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8-03

[*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8 개화파는 왜 조선의 근대화에 실패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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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파는 왜 조선의 근대화에 실패했을까?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8회
법률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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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강연은 함재봉의 『한국 사람 만들기 I: 조선 사람 만들기, 친중위정척사파』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이번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여덟번 째 시간에는,
쇄국정책을 고집하던 조선이 어떻게 개화에 대해 알게 되고, 그 과정에서 나타난 개화파들이 조선의 변화를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과정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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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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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함재봉 한국인의 탄생 시간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어 조선이 오랜 세국 정책을 결국은 포기하고 어떻게 나라를 열
수밖에 없었는가 열게 되었는가 특히 중국은 어떤 전략 하에서 조선이
조선을 열도록 압력을 넣고 일본은 또 어떤 계산 하에서 조선을 열려고
했었던지 이런 부분들을 쭉 살펴봤고요 그리고 이제 조선에서는 이 계곡을
도대체 어떻게 생각을 하고 맞이했는지 특히 김기수가 1차 수신사로 가면서 가서
일본 사람들하고 어 교류하는 가운데 나타난 조선의 정책 어 주도자들은
생각의 일단을 우리가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그
과정에서 그럼 어떻게 해서 개화 파한 사람들이 나와서 아 이게 왜 열린
거고이 열었다는게 개국했다게 무슨 뜻이고 그럼이 기회를 우리가 어떻게
이용해서 어떤 나라를 만들어야 되겠다 그러한 생각을 하기 시작하는 개화파
나오기 시작한 그 과정을 우리가 살펴보고 어 그렇지만
궁극적으로 왜 그 개화파 그이 어 조선을 어 그 근대화 시키는데
실패하고 결국 몰락하게 됐는가를 살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어
함재봉 한국인의 탄생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어 지난 시간에는 이제 그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 다음에 조선에서 수
신사를 보내서 김기수 보내서 이제 일본에서 일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일본에
부국강병 하는 모습을 보고 오는 그 과정에 대해서 살펴봤는데요 자 그럼
이번에는 강화도 조약을 맺고 나서 일본 사람들은 조선에 와서 뭐를 했는지 그 내용을 좀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교과서 같은 데서 역안에서 접하기 힘든 그런 내용이 되겠습니다 아마 처음 들어보신 내용들이 많을
겁니다 그니까 일본은 우선 일차적으로 강화도 조약을 맺은 이유가 미국이
페리 제독을 보내 갖고 일본을 개국을 때 제일 일차적인 목적이 뭐냐면
일본하고 교육을 하자는 거였거든요 통상을 하자는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 통상을 하자는 것은 실제로 서로
장사를 하자 물건을 사고 팔고 다른 열광 손에 들어가는 것도 막고자 하는
부분도 있었지만 일차적으로는 이제 조선하 통상을 하고 싶은 겁니다 그게
어디서 정확하게 나타나냐 그요 강화도 조약을 맺어서 소위 개국을 하지 않습니까 계곡이라는게 뭡니까 특정
항구들을 여는 거죠 연다라는게 뭡니까 외국 배들이 그 한구에 도착해서
마음대로 조선 사람들하고 만나서 장사를 할 수 있게 해 주는 거죠 외관에 한정 돼서 스시마에 배가 뭐
1년에 세견선 20만 들어와서 하고 이렇게 만들어 놨던 거를 이제는 부산항을 열어 가지고 전체에 들어와서
일본 사람들이 마음대로 조선 사람들하고 교 교류를 할 수 있게 교육을 할 수 있게 하자는 거였습니다
자 그래서 부산항을 열고 외관에 있었던 설치되어 있었던 그 철조망이나
철탑을 다 어 허물어뜨리고 이제 동네 전체에 나와서 부산 전체에 나와서
마음대로 어 장사를 할 수 있게끔 뭐 집도 짓고 실제로 이주해서 와서
살기도 하고 도로도 만들고 이제 이런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하는 거죠 그때에 이제 그 일본이
건너와서 조선하 이제 장사를 해야 되는 거니까 그럼 어떤 품목을 갖고
조선하 교류를 해야지 자기네가 돈을 벌 수 있을까 조선 사람이 좋아할까 이제 이런 거를 조사하기 위해서
오쿠보도시미치 그 일본의 외교 정책을 저하는 오쿠보 오꾸라 기하 치료라는
당시 일본의 거상이 있습니다이 사람을 어 보냅니다이 오쿠라가 어 그 조선
하고의 교류가 굉장히 많았던 사람인데이 사람이 이제 건너갑니다 1876년 8월에 동네에 도착해 갖고
비단 양모 인도의 소음으로 만든 옷가지와 생활용품 이런 거를 판매를
하기 시작합니다 근데 금방 품절이 됩니다 근데 이때에
정말 재밌고 중요했던 사실 어 근대화의 또 한 큰 어 척도가 되는게
뭐냐면 이때에 오구라는 어 가격표를 물건마다 다 가격표를 붙여서 왔답니다
전까지라도 들어온 겁니다 그 전까지는 다 뭡니까 물건을 사고할 때는 서로
흥정을 하는 거죠 이때에 오쿠라가 가지고 들어오는 것이 전까지였습니다 그래서 그것도 굉장히 조선 사람들이
어 그 신기했다 그럽니다 아무튼 이때 너무나 그 물건들이 히트를 쳐 가지고
한꺼번에 팔리는 바람에 자신감을 얻고서 그러면 이제 본격적으로 가자 그래서 어 일본 정부가 미츠비 상사
그때 막 생기기 시작한 미츠비시 상사한테 부탁을 해 갖고 부산하고 나가사키를 왔다 갔다 하는 한 달에
한 번씩 왔다 갔다는 정기선을 설치를 하면서 이때부터 본격적인 일본하고 조선의
교류가 시작이 됩니다 그런 과정에서 우리가 알고는 부산이 만들어지기 시작합니다 부산은 일본이 만든
도시입니다 원래는 동래부 속해 있었던 부산 진에는 수근 진영이 있었고
초량지점 있었습니다 강화도 조약을 맺는
1876년에 쯤에 되더라도 어 동네 부 전체에 한 5천 가구가 살고
있었고요 그보다 10km 남쪽에 있는 부산 진에는 양 2,000명의 조선
상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 사람들은 주로 생선 식용 개구리 미역 성류
도기 대나무 화살 소금 이런 거를 판매를 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근데
여기에 이제 어 오꾸라 같은 사람들 들어와서 본격적으로 어 근대식 그
장을 열고 시장을 열고서 이제 물품 물품을 어 팔기 시작하는 겁니다
1876년 2월 구로다 그러니까 그 강화도 조약을 맺으러 일본 함대를 그
와서 신하고 단판을 던 그 구로다의 보고서에 하면 강화 도장 몇기 직전까지만 하더라도
초량지구대 아도 사람들이었죠 그런데 1876년 11월이 되면은
벌써 강화도가 맺은 다음이죠 그다음에는 부산 진에는 일본 상인이
벌써 100명이 넘었고 1본 배도 12척이나 한국에 정박해 있었다고
그럽니다 그리고 다음 해인 1877년 중엽에 이르면 부산 진에는 200개가
넘는 일본 상회가 장사하고 있었답니다 사진에도 보시는 그 부산진 모습이 그
완전히 그냥 옛날 어촌에서 갑자기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근대 도시로
바꾸는 바뀌는 그런 모습을 보실 수가 있습니다 1876년 11월에는 어 그
부산에 일본 우체국이 열리고 그리고 이듬해에는 재생 의원이 생깁니다 그러니까 일본의 군의관들 의료진들이
와서 그 처음으로 병원을 열기 시작을 하는 거고 그 병원에서 일본 사람뿐만
아니라 조선 사람들도 치료를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보통
1880 5년에 알렌이 와서 여는 광원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병원이라
조선 최초의 근대 병원이라 그러는데 사실은 이미 1877년에 부산에서 서양식 근대
의료 훈련을 받은 군인 하고 의료진이 들어와서 치료를 했기 때문에 사실은
근대 의료진이 여는 재생 의원이 최초의 근대 병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180 8년에는
재판소도 생기고 그러면서 그 일본 자치 위원회가 생기고 그러는
과정에서 지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그 그 동본원사 아는
일본 절이 생기고 그 절에 와서 이동인이라는 조선의 어 승이 오쿠무라
신이라고 와서 포교하고 있던 일본 스님과 만나서 일본 것을 배우게 되고
그 배운 것을 나중에 어 서울에 가서 봉은사에서 어김 박영요 서재필 이런
