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8-08

* 조사 시찰단 - 위키백과, 신사유람단 -- 보고서 - 조선 근대 정치의 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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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 시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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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일본 유학 중의 유길준
윤치호의 사진

조사 시찰단(朝士視察團)은 1881년(고종 18년) 5월 7일(음력 4월 10일)부터 8월 26일(음력 윤7월 2일)까지 김홍집의 주장에 따라 수신사에 이어 일본 제국에 파견되었던 집단이다. 과거에는 신사 유람단(紳士遊覽團)이라고 지칭하였으나 한국사 용어 수정안에 따라 조사 시찰단으로 바꾸어 부른다. 조사(朝士)는 조선의 조정에서 벼슬을 하는 신하라는 뜻으로, 《매천야록》 유람조사(遊覽朝士)라는 명칭으로 등장한다. 반면 신사(紳士)는 영어로 젠틀맨(gentleman)과 같은 말이며, 일본 관리들이 지어주었다는 설과[1] 1930년 동아일보에 실린 윤치호의 회고담에서 왔다는 설이 있다.[2]

개설

강화도 조약이 체결(1876년)된 뒤 수신사인 김기수와 김홍집은 일본에 다녀온 뒤, 서양의 근대 문명과 일본의 문물제도를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박정양 · 엄세영(嚴世永) · 조병직(趙秉稷) · 민종묵 · 조준영(趙準永) · 심상학(沈相學) · 어윤중 · 홍영식 · 이원회(李元會) · 이헌영 · 김옥균 등을 정식위원으로 삼고, 이들을 보조하는 수원(隨員)·통사(通事)·종인(從人)으로 조사 시찰단을 편성하여 일본에 파견하였다. 조사 시찰단은 약 4개월 동안 일본에 머물면서 도쿄, 오사카를 주로 하고 때로는 인접 지방까지 가서 문교·내무·농상·외무·대장·군부 등 각 성(省)의 시설과 세관·조폐 등의 중요 부문 및 제사(製絲)·잠업(蠶業) 등에 이르기까지 고루 시찰하고 귀국했다. 이때 윤치호는 어윤중의 수원(隨員), 유길준도 수원이었다. [[隨員]<수원> 외국에 가는 사신 (使臣)을 따라가는 관원. 수행원 (隨行員).]

참고 자료

각주

  1. “[책갈피 속의 오늘]1881년 신사유람단 귀국”. 2004년 10월 21일. 2022년 11월 22일에 확인함.
  2. “우리역사넷”. 2022년 11월 22일에 확인함.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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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어 한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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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감찰팀

위키백과, 자유 백과사전

조선 조사찰단 (宋宗宗)은 1881년 조선 왕조 가 일본에 보낸 조사단으로, 1876년 개항 이후 조선은 점진적으로 근대화 개혁을 추진해 왔다. 1881년 5월, 조선은 메이지 유신 이후 도입 된 다양한 신제도를 조사하고 일본과 중국 국민과 교류하기 위해 ‘동래현 조사단’이라는 명목으로 12명의 ‘조셉’을 100여 일간 일본에 파견했다. 조사찰단 각 구성원은 정해진 조사 임무를 수행했으며, 귀국 후 조사 보고서를 작성했다. 조사찰단은 조선이 새로운 근대 문명을 적극적으로 학습하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으며, 일본에게는 메이지 유신을 체계적으로 조사한 최초의 외국 사절단이기도 했다. 이는 조선 근대사와 근대 동아시아 국제관계사에 있어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 1 ]

출발 전

조선 고종은 1881년 2월 9일(고종 18년 1월 11일)부터 차례로 ‘사문관’을 임명하기 시작했다. 이날 박정양, 조준영, 엄세영, 강문형, 심상학, 홍영식, 유윤정은 고종으로부터 ‘동래현 감찰관’으로 일본에 파견된다는 은폐를 받았다. 3 월 1일(음력 2월 2일)에는 이헌영, 민종목, 조병직, 이원회 등 4명이 같은 은폐를 받았고, 이후 김용원이 합류하여 이 12명이 ‘군자여행단’을 이루었다. 고종은 그들에게 "조정의 논의, 정세, 풍습과 백성, 외교 교류 및 무역"에 대한 상세한 조사를 실시하고 관련 정보를 수집하도록 지시하면서 각자에게 다른 임무를 부여했습니다.

박정양 - 내무부 및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선샹쉐 - 외교부

Yu Yunzhong – 재무부

조준영 - 교육부

Yan Shiyong – 법무부

장원신 - 공공사업부

홍영식 - 육군성

리위안후이 - 군사 훈련

Li Xianyong , Zhao Bingji , Min Zhongmo – 세관 상황

( 김용원은 임시로 임명되었으며, 구체적인 업무는 배정되지 않았습니다.)

인원이 정해지자 시찰 명령을 받은 12명의 신하는 1881년 4월 23일(음력 3월 25일) 경상도 동래부에 도착했다. 나흘 뒤 정병하는 고종이 하사한 여비로 받은 은 5만 냥을 시찰단에게 주고 1,366엔으로 환전했다. 그 후 일본인들과 접촉하여 스미토모로부터 증기선 '안녕마루'를 빌렸다. 5월 7일(음력 4월 10일) 동래부산을 출발하여 시찰을 시작하기 위해 비밀리에 일본으로 향했다. 전체 '신사도단'은 12개 조, 60명 이상으로 구성되었다. [ 2 ]

검사 상황

'신사여행' 일행은 1881년 5월 7일 한국 부산을 출발하여 쓰시마, 나가사키, 시모노세키, 오사카, 고베, 요코하마를 거쳐 5월 27일 일본의 수도 도쿄에 도착했습니다. 일행은 도쿄에 74일간 머물면서 업무차 요코하마와 오사카를 방문했습니다. 그들은 여행을 개인적인 행사처럼 여겨 관공서에 묵지 않고 사설 여관에 숙박했습니다. 일본 방문 기간 동안 '신사여행' 일행은 일본 정부와 국민 모두의 환영을 받았으며,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았습니다.

'신사여행' 일행은 일본 체류 기간 동안 시찰을 맡은 각 부처의 장들뿐 아니라 산조 사네토미 재상, 아리스가와 아루히토 좌 대왕 , 이와쿠라 토모미 우대 왕 , 이토 히로부미 참의원 등 일본 정계 거물 들을 만났다. 또한 허여장 , 장사귀 , 황존선 등 주일 파견한 청나라 사신들과도 자주 접촉했다 . 이들은 일본 정부의 여러 부처를 시찰하는 것 외에도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생활 등 일본 사회 전반에 대한 포괄적인 관찰 활동을 펼쳤다. 2개월 반 동안의 시찰을 마친 후, "신사여행단"은 1881년 8월 5일 일본 외무성이 주최한 송별 연회에 참석한 후 8월 8일 이후 귀국길에 올랐다. 1881년 8월 27일(윤월 7월 3일), 시찰을 위해 중국으로 간 유윤종과 김용원을 제외한 나머지 10명의 한국인은 일본 상선 "치토세마루"호를 타고 부산에 도착하여 한국으로 귀국함으로써 일본에서의 시찰여행을 마쳤다. [ 3 ]

참고 자료

  1. 조사시찰단(장검사단)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encykorea.aks.ac.kr. [ 2019-07-27 ] .
  2.  *한국사*. 탄주도문화출판사. 1999. ( 저자 목록이 누락되어 있습니다 .) |first1=|last1=
  3.  고종실기: 제1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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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1년(고종 18년) 일본으로 파견되었던 조사시찰단(신사유람단) 단원들은 약 4개월간 일본의 정치, 경제, 군사, 교육, 산업 등 근대화된 국가 제도를 정밀하게 조사·시찰한 뒤, 귀국하여 방대한 보고서와 기록을 고종에게 제출하거나 후대에 남겼습니다.

