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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0-03

내가 겪은 손석희, 김어준, 봉지욱, 조갑제, 그리고 그 밖의 인물들 < 평화나무

[기고] 내가 겪은 손석희, 김어준, 봉지욱, 조갑제, 그리고 그 밖의 인물들 < 칼럼 < 쩌날리즘 < 기사본문 - 평화나무

[기고] 내가 겪은 손석희, 김어준, 봉지욱, 조갑제, 그리고 그 밖의 인물들
기자명 평화나무
입력 2026.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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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 사회에서 오보와 음모론에 대한 비판 여론이 본격적으로 일기 시작한 것은 다소 늦었지만, 매우 반가운 일입니다. 특히 지난 10여 년 동안 음모론과 오보를 양산해 온 김어준이 비판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은 무척 고무적인 변화입니다.

저 또한 정정과 사과를 거부한 거대 언론과 유튜브 방송이 조직적으로 생산한 오보의 피해자입니다. 만일 그 피해가 단순한 개인의 명예훼손이나 사적 손해에 그쳤다면, 분하더라도 잊고 살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그 오보가 조직적으로 은폐되는 과정에서,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민간인 학살이자 가장 숭고한 시민 항쟁인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조사가 심각하게 훼손되었다는 점입니다.

이야기는 다소 길고 복잡합니다. 그러나 사안이 엄중하고, 손석희·김어준·봉지욱 등 등장인물의 면면도 결코 가볍지 않은 만큼, 독자 여러분께서 끝까지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1. ‘꿈의 증인’ 김용장의 등장과 명백한 거짓말

어쩌면 대중의 망각과 은폐야말로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이었고, 그들은 이미 그 목적을 달성했는지도 모릅니다. 이제 사람들의 기억에서 희미해진 5·18의 이른바 ‘꿈 같은 증인’ 김용장 사건이 바로 그렇습니다.

2019년 3월부터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와 손석희의 ‘JTBC 뉴스룸에 출연한 김용장은, 1980년 당시 광주에서 근무한 미 육군 군사정보관을 자처하며 5·18에 관한 온갖 주장을 쏟아냈습니다.
2019년 5월 13일 손석희 앵커가 진행하는 JTBC 뉴스룸에 출연한 김용장 씨 (출처=JTBC)

당시 보안사 요원이었던 허장환과 함께 등장한 김용장의 발언은 처음부터 거짓임이 명백했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사실관계부터 틀렸기 때문입니다. 김용장은 1980년 당시 광주에 CIA 요원이나 미 국무성 직원이 없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광주에는 미 국무성 소속 미국문화원, 즉 USIS가 엄연히 존재했고, 당시 문화원장은 현재 미국 버지니아주에 생존해 있습니다. 진짜 미국 정보요원이라면 문화원이 어느 기관 소속인지 모를 리 없습니다. 아주 기초적인 팩트체크만 거쳤어도 일어나지 않았을 소동이었습니다.

실제로 이 사기극을 걸러낸 언론인들도 있었습니다. 허장환은 김용장을 앞세워 MBC ‘PD수첩’에 먼저 접촉했으나, 정황을 판단한 ‘PD수첩’ 측은 이를 거절했습니다. 오랫동안 5·18 탐사보도에 앞장섰던 광주MBC 역시 신빙성이 낮다고 보고 단신으로만 다루며 선을 그었습니다.

그러나 이 가짜 증언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곳이 바로 JTBC의 손석희, 이규연, 봉지욱이었습니다. JTBC는 제대로 된 검증 없이 2019년 3월부터 ‘뉴스룸’과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를 통해 김용장의 인터뷰를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그 결과 사회적 파장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습니다.

2. 본질을 훼손한 복잡한 거짓말과 광주의 열광

40여 년 동안 5·18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에 모든 것을 걸어온 광주는 누구보다 뜨겁게 반응했습니다. 5·18 생존자와 유가족들에게 모든 의혹을 단숨에 해결해 줄 것처럼 보였던 ‘미 군사정보관’의 등장은 그야말로 꿈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허장환과 김용장의 증언은 오히려 광주민주화운동의 본질을 깊이 훼손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사복 차림으로 투입된 특수요원, 이른바 ‘편의대’가 시민들을 선동해 무기를 탈취하고 시설에 방화하게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시민군이 자발적으로 무장해제를 시작하자, 시민군의 폭력성을 부각하려던 전두환의 의도에 따라 계엄군이 서둘러 유혈 진압에 나섰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시민들의 자발적이고 의로운 항쟁이라는 5·18의 본질을 부정하는 주장입니다. 또한 무기 회수를 거부하고 마지막까지 전남도청을 지킨 시민들을 모욕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소설가 한강의 표현대로 “삶이 장례식이 되어버린 사람들”을 결과적으로 조롱한 셈입니다.

그럼에도 발포 명령자 규명과 미국의 개입 여부 등 풀리지 않은 의문 속에서 평생 고통받아 온 유족과 피해자들에게, 김용장의 거침없는 발언은 강렬한 열광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3. 언론의 상업화와 최용주의 이상한 제안

진상규명을 향한 유족들의 간절한 염원을 ‘가짜 증인’을 통해 상업화하려 한 손석희, 이규연, 봉지욱의 행태야말로 진짜 문제였습니다.

그해 3월 말, 5·18기념재단 상임이사와 JTBC 취재팀은 김용장이 거주하던 피지로 건너가 그의 귀국을 설득했습니다. 이후 봉지욱과 취재팀은 미국 현지 취재를 떠나는 등 일련의 촌극을 이어갔습니다.

이 비극적이면서도 희극적인 과정에서 저에게도 석연치 않은 제안이 왔습니다. JTBC의 자문역으로 미국 취재에 동행하기로 한 최용주가 저에게도 동참을 권유한 것입니다.

최용주는 1980년 당시 전남대 총학생회 간부였으며,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의 권유로 도청을 떠났던 인물이었습니다. 항쟁 이후 복역을 마치고 미국에서 농촌사회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그는, 은퇴 후 5·18기념재단의 권유로 관련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저는 깊이 있고 깔끔한 그의 연구 실적을 존경했습니다. 평소에도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수많은 5·18 자료를 공유하던 사이였습니다. 그렇기에 김용장 사건이 터졌을 때 가장 먼저 의논한 사람도 최용주였습니다.

저는 그에게 미국 국방정보원, 즉 DIA와 육군 정보국 INSCOM의 비밀 해제 문서를 근거로, 당시 광주에서 근무한 한국인 군사정보관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짚으며 의구심을 전했습니다. 최용주는 별다른 반론 없이 유보적인 태도를 보이면서도, 저에게 보조 취재 동행을 제안했습니다. 그의 의도가 의아했던 저는 결국 이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4. 첫 번째 경향신문 기고와 JTBC의 부실 보도

JTBC가 5·18 주간에 맞춰 ‘김용장 속편’을 제작하기 위해 미국 취재를 오가는 동안, 저는 INSCOM과 DIA에 김용장 관련 정보공개, 즉 FOIA를 청구하고 답변을 기다렸습니다.

5월 초 귀국한 김용장은 국회와 광주에서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쓴 보고서가 지미 카터 대통령에게까지 보고되었다는 황당한 주장을 반복하며 헤드라인을 장악했습니다.

그런데 더 황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JTBC 취재진은 백악관 NSC 아시아 안보 담당이었던 도널드 그레그와의 인터뷰를 취소한 상태였습니다. 김용장의 보고서가 실제로 백악관까지 올라갔다면, 이를 검토했을 핵심 인물이 바로 그레그였는데도 말입니다. 훗날 봉지욱은 예산 부족으로 인터뷰를 취소했다고 변명했습니다. 그러나 대형 방송사가 예산 핑계를 대는 것도 모자라, 그런 빠듯한 예산으로 저에게까지 동행을 제안했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기만이었습니다.

상황이 다급해지자 저는 최용주에게 미국 취재에서 김용장의 신원을 확인했는지 물었습니다. 그는 망설이다가, 1980년 당시 DIA 한국지부장이었던 제임스 영을 만나 확인했으나 그가 김용장을 모른다고 답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습니다. 저는 경향신문 손제민 기자의 도움으로 2019년 5월 16일 오후, 김용장 주장의 모순을 지적하는 기고문을 인터넷판에 게재했습니다.

그날 저녁 봉지욱의 미국 취재분이 방영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글이 올라가자마자 저는 최용주에게 링크를 보냈습니다. 그러자 최용주에게서 쌍욕이 섞인 격앙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자신이 믿고 말해준 ‘신원 미확인’ 사실을 방송 전에 먼저 폭로해 신의를 저버렸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는 방송에서 이 사실이 다뤄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방영된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는 제임스 영의 증언과 자막을 매우 모호하게 처리했습니다. 시청자들이 진실을 정확히 알 수 없도록 사실상 은폐한 것입니다.

오히려 그 방송은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김용장이 군사정보관 시절 받았다는 표창장을 화면에 비춘 것입니다. 정지화면으로 확인해 보니 그것은 군사정보관 표창이 아니라, 계약직 통역관, 즉 Language Specialist에게 수여된 근속 감사장이었습니다. 저는 즉시 통역관과 군사정보관의 직무 차이에 대해 미 정보기관에 추가 정보공개를 요청했습니다.

5. 김어준의 가짜뉴스 비호와 두 번째 폭로

첫 기고 이후 김용장과 허장환의 신뢰성은 타격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5·18의 한 서린 감정 속에서 진실만을 갈구하던 일부 대중은 저에게 살해 협박 메일까지 보내며 비난했습니다.


그렇게 묻혀가던 가짜 증인들을 다시 살려낸 인물이 바로 김어준이었습니다. 김어준은 자신의 유튜브 채널과 TBS ‘뉴스공장’에 김용장을 세 차례나 출연시켰고, 유례없이 공손한 태도로 그를 비호했습니다.

‘뉴스공장’ 인터뷰에서 김어준은 제 기고문을 의식한 듯 매체명을 숨긴 채 질문을 던졌고, 김용장은 본질을 비껴간 변명으로 일관했습니다. 그러나 본질은 분명했습니다. 미 군사정보관을 자처한 사람이 1980년 광주에 미 국무성 소속 문화원장이 상주하고 있었음에도 “국무성 직원이 없었다”고 공언한 무지와 사기성, 바로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봉지욱과 최용주의 미국 취재 또한 코미디에 가까웠습니다. 제임스 영 전 DIA 한국지부장은 김용장의 사진을 알아보지 못했고, ‘한국인 군사정보관’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증언했습니다. 그러나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는 영어를 알아듣는 사람만 눈치챌 수 있는 자막과 오디오의 괴리를 이용해 이 사실을 비겁하게 얼버무렸습니다.

제 경고를 무시하고 무리한 동행을 제안했던 최용주의 비상식적인 행각을 보며, 저는 답답함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5월 말, 미 정보기관으로부터 “김용장이 작성했다는 문건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공식 답신을 받았습니다. 미국 정보계의 관례상, 30년이 지난 문건에 대해 비공개 사유가 아닌 ‘존재 자체의 부재’를 통보하는 것은 그 문건이 아예 없다는 확실한 증거였습니다. 여기에 더해 저는 INSCOM 공보국을 통해 계약직 통역인 ‘언어전문가’가 ‘군사정보관’으로 직책 전환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최종 답변을 5월 30일 받아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2019년 6월 3일, 저는 두 번째 경향신문 기고를 냈습니다. 완벽한 소스를 토대로 김용장의 신분 허위와 보고서 부존재를 공식적으로 논증한 글이었습니다.

그러자 광주 오월단체 등 제도권은 격렬하게 분노하며 저를 비난했습니다. 저는 유족들의 아픔을 생각해 쏟아지는 명예훼손성 반론과 공격을 묵묵히 감내했습니다. JTBC는 이 내홍을 즐기기라도 하듯 침묵을 지켰습니다.

이 와중에 뜻밖에도 보수 언론인 조갑제가 제 글을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소개하며 김용장이 가짜임을 강조했습니다. 5·18 당시 광주를 직접 취재하고 부마항쟁 기록 등을 남겼던 그가 최근 정권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언론 본류로 돌아온 것을 두고 “변했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변한 것은 그가 아니라 세상입니다.

또한 그해 8월, MBC 박건식 PD는 ‘월간 신문과방송’ 기고를 통해 ‘PD수첩’이 이미 김용장 일행의 신빙성을 문제 삼아 아이템을 거절했었다는 사실을 공식 확인해 주었습니다.

6. 전두환의 명예훼손 소송과 봉지욱의 안면몰수

JTBC의 침묵이 이어지던 2019년 12월, 봉지욱에게서 이메일이 왔습니다. 전두환이 자신과 JTBC를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으니 자술서를 써 달라는 읍소였습니다.

전두환 측이 내세운 증거가 제 기고문과 조갑제, 박건식의 글뿐이니, 제가 어렵게 수집한 미 정보기관의 문건 내용을 스스로 부정해 달라는 황당한 요구였습니다. 자신의 오보가 자초한 재판임에도, 그 태도는 뻔뻔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놀랍게도 MBC 박건식 PD는 동종 의식과 대학 동문 의식 때문인지 봉지욱을 위해 자술서를 제출해 주었습니다. 이는 한국 언론계의 명백한 병폐입니다. 아무리 악인일지라도 사법 처리는 공정해야 합니다. 전두환이기 때문에 더더욱 공정한 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광주정신입니다.

결국 법원은 보도의 진위 여부는 판단하지 않은 채, 이를 언론의 보도 자유 영역으로 인정하며 JTBC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판결 직후 봉지욱의 태도는 읍소에서 뻔뻔한 조소로 돌변했습니다. 제가 페이스북 메시지로 오보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자, 그는 “뭐 하시는 분이냐”며 인신공격을 퍼부었습니다. 나아가 제가 귀국하면 공항에서 체포되도록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겠다고 협박했습니다. 명예훼손죄의 악용을 막아야 할 기자가 도리어 이를 협박 수단으로 삼는 모습은 제정신이라고 보기 어려웠습니다.

이후 메일로 말다툼이 이어지자, 그는 난데없이 제가 가진 김용장 관련 자료를 요구했습니다. 제가 뉴스본부장을 참조인에 넣어 함께 보내겠다고 제안하자, 그는 “그런 자료 없어도 먹고사는 데 지장 없다”며 신경질적으로 거부했습니다.

7. 뉴스타파 이적과 반복되는 오보의 굴레

봉지욱은 실제로 먹고사는 데 지장 없이 승승장구했습니다. 손석희, 이규연, 봉지욱이라는 견고한 카르텔에 대다수 언론이 침묵했기에, 제가 이 사실을 호소할 곳은 조선일보나 프레시안 정도뿐이었습니다.

그러던 2022년 11월, 봉지욱이 갑작스럽게 ‘뉴스타파’로 이적했습니다. 저는 평소 노동자의 권익을 옹호해 온 뉴스타파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삼성 반도체 직업병 피해자 단체인 ‘반올림’의 영문 블로그를 7년간 자원봉사로 관리해 온 인연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뉴스타파 김용진 대표에게 봉지욱의 과거 오보 행적을 고발하는 메일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답장은 없었습니다.

이후의 사태는 모두가 아는 대로입니다. 봉지욱과 뉴스타파는 대선 정국에서 윤석열 후보 검증과 관련해 또다시 대형 오보 논란을 일으켰고, 정권의 압수수색을 받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들의 오보 행태가 아무리 심각하다 해도, 국가 권력에 의한 언론 탄압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시적으로 고발을 중단했습니다. 뉴스타파는 해외 언론계와의 연대에 기대를 걸었지만, 취재 소스였던 신학림 전문위원이 김만배로부터 거액의 돈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면서 국제적 연대의 동력은 상실되었습니다.

결국 이들을 구한 것은 법정 공방 속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민초들의 지지였습니다. 최근 뉴스타파를 사퇴한 봉지욱은 페이스북에서 내부 구성원들을 향해 ‘검사 편’이라며 날 선 비판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과오를 깨닫지 못한 듯합니다.
(제공=설갑수)

결론: 5·18 진조위의 조직적 은폐와 끝나지 않은 책임 추궁

이제 글을 다시 출발점인 5·18로 되돌려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시사에 밝은 이들도 김용장 사건은 기억할지언정, 특별법으로 구성되었던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 이하 진조위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2019년 12월 출범해 2023년 말까지 200억 원 이상의 혈세를 쓴 진조위는 무능하다는 비판 속에 별다른 성과 없이 활동을 마쳤습니다.

진조위의 핵심 조사 대상 중 하나가 바로 김용장 증언의 진위였습니다. 실제로 진조위는 미국에서 검증 자료를 찾으려다 실패했고, 김용장을 직접 면담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진조위가 발간한 최종 보고서 어디에도 김용장의 이름이나 면담 결과는 단 한 줄도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발포 명령자 규명에 버금가는 중대한 과제를 다루고도 조사 내용을 통째로 들어낸 명백한 은폐입니다.

이 은폐의 중심에는 과거 JTBC 취재팀과 미국에 동행했고, 이후 진조위의 핵심 요직인 조사1국장을 지낸 최용주가 있었습니다. 공적 목표를 사적 이익과 안위를 위해 훼손한 참담한 사례입니다.

2024년 5월 광주MBC 보도에 따르면, 최용주는 당시 미국 관료들을 면담 조사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기밀 해제 문건 검토로 충분했다”고 변명했습니다. 미국 측이 대사관 전문을 재탕해 공개하는 수준에 그친 상황에서, 당시 국무성 한국국장 로버트 리치나 백악관 NSC의 도널드 그레그 등 생존해 있던 핵심 인물들을 서면조사조차 하지 않은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직무유기입니다.

현재 김용장 사건에 얽힌 JTBC 인사들 가운데 그곳에 남아 있는 이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짜뉴스로 만들어낸 나비효과에 대해 손석희, 이규연, 봉지욱, 김어준, 그리고 최용주는 지금이라도 역사와 대중 앞에 공개적으로 사과하고 해명해야 합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정의로운 5월의 봄은 다시 찾아왔습니다.

2021-12-24

[기고]설갑수는 5·18에 대해 전두환과 미국의 대변인을 하려는가 - 경향신문

[기고]설갑수는 5·18에 대해 전두환과 미국의 대변인을 하려는가 - 경향신문



설갑수는 5·18에 대해 전두환과 미국의 대변인을 하려는가

김용만 5·18역사왜곡처벌농성단2019.06.09 15:18 입력


■5·18진실규명을 밝히는 증언의 의미


5·18역사왜곡처벌농성단은 겨울의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과 때이른 여름 무더위 속에서도 6월7일 현재 117일째 국회 앞에서 천막농성중이다. 지난 2월8일 지만원 초청 국회공청회 이후 농성단은 망언3적 국회제명, 전두환과 지만원의 구속수사, 5·18역사왜곡처벌법 제정, 5·18진상조사위 즉각 가동이라는 목표 아래 활동해왔다. 특히 10차에 걸친 매주 목요일 5·18행동의 날에 구체적인 증언과 사실을 토대로 학살과 왜곡의 주범들에게 준엄한 질문을 던지며 굳은 의지로 투쟁을 계속해 왔다.



촛불혁명으로 당선되어 5·18정신을 헌법 전문에 올리겠다고 약속한 문재인 대통령은 5월 광주를 왜곡하고 폄훼하려는 시도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자 역사를 왜곡하고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특히 완전한 진상규명은 결코 진보와 보수의 문제가 아니라 상식과 정의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지만원 일당과 극우 유튜브들의 악의적인 왜곡선전이 기승을 부리는 중에도 올해 5·18은 의미있는 계기를 맞았다. 39년간 숨겨왔던 비밀을 고백한 전 미군 501정보여단 소속 김용장씨와 505보안대 특명반장 허장환씨의 매우 뜻깊고 소중한 증언에 뒤이어 오원기씨, 문용식씨, 최종호씨 등의 양심고백이 나왔다. 과거 힌츠페터 등 외신기자들의 활동과 헌틀리, 피터슨 선교사 부부의 증언, 이경남과 신순용, 최영신씨 등 계엄군의 용기있는 증언이 계속 나왔지만 올해의 증언은 양과 내용의 중요성에 있어 의미가 매우 컸다. 재조사에 대한 전국적 여론이 높아지고 5·18진실 말하기운동의 국민적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다. 이로써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던 80년 5월21일의 전남도청앞 집단학살은 그 실체에 한 발 더 다가섰다.


전두환이 이날 헬기를 타고 정오 무렵 광주에 도착해 K-57 제1전투비행단장실에서 정호용, 이재우 등과 회동한 것은 이제 뒤집을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 그리고 그 직후 헬기사격이 시행되었고, 도청 앞에서는 앉아쏴 자세로 집단발포가 이루어져 3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특히 앉아쏴 자세는 자위권이 아니라 사살명령 없이는 실행이 불가능한 조준사격이라는 증언에 주목해야 한다.


그동안 풀리지 않았던 200여명 행방불명자의 의문에 대해서도 이들의 소중한 증언으로 실체적 진실에 접근이 가능해졌다. 계엄군이 항쟁 진압후 가매장했던 시신을 파내 지문을 채취하고 광주 국군통합병원에 설치한 임시화장장에서 소각하는 한편 일부는 시청의 쓰레기차에 실어서 매장했고 일부는 수송용 헬기로 바다에 투기했다는 증언은 이제 검증과 조사를 통해 국가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5·18 증언에 대한 물타기 공격의 의도를 묻는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증언의 신뢰성에 대한 문제 제기를 포함한 물타기와 왜곡의 가짜뉴스 대량유포의 광풍이 불기 시작했다. 황석영의 이름으로 출간되었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영문 번역자라는 설갑수씨의 경향신문 6월3일자 기고문은 충격적이다. ‘5·18의 꿈같은 증인 김용장은 미 육군 군사정보관이 아니었다’라는 제목의 글은 바로 그날 뉴데일리 등 극우 인터넷 신문과 ‘펜 앤드 마이크’ 등 그동안 5·18 왜곡에 앞장서 온 극우 유튜브 채널에서 바로 인용되며 김용장씨 증언의 신뢰성에 커다란 흠집을 냈다. 이는 마치 도둑을 신고하니 어떻게 도둑인지 알았느냐, 당신이 누군데 도둑이라고 신고하느냐 시비를 거는 상황과 흡사하다.


설씨는 제목에 ‘…이 아니었다’라고 단정적인 표현을 썼고, 특히 ‘위증’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증언 전체가 가짜일 수 있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설씨는 누구이길래 이런 글을 무슨 이유로 이렇게 민감한 시기에 스스로 글을 써서 투고했을까? 그는 영문판 <Gwangju Diary>를 번역한 것도 일부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마저도 5·18기념재단으로부터 돈을 받고도 마치 받지 않고 봉사한 것처럼 선전해왔다가 나중에야 돈을 분배했다고 변명했던 사람이다. 2년전 5·18기념재단이 UN에서 열었던 학술회의에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대사가 출연한 것과 관련하여 마치 5·18기념재단과 광주를 대변하는 주요한 역할을 하는 것처럼 행세했다고 전해지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미군 정보보안사령부 등 민감한 기관에 개인적으로 질문해 알아낸 사실이라며 김용장씨의 신분과 증언의 신뢰성을 공격했다.


김용장씨의 신분에 문제를 제기한 설씨의 신분 역시 확실하지 않다. 그는 2017년 광주지역 매체에 자신을 ‘National Underwriter Magazine’의 기자였다고 소개한다. 설씨의 글이 몇 차례 실린 ‘Property Casualty 360’은 해당 매체의 생명보험 정보관련 에디션이다. 설씨는 또 자신이 국제노동조합총연맹(ITUC)의 컨설턴트이자 미국 Unite Here! 노조의 분석가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와 대립하는 측에서 확인해보니 두 곳 모두 설씨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는 회답을 받았다고 했다.


5·18농성단 측에 걸어온 전화에서 설씨는 단지 김용장씨가 미군 정보요원인지 아닌지가 5·18의 핵심적 진실을 좌우할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판단해서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 충심에서 우러난 일을 했을 뿐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기고문이 공개되었을 때 일어날 파장에 대해서도 이미 예상하고 있다고 답했다. 농성단 측은 이전 그의 행적을 미루어볼 때 그의 말과는 다른 의도가 숨어있을 개연성을 포착했다. 5·18관련자는 물론 시민단체와 민주시민들이 5·18의 진상규명에 몰두해 있고, 5·18에 관한 모든 정보를 보고받은 미국이 살인마 전두환을 지원한 책임이 몇몇 언론을 통해 제기되고 있는 시점이다. 

팀 셔록의 체로키 파일 분석에 의하면 5·18 당시 한국 주재 CIA 요원 그레그는 전두환에게 광주항쟁을 진압하라고 명령을 내린 1980년 5월22일 백악관 정책검토회의(PRC)의 핵심 참석자였고, 설씨는 그레그와의 밀접한 관계를 수차례 발언한 바 있다. 그런데 하필이면 지금 갑자기 김용장씨의 증언을 위증이라 하며 공격을 감행한 이유는 그가 가졌다고 주장하는 5·18에 대한 충심을 되려 의심케 한다. 오히려 5·18에 대한 책임을 일관되게 부인해온 미국의 태도에 편승 혹은 나아가 옹호하려는 숨겨진 다른 목적을 겨냥한 의도적 왜곡이 아닌가 하는 합리적 의심이 가능해진다.



■무지에 발붙인 은밀한 목적의 왜곡행위를 사죄하라


첩보의 세계에서 신분이란 비밀에 속한다. 국정원 직원들은 소속기관을 회사라고 부르고 서로 사장, 이사, 부장으로 부르며 특수임무의 경우는 더욱 남이 쉽게 알 수 없어야 한다. 설씨가 김용장씨를 단순 통역관 또는 언어전문가라며 정보관련 업무에서 배제된 것처럼 말하는 것은 한마디로 무지의 소치다. 본 농성단에 들어온 제보에 따르면 당시 광주 주재 미 501정보여단 요원이었던 그린 그릭(Green G. Greek)은 한국어를 알지도 못하고 배우려고도 하지 않았고, 처음 김용장씨가 통역관으로 들어간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실제 정보수집 현장에 투입되었음은 자명한 일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보고서 역시 김용장씨의 손에 의해 작성되었으며 본부와 본국 정부에 보낼 때는 그릭이 자신의 고유코드로 보냈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설갑수씨의 사실확인 요청에 미군 정보보안사령부(INSCOM) 공보국이 “민간인 언어전문가나 통역은 정보전문가로서 훈련받거나 고용되지 않는다”고 밝혔다고 한다. 신원이 불확실한 민간인에게 국가안보를 다루는 정보기관이 소속 요원에 대한 정보를 사실 그대로 공개할 리 없다. 정보기관 요원은 퇴임시 근무 중 취득한 정보를 일체 발설하지 않는 기밀보호 서약을 하고 나온다. 설갑수씨의 질문에 그들이 사실 그대로 말하리라는 것은 헛된 기대에 지나지 않는다.


5·18 당시 서울 공군 706보안부대장 운전병이었던 오원기씨는 최근 광주지검에 참고인으로 출석해 “1980년 5월21일 미 8군 용산 헬기장에서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이 귀빈용 공군 헬기에 혼자 탑승한 것을 목격했다”고 진술했다. 전두환이 5월21일 광주행 헬기를 타고 내린 곳의 증언이 둘 다 있는 것이다. 김용장씨의 진술 하나만으로 전두환의 광주 집단사살 명령이 증명된 것이 아니며, 이를 뒷받침하는 양심고백이 더 나와야 한다. 우리는 이미 80년 당시부터 5·18에 대한 모든 기록이 왜곡 조작되었고 그 이후 80위원회와 5·11대책반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광범위하게 조작과 증거인멸이 자행되었음을 알고 있다. 미국이 30년이 지난 기밀해제 자료들을 한국 측에 제공할 때도 검게 칠하고 가려놓은 채 복사해 보내서 진실을 확인하기 어렵게 만들었던 것도 그동안의 조사과정에서 드러났다.


설씨는 기고문에서 외국인 철수작전(NEO)을 부인하며 김용장씨가 거짓말을 한 증거로 선교사들의 증언을 제시했다. 그러나 당시 외무부의 기록에는 전시 또는 천재지변 상황에나 실시되는 자국민 소개에 미국인 23명 일본인 14명이 광주와 목포를 벗어난 것으로 되어있으며 한국 공군과 보안사 기록에도 증거가 남아있다.


더 이상 검증 없는 주장과 거짓에 5·18 진상규명의 초점이 흐려져서는 안 될 것이라고 설씨는 그의 기고문을 끝맺었다. 그러나 설씨의 주장은 최근 수세에 몰려있던 극우세력에게 반격의 가장 강력한 무기를 쥐어준 왜곡행위가 되었다. 이로 인해 39년간에 걸쳐 진실규명 투쟁을 해온 광주는 물론 대한민국 모든 민주시민의 가슴은 멍들었고, 앞으로 계속해서 나와야 할 계엄군 측의 양심고백과 증언을 주저하게 만드는 후유증이 예상된다. 5·18의 충심을 가장한 그의 행위는 더욱 가증스런 일이다. 설씨는 지금이라도 그의 감추어진 목적과 헛된 소영웅주의를 포기하고 5·18영령 앞에 무릎 꿇고 사죄함이 마땅하다.

