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7-26

[백낙청 인터뷰 35] 나의 유년시절과 12살 때 헤어진 아버지에 대하여

[백낙청 인터뷰 35] 나의 유년시절과 12살 때 헤어진 아버지에 대하여 - 서울대학교 구술사 프로젝트 1편 #역사 #일제강점기 #아버지 #가족 #서울 #백인제 - YouTube


[백낙청 인터뷰 35] 나의 유년시절과 12살 때 헤어진 아버지에 대하여
 - 서울대학교 구술사 프로젝트 1편 
#역사 #일제강점기 #아버지 #가족 #서울 #백인제
===
백낙청TV
9,213 views  Jul 24, 2026

2026년 4월 21일 녹화한 서울대학교 구술사 프로젝트 1편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창작과비평』 명예편집인
홍종욱 서울대 인문학원구원 교수
장문석 경희대 국문과 교수

 
대구에서 출생해 여러 군데 옮겨 다니며 보낸 유년기
평북 정주에서 맞이한 8.15해방
서울 재동초등학교 3학년 1학기 마치고 4학년 2학기로 월반
변호사 아버지가 운영한 출판사 겸 서점 ‘수선사(首善社)’
서북 지역 출신 작가들 저서 주로 출간

 
고등문관시험 거쳐 도청 공무원, 경북 군위 군수 지낸 아버지
5대조가 한성부 좌윤까지 올랐지만 남쪽 선비들과 달랐던 평안도 서북인들의 정서
개화해서 실력으로 일본 누르는 게 애국이라고 생각한 서북인들
일제시대 관료로 『친일인명사전』(민족문제연구소)에 이름 오른 아버지
6.25전쟁 와중에 백부 백인제 박사와 함께 납북돼 생사불명인 아버지

====
Transcript

오늘은 2026년 4월 21일이고 지금
시간은 오전 10시입니다. 장소는
석교동 창비 4억입니다. 오늘은
서울대 영어 영문학과 교수를 지내신
백락청 선생님을 모시고 구슬 제
1차분을 진행하겠습니다. 면담자는 아
저 서울대 입문학 연구원 홍정욱하고
여기 경희대 국어 국문화가
장문석입니다.
그리고 연구 보조원으로 강수현 님께서
진행을 도와 주시겠습니다. 예.
그러면은
반갑습니다. [웃음]
예.
오늘부터 뭐 두 번이나 세 번에 걸쳐
가지고 선생님 좀 아 6년 시절부터
최근에 어떤 그 한국 사회에 대한
선생님 생각까지 좀 천천히 여고자
합니다. 예. 네.
예. 그래서 오늘은 먼저 이제 셋으로
나눠서 처음에 이제 첫 번째 부분이
성장과 교육이라고 저희가 이름을 붙여
봤는데요. 뭐 유년 시절 얘기부터 좀
여쭈고자 합니다. 그래서 주로 오늘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은 장문석
선생님께서 좀 말씀을 여주는 걸로
하도록 합니다. 네. 네.
예. 선생님. 예. 여쭤보도록
하겠습니다. 네.
어, 선생님께서는 1938년 대구에서
태어나셨다고 알려져 있으십니다.
그래서 아버님께서는 경북 군이
군수셨었고
또 어머님의 고향이 또 대구시기도
하신데요.
지금 그러면 대구에서 태어나신 것이고
또 대구에서 성장을 하셨던 겁니다.
성장은 아니고
예.
대구에서 태어난 거 맞아요.
아시다시피 군이라는 데가 지금
대구하고 딱 붙어 있죠. 예. 아주
가까운 경북 중에서 가까운 것인데
아버지께서
경북 도청에
근무하시다가
군이 군수로 나갔어요. 도청에 계실
때 우리 어머니가 결혼을 해서
우리 누님이 대구 태어났을 거예요.
아. 음. 그리고 이제 군에가 있다가
해산할 때가 오니까 친정에 와서 몸을
푸신 거고 유년기는 뭐 아버지가 지방
공무원이었기 때문에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보냈어요. 대국 분할이라 뭐 여러
군데 갔죠. 대국에서 해주도 가고
오 정말
예 해주에도 살고 전주 광주 뭐
선생님께서 경험하셨었던 아시아 태평연
전쟁 말기의 상황 그리고 해방의 순간
혹시 좀 어떻게 기억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해방전 6개월 동안은
정주로 소개하셨다라고 또 알려져
있기도 한데요.
