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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08

간양록(看羊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간양록(看羊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간양록 (看羊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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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문신 강항이 정유재란 당시 일본군에 포로가 되어 겪었던 참상을 기록한 포로기.
이칭이칭건거록(巾車錄)
접기/펼치기정의
조선시대 문신 강항이 정유재란 당시 일본군에 포로가 되어 겪었던 참상을 기록한 포로기.

1책. 목판본. 원래 저자는 죄인이라는 뜻에서 이를 ‘건거록(巾車錄)’이라 하였는데, 1656년(효종 7) 가을 이 책이 간행될 때, 그의 제자들이 책명을 지금의 것으로 고쳤다. ‘간양’이란 흉노땅에 포로로 잡혀갔던 한나라 소무(蘇武)의 충절을 뜻하는 것으로, 그것에 강항의 애국충절을 견주어 말한 것이다. 『수은집(睡隱集)』의 별책으로 간행되기도 했는데, 유계(兪棨)의 서문과 제자 윤순거(尹舜擧)의 발문이 실려 있다. 규장각도서와 고려대학교 도서관 등에 있다.

내용은 적지에서 임금께 올린 「적중봉소(賊中封疏)」와 당시 일본의 지도를 그린 「왜국팔도육십육주도(倭國八道六十六州圖)」, 포로들에게 준 고부인격(告俘人檄), 귀국 후에 올린 「예승정원계사(詣承政院啓辭)」, 적국에서의 환란생활의 시말을 기록한 「섭란사적(涉亂事迹)」으로 되어 있다.

이 기록들은 적국에서 당한 포로들의 참상과 그곳에서 보고 들은 실정을 빠짐없이 기록해 놓았을 뿐만 아니라, 전란에 대비해야 할 국내정책에까지 언급하고 있는 충절의 기록이다. 이 책은 민족항일기에 분서(焚書)의 화를 입어 현재는 희귀본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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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양록(看羊錄)』(이을호 역, 수은강항선생기념사업회,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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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은집 / 간양록다음 슬라이드이전 슬라이드
접기/펼치기집필자
이을호

간양록(看羊録) / 조용필



64,853 views Sep 12, 2010看羊録(간양록) /
 趙容弼 조용필2집엘범 수록곡(1980.12 발매)






Music1 songs










간양록
조용필조용필 2집



Music



nishinago
4.93K subscribers






@davidchoi98053 years ago

정통클래식 판소리는 아닐지 모르지만 대중가수가 이런 고콸리티 판소리 창작곡을 내놓고 또 '난아니야'같은 명작동요를 내놓기도 하고 . . . 놀라운 창작력이다.




11






Reply












@itmasspeaker6847 years ago

당시 끌려가신 분들의 한, 고향을 그리워하며 가슴의 울부짖는 소리가 여기까지 느껴집니다.




@nabipiano12 years ago

이국~땅 삼경이~면~ 밤마다~ 찬서리고 어버이 한숨실은~ 새벽~달일~세 마~음은 바람따~라~ 고향으로 가는데 선영 뒷산에 잡초는 누가 뜯으리 어야어야 어야어야 어~야~ 어~어 어야어야 어야야~ 어야어~어~ 피눈~물로 한줄 한줄~ 간양록을 적으니 님그린 뜻 바다되어 하늘에 닿을세라 어야어야 어야어야 어~야~ 어~어 어야어야 어야야~ 어야~ 어~어 Show less


간양록(看羊錄) - 디지털 장서각

간양록(看羊錄) - 디지털 장서각

간양록(看羊錄)

자료명간양록(看羊錄) 귀저자강항(姜沆)
자료명(이칭)睡隱看羊錄저자(이칭), 姜沆(朝鮮) 撰
청구기호K2-4523MF번호MF35-449
유형분류고서/일기주제분류개인/생활/일기
수집분류왕실/고서/한국본자료제공처장서각(SJ_JSG)
서지장서각 장서각자료센터 전자도서관해제장서각 장서각자료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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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사부분류사부
· 작성시기[1656](효종 7년)
· 청구기호K2-4523
· 마이크로필름MF35-449
· 소장정보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가치정보귀중본

작성주체 - 인물

역할인명설명생몰년신분
강항(姜沆) 찬(撰)

형태사항

· 크기(cm)30.5 X 20.5
· 판본필사본(筆寫本)
· 장정선장(線裝)
· 수량1책(冊)
· 인장李王家圖書之章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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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睡隱 姜沆(1567~1618)이 1597년 9월 왜군에게 끌려가 1600년 5월까지 현지에서 경험한 포로 생활과 일본의 정세를 기록한 책이다.
서지사항
 총 1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표제와 서근제는 ‘看羊錄’, 권수제는 ‘睡隱看羊錄’이다. 황색 표지의 線裝本으로, 斜格卍字 문양이 있다. 표지의 좌측 상단에 표제가 기재되어 있다. 본문의 필사에 無郭, 無絲欄, 無版心의 楮紙를 사용하였다. 본문 가운데 잘못 기재한 부분을 문질러 지우고 수정하거나, 잘라내고 뒤에 종이를 덧붙여 수정한 흔적이 있다. 본문 상단에 한자의 일본 음을 한글로 기재한 부분이 나타난다. 빠진 글이 있는 부분에는 표시한 뒤 본문 우측에 빠진 내용을 기재하였다. 간혹 본문 상단에 첨지를 붙여 필사자의 의견을 기재하기도 했다. 권말에 〈倭國地圖〉 1매가 수록되어 있다. 본문 첫 장 우측 상단에 ‘李王家圖書之章’이 날인되어 있다.
체제 및 내용
 1597년 강항은 고향인 전라도 靈光郡에 돌아와 覲親하였다. 이해 5월에 명나라 總兵 楊鎬가 군병 3천 명을 거느리고 전라도 남원에 주둔하게 되자, 참판 李光庭이 分戶曹로서 군향을 독려하기 위하여 조정에 주청해서 강항을 종사관으로 삼았다. 그러나 왜적에 의해 남원이 함락되자 고향 영광에 돌아와 각 고을에 격문을 보내 의병을 모집하였고, 영광 경계까지 적병이 침범해오자 통영으로 이동하던 중 적선을 만나 포로가 되었다.
 강항은 일본에 도착한 후 오쓰성[大津城]에 갇혀 있다가 오사카를 거쳐 교토 후시미성[伏見城]으로 이송되었다. 그가 후시미성에 억류되어 있을 때 유학자로서의 명성이 알려지자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나타나 이황의 성리학을 일본에 전하게 되었다. 후시미성의 승려이자 학자인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와 교유했으며, 학식이 높은 승려 요시히토[好仁]와 친교하며 사서오경을 일본어로 번역·간행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강항은 유학을 매개로 교유한 인물들을 통해 들은 현지의 지리, 군사시설, 관제를 비롯한 정세를 비밀리에 인편으로 조선에 보고했다. 강항은 2년 8개월에 걸친 포로 생활에서 풀려나 1600년 4월 교토를 떠나 그해 5월 가족들과 함께 부산에 당도하였다.
 본서는 일본 현지의 정세를 적어 고국에 있는 임금에게 올린 賊中封疎, 일본의 관직과 將帥들의 특징 등을 기록한 賊中見聞錄, 귀국 후 조정에 올린 詣承政院啓辭, 일본에서의 포로 생활을 기록한 涉亂事迹, 귀환할 때 현지에 남은 포로들에게 준 檄文인 告俘人檄으로 구성되었다. 본서의 맨 마지막에는 〈倭國地圖〉가 포함되었다.
 권미에 있는 강항의 제자 윤순거(1596~1668)가 1654년 지은 발문에는 본서의 간행 내력이 소개되었다. 발문에 의하면, 강항은 포로 시절에 보고 들은 바를 일기 형식으로 기술하여 ‘巾車錄’이라 이름 붙였다. 여기서 ‘건거’란 죄인이 타는 수레라는 의미로 포로 신세에서 작성된 것임을 강조한 것이었다. 그러나 강항 사후 1656년(효종 7)에 윤순거에 의해 책으로 발간할 때 ‘看羊錄’으로 고친 것이다. ‘간양’이란 흉노 땅에 포로로 잡혀갔던 한나라 蘇武의 충절에 강항의 충의를 비견한 것이었다.
특성 및 가치
 1597년 정유재란 이후 일본으로 끌려간 강항이 오쓰성, 오사카, 교토에서 포로 생활 중 현지인들과 교유하여 얻은 일본의 풍속, 지리, 군사 정세 등 최신 정보와 견문을 반영한 저술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집필자

정은주

宮本武蔵 サイト篇 류노성시타 2 - 강항 - 일본에 억류되고 있던 것은 아시카가 3년이지만,

宮本武蔵 サイト篇
Real and/or Virtual Sites Guide


사이트편 류노성시타 2



現地徹底ガイド 龍 野 城 下 2  (兵庫県たつの市)  Back   Next 






*【武蔵流派系譜】
○新免武蔵守玄信┐
┌―――――――┘
├寺尾孫之丞信正―柴任三左衛門美矩┐
│┌―――――――――――――――┘
│└吉田太郎右衛門実連―立花専太夫峯均

│└寺尾求馬助信行┬寺尾藤次玄高
        │
        ├新免弁助信森
        │
        └寺尾郷右衛門勝行




円明流系統図




*【多田円明流系統図】
○宮本武蔵玄信┐
┌――――――┘
├落合忠右衛門光経
├多田半三郎頼祐――――――――┐
├山田淤泥入          │
├石川主税清宣         │
├市川江左衛門         │
├寺尾孫之丞―――寺尾求馬   │
└柴任道隨重矩―┬吉田太郎右衛門│
 本田中務太輔仕│ 松平伯耆守仕│
 其後浪人播刕 ├立花専太夫  │
 明石在卒   │ 同前    │
        └河村弥兵衛  │
          御旗本   │
┌―――――――――――――――┘
└三浦源七延貞―――――――――┐
  松平伯耆守仕 江戸住居卒   │
┌―――――――――――――――┘
└多田源左衛門祐久(多田円明流祖)→
  古流之得免許後柴任重矩ニ隨テ
  當流傳更重矩永訣シテ水野流居合ヲ
  交今号圓水流









熊本城
   (承 前)

 ところが、円明流系統図の本当の問題は、実はこれより以下の門人たちからである。
 それというのも、武蔵晩年の九州肥後の伝系が違っていて、通例、寺尾求馬助信行も武蔵直弟子であるとするものだが、円明流系統図には、寺尾孫之丞→寺尾求馬の伝承となっている。この点で明らかな相違がある。
 もう一つは、柴任道隨重矩(三左衛門美矩)のポジションである。柴任〔しばとう〕重矩が武蔵の直弟子というのは、これも違っている。九州での伝承では、柴任は肥後で細川家家臣だったが、寺尾孫之丞に隨仕して学び、一流相伝の後離国して、豊前小倉や江戸へ行き、筑前福岡黒田家に仕官したが致仕して、ついで大和郡山の本多政勝に仕え、のち播州明石住、またさらに姫路城主・本多忠国に召抱えられ、最後に明石で卒した人である。
 円明流系統図では、柴任重矩は、「本田中務大輔」に仕えたとある。この「本田」は「本多」である。この本多中務大輔は、時期からして、天和二年(1682)福島から姫路に還ってきた本多氏、すなわち本多忠国がその該当者であり、実際、柴任は晩年この姫路城主に仕えたようである。このあたりのことは[サイト篇]姫路城下のページで述べられるであろう。
 とすれば、柴任が本多中務大輔に仕えて、その後浪人して明石に住んで卒した、という円明流系統図の記事は大略正しいのである。
 ところが、この柴任の弟子の記事に、吉田太郎右衛門(実連)が松平伯耆守に仕えた、立花専太夫も同じく松平伯耆守に仕えた、とするところは、いかにも事情を知らぬ明白な誤伝である。というのも、実際には、吉田太郎右衛門と立花専太夫は、ともに父祖の代から九州筑前の黒田家家臣であるからだ。
 しかし外様大名に松平姓を名のる例があって、伊達政宗は松平陸奥守であるし、黒田家ではたとえば、黒田官兵衛の孫・忠之は、福岡黒田家二代目で、松平筑前守である。三代光之は右衛門佐・右京大夫、四代綱政は肥前守で、伯耆守は名のらないから、この松平伯耆守は誤りである。吉田太郎右衛門と立花専太夫のこの時代、「松平伯耆守」といえば、鳥取城主・池田綱清(1648~1711)である。
 すなわち事実関係は、吉田実連は、はじめ筑前東蓮寺藩主・黒田市正之勝(1634~63)に仕え、その後、福岡の黒田本家の黒田光之(1628~1707)に仕えた。立花峯均は、黒田綱政(1659~1711)に仕えた。
 以上のことから、柴任重矩(美矩)の記事はほぼ正しいが、吉田実連と立花峯均の勤仕記事は誤りである。
 加えて云えば、吉田実連と立花峯均が柴任の弟子だというのは、半分だけ正しい。というのも、立花峯均が『丹治峯均筆記』に記すように、この嗣系は、三祖柴任美矩→四祖吉田実連→五祖立花峯均と順次するのであって、峯均は吉田実連の弟子である。しかし、峯均は明石で柴任から直接兵法伝授されているから、これもまったくの間違いではない。この円明流系統図の記事は、半分だけ正しいのである。
 しかしここで注意しておきたいのは、上述のように円明流系統図における柴任重矩(美矩)のポジションである。ここでは柴任は武蔵の直弟子ということになっている。
 むろん五輪書の相伝記録による限りにおいて、柴任は寺尾孫之丞の弟子、武蔵の孫弟子と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ころである。『丹治峯均筆記』によれば、柴任は《寺尾信正ヨリ傳授ス。勝レタル大男ニテ、容儀弁舌双ビナキ恰好也。信正ニ隨仕、夜白修練シテ七ヶ年ニ成就シ、承應二癸巳年十月二日、一流相傳有》とある。とすれば、承応二年(1652)まで七年間、柴任は寺尾に隨仕して、一流相伝したのである。しかるに、なぜ円明流系統図でこういう異例のポジションを柴任が得たのか、という問いは可能である。
 柴任の生年は不明だが、本庄家別冊家系譜所収の、宝永七年(1710)の柴任書状に、当年八十二歳とあるから、これによれば生年は寛永六年(1629)となる。詳細は、[資料篇]宮本武蔵伝記集の『丹治峯均筆記』読解研究に譲るが、我々の柴任生年仮説では、寛永六年生れとしている。
 このように我々の柴任生年仮説では、武蔵の晩年肥後にあったとき(寛永十七年~正保二年=1640~45年)、柴任の推定年齢は十二~十七歳の十代半ばであり、若年とは申せ、この少年が武蔵に学ばなかったとは云えまい。おそらく柴任は武蔵から直接教えを受けた可能性があると思われる。柴任は少年だったし、まもなく武蔵が死んだので、むろん武蔵からの相伝はない。武蔵卒後、柴任は寺尾孫之丞に七年隨仕して、寺尾から一流相伝を受けたのである。
 そうだとすれば、柴任は若年のころ武蔵の直弟子であったが、相伝形態では孫弟子ということになる。そういう話を、多田祐久は柴任美矩から(柴任の性格からすれば、多少尾ひれもつけて)聞いていたのではないか。たぶん、そのことが、柴任を武蔵直弟子とする円明流系統図に反映されているのである。

 그 엔메이류 계통도에 타다 유쿠가 시임의 제자가 되어 가르침을 받았다는 기사가 있다. 거기에 고류의 면허를 얻고 나서, 시임 중방장에 일어나 당류에 전했다고 하지만, 이 「고류」란 미우라로부터 받은 타다 요시유 전래의 원명류의 유의이며, 거기에 대조적으로, "당류"는 테라오 손노부 → 시바 미코의 히고 무사시류를 가리키는 것이다.
 상술한 미야모토류 면허장은, 미우라 겐 7연정으로부터 타다 히라유키 유우히에게 향해 내놓은 것으로, 연보 9년(1681)의 시기 기재가 있다. 그것이 「고류」의 면허. 게다가 타다 유쿠는 만년의 시임과 사제 관계에 있었다. 시임은 아카시에 살고 있었고, 특히 사다이 4년(1687)부터 수년간은 히메지 성주·혼다 충국을 섬긴 적이 있었다. 타다 유쿠가 시임에 섬기는 것은, 이때 이후의 일이라고 가정하면, 유쿠 삼십대 후반. 시임의 나이는 60대이다.
 이에 대해, 규슈 후쿠오카의 구로다 가사·요시다 타로 우에몬 실련이, 아카시 거주의 시임으로부터 일류 상전한 것은, 연호 8년(1680)이며, 또 타치바나 가타오 미네 균이, 아카시로 시임으로부터 상전한 것은, 겐로쿠 16년(1603)이다(단지미네 필필기). 따라서 시임의 타다 유쿠에게의 전수는 규슈의 상전자와 바로 전후하는 것이다.
 따라서, 시임 중방(미사쿠)이 그린 아카시・히메지・류노라는 파슈의 선은, 여기에 결절한다. 시임은 타다 엔 메이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것은, 요시다 실련·타치바나 미츠키라고 하는 후쿠오카의 2천류 계승자를 낳은 사적의 담에 숨어 알려져 있지 않지만, 보다 알려져 좋다.
 게다가, 시임은 류노에서는 잘 알려져 있었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은, 시임의 이름을, 일반적으로 미사에몬 미소쿠[요시노리]라고 쓰는 것에 대해, 여기에서는 도고 시게사키[시게노리] 하는 근처이다. 타카나가 7년(1710) 그 죽음의 해, 시임은 고향 히고의 조카·혼조 키스케에게, 갑옷 그 외를 주었지만, 그 선장의 서명은 시임도 사카시 쇼쿠(본쇼가 별책가 계보) ). 아카시로 시임으로부터 병법 전수를 받은 타치바나 미네 균은 '단지 미네 균필기'로 시임을 '도하'라고 적기 때문에, 이 도고도 시임 만년의 호로 알려져 있다.
 즉, 류노의 타다엔 메이류전서가 기록한 시임의 이름은 바로 그의 만년의 이름이다. 도로시게 사쿠라는 아카시의 시임 묘비에도 각자 된 이름이다. 그러므로 류노의 타다 유쿠는 그 만년의 시임에 교수를 받은 것이다.