사람들하고 나누기 시작하면서 일본과의 본격적인 교류가 시작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때에 그 박영 하고 김옥균이 어 이동인 테 금괴를 주고
어 일본에 당신 건너가라 그래서 일본에 건너가 가지고 어 일본이
어떻게 지금 변하는지 보라 그래서 이제 이동인이 그 일본으로 건너가게
됐다이 부분을 말씀드렸죠 자 그 역사적인 배경 속에서 이런 교류가 일어나는 겁니다 강화 도자이 그
맺어진 일본이 본격적으로 부산을 와서 개발을 하기 시작하고 그 과정에서
일본 스님까지 와서 포교를 하기 시작하니까 조선의 스님이 그걸 만나기 시작해서 일본에서 있는 변화들을
갖다가 직접 배우기 시작을 하고 그거를 김옥균 서재필 박영한 알려서
다시이 사람들이 이동인 보고 일본 건너가라 그러는 겁니다 그래서 일본에
가서 1년 동안 교도에 가서 또 히가시 홍간지 동본 원사에 가서
도식을 하고 일본 스님이 되고 그리고 이제 도쿄에가 갖고 여러 사람들 만났는데 그중에 이제 예를 들어서
영국 영사로 와 있는 세터를 만나는 겁니다 그 세토의 일기를 보면은 이런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오늘 아침
아사노 조야는 이름을 가진 조선인의 예방을 받다 그는 아사노 조선의
야만을 또한 의미한다고 기지 차게 설명하고 자신은 자기 나라 사람들을
몽시 목적 으로 세계를 보기 위해서 이곳에 왔노라고 말하다 그는 서툰
일본어를 구사하였으며 우리는 서로 의사를 소통할 수 있었다 그런 유럽의 건물들과 기계들 그 밖에 가장
인상적인 것들의 사진들을 사고 싶다고 하면서 이들을 갖고 가서 외국의
위대함에 관한 얘기가 자신이 맞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시키고 싶다고 하고 또한 영국을 방문하고 싶다고 말
말하다 다음 일요일 아침 다시 오겠고 약속하다 그러면서 후쿠사 기와도
만나기 시작하고 면서 어 그 활동을 시작합니다 김기수가 1차 수사가
가갖고 아무도 안 만나고 모든 교류를 거부하고 돌아왔는데
그다음에 전혀 별개로 정말로 민간인으로서 몰래 일본에 건너가서
오히려이 동인이 일본 사람들과 그리고 일본에 와 있던 외국 사람들과 폭넓은
교류를 시작하죠 이러고 있을 때에 드디어 1880년에 2차 수신사 집을
보냅니다 그 김홍집이 가는 이유는 물론 뭐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대표적인게 뭐냐면요 그때에 일본하고
이제 교육을 하겠다 그래서 아까도 이제 오꾸라 이런 사람들이 와서 교육을 시작했다 그러지 않습니까 근데
교육을 할 때에 조선에서 관세를 안 먹였어요 외국에서 일본 사람들이
물건을 갖고 들어와서 팔겠다 그러면 우리가 보통 관세를 먹여야 될 거 아닙니까 관세가 뭔지 몰라서 관세를
안 먹었었어요 그래서 일본이 무관세로 들어와서 장사를 하고 있었던 겁니다 부산에 와서 그런데 이걸 이제
뒤늦게 조선에서도 알게 되는 거예요 어 관세를 매기면 이게 국고에 돈이
들어오는 거구나 우리가 돈을 벌 수 있는데 이거를 못 하고 있구나 개정을 하자 강호도 주역을 개정해서 이번에
관세를 제대로 먹이도록 하자 해 갖고 이제 사실을 보내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2차 수신사 김홍집이 어
1880년 8월 11일 날 도교에 도착을 하고 어 18월 16일 날
이인노 가오로 외모경쟁력 그 외무 경이 된 거죠이 노회는
사실은 강화도조약 때도 어 그 구로다의 부관으로 왔었고 어 김기수가
일본에 왔을 때에도 그 만났었고 그리고 김홍집이 왔을 때에도 또
만납니다 그러니까 조선하 굉장히 밀접한 관계를 맺은 사람입니다 일본
최고의 조선 전문가라고 할 수가 있는 거죠 실제로 사람이 어이 이노의 가오루가
김홍집 만나서 한 얘기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본이 조선으로부터 뭐를 원하는지 조선이 어떻게 했으면
좋겠다고 하는지를 하나 부사가 김기수 했던 얘기랑 거의 똑같은 얘기를 김홍집 한때 합니다 한번 같이
보시겠습니다 우리나라 또한 15년 전의 경상은 15년 전의 상황은 지금
귀국과 다르지 않습니다 조선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때 야마구치 현에 있었는데 바로 폐관 전략의 논의를
극력 주장하였습니다 패관 전략이라는게 뭡니까 모든 항구들 닫아 버려라
그리고 조약들 다 얘기해 버려라 왜 도대체 우리나라가 개국을 하고 서양 놈들이 들어오게끔 하느냐라고 자기네는
이제 우정 척사 바 같은 거죠 손로 조이 파 조랑 양이 파였다 처음에는
그래서 그런 논의를 금력 주장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찌 국세가 날로 약해지는 것을 보고
충분할 억누를 수가 있겠습니까 이에 목숨을 아끼지 않고 금령을 범에 가면서까지 탈출해서 외국에 가서 천하
대세를 깊이 살피고 눈으로 직접 각국의 변기를 보았습니다 이때 이제 조슈 5라는 조시 번에서 다섯 명의
젊은이들이 몰래 미량을 해서 영국에 가서 공부를 하고는데 그때 갔던 사람
중에 하나가 이너웨어입니다 이또 두 같지만 그래서 그 이노가 그 얘기를 지원합니다 이건 도저히 안 되겠다
처음에는 외국과의 교을 반대했지만 이거 나라가 너무 약해지고 있어서 이러면 안 되겠다 못 나간다고
하는데도 그 영까지 어기면서 법을 어기면서까지 외국에 가서 그걸 보면서
경개를 보았다 그리고는 환하게 깨닫고 조종에 돌아와 아래여서 바로 오늘날에
일을이 있었습니다 메이 지실 이루었다 감히 스스로 공을 세웠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나 귀국을 위해 한번
말씀드립니다 우리나라의 병기가 비록 서양만 못하지만 그 제조한 것이 매우
많습니다 어찌 다른 나라 사람과 전쟁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참으로 동양의 나라들이 오랫동안
쇠약해서 떨쳐 일어나지 못한는 까닭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제가 대사께 상남을 권하는 것은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요 귀국이이를 계기로 가오해이녀 순치 상의의 형세를 이루어서 이와
입술과 같은 형세를 이루어서 구라파부대찌개
지난 시간에 1871년에 청일 수호 조약을 맺었다고 그러지 않습니까 일본은 이미
청나라는 조약을 맺는 거죠 외교 관계를 트는 거죠 그러니까 뭐 일본에서 모리 아리노리 같은 사람을
중국 공사로 보낸 거고 중국에서는 하여장이라는 사람을 도교에 파견해서
공사로 보내고 하여장 부관으로 황준헌 그죠 그 유명한 조선 책략을 쓴 그
황준헌 아고 그 두 사람이 주 동경 천국 공사관의 직원들로 와 있는
겁니다 그럼 그 사람이라도 만나겠냐 그 이노랑 일본 사람들이 그러니까 중국 사람들은 만나겠습니다 이러는
겁니다 그래서 만납니다 그 1880년 8월 22일 날 만납니다 그러니까 한
번만 만나는게 아니라 여섯 차례를 만납니다 그 첫 만남에서 황준헌이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우리 조종과
귀국은 즐거운 일과 괴로운 일을 서로 함께 나누고 슬픔과 기쁨을 같이 하였는데 글래 형편을 보면 서양의
여러 나라가 날이 갈수록 넘보고 위협하니 우리 두 나라는 더 마땅히 더 친밀해져야 할 것입니다 저희는
3년 동안이나 도쿄에 머물면서 다른 무리들과 서로 교제해 보았지만 이제
선생이 오시니 참으로 타향에서 옛친구를 만난 것 이상으로 기쁜 마음을 이루 다할 수가 없습니다
그랬더니 김홍집이 답변하기를 중국에 대한 저희 나라의
의리는 속방 같으니 근일 바깥 길이 어지러운만큼 구하고 바 는 바가 더욱
간절합니다 양에서 만난 옛 친구란 말씀은 바로 저의 생각과 같습니다
중국 하고는 너무나 잘 만납니다 분명히 김기수와 마찬가지로 어 김홍집
그 중화질서 속에서 유교 문명권에서 자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때
만나가지고 황준헌 어 하여장이 김홍집 테
계속해서 개국을 하라 그러는 겁니다 더 열어 제껴야 된다 라는 겁니다 이게 뭐냐면 지금 하여장고 황준원
파견한게 누굽니까 그게 이홍장 있니다 뭐를 원한 거냐면 조선을 속 자기네
속방 조선을 지켜야 되겠는데 자기네 중국의 국력으로 도저히 지켜지지 않으니까 이제는 다른 방책을 써야
되는데 그 방책이 뭐냐면 조선으로 하여금 빨리 여러 열강들과 조약을 맺어서 여러 열광과
국교를 맺어 버리면은 어느 한 열강이 특히 러시아 같은 데가 조선을 빼 을
수가 없을테니까 혼자서 독식을 할 수가 없을테니까 그러니까는 황 자기가
보낸 공사하고 그 그 부관한테 뭐라 그러냐면 조선에서 김홍집이 사람이
이제 간다 그러면 그 사람 만났을 때 이런 얘기를 해라 즉 뭐냐면 빨리
조선 열어라 빨리 조선 열어서 서양 모든 나라들 미국이고 뭐 이런 데랑 다 하 수교를 하고 그리고 가장 지금
조선한우 한게 누구냐 러시아다 러시아를 경계하라 왜 중국한테 지금
청나라가 제일 위협을 받는게 러시아거리 자기네 청황실의 고향인
만주에 있는 블라디보스톡을 뭐 거기에 이제 극동 함대를 키우고 군사를 키우고 이러기 시작을 하니까 이게
지금 중국은 굉장히 걱정이 되는게 러시아의 남하 정책인 거죠 그 얘기를
조선한자 생략입니다 그리고 그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서는 미국하고 잘해야 된다이 얘기를 벌써
이때에 해 주는 겁니다 그니까 중국의 전략을 그대로 이행하기 위해서 김웅집 테
조선 전략을 얘기를 해 줍니다 그래서 하여장이 김홍집 테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제 견해로는 러시아 사건은
잠못 긴급합체 걸 열어서 그 중국하고 러시아의 그 국경 지역을 점령을 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현재 내 해내 각국 중 오직 미국만이 민주주의 국가이며
또 그 국세가 부강 미국은 여러 국가와 외교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아직도 신의를 강조하고 극단적으로