이들이 남긴 대표적인 보고서와 주요 글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주요 조사 보고서 (문견록·문견사건)

조사시찰단의 정식 위원 12명은 각자 담당한 정부 부처와 관청, 산업 시설 등을 둘러본 뒤 상세한 보고서인 문견록(聞見錄) 및 문견사건(聞見事件)을 작성해 고종에게 바쳤습니다. 이 보고서들은 조선 정부가 근대적 개화 정책을 추진하는 데 결정적인 지침서 역할을 했습니다.

  • <동사록(東査錄)> - 박정양 (내무·농상 담당)

    • 박정양이 일본의 내무성, 농상무성, 지방 행정 제도 및 산업 시설을 둘러보고 작성한 종합 보고서입니다.

    • 일본의 근대적 지방 행정 조직과 농업·산업 진흥 정책, 세제 및 인구 조사 방식 등을 상세히 기록했습니다.

  • <일본문견록(日本聞見錄)> - 어윤중 (대장성·재정 담당)

    • 어윤중이 일본의 재정 및 화폐·조폐 제도, 세관, 은행 시스템(대장성)을 집중적으로 조사한 보고서입니다.

    • 조선의 근대적 재정 개혁과 세제 개편을 이끄는 기초 자료가 되었습니다.

  • <일본문견록(日本聞見錄)> - 홍영식 (육군성·군사 담당)

    • 홍영식이 일본의 군사 제도(육군성), 징병제, 군사 훈련, 무기 제조 공장(육군 총포창 등)을 시찰하고 작성했습니다.

    • 훗날 조선의 신식 군대(별기군) 창설과 군제 개혁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 <일본문견록(日本聞見錄)> - 이헌영 (세관·외교 담당)

    • 일본의 외무성 업무, 각 항구의 세관 운영 실태 및 무역 구조를 조사·정리했습니다.

  • 기타 위원들의 보고서

    • 조준영 (문부성·교육 담당): 일본의 근대 학제 및 학교 교육 시스템 보고.

    • 엄세영 (사법성·법률 담당): 일본의 근대 사법 제도 및 재판소 구조 보고.

    • 강문형 (공부성·공업 담당): 근대적 공장 및 공업 시설, 기술 인프라 시찰 보고.

2. 개인 견문록 및 일기

공식적인 보고서 외에도 시찰 일정, 일본 정계 인사 및 청나라 사신과의 교류, 근대 문물에 대한 개인적 소회 등을 담은 일기와 견문록이 남아 있습니다.

  • <일본일기(日本日記)> - 박정양

    • 박정양이 1881년 4월 한성을 출발하여 일본 각지를 돌아보고 귀국할 때까지의 일정을 날짜별로 상세히 기록한 일기입니다.

  • <일사록(日査錄)> - 이헌영

    • 이헌영이 시찰 기간 동안 작성한 일기로, 일본의 관청 및 관료들과의 면담 내용, 당시 일본의 사회적 분위기가 생생하게 담겨 있습니다.

  • <음청사(陰晴史)> - 김윤식

    • (※ 조사시찰단 직후인 1881년 말, 청나라에 영선사로 파견된 김윤식의 일기이지만, 당시 개화파 지식인들의 세계관과 해외 시찰 기록의 대표작으로 함께 꼽힙니다.)

3. 수행원들의 추가 기록 및 저술

조사시찰단에 수행원(隨員) 자격으로 참가했던 젊은 지식인들 역시 일본 시찰을 계기로 근대 사상을 접하고 중요한 저술을 남겼습니다.

  • 유길준 (어윤중의 수행원으로 참가)

    • 시찰단 활동 이후 일본에 남아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서 한국인 최초의 일본 유학생이 되었습니다.

    • 훗날 이 시기의 경험과 미국 유학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 최초의 서양 견문록인 <서유견문(西遊見聞)>을 집필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 윤치호 (어윤중의 수행원으로 참가)

    • 윤치호 역시 일본에 남아 도키와이 진샤(동경진샤) 등에서 공부하며 근대 학문을 배웠으며, 이 시기부터 평생에 걸쳐 작성한 유명한 <윤치호 일기>의 초반부를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처럼 조사시찰단이 남긴 보고서와 기록들은 단순히 개인의 여행기를 넘어, 19세기 후반 조선이 서구 근대 문명과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을 체계적으로 파악하고 근대적 개혁(갑오개혁 등)으로 나아가는 데 결정적인 바탕이 된 소중한 역사적 사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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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올려주신 자료의 조사시찰단은 단순히 일본을 구경하고 돌아온 사람들이 아니라, 귀국 후 상당히 방대한 <공식 보고서·견문록·일기성 기록>을 남겼습니다. 오히려 이 기록들이 1881년 조선 지식인이 메이지 일본을 실제로 어떻게 보았는지를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올려주신 자료에서도 이들이 도쿄·오사카뿐 아니라 지방까지 다니며 문교·내무·농상·외무·대장·군부 등 분야를 나누어 조사했다고 설명합니다.

가장 먼저 보실 것은 <일본문견사건 日本聞見事件>입니다. 현재 확인되는 것은 12명의 조사 가운데 박정양·조준영·강문형·이헌영·민종묵·심상학·엄세영 등 7명이 남긴 기록으로, 모두 합해 14권이 전합니다. 일본의 정치·경제·군사·외교뿐 아니라 학교, 산업시설, 개항장, 물산, 풍속, 일상생활까지 기록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일본을 보고 무엇을 느꼈는가”를 알고 싶다면 가장 기본적인 자료입니다.

특히 읽어볼 만한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이헌영, <일사집략 日槎集略>

제가 우선 한 권만 권한다면 이것입니다. 이헌영이 조사시찰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여행하면서 보고 들은 것을 정리한 기록입니다. 천·지·인 3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단순한 정부 조직표가 아니라 여행과 견문이 들어 있기 때문에 당시 조선 관료가 일본을 직접 보면서 받은 충격과 관심사를 파악하기에 좋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일사집략> 안에 귀국 후 국왕에게 제출한 「별단」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최근 연구에서는 이러한 별단이 보통 여행기가 아니라 암행어사의 복명서와 비슷한 형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봅니다. 조사시찰단이 실제로는 ‘해외에 파견된 암행어사’와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1. 박정양, <일본내무성시찰기 日本內務省視察記>

이것은 대단히 구체적입니다.

박정양은 일본의 내무성과 농상무성을 담당했습니다. 귀국하여 일본 내무성의 조직을 거의 해부하듯 기록했습니다. 내무성의 직제뿐 아니라 위생국·경보국·호적국·토목국·지리국·사사국·감옥국 등의 업무와 각종 규칙까지 정리했습니다. 3권 3책입니다.

