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7-27

岡本公三 - Wikipedia 오카모토 코조 적군파 의 테러리스트

岡本公三 - Wikipedia

岡本公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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岡本 公三
警視庁が公開した顔写真
(1997年撮影)
生年1947年12月7日
生地日本の旗 連合国軍占領下の日本
熊本県葦北郡芦北町
没年2026年7月23日(78歳没)
没地レバノンの旗 レバノン ベイルート
思想マルクス主義
活動テルアビブ空港乱射事件
所属共産主義者同盟赤軍派
日本赤軍
信教イスラム教
脚注実兄はよど号グループ岡本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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岡本 公三(おかもと こうぞう、1947年〈昭和22年〉12月7日 - 2026年〈令和8年〉7月23日)は、日本の新左翼党派・共産主義者同盟赤軍派のテロリスト。『テルアビブ空港乱射事件』の実行犯の一人。

一般には日本赤軍メンバーとされるが、正確には日本赤軍成立前のメンバーで、イスラエルからの釈放後にレバノンに亡命し、日本警察から国際手配された[1]よど号グループ岡本武は実兄。

生涯

生い立ち

熊本県葦北郡芦北町で、小学校校長の子として生まれる[2]熊本マリスト学園高等学校卒業。

長兄と次兄・岡本武と同じ進学先である京都大学を二度受験したが失敗し、1968年(昭和43年)、鹿児島大学農学部に入学[3]1971年(昭和46年)、鹿児島大学にやってきた若松孝二足立正生監督の映画『赤軍-PFLP・世界戦争宣言』に共鳴し、上映運動を展開する「赤バス隊」に参加[4]1972年3月共産主義者同盟赤軍派に加わった[5]

テルアビブ空港乱射事件

1972年(昭和47年)2月29日、日本を出国。ベイルートに渡り3週間、PFLPの施設で自動小銃の射撃訓練を受けた。その後、ドイツフランクフルトなど欧州に潜伏した後、ローマからフランス航空機でテルアビブ空港へ移動した。この時点でもPFLPの指導者の名も所在地も知らない、イスラエルのことも詳しく知らない、ただ、世界革命にお前が必要だという指示に従って行動していただけであった[6]

1972年(昭和47年)5月30日奥平剛士安田安之と共に『テルアビブ空港乱射事件』を実行し26人を殺害、逮捕された(奥平、安田は死亡)。このとき、鹿児島大学から放学の懲戒処分を受ける[7]。同年7月13日に岡本はイスラエル裁判にかけられ、職業として「赤軍兵士」を自称した。陳述のなかでは民間人を殺害したことについて謝罪せず、また「事件は当初は3人ではなく丸岡修を含めた4人で行う予定であったが、丸岡は途中から別行動を取ったために3人で襲撃を行った」と供述した[8]

終身刑と釈放

イスラエル政府は当初は死刑求刑を検討していたが、最終的に終身刑が求刑され、終身刑が判決として確定した後に服役。1985年(昭和60年)5月にイスラエルとPFLP-GCとの捕虜交換により釈放。リビアシリアを経由して、日本赤軍が本拠地としていたレバノンに戻り合流した。

日本警察は釈放直後の5月21日から岡本の逮捕状を取り、5月23日に国際刑事警察機構で国際手配中とした[9]。日本の刑法第5条では外国で服役などの処分を既に受けている場合でも日本でさらに処罰することを認めているが、外国で服役等の処罰を既に受けている場合、日本での刑の執行を軽減したり免除したりすることとなっており、13年間服役している岡本が日本で処罰される場合はこれをどう見るかが焦点となる[10]

その後、1997年(平成9年)にレバノンに潜伏していた岡本を含む日本赤軍メンバー5人が検挙され、禁固3年の判決が確定し、2000年(平成12年)3月出所。岡本以外の4人は禁固刑の執行後、日本に送還された。しかし、岡本についてはイスラエルと対立するレバノン政府は岡本の政治亡命を認めた。

亡命後

2000年(平成12年)3月2日に報道陣の前でイスラム教改宗する[11]2002年(平成14年)に、テレビ朝日報道番組ザ・スクープ」が、レバノンに潜伏中であった岡本の独占取材を実施、潜伏先住居内でインタビューを行っている。その中で、被害者への謝罪らしき言葉を述べているが、2001年(平成13年)に壊滅した日本赤軍がまだ存在しているか否かについては、把握できていない様子だった。その一方で、「まだ事件当時の24歳のままの気持ちである」とも語っている。

2002年(平成14年)時点ではヒズボラ[12]などイスラエルと敵対する勢力の庇護を受けてレバノンのベイルート郊外のアパートに在住していたと報じられている。2003年(平成15年)、岡本は共同通信のインタビューに応じ、「日本に帰って昔の友人たちに会いたい」と望郷の念を語っている。その際の岡本は動作が緩慢で健康に問題がある様子であった。これについてレバノン政府は「イスラエルの獄中で治安機関から拷問を受けた後遺症による精神疾患で、発語などに障害を負った」としている。