 그런데 타다 유쿠의 기사로,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타다 유우 히사가 시바 시게사키에 배웠고, 그 후 미즈노 유이 합 을 도입하여 "엔 수류"를 칭했다는 것이다. .
 미즈노류는 거합 외에, 유술, 조술도 포함한다. 이것으로부터 하면 원명류에 가깝다. 면곡설에 따르면, 미즈노 유류조는 미즈노 신고자에몬 시게지. 중정, 경승이라고도 하며, 야나기 적재 혹은 적재를 호했다. 아키히로시마 번을 낭인해 에도에 살았다고 하기 때문에, 타다 유쿠가 아키에 갔던 것도 어떠한 인연이 있었던 것 같다. 야나기 무네사쿠의 문인 오구리 히토에몬 마사노부에게 오구리 유화술을 배웠다. 야나기 무네 사쿠의 추거로 호리타 마사모리를 섬긴 적도 있다. 관영년 중, 장군 이에미츠의 대람을 받았다고 한다. 그 후 사츠마 번을 섬기고 만지 2년 후시미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미즈노류는 사쓰마번, 미토번, 돗토리번 등에 전승되었다.
 미즈노류의 전계를 보면, 타다 유쿠의 원수류는, 미즈노 신고자에몬→오야기 마타사에몬→유쿠라는 경로이다. 그러나, 유우쿠의 스승의 미우라 겐 시치로 연정까지 이름을 올리고 있는 것은 어떨까. 라고 하는 것보다, 미우라 겐지치는 유쿠의 스승이지만, 그것도 미즈노류의 스승으로, 엔수류는 미우라의 지도의 소산인가. 즉, 엔메이류 계통도에 의하면, 미우라 겐지치는 유쿠의 할아버지·타다 요시유로부터 엔메이류를 배웠다고 하는 것이지만, 오히려, 이쪽의 미즈노류의 계통의 사람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시바 미코가 여기에서 이례적인 포지션을 가지는 이유도 보여 온다. 즉, 타다엔 메이류를 미야모토 무사시와 연결하는 끈대는, 실은 시임이었다는 것이다. 유쿠의 오이지 아버지 타다 요시유의 고류는 전승이 부러워졌다. 그래서 유쿠는 시임으로부터 미야모토 무사시류를 다시 배웠다. 그러나 시임 사후 그 무사시류가 미즈노류와 병수되어 타다엔 아키류로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유쿠의 궁리이다.
 하지만, 문제는, 타다엔 메이류에 시임 미구 전수의 올림픽서가 발견되지 않는 것이다. 만약 타다 유쿠가 시임으로부터 올림픽 서를 상전하고 있었다면, 그 사본이라도 존재했을 것인데, 그것이 없다.
 한편, 동류전서에는 올림픽서가 있는 경우가 있다. 표제에 「니텐 일류 圓明之巻」이라며, 5권 분권본이다. 그 내용을 분석하기 위해 상당히 사본이 무너진 것이고, 게다가 히고에서 유출되어 전사된 원명류 계통의 사본이다. 아마 이것은 막부 말기의 사본일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후세 항 사이에서 유통하고 있던 올림픽서를 찍어 자가 자료로 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타다엔 메이류전서에는, 시임전수의 올림픽서는 없다. 또한 그 흔적도 없다. 그렇다고 하는 것은, 시임은 타다 유쿠에게 올림픽서를 상전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점은, 타다 엔 메이류의 시임 전수의 「당류」라고 하는 것의 포지션을 알린다. 즉, 『단치미네 필필기』가 기록한 것처럼, 시임에는 하리마에 문인은 없었던 것이 아니라, 타다 유쿠와 같이 분명히 문인은 있었다. 그러나 치쿠젠 2천류에서 상전된 것 같은 올림픽 서 전수는 없었다. 즉, 엄밀한 의미에서의 시임상전 제자는 없었다는 것이다.

○미야모토 무사시 겐신┐
┌――――――┘ (고류)
├타다 반산부로 요시유-미우라 겐 나나노다테 사다-┐
│             │ │       (당류)   │ └데라오 손지丞信正-시바노미치 사카에 쇼 ┬┤  ┌――――――――――――――┘│  └요시다 타로 우에몬-타치바나 겐타오 │      ┌――――――――――┘      └타다 겐 사에몬 유쿠→       (타다엔 메이류)










원명류 계통도 부분







*【水野流伝系】綿谷雪による
○水野新五左衛門重治┐
┌―――――――――┘
├平田大監物宗乗―武井源太左衛門種次
├東次郎左衛門良賢┬隈元仲介棟貫
│        └山下剛兵衛盛徳
│            (薩摩藩)
├青柳喜右衛門(青柳流)
├大矢木又左衛門正次―――――――┐
├椎原柴右衛門          │
├星七右衛門通寛―小林広右衛門歳程│
│         (水野新当流)│
├片桐杢右術門重正(抜刀術派)  │
├米良隼人            │
└和田平助正勝(新田宮流居合)  │
┌――――――――――――――――┘
├奥田新助正武(奥田派)
│
├木戸重右衛門正晴(木戸派)
│
└三浦源七郎延貞―多田源左衛門祐久
            (円水流)






二天一流圓明之巻
多田家本五輪書



諸流覚書 当該部分



元禄国絵図 龍野と興浜村


讃岐丸亀と播磨
 なお以上に付言すれば、柴任の事蹟に関して、播磨ではなく、讃岐の門流のことがある。
 近年発掘の龍野円明流史料に、我々が「諸流覚書」と仮題する一書(個人蔵)がある。これは十八世紀中期の文書と思われるが、その記事に、従来知られていなかった柴任の記録が見出せる。
 それによれば、「関流 二刀 武蔵流」とあって、《柴藤道隨といふ者、是を遣ふ。今、讃岐ニ有るよし》とある。つまり、武蔵流の二刀に「関流」という流派があって、当時、讃岐で伝承されていた。これが「柴藤道隨」、つまり柴任美矩に発する武蔵流だというわけである。
 では、どうして柴任の門流が讃岐に発生していたのか。柴任は、姫路、龍野、明石等、播磨に足跡を残したが、それが海の向うの讃岐まで及んだとは、にわかに信じがたいことであろう。それも当然で、これは当時のこの地域の事情を知らなければ、理解できぬことである。
 つまり、話はこういうことである。――龍野の城主は、京極氏であった時期がある。すなわち、京極高和(1619~1662)の代、寛永から明暦年間まで、約二十年、六万石龍野城主であった。しかるに、明暦四年=万治元年、京極氏は讃岐丸亀へ移封される。その折、丸亀領は五万石だったので、差分の一万石は、揖保川河口両岸の揖東・揖西両郡の諸村、二十八ヶ村(現・姫路市網干区、余部区、たつの市御津町の一部)を飛び地として与えられた。その領地管理をする陣屋を設置したのは揖東郡興浜村。ようするに、京極家は龍野を去ったが、なお一万石分を播磨の旧領に確保したのである。
 かくして、この龍野近辺の海岸部に京極領の飛び地があった。龍野の多田源左衛門祐久が柴任門人だったとすれば、龍野近辺には他にも柴任の教えをうけた者がいたはずで、おそらく、京極家の家臣のだれかが、柴任に武蔵流二刀を学んで、讃岐京極家中へもたらしたのである。「関流」という以上、柴任から武蔵流を学んだのは、関氏何某であろう。この探索は今後の研究課題である。
 讃岐の「関流」とは未聞の流派だが、それが柴任の門流だったとは、興味深いことである。柴任の門流が讃岐にもあったということだから。
 もっとも、京極家は十七世紀中期の約二十年、龍野にあったわけだから、多田半三郎頼祐の武蔵流兵法と無縁であったわけではあるまい。それゆえ、京極家の讃岐移封により、まず、龍野の「古流」武蔵流が讃岐へ伝わっていた可能性がある。
 その「古流」に対して、柴任の教えをうけた「関流」は当流である。この関流の祖は、以前から讃岐の「古流」武蔵流を学んだ者であろう。彼は、播磨の京極領陣屋へ赴任した機会に、龍野の多田祐久とともに、柴任に教えをうけたものらしい。かくして、讃岐でも、播磨の龍野と同様に、古流/当流という状況があったかもしれない。
 なお、尾張円明流の創始期に関与した竹村与右衛門頼角は讃岐の人で、讃岐には竹村の門人があった。それゆえ、讃岐では、一時期、竹村の門流と、柴任の門流が並存した可能性もある。そうしてみると、播磨灘を越えた対岸の讃岐には、また興味深い状況があったと推測しうるのである。
 ともあれ、播州における柴任の足跡は大きい。武蔵マニア諸君は、以下の[サイト篇]姫路・明石のページでそれを確認するだろう。


龍野城主・赤松氏のこと

 平野庸脩『하리마감』에 의하면, 미야모토 무사시는, 파슈 구동군 미야모토무라의 출생이다. 이에 대해 이미 구동군 미야모토무라의 페이지에서 무사시가 태어났을 무렵 영주가 코지(쿠로다) 관병위였던 것으로 언급되고 있다. 그럼, 그 이전은 어떨까, 라고 하면, 당지는 물론 용노성주의 지배지였다. 그래서 무사시 출생 전사라고도 하는 그 근처의 이야기에 이를 필요가 있다.
 류노성주라고 하면, 텐쇼 5년(1577) 근처까지는, 아카마츠씨였다. 아카마츠 중흥의 조·정칙은 오시시오성(현·히메지시 유메마에초)에 근거했지만, 그 아이·무라히데 이후 4대에 걸쳐 아카마츠씨의 성주가 있었다. 거기서, 아카마츠씨 그 자체의 안내는, 이 [사이트편]의 아카마츠무라의 페이지를 봐 주시는 것으로, 여기는 그 후 일담이다.
 아카마츠 마사노리의 계통이 아카마츠 주류가 되었다고는 해도 시모카츠 상의 대로에서, 시오시오성의 아카마츠씨도 유력 가신의 귀신일 뿐이다. 그렇게 전국 말기를 맞이하지만, 이 아카마츠씨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것을, 류노계의 아카마츠씨로 한가지 보고 싶다.
 아카마츠 마사히데(1510~1570)는 아카마츠무라 히데의 남자. 오시시오성주 하루마사의 사촌이며, 또 그 여위라는 관계. 에이로쿠 원년(1558) 하루마사가 아들 의우와 대립하여 오시오성을 잡히면 용노성에 맞아 망설이고, 에이로쿠 5년(1562)에는 모리 모토나리에게 원군의 파견을 요청했다. . 그러듯이 아카마츠씨 내부는 커녕 부자들 사이에서도 대립항쟁한 것이다.
 또 에이로쿠 7년(1564)에는 아카마츠 일통에서 세위 있던 우라카미 마사무네를 무로야마성에 토벌한다. 이 습격은 마사무네의 딸의 혼례의 의중을 덮쳤다고 한다. 우라카미씨도 내부 대립이 있었고, 마사무네는 동생의 종경과 불화, 그리고 종경과 아카마츠 마사히데는 영지 인접해 적대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갈등은 2원이 아니라 아카마츠 씨 문장과 같이 세 가지 범인 것이다.
 에이로쿠 8년(1565)에 아카마츠 하루마사가 몰리면, 대립하는 아카마츠 요시유와 화의가 되었다. 에이로쿠 11년(1568) 노부나가가 요시아키를 봉사하고 입장하고, 요시아키가 장군이 되면, 마사히데는 딸을 그 사무라이에게 보내려고 했지만, 종가의 아카마츠 요시유키는 코데라 정직에게 명령해 딸을 입기에 억류시켜 우라카미 무네경과 통모해 마사히데를 협격하려고 했다. 아카마츠 요시유키는 아버지 하루마사에 준 마사히데와 대립, 아카마츠 종가를 무시하는 ‘무도의 닌’으로 매도하고 있다.
 에이로쿠 12년(1569), 비젠에서 침입한 우라카미세에 의해 용노성의 마사히데 쪽은 위기에 빠졌고, 이 때문에 마사히데는 아시카가 요시아키·오다 노부나가에게 구원을 요구했다. 노부나가는 이케다 카츠마사, 벳쇼 안지 등에게 명령하여 요시유카타의 성을 공격해, 이 때 마사히데는 류노를 출격해 히메지를 공략하려고 했다. 하지만 우라카미 종경의 침략에 의해 서방이 위험해져, 아오야마에서의 합전 분도 히메지성 주코지 직류·효 다카에 격퇴되어 버린다. 결국 마사히데는 우라카미 종경에 화를 거두고 영지는 우라상세에 점령되었다. 그러다가 모토가메 원년(1570) 마사히데는 암살당했다. 혹은, 우라카미 무네경·우키타 나오야의 공격을 당해, 용노성에 자칼했다고 하는 이전도 있다(아카마츠가 파비작 고성기).




닭고산 류노고성지
효고현 타츠노시




서 하리마 성도



   키시오성
   정칙┬요시무라┬하루마사-요시우-노리보
     |  |히로히데            └           |      └무라히데-마사히데┬히로사다용노성      │     |      ├진룡└정원─정범가미츠키성
     │  │













*[고쿠라 비문]
《요시오카 요요 공방의 사범 爲り. 후소 제일 병술자의 호 있음. 영양원 요시아키 공의 때에, 신면무이를 부르고 요시오카와 병술의 승부를 결정한다. 한번에 세 번을 하고, 요시오카 한번 승리를 얻고, 신면도도승을 결정한다. 부디 신면무이를 하고 히시타 무맹병 법술자의 호를 은사한다>


