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 생각
조정래 선생에 관해서는 전에도 두어번 쓴 적이 있고 해서 더이상 관심이 없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디서 그런 폭력성이 나오는지 궁금해져서 지난 기사들을 좀 찾아 봤다. 그리고 그의 경향과 생각이 좀 더 리얼하게 나타난 강연기록 발견.
“일제시대를 말할 때 공식명칭은 반드시 ‘일본놈’들이어야“하는데 그 이유는 “우리 산천에 있는 모든 것 인력 착취하고 그리고 36년에 걸쳐 400만 명을 죽였”기 때문이다. (숫자는 가급적 호방하게!
일제시대 정책에 따라 아버지가 대처승이 될 수 있어 “일본의 은혜로 제가 태어났는데, 그 은혜를 갚음하기 위해 일본의 잔학상을 쓴 <아리랑>을 썼”다.
(은혜는 원수로!)
문학이란 고작 “우리 인생 그 자체를 글로 쓰는 것”이고 “글로 쓰되 거기에다가 감동을 내 영혼이 흔들려 느낌이 오래오래 가도록, 감동을 넣어서 예술화 시킨 그것이 곧 문학”이다.(글에는 잊지 말고 설탕을!)
또 “문학이 인생의 전체의 희로애락을 감동적으로 쓰는 것인데 역사도 인생을 쓴 것이지만 (전체 중에) 골라”낸 것이니
“그럼 어떤 것이 큰 것이겠습니까? 문학이 더 크지요.
그러므로 이런 해답이 나옵니다. 역사학자는 문학을 몰라도 역사학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문학가는 역사를 모르면 문인이 될 수 없다. “
(큰 것이 좋아! 좋은 것은 문인!)
“세상을 깨끗이 정화시킬 수 있는 글을 써내야 하는 게 작가들의 임무고 소임” 이다.
(세상을 복수의 피로 물들이자!)
“그것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작품이 하나도 남지 않고, 작품이 남지 않으면 문학을 하나마나””말로 지은 원수는 백년을 가고 글로 지은 원수는 만년을 간다”
(정의의 사도 작품님들 모셔놓고 천년만년 살고지고!)
“글이라는 것이 얼마나 생명이 긴 것인가? 글이라는 것이 얼마나 쓰기가 힘든 것인가?”
(“글감옥”의 고통을 아는 나는야 초작가!)
그리고 덧붙이기를
“저는 지금 등단한지 40년 돼, 금년으로 나이가 예순 여덟인데 마지막 발원이 있다면 앞으로 10년 저를 건강히 쓰기를 바라는데, 그때까지 약 3권의 신작을 써서 출판기념회를 하면서 제 작가생활을 마감하는 소망을 갖고 있습니다.”
10년전에 말씀하신 소망을 이루셨으니 이제 그만 두시면 될 것 같다. 그런데 마조히즘과 새디즘으로 가득한 조정래의 말과 글이 훗날 남는다면, 고전으로서가 아니라 ‘시대적생산물’로서일 듯. ‘식민지와 냉전체제가 낳은 불행한 유산’으로서. 8,90년대에 조정래의 작품이 읽힌 것 역시 시대적 소산이다. 작가도 독자도 시대가 만든다.
타자와 이어주는 ‘언어’라는 무기를 고작 혐오수단으로 사용하는 “대작가”님을 우리사회는 갖고 말았다.그나마 다행인 건 오늘의 대학생에겐 더이상 필독서가 아니라는 것.
Park Yu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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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bulkyo21.com/news/articleView.html?idxno=13835
Reply
Park Yu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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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하나 사고가 왜 문제인지 말할 수 있지만 더 언급하지 않는다.
일본여성은 뭐라고 부를까 생각하니 끔찍해져서.
Park Yuha's post
Park Yuha
역사기술도 마찬가지고 문학역시 인간이라는 오묘한 존재의 ‘하나로 말할 수 없음’에 대해 끝없이 탐구하는 쟝르다. 그렇기 때문에 지치지도 않고 수많은 History 와 Story가 쓰여지는 것.
조정래 선생의 가장 큰 문제는 역사 속 인물을 더이상 단순화시킬 수 없을 만큼 단순화한다는 점에 있다. 그래서 선악이 분명하고 권선징악의 구조를 갖는다. 물론 그런 결과에 이르기까지 차용되는 ‘민족수난담’은 온세상의 민족주의적History 와 Story가 즐겨 사용했던 구조다.
말하자면 지극히 단순한 구조.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카타르시스를 주고, 널리 읽힌다. 등장하는 남성들 대부분이 가부장적인 것도 민족주의 자체의 가부장적 속성 때문인데, 당시 386독자들에게 끼친 영향이 궁금해지기도 한다.
소설가가 未知의 과거에 대한 경외심을 품고 ‘이해’(탐구)하려 할 때, 혹은 이해불가한 것으로 그릴 때 소설은 깊이를 갖게 된다. 역사학자들이 내놓은 정답을 참조하며 스토리를 엮을 때 그 소설은 역사 바깥을 품을 수 없다. 그런 공간에서의 단죄란, 대상에 대해 더이상 생각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니, 지적 호기심의 부재선언과 다를 바 없다.
작가든 역사가든 주어진 자료로만 쓸 수 밖에 없고 때로 의식적인 편향도 일어난다. 물론 같은 자료를 놓고 다른 해석이 가능하기에 같은 주제로 역사도 소설도 다시 쓰인다.우리는 일제시대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고, 역사는 물론 소설도 더 많이 씌어야 한다.
조정래선생을 비롯해 반민특위재건을 갈망하는 분들이 많은데, 그런 분들은 반민특위 재판자료부터 먼저 좀 보시면 좋을 것 같다. 유죄인지 무죄인지를 가려야 했던 재판기록들은, 오히려 그러한 전제자체가 진정한 의미에서 성립 불가능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회사존립을 위해(핑계일 수 있다)비행기자금을 낸 사람과 일본 경찰에게 조선어를 가르친 사람 사이에, 경방단장이라는 동네 통반장격 직책을 봉사가 아니라 힘으로 사용하느라 동네주민의 엉덩이를 걷어차고 남의 집에 물을 뿌린 이가 있다.
말하자면 누구나가 기억이 생생했을 당시에 “친일파”로 솎아낸 이들조차, 그 실상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비루하다.
민족문제 연구소가 솎아낸 수천명이름을 외우기보다, 이 자료들을 전국민이 함께 읽고 토론하는 게 훨씬 생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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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어서 본 반민특위 재판기록 - 전4권
정운현 (엮은이)도서출판선인(선인문화사)2009-06-25

책소개
해방 후 제헌국회에서 구성한 반민특위의 친일파 재판기록을 일반인들도 접근할 수 있도록 쉽게 풀어낸 책이다. 반민특위는 8개월 가량 활동하면서 모두 688명의 반민피의자들에 대한 조사와 재판을 진행했다. 이 책에는 총 64명의 친일파들에 대한 재판기록이 담겨있다.
이 책에 소개된 내용은 반민특위에서 피의자로 선정한 이후 재판 과정 전반의 기록을 담고 있다. 다만 인물에 따라 내용의 차이는 있다. 즉 검거-조사-기소(구속)-재판 등 일련의 과정을 거친 거물 친일파들의 경우 자료가 방대하나 특위 조사 후 혐의 내용이 경미해 풀려난 사람의 경우 관련 자료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추천글
친일파 64명에 대한 사법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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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민족에게도 감추고 싶은 비밀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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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추천한 다른 분들 :
한겨레
- 한겨레 신문 2009년 7월 18일 잠깐 독서
저자 및 역자소개
정운현 (엮은이)
1959년 경남 함양 태생으로 대구에서 초중고와 대학을 마쳤다. 1984년 중앙일보에 입사해 조사부와 현대사연구소에서 기자로 근무했다. 김대중 정부 출범 후인 1998년 8월 서울신문으로 옮겨 한국언론 사상 처음으로 친일파 장기 연재 및 미디어 면을 신설하여 성역 없는 매체 비평을 담당했다.
2002년 1월 신생 인터넷 신문인 <오마이뉴스>로 옮겨 초대 편집국장을 지냈으며, 2005년 ‘제2의 반민특위’로 불린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사무처장을 맡아 친일파 청산 작업에 참여했다. 이후 한국언론재단 이사와 국무총리 ... 더보기
최근작 : <임종국 평전>,<홍암 나철과 대종교의 독립투쟁사>,<한 번뿐인 네 인생, 네 뜻대로 살아라> … 총 49종 (모두보기)
정운현(엮은이)의 말
지난 1993년 도서출판 다락방에서 ?반민특위 재판기록?이 처음 영인돼 나왔을 때의 감격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거기엔 제 나름의 사연이 있습니다. 친일파들의 행적을 추적하다 보면 곳곳에서 마주치는 게 반민특위인데, 정작 반민특위와 관련된 자료는 도무지 찾을 길이 막막했습니다. 기껏해야 반민특위 관련 사진 몇 장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반민특위 재판기록?이 나왔으니 친일문제를 연구하던 저로서는 그 반가움을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얼른 한 질을 구입해서 탐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2~3년이 지난 어느 날 현대사를 전공한 한 소장학자가 제게 이런 얘길 들려주었습니다. '반민특위 재판기록'이 출간돼 연구자들이 이제 친일파 재판 관련내용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됐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게 ‘그림의 떡’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 연유를 물어보았더니 영인본으로 출간된 게 문제라면 문제였습니다. 당시 조사관들이 작성한 재판 관련 문서가 한자투성이인데다 글씨도 제각각이어서 해독하기가 여간 곤란한 게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학계에서 이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며 제게 풀이를 좀 해줄 수 없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뜻밖에 제안 아닌 제안을 받은 저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우선 제가 이 어려운 작업을 잘 해낼 수 있을 것인지, 또 17권 분량이나 되는 막대한 양을 다 소화해낼 수 있을지도 걱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결국 이 일은 저의 몫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재판기록 풀이작업에 착수했습니다.
작업 도중에 저는 적지 않은 어려움에 직면했습니다. 우선 초서투성이의 한문을 읽어내는 것은 그렇다고 쳐도, 재판기록의 원본상태가 좋지 않은 곳이 적지 않아 애를 먹었습니다. 특히 이 작업은 단순히 흘려 쓴 한자를 읽을 줄 안다고만 해서 될 일이 아니었습니다. 친일파 인물들이나 일제시대 전반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이 없으면 해결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모 소장학자가 제게 이 일을 권유한 것도 아마 이런 연유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부족하나마 포기하지 않고 이 작업을 계속하기로 작정했습니다. 풀이한 것을 순국선열유족회의 기관지 ?순국?에 연재하기 시작했는데, 1997년 8월호부터 2006년 8월호까지 햇수로 근 10년간 연재하였습니다.
참고로 몇 가지 밝혀둘 것이 있습니다. 우선 이 책에 실린 것은 영인본에 실린 재판기록 전체를 다 풀이한 것은 아닙니다. 그 이유는 당초 책으로 펴낼 생각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 내용만이라도 대중들이 활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에서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여러 명의 증인들을 상대로 한 '증인신문조서'는 내용상 중복이 많아 더러 생략했습니다. 아울러 문체도 나름대로는 현대식으로 고쳤습니다. 한 예로 ‘여좌(如左)함’ 같은 것은 ‘아래와 같음’으로 고쳤습니다. 또 일부 필요한 대목에는 ‘편자 주(註)’를 덧붙였습니다. 그러나 풀이에 더러 오류가 없지 않을 것이며, 원문의 함의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것도 있을 것입니다. 이 모두는 전적으로 천학비재한 저의 책임입니다. 학식과 통찰력을 겸비한 후학들이 차후에 이를 보완해주길 기대합니다.
출판사 제공 책소개
해방 후 제헌국회에서 구성한 반민특위의 친일파 재판기록으로, 원본의 상태가 불량한데다 한자투성이인 것을 편자가 쉬운 우리말로 풀고 주석을 달아 일반인들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만들었으며, Ⅰ·Ⅱ·Ⅲ·Ⅳ 총 4권으로 구성돼 있다.
서론 - 2009년이 갖는 역사적 의미와 ‘반민특위’
올해는 우리 근현대사에서 한 획을 긋는 해이다.
