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만원
지만원
글의 중립성에 대한 이의가 제기되었습니다. (2022년 6월) |
| 지만원 池萬元 | |
|---|---|
| 국방부의 국방연구원 예하 책임연구위원 | |
| 임기 | 1981년 12월 1일 ~ 1987년 1월 31일 |
| 대통령 | 전두환 |
| 총리 | 국무총리 |
| 장관 | 국방부 장관 |
| 차관 | 국방부 차관 |
| 신상정보 | |
| 출생일 | 1942년 11월 20일(83세) |
| 출생지 | 일제 강점기 조선 강원도 횡성 |
| 학력 | 미국 해군대학원 이학박사 |
| 경력 | 군인, 교육인, 정당인 경희대학교 겸임교수 서울특별시 시정개혁위원 자유민주연합 당무위원 겸 전임위원 국가안보정책연구소 자문위원 자유당 고문 겸 당무위원 |
| 정당 | 무소속 |
| 본관 | 충주(忠州) |
| 배우자 | 최현숙 |
| 자녀 | 1남 4녀 |
| 웹사이트 | 지만원의 시스템 클럽 트위터 |
| 군사 경력 | |
| 복무 | |
| 복무기간 | 1966년 ~ 1987년 |
| 근무 | 백마부대, 국방연구원 |
| 최종계급 | |
| 지휘 | 베트남 전쟁 당시 포대장 등 역임 |
| 주요 참전 | 베트남 전쟁 |
| 상훈 | 1971년 인헌무공훈장(무공파월전공) 등 |
지만원(池萬元, 1942년 11월 20일 ~ )은 대한민국의 군인 출신 군사평론가이다.
본래 대한민국 전 대통령인 김대중 편에서 대북과 군사 분야 등에 대해 자문하였던 인물이다.[1]
이력
육군사관학교를 22기로 졸업,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고 1987년 육군사관학교에서 육군 대령으로 예편하였다. 본관은 충주(忠州). 1981년과 1997년 검찰 기록 18만 쪽을 5년간 연구하여 5.18 민주화운동은 폭동임을 증명하기 위해 그의 저서와 온라인 칼럼에서, 5.18 민주화운동이 '북한의 특수군이 침투'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유튜브에 그에 대한 주장이 담긴 동영상과 게시글을 올리고 삭제되자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했으나, 1심과 항소심에서 모두 패소했다.
군인 시절에는 1967년부터 1971년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기도 했고, 1977년부터 1981년까지는 미국 해군대학원을 수료하고 귀국하였다. 국방연구소 연구원 시절에는 율곡 사업 중 방공자동화사업의 문제점과 부품의 결함을 지적하기도 했다. 예편 후에는 미국 해군대학원 부교수, 국방연구원 책임연구위원을 역임했다.
정치 경력으로는 시스템미래당 대표로 활동하였고, 1990년부터 사회발전시스템연구소 소장, 시스템클럽의 대표, 대한민국대청소 오백만야전군의 의장 등을 맡고 있으며, 언론활동도 하고 있다. 교육 경력으로는 USNPS 부교수, 인하대학교 교수, 경희대 겸임교수를 지내기도 했다.
약력
생애 초기
출생과 소년기
1942년 11월 20일 강원도 횡성군에서 태어났다. 동생만은 교육을 시켜야 된다는 넷째 형의 노력으로 횡성군 일신국민학교(현 일신초등학교)에 입학, 그 뒤 일신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 면사무소 소재지 인근에 있던 지제중학교로 진학했다.[2]
학창시절
그 뒤 학교를 중퇴했으며 형들을 따라 서울로 이주, 서울 동대문구 장안평에서 독방을 얻어 노동일을 하는 큰 형 집에 머무르며 신문도 배달하고, 철판을 두드려 자동차를 만드는 이른바 서비스공장도 다니고, 건설현장에 가서 여러 가지 일을 하기도 했다. 그 뒤 서울 고흥중학교에 입학했으나 2학년, 3학년을 다니다가 중퇴했다.[2]
그 뒤 용두동에 소재해 있던 서울 한영중학교에서 졸업장을 받고, 서울 한영고 야간반 과정에 입학했으며 1961년 한영고 야간반 과정을 졸업하였다. 고등학교 3학년 때 그는 서울대학교 수학과를 지망했지만 성적 미달로 떨어졌다.[3] 그 뒤 고전소설, 위인전, 영웅전, 사상계 등 잡지로 나날을 보냈다. 1961년 가을 육군병원 신체검사에서 키가 작다는 이유로 불합격할 뻔하였으나 박정희를 찬양하며 자유당을 지지선언 하여 공로를 인정받아 겨우 통과, 육군사관학교에 입학 할 수 있었다.
군인 활동
장교 임관과 월남전 참전
그 뒤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였다. 그에 의하면 육사생도 재학 당시 학과공부보다는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군의 만행에 관련한 책과 일본의 메이지 유신의 위인들의 유작 들을 많이 읽었다고 한다. 1966년 2월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를 22기로 졸업하고 육군소위에 임관되었다. 초임 소위로 부임했을 때 그는 '부대에 배치된 지 몇 개월 만에 부하들을 못살게 구는 고참 대위를 구타했지만 징계를 면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한다. 육군 중위로 진급한 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였다.
1967년 ~ 1971년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여 백마부대 포병연대에 배속되었으며, 중위 재직 중 포병 대대 포병화력을 담당하는 사격지휘담당장교, 사격통제담당장교로 보임[4]된 그는 베트남 파병 중 그는 투이호아 지역 전투에 참가하였다.
1969년 초 귀국, 5월 육군관리참모부 예산회계처장 전속부관을 역임했다. 한편 귀국 직후 우연한 일로 당시 고위 정치인과 관련있던 정인숙의 오라비를 구타했다가 국무총리 정일권이 당시 육군참모총장 김계원에게 "지만원 소위를 처벌하고 결과보고 할 것"을 주문했는데 정복을 입고 국무총리실로 찾아가 담판을 내고 정인숙의 집으로 찾아가, 정인숙과 담판을 하여 없던 일로 했다 한다. 이를 두고 후일 그는 기적이라 회고하였다.[5]
월남전 재참전과 귀국
1969년 9월 1일 (임)대위로 진급했으나 다시 베트남 전쟁에 참전, 사이공 파월한국군 사령부 전속부관이 되었다. 이후 대위로 재임 중 포병연대 관측장교, 화력지휘담당장교, 작전장교, 월남군청연락장교, 포대장(중대급) 등을 역임하고 1971년에 귀국했다. 귀국 직후 육군대학 전략정보과정(1년)을 수료하였다.
이후 육군 제9보병사단(9사단) 제52포병대대 제2포대장, 1972년~1974년 합참정보국(현, 정보본부) 해외정보 수집담당장교, 1976년~1977년 국방 PPBS 도입 연구요원 등을 역임하고 1977년부터 미국에 유학을 다녀왔다.
미국 유학과 학위 취득
장교로 복무하던 중 미국으로 유학, 수학의 기초과정부터 연구하기 시작했으며 미국 해군대학원(Naval Postgraduate School)에서 행정과학(Administrative Science) 석사과정(1974년~1975년)을 마치고 1975년 미국 해군대학원 행정과학석사를 받았다.
1975년 해군대학원 박사과정에 진학, 경영과학(Operation Research) 박사학위(1977년~1980년)를 취득[6][7][8] 하고 귀국하였다. 당시 그는 '3년이라는 짧은 기간 내에 시스템 수학의 기초과정부터 시작해서 박사 논문까지 끝내야 했기 때문에 그에 따르면 첫학기부터 중압감으로 인해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으며 이는 위장병을 더욱 악화시켰다고 한다.
연구원 활동과 예편
1980년 미국 체류중 안기부 정책보좌관에 임명되었다. 1981년 귀국, 미국 유학을 다녀온 뒤 1981년~1987년 국방부 국방연구원 책임연구 위원 등을 역임했다.[6] 중령으로 재직 중 국방연구원에 있으면서 최전방의 철책선과 해안과 육해공군 레이다 기지들을 답사, 시찰하였다.
대령으로 복무 중 1985년 정부의 지시로 율곡사업 10년을 평가하던 중 방공자동화사업이 돈 낭비라는 점을 지적하였다. 방공자동화사업 담당자와 발주 업체 관계자들을 만난 그는 부품에 하자가 있음을 밝혀내고 이를 보고하였다. 이로 인해 국방부장관과 공군참모총장이 전두환 대통령에게 불려가 호된 질책을 당했고, 국방차관, 국방부 기획실장 등이 그를 국방연구원에서 축출하려 하기도 했다. 그 뒤 육군사관학교로 발령받았다가, 1987년 육군사관학교 예비역 육군 대령으로 예편[6]하였다.
연구, 평론 활동
연구, 사회단체 활동
1987년 미국 국방성에 연구원으로 6개월간 근무하다가 1987년부터 1989년까지 미국 해군대학원(NPS, Naval Postgraduate School) 부교수를 역임했다. 1990년 1월 미군 해군대학원 부교수를 그만두고 귀국, 한국 국방연구원 책임연구위원이 되었다. 그해 한국사회발전연구소 소장이 되고 저서 "70만경영체 한국군 어디로 가야하나"를 집필하여 1991년 8월 김영사에서 출간하였다. 이어 《J의 사관 생활: 멋》, 《군축시대의 한국군 어떻게 달라져야 하나(상.하)》, 《신바람이냐 시스템이냐》, 《문민 IQ》 등의 저서를 집필하였다.
1993년 8월 6일 군사평론가협회 창립에 참여하고 부회장에 피선되었다. 1994년 7월에는 계간잡지 군사논단의 출간에 참여하였다.[9] 1993년 7월부터 11월에는 세계일보에 율곡 사업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논설을 발표하였다.
1994년 김대중, 김상현을 만났으나 뒤에 그들과 결별하였다. 1996년 사회발전시스템연구소 소장이 되고, 군사평론가협회 부회장직을 겸했다. 1998년 2월에는 말지 1998년 2월호에 지만원 박사가 기고한 "15조 국방비 30% 거품을 걷어내라"는 IMF 특집 기사에 율곡사업 관련 비평을 했다가 2월 10일 전 방위실장 이청남, 중령 나승수 등으로부터 말지 편집부장인 최진섭 등과 함께 서울지방법원에 고소장을 냈지만 1999년 9월 30일의 1심과 11월 7일의 2심 판사로부터 무죄를 선고했다.
