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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05

Tae-Ryong Yoon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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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태룡:강연]단계적 한반도 중립화 통일론(4부):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인간의 역할은? ("常念建國, 虛心爲族"의 정신으로 민족통일의 그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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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태룡:강연]단계적 한반도 중립화 통일론(3부): 강연핵심 주제, 뉴튼의 함의, 과거 남북관계의 요약, 통일의 대전제 ("常念建國, 虛心爲族"의 정신으로 민족통일의 그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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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태룡:강연]단계적 한반도 중립화 통일론(2부): 녹음상태가 안좋으니, 이어폰 끼고 볼륨 높여서 시청하셔요! ("常念建國, 虛心爲族"의 정신으로 민족통일의 그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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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태룡:강연]단계적 한반도 중립화 통일론(1부): 녹음상태가 안좋으니, 이어폰 끼고 볼륨 높여서 시청하셔요! ("常念建國, 虛心爲族"의 정신으로 민족통일의 그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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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 Nara's mini interview with ‘People for a Neutralized Korean Peninsu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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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중립화】재미교포 정치학자 황인관 명예교수 '한반도 중립화 헌장' 서울서 선포: ASIA NEWS

【한반도 중립화】재미교포 정치학자 황인관 명예교수 '한반도 중립화 헌장' 서울서 선포: ASIA NEWS



【한반도 중립화】재미교포 정치학자 황인관 명예교수 '한반도 중립화 헌장' 서울서 선포
2010年10月21日
한반도 중립화 황인관 한반도 중립화 헌장

한반도 중립화 헌장
한(조선)반도가 남과 북으로 분단된 지 65년이나 지나도록 우리 민족은 아직도 분단을 극복하지 못했지만 남과 북이 하나의 통일국가를 수립하려는 많은 노력을 시도해 왔다. 그 동안 대한민국(남한)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이 수 차례의 통일방안의 제의와 더불어 극적인 사태의 전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공통의 통일방안에 대한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중립화 레짐 구축(regime building)을 통한 통일방안을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즉 중립화 통일방안은 중립화를 통해 단계적으로 남북간 통합을 이뤄 단일 영세중립 통일국가를 창립 하는 것이다.

단순한 중립, 즉 통상적 중립으로 알려진 경우에는 전시에만 존재하지만 영세중립은 전시나 평시를 막론하고 항상 영원히 존재한다. 영세중립은 무엇보다도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여러 세기 동안 강대국간의 세력 균형 정책 속에서 늘 희생이 되어온 한반도에 평화와 안전을 가져다 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우리나라의 오래된 속담을 생각하는 것은 유익한 교훈이 될 것이다. 우리는 한반도의 지리적 위치를 바꿀 수는 없으나, 중립화 레짐을 바탕으로 민족통일을 달성함으로써 우리의 역사를 바꿀 수는 있을 것이다.

우리민족이 정당한 자위의 수단으로써 무력사용을 하는 경우 이외에 전쟁을 포기한다는 조건에 동의한다면 우리의 독립, 영토보존과 주권이 전시와 평시를 막론하고 한반도를 위요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4강(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에 의해 영구적으로 보장받게 될 것이다.

한반도 영세중립화의 기본적인 장점은 중립화된 통일조국과 중립화보장국 4강간 모두에게 이익을 준다는 점이다. 중립화는 중립화된 국가에게는 보장된 중립화를 제공하고, 중립화 보장국들에게도 평화와 더불어 그들간에 한반도 내에서 세력균형정책에서 벗어나는 길을 제공하게 되어 쌍방모두에게 이익을 보장하게 된다.

본 헌장은 한반도 중립화 레짐 구축을 위한 이론적 틀을 제시한다. 이론적 틀에는 5단계 중립화 통일방안에 대한 미래비전을 아래와 같이 제시하고 있다. 첫 단계는 한반도 평화체제구축을 통해 남북관계의 정상화를 이루고 둘째 단계는 남과 북이 한반도 중립화 공동합의문 채택, 셋째 단계는 남과 북 그리고 4강간 한반도 중립화 선언과 국제조약 체결, 넷째 단계는 남과 북이 통일헌법 채택과 통일헌법에 따른 총선거 그리고 다섯째 단계는 중립화를 통한 통일국가 창립이다. 한반도 중립화 구축을 위한 구체적인 제도적 절차와 과정을 본 헌장에서 아래와 같이 논의하였다.

남과 북이 함께 중립화된 통일국가건설을 위해서는 남과 북이 먼저 스스로 한반도평화와 중립화 구축에 대한 필요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모든 것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남과 북이 우선적으로 먼저 해야 할 것은 상호 무기경쟁과 군사적 대립을 피하고, 이념적 정통성을 주장하는 대립을 지양하고, 외국과의 군사동맹을 탈피하여 양측이 중립화를 스스로 실천하는 것이다.

동시에 남과 북은 진정한 화해와 상호신뢰, 지원 및 신뢰구축을 증진시켜야 한다. 그럼으로써 남북 양 정부는 안정된 평화적 공동체를 건설하고, 한반도 중립화와 관련이 있는 4대 강국과 한반도 중립화를 위해 협상할 수 있게 된다. 4대 강국간에 중립화 국제조약이 체결되면 남과 북은 하나의 주권국 건설을 위해 남북 간의 총선을 통해 새로운 코리아통일공화국(United Republic of Corea: URC)을 건설하게 된다. 이와 같은 한반도 중립화 구축 과정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이제 우리의 역사적 사명을 포기할 수 없다. 우리는 65년 이상 노력하며 기다려 왔다. 우리는 중립화 통일 비전과 희망을 포기하지 말고 우리의 사명이 이뤄질 때까지 계속 노력해야 한다.

본 헌장의 제9조는 분단되고 불안정한 한반도보다 통일되고 중립화되고, 독립된 평화로운 한반도를 4강이 선호할 것이란 가정에 기초를 두고 있다. 더욱이 새로 탄생하는 코리아통일공화국은 동북아시아에서 전반적인 전략적 세력균형을 변화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4강이 한반도에서 통일된 영세중립국가를 지지할 것으로 굳게 믿는다.

조국통일과정에 가장 주요한 장애물중의 하나는 남과 북이 합의할 수 있는 공통된 통일이념의 부재이다. 즉 공산주의, 전체주의, 주체사상, 선군정치, 자본주의, 민주주의, 개인의 자유와 사회정의와 같은 상충하는 정치이념을 공통된 통일이념으로 전환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과제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중립이념을 하나의 촉매로 작용하여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홍익통일' 이념의 개념에 기반을 두고 통일의 길로 연결해 주는 주요한 이론적 틀을 마련하는데 기여할 수 있다. 그럼으로 평화적인 통일을 진정으로 바라는 남과 북의 공통된 통일이념으로 '홍익통일' 이념을 제창한다.

제1장: 일반원칙

제1조. 통일조국의 명칭은 '코리아통일공화국'(영문표기는 The United Republic of Corea: URC)라고 칭한다. 통일이념은 우리 선조들의 홍익통일 이념과 평화, 자유, 평등, 민주주의, 정의와 인권에 기초를 둔다.

제2조. 통일조국의 기본 틀은 우리민족의 역사와 문화적 전통과 혼합한 스위스 또는 오스트리아 사례에서 배운 경험을 바탕으로 영세중립(화)의 기본원칙에 기초를 둔다.

제3조. 남과 북은 다음사항을 충실하게 성실히 준수한다

가항. 남과 북은 통일이 완성되기까지 상호 체제와 이념을 존중하고 한반도 평화조약이 체결될 때까지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에 의해서 확정된 남북 경계선을 재확인한다.

