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민중은 마침내 비참의 공동체가 되었다 [인문견문록] <식민지 트라우마>·<한국인의 탄생> 김창훈 칼럼니스트 | 기사입력 2024.08.10.
한국은 빛과 어둠이 동시에 강한 사회다. 수준 높은 문화상품으로 세계의 찬사를 받지만 그 상품의 내용은 어두움 투성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상품이었던 기생충, 오징어게임, 더글로리 셋 모두가 빈부격차, 폭력과 뒤틀린 욕망이 투영된 사회를 묘사한 것이다. 한국의 성공의 이면에는 어두움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한국 사회를 직조해낸 빛과 어둠의 기원을 찾아나선 책이 있다. 전 성공회대 교수 유선영의 <식민지 트라우마>(유선영 지음, 푸른역사 펴냄)이다.
저자는 책을 쓰게 된 계기가 "왜 우리는 이렇게 살고 있는가?"란 질문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사회 모든 부문에 침투한 권위주의, 부정과 부패, 국가와 제도에 대한 국민의 불신, 학벌주의와 서열주의, 한 인생의 성공이 물질로 환전되는 물질주의, 경쟁위주의 사교육, 성형한국의 외모주의, '갑질'이 만연한 폭력과 착취의 아비투스에 시선이 머물렀으며 의문은 힘을 얻었다."(상기책 인용 인용미기재시 동일) 어느 사회에나 권위주의, 부정부패, 서열주의, 폭력은 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그 양상이 다르다. 유선영은 먼저 프랑스 사회학자 부르디외의 아비투스 개념을 소개한다. 아비투스란 특정한 환경과 조건에 의해 형성된 성향이나 사고, 인지, 판단과 행동의 체계를 의미하는 개념이다. 한 사회의 사람들이 가진 독특한 감정구조 즉 아비투스가 한 사회를 특정한 형태로 주조한다. 한번 형성된 아비투스는 특별한 계기를 만나 변화하기 전까지 지속된다. 유선영은 한국인의 감정의 기원으로 일제강점기 전후를 주목한다.
비교적 안정적 사회를 오래 유지했던 조선이 급격히 와해된 것은 서세동점이란 국제적 흐름 때문이었다. 이런 세상에서 한국인이 제일 먼저 맞닥뜨린 감정은 '업수이여김'이었다. 19세기말 독립신문을 만들고 독립협회를 주도하던 서재필은 미국으로 추방당하게 된다, 그는 떠나기 전 대중을 향해 고별연설을 한다. "나라를 부강케 하고 용맹한 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죽기를 작정하고 앞으로 나아가 세계 만국에 동등 대접을 받고 다시는 외국 사람들에게 업수이 여김을 받지 말지어다." 그는 눈물에 목이 메어 연설을 다 마치지 못했다. '업수이여김'이라는 감정은 조선 민족의 일상 경험으로부터 생겨난 것이다. 일본의 조선지배가 본격화된 이후 일본 경찰의 조선인에 대한 폭력과 모욕은 흔한 일이었다. 그야말로 경찰은 무소불위의 존재였다. 경찰의 폭력은 반일혐의가 있는 이들에게만 향하지 않았다. 특히 위생행정을 핑계로 폭력은 불특정 다수 대중을 향했다.
총독부 산하 경무국 소속 위생경찰의 활동에 대한 유선영의 설명이다. "일제는 식민지민의 일상, 신체, 의식주, 생활방식을 규율하고 직간접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합리화,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근대적 위생 개념·제도·담론을 활용했다."
문제는 위생경찰의 활동이 지극히 폭력적이었던 것에 있다. "청결을 빌미로 매년 몇 차례 정기적, 부정기적으로 농민에게 가하는 구타와 모욕은 다른 경관이나 헌병이 인민을 억압 멸시하는 정도 이상으로 감정을 상하게 했다.", "여자, 노인, 아이 할 것 없이 경찰의 매질, 구타, 무시와 조롱, 협박으로 공포 분위기가 연출되는 것이 청결검사, 검병 호구조사였다.
그러나 두려움보다 더 괴로운 것은 일본인 경찰과 조선인 순사들이 한집안의 어른인 노인을 자식들 앞에서 쥐어박고 더럽다고 비난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특히 일상의 청결상태를 순사에게 검사받는 과정은 말 그대로 모욕의 시간이었다." 현장에서 경찰의 재량권은 무제한에 가까웠기에 70대 노인이나 부녀자를 두들겨 패는 것은 비일비재했다. 폭력을 당하고도 항의 한번 못하고 그들에게 음식을 접대하거나 뒷돈을 바쳐야했다. "1924년 함경남도 홍원에서는 일본인 순사부장이 추계청결을 잘못했다고 한마을 40여 가구의 호주를 모두 구타했으며 칼을 휘둘러 상해를 입히기도 했다." 칼을 휘두른 경찰에게 내려진 처분은 고작 '면직'이었다.
위생이 목적이라기 보다 조선인을 폭력에 순치시키는 것이 더욱 중요했다.
총독부는 조선인들을 보호하고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만들었다면서 '경찰범처벌규칙'을 공포했다. 87개 항의 행위를 규정했는데 이중 1항의 요주의자가 생업없이 각 지방을 배회하는 자 즉 '부랑자'였다. 87개나 되는 항목은 거의 모든 측면에서 조선인을 전지적으로 감시할 수 있게 만들었다. 법령위반자에게는 일본에서는 벌금이 주였으나 조선에서는 태형(매질)과 구류처분이 많았다. 1920년 태형이 폐지될 때까지 매해 3~4만 명의 조선인이 경찰에게 매질을 당했다.