예. 그때 1944년부터
한 45년까지
45년 초까지
광주에 살고 있었어요. 라남도
광주에 살다가 그때 이제 일제 말기가
되니까 폭격 얘기도 있고 그래서
민간인들을
이제 흐트는다고 소개
소개를 시켜서 그 방침에
어 우리는 고향이 원래 아버님 고향이
평북 정주니까
그리고 그때는 이제 분단되기 전리선
없을 때니까 정주로
식구들은 다 정주로 갔어요.
아버님은 직장에 그냥 남아 있고.
예.
그래서 해방을 정주에서 맞았는데
그때 아마 [목을 가다듬음] 해방
8일호 해방 소식이 우리 정지에서
떨어진 돼 있었거든요.
저녁 때 그 소식이 전했을 거예요.
그 나는 어릴 땐데 잘 잘 모르죠.
뭐 두런드런 그 어른들끼리 얘기하는게
해방이 됐다고 [콧방귀]
어 그러신 소리를들은 기억이 나요.
혹시 해방했다 말씀드렸을 때 어떤
마음이 드셨다거나 이런 거는
뭔지 잘 몰랐죠.
그때는
아직 학교는 다니시기 전인 거죠?
아니 학교를
아예
광주에서
초등학교를 입학해 가지고 1학년
마치고 2학년 올라갈 때 소개를
갔어요.
음. 44년에 입학하신 거? 44년에
입학해서 45조에
정주 가서 8일호 겪고
한 4주
아 저
어 한 6개월
이다가
원람을 했어요.
원람을 했는데 그때까지 말해 삼팔선이
거져 있지만은 그렇게 뭐
통제가 심할 때가 아니고 이제 우리는
육노로 오지 않고 배를 타고 왔어요.
정주가 바락거든요. 아.
음.
그래서 거기서 배를 타고 어 원래는
마포 쪽으로 들어올 예정이었는데 뭐
중간에 기관 고장이 나고 어쩌고 해
가지고
결국 저 인천왕으로 들어왔죠.
좀 기억이 좀 있으십니까?
좀 있어요. 모든 기억은
워낙 특별한 거니까 그죠. 배타고
이런 거.
예예. 아 그럼 그렇게 해방 후
6개월 뒤에 배 타고 원람하셔서
서울에 오셔 오신게 서울에는 처음
오셨었던
건가요? 뭐 서울을 들러간 적은
있지만은 예.
서울에 온 건 그때 살 살게 된 건
처음이죠.
45년 10월
아버님도 이제 거기서 연락을 해서
서울에서 만나셨겠네요. 정주로 오셔서
에바크 인천까지 오셨죠.
인천까지.
예. 선생님께서 유년 시절을 그래서
서울 제동에서 보낸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혹시 제동에서 지내시면서 좀 특별히
기억나셨는 일이 있으시거나 어 그때
풍경 같은 것들 좀 궁금하긴 합니다.
제동에서 산 거는 아니고요.
예.
우리가 처음
올람에서 산 것은 지금은 흘려버린 그
백병원
지금 서울 백병원의 일부 일부인데
어디라 그랬지?
적산 가오기 하나 있었어요.
그것을 그때
우리 아버지께서
장만을 해서 거기 변호사 사무실 열고
그 집에서 살면서
제동 초등학교 다닐 때
아마
대부분은 그 거기서 살았어요. 거기서
제동까지 왔다 갔다 했고요. 아
나중에 가서 지금 백인제 가이라고 돼
있는게 우리 큰아버지 안 어쭤보려
그러는데
예 우리 큰아버님이 병원 쪽으로
이사를 가시겠다 그래 가지고
우리 보고
거기 와서 살려 그랬어요.
근데 우리 어머니는 안 좋아하셨지.
왜냐면 거기 우리 할아버지도 그때
지금 원라면서 계시니까 왜 막내가
시아버지 모시니 하는 그런 것도
있었을 거고 또 하나는 저 살다가 뭐
그래도 우리 집을 제대로 하는 말을
해야지
형님 때게만 언제 살다가는 뭐 그럴
기회가 없지 않냐 이제 이런 것도
있고 근데 이제 우리 아버지는 그
형님 인자제자 백인제 박사 형님이
하시는 말씀이 뭐 절대 복정했어요.
나이가 한 열몇 살 차이가 나고
그래서 이제 거기 가서 산을 살고
거기서 경기학도 들어가고
예 그러다 6개월 거기서 만났죠.
그러면은 그 유명한 백인재 가옥에서
몇 년 꽤 사신 거네요?