오늘날 식으로 말하면,

<일본 정부의 행정시스템 벤치마킹 보고서>

에 가깝습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조선 관리들이 서양을 직접 본 것이 아니라 <서양 제도를 받아들여 이미 국가조직을 재편하고 있던 일본>을 연구했다는 점입니다.

  1. 박정양, <일본농상무성시찰기 日本農商務省視察記>

박정양이 함께 작성한 2권 2책의 보고서입니다. 일본의 농업·상업·산업정책과 이를 담당하는 관청을 조사했습니다.

따라서 박정양의 기록을 함께 읽으면,

<내무행정 + 산업정책>

이라는 메이지 국가 건설의 두 핵심 축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별도로

<일본내무성급농상무성시찰서계 日本內務省及農商務省視察書啓>

라는 국왕에게 올린 공식 복명서도 있습니다. 즉 박정양에게는 적어도

<공식 복명서 → 전문 시찰보고서 → 개인적인 견문기록>

이라는 세 층위의 기록이 존재합니다.

  1. 박정양, <일본국문견조건 日本國聞見條件>

제가 보기에는 이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앞의 <내무성시찰기>가 정부제도를 객관적으로 정리한 기술보고서에 가깝다면, <일본국문견조건>은 박정양 자신이 일본에서 직접 보고 들은 것을 정리한 개인적 문견록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도 이것을 공식 보고서와 구별되는 ‘개인적인 문견기록’으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박정양이라는 한 사람을 연구한다면,

<일본내무성시찰기>와 <일본국문견조건>

을 나란히 읽는 것이 매우 좋습니다.

앞에서는 “일본의 제도가 어떻게 되어 있는가”가 나오고, 뒤에서는 “조선의 관리 박정양이 그 일본을 어떻게 인식했는가”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1. 민종묵, <일본외무성시찰기 日本外務省視察記>

외교를 담당했던 민종묵의 보고서입니다. 무려 8권 4책입니다.

외무성의 직제와 규칙뿐 아니라 일본이 각 나라와 맺은 조약, 청국과의 관계, 페루와의 관계, 우편·전신, 외국인 거류지, 개항장 관계까지 수록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차이가 하나 있습니다.

<일본외무성시찰기>에는 민종묵 자신의 평가가 거의 없습니다. 일종의 자료집입니다.

반면 민종묵은 별도로

<일본문견사건>
<일본문견사건초>

를 남겼습니다. 이쪽에는 일본 외교에 대한 그의 실제 관찰과 인식이 더 많이 드러납니다. 따라서 “일본 외교제도”가 아니라 “민종묵이 일본을 어떻게 보았나”가 궁금하다면 후자를 읽어야 합니다.

여기서 조사시찰단 기록 전체를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구별이 생깁니다.

<시찰기> = 제도와 규칙을 조사한 기술보고서

<문견사건> = 실제로 보고 들은 것에 대한 견문록

<서계·별단> = 귀국 후 고종에게 보고한 공식 복명서

<일기·기행문> = 개인적인 여행 경험과 인상

입니다.

그래서 같은 사람이 일본에 대해 여러 종류의 글을 남긴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오늘날 “신사유람단이 일본을 보고 크게 충격을 받았다”라고 한 문장으로 말해버리면 실제 기록의 성격을 놓치게 됩니다.

이 사람들이 일본을 보고 남긴 기록은 의외로 감탄 일변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상당 부분은 놀라울 정도로 <관료적이고 냉정한 조사>입니다.

예를 들어

“일본은 발전했다.”

라고 쓰는 것이 아니라,

“내무성에는 어떤 국이 있고, 직원은 몇 명이며, 어떤 규칙으로 업무를 처리하고, 지방행정은 어떻게 연결된다.”

를 적습니다.

이 점에서 조사시찰단은 1871~73년 일본의 <이와쿠라 사절단>과 비교하면 아주 흥미롭습니다. 실제 연구에서도 조사시찰단을 러시아 표트르 대제의 서유럽 사절단이나 일본 이와쿠라 사절단과 비교합니다.

다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이와쿠라 사절단은

<일본 → 미국·유럽 → 서구 근대>

를 직접 보았습니다.

조사시찰단은

<조선 → 일본 → 일본이 번역해 놓은 서구 근대>

를 보았습니다.

이 차이가 이후 조선의 근대화에 엄청난 영향을 미칩니다.

조사시찰단이 본 일본은 이미 폐번치현, 징병제, 근대적 학교, 경찰, 우편, 철도, 공장, 근대적 관료제 등을 빠르게 구축하고 있던 국가였습니다. 조선 정부가 이들을 12개의 전문 분야로 나누어 조사하게 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올려주신 자료에도 박정양은 내무·농상, 민종묵은 외무, 조준영은 교육, 심상학은 사법, 홍영식은 육군 등으로 임무가 나뉘어 있었다고 나옵니다.

그 결과 이들의 일본관은 대체로 세 가지가 동시에 존재합니다.

첫째는 <경탄>입니다.

“불과 몇십 년 동안 어떻게 이렇게 국가제도를 바꿀 수 있었는가?”

라는 충격입니다.

둘째는 <실용주의>입니다.

“일본을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보다

<조선에 무엇을 가져올 수 있는가>

가 훨씬 중요했습니다.

셋째는 <경계심>입니다.

이미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뒤였기 때문에 일본이 단순히 배울 만한 모범국가만은 아니었습니다.

이 때문에 조사시찰단의 일본관을 곧바로 ‘친일’이라고 부르면 시대착오적입니다. 당시에는

<일본을 경계하면서 일본으로부터 배운다>

는 태도가 동시에 가능했습니다.

저는 조사시찰단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다음 순서로 읽어보는 것을 권합니다.

<1단계>
이헌영 <일사집략>

→ 실제 여행과 일본 사회를 비교적 생생하게 볼 수 있습니다.

<2단계>
<일본문견사건>

→ 여러 조사들의 일본 인식을 비교할 수 있습니다.

<3단계>
박정양 <일본내무성시찰기>

→ 그들이 말한 ‘일본 근대화’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4단계>
민종묵 <일본외무성시찰기> + <일본문견사건>

→ 일본이 이미 국제조약과 외교를 통해 새로운 국가체제로 들어가 있었음을 조선 관리들이 어떻게 파악했는지 볼 수 있습니다.

<5단계>
현대 연구인 윤현숙의 「1881년 조사시찰단 문견 기록의 글쓰기 양상」

→ 이 기록들이 전통적인 조선 사행록에서 어떻게 근대적 조사보고서로 변화하고 있었는지를 분석한 논문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리면, 조사시찰단을 공부할 때 가장 흥미로운 질문은 단순히

<“그들은 일본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게 자세히 보고 돌아왔는데 조선은 왜 일본처럼 국가를 개조할 수 없었는가?”>

입니다.

