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친왕
의친왕 義親王 | |
|---|---|
의친왕 이강 | |
사동궁 이화문 | |
| 의화군(義和君) | |
| 재임 | 1892년 1월 28일 ~ 1900년 8월 17일 |
| 의친왕(義親王) | |
| 재임 | 1900년 8월 17일 ~ 1910년 8월 29일 |
| 이강 공(李堈 公) | |
| 재임 | 1910년 8월 29일 ~ 1930년 6월 12일 |
| 후임 | 이건(李鍵) |
| 공족 이강(公族 李堈)[1] | |
| 재임 | 1930년 6월 12일 ~ 1947년 5월 3일 |
| 후임 | 왕공족제도 폐지 |
| 이름 | |
| 휘 | 이강(李堈) |
| 이칭 | 궁가 사동궁(寺洞宮) |
| 별호 | 아명 이평길(李平吉) 이명 이천광(李天光)[2] |
| 자 | 사강(士岡) |
| 호 | 만오(晩悟)[3] 춘암(春菴)[4] |
| 세례명 | 비오(Pius) |
| 신상정보 | |
| 출생일 | 1877년 3월 30일 |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순화방 숙의 범씨 제택 |
| 사망일 | 1955년 8월 16일(78세) |
| 사망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안동별궁 |
| 학력 | 게이오 의숙 로노크 대학교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 |
| 가문 | 전주 이씨 |
| 부친 | 고종 |
| 모친 | 모친 명성태황후 사친 귀인 장씨 |
| 형제자매 | 적형 순종 서형 완친왕 서제 영친왕(사시 의민황태자) 서매 덕혜옹주 |
| 배우자 | 의친왕비 김덕수 |
| 자녀 | 공식 12자 9녀 |
| 기타 친인척 | 처질 김종성 친척 장인근·장우근[5] |
| 종교 | 유교(성리학) → 천주교 |
| 묘소 | 의친왕묘(義親王墓) |
| 군사 경력 | |
의화군 이강 | |
| 복무기간 | 대한제국 육군 1906년 4월 8일 ~ 1910년 8월 29일 일본제국 육군 1911년 1월 18일 ~ 1930년 6월 12일 |
| 최종계급 | 대한제국 육군 부장[6] 일본제국 육군 중장[7] |
| 서훈 | 1906년 대한제국 대훈위 금척대수장(大勳位金尺大綬章)[8] 1906년 일본제국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勳一等 旭日桐花大綬章)[9] 1913년 일본제국 훈1등 한국병합기념장(勳一等 韓國倂合紀念章)[10] 1924년 일본제국 대훈위 국화대수장(大勳位菊花大綬章)[11] 1928년 일본제국 쇼와대례기념장(昭和大礼記念章)[12] 1930년 일본제국 제도부흥기념장(帝都復興記念章)[13] 1940년 일본제국 기원 2600년 축전기념장(紀元二千六百年祝典記念章)[14] |
의친왕(義親王, 1877년 3월 30일 ~ 1955년 8월 16일)의 이름은 이강(李堈)으로 고종의 별자(別子)이다. 모친은 명성태황후이고 사친은 귀인 장씨이다.
개요
의친왕 이강은 을미사변의 배후에 운현궁 일가가 있을 것으로 의심하고 복수를 계획하던 중 생조부 헌의대원왕(흥선대원군)에게 발각되었고, 이를 계기로 일본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부친 고종은 의친왕의 안전·장래·학업·지인·인품 등을 우려하여 미국 유학을 보내게 되었다. 궁가 사동궁은 개인 채무로 인해 한동안 대한제국 정부가 소유자였다. 혁명혈약서 사건·박영효 일파·이토 히로부미 등과 관련된 역모 사건에 자기 의사와 관계없이 연루되었다.
한일강제병합 공포 이후 일제의 조서에 의해 공족이 되어 공(公) 작위를 받았고, 은사공채(은사금)도 받게 되었다. 《일본의 조선》에 「양국은 칠에 아교를 넣은 듯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친필을 게재하였다.[15] 고종이 사망한 당년 친필로 독립성명문을 작성하였고, 대동단 제2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망명을 시도하던 중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서울로 강제 송환되었다. 다만 신문조서를 받을 때 이에 대해 부정했다고 기록되었다. 이후 여러 염문설로 인해 궁내성이 이강의 공(公) 작위 은거를 검토하게 되었고, 이강은 지병을 이유로 서장자 이건에게 세습하고 은거하였다.
광복 이후 애국협회 회장에 추대되었다. 사동궁이 적산 취급을 당한다는 잘못된 정보로 인해 헐값에 매각하였다. 6·25 전쟁을 겪었다.
생애
어린 시절
출생
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은 1877년(고종 14) 양력 3월 30일 서종조모 숙의 범씨의 제택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고종이고 모친은 명성태황후이며 사친은 귀인 장씨이다.
의화군 봉작·길례
왕세자가 태어난 후 왕자군이 태어나면 왕세자가 만 10세가 되기 전까지 왕자군이 입궁하여 문후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궁중 법도로 인하여, 이강은 궁 밖에서 서종고숙(庶從姑叔) 금릉위 박영효의 양자처럼 양육되었다. 1884년(고종 22) 명성황후가 이강의 궁중 출입 허가와 군(君) 봉작을 추진했지만, 생조부 헌의대원왕(흥선대원군)이 고종의 양모 신정익황후에게 종용하여 명성황후의 계획은 시행되지 못하였다. 이로 인해 이강은 흥선대원군을 원망하였다. 이후에도 군(君) 봉작을 받지 못하고 궁궐 밖 사친의 집에서 지내자 불만을 갖게 되었고, 시중의 무뢰한과 소행을 난잡하게 하기도 하였다.[16] 1891년(고종 28) 음력 12월 의화군(義和君)으로 봉해졌다.[17]
1893년(고종 30) 음력 10월 연원군부인 김덕수와 안동별궁에서 길례(혼인)를 올렸다.[18] 1894년(고종 31) 내의원·사옹원 제조, 영돈녕부사에 임명되었다. 또한 보빙대사(報聘大使)로 임명되어 청일전쟁의 일본 승리 축하 및 조선과 일본의 우호 관계를 증진할 목적으로 일본을 방문하였다. 1895년(고종 32) 이탈리아 움베르토 1세의 질남(姪男) 아부리(阿夫里·아브루치 공작)를 전송하였다.[19] 영국·독일·프랑스·러시아·이탈리아·오스트리아 특파대사(特派大使)로 임명되었지만[20] 두 달 뒤 의원면직 하였다.[21][22]
을미사변 목격
1895년(고종 32) 을미사변 당일 의화군은 고종의 명을 받고 경복궁 밖의 동태를 살폈다. 조선군 훈련대는 건춘문과 춘생문, 일본 군인들은 영추문으로 가는 것을 목격하였고 이어서 을미사변이 발생하였다. 그날 오후 1시 의화군은 윤치호에게 참상을 전하였다. 이후 생조부 흥선대원군이 두려워서 나흘 동안 언더우드와 함께 지내게 되었다.[23]
| “ | …(중략)… 그가 궁을 떠난 직후 칼 찬 일군의 일본인이 전하와 세자가 거처하던 침소를 공격했다. 그들은 왕후를 찾아다녔다. 그들을 시녀 두세 명을 왕후가 틀림없다고 여겨 아주 잔인하게 살해했다. 그들은 세자비(순명효황후)의 머리를 잡아채어 발로 차고 구타하고 질질 끌면서 왕후가 어디 있는지를 말하도록 강요했다. 대답하기를 거부하자 그들은 세자비를 죽어가고 있거나 이미 죽은 군인들 사이로 던져버렸다. 한 일본인이 세자의 머리를 잡아채고 발로 걷어찼다. …(중략)… 이때 왕후가 나타났다. 일본인 하나가 왕후를 붙잡아 발로 차서 쓰러뜨렸다. …(중략)… 자객들이 왕후가 인사불성이 되도록 걷어찼다. 그러고 나서 암살자들은 그녀를 한 방으로 끌고 가서 홑이불로 그녀를 덮었다. 그러고 나서 왕후인지를 확인하고자 일본인 통역 스즈키(鈴木)가 궁을 가리키면서 한 상궁에게 말하기를 왕후가 “그 방”에 누워있다고 말했다. 그 상궁은 방으로 들어갔고 …(중략)… “오, 왕후께서 승하하셨다!”라고 울부짖었다. 이 소리를 들은 암살자들은 달려 들어와 왕후의 시신을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꽃밭(건청궁 녹산)으로 끌고 갔다. 거기서 그들은 왕후의 시신을 내려놓고 불을 질렀다. …(중략)…[24] | ” |
일본 유학
계기
의화군은 을미사변의 배후에 생백부 이재면(흥친왕)과 생종형 이준용(영선군)이 있을 것으로 의심하고 조선 검객·일본 낭인·청나라 세력인 등을 모아 복수를 계획하였는데, 곧 흥선대원군에게 발각되었다.[25] 이는 의화군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는 계기가 되었다.[26]
게이오 의숙 재학·미국 방문
1896년(고종 33) 게이오 의숙을 다녔다. 당시 도쿄에서 3,000원의 빚을 지게 되었는데, 1895년(고종 32) 총리대신 연봉이 5,000원이었다.[27] 7월 도쿄에서 고베(神戶) 근처로 피서를 다녀왔다.[28] 1897년(고종 34) 요코하마(橫濱)에서 미국으로 갔다. 의화군은 서광범과 교류하였고[29] 9월 민영환·박승봉과 함께 서광범의 장례식에 참석하였다.[30] 1898년(고종 35) 일본을 경유해서[31] 귀국하였다.[32]
고종의 미국 유학 결정
고종은 의화군이 일본에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첫째, 의화군이 금릉위 박영효·유길준·민상호 등과 교류하는 것을 싫어하였다.[33] 박영효는 갑신정변 주동자이자 제2차 갑오개혁 추진자이며, 명성황후 암살 모의자로 지목되어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유길준은 을미사변 가담자로 지목되어 망명하였다. 민상호는 춘생문 사건에 연루되었고 아관파천을 단행하였다.