자신의 편리만을 도모하거나 독차지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때 그들이 찾아와서 호의적으로 통상을 요구하니 만약
일본에서 개정하려는 조약과 비슷한 초안으로 조약을 체결하고 한다면 그들이 반드시 기꺼이 응할 것입니다
지금 당신들이 와서 일본하고 무슨 뭐 그 그 관세 조약도 좀 다시 맺자 그러고 그러지 않느냐 만일에 그거와
같은 조약으로 미국이 하자고 그러면 미국이 분명히 응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타국에서 통상으로 오는 자도 반드시 미국과의 조약을 참조하여 혼자 의견대로 하지 못할 것이니 일체의
통상 권리를 모두 내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게 됩니다 만국과 더불어 교섭하는 것은 이익은 있으나 손해는
없습니다 김기수는 돌아가 갖고 고종한 도대체이 통상이란 거 해봐야 열
나라랑 통상 아면 우리가 있는 거 다 팔아 버리기만 하고 물가만 올라가고 우리만 가난해지는는데 뭐 하라 하냐
그랬는데 지금 딱 하 여장은 뭐라 그럽니까 손해 날 거 하나도 없습니다 통하 이러는 겁니다 이것은 만세에 한
번밖에 없는 기회인만큼 놓쳐서는 안 됩니다 만약 굳이 관문을 닫고 거전
하려거나 하려다가 다른 날에 뜻하지 않은 파란이 생겨 일이
다급해졌다 그때는 엄청나게 큰 손해를 입을 것입니다 지금 미국이 원하고
있고 아직은 유리한 입장에 있을 때 적극적으로 해라 나중에 어려워져 갖고
뭘 밀려서 하면 그때는 굉장히 불평등 줘 맺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라고 이제
그 그 얘기를 해주는 겁니다 이런 얘기를 여섯 번에 걸쳐서 한 다음에
김홍집이 마지막에 가서 뭐를 부탁하면 당신들하고 지금 대여섯번 만나면서
들었던이 수많은 얘기들을 내가 조종에 가서 보고를 해야 될 텐데 내가 도저히 다 기억을 못 하겠으니 혹시
이거를 좀 정리를 해서 글로 써 줄 수 있겠냐 그래서 황준이 마지막 만나기 전 사흘을 꼬박
세면서 들을 쓴 것이 그게 조선 책략 있니다 황준이 무 따로 시간이 있어서
무슨 책을 써 놓고 있던 거를 한 카피를 준게 아니라 이홍장의 전략 중국의 새 전략을 어떻게 해서든지
김홍집 통해서도 조선이 좀 제대로 채택해서 빨리 여러 나라들과 수교를
할 수 있게끔 하기 위해서 얘기를 하다가 그 내용을 정리해 달라 그러니까 황주은 4월 만에 밤을 꽃
박서 정리해서 건내준게 조선 생략입니다 그렇게 하는 와중에 그런데
그 김 집이 이동을 만나게 됩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도쿄에 가서 이제
넓게 류들을 하고 있는데 그때 이동이 만나게 됩니다 근데 그 이동이 만나게
된 장면도 너무나 드라마틱합니다 1880년 8월 25일에서 31일 사이로 추정이 되고 있는데요 도쿄에
있는 그 그 별원 히가시 관지 벼원에서 이제 만나는 겁니다 지금 이동도 거기에 묻고 있거든요 김홍도
교도에 왔을 때는 본원의 그 가시 본에 먹다가 이제 도쿄의 원에 또
와서 먹고 있는 거죠 거기서 만납니다 그때에 만나 갖고 뭐를 일본측에서
이제 설득을 하냐면 강화도 제약을 체결하면서 일본이 요구했던게 뭐냐면 세계 항구를 열어 달라는 거였죠
부산만 열지 말고 세계 항구를 열어 달라 그랬더니 조선이 알았다 근데
어디를 열지 아직 못 정하겠다 이제 잃어버리는 겁니다 근데 일본의 입장에서는 부산 다음에는 재물포
당연히 인천을 열어 달라는 거였고 그다음에 원산을 열어 달라는 거였죠 근데 처음에는 이런 지하에 조선에서
거 거절합니다 왜 인천은 지금 우리 수도가 코 앞에 있는데 한양이 코 앞에 있는데 외국 사람들 왔다 갔다
못 하게 하겠다 그래서 거절하는고 원사는 우리 이태조 이성계 태조의 고향인데 거기도 외국 사람들 들게 못
하겠다 그래서 거절을 다 합니다 그런데 제물포를 열어 달라고 하는 거를 이제 막 그 그 그 김홍집이
이제 거절을 하고 있는 거죠 그 얘기가 오고 가고 있을 때 그거를
옆에서 이동인 엿습니다 그러고는 이동인이 뭐라 그러냐면 자기 그때 스스히 그러니까 뒤를 봐주고 있는 그
스스키 내가 들어가겠다 내가 한번 들어가서 김몽 집을 설득해 보겠다
그랬더니 스스이랑 일본 사람들이 아니 너 당신 그래서 되겠냐 지금 몰래
와서 있고 미망을 해서 와 있고 이런데 나타났다가 큰일 나지 않느냐 그랬더니 아니다 그래도 내가 이렇게
있을 수 없다 그러면서 들어가서 얘기를 합니다 동인이 말하기를 내가
일본에 들어온 것은 은에 보답하고 불은에 응하자 하는 것 부고 하는 것인데 나라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조치
조치가 있어도 우려하지 않으니 바라건데 수 신사를 배도록 하여 달라고 하다 하나부사 스스키 모두
탄복하여 수신사 면에도 하였다 동인이 일본 옷을 입고 조선말을 하니 수신사
김홍집이 괴상해 여겨 자세한 것을 물었다 동인이 무릎을 가까이 하여 지난해 나라를 위해 이곳에 와 교도
교에 있으면서 일본의 귀관은 물론이고 제야의 뜻 있는 사람들을 접하여 그
의도하는 바를 탐지하여 하여 보니 조선에 대하여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우리나라를 계명에 이르게 하는 것뿐이라고 말하다 그런데 이번에
하나 부사의 말을 용납하여 수신사 귀국한 후에 적절한 주선이 있기를
바란다고 온갖 말을 다하여 설득한 그니까 제물포를 여러 인천을 열어야 됩니다라고 온갖 말을 다해서 이동이
설득을 합니다 그랬더니 수신사 김홍집이 무릎을 치며 오호라 여기에 기마가 있어 은에 보답하려 하니스러운
바이라고 했답니다 그니까 김집 입장에서는요 지금 일본에 와서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르겠고 외국 사람 자꾸 만나니까 겁이 나서 못
만나겠냐 중국 사람들하고만 만나고 있고 그러는 상황인데 아니 누구가 갑자기 나타났는데 보니까 조선 사람이
일본을 입고 그러면서 벌써 1년 전부터 와 갖고 일본을 다 완전히 을
하고 있고 여기 와 있는 모든 사람들 다 알고 있고 일본이 의도가 뭐고 그러면 조선이 어떻게 되겠고 왜
인천을 열어야 되고 이런 얘기까지 하는 걸 보고 어 어떻게 이런 기가 막힌 일이 다 있냐 어떻게 이런
젊은이가 있느냐 그러면서 이동인 대동을 하고 귀국을 합니다 그러면서
일본 신문이 그동안 그때 이동인이 귀국한 걸 이렇게 보도합니다 작년 9월 다녀간 사람 이동이 귀국했다
그는 단발을 하고 유럽 봇을 입었다 그는 일본말을 유창하게 하고 자기 나라 사람들을 시키고자 한다 지난
9월부터 일본에 머무르고 있으며 조선의 문명화를 누구보다도 강력하게 주장하는 이동이
치토스의 마루를 타고 12월 1일 부산에 도착하여 육로로 한양으로 향했다 유럽 옷을 입고 허리에는
번쩍이는 금식의 줄을 차고 머리도 유럽식으로 한 그는 일본 사람처럼 도쿄 사투리를 쓴다 아무도 그를 조선
사람으로 보지 않을 것이다 그는 매우 지적이고 고매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다 그러면서 일본에서도 완전히
개화의 전령이 생각을 했던 거죠 아 드디어 조선에서도 이런 사람이
나타나서 조선 조종으로 하여금 나라를 열게끔 하겠구나 그니까 여러분 얼마나 기가막힌 얘기입니까 어떻게 이런 우연
아닌 우 끊임없는 우연을 거쳐서 정말 놀랍게도 어 이동인이 2차 수신사
김홍집 만나서 김홍집이 감동을 해서 이동을 데리고 가서 고정을 하게끔
하면서 갑자기 조선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돌아가자마자 1881년 1월 4일 조선이 통리
기무 암문을 설치합니다 그게 뭡니까 최초 외교 부조 그러니까 그동안에 6조 밖에 없어 갖고의 정부하 육조
밖에 없어서 외교 관계는 뭐 예조 이런 데가 맡아서 하는 건데 지금 외 외교 관계라는 건 통상을 해야 되고
뭐 관세를 매겨야 되는 거고 뭐 공사를 파견하고 이런 걸 해야 되니까 지금 조선이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전혀 새로운 영역 외교라는 영역을 해야 되는 거죠 그걸 하기 위해서 6조가 아닌 전혀 새로운 기관을
만드는게 통리 기모 아문 있니다 획기적인 일입니다 조선의 최초의 근대
정부 기관이 생기는 겁니다 어 청나라에 조정해서 학생들을 보내기 시작하고 이런 해외에 학생들 파견하는
일 군사관계 국경 문제 이런 거를 그 전담할 수 있는 어 그런 기관을
만들고 동인을 통리 기하은 참모 관에 임명합니다 여러분 이건 정말로 조선에
있어서 획기적인 왜냐면 스님들은
천민이었던 뭔가 획기적인 일을 하려고 젊었을 땐데 이제 시도를 하는 거죠
그러면서 1881년 1월 16일 인천을 개을 해버립니다
일본에서도 깜짝 놀랍니다 어떻게 이렇게 안 하겠다라는 일본 개을 이렇게 빨리 하는가 왜 이동까지 가서
그거를 다 설득 집을 설득 했듯이 가서 설득을 하니까 통리 기모도 설치하고 아예 내치 인천까지 열어
버리겠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개국이 되는 거고 그러면서 신사유람단
꾸려서 그러면 1번에 아예 정부에서 좀 대거 사람들을 보내서 이동인
얘기만들을게 아니라 이제 직접 가서 좀 봐야겠다 이렇게 해서 신사 유람을 꾸립니다 지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듯이이
과정에서 이동은 종족을 감니다 암살 됩니다 가 죽여버립니다 이동인 때문에
급격하게 개국이 이루어지는 거를 보고 그것에 위험을 받 위협을 받았던 대원군 일파가 됐든지 누가 누군지는
지금 뭐 김홍집이는 그런 설도 있고 그렇지만 아무도 전혀 모릅니다
아무튼 이동인 암살이 되고 사라져 버리고 어쩔 수 없이 이동인 친구였던
다른 스님 무블 탁 정식이 신사유람단 이끌고 안내를 해 갖고 일본으로
건너갑니다 근데 이때만 하더라도 여전히 우정 사파가 너무 강하고 그러니까 딴 나라도 아니고 1번의
조선에서 공식적인 사절단이 간다는 건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아무 얘기를 하지 않고 모두가 다 변장을