2010年(平成22年)4月28日に、ベイルートの奥平剛士の墓前で行われた日本のロックバンド頭脳警察のメンバーPANTAによる追悼ライブに姿を見せた[13][14]2011年(平成23年)には、日本の支持者とSkypeで定期的に連絡を取っており、健在であることが伝えられた[15]。なおレバノン政府からは政治運動などを制限されており、公の場に姿を見せることは滅多にない[16]

一時期糖尿病を患ったが、その後は健康を回復した。一方、イスラエルでの拷問を原因とする統合失調症については、現地の専門医から「病状の悪化を防ぐことはできても、完全に治ることはない」と釘を刺されていたという[17]

2016年(平成28年)5月14日、滞在先のベイルートで共同通信の取材に応じ、パレスチナに骨をうずめたいと語り、死者の多くがプエルトリコ人だったことに「犠牲者には哀悼の意を表したい」と謝罪の言葉を口にした[18]

2017年(平成29年)4月下旬、ベイルートで毎日新聞の取材に応じ、「一度は(日本に)帰りたいが、普通には暮らせないだろうから帰国にこだわりはない」と語った。また「事件はテロではなく、PFLPと共同で起こした武装闘争だった。武装闘争は今も昔も最高のプロパガンダになる。」と語り、自らのテロ行為への反省と謝罪についてや世界同時革命が起きていない現状について尋ねる記者の質問には答えなかった。岡本を保護しているPFLPは「日本のメディアの本格的な取材に応じるのはおそらくこれが最後」としている[19]。パレスチナ側の支援組織が「岡本が死ぬまで面倒を見る」という姿勢を堅持している。

2017年(平成29年)11月21日、岡本に使用させる目的でキャッシュカードを銀行からだまし取ったとして、詐欺容疑で左翼系新聞を発行する人民新聞の社長が逮捕され[20]、その後懲役1年、執行猶予3年の有罪判決を受けた(2021年7月執行猶予満了)[21]

2022年(令和4年)5月30日、レバノンの首都ベイルートにて開催された『テルアビブ空港乱射事件』から50周年を記念する集会に支援者に付き添われ参加した[16][22]。また、東京都内でも岡本公三の支援団体による集会が開催され、約100人が参加した[23]

2022年(令和4年)5月31日、在日イスラエル大使だったギラッド・コーヘン英語版Twitter上にていくつかの報道機関によるツイート画像を引用しながら「1972年にロッド空港で発生した乱射事件から50年を記念する集会に参加した岡本公三容疑者、および先週末出所した重信房子元最高幹部が温かく迎えられる姿を見て愕然としました[24]」と岡本、重信両名を批判する投稿を行った。

死亡

PFLPの発表によれば、2026年(令和8年)7月23日正午(日本時間同日午後6時)ごろにベイルート南郊で死亡した[25]78歳没[26][27]。晩年は高齢で体調を崩し[25]、死因は肺の合併症と発表された[28]。レバノンの首都周辺で埋葬され[25]、葬儀にはPFLP指導部をはじめパレスチナやレバノンの関係者らが参列したという[29]

余談

  • 実兄・岡本武を非常に尊敬していたという。
  • 岡本の渡航費用等30万円を支援したのは若松孝二だった[30]。若松プロダクションには岡本が書いた「借用書」が飾られている[31]
  • 『テルアビブ事件』の際に岡本が用いた偽造旅券は写真製版で精巧に偽造されたもので[32]、「ナンバ ダイスケ」という名義であった。これは虎ノ門事件犯人難波大助から取られている。
  • 事件後、岡本の父は駐日イスラエル大使に対し「極刑に処してほしい」との詫び状を書いている[33]。また、イスラエルのゴルダ・メイア首相にも謝罪の手紙を送った[34]
  • 1975年(昭和50年)、岡本は事件に至るまでの経緯などをまとめた獄中手記を『週刊新潮』に寄稿。手記は1975年8月28日号に特別記事「テルアビブまでの旅」として掲載された[35]
  • 2007年(平成19年)に岡本をモデルとした映画『幽閉者 テロリスト』が製作された。自らもパレスチナに渡り日本赤軍に参加し、2000年(平成12年)に強制送還された映画監督足立正生の35年ぶりの監督作。主演は田口トモロヲ