미야모토 무사시 현창비
기타큐슈시 고쿠라키타구





아시카가 요시아키 동상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논제가 하나 있다.
 그것은 무사시의 장인·신면무이이다. 왜 여기에서 신면무지의 이야기가 되는가 하면, 규슈의 무사시 현창비의 비문, 이른바 고쿠라 비문의 기사에 관련된다.
 어느 무사시 평전에도 나오는 이야기이지만, 오구라 비문에는, 신면 무지가 요시오카와 대전해 이겨, 아시카가 요시아키로부터 「히가시무쌍병법술자」의 칭호를 받았다고 한다. 즉, 요시오카는 대대로 공방(무로마치 장군)의 사범이며, 「후와 제일」, 즉 일본 제일의 병술자의 호가 있었다. 15대 장군, 영양원 요시아키 때, 신면 무지를 부르고, 요시오카와 병술의 승부를 결정했다. 3번 승부로, 요시오카는 1회 승리, 신면은 2회 승리했다. 이에 따라 신면무지에게 '히가시무쌍병법술자'의 호를 줬다는 말이다.
 물론, 이것이 전설인지 사실인지 결코 손은 없다. 다만, 무사시의 양자·미야모토 이오리의 건비가 되는 비문이기 때문에, 무사시 주변에는, 분명히 이런 전파가 있었던 것이 알려져 있는 것이다. 그 이상은 말할 수 없지만, 여기서 한 걸음 나아가, 당시 하리마의 상황을 확인해 두는 것도 좋겠다. 그럼, 고쿠라 비문의 기사를 검증하기 위해, 하리마에 그 가능성의 조건을 찾아 보자.
 마지막 무로마치 장군 아시카가 요시아키(1537~97)는 여기서 반복할 것도 없이 수기적인 운명을 추적한 사람이다. 노부나가에게 지지되어 장군으로서 귀경해, 나중에 노부나가와 대립해 추방될 때까지, 그 재경 기간은 에이로쿠 11년~천정 원년(1568~73)의 5년 정도이다. 이 기간이 위의 고쿠라 비문 기사에 있는 요시오카와 무지와의 대전 시기이다. 이것은 무사시가 태어나기 십년 이상 전이다.
 그럼, 신면무지는, 어째서 교토의 장군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앞에서 매칭을 할 수 있을까. 이것에 대해서는, 신면무지가 무자 수행으로 상경해, 병술자로서 이름을 올려, 그 결과, 장군가 사범의 요시오카와 대전하게 되었다, 라고 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문제는, 신면무지가 교토의 아시카가 요시아키와 연결되는 인연은 어디에 있었는지, 이다.
 즈바리 그것을 지시하면 바로 류노성주 아카마츠 마사히데가 그 결절점인 것이다. 아카마츠 마사히데는 아시카가 요시아키·오다 노부나가 체제에 주어져 있기 때문에, 동쪽에서는 아카마츠 종가의 오시오 성주·아카마츠 요시유, 시카히가시군의 히메지성이나 오키성에 근거하는 코지씨, 서쪽에서는, 우라카미 종경에 협격되는 상황이었다. 말하자면, 아카마츠 마사히데는 미키의 벳쇼씨와 함께 하리마에 있어서의 요시아키·노부나가쪽이었다. 에이로쿠 12년(1569), 비젠의 우라 카미세의 공세에 의해 류노성의 마사히데가 위기에 처해 있어, 아시카가 요시아키·오다 노부나가에게 구원을 요구해 노부나가가 원군을 향한 것은 이미 말한대로 이다.
 물론 이 단계에서는, 히메지의 고지 직류의 유자가 된 관병위 타카타카는 반오리타 쪽이다. 소설이나 전기 등에, 관병위는 처음부터 오다 노부나가에게 마음을 전해, 이른바 선견의 명이 있었다, 등이라는 어리석음을 말해 무지를 드러내는 자가 많다. 사실은, 처음 관병위는 반오다 쪽, 그에 대해, 아카마츠 마사히데는 오다 쪽이다. 관무위에 선견의 명운이 있으면, 그것은 오히려 아카마츠 마사히데의 편이다. 다만 노부나가에게 준 아카마츠 마사히데는 조금 너무 이른 것이다.
 아카마츠 마사히데는 아카마츠 종가의 요시와 대립 항쟁하고 있었지만, 그것도 아들 요시유에 추방된 선대치 염성주의 하루스를 용노에게 비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사히데는 하루마사와는 종형제 관계로, 하루마사의 시대에는 아카마츠씨는 아직 파비작 삼국 수호이며, 하루마사도 교토에 인연이 깊은 것이다. 아카마츠씨의 하리마 제성, 특히 류노에는, 그러한 교토나 무로마치 장군과의 인연은 얕지 않은 것이 있었다. 그러므로 신면무지가 교토에서 요시오카와 어울리기 위해서는 우선 무지가 니시하리마의 류노 주변에 있어 아카마츠 마사히데와 어떠한 관계가 있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또 하나, 무사시가 생국 하리마의 무사로, 구동군의 출생이라면, 그 아버지는 용노성주를 섬긴 자이고, 아마는, 당시 신면무2도 구동군의 거주자이며, 양자 는 용노성을 결절점으로서 관계가 있었던 것 같다. 신면씨가 미작의 성이라도 당시 미작에서 서 하리마로 유입 이전해 온 미작의 무가는 적지 않다. 신면무지도 그 혼자였을 것이다.
 따라서 신면무지가 다가온 것은 류노성주 아카마츠 마사히데(沙野城主, 아카마츠 마사히데)이며, 그러한 당시의 환경조건에서만 신면무지는 교토의 장군 아시카가 요시아키와 연결될 가능성이 있다. 바로 그러므로 오구라 비문의 신면무지요시오카 대전 기사도 어쨌든 그 사실성을 부정하고 떠날 수 없는 것이다. 이 근처의 일은 종래, 무지에 대해 지적된 적이 없는 중요한 포인트인 것은, 무사시 마니아 제군에게는 사족,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일 것이다.

 이야기를 류노의 아카마츠씨로 돌아가자.
 아카마츠 마사히데가 죽으면 야사부로 히로사다가 속이고, 이것이 류노성주 3대째가 되지만, 아마 이 시기부터 상황은 혼돈으로 온다. 당시 하리마는 히가시하리는 미키성의 별장이 패자로 있었고, 니시하리는 어착성, 히메지성의 고지, 류노성의 아카마츠 히로사다라 등이 할당했다.
 텐쇼 3년, 오다 노부나가는 에치젠을 평정했지만, 다음 공략의 초점을 단바·하리마로 정해, 단바에는 아케치 미츠히데, 하리마 오쿠군(니시하리)에는 아라키무라시게를 침략의 지휘자로서 파견했다.
 하리마에 내린 아라키 무라시게는, 당시 아직 귀추의 분명하지 않았던 니시하리를 오다쪽에 짜넣는 것이 임무, 그 증거로서 인질을 내밀게 한 것 같다. 「인질 집고〔특별하게〕참가해야 할 취지 앙갚음 후」(노부나가기)에 쓰는 것은 그것이다.
 류노성주 아카마츠 히로사다는 아라키의 군문에 내려 인질을 낸 것 같다. 그 인질이 누군지 모르지만, 동생의 광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 해 10월에는 히로사다 외에 고데라 타카시, 벳쇼 나가하루 등이 상경해 노부나가에게 인사해, 소령 안도의 주인장의 예를 했다. 「노부나가기」에 「아카마츠」라고 있는 것은, 히로사다라고 한다.
 아카마츠씨의 가신에 우라카미씨가 있었고, 또 가신에게 우키타씨가 있었다. 이 우키타씨는 나오야(1529~1581)대에 역전의 공을 쌓아 주인종경을 압도하는 기세를 보이게 되었다. 종경은, 텐쇼 원년(1573) 오다 노부나가로부터 비젠·미작·하리마의 각소 영지 안도의 주인장을 얻어 오다쪽에 줬다. 그런데 다음 텐쇼 2년 우키타 나오야가 모리 쪽으로 되돌아가 주가 우라카미 씨와 적대하게 되었다.
 따라서 모리의 선봉이 된 나오야는, 텐쇼 5년(1577) 2월, 우라카미 종경의 본성인 비젠 텐진산성(현·오카야마현 와키군 사에키쵸)을 공격해 빠뜨려, 종경은 하리마 에 도망했다. 이 나오야의 패력은 니시 하리마에, 사용군의 우노씨를 비롯해, 아카마츠씨 일당은 모리카타에게 주게 되었다.
 텐쇼 5년 10월, 하시바 히데요시가 노부나가의 생명을 받아 하리마에 군을 넣었다. 히데요시는 코지(쿠로다) 관병위에 맞이해 히메지성에 들어가, 여기를 하리마 제압의 거점으로 정했다. 히데요시는 「하리마 국중, 밤을 날에 이어 현기증, 깨달은 인질 집고」(노부나가기), 곧바로 타지마로 돌아가 이것을 제압해, 빠진 다케다성을 보수해 히데나가를 성대로서 남겨두고 즉시 병사를 하리마에 돌려주고 십일월에는 사용군의 우에즈키성을 포위한 것이다. 이 압도적인 전승의 속도는 시운을 탄 것이었다.
 오다카타는 대군에서 아카마츠 정범의 우에즈키성을 함락시켰다. 그 때 성내에 있던 여자까지 磔에 걸어, 유아는 창으로 찌른다는 철저한 학살이 있었다고 한다. 낙성한 우에즈키성에는 아마코씨의 견신 야마나카 가노스케를 하고 지키게 했는데, 이것도 얼마 되지 않아 우키 다세에 쫓겨나게 된다.

구국 제도



우키타 나오야 동상



우에즈키 성지 효고현 우에즈키마치 우에즈키



도요토미 히데요시상



하리마 제성 지도


류노 관계 지도
 그런데, 우에즈키성을 떨어뜨린 히데요시는, 일단 히메지성에 돌아가, 거기로부터 즉시 용노성으로 진군해 왔다. 여기에서 「마지막 아카마츠」로서의아카마츠 히로히데(광영)의 이야기가 된다. 히로히데는 류노성주 아카마츠 마사히데의 두 남자. 통칭 야사부로, 따로 광영·광통·칙계라고도 한다. 좌병위령, 종5위 아래.
 음, 히데요시의 대군이 왔다. 그러나 지난달 가미즈키성에도 많은 용노 주민들이 참전해 전사하고 있다. 그렇게 되는 데는 항전도 참을성이 없고, 용노성은 항복해 개성했다.
 이 근처는 우에즈키성의 아카마츠 정범의 철저한 항전 만과 비교하면, 지극히 시원한 것으로, 아카마츠씨 내부에도 우키타카타와의 친소의 농도차가 있다. 아카마츠라고 하면 한 장 바위라고 착각하는 방향도 있지만, 그것은 실수로, 각각의 입장에서 색조가 다르다. 어느 쪽인가 하면, 류노계는 친신장파로 온 것 같다.
 류노의 아카마츠씨 가신들은 당시 16세의 류노성주 히로히데를 성하 평위 고사에무라(세무라라고도 한다. 히데요시도 히로히데를 죽이려고 하지 않았다. 히로히데가 나중에 「사이무라」성을 칭하지만, 그것은 사에무라의 이름을 따서 이름이 붙은 것이라고 한다.
 류노성이 항복한다. 히데요시는 싸우지 않고 용노성을 접수했다. 그해의 삶 히데요시는 전승 보고를 위해 안토로 돌아갔다. 노부나가가 하리마 제압의 포상으로서 히데요시에게 을어전[오토고제]의 솥을 준 것은 이 때이다(노부나가기).
 그런데 그 사이에, 텐쇼 6년(1578) 3월 미키성의 벳쇼 나가하루가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휘둘렀다. 이에 하리마 제성주도 연동한 것이다. 10월이 되면 섭진 아리오카성(이타미성)의 아라키무라시게가 노부나가에게 쏘아 농성했다. 이른바 노부나가 포위망이다. 모리키모토나 혼간지 미츠사(현여)라고 호응해, 노부나가에게 추방된 전장군 요시아키를 추구해, 에치고의 우에스기 경승과 카이의 다케다 카츠요리를 화목시켜, 운명이라고 하는 체제였다.
 그러나 텐쇼 7년(1579) 9월에 아라키무라 시게시의 아리오카성은 함락해, 다음 8년 정월에는 벳쇼장지의 미키성도, 농성 2년, 식량이 다해 낙성했다. 또한 저항을 계속하고 있던 것은, 시카 니시 군 에가 성의 미키 도리 아키, 시노 아와 군 나가미야마 [초즈이 씨] 성의 우노 마사노부이었지만, 4 월 5 월 사이에 에가 성도 장수 산성도 빠졌다.
 또, 모리 쪽으로 되돌아가 비전·미작의 다이묘에 올라간 우키타 나오야도, 텐쇼 7년 10월, 이번은 노부나가 쪽으로 되돌아갔다. 반신장방의 유력자 혼간지 미츠사도 텐쇼 8년 노부나가와 강화하여 오사카의 이시야마 혼간지를 퇴거하고 기이의 사모리로 옮겼다. 그렇게 해서 섭진·하리마는 거의 오다 쪽의 세력하에 들어간 것이다.
 하시바 히데요시는, 미키성을 떨어뜨리면, 히메지성을 하리마 경영의 본거로서, 텐쇼 8년(1580) , 모리카타의 요시카와 케이지가 근거한 돗토리성을 포위해, 이것을 빠뜨렸다. 히데요시는 돗토리에서 히메지로 돌아가자 곧바로 아와지로 건너가 이를 제압했다.

 龍野城を退去した赤松広秀は、城下平位郷佐江村に蟄居し、そこで読書三昧の日々を送ったとか言われているが、必ずしもそうではなさそうである。
 というのも、のちの広秀の動きを見ると、家臣団は温存されており、おそらくは再起を期して、龍野城は明け渡し、家臣共々平位城へ移ったということのようである。
 先祖伝来の領地を失った広秀は、天正九年(1581)龍野城主となった蜂須賀正勝(1526~1586)の麾下に属するようになった。天正十年、秀吉の中国攻めには蜂須賀勢の先陣として参戦した。信長急死によって秀吉が対毛利戦を切り上げ、姫路城まで大返しに返すとき、そのシンガリを勤めたのが赤松広秀勢だという。その後も各地の合戦に参加し、賎ケ岳合戦・小牧長久手の戦にも参戦した。
 備中攻めのとき秀吉が出した禁制に、備中国宮内禁制があって、これは吉備津神社の安全保証をするものだが、これを赤松広秀が制札したらしい。この禁制には蜂須賀政勝の添状(天正十年三月二十五日付)があって、「赤松弥三郎殿制札之事」としている。しかもその内容は、自身の麾下に入った広秀を下にも置かぬ様子である。広秀は蜂須賀政勝の被官になったのではなく、あくまでも与力であった。
 天正十三年(1585)、長曽我部元親を攻める四国攻略に広秀は参戦、戦功をあげた。秀吉は戦後の論功行賞で、広秀に但馬竹田城二万二千石を与えた。龍野城主だった蜂須賀家は、同年阿波徳島十八万石へ大加増されて栄転である。
 同年広秀は二十四歳、宇喜多秀家(1573~1655)の妹を夫人に迎えた(因播民談記)。秀家は、父直家の病没により九歳で家督を相続。翌年毛利征伐のため出陣してきた羽柴秀吉の寵愛を受けたの出世のはじまりで、本能寺変の後は秀吉のもとで数々の戦功を挙げ、天下一統後は備前美作それに播磨西部と備中東半の合計五十七万石を知行する大大名になった。文禄の役(1592~93 第一次朝鮮侵略)では総大将を務め、戦後その功により中納言に昇進。さらに、徳川家康、前田利家、毛利輝元、上杉景勝らとともに豊臣政権の最高機関である五大老に名を連ねた。宇喜多は、かつては赤松家臣の浦上氏のそのまた家臣だった。ずいぶん境遇が変るものである。

蜂須賀政勝書状 吉備津神社蔵


赤松弥三郎殿制札之事、即調候て進之候。是を被立可然候。我等先陣之事候条、弥馳走可申候。於様子、弥三郎殿より可被仰越候。恐々謹言
 (天正十年)
 三月廿五日   蜂須賀彦右衛門尉
               正勝(花押)
 備中宮内
  中番 御宿所




竹田城址
兵庫県朝来市和田山町竹田

竹田城は山名宗全が出石城の出城として築いた山城、家臣太田垣氏が城主。秀吉の但馬攻めで落城し、後に文禄から慶長にかけて修築され現在のような石垣が積まれたという。広秀自害後、竹田城は廃城。





斑鳩寺 三重塔
永禄八年赤松政秀再建
兵庫県太子町鵤
 広秀は但馬に新知を得ると、先祖以来縁の深かった鵤庄の斑鳩寺へ米百石を贈り、鐘樓を建立した(斑鳩寺文書)。かつて父政秀は焼失した斑鳩寺を永禄八年(1565)ころ再建した。その再建した三重の塔が残る。斑鳩寺には赤松政秀・広秀父子の供養塔がある。最後の赤松父子は斑鳩寺と縁が深いのである。

