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전개된 동아시아의 '탈민족주의(Post-nationalism)' 비판 담론은, 냉전 해체와 더불어 남북한 및 일본에 고착되어 있던 국가주의적 지적 지형을 해체하려는 거대한 지적 연대이자 모색이었다.
이 시기 비판 담론은 특정 국가의 협소한 민족주의를 단죄하는 차원을 넘어, '근대 국민국가(Nation-State)라는 환상이 어떻게 개인의 주체성을 억압하고 적대와 배제를 재생산해 왔는가'라는 보편적 근대성 비판으로 확장되었다.
이 흐름 속에서 이건지(李建志)의 비평이 차지하는 독자적 위치를 윤건차(尹健次), 임지현(林志弦), 서경식(徐京植) 등 동시대 주요 지식인들의 사유와 비교 고찰한다.
1. 지적 배경: 냉전 해체와 '민족'이라는 성역의 균열
1980년대까지 한국과 일본의 비판적 지식 사회에서 '민족' 혹은 '저항'은 독재 정권과 외세의 지배에 맞서는 가장 신성하고 강력한 무기였다. 한국의 '민족문학론'이나 일본 진보파의 '아시아 연대론'은 민족이라는 개념의 도덕적 정당성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1990년대 탈냉전과 함께 사상적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민주화 이후에도 여전히 개인을 억압하는 국가주의의 실체, 서구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식민주의(사이드, 바바 등) 담론의 유입, 그리고 일본의 전후 민주주의가 은폐해 온 천황제 파시즘과 전후 처리 문제 등이 폭로되었다. 동아시아 비판 지식인들은 마침내 '지배의 민족주의'뿐만 아니라 성역으로 여겨졌던 '저항의 민족주의' 자체를 성찰의 도마 위에 올리기 시작했다.
2. 주요 사상가들과 이건지의 사유 비교
| 사상가 | 핵심 이론 및 저작 | 사유의 출발점 및 관점 | 내셔널리즘에 대한 비판적 초점 |
| 이건지 (李建志) | <조선 근대 문학과 내셔널리즘> | 재일 2세 연구자, 문학 텍스트의 미시적 해체 | 저항과 협력의 공범성, 언어적 분열과 근대성 맹신 해부 |
| 윤건차 (尹健次) | <사상체험의 교차>, <고립의 고뇌를 넘어> | 재일 1.5세 사상사학자, 지성사적 자기성찰 | '민족'이란 허구의 절대화 비판, 개인의 주체적 실존 중시 |
| 임지현 (林志弦) | <적대적 공범자들>, <대중독재>론 | 한국 사학자, 비교역사학·포스트식민주의 | 민족주의의 '피해자 의식 민족주의'와 대중의 자발적 동원 |
| 서경식 (徐京植) | <디아스포라 기행>, <소년의 눈물> | 재일 2세 에세이스트, 디아스포라 미학 | 탈민족주의의 조급성 비판, 피식민자 고통의 구체성 수호 |
(1) 윤건차 vs 이건지: 사상사적 반성에서 텍스트 해체로
윤건차는 전후 일본 사회와 남북한 분단체제라는 거대한 사상적 격랑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치열하게 고민해 온 사상사학자다. 그는 식민지 지배의 피해자였던 조선인이 해방 후 '민족'이라는 관념에 사로잡혀 또 다른 배타적 도그마(남북한의 국가주의)에 갇히게 된 비극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윤건차에게 탈민족주의는 '자신을 가둔 집단적 틀을 깨고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 단독자(單獨者)로서 서기 위한 실존적 결단'이었다.
이건지는 윤건차의 문제의식을 이어받으면서도, 이를 추상적인 사상사 논쟁에 머무르게 하지 않고 '문학 텍스트'라는 구체적인 언어의 전장으로 끌고 들어갔다. 윤건차가 사상의 흐름을 거시적으로 짚었다면, 이건지는 이광수, 염상섭, 김사량 등의 문장 사이에 박힌 수사학과 균열을 파헤치며 피식민 지식인의 내면적 메커니즘을 뢴트겐 사진처럼 투시했다.
(2) 임지현 vs 이건지: '적대적 공범자'와 '근대 문학의 이중 구속'
한국 역사학계에서 '탈민족주의' 담론의 포문을 연 임지현은 <적대적 공범자들>과 '대중독재'론을 통해, 식민주의와 반식민주의, 파시즘과 민족해방운동이 '민족'이라는 거대 기표를 통해 대중을 동원하는 방식에서 구조적으로 닮아 있음을 논증했다. 특히 억압받는 자들이 자신을 영원한 피해자로 규정하며 도덕적 우월성을 누리는 '희생자 의식 민족주의(Victimhood Nationalism)'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이건지의 문학 비평은 임지현의 역사학적 통찰과 완벽하게 공명한다. 이건지는 식민지 조선 문학이 제국의 폭력에 맞서는 과정에서 어떻게 제국의 지식 체계와 진화론적 문명관을 고스란히 복제했는지를 문학적으로 입증했다. 두 사람 모두 "저항이라는 숭고한 명분이 내부의 타자(여성, 소수자, 개별 인간)를 억압하는 면죄부가 될 수 없다"는 단호한 입장을 견지했다.
(3) 서경식과의 긴장: '탈민족'의 이상과 '피식민자'의 구체적 고통
이 시기 탈민족주의 담론 지형에서 가장 흥미롭고 생산적인 긴장을 형성한 대척점이 바로 서경식이다. 서경식 역시 국가주의와 배타적 애국심을 극도로 경계하며 '디아스포라(이산자)'의 탈국가적 정체성을 역설했다. 그러나 서경식은 한국과 일본의 일부 탈민족주의 논의가 지나치게 세련된 이론적 유희로 치달으면서, '식민지 지배가 남긴 현실적 상흔과 차별의 물질성'을 너무 쉽게 표백해 버리는 것 아닌가 하는 깊은 우려를 표했다.
이 지점에서 이건지의 작업은 독특한 긴장감을 유지한다. 이건지는 저항의 내셔널리즘을 가차 없이 비판하지만, 서경식이 우려했던 '제국주의 지배의 면죄부화'로 흘러가지 않기 위해 김사량의 사례처럼 지배 언어 속에서 분열하고 질식해 가는 피식민자의 구체적 고통을 텍스트 속에서 결코 놓치지 않는다.
3. 동아시아 탈민족주의 비평사의 의의와 한계
동아시아 탈민족주의 문학 비평사는 한국과 일본, 그리고 재일(在日)이라는 삼각 구도 속에서 다음과 같은 역사적 성취를 이루었다.
'피해-가해'의 박제화된 도식 해체: 문학을 단지 '민족의 수난과 저항'을 증명하는 선전문서로 보던 편협한 문학관을 극복하고, 근대성 자체의 폭력성을 질문하는 고도의 사유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경계인의 위치성 확립: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재일조선인 연구자들의 경계인적 시각이 동아시아 전체의 닫힌 국수주의를 비추는 가장 날카로운 거울이 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그러나 2010년대 이후 동아시아의 정세(한일 갈등의 재점화, 일본의 우경화, 미중 패권 경쟁, 신냉전 구도) 속에서 이 비평 담론은 일정한 한계와 도전에 직면했다. 지식인 사회의 치열한 '탈민족' 담론에도 불구하고, 대중적 차원에서는 포퓰리즘과 결합한 감정적 민족주의가 훨씬 더 강력하게 부활했기 때문이다. 탈민족주의가 일반 대중의 생존 불안과 결합하지 못한 채 아카데미즘 내부의 담론으로 고립되었다는 비판 역시 피하기 어렵다.
4. 세계인의 시선에서 본 총평
동아시아 탈민족주의 비평사에서 이건지의 저작이 던지는 가장 본질적인 질문은 "우리는 국가와 민족이라는 환상 없이 온전한 개인으로 사유할 수 있는가?"이다.
특정 국가에 대한 맹목적인 애국심을 내려놓은 보편적 세계인의 시각에서 볼 때, 민족은 역사적으로 구성된 우연한 공동체에 불과하다. 저항의 이름이든 지배의 이름이든, 개별 인간의 고유성을 거대한 '우리'라는 집단 속에 용해시키려는 모든 시도는 결국 폭력으로 귀결된다.