안중근 의사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숙적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로부터 1년 뒤 우리는 국권을 상실하고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고, 국내외에서 항일투쟁이 본격화되었다. 1919년 고종황제가 덕수궁에서 비운의 삶을 마치자 이를 계기로 그해 3월 1일 거족적으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올해로 3·1만세의거가 일어난 지 90주년이 된다.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항복선언으로 우리는 일제로부터 해방되었고, 뒤이어 중국에서 활동하던 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하였다. 서대문 경교장에 거처를 마련한 백범 김구 주석은 새조국 건설과 통일정부 수립을 외치다 1949년 6월 26일 안두희가 쏜 총을 맞고 73세로 서거하였는데, 올해로 서거 60주기이다. 선생의 서거 20일 전인 6월 6일에는 친일경찰들이 반민특위를 습격하여 무력화시켰으며, 민족적 염원을 담아 구성됐던 반민특위는 결국 그해 8월 말로 문을 닫고 말았다. 그 역시 꼭 60년 전의 일이다.
반민특위는 해방 후 제헌국회에서 친일파 청산을 목적으로 구성한 국가 기구이다. 제헌헌법 제101조에는 “이 헌법을 제정한 국회는 1945년 8월 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고 규정함으로써 신생 대한민국정부가 친일파를 처단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였다. 이를 토대로 1948년 8월 5일 제40차 국회 본회의에서 김웅진 의원이 ‘반민족행위처벌법 기초특별위원회’ 구성을 긴급 동의안으로 내놓았는데, 이것이 해방 후 친일파 처벌의 첫걸음이었다. 표결에서 재적 155명 중 가(可) 105, 부(否) 16의 압도적인 찬성으로 통과되었으며, 그해 9월 7일 제59차 본회의에서 반민법은 재적 140명 중 가 103, 부 6으로 마침내 통과되었다. 반민법의 공소시효는 1950년 6월 20일까지였다.
반민법이 공포되자 국회는 후속작업으로 반민족행위자특별조사위원회(약칭 ‘반민특위’) 구성을 서둘렀다. 우선 독립운동 경력자, 학식과 덕망이 있는 자 등을 대상 국회의원 가운데서 특위 위원을 선임하였는데, 초대 반민특위 위원장에는 임시정부에서 문화부장을 지낸 김상덕 의원(경북 고령)이 선임되었다. 반민특위는 1948년 12월 23일까지 중앙에 중앙사무국, 각 도 조사부에 조사분국을 설치하여 골격을 잡은 다음 특별재판관 15인, 특별검찰관 9인, 그리고 중앙사무국에 조사관, 서기관을 임명함으로써 최종 진용을 갖추게 되었다. 입법 제안에서부터 법률 공포에 이르기까지 우역곡절 끝에 출범한 반민특위는 당시 돈으로 7천 4백만환의 예산을 타내 이듬해 1949년 1월 5일 중앙청 205호실에 자리를 잡고 본격활동에 들어갔다.
반민특위의 첫 성과는 1949년 1월 8일 친일기업인 박흥식 회신 사장 검거였다. 특위는 당시 박흥식이 미국으로 도피하려한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종로 2가 화신 사장실을 급습하여 현장에서 박흥식을 체포하였다. 이를 시작으로 반민특위는 문화계의 거두 춘원 이광수, 육당 최남선을 비롯해 직업적 친일분자 조병상(중추원참의, 종로경방단장), 경방 사장 김연수, 친일경찰 노덕술, 중추원 부의장 박중양, 여자 밀정 배정자, 친일관료 김대우(경북지사) 등을 속속 검거하였다. 반민피의자는 서대문형무소나 마포형무소에 수감한 후 특별조사위원회에서 조사관들이 조사를 진행한 후 특별검찰부에 넘기면 이곳에서 기소 여부를 결정하였고, 기소된 자에 대해서는 특별재판부에서 재판을 통해 처리하였다.
반민특위의 검거 선풍이 회오리치자 친일세력들과 이들을 정치적 기반으로 한 이승만 정권은 불안한 나머지 반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우선 특위 요원들의 흠집 내기에 이어 특위 요원 암살음모로 이어졌다. 그러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다가 이해 5월 하순에 터진 ‘국회프락치사건’으로 승기를 잡은 친일세력들은 마침내 “실력으로 반민특위 특경대를 해산시키자”고 뜻을 모으고는 6월 6일 아침 반민특위를 습격하였다. 이것이 소위 ‘6·6 사건’이다. 특위 관할서장인 중부서장 윤기병의 지휘로 출근하는 특위 요원 35명을 납치하여 중부서에 감금하였다. 이 와중에 다시 제2차 국회프락치사건이 터졌고, 설상가상으로 백범 김구 선생마저 서거하였다. 특위가 극도의 위기에 몰리자 특위 내에서조차 특위 운영에 대한 회의론이 제기됐고, 급기야 특별법 개정론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때마침 법무장관직을 사임하고 국회로 돌아온 이인을 비롯하여 곽상훈 등은 1950년까지 규정된 공소시효를 1949년 8월 31일까지로 단축시키자는 내용을 골자로 한 반민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국회가 어수선한 틈을 타 이 개정안은 7월 6일 국회를 통과하였고, 이에 김상덕 위원장 이하 초대 특위 위원 전원은 일괄 사퇴하였다. 김상덕에 이어 2대 위원장에는 이인이 선임되었는데, 이로써 8월 31일까지 한 달 남짓 남은 반민특위의 앞날은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결국 2차 특위는 독자적인 조사활동은 벌이지도 못한 채 1차 특위의 잔무처리 수준에서 활동을 마무리하였다. 2차 특위가 활동을 마무리할 무렵인 1949년 8월경에 나온 특위의 결정은 대개가 ‘무혐의(무죄)’ 혹은 ‘불기소’였다. 경방 사장 김연수에 대한 무죄판결은 재판관 간에 의견차가 극심했었다. 김연수 재판의 재판장이었던 서순영 3부 재판장이 무죄론을 주장하자 1부 재판장이었던 김병로(전 대법원장)는 “사회여론을 생각할 때 무죄판결은 위험천만한 재판”이라며 재고를 요청하기도 했다.
1949년 1월부터 활동을 개시한 반민특위는 그해 8월 31일 공소시효가 만료될 때까지 8개월 동안 나름으로는 다양한 활동을 벌였지만 당초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이 기간 동안 특위가 벌인 활동의 규모는 얼마나 될까? 특위가 문을 닫은 직후인 9월 10일자로 이인 2대 위원장이 국회에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활동기간 동안 특위가 취급한 친일파는 여성 6명을 포함하여 모두 688명이었다. 이들 가운데 특위 중앙사무국에서 직접 취급한 경우는 절반에 가까운 326명이었으며, 나머지는 각 도 조사부에서 취급한 경우이다. 또 특위가 취급한 688명 가운데 특별검찰부에 송치된 반민피의자는 모두 599명이었으며, 이들 가운데 영장이 발부된 자는 408명으로, 이 가운데 체포된 자가 305명, 미체포된 자가 73명이었으며, 자수 61명, 영장취소 30명이었다.
특별검찰부가 기소한 자 가운데 특별재판부가 해체되기 전에 판결을 받은 자는 78명이었으며, 미결인 친일파는 215명이었다. 재판에서 최종판결을 받은 자들 가운데는 경찰 출신이 40명으로 가장 많았고, 그다음은 중추원 참의였다. 처벌내용을 형량순으로 살펴보면, 체형(총 10명)을 받은 자 가운데 사형 김덕기(고등경찰), 무기징역 김태석(경찰, 중추원 참의), 징역 2년6개월 이기용(귀족), 징역 2년 이성구(면 서기, 징병자 부친 구타, 사망시킴), 징역 1년6월 조병상(중추원 참의), 징역 1년(총 5명) 김갑복(청주경방단 부단장, 공출/ 징용 적극 협력) 등이며, 이병길(습작, 이완용 아들) 등 9명은 집행유예를, 파인 김동환 등 23명은 공민권 정지를, 김연수, 박흥식 등 17명은 무죄판결을 받았다. 또 고문경찰 박종표 등 9명은 형 면제를,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변절자인 최린, 친일경찰 노덕술 등 8명은 공소기각 판결을 받았다. 이로써 상징적인 친일파들의 대다수는 ‘면죄부’를 받고 풀려나 친일파 청산은 이후 민족적 숙제로 남게 되었다.
책 소개
이번에 도서출판 선인(대표 윤관백)에서 펴낸 ?풀어서 본 만민특위 재판기록?(전 4권)은 현존하는 반민특위의 재판기록을 일반인들도 접근할 수 있도록 쉽게 풀어낸 것이다. 앞에서 소개한 대로 반민특위는 8개월가량 활동하면서 모두 688명의 반민피의자들에 대한 조사와 재판을 진행했다. 그런데 어찌된 연유인지 이들에 대한 재판기록은 상당부분 소실되었다. 반민특위는 활동이 종료된 후 대검찰청과 대법원으로 업무가 이관되면서 관련자료도 이관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남아 있는 자료는 없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번에 출간된 책은 지난 1993년 도서출판 다락방에서 영인본으로 출간한 ?빈민특위 재판기록?(전 17권)을 저본으로 하여 이를 풀이한 것으로, 원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소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 펴낸 '풀어서 본 만민특위 재판기록'에는 총 64명의 친일파들에 대한 재판기록으로, 반민특위에서 취급한 688명의 1할에도 채 미치지 못하는 분량이다. 그마저도 재판 관련자료 전체가 온전하게 보존된 것은 거의 없는데, 이는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훼손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친일관련 자료가 훼손된 사레는 이미 더러 발견된 적이 있다. 한 예로 모 공공도서관에 보존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일부가 예리한 칼로 기사 일부를 도려간 경우도 있었고, 또 국회도서관에서 소장 중인 친일파 관련 서적 가운데는 본문의 일부가 먹으로 칠해져 내용을 알아볼 수 없도록 훼손된 경우도 있었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일제 때 나온 서적 중 상당수가 멸실된 것은 물론 불순한 세력들에 의해 이처럼 친일관련 자료가 점차 훼손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번에 출간된 '풀어서 본 만민특위 재판기록'은 친일관련 자료의 보급은 물론 일반인들이 해독할 수 없는 내용을 쉽게 풀어냄으로써 대중화 작업에도 큰 기여를 할 것으로 보인다. 반민특위 재판기록 원본은 전부 손으로 쓴 수기체로, 한자투성이인데다 글씨체 역시 대부분이 초서에 가까운 흘림체들이다. 그 이유는 조사관들이 피의자나 증인들에 대한 신문내용을 즉석에서 기록한 것이기 때문이다. 풀이의 어려움은 비단 이것만이 아니다. 1949년 당시의 말투는 물론 일제시대나 친일관련 단체 및 인물에 대한 언급이 곳곳에서 등장하고 있어서 단순히 흘림체를 해독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즉 일제시대 전반이나 친일문제 등에 대해 폭넓은 지식을 겸비해야만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편역자 정운현 씨는 친일문제 전문가로서, 이번 작업의 최적임자였다고 할 수 있다. 정씨는 1980년대 후반부터 20년 넘게 친일문제에 천착해왔는데, 원전을 쉬운 말로 풀고 더러 주석도 덧붙였으며, 근 10년간에 걸쳐 이 작업을 진행해 왔다. (‘편역자 소개’ 참조)
이 책에 소개된 내용은 반민특위에서 피의자로 선정한 이후 재판 과정 전반의 기록을 담고 있다. 다만 인물에 따라 내용의 차이는 있다. 즉 검거-조사-기소(구속)-재판 등 일련의 과정을 거친 거물 친일파들의 경우 자료가 방대하나 특위 조사 후 혐의 내용이 경미해 풀려난 사람의 경우 관련 자료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다락방에서 펴낸 원전 17권 가운데 단독으로 한 권 분량을 차지한 사람은 김연수, 박흥식, 조병상 등 3인에 불과했다. 그 외의 사람들은 경미한 자들은 범죄인지보고서, 의견서, 피의자신문조서, 불구속사건기록 정도로 마무리되었다. 반면 반민족행위가 상당해 구속된 자의 경우 구속영장, 수색영장, 체포시말서, 사건송치서, 피의자소행조서, 피의자신문조서, 증인신문조서, 구속기간연장신청서, 차압조서, 공판조서 등 일련의 재판 관련 자료들이 추가로 첨부돼 있다. 그러나 이 역시도 재판의 최종결과를 보여주는 공판조서는 거의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이 책에 수록된 64명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을 몇 소개하면, 반민특위 재판에서도 다수가 유죄를 받은 친일경찰을 비롯해 습작자, 도회 의원, 중추원참의, 기업인, 군수업자, 종교인, 경방단 관계자 등이 두루 포함돼 있다. 전체 64명 가운데 여성은 2명이 포함돼 있다. 각 분야별로 살펴 보면(일부 중복자 있음),
▲경찰-김찬욱, 김창영, 노기주, 박종표, 송병헌, 유지창, 윤장섭, 이중화, 장명원, 장자관, 전정윤, 최준성, 최탁
▲도회/부회 의원-김두하, 김상홍, 성원경, 손재하, 염경훈, 오명진, 오숭은(변호사), 허기엽, 현준호, 홍종철
▲중추원 참의-김연수, 김원근, 김화준, 노영환, 민영찬, 이기승, 이명구, 장직상, 한규복, 현준호, 홍종철
▲습작자-김정록, 박정서, 윤강로, 이경우, 이원구, 조원흥
▲공무원-김덕삼, 김창영, 김혁, 소진문, 손영목(도지사), 오의관, 이관석(公醫), 한규복(도지사)
▲군수업자-신용욱(항공기 제조), 이문환(철공업), 최진세(군납)
▲기업인-김연수(경방 사장), 박흥식(화신 사장), 현준호(호남은행장)
▲종교인-목사(김길창·양주삼·전필순), 승려(한능해), 궁사(이산연)(* 이산연은 청주신사(神社) 궁사(宮司)를 지냈는데, 궁사는 사찰의 주지에 해당함)
▲언론인-정인익(매일신보 편집국장), 홍순복(매일신보 충북지사장)
▲경방단 관계자-박순기, 조병상, 편무재
▲기타-이기권(관동군 협력), 이인희(경북 예천 재산가), 편덕렬(밀정)