脚注

  1.  国際手配中の日本赤軍 - 警視庁
  2.  『越過死海』張承志、香港中文大学出版社、2015年、p149
  3.  テルアビブ空港乱射事件・犯人速報 石川 荘太郎、2012年7月(2020.1.20 lastaccess)
  4.  「若松孝二と赤軍レッド・アーミー 」原渕勝仁著、世界書院、2016年7月、p123
  5.  「若松孝二と赤軍レッド・アーミー 」p29、32
  6.  「過激に走った秀才兄弟」『朝日新聞』昭和47年6月2日.3面
  7.  鹿児島大学教養部 詳細年表 1972年度(昭和47年度) 鹿児島大学
  8.  「第四の男日本潜入 赤軍ゲリラ」『朝日新聞』昭和47年(1972年)6月6日朝刊、13版、1面
  9.  “警察庁、釈放された岡本公三を国際手配”. 朝日新聞. 1985年5月23日.
  10.  “釈放の岡本公三の引き渡しを要求へ 警察庁方針”. 朝日新聞. 1985年5月20日.
  11.  "Red Army guerrillas arrested". BBC.com. 18 March 2000. Retrieved September 6, 2011.
  12.  ヒズボラが保護下に置いた「岡本公三」の利用価値 「フォーサイト」 2002年7月号
  13.  奥平元赤軍派幹部の墓前でライブ レバノン、岡本容疑者も姿」『47NEWS』(共同通信社)2010年4月29日。オリジナルの2010年8月25日時点におけるアーカイブ。
  14.  “頭脳警察・PANTAさん 奥平元幹部の墓前でライブ”. スポニチアネックス. 共同通信社. 2010年4月29日. 2014年1月26日時点のオリジナルよりアーカイブ.
  15.  「元日本赤軍『岡本公三』がレバノンでハマッた『スカイプ』」 、「週刊新潮」2011年10月13日号、P.55-56
  16.  元日本赤軍の岡本公三容疑者、集会に姿現す 亡命先のレバノンで」『朝日新聞』2022年5月31日。2025年4月10日閲覧。
  17.  テルアビブ空港乱射事件から49年 元日本赤軍「岡本公三」容疑者の今”. デイリー新潮. p. 3 (2021年5月30日). 2021年6月1日時点のオリジナルよりアーカイブ。2026年7月24日閲覧。
  18.  パレスチナに骨をうずめたい・日本赤軍岡本容疑者が謝罪[リンク切れ] - 中国新聞(2016年5月14日閲覧)
  19.  テルアビブ空港乱射:岡本容疑者「一度は日本に帰りたい」 毎日新聞 2017年5月30日
  20.  “レバノンの日本赤軍支援か 口座不正開設容疑で左翼紙社長を逮捕 兵庫県警”. 産経新聞. 2017年11月21日. 2019年11月10日閲覧.
  21.  “元日本赤軍メンバー支援でカード詐取 「人民新聞」社長に有罪判決 神戸地裁”. 産経新聞. 2018年7月18日. 2019年11月10日閲覧.
  22.  【独自】ANNカメラが捉えた 国際手配中の「日本赤軍」メンバー岡本公三容疑者の近影(2022年5月31日) - YouTube[リンク切れ]
  23.  ロッド空港乱射から50年で集会”. ロイター (2022年5月30日). 2023年2月8日閲覧。
  24.  Gilad Cohen 🇮🇱 [@GiladCohen] (2022年5月31日). “1972年にロッド空港で発生した乱射事件から50年を記念する集会に参加した岡本公三容疑者”. X(旧Twitter)より2026年7月24日閲覧.
  25.  時事通信 国際報道部「岡本公三容疑者死亡 ロッド空港乱射の日本赤軍メンバー、78歳―レバノン」『時事ドットコム』時事通信社、2026年7月24日。2026年7月24日閲覧
  26.  岡本公三容疑者がレバノンで死亡 ロッド空港乱射事件の実行犯:朝日新聞”. 朝日新聞 (2026年7月24日). 2026年7月24日閲覧。
  27.  Liban : décès du Japonais Kozo Okamoto, membre de l’Armée rouge japonaise et auteur d’un attentat meurtrier en Israël en 1972 - RTBF Actus (フランス語). RTBF (2026年7月23日). 2026年7月23日閲覧。
  28.  “レバノンで岡本公三容疑者の葬儀「最後の瞬間までパレスチナと…」死因は肺の合併症”. テレ朝news. 2026年7月25日. 2026年7月25日閲覧.
  29.  “レバノンで岡本公三容疑者の葬儀 パレスチナ組織発表 首都のモスクを出発、埋葬される”. 産経新聞. 2026年7月25日. 2026年7月25日閲覧.
  30.  決着~岡本公三と若松孝二の40年~
  31.  「若松孝二と赤軍レッド・アーミー 」原渕勝仁著、世界書院、2016年7月、p29
  32.  「3人のパスポート 写真製版で精巧な偽造」『朝日新聞』昭和47年6月2日.3面
  33.  「イスラエル大使にわび状 岡本公三の父」『朝日新聞』昭和47年6月5日.3面
  34.  イスラエルから見た「日本赤軍」の謎 50年前の空港乱射事件、イスラエル人はどう受け止めたのか”. AERA.dot (2022年6月17日). 2022年6月17日閲覧。
  35.  岡本公三 テルアビブ空港乱射50年 本人が手記で明かした「日本を出てから事件を起こすまで」”. デイリー新潮 (2022年5月30日). 2022年6月17日閲覧。