広秀寄進鐘楼 斑鳩寺

赤松政秀・広秀父子供養塔
斑鳩寺



 천정십오년(1587) 히데요시는 규슈 정벌에 진발, 히로히데도 종군했다. 분록 원년(1592)의 조선의 역에도 참가, 「사이무라 좌무위위」의 이름이 문서에 올랐다(시마즈가 문서, 히데요시 주인장). 귀국 후의 문록 3년, 후시미성 축성 공사를 담당, 그렇게 해서, 히로히데는 젊은 다이묘로서, 또 후지와라 사오와와 친교가 있는 문화인으로서, 그리고 무엇보다, 조선인 유자·강벆[강한]과 의 교제로부터 가능하게 된 「4서 5경 왜훈」의 출판 사업에 있어서 학명을 나타냈다. 영지의 타지마에 공자전을 건립해 유교의 석사를 부활시켰다는 점에서는 근세 정치사상사의 여명을 여는 사람이었다.
 이 근처에서,미야모토 무사시의 사적을 삽입해 두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라고 하는 것도 무사시는 『올림픽서』에, 16세 때, 타지마국 아키야마라는 병법자와 대전해 이긴 것을 기록하고 있다.
 무사시는 『올림픽서』에는, 교토의 요시오카의 이름도, 물론 간류도 결투도 적지 않았다. 하리마의 신당류 아리마 키베에와 이 타지마국 아키야마라는 두 개의 이름만 쓰고 있다.
 아리마 희병위는 태어나 처음의 첫 결투 승부의 상대. 그러나 타지마국 아키야마는 몇번이나 모르는 상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름을 무사시가 써 남겼다면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무사시 16세 때라고 하면 게이쵸 4년(1599). 당시, 아카마츠 히로히데는 타지마 다케다 성주. 그렇다면 타지마국 아키야마와의 대전은 아카마츠 히로히데와 무사시와의 관계를 시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올림픽서』에 이 타지마국 아키야마와의 대전을 쓰면 무사시는 무엇인가를 기념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게이쵸 오년(1600) 세키가하라의 역의 때, 히로히데는 당연히 도요토미 쪽에서 일해, 호소카와 유사이가 근거하는 단고타나베성공격에 참가했다 . 대진 중에 세키가하라 합전의 패배를 듣고, 병사를 돌려 타지마 다케다성으로 돌아가 농담에, 도쿠가와 쪽의 가메이 카시오 쇼(히토하타노 성주)의 권유를 받아들여, 서군 미야베 나가사키의 돗토리성을 공격하여 떨어뜨린다. 하지만, 이에야스로부터 절복을 목격받아 돗토리 신교지에서 자해. 향년 39세였다.
 이에야스는 왜 히로히데를 절복시켰는가. 이것은 성하를 불태워 다수의 읍민을 죽였다고 해서 죄에 묻혔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서군의 대장 우키타에 가까운 광수이다. 히데야 도망을 도왔다고도 하며, 어쨌든 명운은 다한 것이다.
 항간속설에, 돗토리성성 공격에서 방어가 굳게 난시해 성하에 불을 쏘고 다수의 읍민을 죽인 것은, 카메이 이바라구로, 이에야스로부터 그 작전의 비를 불어당긴 카메이는, 방화 한 것은 아카마츠 히로히데의 행위라고 문책을 피했다. 이에야스에게 절복을 명령받았지만, 히로히데는 변명을 화가 없이 자해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를 비업의 죽음으로 보였는지, 참금산의 기슭에 묻힌 후에는 목신이 되어 사람들을 괴롭혔다. 이케다 미츠마사의 시대까지 들었다고 한다. 거기서 사를 세워 진혼하자 사는 사라졌다. 도리에는 「아카마츠 다이묘진」이라고 있었다고 한다(고대 진교사기). 마지막 아카마츠는 이런 식으로 이국에서 옷을 입고 진혼하고 있었던 것이다.
 덧붙여서, 카메이 이가사키[이것의 노리]는 아마코씨의 가신·유자에몬 유나가즈나의 차남, 유신쥬로. 아버지가 야마나카 가노스케 등과 츠키야마 도미타 성탈회에 실패해 전사, 신쥬로는 제국을 유랑해 창술의 달인이 되어 「창의 신주로」라고 불렸다. 그 후 야마나카 가노스케 쿠시타에서 아마코 재흥의 군에 몸을 던져 아마코의 일문 카메이가의 양자가 되어 이바사키라고 칭한다. 히데요시의 하리마 공략 이후 우키타의 공격에 의해 야마나카 가노스케가 지키는 우에즈키성 낙성에서 탈출, 그 후 하시바 히데요시의 밑바닥, 인하 공략에 공이 있어 가노성주. 세키가하라역에서는 동군에 속해, 전술한 돗토리성의 일건이 있었지만 전후 가증을 얻는다. 도요토미 정권에서는 백야국 히노야마에 은산을 경영, 도쿠가와 막부 주인장을 얻어 샴 등에 무역선을 파견하는 등 주인이었다.
 광수의 무덤은 타지마의 다케다성 산기슭의 절에 있다.
 무덤이 있는 것은 호수사, JR 다케다역의 뒷편의 산측, 젠카지·죠코지·카츠켄지 등 사원이 늘어선 거리에 있어 , 호수지문 앞에는 ‘아카마츠 히로히데의 무덤’과 안내판이 나와 있다(효고현 아사라이시 와다야마마치 다케다).
 사원의 묘지를 지나 조금 산에 오른 곳에 광수의 무덤이 있다. 묘비에는 정면에 ‘후린인전 가요마쓰운 대거사’라고 법명을 새기고, 좌면에는 ‘호랑성주 아카마츠 사에스케히로 히데유키 묘’, 오른쪽 면에는 ‘게이쵸 고소자 사십월만’ 야카이 요시 / 遍誉照阿建 之」라고 하며, 기대에는 관계자 11명의 이름이 적혀 있다.


아카마츠 히로히데 묘비 호수지 절



아카마츠 히로히데 관계 지도


*[올림픽]
《생국 하리마의 사무라이, 신면무장 모토 후지와라 겐신, 나이를 쓰고 60. 우리 젊은이의 옛날부터, 병법의 길에 마음을 걸고, 13세로 시작해 승부를 한다.其あ히테, 신게류 아리마 희병위와 운병법자에게 타승, a i=3>, 21세로 하고, 도시로 가서, 천하의 병법자에게 만나, 몇도의 승부를 결정한다고 해도, 승리를 얻지 않으면 운사 없음.其後, 國々所々에 이르고, 제류의 병법자에게 행합, 60여도까지 승부를 한다고 해도, 한 번도 게리를 한다. 그 정도, 연 13에서 289까지의 사야 >>




돗토리 성지 돗토리시 히가시마치



*【고대 진교사기】
《왼쪽 병위위 자살 시옥 헤하, 가신 토모 미유쿠오유쇼소 노야마노기치 니장리, 여러분 모두 다지마 니쿠루.此赤松殿 원념 니야, 성하 노인 니츠키 다카테 "아 코소하 아카마츠 카 악령 나리"토 명승출 타마후. 인공 루즈 코트 한 배. 비중전 시대 또 광정공 시대 출옥 후. 종 니하신 니축 히사오타치, 나이에 니신구 나토비 헤시카하, 분개 모박 쿠야나리 니켄, 근세 니하 황옥 후코트나시. 사오오모 치제 니조 리교헤, 지금 하이미식성 케레하, 신려모 히히히타마 후람토 각유. 당시 하아카마츠 다이묘진 토가마 오카케, 도리이오건츠 >>





호수지 문전


다케다 안내 MAP
차로 가는 사람은 우회해, 남쪽의 건널목을
건너 북상. 절 앞에 소수이지만 주차 가능





*[키노시타 가계보]
○스기하라도 마츠┐
┌――――┘
├키시타 가정―┬카츠슌 류노성주 와카사 다카하마 성주
히메지 성주 ├ 於祢     | 호장 야코 무로모리 가성녀 | 도요토미 히데요시실├리보 와카사 다카하마 2만석 |북정소 |3대비 중족수 성주 └여자  ├연준 분고일출번주  아사노 나가 마사무로 | 무로 호소카와 유사이      ├俊定 시나노모리       ├히데슌→코바야카와 히데아키 오카야마 성주       |히데요시 유코고 코바야카와 타카시 경양자      |종삼위 중납언       └모 이즈모모리 호종련














고다이인 사원(당신에게) 동상 고다이지 사원
고다이지 사원 교토시 히가시야마군 시모카와라마치
 덧붙여서, 세키가하라의 당시 하리마국은 도요토미가의 창고 입지, 이것에 히데요시 친족의 키노시타씨가 영유하는 부분을 더하면, 이미 과반으로 나머지는 히가시하리마 밖에 없다. 히메지 성주는 당주키노시타 가정, 거기에 연준 등 아들이 파주에 수만석씩의 영지를 가지고 있었다.
 류노의 성주는 가정 장남키노시타 카츠토시가 텐쇼 15년부터 분로쿠 3년까지, 카츠슌이 와카사 오바마로 돌아간 후는 소 데요시 마사가 문록 5년까지 그 후는 도요토미가의 직령으로 이시카와 미츠모토 등 대관 지배지가 되었다.
 그런데 세키가하라 때, 히메지성 주 키노시타 가정은, 어느 쪽에도 아군하지 않는 중립을 극복했지만, 아들의 키노시타 노부토시는 후시미성 공격에 참가했다. 이 키노시타 일족의 행동을 보면 서군 내부의 복잡한 사정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고바야카와 히데아키(1582~1602)는 세키가하라에서 동군에게 되돌아가 이에야스에게 승리를 가져온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지만, 실은 키노시타 가정의 5남으로, 어릴 때 히데요시의 유자가 되어, 분로쿠 원년(1592)에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의 양자가 된 사람이다. 2년 후 13세 때 융경의 은거에 의해 가독 상속, 치쿠젠·히젠 중에 30만석을 영지했다. 세키가하라 후에는, 그 전공에 의해 우키타 히데야 구령 중 비젠·미작국의 51만석을 주어졌다.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는 세키가하라에서 서군을 배신한 거귀와 같이 이미지 되지만, 그 때 약관 19세이다. 담로 쑤시는 흑막이 상정되지만, 그것이 쿠로다 여수이다.
 그런데, 어쨌든 기노시타 가정의 장남 카츠토시는, 당시 와카사 오하마 성주, 세키가하라 역의 때 후시미성 유수거역이었지만, 그 임을 포기하고 탈출. 삼남 연준은 후시미성 공격에 참가했지만, 그것도 공격하는 척을 하고 있어, 잠자리에 들고, 단바 후쿠치야마성을 공격한다.
 세키가하라 후의 마치는,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는 상기와 같이 대은상. 키노시타 가정은 중립이라는 소극적 자세였지만, 그래도 전후, 비중족수에게 2만5천석을 주어져 장남 카츠토시는 제봉(후, 경장 13년 아버지의 유령을 상속). 삼남연준은 규슈의 분고일출에 삼만석이라는 것이었다.
 (이키노시타 노부토시의 아내는 호소카와 유사녀, 또, 미야모토 무사시 관련에서는 최근, 그 게이쵸 18년의 「일차기」의 기사에 의해, 무이한 병법자를 부자로 유명하게 되어 있는 것 같다).
 이렇게 보면, 키노시타 씨는 세키가하라를 어떻게든 잘라낸 것 같지만, 아카마츠 히로히데는 탄고 타나베성의 포위진에 있고, 그 후 키노시타 노부토시와 같이 잠자리를 돌려 돗토리성을 공격해 떨어뜨렸지만, 자해라는 결과이다 . 같은 수면 행동에서도 그 결과는 상당히 다르다. 요컨대 아카마츠 히로히데는, 서둘러 방법이 능숙하지 않은 것 같다.


무사시에 관한 매니악한 여담


 상술한 바와 같이, 라산문집소수의 「신면현신상찬」에 의해, 라산이 「이시카와 사쿄모」의 의뢰로 무사시상에 찬양을 한 것을 알 수 있다. 초상화에 누군가의 찬사를 넣는다는 것은 선림의 바람을 본뜬 것이다.
 그러나 이 화찬의 건에 대해서, 임라산이 무사시상에 찬송한 정도의 접점이 있었다고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여기의 이야기가 된다. 논점을 선취해 말하면,무사시와 임라산을 연결하는 긴 선이 상정되는 것이다. 이하, 무사시에 관한 매니악한 여담이라고 생각해 주셨으면 한다.

 위의 전 용노성주 아카마츠 히로히데는 마지막 아카마츠 다이묘가이다. 오시시오성에 있던 아카마츠 종가·노리보는 아와에 떠나, 벌써 텐쇼 8년에는, 우에즈키성의 아카마츠 정범은 멸망해, 덧붙여 신사군 장수성의 우노씨, 미키성의 벳쇼씨, 미키키성 의 고지씨도 멸망했다. 아카마츠 계통 제씨는 처마 멸망했다.
 그런 정세 속에서, 아카마츠 히로히데가 간신히 연명한 것은, 아버지 마사히데가 아카마츠 무네가의 요시와 대립해, 형광정이 노부나가·히데요시에 부여했다는 우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다. 아카마츠 히로히데는 일면 문화인으로서의 모모가 있어 호소카와 유사이와 키노시타 카츠토시 혹은 공가의 카라스마 미츠히로와의 교제가 있었다.
 아래 극상의 시대이다. 히데요시에 편승해 다이묘가 된 하리마의 구로다나 비젠의 우키타라는 예가 있다. 그러나 아카마츠 히로히데는 그러한 업적과는 다르다. 그러한 능지와 광수의 호학성이 무언가 관계가 있을 것 같다.
 후지와라 사와와의 교우를 생각하면, 광수의 조선 종군은 아무래도 미묘한 날개가 있다. 학문을 좋아하고, 장서의 많음에 경탄된 일화가 있는 히로히데는, 조선의 역으로 ​​학죄가 된 조선인 학자들을 보호해, 그 귀국을 도왔다.
 그러므로, 여기는 역시,후지와라 아오와(1561~1619)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기와는 근세 유학의 창시자로, 그 제자로부터 임라산이 나왔다. 히와와는 생국 하리마, 미키군 호소카와쇼의 출생이다. 히와와의 아버지는 후지와라 정가의 후손, 시모냉천가의 냉천위순(1530~78). 전국시대가 되어 교토의 공가들도 자가장원이 있는 지방으로 도망치는 경우가 많았다. 시모 냉천가도, 16 세기 초, 권대 납언으로 하리마 권수 겸임의 정위·위효의 무렵에는, 호소카와 쇼로로 하향해, 교토와 하리마의 이중 생활이라고 하는 것이 정상이 되어 있던 것 같다 . 공가라고는 해도, 냉천위순은 거관을 성곽화해, 무장해 전국무사와 변함없는 모습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소년 시대의 왕와는 7세 무렵, 같은 파슈의 류노에 가서 교토의 상국사의 말사였던 류노 근재의 선원. =10>에서 東明宗昊에게 배운 것 같다. 히가시 아키무네 아키라의 사는 쿠미네 무네나리로, 상국사의 탑두옥 용암에 살았던 적이 있다.  중세의 선종 사원은, 실은 유학에 송유의 학문의 부이기도 했다. 특히 소쿠쿠지는 설배 등 양이 배운 곳이며, 그 설배 타루야, 유학해 주자 전집을 가지고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히와와는 상국사계의 학풍 속에서 아마 불교와 함께 유교를 배웠을 것이다. 히와와는 나중에 그 상국사에 입산한다.



소고쿠지 교토시 가미교구 소코쿠지몬마에초

 가와문문집소수의 『문강악』에서, 와와비는 「어린 시절부터 스승도 없어」라고 무사독학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선가의 유불론에 질리지 않고 유서를 읽었다는 것이다.
 그 경운사는 벌써 폐사가 되어, 지금은 현도에 면한 산과 방생 연못의 이름 남은 것 같은 것이 조금 볼 수 있을 뿐. 히라노 쇼고의 『하리마감』에는, 와와의 사적을 기록함과 동시에, 《태평산 경운사 젠종 재중 가키나이무라 무로즈미 성사 말사》로 하고 있다. 그렇다면 18세기 중기에는 이 절은 무로츠의 견성사 말 절로 존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현재는 주택지의 배후의 산복에, 메이지의 한학자, 혼마 사다관의 휘박에 의한 「후지와라 사오와 선생 유우」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타츠시 시 구사이초 나카가키우치).





후지와라 히나와 동상



오와리 하리마 관계 지도







후지와라 히나와 선생님 유적비



사와 유적 액세스 맵

기와 유적 부근 안내도


 그런데, 이 [사이트편]은, 보통의 관광 안내에 없지만 중요한 스포트에 초점을 맞추어, 철저 가이드하는 것을 본지로 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히와와리의경운사지를 위의 후지와라 히나와 선생님 유혹비를 의지하게 묻기로 한다.
 류노의 성시에서 지호 강변을 남쪽으로 내리면 류노 신대교라는 다리의 서쪽 막이다. 거기에서현도 5호선을 서쪽으로 약 2km 정도가면, =7>'이라는 신호가 있다. 거기가 경운사지의 이웃이다.  여기는 버스 노선이 있는 것 같기 때문에, 그렇게 가면 「경운사」라고 하는 버스 정류장에서 하차. 다만, 경운사는 폐사이기 때문에 이름만 버스 정류장이나 신호에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경운사지 탐방자에게는 고맙다.  여기에서는 부근안내도를 참조 되돌아가서, 우선은 현도에서산쪽으로 오르는 가는 일본도를 간다. 아마 경운사의 사역에 이미 들어 있는 것이다. 주택지를 2백m 정도 오르면 길은 막혀 오른쪽으로밖에 구부러지지 않는다. 여기가 포인트.  여기서 왼손 주택의 뒤를 (죄송합니다) 통과시켜 오른손 바로 위에 높이 2m 정도의 비석이 지어져 있다. 그것이 후지와라 히나와 선생님 유흥비이다. 산복은 오래된 묘지 같이 이다.  차로 온 사람은 산쪽으로 올라가는 가는 한 도로를 그대로 똑바로 오르고 막다른 길로 오른쪽으로 구부러지면, 있다. 거기 주차할 수 있어야 한다.  이곳은 바로 깊은 명소와 말하기 위해 현지에 전혀 아무 안내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곳이다. 진짜 매니악한 탐방이며, 우리의 [사이트편]이 안내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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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상사학회 2000년도 대회 발표 요지 이조 후기 지식인 타자상-강벆의 '간양록', 박령원의 '아타가와 일기'에서 반영된 타자

일본사상사학회 2000년도 대회 발표 요지

◆제1회장◆
  

가마쿠라기 선승의 정토 교관-특히 엔지벤엔을 중심으로
도호쿠 대학 대학원 도카이 린 양창
 이번에 다루는 엔지벤엔(1202~80)은 도후쿠지의 개산으로서 많은 문제를 옹호해 가마쿠라 시대의 선종을 말하는데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 연구는 놀라울 정도로 진행되지 않았다. 그 이유로는 우선 저작이 적다는 사료적인 제한이 있었던 것과 다른 하나는 밀교적 수법을 병존시킨 그의 불교 이해가 겸 수선으로 소극적으로 평가되어 온 것 등 가 준다.
 그러나 최근, 겸수적이라고 평가되는 엔센의 사상이, 실은 제종에 우월해 선종의 교리를 자리매김하고 있던 것이나, 현밀 스님과는 입장을 달리하는 스님으로서 귀현의 존경을 모여 있던 것 등이 밝혀져 그의 사상에 다시 빛이 비추어지고 있다. 향후 엔센의 사상은 종파사의 틀을 넘어, 그 중세불교·사회사상의 의의를 묻는다.