나항. 남과 북은 유엔헌장을 준수하고 정상적인 관계로 발전하고, 전쟁위협이나 폭력에 의하지 않고 오로지 평화적 수단으로 분쟁을 해결 한다. 양측은 특히 이미 합의하고 선언한 합의서들(1972년 7.4공동성명, 1992년 발효한 남북기본합의서, 2000년 6.15공동선언. 2007년 10.4선언)에 기초하여 평화공존과 상호신뢰구축을 증진하여 남북관계를 발전시켜 나간다.

제2장 한반도 중립화의 절차와 과정

제4조. 남북공동최고통일위원회[The South-North Joint Supreme Unification Council(JSUC)]의 구조와 역할은 아래와 같다.

가항. 남과 북은 남북관계의 정상화와 더불어 상대방 수도에 각각 대표부를 설치한다. 양측은 중립화 선언을 포함하는 남북간 중립화 선언과 협정을 체결한다. 그리고 양측이 중립화 통일을 마련하는 법적 기구인 가칭 남북공동최고통일위원회를 설치한다.

나항. 남북공동최고통일위원회는 한반도 중립화 통일을 관리하는 상설기구로써 남북양측의 위임 하에 양측의 동수와 약간의 해외동포를 포함해 모두 200명을 초과하지 않는다. 남북공동최고통일위원회 위원은 각기 한 표의 투표권을 갖는다.

다항. 남북공동최고통일위원회는 조직과 운영과정에 관한 자체의 준칙을 채택한다. 운영비용은 양측이 동등하게 부담한다. 남북공동최고통일위원회 위원들은 그들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필요한 제반 특권을 각 지역에서 가진다.

라항. 남북공동최고통일위원회가 20명 상임위원을 선출한다. 남북양측은 동수로 선출하고 약간 명의 해외상임위원을 선출한다.

마항. 남북공동최고통일위원회 사무국은 판문점 근처나 양측이 합의한 장소에 둔다. 사무국은 모든 회의기록을 보관하고 비밀이 요구되는 내용을 제외한 간행물을 발행한다.

바항. 남북공동최고 통일위원회는 코리아통일공화국 건설을 위한 제반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책임을 가진다.

제5조 남북공동최고통일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기능과 역할을 수행한다.

가항. 남북공동최고통일위원회는 향후 통일조국 창립에 대비하여 '코리아통일공화국'의 헌법을 제정하고, 새 국기를 도안하고, 새 국가를 작곡하며, 그리고 새 수도를 선정한다.

나항. 남북공동최고통일위원회는 상설 공동군비통제군축위원회를 설치하여, 남과 북의 군사력을 재평가해서 코리아통일공화국의 영세중립국 지위에 적합하도록 국방력을 조정한다.

다항. 남북공동최고통일위원회는 외부의 군사적 위협에 대처하기 위하여 남북공동 군사지휘체제를 조직하여 운영한다.

라항. 남북공동최고통일위원회는 코리아통일공화국의 군대 구성을 위한 준비의 책임과 권한을 갖는다.

마항. 남북공동최고통일위원회는 중립화를 통한 평화적 통일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관련국가들이나 국제기구와 언제라도 협상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다.

바항. 남북공동최고통일위원회의 모든 결정은 남북최고결정자의 승인을 받아 즉시 효력을 발생한다.

제3장 코리아통일공화국(URC)의 책임과 의무

제6조. 남북공동최고통일위원회는 코리아통일공화국이 전쟁을 포기하고 어떠한 국제적 분쟁도 평화적 방법으로만 해결하며, 국제관계에서 코리아통일공화국의 영세중립국을 선언하고 국제적 승인을 받아야 한다. 코리아통일공화국의 자주독립과 주권과 영토보존을 위해 코리아통일공화국은 중립국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할 것을 서약한다.

제7조. 코리아통일공화국은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책임과 의무를 갖는다.

가항. 코리아통일공화국은 어떠한 경우에도 다른 국가에 대한 평화를 위협하거나 무력사용의 위협을 금지하며, 다른 국가의 국내문제에 간섭하지 않는다.

나항. 코리아통일공화국은 다른 국가들과 어떠한 군사동맹을 체결하지 않으며, 그리고 영세중립국의 정책에 부합되지 않는 군사적이든 아니든 타 국가와의 어떠한 협정을 체결하지 않는다.

다항. 코리아통일공화국은 자국의 영토 내에 외국의 어떠한 군사기지 건설을 허용해서는 안 되며, 또는 타국의 국내문제에 간섭할 목적으로 자국의 영토를 사용하는 것을 허용해서도 안 된다.

라항. 코리아통일공화국은 자국의 국내문제에 대해 어떤 형태로든 외국의 간섭을 허용해서는 안 되며, 어떠한 동맹이나 또는 군사연합을 승인해서도 안 된다.

마항. 코리아통일공화국은 자국의 안보와 방위 목적에 필요한 무기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무기나 탄약이나 전쟁물자가 자국의 영토에 반입되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바항. 코리아통일공화국은 어떠한 외국의 간섭이나 공격에 대비해서 자국의 중립화를 방어하는데 가능한 모든 수단으로 자국의 독립과 영토보존을 유지한다. 중립화는 방어적이나 자국의 생존을 보호하기 위해 무장을 갖춰야 한다.

제8조. 중립은 국가의 의무이며, 국민 개개인의 의무는 아니므로 표현, 출판, 집회, 의견, 양심, 종교의 자유와 같은 국민의 기본권은 제한 받지 않는다. 국민들은 중립의 의무를 가지지 않으며, 도덕, 윤리, 이념, 문화 그리고 모든 다른 사회활동에서 자유롭게 각자의 의견을 표현할 수가 있다.

제4장 4대 보장국(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의 책임과 의무

제9조. 4대 강국은 코리아통일공화국의 영세중립을 보장하기 위해 다음의 책임과 의무를 갖는다.

가항. 4강은 코리아통일공화국의 독립과 영토보존을 위해 영세중립국 지위와 비동맹 정책을 존중하는 영세중립화 조약을 코리아통일공화국과 체결한다. 이 조약은 유엔의 승인을 얻어 유엔사무국에 공식적으로 등록하여 국제법적 효력이 발생하여 국제적인 책임과 의무를 갖는다.

나항. 4강은 모든 방법으로 코리아통일공화국의 독립과 영토보존과 영세중립조약을 존중하고 준수한다.

다항. 4강은 코리아통일공화국의 독립과 영토보존을 방어하고 보장한다. 그러나 4강의 공동조치에 합의할 수 없는 경우에는 코리아통일공화국은 4강 중 그 어느 국가와 개별적으로 방어조치를 취할 수 있는 권리를 보유한다.

라항. 4강은 코리아통일공화국의 영세중립 지위에 직·간접적으로 손상을 주는 어떠한 행위를 범하거나 그러한 일에 참가하지 않으며, 또한 코리아통일공화국의 안정과 평화를 위태롭게 하는 어떠한 무력사용이나 위협 등과 같은 행위를 하지 않는다.

마항. 4강은 코리아통일공화국의 비동맹이나 비 군사 연합을 존중한다. 4강은 어떠한 형태의 외국 군대나 또는 병력을 코리아통일공화국에 들어오게 해서는 안 되며, 외국 군대나 또는 병력을 위한 어떠한 형태의 시설물도 반입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4강은 코리아통일공화국에 어떠한 외국 기지나 또는 어떠한 종류의 외국 군대의 시설물을 설치하지 않는다.

바항. 4강은 다른 국가의 국내문제에 간섭하기 위한 목적으로 코리아통일공화국의 영토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4강은 코리아통일공화국의 내정에 간섭하기 위해 자국을 포함하여 다른 국가의 영토를 이용하지 않는다.

