까요. 지금도 그때 겪었던 불안이나 공포에서 완전히 헤어나질 못했어요. 아직도 기억에 생생해요. 많은 것을 기억한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상처 받았다는 것이고, 많이 아팠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죠.

피난 시절, 저는 미군 보급부대에서 일거리를 얻었는데 보급품을 화물 열차에서 하역하고 다시 ‘칸보이(convoy, 호송차량)’에 옮겨 싣는 노무자들을 관리하는 일이었어요. 다짜고짜 부대로 찾아가 어설픈 영어로 일거리 좀 달라고 말한 덕분에 얻은 일이었죠. 그때 그렇게 일을 하면서 사람은 먹어야 사는데 어쩌면 사는 것 자체가 치욕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세상에는 사람을 능멸하고, 누르고, 무시하는 이들이 많았어요. 엉터리 영어를 조금 읊조려 통역 자리를 얻어내고 우쭐대는 대학생, 병 주고 약 주듯 웃으면서 뺨치는 반장, 담요 한 장과 알량한 임금을 넘겨주면서 못살게 구는 미군 등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많았죠. 그래도 그 과정에서 미군 장교, 한국인 통역, 다양한 부류의 노무자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고 여러 가지 좋은 경험도 많이 했어요.

그때 미군 부대에서 받은 돈으로 서정주 시인의 시집을 큰마음 먹고 사기도 하고, 시를 습작하기도 했어요.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데 무슨 시를 끄적거릴 생각이 나냐고 할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렇게 배고프고 어려운 시절이 있었기에 막막함 속에서 미지의 세계를 갈망하는 글이 나온 게 아닐까 싶어요. 전쟁을 겪으면서 잃어버린 것도 있어요. 설레는 사춘기를 전쟁통에 보냈으니 ‘별을 그리는 부나비의 꿈’을 빼앗겼다는 박탈감이나, 평생 회복하지 못할 소년기의 상실 같은 것이죠. 그때에 비하면 요즘 청소년들은 얼마나 좋은 시절을 살고 있는지 상상도 할 수 없겠죠. 요즘은 6·25를 북침이라고 생각하는 젊은이들도 있고 전쟁을 감상적으로 여기는데 전쟁이 무언지 몰라서 그러는 거죠. 그런 인식을 바로잡아 줄 만한 문학이 많이 나와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처음부터 문학이 좋아서 문학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영문학을 시작한 것도 문학을 제대로 하고 싶었기 때문이고요. 그 당시에는 대개 국문학을 한다고 하면 생계에 도움이 안되니 좋아하지 않았는데, 영문학이라고 하면 나름 괜찮은 학과라고 생각들 했어요. 그러니 제가 영문과를 택한 것은 부모님들께 일종의 속임수를 쓴 거나 다름없는 것이었죠.

광복 직후 3년간 활발한 비평 활동을 했던 김동석(金東錫, 1913~?)이라는 평론가와 시인 정지용(鄭芝溶, 1902~?)을 어려서부터 좋아했는데 두 사람이 모두 영문과 출신이에요. 그분들처럼 글을 잘 쓰려면 영문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특히 ‘문학을 하기 위해 영문학을 택했다’는 김동석의 말에 영향을 많이 받았죠. 그렇다고 외국 문학과 한국 문학을 별개로 인식한 것은 아니고, 외국 문학에서 무언가를 얻어서 한국 문학에 기여하자는 생각이었어요. 책을 많이 읽고 싶다는 생각도 했는데 그때 우리나라에 번역된 외국 문학 서적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외국어를 공부해서 직접 읽고 싶은 마음도 있었어요. 영어 공부를 하면 모든 책을 읽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막연하게 영문과에 들어간 것이죠.

그러나 제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가 6·25전쟁 직후인 1953년이었기 때문에 공부하는 게 쉽지는 않았어요. 기본적인 도서조차 구하기 어려운 시절이었거든요. 대학생이 됐지만 강의실에서 영문학을 배우기보다는 당시 쉽게 구해 읽을 수 있었던 러시아 소설의 영어 번역본과 서머싯 몸(William Somerset Maugham), 토마스 만(Thomas Mann) 등의 작품을 읽으며 혼자 공부를 했던 기억이 나요.