1998년 7월 2일부터 1999년 10월까지 서울특별시 시정개혁 자문위원, 1998년 11월 1일부터 1999년10월 30일까지 국가안보정책연구소 자문위원과 국정원 자문위원 등을 역임했다.[6] 1999년 12월 10일에는 군사평론가협회와 베트남전우회(회장 채명신) 공동주최로 은행연합회회관에서 “한국군의 베트남참전 재조명” 주제로 주관한 학술 세미나에 발제자로 참여하였다.
국민의정부, 참여정부 비판 활동
1999년 2월에는 한겨레 21의 베트남 전쟁에 대한 "미군보다 잔인했던 용병"이라는 기사를 발표하자 이를 논박하면서, 일부의 언론과 잡지에 칼럼을 기고했다. 1999년 9월 인하대학교 교수와 경희대학교 겸임교수에 임용되었다. 그 후에는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를 비판하는 글과 칼럼을 게시하면서 조갑제, 서정갑, 박홍 등과 함께 진보적 네티즌들로부터 공격당하였다.
2000년대 초에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북한 인민군의 특수부대가 침투하였다는 견해를 비롯하여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민주화 운동인가 여부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여 논란이 되었고, 5.18 기념재단과 관련 단체들에게 소송을 당했다.
2001년 5월에는 당시 국방부 장관과 국회 국방분과위원장 천용택 등의 간호사관학교 폐지론에 적극 반대하여 간호사관학교 폐지를 무산시켰다. 2002년에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비판을 이유로 5.18 관련 단체들로부터 광주지검에 기소됐다.
2005년 5월, 경인방송 출연 대담에서 만약 전쟁이 발생한다면 "5, 6월에 전쟁이 날 확률이 90% 이상이라고 본다"라고 주장하였다.[10]
대선 예비후보 출마
2007년 시스템미래당을 창당하여 대표를 하고, 같은 해에 17대 대선 대통령예비후보 출마를 선언했다. 사회발전시스템연구소 소장, 군사평론가, 시스템클럽 대표, 2011년 9월, 대한민국대청소 오백만야전군 단체를 창설, 의장에 재직 중이며, 칼럼과 광고 발표, 토론회 패널 참여 등도 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 이후
2009년 12월 11일 한국군의 아프가니스탄 파병에 관련해 소규모를 보내면 탈레반의 공격목표가 되어 위험하므로 1개 사단의 병력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명박 정부를 비판했다.[11]
범죄전력
기고문을 통해 자신에게 70건 가량의 전과가 있다 주장했으며, 징역형이 3건이고 나머지는 벌금형이라 밝혔다.[12]
이명박 관련 허위사실 유포
한나라당의 대통령 후보자였던 이명박의 아버지가 자서전과 달리 쌍놈이며 친어머니가 일본인이고 이상득과는 배다른 형제라는 의혹 및 병역기피 의혹을 제기했다가 피소되어 1심에서는 징역 8월의 실형,[13] 2심에서는 같은 형량에 집유2년을 선고받았다.[14]
김대중 관련 허위사실 유포
2013년 1월 29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김일성과 짜고 북한 특수군을 광주로 보내 광주시민이 학살당했다'는 주장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명예훼손으로 재판에 넘겨진 지만원에 유죄판결을 내려졌다. 재판부는 "북한과 모의해 5·18광주시민학살을 저지른 사실이 없는데도 믿을 만한 객관적 근거 없이 추측으로 허위사실을 적시해 그의 명예를 크게 손상시켰다"고 밝혔다.[15]
논란
일제시대 발언
- 2005년 3월 8일, 노컷뉴스와의 인터뷰〈"조선이 먹힐 짓 해서 일본에 먹힌 것 아닌가"〉[16]에서 〈한승조 前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 명예교수의 발언]〉[17]에 동조하는 입장을 밝혀 비난 여론이 일어나기도 했다.
- 2005년 3월 10일, 지만원과 진중권은 CBS TV(스카이라이프 162번, 지역 케이블) 시사프로그램 'CBS 저널' 녹화방송을 통해 1시간 20여분 동안 '친일 비판자는 좌익?’이라는 주제를 놓고 서로의 주장을 펼쳤다. 지만원은 "미국이 일본에 원자탄 쏴서 일본이 항복하니까 해방이 된 것이지 만약 러시아에 먹혔다면 일본이 항복해도 한국은 러시아로부터 독립 못했다"며 "그것이 천만다행인 거지 한 교수님을 그렇게 매도할 일이 아니다"고 말했다. 또 "한 교수의 글 제목 자체가 한일관계의 새로운 지평을 열자는 거다"며 "100년 전에 있었던 과거의 불행한 역사를 부추겨서 반일감정을 가지면 국익에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면서 "배울 부분이 매우 많은 글"이라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진중권은 "한 교수님 논문 전문이 지금 인터넷에 떠돌아 다니고 있다"며 "한 교수가 러시아를 지적한 것은 일본 우익들이 러일전쟁 승리의 추억을 갖고 있는 것을 드러낸 것"이라며 "이는 일본이 아시아를 구원했다는 대동아 공영권의 ㅡ근거로 사용한 일본 파시스트의 생각"이라고 맞받아쳤다. 또 "미국이 일본에 원자폭탄을 터트리지 않았으면 항복을 늦게 했을 테고 전쟁이 본토로 확대되고 오키나와에서처럼 일본인 수천 명 사망했을 것"이라며 그렇다면 "원자폭탄은 일본 국민의 축복이며 원자 복탄이라고 해야 하나?"고 말했다. 정리멘트에서 지만원은 "그 분(한승조)이 이번에 아주 훌륭한 일 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18]
-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측은 지만원이 한승조 교수를 위한 해명의 광고문을 실으려 하자 ‘일본의 독도 망동’으로 반일 감정이 극에 달해 있는 상황에서 친일 발언을 옹호하는 광고를 싣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판단, 광고 게재를 거절했다.[19]
일본군 위안부 관련 발언
- 지만원은 자신의 홈페이지에 '위안부 문제를 해부한다(상)'라는 제목의 글에서 "위안부 중 80% 몸팔아 생계유지 창녀"라는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켰다. '수요시위 참가하는 할머니들의 건강과 혈색이 너무 좋아보인다.'고 이유를 들면서 '가짜 위안부가 아니냐?'면서 의혹을 제기했다. 그는 위안부를 `일본군 위안부'와 `종군 위안부', `정신대'로 구분한 뒤 "진짜 피해를 본 `일본군 위안부'는 전체 20% 정도이며 어려운 형편에 스스로 성을 판 종군 위안부가 80%쯤 된다더라"고 썼다.[20]
- '위안부 문제를 해부한다(하)'에서는 '위안부'라는 개념에 대해 그는 "일본군에게 강제로 끌려가 성을 빼앗겼거나, 스스로 성을 팔았던 어린 여성들"로 정의하고 "성을 강제로 빼앗긴 여성들은 주로 미처 시집을 가지 않고 있다가 끌려간 여성들이고, 성을 판 여성들은 글자 그대로 ‘왜 색시’였다"라고 말했다. 지만원은 가짜와 진짜 위안부를 구별하는 방법에 대해 "진짜 위안부 할머니들은 창피하다며 숨어서 산다 한다"면서 언론에 모습을 비치는 위안부 할머니들을 모두 '가짜'라는 입장을 밝혔다. 한편 "내가 진실의 일단을 폭로하자 언론들이 떼거지로 지만원 죽이기에 또 나섰다"고 주장하기도 했다.[21]
- 지만원은 “대한민국이 부끄럽다. 위안부 놀음, 이제는 접어라”라며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와 나눔의 집이 몇명 안 되는 할머니들을 앵벌이로 삼아 국제 망신을 시키고 다닌다”, “일당 3만원을 받는 가짜일 수 있다”는 발언을 해서 논란이 일기도 했다.[22][23]
문근영 가족 관련
- 2008년 11월 14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기부천사 좌익세력의 작전인가?>란 글을 통해 연예인 문근영씨의 사회기부활동을 일부 특정세력에서 외조부 류낙진의 빨치산 행적과 연관시킨다고 비판했다.[24] 그는 그해 4월 YTN과 MBC 등에 문근영의 선행을 칭찬하던 기자와 앵커들이 문근영의 외조부 류낙진을 언급한 것을 문제삼았다.
- 2008년 11월 18일, 진중권은 포문을 열고, 언론에 "70년대 반공 초등학생이 쓴 글 같다[25]"고 비난했다.
