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8-08

조사 시찰단 - 위키백과, 신사유람단 朝士视察团 --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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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 시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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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유람단에서 넘어옴)
1882년 일본 유학 중의 유길준
윤치호의 사진

조사 시찰단(朝士視察團)은 1881년(고종 18년) 5월 7일(음력 4월 10일)부터 8월 26일(음력 윤7월 2일)까지 김홍집의 주장에 따라 수신사에 이어 일본 제국에 파견되었던 집단이다. 과거에는 신사 유람단(紳士遊覽團)이라고 지칭하였으나 한국사 용어 수정안에 따라 조사 시찰단으로 바꾸어 부른다. 조사(朝士)는 조선의 조정에서 벼슬을 하는 신하라는 뜻으로, 《매천야록》 유람조사(遊覽朝士)라는 명칭으로 등장한다. 반면 신사(紳士)는 영어로 젠틀맨(gentleman)과 같은 말이며, 일본 관리들이 지어주었다는 설과[1] 1930년 동아일보에 실린 윤치호의 회고담에서 왔다는 설이 있다.[2]

개설

강화도 조약이 체결(1876년)된 뒤 수신사김기수김홍집은 일본에 다녀온 뒤, 서양의 근대 문명과 일본의 문물제도를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박정양 · 엄세영(嚴世永) · 조병직(趙秉稷) · 민종묵 · 조준영(趙準永) · 심상학(沈相學) · 어윤중 · 홍영식 · 이원회(李元會) · 이헌영 · 김옥균 등을 정식위원으로 삼고, 이들을 보조하는 수원(隨員)·통사(通事)·종인(從人)으로 조사 시찰단을 편성하여 일본에 파견하였다. 조사 시찰단은 약 4개월 동안 일본에 머물면서 도쿄, 오사카를 주로 하고 때로는 인접 지방까지 가서 문교·내무·농상·외무·대장·군부 등 각 성(省)의 시설과 세관·조폐 등의 중요 부문 및 제사(製絲)·잠업(蠶業) 등에 이르기까지 고루 시찰하고 귀국했다. 이때 윤치호어윤중의 수원(隨員), 유길준도 수원이었다. [[隨員]<수원> 외국에 가는 사신 (使臣)을 따라가는 관원. 수행원 (隨行員).]

참고 자료

각주

  1. [책갈피 속의 오늘]1881년 신사유람단 귀국. 2004년 10월 21일. 2022년 11월 22일에 확인함.
  2. 우리역사넷. 2022년 11월 22일에 확인함.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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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어 한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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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감찰팀

위키백과, 자유 백과사전

조선 조사찰단 (宋宗宗)은 1881년 조선 왕조 가 일본에 보낸 조사단으로, 1876년 개항 이후 조선은 점진적으로 근대화 개혁을 추진해 왔다. 1881년 5월, 조선은 메이지 유신 이후 도입 된 다양한 신제도를 조사하고 일본과 중국 국민과 교류하기 위해 ‘동래현 조사단’이라는 명목으로 12명의 ‘조셉’을 100여 일간 일본에 파견했다. 조사찰단 각 구성원은 정해진 조사 임무를 수행했으며, 귀국 후 조사 보고서를 작성했다. 조사찰단은 조선이 새로운 근대 문명을 적극적으로 학습하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으며, 일본에게는 메이지 유신을 체계적으로 조사한 최초의 외국 사절단이기도 했다. 이는 조선 근대사와 근대 동아시아 국제관계사에 있어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 1 ]

출발 전

조선 고종은 1881년 2월 9일(고종 18년 1월 11일)부터 차례로 ‘사문관’을 임명하기 시작했다. 이날 박정양, 조준영, 엄세영, 강문형, 심상학, 홍영식, 유윤정은 고종으로부터 ‘동래현 감찰관’으로 일본에 파견된다는 은폐를 받았다. 3 월 1일(음력 2월 2일)에는 이헌영, 민종목, 조병직, 이원회 등 4명이 같은 은폐를 받았고, 이후 김용원이 합류하여 이 12명이 ‘군자여행단’을 이루었다. 고종은 그들에게 "조정의 논의, 정세, 풍습과 백성, 외교 교류 및 무역"에 대한 상세한 조사를 실시하고 관련 정보를 수집하도록 지시하면서 각자에게 다른 임무를 부여했습니다.

