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란포로, 일본의 신이 되다
노성환 (지은이)민속원2014-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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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서문
01 아리타 도산신사의 신이 된 이참평
1. 머리말
2. 도일 동기
3. 이참평의 출신지
4. 일본에 있어서 이참평의 활약상
5. 도산신사의 신이 된 이참평
6. 마무리
02 부산신사의 신이 된 고려 할머니
1. 머리말
2. 왜군에 잡혀 일본으로 간 조선소녀 ‘갓난이’
3. 죽어서 신이 된 조선여인 갓난이
4. 갓난이 후손들의 과거와 현재상
5. 마무리
03 도조신사의 신이 된 조선인 후예 이마무라 죠엔
1. 머리말
2. 그의 조부 거관은 임란포로이다
3. 미가와치 도자기의 기초를 만든 산노죠
4. 도조신사의 신이 된 이마무라 죠엔
5. 도조신사와 이마무라가의 후예들
6. 마무리
04 당인신사의 신이 된 이종환
1. 당인신사의 조선인
2. 표류민으로서 사가에 정착한 조선인
3. 왜군과 함께 조국을 침략한 조선인
4. 사가번의 어용상인이 된 조선인
5. 당인신사의 신이 된 조선인
05 구마모토의 신이 된 김환
1. 머리말
2. 구마모토에 정착한 임란포로
3. 기요마사의 죽음에 할복 순사한 조선인
4. 기요마사의 배신陪神이 된 조선인 김환
5. 마무리
06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의 단군
1. 머리말
2. 옥산신사의 제신이 단군이라는 언설
3. 고려신에서 단군으로
4. 단군에서 일본의 신으로
5. 마무리
07 일본신이 되기를 거부한 논개
1. 머리말
2. 보수원의 건립동기
3. 격분하는 한국인
4. 역사학에서 본 논개와 로쿠스케
5. 민속학에서 본 논개와 로쿠스케
6. 마무리
08 코즈시마의 신이 된 오다 쥬리아
1. 머리말
2. 조선에 있어서 오다 쥬리아
3. 일본에 있어서 오다 쥬리아
4. 그녀를 신으로 모신 일본인
5. 마무리
09 조선의 원령과 돌을 신으로 모신 사당
1. 머리말
2. 다쿠의 고라이콘겐
3. 우시마도의 초센바대명신
4. 마스다의 사토리 이와
5. 마무리
10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모셔진 귀무덤의 영혼
1. 머리말
2. 귀무덤의 발생과 공양자
3. 귀무덤에 묻힌 영혼들
4. 귀무덤은 왜 만들었을까?
5. 귀무덤은 어떻게 이용되었을까?
6. 귀무덤은 교토에만 있을까?
7. 외국인들은 귀무덤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8. 마무리
후기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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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노성환 (지은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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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대 일본어 일본학과 명예교수. 통도사 차문화대학원 교수.
일본오사카대학 대학원졸업(문학박사), 미국 메릴랜드대학 방문교수, 중국 절강공상대학 객원 교수, 일본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외국인연구원 역임, 주된 연구분야는 신화, 역사, 민속을 통한 한일비교문화론이다.
저서
『일본 속의 한국』(울산대 출판부, 1994), 『한일왕권신화』(울산대 출판부, 1995), 『술과 밥』(울산대 출판부, 1996), 『젓가락사이로 본 일본문화』(교보문고, 1997), 『일본신화의 연구』(보고사, 2002), 『동아시아의 사후결혼』(울산대 ... 더보기
최근작 : <동아시아 요괴 그림책의 세계>,<출산과 죽음의 민속학>,<한국에서 본 일본의 역사와 민속> … 총 40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한국과 중국 그리고 베트남에도 그러한 사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외국인을 자국의 신으로 모시는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다. 한국의 경우 임란 이후 전국적으로 퍼져간 대표적인 외국의 신은 중국의 관운장이었다. 이것은 위기에 처한 조선을 구해주었다는 중국에 대한 감사의 표시이자 사대의 표현 일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는 어디까지 예외일 뿐이며, 보편적인 현상은 아니다. 따라서 근현대에 접어들어 외국인으로서 신이 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일 모셔진다면 자국인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러한 예는 중국과 대만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베트남에서도 전쟁터에 나가서 전사하였거나, 무공을 세워 전쟁의 영웅이 된 사람에게는 마을의 묘에 모셔지는 사례는 많다. 예수, 석가, 공자와 같이 인류의 스승과 같은 자를 제외하고, 극히 일반적인 외국인을 신으로 모신다는 사례를 들어본 적이 없다.
<임란포로, 일본의 신이 되다> 요약 및 평론
1. 도입 및 연구 목적
임진왜란 당시 일본으로 끌려간 수많은 조선인 포로들의 삶은 대개 비참한 노예 노동이나 타향에서의 쓸쓸한 죽음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그 비극의 역사 속에는 지극히 예외적이면서도 기묘한 현상이 존재한다. 바로 적국이었던 일본 땅에서 인간을 넘어 <신(神)>으로 추앙받게 된 조선인 포로들의 존재다. 노성환 교수의 <임란포로, 일본의 신이 되다>는 이처럼 조선인 포로가 일본의 신사(神社)에 모셔져 신격화된 독특한 현상을 미시사적·민속학적 관점에서 추적한 연구서다. 저자는 일본 현지의 신사와 사료를 철저히 답사하여, 왜 일본인들이 조선에서 온 포로를 신으로 모시게 되었으며, 그 이면에 숨겨진 역사적 진실과 문화적 융합의 메커니즘이 무엇인지 밝혀내고자 한다.
2. 내용 요약
본 도서는 일본 각지에서 신이 된 대표적인 조선인 포로들의 사례와 그들이 모셔진 신사의 유래를 구체적으로 조명한다.