'부랑자'라는 명목으로 특정한 범죄행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 일본은 '풍속경찰'이라는 직분을 만들어 요리집, 매음장, 예배소, 신문과 출판물도 풍속관리대상으로 관리했다. 특별한 곳도 아니었다. 연극장에 모인 관중조차도 수시로 단속의 대상이 되고 체포되었다. 체포되어 매질을 당하고 길거리에서 포승줄에 묶인 채 끌려다녔다. 레닌 추도식을 조직한 진보조직의 청년들도 부랑자로 지목되어 처벌되었다. 모든 조선인이 경찰 폭력의 대상이 되었다.
아무런 범죄요건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행해진 풍속경찰에 의한 단속은 숨겨진 의도가 있었다. 잠재적 불안요소가 될 인물들을 부랑자로 호명하며 처벌하는 것은 적지 않은 효과를 가져왔다. "우선 부랑자는 일본이 조선을 식민화해야 하는 이유로 내세워 선전했던 조선 민족의 야만성과 열등성을 방증하는 상징적 존재들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구악과 오랜 적폐인 상류층 부랑자를 단속하고 징치하는 총독부는 풍속교화와 민족성제도라는 문명화 사명을 실행하는 것으로 포장될 수 있었다." 자신들의 행위를 문명의 세례로 선전하며 폭력을 통해 조선인을 완벽히 순종시키는 것이 일본의 진짜 의도였던 것이다.
모욕을 벗어나기 위해 조선인들은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교육열이 조선 전역을 뜨겁게 달궜다. 조선인들은 근대가 가져온 교육시스템에서 승리해서 자신들이 모욕받아 마땅한 존재가 아님을 증명해야 했다. 또한 모욕의 가해자는 일본이었고 그들은 근대적 물질문명을 상징하는 존재들이었기에 조선인은 물질적 성공을 미친 듯이 추구하기 시작했다. 신분제가 급속히 이완되는 틈을 타 물질적 성취를 통한 신분 상승을 꾀했다. 교육열, 물질숭배 이 모든 것들이 하나처럼 맞물려 있었다. 그러나 모욕감, 수치심이 출구를 찾지 못할 때 자기모멸감은 증폭되었고 타인과 자신을 향한 공격성으로 전변한다.
알제리 혁명전쟁에 참가한 정신과 의사 프란츠 파농은 식민지민의 정신을 분석했다. 파농은 책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프란츠 파농 지음, 남경태 옮김, 그린비 펴냄)에서 식민지민의 피부 아래에는 히스테리 증상인 공격성이 자리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알제리 흑인에게 나타나는 귀신들림과 춤에 대한 열광은 파농에 따르면 공격성의 정신질환적 표출이었다. "장기간 모욕과 폭력에 노출된 사람들은 (중략) 수치감을 극복하기 위해 허세를 부리고 스스로를 과대평가하면서 남과 비교하여 우월하다는 자기확신에 집착하기도 한다." 수치감이 촉발한 장기간의 무력감은 공격성을 강화시킨다. "장기간 무력감을 경험한 사람은 공격적으로 될 여지가 큰데 이는 자신을 무력상태에 밀어넣은 트라우마를 정복하기 위해, 수치심으로 인한 고통을 완화하고 자신의 가치를 증대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기애적 분노에 사로잡혀 공격적 행동을 하는 것이다. 공격성과 순응성은 장기간의 모욕과 수치에 대한 심리적 반응이다."
모욕감과 수치심은 사람을 극단적으로 몰아간다. 수치심을 극복하기 위해 나르시시즘이란 방어기제가 작동된다. 식민지민의 정체성은 현실적 지반을 확보하지 못한 채 흔들린다. 그 흔들림은 마음을 더욱 어수선하게 만든다. 식민지민의 삶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나아지지 않는다. 남은 유일한 길은 스스로를 식민지민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식민지민이 아닌 채 살아가는 것이 열패감에 시달리는 식민지 지식인들의 출구가 된다. 결국 일단의 무리는 정신적 친일파가 된다. 우리의 비참함도 '결국 우리가 못난 탓'이라 생각하는 분열적 정체성을 파농은 식민지형 지식인의 전형으로 보았다.
당대 신문의 사회면은 식민지민중의 비참한 처지를 알리는 기사들로 가득했다. "사회면을 보면서 입게되는 상감(感傷)은 배가 부를 정도로 충분하고도 넘치는 상태였다. 빈민굴, 떼죽음, 파멸해가는 농촌, 학생들의 동맹휴학, 염세자살, 끊이지 않는 검거로 하루하루가 반복되는 '비참한 현실'에 감정을 이입하고 분노하고 좌절하는 고통을 경험하는 일상인 것이다" "사회면은 '항상 검거, 징역, 자살, 기근 등이어서 참혹해서 볼 수가 없는' 식민지 사회의 거울이었다." 서로의 절망과 비참함에 공감하면서 한반도 민중은 마침내 '비참의 공동체'가 되었다.
책을 읽으며 외할머니를 떠올렸다. 어린 시절 필자는 외할머니 손에 자랐다. 외할머니는 "순사 온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어린 나이여서 순사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책을 읽고난 후 식민지 시절을 살아내신 외할머니에게 순사가 어떤 존재였었는지 이제야 이해할 것만 같다. 한반도 민중은 순사라는 괴물에 내맡겨진 수인(囚人)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 시기를 다룬 탁월한 책을 이미 갖고 있다. 최정운의 책 <한국인의 탄생>(미지북스 펴냄)이다. 유선영의 책은 최정운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절창'이다. 절창이되 슬픈 절창이란 의미에서.
책소개 20세기 전반기, 제국 일본을 매개로 혹은 그것을 우회하여 초국적 이동을 생존과 실존의 문제로 선택하게 된 피식민지인 이주자들에게, 일본이 내세운 ‘대동아주의’(大東亞主義)는 제국의 ‘아시아’를 트라우마로 경험하게 했다. 이 트라우마 속에서 피식민인들의 사회관계와 정체성은 산산이 깨어져 나갔다.