하고 그냥 부산 이런데 시찰하러 간다 그러면서 뿔뿔이 흩어져서 따로따로
부산에 집결하도록 합니다 홍영식 어윤중 12명의 사절과 수행 예순 두
명이 극비리에 동네 지방 민정 시차를 위해서 하면서 어 부산에 집결해서
본으로 몰래 건너갑니다 그래서 1881년 5월 8일 나가사키에 도착해서 나가사키 오사카 교도 고의
요고 하마를 거쳐서 6월 1일 도교에 도착해서 8월 15일까지 일본에 있으면서 어 그 일본을 공부를 하기
시작하고 조선정부가 일본 공사관의 신사유람단 파견을 공식으로 통보한 것은 신사유람단이 도쿄에 도착한 6월
1일에 통보를 합니다 그래서 그때에 참판 박정은 내무성 윤중은 대장성
문부성 뭐 공무 이런 거 다 보기 시작하면서 그때 같이 갔던 일과
유수는 도일한지 2주만인 6월 8일 날 개여 의수의 그리고 윤치호는
동인사 입 입학하고 김하는 일본의 조선소에 입학해서 공부를 하도록
합니다 자 이러면서 드디어 저 개국을
했지만 이름이 여러분 신사유람단 뭐냐면 신사들이 마러 간다는 거였습니다 왜냐면 무슨 공식 사절단이
일본의 시찰단이 간다는 얘기를 할 수가 없으니까 그냥 이름도 그렇게 붙여 버렸던 겁니다 자 그렇게 해서 급격하게
나라가 열리는 줄 알았어요 그렇게 시찰단이 다 보고 돌아오고 그리고
이제 김옥균 이런 사람 박영혁 이런 사람이 일본에 자꾸 이제 건너가기
시작하면서 일본을 보기 시작하고 처음으로 일본을 이제 제대로 보기 시작했는데
무슨 일이 벌어집니까 모란이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대원군이 다시 권력을 잡는
겁니다 대원군이 다시 권력을 잡고서 개국 이런 거 안 된다 이런 거죠
워낙 쇄국주의 아였다는
강화도 조약을 해서 그것도 조약을 한 다음부터 4년 동안 아무것도 안 하다가 김홍집이 건너가서 그래도
황준원 만나고 이동인 만나고 해서 간신히 이게 돌려서 급격히 개국이
되는가 싶었는데 이모 곤란이 일어나면서 다시 대군이 권력을
잤습니다 그랬더니 어떡합니까 청나라가 대온 걸 송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왜 압송하는 아세요 청나라도 지금 조선이 대국하기 바라는
거 아닙니까 누차 말씀드렸지만 이홍장의 전략은 조선이 빨리 개국을
해서 여러 나라랑 수교를 해야지 누구 한 나라가 한 열강이 조선을 자기 네로부터 뺏지 못하겠다고 생각을 해서
심지어는 일본하고 수교하는 것까지도 적극적으로 권장을 하고 있었던 판인데 그래서 간신이 열어서 일본에도
조선에서 사절단을 보내 갖고 시차를 하게끔 아지 하고 있는 와주 중에
대원군이 다시 권력을 잡으니까 어떡합니까 청의 입장에서 이거는 도저히 자기네의
대전략 자체가 흐트러진다 그래서 대원군을 납치를 해서 바오딩 다 3년
동안 구금을 해 버리면서 계속해서 계곡을 하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대원군을 청나라가 납치를 해 가는 겁니다 한편 일본에서는 그 신사유람단
어 맞이한 후쿠사 기치가 어 그 신사유람단이 와서
일 뭐 이런 사람들을 이제 자기한테 맡기고 윤치호 동인사 가고 이런 것도
다 그 안배하는게 이제 후자였습니다 그서 후사가 이런 기록을
남깁니다 이달 초순에 조선인 수명이 1번 사정을 시찰하기 위하여 왔다
그중 청년 두 명이 본수 그죠 개어 의에 입학하여 나의 집에서 유하고
있다 참으로 20여년 전 나 자신의 일을 생각하면 동정을 금할길이 없다
이것은 조선인의 외국 유학의 처음이요 본도 또한 외국인을 최초로 입학시킨
것이니 실러 기우라 하겠다 그들 때문에 많은 조선인이 나의 집을 방문하여 조선 사정을 말하고 있는데
30년 전에 1번 사정과 유사하다 그 후쿠자와는 기억하시죠 미국의 그 그
사절단이 1860년에 갈 때 어 간닌 마루라는 배를 타고서 쫓아갔다가 그
샌프란시스코에 가서 사진관에 가서 사진관 13살짜리 딸과 사진도 찍고 오고 책들을 갖고 오고 그러면서
공부를 하면서 어 그 시작했던 그게 이제 1860년 이었었는데 지금 이제
1880년 돼서 조선에서도 건너와서 자기가 외국에 가서 배우려고 했던
거와 똑같이 조선 사람들 이제 일본에 와서 배우려고 자기가 하는 학교에 오고 이런 걸 보고서 참 나름대로
감회가 새롭다 얘기를 들어보니 정말 지금 조선의 상황이 30년 전 어
자기 젊었을 때에 자 일본이 막 개국하는 당시에 조선과 너무 비슷하다
그러면서 그때부터 뭐 그 어윤중 김옥균 박영효 오는 모든 사람한테
윤치호 이런 사람들한테 다 어떻게 해야지 근 대화를 할 수 있는가 이런 얘기를 쭉 해 줍니다 그러면서 그
유명한 문명 개화론 문명 개화라는 말 자체를 후사가 만드는 말이고 우리도
지금 개화파 개화파 할 때 그 개화라는 말도 그걸 이제 말하자면 근대화라는 말 를 우리가 화한다는
얘기 개국한다 얘기 문명 개화 근대화 한다라는 얘기는 다 후쿠사 얘긴데
그때 이제 그 후쿠사 자기의 문명론 어 조선 사람들한테 가리키는 거죠
그러면서 후쿠사 문명론 이런 겁니다 문명론이란 사람의 정신 발달에 의논이
그 취지는 한 사람의 정신 발달을 논하는 것은 아니고 천하 대중을 일체로 모아서 그 일체의 발달을
논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도대체 한 사람 한사람 사람을 가르치는 거는 안 되니까 일반 대중 전체가 한꺼번에
어떻게 이거를 가르칠 수 있느냐 신문이다 그래서 신문을 만듭니다 어지지 신보 시사 신보라는 어 그
신문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 신문 만드는 거를 박영을 통해 갖고 일진을
통해 갖고 조선에 가서도 똑같은 신문을 만들라 해서 사실 한성순보를 만들기 위해서 인쇄 기계와 인쇄
기술자 들과 이걸 모두 다 훈련을 해서 후쿠사 귀국하는 박영효와 함께
보내줍니다 그래서 어 6일 준이 한 얘기입니다 선생님께서 후쿠자와서
이전부터 조선인의 교육상 그 문장을 평이하게 하기 위하여 그 나라의 언문
즉 가나 문자를 한자와 혼합 사용하는 일에 차가 하시고 일주이 미타 있는
선생님의 대게 임시로 거처하고 있었을 때 일주에게 명하여 문자의 교의 문장을 한원 혼용 즉 언문 섞긴
문장으로 번역시 문장은 이렇게 하지면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우리가 순한 글은 나중에 독립 신문이 1896년에 처음으로
순한문 한 글로 가지만 이때 벌써 한문에서 벗어나서 온문 즉 한 글이죠
원문고 한자를 혼합을 해서 써야 돼 그렇게 해야지만 근데 신문을 만들고
여러 사람한테 글을 전할 수가 있고 문명 개화를 시킬 수 있다라는 그 모든 모든 아이디어를 제공한 것이
후쿠사 그거를 돌아와서 이행하려고 한 거 그것이 박영효와 6일입니다 그런데
와서 그 신문국 만드는데 결국은 어 어떻게 됩니까 신문국 다 만들었더니
민시 적들이 그걸 뺐습니다 친청파 뺐습니다 그러면서 그 한성 수모는 순
한문으로 어 나오는 신문입니다 사실 그래서 우리가 지금도 신문의 날
최초의 근대신문 언제냐 했을 때 한성순보 출간된 날이 아니라 독립
신문이 출간된 날로 어 그렇게 따진 이유도 그렇습니다 그런 상황이 벌어지기 시작하니까 즉 이모 군란이
일어나서 청나라가 와서 대원군을 잡아갑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이제 일본에서 일본을 배우고 사람들이 이제 박영효
일준 서재필 그렇죠 김옥균 이런 사람들이 일본을 막 배우면서 이제
조선에 다시 돌아오기 시작해서 뭐 신문도 만들어 보려고 이제 이런 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거를
하는게 뭐냐 이게 근대 국가를 만드는 거고이 근대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 뭐냐면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해야
되겠구나 청나라의 영향권 속방 지에서 벗어나서 독립 국가를 만들어야 되겠다
그러는 겁니다 그래서 독립이라는 말이 이때 처음 나온 거고 그 독 독립은
일본 오르 독립이 아니라 중국으로부터 독립입니다 그래서 독립 당이라고 아예
이름까지도 독립당이라고 개화파를 일본에서 독립당이라고 그럽니다 하도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원해서 그러기
때문에 지금 친청파은 민시 정권은 뭡니까 대원군이 다시 뒤집으려고 했던
거를 청나라가 들와서 대원군을 잡아가 줌으로써 민시 정권이 유지가 됐기 때문에 지금 민시은 청나라
하고 관계를 유지해야 되는 거죠 매달려 있는 거죠 그런데
일본에서 배워 갖고 온 개화파 자꾸 청나라로부터 독립을려고 하는 겁니다
그때에 김옥균이 무슨 생각을 하 하고 있었던가를 서재필의 회고하게 나옵니다
김옥균은 천국의 종주권 날에 있는 굴욕감을 참지 못하고 어떻게 하면이 치욕에서 벗어나 조선을 세계 각국
중의 평등과 자유의 일원이 되게 하느냐고 하고 불 불철주야로 노심
추사 하였다 그는 현대적 교육은 받지 않았으나 시대의 추위를 통찰하고
조선도 강력한 현대 국가가 될 것을 절실히 바랐다 그리고 신지식을 주입하고 신 기술을 채용함으로써
정부와 일반 사회의 구투 인습을 일변 킬 필요를 확신하였다 그는 구미의
문명이 일조일석에 된 것이 아니고 열국 간의 경쟁과 노력에 의한 전진의
결과로서 몇 세기를 요구했는데도 일본은 이것을 1일대 동안에
속성한자 그래서 그는 스스로 일본을 모델로 하기로 하고 백방 분주하였다
것이다 제가 친일 개화파 아고 굳이 이름을 붙인게 분명히이 사람들은 일본을
모델로 했기 때문에 그랬 그런 것입니다 자 그래서 개화파가 들어와서
일본에서 박영효가 돌아와서 다행히 한성부윤 서울시장에 임명이 됩니다
그래서 도시의 위생 문제를 해결하고 도로를 놓고 경찰을 설립하고 일본이 하던 거를 따라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2월 28일 날은 고정이 신문 제가를 해서 일주이 갖고 들어온
그렇죠 후쿠사 기치가 보내온 기술 들과 그 기계들을 가지고 이제 신문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어 3월
13일 날 박영효가이 실무 신문 발행의 실무 책임을 그 일에게
맡깁니다 그래서 6일이 방문국이라는 걸 설치해서 조선 최초의 근대 심문