바로 이 질문에서 조사시찰단 → 임오군란 → 갑신정변 → 갑오개혁으로 연결됩니다. 조사시찰단원 가운데 홍영식 같은 인물은 불과 3년 뒤 갑신정변의 핵심 인물이 됩니다. 반면 다른 조사들은 훨씬 온건한 개혁노선을 걷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보고서를 서로 비교해 보면 <개화파가 처음부터 하나의 집단이 아니었다>는 사실도 상당히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원하신다면 다음에는 <조사시찰단 12명 각각이 맡은 분야 + 남긴 보고서 + 귀국 후 정치적 행로>를 표로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이것을 보면 1881년 일본 시찰이 이후 개화파의 분화와 어떻게 연결되는지가 아주 잘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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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한국어로 써저있는 책이나 구할 수 있는 글을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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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시찰단 단원들이 남긴 한문 및 한문 혼용체의 공식 보고서와 개인 일기 등은 국학 연구 기관과 전문 출판사를 통해 현대 한국어로 완전 번역되어 대중도 쉽게 읽을 수 있는 단행본이나 학술 총서로 발간되어 있다.

현재 온·오프라인 서점이나 국립중앙도서관, 전자책 서비스 등에서 구할 수 있는 주요 번역서 및 연구서 목록은 다음과 같다.

1. 번역 총서 및 단행본

<조사시찰단기록 번역총서> (국학자료원)

  • 내용: 국학자료원에서 조사시찰단 관련 사료들을 현대 한국어로 완역하여 시리즈로 출간한 학술 총서이다.

  • 주요 권수:

    • <문견사건·일본국문견조건>: 강문형(공부성), 민종묵(세관), 박정양(외무성), 엄세영(사법성), 조준영(문부성) 등이 시찰한 부처별 보고서를 모아 번역한 책이다.

    • <일본일기(日本日記)> (박정양 지음): 조사시찰단의 주요 인물이었던 박정양이 한성을 출발해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오기까지의 전 과정을 날짜별로 상세히 기록한 현대어 번역본이다.

    • <일본육군조전> (이원회 기록, 박영사/국학자료원): 시찰단원 이원회가 일본의 근대적 군대 편성과 훈련 방식을 조사해 작성한 보고서를 현대어로 옮긴 책이다.

<알기 쉽게 번역한 서유견문> (이한섭 옮김, 박이정)

  • 내용: 어윤중의 수행원으로 조사시찰단에 참여했다가 일본에 남아 유학을 한 유길준의 저서 <서유견문>을 현대 한글 문장으로 완역한 책이다.

  • 특징: 원문이 한문 고어투에 가까워 읽기 어렵던 점을 쉬운 한국어 어휘와 깔끔한 문장으로 풀어내어 전자책(밀리의 서재, 예스24 등) 및 종이책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조선 지식인 유길준, 서양을 번역하다 - 서유견문> (서해문집)

  • 내용: 서해문집의 '오래된책방' 시리즈로 발간된 해제 및 번역서이다. 당시 개화파 지식인이 일본과 서구 문화를 바라본 시각을 현대적 감각에 맞게 정리했다.

2. 해설서 및 종합 연구서

보고서 원문 번역 외에, 당시 시찰단의 활동과 보고서의 핵심 내용을 종합하여 쉽게 풀어서 해설한 교양·연구 서적도 참고할 수 있다.

  • <일본이 진실로 강하더냐> (허동현 지음, 생각의나무/알라딘)

    • 조사시찰단 단원들이 작성한 보고서와 일기를 바탕으로, 그들이 근대화된 일본을 어떻게 관찰하고 평가했는지 다각도로 논증한 역사서이다.

  • <조사시찰단 연구> (각종 학술 단행본)

    • 한국학중앙연구원 및 대학 출판부 등에서 발간한 연구서로, 당시 시찰단이 작성한 보고서 각 편의 전문 원문과 현대어 역주(註)가 함께 수록되어 있다.

3.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디지털 사료 DB

종이책 외에 인터넷을 통해 원문과 번역문을 동시에 검색·열람할 수 있는 기관 DB도 잘 마련되어 있다.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검색창에 '조사시찰단', '박정양 일본일기', '어윤중 문견록' 등을 검색하면 현대어 번역문과 함께 원본 사료를 즉시 열람할 수 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사시찰단 각 위원들의 인물별 항목 및 보고서 명칭별 상세 해설이 정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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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현대 한국어로 읽을 수 있느냐>를 기준으로 다시 정리하면, 선택지가 훨씬 좁아집니다. 
조사시찰단 자체의 원문은 대부분 한문 또는 개화기 문체라서 그대로 읽기 어렵고, 현대 한국어 독자가 접근하기 쉬운 것은 <국역본·해제·현대 연구서·온라인 사료 번역>입니다.

가장 먼저 권할 것은 <국역 해행총재 11>입니다. 민족문화추진회가 1977년에 낸 국역본으로, 조사시찰단 관련 자료 가운데 이헌영의 <일사집략> 등을 현대 한국어로 읽을 수 있는 대표적인 자료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도 <일본문견사건>의 참고문헌으로 <국역 해행총재 11>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만 1977년 번역이라 오늘날의 아주 매끄러운 현대어는 아닙니다. 그래도 한문 원문을 직접 읽는 것과 비교하면 압도적으로 쉽습니다. 도서관이나 중고책, 일부 디지털 자료를 통해 찾을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적극 권하는 것은 국사편찬위원회의 <일사집략>, 한국사료총서 53입니다. 2009년에 간행된 판본입니다. 이헌영이 1881년 일본 시찰에서 작성한 자료를 한데 모은 것으로, <봉서>, <별단>, <문견록>, 일기, 문답록, 서찰록, 산록 등이 들어 있어 단순한 행정 보고서보다 훨씬 생생합니다.

특히 이 책이 좋은 이유는 이헌영이 일본에서 본 것을 상당히 구체적으로 기록하기 때문입니다. 전신, 학교, 물산, 풍속, 관세, 외국과의 조약, 일본 관청, 지방제도, 여행 경비, 선박 규칙 등까지 나옵니다. “1881년 조선 사람이 메이지 일본에 처음 들어가 무엇을 눈여겨보았나”를 읽기에는 가장 재미있는 자료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한국사료총서 53>은 완전한 현대어 대중 번역서라기보다는 연구용 사료집 성격이 강합니다. 따라서 처음부터 끝까지 읽기보다는 필요한 부분을 골라 읽는 편이 좋습니다.

온라인에서 가장 쉽게 시작할 수 있는 것은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의 <조사 시찰단의 보고>입니다. 여기에는 민종묵과 홍영식이 일본에서 돌아와 고종에게 보고한 <승정원일기> 기록을 현대 독자가 읽기 쉽게 번역·설명해 놓았습니다. 조사시찰단이 왜 파견되었으며, 귀국 후 무엇을 보고했는지 배경 설명도 함께 붙어 있습니다. 무료로 읽을 수 있습니다.

제가 처음 읽는 분에게는 이것을 제일 먼저 권하겠습니다.

<우리역사넷 ‘조사 시찰단의 보고’ → 이헌영 <일사집략> → 본격 연구서>

순서가 좋습니다.

조사시찰단 전체를 현대 한국어로 이해하려면 허동현의 연구도 중요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허동현의 연구를 토대로 한 <근대 한일관계사 연구―조사시찰단의 일본관과 국가구상>입니다. 이 책은 원문 번역집이라기보다 조사시찰단원들이 일본을 어떻게 보았으며, 그 경험이 이후 조선의 국가개혁 구상에 어떻게 연결되었는지를 분석한 연구서입니다. 즉 “무엇을 보았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것을 어떻게 해석했나”를 알 수 있습니다.