제5장 코리아통일공화국과 4대 보장국 간 국제협력

제10조. 4강은 중립화 보장국으로써 코리아통일공화국과 적극적인 국제적 협력과 긴밀한 협의를 통해 다음과 같은 임무를 수행한다.

가항. 코리아통일공화국의 영세중립을 보장하기 위해 4강과 코리아통일공화국은 3개의 시행 기구인 평화감시단, 국제법정, 그리고 중립보장위원회를 설치한다. 각 기구는 5명의 대표로 구성된다.

나항. 평화감시단은 제7조 및 9조에서 규정된 중립법에 대한 위법사항을 조사하고 검증하여 국제법정에 보고서를 제출한다.

다항. 국제법정은 감시단이 조사한 내용에 관한 판결문을 작성하여 그 권고안을 중립보장위원회에 제출한다.

라항. 중립보장위원회는 국제법정으로부터 제출된 권고안을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시행하고 코리아통일공화국의 영세중립을 보호하기 위해 회원국들의 무장병력을 포함한 지원을 요청할 수 있다.

마항. 본 3개 기구는 상호 협력하여 각 기구들의 효과적인 조정과 협력을 통해 제반 규정을 협의하고 안출한다.

바항. 본 3개 기구는 코리아통일공화국의 영세중립지위가 확고하게 정착되면 해체되거나 또는 폐지된다.

부칙 조항

제1조. 본 헌장의 규정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언급되지 않은 규정들은 남과 북 양 정부의 지원을 받아 코리아통일공화국이 창립될 때까지 일정기간 동안 활동하게 될 남북공동최고통일위원회가 제정한다.

제2조. 본 헌장과 관련협정들은 남과 북의 현 헌법이나 여타 관련 협정에 저촉되지 않는 한 효력을 유지한다.

제3조. 본 헌장은 남과 북이 상호 협의에 따라 개정한다.
・현직 : 부레드리대학 정치학 명예교수 / 한반도 중립화통일포럼 회장
・학력 : 1950년 용산중학교 / 1950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입학 / 1958년 가주대학 (Berkeley) 학사 / 1960년 남가주대학교 석사 / 1974년 워싱턴대학교 (St. Louis) 박사
・경력 : 1960~63년 고려대학, 단국대학, 건국대학, 국민대학 강사 / 1966~01년 미 부레드리 대학 교수(정치) / 한반도평화통일포럼 회장

우리역사넷 중일전쟁 이후 한인사회의 독립운동

우리역사넷

신편 한국사 > 신편 한국사 > 근대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3. 미주·일본지역의 독립운동 > 1) 미주지역의 독립운동 > (2) 1930년대 북미한인사회의 통일운동과 독립운동

총설
고대
고려
시대
조선
시대
근대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42권 대한제국


43권 국권회복운동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45권 신문화 운동Ⅰ


46권 신문화운동 Ⅱ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개요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1. 중국관내 독립운동정당의 활동


2. 만주지역 독립군의 무장투쟁


3. 미주·일본지역의 독립운동

1) 미주지역의 독립운동

(1) 1930년대 하와이 한인사회의 통일운동과 독립운동


(2) 1930년대 북미한인사회의 통일운동과 독립운동


(3) 1940년대 미주 한인사회의 독립운동



2) 일본지역 민족운동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마. 중일전쟁 이후 한인사회의 독립운동

1930년대 후반 북미지역 한인사회는 국민회 중심의 합동운동이 성과를 보임에 따라 새로운 활기를 되찾았다. 이런 가운데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국민회는 현 시국을 비상시기로 인식하고 임시정부후원활동을 추진하였다. 국민회는 1937년 9월 제4계 중앙집행위원회의에서 임정후원을 위한 특별의연금과 중국항일전쟁후원금(또는 ‘중국항일동정금’으로 불림) 그리고 광복 때까지 독립운동을 항구적으로 후원하기 위한 국민부담금 모금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이를 추진하였다. 1938년 9월 국민회 제3계 중앙집행위원회에서는 중앙상무부 안에 시사위원회를 두어 원동정세와 재미한인의 임무 및 대내외의 선전방침을 연구하게 하고 국민회 대표 1인을 원동으로 특파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825) 또 국민회는 비상시기에 하와이 각 단체들과 일치된 행동을 도모하고자 같은해 9월 14일로 하와이 국민회와 동지회에 공문을 보내 행동통일을 요청하였다.826) 1939년 국민회는 임시정부에 인구세와 국민부담금 1,500원을 송금한 것을 비롯하여, 한인동포의 미국 입·출입 주선, 쿠바재류동포에 대한 구제금 송부, 한인유학생의 미국 체류권 청원활동, 그리고 원동에 있는 한인 각 당들에게 통일 및 연합활동의 재촉 등 대내외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827) 아울러 김용중 등 2세 한인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재해로 경제적 어려움에 빠진 국내 한인들을 돕기 위해 1939년 12월 20일 발기한 內地旱災救濟會에 대해 국민회는 적극 지원하였다.828)

한편 중일전쟁 발발 이후 북미 한인사회에는 국민회 조직과는 별도로 각지에서 한인 연합으로 설립한 중국후원회를 중심으로 활발한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1937년 말부터 그 이듬해 초까지 뉴욕한인연합중국후원회·나성한인연합중국후원회·시카고한인연합중국후원회 등이 결성되어 일화배척운동과 후원금모집활동을 전개하였다.

각지에서 한인 연합으로 결성된 중국후원회는 결성 초기 후원회 안에 국민회 주요 임원들과 회원들이 대거 참가하면서 기존 국민회 조직과 불필요한 마찰을 일으키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조선의용대 창설소식이 미주에 알려진 1938년 11월 이후부터,829) 중국후원회의 개별활동은 강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국민회는 1939년 1월 22일과 2월 16일 중국후원회 문제를 검토한 뒤 국민회가 직접 후원회를 관할한다는 방침을 정하였다.830) 하지만 중국후원회는 1939년부터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이하 ‘의용대후원회’ 또는 ‘후원회’로 약함)로 개편하면서 국민회와 점차 분리해 나갔다.

조선의용대 후원문제가 처음 대두되는 것은 1939년 6월 나성한인연합중국후원회를 대표한 변준호가 조선의용대 후원을 목적으로 로스엔젤레스에 한인 소집을 허락해 줄 것을 국민회 당국에 요청하면서다. 이것은 조선의용대 후원문제를 기존의 국민회·동지회와 같은 기성단체들과 연합해서 공동후원하자는 의도에서였다.831)

하지만 기존의 북미 국민회와 동지회측은 조선의용대 창설문제에 별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 동안 두 단체 모두가 처음부터 오직 임시정부 중심으로만 활동해 임시정부와 무관한 조선의용대에 대해 탐탐치 않게 생각한 때문으로 보인다. 이러한 배경에는 조선의용대를 창설한 朝鮮民族革命黨이 그 동안 임시정부를 否定 또는 不關해 온 현실이 미주 한인사회에 반영된 결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조선의용대를 후원할수록 임시정부에 대한 후원이 줄어든다는 사실도 마땅치 않았다.