# 참고로 이들 가운데 민영찬(중추원 참의)은 충정공 민영환 선생의 친동생이며, 편덕렬(밀정)은 편강렬 의사의 친동생임.
# 여성 2명은 오현주, 이취성임. 접기
풀어서 본 반민특위 재판기록 - 전4권
정운현 (엮은이)도서출판선인(선인문화사)2009-06-25

책소개
해방 후 제헌국회에서 구성한 반민특위의 친일파 재판기록을 일반인들도 접근할 수 있도록 쉽게 풀어낸 책이다. 반민특위는 8개월 가량 활동하면서 모두 688명의 반민피의자들에 대한 조사와 재판을 진행했다. 이 책에는 총 64명의 친일파들에 대한 재판기록이 담겨있다.
이 책에 소개된 내용은 반민특위에서 피의자로 선정한 이후 재판 과정 전반의 기록을 담고 있다. 다만 인물에 따라 내용의 차이는 있다. 즉 검거-조사-기소(구속)-재판 등 일련의 과정을 거친 거물 친일파들의 경우 자료가 방대하나 특위 조사 후 혐의 내용이 경미해 풀려난 사람의 경우 관련 자료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목차
Ⅰ.
김길창
김덕삼
김두하
김상홍
김연수
김원근
김정록
김찬욱
김창영
김 혁
김화준
노기주
노영환
민영찬
박순기
박정서
박종표
Ⅱ.
박흥식
성원경
소진문
손영목
손재하
송병헌
신용욱
양주삼
염경훈
오명진
오숭은
오의관
오현주
유지창
윤강로
윤장섭
이경우
이관석
이규상
이기권
Ⅲ.
이기승
이명구
이문환
이산연
이원구
이인희
이중화
이취성
장명원
장자관
장직상
전정윤
전필순
정인익
조병상
Ⅳ.
조원흥
최준성
최진세
최 탁
편덕렬
편무재
한규복
한능해
허기엽
현준호
홍순복
홍종철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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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정운현 (엮은이)
1959년 경남 함양 태생으로 대구에서 초중고와 대학을 마쳤다. 1984년 중앙일보에 입사해 조사부와 현대사연구소에서 기자로 근무했다. 김대중 정부 출범 후인 1998년 8월 서울신문으로 옮겨 한국언론 사상 처음으로 친일파 장기 연재 및 미디어 면을 신설하여 성역 없는 매체 비평을 담당했다.
2002년 1월 신생 인터넷 신문인 <오마이뉴스>로 옮겨 초대 편집국장을 지냈으며, 2005년 ‘제2의 반민특위’로 불린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사무처장을 맡아 친일파 청산 작업에 참여했다. 이후 한국언론재단 이사와 국무총리 ...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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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현(엮은이)의 말
지난 1993년 도서출판 다락방에서 ?반민특위 재판기록?이 처음 영인돼 나왔을 때의 감격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거기엔 제 나름의 사연이 있습니다. 친일파들의 행적을 추적하다 보면 곳곳에서 마주치는 게 반민특위인데, 정작 반민특위와 관련된 자료는 도무지 찾을 길이 막막했습니다. 기껏해야 반민특위 관련 사진 몇 장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반민특위 재판기록?이 나왔으니 친일문제를 연구하던 저로서는 그 반가움을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얼른 한 질을 구입해서 탐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2~3년이 지난 어느 날 현대사를 전공한 한 소장학자가 제게 이런 얘길 들려주었습니다. '반민특위 재판기록'이 출간돼 연구자들이 이제 친일파 재판 관련내용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됐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게 ‘그림의 떡’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 연유를 물어보았더니 영인본으로 출간된 게 문제라면 문제였습니다. 당시 조사관들이 작성한 재판 관련 문서가 한자투성이인데다 글씨도 제각각이어서 해독하기가 여간 곤란한 게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학계에서 이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며 제게 풀이를 좀 해줄 수 없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뜻밖에 제안 아닌 제안을 받은 저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우선 제가 이 어려운 작업을 잘 해낼 수 있을 것인지, 또 17권 분량이나 되는 막대한 양을 다 소화해낼 수 있을지도 걱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결국 이 일은 저의 몫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재판기록 풀이작업에 착수했습니다.
작업 도중에 저는 적지 않은 어려움에 직면했습니다. 우선 초서투성이의 한문을 읽어내는 것은 그렇다고 쳐도, 재판기록의 원본상태가 좋지 않은 곳이 적지 않아 애를 먹었습니다. 특히 이 작업은 단순히 흘려 쓴 한자를 읽을 줄 안다고만 해서 될 일이 아니었습니다. 친일파 인물들이나 일제시대 전반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이 없으면 해결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모 소장학자가 제게 이 일을 권유한 것도 아마 이런 연유 때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부족하나마 포기하지 않고 이 작업을 계속하기로 작정했습니다. 풀이한 것을 순국선열유족회의 기관지 ?순국?에 연재하기 시작했는데, 1997년 8월호부터 2006년 8월호까지 햇수로 근 10년간 연재하였습니다.
참고로 몇 가지 밝혀둘 것이 있습니다. 우선 이 책에 실린 것은 영인본에 실린 재판기록 전체를 다 풀이한 것은 아닙니다. 그 이유는 당초 책으로 펴낼 생각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 내용만이라도 대중들이 활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에서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여러 명의 증인들을 상대로 한 '증인신문조서'는 내용상 중복이 많아 더러 생략했습니다. 아울러 문체도 나름대로는 현대식으로 고쳤습니다. 한 예로 ‘여좌(如左)함’ 같은 것은 ‘아래와 같음’으로 고쳤습니다. 또 일부 필요한 대목에는 ‘편자 주(註)’를 덧붙였습니다. 그러나 풀이에 더러 오류가 없지 않을 것이며, 원문의 함의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것도 있을 것입니다. 이 모두는 전적으로 천학비재한 저의 책임입니다. 학식과 통찰력을 겸비한 후학들이 차후에 이를 보완해주길 기대합니다.
출판사 제공 책소개
해방 후 제헌국회에서 구성한 반민특위의 친일파 재판기록으로, 원본의 상태가 불량한데다 한자투성이인 것을 편자가 쉬운 우리말로 풀고 주석을 달아 일반인들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만들었으며, Ⅰ·Ⅱ·Ⅲ·Ⅳ 총 4권으로 구성돼 있다.
서론 - 2009년이 갖는 역사적 의미와 ‘반민특위’
올해는 우리 근현대사에서 한 획을 긋는 해이다.
안중근 의사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숙적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로부터 1년 뒤 우리는 국권을 상실하고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고, 국내외에서 항일투쟁이 본격화되었다. 1919년 고종황제가 덕수궁에서 비운의 삶을 마치자 이를 계기로 그해 3월 1일 거족적으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올해로 3·1만세의거가 일어난 지 90주년이 된다.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항복선언으로 우리는 일제로부터 해방되었고, 뒤이어 중국에서 활동하던 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하였다. 서대문 경교장에 거처를 마련한 백범 김구 주석은 새조국 건설과 통일정부 수립을 외치다 1949년 6월 26일 안두희가 쏜 총을 맞고 73세로 서거하였는데, 올해로 서거 60주기이다. 선생의 서거 20일 전인 6월 6일에는 친일경찰들이 반민특위를 습격하여 무력화시켰으며, 민족적 염원을 담아 구성됐던 반민특위는 결국 그해 8월 말로 문을 닫고 말았다. 그 역시 꼭 60년 전의 일이다.
반민특위는 해방 후 제헌국회에서 친일파 청산을 목적으로 구성한 국가 기구이다. 제헌헌법 제101조에는 “이 헌법을 제정한 국회는 1945년 8월 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고 규정함으로써 신생 대한민국정부가 친일파를 처단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였다. 이를 토대로 1948년 8월 5일 제40차 국회 본회의에서 김웅진 의원이 ‘반민족행위처벌법 기초특별위원회’ 구성을 긴급 동의안으로 내놓았는데, 이것이 해방 후 친일파 처벌의 첫걸음이었다. 표결에서 재적 155명 중 가(可) 105, 부(否) 16의 압도적인 찬성으로 통과되었으며, 그해 9월 7일 제59차 본회의에서 반민법은 재적 140명 중 가 103, 부 6으로 마침내 통과되었다. 반민법의 공소시효는 1950년 6월 20일까지였다.
반민법이 공포되자 국회는 후속작업으로 반민족행위자특별조사위원회(약칭 ‘반민특위’) 구성을 서둘렀다. 우선 독립운동 경력자, 학식과 덕망이 있는 자 등을 대상 국회의원 가운데서 특위 위원을 선임하였는데, 초대 반민특위 위원장에는 임시정부에서 문화부장을 지낸 김상덕 의원(경북 고령)이 선임되었다. 반민특위는 1948년 12월 23일까지 중앙에 중앙사무국, 각 도 조사부에 조사분국을 설치하여 골격을 잡은 다음 특별재판관 15인, 특별검찰관 9인, 그리고 중앙사무국에 조사관, 서기관을 임명함으로써 최종 진용을 갖추게 되었다. 입법 제안에서부터 법률 공포에 이르기까지 우역곡절 끝에 출범한 반민특위는 당시 돈으로 7천 4백만환의 예산을 타내 이듬해 1949년 1월 5일 중앙청 205호실에 자리를 잡고 본격활동에 들어갔다.
반민특위의 첫 성과는 1949년 1월 8일 친일기업인 박흥식 회신 사장 검거였다. 특위는 당시 박흥식이 미국으로 도피하려한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종로 2가 화신 사장실을 급습하여 현장에서 박흥식을 체포하였다. 이를 시작으로 반민특위는 문화계의 거두 춘원 이광수, 육당 최남선을 비롯해 직업적 친일분자 조병상(중추원참의, 종로경방단장), 경방 사장 김연수, 친일경찰 노덕술, 중추원 부의장 박중양, 여자 밀정 배정자, 친일관료 김대우(경북지사) 등을 속속 검거하였다. 반민피의자는 서대문형무소나 마포형무소에 수감한 후 특별조사위원회에서 조사관들이 조사를 진행한 후 특별검찰부에 넘기면 이곳에서 기소 여부를 결정하였고, 기소된 자에 대해서는 특별재판부에서 재판을 통해 처리하였다.