조사시찰단의 원자료 가운데 특히 중요한 <일본문견사건>에 대해서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항목도 상당히 유용합니다. 12명의 조사 가운데 박정양·조준영·강문형·이헌영·민종묵·심상학·엄세영 7명이 남긴 기록 14권으로, 일본의 역사·지리·정치·경제·군사·사회·통상·외교·산업·문화·풍속을 조사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온라인에서 짧지만 현대 한국어로 읽기 좋은 자료로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다음 항목들이 있습니다.

<조사시찰단> — 전체 파견 목적과 활동을 가장 간단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일본문견사건> — 7명의 견문 보고서가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일사집략> — 이헌영 기록의 상세한 목차와 내용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일본외무성시찰기> — 민종묵이 일본 외무성을 어떻게 조사했는지 설명합니다. 특히 이것은 개인적인 감상문이 아니라 외무성의 조직·규칙·조약을 모은 일종의 자료집이었다는 점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도 있습니다. 이헌영의 <일사집략>에는 우리가 지금 너무 자연스럽게 쓰는 <주의(主義)>라는 말이 서양어 “-ism”의 번역어로 조선 문헌에 매우 이른 시기에 등장합니다. 메이지 일본에서 만들어진 새로운 근대 개념어가 조사시찰단을 통해 조선에 들어오는 장면을 실제로 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에 관한 현대 한국어 논문도 온라인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세진님께 실제 독서용으로 세 권/자료만 고른다면 이렇게 권하겠습니다.

<1. 우리역사넷, 「조사 시찰단의 보고」>
가장 쉽고 무료이며 현대 한국어입니다. 우선 이것부터 읽으십시오.

<2. 이헌영, 『일사집략』 / 『국역 해행총재 11』>
조사시찰단원이 직접 일본을 경험한 기록을 한국어로 읽는 데 가장 적합합니다.

<3. 허동현, 『근대 한일관계사 연구―조사시찰단의 일본관과 국가구상』>
원자료를 읽은 뒤 “그 경험이 개화사상과 국가개혁 구상으로 어떻게 이어졌는가”를 이해하기에 좋습니다.

특히 세진님께서 궁금해하신 것은 아마 <행정제도 자체>보다는 “조선 사람들이 실제 일본에 가서 보고 무엇을 놀라워했고, 무엇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는가” 쪽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박정양의 관청별 <시찰기>보다는 이헌영의 <일사집략>과 여러 사람의 <일본문견사건> 쪽이 훨씬 재미있습니다.

올려주신 자료에서도 조사시찰단이 약 4개월간 도쿄·오사카와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문교·내무·농상·외무·대장·군무·세관 등 분야별로 조사를 했다고 정리되어 있습니다.

원하시면 다음 답변에서는 제가 실제로 구할 수 있는 자료를 더 확인해서 <현대 한국어로 온라인에서 무료로 바로 읽을 수 있는 조사시찰단 관련 글 10편>을 제목과 링크, 내용 설명까지 붙여 골라드리겠습니다. 이것이 아마 책 한 권을 찾는 것보다 더 유용할 것 같습니다.

네, 찾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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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번에는 <지금 온라인에서 실제로 접근할 수 있고, 현대 한국어로 읽을 만한 자료>를 중심으로 다시 골랐습니다. 조사시찰단 자체가 1881년의 일이어서 원사료는 한문·국한문이 많습니다. 따라서 <현대 연구자의 해설과 번역이 붙은 글>을 중심으로 읽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우선 아래 10편을 권합니다.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조사 시찰단의 보고>

가장 먼저 읽을 자료입니다. 현대 한국어 해설과 함께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민종묵·홍영식의 귀국 보고를 소개합니다. 고종이 무엇을 물었고, 이들이 일본을 어떻게 평가했는지 직접 볼 수 있습니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 일본의 발전을 인정하면서도 <조선도 개혁하면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낙관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조사시찰단 전체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좋은 입문 자료입니다.

우리역사넷 「조사 시찰단의 보고」 읽기

국사편찬위원회 <신편 한국사 38권 ― 일본시찰단의 파견>

이것은 제가 특히 권합니다. 논문 한 편보다 훨씬 체계적이면서 무료입니다.

<파견계획 → 고종의 밀명 → 시찰단 구성 → 일본에서의 활동 → 귀국 후 보고>

라는 순서로 설명합니다. 조사시찰단을 하나의 역사적 사건으로 이해하기에는 아마 온라인 자료 가운데 가장 좋습니다.

그중 <일본시찰 활동> 부분에는 쓰시마→나가사키→고베→오사카→교토→요코하마→도쿄로 이동하면서 산업·군사·관청·기술시설을 조사한 과정이 상당히 자세히 나옵니다.

「일본시찰단의 파견」 전체 읽기

윤현숙, <1881년 조사시찰단 문견 기록의 글쓰기 양상> (2018)

이것은 제가 이번에 찾아본 논문 가운데 세진님 질문에 가장 정확하게 맞는 글입니다.

왜냐하면 단순히 조사시찰단의 정치사를 설명하지 않고,

<그들이 일본에서 무엇을 보고,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글로 기록했는가>

를 연구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문견록>, <문견사건>, <사행록> 등 서로 다른 종류의 기록을 비교합니다. 전통적인 조선 사행기의 글쓰기와 근대적 조사보고서가 만나는 과도기라는 설명도 흥미롭습니다. KCI에서 <원문 내려받기>가 제공됩니다.

KCI에서 논문 보기

윤현숙, <1881년 조사시찰단의 보고서 작성 방식과 그 의미> (2017)

3번과 짝으로 읽으면 좋습니다.

이 글에서는 조사시찰단이 사실상 <암행어사 형태의 비공식 사절>로 파견되었고, 일본에서 수집한 매우 구체적인 정보를 어떻게 고종에게 보고서로 제출했는지를 분석합니다.

중요한 것은 조사시찰단 기록을 단순한 여행기로 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국가가 외국의 제도와 기술을 조사하기 위해 만든 초기의 근대적 정보보고서>

라는 측면을 보여줍니다.

KCI에서 논문 보기

문순희, <1881년 조사시찰단의 일본을 바라보는 시선 차이 ― 『일동록』, 『동행일록』, 『동경일기』를 비교하며> (2016)

이 논문은 특히 추천합니다.

조사시찰단원들이 일본을 보고 모두 똑같은 생각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세 가지 여행기

<일동록 日東錄>
<동행일록 東行日錄>
<동경일기 東京日記>

를 서로 비교하여 <같은 일본을 보면서도 사람마다 무엇을 중요하게 보았는지>를 분석합니다.

세진님께서 앞서 질문하신 “그들이 일본을 어떻게 보았는가?”에 가장 직접적으로 답하는 현대 연구입니다.

KCI 논문 정보와 원문 찾기

조세현, <수신사와 조사시찰단 일행이 경험한 해국(海國) 일본> (2022)

이것도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조선 사람들이 일본에서

증기선
항구
등대
해군
조선소
대양항해
만국공법

등을 처음 경험하면서 일본을 종래의 <섬나라>에서 새로운 <해양국가>로 인식하게 되는 과정을 연구합니다.

