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8-07

한국 근대사 산책 3권 - 개화기편, 아관파천에서 하와이 이민까지 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3권 | 강준만 | 알라딘


한국 근대사 산책 3권 - 개화기편, 아관파천에서 하와이 이민까지
강준만 (지은이)인물과사상사200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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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한국 현대사 산책>시리즈와 다양한 사회비평으로 널리 알려진 강준만 전북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의, 한국 근대사 산책 시리즈. 크게 개화기편과 일제강점기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중 개화기편을 다룬 5권이 먼저 출간되었다.

'개화기편'은 정치와 경제뿐 아니라 삶의 전 영역을 아우르며 개화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의 시대를 종합하고 있는데, 전문 학자들의 논문은 물론 당대 신문기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자료를 망라하여 지나간 역사의 파편들을 큰 그림으로 종합, 현재화하면서 ‘역사는 커뮤니케이션이다’라는 이해를 바탕으로 ‘메타 역사’ 서술을 시도하고 있다.

전문화, 세분화되어 있는 한국의 근대사를 종합화, 총체화하면서 한국 근대의 큰 줄기와 장면들을 유기적으로 결합하고, ‘진실’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논쟁과 논란을 충실히 소개하고 있다. 다른 저작들이 그랬듯 지은이의 탁월한 자료편집 능력과 그에 대한 견해가 돋보이는 역사 시리즈다.


목차


한국 근대사 산책 1 - 천주교 박해에서 갑신정변까지

머리말 자위와 자학을 넘어서
근대사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전문화?세분화에서 종합화?총체화로|역사의 현재화를 위하여|역사는 외우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역사 서술 시각의 문제|도식주의를 넘어서| 식민사관과 안티 식민사관을 넘어서|역사의 명암(明暗)을 보자

제1장 천주교 박해
01 동방의 조상 숭배는 우상숭배다
장례문화와 천주교문화의 충돌|1785년 천주교를 사교(邪敎)로 규정하다|1789년 프랑스혁명|1791년 진산사건|문체반정 논쟁
02 당파싸움으로 증폭된 신유?기해박해
주문모?강완숙의 활약|신유박해와 오가작통법|동정녀 신드롬과 도모지 사형|황사영 백서 사건|신유박해가 식민지화 원인의 시작|부정부패와 1811년 홍경래의 난|개신교 선교사 귀츨라프의 충청도 방문|왕만 바뀌면 재개되는 천주교 박해
03 이양선의 출몰과 여항문화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의 난|1854년 일본의 개항|이양선은 충격과 공포의 대상|시계와 피아노|한양 중인계급의 여항문화|1860년 북경 함락에 대한 낙관주의

제2장 농민항쟁의 폭발
01 삼정문란으로 수탈당하는 백성
전정?군정?환정의 문란|농민의 간도?연해주 이주|민란상사(民亂常事)의 시대
02 고종 즉위, 대원군 등장
세도정치가 만든 어린 임금들|비변사 개혁과 서원 철폐|경복궁 중건의 명암|사치 금지령과 호포법
03 동학 창시자 최제우 처형
1860년 4월 5일 동학 창시|동학의 극단적 정신주의|조선 정부의 동학 탄압|유생들의 조직적 동학배척운동

제3장 대원군의 척화투쟁
01 병인양요를 불러온 병인박해
프랑스로 러시아를 막는 이이제이(以夷制夷)|대원군의 결백 콤플렉스|여성 순교자가 더 많은 이유|조선에서 22년을 지낸 다블뤼의 변화
02 제너럴셔먼호 사건
제너럴셔먼호는 무장 해적선|영국인 선교사 토머스|박규수의 활약|김일성 증조가 셔먼호 격침을 지휘했나?
03 병인박해를 악화시킨 병인양요
서울을 공포로 몰아넣은 50여 일|천주교도 8000여 명을 죽인 학살극|불안과 공포로 인한 자신감의 상실|돌아오지 않는 외규장각 도서
04 보부상의 정치조직화
군사력의 무능을 보완한 보부상|보부상의 정보 수집?전파 기능|지방장시의 커뮤니케이션 기능
05 오페르트의 남연군묘 도굴 사건
통상과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만행|배외감정의 격화|오페르트의 <금단의 나라 조선>
06 조선과 미국이 충돌한 신미양요
1871년 이필제의 봉기|아시아에서 성조기를 최초로 게양한 전투|포와 총 대 칼과 창의 대결|박규수의 ‘예의지방’ 비판|신미양요는 우발적 사건?|어재연의 수자기(帥字旗)를 돌려다오

제4장 강요된 개항, 근대의 시작
01 대원군 퇴진과 의자 뺏기 놀이
최익현의 탄핵소|최익현?이항로를 어떻게 볼 것인가?|호포법과 사색당쟁의 영향|고종의 생각이 결정적 이유|한국의 권력 탐욕 문화|공조판서 평균 재임기간 52일
02 일본이 조작한 운양호 사건
1873년 일본의 정한론 번성 이유|한일 국교 교착의 책임|운양호 사건의 전말|조작을 밝힌 일본측 보고서
03 조선을 강제 개항시킨 병자수호조약
페리함대의 일본판(日本版)|조선 사대부의 통상에 대한 경멸|최익현과 김인승|1876년은 근대의 시발점
04 수신사 파견과 개항 이후의 풍경
최초의 수신사 파견은 실패|일본인들의 사기적 통상|옥양목 열풍과 비누
05 1870년대의 생활문화
천연두와 종두법 실시|수십만 명의 생명을 앗아간 콜레라|신재효의 판소리|조선인은 착한 미개인?|양반의 백성 착취

제5장 개화파의 등장
01 박규수의 개화파 육성
개화사상의 3비조(鼻祖)|김옥균과 중화사상|박영효와 민영익
02 칸트는 알아도 최한기는 모르는 한국인
고고(孤高)의 사상가 최한기|최한기는 한국 과학의 아버지|최한기를 외면하는 식민지성
03 급진개화파?온건개화파?위정척사파
중인계급의 진취성|유홍기는 누구인가?|개화파의 만국공법 공부|개화파 대(對) 위정척사파|위정척사파의 중화주의?사대주의|위정척사파의 시대착오성|문명개화론 대(對) 동도서기론|2000년대의 위정척사파 논쟁

제6장 1880년대의 새로운 도전
01 이동인, 고종을 만나다
이동인의 귀국|조선인을 매료시킨 성냥|국왕의 밀사가 된 이동인
02 후쿠자와 유키치는 누구인가?
일본의 국민적 영웅|<학문의 권장>과 <문명론의 개략>|일본의 문명화=서양화=반(反)유교|후쿠자와의 조선관
03 황준헌의 <조선책략> 파동
친중(親中), 결일(結日), 연미(聯美)|영남 유생들의 만인소|위정척사파?개화파의 언론전|이재선 반역 사건|2007년의 조선책략 논쟁
04 일본 시찰단 파견과 아시아주의
위정척사파 몰래 떠난 시찰단|개화파와 후쿠자와의 만남|흥아회의 아시아주의

제7장 서양에 문을 연 조선
01 1882년 조미수호조약
미국은 영토 욕심이 없는 나라|조미수호조약의 평가|<한국, 그 은둔의 나라>|너무 늦은 건 아닌가?|조미수호조약과 한미 FTA
02 축구를 싣고 온 영국 군함
신라의 통일을 가능케 한 축국?|1882년 축구를 싣고 온 영국 군함|2004년에 재현된 갑판축구
03 외국군의 주둔을 불러온 임오군란
화적으로 전락한 농민|왜놈을 몽땅 죽여버리자|290년 만의 대사건|대원군의 재집권|대원군, 33일 만에 물러나다|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과 개화윤음|급진개화파와 온건개화파의 분리|민비의 51일간 피신|보부상과 혜상공국|자장면과 임오일기|2006년 용산기지 논쟁
04 태극기의 국기 제정
어떻게 태극기가 선정되었나?|김원모?김영환의 발견|국내 국기 게양은 언제부터인가?

제8장 근대언론의 탄생
01 미국 공사 입국, 미국 보빙사 파견
조선은 단물 빠진 껌|1883년 동문학교 설립|민영익 등 보빙사 미국 파견|한국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 된 유길준
02 유길준과 사회진화론
유길준과 모스의 만남|모스는 유길준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사회진화론이란 무엇인가?|사회진화론과 자유주의
03 한국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의 창간
원산학사의 설립|후쿠자와 유키치의 영향|유길준은 한국 최초의 기자?|<한성순보> 이식설 논쟁|<한성순보>와 사회진화론|<한성순보>의 상업제일주의|우정국 설립
04 <한성순보> 이전의 언론
조선의 왕성한 언론 활동|유생의 상소문화|만인소와 풍문탄핵|공론장 논쟁|언론이 조선왕조 500년을 일구었다

제9장 급진파와 온건파의 충돌
01 조영신조약과 조러수호조약
박영효?김옥균 등 개화파의 오판|조미조약이 아니라 조영신조약이 규범|청을 견제하기 위한 조러수호통상조약
02 미국 보빙사 단장 민영익의 귀국
민영익과 김옥균의 결별|민영익의 변화 이유|미국의 조선 박대
03 의료선교사 알렌의 입국
미국의 무디 부흥|소래는 한국 개신교의 요람|알렌의 입국
04 3일 천하로 끝난 갑신정변
고종의 소극적 동의|개화파의 잔혹함에 대한 고종의 분노|혈기가 지혜를 앞선 청춘정권|청국의 개입, 일본의 변심|급진개화파의 전멸|<갑신일록> 위작설 논쟁
05 갑신정변 평가 논쟁
갑신정변 실패의 원인|책임 윤리의 문제|급진개화파의 민심 오판|민중계층의 적극적 참여?|평가의 기준이 문제다
06 갑신정변 주역들의 일본 망명생활
김옥균 이용가치의 소멸|후쿠자와의 탈아론|급진개화파 암살 시도|1886년 김옥균의 상소