반민특위의 검거 선풍이 회오리치자 친일세력들과 이들을 정치적 기반으로 한 이승만 정권은 불안한 나머지 반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우선 특위 요원들의 흠집 내기에 이어 특위 요원 암살음모로 이어졌다. 그러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다가 이해 5월 하순에 터진 ‘국회프락치사건’으로 승기를 잡은 친일세력들은 마침내 “실력으로 반민특위 특경대를 해산시키자”고 뜻을 모으고는 6월 6일 아침 반민특위를 습격하였다. 이것이 소위 ‘6·6 사건’이다. 특위 관할서장인 중부서장 윤기병의 지휘로 출근하는 특위 요원 35명을 납치하여 중부서에 감금하였다. 이 와중에 다시 제2차 국회프락치사건이 터졌고, 설상가상으로 백범 김구 선생마저 서거하였다. 특위가 극도의 위기에 몰리자 특위 내에서조차 특위 운영에 대한 회의론이 제기됐고, 급기야 특별법 개정론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때마침 법무장관직을 사임하고 국회로 돌아온 이인을 비롯하여 곽상훈 등은 1950년까지 규정된 공소시효를 1949년 8월 31일까지로 단축시키자는 내용을 골자로 한 반민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국회가 어수선한 틈을 타 이 개정안은 7월 6일 국회를 통과하였고, 이에 김상덕 위원장 이하 초대 특위 위원 전원은 일괄 사퇴하였다. 김상덕에 이어 2대 위원장에는 이인이 선임되었는데, 이로써 8월 31일까지 한 달 남짓 남은 반민특위의 앞날은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결국 2차 특위는 독자적인 조사활동은 벌이지도 못한 채 1차 특위의 잔무처리 수준에서 활동을 마무리하였다. 2차 특위가 활동을 마무리할 무렵인 1949년 8월경에 나온 특위의 결정은 대개가 ‘무혐의(무죄)’ 혹은 ‘불기소’였다. 경방 사장 김연수에 대한 무죄판결은 재판관 간에 의견차가 극심했었다. 김연수 재판의 재판장이었던 서순영 3부 재판장이 무죄론을 주장하자 1부 재판장이었던 김병로(전 대법원장)는 “사회여론을 생각할 때 무죄판결은 위험천만한 재판”이라며 재고를 요청하기도 했다.
1949년 1월부터 활동을 개시한 반민특위는 그해 8월 31일 공소시효가 만료될 때까지 8개월 동안 나름으로는 다양한 활동을 벌였지만 당초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이 기간 동안 특위가 벌인 활동의 규모는 얼마나 될까? 특위가 문을 닫은 직후인 9월 10일자로 이인 2대 위원장이 국회에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활동기간 동안 특위가 취급한 친일파는 여성 6명을 포함하여 모두 688명이었다. 이들 가운데 특위 중앙사무국에서 직접 취급한 경우는 절반에 가까운 326명이었으며, 나머지는 각 도 조사부에서 취급한 경우이다. 또 특위가 취급한 688명 가운데 특별검찰부에 송치된 반민피의자는 모두 599명이었으며, 이들 가운데 영장이 발부된 자는 408명으로, 이 가운데 체포된 자가 305명, 미체포된 자가 73명이었으며, 자수 61명, 영장취소 30명이었다.
특별검찰부가 기소한 자 가운데 특별재판부가 해체되기 전에 판결을 받은 자는 78명이었으며, 미결인 친일파는 215명이었다. 재판에서 최종판결을 받은 자들 가운데는 경찰 출신이 40명으로 가장 많았고, 그다음은 중추원 참의였다. 처벌내용을 형량순으로 살펴보면, 체형(총 10명)을 받은 자 가운데 사형 김덕기(고등경찰), 무기징역 김태석(경찰, 중추원 참의), 징역 2년6개월 이기용(귀족), 징역 2년 이성구(면 서기, 징병자 부친 구타, 사망시킴), 징역 1년6월 조병상(중추원 참의), 징역 1년(총 5명) 김갑복(청주경방단 부단장, 공출/ 징용 적극 협력) 등이며, 이병길(습작, 이완용 아들) 등 9명은 집행유예를, 파인 김동환 등 23명은 공민권 정지를, 김연수, 박흥식 등 17명은 무죄판결을 받았다. 또 고문경찰 박종표 등 9명은 형 면제를,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변절자인 최린, 친일경찰 노덕술 등 8명은 공소기각 판결을 받았다. 이로써 상징적인 친일파들의 대다수는 ‘면죄부’를 받고 풀려나 친일파 청산은 이후 민족적 숙제로 남게 되었다.
책 소개
이번에 도서출판 선인(대표 윤관백)에서 펴낸 ?풀어서 본 만민특위 재판기록?(전 4권)은 현존하는 반민특위의 재판기록을 일반인들도 접근할 수 있도록 쉽게 풀어낸 것이다. 앞에서 소개한 대로 반민특위는 8개월가량 활동하면서 모두 688명의 반민피의자들에 대한 조사와 재판을 진행했다. 그런데 어찌된 연유인지 이들에 대한 재판기록은 상당부분 소실되었다. 반민특위는 활동이 종료된 후 대검찰청과 대법원으로 업무가 이관되면서 관련자료도 이관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남아 있는 자료는 없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번에 출간된 책은 지난 1993년 도서출판 다락방에서 영인본으로 출간한 ?빈민특위 재판기록?(전 17권)을 저본으로 하여 이를 풀이한 것으로, 원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소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 펴낸 '풀어서 본 만민특위 재판기록'에는 총 64명의 친일파들에 대한 재판기록으로, 반민특위에서 취급한 688명의 1할에도 채 미치지 못하는 분량이다. 그마저도 재판 관련자료 전체가 온전하게 보존된 것은 거의 없는데, 이는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훼손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친일관련 자료가 훼손된 사레는 이미 더러 발견된 적이 있다. 한 예로 모 공공도서관에 보존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일부가 예리한 칼로 기사 일부를 도려간 경우도 있었고, 또 국회도서관에서 소장 중인 친일파 관련 서적 가운데는 본문의 일부가 먹으로 칠해져 내용을 알아볼 수 없도록 훼손된 경우도 있었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일제 때 나온 서적 중 상당수가 멸실된 것은 물론 불순한 세력들에 의해 이처럼 친일관련 자료가 점차 훼손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번에 출간된 '풀어서 본 만민특위 재판기록'은 친일관련 자료의 보급은 물론 일반인들이 해독할 수 없는 내용을 쉽게 풀어냄으로써 대중화 작업에도 큰 기여를 할 것으로 보인다. 반민특위 재판기록 원본은 전부 손으로 쓴 수기체로, 한자투성이인데다 글씨체 역시 대부분이 초서에 가까운 흘림체들이다. 그 이유는 조사관들이 피의자나 증인들에 대한 신문내용을 즉석에서 기록한 것이기 때문이다. 풀이의 어려움은 비단 이것만이 아니다. 1949년 당시의 말투는 물론 일제시대나 친일관련 단체 및 인물에 대한 언급이 곳곳에서 등장하고 있어서 단순히 흘림체를 해독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즉 일제시대 전반이나 친일문제 등에 대해 폭넓은 지식을 겸비해야만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편역자 정운현 씨는 친일문제 전문가로서, 이번 작업의 최적임자였다고 할 수 있다. 정씨는 1980년대 후반부터 20년 넘게 친일문제에 천착해왔는데, 원전을 쉬운 말로 풀고 더러 주석도 덧붙였으며, 근 10년간에 걸쳐 이 작업을 진행해 왔다. (‘편역자 소개’ 참조)
이 책에 소개된 내용은 반민특위에서 피의자로 선정한 이후 재판 과정 전반의 기록을 담고 있다. 다만 인물에 따라 내용의 차이는 있다. 즉 검거-조사-기소(구속)-재판 등 일련의 과정을 거친 거물 친일파들의 경우 자료가 방대하나 특위 조사 후 혐의 내용이 경미해 풀려난 사람의 경우 관련 자료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다락방에서 펴낸 원전 17권 가운데 단독으로 한 권 분량을 차지한 사람은 김연수, 박흥식, 조병상 등 3인에 불과했다. 그 외의 사람들은 경미한 자들은 범죄인지보고서, 의견서, 피의자신문조서, 불구속사건기록 정도로 마무리되었다. 반면 반민족행위가 상당해 구속된 자의 경우 구속영장, 수색영장, 체포시말서, 사건송치서, 피의자소행조서, 피의자신문조서, 증인신문조서, 구속기간연장신청서, 차압조서, 공판조서 등 일련의 재판 관련 자료들이 추가로 첨부돼 있다. 그러나 이 역시도 재판의 최종결과를 보여주는 공판조서는 거의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이 책에 수록된 64명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을 몇 소개하면, 반민특위 재판에서도 다수가 유죄를 받은 친일경찰을 비롯해 습작자, 도회 의원, 중추원참의, 기업인, 군수업자, 종교인, 경방단 관계자 등이 두루 포함돼 있다. 전체 64명 가운데 여성은 2명이 포함돼 있다. 각 분야별로 살펴 보면(일부 중복자 있음),
▲경찰-김찬욱, 김창영, 노기주, 박종표, 송병헌, 유지창, 윤장섭, 이중화, 장명원, 장자관, 전정윤, 최준성, 최탁
▲도회/부회 의원-김두하, 김상홍, 성원경, 손재하, 염경훈, 오명진, 오숭은(변호사), 허기엽, 현준호, 홍종철
▲중추원 참의-김연수, 김원근, 김화준, 노영환, 민영찬, 이기승, 이명구, 장직상, 한규복, 현준호, 홍종철
▲습작자-김정록, 박정서, 윤강로, 이경우, 이원구, 조원흥
▲공무원-김덕삼, 김창영, 김혁, 소진문, 손영목(도지사), 오의관, 이관석(公醫), 한규복(도지사)
▲군수업자-신용욱(항공기 제조), 이문환(철공업), 최진세(군납)
▲기업인-김연수(경방 사장), 박흥식(화신 사장), 현준호(호남은행장)
▲종교인-목사(김길창·양주삼·전필순), 승려(한능해), 궁사(이산연)(* 이산연은 청주신사(神社) 궁사(宮司)를 지냈는데, 궁사는 사찰의 주지에 해당함)
▲언론인-정인익(매일신보 편집국장), 홍순복(매일신보 충북지사장)
▲경방단 관계자-박순기, 조병상, 편무재
▲기타-이기권(관동군 협력), 이인희(경북 예천 재산가), 편덕렬(밀정)
# 참고로 이들 가운데 민영찬(중추원 참의)은 충정공 민영환 선생의 친동생이며, 편덕렬(밀정)은 편강렬 의사의 친동생임.
# 여성 2명은 오현주, 이취성임.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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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소설가 조정래 문학과 삶 강연 전문(上)
서현욱 기자
승인 2010.12.08
“일본 은혜(?)로 태어나 일본 잔학상을
소설 '아리랑'을 썼으니 역사 아이러니”
<태백산맥> <한강> <아리랑> 등 대하장편소설로 40년간 한국문학계를 지켜온 소설가 조정래(동국대 석좌교수)가 7일 불교미래사회포럼이 주최한 포럼 강사로 나서 불자들을 위해 ‘문학과 삶’을 주제로 강연했다. 6.25전쟁, 일제강점기, 근대, 현대 사회부조리와 대기업의 경제범죄 등을 주제로 소설을 써 온 그가 불교와의 인연, 작가로서의 의무와 역할, 그리고 자신의 작가생활의 회향 발원까지를 솔직히 털어 놓았다. 강연내용 전문과 독자들과의 일문일답을 정리해 소개한다. (편집자주)
[현장]소설가 조정래 문학과 삶 강연 전문(上)
안녕하십니까? 제가 (조계사) 대법당에서 두 번째 강연을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제가 순천 선암사에서 태어났다고 하니까 무슨 사연인지를 모를 것 같아서 그 이야기로 시작하겠습니다.