즉 정치제도보다 <실제로 눈앞에서 본 근대 문명>에 초점을 맞춥니다.

48쪽짜리 비교적 긴 논문이므로 조사시찰단의 체험을 생생하게 이해하기 좋습니다.

KCI에서 논문 보기

국립문화유산연구원, <동경일기 東京日記> 해제

제가 의외로 가장 재미있게 찾은 자료입니다.

송헌빈은 조사시찰단 이원회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갔던 인물인데, 1881년 서울을 출발하여 일본을 돌아보고 귀국하기까지 약 6개월의 일기를 남겼습니다.

현재 국립문화유산연구원 사이트에는 원본 이미지와 함께 상당히 상세한 <현대 한국어 해제>가 공개되어 있습니다.

여행 경로도 나옵니다.

서울 → 부산 → 쓰시마 → 나가사키 → 시모노세키 → 고베 → 오사카 → 교토 → 요코하마 → 도쿄

그리고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라 화학물 제조법, 일본어, 각종 제도, 조사시찰단 명단까지 기록했습니다.

「동경일기」 원본과 현대어 해제 보기

이효정, <수신사 및 조사시찰단 기록의 범주와 유형> (2015)

조사시찰단을 본격적으로 공부하려면 아주 유용한 <자료 안내서>입니다.

“도대체 조사시찰단이 남긴 기록이 얼마나 있고, 어떤 종류가 있는가?”를 정리합니다.

저자는 한국과 일본에 상당수의 사료가 흩어져 있으며, 사행 중 일본인들과의 만남과 지식교류를 보여주는 기록도 다양하게 존재한다고 설명합니다.

앞으로 원자료를 찾아 읽고 싶다면 이 글을 먼저 읽어두는 것이 좋습니다.

KCI에서 보기

이효정, <19세기 말 메이지 일본 신문에 드러난 조선 사절단의 모습> (2018)

이것은 시각을 거꾸로 돌립니다.

<조선 사람들이 일본을 어떻게 보았나>가 아니라

<일본 사람들이 이 조선 사절단을 어떻게 보았나>

를 당시 일본 신문을 통해 조사합니다.

조선 측 기록만 보면 이들이 일본에서 실제로 어떤 대우를 받았으며 일본 사회가 이들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알기 어려운데, 일본 신문은 사절단의 움직임을 상당히 자세히 보도했습니다.

조사시찰단 연구를 입체적으로 만드는 데 좋은 글입니다.

KCI에서 논문 보기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일사집략>

이것은 논문은 아니지만 이헌영의 <일사집략> 전체 구조를 현대 한국어로 아주 잘 설명합니다.

<일사집략>은 조사시찰단 자료 가운데 가장 중요한 개인 견문록 중 하나입니다. 천·지·인 3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여행 과정뿐 아니라 일본의 제도와 사회에 관한 여러 자료가 들어 있습니다.

원문을 바로 읽기 전에 이것부터 읽으면 <일사집략>에서 무엇을 찾아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일사집략」

그리고 책으로 한 권만 산다면 여전히 허동현의

<『근대한일관계사연구 ― 조사시찰단의 일본관과 국가구상』, 국학자료원, 2000>

을 가장 먼저 권하겠습니다. 실제로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참고문헌에도 이 책이 확인됩니다.

이 책의 장점은 조사시찰단의 <일본견문 보고서>를 상당히 폭넓게 이용하여, 이들이 일본의 정치제도·사회풍속·경제·산업을 어떻게 이해했고 그것을 조선의 국가개혁 구상과 어떻게 연결했는지를 종합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앞의 답변보다 한 가지 더 분명하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들이 직접 쓴 글을 현대 한국어로 읽고 싶다”>는 목적이라면 위의 10개 가운데 현대 연구논문만 읽어서는 조금 부족합니다. 저는 다음 세 자료를 중심축으로 삼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송헌빈 『동경일기』>
→ 여행 자체를 가장 생생하게 볼 수 있음.

<이헌영 『일사집략』>
→ 일본 사회와 근대 문명을 어떻게 관찰했는지 볼 수 있음.

<각 조사들의 『문견사건』>
→ 귀국 후 일본의 제도와 사회를 어떻게 체계적으로 정리했는지 볼 수 있음.

특히 조사시찰단이 흥미로운 이유는, 올려주신 자료에도 나오는 것처럼 이들이 일본에서 약 4개월 동안 단순히 도쿄만 본 것이 아니라 지방과 관청, 학교, 산업시설, 군사시설 등을 분야별로 조사했다는 데 있습니다.

<제가 권하는 실제 독서 순서>는

① 우리역사넷 <조사 시찰단의 보고>
→ ② 우리역사넷 <일본시찰단의 파견>
→ ③ 송헌빈 <동경일기> 해제
→ ④ 문순희 <일본을 바라보는 시선 차이>
→ ⑤ 윤현숙 <문견 기록의 글쓰기 양상>
→ ⑥ 조세현 <해국 일본>
→ ⑦ 허동현의 책

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단순한 <신사유람단=일본 근대화를 보고 놀란 사람들>이라는 교과서적 설명에서 상당히 벗어나게 됩니다. 실제로는 <사람마다 일본을 보는 눈도 달랐고, 무엇을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한 판단도 달랐으며, 전통적인 조선 관료의 사고방식과 새로운 근대적 국가관이 한 사람 안에서도 공존했다>는 것이 보입니다.

원하시면 다음에는 이 가운데 <3, 4, 5, 6번 논문 네 편을 제가 직접 읽고 종합해서 “1881년 조선인이 실제로 본 메이지 일본”이라는 제목으로 약 2,000단어짜리 종합 요약·평론>을 만들어 드리는 것이 가장 유용하겠습니다.
===

네, 만들어 주세요.
===

좋습니다. 아래 글은 앞서 말씀드린 네 편의 현대 연구, 즉 윤현숙의 두 논문, 문순희의 비교 연구, 조세현의 해양문명 연구를 중심으로 종합한 <약 2,000단어 요약·평론>입니다. 필요할 때는 조사시찰단 전체 맥락도 보충했습니다.

1881년 조선인이 실제로 본 메이지 일본

— 조사시찰단 기록을 통해 본 충격, 관찰, 거리감, 그리고 근대의 발견

1881년 조선 정부가 일본에 파견한 조사시찰단은 흔히 <신사유람단>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교과서에서는 이들을 일본의 근대 문물을 시찰하고 돌아와 개화정책에 영향을 준 집단으로 간단히 설명한다. 그러나 실제 기록과 최근 연구를 보면 이야기는 훨씬 복잡하다.

이들은 일본을 보고 일제히 감탄한 것도 아니었고, 모두 일본식 근대화를 찬성한 것도 아니었다. 어떤 사람은 새로운 기술과 제도를 세밀하게 기록했고, 어떤 사람은 일본의 풍속과 사람들에게 관심을 보였으며, 또 어떤 사람은 새로운 문명을 눈앞에서 보면서도 전통적 세계관을 크게 바꾸지 않았다.