글을 읽다 보니까 저도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렇게 시작된 것이 대학 시절부터 써왔던 평론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어느새 자연스럽게 평론가가 되어있었죠. 또 옛날에는 평론을 하는 사람이 드물어서 제가 젊을 때만 해도 청탁이 많이 들어왔어요.

그러나 제가 가장 많은 시간을 붙잡고 있던 것은 외국 책이었어요. 영어교사가 본업이었고 비평은 부업이었다고 할 수 있죠. 다만 영문학을 공부하는 것과 우리나라 말로 글을 쓰는 것이 전혀 다른 행위라는 생각은 안 했어요. 저에게는 둘 다 문학이거든요. 영문학을 하고 외국 문학을 공부하면서 문학에 대한 더 많은 이해가 생겼고, 그것을 우리나라 말로 적용하면 된다고 봤기 때문에 지극히 자연스러운 거였죠. 그러니 커다란 괴리감이나 모순을 느낀 적이 없어요. 경제학을 가르치면서 문학 평론을 한다면 다를 수 있겠지만요.




한 신문사의 신춘문예 심사 위원으로 참석한 유종호 평론가. 앞줄 왼쪽 첫 번째에 앉아 있다. 그는 글을 읽다 보니까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대학 때부터 평론을 쓰기 시작했고, 그렇게 평론가가 되었다. 당시에는 평론을 하는 사람이 드물어서 원고 청탁도 많았고 많은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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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부터 비평은 문학 장르 중에서 독자가 가장 적은 편이었어요. 그러나 지금은 비평뿐 아니라 문학 독자 자체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죠. 문학 전반이 독자를 잃고 있으니, 비평은 더욱 위기를 겪을 수밖에 없고요. 시청각 매체나 전자 위주로 돌아가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에 책 문화가 범세계적으로 위상을 잃어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상황이기에 단순히 문학만의 문제, 비평만의 문제라고만 볼 수는 없어요.

다만 비평의 경우에는 조금 다른데, 여기에는 1960년대 이후 유럽에서 일어난 이론혁명의 영향이 커요. 그 당시 문학 이론이 융성했는데 그렇게 이론 쪽으로 기울다 보니 독자가 점점 없어진 거예요. 혁명의 영향도 있고요. 또 우리나라의 비평이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거기서도 문제를 찾을 수 있죠. 대학에 기생해서 겨우 살아가고 있잖아요. 학부 학생들이나 대학원에서 논문을 쓰는 학생들을 상대로 말이죠.

비평에는 시비를 거는 측면이 있어요. 그런데 요즘에는 비판적인 요소가 없어지고 해설로만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해설과 덕담이 되어 비평의 고유성을 스스로 파괴한 것도 비평의 위기를 야기한 하나의 원인이라 볼 수 있죠. 앞으로도 이런 추세는 계속될 거라고 봅니다. 현실적으로는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 없잖아요. 그러나 문학만이 지니고 있는 매력과 저력이 있으니까 다른 시청각 매체와 경쟁해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힘써야 해요. 지금 독자들을 상대해서라도 명맥을 유지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문학에도 여러 종류가 있어요. 소설은 사람들의 이야기나 그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적은 일종의 서사이고, 시는 개인의 정감이나 내면의 문제를 다룬 것으로 같은 문학이라고 해도 영역이 다른 것이죠. 그런데 대개 소설 같은 경우는 독자들이 많아요. 근대문학 하면 곧 소설을 연상하는 사람들이 태반이죠. 우리의 경우 아직도 시인들이 많고 시집도 많이 나가지만 서양에서는 시를 읽는 사람들이 극소수예요. 그나마 소설 때문에 문학이 명맥을 유지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다른 매체와 비교할 때, 소설이 다룰 수 있는 서사는 영화에서부터 여러 가지로 대체할 수 있는 영역이 많은데 시는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가 없어요. 시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능력이나 기능은 오직 시를 통해서만 나타낼 수 있거든요. 그러니 저에게 문학의 매력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바로 시라고 말하고 싶어요.