이건지를 비롯한 탈민족주의 사상가들의 고투는, 비록 오늘날 신국가주의의 거센 파도 앞에서 위태로워 보일지라도, 국가라는 경계를 넘어 '자유롭고 주체적인 단독자들의 연대'를 꿈꾸는 이들에게 여전히 가장 투명하고 정직한 나침반 역할을 하고 있다.
- 서경식의 '디아스포라 미학'과 이건지 비평의 심층 비교
- 임지현의 '희생자 의식 민족주의' 개념과 동아시아 기억전쟁 분석
서경식(徐京植)의 '디아스포라적 관점'과 이건지(李建志)의 ''저항의 내셔널리즘' 비판'은 모두 재일조선인 2세라는 공통의 디아스포라적 존재 조건에서 출발한다. 두 사상가 모두 지배 국가인 일본의 배타적 국민주의뿐만 아니라 한반도 분단국가(남과 북)의 경직된 국가주의를 비판하며,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는 보편적 인간의 존엄을 지향했다.
그러나 '피식민과 이산(離散)의 역사적 상흔을 어떻게 마주하고 극복할 것인가'라는 실천적 방법론과 윤리적 강조점에 이르면, 두 사람 사이에는 1990-2000년대 동아시아 탈민족주의 담론 지형에서 가장 치열하고 첨예했던 사유의 긴장이 드러난다.
1. 사유의 공통 지반: 근대 국민국가의 허구성에 대한 고발
두 지식인이 공유한 문제의식은 근대 국민국가(Nation-State)라는 제도가 인간을 균질화하고 억압하는 폭력의 기제라는 점이다.
동화주의에 대한 거부: 일본 사회가 요구하는 '동화(일본인이 되어라)'는 소수자의 고유한 역사와 상처를 지우는 문화적 살해이며, 본국(한국/북한)이 요구하는 '귀속(조국에 헌신하라)' 역시 개인을 국가의 도구로 삼는 또 다른 억압임을 분명히 했다.
경계인(境界人)의 윤리: 국가라는 울타리 안에 안주하지 않고, 경계에 서서 양쪽의 허위의식을 동시에 폭로하는 비판적 주체성을 옹호했다.
보편적 인간 존엄에 대한 지향: 특정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나 애국주의를 거두어내고, 국가 폭력에 희생된 개별 인간의 고통에 응답하는 것을 지식인의 제1의 책무로 삼았다.
2. 이론적 긴장과 대립각: 탈(脫)민족의 이상인가, 상처의 물질성인가
두 사상가의 결정적 균열은 "피식민자의 저항적 내셔널리즘을 어느 지점까지 비판하고 해체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폭발한다.
| 비교 항목 | 이건지 (李建志) | 서경식 (徐京植) |
| 출발 개념 | 근대성의 해체, 언어/텍스트의 이중 구속 | 디아스포라의 실존적 조건, 기억과 애도 |
| 저항의 내셔널리즘을 보는 눈 | '제국주의의 거울상'이자 해체 대상 피해자성 뒤에 숨어 내부 타자를 억압하고 전체주의로 미끄러지는 공범성 지목 | '피압박자의 방어적 보루'이자 불가피한 절규 이를 성급히 해체하는 것은 식민 지배의 현실적 폭력을 상대화할 위험이 있다고 경고 |
| 비판의 우선순위 | 닫힌 민족주의의 도덕적 성역화 타파 | 제국주의 가해 책임의 은폐 및 신자유주의적 동화 경계 |
| 문학/예술관 | 텍스트의 균열과 사상적 모순을 파헤치는 차가운 해부학 | 고통받는 자와 영혼으로 연대하는 '고뇌의 미학' |
(1) 이건지: '저항'이라는 성역의 철저한 해체
이건지는 피식민자의 저항 민족주의가 획득한 도덕적 면죄부를 가차 없이 벗겨낸다. 이광수와 김사량의 텍스트를 통해 논증했듯, 근대화를 향한 맹목과 민족이라는 집단적 환상은 식민지인을 해방하기는커녕 제국의 파시즘적 총동원 체제와 쉽게 결합했다.
이건지에게 '민족'은 보존해야 할 영혼이 아니라, 제국주의적 지식 체계가 만들어낸 근대의 산물일 뿐이다. 저항의 깃발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개인의 사유를 억압하고 집단적 동질성을 강요한다면, 지배의 논리와 하등 다를 바 없다는 것이 이건지의 서늘한 결론이다.
(2) 서경식: '식민지 책임'의 탈정치화에 대한 통렬한 경고
반면 서경식은 이러한 급진적 탈민족주의 담론이 1990년대 후반 일본의 아카데미즘과 결합할 때 발생하는 정치적 위험을 극도로 경계했다. 서경식의 관점에서, 피식민자의 내셔널리즘을 제국주의자의 내셔널리즘과 '동일한 구조의 공범'으로 묶어버리는 순간, 현실에서 실제로 자행된 제국의 잔혹한 식민 지배와 국가 폭력의 구체적 책임이 증발해 버린다.
서경식은 묻는다: "국가와 군대를 가진 제국의 내셔널리즘과, 언어와 이름을 빼앗긴 채 맨몸으로 저항했던 피식민자의 내셔널리즘이 어찌 같은 평면에서 저울질될 수 있는가?"
서경식에게 디아스포라는 '국가를 초월한 멋진 코스모폴리탄'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적 폭력에 의해 고향을 잃고 영구히 추방당한 자들의 '찢겨진 실존이자 치유되지 않은 고통의 자리'다. 따라서 식민 지배의 원인이 온전히 규명되고 사죄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조급한 '탈민족' 선언은,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쥐여주는 지적 기만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3. 언어와 실존의 딜레마: 지배자의 언어로 사유한다는 것
두 사람의 긴장은 '언어'를 다루는 태도에서도 뚜렷이 교차한다.
이건지의 언어적 메스: 이건지는 김사량의 일본어 문학을 분석하며 지배자의 언어를 뺘앗아 제국을 교란하려 했던 시도가 어떻게 제국의 검열과 이국적 소비 대상으로 포섭되고 좌절되었는가를 엄정하게 논증한다. 그는 텍스트의 분열을 냉정하게 관찰하는 '비평적 관찰자'의 위치를 유지한다.
서경식의 언어적 비통함: 서경식은 모국어(조선어)를 온전히 구사하지 못하고 가해자의 언어(일본어)로 사고하고 글을 써야만 하는 재일조선인의 조건을 '언어적 실향'이자 실존적 비극으로 고백한다. 그는 프리모 레비나 장 아메리의 문학을 경유하며, 언어의 상실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피억압자의 '원한(Ressentiment)'과 기억의 윤리를 부여잡는다.
4. 세계인의 시선에서 본 두 사유의 변증법적 통합
이건지와 서경식의 논쟁은 어느 한쪽이 옳고 그른 이분법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국가주의의 폭력에 맞서는 인류의 지성이 도달한 동전의 양면이자 상호 보완적인 긴장 관계다.
이건지의 비판적 메스가 결여된 채 피해자성에만 머무는 디아스포라 담론은 자칫 또 다른 국수주의적 맹목과 내부 소수자 탄압으로 퇴행하기 쉽다. 반대로 서경식의 역사적 통점(痛點)과 책임에 대한 윤리적 환기가 빠진 탈민족 담론은, 현실의 불평등과 제국주의적 상흔을 외면하는 공허하고 냉소적인 지식인의 이론 놀음으로 전락할 수 있다.
특정 국가에 매몰되지 않는 자유로운 세계인의 시각에서 볼 때, 두 사상가의 대화는 가장 묵직한 통찰을 남긴다.
"우리는 지배의 폭력뿐만 아니라 저항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집단주의의 유혹을 경계해야 한다(이건지). 그러나 그 경계 위에서도 역사 속에서 짓밟힌 구체적 개인들의 고통과 가해자의 책임을 망각하는 순간, 탈국가적 자유는 공허한 환상에 불과하다(서경식)."
이 두 가지 경고를 동시에 붙들고 사유하는 것, 그것이 바로 편협한 애국주의와 냉소적 개인주의 모두를 넘어 진정한 세계 시민으로 서기 위한 필수적인 지적 훈련이다.
서경식(徐京植)의 지적 여정에서 이탈리아의 유대인 작가이자 아우슈비츠 생존자인 프리모 레비(Primo Levi)와의 만남은 단순한 문학적 공감을 넘어선 실존적 전회(轉回)였다.