따라서 조사시찰단의 중요성은 <조선 사람들이 일본의 발전을 보고 놀랐다>는 데만 있지 않다.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의 기록 속에서 <조선 지식인의 세계관이 전통과 근대 사이에서 흔들리는 과정>을 실제로 볼 수 있다는 데 있다.

1. 이들은 관광객이 아니라 국가가 보낸 정보수집자였다

1881년 조사시찰단의 정식 임무는 상당히 현대적이었다.

조선 정부는 조사들을 분야별로 나누어 일본의 내무, 외무, 재정, 교육, 군사, 산업, 사법 등을 조사하게 했다. 이들은 일본에서 약 4개월간 머물며 도쿄와 오사카를 비롯한 주요 도시와 여러 기관을 방문했다. 사용자가 올린 자료에서도 박정양은 내무·농상 분야, 민종묵은 외무, 조준영은 교육, 심상학은 사법, 홍영식은 군사 등을 맡았다고 정리되어 있다.

윤현숙의 연구가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 점이다.

조사시찰단은 일반적인 외교사절이 아니었다. 이들은 일종의 <비공식 특명 조사관>이었다. 윤현숙은 이들이 암행어사와 비슷한 성격을 가진 특명사신으로 파견되었으며, 공식 외교경로로 얻기 어려운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정보를 직접 수집했다고 분석한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과거 조선통신사의 일본 기록이 대체로 여행, 접대, 시문 교환, 일본 풍속에 대한 관찰을 중심으로 했다면, 조사시찰단 기록은 훨씬 더 목적 지향적이었다.

예를 들어 일본 내무성을 조사한다면 단순히 “관청이 훌륭하다”고 쓰는 것이 아니라,

어떤 부서가 있는가,
관리는 몇 명인가,
경찰은 어떻게 조직되어 있는가,
호적은 어떻게 관리하는가,
지방행정은 중앙정부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같은 것을 기록했다.

즉 일본은 더 이상 단순한 <외국>이 아니라 <분석해야 할 국가 시스템>이 되어 있었다.

여기서 이미 근대적인 사고방식의 변화가 나타난다.

2. 보고서 자체가 근대화되고 있었다

윤현숙의 두 연구에서 특히 흥미로운 것은 <무엇을 보았느냐> 못지않게 <어떻게 기록했느냐>를 중요하게 본다는 점이다.

조사시찰단은 전통적인 사행록의 형식을 완전히 버리지 않았다. 여전히 날짜별 여행기, 인물과의 만남, 시문, 지리적 관찰 등이 남아 있다.

그러나 동시에 새로운 형태가 등장한다.

윤현숙은 조사시찰단 기록을 크게 <문견사건류>와 <시찰기류>로 구분한다. 전자는 직접 보고 들은 정보를 항목별로 정리한 것이고, 후자는 특정 정부기관이나 제도의 구조를 집중적으로 조사한 보고서에 가깝다.

여기서 중요한 변화는 글쓰기의 목적이다.

전통적 사행록은 “내가 무엇을 보았다”가 중심이었다면 조사시찰단 보고서는

<국가가 이것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가 중심이 되기 시작한다.

따라서 개인의 감상보다 조직, 제도, 규칙, 예산, 인원, 운영방법이 중요해진다.

윤현숙은 이 기록들에 근대적 용어가 다수 등장하며 기존 일본 자료를 수집하고 필요한 부분을 취사선택하여 옮겨 적는 방식도 많이 사용했다고 지적한다.

이것은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라 일종의 <정책자료 수집 프로젝트>였다는 뜻이다.

흥미롭게도 근대화는 조사 대상인 일본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일본을 기록하는 조선인의 글쓰기 자체도 조금씩 근대화되고 있었다.>

이 점이 조사시찰단 기록의 역사적 가치다.

3. 그러나 같은 일본을 보고도 전혀 다르게 보았다

문순희의 연구는 이 점을 아주 잘 보여준다.

그는 조사시찰단 수행원 세 사람이 남긴 기록,

강진형의 <일동록>,
민건호의 <동행일록>,
송헌빈의 <동경일기>

를 비교했다.

세 사람은 같은 시기에, 비슷한 신분으로, 같은 일본을 여행했다.

그런데 일본을 바라보는 태도는 상당히 달랐다.

강진형은 세 사람 가운데 가장 전통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의 기록에는 근대 도시의 풍경이나 새로운 기술에 대한 적극적인 감상이 많지 않다. 새로운 일본 문물에 쉽게 동화되지도 않았다. 일본인과의 교류도 제한적이었다.

즉 일본의 근대화를 보았다고 해서 세계관이 자동으로 바뀐 것은 아니다.

민건호는 상당히 달랐다.

그는 일본 사회생활에 비교적 적극적으로 적응했고 여러 계층의 일본인과 교류했으며 일본의 풍습과 일상문화에도 관심을 보였다.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비교적 솔직하게 기록했다.

송헌빈은 또 달랐다.

그는 사람보다 기술에 강한 관심을 보였다.

<동경일기>에는 여러 제조법이나 근대 기술 관련 정보가 적혀 있다. 일본인들과 시를 주고받거나 사적인 친교를 맺는 데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었지만, 일본에서 사용할 수 있는 실용지식을 가져오는 데 적극적이었다. 후대 연구에 따르면 <동경일기>는 전반부의 여행일기와 후반부의 잡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후반부는 보고서 작성을 돕는 정보집의 성격까지 가지고 있었다.

이 세 사람의 차이는 조사시찰단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조사시찰단은 일본을 어떻게 보았는가?”>

라는 질문에는 하나의 답이 없다.

오히려 <누가 보았는가?> 라고 물어야 한다.

  • 전통적 유학자,
  • 실용적 관료,
  • 기술에 관심을 가진 수행원,

각자의 교육, 성격, 직책에 따라 일본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였다.

4. 가장 큰 충격 가운데 하나는 ‘바다’였다

조세현의 연구는 조금 다른 방향에서 조사시찰단을 본다.

그는 일본의 정부제도보다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가는 경험 자체>에 주목한다.

개항 이전 조선 지식인에게 바다는 세계의 중심이 아니었다.

조선의 전통적 정치·문화 세계는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대륙적 질서였다.

그런데 일본으로 가는 과정에서 조선인들은 증기선, 항구, 등대, 해군, 조선소, 대양항해를 경험했다.

이것은 완전히 새로운 공간감각이었다.

전통시대 여행에서 거리는 보통 육로의 리수로 계산했다.

그러나 증기선 시대에는 거리가 <시간>으로 바뀐다.

“며칠 걸리는가.”

“몇 시간 만에 도착하는가.”

가 중요해진다.

고베에서 요코하마로 갈 때도 육로가 아니라 해로를 이용한다.

조세현은 이런 기록 속에서 <태평양>이라는 새로운 공간개념이 등장하는 것에도 주목한다.

메이지 일본은 이들에게 더 이상 단순한 ‘섬나라’가 아니었다.

해군이 있고,
항구가 있고,
조선소가 있고,
등대가 있으며,
서양과 연결된 국제무역망에 들어가 있는

<해양국가>였다.

일본을 보는 조선인의 공간적 상상력이 여기서 크게 달라진다.

5. ‘섬나라 오랑캐’에서 근대국가로

이 변화는 상징적이다.

