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7-14

일본 최고 권력자들이 아꼈던 조선인 포로 소녀?! 오타 줄리아 | 역사스페셜 시간여행자 "칼과 십자가, 그리고 줄리아"(KBS_2026.07.12.방송) - YouTube

[4K풀] 일본 최고 권력자들이 아꼈던 조선인 포로 소녀?! 오타 줄리아는 누구인가 | 역사스페셜 시간여행자 "칼과 십자가, 그리고 줄리아"(KBS_2026.07.12.방송) - YouTube


일본 최고 권력자들이 아꼈던 조선인 포로 소녀?! 오타 줄리아는 누구인가 | 역사스페셜 시간여행자 "칼과 십자가, 그리고 줄리아"(KBS_2026.07.12.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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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스페셜 #시간여행자 #지승현 #오타줄리아 #고니시유키나가 #도쿠가와이에야스

사백여 년 전, 일본 최고 권력자의 곁에 한 조선 여인이 있었다. 일본은 지금도 그녀를 기억하지만, 정작 우리는 그 이름조차 낯설다. 조선에서 태어났으나 조선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일본 권력의 한복판에 섰으나 끝내 일본인이기를 거부했던 여인. 두 나라의 경계 위에서, 그녀가 끝내 택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임진왜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여인 '오타 줄리아'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추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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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1592년 임진년. 참혹한 인간 사냥의 소용놀이 속에서
이름도 고향도 빼앗긴 채 바다를 건너야 했던 조선의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휘모라치는 운명의 폭풍을 묵묵히 버텨내며 끝내 스스로 빛이 된 존재.
최고 권력자의 인형이 되기를 거부했던 그녀의 이야기는 어찌 된 일인지 우리에게 그리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거대한 전쟁의 포안은 모든 것을 집어삼켰고 한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습니다. 그 가혹한 우명의 소형돌리 속에서
그녀를 끝까지 견디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고난 속에서 오히려 단단하게 피어났던 한 영혼.
그녀가 남긴 가슴실인 발자치를 지금 따라가 봅니다.
망망 대회 위에 점처럼 떠 있는 작은 섬
도쿄에서 남서 쪽으로 180km 육지에서 경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간신을 다할 수 있는 섬심하다. 긴 여정의 끝에 마침내 이곳에 발을
디다이
바다는 400여년 전에도 이렇게 무심하게 게 일러났을까?
고즈시마의 푸른 언덕 거센 바닷바음을 맞으며 우뚝서 있는 하얀 십자가 하나
마치 바다넘어 영영 돌아가지 못한 머나먼 고향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
まし時間か天くですね今日の今年半見えきっとジア今日の関係
い ます 。 ここ は ね
오타줄리아이 낯설고 이국적인 이름의 죄인은 임제란
때 조선에서 강제로 끌려온 여인이라고 전해진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이곳
고지시마에서 그녀는 신과 같은 존재로 남았다.神様
神 様 と 言わ ねえ
の です ねえ
の です ねつ知り まし て そこ で あの
島 です ね と です ね非常 に こう あの ずっと
です 400여년 전 섬들의 병을 돌보고
아픔을 어만졌다는 오타리아 이곳 사람들은 여전히 그녀를 기억하고
있다.
970年
50도
우리에게는 너무나 설고먼 바다건너의 땅. 하지만 이곳에는 다름 아닌
조선의 여인이 새겨 놓은 깊은 흔적이 남아 있다.
그녀는 어떻게 400여년의 세월을 건너이 섬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
있는 것일까? 고즈시마의 전설처럼 전해지는 이름
오타줄리아. 그녀는 과연 누구였을까? 정말 실존했던 인물이기는 할까?
일본 야마구치현 하기시에 위치한 하기 박물관.
지난 2023년 세상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편지가 있다. 전설 속
인물이었던 오타슐리아가 자신의 손으로 직접 썼다고 알려진 사료다.
편지가 쓰인 건 1609년. 잔혹했던 임진회란이 끝나고 꼭
11년이 흐른 뒤였다.
のめ頃 1600年代れジュリア言われる女性自分のですね、当時言っ手紙でこれは極めてうやか優しい女性ぽい字書かれますので非常にこのおさんの共の高さを示しる
に なり ます 。 ここ まで の 手紙 を に し た こと は やはり こう
の で 非常 に こう 極めてい教育 を です ね受け て いう こと の つ
の実 に なる ん だ
と 思う
けど れ所様れ徳言를
끄는 것은 당대일본 최고의 권력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이름이다.
한낮 전쟁 포로였던 그녀는 어떻게 일본 력의 최심장부에 닿았던 것일까?
베일에 쌓인 우타 줄리아의 자취는 일본을 대표하는 한 거장의 문학 속에도 깊이 새겨져 있었다.
평생에 걸쳐 인간의 내면과 신앙의 본질을 치열하게 파고들었던 소설과
앤도슈사쿠. 노벨문학산 후보로도 수차에 거론된 바
있다.え特すべき
特す べき は やはり この 書かれ た この に なる ん です も
先生 は
こちら に なる です
앤도슈사쿠가 마음을 빼앗긴 것은 조선인포로 오타줄리아의 삶이었다.
임제네랄을 배경으로 한 소설 유리아라 불리운 여자는 이렇게 시작된다.
1592년 간박근은 히데오시를 얘기하는 거든요. 예. 명령으로 조선에 건너가에 일본 원정군의 운명은
이제 여기서부터 시대적인 부분을 이제 계속 이어가는 겁니다. 그의 명령으로 조선에 건너갔다라는 얘기가 소설의
출발점으로 시작을 합니다. 그다음에 이제 고인씨 가가 예 전쟁을 바라보면서 나도 예
내가 원해서 하는 거보다는 누군가에 의해서 나가라는 형식을 취하고요.