저의 어머니가 저를 낳게 해달라고 만삭이 돼서 선암사를 찾아가 빌다가 절 마당에서 저를 낳은 게 아니고, 저의 아버지가 16살에 출가해 24살에 법사가 됩니다. 절 대중들에게 부처님의 말씀을 설법하고 가르칠 수 있는 자격을 얻었으니까, 요즘 말로 하면 대학교수 자격쯤 되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는 선암사 대표 대처승
그리고 나서 일제시대가 되는데, 일본놈들이, 여기서 일본놈들은 욕이 아닙니다. 우리가 일제시대를 말할 때 공식명칭은 반드시 ‘일본놈’들이어야 합니다. 그 당시에 독립운동을 했던 만해 한용운 선생, 단채 신채호 선생 등 그런 분들이 글을 쓰실 때 ‘강도일본’이라고 공식명칭을 썼습니다. 강도는 뭐지요? 남의 집에 불법으로 들어가 금품을 탈취한 다음에 사람을 죽이는 것을 강도라고 하지요. 사람을 죽이지 않고 물건만 가지고 나오는 것을 뭐라고 하지요? 절도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 산천에 있는 모든 것 인력 착취하고 그리고 36년에 걸쳐 400만 명을 죽였습니다. ‘강도일본’이라고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국교정상화가 됐으니까 ‘강도’는 빼고 민족감정을 돈독히 하기 위하여 우리는 ‘일본놈’이라고 말해야 됩니다. 서울대학교에 유학 와 있는 일본학생들이 제일 거북한 게 교수들이 일제시대를 말할 때 일본놈이라고 말할 때 가장 견디기 힘들고 곤혹스럽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거기에 전혀 신경 쓰지 말아라. 우리민족은 앞으로 천년만년 일본을 말하 때는 일제시대를 말할 때는 일본놈이라고 한다. 그게 우리민족이 동의한 공식명칭이고, 너희 선조가 잘못한 것이니까 너는 죄의식을 느끼지 않아도 괜찮다. 너는 학문만 매진하라.” 그 다음부터 그 사람이 ‘해방’된 느낌이라고 말했습니다.
“일본 은혜(?)로 태어나 일본 잔학상을
소설 '아리랑'에 썼으니 역사 아이러니”
그 일본놈들은 우리를 지배할 때, 가장 빠른 지배방법으로 선택했던 것이 그때 가장 교세가 컸던, 그러니까 국가가 공식적으로 국교로 정하지는 않았지만 불교가 종교신도 95%를 점유하고 있던 시절에 불교를 빨리 장악해야만 식민지배가 가능하니까 불교조직을 일본군대 편제로 바꿨습니다. 그래서 본산말사 조직을 다 만들었고, 그리고 통제하기 시작했는데, 그 통제의 한 방법이 일본승려들은 다 결혼하지요. 그걸 ‘대처’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승려들도 종교황국화를 위해서 결혼을 반강제적으로 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저의 아버지가 순천 선암사 대표로 1500여 년 만에 대법당에서 결혼식을 올린 대표적인 승려입니다.
일본의 은혜로 제가 태어났는데, 그 은혜를 갚음하기 위해 일본의 잔학상을 쓴 <아리랑>을 썼으니 이것을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제 책에는 전부,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등 책 날개에 약력을 쓸 때 전부, 순천 선암사에서 태어났다고 씁니다. 이것도 포교의 한 방법 아닐까요?
제가 청화 스님에게 <대장경>이라는 소설을 드렸는데, 그것은 우리 한반도 오천년 역사 속에서 꼭 기록해야만 할 30가지를 뽑아서 작가들에게 소설을 쓰게 했습니다. 고려사, 고려 역사 500년 동안에 선택된 것들이 ‘팔만대장경’이었습니다. 저는 이것은 내가 써야 한다고 지목했는데, 그때 팔만대장경을 소설로 장편 1000매를 쓰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28살에 등단에 32살 때, 최초로 쓴 장편소설이 <대장경>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경상남도에서 지원하고 경상남도 음악협회에서 오페라로 공연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봤는데 잘 만들었어요. 내년이 팔만대장경 판각불사 천년입니다. 그 기념으로 만들었고, 저는 그래서 이것을 지방음악회에서만 하기는 너무 아깝다. 대체로 원작자는 TV ,드라마나 영화로 제작됐을 때 만족하지 못한다. 오페라는 아주 잘돼서, 흡족하게 만족할 만큼 잘돼서 이것을 서울에 올라와서 초파일날 하면 어떻겠느냐? 사월초파일 판각불사 천년, 지방 자치단체가 만든 것이 서울로 올라와서, 서울 것만 지방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지방에서 만든 것도 서울로 올라와서 문화교류를 하는 명분을 세운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그것을 하려고 하고 있고, 그때 조계사에서도 적극 지원하게 되면 세종문화회관에서 ‘대장경’ 공연을 보게 될 것입니다.
불교 정신 바탕 3권 신작 쓰고 작가생활 회향
저는 지금 등단한지 40년 돼, 금년으로 나이가 예순 여덟인데 마지막 발원이 있다면 앞으로 10년 저를 건강히 쓰기를 바라는데, 그때까지 약 3권의 신작을 써서 출판기념회를 하면서 제 작가생활을 마감하는 소망을 갖고 있습니다. 그때까지 쓸 작품이 총체적으로 인생이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바른 삶은 무엇인가, 하는 인생에 대한 문제를 담아서 세 권 정도를 쓸 것인데 그 바탕은 불교정신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저는 장편소설을 불교이야기로 시작해서 인생의 마지막 작품도 불교 이야기로 끝내고자 합니다. 부처님의 가피로 이 땅에 온 은혜 갚음이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죠.
부처님 오신 게 2500년 됐습니다. 예수님이 온 게 2000년 됐습니다. 그런데 왜 그 긴 세월 동안 종교들이 계속 필요한 것인가? 그 이유를 아십니까?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예수는 한번 깨달으면 그 깨달음을 어떠한 나쁜 조건이 오거나 어떠한 유혹이 오거나 해도 흔들림 없이 간직합니다. ‘항심’이라고 합니다. 변하지 않는 마음, 그런데 우리 중생들은 믿음이 약해서 부처님 앞에서 기도할 때는 탐욕을 버려야지, 좋은 일하고 살아야지 하다가 기도 끝나고 작심삼일도 아니고 작심 3초, 법당 딱 나가면 또 딴 짓하고 욕심 부리지요. 그래서 끝없이 기도하게 하기 위하여 절이 필요하고 교회가 필요하고 죄 많은 중생들은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우리 인류가 있는 한 종교는 계속될 것입니다. 그분들의 말씀들은 성음으로 남을 것입니다. 그분들처럼 인생을 올바르게 사는 방법, 인생이 무엇일까 탐구하는 것이 문학입니다. 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인간으로서 중생으로서 그들을 담고자 하는 역할을 하는 이들이 문학인인데, 그들이 죽으면 어디 간다? 지옥 간다.(웃음) 감히 그것을 범접하려고 했으니까 지옥 가는 것은 따 논 당장입니다. 좋은 일을 하면서도 그 좋은 일이 문학으로 해야 하는 것이고, 그것이 부처님 말씀처럼 성음으로 남기를 갈망하면서 오늘까지 40년을 살아왔습니다.
여러분! 오늘 여기에 오신 것은 조정래를 통해서 문학이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 역사가 무엇인가? 삶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총체적을 알려고 오셨을 것입니다. 특히 저 사람이 어떻게 소설을 그런 것을 써서 빨갱이로 몰려 11년 동안이나 조사를 받고, 또 그것도 모자라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기업인에게 미움 받는 <허수아비 춤>까지 썼을까하는 의문이 있으실 겁니다.
그것들을 대답 하면 총체적으로 문학이 무엇인가? 문학의 역할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부터 몇 개의 정의를 간략히 하겠습니다.
문학이란 무엇입니까? 그냥 문학이지요. 인생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대답이 없지요. 대답이 없기 때문에 철학자들이 2000년에 걸쳐 많은 책을 썼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철학을 가지고 인생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문학이 무엇이냐는 데 대해 수많은 책이 있지만, 읽어 볼수록 문학이 무엇인지 모르게 됩니다. 그걸 논리라고 하는 거지요. 논리는 필요 없는 것이고 체득하는 중요한 것이지요. 몸소 느끼는 것입니다. 몸소 느끼도록 해드리겠습니다.
문학은 인생을 감동을 담아 글로 예술화 시킨 것
간단하게 문학은 우리 인생 그 자체를 글로 쓰는 것입니다. 글로 쓰되 거기에다가 감동을 내 영혼이 흔들려 느낌이 오래오래 가도록, 감동을 넣어서 예술화 시킨 것 그것이 곧 문학입니다. 그럼 역사란 무엇입니까?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의 전체에 대한 삶의 기록이 역사입니다. 단 문학과 차이가 있는 것은 역사는 기록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골라내서 적어 놓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학이 인생의 전체의 희로애락을 감동적으로 쓰는 것인데 역사도 인생을 쓴 것이지만 골라냈습니다. 그럼 어떤 것이 큰 것이겠습니까? 문학이 더 크지요.
그러므로 이런 해답이 나옵니다. 역사학자는 문학을 몰라도 역사학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문학가는 역사를 모르면 문인이 될 수 없다.
그러면 문학이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문학가에게 주어진 엄청난 칭호와 의무가 있습니다. 세계인류 문화사가들, 문화사가는 인류가 있어 온 지 철학 역사종교 문학 기타 세계를 총체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작가에 대한 정의를 했는데, ‘작가는 인류의 스승이고, 그 시대의 산소’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그러면 지금 문학하는 사람 모두가 그렇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인류의 스승이 될 수 있을 만 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영원토록 그 작품이 높은 가치를 지닌 작품을 쓴 사람들을 인류의 스승이라고 이름을 붙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대문학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산소 역할을 하라는 것입니다. 산소는 뭐지요? 숨 쉬는 것이지요. 정화한다. 정화는 우리 불교용어지요. 모든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한다. 인간들이 사는 세상에는 서로 다른 생각, 서로 다른 이익을 추구하기 때문에 충돌하고, 갈등이 생기고, 문제점이 생기고, 불의가 있고, 부정이 있고, 부패하고, 비인간적인 것 수없이 많이 되풀이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게 인생은 고해다. 파도치는 거친 바다와 같다. 그 여러 가지의 문제점들을 산소처럼 깨끗이 정화하는 역할을 하는 게 작가다. 그러므로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인류의 스승이라는 망이 붙지 않는다. 세상을 깨끗이 정화시킬 수 있는 글을 써내야 하는 게 작가들의 임무고 소임이다. 그것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작품이 하나도 남지 않고, 작품이 남지 않으면 문학을 하나마나, 도로아미타불 되는 것이다.
글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당나라시대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말로 지은 원수는 백년을 가고 글로 지은 원수는 만년을 간다’ 글이라는 것이 얼마나 생명이 긴 것인가? 글이라는 것이 얼마나 쓰기가 힘든 것인가? 하는 이야기를 강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생각을 남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이 글이 없었다면, 기록이 없었다면 오늘날 종교가 있었겠습니까? 전부 다 날라 가고 없는 것이지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것이 글인데, 그 말은 무엇인가 하면, 제가 이 시간에 하는 말은 여기 있지 않으면 들을 수 없는 것이지요. 같은 시간이라 해도 부산에 잇는 사람들은 내 말을 못 듣지요. 시간 공간 거리감 초월해 넘어서는 것이 글의 힘입니다. 글은 반드시 전해야 한다는 게 목적이고, 전해야 하기 때문에 글은 만년이 가도록 써야 하고, 그것이 작가들의 두 어깨에 짊어진 짐입니다. (기사 계속됩니다)
“불교 바탕 소설 3권 쓰고 작가 회향할 것”
[현장]소설가 조정래 문학과 삶 강연 전문(上)
서현욱 기자
승인 2010.12.08
“일본 은혜(?)로 태어나 일본 잔학상을
소설 '아리랑'을 썼으니 역사 아이러니”
<태백산맥> <한강> <아리랑> 등 대하장편소설로 40년간 한국문학계를 지켜온 소설가 조정래(동국대 석좌교수)가 7일 불교미래사회포럼이 주최한 포럼 강사로 나서 불자들을 위해 ‘문학과 삶’을 주제로 강연했다. 6.25전쟁, 일제강점기, 근대, 현대 사회부조리와 대기업의 경제범죄 등을 주제로 소설을 써 온 그가 불교와의 인연, 작가로서의 의무와 역할, 그리고 자신의 작가생활의 회향 발원까지를 솔직히 털어 놓았다. 강연내용 전문과 독자들과의 일문일답을 정리해 소개한다. (편집자주)
[현장]소설가 조정래 문학과 삶 강연 전문(上)
안녕하십니까? 제가 (조계사) 대법당에서 두 번째 강연을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제가 순천 선암사에서 태어났다고 하니까 무슨 사연인지를 모를 것 같아서 그 이야기로 시작하겠습니다.