 그런데, 제가 본 발표로 고찰을 시도하는 것은, 엔지의 정토교 이해이다. 지금까지 엔지가 설하는 선종의 교리와 현밀승에 대치하는 선승으로서의 특성이 밝혀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 앞서 신흥의 전수념불교단과의 차별화를 어떻게 도모했는지 관점을 둔 연구는 볼 수 없다. 이러한 차이화에 관한 과제는 이미 전수념불의 교리를 수용하고 있던 당대의 귀현과 엔지와의 협상에서 특히 극복해야 했다고 나는 추측한다. 그것을 밝히면서 당시 아직 일본에서 알려지지 않았던 '선'이라는 새로운 불교 교리의 전달 과정의 복잡성에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메이에의 밀교 사상
일본 학술 진흥회 특별 연구원 마에카와 켄이치
 명혜의 사상에 있어서, 밀교는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출자 위에서 말해도 메이에는 신고지에 소속된 밀교승으로서 출발한 것이며, 평생에 걸쳐 밀교와의 관계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종래의 연구에서는, 특정의 테마만이 다루어지고 있어, 메이에의 밀교의 전체상이 문제로 되는 것은 적었던 것 같다.
 메이에 자신의 저작에서는, 밀교가 직접의 주제로 되는 것은 반드시 많지는 않지만, 제자들에 의한 문서류에서는, 넓게 교상·사상에 걸치는 메이에의 소설이 적혀 있다. 본 발표에서는 『진문집』 『토리오 이야기』 『다카야마 수문 비밀 초』의 3서를 중심으로 고찰을 시도하고 싶다.

 전기 등의 기술로 보면, 메이에는 상각이나 흥연으로부터 수법해, 니와지에 있어서 교상을 배웠다고 한다. 그러나 명혜의 밀교에 대한 지식의 범위는 이만큼 머무르지 않고, 문서류의 기술에서는 자엔과의 접촉이나 대밀과의 관계도 시사된다.

 메이에의 살아있는 가마쿠라 초기, 밀교의 사상은 많은 유파로 나뉘어, 교상에 있어서도 헤이안 시대 말 이후 활발한 연구가 계속되어 왔다. 이런 상황 속에서 메이에는 뭔가 기본 교설을 받아들였다는 것보다 자주 통설을 비판하고 자신의 견해를 보인다는 자세를 볼 수 있다. 그것은 화엄교학의 수용과도 공통되는 것이며, 이러한 명혜의 기본 자세로부터 그의 현밀에 걸친 사상의 존재 방식을 통일적으로 고찰할 수 있을까 생각한다.


 
도호쿠에서 시중의 수용
고쿠다이 여자 학원 교사 고가 카츠히코
 시중이라면 주로 치유치 마코토를 떠올릴 것이다. 확실히 그는 '일편성화'에 따르면 홍안3[1280]년 가을, 시라카와[강]관을 넘어 오슈로 향했다. 히라이즈미를 거쳐 에자군에 있는 할아버지 고노 통신의 분묘를 참으로, 상만두를 둘러싸고 21명의 스님이 앉아 있다. 육부모를 버린 끝에 '승구의 이상'으로 유죄가 된 고노 일족의 보리를 되살릴 의향이 있었을 것이다. 이 무덤은 「세츠카」라고 불리며, 지금도 이와테현 기타가미시 이나세초 미즈코시에 있다. 이듬해 봄에는, 1편은 동행 18명과 함께(전년보다 줄어들고 있다), 눈에 덮인 강자로부터, 히라이즈미나 마쓰시마 일대를 부산·교화해 유래관을 거쳐 상륙에 들어가 있다. 그 후도, 1편 후계자인 역대 타아미타불이 유행했기 때문에, 도호쿠 지방에서는 지금도 적은 수의 「시종」사원이 있다. 또, 미야기현 등미군 미나미카타무라에 있는, 50여명의 결연중이 48일 사이의 춤 염불을 수수한 것을 기록한 「정안2[1300]년 윤 7월 15일」명을 가지는 판 패가 있는 것도, 당지에서의 수용을 이야기하자.
 하지만 특히 야마가타에서는 한 편과 함께 대표적인 유행의 시중성인 일향 준성의 영향도 놓칠 수 없다. 1996년에 발견된, 야마가타현 덴도시 타카노보 유적 발굴의 묵서초에 의해, 지금까지 전승에 지나지 않았던 일향의 존재가 현실성을 띠었던 것이다. 또 '덴도 낙성 나루히코지 사연기'나 '일 향상인 혈맥 상승보'에는 법연의 제자인 금광의 사적(학우의 왕생사)을 도입한 기술도 있어, 자은사에 일향파 말사가 있었던 것도 고찰해야 할 것이다.


 
『헤이케 이야기』에 있어서의 운명관의 변용―연경본과 『겐헤이 성쇠기』
도호쿠 대학 대학원 이와이 치에
 영화에서 멸망으로 향하는 헤이케 일문의 유전을 '히라가 이야기'에서는 다양한 사상적 요소를 이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 요소는 다층적 구조를 이루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운명이다. 선행 연구에서는 제본 각각의 특징을 개별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 많아, 제본간에 있어서의 사상적 차이에 대해서는 논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운명을 고찰할 경우 제본간의 차이를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본 발표에서는 연경본과 '원평성쇠기'를 다루어 양본의 운명관의 성질의 차이를 검토한다. 연경본은 가마쿠라 중기의 성립으로 고태를 남기는 책으로 알려져 있으며, '원평성쇠기'는 남북조기의 성립의 마지막 출본이 된다. 둘 다 읽기 시스템으로 분류되는 책이다. 성립연대가 다른 동계통의 두 책을 비교해 운명관의 변용을 고찰함으로써 각각이 성립한 시대의 사상의 일단이 보인다. '히라가 이야기'는 제본 성립 당시의 사상을 도입하면서 재구성되어 온 것을 나타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연경본의 운명은 가장 근원적인 사상적 요소이며 어떠한 것에도 규제되지 않는다. 그에 대해 '원평성쇠기'에서는 인간의 악행에 대한 응보로서 운이 다한다는 구도가 보여 윤리적 응보의 관념이 보다 강하게 내세워지고 있는 점이 특징적이다. 본래 불가피·불가측적인 것이었을 운명이, 응보의 관념의 틀에 짜넣어져 갔다고 말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점에 주목하면서, 연경본과 '원평성쇠기'에 있어서의 운명관의 내실을 밝히고, 운명관이 변용해 가는 의미를 재검토하고 싶다.


 
마음을 담아 느끼게 해―『등백 화설』의 일절
학습원 대학 타무라 항
 『등백화설』은 16세기 말에 성립한 화론이다. 그림사 등 백의 어록을 중심으로 본법사의 승일통이 정리한 것이다.
 이 책에는 자주 언급되는 구절이 있다. 梁階의 「야나기 니토리노 그림」을 사카이의 차인 수락종혜가 「나루호 어려운 그림으로 유고자」라고 평가하는 일절이다. 「시즈카인 그림」이라고 하는 이 평어는 「등백 화설」의 눈목으로 되어, 심지어는 등백 자신의 작품에까지 적용되게 되었다.

 이러한 전통적인 이해는 다소 정정되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닛토가 스스로의 감상으로 '시즈카인 그림', '이소가와시키 그림' 등의 평가를 '마음을 붙이는 가감사야'라고 묶기 때문이다. 이것은 개별·구체적인 평어를 감상 방법이라는 차원에서 바꾸고 있는 것이다. 문제의 일절에서 중요한 것은 「시즈카인 그림」보다는 오히려 「마음을 붙이는 가감사」가 아닌가.

 그렇다면 '마음을 붙이는 가감'이란 어떤 것일까. 수락종혜가 쓰다종급의 살롱에 속해, 거기서 「시즈카나」 「이소가 하시키」의 평어가 빈출하는 곳으로부터 다도와 깊이 관련되어 가자. 다도에서는 '마음'에 의한 주객의 일치를 목표로 하며, 이는 그대로 감상자와 회화 세계의 관계에도 적용된다. '마음을 이루는 가감'은 감상자의 회화세계에의 몰입·양자의 융합을 의미하며 다도뿐만 아니라 중세예도론과 이념을 공유한다.

 본 보고서에서는 이상을 확인하고 싶다.
 


 
패널 세션  「여기기」에 보는 중세 - 신도 사상 연구의 새로운 시점을 찾아
<코디네이터> 다이쇼 대학 미바시 마사다
〔취지〕
 중세신도사상이 일본사상사연구의 중요한 테마인 것은 모두가 인정하고 있으며, 1977년에는 일본사상대계의 한 권으로 『중세신도론』이 간행되고 있다. 그러나 중세 전기의 신도서의 대부분은 그 성립 과정조차 분명하지 않고 내용의 검토도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양부신도(진언신도)의 대표적인 책으로 여겨지는 『여기기』도 그 중 하나로 본서에 대해 연구하고 사상사적 위치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기』는 이세신궁(내하 양궁)의 역사·사전·신보·신체 등에 대해 설명한 것이다. '일본서기'와 '신도 5부서'를 기반으로 한 부분도 있지만, 모든 권에 밀교적 해석이 담겨 그 내용은 난해이다. 이미 '홍법대사 전집'과 '신도대계'(진언신도·위)에 활자화되어 있지만, 어느 교정도 불충분하여 정확한 '여기기'상을 그릴 수 있다고 생각된다. 아니. 그래서 우리는 1994년에 '신불습합연구회'를 결성해 '여기기'의 독해를 시도하기 시작했다. 저책에 존경각본(구 가나자와 문고 전 아수자와모토)을 이용해, 다른 중세의 사본과 교합해 교정 본문을 확립할 뿐만 아니라, 각각의 훈을 비교 검토하면서 쓰고 문장·주석을 작성 그리고 현대 어역을 더했다. 그리고 올해, 그 전반(상권)의 작업을 종료해, 간행하는 운반이 된 것이다.

 여기에서는 우리의 성과의 일부를 나타내면서 『여기기』의 구성·언설·도상·주석 등에 대해 분석하고, 거기에서 밝혀지는 중세신도 사상의 발생과 전개에 대해 논해보고 싶다.


 
『여기기』세계의 생성―그 구조를 해독한다―
다이쇼 대학 미바시 마사다
 전 18권으로 구성된 「여기기」는, 가나자와 문고의 전아(1261~1338) 테자와모토가 있어, 또 회회 행(1256~?)의 「유치 신기본원」에 인용되는 등, 가마쿠라 말에는 성립·유포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전체의 구성은 전반 6권 「기」, (5) 「아마테루 황대 신궁 진좌에 따라」, (6) 「도요테 오신 진좌에 따라」)와 후반 8권((7) 「심주 여기기」, (8) 기」, (10) 「만경본연 신령 서기기」, (11) 「신호 여기기」, (12) 「신형 주려 기기」, (13) 「삼계 표려 기기」 , (14) 「현도 여기기」, (15) 「불법 신도 여기기」), 그리고 「신체도」 4권으로 이루어져, 전반 6권과 후반 8권에서는 성질을 다르게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각각의 권 사이에 중복되는 부분이 있으면서, 반드시 내용(언설)이 통일되어 있지는 않다. 즉 『여기기』는, 따로따로 성립한 권의 집성이며, 그것들이 완만한 관련을 가지면서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본 보고에서는 특히, 전반 6권에 대해서 내용을 분석해, 하나하나의 권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재현함으로써, 중세 신도의 발생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다.


 
『여기기』의 도상학 ―중세신도의 이미지와 상징―
이와키 메이 세이 대학 모야 온
 『여기기』 전 18권에는 「신체도」라고 칭하는 도상만의 권이 4권 포함되어 있다. 거기에 그려진 도상이 무엇을 의미하고, 『여기기』 전체의 내용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에 대해서, 제대로 임한 연구는, 지금까지 없다고 말해도 좋다. 또 「신체도」이외의 권에서도, (2) 「신천상 지하 나름」, (3) 「강림차 제려기기」, (6) 「심주여기기」, (11) 「신형 주려 기기」, (12) 「삼계 표려기기」, (13) 「현도 여기기」에는 각각 그림이 그려져 있으며, 그 그림은 그것이 그려져 있는 권의 문장만으로는 아니고, 다른 권의 기술과도 밀접하게 연관하고 있는 것 같다는 것이, 전반 6권의 해독을 통해서, 점차 밝혀져 왔다. 아마도 이러한 그림이 가진 의미를 밝히는 것이 '여기기' 전체의 구상을 밝히는데 있어서도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또 『여기기』 이외에서도 『료노미야모토 맹리 취마 訶衍』・『日諱貴本紀』・『아마테루 황태신 천행 시대 초』 등 양부 신도서에는 도상을 포함 물건이 적지 않다. 이것은 중세의 양부 신도설에 있어서 도상의 역할이 결코 작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언설이 먼저인지, 도상이 먼저인가, 라는 문제를 항상 엿보면서도, 양자는 서로 링크하면서, 신도설의 전개를 지지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예를 들면 3종의 신기나 마음 기둥 등 실재는 하지만 불가시의 심볼을 둘러싼 다양한 언설이 전개되는 것도 중세이지만, 그 이미지를 지지하는 것으로서 그림의 기능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합시다.

 본 보고에서는 『여기기』 전반 6권에 있어서의 도상이 하는 역할을 중심으로, 후반 및 「신체도」해독의 전망을 말한 다음, 한층 더 중세 신도설에 있어서의 도상을 어떻게 파악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 제기 당신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기』와 <주석>-중세주석학의 언설세계에서-
와세다 대학 하라 카츠 아키
 중세에는 처음으로 다양한 형태로 <주석>이라는 영위가 이루어졌다. 『여기기』도 또 예외는 아니다. 중세의 『여기기』 주석서로는 『여기제작초』가 비교적 유포된 것 같고, 『일본서기 사견문(하루유모토)』, 『진구방만신불일치초』에 초록되어 있다 그 외, 신궁 문고장 '가메초'('가메'는 '여행'을 낳은 서명)도 동서라고 한다. 게다가, 정토종 제7조의 성고저 『여기기 사령』 『여기기 습관유』 『여기기신도 화초』, 히에이산 학장의 양편술 『여기문서』 『여기기 초」등이 있어, 친숙한 양편의 강술에 걸리는 『신시로권 사견문』권하(제35조~)는 『여기기』의 <주석>에 향한다.
 본 보고에서는, 중세에 있어서의 <주석>의 존재를 살펴본 뒤, 『여기기』에 관련된 <주석>의 여러상을 개관하기로 하고 싶다. 매우 난해한 『여기기』를 현대의 문맥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중세라는 시대에 있어서 『여기기』가 어떻게 인식되어 해석되어 왔는지, 중세의 해석학의 언설 세계로부터 넘어가는 시도이다 .


 
매몰하는 『여기기』 세계―〈교정〉하는 근세―
종교 정보 리서치 센터 연구원 모리 미즈에
 근세의 『여기기』는, 원래는 하나의 권의 타이틀이었던 『천지 여기기』라고 총칭되었다. (4) 「천지려기기」는 내용적으로도 총론에 어울린다. 그 경위는 향후의 과제이지만, (4) 「천지 여기기」가 「여기기」 전체를 대표하기에 적합한 호칭으로 인정된 것이다. 『천지려기기』라고 총칭된 것으로, (4)「천지려기기」 이외의 권은 『천지려기기』에 포괄되어 각각의 독자성을 약화하게 되었다.
 '천지려기기'는 특정 법류에 이어지는 승려와 한정된 신사의 신직을 ​​넘어 알려져 있었다. 그 때 '여기기'는 더 이상 하나의 독립된 세계를 형성하는 교설이 아니라 '습합신도'의 또 다른 중요한 자료 중 하나이며, 그림과 의례에서 유리한 문자 텍스트로서의 측면에 편향된 수용이었다.

