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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28

식민지근대화론 불편해도 이건 알자 2021. 4. 1. 함재봉과 목요초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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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근대화론 불편해도 이건 알자

경제사회TV
96.9K subscribers

6,372 views  Apr 1, 2021  #독립운동 #일제강점기 #식민지근대화론
#식민지근대화론 #일제강점기 #한국근대화 #독립운동

===
2021. 4. 1. 함재봉과 목요초대석

식민지근대화론에 대해 불편해 하지만,
역사를 정확히 마주했을 때 미래가 열립니다.

아직도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국의 역사 인식과 갈등
우리는 어떻게 이를 극복하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언제까지 친일파와 싸워야 할까요?
언제까지 과거를 받아들이지 못해 서로 증오하고 싸워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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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 J 특강 6 뉴라이트와 식민지근대화론이 불편해?





Dr. J 특강 6 뉴라이트와 식민지근대화론이 불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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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Search in video
[음악]
안녕하세요 닥터 J 장사입니다 오늘은
대한민국 사회를 분열로 몰아가고 있는
뉴라이트와 일명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먼저
식민지 근대화론이라는 건 열강의
침략으로 인해서 그 식 국가가 인
국가에서 현대적인 국가로 어떠한 발전
어 혹은 신문물이 들어왔다는 건데
일단이 부분만 보면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시스템적으로 식민지를 점령한 국가는
해당 식민지의 인프라인 투자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간단한 예로 여러분
따오라는 맥주를 아시나요 독일 제국은
청나라의 칭따오를 강제 점령해서
이곳에 지하수를 기반으로 맥주 생산
설비와 원재료를 들어와 투자를 하게
되었고 이곳에 회사를 설립합니다 이후
100년이 넘은 지금 시점에서도이
칭따오 맥주는 칭따오 시의 주요
산업으로 잘해 잡았죠 그러니까 칭따오
맥주는 어떤 제국주의의 역사적인
배경으로 탄생한 슬픈 산물이라 볼 수
있는데 중국은 이칭 따를 침략자인
독일의 정통 방식으로 만든 아주
뛰어난 제품이라고 본인들이 광고하고
소개합니다 또 이걸로 실제 돈을 크게
벌고 있기도 하죠 비슷하게 조선이라는
국가는 는 당연히 맥주라는게 없었는데
앞서 맥주에 크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일본은 1800년대부터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여 맥주를 생산하고
있었고 대일본 맥주 같은 회사가
조선의 자회사를 만들고 자본과 기술을
들여와 조선 안에서 맥주를 생산하는데
우리가 아는 하이트 맥주 같은 회사가
바로이 일본 대일본 맥주의
자회사였다 조선 맥주로 시작했죠
맥주는 이후 한반도에서 보편화되었고
엄청나게 그 생산량이 늘어나게 됩니다
자 이런 것처럼 예컨대 인도의 무굴
제국이 영국의 침략으로 망하고 일제
강점기는 상대도 안 되는 거진
100년 가까운시기 동안 영국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대략 90년 정도죠
인도는 행정 사법 제도가 근대적으로
정비되었고 뭐 별의별 다민족 체제여서
언어도 제각각이었던 인도가 대부분
영어를 쓰게 되었고 면방직 산업을
현대화하여 면화 생산이 크게 늘었고
농법 토지제도 근대화 되었죠 생산이
늘고 현대적인 산업이 발달하면서
영국은 자신들의 기술로 철도를 놓고
항구도 크게 개발했습니다 또한 가장
결정적으로 사람의 눈이 뛰었다는 거죠
무을 제국이나 인도라는 틀 안에 갇혀
있던 사람들이 현대적인 산업이나
사상을 배우고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되었죠 간디도 그러한 지식인층의 한
사람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철저히 대형 제국의 이익을
위한 방향이었고 그것을 위한 인프라적
투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식민지배를
하는 국가는 당연히 본인들의 편의성과
산업의 이익성 위해 철도 우체국이
신청이니 뭐 이런 걸 설치하기
마련이고 이것은 조선이라고 다를게
없습니다 그 부작용으로 돈이 되는
작물을 생산하고 쌍에 인력을 쓰고
하기 때문에 산업이나 인구는
성장하는데 식량 생산이 줄어들고 정작
식민지인들의 생활이 크게 성하지
않기도 하죠 자 그한 관점에서 식민지
근대화론이라는 것은 당연히 근거가
있고 분명한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그냥
식민지 근대화론을 말하면 발짝을
하지만 식민지 근대화론 자체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애당초 조선의 근대적
개혁인 갑보 개혁 자체가 본이 주도한
개혁입니다 그런데 이제 현대 대한민국
즉 식민지였던 국가의 정치나
경제성장의 그 동력이나 이유 자체를
식민지배에서 찾는 혹은 그것을
찬양하는 식민지 수혜론 가는 것은
사실 이게 문제라는 거죠 영국이
지배하면서 무 제국에서 이어져오는
구시대적 체제가 붕괴되었고 인도의
산업이 성장하고 인구가 오히려 늘기도
했지만 인도인들이 이것을 영국에게
감사해야 하는가 이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입니다 칭따오가 돈이 되니까 무슨
맥주의 나라 독일의 공법으로 만든
정맥주 막 이런 걸고하는 거지만
그렇다고 들어와서 기술을 해준
독일에게 감사해야 하는가 이건 완전히
다른 문제라는 겁니다 문명이란 반드시
타 문명과의 충돌에서 발전합니다
이슬람이 중국과 뭐 탈라스 전투나
비단길의 패권을 놓고 교류하고 때로는
전쟁을 하면서 종이 화약 나침 반등이
넘어가서 추 오스만 제국 같은
경우는이 화약과 화포를 가장 잘
발전시켜 사용한 국가가 되기도 했죠
일본 같은 경우는 임진 란으로 조선의
도공을 잡아가 도자기가 발전하여
이것이 일본의 가장 중요한 국가
산업이 되기도 하죠 여러분 조선과
일본을 보면 기본적으로 구시대 지배
체제 예컨데 조선의 왕조나 막부의
지배자인 쇼군 같은 경우를 봐도 원래
체제의 지배자는 굳이 큰 정치적
개혁을 할 필요성이 없습니다 왜냐
기존의 체제를 유지하면 그 지배층은
계속해서 백성을 지배하면서 군림할
수가 있기 때문이죠 조선이 예당초
근대적 개혁을 하고 황제가 머리카락을
자르고 하는게 무슨 이유입니까
전 가치관과 지체 산업을 유지하는
것으로는 더 이상 국가를 운해
간다는게 불가능하기 때문에 하는 거죠
일본도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막는
당연히 기존의 체제를 유지하려고
하는데 미국의 리제이 막부의 해군을
박살 내죠 일본은 무려 200년
동안을 제한적인 무역을 운영하며
조선보다 훨씬 먼저 무역을 하면서도
정책을지
미화 조약으로 에도와 격적인 및 국을
풀면서 이제 생각 있는 일본의
지식인들도 알게 된 거예요 아 막가
쓰레기구나 우리가 우한 구나라는 걸요
일본이라는 가도 근대의 시작은 처맞고
나서 시작이 된겁니다 근데 이제
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지게 되는
거잖아요 이메이지 유신은
[음악]
세계사적으로
강의 반에 들어가는 가로 합니다
메이신 한 점은 위로부터의 혁이 가장
성공적으로 이어졌다는 거예요
조선이라는 끝 국가도 침략을 당하고
상대과 발성을 몸으로 느끼게 되니까
그제서야 이제 근대적인 개혁이나
노력을 하게 되었지만 컨 중국의
운동이 실패한
것처럼가 스는
않한
군정을 포기하지 않은 채로 독립협회를
살고 신정도 실패했습니다 근본적인
체제는 고치려고 하지 않고 산업이나
군대를 대하려고 했지만 실패했죠 자
뉴라이트라는 집단은이 근대 부분을
보는 시각이 달라요 일본의 조선 강제
병합을 식민지 근대화론 그치면 그건
큰 문제가 없는데이 사람들이 보는
시각은 거기서 한발더가 민지 수론
간다는 거요 런데 저같은 역사관을
가진 사람들은 사실 열강 중에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는
부분은 인정합니다 근데 그게
결과론적으로 일본이라는 국가는 주제도
모르고 미국에게 깝치다가 1940년대
개망한 나라잖아요 예를 들어 러일
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해서 한반도가
러시아의 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면
이후 소비에트를 거쳐이 나라가 어떻게
되었을지 알 수가 없어요 소는
1990년대 초반 까지도 전세계를
양분하는 패권 국가였다 말이죠 그런데
뉴라이트는 일본의 지배 자체를 저
같은 시각이 아니라 이게 윤치호의
사상과 비슷한데 조선이라는 국가는
안된다 조선 민족은 자생 자체가
불가능하다 여기서 출발하는데 문제가
발생한다는 거예요 마치 처칠의
사상처럼 아시아 놈들은 근대적인 문명
국가로 스스로 살아간다는게 어렵다라는
것과 비슷해요 그래서 뉴라이트 사상을
가진 사람들 은 영국 지배와 인도가
그랬던 것처럼 일본이 지배함으로써
신분 체계와 그 인식이 완화되고
결과적으로 인구가 증가하고 산업이
발달하는 부분에 포커스를 맞춥니다
영국이 카스트 제도에 대해 근본적으로
개입하지는 않았지만 당연히 무굴제국
시절보다 신분제에 대한 시각은 완화가
되었죠 또 식민지에 대한 인프라적
투자는 당연히 하는 거고 지배 국가는
그래야 자기들도 편하기 때문에 친
영국의 사상을 가지거나 그
사람들에는 편도 제공하고 그런 애들을
위해서 돈도 당연히 풀어요 이건 모든
제국주의 국가가 다하는 거예요 조선도
똑같습니다 일본 제국이 자체적으로
투자를 해서 병원 철도 우체국 통신
대학 이런 것들이 집중적으로 세워지고
한반도의 위생보건 통신 산업이
발달했다고 하지만 이것은 한주의
논리죠의 대한
인도인들이 에 감사해야 한다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거예요
물론 구한말의 처절한 현실과 상황을
제대로 배우지도 않고 우리의 역사를
포장하며 선과의 구도로 역사를
주입하는 건 큰 잘못이지만 여러분
식민지 근대화론이 아니라 우리가
일본의 지배를 받아 근대적인 국가로
갈 수 있었다 그래서 다행이다 일본
아니었으면 큰일 났었다 이런 수혜론
가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일본도
똑같이 철저한 전근대적인 시스템의
국가였는데
자체적으로 세계사적으로도 인정받는
성공적인 메이지 유신을 보여줬던
것처럼 우리라고 왜 그게 무조건 안
됐겠습니까 물론 저도 종이라는 천하의
쓰레기를 보면 쉽지 않았을 것 같긴
한데 그렇다고 조선민족은 아예 감성이
없는 놈들이다 이렇게 가서야
되겠습니까 여러분 식민지 근대 자체
그렇게 열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건
당연히 근거가 있는 거예요 예를 들어
인도 독립의 아버지인 디만 해도
영국을 히 찬하 람
그 근대화을 본 사람입니다 그는 진짜
영국 시민으로 자부심을 가졌던
사람이에요 그리고 무글 제국에서는
절대 될 수가 없는
신분적인데 노력해서 변호사가 된
사람이고 그리고 유명한 하로 인도
출신이라 남아프리카에 가면서
1등석에서 3석으로 쫓겨날 때 간
본인도 말했죠 내가 위대한 영국의
시이 아닌걸 알 되었다고요 간는 자진
보호전쟁 하고 1차대전 때는 자기들을
지배한 영국을 위해 인도인 의병을
만들자고 나서기도 합니다 저는
대제국이 제가 사랑에 빠졌던 어떤
이상을 갖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간디는 영국이라는 국가가
인도를 변화시킨 부분에 대해 열렬히
찬양하던 일종의 친영파 오히려
이후로도 간디는 영국에 협력하면서
성장하고 종국적으로 인도의 자치와
독립을 인정받아야 한다 조선에도
비슷한 관 람들이 있었 당장 독립은
어려우니 일본에 협력하면서 실력을
키우고 조선인의 참여를 보여주어서
일본 본토인과 동등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지식인도 상당히
많았어요 인간사가 이렇게 복잡해요
우리 입장에서는 저런 생각을 가지고
일본군의 입대할 것을 장려하는 사람은
무조건 악질 친입 하잖아요 그러나
당장 내선일체를 말하면서도 조선인과
일본인을 별하는 등을 는 사람들은 그
입장 자체가 다르단 말이죠 간디는
2차대전 때도 영국의 편으로 철저하게
파시즘과 싸워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인도는 실제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영국은 인도의 자치와 독립을
인정해준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그제서야 희망을 접고 적극적인 인도의
독립 활동에 나서게 되는 거죠 우리가
아는 그 비폭력 무저 운동 뭐 이런
거 있잖아요 그 간디를 인도인들은
마트 위대한 혼이라고 부 찬양합니다
디가 보어 전쟁에서 1100명의 인도
의무대를 만들어 연국 군복을 입고
보어 전쟁에 참여한 것처럼 일본을
위해 천명의 조선인 병대 이끌고 뭐
태평양 전쟁에 자진 참전한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를 철저한 매국노라
매장하지 또한 간디는 영국 식민
지배하에서 분명히 상위 계층으로 젊은
시절을 보내는 사람입니다 왜 영국에
충성하고 영국이 구축한 시스템에서
노력하여 위로 올라간 사람이기
때문이죠 우리도 지나간 역사를 과악
분지 말 일제강점기라는 우리의 치이
왜 시작되었고 그 시기를 실제 겪은
사람이 어떻게 생각을 하였고 무엇이
달라졌고 무엇을 얻었는지 그 시기를
극복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투쟁과
노력이 있었는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단적인 예로 그 안중근 같은 사람도
사실은 메이지 천왕의 사상에 심이
감화된 사람이었고 이봉 같은 사람
자신이 마 일본을 사랑했는지 스스
밝으며 이 진정한 일본인이 될 수
없다는 차별 때문에 그 이후 조국의
독립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분명히 말한
바 있습니다 여러분 감성을 빼고 진짜
역사를 마주합니다 식민지 근대화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뉴라이트가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는
어차피 안 된다라는 패배적 관점 즉
식민지 수혜론 가지고 갈 필요도
없습니다 간디는 상대적으로 당시 더
발전된 국가가 자국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그 시기에 인간이 겪는
달콤함과 고뇌를 잘 설명해 주는
예시라고 있습니다 진짜 역사를 보는
사람은 어 역사를 선과 악으로
재단하지 않습니다 또한 자신이 겪지
않은 일을 가지고 그 시대를 단정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걸어온 길은 굉장히
복잡하며 그 시대의 진짜 역사와
고뇌가 다 기록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하나의 사료가 더 발견되었다는
것으로 앞서 있었던 관점이 논파
하는게 바로 역사입니다
든지 인간의 개혁이나 사상은 시대
필요성에 따라 생기는 것입니다 중국이
실제로 개판이고 혼란기 때문에 제자가
사상이 했고 일본의 혼란기에 배신과
모이 난무했기 때문에 사도라는게
미덕으로 자리잡았던 것처럼 말이죠
우리 모두가 나라를 빼앗던 그
근본적인 원인과 그 시대에 대해서 또
그 시대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에
대해 잘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감사합 니다
[음악]