이야기에는 거짓말이 있지만 노래 속에는 거짓말이 없다’는 옛말이 있어요. 시는 노래에 속하죠. 진정한 시에는 거짓이 없어요. 인문학적 소양을 갖추면 공허한 정치적 수사와 문학성을 구분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또렷하게 볼 수 있을 거예요. 저는 시나 문학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만큼 사회도 좋아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시와 혹세무민(惑世誣民: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미혹하게 하여 속임)의 수사학을 판별할 수 있는 능력은 시민적 자질에 속한다고 생각하니까요. 




노벨 문학상에 대한 유 평론가의 입장은 아주 단순하다. 세계에서 인정받으려고 굳이 노력할 필요 없이 좋은 작품을 쓰면 독자들이 스스로 찾아오기 마련이라는 것. 번역을 잘해서 상을 받는 것이 아니라 좋은 작품은 어떻게든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저는 한국 문학이 세계에서 인정받으려고 굳이 노력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이쪽에서 읽어달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지 않아도 좋은 작품이라면 독자들이 스스로 찾아오기 마련이니까요. 영화와 음악도 마찬가지예요. 꾸준히 좋은 작품을 만들어 내면 되는 겁니다.

그리고 문학이 부진한 이유는 우리나라에 일고 있는 쏠림 현상 때문이기도 해요. 쏠림 현상이란 한쪽으로 사람들이 몰리는 것을 말하죠. 1990년대만 하더라도 한국에서 문과가 인기가 많았어요. 그리고 문과대학 교수들의 사회적인 위치가 상당히 높다는 통계도 나왔었죠. 그런데 이게 IMF를 한번 겪으면서 인기가 점점 사라지더니 지금은 문과대학이 가장 인기가 없어요.

또 하나는 좋은 문학 작품이 나오지 않는다는 데 있겠죠. 진지하면서 감동적이고, 많은 독자들에게 호소력을 발휘할 수 있는, 그런 대작이 나오지 않고 있어요. 그릇이 큰 문학이 나와야 많은 이들이 모여들 텐데 문단에서는 요즘 인터넷 소설이 큰 화제잖아요. 많은 작가들이 참여해 장편이 쏟아져 나오고 있고, 많은 독자를 갖게 되고 수입도 괜찮다니 뭐라 할 수는 없지만 미디어는 문학이 아닌 메시지가 아닐까요? 아쉬울 따름이죠.



자신의 작품은 좋은데 번역이 시원치가 않아서 독자가 없다고 말하는 작가들이 있어요. 모든 주장이 그렇듯이 이런 주장도 반은 옳고 반은 틀린 겁니다. 작품이 뛰어나게 좋다면 번역이 설사 미흡하다 하더라도 독자가 있기 마련이거든요. 거기에 번역까지 좋다면 금상첨화겠지요.

예를 들면 일본의 소설가인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는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Edward George Seidensticker)라는 훌륭한 영어 번역자가 있었기 때문에 노벨상을 탈 수 있었다고 해요. 그러나 그걸 번역의 공으로만 돌릴 수는 없죠.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 같은 훌륭한 번역자를 만난 것도 좋은 작가였기에 때문에 가능했던 거였어요.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직접 번역자를 찾아가서 “내 작품을 번역해주세요”라고 부탁한 것이 아니니까요. 번역을 하기 이전에 좋은 작품을 먼저 쓰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해요.




2001년 은관문화훈장 수상자들과 함께 찍은 기념 사진으로, 앞줄 왼쪽부터 지관스님, 유종호 평론가, 신경림 시인이 앉아 있다. 유 평론가는 우리의 현실이 모든 것을 경영학적인 입장에서 판단하고 있는 것을 매우 우려하고 있다. 우리 사회가 실용적이고 쓸모 있는 것, 그리고 즉각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것만 선택해서 총체적으로 인간에 대한 가치를 상실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이유로 인문학을 멀리 하는 세태를 경계했다.

요즘 인문학 붐이라고 말들을 하는데 그건 잘못된 사실이에요. 인문학이 워낙 위기에 처하다 보니, 인문학에 관계된 교수나 당사자들이 모여서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여러 가지 행사나 운동을 벌이고 있어서 그런 말들이 도는 것 같습니다. 실제적으로는 인문학이 점점 쇠퇴하고 있는 추세입니다. 우선 대접 자체를 못 받고 있죠. 문과대학 졸업생들이 취직할 자리가 없어요. 그러니 점점 위축될 수밖에요. 사회가 점점 실용적이고 쓸모 있는 것, 그리고 우리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만 경영학적 사고로 판단하고 있어요.