한국 근대사 산책 2 - 개신교 입국에서 을미사변까지

제1장 갑신정변의 유산
01 알렌의 민영익 치료, <한성순보>의 폐간
실질적인 개신교 입국|<한성순보>의 폐간|<한성순보>와 청국의 갈등|광인사의 출판활동|사진의 수용과 부작용
02 한성조약과 톈진조약
한성조약과 온건개화파의 득세|김윤식의 시무론|톈진조약의 두 얼굴
03 쌀의 품귀, 담배의 확산
1884년 방곡령 실시|연초제조소?판매소의 집중 설립|담뱃대 사용 금지령|조선인들의 지극한 담배 사랑

제2장 개신교의 활약, 거문도 사건
01 언더우드?아펜젤러의 입국
1885년 4월 5일 부활절|언더우드와 알렌|정동제일교회의 창립|성경 번역과 찬송가 전파
02 제중원 설립과 선교사들의 갈등
백성을 구제하는 제중원|선교사들의 사치 이유|선교사들의 내부 갈등|음주?흡연을 죄악시한 청교도주의
03 영국 함대의 거문도 점령
청?러시아?영국의 각축전|후쿠자와의 악담|대원군의 귀국|조선 왕을 감독하는 총독이 된 원세개|웨베르와 손탁의 입국|거문도 사건의 역사적 의의|거문도 사건의 세 가지 일화
04 유길준의 한반도 중립화론
유길준의 귀국|유길준과 김옥균의 만남|유길준과 부들러의 중립화안|햇빛을 보지 못한 중립화론

제3장 근대화를 향한 움직임
01 전신 개통, <한성주보> 창간
경인 전신업무 개시|<한성주보>의 창간|한국 최초의 신문광고
02 배재학당?이화학당 개교
육영공원의 설립|배재학당의 설립|이화학당의 설립|기독교가 선도한 출판문화|천주교?개신교의 갈등
03 경복궁 건청궁을 밝힌 전기
건청궁을 밝힌 100촉짜리 전구 두 개|물불?묘화?덜덜불?건달불|<전기 100년사>의 재발견
04 주미한국공관 설립
원세개의 방해공작|알렌의 일기에 나타난 박정양 일행의 모습|박정양?이하영?이완용|데니의 <청한론>

제4장 근대화에 대한 공포와 저항
01 외국인이 조선 아동을 잡아먹는다
종두술을 보급한 지석영의 수난|1888년 영아 소동|제중원이 영아 살해의 총본산?
02 박문국 폐지, <한성주보> 폐간
재정난으로 인한 <한성주보> 폐간|1994년 <한성주보> 제16호 발견|서양 미술의 전파
03 1880년대 후반의 민생고
양반계급의 부정부패|일그러진 입신양명 문화|일본의 경제적 침투와 약탈|민족공동체에서 교회공동체로
04 원세개의 횡포, 알렌의 도전
조선 상인의 철시동맹파업과 시위투쟁|원세개의 라이벌은 알렌|왜 원세개만 가마를 타고 입궐하는가?

제5장 동학농민전쟁
01 동학교도의 보은?원평 집회
농민항쟁의 폭발, 동학의 확산|동학의 교조신원운동|동학의 보은?금구?밀양 집회|보은 집회에 대한 평가|북접?남접의 갈등
02 동학농민군의 정읍 고부 봉기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고부 봉기를 키운 이용태|왜 하필 호남인가?
03 김옥균 암살 사건
김옥균 암살 시도|김옥균, 중국 상하이로 가다|홍종우의 총탄 세 발에 쓰러진 김옥균|김옥균의 무덤은 세 개|김옥균 부인 유씨의 한(恨)
04 김옥균?홍종우 평가 논쟁
일본은 김옥균 암살계획을 몰랐는가?|홍종우, 출세를 위한 변신이었나?|조재곤의 홍종우를 위한 변호|일본의 김옥균 이용|북한의 김옥균 평가|신복룡의 평가|하영선?허동현의 평가
05 동학농민군의 고창 무장 기포
고창 무장 기포|부안 백산 대회|황토현 전투|5?16은 이념 면에서 동학혁명과 일맥상통?|김대중의 참여 때문에 빚어진 사건
06 동학농민혁명 기념일 논쟁
고부 기포설 대 무장 기포설|무장 기포에 대한 정읍의 반발|정읍?고창 관계자들의 논쟁|무장 기포 기념일 행사|백산 봉기 기념일 행사|정읍시의회의 성명서 채택
07 동학농민군의 전주성 점령
농민군의 함평 점령, 대원군 감국 통보|청군?일본군의 출병|전봉준?김학진의 상충되는 고민|전주화약(全州和約) 체결|농민군의 집강소 통치|손화중의 무리가 최강|남조선 개벽을 꿈꾼 김개남|동학농민군 전주 입성 113주년 기념행사

제6장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01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일본 낭인들의 입국|천우협과 전봉준의 만남|조선 병사의 피로 물든 경복궁|대원군의 재등장
02 조선의 재앙이 된 청일전쟁
풍도 앞바다에 수장된 청 병사 1000명|러일전쟁을 위한 전초전?|조선 민중의 공포와 고통|일본의 평양 전투 승리|청일전쟁의 기본 구도는 아직 살아 있다
03 자율과 타율 사이에 선 갑오개혁
갑오개혁 자율론과 타율론|사회신분제 폐지|400년 묵은 과부 재가 논쟁|유길준과 김홍집|일제의 꼭두각시를 거부한 대원군|박영효?서광범의 귀국|이노우에 가오루의 등장, 대원군의 퇴진|과거제도 폐지의 충격|이승만의 인생이 뒤바뀌다|너무 늦은 신교육으로의 전환
04 동학 농민군의 제2차 봉기
전라감사 김학진의 제안|전봉준?김학진의 의기투합|삼례 재봉기|왜 7월에 봉기하지 않았나?|일본군의 다롄?뤼순 점령
05 공주 우금치 전투의 비극
남?북접간의 노선 차이|7일간의 우금치 혈투|동학군의 계급적 고립|전봉준의 체포?압송|김개남의 체포?효시|학살당한 농민군은 최소 20만 명|우금치의 동학혁명군 위령탑
06 김홍집?박영효 연립내각 수립
박영효 내무대신, 서광범 법무대신|민비와 박영효의 일시적 화해|김홍집?박영효 연립내각의 한계

제7장 동학농민혁명의 좌절
01 홍범 14조 제정 반포
홍범 14조의 내용|매우 불길한 행사?|고종의 눈물겨운 노심초사|승려의 도성출입금지 해제
02 망명 유학 10년 만에 귀국한 윤치호
조선 기독교 대표자의 탄생|윤치호의 유교 비판|일본에 대한 생각을 바꾸다
03 일본 <한성신보>의 창간
조선 신문이 없는 7년 8개월간의 공백|<한성신보>의 침투전략|최초의 신소설도 <한성신보>에?
04 전봉준?손화중 처형
민중의 영웅으로 각인된 전봉준|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이준용 모반 사건|30만 명의 사망자를 낸 콜레라
05 동학농민혁명 논쟁
동학란에서 동학농민혁명운동으로|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유영익의 주장|박노자?하원호의 논쟁|허동현의 주장|배항섭의 주장|김용옥의 주장|전봉준과 대원군의 관계|전봉준은 동학교도였나?

제8장 3국 간섭?을미사변?단발령
01 러시아?독일?프랑스 3국 간섭
시모노세키조약|일본의 랴오둥반도 반환|정동파의 대두|박영효의 재망명|여우사냥을 위해 입국한 미우라 고로
02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
일본 낭인들의 천인공노할 범죄|대원군의 처신|제3차 김홍집내각과 을미의병|유길준의 역할|민비 시신 능욕설|뮤지컬 <명성황후> 논쟁|명성황후 우상화?|시해범 후손들의 사죄 방문|명성황후 사진 논쟁
03 실패로 끝난 춘생문 사건
민비 시해 6일 만에 떨어진 황후 간택령|공포로 잠을 못 이룬 고종|미국공사관으로의 피신 기도|춘생문 사건은 일본의 음모?
04 미국에 망명한 서재필의 귀국
11년 만에 귀국한 서재필|서광범의 활동|유길준의 지원|일본의 방해 공작|서재필과 이승만의 만남
05 태양력 도입?변복령?단발령
500년 조선사 최대의 개혁안|1990년대까지 지속된 과세 논쟁|변복령에 대한 저항|강압적인 단발령 시행|최익현과 보형(保形)의병|피차 양보할 수 없는 상징 투쟁|이승만과 김구|단발령 특수|조선은 모자의 나라
06 운산금광 채굴권 양여
외국어학교의 설립|알렌이 따낸 운산금광 채굴권|노다지라는 말이 나오게 된 이유|고종의 미국 짝사랑이 잉태한 결과
07 전신과 우편의 발달
1891년 북로전선 개설|민중의 전신 시설 파괴|1895년 우편업무 재개

한국 근대사 산책 3 - 아관파천에서 하와이 이민까지

제1장 갈 곳을 모르고 헤매는 조선의 운명
01 고종의 아관파천
아관파천의 배경과 내막|‘김홍집?유길준 등을 잡아 죽이라’|단발령 철회|을미의병의 보수성|고종의 러시아공사관 생활|‘아관파천은 엄상궁의 작품’|아관파천에 대한 평가
02 <서유견문>의 기구한 운명
<서유견문>의 금서화|개화의 등급과 종류|오늘날의 <서유견문> 평가
03 차라리 가난이 다행이었던 민중의 삶
양반계급은 ‘면허 받은 흡혈귀’|김구의 관찰|조선인의 식탐과 폭식|조선농민의 간도?연해주 이주
04 김구의 치하포 사건
김구는 왜 일본인을 살해했는가?|사형 위기에 처한 김구|전화가 김구의 목숨을 살리다

제2장 독립신문과 독립협회의 등장
01 최초의 민간지 <독립신문>의 창간
<독립신문> 창간 배경|정동파의 역할|정부의 적극적 지원|<독립신문>의 한글혁명|<독립신문>의 역사적 의미|<독립신문>이 내세운 ‘개화’의 의미|<독립신문>의 독자|<독립신문>의 광고|<독립신문>의 사업|‘최초의 민간지’ 논쟁
02 <독립신문>의 편집정책과 방향
사실과 뉴스를 앞세운 신문|<독립신문>의 계몽주의|<독립신문>의 ‘옥시덴탈리즘’|<독립신문>의 기독교 예찬|<독립신문>의 제국주의?의병관
03 독립협회 창립, 애국가의 등장
독립문?독립관?독립공원|독립협회 논쟁|‘한국 최초의 근대잡지’ 논쟁|애국가?창가의 등장|운동회 붐
04 배재학당의 성장과 이승만
배재학당의 정부 위탁교육|이승만의 배재학당 입학|이승만의 배재학당 생활|협성회 발족|협성회의 토론회 활동|1897년 숭실학교 개교

