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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21

일제하 평양부 개발과 ‘ ’조선인 엘리트의 지역정치 ‘, 2023

박 사 학 위 논 문

일제하 평양부 개발 과 ‘ ’조선인 엘리트의 지역정치 ‘ ’

고 려 대 학 교 대 학 원, 한 국 사 학 과

주 동 빈
2023 8 년 월



====

초록

본 연구는 식민지기 개발정책 개입을 통한 조선인 엘리트 주도 지역정치 의 최대 ‘ ’
치에 주목했다 지역정치 란 지역개발 또는 집합재 배분을 둘러싼 권력 획득 및 조정과 . ‘ ’
정을 가리킨다 동시대 일본 지방자치는 신흥 지역상공업자들의 시 의회 장악 고유사무 . ,
로서 토목비 지출 증대 시 세입 중 가장 고수익인 시영전기 운영이라는 요소를 통해 , 3
확대되었다 한국근대사 연구에서 평양 조선인 지역엘리트는 개신교를 일찍 받아들인 .
선구적 시민이자 식민지 지배기구와 거리를 둔 민족주의자로 인식되었다 반면 지역정 . ‘
치 를 보면 일제하 평양부는 오히려 로컬 스케일에서 조선인 지역엘리트가 여론을 결집 ’ ,
하고 개발거점을 확보하여 부 예산정치를 주도한 곳이었다 평양은 조선의 부 협의 회 . ( )
중 유일하게 민선 전환 후 조선인 유권자가 번의 선거 중 번 과반수를 차지했다 식 8 7 .
민지 조선의 부 협의 회에서는 중소상공업자와 전문직 즉 중간계급으로서 지역엘리트가 ( ) ,
주로 선출되었다 즉 평양부 협의 회는 조선인 지역엘리트 과두제의 여론적 기반이었다 . ( ) .
이 여론을 기반으로 조선시가지계획령 의 적용을 받지 않은 조선인 교외 부 주도 시가 「 」
계획 조선 유일의 부영전기 확보가 이루어졌다 년 동우회 계열과 같 , . 1920~1937 ( ) 同友會
은 조선인 민족주의 그룹은 주요 조선어 민간지 지국 개 중 개를 점유하면서 도시 지 3 2
역정치에 개입했다 즉 본고의 목적은 조선인 주도 도시 지역정치 의 최대치를 식민지 . ‘ ’
지배기구 조선인 지역엘리트 간의 세력 변화 계급 갈등 속에서 확인하려는 것이다 , , .
1914 0.5% 년 부제 시행으로 평양부는 종래 행정구역의 로 대폭 축소되었고 일본 「 」
인 인구가 인 식민지 도시 로 바뀌었다 조선인 자산가들이 많았지만 평양에서 도 20% ‘ ’ . ,