그러나 인문학을 홀대해도 되는지에 대한 생각을 해 볼 필요성이 있다고 봅니다. 인문학이 기본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탐구인데 우리가 그것을 하지 않고,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 없이 어떻게 좋은 사회를 건설하고 그것을 위해 노력할 수가 있겠어요. 인간 본성의 탐구나 인간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우리가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과정입니다.







사람을 성숙하게 하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우선 자기의 분수를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젊을 때는 자기 분수를 잘 몰라요. 스스로를 가능성의 덩어리인 것처럼 여기고 남보다 뛰어난 존재라 착각하죠. 게다가 자신이 세계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인간은 우주의 중심에 있지도 않고, 더군다나 60억 인구 중 하나일 뿐이란 말이에요. 저는 이것을 깨닫는 것이 성숙이라고 봐요. 주제 파악을 못하는 사람들이 결국 성숙하지 못하는 거죠.

고대 그리스의 개념 중에 휴브리스(Hubris)란 용어가 있습니다. 보통 오만이라고 번역을 해요. 거만한 것을 말하는 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휴브리스는 자기 분수를 모르는 것을 뜻하죠. 엄청 재수가 좋은 것도 휴브리스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재수가 좋으면 비참한 결론을 맞는다고 생각했어요. 언제나 100퍼센트 맞아 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저는 그것이 고대 그리스인의 지혜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에서는 정치하는 분들이 가장 성숙이 더딘 분들이 아닌가 싶어요. 세상을 한 방에 변화시켜서 유토피아(Utopia)를 만들겠다는 생각부터가 오만이잖아요.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가능했다면 여태까지 왜 못했을까요? 휴브리스(Hubris)가 무엇인지 깨닫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분수를 아는 것, 그것이 성숙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세대 간 갈등은 어느 사회에나 발생하는 것이죠.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는 예부터 경로사상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였어요. 노인들을 무조건 존경해야 했죠.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그런 노인 공경사상은 대개 집약적인 농업 중심 사회에서 일어났어요. 농사를 짓는 사회에서는 늘 같은 일을 하게 돼요. 봄이 되면 씨 뿌리고 여름에는 병충해를 예방하기 위해서 제초 작업하고 가을되면 열매를 거두면서 말이죠. 오래 살다 보면 농사에도 노하우가 생기기 마련이고, 가뭄이나 장마가 일어날 때를 예측하는 노인들에게 젊은 사람들은 지혜를 구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 젊은 사람들이 노인을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그러나 현대 사회는 옛날과 반대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둔해지고 있어요. 사회는 발전했는데 노인들은 자동차 운전도 서툴고 전자 기계도 잘 다루지 못하니 손자가 할아버지를 가르쳐드려야 하는 상황이 된 거예요. 할아버지를 존중하기 어려워지는 거죠. 그러니까 이렇게 기술이 발전한 사회에서는 경로사상이라는 게 점점 사라져서 양자가 완전히 대립하는 구도에 놓인 겁니다.

저는 노인들이 과도하게 젊은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그들에게 저자세를 보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이는 사회 전체적으로도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에요. 젊은 사람은 미성숙한 부분이 많거든요. 제 스스로 20대를 생각해 보더라도 미숙하게 굴었던 적이 많았던 것 같아요. 얼마나 유치했는지 몰라요.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는 경험이 중요한 거예요. 그건 누구한테 배울 수도 없거든요. 자기가 직접 경험하고 깨달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반드시 시간이 필요하죠. 그래서 연륜을 무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유 평론가가 생각하는 이 시대 젊은이들의 문제는 불필요한 절망을 앞당겨서 한다는 것이다. 지금 취직할 가망성이 없는 것은 너무 좋은 직장만 찾아가려 하지 자기에게 맞는 일을 찾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 유 평론가는 자신이 어렵게 살아봤으니 할 수 있는 말이라고 강조했다.