関連項目

外部リン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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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 보호 페이지
출처 : 무료 백과 사전 "Wikipedia (Wikipedia)"
오카모토 고조
경시청이 공개한 얼굴 사진
(1997년 촬영)
생년1947년 12월 7일
직물일본의 국기 연합국군 점령하의 일본
구마모토현 갈대군 아시 키타마치
몰년2026년 7월 23일 (78세)
몰지레바논의 국기 레바논 베이루트
사상마르크스주의
활동텔아비브 공항 난사 사건
소속공산주의자 동맹 적군파
일본 적군
신교이슬람교
각주친형은 요도호 그룹오카모토 타케시 .
템플릿 보기

오카모토 코조 (오모토 코우조, 1947년 <쇼와 22년> 12월 7일 - 2026년 <령화 8년> 7월 23일 )는 일본의 신좌익 당파· 공산주의자 동맹 적군파 의 테러리스트. 텔 아비브 공항 난사 사건 의 실행범 중 한 명.

일반적으로는 일본 적군 멤버로 되지만, 정확하게는 일본 적군 성립 전의 멤버로, 이스라엘 로부터의 석방 후에 레바논 에 망명해, 일본 ​​경찰로부터 국제 수배되었다 [ 1 ] . 요도호 그룹오카모토 타케 는 친형.

평생

살아남다

구마모토현 갈대군 아시 키타마치 에서, 초등학교 교장의 아이로서 태어난다 [ 2 ] . 구마모토 마리스토 학원 고등학교 졸업.

나가형과 차형·오카모토 타케와 같은 진학처인 교토대학 을 두 번 수험했지만 실패해, 1968년 (쇼와 43년), 가고시마대학 농학부 에 입학 [ 3 ] . 1971년 (쇼와 46년), 가고시마대학에 온 와카마츠 타카지 · 아다치 마사오 감독의 영화 “ 적군-PFLP·세계 전쟁 선언 ”에 공명해, 상영 운동을 전개하는 “붉은 버스대”에 참가 [ 4 ] . 1972년 3월 , 공산주의자 동맹 적군파 에 합류했다 [ 5 ] .

텔아비브 공항 난사 사건

1972년 (쇼와 47년) 2월 29일, 일본을 출국. 베이루트 에 건너 3주간, PFLP 의 시설에서 자동 소총 의 사격 훈련을 받았다. 그 후 독일 프랑크푸르트유럽에 잠복한 후 로마 에서 프랑스 항공기로 텔아비브 공항 으로 이동했다. 이 시점에서도 PFLP의 지도자의 이름도 소재지도 모르고, 이스라엘 대해서도 자세하게 모른다 .

1972년(쇼와 47년) 5월 30일오쿠히라 츠요시 · 야스다 야스유키 와 함께 「텔아비브 공항 난사 사건」을 실행해 26명을 살해, 체포 되었다(오쿠다이라, 야스다는 사망). 이때 가고시마대학으로부터 방학의 징계처분을 받는다 [ 7 ] . 같은 해 7월 13일 오카모토는 이스라엘 에서 재판 에 걸려 직업으로 '적군 병사'를 자칭했다. 진술 속에서는 민간인 을 살해한 것에 대해 사과하지 않고, 또 “사건은 당초는 3명이 아니라 마루오카 슈 를 포함한 4명으로 실시할 예정이었지만, 마루오카는 도중부터 다른 행동을 취했기 때문에 3명으로 습격을 실시했다”고 진술했다 [ 8 ] .

종신형과 석방

이스라엘 정부는 당초 사형 구형을 검토하고 있었지만, 최종적으로 종신형이 구형되어 종신형이 판결로 확정된 후 복역. 1985년 (쇼와 60년) 5월에 이스라엘과 PFLP-GC 와의 포로 교환에 의해 석방. 리비아 시리아 경유하여 일본 적군이 본거지로 있던 레바논으로 돌아와 합류했다.

일본 경찰은 석방 직후인 5월 21일부터 오카모토의 체포장을 취해 5월 23일에 국제형사경찰기구에서 국제수배 중으로 했다 [ 9 ] . 일본의 형법 제5조에서는 외국에서 복역 등의 처분을 이미 받고 있는 경우라도 일본에서 더 처벌하는 것을 인정하고 있지만, 외국에서 복역 등의 처벌을 이미 받고 있는 경우, 일본에서의 형 집행을 경감하거나 면제하거나 하게 되어 있어, 13년간 복역하고 있는 오카모토가 일본에서 처벌 되는 경우이를

그 후, 1997년 (헤세이 9년)에 레바논에 잠복하고 있던 오카모토를 포함한 일본 적군 멤버 5명이 검거되어, 금고 3년의 판결이 확정되어, 2000년 (헤세이 12년) 3월 출소. 오카모토 이외의 4명은 금고형 집행 후 일본 으로 송환됐다. 그러나 오카모토에 대해서는 이스라엘과 대립하는 레바논 정부는 오카모토의 정치 망명 을 인정했다.