제3장 대한제국 시대의 개막
01 고종의 경운궁 환궁
러시아 군사교관단 파견|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1년 만에 끝난 러시아 공사관 생활|정부의 <독립신문> 탄압
02 대한제국과 황제의 탄생
‘국왕 전하’→‘대군주 폐하’→‘황제 폐하’|칭제건원 찬반논쟁|칭제건원 평가|대한제국 밖의 냉소적 시선|대한제국?광무개혁 평가 논쟁|환구단의 흔적을 찾아서
03 개신교 성장의 정치학
개신교의 충군애국|교회의 치외법권적 보호 기능|<죠션크리스도인회보> <그리스도신문> 창간|크리스마스 문화의 확산
04 전화를 향해 큰절을 네 번 하다
1896년 10월 2일 최초의 전화 개통|전화를 거는 예절|‘대청전화’의 위력
05 개발권 양여, 매관매직
미국의 무관심|일본의 독식화|이권문제에 대한 <독립신문>의 변화|고종의 매관매직과 미신 사랑

제4장 민권의식의 성장
01 배재학당 <협성회회보>의 창간
협성회의 성황|이승만의 주도|최초의 배달제
02 대원군 사망, 명동성당 완공
“주상이 보고 싶다”|명동성당 완공|대원군에 대한 평가|대원군 평가와 민비 평가
03 제1차 만민공동회
1만 명이 모인 ‘만민공동회’|만민공동회의 러시아 규탄|독립협회의 자기역량 과대평가|만민공동회의 배후는 일본?|러시아의 입장|니시-로젠 협정
04 최초의 일간지 <매일신문> 창간
창간 주체 이승만의 긍지|<독립신문>과의 경쟁 선언|<매일신문>의 혈기 왕성
05 미국으로 돌아간 서재필
서재필의 출국에 반대한 만민공동회|“흐르는 눈물이 한강을 이루었다”|서재필 평가 논쟁|<독립신문>의 소유권 논쟁|서재필의 제국주의?의병관 논쟁|서재필을 어떻게 볼 것인가?

제5장 만민공동회의 도전
01 독립협회의 의회설립운동
독립협회의 상원설립운동|황국협회의 하원설립운동|안경수의 정변(政變) 미수사건|독립협회의 이토 히로부미 환영
02 <제국신문> <황성신문> 창간
1898년의 언론사적 중요성|<제국신문>의 창간 배경|<제국신문>과 외국인 용병사건|<황성신문>의 창간 배경|<황성신문>의 필진|<황성신문> 사장 남궁억의 수난
03 고종 독살음모 사건과 커피
고종의 커피 사랑|고종 독살음모 사건|손탁호텔과 커피|‘사교계의 여왕’ 배정자|커피는 서양 문물?분위기의 상징
04 제2차 만민공동회
‘평화적 혁명이 이루어졌다’|관민공동회 개최 결의|장지연과 최익현의 충돌
05 제3차 만민공동회
관민공동회와 ‘헌의 6조’|백정 박성춘의 연설|무어의 백정 인권 운동|중추원 의관 선거 공고

제6장 만민공동회의 좌절
01 익명서 조작사건
독립협회 간부 20명 체포령|11세 소학생 장용남의 ‘피를 토하는 연설’|보부상의 만민공동회 습격|2배로 늘어난 만민공동회 인원
02 김덕구 장례식 사건
황국협회의 의병 선언|의관 50명의 중추원 성립|의사 김덕구의 탄생
03 박영효의 배후 조정
온건파와 강경파의 갈등|박영효 일파에 포섭된 이승만|이승만의 과격성|만민공동회 폭력화의 배후
04 만민공동회?독립협회 불법화
종로는 ‘조선의 아크로폴리스’|‘신문지 조례’의 제정|독립협회?만민공동회의 역사적 의의|‘만민공동회는 일본이 사주해 일으킨 소요’?
05 박영효 쿠데타 음모사건과 이승만 체포
박영효의 쿠데타 음모|이승만은 최초의 권총 탈옥수|박영효의 집념
06 윤치호?이완용의 변절
윤치호의 덕원부윤직 임명 수락|윤치호의 유교 비판과 친일 논리|이완용의 독립협회 활동|이완용에 대한 긍정 평가|문명개화론의 함정
07 최시형 처형, 영학당 사건
1898년 최시형 처형|영학당의 봉기|강일순의 증산교

제7장 전차?철도와 조혼?축첩
01 전차 개통과 ‘전차 소각 사건’
한성전기회사 설립|1899년 5월 17일 전차 개통식|전차에 대한 호기심과 반감|기독교인 도륙비지 사건
02 대한국 국제 반포
‘대한제국의 정치는 전제정치’|대한국 국제 평가 논쟁|정부보다는 개신교가 더 나은 보호막
03 경인철도 개통 자전거 인력거
“철도가 공간을 살해했다!”|‘불을 뿜어내는 수레’|윤치호의 축지법?|인력거의 보급
04 <독립신문> <매일신문> 폐간
<시사총보>의 창간|<매일신문> 폐간, <상무총보> 창간|<독립신문> 폐간과 고종의 언론관|북한의 <독립신문> 평가|<독립신문> <황성신문>의 인종주의?아시아주의
05 조혼?축첩 청산운동
여성단체 찬양회 조직|<독립신문>의 조혼풍습 비판|일제강점기에도 지속된 조혼|<독립신문>의 축첩제 비판|일제강점기에도 지속된 축첩제
06 1890년대 말의 식산흥업?양전사업
조선은행?한성은행의 설립|대한천일은행 설립|광무 양전(量田)?지계(地契)사업

제8장 외세 지배의 심화
01 활빈당의 출현
중국 의화단의 난|경제적 침탈에 대한 저항|활빈당 평가 논쟁|일본 우익단체 흑룡회 창립
02 외국 쌀 먹으면 애비 에미도 몰라본다
1901년 안남미 수입 파동|내장원 쌀장사 논쟁|국가재정?황실재정 논쟁
03 <제국신문>과 이승만의 옥중생활
감옥에서 <제국신문> 논설 집필|이승만의 기독교 선교|이승만의 감옥 내 집필활동
04 이재수의 난
1898년 방성칠의 난|천주교의 오만과 횡포|천주교인들의 폭력 대응|천주교도 700명 사망, 이재수 교수형|박광수의 영화 <이재수의 난>|천주교의 민간풍습에 대한 적대적 태도
05 개신교?천주교의 충돌
개신교 선교사는 ‘백만장자’|천주교인의 개신교인 구타 사건|‘국가보다 기독교를 더 신뢰한다’|정길당 사건

제9장 하와이 이민
01 최초의 노동이민단 출발
솔나무 밑에서 죽어간 사람들|102명 1902년 12월 22일 인천항 출발|노예와 다를 바 없는 생활|2002년에 발견된 ‘이민자 모집 광고지’
02 영업용 전기, 공중용 전화의 등장
1900년 영업용 전기의 판촉|한국 전차?전기사업의 좌절|1902년 최초의 공중통신용 전화업무 개시|공사관 건물의 위엄 효과
03 최초의 화장장 완공
화장은 ‘왜놈들의 장법’|한국의 독특한 장례문화|의학에서의 해부 금지|아펜젤러 사망

한국 근대사 산책 4 - 러일전쟁에서 한국군 해산까지
제1장 러일전쟁 전야
01 용암포 개항사건
4년 동안 20번 바뀐 외부대신|러일전쟁의 원인이 된 사건|러일전쟁 개전설과 삼국제휴론|양무호 사기 사건
02 고종의 황제 즉위 40주년
즉위 40주년, 50회 탄신일 잔치|월미도 매각사건|웨베르의 한국 방문 소감
03 간도 민족주의의 등장
장지연의 <대한강역고> 출간|1712년 백두산정계비 논란|19세기 후반 조선인들의 간도 이주|간도관리사 이범윤의 활약
04 원산 부흥운동과 YMCA의 탄생
회개와 눈물의 원산부흥운동|‘청년’을 발견한 황성기독청년회의 탄생|YMCA의 교육?계몽 활동|단일교회의 좌절|장로?감리교의 선교방법 차이

제2장 러일전쟁과 한일의정서
01 한반도 쟁탈을 위한 러일전쟁
영일동맹과 노불선언|일본의 38도선 분할론 제시|일본의 전쟁 전략|제물포 해전|충격에 휩싸인 조선 조정|러시아의 ‘영웅 만들기’|‘두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쟁탈 전쟁’
02 한국을 병참기지로 만든 한일의정서
한국의 러일전쟁 병참기지화|도탄에 빠진 민생|아시아주의의 망령
03 황무지개척권 반대투쟁과 한일협정서
일제의 황무지개척권 요구와 보안회의 반대투쟁|한일협정서(제1차 ‘한일협약’)와 고문정치|친일단체 일진회의 발족|보부상들의 공진회 활동
04 <대한매일신보>의 창간
영국 기자 베델을 사장으로 내세운 신문|박은식?신채호의 참여|일본인 신문들의 창간|<황성신문> <제국신문>의 경영난

제3장 갑진개화운동과 위생청결법
01 동학교단의 신문화운동
일본에 망명한 손병희의 활동|진보회의 단발흑의(斷髮黑衣), 바리캉의 등장|갑진개화운동의 평가
02 화장실 파동과 화투 열풍
서울 거리는 대소변 투성이|김옥균의 <치도약론> <독립신문>의 계몽|한국인의 똥으로 돈 버는 일본인|일본에서 수입된 화투|개화기는 화투의 개화기
03 이승만의 출옥과 출국
감옥생활 5년 7개월 만에 석방된 이승만|상동교회 엡워스 청년회|민영환?한규설의 밀사로 도미(渡美)
04 한국인의 왕성한 호기심
‘잭 런던의 조선사람 엿보기’|한국인의 서양인 구경|강한 호기심은 한국인의 장점|“코레아의 태양은 서울에만 뜬다”