이제 가옥에서
한 2년 2년 이상 살았을 거예요.
요새도가 보시면은 그냥 눈에 기억이
선하시겠습니다. 한
한번 가봤는데
지금처럼 이렇게 저 완전히 서울시에
문화재가 돼 가지고 해설사 딸리고
그러기 전이에요.
한번 한번 더 가보고 싶긴 한데
예. 지금 되게 예쁘게 잘하.
예. 그랬다 그래요.
선생님 쓰시던 방 같은 것도 다
그대로 있을 텐데.
내가 그때
내 방을 따로 가질 구멍은 안 될고
[웃음]
아 또 형제 자매가 많으셨을 테니까.
예.
예.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제동초등학교 졸업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당시에 그 해방울 초등학교의 분위기가
좀 어땠는지 또 선생님께서 어떤
초등학생이셨었는지
궁금합니다.
나는 재밌었어요. 저등학교 다닐 게.
그리고 좀 특이한 일이 있다면은 그때
미군정이
훈정이었잖아요. 처음에는.
예.
그래서 미군적인 뭐 서위 미국의
선진적인
교육 제도를 도입한다 그래 가지고
월반 제도라는 걸 도입을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3학년 1학기까지
다니고
4학년 2학기를이
2 이학기를 갔어요. 그니까 4학년
반으로 옮겨갔지. 1년을
[목을 가다듬음]
그래서 그래서 내가 이제 우리
동교들에 비하면 나이가 어린 게
그런 것도 있고 또 1월생이니까 어리
어린 것도 있고 그때는 뭐 초등학교
때부터 무슨 중학교 입학 시험
걱정하고 그러면 그랬어요. 물론 좋은
학교를 가려고 치면은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하고 스트레스는 받았지만은
저녁 때까지 스트레스 받으면서 공부을
하고 나니까
제동에서 이제 저동까지
네.
백병 지금 백봉이는 저동까지 걸어서
오는데 뭐
초등학생들이
명동을 고쳐서 가시나요? 뭐 어떻게?
아니 명동까지는 안 가죠. 명령까지
안 가고 그 길이
그때는 그거를 종로 이거라 그랬는데
지금은 종로 이거가 3일로 그쪽을
정로 이거라 그랬잖아요.
하나 더 가면은
좀 작은 길이 있습니다. 아
그거 정로 이거데 제동에서 쫙 그
길로 가면은
어 백병거까지
백병원 자리까지
마지막에 가서 이제 조금 골목길로
들어가면
그런 자리데
그때는 이제
초등학생들이
학생들이 긴장도 풀리고 그러니까 저
전녁 늦게 그래도 늦게까지 공부는
했거든요.
예.
그러니까 오면서 뭐 온갖 장난질 다
치고
어 하간 재밌게 보냈어요. [웃음]
제동 초초등학 국민학교가 좋은 거였나
보죠. 아버님이 결정하셨을 것 같은데
가까운데 더 무슨가 더 있텐데
우리가 살던 저동하고
재동 사이에는
좋은 학교가 또 하나 있었는데 하나
교동국학교
그 우리나라 최초의 초등학교죠.
그 두 번째로 생긴게 제덕인
전통 있는 국민학교보고
초등학교
일번 사람들이던 학교도 있지 않았나
거기 아니에 일본 사람들은 충무로
쪽에 많이 살았어요. 홈맛치라고.
예. 예.
제동 쪽은 어 북천안이에요. 거기가
예.
저동 가외동. 우리 우리가 산다는
가외동이니까.
어. 그래서 그 당시 한국에서 좀 잘
사는 사람 양반 집안들
그런 사람들이 모인게 가외동 쪽이었
북천이었죠.
학생들간에 무슨 경쟁 의식이라든가
이런 건 별로 많지 않았고요.
네.
그래서 하니까 그때
나는
초등학교
1학년은 1학년까지는 내가 이북에서
마치고 왔고
나머지 4년 중에
올반하는 바람에
3년을 검성을 했는데
아까 그 즐거웠습니다.
예. 선생님 혹시 초등학교 때
읽으셨던 책 중에서 기억나시는 거
있으신가요?
미야또 무사시라. [웃음]
네. 선친이 출판사를 하셨어요.
수선사라고.
그때 그래도 꽤
괜찮은 출판사였는데 그 회사를 만드신
거는 우리 큰아버님이시고 말하자면
당신이 회사 만들어서 대표 하시면서
우리 아버지한테 동생 보고 출판사 해
봐라 그렇게 주신 거지. 그래서
아버지가 회사의 상무의사지만 실질적인
운영을 다 하셨고 역시 그 서북쪽
작가 인사들 책도 지금 나온 리스를
보면은 거의가 서북파예요.