| “ | …(중략)… 명치(明治) 28년(1895)에 우리나라에 유학한 이래로 4년[그 중 1년은 미국(美國)에 유학]이 되었으나 학업의 효과를 보지 못했으니 본 대신은 매우 유감입니다. 그래서 본 대신이 직접 위의화군을 만나 이야기하기를, ‘…(중략)… 학업의 효과를 달성하지 못했으니 의화군은 물론이고 한국 조정을 위해서도 통탄스러움을 감당치 못할 일입니다. 앞으로 한층 분발하여 열심히 학업을 닦으십시오.’ | ” |
둘째, 의화군이 학업을 게을리하는 것을 우려하였다. 셋째, 젊어서 사려가 충분하지 않으므로 어떤 사고를 일으킬지 헤아리기 어렵다고 판단하였다.[35] 결국 고종은 의화군의 학업·안전·장래를 위해 미국 유학을 결정하였다.[36]
미국 유학
의왕(義王) 책봉
1899년(고종 38) 미국 유학을 떠났다. 1900년(고종 39) 8월 의왕(義王)으로 책봉되었고 금책(金冊)·금인(金印)·칠장복(七章服)을 하사 받았다.[37] 칭호는 의왕(義王) 또는 의친왕(義親王)이라 하였다.
박영효의 의친왕 옹립 음모 사건
박영효·이겸제·김창한·이승린(李承麟)·이조현(李祖鉉)·윤석준(尹錫準) 등은 활빈당(活貧黨)을 조직하고 경상도에서 금 50만 원을 모아 일본에서 무기를 구입하고 의친왕을 옹립하려는 계획을 세웠다.[38] 하지만 1900년(고종 39) 발각되었고[39] 박영효 세력은 사망 및 분열되었다. 1907년(고종 46) 이승린·이조현·박영효·김창한·이겸제·윤석준 등이 사면받았다.[40]
혁명혈약서(革命血約書) 사건
조택현·장호익·김홍진·권호선 등은 고종과 순종을 폐위하고 의친왕을 옹립하여 새 정부를 수립하려고 하였다.
…(중략)…『우리나라가 망할 날이 조석(朝夕) 간에 달려 있건만 전혀 막아낼 대책이 없으니 …(중략)… 지금 마땅히 맹약(盟約)을 정하여 나라를 붙들어 세워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중략)… 제목을 ‘혁명혈약서(革命血約書)’라고 달았는데, 그 중의 조건은, 첫째, 대황제 폐하를 폐위한다는 것이고, 둘째, 황태자 전하를 폐위한다는 것이고, 셋째, 의친왕(義親王)을 그 자리에 대신 올려 앉힌다는 것이고, …(중략)… 광무(光武) 4년 월일을 밝힌 아래에 맨 먼저 조택현(趙宅顯)을 쓰고 그 다음에는 장호익(張浩翼)·김홍진(金鴻鎭)·권호선(權浩善)·강용구(姜容九)·방영주(方泳柱)·장인근(張寅根)·이기옥(李基鈺)·권승록(權承祿)·김희선(金羲善)·김형섭(金亨燮)·김교선(金敎先)·김봉석(金鳳錫)·김홍남(金鴻南)·김관현(金寬鉉)을 써서 15인의 이름을 같이 열거하였으며 도장을 찍었습니다. …(중략)…[41]
권호선은 감옥에서 병사하였다. 1904년(고종 43) 평리원의 재판 결과 장호익·조택현·김형섭·김희선·김교선·방영주·김홍진·김영소는 참형되었다.[42]
로노크 대학교·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 재학
1901년(고종 40) 로노크 대학교에서 김규식을 동창으로 만났다. 6월 의친왕은 김규식·수행원 등과 매사추세츠주 노스필드에서 열린 학생 대회에 참여하였다.[43] 로노크 대학교를 마치고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 재학 중 김란사와 교류하였다.[44] 그러던 중 의친왕이 조셉 스타우트(Joseph Stout)에게 구타를 당한 일과 거주하는 아파트에서 복면강도를 당하여[45] 하와이·샌프란시스코 등지로 가서 수학하였다. 하지만 학업·실덕·부채 등의 문제가 발생하였다.
3만 달러 부채 기록
| “ | 왕자가 부채를 자인함. 한국 왕자는 울프 형제상회에 3만 달러의 부채가 있다고 말함. 그의 아버지(고종)가 소송을 통보받음. 원고의 청구금액에 대한 지불 명령을 받을 것임. …(중략)… 뉴욕과 필라델피아의 울프 형제상회는 왕자에서 3만 달러를 회수하기 위해 약속어음에 대한 지불을 요구하는 법률소송을 토요일 지방 최고재판소에 제기했음. …(중략)…[46] | ” |
의친왕은 미국 유학 중 빚을 지게 되면서 대한제국 정부와 사업을 하고 있는 미국회사를 통해 수당을 받게 되었는데, 수당은 250달러로 늘어났고 증권을 하게 되었다. 1902년(고종 41) 고종 앞으로 3만 달러 어음이 발급되었고 부채상환 소송을 통보받게 되었다.[47]
대한제국 귀국 전 일본 체재
의친왕의 귀국 희망·고종의 귀국 불허
1905년(고종 42) 부친 고종은 의친왕이 일본과 미국에서 학업에 매진하지 못하고 품행이 단정하지 않은 점을 우려하였고, 바른 인품을 갖추기를 바랐다.[48] 다만 의친왕이 귀국하면 이재면(흥친왕)·이준용(영선군) 등과의 충돌을 예측하기 어려우므로 일본 또는 미국 유학이 몇 년 더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49] 반면 의친왕은 1905년(고종 42) 1월 대한제국 궁내부로 귀국과 관련된 전보를 보내고[50] 2월 동경에 도착하였다.[51] 고종은 의친왕이 미국과 일본 중에서 계속 유학을 해야하므로 귀국은 불가하다고 하였다.[52] 이에 의친왕은 미국 유학을 희망하고[53] 미국으로 떠났다.[54] 8월 다시 일본 동경에 도착하였다.[55] 이때 고종은 의친왕을 귀국시키고자 하였으나, 대한제국의 새 내각이 정비되지 못 한 상황에서 귀국할 경우 의친왕의 정치적 안전이 염려되어 귀국 허가를 연기하였다.[56]
갑산 구리광산 매매계약서 사본 기록
1905년(고종 42) 4월 주차일본공사관 참서관 한치유(韓致愈)[57]가 윤치호에게 의친왕이 갑산 구리광산 300만 평을 일본인에게 100만 엔에 매각하려 한다고 전하며 계약서 사본을 보여주었다. 내용은 의친왕이 선금 10만 엔을 받았고 잔금 90만 엔은 30만 엔씩 3차례 나눠 받을 예정이나, 만약 계약 파기 시 의친왕이 100만 엔을 보상해야 하고 대한제국 정부와 영업권 소유자 사이의 모든 소송 비용도 지급해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갑산 구리 광산 300만 평 매수 예정자 일본인은 영국 회사에 매각을 시도했다고 전달하였다.[58]
| “ | 어젯밤 한치유 씨가 의화군이 체결하려는 양도 계약을 도와주고 있는 일본인 아라이(荒井)가 영국 회사 직원인 야마모토에게 쓴 편지들을 보여줬다. …(중략)… 1. 조선 정부나 왕실 모두 의화군의 행동과 권리를 통제하거나 간섭할 수 있는 힘이 조금도 없지만, 의화군은 자신의 뜻에 적합하게 조선의 법을 제정하거나 폐지할 수 있다. 따라서 의화군이 서명한 그 양도 계약은 조선 정부나 왕실이 어떻게 말하거나 행동하는가에 관계없이 유효하고 합법적일 것이다. 2. 자녀의 빚은 아버지가 책임을 지는 것이 조선의 관습이자 법이다. 그러므로 그 권리를 거저주다시피 했다는 이유로 의화군이 참수된다고 할지라도, 조선의 황제는 일본인과 외국인이 보유하고 있는 그 계약의 합법성을 결코 부인할 수 없다. 3. 어떤 일본 과학자의 조사에 따르면, 언급된 그 구리 광산은 동부 전역의 광산 중에서 가장 광물이 풍부한 광산이라고 한다. 몇 년 전 안남 연합체가 그 광산을 사려고 800만 엔을 제안했으나, 일본 정부의 개입으로 거부당했다. …(중략)…[59] | ” |
이외에도 한치유는 의친왕이 특명전권공사(特命全權公使) 조민희[60]에게 제일은행에서 1만 엔을 빌릴 수 있도록 보증을 서 달라고 부탁했다고 하였다. 이에 조민희는 일단 수락하였지만, 차후 제일은행에 가서 자신을 보증인으로 세우는 것을 거절해 달라고 비밀리에 요구했다고 하였다.