망명 후

2000년 (헤세이 12년) 3월 2일에 보도진 앞에서 이슬람교개종 한다 [ 11 ] . 2002년 (헤세이 14년)에, 텔레비전 아사히보도 프로그램더 특종」이, 레바논에 잠복중이었던 오카모토의 독점 취재를 실시, 잠복처 주거내에서 인터뷰 를 실시하고 있다. 그 가운데 피해자 에 대한 사과다운 말을 말하고 있지만, 2001년 (헤세이 13년)에 괴멸한 일본 적군이 아직 존재하고 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파악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한편, "아직 사건 당시 24세 그대로의 기분"이라고도 말했다.

2002년(헤세이 14년) 시점에서는 히즈보라 [ 12 ] 등 이스라엘과 적대하는 세력의 비호를 받아 레바논의 베이루트 교외 아파트 에 거주하고 있었다고 보도되고 있다. 2003년 (헤세이 15년), 오카모토는 공동 통신 의 인터뷰에 따라, 「일본에 돌아와 옛 친구들을 만나고 싶다」라고 망향의 생각을 말하고 있다. 그 때의 오카모토는 동작이 느리고 건강에 문제가 있는 모습이었다. 이에 대해 레바논 정부는 “이스라엘의 옥중에서 치안기관 으로부터 고문을 받은 후유증 에 의한 정신질환 으로 발어 등에 장애를 앓았다”고 한다.

2010년 (헤세이 22년) 4월 28일 에 베이루트의 오쿠히라 츠요시 의 무덤 앞에서 행해진 일본의 록 밴드 , 두뇌 경찰 의 멤버 PANTA 에 의한 추도 라이브에 모습을 보였다 [ 13 ] [ 14 ] . 2011년 (헤세이 23년)에는 일본의 지지자와 Skype 에서 정기적으로 연락을 취하고 있어 건재한 것으로 전해졌다 [ 15 ] . 덧붙여 레바논 정부로부터는 정치운동 등을 제한되고 있어 공공장에 모습을 보이는 것은 드물지 않다 [ 16 ] .

한때 당뇨병 을 앓았지만 그 후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한편 이스라엘에서의 고문을 원인으로 하는 정신분열증에 대해서는 현지 전문의로부터 “병상 악화를 막을 수는 있어도 완전히 치유되지 않는다”고 못을 찔렀다고 한다 [ 17 ] .

2016년 (헤세이 28년) 5월 14일 , 체류처의 베이루트에서 공동통신의 취재에 따라 팔레스타인 에게 뼈를 괴롭히고 싶다고 말했고, 죽은 자의 대부분이 푸에르토리코 인이었던 것에 “희생자에게는 애도의 뜻을 나타내고 싶다”고 사죄의 말을 말했다 [ 18 ] .

2017년 (헤이세이 29년) 4월 하순, 베이루트에서 매일 신문 의 취재에 따라, 「한번은 (일본에) 돌아가고 싶지만, 보통으로는 살 수 없으니까 귀국에 구애는 없다」라고 말했다. 또 “사건은 테러가 아니라 PFLP와 공동으로 일으킨 무장투쟁 이었다. 무장투쟁은 지금도 옛날 최고의 프로파간다가 된다.”고 말하며 스스로 테러 행위에 대한 반성과 사죄에 대해서나 세계 동시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현상에 대해 물어보는 기자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오카모토를 보호하고 있는 PFLP는 “일본의 미디어의 본격적인 취재에 응하는 것은 아마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하고 있다 [ 19 ] . 팔레스타인 측의 지원 조직이 '오카모토가 죽을 때까지 번거로움을 본다'는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2017년(헤세이 29년) 11월 21일 , 오카모토에 사용시키는 목적으로 현금 카드 를 은행으로부터 속여 잡았다고 해서, 사기 혐의로 좌익계 신문을 발행하는 인민 신문 의 사장이 체포되어 [ 20 ] 그 후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의 유죄판결을 받았다(2021년 7월 집행유예 만료) [ 21 ] .

2022년 (영화 4년) 5월 30일 ,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 에서 개최된 '텔아비브 공항 난사 사건'에서 50주년을 기념하는 집회에 지원자와 함께 참가했다 [ 16 ] [ 22 ] . 또, 도쿄도내에서도 오카모토 고조의 지원 단체에 의한 집회가 개최되어, 약 100명이 참가했다 [ 23 ] .