성공회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에서 수행한 인문한국(HK) 프로젝트 ‘이동하는 아시아’ 연구의 성과물 중 하나인 이 책 『‘동아’ 트라우마 : 식민지/제국의 경계와 탈경계의 경험들』은, 바로 그와 같은 인식을 바탕으로, 식민지/제국 체제의 아시아인들에게 부과되었던 트라우마적 원경험을 재구성하고 대면함으로써 아시아에 대한 정치적 상상의 회로를 복원하고자 하는 시도로 읽혀야 할 것이다.
글쓴이(수록순) 유선영 : 성공회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HK교수 조정우 : 광운대학교 교양학부 강사 차승기 : 성공회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HK교수 마이클 김(Michael Kim) : 연세대학교 국제학대학원 부교수 이헬렌(Helen Lee) : 연세대학교 언더우드 국제대학 부교수
1부 _ 동아 민족들의 지정학적 배치와 적대의 장치 1장 _ ‘동아’ 트라우마, 제국의 지정학적 공간과 ‘이등신민’의 정치학 _ 유선영 2장 _ ‘척식’이라는 비즈니스?: 식민지 국가기업으로서의 척식회사 _ 조정우
2부 _ 식민지/제국의 역내 이동과 ‘내지’의 구멍들 3장 _ 내지의 외지, 식민본국의 피식민지인, 또는 구멍의 (비)존재론 _ 차승기 4장 _ 지방주의의 역사-지정학?: 식민지 시기 내지 이주 조선인들의 지방주의적 갈등 _ 차승기
3부 _ 아시아 민족들의 혼거와 긴장, 식민지라는 장소 5장 _ 제국의 경계를 재구성하는 관점에서 바라본 식민지 조선의 중국인 이주 노동자 문제 _ 마이클 김 6장 _ 나카지마 아쓰시의 조선소설?: 식민지 도시공간 ‘경성’을 중심으로 _ 이헬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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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P. 10 이 책에 실린 20세기 전반기, 제국 일본을 매개로 혹은 그것을 우회하여 초국적 이동을 생존과 실존의 문제로 선택하게 된 이주자들의 모습과 유형은 제국의 ‘아시아’(‘동아’)를 트라우마로 경험하게 되는 불안정하고 소외되고 타자화된 피식민지인 디아스포라의 모습이다. ‘아시아’를 따옴표 안으로 유보시킬 수밖에 없는 것은 그것이 문화적으로 구성된 정치적 상상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접기 P. 25 20세기 전반기 식민지민의 초국적 이동의 성격은 어떻게 규정될 수 있는가? 분명한 것은 제국, 서구, 메트로폴리스, 산업화와 자본의 이동, 국민국가 프로젝트를 반영한 동화론, 코즈모폴리터니즘, 초국적 디아스포라에 대한 기존의 논의들은 식민 상태의 모국을 떠나 다른 나라로 생활 근거지를 바꾸는 식민적 이동의 특수성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접기 P. 55 일본, 중국, 만주, 조선을 포괄하는 지정학적 권역으로서 동아는 물리적이고 법적인 실체를 갖는 권역이 아니라 제국 일본에 의해 개념화된 관념적 공간이라는 점에서 정치적·문화적·이데올로기적 담론공간이기도 하다. 이 관념적이고 정치적인 공간으로서 동아의 구상이 이념적 및 물질적 형상화를 통해 구체화된 것이 중국 둥베이 삼성 일대를 기반으로 한 만주국(1932~1945)의 건립이다. 접기 P. 103 흔히 전후 동아시아의 경제발전을 ‘국가주도형 경제성장’으로 설명한다. 그 대표적인 국가는 일본, 한국, 대만이라 할 수 있는데, 이 국가들은 모두 일본제국의 주요 구성원이었다. 국가주도형 성장노선에서 국가는 관료기구의 행정력으로 경제발전을 지도했을 뿐만 아니라, 각종 국가기업을 설립하여, 이 국가기업들을 통해 경제정책을 집행하기도 하였다. 접기 P. 133~134 식민지/제국 시기 내지 이주 조선인의 역사는 기본적으로 일본과 조선 사이의 지배/피지배 관계, 또는 차별/저항의 관계 속에서 서술되어 왔다. 이주 조선인 사회의 형성이 일제에 의한 조선 식민지화의 파생물임은 말할 것도 없으며, 따라서 식민지/제국 시기의 내지 이주 조선인 문제를 사고할 때 민족적인 지배/피지배 또는 차별/저항의 관계가 기본 축을 이루는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 기본 축을 망각하고서는 계급적·젠더적 지배/피지배 관계 역시 제대로 사고되지 못할 것이다. 접기 더보기
2013년 현재 성공회대학교 사회문화원 HK교수. Journal of Inter-Asia Cultural Studies 편집위원(현), 인터아시아문화학회 회장(현), 한국문화연구학회 감사(현). 한국여성커뮤니케이션학회 회장(역임), 학술지 ≪언론과 사회≫ 편집장, ≪한국언론정보학보≫ 편집위원 장 및 ≪한국언론학보≫, ≪한국방송학보≫ 편집위원 역임. 주요 저서: ≪한국미디어문화사≫(2007,편저). 한국의 초기영화 관람과 문화적 수용, 식민지 대중가요(신민요)의 잡종화, 초기영화 관객성, 식민지 외화관람과 문화적 실천, 근대적 대중의 형성, 근대주체의 형성, 아메리카나이제이션, 식민지 미국의 헤게모니 등을 분석한 논문이 다수 있음. 접기
조선대학교 국어국문학부 부교수. 일제 말기의 근대비판 언설을 탐구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일제 말 전시체제기의 문학, 사상, 언설을 초경계적 관점에서 연구하는 한편, 식민주의 재생산의 구조 속에서 식민지/제국 체제의 한계 지점을 발견하기 위한 연구에 주력해 왔다. 지은 책으로는 《반근대적 상상력의 임계들》, 《비상시의 문/법》이 있고, 공저로 《‘전후’의 탄생》, 《주권의 야만》 등이 있다. 최근에는 근대 동아시아의 교착된 경험과 글쓰기의 관계를 새롭게 개념화하는 일에 관심을 두고 있다.