조국의 미래 걱정
1905년(고종 42) 10월 의친왕은 윤치호를 만나서 대한제국의 상황을 걱정하고 매국 관료에 대해 비난하였다.[61]
| “ | …(중략)… 일본에 저항했던 이용익의 태도를 칭찬했다. 의화군은 조선 정부가 파리 공사관에 이용익을 받아들이지 말라고 전보를 보냈다는 소식을 전했다. …(중략)… “나는 일본이 조선의 보호국 지위를 차지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하고, 서울에 있는 외국 공사관들을 유지하라고 왕실에 전보를 보냈소. 조선의 독립을 옹호하는 여론을 얻기 위해 훌륭한 인사들을 미국과 유럽으로 보내야 하오. …(중략)… 폐하는 그 일을 위해 1센트도 주려고 하지 않으신다오. 내 계획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오?” …(중략)… “…(중략)… 제가 생각할 때 올바른 국내의 정부 없이 독립을 생각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청일전쟁부터 최근 러일전쟁까지 지난 10년 동안 조선은 영국만큼이나 독립적이었습니다. …(중략)… 미국 대통령(시어도어 루스벨트)이 조선이 지금부터 철저한 내정 개혁을 위해 충실히 노력할 것임을 보증하라고 저하께 요구한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저하께서는 이를 보증하시겠습니까?” …(중략)… “아니, 나는 보증할 수 없소.” …(중략)… “그렇다면 어느 누구도 우리를 도와주지 않을 것입니다.” | ” |
대한제국 귀국 이후
귀국
1906년(고종 43) 3월 이토 히로부미가 고종에게 의친왕의 귀국에 대해 말하자, 고종은 숙고한 뒤 결정하겠다고 하였다.[62] 1906년(고종 43) 4월 의친왕이 귀국하였다.[63] 고종은 이근명에게 의친왕이 무사히 돌아와 기쁘고 다행스럽다고 하였다.[64]
1906년 활동
1906년(고종 43) 4월 대한제국 육군 부장(陸軍 副將)에 임용되었고, 대훈위 금척대수장(大勳位金尺大綬勳章)을 수여받았다.[65] 7월 대한적십자사 총재에 취임하였다.[66] 동월 흥인지문 밖으로 유람[67]과 유연(遊宴·자연 속을 유람하는 연회)을 다녀왔다.[68] 9월 고종의 명을 받고 일본 관병식(觀兵式)에 참석하였고[69] 일본제국으로부터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勳一等 旭日桐花大綬章)을 수여받았다.[70] 10월 의친왕은 고종에게 순종이 순정효황후(사시)와 가례를 올리기 전에 먼저 황후를 정립하는 것이 예법에 알맞다고 하였다.[71]
사동궁 소유자 대한제국 정부
1906년(고종 43) 의친왕의 궁가 사동궁(寺洞宮)이 설립되었다. 하지만 의친왕의 개인 채무로 인해 채권자로부터 사동궁을 차압당할 우려가 있으므로, 소유자는 대한제국 정부였다.
…(중략)…이토 히로부미:
동궁이 일본 체재 중에 여러 곳에서 거액의 부채를 지게 되어 마침내 우리나라 법정에 제소되기에 이를지도 모를 상태에 있다고 하오. …(중략)… 거주하시는 가옥과 같은 것도 이대로 정부에서 의화궁(義和宮)에게 대여해 두는 편이 좋을 것이오. 왜냐하면 이를 의친왕(義親王)의 명의로 바꾼다면 즉시 채권자로부터 차압당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오.민영기:
앞서 의친왕(義親王)이 폐하를 알현하셨을 때 그 집은 정부 소유로 그는 소위 집을 임대하고 있는 신분이므로 매우 거북한 신세라고 말한 적이 있소. …(중략)… 지난날에도 동저(同邸)에 비로 새는 곳이 있었는데 전하는 사람을 나에게 보내시어 정부의 집이므로 즉시 정부에서 이를 수선하라고 명령하셨소. …(중략)…이토 히로부미:
지난날에도 의화궁에게 500원의 채권이 있는 일본인이 있어 이곳으로 와서 동궁에게 상환을 청구했지만 빚을 갚지 않으므로 우리 이사청(理事廳)에 제소하여 이사청에서 이를 나에게 품신(稟申)하였소. 그 차용증서라는 것을 보건대 분명히 변제의 의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에는 의화궁(義和宮) 저택을 인도할 것이라는 조건이 기재되어 있었소. …(중략)…[72]
이토히로부미의 의친왕·영선군 옹립 계획설
1907년(고종 44) 3월 의친왕은 일본에서 돌아온 뒤 대한적십자사 총재에서 해임되었다.[73] 6월 서모 순헌황귀비의 형(兄) 엄준원이 고종에게 통감 이토히로부미가 고종을 폐위시키고 의친왕과 영선군을 옹립할 계획이라고 하였다.
…(중략)… 엄준원(嚴俊源)이 한국 황제를 알현하고 ‘통감은 폐하를 폐하고 의화궁(義和宮)과 이준용(李埈鎔) 양 황족을 옹립할 계획이며 일본 정부 당국자도 이미 찬동을 표하여 폐위와 옹립을 불원간 결행할 것이라고 보고했다’는 내용을 상주했다고 합니다. 한국 황제는 이를 듣고 크게 공포심이 일어나 엄준원과 기타 일파 무리에게 그 선후책을 하문했더니, 엄준원의 의견으로서 그 사위인 …(중략)… 민원식이 일본을 방문한 유일한 목적은 영선군이 과연 통감의 추천에 따라 한국 황제가 될 결심을 품고 있는가 여부를 탐지하는 데 있다고 합니다.[74]
7월 고종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황위에서 물러나 태황제(太皇帝)가 되었고, 순종이 황위에 올랐다.
황태자로 책봉된 영친왕
1907년(순종 원년) 양력 8월 이근명·민영규·이완용·이윤용·임선준·고영희·이병무·조중응·이재곤·송병준·서정순·성기운·신기선·조충하(趙忠夏)·민병석·이중하(李重夏)·구연하(具然河) 등은 순종의 부름을 받고 덕수궁 중명전으로 모였다. 고종은 영친왕이 타고난 성품이 남달리 뛰어나고 효성과 우애가 일찍이 드러났으며, 사람들도 모두 우러러 바라보고 있으니 황태자로 세울만하다고 하였다.[75] 순종은 정종이 동생 태종을 왕세자로 책봉한 고사를 좇아 자신의 서제(庶弟) 영친왕을 황태자로 정하였다.[76] 이어서 순종은 이완용에게 조서를 쓰게 하고 김종한에게 조서를 읽게 하였다.[77]
《고종시대사》[주석 1]는 영친왕의 황태자 책봉은 의친왕파와 영선군파의 음모를 방지하기 위해 이완용 등이 추진 한 것이라고 하였다.[78]
1907년 활동
1907년(고종 44) 3월 의친왕은 일본제국 가나가와현에 위치한 이토 히로부미의 사저를 방문하여, 조선 통감부 통감으로 귀임(歸任)하는 이토 히로부미를 배웅하고[79] 동월 귀국하였다. 4월 보육원에 금 백 원을 희사하였고[80] 창의문 밖에서 승마를 하였다.[81] 5월 의친왕은 흥인지문 안 좌룡정(坐龍亭) 근처에 위치한 민가 4채를 철거해 이주시키고, 그 터에 별장을 짓게 되었다.[82] 7월 경무청에 형사 상 참고 진열소(參考 陳列所)가 설치되자, 의친왕은 대한제국에서 처음 있는 뜻깊은 경사라며 금 십 원을 희사하였다.[83] 동월 일본으로 피서를 떠난 뒤[84] 12월 귀국하였다.[85] 귀국 다음 날 운현궁·누동궁·완평군의 사우(祠宇)에 가서 배례(拜禮)하였다.[86]
1908년 활동
의친왕은 1908년(순종 1) 1월 일본으로 가서[87] 3월에 돌아왔다.[88] 4월 생재종형 이지용의 정자[89], 7월 탑동 승방(僧房)에서 소창(消暢·답답한 마음을 품)하였다.[90] 8월 의친왕은 의친왕비의 형 김성기와 함께 당시 의학생이었던 안상호에게 자선병원(慈善病院) 설립비용 3천 원, 노동야학회(勞動夜學會)에 3천 원을 희사하였다.[91] 9월 안암동 정자에서 소창하였다.[92] 10월 충청남도 직산 성환의 유지들이 의성학교(義成學校)를 설립하고 의친왕을 교장으로 추대하였다. 의친왕은 의성학교의 재정상태가 취약하다는 것을 듣고 금화 천 원을 희사하였다.[93]
1909년 활동
1909년(순종 3) 4월 의성학교에 장려금 5백 원을 희사하였다.[94] 장교 기마병들과 원승회(遠乘會)를 하였다.[95] 5월 동대문 밖 묘련암(妙蓮庵)에서 소창하고[96] 관화연(觀花宴)을 베풀었다.[97] 7월 동대문 밖 흥천사(興天寺)에서 기생과 풍류를 즐겼고[98] 8월 측실 이연연(李姸娟)과 흥천사에서 말을 타기도 하였다.[99] 9월 음벽정(飮碧亭)에서 소창하고[100] 10월 삼종조부 완평군 이승응의 장지(葬地)를 방문하였다.[101] 이토 히로부미가 사망하자 통감부를 방문하여 조의를 표하였다.[102] 11월 안상호의 진찰소를 방문하였다.[103] 12월 적형 순종과 일진회의 한일합방성명서에 관한 대화를 하였다.[104]
의친왕과 사토히로시의 부채 기록
동년 의친왕은 고문(顧問) 사토히로시(佐藤寬)와 함께 빚 6만 원이 있다고 하였다.[105] 고종은 궁내부를 통해 돈을 전달하였다. 그러나 의친왕이 고리대금업자에게 빌렸던 실제 빚은 2만여 원으로[106] 당시 황성신문 논설위원의 월급이 30~40원이었다.