2024-10-27

국어 교과서에 단골로 작품 실리는 ‘친일 문학인’ 6명 - 인사이트

국어 교과서에 단골로 작품 실리는 ‘친일 문학인’ 6명 - 인사이트



국어 교과서에 단골로 작품 실리는 '친일 문학인' 6명



이별님 기자
업데이트 2017.12.17. 

고 임종국 선생 / 뉴스타파





[인사이트] 이별님 기자 = "오욕의 역사도 역사다"




'친일 연구의 선구자'로 알려진 역사가 고 임종국 선생은 생전에 이런 말을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독립운동사'와 같은 영광의 역사뿐만 아니라 '친일'처럼 부끄러운 역사까지도 직시해야 한다는 말이다.




임종국 선생은 '오욕의 역사'도 기록해야 한다는 정신으로 1966년 '친일문학론'을 출판했다.




'친일문학론'에는 한국 문학계를 호령하던 문인들 중 친일파들이 다수 있다는 충격적인 진실이 담겨있다.








해당 저서가 소개하는 '친일 문학인' 중에는 학창 시절 국어 교과서에 쉽게 볼 수 있었던 친숙한 인물들도 많다.




부끄럽게도 교과서에선 이들이 이룩한 문학적 성과물이 나열돼있을 뿐, 친일 행적은 축소되거나 감춰져 있는 경우가 대다수다.




교과서에 나오는 한국의 친일 문학인은 누구인지 아래의 목록을 통해 확인해보도록 하자.




1. 채만식




한국학중앙연구원









일제강점기 당시 땅을 많이 소유하는 대지주들이나 고리대금업자 등 타락한 인물들을 풍자하는 소설 '태평천하'는 채만식의 대표작이다.




식민지 시대의 부정적인 자화상을 그려냈던 소설가 채만식은 아이러니하게도 1940년대 초부터 친일 색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 당시 채만식이 발표한 작품에는 태평양전쟁 징병과 지원병 모집을 선전 선동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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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에도 조선인 스스로가 자발적으로 일본인이 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친일 소설 '아름다운 새벽' 등을 집필했다.




1948년 해방 후 채만식은 '민족의 죄인'이란 작품을 발표하며 자신의 친일행적을 반성하기도 했다.




하지만 때늦은 반성은 대세를 따르기 위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2. 이광수




온라인 커뮤니티










춘원 이광수야말로 대한민국 국어 교과서가 가장 사랑하는 인물이 아닐 수 없다.




이광수의 대표작 '무정'은 교과서에서 쉽게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시험 문제로 자주 출제되는 단골 소설이다.




이광수가 남긴 문학적 업적과 비교해 볼 때 그의 친일 행적은 묻힌 감이 없지 않다.









그는 1930년대 말 중국의 일본군 위문을 위한 모임인 '북지황군위문작가단' 결성식의 사회를 맡으면서 본격적인 친일 행보를 걷기 시작했다.




태평양 전쟁 당시에는 시·소설·평론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황국신민화 찬양과 일본의 침략전쟁 정당화, 전시동원 독려 등을 적극적으로 선전했다.




이 때문에 이광수는 해방 후 친일 청산을 위해 꾸려진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에 의해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됐다.




식민지 시절 민족을 배반했던 대가를 받나 싶었지만, 곧 병보석으로 풀려난다.









3. 노천명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그러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노천명의 첫 시집 '산호림'에 수록된 '사슴'은 섬세한 시 구절과 애상적인 분위기로 현재까지 널리 사랑받고 있는 작품이다.




여성들에게 기회가 많이 없었던 식민지 시절, 여류시인으로 이름을 날린 노천명은 1940년대 초 다른 문인들과 마찬가지로 친일 행보를 걸으며 커리어에 치명적인 오점을 남겼다.




1942년 노천명은 일제가 우리 문인들을 회유하기 위해 만든 '조선문인협회'에 가입한다.




이후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문화부에 들어가 일제의 강제 징병을 찬양하는 내용의 시들을 썼다.




노천명은 뛰어난 재능을 겸비한 여성 시인이었지만, 그가 저지른 과오로 인해 '친일 시인'이라는 오명에서 벗어 날 수 없게 됐다.




4. 최남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최남선은 '해에게서 소년에게'라는 시로 전근대적인 시조형식과 창가 형식에서 벗어나 근대 자유시로의 변화를 성공적으로 이끌어낸 선구자였다.




또 1919년 3·1운동 때는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서 활약했다.




그러던 최남선은 3·1운동으로 투옥되고 나서 석방된 후 일제의 압박과 회유책에 넘어가 친일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다른 문인들에 비해 비교적 일찍 변절한 최남선은 1930년대 말에 만주 건국대학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일제 말기에는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선전하는 언론 활동도 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그는 광복 후에 친일 반민족 행위자로 기소돼 1949년 감옥에 수감되었다. 하지만 곧 병보석으로 석방됐다.




5. 이인직




온라인 커뮤니티




이인직은 한국 최초의 신소설 '혈의 누'의 작가로 한국 소설 문학이 근대로 전개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인직의 실체를 잘 알지 못하는데, 사실 이인직은 을사오적 중 하나인 최악의 매국노 이완용의 비서였다.




뿐만 아나라 이완용과 모의해 일본으로 건너가 한일병합 협상을 벌여 1910년 한일병탄조약이 체결되는 토대를 제공했다.




이후 그는 전국을 순회하며 조선왕조를 비판하고 조선과 일본의 병합을 정당화했다.




친일의 적극성과 해악성을 수치화할 수 있다면, 이인직은 앞서 설명한 친일 문인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을 것이다.




6. 서정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미당 서정주는 탁월한 언어 미학으로 한국 현대 시의 최고 수준을 성취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러나 서정주는 1940년대 초부터 일제가 패망하기 전까지 시와 소설 평론 등을 통해 일제에 협력했다.




일제가 저지르는 태평양전쟁을 미화하거나 학병 지원을 권유하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서정주는 해방 이후에도 식민지 시절과 별반 다르지 않은 행보를 보였는데, 1980년대에는 전두환 독재 정부를 찬양하는 시를 쓰기도 했다.




하지만 서정주는 죽는 날까지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를 '친일파'가 아닌 하늘을 따라 순일(順日)했다는 이른바 '종천순일파(從天順日派)'라는 궤변으로 자신을 변호했다.