오타줄리아의 예측 불가능한 운명. 그 비극의 서막은 바로 조선 침략의
선봉에 섰던이 인물과 함께 시작된다. 안녕하세요.
할거야.
고신이 정승호입니다. 고니시
고니시 초입해 주세요. 그 고니시 고니시 6기나가
어 고니시기 6기화가는소서 행정으로 여러분들이 잘 알고 계실 텐데 임진한때 18,700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제1 장수로서え
な朝鮮本軍
の して朝鮮 く をめ た まし た貿
です ねア の貿
の族 と言われ ます貿 は船 を使え ます の で船 のネットワっ
て いる と ですの秀吉 の天下統一戦 で雪 は 主に輸船
を 使っ てや武器 運유토미
히대요씨의 명을 받아 조선침략에 선봉했었던 장수
우리에게 소서행장이라는 이름으로 더 악명 높은 고니시 유키나가는
사실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속내를 지닌 인물이었다.
전쟁 발발 이드메인 1593년 세워진 웅천 외성.
명나라군의 참전으로 한양에서 물러난 일본군이 남해한 일대로 집결해
장기전에 대비하여 쌓 성이다. 그 천수가 올라가는 데서는 세 개의
관문을 통과해야 되는데 지금 이게 첫 번째 관문인 그 성이라고 하겠습니다.
이곳에 오랫동안 주둔했던 고니시 유키나가 전황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그는 누구보다 먼저 전쟁을 끝내고 싶어 했다. 상인 출신은 그의 정치적
경제적 신리를 위해서는 평화 협정을 맺는 훨씬 유리했기 때문이다.所
和 のっ て
船 にっ人物 が見える に あれ はひょっと して中
の お使い の船 で は ない か喜ん で騒い で騒い で もっかり
이것도 난크리가 있다
고신는 줄곧 명과의 광화를 바았다. 그가 이토록 전쟁의 회의적이었던
데에는 종교라는 또 다른 배경이 있었다.
세스페에서 신부님은 원래는 스페인분이에요. 그 인도 고아라는 곳에서 서품을 받고
일본으로 오시게 되거든요. 그러면서 임진 외란이 일어나니까 그 고니시
가가 기독교 집안이거든요. 그래서 1년 6개월 동안 거기에서 그 미사 접견도 하고
그다음에 강론 그다음에 목회 활동을 하시다가 근데 일본으로 돌아가시게
됩니다. 공식 기록상 조선 땅을 처음으로 밟은
서양인 신북 세스페데스. 역설적이게도 그 계기는 일본의 조선
침략이었다. 이렇듯 보니시 유키나가는 칼과 십자가를 함께 들고 조선에 들어왔다.
머나먼 이국 땅으로 끌려간 비참한 운명들 오타줄리아 역시 그중
하나였다. 13살 그녀의 운명이 송두리째 뒤바 순간이었다.えらればされる
ばされる と いう こと が 非常 に 多かっ た で それ を 持ち込ん
です才能
が ある美しい女性 も 一 に し
ます と思われる人でこの人の場合には代が気がついてあの特別に自分で育
저는 이게 정확한 통계가 없어요. 일본인은 작게 잡아요. 한 5, 6만
정도 잡고 우리나라 사람은 10만에서 15만을 잡아요. 근데 그래서 이제 어림 잡아서 이제 중간치를 이제
산정을 해 보면 10만 원 되지 않았을까? 뭐
조선인 포로들의 첫 기착지는 외군의 본거지이자 대회 무역의 중심지였던
큐슈. 그중에서도 나가사키였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다시 먼
이국당으로 팔려 나갔다.
간신히 노예 매매를 피한 이들은 나가사키 변두리에 모여 집단 생활에 꾸려 나간다.
요게 지금 이제 그때 당시에 나가사기의 지도인데
조선인들이 주로 많이 살았더니 가지야 맞지 뭐 지금이야 뭐 나가사기의 진짜
번화가 중심가지만 그때 당시는 아주 그 외곽 그 가지아마치에 이제
집단으로 거지를 했다고 기록이 나온다 말이죠. 하영노동이라든가
가죽가공이라든가 대장장이라든가 이런 하측 노동민으로서의 생활이 조선인 포로들의
나가기에서의 생활이 아니었을까? 그런데이 비극의 땅에서 조선인
포로들은 전에는 알지 못했던 전혀 다른 세계를 목격한다.
서양에서 건너온 종교 가톨릭이었다.
당시 교슈를 다스리던 영주들은 저마다의 이해를 쫓아 가톨릭을 받아들였다.
줄리아를 거둔 고니 역시 마찬가지였다. 큐슈 지역의 본군 영주들이 대부분이
북부에는 가톨릭 신자로 바뀌는 거는이 사람들이 종교로 믿기도 하지만 서양이
갖고 있는 신식 무기가 갖고 싶은 거예요. 왜냐면 서양에서 들어오면 큐수에 먼저
도착하니까. 그다음에 무역을 하면 이익이 나니까利益
を得る ため に
누군가에겐 가톨릭이 이속의 수단이 되었다면 조선인 포로들에게 그것은 간절한
위로가 되었다. 처음의 생활은 굉장히 고통스럽겠죠.
뭐 노예와 같은 생활인데 저녁이 되면 도망갈 곳이 있는 거예요. 이게
마음이나 정신적으로 위로해질 수 있는 곳을 찾아야 그게 선교사들이 머물고
있는 가톨릭 교회인 거예요. 거기 가면 따닥 맞아 주니까. 그래서
근데 2천명 정도가 이제 나가사기의 조선인들이 모여서 살았고
자신들의 그 신앙생활을 거기서 그 유지했다는 것인데 조그맣게 이제
조선인들이 자기들의 성당을 짓고 가난하지만 거기서 자기들끼리 서로
돌아가면서 살고 있다라는 그 기록이 또 성교사 기록에 나온다 말이죠.
한편 포로로 붙잡힌 어린 줄리아도 규슈에 있는 고니시의 영지로
보내졌다. 그리고 그곳에서 고니시가문에 일원이 되어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雪
の家族がで周辺に次に身分が高いてその周辺にう分が低い作ります
は雪生活니씨의
부인은 줄리아를 친딸처럼 거두었다고 전해진다. 제대로 약재를 다루던 가문의 영향으로
줄리아는 자연슬의 의학 지식도 익혔다.
그리고 특히 신앙이 깊었던 그 집안의 분위기 속에서 그녀 역시 가톨릭을
마음깊이 받아들이게
Espíritus sancti
낯선 땅에 포로로 끌려온지 4년 만에 조선의 소녀는 는 줄리아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현실의 삶은 지극히 비참하고 끌려오기까지 굉장히 큰 아픔과 충격과
그런 것들이 있었지만 이제 4년 후에 세례를 받게 될 때까지 4년의 시간
동안 오다에게 어 그 시간이 조금 취유의 시간이 아니었을까?
내면의 치유의 시간이 아니었을까? 여러 가지 기록에 이제 그것도 남아 있는
사실인데요. 그렇게 기도를이 말씀을 드렸대 아마
신부님들께 말씀을 드린 거 같아요. 그 당시 17세기 초에 선교사님들의
서 서한 서신 서관이었겠군요. 네. 네. 주로 예수의 신부님들이
쓰신 선교사님들이 쓴 편지가 대부분이고 이제 요거는 1880년에
예 번역된 책입니다. 이게 100년이 훨씬 좀 더 지났죠. 그래서 어 오타줄리아가 서반에 현지 썼던
부분들이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렇게 보면 제가 중간중간에 넣는데요. 오타