저의 어머니가 저를 낳게 해달라고 만삭이 돼서 선암사를 찾아가 빌다가 절 마당에서 저를 낳은 게 아니고, 저의 아버지가 16살에 출가해 24살에 법사가 됩니다. 절 대중들에게 부처님의 말씀을 설법하고 가르칠 수 있는 자격을 얻었으니까, 요즘 말로 하면 대학교수 자격쯤 되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는 선암사 대표 대처승
그리고 나서 일제시대가 되는데, 일본놈들이, 여기서 일본놈들은 욕이 아닙니다. 우리가 일제시대를 말할 때 공식명칭은 반드시 ‘일본놈’들이어야 합니다. 그 당시에 독립운동을 했던 만해 한용운 선생, 단채 신채호 선생 등 그런 분들이 글을 쓰실 때 ‘강도일본’이라고 공식명칭을 썼습니다. 강도는 뭐지요? 남의 집에 불법으로 들어가 금품을 탈취한 다음에 사람을 죽이는 것을 강도라고 하지요. 사람을 죽이지 않고 물건만 가지고 나오는 것을 뭐라고 하지요? 절도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 산천에 있는 모든 것 인력 착취하고 그리고 36년에 걸쳐 400만 명을 죽였습니다. ‘강도일본’이라고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국교정상화가 됐으니까 ‘강도’는 빼고 민족감정을 돈독히 하기 위하여 우리는 ‘일본놈’이라고 말해야 됩니다. 서울대학교에 유학 와 있는 일본학생들이 제일 거북한 게 교수들이 일제시대를 말할 때 일본놈이라고 말할 때 가장 견디기 힘들고 곤혹스럽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거기에 전혀 신경 쓰지 말아라. 우리민족은 앞으로 천년만년 일본을 말하 때는 일제시대를 말할 때는 일본놈이라고 한다. 그게 우리민족이 동의한 공식명칭이고, 너희 선조가 잘못한 것이니까 너는 죄의식을 느끼지 않아도 괜찮다. 너는 학문만 매진하라.” 그 다음부터 그 사람이 ‘해방’된 느낌이라고 말했습니다.
“일본 은혜(?)로 태어나 일본 잔학상을
소설 '아리랑'에 썼으니 역사 아이러니”
그 일본놈들은 우리를 지배할 때, 가장 빠른 지배방법으로 선택했던 것이 그때 가장 교세가 컸던, 그러니까 국가가 공식적으로 국교로 정하지는 않았지만 불교가 종교신도 95%를 점유하고 있던 시절에 불교를 빨리 장악해야만 식민지배가 가능하니까 불교조직을 일본군대 편제로 바꿨습니다. 그래서 본산말사 조직을 다 만들었고, 그리고 통제하기 시작했는데, 그 통제의 한 방법이 일본승려들은 다 결혼하지요. 그걸 ‘대처’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승려들도 종교황국화를 위해서 결혼을 반강제적으로 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저의 아버지가 순천 선암사 대표로 1500여 년 만에 대법당에서 결혼식을 올린 대표적인 승려입니다.
일본의 은혜로 제가 태어났는데, 그 은혜를 갚음하기 위해 일본의 잔학상을 쓴 <아리랑>을 썼으니 이것을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제 책에는 전부,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등 책 날개에 약력을 쓸 때 전부, 순천 선암사에서 태어났다고 씁니다. 이것도 포교의 한 방법 아닐까요?
제가 청화 스님에게 <대장경>이라는 소설을 드렸는데, 그것은 우리 한반도 오천년 역사 속에서 꼭 기록해야만 할 30가지를 뽑아서 작가들에게 소설을 쓰게 했습니다. 고려사, 고려 역사 500년 동안에 선택된 것들이 ‘팔만대장경’이었습니다. 저는 이것은 내가 써야 한다고 지목했는데, 그때 팔만대장경을 소설로 장편 1000매를 쓰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28살에 등단에 32살 때, 최초로 쓴 장편소설이 <대장경>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경상남도에서 지원하고 경상남도 음악협회에서 오페라로 공연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봤는데 잘 만들었어요. 내년이 팔만대장경 판각불사 천년입니다. 그 기념으로 만들었고, 저는 그래서 이것을 지방음악회에서만 하기는 너무 아깝다. 대체로 원작자는 TV ,드라마나 영화로 제작됐을 때 만족하지 못한다. 오페라는 아주 잘돼서, 흡족하게 만족할 만큼 잘돼서 이것을 서울에 올라와서 초파일날 하면 어떻겠느냐? 사월초파일 판각불사 천년, 지방 자치단체가 만든 것이 서울로 올라와서, 서울 것만 지방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지방에서 만든 것도 서울로 올라와서 문화교류를 하는 명분을 세운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그것을 하려고 하고 있고, 그때 조계사에서도 적극 지원하게 되면 세종문화회관에서 ‘대장경’ 공연을 보게 될 것입니다.
불교 정신 바탕 3권 신작 쓰고 작가생활 회향
저는 지금 등단한지 40년 돼, 금년으로 나이가 예순 여덟인데 마지막 발원이 있다면 앞으로 10년 저를 건강히 쓰기를 바라는데, 그때까지 약 3권의 신작을 써서 출판기념회를 하면서 제 작가생활을 마감하는 소망을 갖고 있습니다. 그때까지 쓸 작품이 총체적으로 인생이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바른 삶은 무엇인가, 하는 인생에 대한 문제를 담아서 세 권 정도를 쓸 것인데 그 바탕은 불교정신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저는 장편소설을 불교이야기로 시작해서 인생의 마지막 작품도 불교 이야기로 끝내고자 합니다. 부처님의 가피로 이 땅에 온 은혜 갚음이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죠.
부처님 오신 게 2500년 됐습니다. 예수님이 온 게 2000년 됐습니다. 그런데 왜 그 긴 세월 동안 종교들이 계속 필요한 것인가? 그 이유를 아십니까?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예수는 한번 깨달으면 그 깨달음을 어떠한 나쁜 조건이 오거나 어떠한 유혹이 오거나 해도 흔들림 없이 간직합니다. ‘항심’이라고 합니다. 변하지 않는 마음, 그런데 우리 중생들은 믿음이 약해서 부처님 앞에서 기도할 때는 탐욕을 버려야지, 좋은 일하고 살아야지 하다가 기도 끝나고 작심삼일도 아니고 작심 3초, 법당 딱 나가면 또 딴 짓하고 욕심 부리지요. 그래서 끝없이 기도하게 하기 위하여 절이 필요하고 교회가 필요하고 죄 많은 중생들은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우리 인류가 있는 한 종교는 계속될 것입니다. 그분들의 말씀들은 성음으로 남을 것입니다. 그분들처럼 인생을 올바르게 사는 방법, 인생이 무엇일까 탐구하는 것이 문학입니다. 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인간으로서 중생으로서 그들을 담고자 하는 역할을 하는 이들이 문학인인데, 그들이 죽으면 어디 간다? 지옥 간다.(웃음) 감히 그것을 범접하려고 했으니까 지옥 가는 것은 따 논 당장입니다. 좋은 일을 하면서도 그 좋은 일이 문학으로 해야 하는 것이고, 그것이 부처님 말씀처럼 성음으로 남기를 갈망하면서 오늘까지 40년을 살아왔습니다.
여러분! 오늘 여기에 오신 것은 조정래를 통해서 문학이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 역사가 무엇인가? 삶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총체적을 알려고 오셨을 것입니다. 특히 저 사람이 어떻게 소설을 그런 것을 써서 빨갱이로 몰려 11년 동안이나 조사를 받고, 또 그것도 모자라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기업인에게 미움 받는 <허수아비 춤>까지 썼을까하는 의문이 있으실 겁니다.
그것들을 대답 하면 총체적으로 문학이 무엇인가? 문학의 역할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부터 몇 개의 정의를 간략히 하겠습니다.
문학이란 무엇입니까? 그냥 문학이지요. 인생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대답이 없지요. 대답이 없기 때문에 철학자들이 2000년에 걸쳐 많은 책을 썼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철학을 가지고 인생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문학이 무엇이냐는 데 대해 수많은 책이 있지만, 읽어 볼수록 문학이 무엇인지 모르게 됩니다. 그걸 논리라고 하는 거지요. 논리는 필요 없는 것이고 체득하는 중요한 것이지요. 몸소 느끼는 것입니다. 몸소 느끼도록 해드리겠습니다.
문학은 인생을 감동을 담아 글로 예술화 시킨 것
간단하게 문학은 우리 인생 그 자체를 글로 쓰는 것입니다. 글로 쓰되 거기에다가 감동을 내 영혼이 흔들려 느낌이 오래오래 가도록, 감동을 넣어서 예술화 시킨 것 그것이 곧 문학입니다. 그럼 역사란 무엇입니까?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의 전체에 대한 삶의 기록이 역사입니다. 단 문학과 차이가 있는 것은 역사는 기록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골라내서 적어 놓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학이 인생의 전체의 희로애락을 감동적으로 쓰는 것인데 역사도 인생을 쓴 것이지만 골라냈습니다. 그럼 어떤 것이 큰 것이겠습니까? 문학이 더 크지요.
그러므로 이런 해답이 나옵니다. 역사학자는 문학을 몰라도 역사학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문학가는 역사를 모르면 문인이 될 수 없다.
그러면 문학이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문학가에게 주어진 엄청난 칭호와 의무가 있습니다. 세계인류 문화사가들, 문화사가는 인류가 있어 온 지 철학 역사종교 문학 기타 세계를 총체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작가에 대한 정의를 했는데, ‘작가는 인류의 스승이고, 그 시대의 산소’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그러면 지금 문학하는 사람 모두가 그렇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인류의 스승이 될 수 있을 만 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영원토록 그 작품이 높은 가치를 지닌 작품을 쓴 사람들을 인류의 스승이라고 이름을 붙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대문학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산소 역할을 하라는 것입니다. 산소는 뭐지요? 숨 쉬는 것이지요. 정화한다. 정화는 우리 불교용어지요. 모든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한다. 인간들이 사는 세상에는 서로 다른 생각, 서로 다른 이익을 추구하기 때문에 충돌하고, 갈등이 생기고, 문제점이 생기고, 불의가 있고, 부정이 있고, 부패하고, 비인간적인 것 수없이 많이 되풀이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게 인생은 고해다. 파도치는 거친 바다와 같다. 그 여러 가지의 문제점들을 산소처럼 깨끗이 정화하는 역할을 하는 게 작가다. 그러므로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인류의 스승이라는 망이 붙지 않는다. 세상을 깨끗이 정화시킬 수 있는 글을 써내야 하는 게 작가들의 임무고 소임이다. 그것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작품이 하나도 남지 않고, 작품이 남지 않으면 문학을 하나마나, 도로아미타불 되는 것이다.