- 논란의 와중에 진중권으로부터 비난을 받게 되자 지만원은 명예훼손으로 그를 법원에 고소했지만,[26][27] 지만원은 1심과, 항소심에서도 패소했다. 법원은 "진씨의 발언을 허위사실 적시로 보기 힘들다"며 "일부 표현에서 인격모독 가능성이 있다고 해도 발언 경위 등을 감안할 때 풍자와 해학의 측면이 있다"고 판결했다.[28]
- 2010년 6월 1일, 지만원이 ‘문근영은 빨치산의 손녀’라고 쓴 자신을 비방한 진보 성향의 진중권씨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항소심에서 패소했다. 재판부는 “진씨의 글을 허위사실로 보기 어렵고, 지씨가 일부 표현에서 인격모독을 느낄 가능성이 있다고 해도 진씨의 발언 경위 등을 감안할 때 풍자와 해학의 측면이 강하다”며 피고의 손을 들어줬다.[29]
- 2010년 11월 12일, 지만원이 진중권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대법원은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30]
- 2009년 3월 7일, 검찰은 고소를 기각, 진중권은 7일 진보신당 홈페이지에 띄운 글을 통해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서 편지를 받았습니다. 1. 정보통신망 (명예훼손) --- 혐의 없음, 2. 명예훼손--- 혐의 없음, 3. 모욕--- 죄가 안 됨, 이런 내용입니다”라고 밝혔다.[31]
- 2009년 4월 17일 서울남부지법 민사15부(재판장 김성곤 부장판사)는 지만원 씨가 “내 발언을 왜곡해 보도했다”며 SBS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했다고 밝혔다.[32]
- 2009년 5월 13일, 지만원의 발언과 관련하여 ‘지만원 박사가 국민 회초리 맞은 이유-지만원박사 대오각성 건강한 보수로 거듭나야’라는 제목으로 보도한 브레이크뉴스의 김환태 논설 위원과 화해하였다. 여기서 지만원은 사실 관계를 오해한 것을 바로잡은 것이라고 밝혔다.[33]
- 2009년 10월 17일, 언론사들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지만원은 일부 승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사회통념상 참을 수 있는 정도를 넘어 지씨에 대한 사회적 평가를 저해하는 모욕행위라며 지씨를 비난한 기자들에게 200만원의 배상책임을 물었다.[34]
- 2009년 11월 3일, "지만원은 만원이나 냈나?" 라고 비난했던 블로거 임모씨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승소했다. 재판부는 "지씨의 글이 문근영 개인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볼 수 없음에도 이를 고의로 혹은 부주의 때문에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함부로 비판했다"고 지적했다.[35]
4·19 민주혁명 폄하 및 왜곡 관련
- 지만원은 4·19 폭동 참가자에 대해 "시위 한번 한 것 가지고 무얼 그리 나대는가? 제일 하기 쉬운 게 혈기를 가지고 시위장에 나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솔직히 젊은 혈기에 시위에 나서서 돌을 던지고 고함을 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다."고 비판하면서, 3.15 부정선거에 대해 "부정선거도 시대의 산물이다. 부정선거는 지금도 있을 수 있다."고 평가했다.[36]
- 지만원은 4.19 학생 시위를 직접 지도했다고 증언한 사람이 두 사람이나 된다면서 한 사람은 이석이고, 한 사람은 김용규라고 주장했다.[37][38]
- 지만원은 모두 북한이 만들어준 전략과 전술에 기초하였다면서 3.15부정선거에 대한 불만을 4.19폭력시위로 점화시킨 자들은 3.15부정선거에 대한 국민적 불만을 대규모 시위로 점화시킨 존재가 바로 간첩 이석이 이끄는 간첩부대였고 한다. 10월 대구폭동에 참가한 이석은 서울에 있으면서 학생시위를 지도했다고 주장했다.
- 지만원은 "최루탄은 곡사포처럼 공중으로 쏘지 사람의 얼굴을 조준하여 직사포처럼 쏘지 않는다. 그런데 김주열군의 눈퉁이에는 최루탄이 아주 깊이 박혀 바다 속에서 오랜 동안 파도에 부딪히면서도 빠져 나오지 않았다."면서 과학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라고 했다.[36]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왜곡 폄하 및 허위 사실 유포 관련
- 2002년 8월 16·17일 잇따라 동아일보와 문화일보에 "대국민 경계령! 좌익세력 최후의 발악이 시작됩니다"는 제목의 광고를 냈다. "쌀, 마늘사건 등으로 농민을 분노케 해놓고, 거기에 노동세력, 홍위세력 등 좌익들이 불을 댕기면 광주사태의 확대판이 나올 수 있다. 광주사태는 소수의 좌익과 북한에서 파견한 특수부대원들이 순수한 군중들을 선동하여 일으킨 폭동이었다. 소요사태를 일으켜놓고 계엄령을 선포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선거도 없고, 우익들이 잡혀가고, 김정일이 무혈로 서울을 장악하는 사태가 올 수 있다." 이란 내용의 광고로 논란을 일으켰다.[39] 같은해 12월 목포과학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이동춘 등으로부터 피소당했다.[40]
- 지만원은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검찰에 구속된 뒤 2003년 1월 1심에서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 판결을 받았다.[41]
- 2003년 8월 오마이뉴스는 '지만원과 늑대'라는 제목으로 지만원의 광고를 비판하는 기사를 썼다. 이후 지만원은 오마이뉴스의 기사 때문에 명예가 훼손됐다며 오마이뉴스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패소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인터넷 기사에는 다소 자극적이고 과장된 표현이 있지만 당초 지씨의 신문 광고가 5.18민주화운동을 `소수의 좌익이 북의 사주를 받아 일으킨 폭동'이라고 본질을 왜곡한 이상 그런 심한 비난과 반발을 유발했다고 봐야 한다"고 밝혔다.[41][42]
- 2008년 5월 5.18 관련단체들은 그와 전사모(전두환 전 대통령을 사랑하는 모임), 역사학도 등에 대한 법적 대응절차를 거쳐[43] 고소한 바 있다.[44][45] 기타 지만원의 시스템클럽의 논객도 이와 유사한 주장을 하고 있다.[46]
- 2011년 5월 5·18 민주화운동 기록물의 유네스코 기록 유산 등재가 최종 심사 결과만을 남겨 두었을 때 지만원은 5·18이 북한군의 학살이라고 주장하면서 유네스코 본부에 반대 청원서를 제출했다.[47] 하지만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는 당연하게도 지만원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만장일치로 5·18 기록물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했다.[48] 알다시피 5.18 민주화운동은 역사적으로 증명된, 그리고 역사적으로 중요한 대한민국의 역사임이 틀림없기 때문에(당연히 지만원 같은 역사 왜곡자는 폭동이라고 거짓주장하지만) 유네스코가 지만원 같은 역사왜곡자의 주장을 받아들일 리 만무하다.
- 2012년 12월 27일, 대법원은 5.18 민주유공자가 "5.18은 김대중이 일으킨 내란"이라고 주장한 지만원을 고소한 사건에 대해 "특정인을 지칭하지 않아 집단표시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결내렸다. 재판부는 "5.18 민주화운동은 법적 및 역사적 평가가 확립된 상태여서 지만원의 게시글을 통하여 5.18민주유공자나 참가자들에 대한 기존의 사회적 평가가 근본적으로 바뀔 수 있다고 보기 어렵다"면서 "지씨가 특정인을 지칭하지 않아 집단표시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김대중이 일으킨 내란'은 신군부 수장이자 29만원밖에 없다던 그 전두환 및 그 추종세력들이 자신의 독재 권력 유지를 위해 선동한 주장일 뿐이며 최종적으로 내란이 아니라고 법적으로, 역사적으로 결론이 지어졌다. 또한 집단표시에 의한 명예훼손이 법적으로 아닐 뿐, 5.18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부정하고 폄훼한 것은 사실이다[49][50]
- 2016년 5월에 5.18 민주화 운동을 비방했다는 관련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리고 법원에서 5.18 민주화 운동과 관련된 유족들에게 거센 항의를 받았다.[51]
- 지만원은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강릉지역 무장공비 침투사건의 북한군 책임자였던 김동원 대좌가 위관급 군관 시절 광주로 파견와서 광주 시민들을 선동해서 폭동을 일으켰으며 그 공로로 공화국영웅을 수여했다고 주장했다.[52] 그러나 김동원은 1980년 첫 공화국영웅을 수여한 것은 맞으나 공화국영웅을 수여한 날짜가 3월 28일이므로 광주 사태의 공훈으로 공화국영웅을 수여했다고 볼 수 없다.
전현직 대통령 관련
- 2006년 지만원은 시스템 미래당 대표로 재직하던 중에 이명박 당시 대선후보가 병역면제를 위해 횟가루를 마셨으며, 모친이 일본인이고 형인 이상득과는 이복형제라는 주장을 하여 2007년 1심에서 실형을,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이로 인해 2007년 대한민국 대선과 2008년 대한민국 총선에 출마하지 못했다. 또한 지만원은 이명박에 대한 주장 수사 도중 홈페이지 서버 압수수색 당시 과잉수사를 받았다며 국가를 상대로 1억 5000만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으나 패소했다.[53]
- 2009년 5월 26일 지만원은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인내에 한계를 느낀다"라는 제목으로 "노무현은 파렴치한 범죄를 저질렀다. 거기에 더해 노무현 자신도, 부인도, 식구들도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조소받는 거짓말을 했다"면서 "패가망신의 도피처로 자살을 택한 것"이라고 비난하였다. 이어 "사회 전체가 미쳐 돌아가고 있다. 운명을 다한 노사모들이 시체를 가지고 유세를 부리며 단말마적 행패를 부리는 것도 못 봐주겠다"며 "무대 뒤로 사라졌던 역대 빨갱이들이 줄줄이 나와 마치 영웅이나 된 것처럼 까불어대는 모습도, 감옥에 있던 노무현 졸개들이 줄줄이 기어 나와 얼굴을 반짝 들고 설쳐대는 모습도 참으로 꼴불견들"이라고 말했다.[54]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 관련
- 2008년 11월 20일 동아일보는 "지만원 씨는 문근영 씨를 다룬 두 개의 글에서 “동아일보 광고 해약사태는 간첩들이 중앙정보부를 사칭해 벌인 사건”이라는 황당무계한 주장을 하고 있다. 엄혹했던 그 시절 간첩들이 광고주들을 서울 한복판(서빙고동) 아지트로 차례로 납치한 뒤 고문해 동아일보 광고를 해약하도록 했는데 억울하게 중앙정보부가 뒤집어썼다는 것이다. 정상이라고 보기 힘든 상황 인식이다."라고 비판하는 기사를 실었다.[55]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의해,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는 중앙정보부의 광고주 압박으로 일어난 사건이었음이 밝혀졌다.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1974년 12월 중앙정보부는 광고주들에게 강제로 서약서를 쓰게 하는 방법으로, 박정희 정부에 비판적인 동아일보에 광고를 싣지 못하게 했다.[56]
김구 관련
- 지만원은 시국진단 8월호 및 방송 인터뷰에서 "김구는 따지자면 현대판 테러리스트 오사마 빈 라덴이나 사실상 마찬가지다"라고 말했다. 지만원은 좌익들이 이승만을 깎아내리고 김구를 추켜세운다면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김구 - 김대중으로 연결시키고 장준하를 과대 포장하고 이승만 - 박정희를 부정하려는 음모라고 주장했다.[57]
세월호 관련
- 2014년 4월 21일 지만원이 운영하는 시스템클럽과 트위터에 "세월호가 잘 기획된 음모"(음모론)라며 "좌익 진영이 대규모 폭동을 획책할 모양"(진영논리)이고, '시체장사'(고인 모독)란 표현으로 간접적으로 경고했다. 또 "대통령은 제2의 5·18 폭동(5.18에 대한 왜곡 발언)에 대비해야 한다"이라고 주장했다.[58][59][60] => 음모론 + 진영논리 + 고인 모독 +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왜곡 발언 등 망언 4종 세트를 만들어 낸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 지만원은 정몽준의 아들 정예선이 인터넷 상에 올린 발언-세월호 사건과 관련하여 우리나라 국민들이 미개하다고 인터넷에 올린 발언-이 문제가 되자 이를 옹호하고 나섰다.[61]
이러한 지씨의 여러 주장들은 시간이 흐를 수록 허위로 밝혀질 가능성이 높으며 역사 관련 주장들 역시 교과서이 수록될 일도 주류 사학계로 부터 수용될 일도 절대 일어날 일 없을 것이며 정치 관련 주장 역시 극소수 비이성적 집단 외에는 어느 정치 세력으로부터도 수용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저서
- 70만 경영체 한국군 어디로 가야하나(1990, 김영사)[62]
- 군축시대의 한국군 어떻게 달라져야 하나? 상.하(1991, 진원출판사)[63]
- J의 사관 생활: 멋(1992, 진원출판사)[64]
- 신바람이냐 시스템이냐(1993, 현암사)[65]
- 문민 IQ(1994, 경문사)[66]
- 북한의 핵을 읽어라(1994, 일본어판, 일본 삼일서적)[67]
- One Korea?(1994, 미국 후버연구소 공저)[68]
- 싱크로경영(1994, 생산성본부)[69]
- 통일의 지름길은 영구분단이다(1996, 도서출판 자작나무)[70]
- 추락에서 도약으로 -시스템요법-(1997, 도서출판 석필)[71]
- 국가개조 35제(1998, 21세기북스)[72]
- 시스템을 통한 미래경영(1998, 현암사)[73]
- 햇볕정책의 허실(1999, 일본 비지네스 출판사)
- 북한을 영구분단시키자(1999, 일본 덕간서적)[74]
- 한국호의 침몰(2000, 현암사)[75]
- 수사기록으로 본 12.12와 5.18 (2008, 도서출판 시스템)[76]
- 뚝섬무지개 (2009, 도서출판 시스템)[77]
- 시스템경영 (2009, 도서출판 시스템)[78]
- 솔로몬 앞에 선 5.18 (2010, 도서출판 시스템)[79]
- 제주 4.3 반란 사건 (2011, 도서출판 시스템)[80]
- 조선과 일본 (2019, 도서출판 시스템)
상훈
- 1971년 인헌무공훈장(무공 월남전 파병전공)
학력
가족 관계
- 부인 : 최현숙
- 아들 : 1남
- 딸 : 1녀
같이 보기
각주
- 이준규 (2019년 2월 19일). “DJ 편에 섰던 지만원, 왜 '극우 망언자'가 됐나”. 《노컷뉴스》.