도조(陶祖) 이삼평과 가미시라카와 신사: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사가현 아리타에서 백자를 처음에 구워내 일본 자기의 시조가 된 이삼평이다. 그는 죽은 후 <도조 이삼평 공>으로 추앙받으며 가미시라카와 신사에 합사되었다. 일본인들은 그를 단순한 기술자가 아니라 아리타 지역을 먹여 살린 풍요의 신으로 숭배하게 되었다.
치유와 구원의 신이 된 포로들: 규슈와 고치현 등지에는 질병을 고쳐주거나 마을의 재앙을 막아준 존재로 신격화된 조선인들이 존재한다. 낯선 이국땅에서 뛰어난 의술이나 영적 능력을 보여주었거나,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후 마을에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자 그 원혼을 달래기 위해 신으로 모신 <원령 신앙>의 형태가 책을 통해 생생하게 드러난다.
정치적 필요와 지역 공동체의 결속: 조선인 포로가 신이 되는 과정에는 지역 다이묘나 주민들의 현실적 필요도 작용했다. 조선의 선진 기술(도예, 토목 등)을 가진 포로를 신격화함으로써 지역 산업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마을 주민들의 결속을 도모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저자는 이 과정에서 조선의 인물이 어떻게 일본의 고유 신앙인 신도(神道) 체제 속으로 편입되었는지 분석한다.
기억의 변용과 정체성: 시간이 흐르면서 이 신사들은 조선인 포로의 공간이라는 본래의 맥락을 잃어버리고 일본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후손들과 뜻있는 연구자들에 의해 그들의 조선인으로서의 뿌리가 재발견되는 과정을 통해, 역사적 기억이 어떻게 왜곡되고 또 복원되는지를 보여준다.
3. 평론 및 역사적 의의
이 책은 한일 관계사와 민속학 연구에서 대단히 중요한 학술적 성과를 거두었다. 기존의 임진왜란 포로 연구가 주로 피해자로서의 고난과 쇄환(귀환) 문제에 집중되었다면, 이 책은 포로들이 일본 사회의 정신문화적 핵심인 <신앙>의 영역에 어떻게 침투하고 정착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연구의 패러다임을 전환했다.
본 저작이 지닌 역사 평론적 가치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일본의 <신명(神明) 구조>를 통해 한일 문화 융합의 이면을 날카롭게 해부했다. 외래의 존재를 신으로 받아들이는 일본 신도의 특성을 빌려, 조선인의 흔적이 일본의 로컬 아이덴티티로 고착되는 과정을 학술적으로 명쾌하게 증명했다. 둘째, 철저한 현장 중심의 민속학적 방법론이다. 문헌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저자가 직접 일본의 벽지 신사들을 찾아다니며 비문과 구전 전승을 채록한 노력은 미시사 연구의 모범을 보여준다. 셋째, 민족주의적 적대감을 넘어선 인간적 유대의 가능성을 시사한다. 적국의 포로였음에도 뛰어난 능력과 인품으로 현지인들의 경외를 받아 신이 된 인물들의 이야기는, 전쟁이라는 국가 권력의 폭력 속에서도 피어난 인간 대 인간의 관계성을 재조명하게 만든다.
다만 책의 구조상 각 신사별 사례가 병렬적으로 배치되어 있어, 전체를 관통하는 이론적 담론이나 사회학적 분석의 깊이가 뒤로 갈수록 다소 옅어지는 아쉬움은 남는다. 그러나 수면 아래 묻혀 있던 방대한 일차 자료와 현장 기록을 한 권의 책으로 묶어낸 것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폄하될 수 없다.
4. 결론
<임란포로, 일본의 신이 되다>는 강제로 고국을 떠나야 했던 이주민들이 이국땅에서 도달할 수 있었던 가장 극적인 삶의 형태를 보여주는 기록이다. 포로에서 노예로, 다시 노동자에서 지역의 수호신으로 격상된 이들의 역사는 단순한 승리와 패배의 이분법으로 재단할 수 없는 복잡한 역사적 층위를 지니고 있다. 경계를 넘어 신이 된 조선인들의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에게 역사적 상처를 어떻게 기억하고 승화시켜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진다.
<임란포로, 일본의 신이 되다> 요약·평론
노성환의 <임란포로, 일본의 신이 되다>는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들이 일본 각지에서 어떻게 기억되고, 일부는 마침내 신사의 신으로까지 모셔지게 되었는지를 추적한 민속학적 연구서이다. 2014년 민속원에서 출간된 이 책은 저자가 일본 현지를 직접 조사하며 수집한 신사, 사당, 묘지, 비석, 지역문헌, 후손들의 구전자료를 바탕으로 한다. 책은 이참평, ‘고려 할머니’, 이마무라 죠엔, 이종환, 김환, 오다 쥬리아 등 특정 인물뿐 아니라 논개, 단군, 조선인의 원령, 교토 귀무덤의 희생자들까지 다룬다.
1. 일본에서 인간이 신이 되는 방식
이 책을 이해하려면 일본의 신 개념이 한국의 그것과 상당히 다르다는 점을 먼저 보아야 한다. 일본 신도에서 신은 반드시 초월적이고 완전한 절대자가 아니다. 자연물, 조상, 뛰어난 인물, 억울하게 죽은 사람, 지역사회를 발전시킨 사람도 신이 될 수 있다. 살아 있을 때 특별한 능력을 보였거나 죽은 뒤에도 공동체의 기억에 강하게 남은 사람은 신사에 모셔질 수 있다.
따라서 일본인이 외국인이나 조선인을 신으로 모셨다는 것은 기독교식 의미에서 그들을 절대적 신으로 숭배했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해당 인물을 마을의 시조, 기술의 창시자, 수호신, 원령, 조상신으로 받아들였다는 의미에 가깝다.