2021-06-23

5.18단체 혁신 하겠다던 '조폭' 출신 문흥식 , 미국으로 도피한 까닭은? 설갑수 글

5.18단체 혁신 하겠다던 '조폭' 출신, 미국으로 도피한 까닭은?

5.18단체 혁신 하겠다던 '조폭' 출신, 미국으로 도피한 까닭은?

[기고] 광주 건물 붕괴 사고 배후 문흥식을 둘러싼 수상한 의혹들

설갑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영문판 번역자 
 2021-06-22 

문흥식(60) 5.18 구속부상자회 회장이 지난 9일 17명의 시민들이 죽고 다친 광주광역시 학동 4구역 재개발 건물 붕괴 참사와 관련 핵심인물로 지목되자, 경찰 수사를 피해 미국으로 도피해 세간에 많은 충격을 주고 있다. 그는 지난 3년 내내 광주에서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신양OB파'라는 폭력 조직의 우두머리급으로 폭력전과 4범인 문흥식은 인우보증, 다시 말해 어떤 문서적 증거 없이, 주변의 증언을 통해5.18 유공자로 인정됐다. 2004년 그리고 2006년 두 차례 탈락한 후 2015년의 일이다. 그리고 불과 4년 후인 2019년, 문흥식은 그가 현역 조폭이라는 논란 속에서 5.18 구속부상자 회장에 당선됐다.


▲ 철거건물 붕괴참사가 발생한 광주 학동 4구역 재개발사업 업체 선정에 관여하고 이권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받는 문흥식 전 5·18구속부상자회장이 지난 13일 미국으로 출국했다. 참사 전반을 수사하는 경찰은 이날 문 전 회장이 철거공사업체 선정 과정에서 직간접적으로 개입한 정황을 포착하고 입건했다. 해외 출국 사실을 뒤늦게 파악한 경찰은 인터폴과 공조해 문 전 회장을 추적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사진은 2018년 10월 학동4구역재개발사업조합 신임 집행부 선거장에 난입한 문 전 회장의 모습. ⓒ연합뉴스



문흥식이 회장에 당선된 시기는 미묘했다. 5.18 단체들은 그들의 오랜 숙원이었던 공법단체화를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5.18 보상의 일환으로 이들 단체의 수익 사업이 현실화되고 있었던 시기였다. 이 전환기가 조폭에게는 탐나는 먹거리로 보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회장에 당선된 지, 불과 1년 넘긴 2021년 1월 일부 5.18 단체가 문흥식이 수익사업 이양을 명목으로 3억 원을 업자로부터 받았다고 YTN이 단독보도했고, 일부 유공자가 그를 검찰에 고발했다. 문흥식은 맞고소로 맞섰다. 그후 일부 유공자들은 그의 퇴진을 요구하며 천막 농성을 시작했고, 그 농성은 100일 넘도록 계속되고 있다.

내가 문흥식이라는 이름을 처음 접했던 것은 5.18 당시 광주 근무 보안사 요원이었던 허장환 덕이었다. 2019년 허장환은 김용장이라는 인물을 518 당시 광주 근무 미군 군사정보관이라며 한국에 데리고 왔다. JTBC의 간판 시사 프로그램은 이 과정을 독점 보도했다. 나는 두차례 <경향신문> 기고문에서 미국 정보공개법에 의거해 입수한 자료와 관계인사와의 인터뷰를 인용하며, 김씨가 군사정보관이 아닌 민간인 통역에 불과했다는 것과 허 씨와 김 씨의 주장 대부분이 신빙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후 몇몇 언론보도가 나의 주장을 뒷받침했고, 한 JTBC의 기자는 나의 주장을 “내부에서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내게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허 씨와 함께 김 씨의 주장을 보도한 B기자는 정정보도와 사과를 요구하는 내게 막말 퍼붓고, 나와 내 글을 실은 언론사를 고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한편, 전두환이 광주까지 와서 발포 명령을 내렸다고 주장한 김용장은 광주에 와서 검찰과 면담까지 하고도 전두환 명예훼손 재판에 증인으로 나서지 않았다. 또한 스스로의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와 자신이 쓴 정보보고서를 공개하겠다고 공언하고 출국한 김용장은 그후 대중으로부터 완전히 사라졌다.

그런데, 같은 해 7월 허장환과 문흥식은 함께 피지의 김용장 집에서 휴가를 보냈다. 그들은 호형호제하는 사이라고 할 수 있다. 허장환과 문흥식은 '광주 5.18 혁신위원회'라는 별도의 5월 단체 출범을 준비하고 있었다. 문흥식의 직책은 최고위원. 허장환이 페이스북에 올린 격문을 보면 무엇을 혁신하겠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후 이 단체는 5.18구속부상자중앙회 혁신위원회로 탈바꿈하고, 문흥식은 이를 발판 삼아 518구속부상자회를 장악한 것으로 보인다.

허장환과 김용장의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 주장이 5.18 진상규명에 가져온 혼란이 적지 않다. 광주에서는 이들의 주장에 기반한 뮤지컬도 나왔다. 공동체에 구체적 피해를 입히지 않았다면, 허장환과 김용장의 주장도 어지간하게 표현의 자유에 걸쳐 있을 수도 있었다. 따라서 그동안 온갖 협박과 모욕을 감내했지만, 나는 어떠한 처벌이나 정부 조사도 지금까지는 원치 않는다.

그러나 허장환이 문흥식과 연결점을 갖고 있었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5월 단체들이 공법단체화 되는 시기에 이 두 사람이 조직을 결성해서 얻고자 했던 것은 무엇인가? 최근 보도에 따르면, 경찰은 문흥식에게 귀국을 종용하고 있다고 한다. 문흥식은 세상이 조용해질 때까지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겠다는 뜻을 언론에 전했다.

문흥식이 도피한 미국과 한국 사이에는 범죄자인도조약이 1999년부터 발효 중이다. 게다가 그가 도주한 곳으로 여겨지는 시애틀이나 시카고에는 한국 공관도 있다. 의지만 있다면, 그의 행방은 생각보다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문흥식이 자진 귀국을 계속 거부한다면, 사법당국은 영장집행 등의 합법적인 강제를 통해 그를 한국으로 속히 데리고 와야 한다. 17명이나 사상자가 발생한 건물 붕괴 관련 문흥식의 여죄를 밝혀야 한다. 또 5.18 부상자회 회장 재임 중 그의 행각과 그가 허장환과 함께 무슨 의도로 단체를 결성하려 했는지, 김용장과 허장환이 빚은 증언 소동 전말에 역할을 했는지, 했다면 무슨 역할을 했는지, 위법성은 없었는지 명명백백히 규명해 줄 것을 간곡히 희망한다.

그래야만 광주 건물 붕괴의 피해자와 가족들이 진정한 위로가 될 것이고, 무엇보다 한국 현대사의 가장 위대한 순간인 5.18항쟁의 유산을 사유화하려는 일부 세력들을 초기에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 17명의 사상자를 낸 철거 건물 붕괴 참사를 수사 중인 광주경찰청 수사본부는 18일 문흥식 전 5·18 구속부상자회장이 공사 업체 선정 과정에 압력을 행사한 정황을 포착하고 사무실을 압수수색했다. 문 전 회장은 해외 도피 중이다. 5.18 구속부상자회는 사고 직후 문흥식 회장 해임을 의결했지만 문 회장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전달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연합뉴스

(뉴욕에 살고 있는 설갑수는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영문판 Gwangju Diary의 번역편집자이다. 미국에서 그의 글은 Jacobin, Labor Notes, Business Insider 그리고 Progressive Magazine 등에 실렸다.)

설갑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영문판 번역자

2021-01-13

5.18 관련 무책임한 증언들의 진실 찾기 | 제3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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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관련 무책임한 증언들의 진실 찾기
제3의길2019.05.213Hot Issue

<<광고>>











¶글쓴이 : 길벗



-전 주한미군 방첩 정보요원이라고 자처하는 김용장 발언, 윤지오의 장자연 증언 연상시켜

-윤흥정 등 서울 올라와 전두환 만났는데 그 시간에 전두환이 광주에서 사살명령 내렸다니

-이희성 당시 계엄사령관 “전두환이 사살 지시? 군의 작전 지휘 계통을 정말 모르는 소리”





또 다시 5월, 어김없이 5.18은 다가오고, 그리고 또 어김없이 5.18에 대한 새로운 증언들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증거도 없이 주장만 난무한 증언들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온 언론들을 도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합리적 의심이 들어도 이에 대해 정면에서 반박하는 양심과 용기를 가진 지식인이나 언론인은 찾기 힘듭니다.



선동은 단 한 마디로 가능하지만, 그 선동이 거짓임을 증명하는 데는 천 배, 만 배의 노력과 시간이 들지요. 문제는 노력과 시간이 드는 것만이 아닙니다. 5.18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자, 5.18로 밥벌이 하는 자, 5.18이 정치적 자산이 되고 자신의 신념이나 이념의 자양분이 되는 자, 5.18의 진실보다는 자신이 믿고 싶은 것을 진실로 만들려고 하는 자들에 의한 집단 다구리가 선동을 반박하고 진실을 말하는 데 훨씬 큰 장애물이 됩니다.



하지만 이들의 겁박과 집단적 이지메가 두려워 진실을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지난 3월 15일, jtbc는 전 주한미군 방첩 정보요원이라고 자처하는 김용장을 인터뷰한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김용장은 jtbc 출연에 이어 5월 13일에는 국회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주최하는 특별 기자회견을 갖기도 했습니다. 이어 5월 16일에는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에도 출연하고, 광주로 내려가 이용섭 광주시장도 만나고 광주 국군통합병원도 찾았다고 하는군요.



김용장이 피지에서 귀국해 증언하게 된 것은 홍남선 변호사의 아들인 홍기섭의 설득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저는 이런 모습들에서 왕진진(전준주)과 윤지오의 그림자가 보이고, 최근에 벌어진 장자연 사건 재수사 데자뷰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까요?



검찰 과거사진상조사위원회가 캐나다에 있는 윤지오를 설득해서 왕복 비행기 값에 숙박료까지 지급하고 경호까지 붙여주며 귀국하게 해 증언토록 한 것이나, 안민석이 윤지오에게 국회의 출판기념회 자리를 마련해준 것, jtbc 손석희가 윤지오를 ‘뉴스룸’에 초대해 장시간 인터뷰하고, 김어준도 ‘뉴스공장’에서 인터뷰해 주었습니다.



MBC와 KBS 등 언론들이 앞 다투어 윤지오 증언을 대서특필한 것, 윤지오의 증언과 인터뷰에 왕진진의 가짜 편지 내용이 혼재해 있는 것, 윤지오의 증언은 주장만 있을 뿐 증거가 없어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찰 과거사진상조사위원회 총괄팀장(김영희)이 “윤지오의 증언이 신빙성이 있다”고 설레발 친 것 등과 오버랩됩니다.



윤지오의 증언은 신빙성이 떨어져 오히려 장자연 사건 규명을 방해했는데 김용장의 증언은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궁금하네요.



제가 이런 느낌을 갖게 된 데는 그 동안 읽어본 5.18 관련 기록들과 김용장의 증언이 충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김용장의 주장이 100% 거짓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그 동안 5.18 단체가 주장했던 것과 검찰, 국방부가 수사해 발표한 보고서 내용과 모순되기 때문에 철저한 검증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김용장의 주장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전두환이 1980년 5월 21일 낮 12시경에 광주에 내려와 긴급회의를 하고, 이 자리에서 시위대를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며, 그 직후인 오후 1시경에 전남도청에서 공수부대원들이 앉아쏴 자세로 일제 사격을 해 시위대를 학살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5월 20일, 일명 ‘편의대’라는 특수부대원들이 가발과 사복을 입고 일반인으로 위장하여 시위 군중에 섞여 유언비어를 유포하고 시위대를 격분하게 만들었으며, (지만원이 주장하는 북한군 600명이 했다는) 아시아자동차에서 장갑차를 탈취하고 전남지역의 무기고를 터는 등 총격, 방화 행위로 시민들의 과격 행동을 유도했다는 것입니다.






어김없이 5.18은 다가오고, 그리고 또 어김없이 5.18에 대한 새로운 증언들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김용장의 주장이 사실에 부합할까요? 김용장의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은 1988년 국회 청문회 기록, 1995년 검찰의 수사 보고서, 5.18 단체들의 주장에서 금방 드러납니다.



1. 전두환은 5월 21일, 광주에 내려갔는가?



먼저 1980년 5월 21일 낮 12시에 전두환이 헬기를 타고 광주에 내려와 사살 명령을 내렸다는 김용장의 주장을 살펴보겠습니다.



전두환은 21일 점심 12시를 전후로 K57(광주 제1전투비행단, 광주비행장)에 왔습니다.이건 움직일 수 없는 사실입니다. 당시 헬기를 타고 왔으며, 오자마자 K57 비행단장실에서 회의를 열었습니다. 회의 참석자는 정호용특전사령관, 이재우 505보안부대장과 불상자 1명 등 4명 가량이었습니다.



여기까지가 제가 보고한 내용입니다. 이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오후 1시 도청 앞에서 사살이 이뤄진 것을 감안하면, 저는 전두환의 방문 목적은 바로 ‘사살명령’이라고 봅니다. 그 회의에서 사살명령이 전달됐다고 믿습니다. 이건 저의 합리적 추정입니다. 



참고로 발포명령과 사살명령은 완전히 다릅니다. 발포는 상대방이 총격을 가했을 때, 방어하기 위해 대응하는 개념입니다. 



헬기를 타고 왔기 때문에 플라이트 플랜, 즉 비행계획서가 분명 공군에 남아있을 것입니다.그리고, 당시 공군 보안부대원 중에는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 날 전두환은 서울에 있었고, 광주에 내려간 적이 없습니다.



당시 계엄군의 조직 편제는 대통령(최규하)-국방부장관(주영복)-계엄사령관(이희성 육참총장)-2군 사령관(진종채)-전교사령관(윤흥정)-31사단장(정웅)으로 되어 있었으며, 광주에 계엄군으로 파견된 공수부대는 정호용 특전사령관의 지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이 계엄군의 조직 라인에 따라 명령과 지시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는 1995년 검찰 수사보고서에도 다 나와 있습니다. 수사보고서 201페이지 ‘(2) 광주 파견부대 지휘권의 이원화 여부’ 항목을 보면 명확하게 광주에 파견된 공수부대의 지휘권이 이원화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참고로, 1995년 검찰의 수사 당시 수석 검사가 채동욱이었고, 채동욱이 전두환을 사형 언도 받게 재판정에서 심문했습니다. 이 수사보고서도 당연히 채동욱이 직접 조사한 결과물입니다. 채동욱은 호남 출신이고 좌파 진영에서 “까도 까도 미담만 나온다”고 청문회에서 칭찬하던 인물입니다. 채동욱이 전두환에게 일부러 유리하게 수사 보고서를 쓸 이유가 전혀 없겠죠.



그러면 1980년 5월 21일, 계엄군 지휘부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살펴볼까요?



광주지역 계엄을 관리하던 진종채 2군사령관은 5월 20일부터 광주시의 시위사태가 격화되어 무장한 시위대에 의해 계엄군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5월 21일 오전에 김준봉 작전참모를 대동하고 광주를 방문,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으로부터 상황보고를 받았습니다. 윤흥정 전교사 사령관은 진종채 2군사령관에게 무장한 시위대에 의해 계엄군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있어 자위권 발동이 필요하니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 자위권 발동문제를 건의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자위권 발동의 첫 건의자가 현지 지휘관인 호남출신 윤흥정 사령관이었습니다.



진종채 2군사령관은 바로 서울로 가서 이희성 계엄사령관을 면담하고 계엄군의 자위권 발동을 지시해 주도록 건의했습니다. 이에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진종채 2군 사령관과 함께 장관실로 갔습니다. 장관실에는 주영복 장관을 비롯한 합참의장, 합수본부장 겸 보안사령관(전두환), 수경사령관, 육사교장, 특전사령관(정호용)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이 자리에서 광주소요사태의 실상을 보고하고, 계엄군의 자위권 발동이 불가피함을 건의했습니다. 회의에 참석한 군 수뇌부는 이희성 계엄사령관의 건의를 승인했고, 주영복 장관의 승인을 받은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5월 21일 19시 30분경 ‘광주사태에 관련된 담화’를 발표했습니다.



이와 같은 내용은 ‘5.18 기록관’ 등 5.18 단체들이 인용하며 전두환의 자위권 발동 개입의 근거로 삼는 <5공 전사>에도 그대로 나옵니다.



<5공 전사>에는 “2군사는 육본으로 올라와 참모총장을 뵙고 현장의 어려운 상황을 설명하고 자위권 발동을 건의하였다. 건의를 들은 참모총장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라고 하면서 장관께 직접 보고하자고 하여 장관실로 갔다. 장관실에는 장관을 비롯한 합참의장, 합수본부장 겸 보안사령관 전두환 장군, 수경사령관, 육사교장, 특전사령관이 기다리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980년 5월 21일, 광주지역을 담당했던 진종채 2군 사령관, 윤흥정 전교사령관이 서울로 올라와 이희성 계엄사령관을 면담했고, 그 때 전두환(보안사령관)과 정호용(특전사령관)은 국방부 장관실에서 대책회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사실이 이런데 김용장은 전두환이 5월 21일 낮 12시경에 광주로 내려와 광주공항 K57 비행단장실에서 정호용과 이재우 505보안부대장, 미상 1인과 회의를 하고 사살 명령을 내렸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 시간에 서울에 있었던 전두환과 정호용이 어떻게 광주에도 존재할 수 있었는지도 의문이고, 이재우 보안부대장과 미상의 1인과 미팅하고 그 자리에서 사살 명령을 내린다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사살 결정을 내릴려면 최소한 그 지역을 담당하고 있는 진종채 2군 사령관, 윤흥전 전교사령관, 정웅 31사단장이 있는 자리여야 하는데, 정호용과 이재우 보안부대장만 모여 결정하고 시행했다는 것이 말이 되나요? 그리고 정호용도 당시 광주에 내려갔다는 기록이나 증언이 없는데 어떻게 정호용이 광주 K57 비행단장실에 그 시간에 있을 수 있습니까?



전두환이 5월 21일, 광주에 내려왔다는 증언은 김용장 말고도 현재 둘이 더 있습니다. 706보안부대장 운전병이었던 오원기와 505 보안부대원 허장환입니다.



오원기는 5월 16일, jtbc 뉴스룸에 출연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습니다.



<jtbc 손석희와 706보안부대장 운전병 출신 오원기의 인터뷰>

오원기/5·18 당시 공군본부 보안부대장 운전병 : 미8군 헬기장으로 빨리 가자고 해서 가니까 헬기는 도착해 있었고. (전두환) 사령관 혼자 타고, 수행원 없이 전두환 씨 혼자 갔어요.



오원기는 전두환이 혼자 헬기를 타고 광주에 내려갔다고 주장하는데, 이번에 김용장을 피지에서 귀국하게 한 홍남선 변호사의 아들 홍기섭은 전두환이 광주로 내려갈 때 3인이 동승했다고 주장합니다. 아래는 홍기섭이 MBC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의 앵커와 인터뷰한 내용입니다.



<MBC와 홍남선 변호사 아들 홍기섭의 인터뷰 내용>

 진행자 >이 부분 설명 좀 해주시겠어요? 그동안 전두환 씨는 광주에 간 적이 없다고 해오지 않았습니까?
 홍기섭 >그 부분은 본인은 계속 거부하였으나 김용장 선생님의 증언이 토대가 되어 국방부 자료에 5월 21일 그 모든 헬기 탑승자는 명단이 다 기재가 되게 돼 있습니다.
 진행자 >국방부 자료에 따르면.
 홍기섭 >네, 그런데 그 날만 21일 날 출발한 전두환 씨가 타고 있던 헬기만 안보요인 3인으로 기명이 안 돼 있었습니다. 무기명으로. 유일하게 그 날 전두환 씨가 타고온 헬기만.
 진행자 >그러니까 5월 21일 날 유일하게 이름이 없는 게 있었는데 그냥 안보요인, 이렇게 적혀 있었다는 거군요.
 홍기섭 >네, 안보요인 3인으로 돼 있었습니다.
 진행자 >3인으로. 그래서 이제 이 3인 중에 한 명이 전두환 씨일 것이다 라고 얘기하시는 거고,
 홍기섭 >그건 확실합니다.



홍기섭은 전두환이 탔던 헬기에는 안보요인 3인이 탑승했다고 주장하고 있고, 오원기는 전두환 혼자만 헬기에 탑승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둘 중 하나는 사실과 다른 주장을 하는 것이거나, 둘 모두 사실과 다른 주장을 한다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누구의 말이 맞다고 보십니까? 홍기섭은 그나마 국방부 자료를 근거로 하고 있지만, 오원기는 물적 증거 없이 단지 자신의 주장만 있을 뿐입니다.



허장환의 주장에 대해서는 장사복 전 전교사 참모장과 이재우 전 505보안부대장이 1995년 검찰 수사 당시 검찰의 질문에 아래와 같이 반박했습니다.



<장사복 전 전교사 참모장(1995.6.5 검찰 진술조서)>
문: 일부 고소인들과 당시 505부대의 수사관이던 허장환 등은 5.21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광주 K-57비행장을 통해 광주로 와 전교사에서 브리핑을 받고 귀경한 직후 전교사 기밀실에서 정호용, 윤흥정, 부사령관 김기석, 참모장인 진술인, 3개 여단장, 505부대장 등이 참석하에 회의를 열어 정호용과 여단장들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자위권 발동을 결정하였다고 하고 있으며, 당시 전교사 작전참모이던 백남이는 93.5.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시 5.22 전두환이 내광하여 전교사로 왔으며 당시 전두환 사령관의 비행장 도착과 전교사 출발사실에 대한 보고를 받은 바도 있으며, 5.27 작전개시 전 노태우 수경사령관이 전교사를 방문하였는데 자신은 노 사령관의 얼굴을 본 사실도 있다고 주장한 바 있는데 사실인가요.



답: 저가 그 당시나 사후에라도 들은 이야기를 종합하더라도 전두환 보안사령관이나 노태우 사령관의 내광사실에 대해 그와 같은 이야기 자체를 들은 사실이 없습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그들이 만약 전교사에 와서 지휘관들을 만났다면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이고 누구보다도 참모장인 저가 알고 있을 터인데 전혀 기억에 남아 있지 않으며, 참고로 당시 전교사의 주요 간부들 즉 윤흥정 사령관, 김기석 장군, 저, 김순현 장군, 임헌표 장군과 백남이 대령 등 전교사의 대령급 장교들로 구성된 친목모임인 “무등회” 라는 것이 있어 거의 매월 모임을 가지고 있는 바 백남이의 인터뷰 직후에 백남이도 있는 자리에서 인터뷰 기사를 화제 삼아 백남이에게는 물론 참석자들끼리 서로 확인을 해보았지만 아무도 그런 일이 있었다고 말한 사람은 없었고 당시 백남이도 우물쭈물하며 확실한 답변을 하지 않아 더 이상의 추궁을 하기도 무엇하여 넘어간 사실이 있었습니다.

(중략)



문: 백남이가 사실과 다른 증언을 할 이유가 있는가요.



답: 저가 말씀드리기는 무엇 하지만 통상 전교사 작전참모는 장군으로 승진을 할 수 있는 보직으로 여겨졌음에도 백남이는 장군진급을 하지 못하고 전역하였는데 그것은 아마 광주사태를 조기진압하지 못한 데 대해 당시에도 육본 작전참모부장 등으로부터 질책을 받았으며(저에게 하소연하며 눈물을 보인 사실이 있음) 5.24 교도대와 공수부대의 오인사격에 대해 백남이의 상황전파에 문제가 있다고 하여 사태 직후 징계를 받은 사실이 있는데 그것이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이 되며, 이와 같은 일과 함께 저의 기억상으로도 노태우 사령관이 사태 후에 보안사령관이 되어 광주와 전교사에 한 번 온 사실이 있는데 이를 착각하여 증언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이재우 전 광주보안부대장(95.1.20 진술조서)>
문: 당시 505보안부대 수사관이었던 허장환의 양심선언(김영진 저, 충정작전과 광주항쟁 상권, 228정 이하) 내용에 의하면 보안사령부 대공과장 홍성률 중령이 5.18 오후에 광주사태의 진행과정을 확인키 위해 사태 감독관이라는 직책으로 내려와 5.20 저녁에 상경한 바 있다는데 그 내용이 사실인가요.



답: 그 내용은 사실과 다릅니다. 홍성률 중령이 광주에 내려 왔던 것은 사실이나 공수부대가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한 5.21 이후에 보안사령부로부터 광주시내의 상황을 파악하라는 명령을 받고 내려와 광주 시내에 민간인 복장으로 들어가서 상황파악을 하는 등 임무를 수행하다가 5.27 도청 진압작전이 끝난 후에 상경한 것입니다.



문: 위 양심선언 내용에 의하면 5.21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광주에 내려와 전교사에서 사태진행과정에 대한 보고를 받고 헬기로 광주 일원을 둘러보고 간 바 있다는데 사실인가요.



답: 그 내용은 사실이 아닙니다. 만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광주에 왔다면 두 가지 목적이 있을 것인데 하나는 작전부대의 위문이고 또 하나는 비밀 지시사항 시달로 추측할 수 있으나, 그렇다면 최소한 전교사 사령관을 만났어야 하고 저도 알고는 있어야 할 것인데 윤흥정 장군도 국회 청문회에서 전두환 장군을 만난 일이 없다고 증언하였을 뿐 아니라 저도 전혀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는 점에 비추어 터무니없이 꾸며댄 거짓말로 생각됩니다.



문: 5.21 공수부대가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하고 난 뒤에는 광주시내 상황을 어떻게 파악했는가요.



답: 당시에는 보안부대 활동망, 경찰 정보망이 사실상 와해된 상태여서 광주시내의 상황에 대하여는 거의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보안사령부에서 홍성률 중령을 내려보낸 것이며 진압작전과 관련해서는 작전부대에서 민간인으로 위장하여 비밀리에 침투시켰었다는 사실을 진압작전이 끝나고 알게 되었습니다.



김용장의 주장은 5.18 단체가 그 동안 주장해 왔던 것과도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아래는 이와 관련한 호남일보의 기사입니다.



‘5.18 기록관’은 (전두환이) 1980년 5월 21일 오후 1시께 전남도청 집단발포가 이뤄진 직후 ‘자위권 발동과 계엄군 광주외곽 배치’와 관련한 회의를 주도한 것으로 추정되는 기록도 확인했다. 같은 날 오후 2시35분께 국방부장관실에서 시위가 극에 달했다는 보고를 받은 전씨 등이 시위대를 무장폭도로 규정하고 계엄군을 광주외곽으로 전환 배치해 봉쇄한 뒤 사상자가 발생하더라도 자위권을 발동, 신속히 진압키로 했다는 내용이다.

전두환, ‘광주학살회의’주도·최종 결정했다



‘5.18 기록관’도 전두환이 5월 21일, 오후 2시 35분께 서울의 국방부장관실에 있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이것은 <5공 전사>에 나오는 내용과도 일치하지요.



이희성 전 계엄사령관도 최보식 조선일보 기자와 최근 대담에서 전두환은 5.18과 관계없다고 다음과 같이 단호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를 볼 때 전두환이 5월 21일 광주에 내려가 사살 명령을 내렸다는 김용장의 주장은 신빙성이 없어 보입니다.



그건 군의 작전 지휘 계통을 정말 모르고 하는 소리요.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5·18과는 무관하오. 그는 12·12(1979년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수사를 이유로 정승화 육참총장을 강제 연행한 사건)와는 상관있지만 5·18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소.



법정에서도 ‘지휘 체계가 이원화됐다’는 말들이 있었소.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나 몰래 따로 보고받고 지시했다는 소리인데, 그건 범죄요. 그러면 내가 그냥 두고 볼 것 같소. 내가 있는데 있을 수 없는 일이오.



―계엄사령관이 위계상 높지만 당시 모든 힘이 전두환에게 쏠리지 않았습니까?
전두환은 새카만 후배였고 내게 ‘형님, 형님’ 하며 어려워했소. 나를 뛰어넘어 감히 월권해? 내 성격을 알고 이런 관계만 알아도, 그런 소리가 안 나옵니다. 전두환은 밝은 사람이지, 음습하지 않아요. 몰래 그렇게 하는 스타일이 아니오. 내 단호히 얘기하오. 광주에 관한 한 전두환 책임은 없소.



또한 1988년, 국회 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위 제7차(제144회)에 있었던 이해찬과 이희성(계엄사령관) 간에 질의-응답한 자위권과 발포명령 관련해 이희성이 답변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이희성은 당시 전두환이 광주에 내려간 사실이 없음을 증언하고 자위권도 위수령 제15조1항(대통령령 제4949호)에 의거 정상적으로 행사된 것임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리고 자위권 행사는 ‘군인복무규율 제34조’에 의해서도 그 정당성이 담보됩니다.



국회 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위의 자료는 ‘5.18 기록관’에도 나오니 직접 찾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現 위수령 제15조>
제15조 (병기사용한계) ①위수근무에 복무하는 자는 다음 각호의 1에 해당하는 경우가 아니면 병기를 사용할 수 없다.