이쯤 되면 서정주의 시는 '악마의 재능'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일제 덕에 발전했다"는 서울대 교수에 '팩트 폭행'한 일본 역사가'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했던 이영훈 서울대 교수의 망언을 일본의 양심적인 역사학자가 반박해 눈길을 끈다.

역사교과서 논란, ‘식민지 근대화론’이 뭐길래 / 김용삼 대기자 논평 [이것이 뉴스다]


역사교과서 논란, ‘식민지 근대화론’이 뭐길래 / 김용삼 대기자 논평

===



0:05 / 23:42


Transcript


김영삼대 기자님과 함께합니다
어서오십시오네 안녕하십니까 아니 요즘
사 역사기 왔을 때문에 너무나 시끄
거 같습니다 좀 시하게 오늘 좀 논평
주죠 오늘 경영 신문에 난 기사를
보니까 뭐 민족문제 연구소를 앞서
가지고 민족문제 연구소 예 뭐 민정문
연구서가 뭐 하지는 뭐 시청자분들이
잘 아실테니까 아 내용을 보니까 한
다섯 가지
정도를 그 집중 공격을 하는 거
같아요 첫 번째로는 야 무슨 뭐
식민지
근대화론을 써놨다 식민지 근대화론
같이 이렇게 나쁜이 이거 인정할 수도
없는 그니까 일제가 어떻게 보면은이
한반도를 근대화 시켰다 그런 얘지
않습니까 예 근데 이게 뭐가 문제라는
거죠 어 아니 일본이
식민지를 근대화 시키지 않았다는
건가요 뭔가요 그니까 이게 뭐 왜 왜
문제가 되지 잘 이기안 됩니다 예예
식민지 근대화론이 편향된 역사 인식이
그래요 아니 사실이잖아요 그러니까 그
사실을 얘기하면 편향된 역사
인식이라는 거예요이 식민지 근원에
가는 일본 통설에 일본 자금과 기술이
들어와서 우리 조선을 근대화 시켰다
근데 이거를 인정을 못 하겠다는
거예요 그러면이 주장이 왜 편향된
것인지 근거를 내놓라 이거예요 근거가
있어 그다음에 편향된 근거가 뭔지도
그 얘기도 못하면서 계속 이런 식으로
뭐 무슨 뭐 이거 뉴라이트 사관이다
뭐다 뭐 아 근거 없어요 아니 이
근대화를 시킨 거는 뭐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데 이거를 그냥 뭐 무슨
근거도 없이 계속 물고 뜯는 거예요
어 자
일본은 식민지 시절에 막 막대한
투자를 했습니다 뭐
공공재를 그 뭐 건설하기 위해서 또
사회 간접 자본을 건설하기 위해서 또
기업들이 민간기업이 투자를 하는
방식으로 조선에 투자를 했어요 얼마를
그 갔다가 투자 했
총 128억 엔을 투자했어요 이게
당시 돈으로이 128억 당시 돈으로
그럼 어마어마한 돈인데요 그런데 이게
원래는 일본이 그 조선에서 세금을
걷어 가지고 이거를 투자하기로 했는데
아 자체 충당하기로 했는데 조선에서
세금이 거쳐야 말이죠 그러니까 거의
모든 자금을 일본 정부에서 북고
지원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일본 국민이
낸 세금을 조선에 갔다가 줘서 그걸
가지고 뭐 철도 도 놓고 도로도 놓고
뭐 뭐 이런 거예요
이게음 그래서 총 128억 엔이
들어와 가지고
그중에 그 나중에 일본 사람들이이
공장이나 이런 걸 다 뜯어 가지고
갔으면 수탈이 맞을 거예요 그런데이
거의 모든 한반도에 있는 공장 시설
그다음에 뭐음 무슨 뭐 발전소 예예
뭐 철도 도로 항만 시설 이런 걸
전부 가져갔으니 못 가져 가지
어떻게가 다 넘고 갔잖아요 그래서 총
유입 자금의
78.8% 해방 후에 우리 땅에 그냥
남은 거예요 오 그럼 뭐예요 이게
아까 128억 에이라 그러셨습니까
128억 엔에 한 80% 예 한 거의
100억엔 정도는 그대로 근데 당시
100억 엔입니다요 여러분 지금으로
치면은 예 비유가 안 되는 그런
액수입니다 그래서이 저 이대근 교수님
같은 분이 이미 오래전에이 기속 재산
연구라고 하는 정예 말 어마어마한
연구를 통해서 일본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서 얼마 정도를 유입을 했고 그게
어디에다가 투자가 됐고 이게 어디에
남아서 우리께 됐는지가 상세히 연구가
돼 있어요 이걸 토대로 해서 식민지
시절에 근대화 됐다라고 주장하는 건데
이거를 지금 부정하고 이게 마치
불안한 사상인 것처럼 써놨다고 지금
10를 거는 거예요 이게 아 그럼
이유도 얘기도 못하면서 는 그런 상
그렇습니다 자 2차 세계 대전이
끝나는
과정에서 일본 그러니까 식민지를
경영한 나라가
식민지에가 이렇게 어마어마한 자금을
갖다 때려 박았는데 이거를 전부
완전히이 미군정이 몰수를 해 가지고
대한민국 정부에 인계를 해 줬잖아요
예예 이런 사례는 지구상에서 한국을
제약은 없어요 심지어 일본 민간인의
재산까지를 다해서 한국정부에 넘겨 준
거예요
이게 바로 이게 한국이 빠른 시간
내에 선진국에 진입할 수 있었던 진짜
이유다 이런 것들이 이미 다 연구가
돼 있는데 무슨 놈 식민지 근원이
근거가 없는 없다는 뭐 문제가 있다는
거예요 아니 그니까 오히려 우리한테
좋은 건데 예 예 자 두 번째로는네
항일 뭐 의병 투쟁 무장 투쟁이 절대
선이냐 장 투쟁에 대해서는 뭐 얘기도
없이 뭐 어쩌고 저쩌고 뭐 이제 막
비를 걸어놨어요 그런데 그
당시에이 그 외교 독립을 주장하는
분들이 왜 외교 독립을 주장했으니
어 어쩔 수 없는 현실 때문에 한
거예요 사실 경력 차이가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예 자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일본군이 163만 8천
명이에요
경력이 그러면 거기에서 대적하는
우리의 그 상일 의병은 3,500명이
있어요 그 3,500명이 전부
자유시로 유인해서 자유시 다
몰살당하고 그 포로로 잡혔지요 부사원
주의자들이 해서 그죠 그다음에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 때는 일본군이
720만 이었어요 그럼 우리는 몇
명이었습니까
우리는 광복군 300명 조선의용대
300명이 다해요
이게 그런데 무슨 너무 무장 투쟁을
하고 뭘 뭘 하냐고요 이게
어 그 당시 이제 1919년에 임정
상해 임시정부가 만들어지면서 야
우리도 일본하고 전쟁을 하자 전쟁을
하려면 병력이 있어야 되냐 그래서
10만 육군 건설 계획을 발표해요
근데 그 당시 임정이 사무실 월세도
못내 가지고 여기서 쫓겨나고 저기서
쫓겨나고 이런 판인데 10만 육군을
무슨 돈으로 만드냐고요 그래가 여러분
아시겠지만 군대 돈입니다 예 말로만
떠들다가 그냥 버렸어요 근데 무슨
너무 의병 투쟁을 하고 무장 투쟁을
하냐고요 그러니까 할 수 있었던
일이라고는 유일하게 의거가 다했습니다
의거하는 건 요즘말로 바꾸면 뭐예요
암살 테러입니다 이게
그래서 임시정부의 그 외무총장 조소
선생은 예 이거를 그 의거를 뭐라
그랬냐면 국부 파괴 방침이라
그랬어요 일본 군대하고 정부의 주요
요인들을 속 죽이면음 이놈들이 뭐
질서에도 우리를 독립시켜 주지
않겠느냐 그런데 우리 그동안에 그 그
의거를 백여 차례 시도했는데 이런
의거 가지고 독립이 되냐
말이에요 그러면 우리 무장 독립군이
투쟁을 해 가지고 독립을
쟁취했습니다 우리의 무제 저 독립은
카이로 선언에 의해서 우리가 독립을
받은 거잖아요 카이로 선언이 나오도록
그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건 이승만
박사의 미국에서의 외교 독립운동이다
이게 이미 다 연구가 돼 있어요
그런데 무슨 너무 무슨 뭐 의병 뭐
항일
투쟁이지고 지선에 있는 것처럼 이렇게
주장을 하고 있냐고요 예 세
번째로는 김구하 김원봉이 뭐 하나될
수 뭐 있었느냐 뭐 뭐이 사람들이 뭐
갈등 관계를 뭐 기술을 했다 그래서
11을 걸고 있어요 자 그러면 김하고
김원봉이 하나가 수 있었느냐 내면을
들여다보겠습니다네 김원봉은 임시정부를
끝없이 공격하던 사람이에요 아
그런가요 예 뭐 임시정부는 유명무실한
조직이고 그 책임자들은 활동 없이
말만 앞세우는 자들이다 그래고
비판했는데 어느 날 자기가 자기
휘하에 있던 조선의용대 안에 공산
프락치가 침투를 해 가지고 거의
300명 대원 중에 거의 대부분이 다
모택동 군대에 투 에
가버리고음 김원봉이 가려고 그랬는데
공산당에서 너는 테러리스트인 어디를
와 그래가지고 왕따를 당해 가지고
완전히 저 혼자 나고 되니까
임시정부에가 가지고 아 나도 좀 시켜
줘 그래 가지고 임시 정부하 손을
잡고 그 임 정부 이원이 된 거예요
들어오고 싶어서 들어온게 아니에요 아
그랬던 겁니까 장해석 총통이 당신들
좀 빨리 합쳐 이게 뭐 하는 거야
이래 가지고 이제 합쳤는데
합쳤으면 그 그 명령을 따라야 될 거
아니에요 그래서 김구 주석이 김원봉을
국무위원 겸 군무 부장에 임명했는데
예 김원봉이 광복군 총사령관 이청천
지위를 거부하고 자신의 예하부대 뭐
몇 명 있지도 않아요 뭐 뭐뭐뭐
몇십명 다니도 안 돼 예 자기의
예하부대를 독자적으로 지휘를 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구하고 그 이청천 입장에서 보면 아니
뭐 이런 인간이 다 있어 그래
가지고 그 김원봉을 완전히 왕따
시키고요 그리고 그 광복군이 그 하고
같이 그 손 잡고 국내 진공작전 이런
걸 했잖아요 이런 데서도 김원봉은
전부 그 배제시켜 버린 거예요 아니
이런 내용을 갖다가 어떻게 보면
문재인이 다 유조를 해 가지고 마치
국군의 뿌리가 김원봉이 양 그렇게
떠들었고 때문에 우리 학생들한테
학생들아 헷갈리지 마 김원봉은 이런
인물이야 하고서 가르쳐 준 건데
그거를 욕하고 앉아 있는 거예요 이게
이걸 왜 가르쳐라고 지금 공격을 하는
거지 않습니까 자 이렇게 해서 이제
김원봉을 그 당신은 지금 광복군에
오고 나서도 광복군의 지위를 안
따르니까 당신하고 같이 활동할 수
없다 그러 김원봉이 이때서야 그를 또
공격을 해요 뭐라고 공격을 하느냐 뭐
연로하고 군중으로부터 이탈되어 건국을
영도할 수 있 있는 인물이 아니다 뭐
이런 식으로 그래 뭐가 하나가 될
수가 있어 겠습니까 이런 역사적
사실을 얘기하지도 말라는 건가요 아니
우리가 눈을 갚는다고 예 어 낮이
밤이 될 수 있다거나 밤이 낮이 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
밤은 밤이고 낮은
낮이지만 또 미국이 남 만에가 단독
정부를 수립하려고 그렇게 노력을
했대요 이거 정말 웃기는
소리입니다 왜냐 파선을 그 제안한
거는 미국이 제안했지만 미국은 단지
일본군의 항복을 받는 선을
제안했을뿐입니다 그런데 소련군이
38도 선에가 병력을 동원해 가지고
제일 먼저 철도를 끊었어요 두 번째
도로를 봉사했어요 세 번째 통신망을
절단했습니다 정기도 끊어버리고 그리고
사람의 왕래를 막았어요 예 38선을
분단선 막은 거는 소련이 미국이냐
그요 두 번째로 는 그러니까 48선
자체가 어떤 하나의 국경 럼 철책
들고지 지키는 선이 아니라 일본군은
무장 해제하기 위한 그 기준선이 임시