출판사 제공 책소개 트라우마로 경험된 제국의 ‘동아’를 넘어서라!! 식민의 역사가 새겨 넣은 아시아 민족들의 분열적 상흔에 직면한다!
이 책 『‘동아’ 트라우마 : 식민지/제국의 경계와 탈경계의 경험들』은 성공회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에서 수행한 인문한국(HK) 프로젝트 ‘이동하는 아시아’ 연구의 성과물 중 하나이다. 자본과 전쟁, 그리고 식민화가 만들어 낸 이동선(移動線) 위에서 아시아 제 민족들에게 강제되었던 이민과 이주의 경험은, 그들에게 제국주의와 식민주의가 만들어 낸 균열과 적대가 중첩된 공간으로서의 아시아를 각인시켰다. 이동하는 주체들의 시좌(視座)에서 보면 아시아는 다양한 주체들에 의해 부단히 재전유되는 복수의 상대적 공간들로 쪼개져 있다. 초국적(transnational) 이동 주체들은 소수민족, 이민, 이주노동자, 불법체류자, 귀환이민, 식민의 위치에서 아시아를 상대화하는, 타자화된 주체들이기 때문이다. ‘이동하는 아시아’ 프로젝트는 이러한 이동을 역사화함으로써 현재의 아시아라는 공간을 상대화하는 한편, 그 안에서 분할되는 복수의 공간들의 관계성을 드러냄으로써 아시아를 새롭게 구성하고자 한다.
인종질서와 민족 간 갈등의 ‘동아’
1931년 7월, 조선 전국은 ‘중국인 대학살’(평양 사건)의 광풍에 휩싸였다. 며칠 앞서 중국 지린성 창춘에서 발생한 이주 조선인과 중국인 농민들 사이의 분쟁(완바오산 사건)을 조선 언론이 ‘중국인에 의한 조선인 상해 사건’으로 오보한 것이 도화선이 되어, 사망자만도 142명에 달한 참극으로 폭발한 것이다. 그러나 그 폭발의 예비와 전개 과정을 살피면서, 우리는 민족 간 갈등을 조장하고 그로부터 이권을 탐했던 진정한 배후, 일본 제국주의에 직면하게 된다. 메이지 유신 이래 아시아의 패권국가로 떠오른 일본은 ‘대동아주의’(大東亞主義)의 이름으로 포장한 제국주의·식민주의의 논리를 내세워 피식민 민족들을 이주와 이동, 이산으로 내몰았다. 이 과정은 피식민지인들의 사회관계와 정체성에 파괴하며 그들에게 깊은 역사적 트라우마(trauma)의 경험을 남겼다. 일본의 정책적 유도와 급박한 생계의 필요로 많은 조선인들은 불가피하게 대륙으로의 이주를 선택했다(이 과정에서 제국의 ‘이민기계’migration machines로 활약한 것이 ‘척식회사’들이었다. 「2장」 참조). 그러나 그곳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일본 제국주의의 주구(走狗)’ 취급이었다. 조선인이 들어온 다음에는 반드시 일본 세력이 따라 들어온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일본의 ‘이등신민’(피식민지인이지만 일등신민 일본인에 버금간다는 의미)인 조선인을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일본 영사관이 설치되고 경찰력이 들어오는 등의 일이 일어났고, 이는 고스란히 현지인의 조선인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졌다. 게다가 조선인들 중 많은 수가 이 이등신민 규정에 편승해 이익을 취했다는 사실이 갈등을 더욱 심각하게 했다. 이에 조선인들에게 ‘둘째가는 악귀’라는 ‘얼궤이즈’(二鬼子)의 호칭이 붙기까지 했다(「서론」과 「1장」 참조). 반대로 중국에서 조선으로 이동해 온 이주민들이 놓였던 상황은 어땠을까? 일제는 막대한 저임금 노동 수요를 창출하는 동시에 ‘동아’를 관통하는 교통망을 지속적으로 확장해 나감으로써 이주 노동자의 순환을 촉진시켰다. 중국과 일본의 사이에 위치한 식민지 조선으로 중국인 노동자 이민이 급증한 것은 당연했다. 이들의 유입으로 인해 조선 노동시장에는 거대한 산업예비군이 형성되어 저임금 구조를 고착시켰고, 타민족 임금노동자 간의 갈등을 고조시켰다. 급기야는 통치 안정화를 위해 조선총독부가 나서 조선으로의 중국 이민자를 규제하는 데에까지 이르게 된다(「5장」 참조). 학살의 광풍은 이처럼 제국주의·식민주의가 각인된 지정학적 장소 ‘동아’(東亞)에서 민족 간 차별과 위계, 분할에 의해 배양된 적대가 분출한 사건이었다.