1. 폭행을 받아 자위상 부득이 한 때
2. 다중성군하여 폭행을 함에 즈음하여 병기를 사용하지 아니하고는 진압할 수단이 없을 때
3. 신체·생명 및 토지 기타 물건을 방위함에 있어서 병기를 사용하지 아니하고는 방위할 수단이 없을 때
②위수근무에 복무하는 자가 병기를 사용하였을 때에는 즉시 위수사령관에게 보고하여야 하며, 위수사령관은 이를 육군참모총장에게 보고하여야 한다.



<現 군인복무규율 제34조>
제34조(초병의 무기사용) ①초병은 다음 각호의 1에 해당하는 경우에 한하여 휴대하고 있는 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 <개정 1998. 12. 31.>

1. 신체ㆍ생명 또는 재산을 보호함에 있어서 그 상황이 급박하여 무기를 사용하지 아니하면 보호할 방법이 없을 때
2. 야간에 3회 이상 수하하여도 이에 불응하여 대답이 없거나, 도주하거나, 초병에 접근할 때
3. 폭행을 당하거나 또는 당할 우려가 있는 경우 그 상황이 급박하여 자위상 부득이할 때
②초병은 지휘계통상의 상관의 명령이나 지시없이 휴대하고 있는 무기나 탄약을 타인에게 넘겨주어서는 아니 된다.



김용장의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은 1980년 5월 21일 오후 1시 전남도청 광장에서 벌어진 일들을 살펴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김용장은 전두환이 광주에 내려와 사살 명령을 내린 직후인 오후 1시에 공수부대원들이 시위대를 향해 ‘앉아 쏴‘ 자세로 일제 사격하여 시위대를 사살(학살)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 오후 1시를 전후한 전남도청 상황이 어떠했는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1995년 검찰 수사보고서 중에 해당 부분을 그대로 옮겨 보겠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1995년 이 사건을 수사하고 전두환을 사형선고 받게 한 인물이 채동욱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고 이 검찰 수사보고서에 대해 의문이 있으시다면 채동욱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 5.21. 08:00 : 전남도청 앞에 수 만명의 시위대가 사체 2구가 실린 손수레를 앞세우고 시위.
-. 10:00 : 시위대 대표 4명, 도청에서 장형태 도지사와 면담.
-. 11:00 : 장형태 도지사 시위대 앞 연설 포기하고 헬기로 시민 자제 요구 방송.
-. 12:00 : 공수 부대 장갑차 2대와 함께 도로에 횡대로 포진하여 시위대의 도청 진출 저지, 시위대는 장갑차, 트럭, 버스, 택시 등의 백여 대 차량으로 공수부대 저지선 압박.



-. 13:00 : 시위대가 계엄군 장갑차에 화염병 투척, 장갑차에 불이 붙는 순간 시위대의 장갑차 1대가 갑자기 공수부대 쪽으로 돌진, 공수부대의 저지선 무너지고 공수부대원 2명이 장갑차에 깔려 1명 사망. 시위대 장갑차의 갑작스런 돌진에 놀란 계엄군 장갑차 소대장이 장갑차에 거치된 기관총 방아쇠 건드려 공중 발포. 도청 직원들이 선무활동의 일환으로 스피커 통해 애국가 방송하며 해산 호소. 계속하여 시위대의 버스와 트럭이 도청 쪽으로 돌진해 오자 공수부대 장교들이 돌진하는 차량을 향해 발포하여 버스 운전자 1명 사망.



-. 13:30 : 시위대쪽에서 장갑차 1대가 도청으로 돌진하자 경계중이던 공수부대원 장갑차를 향해 일제히 발포하여 청년 1명 피격. 공수부대의 발포로 후퇴하였던 시위대가 다시 카톨릭센터, 한국은행 광주지점 부근에 모임.

-. 13:00~15:35 : 시위대, 광주 인근 전라 지역 파출소, 지서, 경찰서, 광업소, 화약고, 한국화약 등에서 카빈, M1, AR, LMG 등 총기 4천9백여 정, 실탄 13만여 발, TNT 10여 상자, 수류탄 2백 7십여 발 탈취.
-. 14:45 : 61항공단 UH-1H 헬기 전남도청 상공에서 공중 정찰 중 시위대의 대공사격으로 6발 피격.
-. 14:50 : 시위대 장갑차 전남도청 광장쪽으로 돌진, 공수부대 발포로 후퇴.
공수부대는 전남도청 본관과 신관, 전남일보, 수협 도지부, 상무관 등 인근 건물 옥상에 병력 배치하여 도청 부근 접근하는 시위대에 총격.



-. 15:00 : 남평지서에서 무기 탈취한 시위대가 충금지하상가 사거리 도착.
-. 15:15 : 우체국 쪽에서 시위대 2천명 모여 칼빈과 실탄 휴대하고 전남도청 쪽으로 진출하면서 총격전.
-. 15:50 : 시위대가 전남의대 오거리에서 전남도경 쪽으로 사격하면서 이동.
광주통합병원 상공에서 선무방송하던 헬기 시위대 대공사격 6발 피격.



-. 16:00 : 광주은행 본점 부근에 트럭이 도착하여 시위대에 30여 정 칼빈 분배. 일부 시위대는 전남의대 부속병원 12층 옥상에 LMG 2정 설치하고 전남도청과 군 헬기 향해 사격.
윤흥정 전교사령관, 공수부대 전남도청 철수 지시.



-. 16:30 : 전남도청 상황실 폐쇄.
-. 17:00 : 공수부대 전남도청에서 철수 시작.
-. 17:15 : 전남도경 상황실 폐쇄, 경찰 병력 철수 시작, 전경들은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철수.
-. 20:00 : 전남도청 시민군에 의해 접수됨.



시위대에 대한 사살 명령을 하달 받은 계엄군(공수부대)이 실탄을 제대로 지급 받지도 못하고, 무장 시위대에 밀려 전남도청과 전남도경에서 철수하고, 철수하는 과정에서도 구사일생으로 탈출했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사살 명령을 받은 정예화된 우리나라 최고의 부대인 공수부대원들이 훈련받지 않고 조직화되지 않은 민간인들의 공격에 저렇게 무력하게 당할 수 있을까요? 공수부대원들이 사살 명령을 받은 상태라면 과연 그 날 전남도청 인근에서 사상자가 그것 밖에 발생하지 않았을까요?



그 많은 공수부대원들을 포함한 계엄군들 중에 지휘관이든 사병이든 사살 명령은커녕 발포 명령을 받았다거나 부하들에게 지시했다고 증언하는 사람이 어떻게 아직까지도 단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을까요? 사살 명령을 받았거나 지시했다면 과연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2. 편의대는 남한 특수군으로 광주 시민들을 과격 행동하게 유도했나



다음으로는 김용장의 두 번째 주장, ‘편의대’를 광주 시내에 보내 총격, 방화, 유언비어 유포하여 시위대를 격분시키고 무장난동을 유도했다는 것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일명 ‘편의대’라 불리며 시민 행세를 했던 사복군인들이 실제로 존재했습니다. 이들은 5월 20일쯤 K57 광주비행장으로 왔습니다. 성남에서 C-130 수송기를 타고 약 30~40명이 왔으며, K57 격납고 안에 주둔하면서 민간인 버스를 타고 광주 시내로 침투했습니다. 



저는 이 첩보를 입수한 후, 격납고로 찾아가 제 눈으로 재차 확인했습니다. 나이는 20~30대에 짧은 머리였고 일부는 가발을 썼으며, 얼굴은 새까맣게 그을려져 있었습니다.그중에는 거지처럼 넝마를 걸치고 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들을 광주로 보낸 것은 전두환의 보안사령부였고, 홍성률 1군단 보안부대장, 서의남 505 대공과장이 이들을 지휘하기 위해 K57에 출입한 사실이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저의 당시 보고 내용입니다. 이들이 온 이유를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의 합리적 추정입니다. 
북한특수군이 했다는 방화, 총격, 장갑차 탈취 등 일반 시민이 했다고 보기에 어려운 극렬 행위들은 바로 이 편의대, 저는 남한 특수군이라 부르겠습니다. 



이 남한 특수군이 선봉에서 시민들을 유도하거나, 직접 벌인 소행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유언비어 확산도 마찬가지로 이들이 시민으로 위장해 벌인 공작이었을 것입니다. 광주시민을 폭도로 만든 후 강경 진압의 빌미를 만들기 위해 전두환의 보안사령부가 고도의 공작을 펼친 겁니다.

이들의 실체가 밝혀진다면, 광주의 모든 의문이 풀릴 것입니다.



5.18 당시 김용장이 주장하는 편의대와 유사한 조직이 운영되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편의대는 김용장이 주장하는 것처럼 시민들의 과격 행동을 유도하고 총격, 방화, 탈취를 했던 것이 아닙니다. 또 편의대가 투입된 것도 김용장이 말하는 것처럼 5월 20일이 아니라 5월 26일입니다.



편의대는 계엄사가 전남도청을 탈환하고 광주를 장악하여 사태를 진압하는 상무충정작전을 수립하고, 작전이 개시되는 5월 27일 새벽 이전에 전남도청 및 광주일원의 상황을 파악하고 무장 시위대의 위치, 무장 상태, 경계 상황을 미리 파악하기 위해 민간인으로 위장하고 투입한 것입니다. 이들의 활약으로 전남도청 지하에 있었던 도청을 날려버릴 수 있었던 량의 TNT 뇌관도 사전에 제거하였고, 피해를 최소화하여 진압작전을 완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김용장의 주장처럼 방화, 총격, 탈취 등 극렬 행동을 할 이유도 없었고, 또 그런 임무가 주어지지도 않았습니다. 투입된 시기도 이미 광주가 무장 시위대에 장악된 뒤인 5월 25일과 26일이었습니다.



‘5.18 기록관’도 인용하는 <계엄사> 160쪽에는 이런 요지의 기록이 있습니다.



5월 27일 새벽을 기해 광주재진압작전이 시행됐다. 3공수는 30명 특공조를 편성해 전남도청을 01:00부터 05:10에 점령했다. 제7공수는 262명의 특공조를 편성해 광주공원을 01:00부터 05:06에, 제11공수는 37명으로 특공조를 편성해 01:00부터 04:40에 점령했다(주: 사망자는 150명이라는 예측치와는 달리 17명으로 종결됐다).



정보수집원들은 가발을 쓰고 민간복장을 하고 침투해 어느 건물 어느 장소에서 어느 규모의 난동자들이 활동하는지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획득하였다.



이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김용장이 주장하는 편의대는 광주재진입작전을 펼치기 전에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정보 수집차 사전에 투입한 민간인으로 위장한 정보요원이었습니다.

1995년 검찰 수사보고서에 김용장이 주장하는 편의대와 관련한 내용이 아래와 같이 나옵니다.



(5.25. – 전남도청 진입작전 준비 상황)
O 5.25. 04:00경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김재명 작전참모부장에게 광주 재진입작전 계획을 수립하라는 지시를 하여, 이에 따라 육본 작전지침인 상무충정작전이 작성되었음.

O 14:30경 계엄사 탄약검사반이 은밀히 전남도청에 투입되어 수류탄 278발, 최루탄 170발을 분해하였음.



(5.26. – 진입작전 준비상황)

O 21:00경 전교사 문관 4명이 전남도청에 잠입하여 TNT, 수류탄 496발의 뇌관을 제거하였고, 같은 시간 정호용 특전사령관은 가발과 민간인 복장을 공수하여 광주비행장에 도착, 예하 부대원을 격려하였으며, 22:40경 소준열 전교사령관은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 5.27. 새벽 진입작전을 개시할 예정임을 보고하였음.



(5.27. – 전남도청 진입작전 상황)

O 5.26. 23:00경 3공수여단 특공조 11대대 1지역대 장교 13명, 사병 66명은 광주비행장을 출발하여 주답에 도착한 후 다시 조선대 뒷산으로 이동하여 조선대 운동장, 조대부중, 조대여고, 전남기계공고, 조대앞, 노동청을 거쳐 5.27 04:00경 전남도청 후문에 도착, 도청 후문을 넘어 3중대, 2중대, 1중대, 특공중대, 4중대, 11중대 순으로 진입하여 05:21 전맘도청 점령을 완료하고, 07:30경 20사단 61연대에 전남도청을 인계한 후 08:00경 부대로 복귀하였음.

O 7공수여단은…..(중략), 11공수여단 특공조…..(중략)



O 20사단은….(중략) , 31사단은 …. (중략)07:25 계획대로 작전 완료하였음.



3. 의문점에 대한 수사결과(p197~ )



(1) 발포 경위
-. 다만, 고소,고발인들의 주장과 같이 위와 같은 발포가 대대장이나 여단장 이상의 상급 지휘관이나 별도의 지휘계통에 있는 특정인의 구체적인 발포 명령에 따라 행하여진 것이거나 또는 광주시민들의 공분을 고조시키기 위하여 사전 계획에 따라 의도적으로 행하여 진 것으로 인정할 수 있는 자료는 없으며,



-. 결국 전남도청 앞에서의 발포는 현장 지휘관인 공수부대 대대장들이 차량 돌진 등 위협적인 공격을 해오는 시위대에 대응하여 경계용 실탄을 분배함으로써, 이를 분배 받은 공수부대 장교들이 대대장이나 지역대장의 통제 없이 장갑차 등의 돌진에 대응하여 자위 목적에서 발포한 것으로 판단됨.



만약 김용장의 주장대로 장갑차를 탈취하고 방화, 총격한 외부 세력이 있었다고 한다면 5.18의 성격 규정을 다시 해야 하며, 5.18에 대한 평가도 새로워져야 합니다. 물론 5.18에 대한 엄밀한 재수사가 즉시 실시되어야 하겠지요. 필요하다면 특별법을 만들어서라도 진실 규명을 반드시 해야 합니다.



김용장의 주장으로 지만원의 북한군 개입설이 새삼 주목받게 되었습니다. 김용장과 지만원은 탈취, 총격, 방화로 시위대를 격분시키고 상황 악화를 유도한 세력이 있다는 동일한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 둘의 주장이 다른 지점은 그 주체를 김용장은 남한군(편의대), 지만원은 북한군 600명이라고 지목하는 것뿐입니다(저는 개인적으로 김용장의 주장도, 지만원의 주장도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김용장의 주장대로 전두환이 사전에 계획하고 편의대를 군중에 투입하여 그 짓을 했다면, 지금이라도 전두환과 그 일당을 재판정에 다시 세우고,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반인륜적이며 극악무도한 파렴치한 죄로 고령이라고 봐 줄 문제가 아닙니다.



반면에 김용장의 주장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난다면 김용장은 물론 김용장을 부추킨 사람들과 세력들은 이에 대한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참고로 설갑수씨가 경향신문에 기고한, 김용장의 주장에 대해 합리적 의혹을 제기하는 글을 아래에 소개합니다.



<[기고]‘미 육군 정보요원’ 김용장이 답해야 할 의문들>



아래는 ‘5·18 참상을 세계에 알린 사람’으로 유명한 브루스 커밍스와 피터슨 목사의 5.18 광주사태에 대해 썼던 책의 일부 내용입니다. 5.18의 실상이 다 알려진 1995년 이후에 저술된 것인데도 이렇게 사실과 다른 내용을 책에 담아 진실을 오도하고 있습니다. 피터슨 목사는 5.18 당시 헬기 기총 소사가 있었다고 증언했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검찰 수사 결과 피터슨의 증언은 사실과 다름이 확인되었지요.



5월 21일에 이르러서는 광주지역의 수십만 시민들이 군인들을 도시에서 몰아냈고 그 후 5일간 시민들의 수습대책위원회가 이 도시를 통제했다. 이 위원회는 500명이 이미 죽었고 약 960명이 실종되었다고 확인했다.[각주: 이 수치는 하비(pharis Harvey) 목사가 이끄는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감시단체인 ‘한국 인권 감시 북미 연맹’(North American Coalition on Human Rights in Korea)에서 1980년 9월에 집계한 것이다.](<브루스 커밍스의 한국 현대사> 창비, 2004)



1980년에 광주 인구는 약 75만 명이었다. 그 인구 중 광주의 여러 침례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교인들의 수는 대략 2천 명이었다. 이들 2천 명의 침례교인들 중에서 우리는 두 명의 사망자를 경험했는데, 그 비율은 1,000명 대 1명인 것이다. 만일 그 비율을 광주시 전체에 적용하면 약 750명의 사망자가 된다. 그러나 침례교도들은 일반인보다 더 적은 수의 사망자를 경험했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총 832명의 사망자 수는 – 혹은 대략 그 정도의 수는 – 통계적으로 타당한 결론인 것 같다.(<5.18 광주사태> 아놀드 A. 피터슨 목사. 정동섭 옮김, 1995년)



•해당 관련 기사
1. <3/15, jtbc -전두환, 5·18 발포명령 개입했나…”광주 방문 조사해야”>

2. <5/13, 더불어민주당 주최, 김용장 국회 특별 기자회견 전문>
https://blog.naver.com/kopark2012/221536341940
http://facttv.kr/facttvnews/detail.php?number=25113&thread=14r08



3. <5/16,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 -김용장 “5·18, 전두환의 정권찬탈 위한 시나리오.. 美도 알았다”>

4. <김용장 – “계엄군, 5·18 희생자 시신 소각…일부는 바다에 버렸다”>

5. <MBC – “미국은 5.18 미리 알고 있었다”, 김용장 추가 증언 할까?>



아래는 이희성 전 계엄사령관이 조선일보 최보식 기자와 대담한 내용입니다. 이희성은 전두환이 5.18에 개입하지 않았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희성 당시 계엄사령관, “광주 진압은 내가 지휘, 전두환 관련 없다.”>
[(편집자 注)광주 5·18 사건 36주년을 앞두고 崔普植 조선일보 기자가 진압작전의 최종 지휘자였던 당시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 李熺性(이희성) 씨를 인터뷰하였다. 월요일마다 조선일보에 실리던 ‘최보식이 만난 사람’은 어제 나오지 않았다. 이희성 씨는, 당시 신군부의 실력자였던 全斗煥 합동수사본부장 겸 중앙정보부장이 광주 진압 작전에 개입한 적이 없었다고 했다. 李 씨는 ‘병사들이 혼란 속에서 위험을 느껴 쏜 것일 뿐, 발포 명령도 없었다’면서, ‘광주사태가 불처럼 他지역으로 번져 전국에서 民亂이 일어나면 나라가 어떻게 될까, 그때 우리 군에서는 그런 국가 위기 상황을 걱정했고, 절실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인터넷을 통하여 알려진 인터뷰 全文은 다음과 같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5·18에 대한 유감 표명과 광주 망월동 묘역 참배설(說)이 보도됐을 때, 그쪽 관계자는 이렇게 해명했다.



‘광주 방문은 와전된 것이다. 5·18에 본인 책임이 있다는 뜻도 아니다. 당시 희생자가 있었고 대통령이 된 뒤로 충분히 수습을 못 한 데 대해 아쉽다는 표현이다. 지금까지 그는 광주의 가해자로 잘못 인식돼왔다. 이는 사실관계에서 명백히 틀린 것이다. 본인이 가장 억울해하는 대목이다.’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광주학살 주범’인데, 반성 없이 억울해하니 그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판단과 해석 문제가 아니라, 사실관계 문제라면 기자(記者)로서 한번 확인해볼 필요성은 느꼈다. 1980년 당시 정국을 관장한 李熺性(92) 전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을 만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첫인상이 단아했다. 경기도 과천시 갈현동의 전원주택에 살고 있는 그는 방문객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게 무엇이 궁금하오? 하나하나 질문하면 답변드리지. 늙어서 생각이 잘 날지는 모르겠소.’



나는 곧바로 본질로 들어갔다.



―당시 계엄사령관이라면 5·18 상황을 전체적으로 가장 잘 알 수 있는 위치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렇소. 전국 계엄 상황이었으니, 국방장관과 대통령께 주요 사안은 보고했지만 내가 全權을 쥐고 통괄했다고 할 수 있소.’



―1996년 ‘역사 바로 세우기’ 재판에서 5·18과 관련돼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지요?
‘그렇소. 계엄사령관이었기에 책임을 진 거요. 5·18을 어떻게 보느냐를 떠나 결과적으로 피해가 크지 않았소. 희생자와 유족이 많이 생기지 않았소. 국가적으로 이를 추스르는 차원에서 이들의 요구와 주장을 감안해야 하는 거요. 내가 높은 자리에 있었기에 그걸 피할 수는 없는 거요. 도의적 책임을 진 거요(8개월 복역하고 특별사면됨).’

―당시 국정 수반인 최규하 대통령도 도의적 책임이 있습니까?
‘그건 아니오. 군의 작전 상황이니 계엄사령관과 국방장관에게 있지, 군을 잘 모르는 대통령께서야 책임질 일이 아니오.’



―도의적 책임은 그렇고, 실제적인 책임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5·18 당시부터 대학가에서는 ‘광주 학살 주범’으로 전두환을 특정했습니다.
‘그건 군의 작전 지휘 계통을 정말 모르고 하는 소리요.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5·18과는 무관하오. 그는 12·12(1979년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수사를 이유로 정승화 육참총장을 강제 연행한 사건)와는 상관있지만 5·18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소.’



―계엄군 출동과 발포 명령을 그가 배후 조종했다는 게 통설입니다.
‘법정에서도 ‘지휘 체계가 이원화됐다’는 말들이 있었소.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나 몰래 따로 보고받고 지시했다는 소리인데, 그건 범죄요. 그러면 내가 그냥 두고 볼 것 같소. 내가 있는데 있을 수 없는 일이오.’



―계엄사령관이 위계상 높지만 당시 모든 힘이 전두환에게 쏠리지 않았습니까?
‘전두환은 새카만 후배였고 내게 ‘형님, 형님’ 하며 어려워했소. 나를 뛰어넘어 감히 월권해? 내 성격을 알고 이런 관계만 알아도, 그런 소리가 안 나옵니다. 전두환은 밝은 사람이지, 음습하지 않아요. 몰래 그렇게 하는 스타일이 아니오. 내 단호히 얘기하오. 광주에 관한 한 전두환 책임은 없소.’



―그렇다면 5·18에 전두환을 지목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라고 봅니까?
‘광주가 수습되고 3개월 뒤 그가 대통령이 됐기 때문이오. 대통령만 안 됐으면 전두환 이름이 그 뒤로 나오지 않았을 거요.’



―전두환이 아니라면, 누가 5·18에 대해 책임이 있는 겁니까?
‘지휘 계통의 최고위에 있는 계엄사령관인 나와 국방장관(周永福)이오. 그래서 법적 책임을 지지 않았소. 전두환에 대해 과대평가하고 있어요. 그는 보안사령관이었고, 내 참모에 불과했소. 참모로서 내게 건의할 수는 있었겠지만, 작전 지휘 체계에 있지 않았소. 진압 작전에 개입할 수 없었소. 그는 광주에도 내려간 적이 없소.’



―적극적인 스타일인 전두환이라면 광주에서 그런 사태가 벌어졌으니 오히려 한번 내려갈 만하지 않았습니까?
‘현지 보안 부대를 통해 보고가 올라오니까 그도 광주 상황을 알고 있었소. 내려가 본들 뭘 하겠소. 부대장에게 격려금이나 건네주는 게 고작이잖소. 당시 정호용 특전사령관은 내게 보고하고 광주에 내려간 적 있소. 광주 현지 부대에 배속시킨 공수여단 격려차 간 것이오.’



―전두환이 육사 동기생 정호용을 통해 작전 지시를 했다는 설도 있었습니다.
‘재판에서 그런 말이 나왔는데, 정말 군대 체계를 모르고 하는 소리요. 특전사령관도 광주에 파견된 자기 부하들을 지휘할 수가 없소. 작전 책임과 지휘권은 배속된 부대 지휘관에게 있소. 조언은 할 수 있겠지만, 이래라저래라 작전 지휘를 하는 것은 군법에 어긋나는 거요.’



―’역사 바로 세우기’ 재판에서 검찰 측 증인으로 나와 ‘1980년 5월 21일 ‘자위권(自衛權) 보유 천명’ 담화를 발표할 때 보안사 참모가 초안을 건네줬다’고 진술하지 않았습니까? 이를 전두환의 5·18 개입 증거로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내가 검찰 조사를 서너 번 받았어요. 꼭 밤중에 잠 안 재우고 심문을 했어요. 졸려서 정신이 몽롱해질 새벽에 진술서 서명을 받아요. 검찰이 신사인 줄 알았는데 그런 트릭을 써요. 그래서 보안사 참모인지 계엄사 참모인지 헷갈렸던 거요. 계엄사 참모였다고 하더군요. 설령 보안사 참모라고 해도 그런 건의를 해올 수 있는 거요. 결정은 내가 하는 것이오. 애초에 담화 발표 구상은 나 혼자서 한 거요.’



―왜 그런 구상을 했습니까?
‘계엄군이 일방적으로 공격당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오. 다만 담화 내용에 대해 신경을 썼어요. 장차 법적으로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고 봤으니까. 그래서 참모들을 불러 문안을 검토한 뒤 발표했소.’



―장차 법적인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자위권 보유 천명’이 ‘발포 명령’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걸 그때 예상했다는 건가요?
‘재판 과정에서 ‘사정을 모르는 병사들은 자위권을 발포 명령으로 알았을 것’이라는 말이 나왔소. 그런 해석은 오버요. 공격을 받아 신변의 위협을 느낄 때 개인마다 정당방위 차원의 ‘자위권’이 있다는 것이오. 피동적인 것이오. 발포 명령과는 다르오. 더욱이 담화문에서 ‘자위권이 있다’고 한 게 아니라 ‘자위권이 있음을 경고한다’고 했소. 예방 목적이지, 자위권을 적극적으로 발동하겠다는 뜻이 아니었소.’



―자위권을 천명한 담화 발표 뒤 계엄군에게 실탄이 지급됐습니까?
‘실탄 지급은 일선 부대 지휘관 차원에서 이뤄지는 거지, 계엄사령관이 이래라저래라 할 사안이 아니오.’



관련 재판 기록을 보면 ‘자위권 담화’가 있기 전에 실탄 발사가 이미 있었다. 5월 19일 시위대에게 포위된 계엄군 장교가 위협사격을 한 게 첫 발포였다. 20일 밤 광주역에서는 실탄 사격으로 4명이 숨졌고, 21일 담화 발표가 있기 전에도 총격전이 벌어졌다.



―누가 발포 명령을 한 겁니까?
‘1996년 재판 당시 광주 현지까지 내려가 조사를 벌였으나 발포 명령을 내린 지휘관이 없었어요.’



―총 맞은 시민들이 있는데 발포 명령자가 없다는 게 과연 말이 됩니까?
‘전투라는 게 우발적이고 부화뇌동해서 일어날 수도 있소. 겁에 질려 있는 사병들이 막 쏘고, 어디서 날아온 총알에 누가 맞았는지도 가릴 수 없었소. 한밤중에 아군끼리 교전도 있었소. 다만 5월 27일 전남도청 재진입 작전은 적극적이었소. 도청 지하실에 TNT와 수류탄 등 무기가 있었고 무장한 주동 세력이 있었기 때문이오. 당시 북에서 이를 이용 안 할 리가 있었겠소.’



―당시 담화문에 ‘상당수의 다른 지역 불순 인물 및 고정간첩들이 사태를 극한적인 상태로 유도하기 위해 광주에 잠입해…’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근거가 있는 겁니까?
‘첩보는 있었지만 확증을 잡지 못했소. 확증이 없는데 어떻게 얘기하겠소. 다만 무기고를 털고 시위대를 조직적으로 이끄는 등 민간인이 할 수 없는 행동이 있었소.’



―광주가 수습된 뒤 왜 조사를 하지 않았습니까?
‘그때는 뒤처리와 민심 위무(慰撫)가 시급해 그런 조사에 착수할 수 없었소.’



―공수부대를 투입해 초기에 과잉 진압을 함으로써 사태를 악화시켰다는 주장이 있었는데요?
‘당시 공수부대는 소요 진압 임무가 있었소. 5월 18일 아침 휴교령이 내려져 있는데 학생들이 들어가겠다며 전남대 정문에서 군인들과 충돌한 게 발단이었소. 학생들은 가방에 넣어온 돌을 던졌고 군인들이 무방비로 맞은 거요. 그 뒤 시내에서 학생들이 집결하자 군인들이 뒤쫓아가며 진압봉으로 두들겨 팼소. 이를 본 시민들은 공수부대원들이 무자비하다고 흥분한 거요. 어떤 세력이 ‘경상도 공수부대가 전라도 사람 씨를 말리러 왔다’며 악성 루머를 퍼뜨렸소.’



―광주가 수습된 뒤인 6월 초 정부 합동조사단이 현장 조사를 마치고 ‘초기 진압 작전의 과오 책임을 물어 당시 현장 지휘관을 군법회의에 회부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올린 게 맞습니까?
‘그건 맞소. 하지만 내가 반대했소. 현장 지휘관은 잘못한 것이 없는데…. 결과적으로 많은 피해자가 생겼으나 그건 앞서 말한 대로 불가피한 상황도 없지 않았소. 나는 지금도 작전 실패는 아니라고 봐요.’