노성환의 핵심 질문은 단순히 “어떤 조선인이 신이 되었는가”가 아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왜 일본 지역사회는 강제로 끌려온 조선인을 자신들의 신으로 바꾸었는가”이다.
2. 도자기의 신이 된 이참평
책의 첫 사례는 일본 아리타 도자기의 시조로 알려진 이참평이다. 임진왜란 때 사가번의 나베시마 군대에 의해 일본으로 끌려간 그는 아리타 지역에서 도자기 원료인 백토를 발견하고 일본식 자기 생산의 기초를 놓았다고 전해진다.
그는 오늘날 아리타 도산신사에서 도자기의 신으로 모셔진다. 지역의 도공과 도자기업 종사자들은 그를 산업의 창시자이자 은인으로 기억한다. 여기서 조선인 포로는 침략전쟁의 피해자에서 지역 산업의 영웅으로 변한다.
그러나 이 변화에는 역설이 있다. 일본 도자기 발전에 대한 그의 공헌은 크게 기념되지만, 그가 자신의 의지로 일본에 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쉽게 배경으로 밀려난다. 이참평을 ‘도자기의 신’으로 높이는 일은 그를 존경하는 행위이면서 동시에 전쟁포로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순화하는 장치가 될 수 있다.
저자는 이참평의 신격화를 무조건 아름다운 한일교류의 사례로 보지 않는다. 그가 일본 사회에 공헌했다는 사실과 그가 강제로 끌려갔다는 사실을 함께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3. 부산신사의 ‘고려 할머니’
두 번째 사례는 나가사키현 일대의 부산신사에 모셔진 조선 여성이다. 지역 전승에서 그녀는 ‘고려 할머니’ 혹은 ‘갓난이’로 불린다. 임진왜란 당시 어린 소녀였던 그녀는 일본으로 끌려가 도공 집단과 함께 생활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녀는 뛰어난 도자기 기술을 지녔거나 도공 공동체의 중요한 조상으로 기억되었으며, 사후에는 후손과 지역민들에 의해 신으로 모셔졌다. 부산신사라는 명칭도 그녀가 부산 또는 부산 인근에서 끌려왔다는 전승과 관련된다. 지역에서는 그녀를 ‘부산에서 온 할머니’ 혹은 도공 공동체의 시조로 기억한다.
이 사례에서 중요한 것은 이름 없는 여성 포로가 후손들의 계보 속에서 조상신이 되었다는 점이다. 남성 도공의 이름은 기록에 남기 쉬웠지만, 여성 포로들은 흔히 본명조차 잃었다. ‘고려 할머니’라는 호칭에는 존경과 익명성이 동시에 들어 있다.
그녀가 신으로 모셔졌다는 사실은 일본 사회가 그녀를 완전히 배제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본명을 잃고 출신지와 역할만으로 기억되었다는 점에서는 포로 여성의 역사적 소멸도 드러난다.
4. 마을의 신이 된 이종환
사가현 당인신사에 모셔진 이종환은 다른 사례들과 성격이 조금 다르다. 그는 1587년 배가 난파되어 일본에 표착한 인물로 전해지며, 이후 나베시마번의 가신과 특권상인이 되었다. 그는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사가의 당인정을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다. 1655년 그가 죽은 뒤 마을 사람들은 그를 당인신사의 제신으로 모셨다.
이종환은 엄밀한 의미에서 임진왜란 때 직접 납치된 포로라고 보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그러나 그는 전쟁 전후 한일 간의 혼란과 이동 속에서 일본 사회에 정착한 조선인이며,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조선 길 안내에 관여했다는 전승도 남아 있다.
그의 신격화는 산업기술자보다 도시 개척자와 상업 공동체의 창시자에 가깝다. 이종환은 외국인으로 출발했으나 마을을 일으킨 공로 때문에 지역의 시조가 되었다. 국적보다 공동체에 끼친 공헌이 신격화의 기준이 된 것이다.
5. 신이 된 포로와 신이 되기를 거부한 논개
책에는 일본에서 신이 된 조선인만 등장하지 않는다. ‘일본신이 되기를 거부한 논개’라는 장은 신격화를 둘러싼 기억의 충돌을 보여준다.
일본 일부 지역에는 논개를 일본 장수를 따라 죽은 여성으로 해석하거나, 그녀의 영혼을 일본식 신앙체계 안으로 흡수하려는 전승이 존재했다. 그러나 한국에서 논개는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한 항일의 상징이다.
논개를 일본 신사에 모시는 일은 표면적으로는 그녀를 높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행위가 침략자와 저항자의 차이를 흐리고 논개의 죽음을 남녀 간의 애정이나 충절의 이야기로 바꾼다면, 그것은 기억의 왜곡이 된다.
저자가 ‘신이 되기를 거부한 논개’라고 표현한 것은 논개의 역사적 의미가 일본의 지역신앙 속에 쉽게 포섭될 수 없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모든 신격화가 피해자를 존중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 신격화는 저항의 의미를 제거하고 피해자의 기억을 가해자의 문화 안에 흡수하는 방식이 될 수 있다.
6. 오다 쥬리아와 종교적 변신
오다 쥬리아는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 소녀로 알려져 있다. 전쟁 중 고아가 된 그녀는 천주교도였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보호 아래 들어가 세례를 받고 쥬리아라는 이름을 얻었다.
고니시가 몰락한 뒤 그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녀가 되었지만, 천주교 신앙을 포기하지 않아 유배되었다. 이후 코즈시마에서 생활했다는 전승이 남아 있으며, 현지에서는 그녀를 신앙심이 강한 성녀 또는 특별한 존재로 기억한다.
오다 쥬리아의 경우는 신도적 신격화와 천주교적 성녀 기억이 겹쳐진다. 조선에서 태어난 한 소녀가 일본에 끌려가 일본 이름을 얻고 서양 종교를 받아들인 뒤, 일본의 섬에서 숭배의 대상이 된 것이다.