이토 히로부미 조문 특사 임명 취소
1909년(순종 3) 9월 이토 히로부미의 장례식 조문 특파대사(特派大使)로 임명되었다.[107] 그러나 10월 일본은 돌연 조문 특파대사를 민병석으로 변경하였다. 의친왕은 신용이 없고 인격이 실추되었으며, 이토 히로부미가 생전에 특히 싫어한 사람이라는 이유였다.[108]
경술국치 이전 활동
1910년 1월 탑골승방[109], 4월 두모포와[110] 신흥사[111]에서 소창(消暢·답답한 마음을 품)하고 사냥을 다녀온 후[112] 생재종형 이지용과 함께 기생들을 데리고 풍류를 즐겼다.[113] 5월 상사동에 거주하는 측실의 집에서 국악인 김창룡 등과 풍류를 즐긴 후[114] 부산항을 유람하였다. 동월[115]과 6월에는 신흥사와[116] 이지용의 정자에서 소창하였다.[117] 7월 측실 농주(弄珠)와 신흥사에서 소창하고[118] 통감부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주최한 만찬회에 참석하였다.[119] 8월 측실 김금주(金錦珠)와 신흥사에서 소창하였다.[120] 경술국치 직전 신한민보는 의친왕에 대해 보도하였다.[121]
부끄러운 줄 모르는 의친왕은 나라가 망해도 친왕으로 대우한다는 바람에 아무 걱정 없이 기생을 데리고 놀러 다닌다.
일제강점기
1910년대
공족, 이강 공
…(중략)… 조령을 내리기를,
"짐(메이지)이 생각건대,이강(李堈) 및 이희(李熹)는이왕(李王)의 의친(懿親)으로 명성이 일찍부터 두드러졌고 근역(槿域)이 우러러 보고 있으니 마땅히 특별한 대우를 가석(加錫)하여 그 의칭(儀稱)을 풍부하게 해야 할 것이다. 이에 특히 공(公)을 삼고 그 배필을 공비(公妃)로 삼고 모두 황족의 예로써 대하고 전하(殿下)라는 경칭을 쓰게 하여 자손으로 하여금 이 영광의 하사를 세습하여 영구히 아끼는 영광을 누리게 한다."[122]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었다. 메이지 일왕의 조령에 의해 구 대한제국 황실은 이왕가로 격하되었고 고종은 덕수궁 이태왕·순종은 창덕궁 이왕·순종의 윤 황후는 창덕궁 이왕비가 되었다. 의친왕은 공족으로 공(公)의 작위를 받아 이강 공이 되었고, 궁가 사동궁은 이강 공저(李堈 公邸)가 되었다. 또한 은사공채(은사금) 83만 원을 받게 되었다.[123][124] 구 대한제국 황실의 직계·방계·인척 중 이희 공(흥친왕)은 83만 원, 윤택영은 50만 4천 원, 박영효는 28만 원, 이준 공(영선군)은 16만 3,000원, 이지용은 10만 원을 받았다. 또한 이재완·이재극·민영린 등도 받았다고 하였다.[125] 조선귀족 작위 거부자 및 세습 거부자는 조정구·조경호·윤용구·홍순형·윤홍섭·조한국이다.
1910년대 활동
1911년 1월 이강 공은 일본 제국 육군 중장에 임명되었다.[126] 동월 《일본의 조선(日本之朝鮮)》에 「양국은 칠에 아교를 넣은 듯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친필을 게재하였다.[127]

1912년 메이지(明治) 일왕이 사망하자 적형 이왕(순종)의 명을 받고 장례식에 참석하였다.[128] 1913년 4월 일제로부터 훈1등 한국병합 기념장(勳一等 韓國倂合 紀念章)을 수여받았다. 이후 경주로 견학을 다녀오고[129] 부여를 다녀온 뒤[130] 5월 벚꽃 관광을 하였다.[131] 7월 이왕가를 대신하여 메이지 일왕의 1주기에 참석하였다.[132] 8월 이완용과 함께 다이쇼(大正)의 식사 초대를 받고[133] 도쿄를 다녀왔다.[134] 9월 낙산 가을 풍경을 감상한 뒤 안순환(안교환)의 정자에서 연회를 베풀고 박영효·윤택영·송병준 등과 함께 이왕직 차관 고미야 미호마츠(小宮三保松)를 초대하여 시간을 보냈다.[135] 1914년 10월 원산으로 유람을 다녀왔다.[136] 1915년 8월 여주를 다녀오고[137] 9월 해인사 축제와[138] 가정박람회에 참석하였다.[139] 10월 조선물산공진회(시정 5주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를 관람하였다.[140]
1916년 1월 김천을 다녀온 뒤[141] 덕유산에서 수렵을 하였다.[142] 7월 이강 공은 조선호텔로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야마가타 이사부로(山県 伊三郎)·이왕직 차관 고미야 미호마쓰(小宮 三保松)·서기관장 고마쓰 미도리(小松綠)·이왕직 사무관 윤덕영·김춘희 등을 초대하여 오찬을 열게 되었다.[143] 11월 히로히토(裕仁·훗날 쇼와 일왕)의 저위(儲位) 책봉식에 참석한 뒤 다이쇼 일왕을 만났다.[144] 이후 다이쇼 일왕이 궁중 내 천종간(千種間)으로 이강 공·간인노미야 고토히토 친왕(閑院宮 載仁 親王)·히가시후시미노미야 요리히토 친왕(東伏見宮 依仁 親王) 등을 초대하여 식사를 대접하였다.[145] 1917년 4월 창덕궁 이왕(순종)이 함흥을 방문할 때 수행하였다.[146] 7월 이강 공은 조선호텔로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야마가타 이사부로·군사령관 아키야마 요시후루(秋山 好古) 등을 초대하여 만찬회를 개최하였다.[147] 12월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야마가타 이사부로·박영효 등을 조선호텔로 초대하여 만찬회를 개최하였다.[148] 1918년 1월 조선호텔로 서제(庶弟) 이왕세자(영친왕)를 초대하여 만찬회를 개최하였다. 이때 조선총독부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야마가타 이사부로·이왕직 장관 민병석·이완용 등도 참석하였다.[149] 1919년 1월 부친 고종이 사망하였다.
독립신문의 독립성명문
1919년 11월 20일 독립신문에 이강 공의 독립성명문이 보도되었다.[150]
一. 일본은 몇몇 매국노 간신과 결탁하여 나의 부황과 모후를 시해하였다. 부모를 잃은 원한을 열국에 호소하기 위함이다.
二. 3월 1일 이래 우리 인민은 모두가 하나 되어 맨손으로 일어나 독립만세를 외쳤다. 적들은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적수공권의 인민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하는 등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백절불굴의 정신으로 무장한 우리 인민의 독립을 향한 뜨거운 피는 식지 않았다. 강건한 민족정신을 가진 우리는 결코 일본에 동화되지 않을 것임을 만천하에 선포하기 위함이다.
三. 10년 전 맺어진 합병조약은 무력과 위협을 앞세워 체결된 것이다. 부황께서는 결코 합병조약을 승인한 사실이 없다. 한일합병의 진실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서이다.
四. 나 역시 한국민의 한 사람이다. 독립된 한국의 일개 서민으로 살망정, 합병된 나라의 황족으로 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우리 임시정부가 소재하고 있는 곳에 가 정부의 여러 책임자들과 손잡고 생사를 같이하며 협력하여, 동포들이 겪는 고통의 만분의 일이라도 덜어주고 싶다. 나의 결심은 집안의 원수를 갚기 위한 것이며, 동시에 조국독립과 세계평화를 위한 것이다.[151]
조선민족대동단과 상해 망명 시도
1919년 3월 일진회 회원 전협과 최익환이 중심이 되어 서울 봉익동 62번지 전협의 집에서 대동단(조선민족대동단)을 결성되었다. 항일독립운동을 위해 귀족·관계(官界)·유림·상공인·학생을 대상으로 단원을 모집하였고 김찬규(金燦奎)·민영달(閔泳達)·김가진·박영효 등이 가담하였다.[152] 대동단은 이강 공이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망명한다면 독립운동의 파급력이 클 것으로 예상하고 이강 공을 포섭하고자 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동단의 계획을 받아들이고 특파원 강석룡(姜錫龍)으로 하여금 대동단과 연락하여 이강 공의 망명 계획을 추진토록 하였다. 이러한 계획을 추진할 때 이강과 접촉하는 것은 이강 공비(의친왕비)의 동생 김춘기(金春基)가 맡았고 마침내 이강도 동의하기에 이르렀다.[153] 10월 대동단 총재 김가진이 상해망명을 단행하였다.[154] 11월 이강 공 일행은 일본의 감시를 뚫고 상해 망명을 시도하였다. 9일 이강 공은 "수인당 김흥인(의친왕의 측실)과 간호사 최효신(崔孝信)에게 중대한 비밀서류와 고종이 외국인에게 150만 원을 맡긴 증서가 있으므로 동반해야 된다."라고 하였다. 이강 공은 1911년 혹은 1912년 부친 고종이 "이용익(李容翊)에게 기탁하여 각 은행에 예금한 돈이 상해 덕화은행(德華銀行)에 있을 것이니 찾아서 돈을 받으라."라고 하며 자신에게 증서를 건넸다고 하였다.[155] 다만 이는 사전 계획에 없었기 때문에 김흥인과 최효신의 여행증명서는 준비되지 않았다. 10일 오전 수색역에서 평양행 기차를 탔고 이어서 평양에서 안동현으로 향했다. 11일 안동현역에서 상해로 가려다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어 서울로 강제 송환되었다.[156]
조선민족대동단의 독립선언서
반만년 역사의 권위와 2천만 민중의 성충(誠衷)을 의지하여 우리 국가의 독립국됨과 우리 민족의 자유민됨을 천하 만국에 선언하며 또 증언하노라.