줄리아에 대한 기록들이 있는 부분. 그래서 이제 편지에 언제 어 기록자는
누구고 수신자는 누구고 발신은 누구고 요런 식으로 이제 기억이 되어지면서
그녀에 대해 어 서신으로 왔다 갔다 한 서반문이 이렇게 이제 정리가 되어
있는 거를 정리가 한 거고요. 일본에 파견된 포르투갈의 한 신부가
로마 예수의 총장에게 보낸 편지. 그 안에는 줄리야의 육성이 고스란이
박제되어 있다. 주님은
당신을 알지 못하던 조선에서 태어난 저를 구원으로 이끄시고자 고니시
유키나가를 통해 일본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리하여 유일한 구원이신 당신을 알게
하셨으니이 모든 것이 크나 큰 사랑임을 저는 믿습니다.
줄리아는 자신에게 닥친 모진 고난마저 신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평화는 짧았다. 그무렵 일본은 거대한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절대 권력자 도요토미 히데우 씨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일본은 천하를
둘러싼 내전으로 빠져들었다. 모두가 숨 죽인 채 눈치를 보던
빈자리 가장 오래 인내하며 때를 기다려 매의 눈빛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내전을 승리로 이끌며 이후 약 300년간 이어질 에도막부의 문을
연배자였다. 도쿠가와에 맞었던 고니시키나가는
전투에서 해 끝내 붙잡히고 만다.
태장에게 주어진 마지막 길은 무사로서의 존엄을 지키는 할보.
하지만 고니시는 사무라이의 명예 대신 전혀 뜻밖에 죽음을 받아들인다.
무장이나 사무라이들은 영예로운 죽음이 할복이에요. 할복해서 목을 쳐야
되는데 그러면 이게 자살행이잖아요. 자살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것이 사무라이의 특권이니까
종교선 자살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이제 사실
처행이 당할 때에 뭐냐면 권니신 육기 나가는 아이 가톨릭을 그래도 끝까지
지키려고 했구나 가족에게 남긴 편지가 남아 있는데 나
감옥에서 혹독한 그런 것을 겪고 있지만
내가 그 조손인 내가 사륙한 그한 죽인 사람들에 대한 어떤 보소 그것을
지금 받고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이 세상의 삶은 이제 영원한
것이 아니 아니라 아니라는 것을 이제 가족들에게 알리면서 다음 세상을 준비하라라는 이런 이제
편치를 남겼더라고요.
줄리아에게 칼과 십자가를 함께 안겨준 고니시 요키나가
영원할 것 같던 울타리가 한 순간에 무너져 내렸고 줄리아는 다시 새찬
폭풍 속에 홀로 남겨졌다. 그리고 그녀 앞에 펼쳐진 거역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운명 도쿠가와
이에스였다. 처음 일본에 끌려왔을 때처럼이 또한
그녀의 뜻과는 무관한 일이었다.
この よう な 立派 な 女性 が いる の なら 是非徳 に しい と話 が
入っ た の で は ない か と私理由 が あっ て
は 才能 が あっ女性
と日本 に も使え と ま そうっ
が高い生活をる女性
또명 도가와 이아스의 궁중에서 줄리아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그 의문을 풀어줄 실마리는 오랫동안 침묵을 지켜온 줄리아의 침필 편지
속에 고스란이 남아 있었다.
はいる山口のる知のですね聞く本当にあなたた私の弟是非会い手紙
난리가 났던 그 해는 13살이었고 밑으로 11살, 여섯살 그리고 세 살
동생이 있었습니다. 어린 남동생의 손에는 푸른 점이 있었고 발에도 점이 있었습니다.
당신에게도 있습니까? 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만약 그런 점이 있다면
시간을내어 승푸성으로 와 주십시오. 직접 만나 확인하고 싶습니다.所
様 が実 は徳 の こと を 言っ て い ます 。 で 、 ま 、 あの に
はけ
최고배자의 이름에 힘입어 잃어버린 혈을 찾아선 줄리이는
당시 궁중에서 그녀의 입지가 결코 좁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편지를 받은 남동생은 마침내 누나가 있는 곳을 찾아왔다.
그런데 놀랍게도 도크가와는 일계 조선인 포로에 불과했던 그에게 자신의
옷과 칼 말을 직접 내린다. 그 덕분에 남동생은 사무라이의 지위와
봉토까지 얻게 되었다. 도가야스가 봉토를 주고 그리고 무라따
야스마사라는 이름을 지어주면서 말하자면 일가를 이루게
만들어진게 일종의 신분 상승이지만 이제 그런 것이 가능했던 것도
오따줄리아의 그런 영향력이 크게 작용했다고 생각을 할 수 있겠죠.
그런 의미에서의 그런 어떤 특수한 관계가 아니었으면이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ある
意味 こう と いう の です ねえ て いう とろ に それ が ある こと は
極めて珍しい と いう に なり ます の で 今 に なる よう な 肌 につける よう な
ですけど も をげる こと は実 はめさ도크가와의
궁정에는 그를 시중들며 천주를 믿는 조선의 의 여인이 있습니다. 이름은
줄리아.
높은 자기에 있으나 가난한 신자들에게 옷과 음식을 베풀고 정성껏 고해를
올립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아직 젊고
빼어난 용물을 지녔음에도 가시덤불 속에 장미처럼 영혼을 더럽히니 죽음을 택하겠노라 다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머나먼 땅에서 홀로 신앙을 지키는
그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허나 줄리아의 삶에서 십자가는 늘 칼과 함께 왔다.
신앙을 얻은 그 자리에 병원은 쉬 깃들지 않았다.
나가사키에 자리한 26성인 순교 기념관. 일본 천주교 박해의 역사를
증언하는 곳이다. 이 무렵에도막부의 가톨릭 탄압은 한창 거세지고 있었다.
rulers are the most strong I mean for exle in theos they
could not
천하를 거머진 도쿠가와 이아스는 가톨릭을 향해 거침없이 칼을 빼들었다.
맛부의 명을 거역하고 신앙을 지키려는 이들에게는 상상을 초월한 고문과
죽음이 뒤따라
맞아 죽기도 하고 화형도 있고 또는 머리에 바늘 망하는 구멍을 내서
이제 거꾸로 매달게 해서 이제 피를 한 방울씩 흘러가면서 이제