이에 따라 국민회는 6월 29일 중앙상무위원회를 열고 변준호의 제안을 거절했는데 이유는, 지난 4월 6일 국민회 제2계 중앙집행위원회 결의와 어긋난다는 것이다.832) 즉 재미한인은 국민회의 통솔하에 인구세와 국민부담금을 거두어 임시정부로 상납하는 것이 원동활동을 돕는 바른 길이요 在來의 規例인데, 이 규례를 버리고 조선의용대를 직접 후원한다면 사무진행의 계통을 문란케 하는 것이므로 허락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국민회 입장은 북미 한인사회를 철저하게 임시정부 중심과 국민회 중심으로 주도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국민회의 태도에 대해 중국후원회는 간섭과 통제만 있고 활동이 미약한 국민회에 대해 불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존 단체로부터 호응을 얻지 못하자 중국후원회측은 활동범위를 점차 확대해 가면서 소속단체를 불문한 개인별 후원에 의존하였다. 그런 후 1939년 8월 27일 로스엔젤레스의 중국후원회는 안석중 등 40명의 명의로 자체를 해소하고<조선의용대후원회 성립선언문>을 발표하였고,833) 10월 7일 中·美人들과 함께 로스엔젤레스 일본영사관 앞에서 대대적인 시위운동을 전개하면서 후원회 설립을 대외적으로 기념하였다.834)

조선의용대후원회 조직은 나성지역 외에 이미 1939년 4월과 9월에 뉴욕과 시카고에서도 각각 설립되고 있었지만 현재 자료미비로 그 정황을 정확히 알 수 없는 형편이다.835) 다만 이들 후원회 단체들은 1940년 5월 로스엔젤레스에 있는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연합회(이하 ‘조선의용대후원회’로 약함)로 통합되면서 통일된 활동을 전개하였다. 조선의용대후원회는 중한민중동맹단 대표인 한길수의 외교선전활동을 적극 후원하고, 반일시위운동이나 반일선전강연 등 대외활동과 조선의용대 지원을 위한 재정모금운동 등에 주력하였다.

조선의용대후원회는 조선의용대 후원을 주목적으로 하였지만 여기에만 한정하지 않으려 했다. 즉 독립을 위해 무장투쟁을 하는 모든 군사운동에 대해 후원한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다만 임정의 광복군이 창설 중일 때 후원회의 입장은 기본적으로 광복군을 후원한다는 원칙을 가졌으나 이왕이면 이미 조직된 의용군을 확대, 강화하는 것이 더 낫다라는 견해를 갖고 있었다.836)

조선의용대후원회는 스스로 특정한 목적을 위해 조직한 임시적인 기관이며 기존의 국민회와 전혀 대립적인 조직이 아니라고 강조하였지만, 자체 회관을 마련하고 1940년 1월부터 기관지≪의용보≫를 발간하는 등 항구적인 정치단체로 자리잡아 갔다. 그 결과 의용대후원회는 1941년 4월 하와이에서 개최한 해외한족대회에 북미지역 한인사회의 한 대표로 국민회와 함께 참여하였고, 1942년 10월에는 자체를 해소하고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총지부로 개편, 조직을 확대시켜 나갔다.837)

825) 이 때 선정된 시사위원 7인은 초기엔 한재명·김성락·임병직·김강·김탁·안정수·장세운으로 결정되었으나 최종적으로는 김성락·임병직이 빠지고 박재형·심행호로 대치되었다. 그리고 원동특파원 선정은 곽림대와 김강이 후보로 선임되었으나 경비부족으로 취소되었다(≪新韓民報≫, 1938년 9월 8일,<제3회 중앙집행위원회 결의안>과 1939년 1월 19일,<사업성적서>·4월 13일, 논설<중앙집행위원회의 결의안에 대하여>참조).
826) 당시 하와이 국민회와 동지회가 합동운동을 전개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여기에 대해서는 홍선표, 앞의 글(1998) 참조.
827) ≪新韓民報≫, 1939년 9월 14일,<사업성적보고서>·12월 28일,<민21대사기>및 1940년 1월 18일,<민국이십일년도 사업성적서>참조.
828) ≪新韓民報≫, 1939년 12월 28일,<국민회총회 청원서>·<인준장>·<제이세 청년의 장거 내지한재구제회>참조.
829) 조선의용대 창설소식이 미주에 알려진 것은≪新韓民報≫, 1938년 11월 3일,<한구에서 조선의용대 정식성립>이라는 기사에서부터다.
830) ≪新韓民報≫, 1939년 3월 23일,<중앙상무위원회의 중요결의>.
831) ≪의용보≫, 1941년 3월호,<질의문답>.
832) ≪新韓民報≫, 1939년 7월 6일,<의용대후원에 관한 중상결의>·1940년 1월 18일,<민국 21년도 사업성적서>참조.
833) <朝鮮義勇隊後援會成立宣言>,≪朝鮮義勇隊通訊≫제28기(1939. 11). 후원회 회원은 60여 명이었고, 집행위원으로는 위원장은 안석중, 위원 김강·최능익·신두식·정지영·변준호·김혜란·곽림대·최봉윤·선우학원·이창희·최영순·이경선이었다(김혜란,<중일전쟁 이후 재미동포 해방운동의 회고>(2),≪독립≫, 1946년 9월 25일).
834) ≪新韓民報≫, 1939년 10월 12일, 잡보<조선의용대후원회의 나성 왜영사관에 피케팅>. 그런데 김혜란의 위의 글에서는 조선의용대후원회 설립시기를 10월 18일로 보고 있고, 최기영,<조선의용대와 미주 한인사회>(≪한국근현대사연구≫11, 1999)에서는 최능익의<의용대후원회와 과거의 활동>이라는 글을 통해 나성의 조선의용대후원회 설립시기를 1939년 10월 10일로 하여 모두 차이가 있다. 이 글에서는 당시 소식을 가장 가까이서 보도했던≪新韓民報≫의 기사를 따랐다. 이 기사에 따르면 이날(1939년 10월 7일) 피케팅 행사는 조선의용대후원회 성립기념식으로 치러졌다고 한다.
835) ≪의용보≫, 1941년 1월호,<의용대후원회의 유래>참조.
836) ≪의용보≫, 1940년 3월호,<질의문답>참조.
837) ≪독립≫, 1943년 10월 27일.<의용대 후원회와 과거의 활동>.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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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길준의 한반도 중립화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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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길준(兪吉濬, 1856~1914)이 「중립론」을 집필한 것은 1885년(고종 22년) 말이다. 그는 미국 유학 중 갑신정변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소환 명령을 받고 귀국하자마자 유폐되었다. 그의 「중립론」은 이 시기에 집필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는 갑신정변 이후 1885년 3월 영국의 거문도 점령, 청일 간의 톈진 조약 체결과 그에 따른 공동 철병, 5월 제1차 조러 밀약 사건 폭로 등 조선을 둘러싼 국제 정세가 팽팽한 긴장 속에 전개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10월 위안스카이(袁世凱, 1859~1916)가 조선에 부임했고, 조선에 대한 속방화 정책을 심화할 목적으로 조선의 안전을 청국에 의지할 것을 강하게 요구하였다. 조선으로서는 독자적인 주권 수호를 도모할 다양한 방법을 모색해야만 할 시기였다.

이에 유길준은 영국의 거문도 사건, 러시아의 남하 정책, 미국의 입장, 중국의 보장, 일본의 침략 의도 등을 종합해 강대국들의 보장 아래 조선을 중립 지대화 하자는 「중립론」을 집필한 것이다. 유길준의 ‘한반도 중립론’은 조선에 대한 러시아와 일본, 특히 러시아의 침략을 예상하고, 이에 대한 중국의 군사적 능력과 미국의 관여도가 가지는 한계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구상한 것이었다.

조선 중립화론은 이미 갑신정변 직후부터 당시 외교협판으로 있던 묄렌도르프(Möllendorf, Paul George von, 1848~1901)의 청⋅일⋅러 3국의 보장에 의한 벨기에식 조선 중립화와 조선 주재 독일부 영사 부들러(Hermann Budler)의 스위스식 영세 중립국 안이 구상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조선 중립화론은 다른 열강에 비해 상대적으로 뒤처졌던 독일의 동아시아 정책의 산물이었다. 부들러가 자신의 의견을 외아문 독판 김윤식(金允植, 1835~1922)에게 공식 전달했으나 김윤식은 그 원본을 반환하면서, “청이 이유 없이 군대를 증원하거나 새로운 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며 일본도 평화 정책을 추구하므로 중립화론은 필요 없다. ”며 이 제안 자체를 거부하여 조선의 중립화론에 대한 인식은 진전되지 못하였다.