박정양 - 내무부 및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선샹쉐 - 외교부

Yu Yunzhong – 재무부

조준영 - 교육부

Yan Shiyong – 법무부

장원신 - 공공사업부

홍영식 - 육군성

리위안후이 - 군사 훈련

Li Xianyong , Zhao Bingji , Min Zhongmo – 세관 상황

( 김용원은 임시로 임명되었으며, 구체적인 업무는 배정되지 않았습니다.)

인원이 정해지자 시찰 명령을 받은 12명의 신하는 1881년 4월 23일(음력 3월 25일) 경상도 동래부에 도착했다. 나흘 뒤 정병하는 고종이 하사한 여비로 받은 은 5만 냥을 시찰단에게 주고 1,366엔으로 환전했다. 그 후 일본인들과 접촉하여 스미토모로부터 증기선 '안녕마루'를 빌렸다. 5월 7일(음력 4월 10일) 동래부산을 출발하여 시찰을 시작하기 위해 비밀리에 일본으로 향했다. 전체 '신사도단'은 12개 조, 60명 이상으로 구성되었다. [ 2 ]

검사 상황

'신사여행' 일행은 1881년 5월 7일 한국 부산을 출발하여 쓰시마, 나가사키, 시모노세키, 오사카, 고베, 요코하마를 거쳐 5월 27일 일본의 수도 도쿄에 도착했습니다. 일행은 도쿄에 74일간 머물면서 업무차 요코하마와 오사카를 방문했습니다. 그들은 여행을 개인적인 행사처럼 여겨 관공서에 묵지 않고 사설 여관에 숙박했습니다. 일본 방문 기간 동안 '신사여행' 일행은 일본 정부와 국민 모두의 환영을 받았으며,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았습니다.

'신사여행' 일행은 일본 체류 기간 동안 시찰을 맡은 각 부처의 장들뿐 아니라 산조 사네토미 재상, 아리스가와 아루히토 좌 대왕 , 이와쿠라 토모미 우대 , 이토 히로부미 참의원 등 일본 정계 거물 들을 만났다. 또한 허여장 , 장사귀 , 황존선 등 주일 파견한 청나라 사신들과도 자주 접촉했다 . 이들은 일본 정부의 여러 부처를 시찰하는 것 외에도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생활 등 일본 사회 전반에 대한 포괄적인 관찰 활동을 펼쳤다. 2개월 반 동안의 시찰을 마친 후, "신사여행단"은 1881년 8월 5일 일본 외무성이 주최한 송별 연회에 참석한 후 8월 8일 이후 귀국길에 올랐다. 1881년 8월 27일(윤월 7월 3일), 시찰을 위해 중국으로 간 유윤종과 김용원을 제외한 나머지 10명의 한국인은 일본 상선 "치토세마루"호를 타고 부산에 도착하여 한국으로 귀국함으로써 일본에서의 시찰여행을 마쳤다. [ 3 ]

참고 자료

  1. 조사시찰단(장검사단)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encykorea.aks.ac.kr. [ 2019-07-27 ] .
  2.  *한국사*. 탄주도문화출판사. 1999. ( 저자 목록이 누락되어 있습니다 .) |first1=|last1=
  3.  고종실기: 제1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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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1년(고종 18년) 일본으로 파견되었던 조사시찰단(신사유람단) 단원들은 약 4개월간 일본의 정치, 경제, 군사, 교육, 산업 등 근대화된 국가 제도를 정밀하게 조사·시찰한 뒤, 귀국하여 방대한 보고서와 기록을 고종에게 제출하거나 후대에 남겼습니다.

이들이 남긴 대표적인 보고서와 주요 글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주요 조사 보고서 (문견록·문견사건)

조사시찰단의 정식 위원 12명은 각자 담당한 정부 부처와 관청, 산업 시설 등을 둘러본 뒤 상세한 보고서인 문견록(聞見錄) 및 문견사건(聞見事件)을 작성해 고종에게 바쳤습니다. 이 보고서들은 조선 정부가 근대적 개화 정책을 추진하는 데 결정적인 지침서 역할을 했습니다.

  • <동사록(東査錄)> - 박정양 (내무·농상 담당)

    • 박정양이 일본의 내무성, 농상무성, 지방 행정 제도 및 산업 시설을 둘러보고 작성한 종합 보고서입니다.

    • 일본의 근대적 지방 행정 조직과 농업·산업 진흥 정책, 세제 및 인구 조사 방식 등을 상세히 기록했습니다.