그의 저작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와 <디아스포라 기행> 등에서 전개되는 레비 읽기는, 홀로코스트라는 유럽 근대의 파국을 경유하여 동아시아 식민 지배와 분단체제, 그리고 재일조선인이라는 경계인의 상흔을 조명하는 '증언의 윤리학'으로 심화된다.
서경식이 레비의 텍스트를 해독하며 구축한 디아스포라적 사유의 구조를 네 가지 층위로 분석한다.
1. '회색지대(Grey Zone)': 피해-가해 이분법을 넘어선 극단의 인간학
서경식이 프리모 레비의 후기 대표작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I sommersi e i salvati)>에서 가장 깊이 천착한 개념은 바로 '회색지대'다. 수용소는 순결한 피해자와 악마적인 가해자로 깔끔하게 나뉘는 공간이 아니었다. 나치는 카포(Kapò, 수용소 감시원 역할을 맡은 수감자)나 존더코만도(Sonderkommando, 가스실 시신 처리를 강요받은 유대인 특수작업반)처럼 피억압자 내부에서 협력자를 차출하여 피해자가 피해자를 억압하고 착취하도록 강제했다.
서경식의 확장: 식민지와 냉전의 상흔에 투영된 '회색지대'
서경식은 이 '회색지대'의 개념을 식민지 조선과 전후 한반도 분단체제의 비극을 해부하는 렌즈로 전환했다.
식민지 협력의 비극성: 일제 강점기 조선인들이 겪었던 내선일체의 강요, 창씨개명, 학도병 지원 등은 단순한 '자발적 부역'이나 '순결한 저항'의 이분법으로 온전히 포착되지 않는다. 극한의 구조적 폭력 속에서 인간성이 어떻게 마모되고 오염되었는가를 직시하는 고통스러운 통찰이다.
분단체제와 내부 숙청: 해방 후 남북한 분단 독재 정권들이 자국민을 사상 검증과 전향 강요로 몰아넣고, 서로를 감시·고발하게 만들었던 한국 현대사의 '회색지대'(형제들의 옥바라지 과정에서 목도한 고문과 전향 공작)를 증언하는 언어로 기능한다.
2. '가라앉은 자(완전한 증인)'와 '구조된 자(대리 증언자)'의 윤리
프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의 진실에 대해 역설적인 고백을 남겼다. "진짜 수용소의 바닥을 보고 바닥까지 가라앉은 자(Muselmann, 삶의 의지를 완전히 상실하고 죽어간 자들)는 돌아오지 못했기에 증언할 수 없다. 살아남은 우리(구조된 자)는 결코 완전한 증인이 아니며, 다만 그들을 대신해 말하는 대리인에 불과하다."
서경식의 확장: 살아남은 자의 부채의식과 '대리 증언'
서경식은 레비의 이 통렬한 자기 인식에서 디아스포라 지식인이 짊어져야 할 '증언의 윤리'를 길어 올린다.
특권과 부채감의 자각: 서경식 본인은 일본에서 태어나 교육받고 언어와 지식을 누린 2세다. 그러나 그의 두 형(서승, 서준식)은 모국 유학 중 간첩으로 조작되어 수십 년간 옥고와 고문을 겪었다. 서경식은 안전한 지대에 남겨진 자신을 레비가 말한 '우연히 살아남은 자'의 위치에 놓는다.
침묵당한 자들을 위한 목소리: 증언의 주체는 살아남아 말을 독점하는 지식인 자신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이름도 없이 지워지고 학살당한 자들(관동대지진 학살 희생자, 강제연행 노동자, 군위안부, 국가 폭력 희생자)이어야 한다. 서경식에게 글을 쓴다는 행위는 바로 그 '가라앉은 자들'의 침묵을 대신 발화하는 빚진 자의 엄중한 책무가 된다.
3. '고통의 비교 불가성'과 보편적 고통의 공명
서경식은 서구 중심주의적 역사관이 홀로코스트를 '인류 역사상 유일무이한 절대 악'으로 성역화하면서 비서구 식민지의 학살과 수탈을 상대화하는 태도를 경계했다. 동시에 동아시아 민족주의자들이 자국의 피해만을 절대시하며 타자의 고통에 눈감는 태도 역시 단호히 거부했다.
서경식의 확장: 아우슈비츠에서 광주와 서대문형무소로의 횡단
고통의 연대: 서경식은 레비의 발자취를 따라 아우슈비츠와 토리노를 순례하는 동시에, 한국의 광주 망월동 묘지와 옛 남영동 대공분실, 서대문형무소를 잇는다.
국경을 초월한 비판적 연결: 유대인의 비극을 팔레스타인 탄압의 면죄부로 삼는 시오니즘 국가주의를 비판했던 레비의 태도처럼, 서경식 역시 조선인의 식민지 피해 경험이 전후 한국 사회의 베트남전 파병이나 내부 소수자 차별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변질되는 것을 준열하게 경고했다. 레비를 통해 서경식이 도달한 자리는 '민족의 피해사'가 아니라, 국가 권력이라는 괴물이 인간에게 가하는 폭력에 맞서는 보편적 인권의 전선이었다.
4. 기억의 풍화에 맞서는 '증언의 불가능성과 영원성'
프리모 레비는 전후 유럽 사회가 과거를 망각하고 경제적 번영과 안락 속으로 도피하려 할 때, 죽는 순간까지 기억의 망각과 싸우며 증언을 이어갔다(그는 결국 1987년 자택에서 투신하여 생을 마감했다).
서경식의 확장: 일본의 역사 부정과 신자유주의적 망각에 대한 저항
서경식은 1990년대 이후 일본 사회에서 급속히 번진 역사수정주의(자유주의 사관, 위안부 부정론)와 한일 양국에서 득세한 신자유주의적 냉소주의를 '기억의 풍화'로 규정했다.
'끝나지 않은 과거': 가해자는 "이제 과거는 잊고 미래로 가자"고 말하지만, 피해자에게 과거는 청산된 옛일이 아니라 매일매일의 삶을 옥죄는 현재진행형의 고통이다.
증언의 영원한 당위: 서경식은 설령 세상이 그 증언을 듣기 싫어하고 귀를 막을지라도, 끊임없이 불화를 일으키며 상처를 헤집어 증언하는 것 자체가 디아스포라 지식인의 실존적 저항이라고 역설했다. 레비의 투쟁처럼, 증언은 세상과의 타협이 아니라 망각을 종용하는 거대한 체제를 향한 단독자의 불복종 선언이다.
5. 총평
서경식에게 프리모 레비는 서구의 먼 문학가가 아니라, 국민국가 바깥으로 내던져진 이방인이자 영원한 디아스포라로서 마주한 사상적 도반(道伴)이었다.
서경식은 레비의 증언 문학을 흡수함으로써, 재일조선인의 문제를 일국사적(一國史的) 차원의 한일 과거사 갈등에 가두지 않고 근대 문명과 국가 폭력이 인간성 자체를 어떻게 파괴했는가를 묻는 인류 보편의 윤리적 텍스트로 고양시켰다.
어떠한 국가나 깃발에도 영혼을 의탁하지 않는 세계인의 시각에서 볼 때, 서경식이 레비를 통해 축조한 '증언의 윤리'는 "자신이 속한 집단의 승리나 번영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영원히 패배하고 침묵당한 자들의 곁에 끝까지 머물겠다"는 가장 고결하고 준엄한 지적 결단이라 할 수 있다.
- 서경식의 형제들 옥바라지와 국가폭력 비판
- 서경식의 디아스포라 예술 기행(음악·미술 비평) 분석
서경식(徐京植)의 사유에서 장 아메리(Jean Améry)의 주저 <죄와 보수(Jenseits von Schuld und Sühne)>에 등장하는 '원한(르상티망, Ressentiment)'은, 통상적으로 니체적 맥락에서 폄하되던 '열등감과 무기력한 복수심'이라는 굴레를 벗어던지고 '불의한 과거의 풍화와 망각에 맞서는 가장 윤리적인 저항의 도구'로 전면 재해석된다.
서경식은 화해와 용서, 미래지향이라는 이름으로 가해의 역사를 은폐하려는 일본 주류 사회와 신자유주의적 냉소주의에 맞서기 위해 아메리의 르상티망을 호명했다.