저는 1950년대에 대학을 다녔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폐허가 된 곳에서 젊음을 보냈죠. 그때 가장 유행했던 말은 “엽전이 별 수 있나?”였어요. 그 말은 일제 강점기 때 일본에 가서 살고 있던 일본 유학생들 사이에서 번진 말이었죠. 일본은 잘 사는데 자기들은 거기서 고생만 많이 하고 멸시 받고 희망이 없으니까요. 그만큼 힘들었던 시기였습니다. 제가 대학을 졸업했을 때는 다들 취직이 어려웠고 실업자들이 갈 곳이 없어서 당구장에 몰려가기도 했어요. 기차를 타면 6•25때 다친 상이군경들이 물건을 사라고 강요하기도 했죠. 돈이 없어서 거절하면 “야, 너희들이 지금 이렇게 사는 게 누구 덕택인 줄 아냐? 내가 팔 한 짝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야”하며 그렇게 떼를 쓰는 거예요. 그럼 안 살 수가 없어요. 정말 아주 어려운 판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가 살아 남았잖아요.

어려운 시기를 겪으면서도 우리나라는 많이 발전했어요. 그러니 젊은이들도 미리부터 겁내서 희망이 없다고 이야기할 필요가 없어요.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희망을 찾았는데 지금은 어떻겠어요? 반드시 찾으면 길이 있을 겁니다. 그럼에도 좌절만 하고 있는 젊은 세대들이 있다면 너무 편하게 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굶어본 적도 없고 밤을 새워 고민도 안 해봤으니 말이죠. 물론 그게 다 젊은이들 탓은 아니에요. 인생의 선배들이 교육을 잘 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기도 합니다. 부모들조차 자녀들을 제대로 교육시키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에요. 부모의 책임, 앞선 세대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이 시대 젊은이들에게 불필요한 절망을 앞당겨서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을 해주고 싶어요. 그리고 지금 취직할 가망성이 없는 것은 너무 좋은 직장만 찾아가려고 하니까 그런 거예요. 자기에게 맞는 일을 찾으면 되거든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제가 호강을 하고 살았으면 이런 이야기를 안 해요. 저도 어렵게 살아 봤으니 할 수 있는 말이죠.



일할 사람을 찾는 곳은 한정되어 있는데 구직을 희망하는 사람들이 많을 때 결국은 경쟁을 통해서 결정될 수밖에 없는 거죠. 너대니얼 호손(Nathaniel Hawthorne)의 [블라이스데일 로맨스(The Blithedale Romance)]라는 소설을 보면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협동적인 사회를 만들어서 일정한 구역을 정해놓고 같이 농사를 지으며 사는 이상적인 사회가 나와요. 처음에는 문제없이 잘 지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삐걱하는 거예요. 왜 그런가 살펴보니 평화로웠던 그곳에 이성 문제가 등장해요. 경쟁 없이 협력하면서 살자고 했는데 이성이 등장하니 남성간의 경쟁 관계가 성립된 거죠. 그리고 서로 같은 일을 해도 그것이 오래가다 보면 누가 더 일을 했네, 안 했네 하며 비교하다가 실패하고 말아요. 그러니 근본적으로 경쟁이 없는 그런 환경을 만들 수는 없는 거죠. 다만 경쟁을 좀 완화시켜서 인간적인 환경을 만들려는 노력은 필요해요.

예를 하나 들어볼게요. 미국 원주민 중에 경쟁을 극도로 죄악시하며 기피하는 인디언 족의 이야기예요. 1970년대에 신문에도 나왔던 유명한 사건인데요. 인디언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어느 인디언 학생을 유급시키는 일이 발생했어요. 다른 학생들보다 공부가 더 필요했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는데 동급생들이 같이 유급을 하겠다는 거예요. 이 사람들에게는 그 친구를 혼자 놔두고 자신들만 진급한다는 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던 거죠. 이 마을에는 또 다른 전통이 있었는데, 1년에 한 번씩 마을에서 경기를 해서 달리기도 하고 높이뛰기도 하는데 지난해에 우승한 사람은 참여를 못하게 하는 것이었어요. 한번 1등 했으면 됐지 또 하려고 하느냐는 것이죠. 세계에 그런 사람들만 존재한다면 좋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게 현실이잖아요. 그리고 아메리칸 인디언이 몰락한 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경쟁을 멀리한 태도도 하나의 원인이라고 볼 수 있어요. 경쟁 구도를 완전히 철폐하는 것보다는 그것을 완화시켜서 약자에게도 기회를 주는 그런 사회를 만들면 좋을 것 같아요.