  • <일본문견록(日本聞見錄)> - 어윤중 (대장성·재정 담당)

    • 어윤중이 일본의 재정 및 화폐·조폐 제도, 세관, 은행 시스템(대장성)을 집중적으로 조사한 보고서입니다.

    • 조선의 근대적 재정 개혁과 세제 개편을 이끄는 기초 자료가 되었습니다.

  • <일본문견록(日本聞見錄)> - 홍영식 (육군성·군사 담당)

    • 홍영식이 일본의 군사 제도(육군성), 징병제, 군사 훈련, 무기 제조 공장(육군 총포창 등)을 시찰하고 작성했습니다.

    • 훗날 조선의 신식 군대(별기군) 창설과 군제 개혁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 <일본문견록(日本聞見錄)> - 이헌영 (세관·외교 담당)

    • 일본의 외무성 업무, 각 항구의 세관 운영 실태 및 무역 구조를 조사·정리했습니다.

  • 기타 위원들의 보고서

    • 조준영 (문부성·교육 담당): 일본의 근대 학제 및 학교 교육 시스템 보고.

    • 엄세영 (사법성·법률 담당): 일본의 근대 사법 제도 및 재판소 구조 보고.

    • 강문형 (공부성·공업 담당): 근대적 공장 및 공업 시설, 기술 인프라 시찰 보고.

2. 개인 견문록 및 일기

공식적인 보고서 외에도 시찰 일정, 일본 정계 인사 및 청나라 사신과의 교류, 근대 문물에 대한 개인적 소회 등을 담은 일기와 견문록이 남아 있습니다.

  • <일본일기(日本日記)> - 박정양

    • 박정양이 1881년 4월 한성을 출발하여 일본 각지를 돌아보고 귀국할 때까지의 일정을 날짜별로 상세히 기록한 일기입니다.

  • <일사록(日査錄)> - 이헌영

    • 이헌영이 시찰 기간 동안 작성한 일기로, 일본의 관청 및 관료들과의 면담 내용, 당시 일본의 사회적 분위기가 생생하게 담겨 있습니다.

  • <음청사(陰晴史)> - 김윤식

    • (※ 조사시찰단 직후인 1881년 말, 청나라에 영선사로 파견된 김윤식의 일기이지만, 당시 개화파 지식인들의 세계관과 해외 시찰 기록의 대표작으로 함께 꼽힙니다.)

3. 수행원들의 추가 기록 및 저술

조사시찰단에 수행원(隨員) 자격으로 참가했던 젊은 지식인들 역시 일본 시찰을 계기로 근대 사상을 접하고 중요한 저술을 남겼습니다.

  • 유길준 (어윤중의 수행원으로 참가)

    • 시찰단 활동 이후 일본에 남아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서 한국인 최초의 일본 유학생이 되었습니다.

    • 훗날 이 시기의 경험과 미국 유학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 최초의 서양 견문록인 <서유견문(西遊見聞)>을 집필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 윤치호 (어윤중의 수행원으로 참가)

    • 윤치호 역시 일본에 남아 도키와이 진샤(동경진샤) 등에서 공부하며 근대 학문을 배웠으며, 이 시기부터 평생에 걸쳐 작성한 유명한 <윤치호 일기>의 초반부를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처럼 조사시찰단이 남긴 보고서와 기록들은 단순히 개인의 여행기를 넘어, 19세기 후반 조선이 서구 근대 문명과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을 체계적으로 파악하고 근대적 개혁(갑오개혁 등)으로 나아가는 데 결정적인 바탕이 된 소중한 역사적 사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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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올려주신 자료의 조사시찰단은 단순히 일본을 구경하고 돌아온 사람들이 아니라, 귀국 후 상당히 방대한 <공식 보고서·견문록·일기성 기록>을 남겼습니다. 오히려 이 기록들이 1881년 조선 지식인이 메이지 일본을 실제로 어떻게 보았는지를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올려주신 자료에서도 이들이 도쿄·오사카뿐 아니라 지방까지 다니며 문교·내무·농상·외무·대장·군부 등 분야를 나누어 조사했다고 설명합니다.

가장 먼저 보실 것은 <일본문견사건 日本聞見事件>입니다. 현재 확인되는 것은 12명의 조사 가운데 박정양·조준영·강문형·이헌영·민종묵·심상학·엄세영 등 7명이 남긴 기록으로, 모두 합해 14권이 전합니다. 일본의 정치·경제·군사·외교뿐 아니라 학교, 산업시설, 개항장, 물산, 풍속, 일상생활까지 기록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일본을 보고 무엇을 느꼈는가”를 알고 싶다면 가장 기본적인 자료입니다.