―숱한 사상자를 낳은 국가적 비극을 초래했는데?
‘한 사건을 이쪽·저쪽, 위·아래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오. 광주 사태가 불처럼 타 지역으로 번져 전국에서 민란이 일어나면 나라가 어떻게 될까, 그때 우리 군에서는 그런 국가 위기 상황을 걱정했고, 절실했습니다.’



―1996년 ‘역사 바로 세우기’ 재판에서 그 나름대로 진실 규명이 이뤄졌다고 봅니까?
‘내 입장에서 보면 허무하게 진행됐소. 공판 과정에서 내게는 질문이 거의 없었소. 오직 전두환에게만 하고. 당시 정국을 총괄한 계엄사령관에게는 별로 질문할 것이 없었던 모양이오.



아래는 발포 경위와 지휘권 이원화 여부에 대한 1995년 검찰 수사보고서 내용입니다.



3. 의문점에 대한 수사결과(p197~ )



(1) 발포 경위
O 고소,고발인들은, 공수부대의 발포는 5.20. 23:00경 광주역 앞에서 시위 군중에 발포하면서 계속되었는데, 5.21. 13:00경 도청 앞에서의 집단 발포의 형태를 보면, 이는 시위대의 차량 돌진을 저지하기 위한 자위 목적의 우발적 사격이 아니라, 광주시민들의 공분을 고조시키기 위하여 별도로 사전에 계획된 명령에 따라 행하여진 의도적인 발포였을 가능성이 많다고 주장하였음.



O 수사한 결과, 광주에서의 최초의 발포는 5.19. 17:00경 광주고등학교 부근에서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는바,
-. 5.19. 17:00경 사직공원을 수색하고 복귀하던 11공수여단 63대대 배속 장갑차가 광주고등학교 부근에 이르렀을 때 시위대가 장갑차를 포위 공격하면서 불 붙은 짚단을 던져 장갑차에 불을 붙이려 하자, 장갑차에 타고 있던 한 장교가 장갑차 문을 열고 공포를 쏘고 다시 위협 사격하는 과정에서 주위에 있던 고등학생 1명이 총격을 받아 부상한 것이었고,



-. 또 5.20. 23:00경 3공수여단이 고아주역 일대에서 시위대와 공방을 벌이던 중, 트럭, 버스 등 시위대의 차량 돌진 공격으로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 수세에 몰리자, 3공수여단장은 경계용 실탄을 예하 대대에 전달하고, 대대장은 이를 장교 위주로 분배하여 이들이 돌진하는 차량을 향하여 발포하고, 광주역으로 실탄을 전달하러 가던 특공지원조가 시위대와 마주쳐 진로가 막히자 위협 사격을 하고, 5.21. 다시 전남대 앞에서 장갑차, 경찰가스차 등 시위대의 차량 돌진 공격에 대응하여 돌진하는 차량에 발포하였고, 그 와중에서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이와 같은 발포 경위에 비추어 위 발포가 광주시민들의 공분을 고조시킬 목적으로 사전에 계획된, 의도적인 발포였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임.



O 5.21. 전남도청 앞에서의 발포는, 그 동안 국회 청문회 등에서는 그 경위에 관하여, 시위대의 1차 장갑차 공격 후 도청에서 철수하던 31사단 병력으로부터 공수부대가 소량의 실탄을 인수하여 장교들에게 분배한 상태에서 다시 시위대가 차량 공격을 해오자 장교들이 자위적 차원에서 발포한 것이라고 주장되어 왔으나,



-. 수사한 결과, 11공수여단 61, 62대대는 도청 앞 금남로에서 시위대로부터 차량 공격을 받은 후 시위가 소강상태에 들어 간 5.20. 24:00경 대대장이 대대장 짚차 등에 통합 보관하고 있던 경계용 실탄을 대대장의 명령에 따라 위급시에만 사용하라는 지시와 함께 중대장 이상 장교들에게 1탄창(15발)씩 분배하고, 63대대는 5.21. 10:30경 실탄을 분배함으로써, 동일 13:00경 시위대의 차량 공격이 있기 이전에 이미 장교들 위주로 실탄이 분배되어 있었던 사실이 확인되었으며,



-. 13:00경부터 시위대가 장갑차 등으로 공수부대에 돌진, 공격해 오고 병사 1명이 장갑차에 깔려 사망하자 이에 대응하여 첫 발포가 있었고, 다시 시위대가 장갑차와 버스 등 차량 돌진을 계속하자, 공수부대 장교들이 집단적으로 발포하였으며, 그 경 7공수여단 35대대도 철수하던 31사단 병력으로부터 실탄을 인계받아 이를 장교들에게 분배하였고, 돌진하는 차량을 피해 인도와 인금 건물로 산개하였던 공수부대원들 중 일부가 도청 및 주변 건물 옥상에 올라가 경계를 하고 있다가 접근하는 시위대를 향하여 발포한 사실이 확인되었음.



-. 다만, 고소,고발인들의 주장과 같이 위와 같은 발포가 대대장이나 여단장 이상의 상급 지휘관이나 별도의 지휘계통에 있는 특정인의 구체적인 발포 명령에 따라 행하여진 것이거나 또는 광주시민들의 공분을 고조시키기 위하여 사전 계획에 따라 의도적으로 행하여 진 것으로 인정할 수 있는 자료는 없으며,



-. 결국 전남도청 앞에서의 발포는 현장 지휘관인 공수부대 대대장들이 차량 돌진 등 위협적인 공격을 해오는 시위대에 대응하여 경계용 실탄을 분배함으로써, 이를 분배 받은 공수부대 장교들이 대대장이나 지역대장의 통제 없이 장갑차 등의 돌진에 대응하여 자위 목적에서 발포한 것으로 판단됨.



-. 그러나 그 이후 계속된 발포 중에는, 비록 시위대가 무장을 하였다고 하더라도, 도로에 나와 단순히 구호를 외치거나 차량으로 도로를 진행하거나, 총상자들을 구호 또는 호송하려 하거나, 심지어는 시위 현장 부근에서 구경하기 위해 나타난 경우 등 구체적으로 총기 발사나 차량 돌진 등 군에 대하여 직접적 위협을 가하고 있지 아니한 상태에까지 발포가 이루어진 사실을 인정할 수 있어, 당시 실탄 및 사격 통제에 상당한 문제점이 있었음이 확인되었음.



(2) 광주 파견부대 지휘권의 이원화 여부
O 고소,고발인들은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는 상급 지휘관인 계엄사령관, 2군사령관, 전교사령관, 31사단장의 정상적인 지휘계통 하에 있지 아니하고, 별도 세력의 사전 계획에 의해 지휘되고 있었다고 주장하였음.



-. 즉, 7공수여단과 11공수여단이 투입될 당시의 광주상황이 공수부대의 투입이 필요할 정도가 아니었고, 현지의 31사단장이나 전교사령관아 요청한 사실이 없음에도 공수부대와 학생들의 최초 충돌 이전 시간에 특전사령관이 벌써 11공수여단의 추가 투입을 지시하였고,



-. 계업사령관이 자위권 보유를 최초로 천명한 것은 5.21. 19:30이고, 2군 사령부가 자위권 행사를 지시한 것이 5.22. 10:30임에도 하급부대인 7공수여단은 5.21. 18:00에, 전교사는 동일 20:30에 미리 자위권 발동 명령을 내리고, 심지어는 5.20. 23:00경 이미 3공수여단이 광주역에서 발포하였으며,



-. 5.24. 호남고속도로 광주인터체인지 부근과 효천역 부근에서 두 차례나 군부대 간에 오인 사격이 발생한 사실 등에 비추어 별도의 지휘체계가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는 것임.



O 그러나, 7공수여단 2개 대대를 전남대 등 3개 대학에 배치한 것은 소요 예방과 진압을 이유로 육본이 전국 92개 대학에 계엄군을 배치하는 조치의 일환으로 취해진 것으로, 이때 이미 군병력의 시위 진압 투입은 전제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고,



-. 5.18 오후 7공수여단 2개 대대가 광주시내 시위 진압에 나선 것은, 계엄 확대 선포 후 전국에서 유일하게 광주시내에서 시위가 벌어졌고, 경찰이 군의 투입을 요청하고 있는 상황에서 계엄군사령관-2군 사령관-31사단장의 계통에서 군병력 투입을 결정한 사실이 인정되며,



-. 11공수여단의 추가 투입이 광주시내에서 공수부대원들과 학생들이 충돌하기 전인 5.18 14:00경 결정된 것은 사실이나, 이는 광주 시위 상황을 보고받은 육본에서 군병력의 증원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다만, 공수여단 중 적절한 파견부대의 결정을 위하여 특전사령관의 의견을 들어 11공수여단을 증원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이고,



-. 초기에 7공수여단을 시위 진압에 투입한 후, 5.18 야간에 공수부대를 광주시내에 거점 배치하고, 5.19. 11공수여단의 추가 작전통제에 따라 책임지역을 구분하여 시이 진압에 투입하고, 5.20. 3공수여단의 추가 투입에 따라 다시 책임지역을 구분하여 시위 진압에 투입하고, 5.21. 공수부대를 시외곽으로 철수시키는 등의 일련의 부대 운용에 관한 지휘를 실제 31사단장과 전교사령관이 행한 사실이 인정되며,



-. 계엄사령관의 자위권 보류 천명 시간과 각 부대의 자위권 발동지시 시간이 군자료상 선후가 맞지 않는 듯한 것은 사실이나, 자위권 발동이 결정된 마당에 계엄사령관의 방송을 통한 발표 이전에 자위권 발동 사실이 하급 부대에 통보될 수 있는 것이고, 실제로도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5.21. 16:00경 이희성 계엄사령관으로부터 계엄군 외곽 철수와 함께 자위권 발동 승인을 받은 사실 등에 비추어 그와 같은 지시들이 발령, 전파되는 과정에서 선후가 다르다고 하여 지휘권이 이원화되었다고 단정할 수 없고,



-. 5.21. 16:00 31사단장의 2개 공수여단에 대한 작전지휘권이 전교사령관에게 전환된 후에는 각 공수여단이 책임지역에서 외곽봉쇄 임무만을 수행하다가 광주 재진입 작전에 투입된 것으로, 광주 재진입 작전은 전교사령관이 계엄시령관의 지휘를 받아 특전사령관 등의 자문과 조언을 참고하여 그의 책임하에 수행한 것이 인정되며,



-. 또 군부대 간의 오인 사격은 전교사와 공수여단 및 전교사 예하 각 부대 간에 상호 상황 전파 및 통제의 미숙, 단위 부대 지휘관들의 상황 판단 미숙과 침착성 부족 등에 기인하여 발생한 것으로, 이를 두고 지휘권 이원화의 결과라고 할 수는 없음.



O 물론, 광주에 파견된 3개 공수여단이 전교사령관이나 31사단장의 작전통제 하에 있었음에도,
-. 31사단 등과는 무전 교신 체계가 상이한 상태에서 특전사 일부 장교들이 전교사에서 전용 무선 발수신 장치를 설치하여 각 공수여단과 별도로 교신하면서 상황을 파악하고,



-. 특전사령관이 11공수여단과 3공수여단의 증원 결정에 의견을 제시하고, 수시 광주를 방문하면서 공수여단 지휘관들을 격려하고, 광주 재진입 작전인 상무충정작전을 수행함에 있어 특공부대를 선정하는 데 관여한 사실 등이 인정되나, 이를 가지고 당시 공수여단에 대한 지휘권이 이원화 되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임.



아래는 5.18 단체가 출간한 <5.18 광주 살육(공수부대)과 항쟁(민중)>에 나오는 5월 19일, 계엄군의 첫 발포가 있었던 장면을 묘사한 내용입니다. 이 내용으로 보아도 계엄군이 자위적 차원에서 발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후 4시쯤 계림동파출소와 광주고등학교 중간 길에서 계엄군 장갑차가 지나갔습니다. 시민들은 인간사슬로 막아버렸습니다. 장갑차는 가로수를 들이받습니다. 시민들엔 40~50대 되는 부녀자들까지 낀 상태였는데, 시민들은 장갑차에게 우르르 몰려가서 장갑차에 양쪽에 달린 감시경을 돌로 깨버립니다. 안에서 군인들이 나오려하자 시민들은 ‘저놈 죽여라’고 소리쳤고 군인중 2명은 달아나고 7명은 안으로 들어갑니다. 시민들은 근처 페인트가게에서 석유통을 구해 장갑차에 뿌려 붙은 뿌렸으나 타지 않았고 짚더미까지 가져가 했으니 역시 안 탔습니다. 이번엔 뚜껑을 열어 짚더미를 넣으려하자 군인이 뚜껑을 열고 총탄을 쏩니다. 그중 고등학생 김영찬 씨가 손과 대퇴부에 세발을 맞고 쓰러졌고, 장갑차는 이 때를 타 달아납니다.

(2019.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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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벗2019.5.22 AM 10:33


제 글과 맥을 같이 한다고 생각하여 아래에 문재인의 5.18 기념사를 비판하는 ‘아크로’의 ‘비행소년’님이 쓴 글을 복사해 올립니다.
5.18이 성역화되는 것이야말로 5.18 정신을 훼손한다는 것을 문재인이나 꼴통 좌파들, 일부 5.18 유족들과 단체들은 모르는 것 같습니다. 계엄군을 악마화시키기 위해 근거가 없는 주장들을 사실인 것처럼 포장하는 짓이야말로 5.18로 희생된 분들을 욕 되게 하는 것임도 모르는 것 같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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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자의 후예가 아니라면, 5.18을 다르게 볼 수 없습니다.”

저는 이 말에 깊은 한숨과 우려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네, 5.18 정신 누구보다 그 가치가 무엇인지 잘 알고 누군가 5.18 정신을 훼손하는 발언을 한다면 저는 기꺼이 맞서서 토론할 마음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건 아닙니다.
역사는 동일한 사건을 옆에서 지켜 본 두명이 있다고 하더라도 당사자가 아닌 이상에는 그 의도와 진위에 대해서는 그 두명의 증언과 해석중에 누가 맞는 지에 대해서 100% 알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그 당사자도 그 의도가 꼭 그렇지 않았는데, 결과적으로 좋게 또는 정 반대로 나타나는 것도 허다한 것이 역사입니다. 따라서 어떤 특정한 사건에 대한 해석과 그 의미, 그리고 그 후에 세월이 흐르면서 미치는 영향에 대한 의견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과도한 성역화는 반드시 부작용도 불러오게 되어 있습니다. 역사의 해석의 자유는 누구에게나 열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게중에서 많은 사료와 증거를 가지고 좀 더 객관적으로 그 견해를 피력하는 역사가들에게는 거의 무한한 해석의 자유를 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게 바로 광주의 희생자들이 자신들의 목숨을 기꺼이 내놓으면서 지키려고 했던 바로 그 자유민주주의입니다.

따라서 역사적 사건에 이견이 없어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화자는 그저 정치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어서 그런 말을 했거나 아니면 광주의 희생자들은 자신의 정치세력’만’의 정치적 자산으로 독점하여 반대파를 제거하려는 파쇼적인 행태입니다.

한편으로 이 나라의 대통령께서는 나라를 위해 죽은 사람들에 대해 등급을 매겨서 차별을 하고 계신 듯 합니다. 예를 들면 북한의 침략에 나라를 지키다가 생명을 잃은 연평도 해전, 천안함 침몰, 서해 교전의 전사자를 추모하는 자리는 나 몰라라 하면서 세월호나 5.18에만 나타나셨습니다. 이게 한나라의 대통령으로서 할 일입니까, 아니면 당신은 그저 일부 사람들과 지지자들을 위한 대통령입니까. 평소의 이런 행동을 보면, 이견이 없어야한다는 말은 그저 수사법의 실수가 아니라 속 마음 깊숙한 곳에 숨어있는 진영논리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누군가 5.18 정신을 폄훼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저는 기꺼이 맞서서 토론할 수도 있고 때로는 욕도 해주겠습니다.

하지만, 해석을 다르게 본다고 독재자의 후예라고 하는 사람에게는 너도 독재자나 마찬가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출처 : http://theacro.com/zbxe/542817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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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벗2019.5.22 PM 14:54


김용장의 ‘편의대’ 주장과 비슷한 증언이 있습니다. 5.18 당시 전남도청 앞에서 취재한 동아일보 김영택 기자의 1995년의 증언입니다. 그런데 이 김영택의 증언도 황당하기 그지 없습니다. 신군부가 광주의 갱생원 원생들 500명을 현장에 투입해 일부러 시위를 선동, 격화시키도록 했다는 주장인데, 이것을 본이니 직접 목격한 것이 아니라 친지가 말해 준 것이라는데, 그 친지도 직접 본 것이 아니고 누군가 그런 소문을 전해 준 것을 김영택에게 알린 것이라고 합니다. 참 어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김영택이 직접 목격한 것을 진술한 것을 보면 지만원이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하는 근거가 되는 것이 있네요. (저는 지만원의 북한군 개입설을 믿지 않습니다만) 5월 22일 전남 도청으로 500명의 연고대생들이 합류했다는 이야기가 있고, 실제 김영택은 20~30명의 젊은이들이 현장에 나타나 기존 시위대의 환영을 받았다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계엄군이 재진입할 시점 즈음인 5월 26일 소리없이 사라졌다고 증언하고 있네요. 아마 지만원은 이 김영택의 증언을 근거로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하는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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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택 당시 동아일보 광주주재기자의 5.18 체험기, “시위대 500명 신군부 측이 의도적으로 광주 투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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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술조서(제2회·1996년 2월 7일·요지)
진술인 : 김영택(당시 동아일보 광주 주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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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진술인은 5.18 광주사태와 관련하여 당청에 왜 서신을 우송했나요.
답) 서신 내용에 기재된 바와 같이 5.18 광주사태는 전두환 보안사령관 등 신군부 측에서 12.12사건을 통해 군권을 장악하고 다시 정권까지 탈취하기 위한 구실을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광주시민들을 폭도화시킨 후 이를 진압함으로써 결국 정권장악에 이르게 된 것으로 생각되므로 그에 대한 근거자료를 제공하여 주기 위해서 제가 위와 같은 서신을 우송하여 드린 것입니다.
문) 그럼 전두환 등 신군부 측에서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광주사태를 유발하고 이를 무력으로 진압한 것이라는 말인가요.
답) 예, 제가 5.18 광주사태 당시에 동아일보 광주 주재기자로 재직하면서 느낀 바로는 분명히 5.18 광주사태는 전두환 등 신군부 측에서 의도적으로 야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문) 왜 그렇게 생각하나요.
답) 5월 22일 15시08분경 저는 도청 앞 광장에서 취재 중이었는데, 항쟁본부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방송이 있었습니다. 즉, 광주도청 앞을 비롯하여 금남로 등 주요 시위지역 곳곳에 500여 명 정도의 대학생들이 광주항쟁 지원차 서울에서 내려왔다는 내용의 방송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상황은 이미 20사단 병력까지 동원하여 광주가 철옹성처럼 봉쇄되어 외부 사람들은 한 사람도 드나들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어떻게 그런 다수의 대학생들이 광주시내로 들어올 수 있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전두환 등 신군부 측에서 의도적으로 투입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그 다음날인 5월 23일 13시경 광주도청 앞을 비롯하여 금남로 등 주요 시위지역에 복면을 한 시위대가 나타나 시위를 더욱 과격하게 확산시키며 주도했는데, 그것 또한 전두환 등 신군부 측에서 처음부터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광주 시민 등 시위대들을 자극하여 시위를 확산시킴으로써 정권장악을 위한 구실을 만들기 위해 이루어진 일련의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최규하 정부의 무능·한계 인식시키고자

문) 왜 전두환 등 신군부 측에서 대학생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의도적으로 광주 시위현장에 투입시켜 시위를 확산시켰다고 보는가요.
답) 광주사태를 의도적으로 악화시킴으로써 최규하 정부의 무능과 한계를 대외적으로 노정토록 하여 군부가 전면에 나서야만 나라가 안정되고 발전될 수 있다는 인식을 국민들에게 심어주고 이를 통하여 자신들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기반을 마련하려는 의도하에 그와 같은 행위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문) 진술인은 서울에서 내려온 대학생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시위현장에 투입된 상황을 실제로 보았나요.
답) 예, 제가 당시 취재하면서 위와 같은 항쟁본부에서 스피커를 통하여 발표하는 것을 듣고 있었는데, 그 당시 도청 앞 광장에 20~30명 정도의 젊은이들이 도착하자 기존의 시위대들이 박수를 치며 환영했고, 서로 간에 만세를 부르면서 시위 분위기를 한층 더 고조시켰습니다.
문) 다른 시위현장에서는 위와 같은 광경을 보지 못했는가요.
답) 저는 당시 도청 앞에서 취재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곳 광경만을 보았을 뿐 다른 곳에서의 광경은 보지 못했습니다.
문) 그들이 직접 시위하는 장면은 보지 못했나요.
답) 예, 그들은 위와 같이 환영을 받은 후 기존의 시위학생들과 함께 어울렸고, 그들의 복장도 기존의 시위대들과 구별되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이 어떻게 시위를 했는지는 구체적으로 잘 모릅니다.
문) 그전에도 연·고대생 30여 명이 광주시내에 도착했다고 했는데, 어떤가요.
답) 위와 같이 대학생으로 보이는 500여 명이 광주시내에 나타나던 날 10시45분에 저는 도청 앞에서 취재하고 있었는데, 항쟁본부 스피커를 통해 연·고대생 30명이 광주에 도착했다고 하며 위와 같은 방법으로 환영행사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문) 위와 같이 대학생들로 보이는 사람들을 신군부 측에서 의도적으로 투입했다면, 왜 시위대 측인 항쟁본부에서 그들을 환영했을까요.
답) 그것은 시위대들이, 그 대학생들을 신군부 측에서 의도적으로 위장 투입했다는 것을 전혀 몰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문)그 다음날인 5월 23일 오후경 복면부대가 나타나 시위를 더욱 과격화시키고 확산시켰다고 했는데, 그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시위하던가요.
답) 저는 당시에 도청 앞 및 금남로 일대에서 복면부대들이 하는 시위광경을 지켜보았는데, 그들은 수십 대의 버시와 트럭 등 차량을 타고 다니면서 몽둥이를 각자 하나씩 들고 차량을 치면서 “전두환 물러가라”, “신현확 물러가라”, “계엄 해제하라” 등의 구호를 외쳤습니다. 이를 통하여 주위에 있는 기존의 시위대들로 하여금 시위를 과격하게 하도록 유도했으며, 그때부터 시위는 더욱 가열되고 확산되었습니다. 그들은 기존의 시위대학생 등이 총기를 반납하고 대화로써 사태를 해결하려고 하자 이를 반대하며 총기를 반납하지 못하도록 제지하고, “우리;는 끝까지 투쟁을 하여야 한다”고 외치면서 시위를 과열시켰습니다.
문) 복면부대들이 언제까지 시위를 주도했나요.
답) 그들은 5월 26일, 재진압작전이 임박하자 어디론지 전부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복면부대, 광주 무등갱생원들로 시위에 투입했을 가능성

문) 진술인의 서신내용을 보면 위 복면부대들은 정규 정보원이 아니라 무연고자인 광주 무등갱생원 원생들로서 광주사태 당시 위와 같은 의도하에 이용당한 후 전부 집단으로 살해된 것으로 보인다는 취지의 설을 접했다고 하는데, 어떠한 경위로 그와 같은 말을 듣게 되었나요.
답) 저는 최근까지도 전두환 등 신군부 측에서 정권찬탈을 기도하고 기위대들을 폭도화시키기 위한 구실을 만들기 위해 광주사태를 의도적으로 악화·확산시킬 의도로 정규 정보원을 투입한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995년 12월 초순경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저의 친지로부터 그 당시 투입된 복면부대원들은 정규 정보원들이 아니고 광주 무등갱생원 원생들로서 그들은 시위에 투입되어 위와 같이 이용당한 후 집단 살해되었다는 소문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이에 따라 저는 단순히 첩보 제공의 차원에서 김상회 부장검사에게 사신을 보냈을 뿐입니다.
문) 진술인은 그와 같은 소문을 직접 확인하여 본 사실이 있나요.
답) 제가 직접 그 소문의 진위 여부에 대해는 확인한 사실이 전혀 없습니다.
문) 진술인에게 위와 같은 소문을 전해준 진술인의 친지는 그와 같은 소문을 어떻게 듣게 되었다고 하던가요.
답) 단순히 광주 일대에 그러한 소문이 있다고만 했을 뿐 그 구체적인 소문의 진원지 등에 대해서는 전혀 말한 사실이 없습니다.
문) 진술인은 검찰에 위와 같은 첩보를 제공했으면서도, 그 첩보의 진원지인 진술인의 친지를 왜 밝힐 수 없다고 하는가요.
답) 오랫동안 언론기관에서 기자로 재직한 저로서, 그 첩보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는 위와 같은 소문의 진위에 대해 자신이 없고, 더 나아가 확실하지도 아니한 소문으로 인하여 쓸데 없는 파문이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문) 그렇다고 하더라도 위와 같은 소문을 진술인에게 전해준 진술인의 친지에 대해 다시 한 번 그 소문의 진원지 등을 확인하여 줄 수 있는 것은 아닌가요.
답) 제가 다시 한 번 저의 친지와 접촉하여 그 소문에 관하여 확인하여 보기는 하겠으나, 더 이상 새로운 내용의 말이 있을 것이로 기대하지 않습니다.
문) 무등갱생원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아는가요.
답) 그 점에 관하여는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 다만, 광주 동부경찰서 관할지역에 위치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을 뿐입니다.
문) 진술인의 서신상에 광주사태 진압 이후 무등갱생원들이 전부 사라졌다고 했는데, 그 점에 관하여 확인한 사실이 있나요.
답)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저의 친지가 전해준 소문내용의 일부일 뿐 그 진위 여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습니다.
문) 광주사태 당시 무등갱생원 원장이었던 박금현이 갱생원을 새로 짓고 다시 갱생원들을 수용하기 시작했다고 했는데, 그것이 사실인가요.
답) 그것 역시 저의 친지가 저에게 전해준 소문내용이 일부일 뿐 사실인지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문) 무등갱생원 원장이라고 하는 박금현의 인적사항에 대해 알고 있나요.
답) 광주 무등갱생원장을 상당히 오랜 기간 했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매우 연로할 것이라고 생각될 뿐 그 이상 자세한 인적사항에 대해는 알지 못합니다.

5.18 광주사태는 신군부의 사전음모

문) 진술인은 ‘5.18 재수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제하의 서신에서 광주사태가 전두환 등 신군부 측의 사전음모에 의하여 계획된 사건이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답) 그 이유는, 저의 저서인 『광주 5.18 민중항쟁』의 333~342면에 상세히 기재되어 있고, 위 서신상에도 요약되어 있는데, 계엄사가 주도하여 재야인사들이 학생들의 시위를 자제하도록 당부하는 성명을 신문에 싣지 못하도록 하거나 가급적 작게 싣도록 한 점, 5월 17일 당국의 민주화 일정을 관망하기 위해 시위를 중지하기로 결의한 전국 56개 대학 학생회장단을 연행한 점, 김대중과 만나지도 않은 정동년을 김대중 배후조종에 의한 5.18 주동자로 몰아 사형선고까지 한 점, 시위와 아무 관련이 없는 신혼부부 또는 정상적으로 직장에서 일하는 가정부들까지 마구 구타하며 연행한 점, 5월 18일 공수부대가 시내에 투입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정호용 특전사령관이 동국대에 주둔 중인 최웅 11공수여단장에게 “우리가 밀리고 있으니 빨리 출동하라”고 명령한 점, 시내를 빠져나가려는 선량한 시민들을 시내로 몰아넣고 총질을 마구한 점, 신군부 측에서는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와 동시에 국가보위를 위한 비상기구의 설치를 기도하면서 시위자제를 결의한 학생들을 강제로 연행하는 등 시위를 오히려 자극했다는 점, 자기들의 정권찬달 음모계획이 누설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5월 17일 전군주요지휘관 회의록 등 9건의 군 작전관계서류를 없애 버렸다는 점 등입니다.(끝)

출처 : 펜앤드마이크(http://www.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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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동시장2019.6.27 PM 15:44


1. 헤드라인과 달리 전교사, 사령관 윤흥정은 서울로 올라가지 않았던 듯합니다. 현지 지휘관이 작전지역을 이탈할 리는 없겠지요.
2. 2군사령관 진종채가 전교사 윤흥정의 제안을 받아들여(31사단장 정웅이 자꾸 보채니까) 자위권차원의 응사가 필요하다는 허락을 받으려고, 서울에 있는 이희성 참모총장을 찾아갔고, 이희성은 진종채를 대동하고 국방부 장관 주영복 사무실로 갔으며, 거기에서 전두환을 만난 것으로 보입니다.
3. 이상의 사실은 노무현 정권 당시인 2006년~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결과 보고서에도 나와있습니다. 거기에는 80년5월21일 점심 도청앞 발포경위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1908 MBC 부장, ‘전두환 광주 방문’ 주장한 김용장에겐 증거가 없다!조갑제닷컴

MBC 부장, ‘전두환 광주 방문’ 주장한 김용장에겐 증거가 없다!