제4장 일본과 미국의 결탁
01 강압과 착취로 이루어진 경부철도 개통
한국인이 겪은 고통과 굴욕|철도가 만든 개화미신|1906년 경의선 개통|7살 소년을 총살시킨 야만성?잔인성|일진회의 참여|철도가 결정한 도시의 흥망성쇠|철도는 진정 ‘진보의 상징’이었나?
02 일제의 여순 점령
일본의 첩보전에 밀린 러시아|여순 전투의 정치학|부정적인 한국 이미지의 유포|일제의 외교권?독도?통신권 강탈
03 노예로 팔려간 멕시코 이민
이민자 1000명 중 400명 사망|1901~1905년 7226명 미국 이민|해외 교포신문 발간
04 가쓰라?태프트 비밀협약
일본이 압승을 거둔 쓰시마 해전|미국이 조달해준 일본의 전쟁자금|미국은 필리핀, 일본은 한국을 먹다|20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 논쟁
05 이승만의 루스벨트 면담
윤병구?이승만, 루스벨트를 만나다|루스벨트의 일본 사랑|‘이승만은 애국열성의 청년지사’
06 한국의 운명을 결정한 포츠머스 조약
루스벨트가 주도한 포츠머스조약|일본 국민의 폭동|일제강점이 5년 더 걸린 이유|러일 전쟁 발발 100돌을 맞은 일본|한국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제5장 을사늑약과 시일야방성대곡
01 한국의 주권을 박탈한 을사늑약
앨리스 루스벨트의 한국 방문|“정부 대신들이 의논하여 조처하라”|‘을사5적’의 찬성으로 통과된 을사늑약|‘을사5적’인가, ‘을사7적’인가?|민중의 분노|‘침몰하는 배에서 황급히 도망치는 쥐떼’
02 을사늑약 유?무효 논쟁
헐버트?민영찬의 활동|‘을사늑약은 무효다’|고종의 처신|‘낭만주의적 역사인식의 위험’
03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
‘오늘이야말로 목 놓아 크게 울 날이로다’|‘거의 집집마다 보관하고 외웠다’|‘한때 분함을 참으면 백년 화근을 면함이라’|곧 잊혀진 ‘시일야방성대곡’
04 민영환의 자결이 촉발시킨 연쇄 자결
민영환의 할복자살|민영환의 유서|서울은 ‘흥분의 도가니’|연쇄 자결
05 알렌은 어찌 되었는가?
알렌과 루스벨트의 논쟁|“미국은 우리에게 맏형처럼 느껴진다”|알렌의 모순

제6장 1900년대 중반의 생활문화
01 천도교로 개명한 동학
손병희의 귀국|천도교로의 개명의 정치학|이용구 등 일진회 간부 출교 처분|이용구의 시천교 선포
02 한국 최초의 공개 축구?야구 경기
축구대회의 확산|‘YMCA 야구단’|최초의 부인용품 상점
03 흰옷금지령과 공창제
천년 묵은 백의 논쟁|검은색은 ‘문명의 색’|일본 매춘문화의 확산|통감부의 적극적인 공창화 정책
04 동해물과 백두산이 애국가 등장
애국가 작사자 논쟁|1998년 국가상징연구회 세미나|최병헌 유족과 윤치호 유족의 대결|‘한국민족 구성원의 공동 작품

제7장 애국계몽운동과 실력양성론
01 일제 통감부 설치
‘상왕(上王)으로 군림한 이토’|고종 밀서 사건|밀서 진위 논쟁
02 애국계몽운동의 시작
이제 남은 희망은 교육|사립학교 설립 열기|학회의 조직과 활동|애국계몽운동 개념 논쟁|선교사와 한국인 신도의 갈등
03 최익현의 의병 봉기
최익현 부대의 실상|최익현의 순국|최익현 평가 논쟁
04 민영환의 ‘혈죽(血竹) 신드롬’
“누가 민영환이 죽었다고 말하는가?”|‘대한제국이 처음으로 낳은 국가 영웅’|민영환 서거 100주년
05 <국민신보> <만세보> 창간
일진회 기관지 <국민신보> 창간|1906년 <만세보> 창간|<만세보>와 일진회의 관계
06 이인직의 <혈의 누>의 정치학
왜 신소설인가?|임헌영의 <혈의 누> <은세계> 비판|이인직의 친일행적|‘애국계몽주의의 통속화’
07 <경성일보> <경향신문> <대한신문> 창간
통감부 기관지 <경성일보> 창간|천주교의 <경향신문> 창간|<경향신문>을 계승한 <경향잡지>|이완용내각의 기관지 <대한신문> 창간

제8장 국채보상운동과 고종 퇴위
01 개신교의 평양대부흥운동
“미워하던 일본인까지 사랑하게 되었다”|3배로 증가한 개신교 신자 수|부산?경남지역은 예외|2007년 ‘평양대부흥 100주년’|‘2007 한국교회대부흥 기념대회’|‘목사안수 100주년 기념 참회기도회’
02 평양대부흥운동의 정치학
안창호의 한탄|주진오?이만열의 평가|김정기?이혜석의 평가|김진호?백찬홍?최형묵의 평가
03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
일제의 화폐정리사업|“나랏빚을 갚아 국권회복을 도모하자”|거절해도 밀려드는 의연금|일제의 방해공작
04 세브란스병원?대한의원 설립
세브란스병원의 설립|‘알렌 신화’ 논쟁|대한의원의 설립|‘대한의원 100주년?제중원 122주년 기념사업’ 논쟁|“설립정신의 계승이 중요하다”|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
05 헤이그 밀사파견 사건
이완용 ‘3품 내각’의 등장|이상설?이준?이위종 파견|일본과 러시아의 방해공작|<만국평화회의보>의 이위종 인터뷰|이위종의 국제기자클럽 연설|이준의 사망|‘헤이그 특사 파견’ 100주년|이준 열사 순국 100주기 기념행사|헐버트 박사 58주기 추모식
06 고종 퇴위, 순종 즉위
이토?송병준의 퇴위 협박|내시가 대신한 황위 양위식|박영효 체포?유형|순종 즉위, 단발 논란|고종의 러시아 망명설

제9장 정미7조약과 군대 해산
01 정미7조약?군대 해산
“매국노를 수입하려거든 대한으로 건너오시오”|광무신문지법 공포|한국군의 마지막 전투와 해산|‘총포 화약류 단속법’과 호랑이 출몰|의병 총대장 이인영의 ‘어처구니없는 일’|신용하의 새로운 해석|의병의 통신시설 파괴|일진회와 자위단의 행패
02 일본 망명 12년 만에 귀국한 유길준
유길준 쿠데타 음모의 전말|흥사단?한성부민회 창설|왜 유길준은 이토를 지지했나?|유길준의 재발견|2003년 유길준 관련 행사
03 일제 소비문화의 침투
일본 미쓰코시 백화점의 서울출장소 개설|박람회는 ‘국가적 제전의 가장 중요한 형식’|도쿄권업박람회의 한국인 전시|초상사진 열기
04 자동차의 등장, 열악한 도로 사정
1903년 최초의 자동차 등장|최악의 도로 사정|1908년 최초의 신작로 개통|1905년 교통경찰의 등장|상수도 등장
05 <대한매일신보>의 반일 민족주의
광무신문지법의 효과|일제의 <대한매일신보> 탄압|<대한매일신보>의 의병관과 기독교구국론|장도빈?양기탁의 반일 민족주의 논설|학생들의 ‘단지(斷指) 피바람’

한국 근대사 산책 5 - 교육구국론에서 경술국치까지

제1장 다시 타오른 애국계몽운동의 불길
01 교육만이 살 길이다
학회의 국민 계몽활동 | 안창호의 신민회 활동 | 남강 이승훈의 오산학교 설립 | 기독교 사립학교 붐 | 관?공립학교는 비난의 대상 | 한성고등여학교의 설립 | 일본 유학생의 활동 | 일제의 사립학교 탄압
02 스티븐스 저격사건
장인환?전명운의 스티븐스 저격 | 의병투쟁에 미친 영향 | 이승만의 학업
03 <해죠신문> <신한민보>의 활약
블라디보스토크의 <해죠신문> 창간 | 이범진의 후원과 안중근의 기고 | <해죠신문> <신한민보>의 국내 유입 | <신한민보>의 ‘국민혁명론’

제2장 국채보상운동의 좌절과 유산
01 국채보상운동의 좌절
이완용?송병준?이용구의 친일 계보 | 일제의 <대한매일신보> 탄압 | 국채보상운동의 내부 문제 | 베델의 사망 | <대한매일신보>의 몰락 | <대한매일신보>는 베델의 신문? | 윤치호의 국채보상운동?베델 비판 | 국채보상금 처리 문제
02 국채보상운동의 유산
국채보상운동은 ‘여성운동의 효시’ | 1998년 되살아난 국채보상운동 | 243만 명이 참여한 ‘금 모으기 운동’ | 국채보상운동은 ‘한국 엔지오 운동의 역사적 뿌리’
03 최초의 근대 잡지 <소년>의 창간
육당 최남선의 활동 | 최초의 신시(新詩) 〈해에게서 소년에게〉 | 톨슨토이 열풍

제3장 한말 의병운동의 종언
01 순종의 경상?평안?황해도 답사
일제의 보호권 과시 이벤트 | 철저히 연출된 시각적 스펙터클 | 일제의 법죄즉결령 | 대한제국 당시 최대의 부패 관리
02. 간도에 관한 청일협약
간도의 역사적 기원 | 재(在)만주 조선인 20만 명 | 일제강점 후 새로운 갈등 | 신채호?대종교?이범윤의 활동 | 동북공정과 ‘간도 되찾기 캠페인’
03. 호남의병의 와해
1907~1911년 의병 14만 명 | 헌병대?헌병보조원의 악명 | 일제의 ‘남한대토벌작전’ | 의병운동인가, 의병전쟁인가? | 오영섭의 민중주의사관 비판 | 의병정신은 ‘충군애국론에 기반한 의리심’? | 김상기?구완회의 반론
04 <대한민보> <경남일보>의 창간
대한협회의 <대한민보> 창간 | 한국 최초의 시사만화 | 최초의 지방지 <경남일보> 창간 | 장지연의 활동 | <한성신보> <대동일보> <대한일일신문>