피가 류하는 고통. 근데 그 고통은 상상이 안 되는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십자가를 밟아야 했던 잔혹한 시대. 그 칼날 아래에는
고향을 잃고 끌려온 조선인 포로들도 있었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 그들이 마지막으로 붙든 단 하나의 구원.
막부는 그 마지막 영혼의 안칙처맞아 무참히 짓밟아 버렸다.
이스가 처음에 하는 작업이 뭐냐면 천왕과 동격의 권위를 가지려고 해요.
천왕은 종교적인 권이잖아요.
막부 체제의 체제 안정으로 해서는 도구로서는 뭐 어쩔 수 없다. 그러
당연한 조치겠죠. 아직 도구와 막부가 제대로 안정이 되지
않고 있는 시기인데 근데 그 처형하는 과정에서
가만히 보니 자기 측근 순부성의 자기 측근 가신들이나
심지어는 오따리아마저도 기스탄이라는게 이제 판명이 되 발각이 되는 거죠.
여기서 그 도구에 이어서는 뭐 다른 그 가신들이나 이런 건 뭐
무참하게 다 처벌 하지만 오다주리아에 대해서만은
섬으로 유배를 시킨단 말이죠.
일본의 작가 앤도 슈사쿠는 줄리아의 삶을 또 한번 뒤바꾼 그 순간을
이렇게 그려냈습니다. 싫습니다.
줄리아의 작은 입술에서 갑자기 낮고 확실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싫습니다. 사람들은 귀를 의심했다.
이런 대답을들을 것이라곤 생각조차 못했기 때문이다.
줄리아는 돌처럼 침묵을 지킨 채 꼼짝 안고 앉아 있었다.
일본의 지배자 도쿠가와 이에스의 앞이었습니다. 지상의 왕을 위해 하늘의 왕을 져버릴
수는 없다. 포로로 끌려와 평생 숨 죽여 살던 그녀가 처음으로 목숨을 걸고 자신의
뜻을 밝힌 순간이었습니다.
시현님께서는 오타줄리아라는 사람에 대해서 어떻게 알게 되셨어요? 아, 어렸을 때 어떤 드라마인지 영화인지를
봤던 그 영상이 떠올랐어요. 근데 어린 소녀가 바다를 한참 바라보고
있는 장면. 그리고 좀 그 당시에는 그게 김모어였던 것 같아. 근데 어린
아이에는 김모원지 뭔지 모르잖아요. 근데 낯선 복장을 입은 여인이 이렇게
가마 같은 데서 내려서 돌밭을 걷는데 발이 피투성이었어요. 근데 그게 떠오르면서 이제 그게 오다
줄리아가 아니었나 배교할 수 없다고 여러 번 거절했기 때문에 결국은 이제
제 가까운 섬으로 유배를 보내는데 거기서도 다시 한번 배교를 배교할 수
있냐 했는데 거기서도 거절하니까 그다음 성으로 또 보내어졌고
거기서도 이제 마음을 바꿀 수 없다라고 하니까 이제 아무것도 지원을
하지 않는 마지막 섬으로 고이 그 섬으로 이제 보내어진
거듭된 권력의 회유 그리고 목숨을 건 거부 그 굳건한 신앙의 대가로
줄리아가 마침내 다아야 했던 곳 바다 한가운데 외로이 고립된 섬즈시마였다.
오랫동안 고지시마는 줄리아가 생의 마지막을 보낸 곳으로 알려져 왔다.
국경과 세월을 넘어 수많은 순례객이 이섬을 찾아온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코로나로 중단되기 전까지 50여년간 이어져온 고제시마의 줄리아 축제
국경을 넘은이 행사는이 작은 섬에 가장 큰 자부심이었다.
供ろ
はございませれの
言く ない と いう
오모이스 최고 권력자와의 미묘한 인연 그리고
화려한 공중에서 척박한 외딴섬으로의 추방 그럼에도 끝내 굽히지 않은 신앙
줄리아의 삶은 역사와 전설의 경계를 넘나대며 사람들의 마음에 사로잡아
왔다.
허나 줄리아가이 외딴 섬에서 생을 마쳤다는 오랜 이야기는 사실과
달랐다. 어, 오사카에서 살고 있다라고 이제
밝혀진 것들은 이거는 어, 루이즈 메데라는 분이 예, 어, 머나먼
고려라는 책 일본 예수에서 쓴 서관을 중심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 보면 그녀가 나가사게 있고 그리고 그녀가
오사가에 예, 살고 있다라는에 부분들이 여기 보면 신앙을 위해
추방된 고려인 오타줄리아는 지금 이마의 오사카 이르 오사카에 있다.
그래서이 이제 기록으로 이제 해서 그녀가 어 고주시마에서 죽은게
아니다라는 것들이 있고요.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우리에게도 줄리아는 낯선 이름이 아니었다.
그녀를 기리는 행사가 성대히 열렸고 그 삶은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 뜨겁던 관심은 오래 가지 못했다. 외딴 섬에서의 순교라는 매끈한 서사가
깨지는 순간 그녀를 향했던 추모의 열기는 싸느라게 식었다.
어느새 그녀의 이름은 우리의 기억에서 서서히 잊혀갔다.
어디서 죽었다고 하는 것을 따지지 않고에 가톨릭 신자로서 보면 굉장히
순고한 자기 신앙을 지켜 어떤 권력에도 구력을 하지 않고 순고하게에
인생을 선택한 아주 위대한 종교인으로서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인간은 끊임없이 욕 속에 살아가잖아요. 근데 그 욕을 내가 선택하고 거부하는 거는 그녀의 몫인
거잖아요. 그녀가 다른 삶을 선택할 수도 있지만 그녀는이 삶을 선택했잖아요. 이제 종교적인 어
접근이라면 신앙이 되겠지만 일반적인 어 본질적인 거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신념이라는 부분이 되지 않을까?
모든 것을 빼앗긴 채 외딴섬에 던져졌지만 그녀는 내면의 평화와 자유를
지켜내했습니다.
세상에 가장 날카로운 칼날도 스스로 선택한 한 영혼의 존원만은 끝내
베어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줄리아는 조선 사람이었을까요? 아니면 생의 대부분을 보낸 일본의
사람이었을까요? 두 나라 어디에서도 그녀가 온전히
기억되지 못한 이유는 어쩌면 바로 여기에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녀가 지켜낸 인간의 존놈 앞에서 국적이란 그리 큰 의미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경계에 서서 치열하게 살아갔던 한
여인의 삶은 이제 국적과 운명을 넘어 우리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집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라고
말이죠.
채장거리 그리고 채장시간을 을 세상에서 처음 이런 경험을 한
망했다.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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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과 십자가, 그리고 줄리아> 요약 및 평론