그가 아메리의 텍스트를 통해 재일조선인과 국가 폭력 피해자의 실존적 조건으로 변주해 낸 사유의 구조를 네 가지 핵심 축으로 분석한다.
1. 니체의 르상티망에서 아메리의 '도덕적 르상티망'으로의 전회
철학사에서 르상티망은 프리드리히 니체에 의해 '강자에 대한 약자의 비겁하고 도착된 원한', 즉 삶을 긍정하지 못하는 노예 도덕의 뿌리로 낙인찍혀 왔다.
그러나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게슈타포의 잔혹한 고문을 겪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대인 사상가 장 아메리는 이 개념을 정면으로 뒤집었다.
시간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대한 거부: 시간은 가해자에게는 망각과 면죄부라는 치유를 주지만, 피해자에게 시간의 흐름은 사건의 도덕적 진실을 표백하는 폭력일 뿐이다.
비틀린 회복 요구: 아메리에게 르상티망은 흘러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역사의 시곗바늘을 되돌려 범죄가 일어나기 전으로 되돌려 놓으라"*고 요구하는 실존적 저항이자, '도덕적 시간 정지'의 외침이다.
서경식은 아메리의 이 도덕적 반전을 그대로 흡수하여, 피해자의 원한이야말로 역사의 불의를 영원히 현재화(現在化)하는 유일한 방파제임을 천명한다.
2. 가해자의 '자연 치유'에 대한 가차 없는 거부: 한일 과거사와 망각의 정치
서경식은 전후 일본 사회가 견지해 온 태도를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긴 파렴치한 자연주의'로 규정한다.
"이미 끝난 과거"라는 이데올로기: 일본 사회는 패전 후 시간이 흘렀다는 이유로, 혹은 배상과 협정을 맺었다는 이유로 "이제 과거를 잊고 미래로 나아가자"고 종용한다.
식민지 지배의 상처는 자연 치유되지 않는다: 서경식은 아메리의 입을 빌려 반박한다. 물리적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아물지 모르나, 인간의 존엄을 짓밟은 도덕적 범죄는 가해자가 자신의 죄과를 온전히 직시하고 고통스럽게 반성하지 않는 한 결코 저절로 아물 수 없다.
가해자가 역사를 상대화하고 망각하려 할 때, 피해자가 품는 '원한'은 옹졸한 뒤끝이 아니라 가해자의 양심을 끊임없이 찌르고 괴롭히는 도덕적 각성제로 기능한다.
3. '화해'라는 이름의 폭력과 피해자의 자기부정 극복
전후 한일 관계나 한국 현대사의 과거사 청산 과정에서 지배 권력은 흔히 '화해', '용서', '국민적 통합'이라는 미사여구를 동원한다. 서경식은 아메리의 사유를 통해 이러한 정치적 화해가 피해자에게 가하는 2차 가해를 날카롭게 포착했다.
용서의 강요는 피해자의 존엄을 재차 파괴한다: 가해자가 진정으로 참회하지 않는데도 피해자에게 "대승적 차원에서 용서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피해자에게 자신의 고통과 기억을 지우라고 윽박지르는 또 다른 폭력이다.
품위 있는 타협의 거부: 아메리는 독일 사회의 번영과 위선적 화해에 합류하기를 단호히 거부하고 스스로 고립을 택했다. 서경식 역시 재일조선인에게 일본 사회로의 순응적 귀화나 과거의 불의에 눈감는 '쿨한 세계 시민'이 되기를 요구하는 풍조를 경계했다.
식민 지배와 차별의 구조가 온존하는 한, '기만적인 화해의 악수를 거부하고 불화를 선언하는 원한의 상태에 머무는 것'이야말로 노예 상태로 굴복하지 않는 주체적 인간의 마지막 자존심이다.
4. 사적 복수심을 넘어선 '역사적·보편적 연대의 르상티망'
서경식이 번역한 르상티망은 결코 민족주의적 증오나 맹목적인 복수심이 아니다. 만약 원한이 단순한 "네가 나를 때렸으니 나도 너를 때리겠다"는 복수의 감정으로 전락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국가주의적 폭력의 연료로 소비될 뿐이다.
인간성 회복을 위한 부름: 아메리와 서경식이 말하는 르상티망의 궁극적 지향은 가해자의 파멸이 아니라, 가해자가 자신의 범죄를 직시함으로써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가 온전한 인간성을 회복하는 상태로의 진입이다.
고통받는 모든 타자와의 연대: 서경식의 르상티망은 재일조선인이라는 특수 집단의 억울함에 갇히지 않는다. 그것은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나아가 한국 독재 정권의 고문 피해자와 광주 5·18의 희생자 등, 국가 권력의 거대한 맷돌에 갈려나간 모든 '약자들의 연대 지대'로 확장된다. 원한은 기억을 사유화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짓밟힌 모든 무력한 자들의 기억을 공적인 정의의 법정에 계속해서 세워두는 윤리적 에너지다.
5. 총평
서경식에게 장 아메리의 르상티망은 패배한 자, 추방당한 자, 영구히 디아스포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경계인이 손에 쥘 수 있는 '가장 엄격하고 고결한 비타협의 윤리'였다.
그것은 지나간 역사를 지우고 손쉽게 '밝은 미래'를 찬양하려는 모든 권력의 위선을 고발한다. 어떤 국가나 민족주의적 집단 최면에도 굴복하지 않는 자유로운 세계인의 시각에서 볼 때, 서경식이 아메리를 경유하여 되살려낸 원한은 복수를 꿈꾸는 어두운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불의한 역사가 제대로 단죄되고 기억되기 전까지는 그 어떤 불의와의 평화도 거부하겠다"는 단독자의 지독하게 투명하고 고독한 도덕적 선언이다.
서경식에게 장 아메리(Jean Améry, 1978년 자살)와 프리모 레비(Primo Levi, 1987년 투신사)의 죽음은 단순한 개인의 심리적 파탄이나 패배의 기록이 아니었다. 그것은 홀로코스트라는 근대의 절대적 파국을 온몸으로 겪어낸 생존자이자 증언자였던 두 지식인이, 전후 세계의 거대한 망각과 위선 앞에서 마주해야 했던 디아스포라적 실존의 궁극적 한계이자 마지막 저항이었다.
서경식은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와 <디아스포라 기행> 등 여러 저작에서 두 작가의 죽음이 남긴 궤적을 짚으며, 이를 재일조선인이라는 자신의 디아스포라적 조건과 겹쳐 읽어냈다.
그가 두 사람의 죽음을 해석한 핵심 논리는 네 가지 층위로 집약된다.
1. 망각을 강요하는 세계와의 '불화(不和)'가 도달한 막다른 골목
아메리와 레비는 생환 후 수십 년 동안 글을 쓰고 증언했다. 그러나 그들이 마주한 전후 유럽은 그들이 바란 '도덕적 반성과 쇄신'의 세계가 아니었다.
소비사회와 역사수정주의의 대두: 독일과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 사회는 경제 부흥과 안락 속에 빠르게 안주했고, 과거의 비극을 진지하게 대면하기보다 "과거는 털어버리고 앞으로 나아가자"는 신포도식 낙관주의에 빠져들었다. 1970~80년대에는 급기야 나치의 죄과를 상대화하려는 역사수정주의 담론마저 고개를 들었다.
증언자의 철저한 고립: 아메리는 독일 사회의 번영에 결코 동화될 수 없는 이방인으로 남았고, 레비 역시 말년에 이르러 "사람들이 더 이상 수용소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깊은 절망감을 피력했다. 서경식은 이들의 죽음을 가리켜, 사회가 강요하는 기만적 평화와 화해에 끝내 포섭되기를 거부한 증언자가 세상과의 완전한 불화 속에서 선택한 실존적 귀결로 읽어낸다.
2. 아메리의 능동적 자살: '자유의 마지막 행사'로서의 저항
장 아메리는 저서 <자살에 대하여(Hand an sich legen)>를 남기고 1978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서경식은 아메리의 자살을 병리적인 체념으로 격하시키는 시선을 거부한다.
파괴된 세계 신뢰의 확인: 아메리는 나치 게슈타포의 첫 타격을 맞은 순간 "세상에 대한 신뢰(타인이 나를 도와줄 것이라는 믿음)는 영원히 파괴되었다"고 썼다. 고문과 수용소의 경험은 인간성의 근간을 도륙했고, 그 상처는 시간이 흘러도 결코 치유될 수 없었다.