발행을 준비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됩니까 며칠 안 가서 4월 23일 날
갑자기 박가 한성 부에서 해직이 버립니다 그리고 경기도
수로 전출이 돼니다 6일도 통리 교속 성상 무하 주사 그러니까 그 방문을
유지할 수 있는 그 관직을 결국은 사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우 시바 쿠초
그니까 같이 박영랑 돌아와서이 신국을 만들 모든 도움을 하는 신문
전문가였던 시바 다크는 완전히 그 신문이 망해 버리니까 어숲 돌아가니까
실망한 으로 귀국을 해버리고 그 대신 귀국하는 변에 40명의 조선 유학생들을 데리고 가서 전부 다 개어
기주에 개요의 속에다가 유학을 시킵니다 조선 학생들은 자리가
없으니까 빈 군사 막사에서 기숙하면서 일본어를 배우고 그리고 후사와 나이다
이런 사람들 그 저 동인사 이런 거를 운영하는 영화학교를 운영하고 하는
사람들의 추천을 받아서 각정 학교와 정부부처에서 실습 훈련을 받도록
합니다 그니까 계속해서 근대 화를 할 수 있는 임무를 양성하는데 일본이
적극 어 도와주고 있습니다 자 이렇게 되니까 어떻게 됩니까이 뭐처럼 개국을
해서 뭐처럼 일본에 건너가서 일본도 적극적으로 협조해줘서 온갖 교육을
받고 신문을 만들고 뭐를 하고 근대화를 어떻게 하고 이런 거를 다 배워서 하려고 하는 찰라에 다시
밀려나게 됩니다 완전히 밀려나면서 청나라 를 따르는 친청파
완전히 권력을 잡고서 자기네를 밀어 밀어내기 시작하니까 김균하 박영효
이런 사람들이 서재필이 뭐라 그러냐면 이거 가만히 있으면은 우리가 시작한이이 개화의 불씨가 완전히
이제는 말살이 될거다 메지 유신 파가 전쟁을 쿠테타를 일으켜서 성공하였다이
우리도 그 방법밖에 없겠다라고 움직이기 시작을합니다 근데 그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 벌써 전부
다 많은 사람들의 눈에 뜨이고 그때 미국 공사관의 무관으로 와 있던 폴크
소위의 눈에도 이게 뜨입니다 그래서 포크가 이렇게 보고서를 본국 미국에
공선 보고서를 올린게 있습니다 10월 달에 개화파의 지도자 한 명이 저에게
만일 외세의 개입이 막지 않는다면 조선은 곧 청의 수중에 떨어질 것이라고 분개하면서 자신들의 작은
정파는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있는 모든 권력을 빼앗기고 후퇴하고 있을뿐만 아니라 모두 처형당할 위 에
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이는 친청파 모략으로 일어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개화의 사업을
완수하기 위하여 국왕이 사용하기로 계획하였던 왕의 예산은 모두 민씨를
특히 모든 재정을 장악하고 있는 민태호 민혁의 아버지에 의하여 끊겼다고 하였습니다 라면서 어이
사람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다라는 것을 감지를 합니다 그리고 결국은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낙성식 조선 최초에 어 서양식 우체국이 어
열리고 그 낙성식을 하는데 그 낙 우체국의 책임자가 홍영식 있니다
개화합니다 그 홍영식이 그 낙성식을 위해서 성대한 연애를 베푸는데 그
연애를 베푸는 자리에 민영익이 이제 와서 있었고 어 외교 사절들이 모두
다 와 있었습니다 이날을이 낙성식을 정변이 정변
거사일로 어 일과 거사 장소로 잡았습니다 그래서 그날 밤 바깥에서
불을 지르면서 누가 불이야 그러면 이게 거사의 신호로 서로가 약속을
하고 거사를 일으킵니다 최초의 미국 공사 초대 주조선 미국 공사 후트
후트 공사의 어 그 그 보고서입니다 만찬이 끝나갈 때쯤 누가 불이 났다고
소리치자 거의 모든 참석자들이 테이블에서 일어나 불을 보기 위해서 밖으로 나가거나 창가로 갔습니다 불은
상당히 가까운 곳에서 일어난 듯 했습니다 저는 긴급한 상황이 아닌 듯하여 김홍 집을 비롯한 다른
참석자들과 다시 테이블로 돌아갔습니다 바로 그때 민영익이 다시 만찬장으로
되돌아왔습니다 그는 일곱 여덟 곳에 끔찍한 상처를 입고 흐른 피로 얼굴과
못이 범벅이 되어 왔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정변 불이야 했을 때 소리가 났을 때 민영익이 아이 내가 나가
보겠다고 다들 앉아 있으라 그러고 바깥에 나갔는데 그때 정파를 칼에 맞아 뜬 겁니다 모두가 혼비 백산
했습니다 조선의 관리들은 모두 관복을 벗어 던지면서 정원으로 나갔지만 그곳은 이미 군인들과 하인들로서
있었습니다 그 순간 총성이 울리자 모두 뒷담을 넘어 도망쳐 버렸습니다 민영익이 들어왔을 때 저는 그를
멜렌도 그의 도움으로 편한 자세에 앉혔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미국인
의사인 알렌 박사를 부르도록 하였고 멜렌도 그에게 부상당한 민영을 맡기고
스커더 씨와 통역관을 데리고 공사관으로 돌아왔습니다 지금이 순간 암살 시도가 개인적인 원한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정치적인 목적이 있었는지 정확하게 알게 어렸습니다 각종 유원 비어가 난무하고 있습니다
가장 최근의 유원 비원은이 사태가 민영익이 미국으로부터 돌아온 후 추진한 개혁들이 격분한 남부의 한
도의 유생들이 저질렀다고 합니다 저는 며칠이 지나면 보다 확실한 정보를 드릴 수 있을 겁니다 라면서 정변이
일어납니다 그렇지만 어 아시듯이 정변은 3일 만에 어 실패로
돌아갑니다 과감하게 정변에 개입을 하면서 어 정변 파들을 진압을
해버리는게 어 그 원세계 따라서 완전히 정변은 그 실패로 돌아가고
정변을 주도했던 여섯 명 정도만 간신히 탈출을 해서 또 일본으로
망명길에 떠나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다 잡혀서 죽습니다 그래서 그때 풀크
소이가 갑신정변에 실패해 잡힌 사람들의 어
그 처형 장면을 이렇게 보고서에 묘사했습니다 정변에 연료 되던 12명에 대한 고문과 재판은 27일에
종결되었고 그들은 모두 사형 언도를 받았다 여섯 명은 이곳 공사 관으로부터 불과 몇 백 야드 떨어진
곳에서 처형되었고 다섯 명은 도성에 대로에서 28일과 29일 처형되었다
그들은 길바닥에 엎드렸던 여섯 차례 내지 열 차례 내려침 목을 잘랐다
그들의 긴 머리체를 밧줄에 묶어서 상처가 열리게 하였다 시체는 모두 사지를 절단하고 길가에 며칠 동안
내버려 두었다 이렇게 해서 어
조선의 인물들이 인사들이 일본을 보고 오고 근대화의
필요성을 절감을 하고 독립 국가의 건설의 필요성을 절감을 한 인사들이
정변을 일으켜 보지만 완전히 실패로 돌아갑니다 비록 이때 체포는 면에서
간신이 면에서 일본으로 어 망명을 가지만이 사람들의 그다음의 삶은 참
이때 일본으로 건너가서 다시는 조선 땅을 밟지 못합니다
1894년 10년 뒤에 그죠 상해에서 홍종우 암사 당하면서 다시는 고국
당을 밟지 못합니다 그리고 일본에가 있는 10년 동안에도 끊임없이 조선 조정에서 고정하고 미미가 보낸 자객들
어 그 시달립니다 특히 서재필 아고 어 범은 삼족을 멸 여러분
적들은 을 했습니다 홍영식 어 본인이 그 청구한
피살이 되고 아버지 홍순목 영의정까지 했던 그 홍순목 자기 손자 홍영식
갓난 아들을 독약을 매겨서 죽이고 자기도 자결을 하고 홍영식 부인도 다
자결을 시킵니다 서강범 다 자결을 하고 부인은 노비로 옥에 감옥에
집어넣어서 노비로 전락을 하는데 나머지 가족들은 다 몰살이 되고 서재필은
부인은 독약을 막고 자결을 합니다 그런데 갓난 아들이 있었는데 독약을
먹은 엄마의 젖을 먹다가 죽었다는 설도 있고 아니면 아무도 돌보지 않아서 그냥 굶어 죽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서 정말로 처참한 그 말로를 어 그 개화파가 맞게
됩니다이 개화이 개화를 거부했던
이런 사람들에 대한 원한은 아주 사무쳤다 10년 후에 청일 전쟁이
일어나면서 다시 갑보 영장이라는 근대화 어 그 작업이 일어날 때 다시
돌아옵니다 박용효 어 윤치호 서재필 이런 사람들이 돌아와서 다시 근대화를
해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우리가 알고는 갑오 경장과 갑보 개혁 그리고 독립신문 독립협회 이런 운동들이
벌어집니다 그렇지만 최초의 개화를 시도했던 조선의 개화파는 완전히
실패합니다네 지금까지 그 조선의 계파들이 왜 개국을 하고 일본으로부터
그래도 많은 거를 배우려고 했었고 그리고 많은 시도가 있었지만 궁극적으로 어 실패할 수밖에 없었고
그 말로가 얼마나
처참했지만 마지막 부분에 올해 마지막 부분에 우종국 낙성 식에서 그 후트
공사가 한 얘기를 쭉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말씀을 드렸지 않습니까 그런데 바로 그때에 그 칼을 맞은
민영익을 누가 살려 주냐는 그 직전에 미국
알렌이 조선에 가서 의사 노릇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알렌이 그
거기서 칼을 맞은 민영익을 살려주는 거고 그 민영익을 살려 줬기 때문에
하고 고정이 너무나 고마워서 알렌 보고 뭘 원하냐 그랬더니 알렌이 병원을 열게 해
주십시오 해서 광원이 열립니다 그래서 급격하게 개신교 기독교가 들어오게
되는 겁니다 놀라게 한쪽에서는 친일 개화파가 몰락하는 그 순간이 어떻게
보면 또 기독교가 뿌리를 내리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는 순간이었기
때문에 역사가 그래서 재밌있고 중요합니다 그 부분을 다음 시간에 어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통해서 한국인의 탄생을 살펴보는 한국인의 탄생 오늘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 다시 뵙겠습니다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개화파는 왜 조선의 근대화에 실패했을까?> 요약 및 평론