 또한, 「습합 신도」는 「신도」의 일류파이며, 그 문헌은, 습합 이전의 신도로부터의 파생 혹은 개변이라고 생각되었다. 그 때문에 '여기기' 외부에 '여기기'의 근거가 요구되었다. 근세의 사본(국회도서관본, 교토부립도서관본, 천리도서관본)은 권의 편성뿐만 아니라 본문·훈점의 세부에 걸쳐 중세의 제본과는 명백하게 다른 특징이 있다. 그것은 공통의 조본에 기초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합리적인 올바른 본문·훈점을 베풀고자 하는 교정의식에 의한 것으로 생각된다. 본 보고에서는, 근세 사본의 고증학적 태도가, 「본래의 모습」에 가까워지려고, 오히려 원래의 모습을 무너뜨렸다는 것을 나타내고 싶다.
 

◆제2회장◆

 
이조 후기 지식인 타자상-강벆의 '간양록', 박령원의 '아타가와 일기'에서 반영된 타자
히로시마 대학 대학원 김 센조
 159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 때 일본에 연행되어 온 이조의 지식인 강릉(1567~1618년)은 2년 8개월의 일본 억류 생활을 바탕으로 '간양록'을 저 했다. 전통적으로 강간에 관한 연구의 대부분은 주로 강악의 후지와라 사와에 대한 사상적 영향의 측면이 강조되어 왔다. 충분하다고는 할 수 없는 연구 상황과는 반대로 「일본에 주자학을 전했다」라고 하는 언설은 하나의 「강범 전설」을 형성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간양록'의 가치 중 하나는 '야만' 왜구에 의해 잡힌다는 굴욕을 경험한 '문명국' 이조의 지식인이 일본을 어떻게 인식하고 그것이 자의식 어떻게 에 반영되었는가라는 점에 있다. 沆

 '아타카와 일기'는 1780년 건류제의 70세를 축하하는 사절의 일원으로 베이징 아타가와에 휩쓸린 박령원(1737~1805년)의 여행기이다. 박령원은 북학파의 거두라고 언급되는 인물로, 그에 관한 연구는 약 400에 이르지만, 북학 사상 형성에 대한 영향이나 문학자인 측면의 분석이 주로 되어 왔다. 거기서 여기에서는 약 5개월간의 경험이 상세하게 묘사되고 있는 「아타카와 일기」를 통해, 종래의 분석 대상이 되지 않았던 그의 청(왕조)이라고 하는 「타자」를 통해서 나타나는 자의식에 주목하고 싶다.

 주자학의 세계관의 범주 안에 살고 있던 이조의 지식인들에게 취하고, 외부 세계에서 만나는 타인은 어떠한 의미를 가진 것이었는지, 또 그 구체적인 대면을 통해 그들의 자의식에 어떻게 반영 되었는가. 그리고 이러한 분석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지에 대해 검토를 더해보고 싶다.


 
구마자와 소야마의 『주이』 해석에 있어서의 독자성―「음양」을 키워드로
閻茁
 구마자와 반산의 '주이' 해석은 언뜻 주솥을 깔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중요한 개념 해석에 있어서는 달랐다. 예를 들면 '음양' 해석이다. 주희의 '음양'은 '선악'을 특성으로 하며 '상위' '상승'을 상호관계로 하여 교착한 '추행'을 운동형식으로 했다. 「선악」이란 법칙에 따른 확률의 높낮이에 의한 「양」의 「선」과 「음」의 「악」을 말하며, 「상위」 「상승」 「추행」이란, 상반되는 성질 를 가진 '음'과 '양'이 교착하여 상대로 바꾸는 것에 의해 반발하고 운동을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쥰야마의 음양은 '모두선'을 특성으로 하며 '부상해' - '상구' '상생'을 상호관계로 '병행'을 운동형식으로 했다. 「모두선」이란 「음」과 「양」이 양쪽 모두 가치 있는 것, 「부상해」란 「음」과 「양」이 서로 적대하지 않는 것, 「병행」이란 「음 '와 '양'이 '차'의 '양륜'처럼 동시에 존재하고 일하는 것이었다. 이 소산의 '음양'은 '목숨'과 연결되어 숙명론의 인생관을 합리화하는 관념이 되었다. 즉 '양'으로 여겨지는 '부귀'의 '사'와 '음'으로 여겨지는 '빈봉'의 '민'이라는 '순명'과 '역명'의 처지는 생득되는 것으로 '모두 선 그러니까, 특히 「역명」의 「빈빈」의 「민」이 「순명」의 「부귀」의 「사」에 적대하지 않고, 자신의 「역명」을 가치 있는 것으로 해 「순명」 의 것과 함께 사회를 구성하는 부분으로서 일해야 한다는 인생관이었다.

 
구마자와 소야마의 천황관-가락관의 해명을 통해
도호쿠 대학 대학원 오카와 마코토
 와쓰지 테츠로가 서술한 「존왕」사상사에 있어서는, 문화 공동체의 통일의 상징체로서 천황이 일관되게 자각되어 온 것을 제시하는 것이 모티프가 되고 있다. 그 모티브에 적합한 존왕의 기원 중 하나로 구마자와 소야마의 천황관을 들 수 있다. 와쓰지에 의하면, 우야마는, 특수 일본적인 「길」의 실현을, 황실의 전통에 안에 요구한 사상가로 여겨진다. 와쓰지 이후에 구마자와 소야마의 천황관에 부분적으로 접한 연구는 몇 가지 있지만, 이러한 와쓰지의 이해의 타당성을 검토하기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아오야마는 '예악'을 조정이 보유해 왔기 때문에 일본이 문명국이나 얻었다고 하며 '레라쿠' 안의 '락', 특히 가락을 교화 정책에서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소야마는 당대 일본 유학자들은 균일하게 송명학을 '격법'으로 받아들이고 길을 잃고 있다고 하고 송명학에 의한 교화('이학' '심법')는 길 없는 시대의 교화법이며, 이상으로 하는 교화법과는 멀다고 한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일본의 조정의 가락에 의한 교화는 고대 중국에서 행해진 이상적 교화법이며, 연주하는 사람·듣는 사람의 양쪽 모두, 「불지 불식」에 「사랑」 「무왕」 라고 하는 중국 고대의 성왕의 통치에 있는 것 같은 기분으로 시켜, 교화한다고 한다. 아오야마가 조정의 아악에 맡긴 것은 특수 일본적인 길의 발견이 아니라 중국·일본에 보편성을 가진 ‘길’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었다.


 
썰코와 교배학
도쿄대학대학원 한동육
 쇼코는, 교배학의 <조형>이라고 말해지고 있다(이노우에 테츠지로, 이와바시 준성 등). 동시에, 그것이 교배학과 「결정적인 차이」가 존재한다는 정반대의 논의도 있었다(마루야마 마사오 등). 분명히, 예를 들면, 교우가 장자적 성악설을 취하지 않는 점은 간과해서는 안 되지만, 그가 장자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은 도저히 무리라고 생각된다. 여기에서는, 양자의 사상을 대조하면서 검토해, <장자는 교배학에 있어서의 조형의 일부이다>를 밝히고 싶다.
 배광학을 형성론적으로 파악할 때 다음을 지적할 수 있다. (1) 「독서자」는 「중세의 작」이지만, 소코는 만년 정론한 교배학의 구축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2)소배학은 『육경』을 중심으로 하지만, 「세인 장자를 모르고, 무엇을 능가하는 육경을 찬양하냐」라고 하는 교수의 이야기가 보여준 것처럼, 그 때 장자는 근본적인 위치에 있다. (3)교배학은 <탈유입법>의 경향을 분명히 포함한 이유는 장자가 한비자에게 '가교'되어 있기 때문이다. (4) 「기질불변화」설은 장자의 「인성론」에서 한비자의 「인정론」으로의 변용에 의한 것이다.

 사상의 내용에서 말해도, 장자와 교배학과의 「결정적 차이」를 말하는 것은 어렵고, 보다 깊게 보면, 양자의 유사점이 떠오른다. (1) 확실히 장코는 (교배학과 달리) 수신과 치국을 「연속하고 있다」. 그러나 장자의 수신적 표준은 畢竟先天的 도덕이 아니라 '례'이다. (2) 확실히, 徂徠는 「인성론」이 「무용」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는 실질적으로 장자·성악설과 비슷한 가까운 것을 가지고 있다. (3)장·후「성인론」은 반드시 다르지 않다. 장자의 '길의 극'의 생각에는 처음에는 '성인을 위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는 시사가 내포되어 있다. (4)소코는 「공·나」미분화라고 말해진다. 그러나 실은 소코는 "공의를 통해 사욕을 ​​이긴다"고 말하고 있다. 이 '공의'에 대한 강조는 '정치 우위론'이며, 그 의미에서 나와 분화시켜 공을 시작하는 측면을 포함하고 있다.


 
가모 마연의 자연관과 정치 사상
미야기 교육 대학 혼고 다카모리
 도쿠가와 사상사에 있어서의 국학적 사유의 등장은, 도쿠가와 사상사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일본의 사상사에 있어서도 최대의 사건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도쿠가와 시대에 체계적으로 수용된 유학을 총체적으로 비판하고 그것과는 이질적인 세계상을 형상화해 보였기 때문이며, 또한 거기서 획득된 사유의 틀은 그 이후의 사상 전개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과 동시에, 근대 일본의 이데올로기적 지주가 되어, 지금도 일본의 사회를 안쪽에서 구속하고 있는가 보이기 때문이다.

 그 사유의 틀은, 한편으로는, 인간이나 사회의 자연의 발견에 의해 유교의 규범주의, 도덕적 리고리즘을 「인작」으로서 비판해, 인간의 욕망을 인간의 자연으로서 해방하는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의 고전을 전거로서 “일본의 자연”을 읽어내, 사람들의 의식과 행동을, 일본적 자연(=천황제)안에 둘러싸려고 하는 것이기도 했다.

 거기서 이 보고에서는, 국학적 사유의 선구자인 진연을 대상으로 거기서 읽힌 인간·사회 및 일본의 “자연”의 실태를 밝히면서, 그것과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진연에 의해 비판 된 유학으로의 회귀가 아니라 국학적 사유 자체를 상대화하는 관점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고 싶다.


 
혼다 이명의 "타인"인식
중앙 대학 대학원 미야타 준
 혼다 이명(寛保三~文政三)은 근세 후기 사상가이며, '중상주의'적 경제 정책과 전세계적 시야를 담은 경 여론을 주창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번 보고에서 주제로 하는 것은 이명의 경 여론을 구축하는데 있어서 필수 불가결한 '타인 인식'이다. 항상 일본국과 일본인의 장래의 분들에 대한 제언을 저술 속에 표현해 나가는 자세의 외측에는 일본국, 일본인 이외의 모든 것을 상대화한다는 작업을 실시해, 한층 더 상대 화된 것을 이해하는 방법론이 취해지고 있다. 이상의 과정을 거쳐 일본국의 장래의 방식이 시사되는 것이다. 이들을 전제로 일본국, 일본인 이외의 '타인'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하는 명제에 대치함으로써 이명의 경여론을 읽는 것이 가능해진다. 구체적으로는 「토인」등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어떠한 문맥으로 표현되고, 어떻게 이해되어, 장래의 일본의 분들에게의 이론적 근거의 한 요소가 되어 있었는지의 여부 를 고찰하는 것이다.
이명의 경 여론의 세계적 전개를 「식민지 개척」을 목적으로 한 것으로 하면, 정복해야 할 「다른 사람」이란 어떠한 존재였는지, 어떤 이유를 바탕으로 일본 사람과 '타인'과의 차이를 인식하고 있었는지 등이 보고의 중심이 된다. 게다가 이상적인 ‘타자’=서양(서역)의 이명에 있어서의 모습도 정복되는 ‘타자’와 어떻게 관련되어 오는지까지 밟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요미야마 요시의 경학과 사학
도호쿠 대학 대학원 타마다 노리코
 요시야마 요(아나가 9·1780~텐포 3·1832년)년은 에도시대 후기에 활약한 역사가·시인이다. 산요의 역사 사상에 대한 선행 연구에서는, 주로 「일본 외사」나 「일본 정기」에서 볼 수있는 「하늘」의 관념이나 「세상」의 관념에 주목하여, 그 관계성을 고찰해, 사론의 특색 를 규정하는 것이 시도되어 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산요의 사상을 밝히기 위해서는, 사론의 내용을 문제로 하는 것에 멈추지 않고, 산요가 왜 사학에 뜻했는지, 또 사론의 집필에 어떤 의의를 발견했다고 하고 있었는지, 라고 하는 학문적 태도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종래 이 점에 대해서, 충분한 고찰이 이루어져 왔다고는 말하기 어렵고, 산요의 아버지·춘수에서 산요로 하는 세대 교체를 「경학으로부터 사학에」이라고 하는 도식으로 파악해, 산요가 경학을 거부해, 사학에 뜻했다고 하는 견해가 제시되기에 멈추고 있다. 하지만 유거 중인 서한으로 사학에 뜻한 경위를 확인하면 산요는 경학을 중시하고 있으며, 그 후에도 일관되게 경학과 사학을 겸수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산요는 경학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었을까. 이 문제를 해명하는 것은, 사론의 집필에 어떠한 의의를 찾아내려고 하고 있었는지, 라고 하는 사학의 문제에 관련되는 중요한 열쇠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본 발표에서는 이상을 근거로, 아직 충분히 고찰되지 않은 경학에 대한 견해는, 「묘자」의 경문 해석을 이용해 고찰하기로 한다.


 
요시다 마츠네와 후기 미토학의 거리―「안정 3년 8월」을 둘러싸고
도호쿠 대학 대학원 키리하라 켄진
 "향하여 8 월 동안, 한 친구에게 계몽되어, 희미하게 시작하여 깨달음. 에 천조를 우울하게 비웃음.…
 1856(안정3)년 11월에 저술된 이 「또 읽는 칠칙」은, 요시다 마츠네의 강렬한 자기 비판을 표명하는 문서이며, 거기에는 국방론(해방론)으로부터 존왕 논에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겐료 케이 씨)를 볼 수 있다고 말해져, 한층 더 이 「전회」의 사상적 내용은 병학으로부터 미토학에의 「전회」로서 파악되는 것이 적지 않다 . 그러나 이 '전회'를 가져온 '이치토모' 즉 안예의 일향승묵은이 후기 미토학에 대해 극히 비판적인 인물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본 보고에서는 묵묘과의 서간논쟁이나, 투옥·유죄기에 있어서의 송음의 독서록인 「야산옥독서기」에 나타난 동시기 이후에 극적인 변화를 보이는 그 독서 경향 등을 검토하는 것으로 , 「팔월」에 있어서의 「전회」의 해석을 재차 묻고, 한층 더 송음의 존왕론의 성격을 파악하는 것을 주제로 하는 것이며, 동시에 이것은 막 말기에 있어서의 존추론이 도막론으로 전개해 가는 과정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전 3대사 귀환주 해고
아이치 현립 대학 오노 데
 오미쿠지의 대명사라고도 말할 수 있는 전 3대사 미나미이지만, 이 제일부터 백번까지의 모든 것을 1권에 모은 것이, 에도 시대에는 있었다. 서명도 장정도 다종다양하지만, 이들을 총칭하여 전 3대사 고토모토라고 부르고 있다. 현존하는 것도 심각하고 많아 당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다종다양한 전 3대사 미나모토이지만, 거기에 기록된 제일부터 백번에 해당하는 백수의 한시에 대해서는 공통되어 있다. 그리고 이 백수의 한시에서 운세가 도출된다. 이 운세에 대해 자세하게 해설한 주해가 대부분의 전 3대사 고토모토에는 기록되어 있다.

 이 주해를 상세하게 비교해 가면, 많은 고전이 그렇듯이, 전 3대사 고토모토도 주해에 의해서 여러 종류의 계통으로 유별할 수 있는 것을 깨닫는다. 그 중 하나에 『 텐포 신선영 대대잡서 만력대성』 이후 당시의 가정백과라고도 할 수 있는 대잡서에 계속 합각되어 있던 전 3대사 고토모토의 계통이 있다.

 이 계통의 전 3대사 미야모토의 주해는, 대잡서를 통해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지고 있었지만, 여기에는, 운세와는 바꿀 수 없는 결정 붙여진 것이 아니라, 오미쿠지를 추한 자의 윤리적 행위의 여하에 따라 길에도 흉에도 크게 전환한다는 흥미로운 사상이 전개되고 있다.