시 지역 자치 논의를 다루는 상공단체 교육단체 도시 지방의회 중 부협의회에서만 ‘ ’ , ,
조선인이 동일한 수로 임명되었다 대한제국 말기 계몽운동 세력이 임명되었지만 대다 . ,
수가 남부 역전 신시가 일본인 시가 에 세거 해온 하급 토착 관리들이었다 ( ) (‘ ’) ( ) . 驛前 世居
이들은 단군ㆍ기자 계승 의식 을 강하게 가지고 전릉 참봉의 세습을 명예롭게 생 ‘ ’ ( ) 殿陵
각했다 부협의회 안건은 대개 예산안 심의였고 이 시기에는 한정적이었다 일본인이 . , .
일찍 이주한 인천 부산에 비해 재정 규모는 소액이었다 개발은 신시가를 중심으로 진 , .
행되었고 독립세였던 부 영업세가 증징되었다 따라서 제 차 세계대전에 따른 일본 국 , . 1 ‘
책 의 변화로 대평양 론이 제기되었지만 그 재원의 출처는 의문으로 남았다 ’ ‘ ’ , .
이후 국책 주도 개발의 실패로 조선인 지역엘리트가 여론을 주도했다 제 차 세계 ‘ ’ . 1
대전의 호황에 따라서 년 일본 국책 회사 주도의 동평양 시가계획 평양대안시가계 1919 ‘ ’ (「
획 이 시도되었다 ㆍ 운동 직후였기 때문에 조선인 유인책이 포함되었지만 구체적이 」) . 3 1
지 못했다 그러나 이 계획의 전제였던 동양척식 의 황산암모늄 생산 실패와 남만주철 . ㈜
도 의 조선철도 위탁경영 종료 결정 주된 담세자로서 대일본제당 의 행정구역 포함 ㈜ ㈜ ,
거절 년 평양 대수해로 동평양 시가계획은 무위로 돌아갔다 대신 년 워싱턴 , 1923 . 1922
회의 이후 동우회의 구시가 조선인 시가 상공업자 중심 후보단일화를 통해 평양부협 (‘ ’)
의회는 조선인 동수 혹은 과반수가 되었다 또한 증가한 조선인 공장주와 전등 사용자 .
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년 조선 유일의 전기부영화 운동이 성공했다 그해 조선인 1927 .
의원들은 동력 전등 요금의 일괄 인하에 성공했다 다만 전기부영을 주도한 일본 , 20% .
인 평양부윤은 전기적립금을 구시가 북부 교외인 서평양시가계획 재원으로 전용했다.
1929~1937년 평양 조선인 지역엘리트는 제한적인 경제적 수혜는 얻었지만 세력이
약화되었다 년 평양부는 조선 최대의 인구밀집도를 보였다 부 계획으로 북부에 시 . 1929 .
가지를 조성했으며 남부 신시가의 재조일본인들은 반발했다 반면 동우회는 식민지 지 , .
방제도 변경 노동쟁의 강화 조선인 상공업자의 지지세 약화로 주도권을 상실했다 , , . 193
1, 1935 , 4 년 부회는 일본인 우세였고 공황과 재조일본인의 방해로 서평양시가계획은 년
지연된 년 준공되었다 그렇지만 조선시가지계획령 이전의 시가계획은 지주친화 1935 . 「 」
적이었고 평양 북부는 조선인 부동산 부자와 메리야스 고무공장주 중심으로 새로이 조 , ,
성되었다 한편 부영전기는 년대 초 조선총독부 전력정책 변화로 다시 사영화 . 1930 ‘ (私營
化)’ . 될 위기에 처했다 부영전기를 둘러싸고 조선인 상공업자들은 동력요금 인하를 바라
면서 재조일본인의 부 독립세 인하와 조선인 전문직 특히 변호사 들의 사회정책적 주장 ( )
과 부딪쳤다 결국 년 이후 조선인 상공업자들의 요금 인하를 위한 사영화 지지와 . 1936
평양부회의 수적 열세로 년 부영전기는 동양척식 계 회사로 합병되었다 1938 . ㈜
전시체제기 평양부 개발은 군수공업화와 조선인 주도 자치 기구의 종속화로 요약할 ‘ ’
수 있다 동양척식 계의 주도로 중화학공업화 중심 평남 광역 개발 과 동평양 중심 . ‘ ’ ㈜
‘ ’ . 횡단형 개발 이 시행되었다 평양상공회의소와 평양부회의 조선인 상공업자들은 제한선
거권에도 유권자 숫자의 우위를 차지했지만 제도 변화와 동양척식 계열의 영향력 확 , ㈜
대로 지역 자치 기구는 그들에게 종속되었다 평양시가지계획은 경성과 달리 부회 의원 ‘ ’ .
들의 입장이 자문안에 일부 반영되었지만 결국 국책 회사와 일본군을 위한 동평양 편 , ‘ ’
중 개발로 귀결되었다 평양 서부의 공업지구 조성계획 구시가와 동평양 연결로인 제 . , 2
대동교 부설도 모두 형해화되었다 또한 평양부는 부영전기가 동양척식 계열 서선합동 . ㈜
전기 로의 합병대가로 최대 주주의 자리를 얻었다 그러나 배전회사의 증자 과정 . ( ) 增資㈜
에서 평양부의 신주 인수를 위한 부채가 국책 의 이름으로 불인가되어서 평양부 ( ) ‘ ’ , 新株
회의 경영 개입과 주요 재원으로서 주주배당금 추가 확보는 난관에 부딪쳤다.
요컨대 식민지기 평양은 ㆍ 운동 이후 조선인 지역엘리트들이 지방의회를 통해 식 3 1
민지 개발을 주도하려고 했던 부였다 그들은 조선 유일의 조선인 교외 개발 서평양 . (‘ ’,
실제로는 평양 북부 과 부영전기 운영이란 계급적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조선인 주도 ) .
도시 지역정치 는 지역엘리트 과두제였고 가지 딜레마를 가졌다 개발에 개입하기 위 ‘ ’ 3 .
해서 정통성이 결여된 식민지 지배기구와 끊임없이 접촉해야 했으며 조선인의 권리 강 ,
화는 여러 방법으로 제약받았다 또한 잔존하는 혈연ㆍ지연이란 사회관계망 속에서 지역 .
엘리트 여론을 규합해야 했다 마지막으로 조선인 지역엘리트와 노동자ㆍ빈민 간의 계급 .
갈등 속에서 민족적 이익 이란 구호를 견지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전시체제기 말기 ‘ ’ .
평양 조선인 지역엘리트들은 식민지 지배기구로부터 양자 취급 을 받는다고 절규했다 “ ” .
또한 분단화 과정은 북한에서는 조선총독부에 협력하는 친일파 남한에서는 개항 이후 ,
개인 사업과 계몽운동에만 몰두한 시민으로 평양 지역엘리트의 상을 고착화했다 이 과 .
정에서 일제하 평양부 협의 회가 가진 정치성은 오늘날까지 망각되었다 ( ) .

주제어: , ‘ ’, , , , 식민지 개발 지역정치 실력양성론 조선인 지역엘리트 중간계급 엘리트

과두제 부 예산정치 개발거점 시가 지 계획 부영전기 평양부 협의 회 동우회 , , , ( ) , , ( ) , ( ) 同友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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