1. 내용 요약


강좌 8회에서 함재봉은 강화도 조약 이후 개항장 부산의 물리적 변화, 승려 이동인과 2차 수신사 김홍집의 접점, 그리고 청나라의 종주권 행사와 민씨 정권의 보수화에 맞서 조급하게 정변(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참담하게 몰락한 친일 개화파의 형성과 실패 과정을 추적한다.

(1) 개항장 부산의 변화와 이동인의 활동


부산의 근대적 재편:


1876년 개항 이후 부산 외관의 철조망이 철거되고 일본 상인들과 기업(미츠비시 상사)이 들어서며 근대 도시로 탈바꿈했다. 오쿠라 기하치로는 정가표(전가지)를 도입하여 상거래를 개혁했고, 1877년 설립된 재생의원은 서구식 의료 기술이 이식된 최초의 근대식 병원 역할을 했다.


이동인의 밀항과 2차 수신사 김홍집:


범어사 승려 이동인은 동본원사 부산별원에서 서구·일본의 정보를 접한 뒤, 김옥균·박영효 등의 지원을 받아 일본으로 밀항하여 서구 외교관(사토 등) 및 후쿠자와 유키치와 교류했다. 1880년 2차 수신사로 온 김홍집을 만난 이동인은 제물포(인천) 개항의 필요성을 설득하여 귀국 후 통리기무아문 설치(1881년)와 인천 개항을 이끌어냈으나 곧 암살당했다.

(2) 중국의 개입, 후쿠자와 유키치, 그리고 개화파의 조급함

청나라의 전략(조선책략)과 이모군란:


청나라의 이홍장과 황준헌은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조선책략>을 통해 미국 등 서구 열강과의 수교를 조선에 적극 권했다. 1882년 이모군란이 터지자 청나라는 대원군을 압송하여 민씨 정권을 복원시킨 뒤 종주권을 더욱 강화하며 조선의 내정을 간섭했다.


후쿠자와 유키치와 문명개화론:


후쿠자와는 신사유람단과 윤치호, 유길준 등 조선 유학생들을 격려하며 한글·한자 혼용을 통한 신문(한성순보) 발간과 계몽을 지도했다. 그러나 박영효가 한성부윤에서 해직되는 등 민씨 정권과 친청파의 압박으로 개화 사업이 차단되자 개화파의 입지는 급격히 위축되었다.
(3) 갑신정변(1884년)의 파국과 기독교의 전래

갑신정변의 발발과 실패:


청나라의 구속에서 벗어나 독립국을 세우고자 했던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재필, 서광범 등은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낙성 연회를 기해 정변을 일으켰다. 그러나 원세개(위안스카이)가 이끄는 청군의 개입으로 정변은 '삼일천하'로 끝났고, 정변 주도자들은 일본으로 망명했으나 남아있던 가족들은 삼족이 멸하는 처참한 비극을 맞이했다.


역사의 역설(알렌과 기독교의 전래):


정변 과정에서 칼을 맞아 중상을 입은 민씨 일가의 핵심 민영익을 미국인 의사 알렌(Horace N. Allen)이 치료해 살려냈다. 이에 고종과 민씨 일가가 감복하여 왕실 병원인 광혜원(제중원)을 설립하도록 허가함으로써, 친일 개화파가 몰락한 바로 그 순간에 <친미 기독교파> 정체성이 본격적으로 한반도에 뿌리내리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2. 평론: 급진적 선각자의 비극과 역사적 반사이익

강좌 8회는 개화파를 단순한 '친일 역적'이나 '위대한 혁명가'라는 극단적 이분법으로 보지 않고, 체제 변혁을 향한 열망과 현실적 기반의 부재가 초래한 문명사적 비극으로 입증한다.

첫째, 개화파의 사상적 기원과 민중적 기반의 부재를 정밀하게 짚어냈다.

개화파가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삼아 '청나라로부터의 독립'과 '공화정/근대화'를 꿈꿨으나, 대중적 지지 기반 없이 극소수 엘리트의 위로부터의 쿠데타(정변)에 의존했던 구조적 한계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민중을 계몽하고 설득하는 장기적 과정(신문 발간, 교육)이 보수 파벌에 의해 차단되자 조급하게 무력에 의존했던 점이 결국 파국을 불렀음을 잘 입증한다.

둘째, '독립'이라는 개념의 역사적 맥락을 명확히 했다.

오늘날 '독립'이라 하면 주로 일제 강점기에서의 독립을 떠올리지만, 19세기 말 개화파가 부르짖은 독립은 수백 년간 한반도를 짓눌러온 <중국의 종주권(속방 지위)>으로부터의 탈피였음을 사상사적으로 명확히 정리했다. 이는 대한민국이라는 근대 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청일전쟁과 갑신정변이 지닌 성격을 새로이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셋째, 개화파의 몰락과 기독교 전래가 맞물리는 역사의 '연쇄 반응'에 대한 통찰이다.

갑신정변의 피비린내 나는 비극 속에서 민영익의 자상(刺傷)을 치유한 알렌의 광혜원 설립이 개신교 프론티어 정체성의 기원이 되었다는 연결 고리는 매우 인상적이다. 한 정체성(친일 개화파)의 참패가 다른 정체성(친미 기독교파)의 부상을 이끄는 인과적 톱니바퀴를 보여줌으로써, 역사가 단선적 진보가 아닌 복합적 인과율로 작동함을 증명한다.

결론적으로,

함재봉의 8회 강연은 조선의 근대화를 이끌려 했던 초기 개화파가 체제 내부의 보수성과 청나라의 간섭이라는 벽을 넘지 못하고 처참하게 몰락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들의 실패는 사라짐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한반도에 새로운 가치관(개인, 자유, 기독교 문명)을 이식하는 거대한 문명적 대전환의 서막이 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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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8회

<개화파는 왜 조선의 근대화에 실패했을까>

요약

• 이번 강의는 강화도조약 이후 조선이 일본과 서양의 문물을 접하면서 개화파가 어떻게 등장했는지, 그리고 이들이 왜 조선의 근대화에 실패했는지를 설명한다. 함재봉은 개화파를 단순한 친일 세력이 아니라 조선을 살리기 위해 새로운 국가 모델을 찾으려 했던 정치·지식 집단으로 평가한다.

• 개항 이후 부산에는 일본인 거류지가 생겼고, 상점·병원·학교·도로 등 근대적 시설이 빠르게 들어섰다. 조선인들은 일본 상품과 생활방식을 직접 접하면서 외부 세계의 변화를 체감하기 시작했다. 부산은 조선인에게 근대 문명을 처음 대면하는 창구가 되었다.

• 조선은 일본에 수신사를 파견하였다. 김기수와 김홍집 같은 관리들은 일본의 철도, 공장, 학교, 군대와 도시를 관찰하고 귀국했다. 김기수는 일본의 발전에 놀랐지만 유교적 세계관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반면 김홍집은 보다 적극적으로 개화의 필요성을 받아들였다.

• 일본에서 청나라 외교관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전달받은 김홍집은 이를 조선 정부에 소개했다. 《조선책략》은 러시아의 남하를 가장 큰 위협으로 보고, 조선이 중국과 친하고 일본과 결속하며 미국과 연합해야 한다는 ‘친중국·결일본·연미국’ 전략을 제시했다.

• 《조선책략》은 조선 조정에서 큰 논쟁을 일으켰다. 개화파는 국제정세에 맞춰 외교관계를 넓혀야 한다고 보았지만, 위정척사파는 서양과 일본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을 유교질서와 국가 정체성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했다.

• 개화파는 청나라와 일본에 유학생과 조사시찰단을 파견하고, 신식 군대와 행정기관을 만들려 했다. 별기군 창설, 통리기무아문 설치, 신식 교육과 기술 도입 등이 그 시도의 일부였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은 재정과 인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추진되었고, 구식 군대와 보수층의 반발을 불러왔다.

• 1882년 임오군란은 개화정책의 취약성을 드러냈다. 신식 군대인 별기군은 우대받은 반면 구식 군인들은 급료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다. 분노한 군인과 도시 빈민이 봉기하면서 일본 공사관이 공격받고, 민씨 정권도 위기에 빠졌다.

•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는 군대를 보내 조선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했다. 흥선대원군은 청나라로 끌려갔고, 원세개를 비롯한 청의 관리들이 조선 정치에 깊이 개입했다. 개화파가 기대했던 자주적 개혁은 청의 간섭 아래 더 어려워졌다.