그녀의 생애는 임란포로의 정체성을 단순히 조선인과 일본인 가운데 하나로 규정할 수 없게 한다. 그녀는 조선 출신이고 일본 사회에서 살았으며 천주교 신앙을 자신의 핵심 정체성으로 삼은 경계인이었다.
7. 조선의 원령과 돌을 모신 사당
일본 민간신앙에서는 억울하게 죽은 사람의 영혼을 두려워하여 신으로 모시는 경우가 많다. 죽은 자가 재앙이나 질병을 일으킨다고 생각하면, 그 영혼을 달래고 제사를 지내어 오히려 마을을 지키는 존재로 바꾸려 했다.
조선인 포로 가운데도 비참하게 죽거나 억울하게 처형된 사람들이 원령으로 기억되었다. 어떤 지역에서는 조선인이 죽은 장소의 돌이나 무덤 자체를 신성시했다. 이는 존경이라기보다 두려움에서 시작된 신앙일 수 있다.
원령의 신격화는 일본 사회가 타자의 억울한 죽음을 처리하는 전통적 방식이었다. 그러나 역사적 책임을 밝히기보다 원혼을 제사로 달래는 데 그치면, 누가 그 사람을 끌고 왔으며 왜 죽었는지는 사라질 수 있다. 폭력의 원인을 규명하는 대신 재앙을 막는 의례로 문제가 전환되는 것이다.
8. 귀무덤의 영혼
책의 마지막에는 교토 귀무덤, 즉 미미즈카에 묻힌 조선인 희생자들의 영혼이 등장한다. 이곳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일본군이 전과의 증거로 베어간 조선인들의 코와 귀가 묻혀 있다. 귀무덤 맞은편에는 침략을 명령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신으로 모신 도요쿠니신사가 있다.
가해자의 신사와 희생자의 무덤이 마주 보고 있는 이 풍경은 임진왜란 기억의 모순을 압축한다. 도요토미는 일본 통일의 영웅이자 신으로 숭배되지만, 그가 일으킨 전쟁의 희생자들은 하나의 봉분에 익명으로 묻혀 있다.
도요토미가 희생자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무덤을 만들었다는 설명도 있지만, 그것이 참회였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귀와 코를 전과물로 수집하게 한 권력자가 그것을 묻어주었다는 사실만으로 책임이 소멸하지 않는다.
노성환은 귀무덤을 단순한 잔혹성의 유적으로 보지 않는다. 그것은 일본이 전쟁의 가해자와 피해자를 어떻게 서로 다른 방식으로 신성화하고 기억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장소이다.
9. 책의 핵심 주장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주장은 신격화가 단순한 존경이나 화해가 아니라는 것이다.
조선인이 일본에서 신이 되는 과정에는 여러 유형이 있다.
첫째, 이참평처럼 산업과 기술을 발전시킨 공로로 신이 된 경우가 있다.
둘째, 고려 할머니처럼 후손 집단의 시조와 조상신이 된 경우가 있다.
셋째, 이종환처럼 마을과 상업공동체를 일으킨 인물이 지역 수호신이 된 경우가 있다.
넷째, 억울하게 죽은 조선인이 원령으로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가 신으로 모셔진 경우가 있다.
다섯째, 논개처럼 일본의 신격화 자체에 저항해야 하는 역사적 인물도 있다.
따라서 ‘일본의 신이 되었다’는 말은 하나의 의미로 환원할 수 없다. 존경, 감사, 공포, 죄책감, 지역 정체성, 역사왜곡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
10. 책의 장점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문헌기록에서 잘 보이지 않는 피로인의 삶을 민속과 지역기억을 통해 복원했다는 점이다. 저자는 중앙정부의 공식문서보다 일본 각지의 작은 신사와 묘지, 지역 전승, 후손들의 기억을 중요하게 다룬다.
또한 임진왜란을 전투가 끝난 1598년에 종료된 사건으로 보지 않는다. 포로들이 일본에서 가정을 이루고 후손을 남기며 신과 조상으로 기억되는 과정은 수백 년간 지속되었다. 전쟁은 포로와 그 후손들의 정체성, 일본 지역사회의 종교와 산업 속에서 계속 살아 있었다.
책은 일본 문화를 단순히 비난하지도, 한일 문화교류로 미화하지도 않는다. 일본 사회가 국적을 넘어 외부인을 신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포용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 신격화가 침략과 납치의 역사를 가리는 장치로 작용할 가능성도 제시한다.
11. 한계와 비판
그러나 이 책에는 몇 가지 한계도 있다.
첫째, 지역 전승과 신사 유래기는 후대에 만들어지거나 변형된 경우가 많다. 한 인물의 출신지, 이름, 활동이 역사적 사실인지 지역전설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사례가 있다. 저자의 현장조사는 소중하지만, 전승을 문헌사료와 더욱 엄밀하게 대조할 필요가 있다.
둘째, 제목은 ‘임란포로’를 내세우지만 이종환처럼 포로라고 단정하기 어려운 인물, 단군과 논개처럼 실제 일본 이주자가 아닌 인물도 포함된다. 따라서 이 책은 엄밀한 의미의 임란포로 연구라기보다 ‘임진왜란과 관련된 조선인의 일본 신격화’를 다룬 책에 가깝다.
셋째, 신격화를 다소 긍정적인 한일교류의 증거로 읽을 위험이 있다. 피해자를 신으로 모셨다고 해서 가해의 역사가 자동으로 치유되는 것은 아니다. 피해자의 기술과 공헌을 기리는 동시에 그들을 납치하고 이용한 구조도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
넷째, 조선인 후손들이 일본 사회에서 경험한 차별과 정체성 갈등은 상대적으로 덜 다뤄진다. 조상이 신으로 모셔졌다고 하더라도 후손들이 사회적으로 동등하게 대우받았다는 뜻은 아니다.