타협 없는 르상티망의 종착지: 아메리에게 자살은 가해자들이 지배하는 비열한 현실, 그리고 피해자에게 "이제 잊으라"고 윽박지르는 사회에 던지는 마지막 결별 선언이었다. 서경식은 아메리의 죽음을 자기 파괴를 통해서만 증명할 수 있었던 '인간적 존엄의 비타협적 행사'이자, 망각에 저항하는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윤리적 실천으로 규정한다.
3. 레비의 투신: '가라앉은 자'의 무게와 대리 증언의 한계
프리모 레비는 아메리와 달리 훨씬 차분하고 이성적인 태도로 증언을 지속하며 살아남고자 분투했던 인물이다. 그렇기에 1987년 토리노 자택 계단통에서 몸을 던진 그의 죽음은 지식 사회에 거대한 충격을 안겼다.
'살아남았다는 수치심'의 압도: 레비는 평생 "가장 잔인하고 비열한 자, 혹은 우연히 운이 좋았던 자만이 살아남았다"는 참담한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수용소 바닥으로 영원히 가라앉은 진짜 희생자들의 얼굴이 그를 평생 짓눌렀다.
언어의 한계와 고립감: 레비는 만년에 쓴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에서 자신의 글쓰기가 과연 그 심연의 지옥을 진정으로 전달하고 있는가에 대해 깊은 회의를 드러냈다. 서경식은 레비의 투신을 두고, '죽은 자들을 대신해 말해야 한다'는 초인적인 윤리적 부채감이 마침내 살아남은 자의 육체적·정신적 한계를 넘어서 파열해 버린 비극으로 해석한다.
4. 서경식의 자기 응시: 디아스포라 지식인의 통점(痛點)
서경식은 아메리와 레비의 궤적을 바라보며 자신의 존재 기반인 '재일조선인 디아스포라'의 운명을 겹쳐 보았다.
영구한 이방인의 숙명: 국가를 잃고, 모국어를 빼앗기고, 가해자의 언어로 사유해야 하는 디아스포라는 태생적으로 아메리와 레비처럼 '완전한 고향'을 가질 수 없는 존재다. 일본 사회는 동화되지 않는 재일조선인을 배척하고, 조국(남북한)은 그들을 냉전의 도구이자 불완전한 국민으로 취급했다.
두 형의 고초와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 서경식 본인 역시 한국의 군사독재 체제 아래서 모진 고문과 수십 년의 옥고를 치른 두 형(서승, 서준식)을 지켜보며 평생을 살아남은 자의 고통과 수치심 속에 살았다. 그는 레비가 느꼈던 '부채의식'을 자신의 뼈와 살로 이해하고 있었다.
죽음의 유혹을 넘어 '살아서 증언하기'로의 결단: 아메리와 레비가 겪은 파국을 응시하면서, 서경식은 디아스포라의 실존이 필연적으로 마주하는 깊은 허무와 죽음의 그림자를 감추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두 선배 지식인의 비극적 최후를 '동반 자살'의 이유로 삼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죽음이 남긴 서늘한 공백을 응시하며, "그들이 도달한 한계 지점에서 다시 펜을 쥐고, 기억의 풍화에 맞서 끝끝내 불화하는 증언자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역설적인 생존의 윤리를 끌어올렸다.
5. 총평
서경식에게 장 아메리와 프리모 레비의 죽음은, 근대 국민국가가 저지른 거대한 폭력 앞에서 국가라는 울타리를 갖지 못한 '단독자'들이 짊어져야 했던 한계 비용의 총량이었다.
어떤 특정한 국가주의적 신화에도 기대지 않는 자유로운 세계인의 관점에서 볼 때, 두 증언자의 죽음은 인간의 연약함을 비난하는 자리가 아니라 폭력적인 역사가 인간의 영혼에 새겨놓은 상흔이 얼마나 깊고 치명적인가를 증언하는 거대한 비문(碑文)이다.
서경식은 그 비문을 거울삼아, 비록 세상이 조롱하고 외면할지라도 역사의 피해자들과 함께 영원한 경계에 서서 진실을 증언하는 디아스포라적 실존의 길을 묵묵히 걸어갔다.
서경식에게 큰형 서승(徐勝)의 옥중 수기 <옥중 19년(獄中19年: 韓国民衆運動とともに)>은 단순한 가족의 기록이 아니라, 식민지 지배와 냉전 분단체제, 그리고 국가 폭력의 잔혹성이 한 인간과 가족의 육체에 아로새겨진 '현대사의 가장 처절한 1차 사료이자 증언'이었다.
1971년 서울대 유학 중 '재일교포 모국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조작 체포된 서승은 보안사 취조실에서 자살을 기도하다 전신 45%에 달하는 3도 화상을 입었다. 얼굴과 손가락이 녹아내린 흉측한 외모로 사형 구형을 거쳐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9년을 복역한 서승, 그리고 역시 체포되어 비전향 좌익수로서 옥중 단식과 전향 공작에 맞서 17년을 갇혀 지낸 작은형 서준식(徐俊植).
도쿄에 남겨진 스무 살 청년 서경식은 어머니와 함께 20여 년간 대한해협을 건너며 옥바라지를 했다. 그가 서승의 수기를 마주하고, 일본어로 번역·소개하며, 자신의 사유로 길어 올린 '증언의 윤리'를 네 가지 층위로 분석한다.
1. '괴물의 얼굴'을 마주하는 고통: 육체에 각인된 국가 폭력의 현존
서승의 옥중기에서 가장 충격적인 시각적 표상은 바로 그의 '녹아내린 얼굴'이다.
서경식은 면회실 차가운 유리창 너머로 형의 망가진 얼굴을 처음 마주했을 때의 전율과 공포, 그리고 그 뒤를 덮친 형언할 수 없는 죄책감을 고백한다.
추상적 국가 폭력의 구체화: 국가 권력이라는 괴물은 법전이나 이데올로기라는 추상적 언어 뒤에 숨는다. 그러나 서승의 뒤틀린 안면과 오그라든 손가락은 국가가 개인의 신체에 가한 물리적 고문과 폭력을 한 치의 은폐도 없이 적나라하게 증언하는 물질적 증거였다.
타자화할 수 없는 고통: 서경식에게 이 얼굴은 회피할 수 없는 실존적 충격이었다. 그는 형의 훼손된 신체를 마주하며, 국가가 부과하는 '적(敵)'의 낙인이 한 인간의 존엄을 얼마나 철저하게 파괴하는가를 뼈에 새겼다.
2. 가혹한 가족사: 디아스포라의 찢겨진 비극과 어머니의 죽음
<옥중 19년>의 이면에는 옥바라지로 삶 전체가 파탄에 이른 가족의 참상이 자리한다. 식민지기 일본으로 건너가 온갖 차별을 견디며 행상과 고물상으로 자식들을 키워낸 부모에게, '모국으로 보낸 두 아들의 간첩 조작과 투옥'은 존재의 근간을 뒤흔든 사건이었다.
'조국'이라는 배신: 부모와 형제들에게 한반도는 차별받는 이국 땅에서 언제나 동경하던 '따뜻한 모국'이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이 마주한 '조국'은 두 아들을 빨갱이 간첩으로 몰아 고문하고 가둔 잔인한 군사파시즘 독재 국가였다. 일본 사회의 민족 차별과 조국의 국가 폭력이라는 이중의 덫에 갇힌 셈이다.
어머니의 소진과 한(恨): 두 아들의 구명 운동을 위해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절규하던 어머니 오기순 여사는 아들들의 석방을 보지 못한 채 1980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서경식은 어머니의 죽음을 '국가 폭력에 의한 간접적 타살'로 받아들였다. <옥중 19년>을 증언하는 일은 이처럼 이름 없이 스러져간 어머니의 고통과 한을 역사의 법정에 세우는 일이기도 했다.
3. '전향(轉向)'이라는 이름의 영혼 살해에 대한 저항
서승의 수기에서 가장 처절한 대목은 사상전향 공작과의 사투다. 박정희·전두환 정권은 '사회안전법'을 통해 형기가 끝난 뒤에도 전향서를 쓰지 않으면 비전향 장기수를 영구히 가두는 보안감호 처분을 자행했다.