조선 지식인에게 일본은 오랫동안 문화적으로 자신들보다 낮다고 여겨지는 나라였다.

임진왜란의 기억도 있었다.

그런데 19세기 후반 일본에 직접 가 보니 상황이 역전되고 있었다.

  • 증기선,
  • 철도,
  • 전신,
  • 근대군대,
  • 학교,
  • 경찰,
  • 공장,
  • 조선소,
  • 은행,
  • 외교부,
  • 근대적 행정관청

등이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이것은 단순히 새로운 기계를 보는 충격이 아니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왜 일본은 이것을 했는데 조선은 하지 못했는가?>

그리고 더 위험한 질문도 따라왔다.

<이 변화가 계속되면 동아시아의 힘의 관계는 어떻게 될 것인가?>

조사시찰단 기록에는 이 질문이 오늘날처럼 명시적으로 쓰이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러나 기록 자체가 그 질문에 대한 반응이다.

  • 왜 일본의 군제를 조사하고,
  • 왜 세관을 조사하고,
  • 왜 교육제도를 조사하고,
  • 왜 농상무성을 조사했겠는가.

이미 일본이 조선보다 앞서가고 있다는 현실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6. 그런데 ‘충격’이 곧 ‘세계관 혁명’은 아니었다

여기서 조세현의 연구가 중요한 경고를 한다.

오늘날 우리는 흔히 이렇게 생각한다.

“조선 사람들이 일본에 가서 근대 문명을 보았다. 그러니 전통적 세계관이 무너졌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기록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조세현은 새로운 해양문명을 직접 경험했음에도 이것이 즉각적인 세계관의 변혁으로 이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지적한다.

이것은 문순희의 연구와도 정확히 연결된다.

강진형처럼 새로운 근대 일본을 보면서도 기존 사고방식을 거의 유지한 사람이 있었다.

즉

  • <보는 것>과
  • <이해하는 것>과
  • <받아들이는 것>

은 전혀 다른 과정이었다.

이 점은 근대화를 이해할 때 대단히 중요하다.

새 기술을 목격했다고 근대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 철도를 타면서도 전통적 세계관을 유지할 수 있다.
  • 전신을 사용하면서도 성리학적 정치질서를 당연하게 생각할 수 있다.
  • 근대적 군대를 보면서도 군주제의 근본질서를 바꾸려 하지 않을 수 있다.

조사시찰단의 기록은 바로 이 <과도기적 인간>을 보여준다.

7. 그래서 ‘친일파의 기원’으로 읽으면 안 된다

조사시찰단을 후대의 친일파와 연결해서 보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이들은 일본이 강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고 일본에서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본으로부터 배운다>와 <일본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완전히 다른 명제다.

1881년 당시에는 일본이 장차 조선을 식민지화할 것이라는 결과가 아직 결정되어 있지 않았다.

중국, 일본, 러시아, 미국 등이 경쟁하는 가운데 조선이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가 핵심 문제였다.

따라서 많은 조사시찰단원에게 일본은

<위험한 나라>이면서 동시에 <가장 가까운 근대화 교과서>였다.

이 두 감정은 얼마든지 동시에 존재할 수 있었다.

오히려 이 이중성이 개화파의 고민을 잘 보여준다.

8. 조사시찰단에서 갑신정변까지

그러나 조사시찰단 경험은 분명 후대의 정치적 분화를 촉진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홍영식이다.

그는 조사시찰단을 통해 일본의 근대적 군사·행정체계를 관찰한 뒤 불과 몇 년 후 갑신정변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그렇다고 조사시찰단원 모두가 급진개화파가 된 것은 아니다.

일본에서 같은 것을 보고도

  • 급진적 개혁,
  • 온건한 제도개혁,
  • 전통질서 유지

등 서로 다른 결론을 내렸다.

따라서 조사시찰단은 <개화파의 탄생>이라기보다

<개화라는 문제를 조선 정치엘리트 내부에 본격적으로 던진 사건>

이라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9. 평론 — 이 자료들이 정말 보여주는 것은 무엇인가

이 네 편의 연구를 함께 읽으면 가장 흥미로운 결론은 하나다.

<근대는 어느 날 갑자기 도착하지 않았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일본에 가서 근대를 한꺼번에 이해하지 않았다.

그들은 근대를 조각조각 보았다.

  • 누군가는 철도를 보았다.
  • 누군가는 경찰제도를 보았다.
  • 누군가는 군함을 보았다.
  • 누군가는 일본인의 일상생활을 보았다.
  • 누군가는 공장의 제조법을 적어왔다.

그리고 그 조각들을 기존 세계관 속에 집어넣으려고 했다.

그래서 조사시찰단 기록에는 매우 근대적인 관찰과 매우 전통적인 사고가 한 문서 안에서 공존한다.

바로 이 모순 때문에 이 기록들이 흥미롭다.

조선은 아직 전통적인 왕조국가였지만 그 관료들은 이미

  • 통계,
  • 조직,
  • 예산,
  • 군제,
  • 산업,
  • 외교,
  • 교육,
  • 교통,

같은 근대국가의 언어를 배우기 시작하고 있었다.

윤현숙이 조사시찰단 기록을 <전통적 글쓰기와 근대적 글쓰기의 경계>에 있다고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10. 가장 중요한 역설

그리고 결국 가장 큰 역사적 역설이 남는다.

1881년 조사시찰단은 일본 근대화의 상당 부분을 정확히 보았다.

문제가 무엇인지도 어느 정도 파악했다.

개혁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런데 조선은 일본과 같은 속도로 국가를 개조하지 못했다.  왜였을까?

여기서부터 문제가 일본 견문을 넘어 조선 내부로 돌아온다.

정보가 부족해서만은 아니었다.

이미 상당한 정보가 있었다.

문제는

  • 누가 개혁을 추진할 것인가,
  • 누가 비용을 부담할 것인가,
  • 기득권을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 청의 간섭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 일본의 지원을 어디까지 받을 것인가,
  • 민중을 어떻게 개혁에 참여시킬 것인가

였다.

즉 <근대화는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의 문제>였다.

이것이 조사시찰단을 단순한 일본 여행기가 아니라 한국 근대사의 핵심 사건으로 보아야 하는 이유다.

종합 평가

조사시찰단에 관한 이 네 연구를 합쳐 보면 1881년의 일본 여행은 <조선이 근대를 처음 발견한 순간>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다만 그것은 환희에 찬 발견도 아니고 단순한 모방의 시작도 아니다.

오히려

<경탄하면서 경계하고,
배우면서 의심하고,
기록하면서도 이해하지 못하고,
근대를 보면서도 전통을 버리지 못하는>

복잡한 경험이었다.

그래서 조사시찰단의 기록은 개화파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좋은 출발점이다.

그리고 제게는 이 사건의 핵심을 다음 한 문장으로 정리하는 것이 가장 적절해 보인다.

<1881년 조사시찰단이 일본에서 발견한 것은 단순히 발전한 일본이 아니라, 조선이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현실이었다.>

그런데 그 현실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런 합의가 없었다.

그 갈등이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 1894년 갑오개혁으로 이어진다.

이런 의미에서 <1881년 일본 시찰은 조선 근대 정치의 서막>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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