근역청구(槿域靑邱·우리나라)는 타인의 식민지가 아니며, 단군의 자손 고려의 민족은 남의 노예가 될 인종이 아닌 것이다. 나라인즉 동방 군자(君子)의 나라요, 민족인즉 선진한 선인(善人)의 민족인 것이다.
험란하여 나아갈 수 없는 운수를 당하여 정치가 오래 되고 삶이 어지러워질 때에, 밖에는 고래같이 삼키는 강한 이웃이 있고, 안에는 나라를 병들게 하는 간사한 도적이 있어, 5천 년의 신성한 역사와 2천만 예의의 민족과 5백 년 내려온 종사의 황족이 하루 아침에 인멸되니 조정에는 순국하는 신하가 있고, 초야에는 절개를 지켜 죽는 백성이 있으나, 황천(皇天)이 돌보지 아니하고 국민이 녹(祿)을 받을 복이 없어 황제가 성명(聲明)에 갑자기 폐천(廢遷)당하는 욕을 만나고, 사민(士民)이 거의(擧義)에 문득 발이 섬멸되는 화를 당하니 세상에 범람하는 가혹한 법과 잔학한 대우와 노예로운 사역에 백성이 편안히 살 수가 없게 되었도다.
불평이 울면 법률이 강도와 같이 이를 찍으니 무릇 지아비의 충의의 혼이 잔인한 칼날 아래 소멸된 자가 그 몇 천 몇 만인가. 한을 머금고 고통을 씹으며 섶에 누워 쓴 쓸개를 맛봄이 10개 성상을 겪었더니라.
음(陰)이 극(極)하면 양(陽)이 돌아오고 음양이 조화되어 사물이 이치에 통하는 것이 소멸될 수 없는 것은 하늘의 이치의 좋은 운수이며, 죽음에 처하여 사랑을 바라고, 오래 굽히고 있으면 일어날 것을 생각하는 것은 사람의 도리에 있어서 지극한 감정인 것이니, 세계 개조와 민족 자결의 의논이 천하에 높이 오르고 우리 나라의 독립과 우리 민족의 자유의 소리가 우내(宇內)에 가득 넘치는지라, 드디어 3월 1일에 독립을 선언하고 4월 10일에 정부를 건설하였도다.
저 미련하여 도덕을 모르는 일본이 시세(時勢)의 추이를 돌보지 아니하고, 다만 표범이나 이리의 야만성을 구사하여 압박과 억제를 크게 마음대로 행하니 백수(白手)의 도중(徒衆)을 총으로 쏘아 죽이고 성읍과 촌락을 불질러 태우니 이것이 인류의 양심으로 감당해 참을 바일까. 우리 민족의 단충(丹衷)과 열혈은 결코 이 비정리적(非正理的)인 압박에 감축될 바가 아니요, 더욱더욱 정의와 인도로써 용감히 나아가고 매진(邁進)할 뿐이로다. 만일 일본이 끝내 과오를 뉘우침이 없다면 우리 민족은 부득이 3월 1일의 공약에 의하여 최후의 1인까지 최대의 성의와 최대의 노력으로 혈전(血戰)을 불사코자 이에 선언하노라.
대한민국 원년 11월 조선 민족 대표
여기에 연서(連署)한 사람은 의친왕 이하 두 사람(김가진·전협) 외에 양정(楊楨)·이정(李政)·김상열(金商說)·정상무(鄭相武)·백초월(白初月)·최전구(崔銓九)·조형구(趙炯九)·김익하(金益夏)·정설교(鄭卨敎)·이종춘(李種春)·김세응(金世應)·정의남(鄭義南)·나창헌(羅昌憲)·한기동(韓基東)·신도안(申道安)·이신애(李信愛)·한일호(韓逸浩)·박정선(朴貞善)·노홍제(魯弘濟)·이직현(李直鉉)·이내수(李來修)·김병기(金炳起)·이겸용(李謙容)·이설후(李雪吼)·신태련(申泰鍊)·신형철(申瑩徹)·오세덕(吳世德)·정규식(鄭奎植)·김홍진(金宖鎭)·염광록(廉光祿)[157]
11월 28일 조선민족대동단은 이강과 33인의 민족대표 명의로 제2 독립선언서(조선민족대동단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망명 시도·대동단 독립선언서 서명 부정 기록
1919년 11월 24일 일제는 이강 공의 상해 망명 기도와 관련하여 신문조서를 기록하였다.
이강 공은 평소 마음이 평온하지 못하였고, 또 누차 외유(外遊·외국에 나가려 함) 뜻을 측근에게 누설한 일이 있었다. 이에 불령(不逞)의 무리들은 공을 옹립하여 국권회복운동에 종사하게 하면 양반 유생은 물론 조선 내외 인민의 신용을 크게 얻을 수 있음을 보고, 은밀히 공을 유인하여 데려낼 계획이 있었다. 공은 평소 주색을 가까이하고 행동이 자주 상궤를 벗어났으며, 또 즐겨 시정의 잡배들과 왕래하였다. 특히 금년 봄 독립 소요의 수괴인 손병희와는 은밀히 회합하여 모의하였고, 손이 체포되자 공은 자못 낭패한 기색이 있었다고 한다.
최근 불령의 무리가 공을 유인하여 상해로 달아나려 한다는 풍설이 있으므로, 경기도 제3부는 엄중히 공저 부근을 경계하였다. 그런데 공은 11월 9일 오후 10시경 종자 김삼복을 데리고 은밀히 그 저택을 빠져나가 소재가 분명하지 않게 되었다. 이에 경보를 사방에 발하고 극력 수사한 끝에 마침내 11일 오전 11시 30분경 중국 안동 정차장 구내 밖에서 공 및 동행자 정남용을 발견하여 경성으로 보호 연행하였다. 동시에 이재호 외 수명이 경성 초음정에 잠복해 있음을 알고, 12일 미명 초음정 192번지 이관수의 집에서 이재호를 체포하였다. 또 불령자들이 경성 창의문 밖 산복의 민가에 있음을 탐지하여 같은 날 오후 4시 반 동창률, 정운복, 김삼복 3인을 체포하였다. 아울러 동창률의 소지 권총 및 가택을 수색하여 불온문서와 그 원고 및 인쇄기 1대를 발견 압수하였다. 이어 19일에 이르기까지 거괴 전협 이하 공범자 수명을 체포하였다. …(중략)…[158]
1919년 12월 조선민족대동단 신문조서에서 이강 공은 망명 시도와 조선민족대동단 선언서(제2 독립선언서)에 대해 부정하였다.
「신문조서 1」
…(중략)… 그것은 기억에 없는 일이다. 김춘기(金春基)로부터 들은 일이 있는 강석룡(姜錫龍)의 이야기에 제2회 독립선언서인가에 나의 명의를 실었다고 하는 것이기에 나는 「그것은 괘씸하다. 내가 적어도 서명한다고 하면 당당하게 할 것인데 승낙하지 않은 것을 이름을 도용하는 것은 못된 짓이라」고 책했더니 그 후 배부를 중지했다는 것이었으나, 나는 본 일이 없다.[160]
…(중략)…
이강 공:
북문(北門) 밖의 민가에 도착한 것은 오전 3시경의 일이었는데, 나는 정운복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러는 가운데 날이 밝았고, 그 사이 전협(全協)등은 무엇인가 계속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오늘 이곳을 출발하여 안동현(安東縣)으로 가 그곳에서 9일 가량 기다렸다가 배를 타고 가는 것이 좋겠다든가, 상해(上海)로 사람을 보내 내가 상해(上海)에 도착했다는 취지의 전보를 이곳을 향해 띄워 당국의 주의를 다른 방면으로 집중시켜 두고 그 후에 가기로 하는 것이 좋겠다든가, 김가진(金嘉鎭)을 보낼 때에도 배에 태워 보냈다든가, 김가진(金嘉鎭)에게는 이(李) 시종이 권하여 3천 원을 주었다든가 하고 있었다. 그리고 전협(全協) 등은 정운복과 나를 동행시키지 않도록 하면이라고 하는 것 같았으므로 그들이 없을 때에 나는 정운복에게 「꼭 나와 동행해 달라, 그렇지 않으면 사정이 좋지 않다.」고 말했던 것이다.<br/
경장삼랑(境長三郞):
그 민가를 나와 수색(水色) 정거장에서 승차하여 안동현(安東縣)으로 가는 것은 어떠한 이야기가 있어 정한 것인가.