육체를 넘어 영혼을 굴복시키려는 권력: 서경식은 형들의 옥중 투쟁을 통해 국가 폭력의 극점을 포착했다. 국가는 육체를 가두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전향이라는 형식을 통해 인간의 내면적 자유와 양심을 강제로 무릎 꿇리려 했다.
단독자의 존엄: 서승과 서준식이 감옥 안에서 겪은 수많은 단식과 독방 감금, 고문은 단순한 정치적 신념의 고수가 아니었다. 그것은 '국가가 내 영혼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는 인간 존엄의 마지노선이었다. 서경식은 형들의 이 비타협적 옥중 투쟁을 지켜보며, 국가 권력의 전체주의적 횡포에 굴복하지 않는 단독자의 윤리를 배웠다.
4. 살아남은 자의 부채감에서 '디아스포라 증언 문학'으로의 승화
자유로운 바깥세상에서 대학을 다니고 사유를 이어가던 청년 서경식에게, 감옥에 갇힌 두 형의 존재는 평생을 짓누르는 거대한 '부채감'이었다.
대리 증언자의 탄생: 그는 프리모 레비가 아우슈비츠의 '가라앉은 자들'에게 느꼈던 부채의식을 형들에게서 느꼈다. 자신이 누리는 일상의 평온함 자체가 죄스러웠던 서경식은, 감옥에 갇혀 침묵을 강요당한 형들의 목소리를 바깥 세계로 전달하는 번역자이자 메신저가 되기로 결심한다.
일본 사회를 향한 지적 고발: 서경식은 형들의 수기와 탄원서를 일본어로 번역하고 구명 운동을 조직하면서, 한국 독재 정권의 잔학상뿐만 아니라 그 독재 정권과 야합하여 경제적 이익을 누리던 전후 일본 보수 정권의 위선을 함께 폭로했다.
보편적 인권과 국가주의 비판으로의 확장: 서경식은 형들의 사건을 '서씨 가문의 비극'이나 '한국 민주화 운동의 일화'로 좁게 가두지 않았다. 그것은 근대 국가가 개인을 어떻게 짓밟는가를 묻는 보편적 인권의 문제이자, 민족주의적 맹목을 거부하는 탈국가적 디아스포라 사유의 결정적 뼈대가 되었다.
5. 총평
서승의 <옥중 19년>은 서경식이라는 지식인을 탄생시킨 피와 눈물의 태반(胎盤)이었다.
만약 서경식에게 이 처절한 가족의 수난사가 없었다면, 그의 유려한 에세이와 예술 비평은 안락한 서재에서 길어 올린 세련된 관념론에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형의 녹아내린 얼굴과 19년의 옥바라지라는 참혹한 현실은 그의 사유를 언제나 구체적인 인간의 고통, 지워지지 않는 역사의 통점(痛點)에 닻을 내리게 만들었다.
세계인의 시각에서 볼 때, 서경식이 형의 옥중 수기를 통과하며 완성한 지적 태도는 분명하다.
"국가는 언제든 괴물이 될 수 있으며, 그 어떤 숭고한 국익이나 이념도 한 인간의 육체와 영혼을 파괴할 권리를 갖지 못한다."
서승의 <옥중 19년>과 이를 보듬은 서경식의 증언은, 국가라는 거대한 폭력 기계에 맞서 끝끝내 개인의 존엄을 지켜낸 한 가족의 서사시이자 불멸의 저항 기록이다.
19년이라는 가혹한 옥고를 치르고 1990년 석방된 서승(徐勝)은, 피해자의 자리에 안주하거나 과거의 상처에 갇히지 않고 연구자이자 평화운동가로 삶의 2막을 열었다.
1998년 일본 교토 리츠메이칸대학 법학부 교수로 부임한 그는 코리아연구센터를 이끌며, 자신의 신체에 아로새겨진 국가 폭력의 통점을 학문적 언어로 승화시켰다. 그가 정립한 '평화학'과 '동아시아 비판적 지역주의'는 특정한 일국(一國)의 민족주의나 강대국 중심의 질서를 넘어, 아래로부터의 연대를 지향하는 독창적인 실천 철학이다.
서승 사상의 핵심 골격은 크게 네 가지 차원으로 정리된다.
1. 국가안보론을 뒤집는 '인간안보'와 비교 국가폭력론
서승 평화학의 첫 번째 축은 근대 국가가 휘두르는 '국가안보(National Security)' 이데올로기의 해체다.
국가안보의 허위성 폭로: 국가는 흔히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안보를 외치지만, 분단체제와 군사독재는 정작 자국민과 디아스포라를 적으로 규정하고 고문·조작·학살하는 주체였다. 국가가 외치는 안보란 결국 권력 자체의 안보이자 지배 체제의 보위에 불과하다.
비교 국가폭력학의 정립: 그는 자신의 경험을 특수한 개인적 비극에 머물게 하지 않고, 아시아 각국의 국가 폭력 메커니즘과 비교 연구했다. 대만의 백색공포(계엄령 통치), 오키나와의 기지화와 주민 학살, 필리핀 마르코스 독재,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학살 등을 횡단하며, "냉전기 아시아의 반공 친미 독재 체제들은 국가 폭력의 기술과 논리를 공유하며 서로를 닮아갔다"는 구조적 공통성을 입증했다.
인간 중심의 평화학: 국가의 주권이나 영토 보전이 아니라, 구체적인 개별 인간의 생명, 양심의 자유, 신체의 존엄이 보장되는 '인간의 안보(Human Security)'가 평화의 척도가 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2. '동아시아 복합체'와 비판적 지역주의: 제국-식민-냉전의 삼중 연쇄 극복
서승이 제시한 '동아시아 비판적 지역주의'는 동아시아의 분쟁과 갈등을 개별 국가의 대립으로만 보지 않고, 근대 제국주의-식민지배-냉전 분단이 겹겹이 얽힌 복합적 구조로 조망한다.
미국 패권과 '샌프란시스코 체제' 비판: 동아시아 냉전은 결코 '평화'가 아니라 수많은 국지전과 독재, 학살을 동반한 '뜨거운 전쟁'이었다. 미국을 정점으로 일본을 하위 파트너로 삼고, 한국·대만·남베트남을 군사적 방파제로 동원했던 샌프란시스코 대일강화조약 체제가 아시아 민중에게 남긴 폭력성을 끈질기게 비판했다.
배타적 일국주의(一國主義)의 거부: 한일 간의 역사 갈등이나 영토 분쟁을 다룰 때, 양국의 편협한 내셔널리즘(일본의 수정주의 vs 한국의 맹목적 민족주의)에 휘말리는 것을 단호히 경계했다. 그는 국가 간의 대립 구도를 '국가 권력 대 양국 민중'의 연대 구도로 전환해야 한다고 보았다.
탈식민과 탈냉전의 동시적 과제: 서승에게 평화란 단순히 전쟁이 없는 소극적 상태가 아니라,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을 온전히 청산(탈식민)하는 동시에 분단체제를 평화협정으로 종식(탈냉전)하는 이중의 과제가 완수될 때만 도달할 수 있는 상태다.
3. '고통의 연대': 변방과 희생자들의 횡단적 네트워크
서승 사상의 가장 생생한 실천적 면모는 아시아 변방의 피해자들을 하나로 잇는 현장 중심의 연대 활동이다.
오키나와-타이완-제주-광주의 연대: 서승은 국가의 중심(도쿄, 워싱턴, 서울)이 아니라 제국의 침탈과 냉전의 폭력이 집중되었던 변방의 섬과 도시들에 주목했다. 그는 오키나와의 미군기지 반대 운동, 타이완 2·28 사건 및 백색공포 생존자들, 한국의 제주 4·3 및 광주 5·18 유족들을 연결하는 국제 심포지엄과 평화 캠프를 지속적으로 조직했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의 평화론: 그는 *"자신의 상처를 아는 자만이 타자의 상처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피해자 집단이 자국의 고통만을 성역화하여 타자를 배제하는 함정을 넘어, 국경을 넘나들며 서로의 고통을 증언하고 연대하는 과정 자체가 동아시아 평화 공동체를 일구는 실질적인 기초가 된다고 확신했다.