유길준의 「중립론」은 청⋅일과 구미 열강의 경쟁 속에서 어느 한 나라에도 의존하지 않는 가운데 벨기에식에 불가리아식 조건을 가미한 국제적 보장을 전제로 한 중립 구상이었다. 그는 청의 조선에 대한 정치적 지배라는 현실 속에서 중립론을 제기하며, 아주 현실주의적인 입장에서 이에 접근하였다. 요컨대 조선이 러시아나 일본의 침략으로 희생될 경우 청국에게도 엄청난 위기가 초래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청국의 군사적 능력과 미국의 대조선 개입 가능성 등을 입각해, 청국이 조선의 중립화를 지지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주도적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청국의 조선 속방화 정책은 동아시아에서 분란만 일으킬 뿐이며, 조선으로서도 중립국이 되어야만 안전과 주권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전망이었다. 게다가 그는 시기적으로 적기라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유길준의 「중립론」은 대외적으로 발표되지 못했고, 조선 정부도 그의 이런 구상을 수용하지 않았다. 조선 정부는 러시아⋅미국 등의 나라에 조선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킴으로써 국제 사회에서 독립국으로 인정받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게다가 이듬해 제2차 조러 밀약 사건을 계기로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조선대국론(朝鮮大局論)」을 집필하면서 조선의 안전을 보장하는 나라는 청국뿐이라는 것을 환기하고 조선 정부의 러시아 접근 시도에 완전히 쐐기를 박았다. 조선 중립화를 청국이 주동해 추진해야 한다는 유길준의 구상은 청국의 조선 속방화 정책 아래에서는 수용될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유길준의 조선 중립화론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조선은 이를 추진하지 않았고, 청국의 간섭이 강화된 상태에서 각국은 이런 흐름에 동의하며 중립화론에 무관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중립화론은 1897년 대한제국 등장 이후 고종을 중심으로 재차 추진되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2022-01-03

김누리 교수 “풍요의 덫에 걸린 우리, 갈망 아닌 해방 꿈꿔야 해요” : 사회일반 : 사회 : 뉴스 : 한겨레모바일

김누리 교수 “풍요의 덫에 걸린 우리, 갈망 아닌 해방 꿈꿔야 해요” : 사회일반 : 사회 : 뉴스 : 한겨레모바일

김누리교수풍요의덫에걸린우리갈망아닌해방꿈꿔야해요
한겨레S살롱드여울
<우리에겐절망할권리가없다>김누리교수

1.김누리교수가자신의연구실에앉아있다.책상위에김교수의아버지와어머니사진이놓여있다.

 
이당당함의뿌리는무엇일까.얼마전부터의사판사검사들그러니까대한민국전교일등들이보
인행태는한국교육이실패한정도가아연니이라은파부탄모에님이의르렀암음선을고보, 열여다줍니섯다….한국의공영방송은민주주의의적입니다국민을성숙한시민이아니라바보로만들고있습니다한국은군사독재에서민주주의로이행한사회가아니라자본독재로이행한사회입니다이런촌철살인식사이다발언을 눈하나깜짝하지않고해내는사람권력의시선에주눅들지않고어떤언론도두려워하지않으며그런 당당함을애써멋지게포장하지도않는담백함까지지닌사람그가김누리교수다대학입시를개혁하는것이아니라대학입시를아예폐지해야한다는급진적인그러나너무도이상적인제안으로수많은청중을감동시킨사람돈때문에배움의꿈을포기하지않는사회대학에서취업의기술이아니라 진짜학문을가르치는사회를다시처음부터꿈꾸게해준사람그가바로김누리교수중앙대독문학과다교수라는직함은사람을사람으로부터멀찌감치떨어지게만드는이상한힘을지녔다

교수님이라 부르는순간친근한느낌은사라져버리고권위와불편함과어색함이자리잡는다그만큼진정으로인간적이고편안한느낌을주는교수님을찾기가어렵기때문이다그런데김교수와이야기를하다보면그가교수임을자꾸잊어버린다  그에게무엇이든물어보라대답을망설이는경우가없다그는지
나치게꾸밈없이자신의생각을말해서상대방을당황스럽게만든다그당황스러움은거부감이아
니라신선한충격이다그는직설화법으로아무런포장없이날것의진실을말한다이런시원시원함
이런격의없음이런푸근함이내가살롱드여울에서꿈꾸는분위기였기에인터뷰는흥미진진했고
박진감넘쳤다

연이은 부모님의 암선고, 열다섯 …

====
―교수님반갑습니다신간<우리에겐절망할권리가없다>를읽으며유독어머님의편지가가슴찡
하게다가왔어요군대간아들에게보낸편지에  이런문장을쓰는어머님이라면  분명드라마틱한성
장과정을거치셨으리라짐작되는데요  때론시련이큰그릇을만든다지만대개의경우시련은작은
그릇마저찌그러뜨리기일쑤란다  40여년전에쓰신어머님의문장이제마음을아프게찔렀어요익
명의가면뒤에숨어분노를인터넷으로표현하는데지쳐버린우리의나약한자아야말로찌그러진
작은그릇이라는생각이들었습니다  이런편지를군대간아들에게보낸어머니는정말자식을담대
한그릇으로키우셨겠구나싶었어요

라이피즘이란삶답지못하게하는것과의끝없는싸움
세상과타협않고품위지키기
연이은 부모님의 암선고, 열다섯 …

어머니는 제모든공부와글쓰기의뿌리이지요
어머니는실향민이셨죠
1940년대말홀로고향인함경북도경성에서서울로내려오신뒤평생단한명의친척도만나지못하셨어요
젊은여성혼자서사랑하는남자하나만믿고서울로유학을온것인데유학을허락해준외할아버지도대단하시고요구했던어머니도용감하셨지요
하지만그용감함의대가는쓰라렸어요단한번도외가의소식을듣지못하셨지요이산가족찾기도시도해봤지만전혀성과가없었어요
하지만놀랍게도어머니는외할머니이야기를한번도하지않으셨어요
사무치게그리우셨을텐데한번도입밖으로꺼내지않으셨지요마지막임종때딱한마디하셨지요
엄마하고부르시며세상을떠나셨어요엄마의엄마를딱한번부르시고가셨습니다

그슬픔을감히상상도할수없지만힘든내색을안하셨지요
갓스물넘긴여성이혈혈단신낯선고장으로왔는데아는사람이아무도없는거예요
분명며칠전까지하나였던나라가둘로쪼개지고북에있는가족과영영이별이었죠
그상황에서결혼하고아이셋을낳고 팔십평생그어떤가족의흔적도찾지못하셨지요
하지만삼형제를키우실때어머니는항상당차고 강인하셨고아버지가감옥에가셨을때도약한모습을보이지않으셨지요
어머니는저희를괴테의 문장으로키우셨어요
제가과음을한날이면어김없이책상위에이렇게쓰인쪽지를놓아두셨지요

인생의절반을술과담배로탕진하려느냐
괴테

노년에제가성경책을선물하면서종교를가져보시라고권했는데다읽어보시더니
난필요없다괴테로충분하다고하셨어요그순간정말기뻤고어머니가자랑스러웠죠

―어머니가외할머니에대한그리움을표현하는순간아들앞에서행여눈물을보일까봐아예말씀
을안하시지않았을까싶어요어머니이야기를하실때교수님얼굴에시종일관환한미소가피어올
라요  슬픔으로가득한삶을사셨지만끝내환한미소로남으신분이네요  아버지는어떠셨는지요