2022년(영화 4년) 5월 31일 재일 이스라엘 대사였던 길라드 코헨 ( 영어판 )트위터 에서 몇몇 보도 기관에 의한 트윗 이미지를 인용하면서 “1972년 드 공항에서 발생한 난사 사건으로부터 50년을 기념하는 집회에 참가한 오카모토 공삼 용의자, 및 지난 주말 출소한 시게노부코 전 최고 간부가 따뜻하게 맞이할 수 있는 모습을 보고 희연했습니다 [ 24 ]」라고 오카모토, 시게노부 양명을 비판하는 투고를 실시했다.

사망

PFLP 의 발표에 의하면, 2026년(령화 8년) 7월 23일 정오(일본 시간 같은 날 오후 6시)경에 베이루트 남교에서 사망했다 [ 25 ] . 78세몰 [ 26 ] [ 27 ] . 만년은 고령으로 컨디션을 무너뜨리고 [ 25 ] , 사인은 폐의 합병증으로 발표되었다 [ 28 ] . 레바논의 수도 주변에서 매장되어 [ 25 ] , 장례식에는 PFLP 지도부를 비롯해 팔레스타인과 레바논 관계자들이 참석했다고 한다 [ 29 ] .

여담

  • 친형·오카모토 타케를 매우 존경하고 있었다고 한다.
  • 오카모토의 도항 비용 등 30만엔을 지원한 것은 와카마츠 타카지 였다 [ 30 ] . 와카마츠 프로덕션에는 오카모토가 쓴 「차용서」가 장식되어 있다 [ 31 ] .
  • '텔아비브 사건' 때에 오카모토가 이용한 위조여권 은 사진제판에서 정교하게 위조된 것으로 [ 32 ] , ' 넘버다이스케 '라는 명의였다. 이것은 도라 노몬 사건범인 난바 대조 로부터 취해지고 있다.
  • 사건 후 오카모토의 아버지는 주일 이스라엘 대사에 대해 "극형에 처해 달라"는 사죄장을 썼다 [ 33 ] . 또한 이스라엘의 골다 메이어 총리에게도 사과의 편지를 보냈다 [ 34 ] .
  • 1975년 (쇼와 50년), 오카모토는 사건에 이르기까지의 경위 등을 정리한 옥중수기를 『주간신조』에 기고. 수기는 1975년 8월 28일호에 특별 기사 「텔아비브까지의 여행」으로서 게재되었다 [ 35 ] .
  • 2007년(헤세이 19년)에 오카모토를 모델로 한 영화 ' 유폐자 테러리스트 '가 제작되었다. 스스로도 팔레스타인에 건너 일본 적군에 참가해, 2000년(헤세이 12년)에 강제 송환된 영화 감독 아다치 마사오 의 35년만의 감독작. 주연은 타구치 토모로오 .