제4장 사회진화론?영웅숭배주의?문약망국론
01 사회진화론의 융성
양계초의 <신민설> 수입 | 양계초의 주장 | 조선 지식인을 사로잡은 사회진화론 | <월남망국사> 논쟁 | 박노자?허동현 논쟁 | 사회진화론 개념의 혼동
02 영웅숭배주의의 유행
신채호의 영웅숭배주의 | 영웅 전기의 유행 | 광개토대왕과 을지문덕
03 문약망국론과 운동회 붐
문약망국론과 상무정신 | 상무정신과 학교 운동회 | 군사훈련식 운동회와 석전

제5장 애국과 매국의 몸부림
01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
안중근 추모 열기 | 안태훈과 안중근 | 안중근과 조마리아 | 안중근 연구의 현황 | 의거 100주년 기념 준비 | 안중근은 ‘충직한 근왕주의자’? | 안중근과 아시아주의
02 이완용 내각과 일진회의 ‘매국’ 경쟁
일진회의 한일합방 요구 성명 | 이완용과 송병준의 차이 | 일진회 비난?지지 성명전 | 일진회?서북학회?대한협회 ‘3파 제휴’ 결렬 | 일진회는 오명의 대명사
03 이재명의 이완용 암살 시도
이완용의 파란만장한 ‘변역’ | 이완용 중상, 이재명 사형 | 김구의 후회 | 박원문의 죽음에 대하여 | 이완용에 대한 민심의 분노

제6장 망국 직전의 생활문화
01 영화의 폭발적 인기
영화는 언제 조선에 들어왔는가? | 최초의 공식적인 기록은 1903년 | 마케팅 수단으로서의 영화 | 오락 이외에 무엇으로 삶을 위로하랴
02 연극의 인기와 풍기 논란
광무대?단성사의 개관 | 원각사와 이인직 | 신문의 전통연극 비판 | 매춘을 알선하는 소굴 | 유성기의 판매와 보급 | 일제의 통제와 탄압
03 개신교의 백만인 구령운동
1884~1910년 개신교 선교사 499명 | 선교 지역의 교파별 점거 | 한국 교회는 ‘선교하는 교회’ | 일제의 탄압엔 정교분리주의 | 20만 신자를 100만 신자로 | 백만인 구령운동의 정치학 | 한국은 세계 2위의 선교대국 | 한국인의 ‘중층다원성’ | 한국의 종교적 다원주의
04 철도?시계가 불러온 시간개념의 변화
1898년에서야 만들어진 관료들의 시간표 | 신문들의 시간엄수 계몽 |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 시계의 상징적 가치 | 도량형의 표준화

제7장 518년 만에 멸망한 조선
01 일제의 강점
안창호의 〈거국가〉 | 강제병합안 8개항 | 경술 7적과 연쇄 자결 | 왜 8월 29일은 조용했나? | 이광수의 고백 | 모든 국민이 일심동체였을까? | 일제강점 호칭 논쟁 | 일제하 68명의 조선 귀족 탄생 | 일제에 기용된 조선인 관료
02 토사구팽 당한 이용구와 일진회
헌신짝처럼 버려진 이용구와 일진회 | 이용구의 후회 | 이용구와 송병준?이완용의 다른 길 | 흑룡회가 일진회를 속였나?
03 신문과 민족주의의 탄생
한글 글자 공동체의 형성 | 민족의식의 계보 | 민족과 조국 | 민족과 국민 | 신용하?박지향?이진경의 주장 |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의 광고 분석 | 소통의 빈곤
04 고종?대한제국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이태진의 <고종시대의 재조명> | 수십여 명의 학자가 참가한 ‘기념비적 논쟁’ | 허동현의 종합 관전편 | ‘편승’을 어떻게 볼 것인가? | 이론의 함정은 없는가? | 내부적 검증?추궁은 충분했는가? | 식민사관과 민족사관을 넘어서

맺는말: ‘조선왕조 500년 신화’를 넘어서
‘우리 자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기’ 운동 | 한국은 일류의 자질과 능력이 있다 | 임진왜란의 진실 | 재조지은(再造之恩)의 진실 | 정유재란?정묘호란?병자호란 | 병자호란의 치욕 | 임진왜란?병자호란 이후 | 임진왜란?병자호라과 체제 안정성 | 당쟁?사화가 조선왕조 존속에 기여했다? | 유교?양반 망국론 | 혈통주의의 폐쇄성 | 유교적 가족주의가 500년의 비결인가? | 공식적 가족?자궁 가족의 2중 구조 | 성공이 실패의 원인이 되는 역설 | 입신양명 이데올로기 | 기회주의와 줄서기 | ‘당쟁 망국론’에 대한 반박 | 일제 치하?군사독재의 상흔과 싸우기 | 양반 면책으로 빠진 식민사관 비판 | 한국의 무기력과 침묵 |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가? | 한국 정치의 5대 환경 | 당파싸움의 두 얼굴 | 지금도 건재한 양반문화 | 가문 단위의 부정부패 | 2006년 종친회 가입률 22퍼센트 | 한국인의 보호막 투쟁 | ‘보호막 공영화’를 위하여 | ‘면허받은 흡혈귀’를 넘어서 | 성리학의 가족 중심주의를 넘어서
접기


책속에서


당시 개화의 첫걸음은 무엇보다도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중화사상'을 극복하는 것이었다. 어느 날 박규수는 김옥균에게 조부 박지원이 중국을 유람할 때 구입해온 지구의를 꺼내 보였다. 박규수는 지구의를 돌리면서 김옥균을 돌아보고 웃으며 '오늘날 중국이 어디 있단 말인가. 저리로 돌리면 미국이 중국이 되고 이리로 돌리면 조선이 중국... 더보기
P. 25 유길준은 <서유견문> 제14장 개화의 등급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개화란 온갖 사물을 깊이 연구하고 경영하여, 날로 새롭고 더 새로워지도록 기약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그 진취적인 기상이 웅장하여 사소한 태만함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개화하는 일을 주장하고 힘써 실행하는 자는 개화의 주인이며, 개화한... 더보기 - bookholic
P. 128 처음에 전화는 ‘텔리폰’이란 말을 음역(音譯)해서 덕진풍(德津風)이라고도 했고 의역(意譯)해서 전어기(傳語機)라고도 했다. 다리풍, 어화통, 전어풍 등으로도 불렸다. 영어 ‘텔레폰’의 차음이거나 신조어다. 당시 일반인들은 ‘하늘의 전기바람은 비구름을 말리고 땅의 ‘덕진풍’은 땅 위의 물을 말린다˝며 전기와 전화를 싸잡아 경원시했... 더보기 - bookholic
P. 255 윤치호가 현실에 굴복해 변절했을망정, 그에게 국가, 사회를 생각하는 그런 정신은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윤치호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즉시 관직을 버리고 애국계몽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1906년에 결성된 대한자강회의 회장에 추대되었고, 1907년에 조직된 비밀단체 신민회의 주도 멤버로 활약했다. 그는 그런 활동을 하다가 10... 더보기 - bookholic



저자 및 역자소개
강준만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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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대학교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인 강준만은 탁월한 인물 비평과 정교한 한국학 연구로 우리 사회에 의미 있는 반향을 일으켜온 대한민국 대표 지식인이다. 전공인 커뮤니케이션학을 토대로 정치, 사회, 언론, 역사, 문화 등 분야와 경계를 뛰어넘는 전방위적인 저술 활동을 해왔으며, 사회를 꿰뚫어보는 안목과 통찰을 바탕으로 숱한 의제를 공론화해왔다.
2005년에 제4회 송건호언론상을 수상하고, 2011년에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한국의 저자 300인’, 2014년에 『경향신문』 ‘올해의 저자’에 선정되었다. 저널룩 『인물과사상』(전33권)이... 더보기

최근작 : <팬덤이 약탈한 정당>,<문해력을 위한 교양국어사전>,<권력과 복종> … 총 601종 (모두보기)
강준만(지은이)의 말
개화기는 외세의 침투,침략이 이루어진 가운데 그 모순이 폭발한 시기였다. 그래서 내부개혁과 외세에 대한 저항의 방향이 하나로 집결될 수 없었고 효과를 발휘할 수도 없었다. 그로 인해 당하게 된 망국의 세월은 저주였지만 다시 이 저주는 한국인들에게 새로운 축복을 만들어낼 수 있는 심적 터전을 닦는 씨앗이 되었다. 부끄러워할 것도 많지만 자랑할 것도 많다. 그 어느 한쪽에 집착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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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넘쳐나는 미디어, 꿰뚫어 보는 통찰력>,<팬덤이 약탈한 정당>,<문해력을 위한 교양국어사전>등 총 427종
대표분야 : 한국사회비평/칼럼 5위 (브랜드 지수 137,070점), 역사 14위 (브랜드 지수 236,632점)





출판사 제공 책소개
‘자위’와 ‘자학’을 넘어선 강준만의 역사 읽기

:: 한국 근대사의 생생한 몽타주!
<한국 근대사 산책>은 정치와 경제뿐 아니라 삶의 전 영역을 아우르며 개화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의 시대를 종합하고 있다. 아울러 전문 학자들의 논문은 물론 당대 신문기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자료를 망라하여 지나간 역사의 파편들을 큰 그림으로 종합, 현재화하면서 ‘역사는 커뮤니케이션이다’라는 이해를 바탕으로 ‘메타 역사’ 서술을 시도하고 있다. 근대 한국의 풍경에 대한 다양한 주장들을 편견 없이 보여줌으로써 ‘교과서’가 지니는 경직성에서 벗어나 한국 근대사를 생동감 넘치게 몽타주할 수 있게 한다.