그래서 그런 분들 뭐 집에도
찾아오시고
집에 비교적 찾아오신 분이 정비석
선생 같은 분 정비석 소류가 수선사를
하면서
수선 서림인가 뭐
서점을 동시에 했어요.
그 그 서점에 나가서 책을
어 어 위치가 어디쯤 있었
위치가 지금으로 지금 남대문으로
그니까 남대문에서 저
광화문 쪽으로
광화문 쪽으로
예 오는
길이 있었는데 명동 입구 부근이
부근이에요.
네. 예.
예. 있었는데 거의 매일 그게 나가
가지고 소설 책 봤죠. 이것저것 보고
한국 소설들을 좀 많이 보셨던
한국 소설 많이 봤고요. 그리고
그때는
이게 62호 전이기 때문에
좌익 소적도 많이 나와 있었고
홍명의 임정이
의리문헌사에서 나오고 있었잖아요.
완는 안 됐지만은예
그런 책들
그 나중에는 그말
비밀리에 돌게 된 마지책 같은 것들
그런 거 그때 많이 봤어요. 그리고
출판사의 편집장이 개영 선생이었고
개영 선생님
개영욱 선생님 작품집도 수선사에서
나왔었던 걸로 기억을 별을다라는네
나왔습니다.
영구 선생 책도 나오고
아 아버님은 변호사 하신 거
아닌가요?
변호사 하면서
하면서 출판사
출판사도 경영을 했죠.
사실은 그 이제 우리 아버지도 선진
선진도 이제 그런 생각을 쭉 하신
분이지만은
형제가 다
문화 사업에 관심이 많으셨어요.
그래서 나중에 이제 백병원이
인재대학교 만들잖아요. 그도 나는
큰아버님이 그런 구상이 전부
있으셨다고 봐요.
대학도 만들고 뭐
아버님과 큰 아버님 말씀을 좀 해
주셨는데요. 좀 아버님께서 좀 어떤
분이셨는지로 좀 기억을 하고 계신지
좀 여쭤보고 싶습니다.
예. 내가 우리 아버님하고 헤어진게
50년일까 내가 12살 때죠.만으로
살 때니까 기억이 많지 않은데 나는
이제 개인적으로는 우리 아버지는
굉장히 재밌고 따뜻하고 애들하고 놀기
좋아하고 장난 좋아하시고 그런
아버지를 기억을 해요. 그리고 나중에
우리 그
어른들 그 우리 친척들 어른들 얘기
들어 보면은 그 번 번뜩 번뜩이는 제
자주로는 형제 중에 제일
제리었다 그래요.
음.
어,
근데 인물로는 내가 보기에도 우리
임재 박사님이
어, 역시 거물이고 카리스마가 있고
음.
어, 물론 돈도 제일 잘 벌고
국회의원들 나가 있었다. 떨어지고
그런 분이었죠. 근데
우리 아버지는
어, 하니까 나한테는 참
음. 어
다정하고
그런 아버지였고요. 오늘 참부 이렇게
개인 정보를 많이 [웃음]
수집하러 오신 거 같은데
기왕의 개인 정보를 제공하는 김에 그
얘기도 하는게 좋을 것 같아요. 아까
이제 우리 아버지가 지방 도청
공무원도 하고
그랬다 그랬잖아요. 나중에 이제
기건 올라가야 전 과장까지
올라갔으니까 지금으로 치면 그 별 건
아니지만은
일제 시대는 그게
한국 사람이 아무나 못 하는
자리네요.
네.
근데 우리 아버지가 그걸 할 수
있었던 거는 어 곧이죠. 그 고동문관
시험이라고 고문 팔수한다 그랬는데
어 일본서
법과를 정공하면서
어 사업 시험 먼저 통과했고
그러다 행정
우리 요즘 말하면 행정 고시
네까지
통과했기 해서 어 그래서 이제
경상북도에
처음 보이면서 거기서 그래서 시보
시보 노릇을 하고
그러고서 처음 부임한 것이 군이
군수입니다.
그니까 한국 사람이 그때
군수가 된다는 거는 그 공원 파서 안
한 사람은 불가능했죠.
굳이 숨길 일는 없지만은 그렇다고 뭐
광고하고 다닐 일도 아닌게
그 뭐 분명한 친일 행위 아닙니까?