식민지/제국 체제의 모호한 경계와 그 불안
‘식민지/제국 체제’는 식민지(조선)와 식민본국(일본)이 각각 분할되어 존재하는 국가 단위가 아닌, 비대칭적 위계관계를 내포한 채로 성립하는 하나의 ‘체제’임을 나타내기 위해 제안된 용어이다(「4장」, 172쪽 이하 참조). 이 체제 아래서 식민지는 모호한 위치에 놓인다. 식민본국(내지)의 통치 시스템에 포섭되어 있긴 하되, 동등한 법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조선 총독에 의해 따로 입법 사항이 규정되는 이법(異法) 지역인 외지로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식민지/제국 체제는 근본적으로 차별을 내포한 체제였고, 민족적 배제와 포섭의 정치를 낳는 체제였다. 이 체제 아래서 피식민 민족들은 제국이 부여한 위계질서에 의해 신분과 정체성을 규정받았는데, 또한 그 위계에 의한 분할선도 제국의 필요에 의해 유동하는 것이었다. 대표적 예시가 ‘내선일체’(內鮮一體)라 할 수 있는데, 중일전쟁 발발을 전후해 전시동원 필요가 긴급해지자 행해진 내지/외지 통합 시도가 그 실체였다. 이처럼 경계는 모호하지만 효과에서는 더없이 강력했던 식민지/제국 체제의 내지/외지 차별 구조는, 제국의 외지를 무대로 했을 때는 앞서 보았듯 민족 간 갈등의 씨앗이 되곤 했다. 그렇다면 외지인의 ‘내지 도항’은 어떤 결과로 이어지고는 했을까? 애초에 피식민지인의 내지 이주 유도의 목적이 늘어가는 저임금 노동력 수요의 충당을 위한 것이었으므로, 그것은 우선 “‘농민’에서 ‘노동자’로의, 특히 ‘룸펜 프롤레타리아’로의 이동”(「3장」, 138쪽)을 뜻했다. 이들은 언제나 지독한 생활불안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그럼에도 식민지 생활의 비참함으로 돌아가게 되는 공포에서 자유로워질 수도 없었다. 때문에 “그들은 제국에 동화될 수 없는 비국민/이등신민으로 배치되며, 문명화될 수 없는 야만성과 후진성을 신체에 각인한 인종”(「머리말」, 9쪽)으로 자타에 규정되면서도, 그곳에서 나름의 ‘정주의식’과 이주민들의 생활권(生活圈)을 형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생활 조건이란 그야말로 한계적인 것이자 또한 고립된 것이었기에, 내지 도시의 골목 어딘가에 생겨난 ‘구멍’으로 비유되며 ‘내지 속의 외지’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나아가 내지 안에는 조선만이 아니라 다른 외지 아시아인들(중국인, 대만인, 오키나와인 등)이 유사한 조건에 놓인 채 혼거하고 있었음에도, 그들은 서로 소통하거나 마주볼 수 없었다. ‘동아’ 트라우마는 일본을 통하지 않고서는 대면할 수 없었던 식민지/제국 체제의 ‘배치’의 산물이기도 했던 것이다(「3장」, 160쪽 이하 참조). 이상에서는 외지에서 외지로, 또 외지에서 내지로 이루어진 초국적 이동이 다루어졌는데, 시점을 바꾸어 내지에서 외지로 이루어진 식민자의 이동에도 관심을 기울여 볼 만하다. 경성의 한문교사였던 아버지를 따라와 청소년 시절을 식민지 조선에서 보냈던 나카지마 아쓰시(中島敦, 1909~1942)는 자신의 소설에서, 이주 식민자들이 식민지에서 정복자로 군림하는 동시에 사적인 관계 또는 친교를 통해 피식민지인들과 함께 얽혀 들어간 복잡하고 독특한 내면의 과정을 형상화한다. “특히 식민지 도시 경성은 피식민지인에게는 끝없이 배회하지 않을 수 없는 공간이지만 식민자에게는 일시적인 방황을 통해 성장하게 하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식민자와 피식민지인은 공존할 수 없는 세계로 분열되어 있”음을 그의 소설은 보여 주는 것이다(「6장」 참조 ).
새로운 ‘아시아’를 상상하기 위하여
20세기 전반기, 아시아의 피식민지인들에게 초국적 이동은 제국 일본에 의해 부과된 생존과 실존의 문제였다. 그리고 이런 강제적 이동을 통해 경험된 ‘아시아’의 일상은 식민주의와 제국주의가 각인된 분할선들을 따르거나 가로지르며 형성된 것이었기에, 그 속에서 이주자들은 자기소외와 타자화의 현실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다. 트라우마로 경험된 ‘아시아’라는 정치적 상상의 산물은, 탈식민의 20세기 후반 이후로도 자본·지식·문화의 전 지구화에 대응하는 지역권적 사고를 가로막는 터부로 남았다. 군사·영토 분쟁은 물론이고 경제·문화 영역에서 아시아 민족들 간의 적대가 반복적으로 생산되면서, 대안적 ‘아시아’ 상상을 밀어내고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전면화하는 힘이 강력히 작용하고 있다. 이렇게 “당대에 아시아를 재구성하고자 하는 모든 노력과 시도들을 잡아당기는 퇴행적이고 때로는 파괴적인 힘의 역사가 ‘동아’ 트라우마의 역사”(「머리말」, 10쪽)이다. 이 책 『‘동아’ 트라우마 : 식민지/제국의 경계와 탈경계의 경험들』은 바로 그와 같은 인식을 바탕으로, 식민지/제국 체제에 아시아인들에게 부과되었던 트라우마적 원경험을 재구성하고 대면함으로써 아시아에 대한 정치적 상상의 회로를 복원하고자 하는 시도로 읽혀야 할 것이다.
서양인들은 일제의 식민통치를 어떻게 바라봤을까? 무수천 ・ 2022. 7. 30. 11:00
사실 이때는 제국주의의 시대라 너도나도 식민지 만들겠다고 날뛰던 게 당연시되었고, 그래서 '근대화' 라는 이름하에 식민지 확장을 서로서로 커버쳐주는 분위기도 당연시되었습니다.
조선과 대만을 식민지배하던 일본도 당연히 예외는 아니었죠.
당시 영국, 미국 사람들은 여러 학회나 잡지 기고 등을 통해 일본의 조선 식민지배를 은근히 합리화하곤 했는데, 대표적인 예시는 이렇습니다.