각주

  1.  국제 수배 중 일본 적군 - 경시청
  2.  『월과 사해』 장승지, 홍콩 중문대학 출판사, 2015년, p149
  3.  텔아비브 공항 난사 사건·범인 속보 이시카와 소타로, 2012년 7월(2020.1.20 lastaccess)
  4.  「와카마츠 타카지와 적군 레드 아미」하라부치 카츠히토, 세계서원, 2016년 7월
  5.  「와카마츠 타카지와 적군 레드 아미」p29, 32
  6.  「과격하게 달린 히데사이 형제」 「아사히 신문」쇼와 47년 6월 2일. 3면
  7.  가고시마 대학 교양부 상세 연표 1972년도(1972년도) 가고시마 대학
  8.  “제4의 남자 일본 잠입 적군 게릴라” “아사히 신문” 쇼와 47년(1972년) 6월 6일 조간, 13판, 1면
  9.  “경찰청, 석방된 오카모토 공삼을 국제 수배”. 아사히 신문. 1985년 5월 23일.
  10.  “석방의 오카모토 공삼의 인도를 요구에 경찰청 방침”. 아사히 신문. 1985년 5월 20일.
  11.  "Red Army guerrillas arrested" . BBC.com. 18 March 2000. Retrieved September 6, 2011.
  12.  히즈보라가 보호하에 둔 「오카모토 고조」의 이용 가치「포사이트」 2002년 7월호
  13.  오쿠다이라 전 적군파 간부의 무덤 앞에서 라이브 레바논, 오카모토 용의자도 모습」 「47NEWS」( 공동 통신사 ) 2010년 4월 29일. 원래 2010년 8월 25일 현재 아카이브.
  14.  “두뇌 경찰·PANTA씨 오쿠다이라 전 간부의 무덤 앞에서 라이브” . 스포니치아넥스 . 공동 통신사 . 2010년 4월 29일 .
  15.  「전 일본 적군 『오카모토 고조』가 레바논에서 빠져들었던 『스카이프』, 『주간 신조』 2011년 10월 13일호
  16.  전 일본 적군의 오카모토 공삼 용의자, 집회에 모습 망명처의 레바논에서 ” “아사히 신문” 2022년 5월 31일. 2025년 4월 10일에 확인함.
  17.  텔아비브 공항 난사 사건으로부터 49년 전 일본 적군 “오카모토 공삼” 용의자의 지금 ”. 데일리 신조 . p. 3 (2021년 5월 30일). 2021년 6월 1일 시점의 오리지널 보다 아카이브.2026년 7월 24일 열람.  
  18.  팔레스타인에게 뼈를 괴롭히고 싶다 · 일본 적군 오카모토 용의자가 사과 [ 링크 끊어짐 ] - 중국신문(2016년 5월 14일 열람)
  19.  텔아비브 공항 난사 : 오카모토 용의자 “한번은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다” 매일 신문 2017년 5월 30일
  20.  “레바논의 일본 적군 지원인가 계좌 부정 개설 혐의로 좌익지 사장을 체포 효고현 경” . 산케이 신문 . 2017년 11월 21일 . 2019년 11월 10일 열람 .
  21.  “전 일본 적군 멤버 지원으로 카드 사취 “인민신문” 사장에게 유죄 판결 고베 지재” . 산케이 신문 . 2018년 7월 18일 . 2019년 11월 10일 열람 .
  22.  [독자]ANN카메라가 포착한 국제 수배중의 「일본 적군」멤버 오카모토 공삼 용의자의 근영(2022년 5월 31일) - YouTube [ 링크 끊어짐 ]
  23.  로드 공항 난사로부터 50년에 집회 ”. 로이터 (2022년 5월 30일). 2023년 2월 8일 열람.
  24.  Gilad Cohen 🇮🇱 [@GiladCohen] (2022년 5월 31일). “1972년 로드 공항에서 발생한 난사 사건으로부터 50년을 기념하는 집회에 참가한 오카모토 공삼 용의자” . X(구 Twitter) 보다 2026년 7월 24일 열람.
  25.  시사통신 국제보도부 “ 오카모토 공삼 용의자 사망 로드 공항 난사의 일본 적군 멤버, 78세-레바논 ” “시사닷컴” 시사통신사, 2026년 7월 24일 . 2026년 7월 24일에 확인함 .
  26.  오카모토 공삼 용의자가 레바논으로 사망 로드 공항 난사 사건의 실행범:아사히 신문 ”. 아사히 신문 (2026년 7월 24일). 2026년 7월 24일 열람.
  27.  Liban  : décès du Japonais Kozo Okamoto, miembro de l'Armée rouge japonaise et auteur d'un attentat meurtrier en Israël en 1972 - RTBF Actus(프랑스어). RTBF (2026년 7월 23일). 2026년 7월 23일.
  28.  “레바논에서 오카모토 공삼 용의자의 장례 “마지막 순간까지 팔레스타인과…” 사인은 폐의 합병증” . 텔레 아침 news .
  29.  “레바논에서 오카모토 공삼 용의자의 장례 팔레스타인 조직 발표 수도의 모스크를 출발, 매장된다” . 산케이 신문 . 2026년 7월 25일 . 2026년 7월 25일 열람 .
  30.  결착~오카모토 고조와 와카마츠 타카지의 40년~
  31.  「와카마츠 타카지와 적군 레드 아미」하라부치 카츠히토, 세계서원, 2016년 7월
  32.  「3 명의 여권 사진 제판으로 정교한 위조」 「아사히 신문」1977 년 6 월 2 일.
  33.  「이스라엘 대사 와비상 오카모토 공삼의 아버지」 「아사히 신문」1977년 6월 5일.
  34.  이스라엘에서 본 '일본 적군'의 수수께끼 50년 전의 공항 난사 사건, 이스라엘인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 AERA.dot (2022년 6월 17일). 2022년 6월 17일 열람.
  35.  오카모토 공삼 텔아비브 공항 난사 50년 본인이 수기로 밝힌 “일본을 나와서 사건을 일으킬 때까지” ”. 데일리 신조 (2022년 5월 30일). 2022년 6월 17일 열람

관련 항목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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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모토 고조 지원 · 오리온 모임

오카모토 고조란 무엇인가
오리온 모임이란?
팔레스타인 해방 투쟁의 역사
리다 투쟁이란 무엇인가?
이스라엘 군사재판의 의문(쇼지히로 변호사)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일본 적군의 역사
선전의 최선의 형태란?
2020 리다 투쟁 48주년 어필
오리온회 블로그에




오카모토 고조란 무엇인가



★오카모토 고조란

 오카모토 고조는 1947년 구마모토에서 태어났다. 이른바 단괴의 세대로 당시 전국 대학에서 싸우고 있던 전공투 운동에 참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후 개별 학원 투쟁에서 싸움의 장소를 아랍 팔레스타인에 찾아 해외로 건너갔습니다.