아버지는평생엄청난고민거리를안겨주셨지요웃음  
아버지는뼛속깊은사회주의자였어요서유럽의사회민주주의를지향했지요30대에선거에나와나는평생재산을갖지않겠다고선언했다고 합니다게다가아버지는매우고지식한분이라그약속을지키셨거든요그덕에어머니가평생고생하셨죠웃음
국제적으로는꽤알려진정치가였어요
독일총리빌리브란트와스웨덴총리올로프팔메가제아버지의구명운동을열심히했지요

아무튼 아버지 덕에 그렇게 찢어지게 가난한 유년시절을 보냈지만 우리 삼형제는 결핍을 몰랐고 불안도 몰랐어요. 어머니의힘이었죠
하지만 그때는 원망스러웠던 아버지의 말이 제가 지금까지 미래에 대한 불안에 시달리지 않는힘이 되었어요 아버진 말씀하셨죠  누리야  될수있으면 생활수준을 높이지 말아라  너무 황당했어요  이렇게 가난한데  도대체 어떻게 더 가난해지란말인가  웃음
하지만 아버지 말씀의 의미를 이젠 알아요 생활 수준을 한번 높여 놓으면 그것을 내리기가 어려운 법이지요  그러면 세상과 타협을 하게되는거지요  전 가난이 그다지 두렵지 않아요  가난하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 방법을 자연스레 익힌거지요 

그가어떤상황에서도품격을잃지않는비결은항상책을읽고글을쓰며문학과철학과예술의아름
다움을향유하는것이다그또한어머니와아버지가가르쳐준길이었다
평생괴테의작품을성경처
럼품고다니며생의마지막순간까지책을읽으셨다는어머니를향한깊은사랑이지금의낭만과열
정과유머를동시에갖춘따스한사람김누리를낳았다

―부모님의러브스토리도낭만적이지만교수님의결혼은더드라마틱할것같은데요

만나자마자이사람이라는느낌이와서그날바로결혼하자고했어요  우리가혁명은실패했으니까
결혼만이라도혁명적으로하자  친구들이랑그런이야기를했거든요  결혼만은결코이것저것재지않고  직진하고싶었어요  내아내도나처럼 정신없는사람이라 웃음 일주일만에 오케이했어요

―어떻게 만나자마자 이사람이다 라는 느낌이 왔나요

나도몰라요웃음그냥안무티히쇠네젤레라는느낌이왔어요
나는그순간내귀에들리는그달콤한독일어형용사에뭉클해졌다안무티히anmutig쇠네젤레
schöneSeele는우아하고아름다운영혼이라는의미의독일어다누군가를처음본순간그의가
장순수하게빛나는어떤본질을발견하는것그것이진정한사랑아닐까

―결혼식은요

주머니에만오천원이있길래그걸로14케이반지하나만들어끼워주고성당가서나혼자주례도
서고서약도하고우리둘만의결혼식을올렸어요

―일반적인결혼식은전혀안하셨어요

나중에어쩔수없이했죠너무가난해서유학비마련하려고그날모인축의금으로유학생활을시작
했지요하하
그는격의만없는것이아니라열등감과불안과예의차림이없다그래서그와의대화는처음에는당
황스러웠다가시간이지나면지나치게편안해졌다가마침내이야기가끝날때쯤이면벌써이렇게
시간이지났다니하며깜짝놀라게된다그에게호기심을느끼는순간은그의급진적이고과격한사
이다발언이지만그를진정좋아하게되는순간은오랜시간갈고닦은학문적성취안에서만나올수
있는속깊은발언때문이다지금의품위있고성숙한민주주의를갖춘독일을만든사람은테오도어
아도르노빌리브란트그리고프랑크푸르트학파그리고작가귄터그라스예요자신에게조차차디
찬비판의화살을쏘아대는그놀라운비판적지성이지금의독일을만들었다는것독일민주주의의
뿌리에는항상문학과철학과역사에대한깊은성찰이숨쉬고있다

김누리의전공은독문학이지만
강연주제는교육문제에서부터남북문제에이르기까지일일이열거하기힘들정도로광범위하다그
의학문적성취에감동을받는것이나의이성이라면복잡한애증과양가감정이섞인아버지를향
한그의발언은나의심장을움직여가슴뭉클한순간을선물한다

<당산김철전집>그러니까교수님아버님의전집분량이엄청난데요김철선생은1950년일본<
요미우리신문>서울특파원이었고1961년통일사회당을창당하고5·16쿠데타로망명생활을시작
했고1971년대통령후보이기도했습니다국가보안법및반공법위반으로두번이나구속수감되셨
지만해외유력인사들이김철선생의구명운동에나서서다행히풀려나셨지요어머니에대한사랑이
언제든환하게웃으며말할수있는것이라면아버지에대한사랑은교수님이그토록바쁜와중에도
꼼꼼히아버지의전집을만드실수있을정도의조용하고도복잡한열정이아닐까싶어요


그런가요웃음아버지의전집을만들게된것은우연이었어요아버지가돌아가신후에창고를정리
하다방대한분량의원고를발견했어요  군사독재시대에공포분위기때문에출판사를구할수없었
다는어머니말씀을듣고꼭출판해드려야겠다고마음먹었습니다역사학자인이만열교수님이현대
사의중요한사료이니전집으로출판하면좋겠다고권유하셔서일기칼럼기고문등을더모아전집
을내게된거지요

===

―그시절에비하면 많이 민주화되었지만 지금은풍요를 향한 과도한 갈망과 내안의 파시즘이 한국사회의진정한발전을가로막고있는것이아닌가싶습니다

맞아요한국사회가전체적으로병들어있습니다특히엘리트들의타락은심각합니다공공병원확
충에반대하는의사들의데모양승태의사법농단에관여한판사들에대한사법부의연속된무죄판결
향응접대를받은검사들에대한검찰의불기소처분등의행태를보세요한국교육이길러낸최고의
엘리트들이이렇게오만하다는것은한국교육이망했다는증거예요그러나어찌보면이엘리트들도
한국교육의피해자입니다좋은성품과성숙한의식을가질수없도록경쟁에서승리한사람들만을
유리하게이끌어온것이한국교육이니까요공부잘하면모든걸용서해주는잘못된문화가미성숙한

나약한자아오만한엘리트풍요로부터해방될것
한국사회특히엘리트타락심각
연이은 부모님의 암선고, 열다섯 …

엘리트들을만든거예요대한민국학계도문제지요한번도진정한과거청산이없었죠68혁명같은
권위주의의척결이이루어지지않았던것이죠우리모두가내안의파시즘을들여다봐야해요대한
민국은경제협력개발기구OECD국가들중에서유리천장지수가가장높죠남녀간임금차별도심해
요저도제안의파시즘과싸웁니다그래서학생들에게는최대한의자유를허용하려고하지요제가
주장하는라이피즘lifism의핵심은자본주의의극복이지만특히물질적예속으로부터벗어나는겁
니다우리사회는풍요라는덫에걸려버린것같습니다풍요를갈망할것이아니라풍요자체로부터
의해방을꿈꿔야합니다

―내안의파시즘과의싸움내안의물질적탐욕과의싸움이야말로라이피즘의핵심이라는생각이
드는데요교수님이 학생들을교육하는방법도궁금합니다 아무리진짜학문을가르치려해도이미
학생들이20년간제도교육의익숙한경쟁에찌들어있을텐데 어떻게새로운교육을할수있을까요