1. 1911년에 알버트 하트라는 사람이 지은 '명백한 동방(The Obvious Orient)' 이라는 책에선 '조선인이 강력한 독립의지를 가졌음에도 식민지배를 하는 건 문제다' 라고 언급했지만 그와 동시에
'그럼에도 일본의 식민지배는 조선에서 가장 선하게 이뤄지는 통치고, 조선인이 역사상 처음으로 좋은 도로와 경찰, 생명과 재산의 보호, 합리적이고 공정한 정부를 갖게 해 주었다'
라고 말하는 등의 이중적인 서술을 보임.
그리고 이 모든 걸 설계한 사람이 이토 히로부미였으며, 그를 죽인 조선 청년(안중근)의 행위는 부당했다고 글을 마침.
2. 3.1운동 9년 후인 1928년에 나온 영국의 한 잡지 기고문은 3.1운동을 '수동적 폭동' 에 불과하다고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서술함.
- 한국인들은 자신들 스스로를 다스릴 정부를 구성할 능력도 없다. - 그러므로 무정부 상태나 독재를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일본과 같은 강대국의 지배가 필수적이다. - 한국인들은 무능한 왕조의 부패와 착취로부터 벗어나 전례없는 평화와 안정을 누리고 있다.
3. 런던경제학교를 창설한 영국의 학자 시드니 웹(Sidney Webb) 부부는 1911년에 조선을 방문하여 총독부에 의해 극진한 환영을 받고 이런 평을 남김. - 일본인은 유달리 깨끗한 민족이나 조선인은 더럽고 구제불능인 민족일 뿐이다. - 이 두 민족은 결코 상호 대등하게 소통할 수 없을 것이다. - 이렇게 답이 없는 조선인들은 오로지 총독부의 식민통치를 통해서만 교정될 수 있다. - 따라서 일본은 조선 통치에 긍지를 가질 자격이 있고, 조선인들은 일본인들의 우수한 지도에 순응해야 한다.
4. 영국 해군 정보장교 킹. 홀(S. King-hall)은 중국 재직 시절 한국의 사정을 이렇게 평함. - 한국인은 대만인 다음으로 동아시아에서 가장 미개한 민족이다. -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상태를 돌아보는 것조차 할 수 없어서 독립 따위는 사치다. - 따라서 일본이 이런 한국인들을 충분히 계몽시키고 난 후에 비로소 독립이든 뭐든 논할 수 있을 것이다.
5. 영국의 여행가 알레인 아일런드(Alleyne Ireland)는 자신의 저서 '새로운 한국(한국 발행명은 '일본의 한국 통치에 관한 세밀한 보고서)' 에서 일본의 식민통치를 극찬했음. - 일본의 반도 통치는, 과거의 통치보다 훨씬 훌륭하다. 행정, 사법, 산업,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진보'가 이뤄지고 있다. - 일본은 조선인들의 교육에 많은 투자를 하였으며, 학교도 계속 늘려갔다. - 또한 비위생적이던 지옥같던 조선의 감옥을 개선했다. 미국 감옥과 비교해도 더 좋을 정도. - 결론적으로 조선인들의 생활 수준은 식민통치 이전보다 훨씬 좋아졌으며, 지금의 조선은 이전과 비교하면 눈에 띄게 번영하고 있다.
물론 3.1운동의 일본의 진압이 폭력적이고 나쁘다는 서술을 하기도 했지만, '만세운동으로는 절대 독립이라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라는 부정적인 서술도 더함.
결말부에 '다른 어떤 강대국의 지원을 받는다 하더라도 절대 일본을 쫓아낼순 없을 것이다' 라고 쐐기를 박는 건 덤.
후일 고려대 총장을 지낸 김준엽은 본 연재를 통해 별도로 다루지는 않았지만, 전체 주제를 관통하는 상징적 인물이다. 평안도 출신의 1920년생 김준엽은 일제강점기 조선인 학병세대로 일본군 학병을 최초로 탈출해 장준하를 이끌어 충칭 임시정부로 인도했고, 해방 직전 광복군 장교가 돼 이범석의 비서로 활동했으며, 전쟁을 치르고 국가를 재건하던 50년대 후반 사상계 그룹의 핵심으로 4·19혁명의 격동기에 ‘사상계’ 주간으로 여론을 주도했다. 요컨대 김준엽은 한국의 ‘정통’ 우익을 대표한다. 김준엽은 스스로도 정통 민족주의자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가 봤을 때 해방 후 대한민국의 집권세력은 온통 친일파 일색이었다. 그는 김영삼 정부가 출범한 해인 1993년 8월 ‘한국일보’와 인터뷰에서 한국 현대사를 돌아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부끄러운 것은 광복 후 친일파들이 활개를 치며 살게 했다는 것입니다.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은 가난에 허덕였으나, 친일파들은 일제하에서 쌓은 배경으로 계속 잘살았습니다. 이런 풍토에서 누가 역사를 두려워하고,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정의와 도덕을 생의 지표로 삼겠습니까. 민족을 배반한 것이 죄가 안 되고 부끄럽지 않은 나라에서 다른 무엇이 죄가 되겠습니까.” 이런 김준엽의 언급은, 평생의 동지 장준하가 박정희와 대결할 때 줄곧 광복군 출신인 자신과 일본군 장교 출신의 박정희를 대조했던 이유를 이해하게 해준다. 그런데 친일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먼저 일제강점기를 통과한 사람들의 나이를 살펴보자. 일제강점기 사회활동을 시작했던 지식인 엘리트 가운데 엄밀한 의미에서 ‘친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드물다. 연령대로 봤을 때 그 경계는 어디쯤일까. 개인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해방이 됐을 때 채 서른이 안 된 1917년생 이후 출생자는 대개 일제강점기 말에도 사회에서 자리 잡기에는 이른 나이였다. 17년생이라 하더라도 박정희와 같이 일본군 장교가 되거나 고등문관시험을 통해 일찍 행정 관리가 된 이들은 오히려 예외에 속한다. 황산덕(본 연재 10회)과 강원용(본 연재 16회)의 경우, 두 사람 모두 17년생이지만 일제 말 고등문관시험을 거쳐 행정관이 된 황산덕과, 같은 시기 만주 룽징(龍井)에서 교회 전도사로 있었던 강원용은 이 기준으로 가름된다. 이 나이 대에서 강원용 쪽이 일반적인 경우였음은 분명하다. 많은 청년 지식인이 학병으로 끌려갔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이 세대에서 일제강점기 군 장교와 관리가 된 사람들은 확실히 소수에 속한다. 학병세대의 자기의식에서 세대 감각은 참으로 강조할 만하다. 친일로부터 자유로운가 여부는 그 이전과 이후를 가르는 큰 가름대가 된다. 이항녕의 경우를 보자. 이항녕이 오랜 훗날, 일제강점기 말 자신의 친일을 여러 차례 공식석상에서 참회한 것은 유명하다.