1. 다큐멘터리 요약

KBS <역사스페셜 시간여행자>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으로 강제 연행되어 최고 권력자들의 중심에 섰으나, 끝내 신앙과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배교를 거부하고 유배의 길을 택한 조선인 포로 여인 '오타 줄리아'의 삶을 추적한다.

1592년 13세의 나이로 끌려온 그녀는 기독교 신앙을 가졌던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가문에서 친딸처럼 양육되며 '줄리아'라는 세례명을 받는다. 1609년 줄리아가 직접 쓴 친필 편지와 17세기 초 선교사들의 서한을 통해 그녀가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의 궁중(순푸성)에서 높은 지위와 영향력을 가졌음이 증명된다. 실제로 그녀의 영향력 덕분에 헤어졌던 남동생을 찾아 사무라이 신분과 봉토를 하사받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에도 막부의 가톨릭 탄압이 극에 달하자, 이에야스는 측근이자 총애하던 줄리아에게 배교를 강요한다. 줄리아는 "지상의 왕을 위해 하늘의 왕을 져버릴 수 없다"라며 단호히 거부했고, 결국 이즈 제도의 고즈시마(神津島)를 비롯한 외딴섬들로 유배된다. 고즈시마 사람들은 4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섬의 아픈 이들을 돌보았던 그녀를 '신(神)'과 같은 존재로 기억하며 매년 줄리아 축제를 열어왔다. 최근 선교사 기록을 통해 그녀가 고즈시마에서 생을 마감한 것이 아니라 이후 나가사키를 거쳐 오사카에서 신앙을 지키며 살아갔다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으며, 다큐멘터리는 국적과 경계를 넘어 자신의 신념을 지켜낸 한 인간의 숭고한 존엄을 조명하며 마무리된다.