MBC 부장, ‘전두환 광주 방문’ 주장한 김용장에겐 증거가 없다!
“‘PD수첩’의 주장 뒷받침할 증거 요구에 아무것도 제시 못해”


조갑제닷컴









한국언론진흥재단에서 발간하는 월간지 <신문과방송> 8월호에 ‘전두환이 1980년 광주에 왔다’는 주장을 한 김용장 씨의 정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기사가 실렸다.

박건식 MBC 시사교양본부 부장은 ‘거짓 제보자에 속지 않으려면 기본 원칙을 지켜라’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자신을 미 군사정보관으로 소개한 김용장을 PD수첩 팀에서 단독으로 보도할 수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를 소개했다. 그의 신원과 증언에 대한 증거를 요구했으나 김용장 씨가 이를 제공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용장과 관련된 박건식 부장의 글을 발췌해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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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운동 보도와 취재원의 신뢰도

박성현 MBC 시청자위원은 2019년 5월 7일 보도한 PD수첩 <2019, 광주가 분노한 이유>편에 대해 “이번 5•18 내용은 전반적으로 알려져 있던 내용이어서 새로운 정보 제공보다는 정리 차원에 머문 느낌이 있다”고 평가했다. 전적으로 동감한다. ‘PD수첩’은 5•18 광주 편을 기획하면서 5•18 당시 보안사 505보안부대에 근무했던 허장환 씨와 긴밀히 연락을 주고 받았다.

허장환 씨는 “5•18 민주화운동 당시 미 육군 정보부대인 501정보여단에서 군사정보관(MIS, Military Intelligence Specialist)으로 근무하면서 미국에 군부 동향을 보고한 김용장 씨가 메가톤급 폭로를 할 예정인데, 이건 ‘PD수첩’과 단독으로 하고 싶다”고 했다.

5•18 민주화운동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헬기를 타고 광주 K57(제1전투비행단) 비행장에 와서 정호용 특전사령관, 이재우 505보안대장과 회의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갔고, 그 회의 이후 광주에서 공수부대의 발포가 이뤄져 시민 54명이 숨졌기 때문에 전두환의 방문 목적은 사살 명령이었다는 것이 김용장 씨 주장의 핵심이었다.

이게 사실이면 그야말로 한국사를 새로 기록할 만큼의 메가톤급 증언이었다. 5•18 민주화운동은 전두환이 대통령이 될 야망으로, 민주화운동을 사전에 진압할 욕심으로 계획된 시나리오에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억울한 사건이 되는 것이다. 전두환이 1980년 당시 서울을 희생양으로 삼기에는 너무 규모가 크고 위험해서 서울보다는 규모가 작은 다른 도시를 희생양으로 삼으려고 했다는 추론은 이전에도 있었다.

그리고 이즈음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1979년 부마항쟁 당시 부산의 계엄사령부를 방문해 계엄사령관 등과 함께 시위 진압 작전을 논의했다는 육군군수사령부의 공식 기록도 나와 전두환의 광주 방문 가능성에 대한 의혹도 더불어 커지는 상황이었다. 허장환은 ‘PD수첩’ 제작진에게 자신과 함께 피지로 가서 김용장의 인터뷰를 단독으로 방송하자고 제안했다.

엄청난 특종 앞에 ‘PD수첩’ 팀은 흥분했다. 게다가 공군 706보안부대장의 운전병이던 오원기 씨가 1980년 5월 21일 오전 전두환이 용산 미8군 헬기장에서 헬기를 타고 어디론가 갔다는 주장을 했다. 이는 오후에 전두환이 광주에 도착했다는 주장과 맞물려 큰 파장을 낳았다.

그런데 여기에도 함정이 있다. 오원기 씨의 주장이 맞다고 하더라도 전두환이 광주로 내려갔다는 증언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원기 씨의 발언은 전두환이 오후에 광주에 도착했다는 김용장의 주장과 합쳐지면서 국민들에게 전두환이 헬기를 타고 광주로 갔다는 짐작을 하게 만들었다. 오원기 씨의 증언까지 나오니, 김용장의 주장은 확고한 진리처럼 보였다. ‘PD수첩’ 팀은 김용장 씨의 인터뷰를 방송하기만 하면 큰 반향을 몰고 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는 셈이었다.

그러나 ‘PD수첩’ 팀은 흥분하기에 앞서 허장환, 김용장의 주장을 꼼꼼하게 검증했다. 먼저 공군 항공운항기록을 살폈다. 공군 항공운항기록은 헬기 등의 비행기 탑승자는 반드시 기록하게 돼 있기 때문이다.

공군 항공운항기록에는 1980년 5월에 당시 최규하 대통령, 정호용 특전사령관이 서울에서 광주로 내려간 탑승기록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탑승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다음으로 계엄사령부 상황일지, 광주 전투 교육사령부 상황일지, 5•18 평가일지, 중대별•대대별 병력일지 및 《광주사태 소요진압 평가와 교훈》이라는 책자 등을 살펴봤다. 그 어디에도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광주로 내려왔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았다. 더구나, 전두환이 광주에 직접 내려왔다는 증언은 김용장 씨가 직접 목격한 내용이 아니었다. 김용장은 이 내용을 정보원에게서 들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PD수첩’ 팀은 김용장 측에 당시 정보원의 연락처나 사진, 녹음자료, 미국 501정보여단의 보고자료 등 전두환이 광주에 왔다는 것과 관련된 구체적 증거를 요구했지만 이 중 어느 하나도 제대로 제시되지 못했다. 물론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초실세여서 어떠한 기록도 남기지 못하게 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지만, 이 역시 입증의 책임 범위를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1980년 5월 21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근무일지 또는 상황일지 등 교차검증이 가능한 영역이 남아 있다. 그 사이 ’PD수첩’ 팀은 당시 보안사에 근무했던 요원들을 직간접적으로 접촉했다. 그런데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전두환을 광주에서 보았다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PD수첩’ 팀은 김용장 씨 인터뷰를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특종의 유혹이 컸지만, ‘PD수첩’ 팀이 검증한 바로는 김용장 씨의 발언을 뒷받침해주는 증거가 거의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PD수첩’ 팀이 인터뷰를 하지 않기로 한 이후, 김용장 씨는 국내로 들어와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JTBC 뉴스룸’, ‘김어준의 뉴스공장’ 등에 연이어 출연해서 전두환 광주 방문 주장을 이어 나갔다.

그러다가, 2019년 5월 18일자 경향신문에서 김용장 씨의 신분에 대한 의혹이 제기됐다. 번역가 설갑수 씨는, 김용장 씨가 미 육군 정보부대 정식직원인 군사 정보관이 아닌 통역요원에 불과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에 등장한 군사정보관을 증명하는 문서에는 김용장 씨의 신분이 군사정보관이 아니라, 통역관으로 기재돼 있었다. 이후, 김용장 씨는 “미국 501정보여단에서 한국인 근무자들의 직함은 통•번역관(Interpreter•Translator), 군사정보관(MIS), 언어관(Linguist) 등으로 시기에 따라 달리 불렸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김용장 씨가 직접 보고서를 작성하거나 기안품의를 올릴 수 있는 위치는 아니었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아직 김용장 씨는 당시의 정보원에 관한 내용이나, 당시의 보고서 내용이나 군사정보관 관련 신분 자료들을 어느 하나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결국, 2019년 5월 김용장, 허장환의 ‘전두환 광주 방문 소동’의 원인은 특종이 주는 유혹에 빠져 제보자에 대한 검증을 소홀했다는 점이다. 가장 먼저 했어야 할 일은 김용장의 신분을 검증하고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상당수의 언론은 김용장이 미 육군의 군사정보관이란 주장을 여과 없이 소개했다.

문제는 제보자가 아니라 언론

이상 워싱턴포스트, 미국 CBS의 메모 게이트, BBC의 길리건 기자 보도 사태, 그리고 5•18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김용장, 허장환 주장의 사례들을 살펴봤다.

이들이 주는 교훈은 명료하다. 문제는 제보자가 아니라, 언론이라는 점이다. 제보자들은 실로 다양한 의도를 가지고 언론을 상대한다. 여기에 언론이 원칙을 갖고 제보자를 대하지 않으면, 자칫 제보자의 노리개가 되기 쉽다.

즉, 언론이 특종과 속보의 욕심을 누르고 팩트들을 교차검증하고 항상 반론을 청취하며,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단정적으로 보도하는 것을 삼가야 한다는 기본원칙에 충실할 때, 언론은 가짜 제보자의 속임수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선입견과 단정의 오류에서 벗어나 반대의 경우나 다양한 가능성에 대해 항상 열려있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 거짓 제보자에게 놀아나지 않는 지름길이다. 즉, 언론에 필요한 것은 바로 저널리즘의 기본원칙이다.


글 박건식 / MBC 시사교양본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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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닷컴 7월 기사 7 JTBC의 ‘김용장 보도’에 언론상을 준 5·18 재단은 실수한 것 아닌가?
여전히 남아 있는 신분 관련 의문…“의문은 해소됐다”는 재단
金永男(조갑제닷컴)

지난 7월 5·18 기념재단과 광주전남기자협회는 5·18언론상 취재 보도 부문 수상작으로 JTBC의 ‘5·18 진상규명’ 연속보도 등을 선정했다. 이 재단은 심사평에서 JTBC 보도와 관련, “5·18 당시 미501여단 한국인 정보요원 김용장씨의 증언을 이끌어내 5·18 진상규명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국민적 관심사로 부각시킨 점이 심사위원들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했다.

이 재단은 “김용장씨의 미군부대 정보요원 신분에 대한 일각의 의문제기에 대해서는 5·18 재단에서 정보요원 입증자료와 관련자 증언을 확보해 의문이 해소됐음을 밝혀둔다”고 덧붙였다. <조갑제닷컴>은 5·18 재단에, ‘의문을 해소한 자료와 증언이 무엇이었느냐’고 질문했으나 31일 현재까지 답변을 듣지 못했다. 김용장씨의 신분에 관한 논란은 두 달 가까이 이어졌다. 입증자료가 언론을 통해 공개돼 의문이 해소된 적도 없다. 오히려 김용장씨의 신분이 ‘정보요원’이 아니었다는 점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언론에 소개됐다.

5·18 재단은 심사평 마지막 부분에서 “2020년 5·18 40주년에는 언론인들이 보수세력의 5·18조작, 왜곡의 위장막을 거둬내고, 5·18진실의 문을 더욱 활짝 열어 제쳐주길 소망하고 기대한다”고 했다. 이 재단은 ‘진실의 문’을 언급했는데 JTBC 보도를 통해 세상에 등장한 김용장씨의 신분에는 의문이 아직 많이 남았다. 김용장씨에 대한 의혹이 아직 풀리지 않은 이유를 차례로 소개한다.



1. 在美 번역가의 취재로 밝혀지는 김용장의 신분

김용장씨는 3월 JTBC 인터뷰를 통해 세상에 처음 알려졌고 5월에는 한국 국회의원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1980년) 5월 21일 광주를 방문해 비밀회의를 갖고 ‘사살 명령’을 내렸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이미 여러 차례 국가기관의 조사를 통해 사실이 아닌 것이 밝혀졌다.

그러나 1980년 당시 미 육군 501 정보여단 군사정보요원으로 활동했다고 주장한 김용장씨의 실제 직책이 정보요원이 아니었다는 증거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가 군사정보요원이 아닌 Language Specialist, 즉 한국어 전문가(통역가)로 활동했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아이러니하게도 김용장씨가 언론에 공개한 501 정보여단으로부터 받은 ‘상장’에 적시돼 있다.

차례로 설명하기에 앞서 요약을 하면, 그가 ‘미군정보원’으로 활동했다는 증거로 제시한 ‘상장’ 등은 오히려 그가 정보원이 아니라 통역 등 언어전문가로 활동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군사정보기관 관계자에 따르면 민간인 언어전문가가 정보를 보고할 수는 없다. 즉, 통역 업무를 비롯해 정보원을 만나 정보를 수집할 수는 있었겠지만 직접 보고하는 정보관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김용장씨의 신분에 처음 증거를 갖고 의문을 제기한 것은 설갑수라는 번역가이다. 그는 황석영 등이 쓴 5·18 관련 책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영문판을 번역한 사람이다. 그는 김씨의 기자회견 후인 5월 16일 <’미 육군 정보요원’ 김용장이 답해야 할 의문들>이라는 경향신문 기고문을 통해 김씨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했다.

설갑수씨가 집중적을 의문을 제기한 부분은 김용장씨의 당시 신분이었다. 김용장씨의 주장 이외에는 증거가 없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김용장이 501그룹 시절 받은 포상은 그가 501그룹 종사자였음을 증명할 뿐 광주에서 군사정보 전문가로 일했다는 증거는 아니다”라며 “지금까지 공개된 501부대의 두 상급기관, 육군 정보보안사령부(INSCOM)와 국방정보국(DIA) 문건에서 광주 근무 ‘한국인 정보전문가’의 흔적은 찾기 힘들다”고 했다.

그는 김씨의 증언의 정확성에도 문제가 있다고 했다. 김용장씨는 앞서 소개한 기자회견에서 “1980년 광주에 CIA나 국무부 직원은 없었다”고 한 바 있다. 설갑수씨는 자체적으로 조사를 실시, “CIA 요원 상주 여부는 알 수 없으나 광주에는 국무부 소속 미 문화원들이 있었고 미국의 5·18 초기 정보는 문화원 직원들의 작품이었으며 20년 넘게 광주의 미 육군정보 요원이 이들의 존재를 모를 수 없다”고 지적했다.

설갑수씨는 INSCOM의 1980년 연례보고를 검토, 당시 501 그룹에는 미군 194명, 직접 고용한 민간인은 두 명뿐이었다고 했다. 그는 “그 중 하나가 김용장이었을까”라며 “그러한 특기자가 굳이 광주 공군기지에 20년간 배치됐을까”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설갑수씨는 6월2일 <5·18의 ‘꿈 같은 증인’ 김용장은 ‘미 육군 군사정보관’이 아니었다>는 제목의 경향신문 기고문을 통해 김용장씨의 직책과 관련된 후속취재 결과를 소개했다. 그는 미군 당국에 정보요청을 하는 등의 취재를 통해 “그가 501 군사정보단의 군사정보관(Military Intelligence Specialist)로 근무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다”고 밝혔다.

설갑수씨에 따르면, 김용장씨는 9급 통역으로 501 정보단에 1974년 입단했고, 90년대 중반 통역관(Language Specialist)을 끝으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설갑수씨는 “이 기간 그는 비공식 정보원으로서 광주 주변의 첩보를 수집해 보고할 수도 있었으나 그가 속했다던 501 정보단의 524 임시대대-미 육군 정보보안사령부(INSCOM)-국방정보국(DIA) 계통을 거치는 공식 보고서를 직접 작성할 위치나 권한은 없었다”라고 했다.

설씨는 또한 김용장씨가 501 정보단 직책을 맡았다는 것을 물증으로 증명한 적이 없었다고도 지적했다. 20년 동안 501 정보단에서 일했다는 근속표창만을 제시했을 뿐 어떠한 직책도 증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가 공개한 부대 표창 중 하나에는 그가 ‘민간인 통역관’이었다는 설명도 담겨 있다.

그가 공개한 표창은 ‘COMMANDER’S AWARD FOR CIVILIAN SERVICE’이다. ‘민간근무자에 대한 사령관 표창’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그가 받은 상장 내용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다. ‘1995년 3월 1일부터 1996년 3월 31일까지 501정보여단에서 언어전문가로서 이례적으로 우수한 근무를 해 두각을 나타낸 사람’이라는 뜻이다. 영문에서도 볼 수 있듯 그는 그가 소개한 ‘MILITARY INTELLIGENCE SPECIALIST’가 아니라 ‘LANGUAGE SPECIALIST’로 근무했다.

INSCOM 공보국은 이와 관련된 설갑수씨의 질문에, “민간인 언어전문가나 통역은 군사정보관으로 활용되거나 임명될 수 없다”며 “그들은 정보전문가로서 훈련받거나 고용되지 않는다”고 답했다고 한다. 김용장씨 퇴직 직전 501 부대장이었던 퇴역 장성 H씨 역시 김용장씨를 기억하지 못했다고 한다. H 장군은 ‘민간인 통역이 군사정보직으로 갈아타거나 겸직할 수 있느냐’는 설갑수씨의 질문에 코웃음을 치며 전화를 끊자고 했다고 한다.

2. 아이러니한 한겨레의 특종

설갑수씨의 기고문이 공개된 이후인 6월 5일 한겨레에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단독] “김용장씨, 미 육군 방첩부대 501정보여단 재직 맞다”’는 제하의 기사이다. 한겨레는 5·18 당시 케이-57 기지(공군 제1전투비행단)에 재직했던 전 군 정보요원 ‘ㄱ’씨를 인용, “김씨가 군사정보관은 아니었지만 통역관 호칭으로 첩보를 수집하는 등 활동한 사실이 있다”고 했다. 그는 “501정보여단 광주파견대에 근무했던 그(김용장)는 통역사였지만 득문 내용을 미군 정보관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었고 기관 방문 때 정보관들과 동행해 통역했으며 각종 정보도 수집했다”고 했다. 이어 “김씨가 공식 보고서를 쓸 수 있는 위치는 아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이 기사는 한겨레의 말처럼 특종이다. 그러나 진짜 특종인 팩트는 ‘김용장씨는 미군 정보여단에서 재직한 게 맞다’가 아니라 ‘군사정보관은 아니었지만…’이 아닐까?

김용장씨는 당시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501정보여단에서 정보 수집 및 보고 활동을 하는 군사정보관(Military Inteligence Specialist, MIS)으로 재직했다”고 거듭 주장했다고 한다. 그는 “501정보여단에서 근무했던 직원 중 미국인 일반 정보요원은 ‘스페셜 에이전트’로 불렀지만 한국인 근무자들의 직합은 통역, 번역관(Interpreter/Translator), 군사정보관(MIS), 언어관(Linguist) 등으로 시기에 따라 달리 불렸다”며 “한국인 근무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직함은 군사정보관이었고 이 직함도 요청하면 언제든지 바꿔준다”고 했다.

앞서 설명했듯 군사정보관과 통역 및 번역, 즉 언어전문가는 차이가 크다. 그런데 이런 직책이 계속 바뀔 수 있다는 게 김용장씨의 주장이다. 설갑수씨가 인터뷰한 501 부대장 H 장군은 ‘민간인 통역이 군사정보직으로 갈아타거나 겸직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코웃음을 치며 전화를 끊었다고 한다.

3. 김용장은 왜 명확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나?

김용장씨는 한겨레에 “통역 및 번역관의 직함이 적힌 표창장과 군사정보관이라고 적힌 신분증도 찾아서 공개하겠다”고 밝혔다고 한다. 이런 인터뷰가 나간 지 한 달 반이 지난 현재, 이런 신분증이 언론에 공개된 적은 없다. 5·18 재단에 이런 신분증을 확인한 것인지 문의했지만 아직 답변을 듣지 못하고 있다.

김용장씨는 ‘언어전문가’, ‘미스터 김용장’으로 소개된 상장과 표창장은 모두 제시했는데 가장 무게감이 있는 ‘군사정보관’이라는 직함이 적힌 어떤 것도 공개하지 않았다. 의문이 생기는 것이 당연한 상황이다.

한편, 당시 한국군 505보안부대에서 근무했다는 허장환씨는 국회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김용장씨와 함께 참석했다. 그도 광주에 전두환 장군이 왔었다는 주장을 했다. 그는 설갑수씨의 두 번째 경향신문 기고문이 게재된 후인 6월 13일 페이스북에 장문의 글을 썼다. ‘김용장 선배가 연락을 피한다’는 취지였다. 그는 김용장씨의 신분에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에 분노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관련 글에 있는 오타 등을 수정하지 않은 채 전문 소개한다.

<근간에 즈음 하여 Facebook 상 에 글을 올리는게 조심 스러워 진다
고약한 심성을 가진 자들이 아무렇치도 않게 기고문에 대한 험집내기를 능사로 하고 시사성을 노린 언론은 이를 기사의 호재로 하여 독자들을 현혹 시키는 다시 말해 혹세 무민 함을 주저치 않는다
아니면 말고 식이다
하지만 음해를 당하는 당사자는 작난삼아 던지는 돌 맹이 에 목숨을 잃는 개구리 격이다
진실과 거짓이다 라 는 공방을 떠나
국군 아저씨들의 행열 을 보고 손을 흔드는 개울에 서 멱을 감고 놀던 어린 초등 학생들 에게 무차별적인 사격을 가한 5,18당시 시 외각 으로 철수 하던 공수 부대원 들의 행위는 변명 의 여지가 없는 말 그대로 만행이다
진실과 거짓 또는 당위성을 논할 여지가 없지 않은가 !
이러한 5,18의 실상을 증언 하기 위해 머나먼 태평양 피지에 에서 노구를 이끌고 다시는 오지 않겠다고 떠나버린 조국에 날아와서 증언 대에 서서 39 년 동안 무겁게 마음 속 에 자리 잡고 있던 십자가를 내려 놓으며 피를 토하는 심경으로 증언 하는 김 용장 씨를 ~~
가짜니 통역관에 지나지 않는 존재 감 없는 하짠은 사람 이니 하며 애써 그날의 증언 자체를 평가 절하 하고 있다
참으로 한심스런 작태라 아니 할수없다
입을 섞어 상대 할수없는 축생보다 못한 쓰레기 중에 상 급 쓰레기 들 이고 상판에 가래침을 벳어주고 싶은 속물 들이다
피지에 돌아간 김용장 선배는 요즘 내가 전화 를 해도 받질 않는다
당분간은 서로 연락 하지 말고 지내자고 한다
우리가 해야할 모든 역활은 마음의 십자가를 내려 놓는 그순간 다 끝난 것 이라고 한다
정말 씁쓸한 마음 이 든다
나역시 아무도 만나기도 싫다
사람 만나는게 두렵고 말 하는게 불편 스럽다
당분간 Sns 접속도 삼가 해야 할것 같다
노을이 짙게 드리우는 화천 북한강 강 언덕에 팔 베게를 하고 누워 그 간의 힘들었던 순간 순간을 떨쳐 버리련다.>

[ 2019-07-31, 16:42 ]

*2019. 5.15 조갑제닷컴 김영남 기자의 취재기

5·18을 앞두고 다시 한 번 황당한 주장이 언론을 도배하고 있다. 1980년 당시 미 육군 501정보여단 군사정보관으로 활동했다는 김용장씨가 13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한 “전두환이 5월 21일 광주를 방문해 ‘사살 명령’을 내렸다”는 주장이다. 그는 올해 3월 JTBC와의 인터뷰에서 비슷한 주장을 해 세상에 알려진 사람이다.

그의 주장을 종합하면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21일 광주에 내려가 비밀회의를 가지고 ‘사살 명령’을 내렸으며 그가 떠난 직후 ‘계엄군의 집단사격’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이 국가차원의 조사가 수차례 이뤄진 뒤에 나오는 것도 황당하지만 이를 보도하고 있는 JTBC의 보도 행태가 더욱 황당하다.

JTBC는 김용장씨가 국회에서 증언(?)을 한 날인 13일, 김 씨 관련 기사를 간판 프로그램인 뉴스룸을 통해 세 차례에 걸쳐 내보냈다. 두 꼭지는 이른바 ‘스트레이트’ 기사로 이날 있었던 김씨의 주장을 차례로 소개한 기사다. JTBC는 이후 김용장씨를 직접 스튜디오로 초대해 손석희 앵커와의 인터뷰를 내보냈다.

우선 1차 보도인 스트레이트 기사의 제목은 <“광주에 내려온 전두환” “발포 아닌 사살” 국회 증언>인데 유선의 기자가 보도했다. 손석희 앵커는 이 기사 보도를 다음과 같이 시작했다.

<앵커: 광주 금남로 옛 전남도청 앞에 있는 시계탑입니다. 오후 1시에서 1시 30분을 향해 가는 시각, 80년 5월 21일 여기서 계엄군은 시민을 향해 집단, 조준 사격을 했습니다.

김용장: “발포 명령과 사살 명령은 완전히 다릅니다.”
허장환 “그 사격은 제가 직접 목도를 했습니다. 앉아쏴 자세에서 사격은 절대 자위적 투사가 아닙니다. 그건 사살이지.”

앵커: “발포가 아닌 사살이었다.” 5.18 당시 광주에서 활동한 미군 정보요원 김용장 씨와 보안부대 수사관 허장환 씨는 ‘계엄군의 사격은 사살이었고, 명령에 따른 것’이라고 오늘(13일) 국회에서 증언했습니다. (하략)>


손석희 앵커는 기사 소개에 앞서 5월 21일 계엄군의 집단, 조준 사격이 있었다고 단정했다. 그는 그의 이런 주장을 뒷받침할 어떤 출처도 밝히지 않았다. 이 기사에 소개될 김용장씨와 허장환씨의 주장을 ‘증언’으로 표현해 사실임에 틀림없다는 보도 행태를 취했다. 이 기사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 측의 입장이나 전두환씨가 같이 회의를 했다는 사람들의 주장은 전혀 소개되지 않았다. 이들은 과거 검찰 조사와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은 광주에 오지 않았다고 밝혀왔다.

JTBC는 이후 <“헬기 사격, 전투기 출격대기도…” 구제척 증언 ‘일치’>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것인데 기사 첫 문장은 “김용장 씨는 헬기사격을 백악관에 보고했다고 말했습니다”이다. 김씨가 이런 보고를 하게 된 경위나 헬기 사격이 사실임을 뒷받침하는 어떤 내용도 기사에는 없다. 미 정보요원이 백악관에 보고를 했으니 시청자들은 이를 사실로 받아들이면 된다는 식이다.

이날 뉴스룸 후반부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도 사실확인 노력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오히려 김용장씨의 황당한 주장이 24분 동안이나 전파를 타는 상황이 이어졌다. 손석희 앵커의 역할은 김용장씨의 주장에 신뢰성이 있는지, 무엇을 바탕으로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인지 확인하는 것이지만 이는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물론 손 앵커는 김용장씨가 1997년에 받은 상패를 보여주고 ‘시청자들의 신뢰를 위해서’라고 말했다. 광주사태는 1980년에 일어났다.

이날 인터뷰에서 우선 손석희 앵커는 김용장씨와 간단한 인사를 나눈 뒤 ‘이런 사실을 공개하기로 한 어려운 결정을 했다’는 격려성 발언을 했다. 이에 김용장씨는 “그렇다. 그동안 가지고 있던 제 마음속의 십자가는 너무 크고 너무 무거웠다. 감히 누가 39년 비밀을 지킬 수 있겠나? 현장에서 직접 본 사람으로서는 그 비밀이 굉장히 컸다”라고 했다.

이런 답변이 나온다면 대다수의 기자들은 ‘당시 현장에서 무엇을 했고 무엇을 직접 봤습니까’라고 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손 앵커는 ‘미국 정보요원이라는 역할이 무엇이고 보고체계가 어떻게 되느냐’고 물어 시청자들은 광주사태와는 관련 없는 미국 정보 보고 체계에 대한 설명을 들어야 했다.

이후 손 앵커는 ‘광주에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얻은 정보도 있을 테고 본인이 직접 취득한 정보도 있을 텐데 다른 사람으로부터 얻은 정보는 누구로부터 얻느냐’고 물었다. 기자가 인터뷰를 했다면 ‘당시 직접 취득한 정보는 무엇이었습니까’이었을 것이다.

손 앵커의 질문에 김용장씨는 “한국 정보기관 요원 등을 비롯한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는 정보원들을 통해 정보를 받는다”고 했다. 이에 ‘왜곡된 정보를 줄 수도 있지 않느냐’는 질문에, 김씨는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며 “한국에 있는 정보기관도 그 첩보를 자기 기관을 통해 상부에 보고하고 우리에게도 주고 또 그 정보가 상보하는 과정에서 크로스체크가 되기 때문에 허위정보를 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이 질문 과정은 또 한 번 핵심 논점에서 벗어난다. 손 앵커와 김용장씨가 전하고자 하는 핵심은 전두환 장군이 광주에 와서 사살명령을 내렸다는 것일 텐데 미 정보요원의 전반적인 정보 취득과 보고 활동에 대해서만 대화가 이뤄지고 있다.

손석희 앵커는 김용장씨가 받았다는 상패를 소개한 뒤 본론으로 들어가겠다며 ‘전두환 씨가 (광주에) 온 것을 어디서부터 어디로부터 정보를 받았는가’라고 물었다. 이에 김용장씨는 “전두환 씨가 5월 21일 정오쯤 해서 왔는데 우리 정보원을 통해서 첩보를 받았습니다. 그 첩보원은 보안사령부에서 근무하는 정보요원”이라고 했다. 이어 “그 분이 첩보를 줬고 그 후에 505보안부대에 근무하는 여러 분들도 본 적이 있다”라고 했다.

손 앵커는 “전두환씨가 온 것을 봤다는 얘기인가”라고 물었다. 김 씨는 “본 적 있다”라며 “그리고 간접적인 증명을 할 수 있는 몇 가지가 있다”며 전두환씨가 탄 헬기의 비행 계획서 기록에 남아 있을 것이라는 주장을 했다.