특히 읽어볼 만한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이헌영, <일사집략 日槎集略>

제가 우선 한 권만 권한다면 이것입니다. 이헌영이 조사시찰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여행하면서 보고 들은 것을 정리한 기록입니다. 천·지·인 3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단순한 정부 조직표가 아니라 여행과 견문이 들어 있기 때문에 당시 조선 관료가 일본을 직접 보면서 받은 충격과 관심사를 파악하기에 좋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일사집략> 안에 귀국 후 국왕에게 제출한 「별단」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최근 연구에서는 이러한 별단이 보통 여행기가 아니라 암행어사의 복명서와 비슷한 형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봅니다. 조사시찰단이 실제로는 ‘해외에 파견된 암행어사’와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1. 박정양, <일본내무성시찰기 日本內務省視察記>

이것은 대단히 구체적입니다.

박정양은 일본의 내무성과 농상무성을 담당했습니다. 귀국하여 일본 내무성의 조직을 거의 해부하듯 기록했습니다. 내무성의 직제뿐 아니라 위생국·경보국·호적국·토목국·지리국·사사국·감옥국 등의 업무와 각종 규칙까지 정리했습니다. 3권 3책입니다.

오늘날 식으로 말하면,

<일본 정부의 행정시스템 벤치마킹 보고서>

에 가깝습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조선 관리들이 서양을 직접 본 것이 아니라 <서양 제도를 받아들여 이미 국가조직을 재편하고 있던 일본>을 연구했다는 점입니다.

  1. 박정양, <일본농상무성시찰기 日本農商務省視察記>

박정양이 함께 작성한 2권 2책의 보고서입니다. 일본의 농업·상업·산업정책과 이를 담당하는 관청을 조사했습니다.

따라서 박정양의 기록을 함께 읽으면,

<내무행정 + 산업정책>

이라는 메이지 국가 건설의 두 핵심 축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별도로

<일본내무성급농상무성시찰서계 日本內務省及農商務省視察書啓>

라는 국왕에게 올린 공식 복명서도 있습니다. 즉 박정양에게는 적어도

<공식 복명서 → 전문 시찰보고서 → 개인적인 견문기록>

이라는 세 층위의 기록이 존재합니다.

  1. 박정양, <일본국문견조건 日本國聞見條件>

제가 보기에는 이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앞의 <내무성시찰기>가 정부제도를 객관적으로 정리한 기술보고서에 가깝다면, <일본국문견조건>은 박정양 자신이 일본에서 직접 보고 들은 것을 정리한 개인적 문견록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도 이것을 공식 보고서와 구별되는 ‘개인적인 문견기록’으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박정양이라는 한 사람을 연구한다면,

<일본내무성시찰기>와 <일본국문견조건>

을 나란히 읽는 것이 매우 좋습니다.

앞에서는 “일본의 제도가 어떻게 되어 있는가”가 나오고, 뒤에서는 “조선의 관리 박정양이 그 일본을 어떻게 인식했는가”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1. 민종묵, <일본외무성시찰기 日本外務省視察記>

외교를 담당했던 민종묵의 보고서입니다. 무려 8권 4책입니다.

외무성의 직제와 규칙뿐 아니라 일본이 각 나라와 맺은 조약, 청국과의 관계, 페루와의 관계, 우편·전신, 외국인 거류지, 개항장 관계까지 수록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차이가 하나 있습니다.

<일본외무성시찰기>에는 민종묵 자신의 평가가 거의 없습니다. 일종의 자료집입니다.

반면 민종묵은 별도로

<일본문견사건>
<일본문견사건초>

를 남겼습니다. 이쪽에는 일본 외교에 대한 그의 실제 관찰과 인식이 더 많이 드러납니다. 따라서 “일본 외교제도”가 아니라 “민종묵이 일본을 어떻게 보았나”가 궁금하다면 후자를 읽어야 합니다.

여기서 조사시찰단 기록 전체를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구별이 생깁니다.

<시찰기> = 제도와 규칙을 조사한 기술보고서

<문견사건> = 실제로 보고 들은 것에 대한 견문록

<서계·별단> = 귀국 후 고종에게 보고한 공식 복명서

<일기·기행문> = 개인적인 여행 경험과 인상

입니다.

그래서 같은 사람이 일본에 대해 여러 종류의 글을 남긴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오늘날 “신사유람단이 일본을 보고 크게 충격을 받았다”라고 한 문장으로 말해버리면 실제 기록의 성격을 놓치게 됩니다.