2. 영상 평론

이 다큐멘터리는 그동안 문학과 전설의 영역에 머물러 있던 '오타 줄리아'라는 인물을 역사적 사료와 실증적 추적을 통해 현실의 역사 위로 끌어올린 탁월한 영상 역사학의 성과를 보여준다. 특히 앤도 슈사쿠의 소설 <유리아라고 부르는 여자>가 심어놓은 '외딴섬에서의 비극적 순교'라는 매끈한 문학적 서사를 넘어, 끈질기게 살아남아 신념을 이어간 인간 줄리아의 실존을 입체적으로 복원해 냈다.

첫째, 사료를 통한 서사의 과학적 복원과 확장

방송은 2023년 세상에 처음 공개된 줄리아의 1609년 친필 편지와 1880년에 번역된 예수회 선교사들의 서반문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이를 통해 그녀가 단순히 동정을 받는 무력한 포로가 아니라, 이에야스 궁정 내부에서 권력자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잃어버린 가족을 구원할 만큼 주체적이고 교양을 갖춘 인물이었음을 증명한다. 또한 고즈시마 이후 오사카와 나가사키로 이어지는 생의 흔적을 추적함으로써, '박제된 순교자'가 아닌 가혹한 현실 속에서 끝까지 신념을 실천하며 살아간 '생활인이자 종교인'으로서의 스펙트럼을 넓혔다.

둘째, '경계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인간 존엄의 가치

다큐멘터리는 줄리아를 단순히 '조선인 포로'라는 민족주의적 프레임이나 '일본 최고 권력자의 총애를 받은 시녀'라는 타자 전도적 시선에 가두지 않는다. 조선과 일본이라는 거대한 국가 권력의 칼날 아래에서, 그녀는 어느 한쪽의 인형이 되기를 거부하고 오직 가톨릭이라는 신앙을 매개로 자신만의 내면적 자유를 구축했다. 이는 국가와 애국심이라는 거대 담론이 포착하지 못하는 개인의 주체성과 인간다운 신념이 무엇인지를 묵직하게 질문한다.

셋째, 망각의 역사에 대한 성찰과 영상 미학

고즈시마의 거센 바닷바람 속에 서 있는 하얀 십자가와 피투성이가 된 발로 돌밭을 걷던 줄리아의 이미지를 시각적으로 대비시키며 권력의 유혹과 신념의 대가를 강렬하게 전달한다. 외딴섬 유배라는 비장한 서사가 깨지자 한국 사회에서 그녀에 대한 추모 열기가 식어버렸다는 점을 지적한 부분은, 우리가 역사를 기억할 때 문학적 도식이나 민족적 입맛에 맞는 영웅주의적 서사만을 소비하려는 경향이 있지 않은지 뼈아픈 성찰을 제공한다.

3. 총평

KBS <역사스페셜 시간여행자>의 이번 방영분은 칼(권력)의 위협 앞에서도 십자가(신념)를 내려놓지 않았던 오타 줄리아의 삶을 통해 국가와 민족, 종교라는 경계를 뛰어넘는 보편적인 인간 존엄의 가치를 훌륭하게 역설했다. 비극적인 역사 속에서 지워졌던 한 여성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살려내어 복원한, 깊은 울림과 학술적 가치를 모두 잡은 다큐멘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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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KBS <역사스페셜 시간여행자―칼과 십자가, 그리고 줄리아>(2026년 7월 12일 방송)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1,000단어 안팎의 요약·평론이다.

<칼과 십자가, 그리고 줄리아> 요약·평론

1. 잊힌 조선인 포로 여성의 생애

이 다큐멘터리는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 여성 오타 줄리아의 생애를 추적한다. 줄리아는 일본에서는 고즈시마의 전설과 축제를 통해 기억되어 왔지만, 한국에서는 거의 잊힌 인물이다. 프로그램은 “일본 최고 권력자들의 곁에 있었으나 권력의 인형이 되기를 거부한 조선 여성”이라는 틀로 그의 삶을 재구성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시작되었을 때 줄리아는 약 열세 살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일본군의 포로가 되어 가족과 고향을 잃고 일본으로 끌려갔다. 당시 일본군이 데려간 조선인 포로의 수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수만 명에서 십여만 명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포로들은 규슈와 나가사키를 비롯한 일본 각지로 보내졌으며, 일부는 노예로 해외에 팔려 갔다. 일본에 남은 사람들도 대장장이, 가죽 가공, 하역 노동과 같은 낮은 지위의 노동에 종사했다.

줄리아를 데려간 인물은 일본에서 ‘고니시 유키나가’, 조선 기록에서 ‘소서행장’으로 알려진 장수였다. 그는 임진왜란 선봉장이었지만 동시에 가톨릭 신자였다. 이 때문에 프로그램은 고니시를 단순한 침략자가 아니라 칼과 십자가를 함께 지닌 모순적인 인물로 묘사한다.

고니시 가문에 들어간 줄리아는 그의 부인에게 양녀처럼 보호받았으며, 약초와 치료법을 익힌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일본에 끌려온 지 몇 년 뒤 세례를 받고 ‘줄리아’라는 이름을 얻었다. 프로그램은 포로 생활의 고통 속에서 가톨릭 신앙이 줄리아에게 정신적 피난처와 내면적 치유를 제공했다고 해석한다.

2. 조선인 포로와 일본 가톨릭

다큐멘터리는 줄리아 개인의 생애뿐 아니라 당시 일본에 정착한 조선인 포로와 가톨릭의 관계도 설명한다. 나가사키에 거주하던 조선인 포로들은 자신들만의 작은 교회 공동체를 형성했고, 선교사들의 보호와 도움을 받았다. 이들에게 교회는 단순히 새로운 종교를 배우는 장소가 아니라, 노예적 삶 속에서 인간으로 대접받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공간이었다.