- “보관된 사본”. 2013년 12월 1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0년 11월 2일에 확인함.
- “보관된 사본”. 2014년 12월 19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0년 11월 2일에 확인함.
- “보관된 사본”. 2009년 2월 23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0년 11월 2일에 확인함.
- “인생 파노라마”. 2014년 4월 2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3년 6월 2일에 확인함.
- (http://www.systemclub.co.kr/profile_2005.htm 보관됨 2009-01-26 - 웨이백 머신 시스템클럽)
- (http://oai.dtic.mil/oai/oai?verb=getRecord&metadataPrefix=html&identifier=ADA093257 보관됨 2009-02-04 - 웨이백 머신 "Developing Mathematical Models for Preliminary Internal Control Evaluations of Inventory Systems in Auditing"). 석사학위 논문
- (http://oai.dtic.mil/oai/oai?verb=getRecord&metadataPrefix=html&identifier=ADA093257 보관됨 2009-02-04 - 웨이백 머신 "Mathematical Models for Operational Availability"). 박사학위 논문
- "계간 「군사논단」출판회 군사평론가협 안보환경변화등 논의", 동아일보 1994년 7월 9일자 25면, 생활문화면
-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0991788 "5, 6월 미.북 전쟁 확률 90% 이상"-지만원씨)
- “인터넷 독립신문 : new”. 2014년 4월 2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0년 3월 13일에 확인함.
- “보관된 사본”. 2015년 4월 2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9년 10월 7일에 확인함.
-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112&aid=0000076887 이명박 병역ㆍ출생의혹 제기 지만원씨 실형)
-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52&aid=0000175792 '이명박 당선자 의혹 제기' 지만원 씨 집행유예)
- 'DJ 관련 허위사실 유포' 지만원, 집행유예 NEWS1 2013년 1월29일
- 지만원 "조선이 먹힐 짓 해서 일본에 먹힌 것 아닌가" 노컷뉴스 2005.3.8
- 한승조 교수 “일본 덕에 공산화 안돼” 한겨레 2005.3.4
- 지만원, "한승조, 그 분 이번에 아주 훌륭한 일 했다"
- 조선·동아, 지만원 광고 게재 거절 :: 네이버 뉴스
- 지만원씨 `가짜 위안부' 의혹 제기 파문
- 지만원 "진짜 위안부 할머니는 숨어서 산다"[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위안부 할머니 ‘외침은 계속된다’ 경향신문 2005년 12월 29일
- `지만원 망언` 일파만파
- 서재희 (2009년 11월 18일). “‘기부천사’ 배우 문근영, 악성 댓글 논란”. KBS. 2014년 4월 2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12월 28일에 확인함.
- http://www.cbs.co.kr/nocut/show.asp?idx=989445[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문근영 색깔론' 지만원, 진중권 명예훼손 고소”. 2007년 2월 10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3월 12일에 확인함.
- 임재훈 (2008년 11월 19일). “'지만원 3행시, 문근영 3행시'”. 뷰스앤뉴스. 2014년 4월 2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6월 30일에 확인함.
- 보수논객 지만원, 진중권에 항소심도 패소 노컷뉴스 2010년 6월 1일
- 보수논객 지만원, 진중권 상대 항소심서 패소
- “'문근영 색깔론' 지만원 손배訴 패소 확정”. 2022년 4월 19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0년 11월 12일에 확인함.
- '문근영 좌익'논란 지만원, 진중권에 '완패' 보관됨 2009-03-10 - 웨이백 머신,《노컷뉴스》 2009년 3월 7일
- “문근영 씨 비방은 색깔론” 지만원 씨 패소],《동아일보》
- 지만원 (2009년 7월 8일). “문근영사건 법정다툼서 아름다운 화해로”. 브레이크뉴스. 2014년 4월 2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12월 28일에 확인함.
- 지만원, 언론사 상대 손배소 승소 뉴데일리[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지만원은 만원이나 냈냐?" 30대에 유죄
- “보관된 사본”. 2013년 8월 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1년 5월 27일에 확인함.
- “인물과사건 > 5.18 > 17. 간첩의 배후 조종 없는 소요는 없다”. 2014년 3월 26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1년 5월 27일에 확인함.
- 뉴스타운 - 선진한국 바른언론 ▒ 뉴스타운의 역사는 대한민국 인터넷신문의 역사입니다[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오마이뉴스
- '5.18은 폭동' 발언 지만원씨 고발 오마이뉴스
- 지만원 씨, 오마이뉴스 상대 패소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지만원씨, 잘못했으면 다소 심한 보도 감수해야"
- “:: 한국언론 뉴스허브 뉴시스통신사 ::”. 2015년 10월 1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4월 27일에 확인함.
- 5·18 단체, 지만원씨 등 고소 왜곡·비방글 명예훼손 혐의 한겨레신문
- “:: 한국언론 뉴스허브 뉴시스통신사 ::”. 2014년 3월 2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4월 27일에 확인함.
- 시스템클럽
- 5·18운동, 유네스코 등재 '임박'…보수단체 저지[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인터뷰] 민주당 김영진 의원”. 2013년 12월 13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2년 11월 8일에 확인함.
- '5ㆍ18은 DJ가 일으킨 내란' 보수논객 지만원 무죄 연합뉴스 2013년 1월10일
- “"5·18은 DJ가 일으킨 내란" 주장 지만원 '무죄' 확정”. 2013년 12월 13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3년 2월 26일에 확인함.
- '5.18 비방' 지만원,법원서 피해자들과 몸싸움2016년 5월 20일, sbs 뉴스 민경호 기자
- 지만원의 시스템클럽
- '과잉수사' 주장 지만원씨, 국가상대 손배소 패소
- 안광호 (2009년 5월 27일). “‘盧 서거’ 극우인사들 독설에 네티즌 ‘뿔났다’”. 경향신문.
-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5&oid=020&aid=0002005513 누가 자신을 악플러라 하는가
- 2008년 10월 29일 YTN 보도
- 지만원, 그분을 알고 싶다. 노컷뉴스 2008년 11월 19일자
- 지만원, 세월호 참사에 “시체장사에 한두 번 당해봤는가” 경향신문 2014년 4월 22일자
- 지만원 “세월호 참사는 ‘시체장사’” “제2의 5·18반란” 망언 파문 한겨레신문 2014년 4월 22일자
- 지만원 "세월호는 기획된 음모" 보관됨 2014-04-24 - 웨이백 머신 머니투데이 2014년 4월 22일자
- 정몽준 아들 발언 반듯하고 어른스러워 서울신문 2014년 4월 24일>
- “70만 경영체 한국군 어디로 가야하나(1990, 김영사)”. 2008년 6월 2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3월 12일에 확인함.
- “군축시대의 한국군 어떻게 달라져야 하나? 상.하(1991, 진원출판사)”. 2008년 6월 2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3월 12일에 확인함.
- “J의 사관 생활: 멋(1992, 진원출판사)”. 2008년 6월 2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3월 12일에 확인함.
- “신바람이냐 시스템이냐(1993, 현암사)”. 2008년 6월 2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3월 12일에 확인함.
- “문민 IQ(1994, 경문사)”. 2008년 6월 2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3월 12일에 확인함.
- “북한의 핵을 읽어라(1994, 일본어판, 일본 삼일서적)”. 2008년 6월 2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3월 12일에 확인함.
- “One Korea?(1994, 미국 후버연구소 공저)”. 2008년 6월 2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3월 12일에 확인함.