이 사람들이 일본을 보고 남긴 기록은 의외로 감탄 일변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상당 부분은 놀라울 정도로 <관료적이고 냉정한 조사>입니다.

예를 들어

“일본은 발전했다.”

라고 쓰는 것이 아니라,

“내무성에는 어떤 국이 있고, 직원은 몇 명이며, 어떤 규칙으로 업무를 처리하고, 지방행정은 어떻게 연결된다.”

를 적습니다.

이 점에서 조사시찰단은 1871~73년 일본의 <이와쿠라 사절단>과 비교하면 아주 흥미롭습니다. 실제 연구에서도 조사시찰단을 러시아 표트르 대제의 서유럽 사절단이나 일본 이와쿠라 사절단과 비교합니다.

다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이와쿠라 사절단은

<일본 → 미국·유럽 → 서구 근대>

를 직접 보았습니다.

조사시찰단은

<조선 → 일본 → 일본이 번역해 놓은 서구 근대>

를 보았습니다.

이 차이가 이후 조선의 근대화에 엄청난 영향을 미칩니다.

조사시찰단이 본 일본은 이미 폐번치현, 징병제, 근대적 학교, 경찰, 우편, 철도, 공장, 근대적 관료제 등을 빠르게 구축하고 있던 국가였습니다. 조선 정부가 이들을 12개의 전문 분야로 나누어 조사하게 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올려주신 자료에도 박정양은 내무·농상, 민종묵은 외무, 조준영은 교육, 심상학은 사법, 홍영식은 육군 등으로 임무가 나뉘어 있었다고 나옵니다.

그 결과 이들의 일본관은 대체로 세 가지가 동시에 존재합니다.

첫째는 <경탄>입니다.

“불과 몇십 년 동안 어떻게 이렇게 국가제도를 바꿀 수 있었는가?”

라는 충격입니다.

둘째는 <실용주의>입니다.

“일본을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보다

<조선에 무엇을 가져올 수 있는가>

가 훨씬 중요했습니다.

셋째는 <경계심>입니다.

이미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뒤였기 때문에 일본이 단순히 배울 만한 모범국가만은 아니었습니다.

이 때문에 조사시찰단의 일본관을 곧바로 ‘친일’이라고 부르면 시대착오적입니다. 당시에는

<일본을 경계하면서 일본으로부터 배운다>

는 태도가 동시에 가능했습니다.

저는 조사시찰단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다음 순서로 읽어보는 것을 권합니다.

<1단계>
이헌영 <일사집략>

→ 실제 여행과 일본 사회를 비교적 생생하게 볼 수 있습니다.

<2단계>
<일본문견사건>

→ 여러 조사들의 일본 인식을 비교할 수 있습니다.

<3단계>
박정양 <일본내무성시찰기>

→ 그들이 말한 ‘일본 근대화’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4단계>
민종묵 <일본외무성시찰기> + <일본문견사건>

→ 일본이 이미 국제조약과 외교를 통해 새로운 국가체제로 들어가 있었음을 조선 관리들이 어떻게 파악했는지 볼 수 있습니다.

<5단계>
현대 연구인 윤현숙의 「1881년 조사시찰단 문견 기록의 글쓰기 양상」

→ 이 기록들이 전통적인 조선 사행록에서 어떻게 근대적 조사보고서로 변화하고 있었는지를 분석한 논문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리면, 조사시찰단을 공부할 때 가장 흥미로운 질문은 단순히

<“그들은 일본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게 자세히 보고 돌아왔는데 조선은 왜 일본처럼 국가를 개조할 수 없었는가?”>

입니다.

바로 이 질문에서 조사시찰단 → 임오군란 → 갑신정변 → 갑오개혁으로 연결됩니다. 조사시찰단원 가운데 홍영식 같은 인물은 불과 3년 뒤 갑신정변의 핵심 인물이 됩니다. 반면 다른 조사들은 훨씬 온건한 개혁노선을 걷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보고서를 서로 비교해 보면 <개화파가 처음부터 하나의 집단이 아니었다>는 사실도 상당히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원하신다면 다음에는 <조사시찰단 12명 각각이 맡은 분야 + 남긴 보고서 + 귀국 후 정치적 행로>를 표로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이것을 보면 1881년 일본 시찰이 이후 개화파의 분화와 어떻게 연결되는지가 아주 잘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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