일제 시대. 어 예
어 나는
우리 아버지가 어
그 친일한게
무슨 그 첫째는 악질 친일은 안
하셨을 거라고 나는 그 안 하신 걸로
알고 있고
또 하나는요 이게 내가 이제까지 그런
얘기를 안 했는데
얘기하면은 뭐 자기 아버지 치료한 거
변명한다 그럴까
그런 얘기도들을 수 있고 그래서 이거
변명하기 전에 실제로 친일하셨다는 걸
솔직히 인정하고
그리고 그때 우리 민족이 전부 참
일제 탄압안에
직접 탄압을 안 받더라도 참 어렵게
그렇게 살았는데
우린 잘 살았거든
지방 공무원 올고 이렇게 많거나
그러지 않았지만 어쨌든 아쉬 없이
살았으니까. 그래서 그거는 사실 뭐
민족 앞에서 떳떳한 일은 아니죠. 그
나는 그거는
나부터 죄스럽게 생각해야 옳고 또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살지만은
그런데 이제 굳이 변명한다면 또
이런게 있어요. 우리 집안이 평안도
아니에요.
그서 사람들 정서는 남쪽의 선배들하고
달라요. 우리 집안 집안이 사실은
평안도 사람 식으로는 예외적으로 높은
변수를 했어요. 우리 5대조가 한성부
좌을 했으니까.
음.
지금 같으면 이제 제1부 시작하네요.
예.
어,
종이풍일 거야.
예. 그 평안도에서 뭐 예외가 거의
참은 일인데 그건 어떻게 하게
되냐면은
헌경내란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예.
그런데 우리 그 5대조의 형님 되시는
분이
네.
이건 이제 임금에 대한 반역이고
네.
우리는 그래도 대대로 문과 급제도
하고
네.
그건 양반인데
네.이 이 좌시할 수 없다. 그래
가지고 창의군을 일으키다가 잡혀서
사행을 당하셨어.
아 홍경 내측에게
헌경내측에
예.
근데 이제 우리 어디죠? 그분의
동생은 그분 문과 급질해 가지고
네. 문가 급제했는데도 어디
울에 수량은 못 하고 안 죽가 어디에
이제
말단 표수를 하시다가
어 형님 하는 일 돕기도 하고 뭐
왔다 갔다 해했는데
나중에 헌경내란 진압되고 나니까 이건
굉장한 공신 아닙니까?
예. 근데 그 말 주동자인
그 우리
5대조의 형님은 돌아가시고
그래서 그 혜택을 주어본 게
우리 오대조 그분이었어요. 자
해제인데
이분이 또 문과를 하셨고 그때 아직
그래서 말하 특해 가지고
어 한성 좌가 했었어요. 그니까 뭐
그 지금 남쪽 그래서 뭐
아니 그니까 기호 쪽 쪽에 양반들
말고
영남에서 뭐 [웃음] 이렇게 행사하는
집안들 보면은
조기 이쁨은 별 드물걸.
특히에 와서는 음
하간 그래서 나라의 은혜를 많이
입었는데
그런데도 내가 전에 들어온 얘기
들으면은 서울 와 가지고 그 얼마나
왕따당했겠어요. 예.
시골에 참 듣보잡이 갑자기 와가지고
한성 좌연을 하니까.
예.
그래서 이분이 그 지역 차별
예. 평안도 차별에 대해서 참 헌경리
못지 않게 맺친대가 있었다.
있었다 그래요.
그래서 이제 일반적으로
평안북도 사람들은 평안북도 남도도
그렇지만은 조선이 망했다 그래 가지고
자결하고 그런 사람 없어요.
음.
내가 내가 왜 죽냐? 나하고 관계
없는 어 왕조가 준 거다. 이제 이런
의식이 있어 가지고 거기가 이제
개화를 먼저 한 하게 된 배경도 그런
건데
빨리케화해 가지고
실력으로 일본 사람을 누르면은 그게
애국이다. 이런 생각을 했지.
예.
어 내가 그래도 매천처럼
특별히 큰 변설한 건 없지만은 그래도
독서인으로
어 살아왔는데 내가 그냥 그냥 저
있을 수 없다라 자결하고 이런 분이
없습니다. 현도에는
그래서 말하지만 우리 아버지도 어
우리 선친도
자기가
일본 사람들하고 똑같은 일을 해서
잘하는 것이 더 잘하는게 애국이다.