•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 급진개화파는 점진적 개혁으로는 조선을 바꿀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들은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모델로 삼아 신분제 철폐, 재정 개혁, 군주권 제한, 근대 관료제와 교육제도의 도입을 추진하려 했다.

• 1884년 갑신정변은 이들의 가장 결정적인 시도였다. 급진개화파는 일본 공사의 군사 지원을 받아 정권을 장악하고 개혁정강을 발표했다. 그러나 청군의 개입으로 정변은 불과 3일 만에 붕괴했다.

• 함재봉은 갑신정변 실패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으로 군사력과 정치적 기반의 부족을 든다. 개화파는 소수의 엘리트였고, 농민·상인·도시민 등 폭넓은 사회세력의 지지를 확보하지 못했다. 또한 일본군에 의존했기 때문에 자주개혁이라는 명분도 약화되었다.

• 개화파의 전략에는 또 다른 한계가 있었다. 일본이 조선의 독립과 근대화를 순수하게 지원할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일본은 자국의 국익과 세력 확장을 우선했다. 개화파는 일본의 발전을 배우려 했으나 일본 제국주의의 가능성을 충분히 경계하지 못했다.

• 갑신정변 이후 김옥균은 일본으로 망명했지만 일본 정부의 보호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는 결국 상하이에서 암살되었고, 시신은 조선으로 보내져 능지처참되었다. 개화파와 그 가족들 역시 처형·투옥·연좌제의 희생자가 되었다.

• 서재필은 미국으로 망명해 의학을 공부한 뒤 귀국하여 《독립신문》을 창간했다. 그는 한글과 쉬운 문장을 사용해 일반 백성에게 근대적 시민의식과 독립 개념을 전달하려 했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는 개화사상을 소수 엘리트의 논의에서 대중적 정치운동으로 확장한 시도였다.

• 그러나 독립협회도 황실과 보수세력의 견제를 받아 해산되었다. 함재봉은 조선의 개화파가 여러 차례 개혁을 시도했지만 왕권, 청나라의 간섭, 위정척사파의 반발, 일본의 전략적 이용, 부족한 대중 기반 때문에 실패했다고 정리한다.

• 결론적으로 개화파의 실패는 단순히 이들의 무능 때문이 아니었다. 이미 약화된 국가재정, 외세의 경쟁, 강한 보수질서, 근대적 교육과 조직의 부족 속에서 소수 지식인이 너무 많은 변화를 짧은 시간에 이루려 했던 구조적 실패였다. 그럼에도 이들이 만든 신문, 학교, 정치개혁론과 독립사상은 이후 한국 근대국가 형성의 중요한 유산으로 남았다.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8  개화파는 왜 조선의 근대화에 실패했을까? 

평론

이 강의는 개화파를 단순한 친일파나 실패한 쿠데타 세력으로 규정하지 않고, 조선의 생존과 근대화를 모색한 선구적 집단으로 복원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특히 《조선책략》, 임오군란, 갑신정변, 독립신문을 하나의 개화운동 계보로 연결한 설명은 명료하다.

다만 개화파의 실패를 보수세력과 대중 기반 부족으로 설명하면서, 개화파 자체의 엘리트주의와 일본 의존, 농민 문제에 대한 무관심을 더 비판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다. 갑신정변의 개혁정강이 진보적이었다 해도 외국군에 기대어 정권을 바꾸려 한 방식은 큰 정치적 약점이었다. 전체적으로는 개화파의 역사적 공헌을 적극적으로 재평가하면서 이후 ‘친일개화파’의 형성을 이해하게 하는 핵심 강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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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주제에 대한 더 완벽한 연구 책을 추천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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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진님, 함재봉 교수의 강의에서 지적된 개화파의 한계, 즉 엘리트주의, 외세(일본) 의존성, 그리고 농민 및 민중 기반의 부재를 훨씬 실증적이고 다각도로 깊이 있게 파고든 대표적인 연구서들을 추천해 드립니다.

언급하신 평론의 문제의식을 충실하게 파악하는 데 가장 적합한 학술서 세 권입니다.

1. 실증과 민중사적 분석의 최고 권위서

<갑신정변 연구: 조선의 근대적 개혁구상과 민중의 의식>

  • 저자: 박은숙

  • 출판사: 역사비평사

추천 이유

갑신정변과 개화파 연구에서 가장 독보적인 실증 연구서입니다. 함재봉 교수의 강의가 개화파의 구상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 책은 개화파 개혁의 내용(정령 14개조)과 한계, 그리고 이에 대한 민중의 적대적 반응을 사료로 정밀하게 입증합니다.

김옥균 등 상층 엘리트뿐만 아니라 정변 행동대원으로 참여한 하층 민중의 동기, 그리고 '위로부터의 개혁'이 왜 일반 농민과 민중에게 배척당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명확하게 밝혀줍니다. 개화파의 엘리트주의와 민중 기반 부재라는 평론의 지점을 가장 확실하게 보완해 주는 책입니다.

2. 개화사상의 계보와 구조적 한계 규명

<초기 개화사상과 갑신정변 연구>

  • 저자: 신용하

  • 출판사: 지식산업사

추천 이유

박규수, 오경석, 유홍기에서 시작된 초기 개화사상이 어떻게 형성되고 급진 개화파로 이어졌는지 계보를 체계적으로 추적한 고전적 학술서입니다.

개화파의 근대화 구상이 지닌 진보성과 동시에, 농민 문제와 같은 사회경제적 기반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 사상적 한계, 그리고 정변이라는 폭력적·외세 의존적 수단을 택하게 된 내적 논리를 사회학적·역사학적 관점에서 철저하게 분석합니다.

3. 입체적 입적·외교 문서 재구성을 통한 평가

<갑신정변 회고록>

  • 편역자: 신복룡

  • 출판사: 풀빛 (또는 지식산업사)

추천 이유

갑신정변 당시 현장에 있었거나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조선, 일본, 청나라, 미국, 독일 관계자 16명의 기록과 외교 문서를 모아 편역한 책입니다.

개화파 인물들(김옥균, 박영효, 윤치호 등)의 주관적 회고뿐만 아니라, 열강 외교관들의 냉혹한 시선을 동시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개화파가 기대고자 했던 일본의 열강적 속셈과, 외세에 의존한 쿠데타가 가질 수밖에 없었던 정치적 취약성을 객관적인 1차 사료를 통해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약 및 일독 순서 제안

  • 개화파와 민중의 관계, 개혁안의 실체를 가장 정교하게 파악하고 싶으시다면 박은숙의 <갑신정변 연구>를 가장 먼저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 이후 1차 사료를 통한 열강의 외교적 맥락을 확인하시려면 신복룡 편역의 <갑신정변 회고록>으로 시야를 넓히시는 것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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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재봉의 강의보다 더 완전한 설명을 원한다면, <개화파를 영웅적으로 복권하는 책 한 권>보다는 서로 다른 관점의 책을 함께 읽어야 합니다. 개화파의 실패는 단순히 “보수파가 강했고 민중이 준비되지 않았다”는 것으로 설명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핵심적으로는 다음 다섯 문제를 함께 봐야 합니다.

<개화사상의 형성>, <갑신정변의 정치적 방식>, <청·일 제국주의의 경쟁>, <농민과 향촌사회의 반응>, <개화파가 친일개화파로 분화되는 과정>입니다.

가장 먼저 추천할 책

1. 신용하, 《초기 개화사상과 갑신정변 연구》

이 주제에 가장 직접적으로 대응하는 한국어 연구서입니다.

신용하는 개화파를 단순한 친일파로 보지 않고, 실학에서 초기 개화사상으로 이어지는 사상적 계보와 갑신정변의 근대국가 구상을 적극적으로 평가합니다. 동시에 개화파의 조직 기반, 사회계층적 성격, 정변의 준비 과정과 실패 원인을 구체적으로 검토합니다. 신용하의 대표 저작 가운데 하나로도 확인됩니다.

함재봉 강의와 비교하면 다음 장점이 있습니다.

  • 개화파의 사상을 몇몇 선각자의 아이디어가 아니라 사회사적으로 설명합니다.
  • 갑신정변의 14개조 정강과 개혁 구상을 구체적으로 분석합니다.
  • 개화파를 옹호하면서도 일본군 차용과 민중 기반 부족을 실질적인 실패 원인으로 다룹니다.
  • 실학―개화사상―갑신정변이라는 한국 내부의 사상적 연속성을 강조합니다.

다만 신용하 역시 갑신정변을 <자주적 근대화운동>으로 높이 평가하는 편입니다. 따라서 개화파의 엘리트주의와 민중 배제까지 비판적으로 이해하려면 아래의 책들을 함께 읽어야 합니다.

<한 권만 고른다면 이 책이 가장 직접적인 선택입니다.>


2. 이광린, 《개화파와 개화사상 연구》

한국 개화사 연구의 고전입니다. 1991년에 단행본으로 출간된 판본이 확인되며, 현재는 품절 상태여서 도서관이나 중고서점에서 찾아야 할 가능성이 큽니다.

이 책의 강점은 개화파를 하나의 동질적 집단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박규수·오경석·유홍기 등의 초기 개화사상에서 김옥균·박영효·홍영식 등의 급진개화파, 김홍집·김윤식 계열의 온건개화파에 이르기까지 인맥과 사상적 분화를 추적합니다. 따라서 함재봉 강의에서 비교적 단순하게 연결되는 다음 계보를 더 세밀하게 볼 수 있습니다.

박규수와 북학파
→ 초기 개화파
→ 급진개화파와 온건개화파의 분열
→ 갑신정변
→ 갑오개혁과 독립협회
→ 친일개화파와 애국계몽파의 분화

이 책을 읽으면 <개화파는 왜 실패했는가>라는 질문이 사실은 다음 질문으로 바뀝니다.

<어떤 개화파가, 어느 시점에서, 누구와 연합하거나 결별하면서 실패했는가?>

개화파를 하나의 집단으로 묶는 함재봉식 설명을 교정하는 데 중요한 책입니다.