12. 종합평론
<임란포로, 일본의 신이 되다>는 매우 흥미로운 역설을 보여준다. 전쟁포로였던 사람이 가해국 사회에서 신이 될 수 있다는 역설이다.
이것은 일본인의 포용성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일본 지역사회는 자신들에게 필요한 기술과 노동을 제공한 조선인을 존경했고, 마을의 조상으로 받아들였다. 동시에 그들의 강제이주와 상실을 지역의 성공서사 속에 흡수했다.
신격화는 기억을 보존하면서도 역사를 변형한다. 이참평이 도자기의 신이 되면 그의 기술은 기억되지만 포로로 끌려온 고통은 약화될 수 있다. 고려 할머니가 조상신이 되면 그녀의 존재는 보존되지만 본명과 가족사는 사라질 수 있다. 논개가 일본 신사에 모셔지면 그녀는 존경받는 듯 보이지만 항일 저항의 의미는 희석될 수 있다.
그러므로 진정한 화해는 조선인을 신으로 모시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왜 그들이 일본에 왔는지, 누가 그들을 끌고 왔는지, 어떤 삶을 빼앗겼는지를 함께 기억해야 한다.
이 책은 일본의 신사가 단순한 종교시설이 아니라 역사기억을 조직하는 장소임을 보여준다. 신사에는 공동체가 기억하고 싶은 공헌과 영광이 남지만, 기억하고 싶지 않은 폭력은 감춰질 수 있다. 노성환의 연구는 그 감춰진 층을 다시 드러낸다.
결국 이 책은 ‘조선인이 일본의 신이 되었다’는 기이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넘어, 가해국이 피해자를 어떻게 기억하는가를 묻는 책이다. 피해자를 영웅이나 신으로 높이는 일은 망각보다 낫다. 그러나 그것이 역사적 책임을 대신할 수는 없다.
<임란포로, 일본의 신이 되다>는 임진왜란을 국가 간 전쟁에서 기억과 신앙의 역사로 확장한다. 포로는 일본의 산업과 마을과 종교 속에 깊이 들어갔고, 그 흔적은 지금도 신사의 제단 위에 남아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성과는 바로 그 제단 아래에 감춰진 납치, 상실, 적응, 공헌, 왜곡의 복합적인 역사를 다시 읽게 한다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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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포로, 일본의 신이 되다 |
노성환 8. 귀무덤의 영혼
책의 마지막에는 교토 귀무덤, 즉 미미즈카에 묻힌 조선인 희생자들의 영혼이 등장한다. 이곳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일본군이 전과의 증거로 베어간 조선인들의 코와 귀가 묻혀 있다. 귀무덤 맞은편에는 침략을 명령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신으로 모신 도요쿠니신사가 있다. 가해자의 신사와 희생자의 무덤이 마주 보고 있는 이 풍경은 임진왜란 기억의 모순을 압축한다. 도요토미는 일본 통일의 영웅이자 신으로 숭배되지만, 그가 일으킨 전쟁의 희생자들은 하나의 봉분에 익명으로 묻혀 있다. 도요토미가 희생자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무덤을 만들었다는 설명도 있지만, 그것이 참회였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귀와 코를 전과물로 수집하게 한 권력자가 그것을 묻어주었다는 사실만으로 책임이 소멸하지 않는다. 노성환은 귀무덤을 단순한 잔혹성의 유적으로 보지 않는다. 그것은 일본이 전쟁의 가해자와 피해자를 어떻게 서로 다른 방식으로 신성화하고 기억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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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학자들의 귀무덤 해석을 알려주세요.
교토의 <귀무덤(미미즈카·耳塚)>에 대한 일본 학계 및 지식인들의 해석과 담론의 변화는 시기별, 그리고 학자들의 성향에 따라 다층적으로 전개되어 왔다.
이들이 귀무덤을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해 왔는지 핵심적인 세 가지 흐름으로 나누어 정리할 수 있다.
1. 에도시대 유학자들의 해석: 야만성의 은폐와 명칭의 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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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무덤은 본래 조선인들의 코를 주로 묻었기 때문에 <코무덤(하나즈카·鼻塚)>으로 불렸다. 그러나 에도시대의 관학자이자 주자학자였던 하야시 라잔(林羅山)은 그의 저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보(豊臣秀吉譜)>에서 이 무덤을 다루며 명칭의 변화를 주도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학중앙연구원
야만성 순화론: 하야시 라잔은 "코를 베어 온 것은 너무 야만적이고 잔혹하게 들린다"며, 상대적으로 덜 잔인하게 느껴지는 <귀무덤(미미즈카)>으로 부를 것을 제안했다.
체제 정당화: 이는 도요토미 정권을 무너뜨리고 들어선 에도 막부 체제 하에서, 전란기(센고쿠 시대)의 극단적인 잔혹상을 문치주의적 관점에서 순화하고 은폐하려는 의도적인 해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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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근대 제국주의 시기의 해석: 인도주의와 시혜의 프레임
메이지유신 이후 군국주의가 팽창하던 시기, 일본의 관제 학자들과 교육계는 귀무덤의 건립 맥락을 왜곡하여 제국주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삼았다.
Modern Kyoto Research
인도주의(휴머니즘)로의 포장: 메이지 시기 일부 관제 사학자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무덤을 세우고 불교 승려들을 동원해 대규모 천도재(위령제)를 지내게 했다는 사실을 부각했다. 이들은 이를 "적군조차 자비로 품은 인도주의적 선행" 혹은 오늘날의 "적십자 정신의 효시"로 칭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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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의 정당성 부여: 이러한 해석은 조선 침략과 식민 지배를 자비로운 문명화 과정이자 시혜로 묘사하려는 제국주의 사학의 논리로 적극 활용되었다. 가해의 역사적 사실(코와 귀를 베어 오라는 잔혹한 명령)은 거세되고, 이를 묻어준 '시혜적 조치'만 영웅화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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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현대 양심적 사학자 및 지식인들의 해석: 가해의 직시와 반성
전후(戰後) 평화주의 헌법 체제 하에서 양심적인 일본의 역사학자들과 시민단체들은 귀무덤을 "일본 군국주의와 침략 전쟁의 참혹한 실상을 보여주는 가장 노골적인 증거"로 재해석하기 시작했다.