편의 선이었는데 이거를 저렇게 국경선
비슷하게 통제하고 봉쇄한 것은 소련이
거기다가 해방정국에서 제일 먼저
북한에 단독 정부를 저 만들라고
지시한 거는 스탈린이 1945년 9월
20일 날 비밀 령을 내린 사실이 다
연구를 통해서 밝혀졌어요 이거 다
공개된 거지 않습니까 예 자 그랬는데
스탈린이 빨리 공산 정부를 만들어라
그랬는데 이게 자꾸 시간이 늦어지고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해
12월 25일 날 슈킨이라는 사람이
슈킨 보고서를 내놓는데 슈킨 보고서
내용이 뭐냐면은 야 지금 스탈린
대원수서 북조선에 빨리 공산 단독
정부를 만들 만들으라고 명령을
내주셨는데 너네 왜 이렇게 너무 느린
거야지 음 빨리 만들어 어 소련의
국가 이익을 보장할 수 있는 굳건한
정치경제적 교두보를 세워 다시
말씀드리면 공산 단독 정부를 세워라고
지시한게 45년 12월 25일 슈킨
보고서이 슈킨 보고서에 의해서 46년
2월 8일 날 북조선 임시 민회가
출범하는데 예 이름만 임시위원회이이
사람들은 자기네들의 임시 의원에는
우리의 정부다 선언을 했어요 아니
그렇지 않습니까 46년 2월 8일 날
이미 소련 스탈린의 지시에 의해서
북한의 단독 공산 정부가 수립돼 있는
사실을이 경양 신문과 민족문제 연구소
사람들은 모르고 있었다는 얘기입니까
이게 아니요 숨기려는 거겠죠 아니
유이 그래서 선거를 하려고 북한에
들어가려고 하는 거를 가로 막았 아아
이미 북한에는 정권이 있으니까 또
선거하면 안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가로 막았는데 이런 역사적 사실들을
다 가르치 말놓고 미국이 이 그 그
저 분단을 강요했다고 지금 뒤집어
씌우는 겁니다이을 정해놓고 우리
학생들한테 가르치려고 하는 거죠 예
자 그다음으로 다섯 번째 그 일제가
조선을 수탈 했대요 예 자 수탈은
아까 제가 말씀드린 대로이 사람들이
128억 불을 조선해가 투자를 하고
그거를 전부 뜯어 가지고 갔으면
수탈이 맞을 거예요 그런데 그 당시
조선은 정말 미안한 얘기입니다만 그
우리가 일본 에게 나라를 빼앗겼을 때
우리의 공업 수준은 고무신도 못
만들었어요 그랬나요 그래 가지고 뭔
남악신도시이 전부예요 그근데
1915년에 일본인이 조선에가
고무신을 판매해 가지고 엄청나게 돈을
법니다 어 가볍고 즐기고 그랬을
테니까요 비도 안 세고 자 그러면
조선은 그때서부터 이제 조선 사람들이
앞다 터서 고무신 제주에 뛰어들었어요
고무신 제조에 왜
성공했으니까 고무신 제조 원료가
뭐예요 고무 고무는 우리나라에서 안
나잖아요 예 수입해야 저 동남아에서
나잖아요 일본
사람들이이 고무신의 원료인 고무를 저
동남아에서 수입해다 한국에다 공급을
했기 때문에 우리가 고무신을 만들 수
있었던 거예요 예 그리고
1917년에 저 황해도에가 미스비시
제철소를 만듭니다 예 그리고
1930년대 중반부터 조선 곳곳에가
제철소를 만들어 줘요 음 1911년에
압록강 철교를 만들어 가지고 압록강
철교가 저렇게 홀려 됐습니까 만주고
오허 저 한반도를 연결시켜 줘요 오
그러네요
1933년에는 두만강의 도문 철교를
가설 해서 오 저쪽 그 그 연애주
쪽으로도 저 철도를 연결해 줘요 예
19세기 말까지 조선에는 상선 시상이
존재하지 않았는데 일제 시대에 조선의
상설 시상은 물론이고 화정까지 속속
등 을해요음 자
그리고 일본이 이제이 그 근대화의
가장 결정적인 그 그 바로미터는
전기입니다 그렇죠 전기를 1900 그
20년대 중반부터 부전강 허천강
장진강 발전소를 비롯해서 압록강
지류인 수풍댐 이런 거를 그 막아
가지고 발전을 해 가지고 우리에게
얼마를 합쳐서 공급을 했느냐 150억
kw 그래요 오
150kw 150억 kw n 뭐 하고
비견할 수 있냐면 그 유명한 그
미국이 자랑하는 후보 댐 있죠 아
초대형 댐이지 않습니까 후보 댐 예
후보 댐이 수력 화력 합쳐서
165kw 든요 미국의 후보 댐 하고
거의 만 먹는 정도의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시설을 조선에가 만들어
줬어요 와 이건 너무 많이 준 거
같습니다 자 이러한 그 그 발전소나
댐이나 이런 걸 일본이 아 이거
우리가 투자한 거니까 이거 우리가
가져갈 거야 하고 다 뜯어 갔으면
아니죠 뭐 스탈이라 해도 맞겠죠
그런데 조선 총독부가 일본 정부로부터
막대한 보조금을 지원받아 가지고 이런
일을 만든 거예요 일본 국민의
세금으로 조선에 철도 놔줘 도로 놔줘
항만 건설해 줘 살림 녹화해 줘 예
그다음에 뭐 아까 말씀드린 대로 뭐
발전소 만들어
그 제철소 만들어줘 어 이게 인류
역사상 최악의 그 스탈이에요 아니
식민지라고 하면은 보통 이렇게 막 그
나라에 있는 모든 거를 다 뺏어서
본국으로 가져가는 건데 이거는 좀
아닌 거 같은데요 자이 영국하고
비유해 보겠습니다 영국은 인도를
지배하는 과정에서 인도 지배를 위해서
영국 정부가 돈을 한푼도 안 썼어요
왜냐면 인도에서 나오는 세금을 걷어서
인도에 필요한 모두 을 다
충족시키고도 남아가지고
인도에서 그 돈 거은 거를 전부
영국으로 가져와서 영국이 땡을 잡은
거예요
이게 인도에 진출한
영국인은 어 어마어마한 돈을 영국에
송금해 가지고 인도는이 제국 영국
제국을 유지하는데 있어서 황금마을
낳는 거였다 자 그럼
일본은 죽어라고 한반도에 투자를 해
에다 투자를 해 대만에 투자를 했는데
동남아에서 본동 갔다가 다 조선에
이제 꼬라박는 거네요 그런데
일본이
대만에는 한 10년 간은 돈을 투자를
했습니다 그런데 대만에서 사탕 수수가
많이 났어요 그리고 거기는 모장이
가능해요 그래서 대만에서는 이익이 나
가지고 대만에서는 아주 좀 재미를
봤어요 막 사탕 수수 가져다가 뭐 뭐
그 설탕 산업을 일으키고 해가지고 예
한반도는 세금이 거쳐야 말이지
그러니까 일본 국민이 낸 세금을
가져다가 보조금 형태로 한반도에
128억 불을 때려 박아
가지고 그렇게 해서 한반도에 철도
놓고 다 다리 놔주고 도로 만들고
항만 만들어 주고 제철소 만들어
주고음 발전소 만들어 줘 가지고 겨우
뭐 뭐 뭐 불이나 켜고 먹고 살 수
있게 만들어 졌더니 이게 스탈이에요
이게 아 이런 식의 지금 엉터리
주장들을 지금 경양 신문과 민족문제
연구소가 지금 선동을 하고 있어요
그니까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식민지의 그 이미지를 가지고 일제
시대를 갖다가 굉장히 최하에 통치했던
걸로 이렇게 어 가르치고 있는 건데
사실 일본이 뭐 나중에 조선도 웬만큼
일본만큼 잘 살게 됐으면 뭐 뺏어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역사에 만약에
없지않습니까 그런 거 하기도 전에
일본이 패망했다 거예요 그래서 사실
일본은 조선 을 먹고 나서 굉장히
많은 손해를 봤다 그런 결론을 볼 수
있는 거죠 그렇죠 일본이 그
한반도에서 뭔가 자기네들도 재미를
보려고 했을지는 몰라도 재미를 보기
전에이 일본이 망했으니까 그 망한
다음에 그 모든 뭐 투자한 걸 다
놓고 나갔으니까 거기다가 일본 그
정부 재산뿐만 아니라 민간인들
재산까지 전부 미군정이 뺏어 가지고
한국정부에 인계를 해줬는데 무슨 수
고요 그럼 스타레스 증거 가지고 와
봐 여러분 어 저희 팬앤드 마이크가
이제 다음 쯤은
추석이지만 김용삼 제기자 님과 함께
진짜이 역사 어떤 그 좌파들의 역사
외국을 갖다가 완전히
깨뜨리려고 진짜 일제 시대 때가 누가
가장 많은 혜택을 받냐 바로 그 고종
일가이 왕공이라고 불리는이 이가가
얼마나 많은 혜택 받는지 여러분께
낱낱이 특집 방송으로 어 전해드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제가 오늘 이렇게
논평을 하면서 일부러이 PPT 좀
길게 여러장을 만들어서 그 보여 드린
이유는 뭐냐면이 좌익들의 거짓말을
우리가 어떤 근거를 가지고 반박을
해야 되잖아요 그 근거로 삼으시려고
제가 이거를 증거물로 지금 이렇게
뛰어 놨으니까 이거 뭐 사진을
찍으시던 해가지고이 거짓말하는 사람들
더 이상 거짓말 못 하게 게 아주 그
공업용 미식이 좀 필요할 것 같아요
저희가요 영상 클립은 별도로 좀
편집을 해 가지고 어 김용삼 대기자
논평 딱 제목 달고 그리고 식민지
대화가 뭐 어떻길래 뭐 이런 제목 딱
달아 가지고 어 련을테니까 또 많이
공부하시면서 보시기 바랍니다 아니 그
귀속재산 연구만 읽어봐도 이게
얼마나이 스타인이 뭐니 하는게 이게
실하고 다른
내용인지이이 사람들은 그런 거 있는지
없는지조차 아마 인정을 안 하려고 들
겁니다 아니 딱 다을 정해 놓고
일본은 무조건이 한반도를 수탈해 돼
식민 주로에서 다 뽑아 먹었어야 돼
딱 답을 정해 놓고 거에 관련된 것만
찾았나 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결론이
나오겠죠 그리고 아까 제가 이제
김원봉 말씀드렸는데이 김원봉 정말이
흉악한 놈이에요
결국은 그래서 뭐 오자마자 월북
했잖아요 월북해 뭐 했어요 북한
가지고 인민군 만들어졌습니까
그러니까 그래서 우리 남침 당했어요
아이 이 한심하 들 그런 사람을 갖다
국군에 뿌리라고 하는 그런 사람이
있으니 참 답답하기만 합니다 그런게
말입니다 예 아 저희 오늘은 김삼
기자님과 함께 뉴스에 클로징을 좀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아 여러분
트랜드 마이크 이렇게 확실한 역사적
근거 다 찾고 취재해서 여러분께 진짜
팩트 체크가 된 내용만 전달해
드리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나가시기
전에 좋아요 구독 꾹 눌러주시고요 어
김영삼 기자님과 함께하는 역사 특강도
많이 좀 봐주시고 주변에 좀 리 좀
알려 주시고 요즘 저희 팬앤드 마이크
되게 잘 나가고 있거든요 그래서 많은
또 새로운 분들도 인터뷰하고 있는데
내일 아침 방송에는 아 이진숙
방송통신 위원장이 오십니다 지금 현재
어떻게 보면
대한민국에서 가장 외곡을 앞장 서고
있는게 MBC 아니겠습니까 그 MBC
정상화시키고 방송을 정상화시키는 그
작업에 진짜 살신성인 몸 바치고 있는
이진석 방송통신 영장도 팬앤드
마이크에 출연하기로 했고 저희 팬앤드
마이크가 이렇게 계속해서 노력하고
여러분에게 좀 더 좋은 방송 만들려고
어 진짜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
여러분 많이 응원해 주시고 그리고
좋아요 구독 꼭 눌러 주시기를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자 내일이 시간에 또
찾아뵙겠습니다 대기자님 오늘 말씀 잘
드렸습니다 고맙습니다 인터넷 검색창에
팬앤 마켓을 검색해 주세요 팬앤
마켓은 팬앤드 마이크 구독자분들을
위한 종합 쇼핑몰로 좋은 상품으로
온라인 최저가를 목표로 하는
마켓입니다 많은 관심과 사랑
부탁드립니다
[음악]
[음악]