:: 생각하는 역사(읽을거리1 참조)
한국언론사?한국문학사?한국철학사 등 각 분야의 역사는 그 분야에 관계된 역사에 대해서만, 즉 언론?문학?철학에 대해서만 말한다. 물론 각 분야와 관계된 시대적 배경에 대해 최소한의 설명은 들어가지만 역사의 큰 줄기와, 각 분야의 유기적인 관계를 조망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게다가 그간 나온 책들은 너무 간결하게 압축돼 있거나 특정 주제만을 다룬 전문서들 뿐이었다. <한국 근대사 산책>은 전문화?세분화되어 있는 한국의 근대사를 종합화?총체화하면서 한국 근대의 큰 줄기와 장면들을 유기적으로 결합하고, ‘진실’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논쟁과 논란을 충실히 소개하여 어떤 주장이나 편견에서 자유롭게 함으로써 ‘생각하는 역사’를 전개한다.

:: <한국 근대사 산책>의 특징(읽을거리1 참조)
나이스비트가 <메가트렌드>로 유명해지자 사람들은 그에게 “나는 당신이 책에서 말한 것들을 대부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 모든 조각들을 한데 모아 정리해주었지요”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나이스비트는 <마인드 세트>에서 그런 평가에 대해 “‘익은 과일 따기’는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최고의 찬사다”라면서 “문제는 무엇을 따서 어디에 놓을까 하는 것이다”라고 여유를 보였다.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연관 지어 하나의 커다란 그림으로 엮어내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한국 근대사 산책>의 첫 번째 특징 역시 바로 이러한 ‘종합’이다.

두 번째 특징은 ‘역사의 현재화’다. 모든 역사가 다 그렇지만 특히 개화기는 현재진행형 이야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화기 이전은 너무 멀고 개화기 이후는 너무 가깝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이 시절 조선은 열강들의 각축전의 와중에서 생존을 모색해야 했다는 점이 오늘의 상황과 비슷하다고 보기 때문에 지식인들은 주로 개화기 사건을 거론하면서 오늘을 논하고 있다. <한국 근대사 산책>은 현재의 이야기와 역사적 사건을 연계시켜 풀어 쓰는 새로운 기술방식을 시도했다. 과거와 현재의 생생한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책과 논문은 물론 신문기사?칼럼 등을 광범위하게 이용하고 있다.

세 번째 특징은 ‘언론?문화?커뮤니케이션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는 점이다. E. H. 카는 “역사는 역사가와 사실과의 상호작용의 부단한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지만 그 상호작용?대화의 성격과 질이 문제의 핵심이고 ‘대화’보다는 넓은 의미의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단어가 더 적합하다. 역사는 커뮤니케이션이다. 역사를 그렇게 이해할 때에 인간이 역사에 끌려 다니거나 이용당하지 않는 주체성을 조금이라도 확보할 수 있다. 기존 역사 서술은 커뮤니케이션과 과정을 소홀히 하면서 구조와 결과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거대담론의 폭력성’을 은연중 드러냈다.

네 번째 특징은 이른바 ‘메타 역사’ 서술을 시도했다는 점이다. ‘메타 역사’란 ‘역사에 관한 역사’다. 개화기 시절의 어느 사건에 대해서건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하며 수많은 주장과 이견들이 난무한다. 당연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명쾌한 역사란 있을 수 없으며 ‘교과서’는 늘 위험하다. 특정한 주장을 내세우기보다는 ‘종합’에 의미를 둔 이 책은 다양한 주장들을 다 보여주는 데에 주력했다. 역사는 단순명쾌할 수 없으며 매우 복잡하다. 과거의 복잡성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복잡성과 전혀 다를 바 없으며 현재라는 변수가 더해져 현재보다 오히려 더욱 복잡할 수밖에 없다. 복잡성은 한 차원 높은 재미를 재공한다. 매 사건마다 각기 다른 여러 전문가들의 주장을 감상하다 보면 “아, 똑같은 사안을 이렇게까지 다르게 볼 수도 있구나!” 하는 놀라움과 더불어 재미를 만끽할 수 있다. 이런 이해와 체험은 “역사는 외우는 과목”이라는 잘못된 생각에서 벗어나게 한다. 역사는 ‘외우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이다.

다섯 번째 특징은 ‘역사 서술의 다양한 시각을 치우침 없이 소개하면서 도식주의를 넘어서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 책은 특정한 지향성을 갖고 있지 않다. 보수?진보 시각이 충돌을 빚으면 둘 다 균형 있게 소개하려고 했으며 개화기 역사에서 잘 나타나곤 하는 민족사적인 서술 시각도 공정하게 보려고 애를 썼다. 암울한 역사의 그늘을 거닐며 독자가 자괴감이나 패배주의에 빠지지 않을까 걱정해 특정한 시각을 강조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렇게 성장했다는 건 우리의 저력이 무섭다는 걸 말해주는 게 아니겠는가”라고 발상의 전환을 해보길 권하는 게 옳은 일이다.

:: 늑대 떼의 출몰과 함께 시작된 개화기
개화기 역사는 가슴 한구석을 답답하게 한다. 동화식으로 이야기하자면 당시 우리나라의 처지는 사나운 늑대 떼에게 포위된 한 소년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부모님의 말씀을 안 듣고 위험한 곳으로 간 소년의 잘못에 대해 인과응보(因果應報)라고 말하기엔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소년의 몸부림이 너무 눈물겹다. 그 소년은 나름대로 꾀를 내보기도 하지만 다 실패로 돌아가고 결국 늑대의 밥이 되고 만다.
한반도에 ‘늑대 떼’가 본격 출몰한 건 조선의 국운이 기울기 시작한 1870년대부터였다. 개화기를 언제부터 언제까지로 볼 것이냐에 대해선 학자들마다 의견이 다르지만 바로 이 시기에서부터 1910년에 이르는 30~40년간을 개화기로 보는 시각이 유력하다.
‘늑대 떼’의 출몰과 함께 개화기가 시작되었다는 건 그들을 무조건 막아내 싸우는 것만이 능사일 수는 없었으며 그 만큼 대처 방안을 놓고 내부의 혼란과 갈등이 심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 혼란과 갈등은 크게 보아 ‘개화론’과 ‘수구론’의 대립에서 비롯되었지만 이런 이분법 자체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당시의 지식인?위정자들의 사고를 개화 혹은 수구의 어느 한쪽에 끼워 넣으려는 것은 당시 조선의 정치지형, 그리고 현실정치의 역학관계 및 문맥을 이해하는 데 오해를 낳기 마련이다. …… 이런 시각에 입각하게 되면 동요하고 있던 시대를 살았던 당대인들의 정치적 고뇌와 선택의 의미가 생동감 있게 느껴지기 어렵다. 19세기를 살았던 인물들의 사고의 경직성을 탓하면서 정작 우리 스스로가 이분법적이고 도식적인 사고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 ‘자위’와 ‘자학’을 넘어서는 ‘제3의 길’
‘명암(明暗)이론’은 편견과 도식?집착을 모두 넘어서는 제3의 길이다. 동전의 양면처럼 명암의 양면을 다 보고 끌어안고 축복이 저주가 되고 저주가 축복이 되는 역사의 문법 위에 바로 서자는 것이다.
조선조 500년은 축복인 동시에 저주였다. 안정된 체제 유지가 축복이라면 그로 인해 축적된 내부모순이 저주다. 체제의 안정성은 국가 중심이 아니라 가문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개인의 능력보다 소속 가문이 더 중요했다. “양반사회의 출현으로 한때 국가체제의 건전한 발전을 이룩하였으며 보편적 유교문화와 전통문화의 꽃을 함께 피울 수 있었지만 이제는 정반대로 양반사회의 존재 그 자체가 국가권력을 쇠퇴시키고 개인의 창의력을 말살하며 다가올 새로운 시대를 외면하게 만들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개화기는 외세의 침투?침략이 이루어진 가운데 그 모순이 폭발한 시기였다. 그래서 내부개혁과 외세에 대한 저항의 방향이 하나로 집결될 수 없었고 효과를 발휘할 수도 없었다. 그로 인해 당하게 된 망국의 세월은 저주였지만 다시 이 저주는 한국인들에게 새로운 축복을 만들어낼 수 있는 심적 터전을 닦는 씨앗이 되었다. 부끄러워할 것도 많지만 자랑할 것도 많다. 그 어느 한쪽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 이렇게 역사를 보는 게 바로 제3의 길이다. 매우 쉬운 것 같지만 의외로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는 관찰법이다. 이 책은 개화기 역사에 대한 ‘자위(自慰)’와 ‘자학(自虐)’을 모두 넘어서고자 한다. 물론 그 누구도 개화기 이야기를 하면서 ‘자위’나 ‘자학’은 하지 않는다. 어떤 시각이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만 그렇게 보일 뿐이다. 그렇게 보는 것마저 넘어서자는 뜻이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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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시대가 열렸다. 국왕전하에서 황제폐하라고 호칭이 바뀐다. 마지막 챕터는 최초의 노동이민단이자 노에나 다름없는 하와이 이민단 이야기가 이어진다.
쎄인트 2026-02-08 공감 (1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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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으로 치닫는 조선
shuita 2022-02-11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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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이지만, 제국 같지 않은 제국, 대한 제국의 불안한 출발과 작은 가능성.
解明 2021-10-24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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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역사에 관심이 있었는데 학교 추천 도서라 구매했어요. 좀 더 쉽게 근대사에 접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yyykim 2013-01-23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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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나라에서 도망다니는 왕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은 강준만의 <한국 근대사 산책> 3권을 이야기해줄게. 지난번 2번에서는 1895년 10월에 있었던 을미사변까지 이야기를 했었지. <한국 근대사 산책> 3권의 부제는 ‘아관파천에서 하와이 이민까지’란다. 아관파천이라고 하니 1896년부터 이야기가 시작될 터이고, 하와이 이민은 아빠가 언제 처음 시작되었는지 모르니 3권의 이야기가 몇 년까지 이어질 지는 서서히 이야기를 해보자꾸나.

학창 시절의 역사를 싫어했던 아빠는 아관파천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있었다는 것은 기억나는데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몰랐단다. 나중에 어른이 되어 역사에 재미를 느끼고 여러 역사책들을 읽어보다가 ‘아관’이라는 말이 ‘러시아 공사관’이라는 뜻이고 ‘파천’이는 말이 ‘임금이 도성을 떠나 피란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단다. 을미사변 이후 일본의 위협이 거세지면서,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은 비밀리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을 갔단다. 고종이 여장을 하고 도망쳐 갔다고 하니 007 작전을 뺨 칠 정도라고 할 수 있으나, 자신의 나라에서 왕이 저리 도망갈 정도였으니 나라의 위신과 국력이 얼마나 엉망이었던 거니. 이 때 영친왕의 엄마이기도 했던 엄상궁이 이 작전을 주도했고, 당시 친러파였던 이범진, 이완용이 동참했다고 하는구나. 이완용은 너희들이 알고 있는 매국노 이완용 맞단다. 이 때만 해도 친일파가 아니고 친러파였구나. 이렇게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한 것이 1896년 2월 이었단다.