전리품과 과시욕의 증거: 현대 사학자들은 히데요시가 귀무덤을 자신이 세운 거대한 대불(대불전) 바로 앞, 즉 가장 번화하고 상징적인 공간에 조성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는 단순한 위령이 아니라, 자신의 군사적 위업과 권력을 대중과 외교 사절에게 시각적으로 과시하기 위한 '전쟁 전리품 전시장'이었다고 분석한다.
Modern Kyoto Research
역사 교육으로부터의 은폐 고발: 일본의 진보적 사학자들과 시민학자(예: 아마키 나오토 전 외교관 등)들은 일본 문부과학성이 교과서 검정 과정에서 귀무덤의 참혹한 구체적 서술을 통제하고, 히데요시의 '위령' 측면만 강조하도록 압력을 넣은 점을 비판해 왔다. 이들은 귀무덤을 한일 간의 진정한 화해를 위해 일본인들이 가장 먼저 대면하고 사죄해야 할 가해의 유적으로 정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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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하자면 일본 학계의 귀무덤 해석은 에도시대의 **야만성 감추기(명칭 변경)**에서 시작하여, 메이지기 제국주의 하의 **자비와 인도주의 프레임(침략 미화)**을 거쳐, 현대에 이르러 비로소 가해의 역사를 증언하는 평화와 반성의 공간으로 그 패러다임이 이동해 왔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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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학자들은 교토 귀무덤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일본 학계의 해석을 종합하면, 교토의 귀무덤〔耳塚, 미미즈카〕은 단순한 ‘희생자 위령시설’이라기보다 다음 세 가지 성격이 겹친 장소로 이해된다.
<전공을 계산한 군사행정의 유물>, <도요토미 권력의 위세를 과시한 기념물>, 그리고 <후대 일본사회가 침략전쟁을 기억하거나 망각해 온 기억의 장소>이다.
먼저 명칭부터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일본 연구자들은 이곳에 주로 묻힌 것이 귀보다 <코>였기 때문에 원래의 명칭은 ‘코무덤〔鼻塚, 하나즈카〕’에 가까웠다고 본다. ‘귀무덤’이라는 이름은 후대에 정착했다. 다만 실제 유해의 구성과 수량은 발굴로 확인된 것이 아니므로, 정확한 규모에 관해서는 신중해야 한다. 교토시의 공식 설명도 일본군이 조선의 군인과 민간인의 코를 전공의 증거로 잘라 일본으로 보내고, 이를 1597년 방광사 앞에 묻어 대법회를 열었다고 서술한다.
1. 전쟁의 잔혹성보다 먼저, ‘전공 심사제도’의 유물이다
일본 근세사 연구자들이 가장 기본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코와 귀의 절단이 무질서한 병사들의 개인적 잔혹행위만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전공을 계산하고 포상하기 위한 군사행정에 편입되어 있었다.
일본 국내의 전쟁에서는 적장의 목을 가져와 신원을 확인하는 ‘수급검분’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조선에서 수많은 목을 일본까지 운반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코나 귀를 잘라 소금이나 석회로 방부 처리하고, 담당 관리가 수량을 확인한 뒤 증명서를 발급했다. 이런 의미에서 귀무덤은 단순한 학살 흔적이 아니라, 인체 일부를 수량화하여 전공과 포상으로 전환한 <관료화된 폭력>의 유적이다. 일본 측 자료에는 코를 확인한 뒤 발행한 ‘코 인수증〔鼻請取状〕’이 나타난다.
이 해석은 중요한 차이를 만든다. 귀와 코의 절단을 일부 병사의 광기라고 설명하면 책임이 현장의 개인들에게만 돌아간다. 그러나 전공 심사와 포상제도의 일부였다고 보면 책임은 지휘관과 다이묘, 최종적으로는 침략을 명령하고 성과를 요구한 도요토미 정권으로 올라간다.
또한 목은 얼굴과 신분을 식별할 수 있지만 코는 대개 누구의 것인지 확인할 수 없다. 따라서 코를 전공 증표로 삼는 순간 희생자는 개인이 아니라 숫자로 바뀐다. 군인인지 민간인인지, 남성인지 여성인지도 구분하기 어려워진다. 일본 학계가 귀무덤을 <대량전쟁의 비인격화>를 보여주는 유적으로 읽는 이유다.
2. 위령의식은 있었지만, 그것을 ‘참회’라고 보기는 어렵다
1597년 도요토미 정권은 가져온 코와 귀를 방광사 대불전 앞에 매장하고 대규모 불교의식을 거행했다. 이 때문에 귀무덤을 히데요시가 희생자를 불쌍히 여겨 만든 위령시설이라고 설명하는 일본의 오래된 통속적 해석이 생겼다.
그러나 현대 일본 연구자들은 <위령의식이 있었다>는 사실과 <히데요시가 전쟁을 반성했다>는 주장을 구별한다. 전근대 일본에서 적군의 시체나 신체 일부를 매장하고 승려가 독경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이는 오늘날의 사죄나 책임 인정이라기보다 죽은 자의 원령을 진정시키고, 승자의 질서 안에 편입하는 의례였다.
최근의 전쟁사 연구도 1597년 9월 28일 히데요시가 조선인 신체 일부를 대상으로 진혼의식을 거행했다는 사실을 확인하지만, 이를 당시 일본이 조선에 대한 지배력을 과시하던 일련의 정치·군사 활동과 함께 본다.