한국의 교회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한국의 교회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한국의 교회사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1911년 기독교 각파 조선포교 구역도이다.

한국의 교회사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 속에서 형성된 기독교 역사, 즉 교회사를 말한다. 한국교회사라고도 한다.[1] 기독교의 교파중에 가장 먼저 한반도에 전래된 것은 로마 카톨릭(천주교)인데, 특이한 점은 최초의 선교가 선교사에 의한 것이 아니라 문서선교에 의해서 이루어진 점이다. 또한 교회와 조직이 먼저 생겨난 후 선교사 파송을 요청한 세계 기독교 역사상 유례없는 매우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중국을 거쳐 프랑스의 영향을 받은 조선 천주교는 전래 이래 극심한 탄압을 받으며 100여년 동안 많은 순교자가 발생했다. 이런 순교는 훗날 1880년대 중반에 미국 개신교가 한반도에 전래되고 뿌리내리는데 자양분이 되었다. 기독교에 대한 신앙의 자유는 조선이 외국과 개항을 하면서 이루어 졌다.[2] 그러나 다수의 천주교 신자들이 포진해 있던 실학자들이 순교당하며 조선의 근대화는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말았다. 일제강점기중 친일행보로 인해[3][4][5] 광복후 천주교는 침제되었으나 1970년대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며 이미지 쇄신이 이루어진 후 교세가 성장하였다.

1880년 중반에 시작된 개신교 선교는 주로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교육과 의료활동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제국열강들의 다툼과 조선조정의 무능함속에 혼란스러움이 겹치며 신앙이 아닌 정치활동으로 변질되는 양상을 띄었다.[6] 이런 현상은 평양대부흥운동(1907) 이후 바로잡히며 교세가 성장하면서 독립운동으로도 연계되었다. 그러나 일제가 세력을 억누르려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이에 일부 교회가 굴종하였고 이에 내분이 벌어지기도 했다.[7][8]

광복이후 한국전쟁, 전후복구와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도시 근로자와 서민들의 고난을 함께 하며 크게 부흥한 개신교였지만, 일면 그 부작용으로 교파가 분열되고 이단, 사이비 종교를 양산하는 등 많은 문제점을 표출하여 사회의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전래초기 교육과 의료봉사로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활동했으나 근래에 들어서는 해외에 선교사를 파송하여 교육과 의료봉사를 병행하는 정도로 안정된 모습을 한국개신교 교회가 보이고 있다.

1960년대 말까지 백만 명 정도의 개신교인들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1980년대에 이르러 세계에서 가장 빠른 증가세를 보였다.[9] 한국 리서치의 조사에 따르면 2022년 기준 한국 개신교 신자수는 국내 인구의 20%, 총 1,031만 8,532명이며 여기에 천주교인 10%를 합세하면 기독교 신자수는 전체 인구의 30%로 한국 내 종교인 인구 1위를 차지하고 있다.[10]

가톨릭교회

[편집]

로마 가톨릭교회는 조선시대에 천주교라는 이름으로 전파되었으며 모든 기독교 교파 중 가장 먼저 유입되었다. 천주교의 한반도 전래에 대한 최초의 시점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어 이견이 있으나[11] 천주교의 전래는 선교사에 의한 것이 아니라 문서선교로 먼저 이루어졌다.[12] 또한 선교사의 미방문 국가에서 자생적으로 교회와 조직이 먼저 생겨난 후 선교사 파송을 요청하였는데, 이는 로마 카톨릭 사상 유례없는 일이었다.[13]

전래초기에는 종교가 아니라 '서학(西學, 천주학)'이라 불리며 하나의 학문이나 사상 등 서양문물로 받아들여졌다.[14] 점차 천주학이 종교로 받아들여지며 성리학적 지배원리의 한계성을 깨닫은 일부 진보적 사상가와, 부패하고 무기력한 지배체제에 반발한 민중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면서, 18세기 말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다.[15] 그러나 이런 흐름에도 불구하고 문화적 이질감이 컸으며 제사불허라는 교리는 불효불충(不孝不忠)의 사교(邪敎)라는 이미지를 심어주었고, 정치권력자들이 정적제거의 희생양이 필요할 때마다 탄압의 빌미를 제공했다.

결국, 신해박해(1791)부터 병인박해(1866)까지 이어진 탄압으로 약 100 여년간 엄청난 순교자가 발생했다. 천주교 박해를 통해 실학을 중시했던 남인의 대량 숙청은 조선의 근대화를 퇴보시켰고, 붕당정치가 무너진 자리에 세도정치가 자리잡았다. 이후 쇄국으로 이어지며 근대화를 이루지 못하게 되면서, 결국 20세기초에 일제강점기라는 한국 현대사의 치욕을 맛보게 만든 원인중에 하나를 제공했다는 분석도 있다. 천주교와 개신교의 신앙의 자유와 종교로서 공인은 조미수호통상조약(1882)과 한불수호통상조약(1886) 둥 서양과 개항이후 조선조정의 묵인 또는 간접적 허용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이는 천주교가 본격적으로 선교활동이 시작된지 약 100년만에 일이었다.[2]

이 시기에 개국과 함께 미국 선교사를 통해 들어온 개신교는 별 다른 박해 없이 교육과 의료봉사를 병행하며 선교 활동을 했으며, 1907년 평양 대부흥을 기점으로 천주교의 교세를 뛰어넘기도 했다. 이에 반해 가톨릭은 일제강점기중 친일행보를 보인 탓에[3][4][5] 해방 정국을 거치며 교세의 악화를 면치 못하다가, 1970년대의 민주화 운동 참여로 사회적 명성을 얻은 후 교세가 성장했다.

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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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에 흐리산프 쉐트코프스키 신부로부터 정교회 선교가 시작되었다.