이강 공:
아무리 내가 귀가하려고 하여도 들어먹히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어디까지엔가 가서 기회를 보아 돌아가기로 할 작정이었다. 그리하여 정운복(鄭雲復)은 동행시키지 않는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아무튼 우선 그곳을 나와 안동현(安東縣) 쪽으로 가기로 하였던 것이다. …(중략)…
경장삼랑:
제2회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니 증인에게 이름을 내도록 하라는 교섭이 있었던 일은 없는가.
이강 공:
없었으나, 내 승낙없이 내 이름을 늘어놓은 선언서를 낼 계획을 하는 자가 있다는 것으로, 내가 이곳을 출발하기 전 발표할 계획으로 되어 있던 것을 출발 전에 발표하면 떠들어댈 우려가 있다 하여 내가 출발하기까지 강석룡(姜錫龍·본명 강태동)이 제지했다는 것을 김춘기(金春基)로부터 들어 안 일이 있다. 그때 나는 자신이 이름을 내는 것을 승낙하지 않은 것이니 그러한 것은 아무리 발표해도 상관없으므로 「내려면 내라고 하라」고 말하였다. 내 생각으로는, 그렇게 내 이름을 낸다고 하면 내가 곤란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나를 위협할 작정은 아니었는가 생각된다.
경장삼랑:
그때 그 선언서의 문의(文意) 및 기안자에 대한 것은 듣지 못했는가.
이강 공:
듣지 못하였다.
(이때 대정大正 8년 형刑 제4429호의 증거품 령領 제1404호의 3을 보이다)
경장삼랑:
증인은 이 선언서를 본 일이 없는가.
이강 공:
지금 처음 본 것으로, 전에는 본 일이 없다. …(중략)…[159]
「신문조서 2」
조사관 천엽료(千葉了)가 대동단에 대해 진술하라고 하자 이강 공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 것으로 기록되었다.[161]
…(중략)… 참으로 일신 상의 일을 말해 불평 같기는 하나, 내가 술을 마시거나 빚을 지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핀잔을 받는 것 같은 행동을 하는 것도 모두 나쁘다는 것은 알고 있으나, 괴로운 심정을 어떻게 할 수 없어 대개는 술 때문에 전후를 기억하지 못하며, 차용금에 관해서는 경제 관념이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많이 이익을 빼앗기고 나의 얻는 바가 없는 것도 알고 있지만 난폭하게도 뒤에 정리를 해 달래고 있다. 물론 경제 상에 관해서는 예산 상 허용되지 않는 것도 안다. 그래도 너무 그 방법이 냉정하여 나로서는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아무쪼록 적당한 보호의 방도를 세워 유쾌하게 지낼 수 있도록 바란다. 나는 어려서 어머니(귀인 장씨)와 헤어져 모후(명성황후)에게 괴로움을 받았고 다음에는 똑같이 서모(순헌황귀비)에게 억압 당했으며, 이어서 지금은 또한 이왕직(李王職) 중의 간사한 놈 때문에 사람이 모르는 고통을 맛보고 있다. 나를 어리석다고 하겠으나 선악의 차별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나의 불평의 연유 하는 바를 통찰 하여 잘 중재(仲裁)해 주기 바란다. 또 본 건의 처벌에 있어서도 아무쪼록 관대한 처분을 절망(切望)한다.
조선민족대동단 사건은 재판에 회부되었다. 전협(全協)은 징역 8년[162], 최익환은 6년을 언도받았다. 정남용, 이재호, 권태석 등 권련자 20여 명도 최고 5년에서 최하 2년까지 언도받았다.[163] 김가진은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 정부 고문을 역임하였다.[164] 이강 공은 조선총독부 부속 녹천정(綠泉亭)으로 옮겨져 외부인과의 만남을 차단당하였고, 1919년 12월 30일 이강 공저로 돌아가게 되었다.[165]
1920년대
사이토 마코토에게 보낸 서한
1920년 이강 공이 조선총독부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에게 서한을 보낸 기록이 나타나 있다.
수상 각하본인은 귀하께서 본인이 중국에 갈 당시 귀하의 경찰에 의해 어떻게 제지되었는지를 알려 드렸던 본인의 앞서의 서한들을 잘 받아보셨는지 모르겠읍니다. 수일 전에 경관들이 본인에게 와서 즉각적으로 동경으로 갈 것을 명령했읍니다. 그들은 또한 본인이 자의에 의해 동경에 간다는 것을 공표하도록 엄명했읍니다. 본인은 이 모든 행동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읍니다.
수상 각하, 본인은 본인의 왕자의 지위를 거부하며 본인의 유일한 희망은 일개의 시민으로서 간주되길 원하면서 여생을 그렇게 보내고 싶다는 것을 이 기회에 폐하(다이쇼)께 알려 드리기 위해 이 기회를 이용하고자 합니다.[166]
본인은 한국의 한 왕이며, 그보다 일본의 황족이라는 것을 귀하에게 상기시키고자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은 귀하의 경찰에 의해서 불량자처럼 취급받았읍니다. 본인은 아직도 귀하의 경관들이 본인에게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동경에 가도록 강요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읍니다. 본인은 각하께서 이 경관들의 행동에 대해 충분한 설명을 본인에게 해 주실 것을 간청합니다.
천도교 잡지 「개벽」의 세태비평
…(중략)… 이왕가 왕족들은 어떠한지 좀 말하고 그만 두자. 이 씨 중에 이강 공(李堈 公)은 다 아는 일이니까 강론할 필요도 없거니와 이지용·이재각·이해승·이재극 등 여러 사람들이 다 남 부럽지 않게 한참 첩 놀이를 잘하였다. …(중략)…[167]
한성은행 대주주
이강 공은 1921년·1923년·1925년·1927년 한성은행(漢城銀行)의 대주주로 기록되었다. 대주주는 이왕직 장관 및 일본인을 제외하고 이준 공(영선군)·고희경·민영휘·박정양·이달용·이완용·이윤용·이항구·한창수 등 대부분 친일반민족행위자였다.[168]
동의기념비(同義紀念碑)
동의기념비(同義紀念碑)는 1906년(고종 43)부터 1909년(순종 3)까지, 1910년부터 1914년까지의 의병 명단을 기록한 비석으로 1929년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산외면 오공리에 세웠다. 비석 전면에는 하청사(河淸祠)를 건립하고 비석을 세우는데 동의한 최익현(崔益鉉)을 비롯하여 유림 264명의 이름을 새기고 뒷면에는 비석을 건립한 뜻을 새겼다. 비문(碑文)은 이강이 썼다. 하청사(河淸祠)는 1928년 이희봉·권영모 등 유림 34인이 발의하여 일본에 항거한 애국지사 최익현·임병찬·오계업·박재규·박재구 등 5인을 향사하기 위하여 하청사를 건립하였다. 하청사는 1950년 6·25 전쟁 때 소실되었고 현재 동의기념비만 남아 있다.[169]
1920년대 활동
1921년 4월 이강 공은 조선군사령부 육군 중장으로 임명되었다.[170][171] 1922년 1월 조선호텔로 조선총독부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 實)·조선총독부 정무총감 미즈노 렌타로(水野 錬太郎) 등을 초대하여 만찬을 개최하였다.[172] 7월 조선호텔로 아리요시 주이치(有吉 忠一)·부국장 등을 초대하여 만찬을 개최하였다.[173] 11월 일본제국 육군대연습에 참여하고[174] 다이쇼 일왕 부부를 만나게 되었다.[175] 또한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아리요시 주이치(有吉 忠一)를 고이시카와 고라쿠엔(小石川後楽園)으로 초대하여 만찬회를 개최하였다.[176] 11월 28일 일제의 궁중 죽간(竹間)에서 데이메이 왕후·이왕세자(영친왕) 등을 만났다.[177] 29일 후시미노미야 사다나루 친왕(伏見宮貞愛親王)이 이강 공·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秩父宮雍仁親王)·간인노미야 고토히토 친왕(閑院宮載仁親王)·구니노미야 구니요시 왕(久邇宮邦彦王)·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 왕(梨本宮守正王)·이왕세자(李王世子) 등을 초대하여 만찬회를 개최하였다.[178] 12월 도쿄에서 공부하고 있는 서장자 이건과 이준 공(영선군)의 양자로 출계한 이우를 만나고 귀국하였다.[179] 1923년 2월 아리요시 주이치(有吉 忠一)를 조선호텔로 초대하여 만찬을 개최하였다.[180] 1924년 1월 8일 일제로부터 훈1등 대훈위 국화대수장(勳一等 大勳位 菊花大授章)을 수여받았다.[181] 1월 히로히토의 결혼식을 참석하기 위해 도쿄로 향하였다.[182] 2월 히로히토의 결혼식이 끝나고 궁내부대신 마키노 노부아키(牧野伸顯)가 초대한 만찬회에 참석한 뒤[183] 귀국하였다.[184] 2월 다이쇼 일왕과 메이데이 왕후가 요양 중인 누마즈 별장 근처에 큰 화재가 나자 이왕(순종)·이강 공·조선총독부 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안위를 걱정하며 전보를 보내게 되었다.[185] 8월 이강 공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시모오카 주지(下岡 忠治)를 조선호텔로 초대하여 만찬회를 갖게 되었다.[186]
1925년 4월 이강 공·이왕직 장관 민영기·조선귀족 대표 이항구 등은 다이쇼 일왕과 메이데이 왕후의 은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도쿄로 향하였다.[187] 5월 도쿠가와 이에사토(德川家達) 종질료(宗秩寮·궁내성 산하기관) 총재가 자택으로 이왕세자(영친왕)·이왕세자비(이방자)·이강 공·덕혜옹주를 초대하여 원유회를 개최하였다.[188] 6월 이강 공은 동소문(혜화문) 밖에서 군사령관·사단장·사령관·대장 등과 원유회(遠乘會)를 가지게 되었다.[189] 1926년 3월 이왕세자(영친왕)가 이왕(순종)의 병문안을 하기 위해 귀국하였고, 이강 공은 조선호텔로 이왕세자·스즈키 소로쿠(鈴木莊六)·이왕직 사무관 등을 초대하여 연회를 개최하였다.[190] 4월 적형 순종이 사망하였고 5월 순종과 순명효황후의 유릉지를 시찰하였다.[191] 11월 사가현(佐賀縣) 내에서 열리는 대연습을 참관하게 되었다.[192] 1927년 6월 이강 공은 지병 류머티즘의 통증으로 전의(典醫) 안상호를 부르게 되었다.[193] 1929년 4월 불국사를 시찰하였고[194]
1930년대
공(公) 작위 은거(隱居)
1927년 이강 공과 요코하마(横浜)에 거주하는 러시아인의 염문설이 발생하였다. 러시아인은 과거 이강 공에게 약속 받았던 위자료 1만 엔을 요구했지만, 이강 공저에서 거절하자 가나가와현(神奈川県) 지사에게 진정서를 제출하게 되었다. 이에 궁내성이 내사를 한 결과 제국호텔 매점 직원 고바야시 아야코(小林アヤ子) 외에 여러 명과 염문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고 하였다. 결국 궁내성은 이강 공의 은거를 검토하게 되었다.