일제강점기 군수 지낸 이항녕의 참회 김준엽보다 불과 5년 위 연배인 1915년생 이항녕은 40년 경성제대 법과를 졸업하기 전 고등문관시험 행정과(행정고등고시의 전신)에 합격해 41년부터 해방까지 경남 하동군수와 창녕군수를 지냈다.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면 곧바로 군수급 발령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을 포함해 “일제 말기 군수 이상의 행정관리는 모두 친일행위자”라고 이야기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1954년 이후 고려대 법대 교수로 있다 65년 9월 한일협정 반대로 인해 ‘정치교수’로 몰려 해직되기도 했고, 같은 해 남정현의 ‘분지’ 필화사건 때는 한승헌과 함께 변호인으로 법정에 서기도 했던 한 사람의 ‘양심적인 지식인’은 이렇게 일제강점기 말 ‘기껏’ 군수를 한 것만으로도 부끄러워했다. 이항녕은 자신보다 4년 위인 1911년생 류달영(본 연재 12회)의 삶에 대해 다음처럼 찬사한 바 있다. “많은 지식인이 입신출세를 위해 일제에 아부했는데 성천(류달영)은 끝끝내 지조를 지켜 민족의 스승이 되었다.” 이항녕이 가졌던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 그리고 류달영에 대한 찬사는, 군수 정도가 비난의 대상이 될 만한 친일인가 하는 문제를 떠나서 의미하는 바가 있다. 학병 윗세대의 ‘친일 콤플렉스’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감각을 알아채는 것은 중요하다. 학병 윗세대 류달영이 존경의 대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1911년생으로 학병세대보다 윗세대였던 까닭에 친일의 국면에 놓여 있었음에도 “지조를 지켰다”는 데 있다. 요컨대 ‘친일’은 학병 윗세대들에게는 원죄와 같은 콤플렉스를 가지게 만들었고, 역으로 새 조국건설에 기여하고자 했던 학병세대는 소수를 제외하면 친일의 죄의식로부터 자유로운 첫 세대가 되었던 셈이다. 그런데 이들 학병세대가 어떤 토양에서 자랐는가를 살필 때 문제가 그리 단순치 않음을 알게 된다. 1943년 일제의 학도병지원병제가 공포될 때 전문학교 이상 교육기관에 재학하고 있었다는 것은, 이들이 모두 제국의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임을 의미한다. 제국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았다는 것은 해방 후 국가건설의 밑바탕이 된 이들의 지식이 모두 일본으로부터 온 것임을 뜻한다. 학병 윗세대는 두말할 것도 없다. 건국기에 이미 대한민국 각 분야의 ‘태두’급 지식인은 모두 일본 교육의 강력한 수혜자들이었다. 철학자 박종홍이 일본 철학자들, 특히 국가주의 철학을 뒷받침한 교토학파의 저작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박종홍이 기초한 국민교육헌장(1968)과 일본 교육칙어(1890)의 유사성은 오래전부터 지적돼왔다. 이런 정도는 일본 지식계의 영향을 보여주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학병세대이자 ‘정통’ 민족주의자인 김준엽은 어떨까. 김준엽이 유학한 일본 게이오(慶應)대 설립자는 오늘날 일본의 기초를 놓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다. 김준엽은 대학 시절 후쿠자와의 삶에 깊이 감명했음을 고백한 바 있다. 후쿠자와로부터 감명을 받은 것은, 후쿠자와가 ‘관의 유혹을 뿌리치고 학문과 언론활동에만 전념’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후쿠자와가 학문과 교육, 언론을 통해 일본 근대화에 기여한 것처럼, 자신도 ‘우리 조국의 근대화를 위해 헌신할 것’이라고 다짐했다고 한다. 조선을 침략한 일본의 제국화를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후쿠자와에 이른다. 이 세대에서 지극히 예외적인 조지훈과 같은 경우(본 연재 19회)를 제외하면 ‘모두’가 정신적으로든 기술적으로든 일본에 빚지고 있었다. 확실히 오늘날 대한민국을 설계한 이들과 그 생각들을 이야기할 때 일본을 지우고 가기란 힘들다. 친일의 합리화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국가 대 국가’의 시각으로 접근하는 데는 한계가 따른다는 것이다. 그 기원에서 일본으로부터 왔다는 것과 제국에 협력했다는 것을 혼동할 이유는 없다. 김교신(본 연재 11회)과 우치무라 간조를 생각해보더라도 그렇다. 일제강점기 말 광복군에서 김준엽이 장준하와 미군 OSS(CIA 전신) 훈련을 받은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상징성이 있다. 두 사람이 훈련받은 중국 시안의 광복군 제2지대는 광복군 주력부대로서 1945년 해방 직전 당시 미 전략정보기관 OSS와 합작해 조선반도 진입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장준하와 김준엽이 OSS 훈련을 받은 것은 이 작전과 관련돼서였다. 중국 군복을 벗고 “미군 군복으로 갈아입었다.”(김준엽의 ‘장정 2’)