개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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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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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개신교 성경이 조선에 전달된 시기는 1816년 9월 5일이다. 이날 서해안 군산만 마량진에 영국 군함 2척(올체스트 호와 라이라 호)이 나타났는데, 마량진 첨사(僉使) 조대복이 영국 군함에 승선하여 소통을 시도하며 그들로부터 여러 선물을 받은 적이 있다. 이때 조대복이 받은 선물 중에 성경책이 들어 있었고 이것이 조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개신교 성경을 전래받는 사건이 되었다.[16] 선물을 가지고 돌아온 조대복은 영국인들이 원하는 식량과 식수를 공급해준 후 이런 사실을 조정에 알렸다.[17]

최초의 선교사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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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귀츨라프 (1803~1851)

한반도에 처음으로 개신교 선교사가 방문한 시기는 1832년 7월 22일이다. 영국 상선 로드 애머스트 호를 타고 독일출신의 카를 귀츨라프(Karl Gutzlaff) 목사가 충남 보령시 오천면 고대도에 상륙하였다. 그는 홍주 목사(洪州牧使) 이민회(李敏會)와 수군 우후(水軍虞候) 김형수(金瑩綬)와 한문으로 필담을 나누었다. 또한, 주민들에게 한문성경과 전도문서와 서적 및 약품을 나눠주었고, 감자와 포도주 재배법을 가르쳐 주었다.[18][19] 감자와 포도 재배법을 한문으로 적어 나누어주었고,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하여 가르쳐 주었고, 한글 자모를 받아 적은 다음 귀국후 한글이라는 문자의 존재를 유럽에 알리기도 했다.[20]

조선 조정에 선교와 통상에 대한 허락을 요청했으나 거절 당하자 한달도 못되는 짧은 체류기간을 뒤로하고 일본으로 떠났다.[19] 그의 방문은 선교의 가능성을 탐문하기 위하여 개인자격으로 온 것으로 타고온 상선의 통역이자 선목이었다. 고대도에는 2005년에 귀츨라프 기념교회가 건립되어 있으며, 교회건물 2층에 있는 귀츨라프 기념실에는 각종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2014년 3월에는 귀츨라프 학회도 창설되어 그를 기리고 있다.[21]


첫 선교사 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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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개신교 선교사로서 처음으로 순교자가 발생한 시기는 1866년 9월이다. 런던 선교회 소속의 로버트 저메인 토머스 선교사가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내한했다가 짧은 선교일정을 마친후 제너럴셔먼호 사건에 엮기며 순교하고 말았다.[22] 그는 조선 선교에 대단한 열정을 품고 있었던 선교사였다. 첫 선교지였던 중국에 도착한 후 동행했던 부인이 사망하자 크게 낙심하여 한때 사직하고 세관에서 근무하기도 했으나 다시 선교사의 사명을 다하고자 했다

1866년에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내한한 것은 그의 두번째 방한이었다. 한 해전인 1865년 가을에 밀입국하여 성경배포, 선교 그리고 천주교인들과 접촉하며 한국어를 배우기도 했다. 타고 온 선박이 폭풍우에 휩쓸려 표류하면서 방한 두 달반만에 중국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지만 그의 조선 선교에 대한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특히 1866년 초에 조선에서 병인박해라는 천주교인 박해 소식을 접했음에도 불구하고 선교를 하기 위해 조선에 다시 갈 기회를 잡으려 노력했다.[23] 수소문 끝에 제너럴셔먼호가 통상시도를 위해 조선으로 항해한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통역사로 승선을 했다.

제너럴셔먼호의 통상요구는 조선정부에서 거부당했다. 그러나 제너럴셔먼호는 이를 무시하고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무력시위를 하며 통상을 요구하다가 조선군의 화공전에 휘말려 격침되고 말았다. 이때 토마스 선교사는 물로 뛰어든 후 강가로 나왔으나 성난 평양 관민들의 휘두른 칼에 찔려 순교하고 말았다.[24] 일설에 의하면 순교 직전에 조선인들에게 한문성경책을 나누어주었고[25] 이 성경을 읽은 이들 중에 개종한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26]

선교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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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새뮤얼 매클레이

1884년에는 미국 감리교 선교사 매클레이가 고종으로부터 조선에서의 선교회사업(교육과 의료)에 대한 허락을 받아내었다.[27][28] 공식적으로 선교를 허용한 것은 아니기에 선교의 자유가 보장된 것은 아니지만 선교회 사업의 일환으로 병원과 학교의 설립과 운영을 허가함으로 간접적, 부분적으로 선교를 허락한 것이였다.[29] 이로써 최소한 개신교 선교사들이 합법적으로 입국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선교회 사업의 합법화란 미국 감리교단의 노력과 후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조미(朝美)간 수교후 조선의 사절단이 1883년에 미국에 파견되였는데, 이때 미국 감리교회 해외선교부가 사절단과 교류하며 조선 선교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하게 되었다. 또한 일본 체류중에 개종한 조선 관리 이수정이 1883년 후반기에 공개서한을 보내 조선에 선교사 파송을 미국에 요청하는 일이 있었다.[30] 이 공개서한이 선교잡지에 실리자 각지에서 많은 선교 헌금이 접수되었다.[31]

이에 미국 감리교 선교부는 일본에서 활동하는 매클레이 선교사에게 한국의 실정을 살펴볼 것을 요청했고, 매클레이는 1884년 6월 개신교 성직자로서는 처음으로 합법적인 절차를 밟아 내한하였다.[32] 이후 같은해 7월 3일에 과거에 친분이 있었던 도승지 김옥균을 통하여 선교회 사업에 관하여 허락을 얻어내는데 성공했던 것이다.[33] 실질적인 선교나 종교의 자유는 교민조약(1899), 교민화의약정(1901), 선교약조(1904)가 체결된 후에야 가능해졌다.[34]

선교사들의 입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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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4월 개신교 선교사로는 최초로 장로교 소속의 존 헤론(John W. Heron)이 조선 선교사로 임명을 받았다.[35] 그러나 아직 조선 정국이 안정되지 못하다는 판단에 따라 일정이 지연되다가 다른 선교사들 보다 늦은 1885년 6월 조선에 입국하였다.[35] 개신교 선교사로서 최초로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조선에 입국한 선교사는 장로교 소속 알렌(Allen)으로 그는 1884년 9월에 입국하였다.[36][37][38] 갑신정변때 민영익을 치료하며 고종의 신임을 얻은 알렌은 제중원 설립을 주도한 후 초대원장이 되어 의료 선교를 펼치며 서양의술도 가르쳤다.

기독청년회(YMCA)를 조직하는 등 선교에 헌신적이었던 장로교 소속 언더우드 선교사는 1885년 4월 2일에 입국하였다.[39] 일본을 경유하였는데 일본에 잠시 체류하며 이수정이 번역한 한글 성경을 입수했고 한국어도 배웠다. 비슷한 시기에 입국한 감리교 소속 아펜젤러는 배재학당을 건립하는 등 교육분야에서 활발히 선교활동을 했다.[40] 같은해 스크랜튼 모자가 선교사 자격으로 입국하는 등 이후 많은 선교사들이 들어왔다.[41] 이들은 학교, 병원, 교회를 건립하여 선교, 의료, 교육사업을 펼치며 근대화에 이바지했다.[42]

한국인 목사 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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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최초의 개신교 목사는 감리교 소속 김창식과 김기범이다.[43] 이들은 1900년 감리교의 지방회에서 개설한 신학회에서 신학교육 과정을 이수한 뒤 스크랜턴이 설립한 상동교회에서 1901년 5월 14일 H.무어 감독으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았다.[44][45] 김창식은 전국에 48개의 교회를 세우는 등 활발한 사역활동으로 ‘한국의 사도바울’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으며,[46] 김기범은 1893년부터는 인천지역에서 전도사로 일했고, 안수를 받은 후에는 순회목사로 활동하다가 아펜젤러가 설립한 인천 내리교회의 담임목사로 시무했다. 침례교에서는 신명균이 1905년 첫 목사 안수를 받았다.

장로교에서는 1907년 9월 17일 길선주방기창서경조송인서양전백이기풍한석진이 처음으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들 7명 모두는 모펫 선교사 설립한[47] 5년제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의 제1회 졸업생이었다.[48] 이들 중 길선주 목사의 활동이 두드러지는데, 그는 평양대부흥운동을 주도한 사역자중에 한 사람이었으며, 새벽기도라는 한국 개신교만의 독특한 문화가 정착하는데 크게 이바지했다.[49][50][51] 뿐만아니라 40년 목회활동을 통해 2만여 회에 걸쳐 설교했고, 연 380만여 명에게 복음을 전해 7만여 명의 개종자를 얻었으며, 60여 곳에 교회를 설립하고, 3천여 명에게 세례를 베푼 것으로 알려져 있다.[52]

한국에서 최초로 여자목사 제도를 인정한 교단은 감리교회로, 1931년 헌법 「교리와 장정」에 이를 명기한 후, 같은해 다수의 미국 여선교사들이 양주삼 목사로부터 안수를 받았다. 첫 한국인 여성목사는 감리교 소속 전밀라명화용이 1955년 4월 8일 정동제일교회에서 안수를 받으면서 탄생했다.[53][54] 한국기독교장로회에서는 1977년 처음으로 여성목사를 배출했으며,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에서는 1995년부터 여자목사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55]

세례교인 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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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로 국내에서 개신교 세례를 받은 기독교인은 노춘경(盧春京)으로 알려져 있다.[56][57] 1886년 7월 18일 존 헤론 선교사의 집에서 언더우드 선교사의 집례로 세례를 받았다.[58] 최초로 세례를 받은 사람은 이승훈(1784)이지만 천주교인 이였고 세례를 받은 장소는 국내가 아니고 중국 베이징이었다. 또한, 1876년 백홍준, 이응찬, 이성하, 김진기 등이 스코틀랜드 선교사로 부터 세례를 받은 적이 있으나[59] 이 또한 국외 지역인 만주땅이었다. 1883년에 이수정도 세례를 받고 개신교인이 되었으나 일본에서 받은 것이었다.[60]

선교와 신앙의 자유가 없었던 시절이라 세례받은 사실이 관아에 발고되면 목숨을 부지하지 어렵고 세례를 준 선교사 조차 어떤 처벌을 받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만일을 대비해 호머 헐버트 선교사가 방문쪽을 가로막아 지키는 상황하에 노춘경이나 언더우드나 목숨을 걸고 세례식을 진행하였다. 이후 조선인 세례교인은 국내외에서 조심스럽게 증가하였다.

장로 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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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홍준은 한국 최초의 개신교 장로이자, 최초의 평신도 출신 순교자다.[61] 1887년 언더우드가 서울 정동의 자기 집에서 14명의 신자와 함께 진행한 새문안교회 창립 예배때 서상륜과 함께 장로로 추대되었다.[62] 이후 백홍준은 언더우드와 함께 1889년에 만주로 건너갔으며 그때에 교인 33명에게 세례를 받도록 주선했다. 이후 모펫(S A Moffett)과 J.게일 선교사 등의 안내자가 되어 국내에서 순회전도집회를 주선하였다. 1892년에 불온서적(성경)을 간행하고 불법집회 주선 혐의로 체포되어 고문을 받다가 다음해에 옥사함으로 한국 개신교 최초의 평신도 출신 순교자가 되었다.[63] 한편 서상륜은 개신교 선교사가 내한하기도 전인 1883년에 황해도에 소래교회를 설립했으며, 성경번역과 전도 등 왕성한 선교활동을 벌여 한국의 베드로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성경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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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천주교는 성경번역에 소극적이었다.[64][65] 그러나 개신교는 선교사들이 입국하기도 전에 한글 쪽복음서를 출판하여 전도에 이용하고 있었다.[66][67] 이런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스코틀랜드 출신 중국 선교사 존 로스와 매킨타이어가 만주에서 백홍준서상륜 등에게 한글을 배우면서 동시에 이들과 함께 번역작업을 하였고, 1882년에 누가복음으로 시작하여 지속적으로 쪽복음서를 발간했기 때문이다.[68] 1887년에는 신약 전권이 완역, 출간되었다.