김용장씨는 자신이 직접 본 것은 없고 남에게 들은 얘기를 자신이 보고했으니 이를 진실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손 앵커는 의문을 갖지 않았다. 손 앵커는 본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도 하지 않았다.

손석희 앵커는 이후 “전두환 씨는 그때 광주에 안 갔다고 얘기했기 때문에 사실 자체가 명확하게 드러난다면 그런 발포명령의 개연성이 그만큼 높아질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자 김용장씨는 “그렇다”라면서 “아마 전두환 씨가 나이가 많이 들어서 아마 기억력이 떨어질지 모르지만”이라고 했다.

김용장씨는 계속 이어지는 인터뷰에서 한국군 ‘편의대’가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방화 등을 하면서 무력진압을 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계엄군의 성폭행과 관련된 보고도 있었다고 말했다. 이 모든 주장의 출처는 ‘정보원’이었다.

JTBC 뉴스룸에서 13일 진행한 김용장씨의 인터뷰 기사와 관련 기사 두 꼭지, 김 씨의 주장에 정면 배치되는 관련자들의 증언을 차례로 소개한다.

[ 2019-08-30, 14:54 ]

1708 설갑수의 조지 카치아파카스에 대한 재반박 - 광주in

설갑수의 조지 카치아파카스에 대한 재반박 - 광주in


설갑수의 조지 카치아파카스에 대한 재반박

설현 UNITE HERE! 기업분석/국제 캠페인
승인 2017.08.06 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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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카치아파카스(이하 조지)와 같은 이와 사실의 진위 논쟁을 하는 것은 참으로 피곤한 일이다. 그는 단순한 거짓말쟁이가 아니다. 한 가지 사실에다 수많은 거짓을 퍼부어 진실을 희석하는 것이 조지가 행하는 일반적 거짓 형태다.

또한 상대방을 끝없이 분열시키는 것이 그의 거짓의 특징이다. 예컨데, 조지는 7월 20자 “반박문”에서는 정작, 반박할 대상인 5월 단체와 5.18 기념재단의 공동성명 대신, 재단 상임이사 김양래를 물고 늘어졌다. 그리고 8월 4일자에서는 나만 물고 늘어진다.

조지가 뻔한 사실을 두고 논쟁을 만드니, 말이 길어지고, 에너지 소모도 많다. 그러나 조지의 최근 반박문이 나 자신에 대한 거짓 정보로 일관하고 있으니, 별도리 없이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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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전에 다음을 밝힌다.

1) 8월4일자 광주인에 실리고, 스스로가 여기저기 뿌려된 조지의 글은 7월 26일 그가 내게 보낸 이메일의 확장판인듯 하다. 나는 답신으로 그의 거짓 주장에 대해 반박했으나, 8월 4일의 그의 글에서는 그 점이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2) 그 후 이메일에서 조지는 내게 법적 소송을 할 것이라 말했다. 내게 미국과 한국에서 변호사를 선임해 그들의 연락처를 보내달라고도 말했다. 따라서 지금 이 글이 조지의 주장을 반박하는 마지막 공개글이 될 것 같다. 그렇게 되기를 진심으로 희망한다.

3) 사실 조지는 나와 이메일을 통해 논쟁을 시작한 초기부터 빈번하게 내게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고 말해왔다. 이미 7월 23일 글에서 밝혔듯이 나는 송사가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아니라고 믿는다. 또한 그 모호한 법귀로 말미암아, 강자에게 유리하고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는 한국의 명예훼손법에 나는 반대한다.

5.18민주화운동 37주년 국제학술세미나가 '광주일지: 민주주의와 자유의 집단 기억” (Gwangju Diary: A Collective Memory of Democracy and Freedom)'라는 주제로 지난 5월26일 유엔본부(Conference Room 11)에서 5.19기념재단 주최로 열리고 있다. 도도널드 그레그(Donald P. Gregg) 전 주한 미대사(왼쪽에서 두 번째)와 대표적 진보적 한국학 학자 브루스 커밍스 (Bruce Cumings) 교수(맨 왼쪽)가 발제자로서 참여하고 있다. ⓒ5.18기념재단 누리집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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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군다나, 백인 미국인 교수가 미국적을 취득한 재미 한국인에게 한국에서 취할 명예훼손 소송의 꼴이 가관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가 소송을 감행한다면 회피할 생각은 없다. 적극적으로 대응할 것이다. 따라서 조지가 법정소송을 행하려는 동안, 그를 직접 상대할 이유도 필요도 나는 없다.

그가 변호사를 선임해 그로 하여금 나와 연락 하기를 바란다.(이 점은 이미 조지에게 통고했다). 변호사이던 누구이던 삼자를 통하지 않고 조지와 직접 상대하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다.

4) 마지막으로, 이 글의 내용은 나의 개인 입장이지, 이 글에서 언급될 단체나 개인의 입장과 무관하다. 다시말해, 나는 그들의 의견을 대표하지 않는다. 모든 존칭과 존어는 생략한다.

조지가 그의 문단마다 번호를 붙혀 왔으니, 나는 그 길을 좇아 반박해 나가겠다. 글읽는 사람들은 두 글을 비교해서 읽어도 좋으리라.

1.

나는 단 한차례도 나를 “광주일지”의 단독 번역자로 소개한 적이 없다. 그러기에는 공동번역 편집자의 닉 마마타스 (이하 닉)의 공과 우정이 너무 크고 깊다. 책이 어떻게 번역하게 됐는지는 2015년 5월 오마이 뉴스 기고문에서 밝혔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10872

한국에서 대학까지 마치고 미국에 온 나는 내 영어가 완벽하다고는 절대 여길 수 없다. 그래도 미국에서 영어글 써서 먹고 사니, 책 번역할 실력은 된다고 생각한다. 사실, 조지가 내게 보낸 이메일과 그리고 공개된 그의 반박문 속에서 곧잘 문법적 오류가 나온다. 우연히, 곧 인용할 조지의 이메일도 문법적 오류를 품고 있다 이 점에 대해, 소위 내티브 스피커이자 대학교수인 조지의 변명이 궁금하기는 하다.

궁금한게 한 가지 더 있다. 왜 나만 영어를 잘해야 하나, 정작 조지는 아직도 한국말이 서툰데? 조지가 광주를 들락달락한지도 대략 20년이 넘었고, 그 동안 두 명의 한국인 아내를 맞았다. 그런데 한국어 수준이 간신히 의사소통은 하나, 한국말 책이나 신문을 읽지 못하는 수준이라고 조지는 그의 수많은 이메일 중 하나에서 고백했다.

또 다른 이메일에서는 조지는 어디에서인가 그가 한국어 연설로 연설하자, 기립박수를 받았다고 썼다. 그의 연설내용이 감동적이라서 그런 격한 반응이 나왔는지, 혹은 한국말하는 것이 기특해서 기립박수가 나왔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그가 빈번히 번역글에 의존하다 보니, 특히 한국어 글에 대한 오해도 잦았다. 또한 글이 잘못 번역되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한국어 를 배우던지, 전문번역사를 고용하라고 몇 차례 충고했다.

2.

광주일지”를 번역 편집자 그리고 기고자인 브루스 커밍스와 팀 모두가 애초에 돈을 한 푼도 받지 못한 것을 사실이다. UCLA Monograph Series가 비영리 출판 프로젝트였기 때문이었다. 우리 4인은 “광주일지”를 절대로 절판하는 일이 없을거라는 편집자의 구두 약속을 믿고, UCLA와 계약을 맺었고, 책은 적어도 30여개 미국 대학교에서 교재로 쓰였다 (자세한 내용은 위에서 언급한 오마이 뉴스 기고문을 참조하기 바람).

조지는 애초부터, 내가 재단으로부터 4000-4800만원을 받고 판권을 넘겼다고 나를 몰아붙였다. 나는 그런 터무니없는 액수를 받은 적이 없다고 여러차례 밝혔다. 조지의 최근 반박문의 기초가 된 7/26일 이메일을 공동번역자 닉에게 비밀참조(bcc)로 보내면서, 조지는 내게 물었다. “그 돈 받아서 닉에게도 공정하게 줬니?” 한 마디로 내가 그 엄청난 액수를 혼자 챙겼다고 가정하고, 닉과 나의 반목을 꾀한 것이다.

굳이 내가 반박할 필요가 없었다. 닉은 즉시 조지에게 답장을 보내, 내가 책에 관련된 모든 문제에서 그를 공평하고 평등하게 대접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속된 말로 “그만해라”라는 충고도 조지에게 해줬다.

그래서 밝힌다. 조지가 굳세게 믿는 액수는 터무니없고, 재단에게 받은 금액은 닉만 아니라, 팀과 커밍스에게도 적절하고 공정하게 배분됐다. 판권은 기증했고, 금액은 금년에 나온 개정판과 앞으로 있을 수 있는 모든 개정판의 수고비였다.

이 모든 것은 문서화됐고, 나는 서명했다. 자세한 내용은 5.18 재단에게 물어보기 바란다. 여하튼 금전이 오가니, 나도 “기증”이라는 말이 맘에 걸려, 김양래 상임이사님에게 말씀드렸다. 그 후로는 재단 측에서도 “기증” 대신 “판권 확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3.

조지는 “설갑수는 내가 그는 CIA를 위해 일한다고 말한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대신, “그[설갑수]가 30년 동안 CIA요원이었던 도널드 그레그와 일한다” 고 말했다. 그러나 다음은 6월 14일 그가 팀에게 보낸 이메일의 일부이다.

“To complicate matters, I believe Mr. Kap may also have mentioned all this to Donald Gregg, thereby possible bringing CIA attention to me.”

우선 글을 해석하기 전에 명칭과 문법의 오류부터 바로잡자. Mr. Kap이 아니라, Mr. Seol이 맞다. 한국을 20년 왕래하고 “광주일지”를 빈번히 인용한 조지는 내 성이 뭔지 구별하지 못했다. 또한 “possible”이 아니라 “possibly”가 문법적, 어법적으로 맞다.

해석인 즉슨,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 즉슨, 나는 설갑수가 이 모든 것을 도널드 그레그에게 말했고, 따라서 CIA가 나를 주목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조지는 내가 CIA를 위해 일한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또한 이 지리한 논쟁의 발단이 된 조지의 5월28일자 이메일 “518-CIA connection)에서 조지는 다음과 같이 썼다.

“518 기념재단이 미국과 CIA에 밀접하게 다가가는 것은 정말 중요한 정치적 문제라고 생각한다.” (“I think there is a real political issue about the 518 Foundation’s drawing close to the US and the CIA.“

그의 글 자체가 모든 것을 보여준다고 믿기에, 달리 반박하지 않겠다. 또한 “중국을 통한 북한 압력은 소용없다”라는 그레그의 글을 국내 언론에 싣도록 돕는 일이 “30년동안 CIA에서 일한 사람과 같이 일한다”는 표현으로 퉁칠수 있는 것일까? 그런식으로 말하는게 비열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4.

내가 그레그가 70년대 중반까지 일했다고 한 것은 오타였다. 그는 82년 즉 중반까지는 CIA에 적을 두며, 백악관 NSC에서 일했다. 글이 올라간 후, 비슷한 오타를 한 가지 수정했으나, 저 부분은 놓쳤다. 여하튼 오타는 나의 불찰이고, 따라서 그 글을 읽은 분들께 사과한다.

나는 그레그가 80년 5.18의 결정당사자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또한 조지가 그레그가 그렇게 중요한 인사였다고 믿었다면, 그의 책에서 다만 세 차례, 세 문장만 그레그를 언급할 수 있냐고 반문했다. 마지막으로 그가 5월 22일 백악관 회의 이틀 전에 쓴 메모를 보면, 그레그가 미 군부와는 사뭇 다른 관점을 견지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의 메모의 링크: http://digitalarchive.wilsoncenter.org/document/122097

5.

나는 조자기 2000년 시민법정 기획에 참여했다고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당시 언론보도를 보자면, 그렇게 판단된다고 말했다. 동시에, 조지의 반박대로 단지 참여만 했다면, 조지는 그레그가 시민 법정에서 기소됐다는 잘못된 근거로 성명을 통해 그레그의 유엔 518행사 참여를 비판하기 전에 팩트 체크부터 했어야 했다. 그렇지 않다면, 모르는 사실을 되는 대로 말한 것 아닌가?

6.

또한 그레그는 그의 비판 성명에서 그레그를 명예손님(honored guest)라고 칭한 것을 철회하지 않았다. 주최측 그 누구도 그레그를 명예손님으로 부르지도 않았음에도 말이다. 조지는 처음에는 그레그가 돈을 받았기 때문에 명예손님이라고 주장하다가, 그레그가 어떠한 댓가 없이 유엔행사에 참여한 것을 알려주자, 유엔행사에 참여하는 것은 그레그에게 명예로운 일이니, 명예손님이라는 해괴한 논리를 개발했다.

7.

그레그의 비판 성명을 실은 “스리랑카 가디안”이 7월15일까지 수정되지 않았다는 게 나의 기억이다. 그 기사가 따로 정정발표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증명할 수 없다고 나는 나의 반박문에서 분명히 말했다. 조지 말처럼, 정정이 6월 26일 전에 이뤄졌다해도 애초 기사가 올라간 13일로부터 열흘 후였다. 다시말해, 518 재단과 깊은 유대를 갖고 있는 스리랑카의 유력지에 거짓 주장이 10일간 정정되지 않았고, 그후 정정 발표도 없었다. 이게 제대로 된 일처리로 보이는가?

8.

얼정한 사실에 거짓을 뒤섞는 것이 바로 가짜뉴스의 근간이다.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이런 방식이 조지의 화법이었다. 다만 조지에게 묻고 싶다. 내가 무슨 인종차별 발언을 했는지, 그가 백인남자의 특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역차별적 인종주의(reverse racism)가 가능한지를 묻고 싶다.

9.

조지가 그의 주장대로 518 기념 재단이 그레그에게 보고하는 것처러 보이게 만들 의도도 없고, 생각도 없었다면, 왜 7월 23일 반박문에서 다음과 같은 거짓말을 했는지 대답해야 한다. 조지는 518재단의 직원이 “나에게 보낸 이메일이 도널드 그레그에게 함께 참조(CC)로 보내졌다.”라고 주장했다. (A few months later an email sent to me from a member of the May 18 Foundation’s staff was also cc’d to Donald Gregg.). 이메일은 참조(CC)로 보내지지 않았다. 이메일은 재단 직원 유인례가 재단의 국제연대 코디네이터로 승진했다고 발표한 집단 메일이었다. 이에 유인례가 이메일 통해 조지에게 항의하자 조지는 발언 철회도 사과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조지는 아무 해명없이 7월20일 반박문에서 위의 집단 이메일이 그레그에게도 보내졌고, 따라서 전 CIA요원 그레그를 5.18재단이 “친구”이자 “협력자”로 지칭했다고 비난했다. 그의 어처구니 없는 거짓과 그레그를 “명예손님”으로 우긴 억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패턴이 발견되지 않느가? 1) 사실 하나에 거짓말을 덧부쳐 초점을 흐린다 2) 거짓말이 드러나면 해명이나 사과는 절대 하지 않고, 다른 쟁점을 만들어 논점을 계속 희석시킨다. 보통 페이크 뉴스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10.

이미 말했듯이 조지가 팀의 자료를 무단 사용했다는 공방에 대해 팀의 공식입장이 곧 나올것이고, 그 문제에 대해서 내가 더 이상 발언하지 않겠다는 것이 나의 입장이었다. 다만, 팀이 제기한 문제의 책, “한국의 민중봉기” (5월의 봄: 2015)의 원저 출판사인 PM출판사의 발행인 램지 칸의 이메일을 조지가 공개한 이상, 그 범위 안에서 내 개인의 의견임을 전제로, 몇마디 덧붙이겠다.

먼저 PM 출판사는 팀의 주장을 옮곧게 살펴보지 않았다. 그냥 일방적으로 조지의 주장을 번복했다. 또한 워낙 소규모출판사라서 그런지 모르지만, 조지의 책에 대해 팩트 체크 등을 제대로 하지 않았던것 같다. 개인 의견임을 전제로 단언컨데, 편집 과정에서 걸려지고 지적될 문제를 팀은 제기하고 있다.

새로운 프로젝트로 말미암아 분주한 팀이 입장 표명을 곧 하기를 바란다.

사실 출판사가 영세해도 편집일을 제대로 해야한다. “광주일지”를 발행한 UCLA Monograph도 금전적으로야 영세하기 짝이 없었지만 편집에는 돈과 시간을 아끼지 않았다. 편집 기간 8개월 동안,경력30년차의 편집자는 물론, 두 명의 한국학 교수와 한 명의 한국학 대학원생이 팩트체크와 인용 사례 하나하나를 점검했고, 내게 10 차례 정도 추가 설명과 자료를 요청했다.

이를 좇아, 나 또한 “광주일지” 재판을 준비하면서 미국의 저명한 잡지 뉴요커(The New Yorker Magazine)의 팩트체커(fact checker)와 알 자지라 방송의 전 기자를 동원해 편집과 인용상 모든 문제들을 재점검했다. 이 과정은 이번 재단의 간행물 “주먹밥” 8월호의 내 기고문에서 간단히 설명했다.

설갑수, 나는 누구인가?설갑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영문판 편집 번역자.

나의 먹고사니즘은 조지와 나의 논쟁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퇴한 백인 노교수가 직접 내 개인 정보를 캐는 고약한 짓을 하셨으니, 나로서는 대응할 수 밖에 없다. 참 열없는 노릇이지만, 과정에서 조지의 무지와 악의가 드러났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먼저 조지는 내가 기자(staff writer)로 일한 “내셔널 언더라이터” (National Underwriter Magazine)이 존재하지 않는 잡지라고 주장했다. 긴말 필요없이 다음의 웹사이트를 보기 바란다. https://www.nationalunderwriter.com/magazines

나는 조지가 주장하는 것처럼 재산 상해 보험 산업 정보 사이트에서 일한 것이 아니라, 위의 잡지 “생명보험” 에디션에서 일했다. 내가 퇴사한 후, 내셔널 언더라이터는 두 차례 주인이 바꿨고, 새로운 온라인 플랫폼도 시작됐다. 조지의 최근 기고문의 원형이었던 그의 이메일을 받고, 나는 이 점을 즉시 지적했으나, 조지는 이를 무시하고 그냥 글을 실었다.

또한, 내가 일했던 또다른 직장, MSCI는 투자회사인 모갠스탠리와 같은 회사가 아니다. MSCI는 소위 인덱스회사, 즉 금융 기업 데이타 분석 전문회사이며, 모갠스탠리에서 오래 전에 분사됐다. 두 회사의 합의에 의해,MSCI라는 약자는 분사된 회사가, 모갠스탠리는 원회사가 사용하기로 했다. 이 점 또한 조지에게 설명했는데, 그는 또한 무시했다.

조지가 말한 것처럼 모갠스탠리는 헤지펀드가 아닌, 일반 투자회사이다. 헤지펀드와 일반 투자회사를 구별하지 못하니, 사회학 박사학위 소지자 조지의 상식 수준이 의심스럽다. 아니면 나에 대한 악의 때문에 아무말 대잔치라도 하고 있는 것인가?

MSCI ESG는 전세계 상장사들의 환경 (Environmental) 지속가능성 (Sustainability) 그리고 지배구조(Governance)를 평가한다.지배구조 분석이 내 전문분야였다. 여하튼 회사에서는 불성실하고, 게으른 존재였으나, 가끔 튀기도 해서 내가 쓴 리포트가 2014년 ESG 보고서 중 가장 많이 읽힌 보고서이기도 했다.

사실, 학부 때 나름 학생운동도 열심히 했고, 한 때 스스로를 혁명적 사회주의자라고 믿었었다. 여전히 나는 내가 좌익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넘어넘어” 영문판씩이나 출간한 사람이 금융정보 기업에서 일한다는 것은 우울하고 슬픈 일이었다. 그래서 나름 틈틈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찾아 할려고 노력했다. 그러지 않고는 미칠 것 같았다. 최근 몇 년 동안 꾸준히 한 일 중의 하나가 미국의 평노조원 잡지 레이버 노츠(http://labornotes.org/)에 한국 노동문제에 대해 기고하는 일이었다.

미국이라 안심하고 실명 기고를 했는데 5-6년 전 사단이 났다. 회사 누군가가 내 기고문을 보고, 나의 상사가 아닌, 그 상사의 경쟁자에게 보고를 한 것이다. 경쟁자는나의 글을 적절히 내 상사를 공격하는데 사용했고, 그녀는 회사를 떠났다. 정확히 말해, 나 때문에 그녀가 사퇴한 게 아니라, 나는 그녀가 밀려나야했던 많은 이유 중의 하나였다.

솔직히 비참했다. 나의 정치적 글은 저들에게 위협은 되지 못한 장기판의 졸이였다. 여하튼 나는 힘없어서 살아남은 웃기는 존재였다. 그 후 나는 나의 페이스북과 트위터를 폐쇄했고, 필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여하튼, 존재와 의식 간극에서 언제나 울쩍했던 나에게 2011년 월스트릿점령(Occupy Wall Steet)시위는 신나는 일이었다. 특히 주코티 공원을 점거한 시위자들이 매일 집회를 통해모든것을 집단적, 민주적으로 결정하는 것을 보며, 나는 80년 광주의 도청 앞 집회를 떠올렸다.

당시, 한진 중공업의 노동자 김진숙이 크레인을 점거하고 장기 농성 중이었고, 뜻있는 시민들은희망버스로 호응하고 있었다. 2011년 10월9일 나는 그와 손전화를 연결하여, 주코티 공원월 스트릿점령 집회에서 연설하도록 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37758

http://labornotes.org/blogs/2011/10/south-korea-sit-connects-us-%E2%80%98occupiers%E2%80%99

이렇듯, 이러저러한 계기로 많은 젊은 노조운동가들과 친해졌고, 그들의 소개로 국제노조연맹(ITUC) 그리고 미전국노조 연합 중 하나인 UNITE HERE!에서 일할 수 있게 됐다. 너무 기뻤다. 조지가 이메일을 통해, 내가 이들 조직에서 일하는 것을 확인할 수 없다고 그 누구도 나를 모른다고 말했다. 나는 확인할 있도록 도와줄테니, 변호사 통해 연락해 달라고 대답했다 (이미 말한대로, 나는 더이상 그와 직접 소통을 하지 않으려한다). 그럼에도 그는 또다시 일방적으로 글을 올렸다.

내 재산 관계에 대한 조지의 주장에 몇 마디 하겠다. 개인정보를 뒤져보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더구나 개인 정보가 잘못된 거라면, 공개헤서는 안된다. 그 개인정보가 이 논쟁에 어떤 의미가 있다면, 내게 먼저 해명과 설명을 구하는 것이 맞다. 조지는 스스로가 초라해 보이지 않는가?

그레그는 정말 누구인가?

미국 대학은 학생들이 위키피디아를 과제물에 인용하는 것을 금지한다. 오류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퇴한 미국 대학교수 조지는 그레그에 대해, 위키피디아를 인용한다. 그레그가 이란 콘트라 스캔들의 정점이었던 펠리스 로드리게스의 친구였으며, 그가 부대통령 부시를 만날 수 있게 해 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외에 더 밝혀진 것은 없다. 자세한 설명은 위키피디아가 아닌 이 웹사이트를 참조했으면 좋겠다.

https://www.brown.edu/Research/Understanding_the_Iran_Contra_Affair/profile-gregg.php

조지는 그레그가 피닉스 프로그램을 지휘했다는 주장을 위키피디어가 아닌 다른 근거로 설명해야 할 것이다.

그레그의 사과

5.18 에 대한 그레그의사과는 분명 미흡했고, 미국의 공식 사과가 필요 없다는 그의 입장은 잘 못된 것이었다. 그러나 5월 26일 유엔 학술회의는 사과 받는 자리가 아니었다. 사과의 유무가 참가자의 자격을 결정하는 게 아니었다. 모든 학술회의가 그렇듯 최소 동의 속에서 다양한 의견을 개진하는 장소였다.

차라리 그레그의 특징은 그가 필요하다면 사과한다는 것이다. 그는 남북분단의 미국에 책임에 대해 미안하다 했고, (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477753.html) 심지어 박근혜를 좋게 평가한 것도 사과했다(http://www.ytn.co.kr/_ln/0104_201611071510062253_001). 그런데 무슨 소용이 있나? 분단의 책임과 광주진압의 개입의 사과를 한다면, 미국인이 아닌 미국정부가 해야 한다.

유엔행사에 연사로 와달라고 부탁하자, 그레그는 처음에는 망설였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나는 내가 많이 좌익이라고 생각하고, 당신은 분명히 우익이다. 남북 화해를 제외하고는 당신과 내가 동의할 수 있는 이슈는 거의 없을 것 같다. 나는 당신이 주한 대사로 부임할 때, 반대시위했었다. 그러나 당신이 우익이기 때문에 와야한다.”

그리고 지만원류의 북한개입설을 그대로 흡입한 전두환의 저서전에 대해 언급했다. 그의 표정이 전두환에 대한 불쾌감으로 어그려졌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전두환 웃기는 놈 아니냐? 부디 와서 우익으로서 전두환 주장이 거짓이라고 말해 주기 바란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레그에게 “연민”도 “민망함”도 없다. 다만 당시 행사의 원활한 진행을 책임진 사회자로서 미국의 역할에 대한 비판의 화살이 집중되는게 민망했을 따름이다. 솔직히 조지가 한국낱말 “민망함”의 함의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도 궁금하다. 그가 그의 글에서 “민망힘”을 “연민”을 동의어로 취급하니 의문이 난다.

조지는 유엔행사가 광주시민 모르게 계획되었고, 첫 언론 보도가 5월27일에 나오기까지 시민 대부분이 연사가 누구인지도 몰랐다고 주장했다. 유엔행사는 5.18재단이 매년 초에 발표하는 사업계획서에 나와있다. 그러니 그의 주장은 거짓이고. 황교안 권한대행 정부의 비협조로 유엔 장소를 구하는데 시간이 많이 지체됐으나, 행사 한 달여 전인 4월20일부터는 일정과 연사에 대한 뉴스가 보도되기 시작했으니, 그 또한 조지의 주장이 거짓이다. (https://youtu.be/fTnBfakPsrc)

조지의 CIA 정보공개요청

조지는 “내가 학술적 연구를 위해 CIA 문서를 인용하는 것은 5.18기념재단이 CIA를 이용해 자신을 정당화하는 것과 전혀 다르다.” 라고 주장한다. 어처구니가 없다. 재단이 CIA 기밀해제된 문서 중 “5.18 북한개입설을 반박할수 있는 자료를 찾아 분석하고, 커밍스와 그레그의 의견을 듣는게 CIA를 이용하는 일인가? . CIA가 광주의 한 비영리 단체에 이용 당할만한 조직인가?

조지는, 2003년, 부산의 한 활동가로부터 부탁을 받고 10.26 박정희 암살관련 CIA 정보공개 요청(FOIA) 했다고 말했다. 그 자체는 아름다운 일이긴 하나, 조지의 FOIA 요청 문건을(읽고 내가 내린 결론은 그가 이런 일을 하기에는 실력도 성의도 모자란다는 것이다. 대강 보아도 사실적 오류가 꽤 많지만, 박정희에 관련 두 가지만 짚어보자. http://www.pmpress.org/content/article.php/20130423151755456)

-. 조지는 박정희가 일본군 장교라고 주장한다 (Park Chung-hee (later to become president of South Korea from 1961 to 1979) was one such former Japanese officer) 그 소스를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 II”에서 인용한다. 인용도 오용했고, 사실관계도 틀렸다. 박정희는 일본군 장교 급도 못되는 괴뢰국 만주국 장교였다.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하다. 5.16쿠테타의 주모자들은 박정희의 만주군 인맥이었지, 일본군 인맥이 아니기 때문이다.

-. 조지는 “박정희가 일본군 정보장교였고, 김일성을 생포하거나 죽이려고 했었다” (Park had been an intelligence officer in the Japanese Army and sought to capture or kill Kim Il-Sung)고 말한다. 이 정도면 거의 소설급이다. 박정희는 정보장교를 할 정도로 뛰어난 주구는 아니었다. 그는 작전장교였다. 또한 이 방면의 탁월한 연구자들인 정운현과 김효순이 그들의 저서에서 밝혔듯이 만군 장교 박정희와 항일 게릴라 리더 김일성이 전투건 추격전이든 조우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박정희와 김일성의 활동 지역도 시기도 달랐기 때문이다.

이미 잘 알려진 정보 조차 모르거나 왜곡한 채, 기밀정보 공개를 요구하는 조지를 보고 CIA 한국 사료담당과 변호사들이 그를 비웃지 않았을까?

그러나 조지의 정보공개요구서의 결정적 결함은 요구한 정보공개가 실현되면 공공의 이익에 어떻게 복무할 수 있는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설명은 모든 정보공개 요구서의 기본이다. 한 마디로 사실관계는 틀리고 서식도 못맞춘 것이다. 다만, 조지는 그의 연구와 글이 공공의 이익에 계속 복무할 것라고만 이야기했다 (Dr. Katsiaficas' research and writing has, and will continue to, serve the public interest by addressing the history of South Korea and the relationship between United States and South Korea).