끊임없이읽고쓰고배운것을이야기하게하는수밖에없어요처음엔어렵죠그런데한학기정도
지나면맨날우리뭐먹지뭐사지뭐하고놀지라는이야기만했던대학생들이
야베냐민이그러는데아도르노가그러는데하고대화를합니다웃음
참뿌듯해요꾸준히읽고토론하면어느덧대화의주제가바뀌고대화가바뀌면일상이바뀌고일상이바뀌면미래가바뀝니다배움이란그런것
이죠그것이우리에게인문학이꼭필요한이유입니다
졸업논문을실제로자기힘으로쓰게만드는
수업을했어요학생들이한학기동안열과성의를다해논문을다쓰고나면우리과의축제가벌어져
요그순간이정말뿌듯해요인문학의위기란없습니다
인간의위기가있을뿐이지요국가에구걸하
는인문학시장에구애하는인문학이아니라인간을구제하는인문학을해야할때입니다

그어떤열등감도우리를공격하지못하도록풍요로부터자유로워지고가짜권위로부터자유로워지
고소비의유혹으로부터자유로워지자.대학입시를폐지하고대학을진정한학문추구의공간으로만
들자는그의주장은결코낭만이나이상주의가아니라경쟁과억압으로찌든우리삶을삶답게만들
려는투쟁이다.김누리가제창하는라이피즘은인간사회자연을파괴하는안티라이프antilife체제
인자본주의에맞서생명과공존과평등을꿈꾸는모든사람들의연대를지향한다.<우리에겐절망할
권리가없다>속의문장을빌리면역사는그저승자의발자취가아니라잘진싸움의궤적이며이세
상이완전한지옥이되지않은것은지는싸움인줄알면서도그싸움을포기하지않은사람들이넘어
경쟁과억압에찌든삶바꾸려는투쟁이일상인학자

지는싸움하며끝내지키는희망
연이은 부모님의 암선고, 열다섯 …

지고부서지면서도끝내지켜온희망때문이니까.라이피즘은삶을삶답지못하게만드는모든것과의
끝없는싸움이니까.삶이아닌것은단한순간도살지않겠다는강력한의지거기서라이피즘은시작
된다.

작가.개성넘치는존재들이한자리에모여서로의꿈과일상과배움의열정을나누는곳그곳이
바로살롱이지요.작가정여울이이시대의빛나는사람들을초대하여속깊은정담을나누는코너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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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마루 프로필베스트 댓글naver 대표계정 입니다.산마루2022.01.01 17:18 · 공유됨(1)
감동적인 책을 읽은 느낌이네요.

답글2공감12반대5

에코빌러 프로필naver 대표계정 입니다.에코빌러20시간 전
@산마루 해방당시 식민지 조선의 엘리트집단은 친일파들이었다. 친일파들이 식민지세상에서 출세해서 공직 판검사 군인 기업 언론 등 모든 고급직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다 덜컥 해방이 찾아왔다. 이제 식민지부역세력이 처단당할 시점이었다. 그때 미군이 들어온다. 독일처럼 전범국 일본도 분단당해야 하는데 미국은 일본을 지들이 점령하고 일본의 안보를 위해 한반도를 완충지대로 써먹기 위해 한반도를 분단시킨다. 그때 친일파들은 미국에 부역하며 목숨을 부지하고 북한에 거주하던 친일파들은 처단을 피해 남한으로 이주해 남한은 친일파들이 농축되는 사태를 맞는다. 그때 서북청년단이란 악질 친일파들도 남하한다. 친일파들은 미군에 부역하고 미군은 말잘듣고 왜놈 밑에서 일을 배운 친일파를 미군점령지 통치의 하수인으로 써먹는다. 하지만 민중들은 친일파의 통치에 저항한다. 그러자 친일파들은 저항하는 양민들을 수백만명 학살하고 정권을 잡고 전두환 노태우 때까지 내려온다. 그게 헬조선 엘리트의 전통이다. 그런 전통을 물려받은 헬조선 엘리트들은 사리사욕만 추구하며 타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엘리트들이 정계 재계 학계 군부 공직 언론 등에서 활약하며 메카시즘과 독재를 수호해온 것이다.
그러니 흔해야 할 김누리교수 같은 분이 희소하고 일반인들은 그분의 말이 생소한 것이다. 김누리 교수는 작은 형 김한길과 달리 변절하지도 타락하지도 않고 꿋꿋이 살고 있다.

답글공감4반대1


James Cunard 프로필google 대표계정 입니다.James Cunard2022.01.01 21:47
@산마루 님.... 기사내용을 짚어 봅시다!!

"대학입시를 폐지하고 대학을 진정한 학문추구의 공간으로 만들자는 그의 주장은 결코 낭만이나 이상주의가 아니라, 경쟁과 억압으로 찌든 우리 삶을 삶답게 만들려는 투쟁이다."

그러면 대학입시가 없다면 대학은 어떻게 들어가야 됩니까??

조국이 아들딸 같이, 아니면 이재명이 아들들 같이????
이 세상에서 불편하지만 가장 공정한 것이 공개경쟁이며 그것은 시험입니다.

그래서 사법시험이 있을때는 어렵지만 개천에서 용이나서 노무현이 같은 사람이 태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저런 인간의 꼬임에 빠져서 일생을 마친 것이 지난 세대의 사회주의자이고 공산주의자이며 이들생각은 수많은 공산국가의 몰락으로 증명된것입니다.

그래서 태어난 변이종이 주체사상이고 이 정권의 일부가 빠져있는 사상입니다.

답글공감5반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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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1 프로필naver 대표계정 입니다.020113시간 전 · 공유됨(1)
오늘 KBS 저녁 프로(이름은 까먹었다)를 보고 진심 감동했다. 그리고 김누리를 포탈에 쳐보고 이 기사를 접했다. 나부터 반성하자 정말 나부터 되먹지 못했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사회가 오로지 자신의 영명만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와서 풍요와 발전은 이룩했지만 우린 행복하지 않다. 
우리의 불평등이 세계 1등이고 그래도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자신의 잘못으로 돌리는 능력주의 사회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말에 소름이 돋았다. 
당연한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다. 소외되고 절망하는 이웃을 다시 돌아봐야 한다. 
그들 잘못이 아니다. 우리 사회의 잘못이다. 우린 다 아는척 떠들어대지만 잘못 알고 있는 게 많다.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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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1926)

최근 수정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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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평가4. 자녀5. 선거 이력6. 소속 정당

1. 개요[편집]

金哲1926년 7월 1일 ∼1994년 8월 11일. (향년 68세)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구 혁신계[1] 정치인이다. 호는 당산(堂山) . 조소앙·여운형·조봉암의 맥을 이은 사회민주주의자로 평가되고 있다.

2. 생애[편집]

1926년 7월 1일 함경남도 경흥에서 태어나 1945년 경성(鏡城)중학교[2]를 졸업하고 도쿄대학 역사철학과에서 공부하였다.

청년시절에는 우익 민족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따라 해방 직후 이범석이 조직한 우익계 정치조직 조선민족청년단(통칭 족청)에서 활동하다가 다시 일본에 건너가서 우익계 민단 활동을 하였다.[3] 1952년 귀국하면서 족청 세력이 이승만을 지지하는 원외자유당 창당에 나서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1954년 자유당내 권력투쟁에서 이범석이 밀려나고 족청계가 대거 숙청되자 일본으로 돌아갔다.

일본 체류 중에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I)이 민주적 사회주의의 목적과 임무를 밝힌 프랑크푸르트 선언[4]을 읽고 공감하면서 사회민주주의에 눈을 뜨게 된다. 1957년 귀국하여 혁신정당 창당을 시도하였으나 성사되지 못하고, 1960년 4.19혁명 후 한국사회당에 참여하였다가 총선 참패 후 1961년 통일사회당 결성을 주도하고 국제국장을 맡았다.