 본 발표에서는 그 사상사적 의의 및 배경에 대해서도 함께 생각해보고 싶다.


 
무사를 둘러싼 이야기와 "무사도"
아이치 현립 대학 히구치 히로조
 본 보고는 '무사도'라는 소재를 '에도'와 '근대'와의 왕환 속에 두는 것을 통해 역사, 혹은 역사표상의 문제를 사상사적으로 생각해 보려는 것이다.
 근대로부터의 호출에 대해서는, 이노우에 테츠지로와, 와쓰지 테츠로 및 그 후계를 2개의 시대의 무사도의 호출로서 다루어 간다. 우선 이노우에가 실시하는 무사도의 전통화가 제국의 시작 시기에 말해지는 것에 대해, 와쓰지들은 총력전기의 무사도를 형상화한다고 하는 시대적 컨텍스트를 확인해, 동시에, 어떻게 와쓰지 등 이노우에를 비판(「진짜 무사도」를 제시)해, 이노우에의 무사도론을 볼 가치가 없는 아류로 해 갔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고 싶다.

 게다가 에도기의 무사도는 어떤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하는지, 전후의 일련의 잎은해석을 참조하면서 생각해보고 싶다. 거기서의 방법적 과제는, 「진짜의 무사도」가, 와쓰지 이후 반복 제시되는 존재 방식을 문제화하는 것을 기획하고 있다.

 게다가 에도기의 사무라이의 사회적 존재 방식을 둘러싼 이야기를 일단 현대적인 호출의 틀에서 떼어내고 사무라이의 존재 방식을 둘러싼 당기의 디스코스 안에 두어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 미리 사도와 무사도로 나누어져 있던 것은 아닌 에도기의 무사의 존재 방식을 둘러싼 제표상을, 그 혼재의 존재방 안에 되돌리는 것을 유의하는 가운데, 방법적 과제와 학설사적 과제에의 응답 가 교차하는 지점을 모색해 가고 싶다.

◆제3회장◆

 

니시다 철학에서 보는 송학적 전통
간사이대학 이노우에 카츠토
 근대 일본에서의 서양 철학의 수용은 일본의 <지>의 역사에서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전통적으로 길러져 온 우리나라의 학문·사상의 방식에 근본적인 반성을 촉구하는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메이지 시대의 사상적 전통을 생각할 때, 물론 불교나 국학의 존재는 무시할 수 없더라도, 사람들의 생활 양식 속에서 가장 직접적인 체험으로서 길러지고 있던 것은 무엇이라고 해도 유교적 소양 이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메이지 5(1872)년의 「학제」발포 후, 근대적인 초등학교가 창설되어 가는 가운데, 근세로부터의 살아남은 유자들은 스스로 한학원을 열고, 당시의 아이들에게 한학의 교양의 손잡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적어도 메이지 초기에 태어나 자란 사상가들의 대부분이, 정도의 차이야말로, 그 사고의 발상의 원점에 송유학의 영향이 농후했던 것은 염두에 넣어 둘 것이다. 메이지 3년생인 니시다 기타로(1870~1945)도 그 예외는 아니다.

 종래, 니시다 철학에서의 동양적 전통이라고 하면 독점적으로 임제 선, 혹은 대승 불교의 면만이 취해졌고, 주객 미분의 「순수 경험」론 및 그것을 근거로 한 종교 철학에만 한정되어 이해되는 싫음이 있었지만, 본 발표에서는 상기와 같은 시점에 서서, 이른바 선을 그 안에 포함하는 송유학적 전통을, 니시다의 사고 양식 안에서 보고 싶다.


 
「우치무라 감삼 불경사건」재고
미야기 학원 고등학교 이마타카 요시야
 1891(메이지 24년) 1월 9일, 제1고등 중학교 촉탁 교원 우치무라 감조는, 동교의 교육 훈어 봉독식에 있어서, 그 <전서>에 대한 경례가 부족했다고 비난되어, 사실상 해직이 되었다. 연구사상 남아 있는 문제는 ‘이날 굳이 참석한 우치무라(다른 그리스도자 교원 두 명은 신중을 기하여 결석)의 각오여 무엇’이다. 과연 '봉배'를 거부하는 결의를 굳히고 식에 임한 것일까. "전혀 마음의 준비가 없었다"라는 우치무라 자신의 고백에서도 오히려 우치무라는 천황을 경애하고 칙어의 정신을 봉사하는 "애국적 그리스도자"로서의 <양심>에서 자신 나름의 <경례 >를 이루려고 해서 식에 참렬하고 있던 것이 아닌가. 그러나, 식이 진행되는 가운데, 「불교나 신도의 의식으로 조상의 위패 앞에서 하게 되어 있는 같은 방식으로」머리를 내려야 한다(「예배적 저두」)라는, 우치무라에게 있어서는 예상치 못한 '봉배' 이해가 교두로 나타난 것에 따라, 이 '봉배'는 '자신의 기독교적 양심을 해치게 된다'는 기침의 판단이 일하고, 우치무라는 '저두'를 ' 망설이게 된 것이다. 확실히 「사건」의 전날, 스스로가 속하는 삿포로 교회 퇴회를 가장 친한 친구인 미야베 가네고에게 보내고 통고하고 있는(이유에는 접하지 않고), 삿포로 교회에 누를 미치는 어려움의 배려로부터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음날의 칙어봉독식을 향한 각오보다는 천황신격화를 인정할 수는 없다. 각오>를 나타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시가중창의 유교교육주의 비판
본드 대학 개빈 마사코
 메이지 20년대 언론계는 조약 개정을 둘러싸고 지금까지 보지 못한 활발한 논쟁을 전개했다. 근대서양식 교육을 받은 메이지기의 2세대 지식인은 정부의 서양열국에 대한 연약한 태도를 강하게 비판했다. 시가중창은 이런 체제비판을 한 혼자로, 국수주의자, 또 도쿠토미소봉의 지적 라이벌로 알려져 있다. 또한 시가는 지리학자이자 저널리스트이자 당시에는 드물게 남양을 방문할 수 있었던 사상가 중 한 명이었다.
 시가와 도쿠토미는 일본의 공업화에 관해서 여러가지 공통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가는 '보수적', 도쿠토미는 '혁신적'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보수', '혁신' 이분설 때문에 시가는 당시에도 지금도 '보수주의자'로 보이는 경우가 많다. 시가 자신은 「보수주의자」라고 불리는 것을 싫어하고, 메이지 30년에 교육 칙어가 발포되면, 칙어를 편찬하는데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보수주의자」 특히 유교주의를 강하게 비판했다 . (*여기서 「유교주의자」라고 하는 것은 교육 칙어를 편찬하는데 영향력을 갖고, 또 메이지 43년 이후 국민도덕 운동을 추진한 학자, 특히 이노우에 테츠지로를 가리킨다.)

 또 메이지 43년 이후 유교주의자가 국민도덕운동을 일본 전국에 추진하려 할 때도 지매는 강하게 비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수 제창이 잘 알려진 반면, 시가의 유교주의자 비판이나 교육에 관한 생각은 별로 연구되지 않았다. 이 연구에서는, 메이지 43년 이후, 국민도덕 운동을 추진한 유교주의자를 시가가 강하게 비판했을 때에 초점을 맞추고, 시가의 비판을 분석하는 것으로 다음의 두 가지 점을 밝히고 싶다. 하나는 유교주의자는 시가의 지적 활동의 라이벌이었던 것. 또 하나는 시가는 새로운 일본 교육의 본질을 깊이 우려한 사상가였다는 것이다.

 시가는 남양에서 서양문명의 퇴폐된 부분을 목격했기 때문에 무차별적 서양문명의 채용에는 반대로 급속히 변화하는 세계정세에서 일본의 생존과 외국으로부터의 신용은 교육에만 기대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세계 정세를 이해하기 위해 지리학을 교육의 필수 과목에 도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서는 교육기관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저널리즘을 통해 일반 국민을 계몽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믿었다. 이와 같이 교육론은 시가의 사상활동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분야이다. 이 연구에서는 지금까지 상세히 연구되지 않았던 시가의 교육상의 견해에 특히 초점을 맞추고 싶다.


 
미야케 유키미네의 「개」의 문제
도시샤 대학 나가츠마 미사오
 본 보고는 미야케 유키미네의 「개체」를 파악하는 방법을 주로 러일전쟁 후 그의 시론을 통해 고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닛신전쟁, 심지어 러일전쟁의 승리로 국가적 독립을 확보하겠다는 민족적인 위기의식이 이완된 결과, 메이지유신 이후의 국시였던 ‘부국강병’ 노선이 민심의 구심적 원리 로서 충분히 기능하지 않게 되어, 특히 청년층 사이에서는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희박해져, 개인적 생활에 강한 관심을 보이는 경향이 보였다. '우리는 무엇인가'에 대해 고뇌하고 내향적이고 정신적 가치를 탐구하는 '번지 청년', 거기에 통속적이고 물질적인 가치를 우선하는 '성공 청년'이 러일전쟁 후에 많이 등탕했다 .
 미야케 유키미네는 '자만해져 번민 흥분'이라는 문장을 발표하고 청년층에서 볼 수 있는 '번지'의 유행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실업지세계' 등에서 처세훈이나 청년론을 반복 발표 하고 청년들의 '성공'에 대한 동경 붙여 언급했다. 설령은 내면적인 세계에 갇히려고 하는 '번지 청년'을 꾸짖고, 또 자기의 경제적 이익만을 목적으로 하는 '성공 청년'에 대해서도 엄격히 비판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정부가 교육칙어의 지도를 철저화함으로써 국민정신을 강화하려고 한 것에 대해서도 정면에서 반대한 것이다. 이 보고에서는 설령의 시론을 검토함으로써 그의 '개인주의'관, 나아가 개인과 국가·사회의 문제에 대해 설령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밝히고 싶다.

 

초기 정교모에 보는 제국 일본의 의식-1889년 협약 개정에 있어서의 대응을 단서로
오사카 대학 대학원 미즈노 모리
 본 발표의 목적은 18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전반기에 있어서의 정교사의 사상을 「세기전환기」라고 하는 세계사적인 동시대성·상호관련 속에서 밝히려 하는 것이다. 열강 국가에 의한 세계적 팽창이 일으킨 노동력 이동, 이민이나 내지잡거 문제, 혹은 서양 사상이나 문화의 유입이 일본의 지식인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염두에 두면서, 일본의 「국수」를 시작함으로써 제국으로서의 일본을 말하려고 했던 정교사의 지식인의 사상의 일단을 밝히고 싶다. 거기서 밝혀지는 것은, 서양에 대한 후진 제국 일본으로서의 콤플렉스, 당시 동아시아에서 강대한 프레즌스를 가진 청국에의 무서움, 혹은 사회 진화론에 뿌리를 둔 인종주의와 차별이라고 하는 착밀한 자/타 인식 의 존재이다. 이번에 특히 주목하는 것은 1889년 오쿠마 시게노부 외상에 의한 조약 개정 협상을 둘러싼 정교모의 조약 개정 반대의 주장이다. 협약 개정 반대가 불평등 조약을 둘러싼 서양 국가에 대한 반발뿐만 아니라 노동력으로 유인한다고 두려워한 중국인에 대한 반발이기도 한 것은 동시에 세계를 석권하고 있던 중국인 노동 자문제가 동시대적인 문제로서 일본의 지적공간을 규정한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그러한 상황에서 말할 수 있는 자/다른 인식을 나타냄으로써, 닛신전 전기=「건전」이라고 자리매김해 온 당해의 사상을, 서양의 제국의 닮은 모습을 시도한 제국 일본의 사상으로 재지정하는 것이 목표가 된다.

 
지하라 화산의 서양 경험
쓰쿠바 대학 대학원 미즈타니 고토
 러일전쟁 종결 얼마 안되는 1905(메이지 38)년 9월, 지바라 화산(1870~1952)은, 「만조보」 해외 통신원으로서, 약 5년에 걸친 구미 외유의 길에 갔다. 러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은 '일등국'의 동참을 이루고, 국민은 국제적 동심을 강화시켰지만, 한편 개국 이후의 염원이었던 국가적 독립의 실현은 전후의 신상황에 대응해야 할 다음 국가적 과제의 설정을 요청했다. 이런 상황 하에서, 지하라는 20세기 초의 세계 정세를 어떻게 실견하고 무엇을 획득했는가. 본 발표의 과제는, 이 외유기의 경험이, 귀국 후의 그의 사상과 행동을 규정하는 큰 요인이었다고 재평가하는 것이다. 오른쪽과 같은 과제에 대해, 본 발표에서는 우선, 「만조보」에 전해진 해외 통신 기사의 분석을 통해, 지바라의 서양 경험을 검증하는 것으로, 러일 전후에 일본의 장래적인 방향 성이 어떻게 모색되었는지를 밝힌다. 다음으로 돌아간 후, 그가 「민본주의」를 조기에 제창해, 일본의 사회 상황에 대응해 가는 계기를, 외유중에 획득한 동서 문명에 관한 인식이나 「생활 문제」에의 관심에 주목하면서 고찰한다. 러일 전후에 있어서의 외유의 사상사적 의의를 둘러싼 것은, 「다이쇼 데모 클래시」기에 있어서, 「익진주의」고부키의 아래, 잡지 「제3제국」을 창간해, 국민의 실생활에 근본 타치헌 정치의 실현을 창도한 지하라의 사상의 중심구조를 해명하는 것으로 이어지면서, 당기의 사상사연구에서 하나의 새로운 전망을 열 수 있다.

 
다케고시 요사부로의 「자치」와 「인민」
쓰쿠바 대학 대학원 오무라 쇼토
 닛신 전쟁 후에 간행된 「세계지 일본」의 주필이었던 타케고시 요사부로는, 1901년에, 「국체, 정체, 인민에 관한 개념의 확고한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인민독본」이 되는 저작 세상에 물었다. 열강에 의한 중국 분할이 진행되는 이 시기에, 타케고시도 일본이 열강이라고 묻는 제국으로 상승 전화하는 의식을 고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저작은 제국 일본을 지지하는 국민의 일체성을 창출하는 것만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인민」의 정치적 참가의 확대에 기초해야만 메이지 헌법에 의해 조출된 국가가 내실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시가가 위해 출판된 것이었다. 다케고시는 이 저작의 제목에서 "일본국은 자신에게 서서, 꼭 일본인민을 만들지 않을 수 없어"라고 "인민"창출에의 초조감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러한 타케고시의 생각은, 그가 1885~87년에 마에바시에 체재해, 가미모 청년의 「자치」의 에너지를 햇볕으로 함으로써, 내면적으로 양성된 것으로 있다고 생각된다. 군마현은 1887년 전후에 자생적으로 청년회가 조직되어 폐창 연설회 등도 활발히 전개된 땅이다. 그래서 본 발표에서는 닛신 전쟁 이전 시기에 초점을 맞추고 다케고시가 가미모지에서의 원체험에 맞춰 평민주의를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밝히고 싶다. 게다가 그가 이 땅에서 안은 '인민' 창출이라는 과제의식이 1891~92년에 집필한 '신일본사'에서 유신을 파악하는 방법에 관여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논하고 싶다.


 
세기전환기 일본의 사상
고베 대학 우노다 나오야
 도쿠토미 소봉은, 이른바 「전향」후의 저작 「시무이치가언」(다이쇼 2〔1913〕연간)에 있어서, 「오늘의 평민주의」에 대해, 대략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오늘의 평민주의'는 과거의 '개인적 평민주의'가 아니라 '온건한 사회주의를 함축하는', '사회적 평민주의'여야 하며, '내에 사회주의를 행하 , 밖에 제국주의를 행은 헷갈리기 위한 것이다」라고. 소소에서의 이러한 사상적 입장의 변화―그 자신의 말에 의하면 「진화」―는, 통상, 「평민주의에서 제국주의로의 「전향」」이라고 이해되고 있지만, 이 이해는, 또 하나 하나 "사회주의"라는 요소를 통합하는 형태로, 재고될 필요가 있다.
 내가 이 점을 강조하는 것은, “소봉은 닛신 전쟁을 계기로 평민주의에서 제국주의로 전향했다”는 단선적인 이해로는, 동시대의 구미의 사회 제국주의 사상의 수용이라는, 그의 사상적 입장의 변화를 강하게 규정하고 있었을 것의 계기가 보이지 않게 되어 버린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본 보고에서는, 영국을 비롯한 구미 제열강의 국내외의 정치 정세·사상 상황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입장으로부터, 소봉에 있어서의 사상적 입장의 변화라는 문제에 대해 재검토하고, 나아가 닛신 전후에 있어서의 평민 주의의 행방이라는 동석에 대해서도 ―소봉의 개인사에 환원해 버리는 것과는 다른 형태로― 생각해 보고 싶다. 이러한 작업은 세기전환기의 세계적 동시대성 속에서 근대 일본의 사상적 전개를 재검토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식민지주의와 「학지」―대만 원주민에 관한 법학적 언설을 중심으로
아이치 교육 대학 마츠다 쿄코
 「…
 1895년, 닛신 전쟁의 「전리품」으로서 할양된 대만. 그 말하자면 일본제국 최초의 '본격적' 식민지 경영에 있어서 인류학, 역사학을 비롯한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학지'가 동원되어 가게 된다.