또한 일본에 체류중이던 이수정도 마가복음을 번역하여 1885년 2월에 출간하기도 했다.[69][70] 존 로스나 이수정의 번역본은 외래 선교사들의 초기 선교나 한국어 공부에 큰 도움되었다. 좀 더 체계적인 번역작업은 1887년 언더우드 등 선교사들이 성서변역위원회를 구성하여 진행되었고 1910년에 신구약을 완역하여 다음해에 출판하였다.[71] 훗날 1937년에 전면개정판이 나오고 점차 좀 더 양질의 번역서가 발간되었다.

감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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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북감리회 매클레이 선교사가 내한하여 1884년 7월에 의료선교와 교육사업에 대해 고종의 윤허 받은 것을 기원으로,[72] 이듬해 중순에 스크랜튼아펜젤러 등의 선교사가 내한하였다. 이들은 시병원(施病院), 배재학당이화학당을 세워 의료선교와 교육사업을 했고, 아펜젤러가 정동제일교회(1885)를, 스크랜든은 상동교회(1888)를 설립하여 선교사업도 시작하였다. 1887년 7월 배재학당 학생 박중상이 첫 감리교 세례교인이 되었고, 이후 선교와 신학교육에 진력한바 1901년에 개신교 사상 최초로 한국인 목사를 배출하기에 이르렀다.[73]

미국 남감리회는 윤치호의 청원을 받아들여 1896년에 선교사 리드(Reid)를 파송하였고 이듬해인 1897년 6월 광희문교회를 설립하며 본격적으로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74] 남감리회 선교사 하디(Hardie)로 부터 시작된 1903년의 원산부흥운동은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을 거쳐 1909년 백만명구령운동으로 연결되며 초교파적인 부흥의 결과를 이끌어내기도 했다.[73] 아울러 북감리회와 남감리회는 처음부터 선교사업을 상호협력하여 추진하였다. 그 결과 두 선교부는 1930년 12월 기독교조선감리회를 창립하여 통합되었다.

그러나 일제가 종교탄압 정책을 펼치며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일부 교회 지도자들이 회유와 위협에 굴복하여 신사참배를 수용하는 과오를 범하기도 하였다. 또한 점차 강력해지는 일제의 억압 하에 한국 감리교회는 1945년에 ‘일본기독교조선교단’에 흡수되고 말았다.[75] 광복후에 기독교대한감리회 단일 총회로 재건되었다가 1960년대와 1970년대 내부 갈등으로 두 차례 교단이 분열되기도 했다. 그러나 곧 수습되었고, 현재까지 단일 교단으로 활발한 선교사역을 이어 가고 있다.

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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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4년 스코틀랜드 장로교 출신 선교사 존 로스가 중국 만주에서 조선인들을 상대로 선교했던 것이 장로교가 한반도에 유입된 기원으로 알려져 있다.[76] 1876년에 첫 세례 교인들이 탄생하였고 존 로스는 이들과 함께 한글성경 번역작업을 진행했다. 이때 존 로스를 도왔던 서상륜서경조 등은 1883년 5월 16일 황해도 대구면 송천리에 조선 최초의 교회인 소래교회를 설립하였다.[77] 즉 외래 선교사가 조선에서 선교를 시작하기 전에 이미 조선인들 스스로 교회를 세운 것이다.

1885년 미국 북장로회 소속의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목사가 선교를 시작한 이래로 남장로회, 캐나다 장로교회, 호주 장로교회 등 여러 교단의 서양인 선교사가 조선에 들어왔다. 1907년 한국 최초의 노회인 조선예수교장로회 노회가 창설되었으며, 1912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를 결성하면서부터 독립된 교회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일제강점기에 신사 참배 문제로 조선총독부와 마찰을 보이다가, 제27차 총회(1938년)에서 공식적으로 신사참배를 가결하면서 변질되기 시작하였다.

1943년에는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으로 일본 장로교 산하로 통합되며 해산한 이후, 1945년에는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이라는 통합 기독교 교단에 흡수되었다. 1945년 일제 패망 후 장로교회 재건에 대한 논의가 지속된 이래, 남북 분단의 상황에서 남측의 장로교 교인들만으로 1947년 총회를 다시 시작하였고, 1949년에 대한예수교장로회로 명칭을 변경했다.

1952년 고려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신사참배 저항 목회자들이 총회에서 제명당한 것을 계기로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이 출범하였고,[78] 1953년에는 성서비평학을 받아들이는 진보적 장로교 계열이 한국기독교장로회와 조선신학교(한신대학교)를 조직하여 분열해 나갔다. 1959년 세계 교회 협의회 가입을 둘러싼 의견 대립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과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으로 갈라졌다. 이후 1961년 김치선 목사를 중심으로 하는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이 분립했다.

1974년 제24회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총회에서 신자간에 일반 법원에서의 고소가 가능하다고 가결한데서 빚어진 교리의 신학적인 변질과 교회행정 문제에 항의한 것이 문제가 되어 고신측 총회에서 분리되어 나온 반고소 고려파가 대한예수교장로회(고려)총회를 세워 나간 뒤로 대한민국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교단은 170여 개[79]에 이른다. 2000년대 이후, <스코틀랜드 장로교 전통>의 역사적 계승을 선언한 한국예수교장로회가 새로이 2012년 1월에 출범했다.

루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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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2년 조선에서 약 25일간 머물렀던 독일 루터교의 카를 귀츨라프가 기록이 남아있는 최초의 서양인 개신교 선교사로 알려져있다. 그러나 이는 개인적인 방문이었으며 루터교 교단 차원의 선교는 1958년 루터교회 미주리시노드에서 선교사를 파송하여 처음 시작되었다.

성공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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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 잉글랜드 성공회의 찰스 존 코프(한국이름 고요한) 주교가 3대주교가 될 마크 트롤로프(조마가)사제와 미국 펜실베이니아 출신 의사로서 현재 대한성공회 내동교회 터에 성 루가교회(낙선시 병원, 선을 베푸는 병원)을 지어 의료선교를 한 랜디스(한국이름 남득시)와 함께 부산항으로 입국하였다. 대한성공회 선교 130주년을 기억하는 《성공회신문》2020년 9월 28일자 1면에 의하면, 1889년 11월에 주교서품을 캔터베리 대주교로부터 받은 고요한 주교는 "임금이 없으므로 내핍생활을 해야 하며, 다른 성직자들과 공동체 생활을 해야 한다"라고 선교사 모집공고를 내었지만, 지원자가 없자 직접 지원자를 찾았다. 이에 호응한 이들이 조마가 주교와 남득시 선생이었다. 그날 존 코프 주교는 영국 세관원의 아들에게 세례를 주었다.[80]첫 성공회 성당은 현재 인천 중구 내동 3번지 언덕에 있는 성공회 내동성당이며[81],서울 정동 1번지에 현재는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로 활동하는 교회를 세우며[82] 성공회는 한국에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잉글랜드 성공회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이 7년째인 1897년에 김희준(마가,?-1946년)과 김군명(요한)이 성공회에서 처음으로 세례를 받았다.[83]