- “싱크로경영(1994, 생산성본부)”. 2008년 6월 2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3월 12일에 확인함.
- “통일의 지름길은 영구분단이다(1996, 도서출판 자작나무)”. 2008년 6월 2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3월 12일에 확인함.
- “추락에서 도약으로 -시스템요법-(1997, 도서출판 석필)”. 2008년 6월 2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3월 12일에 확인함.
- “국가개조 35제(1998, 21세기북스)”. 2008년 6월 2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3월 12일에 확인함.
- “시스템을 통한 미래경영(1998, 현암사)”. 2008년 6월 2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3월 12일에 확인함.
- “북한을 영구분단시키자(1999, 일본 덕간서적)”. 2008년 6월 2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3월 12일에 확인함.
- “한국호의 침몰(2000, 현암사)”. 2009년 1월 30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10월 31일에 확인함.
- “수사기록으로본12.12와 5.18역사책 발간”. 2009년 2월 16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9년 3월 11일에 확인함.
- “뚝섬무지개 발간”. 2014년 9월 21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3년 2월 20일에 확인함.
- “시스템경영 발간”. 2014년 9월 21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3년 2월 20일에 확인함.
- 솔로몬 앞에 선 5.18역사책 발간[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제주 4.3 반란 사건 발간[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참고 자료
- 대한민국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증언을 통해 본 베트남 전쟁과 한국군:3,청룡부대 전쟁의 평가 및 교훈 통계 및 참고자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3)
외부 링크
- 대한민국 육군 대령
- 1942년 출생
- 살아있는 사람
- 충주 지씨
- 횡성군 출신
- 20세기 한국 사람
- 20세기 대한민국 사람
- 21세기 대한민국 사람
- 대한민국의 참전유공자
- 대한민국의 사회 운동가
- 대한민국의 언론인
- 대한민국의 극우 정치
- 대한민국의 공학자
- 대한민국의 반공주의자
- 대한민국의 베트남 전쟁 관련자
- 대한민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
- 대한민국의 군사 평론가
- 대한민국의 시사 평론가
- 대한민국의 블로거
- 자유민주연합 당원
- 자유민주연합의 정치인
- 대한민국의 대학 교수
- 인하대학교 교수
- 경희대학교 교수
- 육군사관학교 동문
- 미국 버지니아 종합군사학원 동문
- 미국 미주리 종합군사학원 동문
- 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
- 일본에 거주한 대한민국인
- 대만에 거주한 대한민국인
- 육군공병학교 동문
- 육군보병학교 동문
- 육군대학 동문
- 한영고등학교 (서울) 동문
- 전두환 정부
- 동교동계
- 대한민국 국방부 특별보좌관
- 미국 해군대학원 동문
- 인헌무공훈장 수훈자
- 대한민국의 음모론자
池萬元
この記事は広告・宣伝活動のような記述内容になっています。 (2024年9月) |
この記事は中立的な観点に基づく疑問が提出されているか、議論中です。 (2012年8月) |
| 池万元 | |
|---|---|
| 各種表記 | |
| ハングル: | 지만원 |
| 漢字: | 池萬元 |
| 発音: | チ・マノンまたはチ・マンウォン |
| ローマ字: | Ji Man-Won |
池 萬元(チ・マノンまたはチ・マンウォン、1942年11月20日 - )は、大韓民国の軍人、評論家。経営科学博士。江原道出身。本貫は忠州池氏[1]。韓国人の「国民情緒」に反する発言により、親日などと批判を浴びている一方で、竹島問題などに対する日本側の主張に反対している[2]。2023年1月12日、韓国大法院第3部(主審ノ・ジョンヒ大法官)は、5・18民主化運動に参加した市民は北朝鮮の特殊部隊であるとして名誉を毀損したことなどにより、池に対する懲役2年の実刑判決を確定した[3]。
経歴
- 1966年 韓国陸軍士官学校第22期卒業
- 1967-71年 ベトナム戦争出征
- 1972-74年 情報本部海外情報募集将校
- 1975年 アメリカ合衆国海軍大学大学院行政科学修士
- 1976-77年 国防企画計画予算制度導入研究員
- 1980年 アメリカ合衆国海軍大学大学院経営科学博士
- 1981-87年 国防研究員責任研究委員
- 1987年 陸軍予備役大佐
- 1987-89年 アメリカ合衆国海軍大学副教授
- 1990年- 社会発展システム研究所長
- 1998-99年 ソウル市是正改革委員。国家安保政策研究所諮問委員
主張
「親日派」への糾弾について
「時局診断」2004年8月号で日帝強制占領下の親日反民族行為真相糾明に関する特別法推進に対する主張を発表[4]。
- 反日独立運動家の金九は現代版に解釈すればウサマ・ビンラディンのような人間であり、国を経営できる人間ではない。実力が足りないながらも李承晩大統領に嫉妬した人間である[4]。
- 偉人と傑作は時代の産物であり、その時代に誕生した最も立派な偉人は朴正煕であり、その時代の傑作は維新(維新体制)だった。しかし、何の能力もないアホどもが100年前に日本に占領された時、『誰が頭が良くて日本の陸軍士官学校に行き、誰が東京帝大に行ったか調査する』と大声でわめき散らしている。金大中と盧武鉉は大韓民国の恥である[4]。
- 歴史を評価するためには何が間違っていたのかを評価すべきで、誰が間違っていたかを評価してはならない。歴史の評価は学者たちが行うもの。現在の一部の政治家たちの行動はお門違いであり越権である[4]。
慰安婦問題について
2005年4月ホームページ上に「慰安婦問題を解剖する」という論文を発表[5]。
- 日本大使館前で毎週水曜に行われている抗議集会に参加する元挺身隊の女性たちは偽者である。日本の最高裁判所が確実に日本軍慰安婦だったと認めたシム・ミジャ(沈美子)さんが認める日本軍慰安婦だった女性は33人で、このうち現在デモをしている女性は1人もいなかった。テレビでよく見かける女性の場合は日本の関連団体が偽者とし保証金の支給さえ拒絶している[5]。
- 1944年がおそらく従軍慰安婦に連れて行かされた最後の時点であるはずで、当時15歳以上だったならば、現在は少なくとも78歳以上になったはず。最近、テレビで見る元慰安婦の女性の中には、それほど高齢でもなく健康も良さそうで、声に活気あふれる方もいる[6]。
- 本当の従軍慰安婦は全体の20%に過ぎず、その大半が厳しい経済事情のため自ら性売買を望んだ人だとした[6]。
韓国挺身隊問題対策協議会はこれらに対し「挺身隊の女性たちの名誉棄損と人権侵害の責任を問い、法的対応をしていく考え」との声明を発表した[5]。2005年4月18日には、「歴史的事実を明らかにし、自分の名誉を回復するために個人的羞恥心を乗り越え勇気を振り絞って集会に参加している被害者たちの胸に再びナイフを突きつけた。日本右翼団体の論理でもって被害者と被害者たちを支援する団体の名誉まで毀損した」などとして名誉毀損でソウル中央地検に告訴した[7]。また池萬元ホームページには抗議が相次いだ[6]。
韓国について
- 東亜日報の白紙広告事件は、韓国中央情報部(KCIA)を騙った北朝鮮の工作員が広告主に圧力を掛けたものだ[8]。(後に中央情報部によるものと判明[9])。
- 韓国軍の中には「自生スパイ」や「パルチザン」らがうようよしているはずである。新しい粛軍作業をやるべき時点を迎えている。韓国軍は、先日23冊の「不穏書籍」のリストを作成し、これらの本が軍部隊に入れないよう措置を取った、現役将校の軍法務官7人(陸軍6人、空軍1人)が軍の指揮権に露骨に反発して出た。絶対にあり得ない抗拒であり、軍はこれらに対して厳しく罰しないといけない。こういう人々は一日でも軍に身を置いてはいけない。「対共」機関は、彼らの思想的行為らに対して深層調査をしなければならない。彼らを庇護する左翼勢力も多くあるはずだ。これから「パルチザン」らの総体的な必死のあがきがあちこちから突出するだろう[10]。
- 金正日を「委員長」という呼称なしで名前だけで呼ばなければならない。憲法が規定した不法集団の首魁をどうして尊称を付けて呼ぶべきなのか。違法ではないか。「委員長」呼称は金大中の時に始まった。左翼政権との繋がりの遮断を試みるべきであり、金正日に対する呼称を変更することから始めるべきである[11]。
- 国家のスタンスや主張が食い違うことは珍しくないが韓日は経済連携や軍事連帯で互いに協力し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が山積みである。韓国社会に蔓延する反日ポピュリズムと、それに媚びた中国にすり寄っての日本軽視外交が韓国の国益を損なう愚行であるか朴槿恵大統領も国民もよく考えるべきだ。朴大統領は、中国と歩むことが韓国の安全保障の危険にさらすことを理解せず、政治家としての能力とバランス感覚があまりに欠如している[2]。
著作
- 「北朝鮮の「核」を読む」 三一書房 (1994.7) ISBN 4380942554
- 「北朝鮮 韓国からの極秘レポート」 ビジネス社 (1999.7) ISBN 4828408290
- 「北朝鮮と永久分断せよ」 徳間書店 (1999.8) ISBN 4198610517
- 「韓国号の沈没―韓国社会の深層分析」 芦書房 (2002.6) ISBN 4755611660
- 「元韓国陸軍大佐の反日への最後通告」崔鶴山ほか訳、ハート出版(2020.4)ISBN 978-4-8024-0092-3
- 「反日国家の野望―光州事件」松木国俊監訳、ハート出版(2023.3)ISBN 978-4-8024-0145-6
関連項目
脚注
- “지만원씨, 한가하게 부시에게 편지나 쓸 때요?” (朝鮮語). 오마이뉴스 (2006年9月30日). 2022年9月1日閲覧。
- 韓国陸軍元大佐「反日で中国に擦り寄る朴槿恵大統領は愚か」 zakzak 2014.9.11
- “5·18 왜곡 지만원, 대법원서 징역 2년 확정” (2023年1月12日). 2024年9月20日閲覧。
- 「一部政治家の越権」親日法を痛烈批判の軍事評論家 (朝鮮日報 2004/08/10)
- 「水曜集会の元慰安婦女性は偽者」 軍事評論家の随筆が波紋(朝鮮日報 2005/04/14)
- 池萬元氏「偽の慰安婦」疑惑を提起、波紋広がる 中央日報 2005.04.14
- 挺身隊対策協、「偽者慰安婦発言」チ・マンウォン氏を告発 朝鮮日報 2005/04/18
- “「오늘과 내일/김상영」누가 자신을 악플러라 하는가(「今日と明日/キム・サンヨン」誰が自分を悪質書き込み者とするのか)”. 東亜日報. 2008年11月20日. 2015年8月16日閲覧.