글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당나라시대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말로 지은 원수는 백년을 가고 글로 지은 원수는 만년을 간다’ 글이라는 것이 얼마나 생명이 긴 것인가? 글이라는 것이 얼마나 쓰기가 힘든 것인가? 하는 이야기를 강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생각을 남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이 글이 없었다면, 기록이 없었다면 오늘날 종교가 있었겠습니까? 전부 다 날라 가고 없는 것이지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것이 글인데, 그 말은 무엇인가 하면, 제가 이 시간에 하는 말은 여기 있지 않으면 들을 수 없는 것이지요. 같은 시간이라 해도 부산에 잇는 사람들은 내 말을 못 듣지요. 시간 공간 거리감 초월해 넘어서는 것이 글의 힘입니다. 글은 반드시 전해야 한다는 게 목적이고, 전해야 하기 때문에 글은 만년이 가도록 써야 하고, 그것이 작가들의 두 어깨에 짊어진 짐입니다. (기사 계속됩니다)
“불교 바탕 소설 3권 쓰고 작가 회향할 것”
[현장]소설가 조정래 문학과 삶 강연 전문(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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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소설가 조정래 문학과 삶 강연 전문(中)
서현욱 기자 승인 2010.12.08
21세기에도 강대국의 착취는 계속된다
전통 역사 풍습 문화 담긴 게 소설
또 하나의 정의가 있습니다. 인류사가들이 할 일이 없으니까 이런 가정을 했습니다. 우리 인류가 지금 멸망한다면 그때에 인류의 살다간 증거를 남겨야 하는 데 딱 한 가지가 무엇이겠는가? 불경입니까? 성경입니까? 역사책입니까? 철학책입니까? 답이 나왔죠. 제일 잘된 소설 한권을 남긴답니다. 왜냐하면 소설책에는 종교와 역사와 풍물과 습관과 모든 것이 버무려져 잇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한 나라의 전통과 문화의 깊이를 알게 될 때는 역사책을 읽기보다는 제일 잘된 소설을 읽음으로서 그 나라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톨스토이를 읽으면 러시아를 알게 됩니다. 빅토르 위고를 읽으면 프랑스를 알게 됩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읽으면 미국을 알게 됩니다. 소설이 갖는 힘은 현실적으로 정치권력, 경제권력에 비해서 매우 허약합니다. 그래서 릴케라는 시인은 ‘지금 한겨울에 얼어 죽어가는 소녀에게 필요한 것은 빵 하나인데, 내가 그 소녀를 살릴 수 없으니 무슨 의미가 있는 가’라고 했습니다. 20세기 지성사에서 최고의 지성이라고 말하는 사르트르도 ‘내가 쓴 소설이 몽마르뜨에서 죽어가는 노숙자의 담요 한 장이 안돼니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라고 했습니다.
그런 고민들을 통해서 긴 시간들을 거쳐 가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깨우쳐주고, 그 영혼들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을 열어주고 제일 제이 제삼의 불경과 성경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문학의 힘은 현실적으로는 약해도 장구한 세월을 통해 보면 장구한 인류의 역사를 이끌어 가는 푯대의 역할을 했다는 것을 잊어버리면 안되고, 그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문학작품을 읽는 것이고, 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현실적인 가난, 현실적인 괴로움을 견뎌가면서 일생을 문학에 바치는 것입니다.
우리 말을 지킨 사람들이 문학인
우리에게 36년이라는 세월이 도저히 지울 수 없는 핍박받은 처절한 괴로운 역사입니다. 그때 일본놈들이 가장 잔혹한 시민지 지배를 했다고 하는 데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까 말한대로 400만 명의 동포를 죽인 것 때문이 아니고, 그보다 더 큰 것이 민족의 언어를 완전히 말살 시켜버린 것 때문입니다. 1930년대 들어오면서 국어 교육을 못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해방되기 5년 전에는 이름을 개명해 이름까지 완전히 없애려고 했습니다. 미국 영국 프랑스 스페인 수많은 나라들이 식민지배를 했지만 이런 식으로 민족의 언어를 없애려고 하거나 성까지 바꾸려고 한 나라는 일본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가 많은 인명을 학살한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에 지금처럼 국민전체가 문맹률이 0.1%도 안되는 대한민국이 아니고, 패망한 조선 후예들이지요. 그때에 문맹률이 60%입니다. 일본이 정책적으로 국어를 못하게 했는 데 그 시절에도 문학을 한 분들이 있다고 하는 것이지요. 만해 한용운 스님부터 친일파 거두 육당 최남선, 춘원 이광수, 김동인, 염상섭, 수많은 사람들이 문학을 함으로써 우리 언어를 올곧게 지켜왔고 해방되면서 우리 국민에게 바로 국어 공부를 시킬 수 있는 바탕을 제공했고, 세종대왕께서 한글을 만드시고, 주시경 선생이 문법체계를 만드시고, 그리고 최현배 선생께서 국어연구에 가장 큰 공헌을 하셨는데, 그분이 한 말씀이 ‘우리 말을 지킨 것은 식민지 시대의 작가들이 지켰다’고 작가들을 칭송한 일이 있습니다.
나랏말 천시하는 넋 빠진 시대 빨리 끝나야
우리에게 언어가 없어진다면 민족일 게 없죠. 민족인 것은 첫 번째 말이 같다는 거죠. 두 번째 풍습과 습관이 같다는 거죠. 세 번째 전통이 같다는 거죠. 네 번째가 단일국가를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분단되어 있기 때문에 한민족 두 국가가 됨으로써 아직 민족의 정통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비극에 있습니다. 그런데 세계화 글로벌 하는 말들이 퍼지면서 영어를 가르치는 돈이 10조 15조를 넘어 지금은 20조가 되었습니다. 사교육비가. 엇그저께 TV에 나왔는데, 초등하생이 번개라는 말을 한국말로는 모르고 영어로는 알더라고요. 제가 보고 이게 세상에 말이 되는가? 영어를 잘하려고 혀를 수술해준다고 합니다. 영어 필요하지요. 우리가 세계를 상대로 물건을 팔아먹고 잘 살게 하기 위해서는 영어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전 국민이 이렇게 영어에 몰두해 많은 돈을 탕진하고 국어를 천시하는 시대는 일본놈들은 강제로 국어를 빼앗으려 했는데, 우리 스스로가 20조라는 막대한 돈을 들여 나랏말을 천시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넋 빠진 시대는 빨리 끝나야 하는 데 언제 끝날지 요원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에 <허수아비 춤>이란 작품을 쓰면서 , 일부러 우리말이 얼마나 맛깔스럽고 소중한 것인가? 얼마나 깊은 문학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알리기 위해서 수많은 속담을 그리고 부사라는 의성어 의태어, 빨강 파랑 누루죽죽 등 그런 식의 말들을 골라 집어넣음으로써 우리말의 묘미를 살리려고 했습니다. 그것이 대중들을 향해서 우리 국어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것인데, 그것을 설명하는 것은 문학평론가들이 할 일인데 두고 볼 일이죠. 인터넷 연재를 했는데, 많은 독자들이 여자들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데 이렇게 많은 우리말이 잇는지 몰랐다는 반응을 보면서 제가 노력한 것이 얼마나 효과가 있는 것인지 확인을 했습니다.
우리 것 소중함 잃으면 존재 상실
여러분께서도 어짜피 이 땅에 태어나서 이 땅에서 나이 먹고 늙어가서 이 땅에 뼈를 묻을 것이니까 우리 것이 소중함을 아는 것, 그 정신을 버리면 우리가 있을 수 없습니다.
자 여러분 세계화 참 좋습니다. 뭔지 모르게 좋은 것 같아요. 과연 좋습니까? 우리가 처음으로 겪은 세계화를 가르쳐 드릴게요. IMF사태입니다. 그 돈을 달라가 없어 나라가 거덜 나게 생겼는데 IMF사태를 6.25 이후 최대의 국난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IMF 세계은행에서 돈을 빌려왔습니다. 그때 세계은행 IMF에서 우리에게 받아간 이자가 얼마나 되는 지 아십니까? 10여 년 전에 일어난 일인 데 다 모르고 있단 말이예요. 이렇게 넋을 빼고 사니 우리에게 IMF는 또 와요. 그때 우리에게 돈을 주고 25%이자를 뺐어 갔습니다. 국제은행의 이자가 2%가 안되고 미국은 지금 이자가 없어요. 은행에 돈을 맡겨도 이자가 없어요. 그런 세상에서 25%의 이자를 뺐어갔어요. 고리대금도 이만저만한 고리대금업자가 아닙니다. 뭘말하는가? 우리나라가 망하게, 빈사상태, 곧 죽게 되는 환자의 팔뚝의 혈관에 주사바늘을 꽂아두고 피를 뽑아가는 것과 같은 겁니다. 세계화라는 게 이런 겁니다. 그거 좋아하면 안됩니다. 우리가 올바르고 똑바르고 정신 차리고 그 다음에 교류하는 게 세계화이지 무작정 영어만 잘하는 게 세계화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IMF가 또 오면 또 그렇게 할 겁니다. 금년 7월에 대전에서 세계금융회의가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경제장관도 참석했고, 바뀐 IMF 대표도 참석했습니다. 그때 IMF대표가 25% 고이자를 강압한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사과했어요. 사과로 끝나면 됩니까? 잘못된 것을 고쳐서 이자를 토해내야지 그렇지 않아요? 25%가 잘못됐으니 10%만 받겠다. 15%를 토해내던지, 그렇지 않으면 10%라도 토해내야 되지요. 먹은 놈이 장땡이라고 입 싹 닦아버려요. 이 지경이기 때문에 우리가 정신을 못차리면, 앞날이 어떨지 모르고, 제가 연세대 상대 강의를 가는 데 150명 상대생들이 한명도 몰라요. 생업에 바쁘신 여러분들이 모르는 것은 괜찮아요. 상법을 한다는 사람들이 몰라요. 정말 잘못됐지요. 대기업에 가서 나만 잘 살면 된다. 많이 잘 살아봐라. 다 굶어 죽는데, 니만 잘 살아봐라. 이런 식의 이기주의가 팽배해서는 안됩니다.
문인으로서 문학하는 의미 고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저는 아까 말한 대로 이 시대의 산소역할을 하는 것이 무엇일까를 대학 다닐 때부터 고민했고 그 결과로 얻은 결론이 나는 왜 하필이면 이렇게 척박하고 슬픈 통렬한 역사의 땅에 태어났을까? 이런 땅에 태어나 하필이면 나는 문학을 하려는 것일까? ‘왜 하필이면’ 이라고 붙는 것은 그 당시에 국문과는 ‘굶는과’라고 했어요. 밥을 굶는다. 그래서 국문과 학생들은 시를 하건 소설을 하건 상관없이 부업을 가질 준비를 했습니다. 제일 좋은 직업이 학교 선생 하는 거죠. 학교선생. 두 번째가 신문기자거나 잡지사 기자거나 출판사 기자거나 하는 거죠. 그래서 저도 교사자격증을 따기 위해서 국문과 공부보다 교육학개론 공부를 더 열심히 했어요. 그래서 정교사 자격증을 따가지고 졸업을 했습니다. 그때 문학을 하려고 하는 의지는 굶는 것을 각오해야 하기 때문에, 가난하게 사는 것을 각오해야 하기 때문에 굉장히 어려운 결심입니다. 그러면서 이러한 땅에서 문학을 하면서 무엇을 써야 하는가? 결론이 척박한 역사에 대한 이야기, 민족의 수난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것이 가장 문인으로서 문학하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첫 출발부터 사회부조리 비인간적인 인권 그러한 것들을 단편으로 쓰기 시작하고 그리고 대하소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그리고 <허수아비 춤>까지 쓴 것입니다. 제가 처음 등단에서 쓴 작품이 <누명>인데 미군부대에 근무하는 한국병사가 미군들 속에서 살면서 도둑놈도 아닌데 미군이 물건을 잃어버렸다고 할 때 누명을 쓰고 다시 한국군대로 돌아가는 이야기입니다. 흔한 말로 하면 반미소설이예요. 1970년 그때 스물여덟 살 때 등단한 작품이 <누명>입니다.
아버지가 6.25때 월북을 했는데 자기는 죽은 줄 알았어요. 근데 ROTC 마지막 신원조회에서 아버지가 월북한 게 드러나서 장교가 못되고 하사관으로 추락해 버리는 이야기를 썼어요. 그 말은 ‘연좌제’. 그러니까 반미 연좌제 이따위 소설이나 썼으니 미운털 박혀 중앙정보부에서 오라가하 했던 것이고, 또 <태백산맥> 때문에 11년 동안이나 조사받고, 그런 데 놀랍게도 무협의 처리 받지 못할 때 이 대법당에서 빨갱이 혐의자로 문학강의를 했으니 조계사 대단한 절이예요.