그러므로 일본 학자들의 신중한 해석은 다음과 같다.
<매장은 방치보다 나은 행위였으나, 참회는 아니었다.>
자신이 명령한 침략전쟁의 결과물을 수도의 대불전 앞에 가져와 묻고 제사를 지냈다는 것은 희생자를 인간으로 회복시킨 행위라기보다, 전쟁의 성과와 죽은 자의 영혼을 모두 통치자의 권력 아래 배치한 행위로 볼 수 있다. 위령과 권력과시는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의례 안에서 공존했다.
3. 귀무덤은 히데요시의 ‘무위’를 시각화한 전승기념물이다
후지이 조지〔藤井讓治〕를 비롯한 일본 근세사 연구자들은 귀무덤을 히데요시와 분리된 희생자 묘지로만 보지 않는다. 방광사 대불전, 히데요시를 신으로 모신 도요쿠니사〔豊国社〕, 귀무덤은 본래 하나의 정치적 경관을 구성했다.
방광사의 거대한 불상은 히데요시의 재력과 천하통일을 나타냈다. 인근의 도요쿠니사는 히데요시를 ‘도요쿠니 대명신’으로 신격화했다. 귀무덤은 그가 해외에서 벌인 전쟁과 군사적 위세를 나타냈다. 따라서 세 시설은 각각 종교·신격·전쟁을 통해 히데요시의 권력을 보여주는 장치였다고 읽을 수 있다.
이 해석에 따르면 귀무덤의 조성 목적은 희생자를 조용히 추모하는 데 있지 않았다. 조선에서 베어온 수많은 신체 일부를 수도의 중심적 종교시설 앞에 묻는 것은, 도요토미 정권의 군사력이 바다 건너까지 미쳤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전승기념물>의 성격을 지녔다.
귀무덤 맞은편에 현재의 도요쿠니신사가 있는 풍경은 그래서 상징적이다. 한쪽에서는 침략을 명령한 히데요시가 신으로 숭배되고, 다른 쪽에서는 이름을 잃은 희생자들이 한 봉분에 묻혀 있다. 다만 오늘날의 신사 건물은 메이지기에 재건된 것이므로, 현재의 공간배치를 1597년 당시 모습과 완전히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4. 도쿠가와 막부는 귀무덤을 ‘일본의 무위’로 재해석했다
로널드 토비와 구제 나오〔久世奈欧〕 등의 연구는 귀무덤의 의미가 히데요시 사후에 다시 바뀌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도쿠가와 막부는 도요토미 가문을 멸망시킨 뒤 도요쿠니사를 철거하거나 억압했다. 히데요시 신앙이 옛 도요토미 가신들의 결집점이 되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통신사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에는 방광사와 귀무덤을 보여주었다.
구제 나오의 연구에 따르면, 막부는 귀무덤으로 상징되는 조선침략을 단순히 히데요시 개인의 업적으로 남겨두지 않고 <일본 전체의 군사적 위세>, 나아가 도쿠가와 정권의 대외적 권위로 다시 해석했다. 통신사를 이곳으로 지나가게 한 것은 조선인 사절에게 전쟁의 흔적을 보이는 동시에, 이를 구경하는 일본 민중에게 ‘조선이 일본에 복속되어 사절을 보낸다’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는 정치적 연출이었다.
이것은 귀무덤의 의미가 시대마다 바뀌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도요토미 시대에는 히데요시의 정복전쟁을 나타냈고, 도쿠가와 시대에는 막부가 관리하는 ‘일본의 대외적 무위’로 전환되었다. 실제 조선통신사는 평화적 외교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온 사절이었지만, 일본 대중에게는 패배한 조선이 조공하러 온 것처럼 왜곡되어 소비되었다.
따라서 귀무덤은 전쟁의 유적이면서 외교를 지배와 복종의 서사로 바꾼 <기억정치의 무대>였다.
5. 에도시대에는 명소가 되면서 폭력성이 희석되었다
일본의 도시사와 문화사 연구는 귀무덤이 에도시대 교토의 명소 가운데 하나로 편입되었다는 점에도 주목한다. 여행안내서와 명소기, 그림지도에 귀무덤이 등장하면서, 본래의 전쟁범죄적 성격은 점차 기이한 볼거리나 히데요시 유적의 일부로 바뀌었다.
이 과정에서 희생자들의 구체적인 삶은 사라졌다. 누가 죽었으며 왜 코와 귀가 잘렸는지는 뒷전으로 밀리고, ‘옛날 히데요시가 조선을 정벌했을 때 생긴 무덤’이라는 짧은 설명만 남았다.
이는 기억의 완전한 소멸과는 다르다. 귀무덤의 존재는 계속 알려졌지만 그 의미가 탈정치화된 것이다. 일본 기억연구에서 이런 현상은 <기억하면서 망각하기>라고 설명할 수 있다. 장소는 보존하되 가해의 구조와 희생자의 관점은 제거하는 방식이다.
6. 메이지기의 정비는 희생자 추모와 히데요시 숭배가 결합한 사건이다
귀무덤은 1898년 히데요시 사망 300주년을 맞아 대대적으로 정비되었다. 주변의 석책과 수리기념비도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교토시의 설명은 이 정비가 히데요시를 현창하는 ‘도요토미공 300년제’와 연결되었다고 명시한다.
이 점은 중요하다. 오늘날 보이는 귀무덤의 정돈된 모습은 순수하게 조선인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메이지 일본에서 히데요시는 신분이 낮은 인물에서 출발하여 천하를 통일한 국민적 영웅으로 재평가되었다. 동시에 청일전쟁 이후 일본이 제국주의 국가로 성장하던 시기였다.