이런 생각하셨던 거 같아요. 집안
분위기가 막 그랬어요. 우리 인자제자
그거로는 3일운동 때 투억도 되시고
그것 때문에 의사 면업하는도 시간이
꽤 걸렸습니다. 곡절이 있었지만
거기는 이제 의수를 하시니까
일제하에서라도
자기 기술로
돈 벌고 그런 것을 신일로 간지할
필요가 없지만은
아버지는
관리를 했으니까 그 뭐 친해는게
분명하죠.
근데 내가 이걸
그렇다고 뭐 그래 친일했어.
광고달하면서
어 내가 대신해서 사고한다 뭐 이런
커스프레는 하고 싶지 않았고
그러나 내가 이거 감추지도 않은
것이죠. 예.
그 노무현장될까요?
친일 진상 조사위원 같은 것도 만들고
거기서는 우리 선천권 끼지도
않았어요. 소위 생계가이
그랬지만은 문재 문재 연구소에서 나
나온 그 친일 임명 사전 그 훨씬
방대하잖아요.
거기에는 이름이 지금 올라 있습니다.
뭐랄까 당연직이라 그럴까 이렇게 지로
딱 결정을 했으니까
그 상당히 그 기계적인 적용해 가지고
그런데 그때요 그 진상조사 위원회가
어딘가 하는 쪽에서
누구라 그러면 알 만한 분인데 아주
훌륭한 어 후급고 활동가인
교수가 나하고 잘 아는 교수가 나한테
전화를 해 가지고
제가 이러 이래 작업을 하는데 때
내가 고문으로 들어오면 좋겠다
그랬어요.
네.
음.
그때 뭐 그냥 뭐 제야 인사로서
이름이 나 있으니까 그렇게
말씀하시길래 내가 아 나 그거 그건
내가 못 합니다.
네. 사실은 우리 아버지가 이래를 해
가지고 친의 행적 있는데 내가 거기
들어가서 공문하면은 당신들 무서워진다
그래 가지고
사양한 적이 있거든요.
그러니까
그 완전히 비밀로 한 건 아니지만은
그냥 떠들러 달리질 않았고
특히 오늘 얘기한 그 변명 비슷한
얘기는 더 안 했고요.
예. 음.
예. 그런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근데 선치는
우선 해방 직후에 그 이승만이나
한민당 이쪽이 전혀 아니었고
사실은 저 해방 측회는 백인재 박사가
서재필 선생을 옹립하려는 그게 들어
있었어요. 이번에 돈이 있으니까
서재필 박사 오셔고 이제 그러기도
했는데 어쨌든 그 친일파들이 모인 그
당에는 안 들어가 있었어요.
음. 음.
그러다가 뭐 625 때
어 답이 갔으니까
뭐 제대로
친일 해결 뭐를 아니 그 친일 서의
친일 잔재들이 하는
나쁜 짓에 그렇게 가담할 기회도
없었고
따라서는 좀 가슴 아픈 일이지만은
진한 업보를 일찍 일찍 받으셨죠.
우리 아버지는
나중에 변역적 중도지 여쭤볼 때 좀
그런 걸 여쭤볼 생각도 있는데이
식민지 시기의 그런 보통 사람들의
삶이라든가 뭐 지식인들의
그런 것도 좀 한번
다시 한번 얘기를 해 봐야 될 필요가
있는 거 같습니다. 특히 특히 요즘
들어서 식민지 연구에서
정치라는 이제 개념
그 예전에는 그 이제 뭐 친일이다,
타협이다, 뭐 자치 운동이다 이러고
그냥 전혀 돌아보지 않았었는데 요즘은
그게 간단한게 아니다 이런 연구들이
많이 나오거든요.
그래서 그런 거랑도 좀 관련해서
황교수가 쓰신 민족과 혁명이라는 책을
내가 읽고 많이 배웠는데 [웃음]
거기에 이제 그런 나오죠. 해외에서
운동한 분들이 참 다 훌륭하긴 한데
예 어떻게 보면 이제 망명 사관 예예
그들 기준으로 보면은 국내에서 좀 타협적으로
타협하면서 적당히 산 사람들도 다 친일이 되는 거죠.
예.
독립운동에 뭐 비밀 후원을 한다든가 그러지 않으면은 근데 그런 그 그
남쪽도 그렇지만은 그건 어떤 의미에서 더하죠. 여러분 김일성의 무력 투쟁이
그 해외는 아니지만은 주는 만주를 무대로 국회에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그런 거는 우리가
좀 정말 양쪽을 다 이렇게 정업해서 새로 정립할 필요가 있지 않나 니다.
[음악]
[음악]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