개화파의 정치적 한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책

3. Vipan Chandra, 《Imperialism, Resistance, and Reform in Late Nineteenth-Century Korea: Enlightenment and the Independence Club》

비판 찬드라, 《19세기 말 조선의 제국주의·저항·개혁: 계몽과 독립협회》

갑신정변만을 다루는 책은 아니지만, 개화파에서 독립협회로 이어지는 근대개혁운동 전체를 분석합니다. 책의 부제가 정확히 <계몽과 독립협회>이며, 19세기 말 한국의 제국주의·저항·개혁을 함께 다루는 연구입니다.

이 책의 핵심 장점은 개화파의 근대주의를 무조건 민주주의로 해석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개화파와 독립협회 인사들은 국민, 교육, 문명, 자주독립을 주장했지만 동시에 다음과 같은 한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 개혁을 위에서 아래로 추진하려 했습니다.
  • 교육받은 엘리트가 국민을 지도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 농민과 도시 하층민의 정치적 자율성을 불신했습니다.
  • 서구와 일본을 문명의 표준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 대중 참여를 요구하면서도 대중의 독자적인 요구가 등장하면 이를 경계했습니다.

따라서 개화파의 실패를 단순히 <대중 기반이 없었다>고 말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왜 그들은 대중 기반을 만들지 못했는가>를 묻게 합니다.

그 답은 상당 부분 개화파 자신의 정치관에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백성은 개혁의 주체라기보다 계몽과 훈육의 대상이었습니다.


국제정세를 이해하기 위한 필수 책

4. Martina Deuchler, 《Confucian Gentlemen and Barbarian Envoys: The Opening of Korea, 1875–1885》

마르티나 도이힐러, 《유교적 신사들과 야만의 사절들: 조선의 개항, 1875–1885》

강화도조약에서 갑신정변까지의 시기를 정밀하게 다룬 고전입니다. 조선 개항 이후 청·일·러시아 등의 경쟁과 조선 유교 정치질서의 대응을 분석한 연구로, 1977년 워싱턴대학교 출판부에서 출간되었습니다.

함재봉의 설명은 주로 조선 내부의 사상 변화에 초점을 맞추지만, 이 책은 개화파가 활동한 구조 자체가 얼마나 제한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개화파는 자유롭게 여러 근대화 모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조선은 다음 세 압력 속에 놓여 있었습니다.

  • 청은 전통적인 종주권을 실질적인 정치·군사적 지배로 바꾸려 했습니다.
  • 일본은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자국의 영향권으로 편입하려 했습니다.
  • 조선 조정은 외세를 서로 견제시키며 왕권을 보존하려 했습니다.

갑신정변은 이 삼각관계 속에서 일어났습니다. 개화파가 일본군을 끌어들인 것은 단순한 개인적 친일 성향만으로 설명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전략적으로 정당화할 수도 없습니다.

도이힐러의 책은 <개화파가 옳았지만 힘이 없어서 실패했다>는 설명보다 훨씬 복합적인 그림을 제공합니다.


5. Kirk W. Larsen, 《Tradition, Treaties, and Trade: Qing Imperialism and Chosŏn Korea, 1850–1910》

커크 라슨, 《전통·조약·무역: 청 제국주의와 조선, 1850–1910》

개화파와 갑신정변을 이해할 때 청나라의 역할을 단순히 <수구적인 종주국>으로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라슨은 후기 청의 조선정책이 단순한 전통적 조공관계가 아니라, 다른 19세기 제국주의 국가들과 유사한 경제·외교·군사적 개입이었다고 주장합니다. 특히 임오군란 이후 청의 조선 개입과 통상특권, 위안스카이의 정치적 영향력을 분석합니다.

이 책을 읽으면 개화파의 반청노선이 단순한 사대주의 반대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청은 군대를 주둔시키고 조선 내정과 경제에 깊이 개입했습니다. 실제로 급진개화파는 청의 개입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근대국가 건설의 선결조건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개화파가 청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본의 힘을 빌렸다는 것입니다.

즉, 갑신정변은 다음 모순을 안고 있었습니다.

<외세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다른 외세의 군사력에 의존했다.>

라슨의 책은 이 모순이 개인들의 판단착오뿐 아니라 청·일 양국의 제국주의 경쟁 속에서 발생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일본 의존의 위험을 이해하기 위한 책

6. Peter Duus, 《The Abacus and the Sword: The Japanese Penetration of Korea, 1895–1910》

피터 두우스, 《주판과 칼: 일본의 한국 침투, 1895–1910》

이 책의 본격적인 서술은 갑신정변보다 뒤인 1895년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나 <왜 개화파의 일부가 결국 친일개화파가 되었는가>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두우스는 일본의 한국 침투가 단순한 군사정복이 아니라 정치·군사적 압력과 경제적 침투가 서로 강화하는 과정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일본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질 때마다 상업·금융·철도·이주 기회가 확대되었고, 경제적 이해관계는 다시 정치적 지배를 정당화했습니다.

이 책을 통해 갑신정변 당시 일본의 지원을 다음과 같이 다시 볼 수 있습니다.

일본은 조선의 근대화를 순수하게 지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조선 개혁세력과의 연대를 일본의 국익, 경제적 진출, 대륙정책에 이용했습니다. 개화파는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근대화 모델로 보았지만, 일본은 점차 조선을 동등한 개혁 파트너가 아니라 침투 대상으로 보았습니다.

따라서 개화파의 일본 의존은 단순한 도덕적 잘못 이전에 <제국주의 국가와 약소국 개혁 엘리트 사이의 비대칭적 동맹>이라는 구조적 문제였습니다.


개화파 이후의 민족주의까지 보려면

7. Andre Schmid, 《Korea Between Empires, 1895–1919》

앙드레 슈미드, 《제국 사이의 한국, 1895–1919》

이 책은 갑신정변 이후 개화 담론이 어떻게 민족주의, 문명론, 국민 만들기로 변형되었는지를 분석합니다.

특히 개화파가 사용한 <문명>, <독립>, <국민>, <국가>, <진보>라는 언어가 중립적인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한국의 근대 민족주의가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면서도 일본과 서구가 제시한 문명 기준을 상당 부분 내면화했다는 것입니다. 이 책은 한국 민족주의 연구에서 중요한 저작으로 평가됩니다.

함재봉은 개화파를 전통적 유교질서에서 근대국가로 넘어가는 선구자로 평가합니다. 슈미드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묻습니다.

<그들이 말한 근대와 문명은 누구의 기준이었는가?>

개화파는 국가의 독립을 추구했지만, 동시에 조선 사회와 민중을 <낙후되고 미개하며 개조되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이러한 시선은 이후 식민지 문명론과도 불편하게 접촉합니다.


개화파의 가장 큰 맹점: 농민 문제

함재봉 강의의 가장 큰 공백은 <동학농민운동>입니다.

개화파의 실패는 개화파와 수구파 사이의 대립만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같은 시대에 농민들은 조세수탈, 토지문제, 지방관의 부패, 외국 상인의 침투에 맞서 스스로 개혁운동을 일으켰습니다.

개화파가 위로부터의 중앙집권적 개혁을 추구했다면, 동학농민운동은 아래로부터의 사회경제적 개혁 요구를 드러냈습니다.

이 점을 보완하려면 다음 책이 필요합니다.

8. 신용하, 《동학과 갑오농민전쟁 연구》

또는 동학농민혁명사에 관한 한국학계의 개설서와 연구서를 함께 읽는 것이 좋습니다.

개화파의 개혁정강은 신분제와 국가재정 문제를 다루었지만 농민들이 절박하게 요구한 토지, 조세, 지방행정, 탐관오리 문제를 조직적인 대중정치로 발전시키지 못했습니다.

갑신정변의 실패 원인으로 공식적인 역사서술도 민중 지지의 결여, 시민계층의 미성숙, 일본군 차용, 정변 수행의 미숙 등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민중이 미성숙했다>고만 설명하면 책임이 민중에게 돌아갑니다.

더 정확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개화파는 왜 농민들의 불만과 개혁 요구를 자신의 정치운동으로 결집하지 못했는가?>

그들은 농민을 조직하지 않았고, 농민의 언어로 개혁을 설명하지 않았으며, 농민과 권력을 나눌 정치적 구상도 충분히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제가 권하는 읽기 순서

한꺼번에 모두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1. 신용하, 《초기 개화사상과 갑신정변 연구》
  2. 이광린, 《개화파와 개화사상 연구》
  3. 마르티나 도이힐러, 《Confucian Gentlemen and Barbarian Envoys》
  4. 커크 라슨, 《Tradition, Treaties, and Trade》
  5. 비판 찬드라, 《Imperialism, Resistance, and Reform》
  6. 피터 두우스, 《The Abacus and the Sword》
  7. 앙드레 슈미드, 《Korea Between Empires》

이 가운데 세 권만 읽는다면 다음 조합이 가장 균형 잡혀 있습니다.

<신용하> — 개화파 내부의 사상과 갑신정변
<도이힐러> — 개항기 조선의 정치외교 구조
<비판 찬드라> — 개화 엘리트의 정치적·사회적 한계

일본 제국주의와 친일개화파의 형성까지 중요하다면 비판 찬드라 대신 피터 두우스를 넣어도 됩니다.

종합 판단

함재봉의 강의는 개화파를 <친일파의 전사>로만 보는 민족주의적 통념을 교정한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반작용으로 개화파를 지나치게 선구적인 자유주의 근대화 세력으로 이상화할 위험도 있습니다.

더 완전한 연구는 개화파를 다음과 같이 보아야 합니다.

개화파는 조선의 독립과 근대국가 건설을 진지하게 추구한 선구적 엘리트였다. 그러나 그들은 소수 중앙 엘리트에 머물렀고, 농민과 도시 민중을 정치적 주체로 조직하지 못했다. 청의 지배를 벗어나려다 일본의 군사력에 의존했으며, 일본의 근대화를 모방하면서 일본 제국주의의 성격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다. 그들의 개혁은 내용 면에서는 급진적이었지만 방법 면에서는 쿠데타적이었고, 국민국가를 지향하면서도 실제 국민을 만들어낼 사회적 연합에는 실패했다.

따라서 개화파의 실패는 <너무 앞서갔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사회적 기반 없는 엘리트 근대화, 외세에 의존한 자주독립, 민중을 배제한 국민 만들기라는 내부 모순 때문에 실패했다>고 보는 것이 가장 설득력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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