새 나라의 설계, 일본에서 미국으로중국 군복은 잠시 입었던 것으로, 결과적으로 일본 군복에서 미군 군복으로 갈아입은 셈인데 이 장면은 참으로 인상적이다. 곧 있을 해방과 이후 한국의 앞날을 예고하는 듯해서다. 모두 알고 있듯, 일본의 패전은 한반도와 만주를 덮고 있던 일본의 우산이 걷히고 북위 38선 이남에 미국의 우산이 드리우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데 오늘날 학계에서는, 이미 해방 이전 일제강점기부터, 이르게는 구한말부터 한반도에서 서북지역을 중심으로 미국화가 진행 중이었다는 견해들이 있다. 해방 전 미국화 과정에서 기독교 선교는 그 중심에 있었다. 교육과 의료를 앞세운 기독교는 근대화의 기본이자 첨병으로 인식됐다. 조선에서는 1885년 개신교 선교 이래 첫 5년간의 성서보급률이 중국에서 50년간의 보급률보다 높았으며, 일본의 최초 12년 선교 성과를 단 2년 만에 달성했다는 보고가 있다.(유선영의 ‘대한제국 그리고 일제 식민지배 시기 미국화’) 일제강점기 한반도 서북의 미국화는, 해방 후 좌우 재편 과정에서 남으로 내려온 이북 출신 지식인들과 종교인들이 가지는 의미를 그대로 예고하는 것이다. 건국과 전후 국가재건 과정에 미국이 끼친 절대적 영향력을 생각해보면, 월남 지식인들이 가지는 한국 사회 설계에서의 비중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단적인 예로, 6·25전쟁 후 한국의 근대화 플랜을 펼쳐 보였던 사상계 그룹(본 연재 6회)의 편집위원 출신 분포를 보자. 1950년대 ‘사상계’ 편집위원진은 장준하를 포함해 29인이었다. 이 29인 가운데 21인이 이북 출신이며 그것도 평안도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그 대다수가 기독교인이었다. 편집위원이 아니더라도 ‘사상계’ 주요 필진이던 함석헌, 김재준, 백낙준, 김성식 등을 헤아리게 되면 그 수는 더욱 늘어난다. 훗날 지명관은 이 상황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남쪽에 내려오니까 여기 그렇게 지식인이 많지 않은데, 중요한 지식인이 북행을 했고, 그러니까 하나의 지적 공백이 생기지 않겠어요? 리더의 공백이 생기고 (중략) 그 북쪽 사람들이 도미네이트(dominate)했고.”(국사편찬위원회의 ‘지명관 녹취록 4차’)
종교인이 숨통 틔운 이념 대한민국 건국과 전후 재건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이북 출신’ 지식인이 모두 ‘친미 보수우익’이란 한통으로만 묶일 수 없음은 다시 언급해둬야겠다. 물론, 남북 간 전쟁이 동족을 생래적 원한관계로 갈라놓은 탓에 전쟁 후 한국사에서 중도 이념조차 발붙이기 어렵게 된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분단 이전, 원래 해방기 이념의 스펙트럼에서 극좌와 극우는 ‘한 줌’에 불과했다. 1946년 여름 미 군정청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나라 만들기’의 과제와 관련해 자본주의 체제를 원한다는 응답자가 전체의 14%(1189명), 공산주의 체제 선호자가 7%(574명)였음에 비해, 사회주의 체제를 바란다는 응답자가 전체의 70%에 이르는 6237명이었다고 한다(서중석의 ‘조봉암과 1950년대 (상)’). 이 시기 대중은 ‘사회주의’를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제3이념으로 이해했던 듯하다. 이러한 통계는 이 시기 보수우익 정당인 한민당조차 사민주의적 정책을 일부 표방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해준다. 해방기 북을 선택하지 않은 ‘수많은’ 중도파의 존재는 1950년대 진보당의 정치세력화와 1960년 4·19혁명 국면에서 혁신세력의 등장 현상을 설명해주기도 한다. 물론 이들은 모두 실패했다. 그렇지만 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에 걸친 김재준과 ‘한신(韓神)’의 민주화운동(본 연재 15, 16회)은 정치적으로 중도노선의 입지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던 것으로 해석될 여지를 보여준다. 말하자면 우익 편향의 한국 현대 정치사의 지평에서 일부 종교가 사회 진보를 위한 ‘숨통을 터주는’ 기능을 했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류영모-함석헌 등 국가주의에 반대하는 정신주의 계보(본 연재 14회)도 한몫을 했다. 이들이 끼친 영향들, 그리고 오늘날 한국 사회에 펼쳐진 상황을 두루 살피면서, 연재를 마치기로 한다. 해방 후 한국 역사에서 좌익이 정권을 잡은 적은 없다. 1950년대 후반 한국 근대화의 플랜을 제시하고 60년대 중반 이후 박정희 정권에 저항한 장준하, 김준엽 등 사상계 그룹의 성향은 명백히 우익 민족주의 계열이었다. 한신 정도가 그 기원에서 좌우 사이 중도 성향을 보이긴 했지만, 실제 정치사에서 구체적인 정책을 제시한 적은 없으며, 다만 극우 독재에 저항했을 뿐이다. 해방 후 제도권 정치의 역사에서 중도 노선 정당조차 살아남은 적이 없다. 우익과 보수를 가장한 극우 정치세력과, 그냥 우익들 간 이합집산과 대립의 정치사였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의 정치와 정책을 말하면서 보수우익 일부에서 틀 지은 ‘좌우 프레임’에 사로잡힐 이유는 없을 듯하다. 이념의 스펙트럼은 넓고 우익도 마찬가지다. 독자들이 이 연재를 ‘한국 우익의 기원과 성격’에 대한 하나의 이야기로 읽었기를 바란다. 자신들 견해와 같은 극우적 국가주의가 아니면 모두 좌파로 내모는, 오늘날 우익을 사칭하는 사람들에게도 그러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