글을 맺으며

마지막으로 조지는 내가 복수를 다짐하고, 그를 정부에 밀고하겠다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통역을 오역인지, 악의적인 왜곡인지는 나는 잘 모르겠으나, 다만 나는 조지가 그가 행한 거짓과 기만에 대해 책임져야하고 그렇게 만들겠노라고 말했다.

또한 조지의 허위 주장에 대한 나의 반론이 모두 사실에 의거하고 증거가 있으니, “언론기관이나, 책임있는 단체나 정부의 요구가 있다면, 이 모든 자료를 공개하겠다.”고 말했다. 그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

조지의 논리대로라면, 광주항쟁의 중요한 자산인 “넘어넘어” 영문판은 은퇴한 89세 요원을 통해 CIA과 연결된 자가 CIA를 이용하는 광주단체를 통해 출간한 셈이다.

따라서 내 요구를 다시 강조하려 한다.

조지의 사과와 해명으로 사태가 진정되기에는 조지는 광주의 전통을 국내외적으로 알리고 유지하려는 많은 사람과 단체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조지는 사과가 아닌 책임을 져야 한다. 따라서 나는 조지에게 수여된 명예광주시민증(2015)과 후광학술상(2016)은 치탈되거나 조지 스스로가 자진 반납해야 한다. 특히, 조지가 팀의 평생 노력을 무단 도용했다면, 이론의 여지없이 그렇게 되어야 한다

설갑수

8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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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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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aladin.co.kr/author/wauthor_overview.aspx?AuthorSearch=@64132

조지 카치아피카스(George Katsiaficas)

미국의 좌파 정치학자. 대학 시절 68혁명을 경험하며 운동에 참여했고, 당시 베트남전쟁 반대운동을 주도적으로 조직하여 FBI의 블랙리스트에 오르기도 했다. 오랫동안 평화와 정의를 위해 투쟁해온 활동가이자 전남대학교 5·18연구소의 국제 코디네이터이며, 보스턴의 웬트워스 공과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주요 저서로 《신좌파의 상상력: 전 세계적 차원에서 본 1968년》 《정치의 전복》 등이 있다.

카치아피카스는 1968년 5월 프랑스와 1970년 5월 미국 등 전 지구적 운동에서, 혁명에 대한 열망과 투쟁이 매우 빠르게 퍼져나가는 모습에 깊은 충격을 받는다. 수백만 명의 보통 사람들이 역사의 무대에 갑자기 등장해서 통일된 방식으로 행동했고, 자신들이 사회의 방향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확신했다. 민중들이 대대적으로 들고일어날 때, 정부의 권위, 노동 분업 등 기성사회의 틀은 하룻밤 사이에 사라질 수 있다. 민중은 운동의 주체로서 전혀 새로운 현실과 생활방식을 상상하며, 수십만 또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변화된 규범, 가치, 믿음에 따라 살아가기도 한다. 그는 이러한 현상을 ‘에로스 효과’라는 개념으로 발전시켰다.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연구를 진행하면서, 이 에로스 효과가 1980년 5·18광주민중봉기의 ‘절대공동체’, 1980년에서 1992년까지 아시아 여러 나라를 뜨겁게 달군 민중봉기들, 2011년 아랍의 봄과 비슷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러한 ‘사랑’의 물결에 완전히 매료된 그는 10년간의 방대한 연구와 취재를 바탕으로 《한국의 민중봉기》 《아시아의 민중봉기》를 저술했다.
출간도서모두보기

<신좌파의 상상력 : 세계적 차원에서 본 1968> - 1999년 5월  더보기

거세게 일어난 반란 운동들은 서로를 자극해 왔다. 하지만, 상이한 운동들간의 동시성은 주목할 만한 문제를 가져올 수도 있다. 자신들의 명칭, 의상, 구호 등을 과거로부터 빌려온 나머지, 자신들만의 것을 만들지 못했던 운동이 얼마나 많았던가를 살펴봐라! 명성을 얻을 만한 혁명적 이론은 오직 꾸준히 변화할 때에만 존재할 수 있다. 이론은 혁명적 실천에 필수불가결하긴 하지만, 그 기원과 발전의 구체적 조건들에 비판적 거리를 두지 않은 채 무차별적으로 수입되어 적용될 경우에는, 운동 자체에 지도력을 부여해 주는 대중적 운동의 능력을 저해할 수도 있다. 최악의 경우, 이론적 틀을 교조적으로 적용한다면 이전에 활기차고 생생한 행동가들을 살아 있는 시체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자신들의 동료인 광신적 구성원들과만 관계를 맺는 좀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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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7 김양래 5.18재단 상임이사, 조지 교수 '반박'
광주in 승인 2017.07.14 15:33 댓글 1기사공유하기

김 상임이사, 조지 카치아피카스 교수 주장 해명
아래 글은 조지 카치아피카스 교수가 지난 11일 5.18재단을 상대로 주장한 내용에 대해 김양래 5.18기념재단 상임이사가 반박한 글 전문입니다. /편집자 주


5·18기념재단 상임이사 김양래입니다. 오늘 조지 카치아피카스 교수에 관한 질문을 복수의 기자님들이 물어와서 사실관계만 말씀드립니다. 저는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6월12일, 조지 교수가 본인의 주장을 누구에게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의사표명을 했는지부터 알지 못합니다.


1. 언젠가(6월7일) 퇴근무렵, 독일에서 활동하는 화가 정영창 작가가 조지 교수와 저녁식사를 하고 있다고 참석할 수 있냐고 물어서 "아직 사무실 일이 끝나지 않았다. 오늘은 참석하기 어렵다"고 통화했던 사실이 전부입니다. 이때는 518재단의 유엔행사에 대해서 조지 교수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때입니다.




5.18기념재단.
2. 제가 2017년 조지 교수로부터 받은 이메일은 4건입니다.


-조지 교수는 6월 13일 15:17분에 518재단의 유엔행사와 그레그 대사 초청에 관한 성명서


-6월 23일 14:35분에는 2002년에 열린 시민법정에 관한 자료를 요청
-7월7일 01:04분에 2002년 시민법정 관련된 내용을 확인하는 메일
-7월10일 20:12분에 저를 공격하는 글


제가 2017년 조지 교수에게 보낸 글은 1건으로


-7월6일 15:43분에 보낸 국영문 해명요구서, 2002 시민법정 자료집 파일입니다. 영문으로 된 해명요구서는 조지 교수의 지인 4명에게 혹시 단어의 사용이 적절치 않으면 의견을 달라고 했던 것이 전부입니다.


조지 교수가 6월17일에 저에게 보냈다고 하는 사과메일을 저는 받은 적이 없습니다. 재단 직원들에게 확인한 결과, 6월 17일 뿐아니라 아무도 사과메일을 받지 않았습니다. 누구에게 사과메일을 보냈는지 재단은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5월단체가 공동으로 작성한 해명요구에 대해서는 갑자기 김양래에 대한 비난으로 대응해서 황당한 일입니다.


이 일은 6월22일, 재단 기획위원회에서 위원이 공식으로 "일부 시민사회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말들이 sns 상에서 돌고있다" 문제가 제기하었고, 저는 조지 교수가 해명을 했다는 말을 들었지만 아직 확인할 수 없다고 보고하였습니다. 기획위원회가 공식대응을 요구해서 6월26일, 이사회에 보고되고 5월3단체가 유엔행사는 공동으로 결정하고 참여한 일이라 공식 해명요구서를 낸 것입니다.


이 성명은 조지 교수의 기고문으로 6월15일자 스리랑카 가디언지에 실려 해명요구는 불가피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조지 교수가 공개적으로 자신이 기고한 언론에 기사수정을 요청했다는 것은 확인 할 수 없습니다.


3. 조지 교수는 2016년 광주인권상에 대해서도 재단을 공격한 일이 있습니다.


조지 교수는 2016년 광주인권상 수상자인 베트남 출신 누엔 단 쿠에 박사가 고문당하고, 감옥에 갇힌 적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광주인권상 시상이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재단은 각 기관, 단체에서 추천된 심사위원들이 공정하게 심사하고 토론해서 만장일치로 심사를 마쳤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2016광주인권상 심사위원장이 가톨릭 주교라는 것과 가톨릭 교회와 이해관계로 결정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건과 관련해서 조지 교수와 친근한 분들에게 메일을 전달해서 의견을 들은바, 가까운 분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잘 설명하기로 하고 조지 교수의 가까운 지인들이 참여한 2017년 광주인권상 개선방향이라는 간담회를 통해 해소하였습니다.


재단은 이후 누엔 단 쿠에 박사와 추천자로부터 투옥과 고문에 대해서 직접 설명을 들었습니다. 조지 교수의 주장은 잘못된 정보를 인용한 것입니다.


4. 지난해 9월 태국 타마삿 대학교에서 열린 국제학술회의에 조지 교수를 초청한 것은 사실입니다. 제 기억에 의하면 조지 교수는 그 즈음 일정이 있어 바쁘고 그리스 방문계획이 있다고 항공권을 미국에서 방콕경유 그리스로 할 수 있냐고 물었고, 재단은 예산문제가 있었고, 조지 교수도 시간조정이 어렵다고 해서 다른 분을 교섭하고 마무리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광주인권상 문제를 제기하면서 거부한다고 통보하는 해프닝이 있었습니다.


5. 도널드 그레그 대사에게 재단에서 조지 교수에서 보낸 메일을 전달했다는 주장은 악의적인 선전으로 정말 황당합니다. 너무 무책임한 말을 함부로 하십니다. 재단에서 도날드 그레그 대사에게 메일을 보낸 적은 있습니다. 행사 초청과 감사편지를 보낸 것이 전부입니다. 또한 저를 포함한 5월단체들은 7월5일 기자회견을 한 사실이 없습니다.


보통 연구자들은 자신이 인용한 팩트가 다르게 확인되면 주장을 거둡니다. 그런데 지난해 광주인권상 관련 문제 제기와 이번 유엔 행사에서 조지 교수는 변명과 개인의 이념적인 주장을 되풀이합니다.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행동입니다.




<스리랑카 가디언 지에 실린 조지 카치아피카스 기고문>


South Korea: Human Rights Violated CIA officer!


 Jun 15, 2017Jun 26, 2017  Sri Lanka Guardian Diplomacy, Feature, StatementsNo comments


Statement on Donald Gregg’s Participation in the 5.18 International Conference in New York


by George Katsiaficas


( June 15, 2016. Seoul, Sri Lanka Guardian) As reported in the Hankyoreh article entitled, “The spirit of Gwangju Democratization Movement comes to UN headquarters in New York,” on May 26, 2017, former CIA Seoul station chief and US ambassador to Korea Donald Gregg was the honored guest of the May 18 Memorial Foundation at a conference in New York at the United Nations.


Fifteen years earlier, on May 18, 2002, a Gwangju Citizens’ Tribunal involving hundreds of people found a few US officials (including former President Jimmy Carter) guilty of “crimes against humanity” for their role in the suppression of the 1980 uprising. Gregg has repeatedly asserted, contrary to mountains of evidence, that he has no reason to apologize to Gwangju citizens and that the US did not know what was happening there in 1980. The May 18 Memorial Foundation’s decision to invite Donald Gregg is therefore quite regrettable.


Gregg participated in the May 22, 1980 White House meeting that came to “general agreement that the first priority was the restoration of order in Gwangju by the Korean authorities” (quoted from US government documents by then-US Ambassador William Gleysteen)—a clear signal to Chun Doo-hwan for him to suppress the uprising. Nine days before May 18, 1980, in a meeting in the very same safe house where Park Chung-hee had been assassinated, Gleysteen had instructed Chun the US would not oppose the use of the army against demonstrators, another indication of US knowledge and intent.


So great was public disapproval of Gregg when he was U.S. ambassador to South Korea from 1989 to 1993, he never made a publicized address at any Korean university because of expected protests (according to his own admission). In an article in 2005, he described the results of a 2003 South Korean poll as “shocking” because of the anti-American feelings expressed by so many people.


For the May 18 Memorial Foundation simply to ignore this history and invite Donald Gregg as an honored guest ignores years of Gwangju citizens’ heartfelt grievances—and their righteous condemnation of Donald Gregg and other American officials as the hand behinds behind Chun.


Recent attacks on 518 include false claims that the uprising involved North Korea. It is important to set the record straight, but in doing so, it at least as significant to clarify decades of US government and CIA lies about US involvement. Rather than doing so, the May 18 Foundation routinely uses CIA sources of information to “prove” no North Korean involvement, thereby implicitly endorsing the CIA as a reliable source of information and disrespecting the spirit of Gwangju.


Only If Gregg would apologize sincerely and truthfully reveal his and the US role in encouraging Chun to use force against Gwangju citizens should such an invitation have been ma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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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7 조지 카치아피카스 교수, 5.18재단 반박
 광주in 승인 2017.07.11

그레그 전 미대사 유엔 5.18학술대회 참석 놓고 쟁점

아래 조지 카치아피카스 교수의 반박문 전문은 지난달 29일 5·18기념재단, 5·18민주유공자 3단체(민주유공자유족회, 민주화운동부상자회, 구속부상자회)가 지난 5월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5.18국제학술대회에 5.18기념재단이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국대사를 초청한 이유와 배경을 설명한 후 조지 교수를 공개 비판한 것에 대한 입장이다. 아래 전문은 11일 새벽 조지 교수가 직접  이메일로 보내온 내용이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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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광주의 친구 여러분,

여러 해 동안 광주의 진보적 공동체와 함께 활동한 것은 나에게 특권이자 영광이었다. 구 전남도청이 파괴될 위기에 처했던 2008년 투쟁의 경우처럼, 진보세력 내에서 벌어진 지속적 투쟁은 때로는 가혹했다. 1980년 5.18 당시에도 굴복할 것인가? 투쟁할 것인가? 입장이 대립했다. 두 가지 입장은 여전히 남아있다.

6월 12일 나는 사랑과 연대의 마음으로 비판적 이슈를 제기했다. 나는 존경받는 단체들의 요청에 대해 내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5․18기념 국제학술대회가 지난 5월 26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UN본부에서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미대사 등이 참석한 가운데 ‘광주 다이어리: 민주주의와 자유의 집단 기억’이란 주제로 열리고 있다. ⓒ광주시청 제공
내 성명은 5.18기념재단이 UN에 열린 국제학술회의에 도널드 그레그를 초청한 사실에 대한 유감을 표명했다. 5일 뒤인 6월 17일 나는 그레그가 2002년 광주시민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던 미국 고위관리 중 한 명이라고 언급한 부분은 실수로 인정하고 공개적으로 사과했다.

6월 17일 나는 김양래와 5.18기념재단 관련자들에게 공식사과문을 보냈다. 그리고 그 중 한 명은 나의 수정을 즉시 인정하는 답변을 보냈다. (사과문은 이 성명 끝에 첨부돼 있다.)

1. 왜 공개사과문이 5일 후 6월 22일 내 성명에 대한 논의를 하는 회의에서 사람들에게 보고되지 않았는가?

2. 나의 수정과 사과를 밝힌 후 3주가 지난 7월 5일, 김양래 씨는 이미 내가 사과한 그 사실을 알면서도 광주에서 나의 사과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3. 도대체 이게 무슨 업무방식인가?

4. 나는 김양래 씨에 대해 유감을 느낀다. 왜냐 하면 그는 5.18단체들에게 모든 사실을 밝히지 않고 자신의 정치적 필요를 위해 중요한 정보를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5. 김양래 씨의 성명에 서명한 존경받는 시민단체들에게 김양래씨가 5일 전에 내가 사과했다는 사실에 그들에게 말하지 않았던 이유를 조사해줄 것을 요청한다.

6. 지난달 6월 7일(내가 한국을 떠나기 2일 전) 오후 7시경 내 친구와 함께 있는 자리에서 김양래씨에게 내가 전화를 했다. 김양래 씨는 전화를 받았으나, 나와 통화를 거부했다. 그리고 나와 통화할 것을 요청 받았다는 사실을 숨기고 있다. 그는 공개성명을 발표할 때까지 2002년 시민법정에 관한 문서를 요청한 내 이 메일에 응답하지도 않았다. 광주의 한 친구가 나에게 전화했을 때 비로소 나는 김영래 씨가 나를 공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도널드 그레그 초청에 대한 나의 비판

6월 12일 나는 도널드 그레그가 5.18재단이 주최한 2017년 뉴욕 토론회에 초청됐다는 사실에 슬픔을 공개적으로 표명했다. 그레그의 2002년 유죄판결 관련 여부와 관련 없이, 나는 그레그를 초청한 결정은 적절치 못했다고 확신한다.

그레그는 미국의 역할에 대해 진실하지 않았고, 그의 손에 묻은 광주의 피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다. 그레그는 악명높은 1980년 5월 22일 백악관 모임의 참석자였고, 그 모임은 남한 정부에게 5.18 당시 무력진압을 허락했다.


5.18기념재단.
김양래는 씨는 그레그가 뉴욕에서 자신의 “침묵”과 “한국인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한 것에 대해 사과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과연 그레그는 사랑하는 사람이 학살당한 가족들이 겪었던 고통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가? 부상당한 사람들이 느낀 고통을? 잔혹하게 짓밟힌 도시 전체가 경험한 트라우마를?

‘진실규명’과 ‘사과’는 광주의 정의를 세우는 데 근본적으로 중심적이었다(지금도 여전히 변함없다). 1980년 시민들은 진실한 사과와 책임자 처벌을 주장했다. 유죄판결을 받은 전두환과 노태우는 미국 ‘열강정치’라는 장기판의 졸이었다.

오늘날까지 도널드 그레그는 미국이 취한 행동의 진실을 밝히지도 않았고 유혈사태에 대한 미국의 책임에 대해 사과하지도 않았다. 미국은 유혈사태에 대해 책임이 없고 따라서 사과할 이유도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비록 재단이 그레그가 사과했다고 밝히고 있지만, 그의 사과는 진실에 기초한 것이 아니고, 따라서 불성실한 사과이며, “사과”라고 부를 가치조차 없다. 과거에 그레그는 미국이 사과할 것은 없다고 공개적으로 되풀이해서 발언했다. 그가 UN토론회에 나타났다고 해서 그런 입장은 바뀌지 않았다.

김양래 씨는 그레그가 귀빈이라고 내가 말했다고 했다. 나의 주장은 그레그를 UN에서 연설하도록 초청한 것은 명예로운 일이지, 그를 감옥에 보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역사는 엄격해야 하고, 5.18과 광주의 역사는 더욱 더 엄격해야 한다. 여기에 약간의 문화적 차이가 있다. 미국에서 자신이 잔혹행위를 가한 도시로부터 초청받아 UN에서 연설하는 것은 커다란 명예로 간주한다.

김양래 씨는 1980년에 북한군이 개입하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CIA 문서를 사용한 것을 옹호한다. 물론 그것은 사실이다. 내가 CIA 문서 사용을 꺼렸던 것은 거짓말, 외국 지도자 암살, 타겟으로 정한 개인들의 신뢰를 무너뜨리기 위한 수십 건의 거짓정보 캠페인, 의회에 허위 보고서 제출 등으로 점철된 CIA의 과거사 때문이다.

CIA의 가증스런 범죄는 윌리엄 블룸(William Blum)의 <희망 죽이기>(Killing Hope)나 전 CIA 요원 필립 애지(Philip Agee)의 <회사 내부에서>(nside the Company)같은 책에 철저하게 잘 기록돼 있다. 일단 우리가 CIA의 주장을 진실된 것으로 받아들이면, 우리는 미래에 일어날 CIA 작전에 우리 자신을 노출시키는 꼴이 된다.

작년에도 김양래 씨의 진실되지 못한 행동이 분명했다. 나는 재단이 누옌 단 쿠에(Nguyen Dan Que)를 광주인권상 공동수상자로 지명한 것이 유감스럽다는 의견을 그에게 개인적으로 피력한 바 있다.

몇 달 간 논의하는 동안, 재단은 누옌이 고문당했고 감옥에 갇혀 있었다는 주장을 검증할 단 하나의 정보도 발견할 수 없었다. 사실, 누옌은 비록 그가 지속적으로 새로운 정부의 타도를 호소하고, 미국이 베트남에서 저지른 짓을 찬양하고 미국의 귀환을 희망한다고 표현했음에도 그는 감옥에 갇히지 않았다.

미국이 베트남 정부를 전복하려고 시도하는 시기에 응우옌은 혁명을 호소했다. 2016년 광주인권상을 수상한 지 몇 주도 안되어, 자유 아시아 라디오(Radio Free Asia: CIA가 설립한)는 5.18재단의 근거 없는 주장을 방송했다.


조지 카치아피카스 교수.
518재단의 직원이 나에게 보낸 이메일이 도널드 그레그에게 함께 참조로 보내졌다. 몇 달간 의견교환을 거쳐 5.18 관계자들의 작은 모임이 꾸려졌고, 우리는 수상자 선정과정이 개선되어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했다.

재단이 누옌 단 쿠에에게 부적절한 수상을 한 이후, 나는 2016년 타일랜드 방콕에서 열린 한 국제회의에 기조연사로 참여해 달라는 재단의 초청을 거부했다.

만약 내가 쓴 어떤 것이 광주시민이나 단체들에 대한 공격으로 해석된다면 깊이 사과 드린다. 나는 역사 속에 5.18민중봉기의 미래에 대한 우려와 사랑으로 비판적 입장에서 글을 썼고, 결코 악의적 공격으로 쓴 것이 아니다. 나는 단체들의 오해에 대해 유감을 느끼며, 나와 만나겠다는 여러분의 제안을 환영한다.

핵심 사실의 누락에서 증명된 것처럼, 김양래 씨가 존경받는 광주단체들과의 모임에서 나의 성명을 진실되지 않게 설명한 것은 유감스런 일이며, 5.18의 명예를 훼손하는 일이다. 김양래 씨는 되풀이해서 재단을 개인적 목적으로 이용했고, 광주 시민단체들의 법률소송에 직면하고 있다.

http://m.newstow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91199&daum_check&naver_check

김양래 씨가 5.18재단의 대표성을 갖고 있는 동안, 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의 사임을 요구함을 공개적으로 밝히며, 그와 아무 관계없음을 공개적으로 선언한다.

조지 카치아피카스
katsiaficas@gmail.com

 

아래 글은 지난 6월 13일 조지 카치아피카스 교수가 5.18기념재단에 보내온 메일 전문입니다. 

  도널드 주한 미대사의 5.18 국제학술대회 참석 유감

지난 5월 26일자 한겨레신문에 “유엔본부에서 열린 첫 5.18 국제학술대회”라는 제목으로 실린 기사http://www.hani.co.kr/arti/PRINT/796398.html)에 보도된 것처럼, 과거 CIA서울지국장과 한국주재 미국대사를 역임한 도널드 그레그가 뉴욕유엔본부에서 열린 5.18기념재단의 국제학술대회에 초청연사로 참석했다.

15년 전인 2002년 5월 18일 수백명이 참석한 광주시민법정은 그레그와 다른 미국 관료들(전 미국대통령 지미 카터를 포함한)이 1980년 광주항쟁 진압에서 했던 역할에 대해 “인류의 반하는 범죄” 혐의로 유죄판결을 내렸다.

그레그는 수많은 증거와는 반대로 자신은 광주시민들에게 사과할 이유가 없으며 미국은 1980년 광주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알지 못한다고 되풀이해서 주장했다. 따라서 도널드 그레그를 초청한 5.18기념재단의 결정은 대단히 유감스럽다.

그레그는 1980년 5월 22일 백악관 모임에 참석했으며, 이 모임은 “최우선적 과제는 남한 당국이 광주에서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란 점에 전반적 합의”에 도달했다(당시 미국대사 윌리엄 글라이스틴이 미국 정부에 보낸 문서에서 인용).

이것은 전두환에게 광주봉기를 진압하라는 명확한 신호를 보낸 것이었다. 1980년 5.18항쟁 9일 전에 박정희가 암살당한 바로 그 안가에서 가진 모임에서 글라이스틴은 전두환에게 미국은 시위대에 무력을 사용하는 데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고, 이는 상황에 대한 미국측의 인지와 의도를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이다.

1989년부터 1993년까지 그레그가 미국대사로 재임할 당시 그레그에 대한 대중적 반감이 너무나 커서, 그는 예상되는 시위 때문에 남한의 어떤 대학에서도 공개연설을 하지 않았다(그레그 자신이 인정한 바이다). 2005년 논문에서 그레그는 2003년 여론조사 결과를 설명하면서,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반미감정을 표현해서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5.18기념재단이 이런 역사를 무시하고 도널드 그레그를 귀빈으로 초청연사로 토론회에 참석케 한 것은 광주시민들의 진심어린 투쟁의 세월을 무시하는 처사이다.

또 전두환을 비호한 도널드 그레그와 다른 미국 관료들에 대한 광주시민들의 정당한 비판을 무시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최근 5.18에 대한 공격에는 광주항쟁에 북한이 개입했다는 허위 주장도 있다. 역사를 올바르게 기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미국의 개입에 대한 미국과 CIA의 거짓말을 분명히 밝히는 것도 최소한 같은 정도로 중요하다.

5.18재단은 진실을 밝힌다면서, 북한의 개입이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 일상적으로 CIA의 정보를 근거로 사용하고 있으며, 따라서 암묵적으로 CIA를 신뢰할 만한 정보의 출처로 인정하여 광주의 정신을 훼손하고 있다.

그레그가 진정으로 사과하고 전두환이 광주민중에 대해 폭력을 사용하도록 부추긴 자신과 미국의 역할을 진심으로 밝히는 경우에만 그를 초청했어야 했다.

조지 카치아피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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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8 조지 카치아피카스 교수, 설갑수 주장에 반론
 광주in 승인 2017.08.04

어떻게 그가 미래 5.18의 역사를 훼손시킬 수 있는가?

5.18 기념재단과 존경하는 세 단체에 대한 나의 응답 내용을 홈페이지에 게재하지 않아서, 나는 광주 5.18 관계자들에게 응답을 보냈다. 한편, 설갑수는 인터넷에 첫 문장부터 마지막 구절까지 노골적인 거짓말, 허위 주장을 진술했다. 설갑수는 어떤 인간인가?  그는 어떻게 5.18재단과 광주를 대변해서 중요한 결정을 하는 권한을 갖게 되었는가?

설갑수의 수많은 거짓말들에 대한 나의 진실규명

1. 설갑수 씨는 자신이 <광주일지>의 번역자로 소개한다. 이는 거짓이다. 그는 공동 번역자일 뿐이다. 그의 영어능력은 번역자로 주장할 만큼 능숙하지 못함을 나는 밝힌다.그가 보낸 26통의 이메일 영어표현에서 확인했다.

2. 설갑수는 그가 돈을 받지 않고 <광주일지>를 번역했다고 주장한다. 아래 기사를 보라. 
http://m.gwangjuin.com/news/articleView.html?idxno=93269  
http://v.media.daum.net/v/20161124173938830  
설갑수는 거짓말을 했다. 설갑수는  겨우 92쪽 영어번역을 하고 4,000만원 혹은 4,800만원을 받았다(정확한 액수를 밝히기 바란다).  이제 적은 돈인가? 설갑수는 “ 아무댓가없이” 번역하겠다고 인터뷰하고, 그렇게 많은 돈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해 부끄럽지도 않은가? 재단의 기금은 5.18 희생자들을 위한 것이다.

3. 설갑수는 내가 그는 CIA를 위해 일한다고 말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나는 “그가 30년 동안 CIA요원이었던 도널드 그레그와 일한다” 고 말했다. 그는 <광주인>에 그레그와 협력한 세부적 내용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즉, 그레그를 UN 회의에 초청, 김양래와 함께 그래그의 집을 방문, 그레그가 <오마이뉴스>에 글을 싣도록 도움을 주었다.

4. 설갑수는 그레그가 1970년까지 CIA에서 일했다고 했다. 이 또한 거짓말이다. 그레그는 1982년 5.18 민중항쟁 시기까지 CIA요원이었다. 설갑수는 그레그가 1980년 광주 유혈사태와 별로 관계없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애썼다.

5. 설갑수는 내가 2002년 시민법정 기획에 참여했다고 말한다. 또한 2002년에 기소된 미국관리들을 내가 선발했다고 주장하면서, 내가 왜 기억하지 못하는지 묻는다. 하지만 진실은 내가 2002년 시민법정 준비과정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단지 나중에 초청을 받아서 짧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열정적인 연설을 했다. 

또한  미국관리들을 선정하는데 나는 참여하지 못했다. 재판은 통역 없이 오로지 한국어로 진행됐다. 5.18기념재단 홈페이지에 재판결과에 관한 영어와 한국어 결정문이 있다. 두 문서에서 보여주는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의 숫자가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6. 설갑수는 2002년 그레그의 유죄판결에 관해 수정과 사과문을 쓰지 않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진실은 6월 17일에 내가 “도널드 그레그에 관한 실수에 대한 사과” 제목으로 한국어와 영어 성명을 썼고, 설갑수, 김양래 외 10여명의 사람들에게 보냈다. 이 사과문은 이미 <광주인>에 게재돼 있다. http://m.gwangjuin.com/news/articleView.html?idxno=95945

7. 설갑수는 <스리랑카 가디언>이 7월 15일까지 그레그에 관한 언급을 수정하지 않았다고 썼다. 이는 또 다른 거짓이다. <스리랑카 가디언>은 6월 26일 이전에 수정했다. 편집자가 직업을 잃고 업무중단으로 내 수정문을 받은 후 게재하는데 며칠 더 걸렸던 것이다. 이 또한 이메일 내용으로 증명할 수 있다.