존 코프 주교의 기록에 따르면, 존 코프 주교는 1890년 조선에 입국하기전부터, 조선사람들이 빈곤과 질병으로 고통함을 알고는, 숙련된 의사와 간호사들이 환자들을 돌보도록 하는 의료선교를 생각하였다. 조선선교를 위한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영국 순방 당시 많은 교우들이 자금을 기부했다고 한다. 미국인 랜디스(한국이름 남득시)가 존 코프 주교의 뜻을 존중하여, 성공회 내동교회에서 의료선교를 했다. 가마온돌을 사용하는 등 한국사람들의 전통을 존중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 영향으로 대한성공회는 1993년 관구 설정이 이뤄질때까지 잉글랜드 성공회 산하 교구로 활동하였고, 1965년 이전에는 잉글랜드 성공회 조선교구로 활동하였다.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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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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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국기독교회사(韓國基督敎會史)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22년 4월 26일에 확인함.
  2. ↑ 이동:  [카톨릭 평화신문] 한국 천주교회사 특별 기획전, (6) 신앙의 자유도 잠시, 또다시 닥쳐온 시련 2017.8.27
  3. ↑ 이동:  [한겨레 신문] ‘천주교의 친일’ 언제 회개하려는가.....신사참배는 정교분리 원칙에 따라 종교예식이 아니므로 ‘해도 무방하다’는 궤변, 일본 메이지 천황의 죽음(1912)이 국상이며 주일마다 성경을 암송하고 경문을 외우라는 지시, 1937년 중-일 전쟁 발발 뒤 황군의 승전을 위한 기도회를 올리고 위문금을 모아 보냈다는 선전, 국가(일본)를 위해 적군의 손에 죽는 것은 충신이요 ‘순교’라는 설교, 반도청년이 황군에 입대하면 완전한 황국신민의 자격을 갖춘다며 징병을 거들고 …. 이와 같은 일들의 종결점이 1940년 결성된 ‘국민총력 천주교경성교구연맹’이었으니, 초대 이사장이 앞서 든 노기남 신부였으며, 그는 2년 뒤 주교로 승품됐다.
  4. ↑ 이동: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5년 p481....(내용요약)...로마교황청은 1936년 5월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니므로 참배는 가하다고 발표함.
  5. ↑ 이동:  [연합뉴스] 안중근의사 내용담은 '뮈텔 일기'와 '조선교구통신문'......천주교 선교사들은 일제의 한반도 식민통치를 지지하거나 침묵했으며, 조선 천주교에서는 독립운동을 하는 학생들을 퇴학시키거나 밀고했고, 안중근이 거사를 성공시키자 출료시켰으며, 사형집행전 종부성사를 위한 신부요청을 거부했고, 종부성사를 집행한 선교사를 징계했다.
  6.  [네이버 지식백과] 천구백칠년 대부흥운동 [千九百七年大復興運動]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1907년 대부흥운동은 20세기 초 불안한 국제정세 가운데 일어났다.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중화질서는 무너졌고, 러시아는 남하하고 있었으며, 일본은 조선 침략의 야욕을 불태우고 있었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무능하고, 부패해서 백성들을 보호할 수 없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많은 한국인들은 불안함을 달래기 위해서 기독교를 찾기 시작하였다. 한편 한국에서 사역하던 선교사들은 비록 많은 신자들이 교회에 모이지만 그것은 신앙이 아닌 정치적인 동기에서 교회로 오고 있다고 보았고, 이에 이들을 진정한 신자로 만드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했다.
  7.  [네이버 지식백과] 신사참배 [神社參拜]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총독부가 1935년 11월 평양 기독교계 사립학교장 신사참배 거부사건을 계기로 강경책으로 나오자 기독교계는 분열되었으며, 1937년부터 기독교계 학교의 일부는 폐교되고 일부는 ‘순응’하게 되었다..(중략)...일제 경찰은 1938년 2월 기독교에 대한 지도대책을 세워 일반신도들의 신사참배를 지도 강화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일선 경찰력을 동원하여 교회로부터 시작하여 노회 ·총회 등 교단적 차원에서 신사참배를 결의 실행하도록 압력을 가하였다. 결국 기독교계도 이러한 강압을 이기지 못하고 1938년 9월 장로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를 고비로 굴복하여 급격히 변질되고 말았다.
  8.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5년 p482~487
  9.  figures from the 2005 census Archived 2011년 7월 23일 - 웨이백 머신 Figures from the 1995 census Archived 2011년 7월 23일 - 웨이백 머신
  10.  [기독일보] 한국 종교 인구 분포.....한국리서치 조사 결과 1년 전 신앙을 갖고 있던 개신교인 10명 중 1명은 현재 신앙을 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불교와 비슷하고 천주교보다는 약간 높은 수치다. 전체 인구 중 개신교인은 20%로 지난해와 동일했으며, 불교(17%), 천주교(11%)가 뒤를 이었다.
  11.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15:문화군주 정조의 나라 만들기》, 한길사, p.203
  12.  이덕일 <이덕일의 여인열전> 김영사 2003년 p343~345
  13.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5년 p36
  14.  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1> 인물과 사상사 2011.3.31 p27
  15.  [네이버 지식백과] 신유박해 [辛酉迫害] (두산백과)
  16.  김인수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 (상)>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1998년 p96
  17.  [조선왕조실록] 순조실록 19권, 순조 16년 7월 19일 병인 2번째기사
  18.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의 감자 역사 - 역사 속의 감자 (감자, 2004. 9. 17., 전수미)
  19. ↑ 이동:  김인수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 (상)>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1998년 p100
  20.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는 독일인 ‘칼 귀츨라프’입니다””. 2014년 8월 22일. 2020년 10월 13일에 확인함.
  21.  [디지털보령문화대전] 고대도 교회
  22.  김인수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 (상)>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1998년 p104
  23.  [네이버 지식백과] 제너럴셔먼호사건 [─號事件]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토머스(Thomas,R.J., 崔蘭軒)를 통역관으로 채용한 뒤 8월 9일 즈푸(芝芣)를 출항, 조선으로 출발하게 하였다...(중략)...조선이야말로 선교의 최적지임을 확신하고 다시 조선으로 들어갈 날을 학수고대하던 끝에..(이하생략)
  24.  [조선 왕조 실록] 고종실록 3권, 고종 3년 7월 27일 계미 1번째기사
  25.  김만형 (1934년 9월 7일). “宣敎五十週年맛는 長老會懷舊錄”. 조선일보.
  26.  김인수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 (상)>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1998년 p107
  27.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5년 p128
  28.  [네이버 지식백과] 로버트 매클레이 [Robert Samuel Maclay]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1873년 감리교 선교회의 일본 미션 총리에 임명되어 요코하마[橫濱]에서 선교활동을 하였다. 이 무렵 차관(借款)교섭차 일본에 가 있던 김옥균(金玉均)과도 친교를 맺었다. 1884년 미국 감리교 선교부의 지시에 따라 한국의 실정을 살피기 위하여 신교도로서는 처음으로 합법적인 절차를 밟아 내한하여 고종을 알현하고 선교회 사업에 관하여 허락을 얻었다.
  29.  공개적 혹은 공식적인 전도나 집회, 선교 등은 허락한 것이 아니었다. 세례를 주거나 전도를 공개적으로 할 경우에 처벌 받았다.
  30.  김인수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 (상)>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1998년 p117
  31.  김인수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 (상)>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1998년 p124
  32.  귀츨라프(1832)와 토마스(1865)의 방한은 조선의 쇄국정책으로 인해 불법입국, 즉 밀입국이었다.
  33.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5년 p145
  34.  [네이버 지식백과] 선교약조 [宣敎約條]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한불수호조약 이후 선교사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선교활동을 하고 그 결과 교인수가 늘어나자, 자연히 선교사와 지방관료 및 교인과 일반인 사이에 분쟁이 야기되어 한불 양국 간의 외교문제로까지 확대되는 이른바 교안(敎案)이 자주 일어났다. 이를 근본적으로 방지하기 위하여 1889년에 교민약조(敎民約條)를, 1901년에 교민화의약정(敎民和議約定)을 체결한 데 이어, 1904년 6월 9일자로 다시 선교약조를 체결하였다.
  35. ↑ 이동:  김인수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 (상)>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1998년 p128
  36.  이견이 있을 수 있으나, 귀츨라프(1832)와 토마스(1865)의 방한은 조선의 쇄국정책으로 인해 불법입국, 즉 밀입국이었다. 매클레이(1884년 7월)은 정식으로 조선에 파송된 선교사 자격이 아니었고 수일간만 체류하며 제대로된 선교활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알렌은 입국초기에 신변안전을 위해서 선교사라는 신분을 숨기고 의사로 활동 했을뿐이다.
  37.  김인수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 (상)>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1998년 p129
  38.  Kang, Wi Jo (2016년 9월 13일). “The Legacy of Horace Newton Allen”. 《International Bulletin of Missionary Research》 (영어) 20 (3): 125–128. doi:10.1177/239693939602000308S2CID 171878262.
  39.  김인수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 (상)>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1998년 p136
  40.  김인수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 (상)>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1998년 p152
  41.  김인수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 (상)>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1998년 p138
  42.  김인수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 (상)>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1998년 p140
  43.  [네이버 지식백과] 우리나라 최초의 목사 (교회용어사전 : 행정 및 교육, 2013. 9. 16., 가스펠서브)....① 감리교 : 김창식, 김기범(1901년. 미감리회에서 안수). ② 침례교 : 신명균(1906년). ③ 장로교 : 서경조, 한석진, 송인서, 양전백, 방기창, 길선주, 이기풍(1907년 제1회 독노회에서 안수).
  44.  [국민일보] 한국인 첫 목사 안수받은 김창식·김기범 사역 재조명한다....1901년 5월 14일 서울 상동교회. DH 무어 감독의 집례로 목사안수식이 시작됐다. WB 스크랜턴과 GH 존스, WA 노블 선교사는 안수를 보좌했다...(중략)...감리교 선교사들이 세운 신학교육기관 ‘신학회’에서 훈련받은 김창식과 김기범은 5년 동안 선교사와 함께 복음을 전했고 수업에도 빠지지 않았다.
  45.  [네이버 지식백과] 김기범 [金箕範]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46.  [네이버 지식백과] 김창식 [金昌植]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47.  평양장로회 신학교 설립, 국민일보, 2011년 9월 25일
  48.  김인수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 >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1998년 p348
  49.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5년 p267
  50.  [기독일보] 한국교회 새벽기도회 유래는 어떻게 시작됐나?.....길선주의 새벽 기도회가 1906년 가을에 시작했다...(중략)...새벽 기도회는 부흥운동이 끝난 후 열기가 사라지고 사람들이 냉랭해졌을 때 다시 부흥의 불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1909년에 시작한 새로운 부흥회 방법이었다...(중략)....새벽 기도회가 매일 드리는 일상의 기도로 거의 모든 교회에서 자리 잡은 것은 식민지 치하에서 더욱 기도가 간절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51.  김인수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 (상)>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1998년 p246~247, p256
  52.  [네이버 지식백과] 길선주 [吉善宙] (교회용어사전 : 교파 및 역사, 2013. 9. 16., 가스펠서브)
  53.  김은신 <한국 최초 101장면> 가람기획 1998.9.10 p223
  54.  [네이버 지식백과] 전밀라 [全密羅]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55.  [네이버 지식백과] 여목사, 여자목사 [女子牧師, woman pastor] (교회용어사전 : 행정 및 교육, 2013. 9. 16., 가스펠서브)
  56.  김인수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 (상)> 장신대 출판부 1998년 p156
  57.  [월간중앙] 근·현대 서구화와 기독교 수용의 주역들(5) 개신교 개척자 서상륜
  58.  [네이버 지식백과] ‘상상할 수도 없는 묵시록적 의미’인가? - 알렌, 언더우드, 아펜젤러의 조선 입국 (주제가 있는 미국사, 강준만)
  59.  [네이버 지식백과] 백홍준 [白鴻俊]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60.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5년 p165
  61.  [네이버 지식백과] 백홍준 [白鴻俊]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62.  [네이버 지식백과] 백홍준 [白鴻俊]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63.  [네이버 지식백과] 백홍준 [白鴻俊] (인명사전, 2002. 1. 10., 인명사전편찬위원회)
  64.  김인수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 (상)> 장신대 출판부 1998년 p211
  65.  [네이버 지식백과] 신약전서 [新約全書]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우리 나라에 천주교가 포교되기 시작하여 상당한 교세를 가지게 될 때까지도 성서에 대한 작업은 특기할 만한 것이 없었다. 다만 1795∼1800년 사이에 이가환(李家煥) · 정약종(丁若鍾) 두 사람이 천주교 성서를 번역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따름인데, 아마 그것은 4복음서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66.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5년 p169
  67.  김인수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 (상)> 장신대 출판부 1998년 p211.....이는 기독교 역사상 전례없는 일로, 1885년에 입국한 언더우드 선교사가 1887년에 평북 의주에 갔을때 이미 성경을 읽은 이들이 세례를 받고자 몰려드는 것을 보고 놀랐다는 기록을 남겼을 정도였다.
  68.  김인수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 (상)> 장신대 출판부 1998년 p112....최초의 한글성경이다.
  69.  김인수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 (상)> 장신대 출판부 1998년 p118
  70.  이 성경을 언더우드 등의 선교사들이 일본을 경유하면서 입수하여 내한하였다.
  71.  김인수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 (상)> 장신대 출판부 1998년 p165~166
  72.  [네이버 지식백과] 기독교대한감리회 [基督敎大韓監理會]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73. ↑ 이동:  [기독교대한감리회] 감리교회사, 미감리회석교시대(1884~)
  74.  김인수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 (상)> 장신대 출판부 1998년 p185
  75.  [기독교대한감리회] 감리교회사, 자치시대
  76.  김인수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 (상)> 장신대 출판부 1998년 p109~111
  77.  “황해도 소래교회 - 한국 최초의 '자생교회'. 2012년 4월 26일. 2023년 1월 1일에 확인함.
  78.  이 교단은 1960년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과 결합하였으나 신학적인 견해 차이 및 신학교 통폐합에 대한 의견 대립으로 1963년 환원하였다.
  79.  이중에는 개신교계에서 이단으로 판정되어 소속 교단에서 제명된 교회가 자체적으로 만든 비성경적인 장로교단도 포함된다.
  80.  대한성공회 선교교육원. 《성공회의 역사》. 대한성공회 선교교육원.
  81.  천주교 답동성당, 내리감리교회와 같은 지역에 있어, 한국 기독교 초기의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
  82.  1890년에 축성했을 때에는 한옥성당이었는데, 1926년에 지금의 로마네스크 양식 성당으로 건축하여 축성함. 고딕양식을 생각했지만, 건축가 아서 딕슨의 도움말대로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었다고 한다.
  83.  성공회의 역사/성공회 선교교육원 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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