1929년 정무총감 고다마 히데오(兒玉 秀雄)는 이강 공에게 이건이 지난해 성년에 이르렀으나 규정상 전하의 존칭을 받을 수 없으므로 이번 기회를 통하여 은거를 권유하였다. 이강은 승인하지 않았고 일본 여행을 떠난 뒤 7개월이 지나도록 조선으로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195] 이후 일제는 이강이 이왕가로부터 30만 원을 받아 측실 수인당 김흥인·수덕당 이희춘·양용희·김금옥, 서자녀 이주(이인용 출계)·이곤(훗날 의친왕비 자녀 입적)·이영(이기용 출계)·이진(이기용 출계)의 처우·재정 정리비로 충당하라고 하였다. 이어서 이강이 벳푸(別府)에 영주(永住)할 뜻으로 이왕가로부터 3만 5천 원을 받아 가옥을 신축할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이건은 공(公)위를 세습 하면 세비가 아닌 어장 수입·기타 수입으로 재원을 마련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196]
1930년 이강 공은 지병을 이유로 쇼와(昭和) 일왕에게 은거(隱居)를 청원하였고, 왕황족회의 결의를 통하여 은거를 허가 받았다. 이강은 일제 군사령부를 면직하였고 공족으로서의 의무가 면제되었다.[197] 6월 12일 이강은 서장자 이건에게 공(公) 작위를 승계하였다. 이때 공족(公族)으로서의 지위와 전하의 경칭은 유지되었다.[198][주석 2] 또한 이강 공저(李堈 公邸)는 이건 공저(李鍵 公邸)가 되었고, 1931년 이강의 별장 성락원(현 서울 성북동 별서)의 소유자는 이건으로 변경되었다.[199]
1930년대 활동
이강은 1930년 6월 3일 일본 포드 공장을 방문하였고[200] 8월 귀국하였다.[201] 1931년 서장자 이건의 결혼식 참석으로 도쿄(東京)를 다녀왔고 벳푸(別府)에서 지내기도 하였다.[202] 1933년 5월 일본에서 서울 영등포역으로 귀국하여[203] 조선호텔에서 머물렀다.[204] 5월[205]과 9월 서울로 돌아왔고[206] 백천온천을 다녀왔다.[207] 1934년 서장녀 이영(李玲)의 결혼식 참석으로 귀국하였다. 5월 도쿄로 가서[208] 6월 서울로 돌아왔고[209] 이어서 부산을 다녀왔다.[210] 1935년[211]과 1936년[212] 일본을 다녀왔다.
1940년대
활동
1940년 4월 왕공가 방문 차 동경으로 가서[213] 그달에 귀국하였다.[214] 9월 서종고숙(庶從姑叔) 금릉위 박영효의 묘비문을 지었다.[215]
광복 이후
이강의 김구 예방
1945년 10월 이강은 이승만에게 찾아가 "광복을 위한 노력에 감사하고 앞으로 대한민국을 위해 계속 활동해달라."라고 전하였다. 이어서 "자신은 일평민(一平民)으로 대한민국을 위해 노력하겠다."라고 하였다.[216] 11월 23일 김구·김규식·이시영·김상덕·유동열·엄항섭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들은 오후 4시 경 김포비행장에 도착하자 곧장 숙소(최창학의 집)로 향하였다. 이때 숙소에 미리 방문한 이승만과 잠시 이야기를 했을 뿐 모든 면회를 사절하였다.[217] 12월 이강은 경교장으로 가서 김구를 20여 분 만나게 되었다.[218]
애국협회 회장 추대
1946년 시급한 민생 문제를 해결하고 애국사상을 고취하고 계몽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애국협회(愛國協會)가 결성되었다.[219] 이강은 회장에 추대되었다.[220]
사동궁 매각
1947년 왕공족 제도가 폐지되었다. 그해 박응래(朴鷹來)·김선태(金善泰)·최시화(崔時化) 등은 이강에게 사동궁(寺洞宮)이 적산(敵産) 취급을 당한다고 하였다. 이강은 당시 천수백만 원하는 사동궁을 백오십만 원에 매각하였다.[221] 곧이어 들어온 미군정이 사동궁은 국유 재산이라 매각이 부당하다고 했지만 대법원은 묵살하였다. 이강은 사동궁을 되찾기 위해 박응래·김선태·최시화 등을 고소하였다. 하지만 박응래와 최시화가 결탁하고 의친왕이 선임한 변호사를 내세워서, 이강에게 고소를 취소하라고 공갈 협박하였다. 1948년 이강은 고소를 취소하였다.[222] 이후 안동별궁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민족정기의 심판》
민족정기(民族正氣)의 심판(審判) 서문서(序)
6천만의 눈동자가 주시(注視)하고 있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활약(活躍)이 점차 활발화하여 가고 있는 이때에 있어 친일파 민족반역자(親日派 民族叛逆者)들의 과거죄악사(過去罪惡史)를 더듬어 보는 것도 결코 무의미(無意味)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소책자(小冊子)를 발간(發刊)하게 된 동기(動機)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 소책자가 민족정기(民族正氣)를 양양(昻揚)하는 데 있어 또한 매국(賣國)의 무리들의 정기(正體)가 어느 정도 밝혀졌다면 이에 더한 기쁨이 없으며 앞으로 더욱 세밀(綿密)한 조사(調査)를 진행시켜 2집 3집 계속하여 출판(出刊)하려 한다.
단기(檀紀) 4282년 2월
편집자 일동(編輯者 一同)[223]
「왕족급공족(王族及公族)」
…(중략)…
이건 공가
이건 공: 이강 제1남 대훈위 일본 제국 육군 중좌
성자: 이건 공비 백작 광교진광 가족(송평반 제1녀)
…(중략)…
이강: 고 이태왕(고종) 제5남 대훈위
김 씨(의친왕비): 이강 비 고 남작[주석 3] 김사준 제1녀
이우 공가
이우 공: 이강 제2남 대훈위 육군 소좌
찬주(박찬주: 이우 공비 후작 박영효 손(고 박일서 제1녀)
…(중략)…
이중에서도 고종황제의 매부되는 조정구(趙鼎九)씨는 퇴작할 뿐 아니라 한일합병의 조서와 유고문을 찢어 버리고 자살까지 계획하였으나 가족들에게 발견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중략)…[224]
1948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민족정기(民族正氣)의 심판(審判)》을 발간하였다. 이건 및 이우의 자녀들·순정효황후(사시)·영친왕(사시 의민황태자), 이방자(사시 의민황태자비)·이구(사시 회은황세손)·흥친왕비 이씨·영선군의 부인 정경부인 김씨도 기록되었다.
사망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부산 동래 포교당으로 피난을 떠났다. 서모 광화당 귀인 이완흥과 삼축당 김옥기와 피란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정부 지원금이 끊겨서 피죽으로 겨우 연명하였다. 1953년 휴전 협정 이후 안동별궁으로 돌아왔다. 동년 아들 이곤이 토건업자 등과 공모해 인장을 위조하고 명동 소재의 옛 조선 왕실 소유 토지와 주택을 700만 환에 매각했다가 사기 혐의로 체포되었다.[225] 징역 3년을 구형 받았으나, 7월 서울지방법원 제4호 법정에서 진행한 「구왕궁재산 부정처분사건」재판에서 6·25 전쟁 전까지 국가에서 지급한 보조금을 받지 못해 생활고를 겪고 있다는 점이 고려되어 징역 2년에 집행유예 5년을 언도받았다. 재판장은 "왕족이라고 해서 특별한 은전을 베푼 것이 아니고 사회적인 동정이 그에게 집중되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곤은 서대문형무소 수감 2개월 만에 출소하였다.[226]
1955년 천주교로 개종하고 세례명 비오(Pius)를 받게 되었으며, 병석에서 부통령 장면(세례명 요한)을 대부로 하여 영세하였다.[227] 8월 16일 새벽 4시 17분[228] 의친왕 이강은 노환과 영양실조로 인하여 향년 78세를 일기로 안동별궁에서 사망하였다.