따라서 귀무덤의 정비에는 두 가지 상반된 의미가 있었다.
희생자들의 신체를 매장한 장소를 보존하고 공양한다는 의미와, 해외원정을 감행한 히데요시를 제국 일본의 선구자로 기념하는 의미다.
일본 학자들은 이 모순을 귀무덤 해석의 핵심으로 본다. ‘공양비’라는 글자가 있다고 해서 그 장소가 오직 피해자 중심의 추모공간이었다고 볼 수 없다. 오히려 가해자 영웅화의 행사 속에 피해자의 무덤이 부속되었다.
7. 전후 일본에서는 ‘보이지 않는 가해의 기억’이 되었다
전후 일본의 국제이해교육과 집단기억을 연구한 이노우에 세이지〔井上星児〕는 귀무덤이 일본인의 시야에서 후퇴한 장소라고 지적한다. 귀무덤의 사연이 일본사회에 부담과 죄책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토론되기보다 판단이 정지되고 집단기억에서 밀려났다는 것이다.
이 해석에서 귀무덤은 ‘아무도 모르는 유적’이 아니다. 교토의 중심부, 유명 관광지인 산주산겐도와 국립박물관 부근에 있지만, 대중적 역사교육에서는 크게 다뤄지지 않는 <가까이 있으나 보이지 않는 장소>이다.
일본 학교에서 히데요시는 전국통일과 검지, 도수령으로 자세히 배우지만 조선침략과 귀무덤은 상대적으로 짧게 처리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 결과 히데요시의 성공서사와 조선 민중의 피해가 서로 연결되지 않는다. 귀무덤은 바로 그 단절을 드러낸다.
다만 최근 일본의 지역사 연구자, 시민단체, 교사들은 귀무덤을 침략전쟁의 희생자를 기억하고 한일 평화를 생각하는 ‘부의 유산’으로 재해석해 왔다. 교토의 현재 안내문도 이를 조선 민중이 겪은 고난을 전하는 역사적 교훈으로 규정한다.
8. ‘귀무덤의 영혼’이라는 해석에 대한 일본 민속학의 유보
노성환은 귀무덤에 묻힌 희생자들의 영혼을 일본의 원령신앙과 연결한다. 일본 민속학의 관점에서도 억울하게 죽은 자의 영혼을 제사로 달래고 수호적 존재로 전환하는 전통은 중요하다.
그러나 일본 연구자들이 모두 귀무덤을 ‘원령의 무덤’이라고 보는 것은 아니다. 사에키 신이치〔佐伯真一〕는 일본 각지의 ‘귀무덤’과 ‘귀당〔耳堂〕’ 전승을 검토하면서, 귀무덤이라는 명칭이 모두 실제 귀와 코가 묻힌 전쟁유적을 뜻하지는 않는다고 지적한다. 일부 귀무덤은 귀 질환을 치료하는 민간신앙의 장소이거나, 후대에 귀를 잘랐다는 전승이 결합한 곳이다.
교토의 귀무덤은 조선침략과 연결된 문헌근거가 분명하지만, 그곳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원령신앙이 형성되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일본 각지의 귀무덤에서 반드시 무서운 원령담이 전해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귀가 잘 들리게 해주는 신으로 친숙하게 숭배되는 곳도 있다는 민속학적 조사도 있다.
따라서 ‘희생자의 영혼이 신이 되었다’고 말할 때에는 구별이 필요하다.
귀무덤에서 위령제가 거행되었다는 사실, 희생자들의 영혼을 달랜다는 현대적 의미, 그리고 실제로 지역민이 그 영혼을 독립된 신으로 숭배했다는 주장은 서로 같은 것이 아니다.
9. 일본 학계의 해석을 네 문장으로 정리하면
일본 학자들의 주요 해석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귀무덤은 전장에서 벌어진 우발적 잔혹행위의 흔적이 아니라, 코와 귀를 전공으로 계산한 도요토미 정권의 <제도화된 폭력>의 유적이다.
둘째, 매장과 법회는 희생자 위령의 성격을 가졌지만, 현대적 의미의 사죄나 참회라기보다 승자가 죽은 자의 영혼을 통제하고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하는 의례에 가까웠다.
셋째, 귀무덤은 히데요시 시대에는 해외정복의 전승기념물이었고, 도쿠가와 시대에는 조선통신사를 이용해 ‘일본의 무위’를 과시하는 정치적 장소로 재해석되었다.
넷째, 근대와 전후에는 히데요시 영웅화, 관광지화, 침략 기억의 회피가 겹쳤지만, 최근에는 일본의 가해역사를 성찰하는 <부의 유산>이자 한일 평화교육의 장소로 다시 읽히고 있다.
종합평론
앞서 제시된 “가해자의 신사와 희생자의 무덤이 마주 보고 있다”는 해석은 상징적으로 강력하며 대체로 타당하다. 다만 일본 학계의 연구를 반영해 조금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귀무덤은 처음부터 순수한 희생자 추모공간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희생자들의 신체를 매장하고 공양한 장소인 동시에, 그 신체를 전공으로 수집한 권력자가 자신의 군사적 위세를 수도에 전시한 장소였다. 후대의 일본사회는 이를 히데요시 숭배, 국가의 무위, 관광명소, 평화교육의 유적으로 계속 다르게 재해석해 왔다.>
그 점에서 귀무덤의 핵심은 ‘일본이 가해자와 피해자를 서로 다르게 신성화했다’는 데만 있지 않다. 더 정확히는 <가해자의 영광과 피해자의 위령을 하나의 공간 안에 함께 배치함으로써, 책임과 추모의 경계를 흐려 왔다>는 데 있다.
희생자를 공양한다고 해서 가해자가 사죄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귀무덤은 추모가 역사적 책임을 대신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일본 학계에서 가장 비판적인 해석은 바로 이 지점에 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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