 논리성과 합리성을 기조로 한, 이른바 「이성」의 언어를 조종하는 법학적 지식도 그 예외는 아니었다. 한편, 엄격한 법문 해석이라는 스타일을 취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그 해석의 본연의 안에, 식민지·대만 및 식민지 주민을 둘러싼 당기의 사고의 본연의 자세가 새겨져 있다고 해도 좋다.

 본 보고에서는 세기전환기에 대상시기를 설정하고 당시 '생싹'으로 불린 대만 원주민에 관한 주로 법학적 지식에 뒷받침된 언설의 본연의 자세를 비판적으로 논하고 싶다. 그 때, 개개인의 사상의 탐구에 노력하기보다는, 오히려, 보기, 상반되는 견해라는 양상을 취하는 다양한 의견이, 총체로서 어떤 언설 공간을 구축하고 있는지의 해명에, 분석의 역점을 두는 것에 의해, 식민지주의와 「학여」의 관련에 관한 하나의 범형을 제시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保田與重郎의 「전향」―나카노 시게지와 고바야시 히데오 사이
아이치 교육 대학 와타나베 와야스
 고등학교 시절의 호타가 어떠한 형태로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은 일찍부터 알려져 있다. 한편 초기의 호타가 엄격히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을 '전향'이라고 부르는지 여부와는 별도로, 거기에 명백한 사상 전환이 있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지지를 표명한 「단가는 어디로 가는가?」(『炫火』1931년 1월)는 압도적인 나카노 시게하루의 영향으로 집필되었다. 동시에 호타는, 「사상」1930년 12월호에 공모 논문으로서 게재된 하야카와 아유노스케의 「비평은 어디에 간다?」를 참조하고 있다. 하야카와 논문은 「다양한 디자인」으로 등장한 고바야시 히데오를 재빨리 옹호한 것으로, 하야카와 논문을 통해 호타는 고바야시의 사상을 접하고 있었다.

 1932년 3월 창간의 '고기토' 제1호에 게재된 호타의 '인상비평'은 습작 '단가는 어디로 가나?'라고 강한 공통성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 「인상 비평」에서는 나카노 논문이 몇가지 참조되고 있는 한편, 사키노 하야카와 논문이 여기에서도 참조되고, 덧붙여 코바야시 히데오가 직접 참조되고 있다. 1931년 1월부터 1932년 3월까지의 사이, 호타는 일관되게 나카노 시게하루와 고바야시 히데오의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던 것을 알 수 있다.
 

 
전후의 일본 사상사의 전제―「실학」
이와테 대학 명예 교수 후지와라 츠카사
 전후의 일본 사상사 연구의 하나의 흐름은, 마루야마 마오오씨 「후쿠자와에 있어서의 실학의 전회―후쿠자와 유키치의 철학 연구 서설―」(쇼이치·3)에 끝을 발한다. 이후 겐료고씨의 실학사상연구, 스기모토 이사오씨의 실학사연구, 사토 마사스케씨의 양학사연구… 것으로 생각된다. 마루야마 논문은 적어도 두 점을 지적했다.
 하나는 후쿠자와의 「실학」관에는, 에도시대(봉건제, 안샨 레짐)의 「실학」의 본연의 방법이 메이지 개화기에서 윤리 핵심의 실학으로부터 물리 핵심의 실학으로 혁명적 전회를 나타냈다 것.

 2는 그 학문의 담당자를 생활인에게 두고, 「생활과 학문과의 결합 방법」이 「자연 질서와의 완전한 합일」로부터 「자연 과학적 학리에 의한 생활 영역의 개척」을 가져오는 「분투적 인간 (이념형 시민)」에의 혁명적 전회라는 것. …

 즉, 신실천적 학문(신윤리학)의 형성이라는 면도 가지고 있었다. 이 「후쿠자와에서 볼 수 있는 전회」는 전시대에 전제를 가졌는지의 여부의 검증이 전후 시작되고, 동시에 이 검증은 메이지 개화기 후의 제2의 개화로 될 때까지의 전제적 검증을 가져왔다. 「실학·실업형 인텔리전티어」의 분석도 그 나타날 것이다. 이러한 사상사의 검증상 다시 한번 쇼와 전기를 묻고 싶다. 원재료의 하나로서는 마루야마 논문에도 인용된 니시신이치로의 『동양윤리』를 거론해 본다. (본 발표는 관계해 온 실학 자료 연구회가 20주년을 맞이하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
 

 심포지엄 “동아시아 유교-21세기 사상사 연구” 
 
 
 


중국에서 송명리학 연구의 방법, 관점과 그 추세

베이징 대학 첸 오 
―, 일본의 학계와 달리, 중국의 학회에서는 보통, 「유교」가 아니고 「유학」이나 「유가」의 명칭을 통해 공자가 열린 그 사상의 전통을 가리킨다. 요우유란 이후 '신유가'를 통해 송요 이후 유가의 사상을 가리키는 사용법이 점점 늘어났지만 많은 학자들은 여전히 ​​관용으로 '이학' 또는 '도학'의 명칭으로 송명시대의 주류 유가 사상을 부르고 있다. 중국의 교육과 연구 체제 속에서 유가와 유가 사상에 듣는 연구의 다수는 대학의 철학학부와 철학연구소에서 진행되고 있다. 따라서 중국의 유학연구와 「유학」에 대한 이해는 내용에 있어서는 주로 그 「사상」을 중시하고, 연구방법에 있어서는 「철학」적 방법론이 주도된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
2, 20세기 후반 50년간 '문화대혁명'에 종말을 고하는 것을 경계로 중국 연구자들은 전후 두 가지 다른 시대를 경험해 왔다. 전반의 모택동 시대에 있어서는, 이데올로기의 입장으로부터 유자가 역사화·종교화되어 유가의 사상도 혁명의 저해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유가 사상과 송명리학은 엄격한 비판을 받고 있었다. 그 때문에 유가 사상과 송명리학에 대한 학술적인 연구도 영향을 받고 있었다. 포스트 '문혁' 시대 이후 유학에 관한 연구의 모습이 바뀌었다. 즉, 유학에 대한 태도는 전면 비판으로부터 변증법적 긍정이 되고, 유학에 대한 연구는 「철학의 연구」로부터 「문화의 연구」로 확대해, 유학을 「외재적으로 파악하는 것」으로부터 「내재적 이해
」 로 깊어 왔다는 것이다.

셋째, 당연 이래의 중국사회의 특질 및 그것이 송명리학과의 관련이라는 문제에 관해서는 역사학자의 의견은 일치하지 않는다. 개인으로서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싶다. 즉, 중당 이후 귀족장원제 경제가 중소지주와 자경농이 중심으로 하는 경제형태로 전환되어 중소지주와 자경농계층 출신 지식인이 과거제도를 통해 '사대부'의 주체가 되었다. 사회의 변천과 문화의 방향전환과 연동하여 이것이 신유가 출현의 역사적 배경이 되었다. 그런데, 역사 해석상의 기계적 역사 유물론의 실패를 거쳐, 중국의 연구자의 대부분은 마이크로 역사에 대한 「대서술」에의 추구를 방엽해, 크지만 사용물이 되지 않는 토론을 피하자 했다. 현재의 유학연구자는 '사상' 자신에 대한 세밀한 연구를 보다 중시하고, 사상가의 정신상의 추구, 가치의 이상, 철학적 사고, 인생의 체험 등을 무겁게 보고 있다. 또한 유가의 경전 해석으로서의 전통과 덕성윤리로서의 전통을 중시하고 유가와 사회집단의 윤리와의 관계, 유가와 세계(글로벌적) 윤리와의 관계를 중시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연구를 바탕으로 서양의 철학자와 신학자와의 대화를 요구하고 있다.

넷째, 중일한 등 동아시아 국가들에게 역사상 한때 유학이 있었고 주자학이나 양명학이 있었다고 해도 각 나라에 있던 유학 사이에 큰 차이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각국의 유학은 각각의 사회에서의 지위도 다르다. 정교한 비교 연구가 필요합니다. 일본의 유학과 한국의 유학을 연구할 때, 중국의 유학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면, 일, 한유학의 특질과 그 발전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다. 같은 일로 한일의 유학을 모르면 진정한 의미에서 중국 유학의 특질을 파악하기 어렵다. 일본 학자들은 동아시아 문화에 대해 널리 연구해왔다. 이에 비하면 중국의 연구자는 일본과 한국의 역사상에 있던
유학에 대한 연구는 아직 부족하다. 이 면의 연구가 힘차게 진행해 나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사회와 유교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일본학연구소 이케 명관

  왜 조선은 전통적으로 유교적 문관사여였는가. 신라통일(668년) 이후 조선은 문장이 우위를 차지하는 사회로 전환하기 시작했다고 생각된다. 그것에 대해 큰 이유로 두 가지 올릴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이 두 가지는 상관관계가 있는 것은 물론이지만, 하나를 지정학적인 이유로 하고, 다른 하나는 지정문화적인 이유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거대한 중국 주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중국에게 군사적인 위협이 아니어야 한다. 그리고 조선은 중국에 문화적으로 정체화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1393년 조선왕조가 시작된 뒤 주자학이 지배 이데올로기로 군림했다. 그러나 주자학 일변도라고 해도 적어도 그 사회가 지배층과 민중으로 분열해, 대립하기 쉽고, 유자들도 사관하는 자와 재야의 자로 분열하기 쉽다는 것을 주목하지 않아 해야 한다. 재야의 유자들이 정권비판의 입장에 섰을 때는 민중이 호응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조선기 말기에 가까워짐에 따라 주자학적 전통에 서서도 개혁적 정책륜이 특히 재야의 유자들 사이에서는 번성했다. 이윽고 외국의 침략이나 밀려오면 저항적인 감이론 또는 구국론이 강해졌다. 그러나 문치사회에서 부국강병의 정치권력과 국민적 조직을 만들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렇게 근대에 대한 대응에서 아침군은 실패했다고 할 수 있지만, 전통적인 유교적 에이토스라는 것은 절의를 내건 저항에는 강한 것이었다. 그것은 한국의 현대사까지도 관철하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것이 21세비에 있어서는 어떤 길을 따라갈 것인가 하는 것은 큰 사상사적 과제이다.

 만약 동아시아라는 틀에서 생각한다면 적어도 사상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20세비는 무가 우위를 차지한 시대였다. 그것은 또한 전통적인 화이 질서를 뿌리 내리고 파괴하는 것이었다. 21세기는 그것을 다시 역전시키고, 문장의 우위를 구하고, 게다가 세로의 질서가 아니라 옆의 질서를 구축하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그것에 과연 유교나 현대적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21세기의 신유교 연구
도요 대학 요시다 공평
 21세 순으로 동아시아의 신유교를 어떻게 연구할 것인가가 발표자에게 부과된 과제이다. 이것을 논의할 때, 신유교를 다음과 같이 정의해 두고 싶다. 유교의 역사는 원시 유교·신유교·신유가의 3기로 구분할 수 있다. 통시대적으로 유교는 (1)경학(2)형이상학(3)심성론(4)종교의례(5)정치사상을 내용으로 한다. 신유교를 집대성한 주자학은 성선설을 핵심으로 하는 심성론과 정치사상을 두 초점으로 하는 곳에 특색이 있지만, 경학·형이상학·종교 의례에 대해서도 정해진 언설을 남기고 있다. 원래 이 주자학은, 재노의 시대 비판의 철학 사상이었지만, 명대 이후에 과거의 정통교학이 되어 좁은 해석이 유통되면, 성선설의 재생을 의도해 양명학이 등장한다. 양명학은 심성론을 중심으로 주자학을 비판하고 있지만, 그 유교 이해는 많은 것을 주자학에 의존하고 있다. 신유교 사상운동의 주변에는 주자학·양명학에 포섭할 수 없는 유교도군이 있지만 지금은 주자학·양명학을 신유교의 쌍벽으로 대표하게 한다.
 이 신유교는 중국의 송대에 불교·도교에 맞서 전개된 복고운동의 성과이다. 이 신유교 사상은 청대 말기에 과거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공허의 교학이었기 때문에 구 중국 지식인의 사고양식에 심각한 영향을 주었다. 한반도 이씨 조선에서는 과거의 교학으로서 배타적으로 활용되어 생활의 사상으로 실천되었다. 일본에서는 본격적으로 수용된 것은 에도자키요 이후이다. 다만, 무사가 문관의 직무를 세습한 일본에서는 과거는 실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이나 조선처럼 주자학이 교학사상으로서 기능하지는 않았다.

 중국·조선·일본에 있어서의 신유교에 대해서는, 첸래씨·이케아키칸씨·마에다 공씨의 발표에 있기 때문에, 나는, 일본에서의 신유교 연구사의 특색에 대해 말한 후에, 사견을 말하고 싶다.

 일본의 신유교 연구사는 3기로 구분된다.

제1기·에도 시대. 중국·명대 후기의 출판물이나 주륙 논쟁의 영향하에 선진적 사상으로 받아들여 신유교 사상이 사색할 때의 중심적 자양원이 되었다.
제2기・메이지・다이쇼・쇼와 전기. 시대 사조의 주역의 자리를 양학 사상에 양보하면서도 국민을 신민화하는 교육 제도 속에서 신유교가 국체론 속임수로 침투했다.

제3기·쇼와 후기 이후. 유교사상이 구봉건사회를 지지한 사상의 하나라고 규탄되어 공교육의 장에서도 '진보적' 사상계에서도 추방되었다. 개인적으로 교양으로 배웠다.

 21세기의 과제. (1) 20세기의 연구가 등반시해 온 것을 재검토하여 연구의 기초를 굳히는 것. (2) 철학 자원으로서 활용할 수 있는 것이 있는지 여부를 검토하는 것.

 
'무국' 일본 속에서 주자학의 역할
아이치 교육 대학 마에다 공부
 중국·조선·일본의 동아시아 지역은 유교문화권이라고 불린다. 그 가운데 일본은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한때 환영받은 「유교 르네상스론」에 있어서는, 일본은 유교문화권의 최선진국·모범국으로서 논의되는 한편, 「유가의 도덕교는, 고왕 지금부터 曾해 우리 국민의 도덕생활을 지배한 것 가 무가츠타」(쓰다 좌우길 『유교의 실천도덕』)으로 여겨져 일본이 유교문화권에 속하는 것조차 부정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반되는 주장이 가능한 것은 원래 유교문화권 속에서 일본의 특이한 성격에 기인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은 일의 일면을 이데올로기적으로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이 유교문화권의 일원으로서 어떤 공통성을 갖고 또 반대로 유교의 나라로서 자타적으로 인정한다. 같은 점에서 차이가 있을지, 동과 다른 양면을 아울러 보는 것이 요구되고 있다.
 본 보고에서는 이 차이에 대해서는, 근세 일본에 독특한 자국 자민족 우월 의식인 「무국」관념에 주목하고 싶다. 일본은 중국이나 조선과 같은 독서인 관료의 '긴소매의 나라'가 아니라, 두 병의 사무라이가 지배하는 무위의 나라다. 그러므로 유교의 덕치주의는 현실 정치에는 도움이 되지 않으며, 또 무사의 용장한 '야마토혼'에도 반한다. 한층 더 신공황후의 「삼한 정벌」이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의 장거야말로 「무국」의 증거이며, 일본에는 그러한 해외에 웅비하기에 충분한 절대적인 군사력이 있다고 한다, 도쿠가와의 평화' 속에서 양성된 일종의 환상이다. 이런 '무국' 관념이 유교문화권에 속하면서도 그 속에 전면적으로 감싸는 것을 거부하는 사상적인 근거가 되었던 것은 간과해서는 안 된다.

 또 보고에서는 에도시대의 유교, 일에 영자학의 과연 적극적인 역할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고 싶다. 그것은 과거제도가 없는 '무국' 일본 속에서 쓸 수 없는 '유민'으로 여겨질 수 있는 유자가 자기의 비소함을 근거로 하면서 만들어낸 사상적인 가능성이다. 구체적으로 주자학을 진지하게 배우는 자는 자력구제적인 '성선'설과 보편적인 원매를 내세워 억압적인 국가인 '무국' 사이에 일정한 긴장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일을 논하고 싶다.

 본 보고에서는 이와 같이 '무국' 속에서 주자학의 보편적 원리로서의 가능성을 논하는 것으로 중국이나 이씨 조선과의 동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단서를 제시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