줄리아가 남긴 것으로 소개되는 신앙 고백에는 “조선에서 태어나 당신을 알지 못하던 나를 고니시 유키나가를 통해 일본으로 보내 구원에 이르게 하셨다”는 취지의 내용이 있다. 그는 자신의 납치와 고난을 신의 섭리로 해석했다.

이러한 해석은 신앙인의 내적 세계를 보여주지만 동시에 매우 불편한 질문을 낳는다. 일본의 침략과 납치가 구원을 위한 신의 계획이었다고 말할 때, 침략의 폭력성이 신앙의 언어로 미화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프로그램은 이 문제를 직접 비판하기보다 줄리아가 고통을 견디기 위해 그 사건을 신앙적으로 재해석했다고 보는 쪽에 가깝다.

3. 고니시 유키나가의 몰락과 도쿠가와 궁정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뒤 일본은 권력 투쟁에 들어갔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고니시 유키나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패배했다. 고니시는 사무라이의 명예로 여겨지던 할복을 거부했다. 가톨릭 교리에서 자살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처형되었으며, 줄리아가 의지하던 고니시 가문도 몰락했다.

줄리아는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궁정으로 들어갔다. 프로그램은 그가 단순한 시녀 이상의 영향력을 지녔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1609년에 작성된 것으로 알려진 편지에서 줄리아는 임진왜란 때 헤어진 남동생을 찾는다. 그는 남동생의 손과 발에 있던 점을 기억하며, 같은 특징이 있다면 슨푸성으로 찾아오라고 요청한다.

남동생은 결국 줄리아를 찾아왔고, 이에야스로부터 옷과 칼, 말을 받고 사무라이의 지위와 봉토까지 얻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는 줄리아가 궁정에서 상당한 신뢰와 영향력을 가졌음을 암시한다. 선교사들의 편지에도 줄리아가 가난한 신자들에게 음식과 의복을 베풀고, 신앙생활을 충실히 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4. 권력 앞에서의 거부

그러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의 지배자로 자리 잡으면서 가톨릭에 대한 탄압은 점차 강화되었다. 막부는 가톨릭이 신자들에게 막부보다 더 높은 권위를 요구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가톨릭 신자들은 배교를 강요받았고, 이를 거부한 사람들은 화형, 고문, 처형을 당했다.

줄리아 역시 신앙을 버리라는 요구를 받았다. 엔도 슈사쿠는 소설 《유리아라고 부르는 여자》에서 이 장면을 극적으로 재현한다. 줄리아는 이에야스 앞에서 낮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싫습니다”라고 말한다. 평생 포로와 시녀로 살아온 여성이 일본 최고 권력자 앞에서 처음으로 자기 뜻을 밝힌 순간이다.

다큐멘터리는 이 거부를 줄리아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본다. 그는 도쿠가와의 궁정에서 안정된 지위를 유지할 수도 있었고, 신앙을 버리면 보호를 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지상의 권력자를 위해 하늘의 신을 버릴 수 없다고 판단한다.

줄리아는 처음에는 이즈오시마로, 그다음에는 니지마로, 마지막에는 고즈시마로 유배되었다고 전해진다. 막부는 그가 배교하면 궁정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여러 차례 회유했으나, 그는 끝까지 이를 거부했다.

5. 고즈시마의 전설과 새로운 사실

고즈시마 사람들은 줄리아가 섬의 병자들을 돌보고 주민들에게 약초와 치료법을 전해주었다고 기억한다. 섬에는 줄리아를 기리는 십자가가 세워져 있으며, 오랫동안 줄리아 축제가 개최되었다. 한국의 가톨릭 신자들도 이 축제에 참여했다.

오랫동안 줄리아는 고즈시마에서 생을 마친 순교자로 알려졌다. 그러나 프로그램은 이 전설이 역사적 사실과 다를 가능성을 제시한다. 예수회 서한에는 줄리아가 고즈시마에서 죽지 않고 이후 나가사키와 오사카에서 살아 있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이 사실이 알려진 뒤 줄리아를 향한 관심이 오히려 줄어들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외딴섬에서 홀로 죽은 조선인 순교자라는 이야기는 극적이고 아름답다. 반면 유배에서 살아남아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 계속 신앙생활을 했다는 이야기는 덜 극적이다.

다큐멘터리는 줄리아의 가치가 어디에서 죽었는가에 달려 있지 않다고 강조한다. 중요한 것은 그가 실제로 순교했는지가 아니라, 권력의 회유와 억압 속에서도 신앙과 존엄을 지켰다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6. 이 다큐멘터리의 장점

이 프로그램의 가장 큰 성과는 줄리아를 임진왜란의 주변적 인물이 아니라 전쟁의 본질을 보여주는 인물로 복원했다는 데 있다. 임진왜란의 역사는 흔히 장군, 전투, 전략, 승패를 중심으로 서술된다. 그러나 줄리아의 생애를 통해 보면 전쟁은 한 소녀의 가족과 언어와 정체성을 파괴하고, 그를 타국의 권력 구조 속으로 밀어 넣은 인간 납치의 역사다.

또한 프로그램은 줄리아를 단순한 피해자로만 그리지 않는다. 그는 모든 것을 빼앗겼지만 신앙과 신념을 통해 자기 내면의 자유를 만들어간다. 특히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요구를 거부한 행위는 약자가 어떻게 권력에 맞설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줄리아는 도쿠가와를 정치적으로 패배시키지 못했다. 막부의 가톨릭 탄압을 중단시키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는 권력자가 자신의 영혼까지 소유하는 것을 거부했다. 이 점에서 줄리아의 저항은 외형적으로는 작지만 윤리적으로는 매우 크다.