- 白紙広告事件は、2008年10月、「真実和解のための過去史整理委員会」が2年間に掛けて調査した結果を発表し、中央情報部が主導して広告主に圧力を掛けたことが明らかになった。出典:“"동아일보 사태, 중앙정보부가 주도"(“東亜日報事態、中央情報部が主導”)”. YTN. 2008年10月29日. 2015年8月16日閲覧.
- 軍は粛軍作業に着手せよ! (統一日報 2008.10.28)
- 「対北問題」を見直せ! (現代コリア 2008.10.15)
外部リンク
- 지만원의 시스템클럽 System Club 公式サイト 池萬元のシステムクラブ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군사평론가이자 이른바 <5·18 북한 특수군 개입설>을 체계화한 극우 논객 지만원(池萬元)의 인물 궤적과 사상적 특징, 그리고 그에 대한 비판적 평론이다
1. 인물 개요와 생애 궤적
1942년 강원도 횡성에서 출생하여 육군사관학교(22기)를 졸업하고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였다
1990년대 초중반의 지만원은 합리적·실용주의적 군 개혁론자로 주목받았다
<70만 경영체 한국군 어디로 가야 하나>(1991), <군축시대의 한국군 어떻게 달라져야 하나>(1992) 등의 저서를 통해 군의 비효율을 경영학적 시스템으로 개선할 것을 주장하였다
. 진보 매체 기고는 물론 남북 상호 군축, 미국-캐나다 모델에 기초한 '2국가 경제공동체' 형태의 영구 분단 평화 공존론(<통일의 지름길은 영구분단이다>, 1996)을 내놓아 기성 보수 진영의 시각을 뛰어넘는 유연한 면모를 보이기도 하였다
. 1990년대 중반에는 김대중의 아태평화재단에 참여하여 국방·안보 분야의 자문 역할을 수행하였다
.
그러나 1990년대 말~2000년대 초를 거치며 급격한 사상적 '전향'을 겪었다
2. 핵심 사상과 주요 주장
첫째,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북한군 개입설 ('광수' 음모론)
그의 활동을 대표하는 핵심 주장은 "5·18은 북한 특수군 600명이 침투해 일으킨 내란 폭동"이라는 가설이다
둘째, 국가 적화 공포와 극단적 매카시즘
지만원의 세계관은 '대한민국은 이미 내부의 종북·좌익 세력에 의해 사상적·정치적으로 장악되었다'는 절박한 위기의식에 지배되어 있다
셋째, 사회진화론적 국제정치관과 탈민족적 현실주의
국제 관계와 한일 관계에서는 철저한 힘의 논리를 따른다
3. 비평 및 평가
합리적 테크노크라트의 음모론적 표류
미국 해군대학원에서 시스템공학을 전공하고 계량화된 통계와 분석을 중시하던 전문 군 장교가, 정치적 좌절과 냉전 해체기의 위기감 속에서 극단적인 확증 편향과 음모론자로 퇴행한 대표적 사례다
제도적 보수와의 결별과 고립
지만원은 진보 진영뿐 아니라 조갑제, 서정갑, 하태경 등 정통 보수 진영과도 심각한 반목을 빚었다
사법적 단죄와 역사 왜곡의 한계
지만원의 사상적 실천은 역사적 공론의 장을 오염시키고 실제 5·18 유공자와 유족들에게 심각한 인격권 침해와 2차 가해를 입혔다
1. 서론: 지만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지만원은 한국 현대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그는 처음부터 5·18 민주화운동을 부정하는 극우 논객으로 알려졌던 것은 아니다. 군 장교 출신으로 군사조직의 비효율성을 비판하고 국방개혁을 주장하면서 주목받았으며, 이후 강경한 반공주의와 역사수정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로 변모했다.
그의 생애에서 가장 흥미로운 문제는 바로 이러한 변화이다.
어떻게 군사조직의 합리화와 개혁을 주장하던 사람이 민주화운동을 북한의 공작으로 해석하는 정치적 세계관에 도달했을까?
지만원을 이해하려면 그의 개인적 성향뿐 아니라 한국의 군사문화, 냉전 반공주의, 민주화 이후 보수세력의 정체성 위기, 인터넷을 통한 음모론의 확산을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
2. 생애와 지적 배경
지만원은 1942년 강원도 횡성에서 태어났다. 육군사관학교 제22기로 임관했으며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다. 미국에서 경영·시스템 분야를 공부했고 군 조직의 운영과 효율성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1987년 대령으로 예편했다.
그의 초기 활동에서 중요한 것은 군사적 전문성과 조직관리 지식이었다.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에 걸쳐 그는 한국군의 낭비, 비효율적인 인사제도, 관료주의, 국방예산 운영 등을 비판했다. 당시 군사문제에 관한 민간의 공개적 토론이 제한적이었던 상황에서 그의 발언은 일정한 주목을 받았다.
그의 초기 군사개혁론은 적어도 일부 영역에서 기존 군 조직에 비판적인 성격을 지녔다. 군대의 합리적 운영, 예산절감, 조직의 효율성이라는 문제의식 자체는 진지하게 검토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개혁적 문제의식을 곧 민주주의에 대한 일관된 신념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조직의 효율성을 중시하는 개혁론과 정치적 민주주의는 서로 다른 차원의 사상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구별이 지만원의 사상적 변화를 이해하는 출발점이다.
3. 사상의 핵심: 반공주의와 국가안보 중심의 세계관
지만원의 후기 사상을 관통하는 가장 강력한 요소는 반공주의다.
그에게 북한 공산주의는 단순한 외부의 군사적 위협이 아니다. 대한민국 내부의 정치적 갈등과 역사적 사건을 설명하는 핵심 요인으로 등장한다.
이러한 세계관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국내 정치적 반대세력을 외부의 적과 연결하는 경향이다. 민주화운동이나 진보정치의 독자적인 사회적 원인을 충분히 인정하기보다 북한의 영향력을 의심한다.
둘째, 국가안보를 다른 정치적 가치보다 우선시한다. 개인의 자유, 민주적 저항, 정치적 다원주의는 국가안보라는 기준 아래에서 평가된다.
셋째, 정치적 갈등을 선과 악, 애국과 반역이라는 이분법으로 해석하는 경향이다.
문제는 이처럼 모든 정치현상을 안보 문제로 환원하면 사회 내부의 자율적인 갈등과 변화를 설명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예컨대 노동운동은 노동조건의 문제에서, 학생운동은 권위주의적 통치에 대한 저항에서, 민주화운동은 정치적 권리의 요구에서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강경한 반공주의적 시각에서는 이러한 다양한 원인이 외부 세력의 공작이라는 단일한 설명에 종속되기 쉽다.
4. 5·18에 관한 주장과 역사수정주의
지만원의 사회적 영향력이 가장 크게 나타난 분야는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해석이다.
그는 광주에 북한 특수군이 침투하여 사건을 주도했다는 주장을 지속적으로 제기했다. 특히 당시 사진에 등장한 시민들을 북한 인물로 지목하는 이른바 '광수' 주장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신뢰할 만한 증거로 입증되지 않았으며, 구체적인 피해자들에 대한 허위사실 적시와 명예훼손으로 법적 판단을 받았다.
2023년 1월 대법원은 지만원에게 징역 2년을 확정했다. 2026년 1월에는 북한군 개입설을 담은 저서와 관련하여 9천여만 원의 손해배상 책임도 대법원에서 확정되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법원의 판결만이 아니다. 역사학적 방법의 문제다.
역사적 사실을 규명하려면 여러 독립적인 증언, 문서, 물적 증거를 비교하고 자신의 가설과 모순되는 증거도 검토해야 한다.
하지만 특정한 결론을 먼저 확정한 뒤 그 결론에 들어맞는 것으로 보이는 사진이나 증언만을 선택하면 이는 역사연구가 아니라 확증편향에 가까워진다.
그의 5·18 해석은 바로 이러한 방법론적 문제를 보여준다.
5. 군사적 합리주의와 음모론의 결합
지만원의 사상에서 주목할 만한 역설은 조직의 합리성과 과학적 분석을 강조했던 인물이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는 검증되지 않은 추론을 확신했다는 점이다.
기술적 전문성과 사회과학적 판단력은 동일하지 않다.
군사조직의 예산이나 관리체계를 분석하는 능력이 역사적 증언의 신뢰성, 집단행동의 원인, 정치적 동기를 해석하는 능력을 자동으로 보장하지는 않는다.
특히 사회현상에서는 우연, 개인의 자율성, 집단 간 이해관계, 제도의 변화가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그런데 지만원의 후기 역사해석은 복잡한 사건 뒤에 일관된 비밀조직이나 숨은 지휘자가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설명은 겉으로는 복잡한 사건을 단순하고 명쾌하게 해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반증 가능한 증거의 기준이 약해지면 어떤 반대 증거도 은폐나 조작의 결과로 해석할 수 있게 된다.
이때 이론은 외부의 비판으로 수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판을 받을수록 더욱 강해지는 폐쇄적인 신념체계로 변한다.
6. 사회학적 해석: 권위주의적 사고와 집단 정체성
지만원의 영향력을 개인의 성격만으로 설명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그의 주장이 지속적으로 지지자를 확보한 데에는 한국 사회의 역사적 조건이 작용한다.
한국의 보수적 반공주의는 한국전쟁, 분단, 군사독재, 냉전이라는 특수한 역사 속에서 형성되었다. 그 속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적대감은 때로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동일시되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이러한 세계관은 도전을 받았다.
과거에 국가질서를 수호하는 행위로 정당화되었던 군사적 통제와 정치적 억압이 민주화 이후에는 인권침해와 권위주의적 통치로 재평가되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일부 강경 보수세력은 자신들이 믿어온 국가적 정당성이 흔들린다고 느꼈을 가능성이 있다.