….

을미사변이 있고 얼마 후 김구 선생이 역사에 처음 등장한단다. 치하포라는 곳에서 을미사변에 참여했던 일본인을 죽이게 되는데(1896년 3월) 얼마 못 가 김구는 체포되고 사형 선고를 받게 된단다. 그런데 사형 선고 직전에 고종이 전화를 걸어와 사형을 면해주었다는 일화가 있다는구나. 전화 개통이 얼마 안 된 뒤였는데, 그 전화로 김구 사형 선고를 막았다고 하니 전화가 조금만 늦게 개통되었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김구 선생은 없을 뻔했구나. 고종이 잘못한 일은 많았지만 이 일은 잘했구나. 그렇게 사형을 면한 김구는 형살이를 2년 더 하다가 탈옥하여 도망쳤다고 하는구나. <한국 근대사 산책> 10권까지 이야기하다 보면 김구 선생의 이야기를 계속 나올 테니 틈틈이 이야기 하도록 하마.






1.

서재필이 1986년 4월 7일에는 독립신문을 창간하게 되는데, 파격적으로 순한글로 간행하였고, 한글 띄어쓰기도 처음으로 시도했다고 하는구나. 서재필이 미국 유학 생활에 영향을 많아 기독교 예찬 내용도 포함되어 있고, 청결을 중시하라면서 목욕을 2일에 한 번 하라는 기사도 있었다고 하는구나.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 목욕을 2일에 한 번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었을까. 그리고 독립신문에는 광고도 싣는 등 오늘날 신문의 모습을 갖추어 나갔어.

독립 신문을 창간한 지 3달 뒤인 1896년 7월에는 같은 개화파 사람들과 함께 독립협회를 창립했단다. 그리고 파리에서 봤던 개선문을 본 따서 독립문도 건설했단다. 아빠는 독립문이 당연히 일본으로부터 독립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것인지 알았는데, 일본으로부터 독립이 아닌, 중국의 종속에서 벗어나 독립하자는 뜻에서 지어졌다고 하는구나. 얼마 전에 ‘썬킴의 한국사’라는 팟캐스트에서 알게 된 사실인데 이 책에도 그 내용이 나와 있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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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74)

서재필은 자서전에서 “영은문은 조선이 중국의 명청 양국을 상국으로 섬길 때에 생긴 것인데, 우리가 중국의 노예라는 표라고 볼 수 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본국에 돌아와서 제일 먼저 눈에 뜨인 것이 영은문이었다. 무엇보다도 이 더러운 표, 부끄러운 이 문을 없애야겠다고 굳은 결심을 하였다. …… 영은문을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다 ‘독립문’을 세우기로 한 것이다. 때마침 내가 가진 화첩 중에 파리의 개선문이 생각나서 그 규모를 축소해 그 모양만은 똑같이 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그때 독일공사관에 근무하는 스위스 사람에게 설계도를 부탁 작성하였다. 그리하여 심(沈)모라는 목수가 시공하였는데 총공사비는 1500여 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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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에서 우리나라에 근대식 학교가 생겨났다고 했었잖아. 그 중에 배재학당이란 곳에 급성장했다고 하는구나. 이 곳에는 이승만도 입학하였고, 이승만이 영어를 습득하는데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고 하는구나. 영어만 잘 하면 뭐 하나. 서재필이 매주 배재학당에서 특강을 하고 했는데, 아무래도 미국에서 자신이 배웠던 것들을 많이 알려주었겠지? 서재필은 토론하는 것에 대해 가르쳐 주기도 했는데, 협성회라는 것을 만들어서 토론을 정기적으로 했대.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고 있는 고종은 1896년 러시아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민영환을 특사로 보냈다고 하는구나. 그리고 일본에 맞설 군대를 만들기 위해 러시아에 군사교관 파견을 요청했다고 했어. 그래서 러시아에서는 13명이라는 적은 수이지만 군사교관을 파견했다고 하는구나. 이렇게 러시아가 조선과 손을 잡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뒤로는 일본과 암약을 시도하고 있었는데, 그 내용은 조선을 서로 반으로 나누자는 내용이었다는구나.

고종은 1897년 2월 1년 만에 경운궁(덕수궁)으로 다시 돌아왔다고 하는구나. 아관파천 1년 동안 느낀 것이 있었는지 나라는 거창하게도 대한제국으로 이름을 바꾸고 자신은 황제가 되었다고 하는구나. 고종은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에 거리낌 없었어. 앞서 김구를 사형에서 면하게 한 전화도 1896년 10월에 처음 설치되어 계속 확대 설치를 했어. 철도 부설도 논의되어 여러 나라들이 참여하겠다고 했는데, 80~90%가 일본에서 철도부설권을 가져갔다고 하는구나.

1898년에 있었던 일들을 좀더 살펴보도록 할게. 1898년 2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대원군이 죽었단다. 죽기 전에 주상이 보고 싶다고 했다는데, 고종은 대원군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어. 1898년 5월에는 서울 명동성당이 완공되었어. 1898년 3월에는 독립협회에서 주관했던 만민공동회가 열렸단다. 이것은 여러 시민들이 모여 진행한 일종의 시위였는데 1차 만민공동회의 주요 주제는 러시아 세력을 몰아내자는 내용이었어. 러시아는 몰아내자는 내용이 있어서 일본이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설이 있단다.

배재학당의 토론 모임인 협성회를 이야기했었잖아. 1898년 4월 이 협성회에서 일주일에 1번 협성회 회보를 내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나중에 ‘매일신문’로 바꿔 매일 신문을 발행했다고 하는구나. 독립신문이 주 3회 간행했었는데, 매일신문이 나온 이후로 독립신문도 일간지로 바꿨다고 하는구나. 경쟁 체계에 돌입한 거지.

대한제국 정부는 만민공동회의 책임을 독립협회의 서재필에게 물어 출국하라고 했고 그렇게 서재필인 1898년 5월에 미국으로 돌아갔다고 하는구나. 서재필에 평가는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가 상존하는데, 우리나라를 개화화하는데 노력하긴 했는데 미국인 행세만 했다는 비판도 있다는구나.

서양 문물을 받아들일 때 우리나라 토착 문화와 잘 융합하여 조화롭게 받아들여야 하는데, 무조건 미국식 문물로 바꾸려고 했던 것이 아쉬운 점이라고 할 수 있겠구나.

독립협회는 상원 중심의 의회 정치가 필요하다면서 고종에 상소를 했대. 독립협회가 이렇게 정치적으로 힘을 발휘하려고 하자, 독립협회를 견제하기 위해 황국협회라는 것을 급조했는데, 황국협회에서는 하원 의회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대. 근대식 정당 정치의 시작이라고나 할까? 1898년 제국신문, 황성신문 등 일간지도 또 창간을 하게 되었는데, 황성신문은 장지연, 유근, 남궁억이 만들었대 황성신문에는 박은식, 장지연, 신채호 등 유명하신 분들이 활동했다는구나.






2.

고종이 커피를 좋아했다는 것은 유명하단다. 그런 커피에 독약을 타서 고종을 암살하려는 사건이 있었어. 고종은 커피 냄새가 이상한 것을 알아채고 바로 뱉어내어 무사했는데, 같이 커피를 마셨던 황태자는 먹었다가 토를 했는데도 고생을 했다고 하는구나.



1898년 10월 1일부터 12일까지 2차 만민공동회가 열렸는데, 수구 친러 정부 퇴진을 요구하면서 시위를 벌였어. 시위가 거세지자 고종은 결국 친러파 대신 일곱 명을 파면 조치했다는구나. 음, 오늘날 촛불 시위를 연상케 하는구나. 1898년 10월 28일부터 29일까지 3차 만민공동회가 열렸는데, 헌의6조라는 개혁안을 고종에게 건의를 했단다. 이렇게 만민공동회가 이어지면서 친러파 인사들도 반격을 준비했어. 익명의 조작 사건을 벌여서 독립협회 회원 20명을 체포해 버렸어. 그러자 다시 만민공동회를 열어 항의했고, 체포되었던 사람들 중 간부들을 일부 석방시켰다고 하는구나. 만민공동회는 일종의 직접 민주주의라고 평가되기도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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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3-244)

또 전인권은 “이 당시 종로는 ‘조선의 아크로폴리스’였으며, 이들의 투쟁은 단기적으로 대성공을 거두었다”며 “만민공동회는 종로에 연단을 만들고 신분과 나이의 구별 없이 어린이조차 연단에 올라 연설을 하는 등 ‘한국의 직접적 민주주의’ 또는 ‘대중의 정치적 의사표현’의 원형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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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이 만민공동회의 요구 사항을 시행하지 않자 박영효가 주도하여 만민공동회는 다시 시위를 했어. 그런데 독립협회 내에서도 이번 시위는 만류하는 온건파 인사도 있었단다. 이로 인해 박영효를 중심으로 한 강경파와 윤치호를 중심으로 한 온건파 사이의 갈등이 생기기도 했단다. 이 시위로 인해 일단 고종은 독립협회 인사들을 내각에 참여시키긴 했지만, 고종의 반격은 오래가지 않았단다.

1898년 12월 23일 고종은 군대를 동원하여 만민공동회를 강제 해산시켰고 불법화했고, 독립협회를 강제 해산시켰단다. 그로 인해 독립신문과 매일신문도 폐간이 되었다고 하는구나. 얼마 전에 내각 중추원에 참여시켰던 독립협회 회원들도 모두 파면되었대. 그러자 박영효의 쿠데타 음모가 있었고, 이 일로 이승만도 검거되어 사형을 선고 받았대. 이때 선교사와 이승만의 부인 박승선의 구명 상소를 올렸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사형은 면했다고 하는구나. 미래를 생각했을 때 다소 아쉬운 일이구나.