8. 설갑수는 내가 “가짜 뉴스” 확산방식으로 따른다고 했다. 그는 나를 공격하기 위해 이런 개념을 쓰지만, 가짜 뉴스를 퍼뜨리는 사람은 잘못을 즉각 수정하지 않는다. 설갑수는 두 번이나 나의 출판사에게 메일을 썼고, 내가 모르게 수 많은 언론사에게 이메일과 소문으로 나에 관한 거짓소문을 퍼뜨렸다. 

나에게는 43일 동안 26차례 공격적이고 수준 낮은 표현의 이메일을 보냈고, 인종차별적 저급한 표현과 나의 피부색을 4차례나 부정적으로 언급했다. 그는 이메일에서 여러 차례 나에게 복수하겠다고 선언했고, 8번의 메일에서 거짓말쟁이라고 나를 모욕했다. 필요하면, 그의 이메일을 모두 공개할 수 있다.

9. 설갑수는 내가 그의 메일이 5.18기념재단이 도널드 그레그에게 보고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기를 원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결코 5.18기념재단이 도널드 그레그에게 보고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설갑수의 이런 상상력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가?

10. 설갑수는 팀 셔록이 자기가 처음으로 획득한 미국정부의 문서를 내가 사용했다고 나에 대한 불만을 제기했다고 언급한다. 그러나 설갑수는 팀 셔록의 문제제기가 나의 출판사에 의해 결정적으로 거부당했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 셔록의 문제제기가 근거가 없다는 판단이 내려진 후에, 두 번이나 내 출판사에 메일을 보냈으니 잘 알고 있다는 증거다.

설갑수는 누구인가?

설갑수는 지속적으로 진실(facts) 왜곡할 뿐만 아니라, <광주인>에 의도적으로 자신의 소속을 모호하게 밝혔다. 자신을 “MSCI ESG 분석가”라고 했다. MSCI는 대표적 헤지펀드(소수 투자자들을 비공개모집 후 위험성 높은 금융상품을 만들어 절대 수익을 남기는 펀드) 기업인 모건스탠리 투자회사이다. 이 회사는 글로벌 금융자본의 눈과 귀 역할을 하며, 그들의 슬로건은 “자본이 변화를 창조한다”이다.

설갑수는 존재하지도 않는 “National Underwriter Magazine”의 기자였다고 소개한다. 설갑수의 글은 National Underwriter Company의 자회사인 “Property Casualty 360”에 실렸다. 이 잡지는 보험업계 중개인을 위해 P&C 보험 소식, 트렌드, 의견, 자료, 판매 요령을 제공한다. 설갑수는 이 잡지에 16년 전인 2001년 6월에 마지막 글을 실었다. 설갑수는 현재 자신이 국제노동조합총연맹(ITUC)의 컨설턴트이자 미국 Unite Here! 노조의 분석가라고 주장한다. 내가 직접 확인 한 바, 두 군데 모두 설갑수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설갑수에 대한 공식 자료에 의하면, 그는 미국에서 2003년 법적 파산선고를 받고 난 후, 2010년  415,000달러 현금으로 주택을 구입했다( 현재 시세로 하면 4억6,500만원).  파산을 신청한 후 그는 어떻게 돈을 숨겼을까? 매우 궁금하다.

이제 정치적 관점에서 보자. 2017년 5월 27일 <한겨레>에 기사가 실릴 때까지, UN에서 5.18 관련 토론회가 열릴 것임을 아는 광주 시민은 거의 없었다. 특히 도널드 그레그(전두환에게 광주봉기를 진압하라고 명령을 내린 1980년 5월 22일 백악관 모임의 핵심 참석자)가 초청연사로 참석하는 사실에 대해서 더욱 몰랐다. 

그런데 설갑수는 <광주인>에 그가 여러 달 동안 이 회의를 위해 일했고 도널드 그레그의 집을 방문한 다음 그를 초청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어떻게 이렇게 중요한 행사를 5.18 재단 관련 단체와 시민들이 모른 채 설갑수가 진행할 수 있단 말인가? 

도널드 그레그는 누구인가?

도널드 그레그는 광주, 니카라과, 베트남에서 수 많은 사람들의 죽음과 관련된 CIA 요원이었다. 그는 31년 동안 CIA에서 일했고, 그 이후에 조지 부시의 국가안보 고문(1982-89년)으로, 그리고 그 이후에는 주한 미국대사(1989-1993년)로 근무했다. 광주시민들의 피를 손에 묻힌 채 3년도 안되어, 이란-콘트라 스캔들, 즉 미국 정부가 이란과 살인적 니카라과 반군(“콘트라”)에 불법적으로 무기를 공급한 불법사건에 관여했다. https://en.wikipedia.org/wiki/Donald_Gregg

1980년 콘트라 반군이 미국인 카톨릭 수녀 3명과 평신도 활동가 1명을 살해하자, 미국 의회는 구체적으로 콘트라반군에 대한 살상무기 지원을 금지했다. 1983년 도널드 그레그가 백악관 에 메세지를 보냄으로써 콘트라 반군에 대한 미국정부의 불법, 비밀 군사지원 작전이 시작됐다. 그 당시 이 작전을 위해 그레그는 펠릭스 로드리게스와 자주 만났다. 로드리게스는 체 게바라 살해에 직접 가담한 전직 CIA 요원이다. 체 게바라가 살아있던 마지막 사진에 그를 체포한 로드리게스가 함께 있다. 체 게바라는 부상당한 포로로써 결국 살해당했다.


1967년 체 게바라의 암살 직전 게바라와 함께 있는 펠릭스 로드리게스.
그레그는 베트남 전쟁 때 로드리게스의 상관으로서, 그들은 악명높은 불사조 작전(26,000명 이상의 베트남 민간인 살해 사건)에 작전을 지휘했다. 1983년 그레그는 로드리게스를 당시 부통령인 조지 부시에게 소개했다.

설갑수는 그레그가 한국에 대해 올바른 역사적 관점을 가지고, 북한과 미국의 정책을 이해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는 그레그가 한국의 정책을 안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그레그는 5.18 당시 미국의 책임에 대해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레그는 전두환에게 광주에서 “질서를 회복하라”고 명령을 내린 1980년 5월 22일 백악관 회의에서 자신의 역할을 단 한 번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레그는 미국이 5.18에 대한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http://www.kjmbc.co.kr/board/index.cfm?bbs_name=todaynews&w=view&wr_id=218248

설갑수는 그레그의 역할을 아무도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거짓이다. 그레그가 자신의 역할을 알고 있다! 그레그의 손에는 추천명의 베트남인, 한국인, 니카라과인의 피가 묻어 있다. 그레그는 단지 5.18민중봉기에만 연관된 사람이 아니다. 나는 광주에 대한 애정이 매우 깊다. 광주가 민주주의와 평화가 아닌, 광주시민을 학살한 동조자와 협력했다는 대외적 평판을 받는 것을 매우 우려한다. 설갑수가 날 공격하는 이유는 내가 광주5.18재단과 도날드 그래그 관련성에 대한 문제제기를 했기 때문이다.

그레그에 대한 설갑수의 동조


5.18민주화운동 37주년 국제학술세미나가 '광주일지: 민주주의와 자유의 집단 기억” (Gwangju Diary: A Collective Memory of Democracy and Freedom)'라는 주제로 지난 5월26일 유엔본부(Conference Room 11)에서 5.19기념재단 주최로 열리고 있다. 도도널드 그레그(Donald P. Gregg) 전 주한 미대사(왼쪽에서 두 번째)와 대표적 진보적 한국학 학자 브루스 커밍스 (Bruce Cumings) 교수(맨 왼쪽)가 발제자로서 참여하고 있다. ⓒ5.18기념재단 누리집 갈무리


설갑수는 도널드 그레그가 뉴욕 회의에서 불편함을 느껴 자기가 민망했다고 표현하면서, 광주시민에 대한 연민은 단 한마디도 표현하지 않았다. 광주시민의 씻을 수 없는 아픔과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레그가 잠시 불편한 것이 그리도 민망한가? 비록 그레그가 89세라로 해도, 그는 여전히 냉혹한 CIA 충성파이며, 불사조작전, 광주의 유혈사태, 콘트라반군의 살인만행, 그가 참가한 모든 미국의 작전에 대해 사과조차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는가?

광주시민들의 동의도 없이, 설갑수가 그레그를 5.18 UN 학술대회에 연결시킴으로써 5.18의 명예를 영구적으로 훼손시켰다. 그레그를 5.18의 “친구이자 파트너”로 만든 설갑수와 같은 사람들이 5.18재단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일이 다시는 없기를 바랄 뿐이다.

설갑수는 마지막 부분에서 필요시 정부에게 나를 밀고하겠다고 밝혔다. 도널드 그레그에 대한 연민과 48년 동안이나 전쟁 반대 활동가이자 5.18을 사랑하고 전쟁에 비판적인 학자인 나에 대한 이러한 행동은 설갑수씨가 누구를 적과 동지로 생각하는지 분명히 보여준다.

설갑수가 시도한 최악의 거짓은 나를 안다고 주장하는 점이다. 그는 나에 대해서 전혀 모르면서 마치 잘 아는 척 한다. 나는 그를 만난 기억이 없다. 설갑수는 도널드 그레그가 누구인지 연구해야 한다. 어떠한 자격이나 적절한 연구도 없이 설갑수는 광주시민의 동의도 없으면서 마치 5.18운동을 지도하는 지휘관처럼 행동한다. 

그는 게임처럼 “좌익”과 “우익”을 조정하고 도널드 그레그를 UN으로 끌어들였다. 광주인에서 설갑수는 자신의 상상속에 나와 김양래 둘 중 누가 도청에 남을 것인가? 라고 물었다. 나는 분명히 남을 것이다. 하지만 설갑수는 확실히 그 곳에 없다. 1980년부터 37년이 지난 후, 설갑수 같은 사람들은 5.18의 피에서 이득을 챙기려고 하고 도널드 그레그 같은 자들이 살해한 수천명의 피해자들의 피웅덩이에서 기억을 도려내려고 애쓰는 것이 참담하다.

설갑수의 억지주장에 얼마든지 논박할 수 있다. 내가 학술적 연구를 위해 CIA 문서를 인용하는 것은 5.18기념재단이 CIA를 이용해 자신을 정당화하는 것과 전혀 다르다. 설갑수는 내가 박정희 암살자료를 CIA에게 요청함을 비난했다. 이는 부산의 매우 존경받는 활동가들이 나에게 공개적으로 요청을 해서 내가 그렇게 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설갑수는 31년 동안 CIA요원이었고, 수천명의 피를 손에 묻힌 도널드 그래그와 5.18재단을 연결시키며, 이를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나를 공격했다.

나는 5.18을 사랑하는 어떤 사람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기를 원하지만, 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발언해야 한다. 존경하는 5.18 단체와 광주시민 여러분, 나의 답변을 읽고 광주정신의 미래를 위해 올바른 판단을 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조지 카치아피카스

2017년 7월 30일
 

PM 출판사 입장- 죠지 카치아피카스의 팀 셔록 자료 인용 건에 대하여

2017. 6.21일 팀 셔록은 죠지 카치아피카스의 인용 및 표절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출판사는 팀 셔록의 주장을 확인한 바, 해당되는 근거가 발견되지 않았다. 팀셔록은 1996년 FOIA에 근무하면서 받은 미국 정부자료를 근거로 제시했다.

이 자료는 2017년에 광주에 공개되었다. 1997년 광주시는 미국 정부의 FOIA문서를 요쳥해서 공개했고, 죠지 카치아피카스는 그 자료를 근거로 연구를 했다. 또한 팀 셔록은 죠지 카치아피카스에게 미국 정보자료를 사용해도 좋다는 이메일을 보낸 것이 확인되었다. 그 메일에는 자신의 이름은 밝히지 않아도 좋다고 적혀있다. 따라서 PM출판사는 팀 셔록이 죠지 카치아 피카스에게 사과 하고, 더 가치 있는 일에 집중해 주기를 바라는 입장이다.

Ramsey Kanaan

발행인

PM 출판사

오클랜드, 켈리포니아.

7.14.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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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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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699
(앵커)

유엔 본부에서 사상 처음으로
5.18 행사가 열렸다는 내용
어제 전해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5.18에 대한 미국의 책임 문제가
단연 화제였습니다.

같은 미국인이라도
미국에 책임이 있다, 없다를 놓고
열띤 공방을 벌였습니다.


현지에서 김철원 기자입니다.

(기자)

1980년 5.18 당시 광주시민들은 미국이 자신들을 도와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인권주의를 표방한 미국 카터 대통령이 전두환을 몰아낼 것이라는 기대는 그러나 가차 없이 무너졌습니다.

미국이 한국의 전방부대인 20사단 작전통제권을 전두환측에게 넘겼고 5월 27일 전남도청 진압작전을 전두환측과 함께 협의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반미감정은 극도로 확산됐지만 아직까지도 미국 정부는 이를 인정하거나 사과한 바가 없습니다.

한국전쟁 연구의 세계적 석학인 브루스 커밍스 교수는 5.18의 비극은 미국의 책임이 크다며 미국정부가 사과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녹취)브루스 커밍스/미국 시카고대 석좌교수
"미국 정부가 광주를 비롯한 여러 군사독재정권을 너무 오랫동안 지원해온 것에 대해 정말 창피함을 느낍니다.

5.18 당시 미국 국가안보회의 아시아 책임자였던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미대사는 전직 미국 관료답게 미국 정부가 사과할 일은 아니라는 입장을 분명히 했습니다.

(녹취)도널드 그레그/전 주한미대사(5.18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아시아 책임자)
"광주에 대해서 미국이 사과해야 한다고 여러차례 요구를 받았는데요. 저는 미국이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얘기했습니다.만약 우리가 사과할 게 있다면 너무 오랫동안 침묵을 지켜온 것, 그것은 사과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넘어넘어'의 영문판 번역자는 5.18과 미국의 정확한 관계를 밝히기 위해서는 베일에 가려진 비밀문서를 온전한 형태로 미국 정부가 공개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인터뷰)설갑수/'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영문판 번역자
"80년 전후의 모든 기록, (미국과 한국 사이의) 외교, 군사, 정치적 모든 기록을 한국 정부에게 넘기라고 미국 정부에 요구하는 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스탠드업)
미국이 5.18에 어느 정도 개입했는지 카터 정부가 전두환 신군부를 얼마나 적극적으로 도와줬는지를 밝히는 일, 반드시 풀어야 할 5.18의 과제입니다.

뉴욕에서 MBC뉴스 김철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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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8 [특별기고] 윤상원에게 물어보라
 나간채 전남대 명예교수(전 5·18민주화운동기록관장) 승인 2017.08.24

유엔본부 5·18학술대회에 관련하여 초래된 분쟁에 대한 하나의 성찰적 제안


이 글의 목적은, 비록 싸움이 역사 발전에 불가피한 것이지만, 그 자체로 끝나기 않고 그것을 넘어서 화해*상생의 진리에 이르는 길을 함께 고민해보자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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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외에 큰 관심을 끌었던 유엔본부의 5·18국제학술대회와 관련하여 지난 6월 이후 조지 카치아피카스(이하에서 조지로 약칭함) 교수와 이 학술회의를 주도했던 이들 사이에 제기된 분쟁이 아직 어떤 결말 없이 시중에 떠도는 과정에서 의혹은 증폭되고, 그 결과 관련자들은 물론 5·18 자체에 상처가 깊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필자에게 이 사안에 관한 질문과 요구가 거듭되었던 바, 필자는 이러한 질문이 시민의 정당한 요구이면서 동시에 광주공동체의 자율적 윤리성을 가늠하는 잣대가 된다고 본다. 또한 이제 세계적 차원의 역사가 된 5·18의 명예와 존엄을 위해서도 이에 대한 진지하고 엄정한 성찰이 요구되고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옛 전남도청 복원을 위한 범시도민대책위원회가 23일 5.18민주광장에서 '1980년 5.18 당시 공군 전투기의 광주폭격 계획'과 관련 정부와 국회에 '5.18특별법 제정',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옛 전남도청 복원을 위한 범시도민대책위원회 제공
문제의 발단은 이 5.18국제학술대회(5/27)에 대한 조지 교수의 비판적 논평(6/13)이었다. 이 논평에 대하여 5·18기념재단과 3개 유공자단체가 공동으로 반박 성명을 발표했고(7/3), 이 성명에 대한 조지 교수의 해명과 질문(7/11), 그리고 뒤 이은 김양래 상임이사의 해명과 응답이 이어졌다(7. 14). 그 과정에서 논란의 쟁점은 학술회의를 넘어서 광주인권상, 방콕학술대회, 표절, 번역문제 등 매우 광범한 주제로 확산되었고, 조지 교수를 공격하는 한국인들이 합세하면서 합리적 토론의 형태를 넘어 감정적 비방과 극언을 포함하는 수준으로 추락하는 경향을 보였다. 여기에서 8월에도 이어진 이 문제를 전반적으로 다룰 수는 없다. 초기 상태에 집중하여 사태의 진전양상을 살펴 그 적절성을 논평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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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의 계기가 된 조지 교수 논평의 핵심은 CIA서울지국장과 한국주재 미국대사를 역임한 도널드 그레그를 학술대회에 토론자로 초청한 것이 ‘광주시민의 진심어린 투쟁의 세월을 무시’하는 처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미국이 광주항쟁을 알지 못한다고 되풀이해서 주장했으며, 광주시민법정(2002. 5. 18)이 그를 ‘인륜에 반하는 범죄로 유죄판결’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진정으로 사과하고 자신과 미국의 역할을 진심으로 밝히는 경우에만 그를 초청했어야 했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한 5·18기념재단과 3단체의 공동성명 요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그레그는 광주시민법정에서 인륜범죄자로 판결받지 않았다는 점, 둘째는 그레그는 귀빈으로 초대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전체적인 차원에서 이 학술대회를 통해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는 보편적 입장을 확인하고 5·18의 진실에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효과를 거두었다는 점 등을 주장했다. 

또한 이 성명은 조지 교수가 5·18기념재단과 5·18민주유공자들을 공격하는 행위를 멈추고 잘못된 사실을 공표한 것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입장을 밝힐 것을 요구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러한 공개요구에 대하여 조지 교수는 해명과 아울러 자신의 입장을 천명했다. 첫째, 도널드 그레그가 광주시민법정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고 말한 것은 자기가 사실을 잘못 인식한 실수로 인정하고 공개적으로 사과했고 이 사실을 김양래 상임이사 등에게 이메일로 알렸다(6. 17).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사실을 회의에서 알리지 않았고, 이미 사과한 그 사실을 알면서도 나의 사과를 요구하는 공동성명을 5·18관련 4개 단체의 명의로 발표했다(6. 29). 김양래 이사의 이와 같은 행위에 대하여 유감을 표명함과 아울러 관련 단체가 그 경위를 조사해 줄 것을 요구했다. 

둘째, 유죄판결 여부와 관계없이 그레그를 초청한 결정은 적절치 못했다는 점과 그 사유를 밝혔다. 그는 광주진압을 결정했던 백악관 회의(1980. 5. 22)에 참석했으며, 그가 사과한 것은 자신의 ‘침묵’과 ‘한국인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한 것’일 뿐 그 당시 미국이 취한 행동의 진실을 밝히지도 않았고 미국의 책임에 대해 사과하지도 않았다. 그것은 불성실한 사과이며, “사과”라고 부를 가치조차 없다. 


광주광역시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

조지 교수는 이 밖에도 2016년 광주인권상 수상자 결정과정의 문제, 재단이 주관한 방콕 학술대회에서의 기조발표 초청을 거부한 문제, 더 나아가 김양래 이사의 사임을 공개적으로 요구 등 개인에 초점을 맞춰 더 적극적인 비판과 공격을 펼쳤다.

조지 교수의 이와 같이 강경하고 확장된 공격에 대하여 김양래 이사는 다음과 같이 대응했다(7. 14). 첫째, 그레그가 시민법정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는 주장에 대한 조지 교수의 공식사과메일에 대해서 알지 못했으며, 나중에는 메일확인과정에서 간과한 것으로 말했다. 

둘째, 조지 교수는 2016년 광주인권상 수장자 결정과정에 대해서도 잘못된 정보를 이용했고 가톨릭 교회의 이해관계와 연계하는 듯한 인식도 잘못된 것임을 지적했다. 이밖에 태국학술회의 참가거부 사유에 대한 진설성, 재단과 그레그 간의 연계 의혹에 대하여 조지 교수이 언행을 비판했다. 

또한 필자와의 면담에서 김 이사는 5월단체 이름으로 발표된 해명요구에 대헤서 갑자기 김양래 개인 실명에 대한 공격과 비난으로 대응한 점에 대한 강한 불만을 토로했다.

두 사람 간의 이메일을 통한 논란이 거듭되는 가운데 미국 현지에서 이번 학술회의를 실질적으로 주관했던 설갑수 씨가 여기기 개입하여 조지 교수를 극단적인 언사로 비하하는 공세를 전개했다. 조지 교수에 의하면 적어도 26회의 인신모독적 공격과 폭언-거짓말, 병적인, 표절의혹, 불쌍한 인간 등-을 거듭했다는 것이다.

김양래 이사도 조지 교수에 대하여 거짓말쟁이, 무책임한 학자 등 치명적인 인격모독의 언사를 거듭했다. 이들은 조지 교수에게 수여된 명예시민증과 후광학술상을 치탈해야 한다는 극언도 불사했다. 

그리고 이러한 잔혹한 폭언으로 조지 교수는 극심한 정신적 상처에 고뇌하고 있음을 알려왔다. 조지 교수의 적극적인 화해 제안과 필자의 상호 직접 소통을 통한 화해 및 중재 제안에 대하여 김 이사는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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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평 >

이상의 사실적 진전과정을 지켜보면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했다.

1. 발단이 된 조지교수의 대응과 관련하여:

*우선 그레그를 초청을 비판한 그의 논평은 시민사회의 공론장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매우 자연스러운 토론이었다. 사회는 이러한 토론을 통해서 지적, 윤리적 수준을 심화하고 고도화하는 것이다. 다만, 학술대회 주관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 대회를 통해서 5·18항쟁에 대한 국제적 인식 확장, 전 지구적 홍보효과 등의 긍정적 측면에 대한 호의적 평가가 함께 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은 있었던 것 같다. 

말하자면, ‘다된 밥에 제뿌리기’라고 인식하여 결과적으로 학술대회의 성과를 훼손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던 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러나 이 비판이 5.18의 역사적 무게를 높였으면 높였지 훼손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전두환 사면을 생각해보면 안다.

*더 나아가 4개 5월단체의 공동성명에 대한 조지 교수의 반박문은 상당히 강경한 공격성을 보여주었고 이것이 김 상임이사의 마음에 큰 충격을 주었지 않나 생각된다. 특히 김 이사에 대한 조사요구, 김이사 개인성명을 거명하여 시민사회와 연계된 공격, 쟁점을 학술대회에서 인권상 문제 등 이전의 문제로 확대시킨 점 등은 조지 교수에게 책임이 있다고 본다.

*분쟁의 진전과정에서 조지 교수가 상호 직접 소통과 화해를 제안한 점은 유의할 사항이다. 필자에게도 그러한 의도를 표명했고, 다른 사람을 통해서도 김 이사에게 의사를 전달했으나 그는 한사코 거부했다.

2. 다음으로 김 상임이사와 설갑수 씨의 대응자세와 관련하여:


1980년 5.18광주민중항쟁 당시 시민군의 최후 격전지였던 엣 전남도청 전경.

*우선 이 학술대회의 실질적 주관자로서 매우 집중적이고 큰 활동을 성공시킨 점은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고 본다. 많은 시민들이 노고를 찬하고 격려한 것이 사실이다.

*이 분쟁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점은 김 이사가 6월 17일에 보낸 조지 교수의 공개사과 메일을 확인하지 못하고, 또 공동성명을 논의할 때 이를 5월단체 대표들에게 알려주지 않은 사실에서 연유한다. 

조지 교수가 사과한 사실을 알았다면 공동성명 발표에 참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한 5월단체 대표의 말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김 이사는 이에 대한 진실된 사실해명과 정중한 사과를 공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건강한 시민의 기본 상식이다.

*김 이사는 과격하고 인격모독적인 언사로 조지 교수를 공격했다. 거짓말쟁이라는 표현이나 사실 확인도 하지 않는 무책임한 학자 등의 언사는 양심적인 학자에 대한 치명적인 언어폭력이고 인격모독이다. 

필자가 아는 한, 그는 의도적으로 거짓을 말한 적이 없으며, 사실 확인에 태만한 지식인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김 이사가 거짓말이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더구나 거짓말이나 사실확인을 않했다고 공격하는 김 이사 자신이 메일확인도 않는 점에 대해서 무어라 설명할 것인가? 서로 양보하여 소통하는 길이 진리이다.

*특히 설갑수 씨 역시 더욱 인격모독적인 언사로 조지 교수를 공격했다. 특히 그의 비판과 공격에는 자가당착적 문제가 보인다. 이를 테면, 설 씨는 ‘자기를 CIA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라고 조지 교수가 단정해서 공격했다고 비판했지만, 그 내용을 자세히 보면 ‘CIA 대원인 그레그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잘못 해석한 것이었다. 

조지 교수를 표절자로 지목하여 이 사실을 해당 출판사에 조사요청을 한 결과 그 출판사에서 ‘표절의혹 없음’이라는 회신을 보내자 오히려 출판사를 폄훼하는 듯한 언사를 보인 것은 그의 공격이 갖는 한계를 알 수 있게 한다. 실제로 조지 교수가 표절했다는 문제의 자료는 필자도 기록관 자료실에서 조지 교수에게 직접 보여준 것이었다.

3. 5월관련 단체의 대응과 관련하여:

*5·18기념재단과 유가족, 부상자, 구속부상자의 3개 민주화유공자 단체는 공동의 명의로 조지 교수에게 입장을 밝히라는 요구의 성명을 발표했다. 두 가지 의견을 제시한다.

첫째는 그 공동성명의 말미에는 조지 교수가 ‘5·18민주유공자들을 공격하는 행위를 멈추고 잘못된 사실을 공표한 것에 대하여 공개적으로 입장을 밝힐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조지 교수의 논평은 단체나 유공자들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 국제학술회의의 초청인사 문제로 한정하여 거론했다는 점을 지적해둔다. 대상을 확대시키는 것은 문제가 있는 표현이다. 그리고 이는 적대적 공격이라기보다는 진정성 있는 비판이다.

*둘째는 일단 단체 대표들이 조지의 공식사과 메일을 김 이사에게 보낸 사실과 공식적으로 사과한 사실을 모른 상태에서 그에 모순되는 문제의 성명이 발표되었다면, 당연히 이 성명은 수정되거나 철회되는 것이 책임성 있는 공공기관으로서 합당한 자세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더 나아가 착오로 발표된 성명에 대하여 공적인 사과도 있어야 한다. 단체의 명예와 존엄을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본다. 그로 인해 상처받은 개인이 있다면, 이는 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이러한 견해를 필자는 각 단체 대표를 면담한 자리에서 직접 전했다. 그러나 아직 이에 대한 응답을 필자는 알지 못한다.

4. 결어

*서두에서도 밝혔듯이 조지 교수와 김 이사 두 분이 직접 소통하기를 다시 제안한다. 필자가 중재할 용의가 있다. 그러면 대다수 오해는 해소되리라 믿는다. 많은 부분이 언어 소통에서 과장되거나 잘못 해석된 결과에서 초래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 길이 상호간의 상처를 치유하는 길이고 더 나아가 5·18이 입은 상처도 치유되는 길이다. 망설여진다면 공동체를 위해 몸 바친 열사 ‘윤상원에게 물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나간채 전남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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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양측을 아는 편이지만, 특히 조지 교수는 근 20년을 함께 연구하고 소통해온 가까운 관계이다. 그 동안 조지 교수는 수 십 회의 해외학술대회에서 5·18연구 결과를 발표하여 5·18의 국제화에 기여했다. 외국인으로 5·18에 관한 한 최고의 전문가이고 그의 광주사랑, 5·18사랑은 광주시민에 못지않다. 

따라서 그의 명예시민증은 치탈되어서는 안돼고 오히려 그의 업적과 5·18에 관한 지식은 광주공동체의 값진 자산으로 보호되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물론 이 밖에 그에 대한 폭언들도 거두어들여져야 한다.

*나는 토론문을 쓰면서 가능하면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관점을 가지려 노력했다. 그러나 독자에 따라서 달리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토론문과 관련하여 이견이나 질문을 환영한다. 이를 통해서 스스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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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간채 전남대 명예교수(전 5·18민주화운동기록관장)
나간채 전남대 명예교수(전 5·18민주화운동기록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