제 자신이 고민이 많고 방황하며 갈팡질팡 했는데 어떻게 타인에게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칠 수 있겠어요? 다만 제가 늘 염두에 둔 것은 사람은 건전한 양식과 판단력을 가져야 한다는 거였어요. 또 학생이면 본분이 공부하는 것이니, 일단 공부를 열심히 해야 된다는 소박하고 기본적인 것만 이야기했었죠. 과도하게 욕심을 내서 학생들을 어떠한 방향으로 끌고 가야겠다는 지도자적 포부 같은 것은 처음부터 품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솔직한 고백이죠.

그리고 학교에 들어가서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니까 모두가 수재이며 뛰어난 존재더군요. 그때 제 오만을 깨달았습니다. 저 스스로 건방지게 굴고 잘난 척 했었는데 저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잘났고 뛰어나며 개성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죠. 갑자기 불현듯 깨달은 건 아니에요. 아이들과 마주하며 가르치다 보면 머리 좋은 학생들이 많아요. 제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이야기하는 학생도 많고요. 그런 걸 몇 번 겪고 나니까 '아, 내가 꿈에서 깨어나야겠다. 모두가 훌륭하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되더군요.




문학인이면서 오랜 동안 강단에 선 인문학자인 유 평론가는 현대를 전체적으로 문학의 위기, 교양의 위기, 대학의 위기, 고급문화 전반의 위기 상황이라고 본다. 그는 이것이 과거 인쇄술 중심의 책 문화에서 인터넷 전자 문화로 옮아가는 문명의 전환기에서 발생하는 범세계적인 현상이지만, 인간에 대한 탐구를 하지 않는다면 사회가 제대로 발전하지 못할 것이라고 우려한다.

젊을 때는 시간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잘 몰라요. 젊음을 누리고 있을 때 시간과 정력을 어느 쪽에 바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일생이 좌우됩니다. 그러니 시간이 주어졌을 때 그걸 아낄 줄 알아야 해요. 스스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결정해야 하고요. 거기에 맞게 방향을 정해서 시간을 잘 아끼라는 충고를 하고 싶습니다.

저도 사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실천하는 것이 어려워요. 제가 못한 것이기 때문에 젊은 사람들에게 권유해 보지만, 다른 사람 이야기를 듣고 실천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다 자기 속에서 스스로 우러나와야 하는 것이죠.



어떤 친구를 만나느냐에 대한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일이에요. 결혼 상대를 만나는 것만큼 중요한 거죠. 옛날 중국의 시나 문학을 보면 여자를 그리워하는 사랑 노래는 드물지만 친구를 그리는 노래나 시는 무척 많아요. 그만큼 우정을 중요시한 겁니다. 정말 마음에 맞는 친구, 선의의 경쟁을 할 수 있는 친구, 배울 것이 많이 있는 친구를 사귀게 되면 그것이 자기를 풍부하게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좋은 친구를 사귀어 많은 걸 배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친구라고 동년배만 뜻하는 경우가 많은데, 영어의 Friend는 동년배를 뛰어넘어 제자이자 친구입니다. 선생님도 친구가 될 수 있고 이성친구도 친구이며 같은 일에 종사하는 사람도 친구인 거죠. 공자는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고 했어요. 친구를 사귀어 보면 다 나의 스승이나 다름없음을 알 수 있지요. 장점이 많은 사람들이 많죠. 남에게 절대 험담 안 하는 친구, 절대 언성을 높이지 않는 친구처럼 말이에요. 그런 사람들이 부러워요. 그런 친구들 곁에 있으면 배우는 게 많거든요. 지금도 저는 다양한 친구를 만나서 스승으로 삼고 싶어요.



특별히 기억되고 싶다는 생각은 별로 해본 적이 없어요. 그래도 말하라면, 평범한 사람으로 태어나서 평범하게 살아왔지만 한눈팔지 않고 자기의 길을 꾸준히 걸었던 사람으로 기억되면 좋겠습니다.

인터뷰이 소개유종호

[출처] 유종호 - 문학평론가 유종호의 인생|작성자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