 그리고 1972년 5월 30일, 이스라엘·리다 공항(현 벤글리온 공항)에의 결사 작전을 오쿠다이라 츠요시, 야스다 야스유키의 일본인 3명과 PFLP(팔레스타인 해방 인민 전선)와의 공동 군사 행동으로서 싸웠다. 오쿠다이라와 야스다는 그 자리에서 사망, 오카모토 공삼은 이스라엘 군에 사로잡힌 몸이 되었다.

  이스라엘군에 사로잡힌 오카모토 고조는 군사법정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아 이스라엘군 보안부의 상상을 끊는 보복과 정보 수집을 위한 공격에 계속 노출되었다. 강제자백을 끌어내기 위한 고문은 국제조약을 무시한 격렬함으로, 장기간에 걸친 구금생활 때문에 그의 심신은 파괴되어 정신분열증의 병리를 보였다 . 1985년 이스라엘 국가의 안전을 맡는다는 구실로 인근 나라에 있는 난민 캠프와 팔레스타인 저항세력에 공폭을 계속하고 있던 이스라엘 군기가 격추되어 3명의 파일럿이 포로로 되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오카모토 공삼의 석방을 거절해 온 이스라엘은 국제적십자의 중개로 팔레스타인의 옥중자와 파일럿의 '포로 교환'에 따라 오카모토 공삼을 비롯한 다수의 팔레스타인 아랍 전사들은 레바논으로 돌아왔습니다.       (사진은 1972년의 오카모토 고조)



★레바논에서의 오카모토 고조와 정치 망명

이스라엘 감옥에서 13년간 심신 모두 상처를 입은 오카모토 고조는 동료들과 재활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1997년, 생활을 함께 하고 있던 일본 적군 5명이 일본 정부의 의향을 받은 레바논 국가 보안국에 체포되었습니다. 오카모토 공삼을 제외한 4명은 강제 송환되는 사태가 되었습니다만, 그 중에서 그만은, 레바논 민중의 송환 저지의 항의 행동과 법조계의 진력으로 일사 불재리를 법적 근거로 해, 또한 전쟁 포로의 교환으로 석방된 것이 법적으로 확인되어 레바논 당국에 '아랍의 해방 투쟁의 영웅'으로서 정식으로 정치 망명이 인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현재의 재활요양생활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레바논 정부에 압력을 가하는 일본 정부의 움직임에 위협받고 있습니다. 이 움직임을 주시하고, 일본 정부가 「신품 구속」의 거에 나오지 않도록 감시해 나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오카모토 코조의 현상

현재, 그가 체재하는 레바논에서는 인접한 시리아 내 전격 격화의 영향으로, 「IS」세력이 피난민과 함께 유입되어, 레바논 정부군, 「하나님의 당」( 호즈볼러 ) 부대, 그리고 다양한 여러 조직과의 사이에서 전투가 빈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들어가듯이 이스라엘의 때때로 겹치는 가자 공격과 학살 행동이 있어, 「하나님의 당」( 호즈볼러 ) 공격의 가능성이 소문되어 긴장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정세하에서도, PFLP의 동지적인 협동자들의 지원으로, 그의 투병·생활 체제는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의 안전을 뒷받침하는 것은 일본인 3 전사들의 리다 투쟁에서 뿌리 내려온 일본과 아랍 민중의 흔들림없는 연대 의식입니다.

 그의 투병·생활 체제가 유지할 수 있는 또 다른 요소는 그 아랍의 민중의식을 반영하여 레바논 정부가 처음 인정한 '정치 망명'을 유지하는 입장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집회나 친구에게 보낸 메시지에서도, 오카모토 코조가 건강하게 보내고 있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위성 방송에서 뉴스와 스모를 보거나 일본의 정치 동향과 사회 정세도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 투병·생활의 개조 협동자란 아랍어로 의사 소통이 되어, 매우 과묵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일본어에 의한 대화나 생활의 기미를 함께 하는 동료가 필요하게 되는 것에,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것은 정신 질환을 개선하는 큰 열쇠가되기 때문입니다.

2개월에 한 번의 정기 건강 진단 등으로 정신분열증의 증상이나 다른 병에 대한 치료는 현지 의사를 포함한 지원 체제가 확립되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투병·생활의 개조 협동자와의 관계도, 담당자의 인간적인 정직함으로 신뢰 관계가 구축되어 안정되어 있습니다.



지금, 오카모토 씨의 투병·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 묻고 있는 것은

●생활 유지를 위한 비용과 물자 구입 비용

● 자원봉사자로서의 방문단

●일본 정부의 숨쉬는 오카모토씨의 송환 요구의 저지입니다.



세계는 지금, 많은 대의 있는 「민중의 싸움」 「민족의 싸움」을 「테러리즘」으로서 일도 양단으로 하고 있습니다. 오카모토 씨가 맡은 리다 투쟁도 또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한번 싸움의 전모를 생각해 보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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