지만원의 주장은 그러한 집단에 하나의 대안적 역사서사를 제공했다.
5·18이 민주주의를 위한 시민의 저항이 아니라 북한의 공작이었다면, 군부의 진압도 민주주의에 대한 폭력이 아니라 국가방위의 행위로 재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역사적 사실의 문제가 집단적 정체성과 연결되는 전형적인 사례다.
사회학적으로 보면 그의 역사수정주의는 단순한 과거 해석이 아니라 현재의 정치적 정체성을 방어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다만 이러한 분석은 지만원 개인의 실제 심리나 동기를 입증한 것은 아니다. 그의 주장과 지지 기반의 관계를 설명하는 사회학적 해석이다.
7. 한국 극우주의에서의 위치
지만원을 한국의 모든 보수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민주적 보수주의는 국가안보, 법질서,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면서도 다원주의와 헌정질서를 인정할 수 있다.
반면 극우적 정치사상에서는 정치적 반대자를 합법적인 경쟁자가 아니라 국가 내부의 적으로 보는 경향이 나타난다.
지만원의 후기 사상은 후자에 가깝다.
특히 그의 특징은 군사적 전문성이라는 개인적 권위를 역사해석과 정치적 판단에까지 확대했다는 데 있다.
그는 일반적인 정치 선동가와 달리 군 경력과 분석적 언어를 통해 자신의 주장에 전문성을 부여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방식은 전문지식의 권위가 본래의 적용 범위를 넘어 사용되는 사례로 볼 수 있다.
또한 인터넷은 이러한 주장의 확산에 중요한 환경을 제공했다. 전통적인 학문적 검증이나 언론의 사실 확인을 거치지 않고도 특정한 역사해석을 반복적으로 유통하고 지지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8. 종합 평가
지만원은 하나의 모순적인 역사적 인물이다.
그는 군사조직의 합리화를 주장했던 개혁적 평론가였지만, 후기에는 한국 민주주의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왜곡하는 극우 논객으로 알려졌다.
그의 초기 군사개혁론은 그 자체의 내용에 따라 평가할 필요가 있다. 후기의 역사왜곡이 초기의 모든 문제제기를 무효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5·18에 관한 그의 활동은 별도로 엄격하게 비판해야 한다. 검증되지 않은 주장을 역사적 사실로 제시하고 실제 시민들을 북한군으로 지목한 행위는 단순한 학술적 이견의 범위를 넘어섰다.
무엇보다 그의 사상적 변화는 기술적 합리성과 민주적 합리성이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조직을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능력과 서로 다른 시민의 목소리를 인정하는 능력은 다르다. 국가의 안보를 중시하는 것과 국가권력의 정당성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도 서로 모순될 필요가 없다.
지만원은 전자를 강조하면서 후자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정하지 못한 사례로 평가할 수 있다.
사회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결론은 다음과 같다.
지만원의 문제는 단지 한 개인이 잘못된 역사적 주장을 했다는 데 있지 않다. 그의 주장이 일정한 사회적 지지를 확보하고 오랫동안 재생산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따라서 그를 연구하는 것은 한국의 반공주의가 어떻게 형성되고 지속되었으며, 민주화 이후 일부 보수세력의 역사인식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재구성되었는지를 이해하는 작업과 연결된다.
결국 지만원은 한국 현대사의 한 극우 논객인 동시에, 냉전적 국가관과 민주화 이후의 역사적 정당성이 충돌하는 지점을 보여주는 연구 대상이다.
더 검토할 문제
세진님께서 사회학적 관점에서 이 인물을 연구하신다면, 특히 다음 세 가지 비교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만원과 전두환·신군부의 5·18 역사서사는 어떤 점에서 일치하고 차이가 나는가?
지만원의 초기 군사개혁론과 후기 극우주의 사이에 사상적 연속성이 있었는가, 아니면 실질적인 단절이 있었는가?
지만원의 지지자들은 왜 법원의 확정판결과 상반되는 역사해석을 계속 신뢰하는가?
이 가운데 두 번째 문제, 즉 는 그의 생애 전체를 평가하는 데 가장 생산적인 연구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지만원의 친일파 규탄에 대한 비판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 관련 발언은 그의 극단적 현실주의와 반공·진영 환원주의가 결합하여 나타난 대표적 사례다
1. '친일파 규탄'에 대한 비판 논리와 구조
주요 발언 및 입장
2004~2005년경 노무현 정부 시절 추진된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 등에 대해, "100년 전 과거사에 매달려 누구를 단죄하겠다는 것은 능력 없는 자들의 정치적 월권"이라며 친일 청산 작업을 강하게 비판했다
. 2005년 한승조 고려대 명예교수가 "일제 식민 지배는 축복이며, 일본에 먹히지 않았다면 러시아에 먹혀 공산화되었을 것"이라는 취지의 기고를 냈을 때, 지만원은 "한 교수가 아주 훌륭한 일을 했다", "조선이 먹힐 짓을 해서 먹힌 것 아니냐"며 이에 적극 동조했다
. 친일 청산을 요구하는 시민사회와 정치권을 '좌익' 내지 '반일 감정을 악용하는 선동 세력'으로 규정했다
. 반면 김구 등 독립운동 지도자에 대해서는 국가 경영 능력이 결여된 인물로 깎아내리며 테러리스트에 빗대어 평가절하했다 .
사상적 평론
약육강식의 사회진화론적 현실주의: 지만원의 논리는 국제정치를 철저한 힘의 균형과 생존 투쟁으로만 파악하는 극단적 힘의 논리에 기초한다
. 조선이 근대화와 국력 배양에 실패해 주권을 빼앗긴 것이라는 '피해자 유책론'에 서 있으며, 식민 지배의 불법성·폭력성이나 제국주의 침탈의 도덕적 문제는 사상적으로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한다 . 냉전적 도구주의와 진영 논리: 그에게 역사는 진실이나 인권의 문제가 아니라 철저히 '반공 체제 유지와 한미일 안보 공조'라는 현재적 목표에 종속된다
. 친일 청산 논의를 대한민국 주류 세력의 정통성을 허물려는 좌익의 기획으로 단정함으로써, 과거사 반성과 민족적 상처 치유라는 본질을 이념 투쟁으로 단순화·왜곡시켰다 .
2.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주장과 폄훼
주요 발언 및 입장
2005년 자신의 홈페이지에 게재한 <위안부 문제를 해부한다> 등의 글을 통해 "진짜 피해를 본 일본군 위안부는 20%에 불과하고, 80%는 어려운 형편 때문에 스스로 몸을 판 종군 위안부(성매매)"라는 왜곡된 주장을 펼쳤다
. 수요시위에 참여하는 고령의 피해 할머니들을 향해 "혈색이 너무 좋아 보인다", "진짜 피해자들은 부끄러워 숨어 사는데 언론에 나오는 이들은 가짜이거나 일당을 받는 이들일 수 있다"는 식의 모욕적 인신공격을 가했다
. 정대협(현 정의기억연대)과 나눔의 집 등을 향해 "몇 안 되는 할머니들을 앵벌이로 삼아 국제 망신을 시킨다", "위안부 놀음을 이제 접어라"라며 피해자 지원 운동 자체를 사기극으로 몰아세웠다
.
사상적 평론
인권·전쟁범죄에 대한 몰이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국가권력과 군벌이 개입해 여성의 신체적 자유와 존엄을 조직적으로 유린한 '반인도적 전쟁범죄'라는 것이 국제사회의 보편적 합의(UN, 국제인권기구 등)이다
. 지만원은 이를 단순 성매매 계약이나 사적 거래로 치환함으로써 전시 여성 성폭력과 인권 유린의 본질을 악의적으로 은폐했다 . 2차 가해와 혐오의 상업화: 피해자들의 얼굴과 건강 상태를 임의로 재단해 '가짜 위안부' 프레임을 씌우는 방식은 객관적 사료나 교차 검증에 기반한 학술적 비판이 아니었다
. 이는 평생을 트라우마 속에 살아온 고령 피해자들의 명예를 훼손하고 고통을 가중시킨 명백한 2차 가해이자, 극단적 표현을 통해 자신의 인터넷 사이트(시스템클럽) 지지층을 결집하려는 혐오 선동에 가까웠다 .
3. 총평
독립운동을 폄훼하고 친일 청산을 '좌익의 음모'로 환원하며, 위안부 피해자를 매도한 지만원의 논리는 보수주의 철학의 핵심 가치인 공동체의 긍지·명예·도덕적 연속성을 지키는 정통 보수의 입장과도 완전히 괴리되어 있다
그의 친일·위안부 관련 담론은 역사적 학술 연구의 산물이 아니라, '반공'이라는 단 하나의 잣대로 모든 역사적 정의와 보편적 인권을 부정해버린 탈진실(post-truth)적 극우 이데올로기의 파행으로 평가된다
과거 2005년 시사 토론에서 친일 비판 담론과 관련해 설전을 벌인 실제 상황을 살펴보려면
식민지 근대화론·반공주의·역사수정주의의 관계
1. 서론: 반공주의는 어떻게 식민지배 옹호와 연결되는가
지만원(池萬元)의 역사관에서 가장 주목할 문제는 강렬한 민족주의적 반공주의와 일본 식민지배에 대한 관대한 평가가 공존한다는 사실이다.
그는 북한에 대해서는 대한민국의 존립을 위협하는 적대세력이라는 입장을 일관되게 강조하면서도, 일본 제국주의에 대해서는 조선의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논리를 상당 부분 수용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서도 일본 국가의 책임보다 피해자들의 증언과 한국 시민단체의 활동을 의심하는 데 집중했다.
이러한 태도는 단순히 일본에 우호적이거나 한일관계 개선을 주장하는 것과는 다르다.
핵심은 그의 역사인식에서 반공주의가 식민지배의 책임이나 피해자의 인권보다 우선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이 문제를 이해하려면 2005년 친일파 논쟁과 일본군 ‘위안부’ 논쟁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2. 친일파 비판에 대한 지만원의 입장
2005년 3월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한승조는 일본 잡지에 실은 글에서 일제 식민지배가 한국에 결과적으로 다행이었다는 취지의 주장을 제기했다.
이에 대한 사회적 비판이 거세지자 지만원은 한승조를 옹호했다.