‘태백산맥’은 강대국의 약소국 착취와
한민족 이해하는 백과사전 역할한 것
그래서 긴 소설을 쓴 이유는 여러분들의 주머니를 털려는 게 아니고 너무나 할 이야기가 많고, 너무나 역사를 이해하는 데 복잡한 것이 많아서 길게 쓰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제가 길게 쓴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마흔에 <태백산맥>을 시작해 <아리랑> <한강>을 끝내니까 나이가 60이 됐어요. 20년 세월이 휙 지나갔어요. 그 좋은 장년 남자나이 20년 세월이 휙 지나갔어요. 그래서 스님들에게 제가 농담을 합니다. 스님 네들 면벽 5년, 10년 자랑하지 마십시오. 저는 20년 면벽 참선했습니다. 왜냐하면 <태백산맥>을 시작하면서 모든 대하소설은 뒤로 가면서 지루해진다는 것이 독자들의 정평입니다. 그건 왜 그러냐면 소설이 길기 때문에 세월이 5년 10년 갑니다. 박경리 선생이 <토지>를 25년 썼잖아요. 그러면 작가가 늙어요. 작가가 체력이 떨어져요. 지쳐요 그래서 소설이 뒤로 가면 지루해지는 겁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나서 소설 쓰면서 내 소설이 지루해지면 안되잖아요. 요즘 어떤 시대입니까? TV 다이얼을 돌리던 시대가 아니예요, 지금부터 20년 전에는 재미없는 프로그램은 다이얼을 돌렸지만 지금은 앉아서 팍팍팍 눌러버리면 끝나버려요. 그 누르는 시간이 얼마입니까? 1초에요 1초. 인내심이 전혀 없어요. 요즘은 채널도 100개가 넘어서 마구잡이로 누르면 별별거 다나오는 데 그 독자들과 싸우는 것입니다. TV의 빠른 속도, 흥미진진 그것과 싸우려면 소설이 지루하면 되겠습니까? 두 페이지만 지루하면 탁 덮어버리면 끝이예요. 그래서 최대한 내가 늙지 않도록 단축해야 한다. 단축하기 위해서 저는 20년 동안 술을 한잔도 하지 않았습니다. 외출 한 번도 안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자신만만하게 면벽참선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제 인생이 다 들어간 것이지요. 그렇게 쓴 이유는 우리 민족의 처절한 삶만을 쓴 것이 아니고, 우리 민족의 삶을 씀으로써 우리의 잘못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핍박받는 민족이 있다고 세계를 향해 말하고 싶어서 쓴 것입니다.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태백산맥>이 15년 전에 일본에서 번역됐는데, 일본평론가가 이렇게 평했습니다. ‘이 소설은 단순히 한국전쟁에 대한 이야기만 쓴 것이 아니다. 약소민족을 강대국이라는 나라들이 유린하고 핍박하고 착취했는가를 쓴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한국민족을 이해하는 데 이 소설은 백과사전의 노릇을 한다’
21세기에도 강대국의 착취는 계속된다
우리처럼 약소민족이 세계에 200개쯤 있고, 강대국이 10개쯤 있습니다. 그들이 지난 200년 동아네 식민지 착취를 하면서 얼마나 나쁜 짓을 많이 했습니까? 그중의 하나가 일본이고, 그리고 앞으로도 21세기에도 그러한 착취는 방법을 달리할 뿐이지 끝없이 계속된다는 이야기이지요. 그 이야기를 저는 제 소설을 통해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2005년에 독일 프랑크 프르트에서 도서전시회를 할 때, 우리나라가 주빈국이었어요. 그때 150평되는 중앙광장에다가 한국을 보여주는 전시를 했는데, 한국작가까지 나서 작품을 낭독하고 토론을 하는 데, 그때 사회를 보는 독일 평론가가 당신은 32권의 소설을 썼는데, 이미 유럽에서는 대하소설이라는 것이 없어져버렸다. 그 긴 소설을 쓴 당신은 유럽인들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 내가 일본 평론가가 한 말을 했어요. 그랬더니 통역하는 한국여성학자가 정말 토역을 잘 했는데, 300여명이 기립박수를 썼어요. 자기들이 저지른 2차대전의 범죄에 대해서 독일인들은 끝없이 죄의식을 가지고 있다. 당신이 한 말이 옳다는 겁니다.
제가 소설을 쓴 이유가 우리의 서러운 역사, 비통한 역사 그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의 미래에는 이러한 일이 없다는 게 첫 번째 이유이고, 두 번째는 우리처럼 약소민족들이 수없이 많은 데, 그들에게 저질러진 강대국들의 횡포가 다시는 있어서는 안된다. 범인류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기사 계속됩니다)
==[현장]소설가 조정래 문학과 삶 강연 전문(下)
서현욱 기자 승인 2010.12.08
삶 만족도 꼴지는 경제구조 잘못된 탓
‘백성의 하늘은 밥이고 임금의 하늘은 백성이다’
그래서 <한강>까지 썼는데 왜 이 땅의 기업인들이 모두 저를 미워하도록 <허수아비춤>을 썼는가? 이유는 간단합니다. 옛날 말에 ‘백성의 하늘은 밥이고 임금의 하늘은 백성이다. 이 말은 임금이 백성을 배고프게 하면 끝난다. 법 먹는거, 행복하게 사는 것이 우리가 사는 최고의 목표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경제발전을 했다고 하는 50년 세월을 사는 동안에 GNP 2만 달러라고 합니다. 경제 강대국 30개가 모인 것이 OECD인데, 세 나라가 더 들어가서 33개 나라가 됐는데, OECD 나라 중에서 행복지수 삶의 만족도가 몇 등입니까? 꼴지. 자살률이 일등 저출산이 1등, 못된 것만 1등합니다. OECD30개 나라가 있을 때 수출이 세계12위 였고, 올라 9위 금년에 7위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삶의 만족도가 7위는 못될망정 15위는 되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삶의 만족도가 꼴지예요. 우리는 ‘나는 불행하다’고 생각해요. 왜 그렇겠습니까? 그것은 경제구조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삶 만족도 꼴지는 경제구조 잘못된 탓
여러분 나이 든 분들은 분명히 기억할 겁니다. 70년대 초중반에 정부가 국민을 향해 큰 소리로 외친 말이 있습니다. ‘지금은 분배의 시기가 아니고 축적의 시기이다’ 이 말은 국민 여러분께서 기다리시면 언젠가 분배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기다리십시오. 그 말이지요. 그때 한말이 민족자본을 형성해야 한다. 아~ 명칭 멋있어 민족자본. 이것은 세계의 거대한 자본들과 경쟁해서 우리가 수출품을 잘 팔아서 국민 전부가 잘살게 하기 위해서 허리띠를 졸라매고 기업들을 키워서 대자본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고 정부가 보호 비호를 했어요. 그리고 50년 지난 지금에 분배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이 땅의 거대한 기업들은 비자금 만들고, 탈세하고 불법으로 상속하고 그렇게 해서 지 배때지만 배 터지도록 먹고 국민들은 상대적으로 가난하도록 만든 것이 오늘의 현실이잖아요. 이 문제가 얼마나 시급하고 화급한가.
자 여러분, 1980년대 중반에 전두환 정권이 있을 때 우리는 군부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젊은이들이 가두투쟁을 하고 매일이다시피 최루탄 가스 마셔야 하고 분신자살하고 굉장했습니다. 그때 조사를 했습니다. ‘당신은 경제적으로 어떤 부류에 속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국민의 80% 정도가 난 중산층이라고 했습니다. 그때 국민소득이 5천불정도 밖에 안됐어요. 지금의 1/4 정도입니다. 세계 경제학자들이 깔깔 웃었어요. 저 사람들 정신병자 아냐? 어떻게 자기들이 서민일 뿐인 데, 중산층이라고 말하는가? 그자들은 숫자밖에 안 봤어요. 숫자.
우리 국민들은 지금은 별로 만족하지 못해도, 세월이 가면 나는 중산층이 될 수 있어 하고 꿈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그들은 몰랐던 것이죠. 병신새끼들이니까.
지금, 최근에 조사를 다시 했어요. 국민의 75%가 ‘나는 서민이다’라고 대답했어요. 이 얼마나 끔직한 현실이예요. 지금은 꿈이 없어져 버렸다는 거예요. ‘서민’이라는 말은 나는 가난해, 갑갑해, 나는 잘 살 가망이 없어, 그런 식으로 절망 좌절에 빠져있다는 것이에요. 이 얼마나 무서운 현실입니까?
제가 <허수아비숲> 내자마자 소설이 정확한 현실반영이라는 것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한화 비자금 사건 터져, 태광 비자금 터져, 아 역시 작가는 선견지명이 있다. 놀랍게도 태광이라는 이름이 소설의 일광이라는 회사와 이름자를 빌려온 것처럼 됐어요. 이것 참 부처님의 은혜인가 봐요. 그 기업이 총 서열 40위 밖에 안 되는데, 서울신문이 그들의 비자금이 1조라고 했어요. 그리고 검찰이 7천억이라고 했어요. 1조라고 하면 국민이 배신감을 느꼈을 테니 수사 기법 상 줄였겠지요. 중요한 것은 40위 밖에 되지 않는 업체가 그랬을 때, 그 보다 돈 많은 어찌 했겠는가? 임이여 짐작하소서!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에요. 그리고 사업하는 분들은 괴롭지만 들으십시오. 괴로우면 불전에 보시 많이 하십시오. 예사로 당연한 것처럼 하는 말들이 있습니다. ‘나라에서 내라는 세금 다 내면 못해먹어’ 그 말은 뭐냐면, 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탈세를 하고 있어. 그 말이잖아요. 그렇죠. 참 무서운 현실입니다. 국가는 뭡니까? 국민의 세금을 잘 걷어서 잘 관리해 국민전체를 위해서 고루고루 잘살도록 만드는 책임과 의무를 하는 게 국가입니다. 그들의 많은 비자금, 많은 기업들이 탈세를 하게끔 만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권한을 위임한 국가수반에 종사하는 자들이 전부 기업 돈 먹고 타락했다는 말이에요. 그이야기를 <허수아비춤>에 다 써버렸어요.
반국민적 반사회적 경제범죄 감시해야
여러분들이 읽으시면 통쾌하기도 분하기도 절망하기도 할 거에요. 하지만 <허수아비춤>이란 제목이 왜 붙었는가? 그들이 그렇게 하도록 방관하고 기업이 잘돼야 잘 살수 있다는 맹신을 믿고 멍청하게 산 우리 모두의 잘못이다. 우리 모두가 ‘허수아비춤’을 췄기 때문에 그렇다. 또 하나의 의미는 재벌을 에워싸고 그런 나쁜 짓들을 하면서 반국민적인 반사회적인 비인간적인 경제범죄들을 저지르는 행태를 저지르는 그 자들을 우리 모두가 힘을 합쳐서 허수아비춤을 멈추지 않으면 4,5만 불대의 선망하는 선진국의 미래는 없다.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저 옛날부터 독서를 잘 하는 방법이 무엇인가? 안광이 지배를 철하도록 읽으라고 그랬어요. 눈빛이 종이를 뚫도록 읽으라고 그랬어요. 여러분 지금부터 눈을 크게 뜨십시오. 앞에 있는 종이를 보세요. 뚫립니까? 안 뚫리지요. 그 말은 정신을 집중시켜서 글자 하나하나의 행간을 다 읽어라 하는 뜻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어려운 책, 뜻을 모르는 책도 100번을 읽으면 자연이 뜻이 풀린다. 공자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작가가 글을 쓸 때는 한 줄을 쓰면서도 두 번 세 번 생각하고 다시 글을 고치고 그렇게 해서 하나의 작품이 되어 집니다. 졸면서 읽지 마시고, 엎드려 읽지 마시고, 발가락으로 읽지 마시고 똑바로 스님들이 독경하는 태도로 정확하게 읽으시면 이 작품이 왜 이 땅에 있어야 하는 지 아시게 될 것입니다.
저는 제가 글을 써왔던 40년의 역경이 곡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 세상의 만상이 다 글의 소재가 됩니다. 그것을 작가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어떻게 사물을 인식하고 있는가에 따라서 소재를 취사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파악하는 문학의 인생은 지금까지 써온 인생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남은 세월도 그렇게 쓸 것이고, 그것이 곧 작가로서 산소역할을 하는 것이라 믿기 때문에 그렇게 쓸 것이다.
<태백산맥>이 나온 지 24년이 됐습니다. 책이 한권이 나오면 문화가 있는 나라에서는 책의 수명이 3~6개월입니다. 지금도 제 책이 계속 <태백산맥>이랑 <한강>이 한 해에 10만권씩 팔립니다. 그렇게 긴 세월을 팔 수 있는 것이 제가 선택한 길이 옳다는 것을 독자들이 입증해 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 길을 따라서 갈 것입니다. (강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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