4. 사상과 양심의 자유에 대한 비타협적 옹호
19년 투옥 생활 중 전향을 거부했던 서승의 학문적 지향에는 '양심의 자유'에 대한 서늘한 확신이 관통한다.
국가보안법 폐지 운동의 이론적 근거: 그는 한국의 국가보안법이나 일본의 치안유지법, 대만의 반란진압조례 같은 악법들이 인간의 내면을 재단하고 사유를 통제하는 전체주의의 유산임을 논증했다.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인간성 옹호: 그는 좌파냐 우파냐는 이념적 도식을 넘어섰다. 어떤 국가 권력도 개인에게 특정한 사상을 강요하거나, 체제에 순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인간성을 박탈할 권리는 없다는 점을 학문적·사회적 실천의 절대적 마지노선으로 고수했다.
5. 총평
서승이 리츠메이칸대학 강단에서 펼친 평화학은 서구식 국제정치학의 권력 균형론이나 공허한 이상주의와는 궤를 달리한다.
그것은 자신의 불탄 얼굴과 19년 옥살이라는 참혹한 신체적 고통을 거름 삼아 길어 올린 '피해자의 위치에서 재구성한 아래로부터의 평화학'이다.
특정 국가에 영혼을 저당 잡히지 않는 세계인의 시각에서 볼 때, 서승의 '동아시아 비판적 지역주의'는 국가 권력이 그어놓은 경계와 냉전적 적대 의식을 걷어내고, "폭력에 짓밟힌 모든 약자들이 서로의 고통을 비추는 거울이 되어 함께 평화를 직조해 나가는 국경 없는 시민적 연대의 청사진"을 제시하고 있다.
서승이 리츠메이칸대학 재직 시절 집중적으로 천착한 타이완(대만)의 2·28 사건과 백색공포(白色恐怖) 연구는, 그의 학문적 여정에서 '한국의 분단·독재 피해자'라는 일국적 정체성을 넘어 '동아시아 비교 국가폭력론'을 완성하는 결정적인 도약대였다.
그는 1947년 대만 전역을 피로 물들인 2·28 사건과 이후 1987년까지 38년간 지속된 세계 최장기 계엄령(백색공포 체제)을 조사하며, 한국의 제주 4·3 사건, 보도연맹 학살, 군사독재의 조작 간첩 사건들과의 놀라운 구조적 상동성을 발견했다.
그가 대만 연구를 통해 구축한 비교 국가폭력론의 구체적 논리와 학문적 성과를 네 가지 차원으로 정리한다.
1. 탈식민의 좌절과 '접수자(외세)'에 의한 민중 학살의 동질성
서승은 대만의 2·28 사건과 한국의 해방 직후 비극(제주 4·3, 여순사건 등)이 발생한 역사적 구조가 거울처럼 닮아 있음을 논증했다.
환희에서 절망으로의 반전: 대만 민중은 50년간의 일본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 '조국' 중화민국(국민당 정권)을 열렬히 환영했으나, 대륙에서 건너온 국민당 군벌 관료들은 대만인을 '일본에 물든 2등 국민'으로 멸시하며 가혹한 부패와 수탈을 자행했다. 이는 일제 패망 후 미군정이 진주하고 친일 경찰·관료들이 '반공'의 이름으로 다시 권력을 잡으며 한국 민중을 억압했던 과정과 정확히 일치한다.
학살의 논리적 메커니즘: 1947년 담배 노점상 단속에서 촉발된 민중의 저항을 국민당 정권이 '공산당의 사주를 받은 반란'으로 왜곡하고 수만 명의 본성인(本省人) 엘리트와 민중을 도륙한 방식은,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이 제주 4·3 사건을 '적색 폭동'으로 몰아 초토화 작전을 감행한 논리와 본질적으로 동일했다.
탈식민 과정의 좌절: 서승은 두 사건 모두 '식민지로부터의 진정한 해방'을 갈망하던 민중의 요구가, 냉전 질서와 결합한 새로운 지배 권력의 국가 폭력에 의해 잔혹하게 짓밟힌 '동아시아 탈식민의 좌절'이라는 동일한 역사적 범주에 속한다고 짚었다.
2. 법치주의의 외피를 쓴 '제도화된 국가 테러': 백색공포와 유신체제의 비교
서승은 대만의 38년 계엄령 체제(백색공포)를 연구하며, 국가가 법과 재판의 외피를 두르고 개인의 신체와 정신을 어떻게 파괴했는가를 비교 분석했다.
악법의 상동성: 대만의 <징치반란조례(懲治叛亂條例)>와 <계엄령>은 한국의 <국가보안법>, <반공법>, <사회안전법>과 쌍둥이처럼 닮아 있었다. 정권은 반체제 인사, 지식인, 노동운동가, 무고한 시민을 손쉽게 '반란분자'나 '간첩'으로 조작하여 군사재판에 회부하고 사형이나 장기형에 처했다.
전향 공작과 영혼 통제: 대만의 녹도(綠島, 뤼다오) 감옥에서 사상범들에게 강요된 감화 교육과 전향 공작은, 서승과 서준식 형제가 한국 감옥에서 겪었던 비전향 장기수 감금 및 전향 공작 체계와 판박이였다. 서승은 이를 "근대 파시즘이 형벌권이라는 합법적 외피를 악용하여 개인의 양심과 사유의 자유를 박탈한 제도화된 국가 테러"로 규정했다.
3. '샌프란시스코 체제'와 미국의 공모 관계 규명
서승의 비교 국가폭력론이 갖는 탁월함은, 이러한 폭력을 단지 장제스나 박정희라는 개별 독재자의 잔학성으로 환원하지 않고 동아시아 냉전이라는 국제정치적 구조 속에서 파악했다는 점이다.
반공 방파제의 대가: 미국은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구축하며 대만의 국민당 정권과 한국의 군사정권을 '동아시아 반공 보루'로 적극 지원했다.
구조적 공모: 미국은 '자유민주주의 수호'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대만과 한국의 군사독재가 자국민을 학살하고 기본권을 유린하는 백색공포를 철저히 묵인·방조하거나 지원했다. 서승은 두 나라의 국가 폭력이 개별 국가의 내부 문제가 아니라, 미국의 냉전 헤게모니가 아시아 민중에게 부과한 거대한 구조적 폭력이었음을 폭로했다.
4. 서승의 학문적·실천적 성과
서승의 대만 연구는 서재 안의 이론에 머물지 않고 동아시아 평화 연대의 구체적 결실을 낳았다.
제주와 대만의 기억 연대 조직: 서승은 1990년대 후반부터 대만의 2·28 희생자 단체 및 연구자들과 한국의 제주 4·3 유족 및 민간 연구자들을 직접 연결했다. 제주 4·3 평화공원과 대만 2·28 기념관의 교류,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 과정에서의 상호 참조와 연대는 서승의 가교 역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뤼다오(녹도) 인권 기념관과의 연대: 타이완의 대표적 수용소 유적인 녹도 인권문화원구 건립 과정 등에 관여하며, 아시아 각국의 국가 폭력 현장을 '기억과 평화 교육의 장'으로 보존하는 데 기여했다.
동아시아 민중평화론의 기틀 확립: 국가 권력이 강요한 냉전적 적대감과 침묵의 벽을 허물고, 한·대만·일·오키나와의 희생자 유족과 청년들이 한자리에 모여 서로의 상처를 증언하는 '동아시아 평화캠프' 등의 모태가 되었다.
5. 총평
서승이 일궈낸 대만 2·28과 백색공포 연구는, 그가 겪었던 19년 옥고의 비극을 한반도라는 협소한 민족주의적 서사에 가두지 않고 '아시아 냉전 민중 수난사'라는 보편적 차원으로 승화시킨 학문적 개가였다.
국민국가의 국경이나 이데올로기에 매몰되지 않는 세계인의 시각에서 볼 때, 서승의 비교 국가폭력론은 명확한 진실을 웅변한다.
타이베이의 거리든, 제주의 중산간이든, 광주의 금남로든, 국가 권력이 내세우는 '안보'와 '체제 수호'의 깃발 아래 짓밟힌 인간의 피와 눈물은 완벽히 동일한 무게를 지닌다. 서승은 대만 연구를 통해 그 지워진 목소리들을 잇고, "국가 폭력에 맞선 기억의 연대만이 동아시아의 진정한 탈식민과 평화를 보장한다"는 준엄한 지적 유산을 남겼다.