독립협회 해산되면서 온건파였던 윤치호도 피신 중이었는데, 독립협회를 배신하고 내각에 들어가게 되었대. 윤치호의 아버지 윤웅렬이 법무대신으로 있었다고 하니 배신하기 쉬웠을 거야. 이완용은 1898년 독립협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는데 이 또한 변절하고 최악의 친일파의 길을 걷게 된단다.

….

다시 이 당시 사회 모습을 일부 이야기해줄게. 고종은 미국 공사였던 알렌을 통해 전기, 전차를 추진했어. 그래서 한성전기공사라는 회사가 만들어져 1898년 1월 전기가 처음 들어왔고, 1899년 5월에는 전차 운행이 시작되었단다. 전차를 처음 본 사람들이 얼마나 놀랬겠니. 그런데 전차로 인해 불미스러운 안전사고와 교통사고가 연이어 일어났고, 그로 인해 전차를 불에 태우는 사건도 일어났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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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3-274)

1899년 5월 26일에 일어난 ‘전차 소각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종로 2가에서 전차가 다섯 살짜리 어린아이를 치어 죽이자 아이의 아버지가 도끼를 들고 전차에 달려들었다. 전차가 멈추지 않고 지나가려 하자 이를 지켜보던 군중들이 차장과 운전수를 향해 돌진했다. 그들이 도망가자 군중은 방치된 전차에 돌을 던져 파괴하고 그 위에 석유를 붓고 불을 질렀다. 또한 뒤에 달려오던 다른 전차도 전복시키고 태워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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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는 1899년 9월 경인구간 일부구간이 개통되었고, 1900년 7월에 전구간 개통되었다고 하는구나. 자전거, 인력거 등도 이때 등장하였고, 은행도 설립되었다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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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제주도에서는 이재수의 난이 일어났어. 천주교에서 교세를 확장하려고 했는데 이때 여러 가지 폐단이 일어났고, 정부에서는 세금을 높이거나 부정한 방법으로 더 걷어가는 조세수탈에 백성들의 불만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어. 이에 제주도 백성들이 항거하자 천주교도들이 농민들에게 폭력을 가하는 일이 일어났단다. 그래서 이재수를 중심으로 제주도민들이 봉기하여 천주교도 700여 명이 죽는 사건이 일어났단다. 정부는 회유책으로 이들을 해산시키는데 성공하고, 이재수는 체포하여 처형시킴으로써 난은 종결되었단다.

1901년에서 1902년에 심한 가뭄으로 흉년이 이어졌어. 굶어 죽는 사람들이 많았어. 그 와중에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하와이 이민 광고가 붙기 시작했단다. 1902년 12월 처음으로 100여 명이 하와이로 이민을 갔다고 하는구나. 돈을 잘 벌 수 있다는 것은 예상했듯이 거짓이었고, 심한 인종 차별을 당했고 노예 같은 생활을 했다는구나. 다시 조선으로 돌아올 수 있는 방법도 없고 말이야.

여기까지가 <한국 근대사 산책> 3권의 이야기란다. 500년 동안 이어졌던 조선 왕조가 어디서부터 잘못되어 이런 초라한 모습이 되었을까? 안타깝기 그지없구나. 나라의 지도자가 나라의 미래를 보지 않고 백성들을 등한시하게 되면 얼마 못 가 나라꼴이 이렇게 된다는 것을 역사 속에서 배워야 하는데, 오늘날 대한민국은 일 년여 만에 부끄러운 나라로 돌변하고 있으니, 이 또한 안타깝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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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번 <한국 근대사 산책> 3권에서도 서양인들의 눈에 비친 당시 조선의 모습들에 대한 이야기도 해주는데, 재미있는 것 두어 개만 소개해줄게. 먼저 우리나라 사람들이 폭식을 많이 한다고 하고, 그것을 신기하게 보고 글로 남긴 사람이 있다고 하는구나. 음, 아빠가 가끔 폭식하고 나서 후회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괜히 그런 게 아니구나. 조선의 DNA를 가지고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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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1902년부터 1903년까지 서울 주재 이탈리아 총영사로 일한 카를로 로제티도 1904년 이탈리아에서 출간한 <꼬레아 꼬레아니>에서 한국인들의 폭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에서는 많이 먹는 것이 큰 자랑거리의 하나이며,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는 누가 더 많이 먹는가를 내기하는 것이 매우 흔한 일이다. 이 경우 그들이 먹어치우는 엄청난 양은 직접 자신의 눈으로 보지 않고서는 짐작도 할 수 없을 정도이다. 이러한 한국인의 체질로 인하여 상류층에서 가장 즐기는 오락이 바로 잔치라는 것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혼령들을 위한 제사는 제쳐두더라도 결혼식 잔치에서부터 친척의 기일날에 이르기까지 즐거운 연회가 항상 함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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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는 장례문화에 관한 것인데, 우리나라 장례문화는 예전부터 축제처럼 하는데 그것이 서양 사람들에게 색다르게 비춰진 것 같구나. 마지막 가는 길을 즐겁게 가시라는 의미인데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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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9)

1902년부터 1903년까지 서울에 주재한 이탈리아 총영사 카를로 로제티는 1904년 이탈리아에서 출간한 책에 다음과 같이 썼다.

“장례식의 주된 분위기는 분명 슬픈 것만은 아니다. 이것은 바로 자신들의 감정을 가장하려는 극동 아시아 모든 민족의 기질인 것이다. 상여꾼들은 종종 청중의 웃음을 자아내는 노래를 부르며 보조를 맞춰 행진하고, 가족을 둘러싼 친지들은 농담이나 웃음짓으로 가족을 흥겹게 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쓰는데, 우리 관점에서 볼 때는 매우 어색하게 보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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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첫 이민이 1902년 12월까지였구나. 그러면 <한국 근대사 산책> 4권은 1903년부터 이야기가 이어지겠네. 이것도 조만간 읽고 이야기해줄게. 자,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PS,

책의 첫 문장: 단발령으로 사회적 혼란이 고조된 상황을 틈타 러시아는 공사관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인천에 정박 중인 러시아 군함으로부터 수병 100여 명을 서울로 이동시켰으며, 서울 주재 러시아공사관은 친러파 이범진 등과 공모하여 친위대 병력이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지방에 파견돼 왕궁의 경비가 소홀한 틈을 타 고종을 아관(俄館,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기게 하였다.

책의 끝 문장: 1903년 8월 원산에서 감리교 선교사 하디(1865~1949)는 교인들 앞에서 바로 그 점을 고백함으로써 ‘원산부흥운동’의 씨앗을 뿌리게 된다.









유길준은 <서유견문> 제14장 개화의 등급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개화란 온갖 사물을 깊이 연구하고 경영하여, 날로 새롭고 더 새로워지도록 기약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그 진취적인 기상이 웅장하여 사소한 태만함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개화하는 일을 주장하고 힘써 실행하는 자는 개화의 주인이며, 개화한 자를 부러워하여 배우기를 기뻐하고 본받기를 즐거워하는 자는 개화의 빈객이다. 또 개화한 자를 두려워하고 미워하면서 부득이하여 따르는 자는 개화의 노예라 할 것이다."
- P25



처음에 전화는 ‘텔리폰’이란 말을 음역(音譯)해서 덕진풍(德津風)이라고도 했고 의역(意譯)해서 전어기(傳語機)라고도 했다. 다리풍, 어화통, 전어풍 등으로도 불렸다. 영어 ‘텔레폰’의 차음이거나 신조어다. 당시 일반인들은 ‘하늘의 전기바람은 비구름을 말리고 땅의 ‘덕진풍’은 땅 위의 물을 말린다"며 전기와 전화를 싸잡아 경원시했다. 진용옥은 덕진풍이라고 하는 경우가 많지만, 텔레폰의 한역이므로 ‘덕률풍(德律風)’이 맞다고 주장했다. - P128



윤치호가 현실에 굴복해 변절했을망정, 그에게 국가, 사회를 생각하는 그런 정신은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윤치호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즉시 관직을 버리고 애국계몽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1906년에 결성된 대한자강회의 회장에 추대되었고, 1907년에 조직된 비밀단체 신민회의 주도 멤버로 활약했다. 그는 그런 활동을 하다가 105인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게 된 것인데, 출감 후 그는 <매일신보> 사장과의 회견에서 이후 일선동화(日鮮同化)를 위해 노력할 것을 천명했다. - P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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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holic 2023-09-21 공감(19)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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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고종은 군함을 사려했을까..



어떤 사실이 왜 그렇게 되었는가를 속시원하게 알려주는 책이다.

정말이지 대단하고 부지런한 사람이다. 강준만씨는...

1인 언론을 표방하며 인물과 사상이라는 책을 낼테부터 느꼈던 거지만, 이렇게 많은 책을 끊임없이 잃고 출간 약속을 어기지 않는 사람은 처음 보는 것 같다.

그렇다고 내용이 허접하냐면 그것도 아닌 것이 역사를 공부하는 학도이자 가르키는 사람으로서도 이 책을 꼭 참고로 할 정도로 당시의 상황과 어떤 책에서도 볼 수 없는 논리 정연함과 잘 짜여진 전개가 한국 현대사 산책 전집을 산데 이어 이것도 사게 만들었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보다가 한번 볼 책이 아닌 것 같아서 이번에 큰 돈을 들여 다 사기로 맘 먹었다.

그가 참고한 문헌의 내용도 어마어마해서 세부적으로 공부하고 싶을땐 또 이 책 뒷부분을 뒤적거리게 된다.

이 사람의 장점은 다양한 시각에서 역사를 두루 바라보고 있다는 점. 그렇다고 자신의 견해를 잃지는 않는 점인 것 같다. 그야말로 화이부동한 자세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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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lishyon 2008-09-19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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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의 현재 모습

현재를 알고 미래의 모습을 알려면, 과거를 먼저 알아야겠죠? 우리 민족의 현재 모습을 이 책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양한 사진자료와 학자들의 다양한 관점을 통해 과거 사건을 현재 입장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는 것이 이 책의 매력이자 가장 큰 장점이라 생각합니다. 시리즈로 구입해 놓고 재미있게 천천히 음미하며 읽고 있습니다. 지금 3권을 읽고 있는 중.... ^.^
rimdo 2008-02-05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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