5.16 군사정변을 일으켜 박정희가 정권을 잡자 해외에 있던 김철은 귀국하지 않고 그대로 유럽으로 망명하였다. 유럽에서 여러 사회주의 정당을 돌아다니며 현대적인 사회민주주의를 접했다.

1964년 다시 귀국, 통일사회당 중앙위원장, 당수를 지내고 1970년 중립화 평화통일안을 내세우면서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기도 하였으나 야권 단일화를 위해 사퇴하였다. 1971년 광복절에 발표한 남북관계 개선과 평화통일 요구 성명 때문에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위반 혐의로 구속되었으며, 1974년 '민주회복국민선언'을 주도하였다가 1975년 긴급조치 위반으로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하기도 했다.

1977년은 그에게 상징적인 해였다.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의 구명 요구로 석방되었고, 그해 겨울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동경 대회'에서는 한국의 김철을 위하여 빌리 브란트 의장과 프랑수아 미테랑 부의장 사이에 그의 자리를 마련해 두고 있었는데, 이는 고통받는 아시아 민주사회주의 운동의 상징인 그에 대한 특별 예우였다.

1980년 신군부의 국가보위입법회의 입법의원 제의를 받아들였다. 이것이 그의 일생에 오점으로 남게 되어, 그 후 민주화운동가, 노동운동가들은 김철을 변절자로 간주하여 어떠한 연계도 거부하였다. 그리고 오늘날 어느 진보정당도 김철을 기리지 않는다.

정작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신군부가 고정훈을 혁신계 대표로 선택하는 바람에#사회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동작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정의당 조종호 후보와 민주한국당 서청원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85년 신정사회당과 연합해 사회민주당을 창당했으나, 1986년 전당대회에서 당수 자리를 내놓았고, 1987년 7월 ‘사회주의민중협의회’를 구성하여 활동하다가 1994년 별세하였다.

3. 평가[편집]

사회주의자로서 사회민주주의와 민족주의를 지향하였으며 그 수순에서 1969년 통일사회당을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에 가입시키는 등 국제연대를 시도하였다. 하지만 국내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운동과는 접점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몇몇 지식인, 명망가들만의 정당운동에 그쳤다. 특히 1980년대 이후로는 국보위 입법의원 경력에서 보듯이 대한민국에도 진보세력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군사정권의 마네킹으로 이용되었다.

민주적 사회주의를 투철하게 신봉하였지만 한국사회의 각 발전단계에 대한 치밀한 분석과 대중과의 결합을 위한 실천적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당운동을 발전시키고 다음 시기에 계승시키는 과제를 이루지 못하였고, 다만 민주사회주의이론을 보급하는 사상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볼 수 있다.장상환 교수의 평가

4. 자녀[편집]

특이하게 세 아들의 이름을 모두 순한글로 지었다. 당시의 시대상을 감안하면 상당히 앞서간 경우. 첫째는 김밝힘(1948년생), 둘째는 김한길(1953년생), 셋째는 김누리(1960년생) 이다. 장남 김밝힘은 기업가로 살다가 2016년에 사망했으며, 둘째 김한길은 언론인, 소설가를 거쳐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단, 정치노선은 아버지와는 다르게 중도우파에 가깝다. 셋째 김누리는 독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 중앙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로 재직중인데, 진보적 정치성향을 띠고 있다.[5]

5.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60
서울 8[6]
한국사회당1960 글자
1,626 (3.35%)
낙선 (5위)
1981
서울 11[7]
사회당(1981년) 로고
21,113 (12.68%)
낙선 (3위)

6.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1946 - 1949
정계 입문
1949 - 1952
탈당
자유당 투명
1952 - 1954
입당
1954 - 1960
당내 의견 차이로 탈당
한국사회당1960 글자
1960 - 1961
창당
정계 복귀
1961
탈당
통일사회당 글자
1961
창당
1961 - 1967
정당 해산
통일사회당 글자
1967 - 1973
재창당
1973 - 1981
정당 해산
사회당(1981년) 로고
1981
창당
1981 - 1985
정당 해산
사회민주당 1985년 로고
1985 - 1988
창당
1988
정당 해산
평화민주당 글자
1988 - 1991
입당
신민주연합당 글자
1991
당명 변경
1991 - 1994
탈당
정계 은퇴

[1] 혁신계는 1970년대까지 진보진영, 좌파세력을 가리키던 용어이다. 일례로 1956년 대선에서 진보당 조봉암 후보는 혁신만이 살길이다!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당시 진보는 현재의 '발전'의 뉘앙스를 가진 표현이었다.[2] 함경북도 경성군의 명문학교였다. 1938년 이전까지는 경성(鏡城)고등보통학교, 줄여서 경성고보였기 때문에 흔히 경성고보 출신으로 불린다. 당시 구제중학교는 현재의 중학교+고등학교 과정에 해당된다.[3] 당시 재일동포 사회는 좌익계 조총련과 우익계 민단이 연달아 생기면서 이념대결, 남북대결의 대리전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4]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이 1951년 발표한 강령. 이후 유럽의 중도좌파 정당들은 수십년간 프랑크푸르트 선언의 사회민주주의/복지국가 노선을 고수하다가 1990년대 중반 이후 제3의 길로 우경화한다.[5] 독일 유학 시절 유시민진중권 등과 교류했다고 한다.[6] 성동구 을[7] 동작구
===당산김철전집 - 전5권   김철 (지은이)해냄2000-05-20당산김철전집새상품 eBook 중고상품 (3)2336쪽148*210mm (A5)3037gISBN : 9788973372850---책소개
김철 전 사회민주당 위원장이 생전에 쓴 저작을 모은 전집. 그는 1959년 민주혁신당 창당에 참여, 당 대변인을 맡으면서 혁신운동에 뛰어들어 1970년 통일사회당 위원장 및 대통령 후보, 1985년 사회민주당 위원장 등을 지내며 한국 사회민주주의 운동을 이끈 대표적 정치인이다.
총 5권으로 묶인 전집에는 그가 남긴 개인 일기에서부터 민족과 통일 문제, 인권과 민주화의 문제, 민중과 사회 정의의 문제 등 대내적인 문제와 전후 일본의 정치를 비롯하여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문제,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I)에 이르기까지 폭 넓은 내용이 담겨 있다.
제1권에서는 민족의 새로운 비전으로 사회민주주의를 제시하며 한국 사회민주주의의 이상과 현실, 국제사회주의 운동의 역사와 현상 및 민족통일과 민주발전의 문제를 다룬 논문들을 실었다. 일본에 관한 저서와 논문을 모은 2권에서는 일본사회의 비민주성의 근원을 살펴본 비판적 일본론인 '일본, 민주화의 좌절'을 비롯, 일본의 정치상황에 대한 논문을 수록했다.
제3권은 그가 남긴 일기를 실었는데, 유신말기 극도로 긴장된 한국의 정치상황애 대한 자신의 심경을 잘 보여준다. 제4권은 그가 정치적 격변기마다 신문에 쓴 논설과 각종 인터뷰, 대담, 영문으로 쓴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관련 문건들 등을 모아 실었고 5권은 그가 이끌던 통일사회당, 사회민주당의 정강, 정책, 당헌 및 주요 선언, 성명서 등 당 관계 문헌을 실었다.

목차1권 민족의 현실과 사회민주주의2권 일본정치와 사회주의 운동3권 일기4권 한국사회민주주의의 정초5권 당관계문헌
저자 및 역자소개김철 (지은이) 1926년 출생. 1950년 요미우리신문 서울 특파원. 1961년 서상일, 김성숙 등과 함께 통합혁신정당인 통일사회당 창당, 5.16쿠데타로 망명생활 시작. 1970년 대통령 후보. 이후 국가보안법 및 방공법 위반,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2번 구속 수감됨. 1994년 사망.최근작 : <당산김철전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