2005년 3월 10일 CBS의 토론에서 그는 진중권 교수와 논쟁했다.
당시 지만원이 제시한 논리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조선은 스스로 근대화할 능력이 부족했으며 지배층의 무능으로 국권을 상실했다.
일본의 지배 아래 철도, 항만, 발전시설 등 근대적 기반시설이 건설되었다.
일본 대신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다면 해방 이후 상황이 더 나빴을 수 있다.
과거의 식민지배를 계속 규탄하기보다 한국인이 스스로 노력하여 발전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는 식민지배를 비판하는 한국 사회의 태도를 문제 삼았으며, 독립운동가 김구를 오사마 빈 라덴에 비유하는 발언까지 했다.
###
지만원의 논리에는 중요한 오류가 있다.
식민지 시기에 철도와 항만이 건설되었다는 사실과 식민지배가 정당했다는 판단은 전혀 다른 문제다.
일본 제국은 조선의 자주적 발전을 보장하려고 조선을 지배한 것이 아니었다. 교통·산업시설의 확충 역시 일본의 군사적·경제적 필요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식민지배가 일정한 물질적 변화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그것이 한국인의 정치적 자기결정권을 박탈한 행위를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또한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더라면 더 나빴을 것이라는 주장은 입증할 수 없는 반사실적 가정이다. 그러한 가정만으로 실제 일본 식민지배의 책임을 경감할 수는 없다.
여기에는 더욱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그는 강대국의 지배를 국제정치의 현실로 받아들이면서, 지배당한 민족의 저항은 비현실적이거나 비합리적인 행동으로 평가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것은 역사적 현실주의라기보다 강자의 관점에서 역사를 평가하는 사고방식에 가깝다.
3. 일본군 ‘위안부’에 관한 주장
지만원의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발언은 친일파 청산에 대한 비판보다 더욱 직접적으로 피해자의 인권과 관련된다.
2005년 4월 14일 그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라는 글을 발표했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그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제기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알려진 여성 상당수가 실제 강제동원 피해자가 아니라는 주장
전체의 약 80%가 경제적 이유로 성매매에 종사했다는 주장
수요집회에 참가하는 여성들의 피해자 자격에 대한 의혹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등 시민단체가 피해자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는 주장
특히 그는 한 피해자의 발언을 근거로 생존 피해자 가운데 실제 일본군 ‘위안부’가 소수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 비율을 뒷받침하는 객관적인 조사나 통계는 제시하지 못했다.
###
지만원 주장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여성들이 위안소에 들어가게 된 경위와 위안소 안에서 경험한 지배·착취를 구분하지 않는 데 있다.
일본군 ‘위안부’ 제도에서는 여러 모집 방식이 사용되었다.
취업 사기, 인신매매, 협박, 가족의 경제적 곤궁을 이용한 모집, 직접적인 강제연행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그런데 모집 과정에 민간업자가 개입했다거나 일부 여성에게 금전적 대가가 지급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일본군의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위안소는 일본군의 필요에 의해 설치·확대되었고, 여성들의 이동과 생활, 성적 행위는 군사조직의 통제 아래 놓였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도 일본군과 식민지 권력기관, 민간 모집업자가 연결된 동원체계를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핵심은 여성이 위안소에 들어간 최초의 계기뿐 아니라, 이후 자유롭게 거부하거나 떠날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다.
경제적 궁핍 때문에 모집에 응한 사람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지속적인 성적 착취에 자유롭게 동의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지만원은 이 두 문제를 사실상 하나로 취급한다.
###
지만원은 피해자들의 진술 사이에 차이가 있거나 시민단체 운영에 문제가 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물론 역사연구에서는 모든 증언을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시민단체 역시 활동과 회계에 대한 검증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개별 증언의 불일치와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역사적 존재는 별개의 문제다.
피해자의 기억에 차이가 있거나 지원단체의 운영에 문제가 발견되더라도, 그것이 일본군과 일본 정부의 제도적 책임을 부정하는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
지만원의 논리에서는 이러한 구별이 무너진다.
결과적으로 일본 국가와 군대의 책임을 규명해야 할 역사적 논쟁이 피해자 개인의 신빙성에 대한 공격으로 바뀐다.
이것은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를 낳을 수 있는 역사해석 방식이다.
4. 반공주의와 친일파 청산 반대의 관계
지만원이 친일파 청산과 일본군 ‘위안부’ 운동에 비판적이었던 이유를 이해하려면 한국 보수주의의 냉전적 형성을 살펴보아야 한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국가형성 과정에서는 일제강점기의 관료·경찰·군사 인력이 상당 부분 재활용되었다.
냉전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국가의 주요 정당성은 항일독립운동의 계승뿐 아니라 반공주의와 자유진영의 수호에서 확보되었다.
그 과정에서 일부 보수세력은 식민지배의 유산을 청산하는 문제보다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문제를 우선시했다.
지만원의 역사관도 이러한 전통과 연결된다.
그에게 친일파 청산운동은 단순한 역사적 책임 규명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건국세력과 보수적 정통성을 공격하는 정치운동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
일본군 ‘위안부’ 운동에 대한 비판 역시 같은 구도에서 해석할 수 있다. 그는 피해자들의 권리와 역사적 정의를 중심에 두기보다 그 운동의 정치적 의도를 의심한다.
다만 이러한 해석은 그의 발언에서 드러나는 사상적 구조에 관한 분석이지, 그의 개인적 동기를 직접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5. 친일파 청산 비판에 존재하는 정당한 문제의식
지만원의 주장 전체를 평가할 때 한 가지 구별은 필요하다.
친일파 청산 과정이 정치적 목적에 이용될 수 있다는 문제제기 자체는 원칙적으로 검토할 가치가 있다.
실제로 역사적 책임을 규명하는 과정에서는 다음과 같은 원칙이 중요하다.
친일행위의 성격과 정도를 구체적으로 구분해야 한다.
동일한 기준을 모든 정치적 진영에 적용해야 한다.
단순한 일본 유학이나 식민지 시기의 공직 경력만으로 개인의 책임을 단정해서는 안 된다.
역사적 사실의 규명과 정치적 낙인찍기를 구별해야 한다.
이러한 원칙은 정당하다.
그러나 친일파 청산 과정에 정치적 편향이 있을 가능성과 친일행위에 대한 역사적 책임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양립할 수 있다.
전자를 지적한다고 후자를 부정할 수는 없다.
지만원은 특정한 청산운동의 정치적 성격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일본 식민지배 자체에 대한 비판까지 과도하게 약화시키는 경향을 보인다.
이것이 그의 논리가 갖는 결정적인 한계다.
6. 일본의 역사수정주의와의 비교
지만원의 역사인식은 일본 우익 역사수정주의와 중요한 공통점을 보인다.
쟁점 | 지만원의 주장 | 일본 우익 역사수정주의와의 공통점 |
|---|---|---|
식민지배 | 근대적 기반시설과 발전 효과 강조 | 식민지 근대화의 성과 강조 |
조선의 국권 상실 | 조선 지배층의 무능 강조 | 피지배 민족의 책임 강조 |
독립운동 | 일부 무장투쟁의 정당성 폄하 | 반제국주의 저항의 가치 축소 |
일본군 ‘위안부’ | 피해자의 자발성과 신빙성에 의혹 제기 | 강제성과 국가책임의 축소 |
역사청산 운동 | 정치적 목적과 반일감정 조장 의심 | 역사문제 제기를 정치적 공격으로 해석 |
그렇다고 지만원의 사상이 일본 우익의 역사관과 완전히 동일하다고 할 수는 없다.
일본 우익 역사수정주의가 일본 국가의 과거를 방어하는 데 목적을 둔다면, 지만원에게는 한국의 반공국가적 정통성을 방어하려는 관심이 더 두드러진다.
두 역사관은 출발점이 다르지만 결과적으로 일본 식민지배와 전쟁범죄의 책임을 축소하는 방향에서 만난다.
이것이 지만원 사상의 중요한 역설이다.
7. 종합 평가: 국가주의는 있지만 인권의 보편성이 부족하다
지만원의 역사관을 관통하는 핵심은 보편적 인권이나 민족의 자기결정권보다 국가의 힘과 안보를 우선시하는 사고방식이다.
그는 한국의 독립운동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권리 요구를 평가할 때에도 이러한 국가주의적 관점을 적용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국가는 그 힘이 얼마나 강한가와 관계없이 자신이 지배하는 사람들의 기본적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
일본 제국이 조선에 철도를 건설했다는 사실은 조선인의 정치적 권리를 박탈한 행위를 정당화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일본군 ‘위안부’ 동원 과정에 민간업자가 개입했다는 사실은 일본군의 제도적 책임을 제거하지 못한다.
더구나 국가안보를 강조하는 사람이 외국 제국주의의 지배를 상대적으로 관대하게 평가한다면, 그 국가주의가 과연 누구의 국가와 어떤 가치를 지키려는 것인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사회학적으로 지만원은 한국의 냉전적 반공주의가 역사적 기억을 어떻게 선택적으로 구성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그의 역사관에서는 공산주의에 대한 적대감이 강한 반면, 제국주의적 지배와 식민지 피해에 대한 도덕적 판단은 상대적으로 약화된다.
따라서 지만원의 친일파 청산 비판과 일본군 ‘위안부’ 발언은 별개의 일탈적 주장이 아니다. 두 주장은 반공주의를 중심으로 역사적 정당성을 판단하는 하나의 사상적 구조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나의 종합적 평가는 다음과 같다.
지만원은 일본 식민지배가 가져온 물질적 변화와 한국의 역사청산 운동이 가진 정치적 문제를 지적하려 했지만, 그 과정에서 제국주의의 지배책임과 피해자의 권리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다. 특히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근거 부족한 일반화는 역사적 분석이라기보다 피해자의 신뢰성을 공격하는 정치적 주장에 가까웠다.
그의 사례는 한국 사회에서 역사적 진실과 정치적 정체성이 충돌할 때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더욱 근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한다.
국가의 안보와 발전을 옹호하는 사상이 그 국가의 구성원과 식민지 피해자들의 자유와 존엄을 충분히 존중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과연 진정한 보수주의라고 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이 지만원의 역사관에 대한 가장 중요한 비판이라고 생각한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