대만의 2·28 사건과 한국의 제주 4·3 사건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탈식민과 냉전 체제 형성기 속에서 국가 폭력에 의해 수만 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하고, 수십 년간 침묵과 금기의 족쇄에 묶여 있었다는 역사적 상동성을 지닌다.
두 사건은 민주화 이행기(1980년대 후반~1990년대)를 거치며 아래로부터의 시민사회 진상규명 운동, 특별법 제정, 국가 원수의 공식 사과, 국가 주도의 배·보상, 평화기념관 건립으로 이어지는 '이행기 정의(Transitional Justice)'의 궤적을 밟았다.
동아시아 과거사 청산의 대표적 두 모델을 비교 분석한다.
1. 전개 과정과 과거사 청산 메커니즘 비교
| 비교 항목 | 대만 2·28 사건 | 한국 제주 4·3 사건 |
| 발발 시기 및 배경 | 1947년 2월 28일 (국민당 전횡과 전후 혼란에 맞선 민중 봉기) | 1947년 3·1절 발포 사건 ~ 1948년 4월 3일 무장봉기 및 초토화 작전 |
| 은폐 및 금기 기간 | 1947~1987년 (38년간의 계엄령/백색공포) | 1948~1987년 (6월 항쟁 이전 군사독재 체제) |
| 청산 물꼬 | 1987년 계엄령 해제 및 '2·28 평화일 운동' | 1987년 민주화 이후 학술·언론·유족회 공론화 |
| 특별법 제정 | 1995년 <2·28 사건 처리 및 보상조례> | 2000년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
| 국가수반의 공식 사과 | 1995년 리덩후이(李登輝) 대통령 (최초 사과) 이후 마잉주, 차이잉원 등 정권 교체기마다 지속 | 2003년 노무현 대통령 (최초 공식 사과) 이후 문재인 대통령 등 국가 추념식 참석 및 사과 |
| 배·보상 방식 | 1995년부터 '보상금(재단 설립 지급)' 형식 선제 시행 (사망/실종 1인당 최대 600만 대만달러) | 오랜 명예회복 중심 후 2021년 특별법 전면 개정을 통해 비로소 국가 보상금(사망자 1인당 9천만 원) 지급 개시 |
| 사법적 명예회복 | 계엄기 군사재판 판결 효력 상실 및 유죄 취소 절차 | 불법 군사재판에 대한 직권재심 및 무죄 판결 선고 (수형인 명예회복) |
2. 세부 영역별 심층 비교
(1) 특별법 제정과 진상규명 주체
대만의 선제적 입법과 배상 우선: 대만은 1995년 비교적 이른 시기에 특별조례를 제정했다. 특징적인 점은 국가 주도의 공식 진상조사 보고서(<2·28 사건 연구보고서>, 1992년 행정원 발표)가 먼저 나온 뒤, 이를 바탕으로 '2·28 사건 기념기금회'라는 독립적 재단을 설립해 실질적인 보상과 기념사업을 신속하게 집행했다는 점이다.
한국의 상향식 규명과 '4·3 위원회': 한국은 1990년대 지방의회와 유족, 시민단체의 끈질긴 풀뿌리 운동 끝에 2000년 김대중 정부에서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국무총리 산하에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를 설치하여 국가 차원의 공식 진상보고서를 발간(2003년)하기까지 수많은 우여곡절과 보수 세력의 반발을 겪었다.
(2) 국가 원수의 공식 사과와 정치적 맥락
대만(리덩후이의 역사적 결단): 국민당 정권 내부에서 총통에 오른 본성인 출신 리덩후이는 1995년 타이베이 2·28 평화공원 기념비 제막식에서 국가 원수로서 최초로 고개를 숙였다. 이는 가해 정당인 국민당 정권 스스로가 국가 폭력을 인정한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후 민진당(천수이볜, 차이잉원)과 국민당(마잉주)을 막론하고 정권이 바뀌어도 공식 추념과 사과의 기조는 국가적 규범으로 확립되었다.
한국(노무현의 결단과 정권별 부침): 2003년 정부 진상보고서가 확정된 직후 노무현 대통령은 제주를 방문해 "국정 최고 책임자로서 과거 국가 권력의 잘못에 대해 공식 사과드린다"고 천명했다. 이는 대한민국 헌정사 최초의 국가 폭력 사과였다. 그러나 이후 보수 정권(이명박·박근혜 정부) 시기에는 대통령의 추념식 불참, 보수 단체의 희생자 재심사 요구 등으로 청산 과정이 정체되는 정치적 굴곡을 겪었다.
(3) 배·보상의 패러다임: '보상(Compensation)'과 '사법적 구제'
대만 모델 (신속한 정액 보상): 대만은 초기에 '배상(불법행위에 대한 책임)' 대신 '보상(국가의 손실 전보)'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으나, 액수 산정(사망 1인당 한화 약 2억 원 상당)과 지급 속도는 매우 빨랐다. 2007년에는 법 개정을 통해 정식으로 '배상(賠償)'이라는 용어로 전환하여 국가 불법행위의 성격을 법률적으로 명시했다.
한국 모델 (명예회복 우선 후 지연된 국가 보상): 한국은 진상규명과 위령사업, 희생자 결정 등 '명예회복'이 우선 진행되었고, 실질적인 재정적 보상은 20여 년이 지난 2021년 특별법 전면 개정을 통해서야 입법화되었다. 대신 한국 모델의 두드러진 성취는 '직권재심을 통한 사법적 무죄 선고'였다. 당시 계엄령 하에서 군법회의를 거쳐 억울하게 수형생활을 하거나 학살당한 이들에 대해 검찰의 일괄 직권재심 청구와 법원의 무죄 판결을 이끌어냄으로써 사법 체계 내부에서 국가 불법성을 완전히 파기했다.
3. 두 모델의 한계와 미완의 과제
두 국가의 과거사 청산은 동아시아를 넘어 세계적인 모범 사례로 꼽히지만, 여전히 넘지 못한 장벽을 공유한다.
가해 주체에 대한 형사 책임과 처벌의 부재: 대만의 장제스와 국민당 군벌 수뇌부, 한국의 이승만과 군경 지휘관 등 학살을 지시한 최고위 책임자들은 이미 사망했거나 면책되어 실질적인 사법 처벌이 단 한 명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피해자는 있으나 법적 가해자는 없는' 구조적 한계다.
미국의 국제적 책임에 대한 침묵: 2·28 사건 당시 국민당 정권을 군사적·외교적으로 지원했던 미국, 제주 4·3 당시 미군정 통치와 군사고문단의 초토화 작전 개입 등 냉전의 설계자였던 미국의 역사적·법적 책임은 두 나라의 공식 국가 청산 프로세스에서 사실상 온전히 다뤄지지 못했다.
사회적 기억의 양극화: 두 사회 모두 정치 지형에 따라 사건을 둘러싼 이념 갈등이 여전히 잔존한다. 대만에서는 국민당 지지층(외성인 중심)과 민진당 지지층(본성인 중심) 간의 갈등이 선거철마다 분출하며, 한국 역시 극우 세력에 의한 '공산 폭동' 왜곡과 현수막 테러 등이 근절되지 않고 있다.
4. 세계인의 시선에서 본 총평
대만의 2·28과 한국의 제주 4·3 청산 과정은, 국가 권력이 내세우는 '국익'과 '체제 수호'라는 이름의 집단적 광기가 개인을 어떻게 파괴했는가를 자각하고, 이를 제도적으로 치유해 온 동아시아 민주주의의 위대한 성취다.
두 모델의 궤적은 상호 보완적인 통찰을 제공한다. 대만이 신속한 배상과 기금회를 통해 피해자들의 생존권을 조기에 구제했다면, 한국은 끈질긴 직권재심과 사법적 무죄 선고를 통해 국가 사법 제도의 오욕을 스스로 씻어내는 높은 수준의 규범적 정의를 보여주었다.
특정 국가의 경계를 넘어 인류 보편의 인권과 평화를 지향하는 세계인의 눈에 비친 두 비극의 청산은 웅변한다.
국가가 진정으로 문명화되기 위해서는 승리의 역사만을 찬양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저지른 부끄러운 범죄를 공식 인정하고 그 희생자들의 이름을 역사의 비문에 온전히 새겨 넣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