프로그램이 일본의 여러 지역을 직접 찾아가 현지 전승, 기록, 기념물, 새롭게 발견된 편지를 보여준 점도 장점이다. 특히 줄리아가 남동생을 찾기 위해 쓴 편지는 그가 단순한 전설 속 인물이 아니라 가족을 기억하고 혈육을 찾으려 했던 구체적인 인간이었음을 보여준다.

7. 고니시 유키나가의 묘사에 대한 주의

그러나 고니시 유키나가를 다루는 방식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프로그램은 그가 전쟁을 끝내려 했고 가톨릭 신앙을 지켰으며 줄리아를 보호했다고 강조한다. 이런 사실들은 고니시를 복잡한 인물로 이해하는 데 필요하다.

그러나 그는 어디까지나 임진왜란의 선봉장이었다. 그가 평화를 원한 이유도 조선인에 대한 인도주의적 관심보다는 장기전에 따른 정치적·경제적 부담 때문이었다. 가톨릭 신자였다는 사실 역시 침략자로서의 책임을 없애지 않는다.

그가 줄리아를 가족처럼 대했다 해도, 줄리아가 일본에 오게 된 원인 자체가 고니시가 참여한 침략전쟁이었다. 이 모순을 분명하게 하지 않으면 고니시는 자칫 조선인 포로를 구해준 선량한 기독교 장수로 미화될 수 있다.

“칼과 십자가”라는 제목은 이 모순을 잘 드러낸다. 그러나 다큐멘터리는 때때로 십자가가 칼의 책임을 너무 쉽게 덮어주는 방향으로 흐른다. 고니시의 개인적 신앙과 인간성은 인정할 수 있지만, 그것이 침략의 구조적 책임과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8. 신앙과 식민적 폭력

줄리아가 자신의 납치를 신의 은총으로 해석한 대목도 비판적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그것은 피해자가 고통을 견디기 위해 만들어낸 의미일 수 있다. 인간은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견디기 위해 그 사건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그러나 후대의 사람들이 그 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여 “일본에 끌려왔기 때문에 줄리아가 구원을 얻었다”고 말한다면 문제가 달라진다. 그런 논리는 일본의 침략과 납치가 결과적으로 좋은 일이었다는 식의 위험한 서사로 이어질 수 있다.

줄리아의 신앙을 존중하면서도 일본의 침략은 명백한 폭력이었다고 말해야 한다. 줄리아가 고난을 신의 섭리로 재해석한 것은 침략을 정당화한 것이 아니라, 침략이 빼앗아 갈 수 없는 의미를 스스로 만들어낸 행위였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의 위대함은 일본으로 끌려갔기 때문에 신앙을 얻었다는 데 있지 않다. 자신에게 가해진 폭력을 넘어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창조했다는 데 있다.

9. 국적과 정체성의 문제

프로그램은 마지막에 줄리아가 조선인인지 일본인인지 묻는다. 그는 조선에서 태어났지만 일본에서 대부분의 생애를 살았다. 조선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일본에서도 완전히 일본인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국적은 중요하지 않다”는 결론은 다소 조심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 인간의 존엄이 국적보다 중요하다는 말은 옳다. 그러나 줄리아가 왜 두 나라의 경계에 놓이게 되었는지를 생각하면 국적과 역사는 결코 부차적이지 않다. 그는 스스로 일본으로 이주한 사람이 아니라 전쟁포로였다.

그를 단순히 ‘국경을 초월한 세계인’으로 부르면 임진왜란과 강제이주의 책임이 흐려질 수 있다. 줄리아의 정체성은 조선인과 일본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방식으로 설명하기보다, 전쟁으로 인해 두 세계 사이에 놓인 디아스포라적 존재로 이해하는 편이 정확하다.

그는 일본어와 가톨릭 신앙 속에서 새로운 삶을 살았지만, 잃어버린 동생을 찾아 나섰다는 편지는 조선의 가족 기억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줄리아는 일본인이 되기를 단순히 거부한 것이 아니라, 일본 사회 안에서 살아가면서도 자신의 과거와 신앙을 완전히 지우지 않은 인물이었다.

10. 종합 평가

<칼과 십자가, 그리고 줄리아>는 오타 줄리아를 영웅이나 순교자로만 만들지 않고, 전쟁포로, 궁정 여성, 가톨릭 신자, 유배자, 치유자라는 여러 모습으로 복원하려 한 의미 있는 다큐멘터리다.

프로그램이 전달하는 핵심은 인간의 자유가 외적 조건에만 달려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줄리아는 고향과 가족과 지위와 삶의 선택권을 빼앗겼다. 그러나 자신이 무엇을 믿고 무엇을 거부할 것인가에 대한 마지막 결정권만큼은 포기하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날카로운 칼도 스스로 선택한 한 영혼의 존엄은 베어낼 수 없다”는 프로그램의 결론은 줄리아의 생애를 잘 압축한다. 다만 그의 신앙을 찬양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를 일본으로 끌고 간 침략전쟁의 책임과 여성 포로에게 가해진 폭력까지 함께 기억해야 한다.

엔도 슈사쿠가 줄리아를 “싫습니다”라고 말한 여성으로 그렸다면, 이 다큐멘터리는 그 거부 뒤에 있었던 더 넓은 역사를 보여준다. 줄리아의 삶은 단순한 순교전설이 아니다. 그것은 제국의 전쟁, 종교의 위로와 모순, 여성의 신체를 향한 권력, 디아스포라의 정체성, 그리고 약자의 내면적 자유가 교차하는 역사다.

결국 오타 줄리아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그가 조선인이었는가 일본인이었는가”만이 아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인간이 모든 것을 빼앗긴 상황에서도 무엇을 끝까지 자기 것으로 지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줄리아가 지킨 것은 단순히 종교적 교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몸과 양심과 삶을 최종적으로 결정할 권리, 곧 인간의 존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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