의친왕묘(義親王墓)
1955년 초장지는 양주 화양리(현 서울 광진구 화양동)이고 1965년 사친 귀인 장씨묘와 함께 서삼릉 경내로 이장되었다. 1996년 딸 이공(이해경)의 노력으로 의친왕묘와 의친왕비묘를 홍릉과 유릉 경내로 옮기고 합장하였다. 묘에는 상석, 향로석, 장명등, 망주석 등을 배치하였다.[229]
가족 관계
본인
| 출생 | 사망 | |
|---|---|---|
| 의친왕 義親王 | 1877년 3월 30일 (음력 2월 16일) | 1955년 8월 16일 (음력 6월 29일)(78세) |
부모
| 본관 | 성명 | 생몰년 | 부모 | 비고 | ||
|---|---|---|---|---|---|---|
| 부 | 고종 | 전주 | 희 㷩 | 1852 - 1919 | 문조 文祖 신정익황후 神貞翼皇后 사친 헌의대원왕 獻懿大院王 | 조선 제26대 국왕 대한제국 초대 황제 |
| 모 | 명성태황후 민씨 明成太皇后 | 여흥 | 1851 - 1895 | 여성부원군 민치록 驪城府院君 閔致祿 한창부부인 한산 이씨 韓昌府夫人 韓山 李氏 | ||
| 사친 | 귀인 장씨 貴人 張氏 | 덕수 | 1838 - 1887 | |||
친왕비
| 본관 | 성명 | 생몰년 | 부모 | 비고 | |
|---|---|---|---|---|---|
| 의친왕비 義親王妃 | 연안 | 김덕수 金德修 | 1880 - 1964 | 김사준 金思濬 창원 황씨 昌原 黃氏 | 연원군부인 延原郡夫人 |
측실
의친왕비는 의친왕의 측실 수관당 정씨·수인당 김흥인·수덕당 이희춘에 대해 "내가 친히 기른 사람들이고 내 좋은 동무들이다."라고 하였다.
| 당호 | 성명 | 생몰년 | 부모 | 비고 | |
|---|---|---|---|---|---|
| 1 | 수관당 修觀堂 | 정씨 鄭氏 | ? - 1912[230] | ||
| 2 | 수인당 修仁堂 | 김흥인 金興仁 | 1884 - ? | 김일선 金一善 이씨 李氏 | |
| 3 | 수현당 修賢堂 | 정운석 鄭雲石 |
| ||
| 4 | 수길당 修吉堂 | 박영희 朴英喜 | 1891 - ? | 박영록 朴永祿 강씨 姜氏 [236] |
|
| 5 | 수덕당 修德堂 | 이희춘 李喜春 | |||
| 6 | 수완당 修完堂 | 김정완 金貞完 | 1894 - ? | 김성환 金聖煥 주세창 朱世昌[237] |
|
| 7 | 수경당 修慶堂 | 김창희 金昌熙 |
| ||
| 8 | 수정당 修正堂 | 정성진 鄭垶鉁 |
| ||
| 9 | 조병숙 曺秉淑 | ||||
| 10 | 함개봉 咸開鳳 | ||||
| 11 | 김혜수 金蕙洙 | ||||
| 12 | 홍정순 洪貞順 | ||||
| 13 | 김금주 金錦珠 | 1894 - ? |
| ||
| 14 | 농주 弄珠 |
| |||
| 15 | 미상[241] |
| |||
전 측실
| 당호 | 성명 | 생몰년 | 비고 | |
|---|---|---|---|---|
| 1 | 향란 香蘭 |
| ||
| 2 | 이연연 李姸娟 | |||
| 3 | 강선옥 姜善玉 |
| ||
| 4 | 오소홍 吳小紅 | 1892 - ? |
| |
| 5 | 장학선 張鶴仙 | 1906 - 1970 |
| |
| 6 | 이유색 李柳色 | 1900 - ? | ||
| 7 | 이유앵 李柳鶯 | 1905 - ? |
| |
| 8 | 수은당 修恩堂 | 송은점 宋恩点 |
| |
| 9 | 수화당 修和堂 | 후지타 마사코 藤田昌子[248] | ||
| 10 | 김응숙 金應淑[252] |
| ||
| 11 | 양용희 梁龍喜[253] | |||
| 12 | 김금옥 金今玉 |
| ||
| 13 | 김금덕 金今德 | 1909 - 1975 |
| |
자녀
1965년 이전 의친왕비는 의친왕의 생존 자녀가 26명이라고 하였다.[255] 의친왕의 공식 자녀는 21명(12자 9녀)이다.
의친왕과 의친왕비 사이에 친생자녀는 없고, 이곤과 이공(이해경)이 의친왕비의 자녀로 입적(入籍)되었다.
아들
| 족보명 | 아명 | 항렬명 | 생몰년 | 사친 | 출계 비고 | |
|---|---|---|---|---|---|---|
| 1 | 이건 李鍵 | 용길 勇吉 | 1909 - 1990 | 수관당 정씨 |
| |
| 2 | 이우 李鍝 | 성길 成吉 | 1912 - 1945 | 수인당 김흥인 | ||
| 3 | 이방 李鎊 | 흥길 興吉 | 해진 海鎭 | 1914 - 1951 | 수현당 정운석 | |
| 4 | 이창 李鎗 | 창길 昌吉 | 해직 海直 | 1915 - 1986 | 조병숙 |
|
| 5 | 이주 李鑄 | 수길 壽吉 | 1917 - 1982 | 수인당 김흥인 | ||
| 6 | 이곤 李錕 | 명길 明吉 | 1919 - 1984 | 모친 의친왕비 사친 수인당 김흥인 |
| |
| 7 | 이광 李鎤 | 형길 亨吉 | 해청 海淸 | 1920 - 1952 | 수은당 송은점 |
|
| 8 | 이현 李鉉 | 경길 敬吉 | 1922 - 1996 | 수경당 김창희 | ||
| 9 | 이갑 李鉀 | 충길 忠吉 | 해룡 海龍 | 1938 - 2014 | 함개봉 | |
| 10 | 이석 李錫 | 영길 英吉 | 해석 海錫 | 1941 - 생존 | 홍정순 | |
| 11 | 이환 李鐶 | 문길 文吉 | 해선 海瑄 | 1944 - 생존 | 김혜수 | |
| 12 | 이정 李鉦 | 정길 定吉 | 해준 海俊 | 1947 - 생존 | 홍정순 | |
| - | 이심세[256] | 1906 - 1908 | 수화당 후지타 마사코 | |||
| - | 미상[257] | 1916 - ? | 수길당 박영희 | |||
딸
| 족보명 | 아명 | 항렬명 | 생몰년 | 사친 | 출계 비고 | |
|---|---|---|---|---|---|---|
| 1 | 이영 李玲 | 길순 吉順 | 해완 海琓 | 1918 - 1981 | 수덕당 이희춘 | |
| 2 | 이진 李珍 | 길운 吉雲 | 해원 海瑗 | 1919 - 2020 | ||
| 3 | 이찬 李瓚 | 길련 吉蓮 | 해춘 海瑃 | 1920 - 2009 | 수완당 김정완 | |
| 4 | 이숙 李琡 | 길영 吉英 | 해숙 海琡 | 1920 - ? | 수길당 박영희 | |
| 5 | 이공 李玜 | 길상 吉相 | 해경 海瓊 | 1930 - 생존 | 모친 의친왕비 사친 김금덕 |
|
| 6 | 이장 李璋 | 희자 禧子 | 1940 - 2015 | 김혜수 | ||
| 7 | 이용 李瑢 | 해란 海蘭 | 1944 - 생존 | 홍정순 | ||
| 8 | 이현 李現 | 해련 海蓮 | 1950 - 생존 | |||
| 9 | 이민 李玟 | 1950 - 생존 | 김혜수 | |||
| - | 미상[258] | 1918 - ? | 수길당 박영희 | |||
손자녀
| 성명 | 출생 | 부모 | 배우자 | 비고 | |
|---|---|---|---|---|---|
| 1 | 이준 李準 | 1961 | 이곤 李錕 황경생 黃庚生 | 김성자 金成子 | |
| 2 | 이원 李源 | 1962 | 이갑 李鉀 이경숙 李慶淑 비공식 양부모 이구 李玖 아리타 키누코 有田絹子 | 최희정 |
|
의친왕이 등장한 작품
TV 시리즈
참고 자료
관련 서적
- 《나의 아버지 의친왕》(1997년 06월 01일), 이해경 저, 진.
- 《조선의 왕실과 외척》(2003년 04월 27일) 박영규 저, 김영사.
-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2004년 08월 20일), 이덕일 저, 김영사.
- 《제국의 후예들》(2006년 05월 25일) 정범준 저, 황소자리.
- 《대한제국 황실 비사》(2007년 08월 06일) 곤도 시로스케 지음, 이연숙 옮김, 이마고 펴냄.
- 《의친왕 전하》(2008년 08월 15일), 이효재 저, 의친왕숭모회.
- 《의친왕 이강》(2009년 07월 23일), 박종윤 저, 하이비전.
- 《황제 1,2,3 - 제국의 부활》(2009년 12월 15일) 문영 지음, 평민사 펴냄.
- 《의친왕과 황실의 독립운동:기록과 기억》(2022년 10월 14일) 경운박물관·의친왕기념사업회 지음.
같이 보기
각주
- 1967~1972년, 국판, 14.8×21.0, 각 900쪽, 6책 고종시대사는 1863년 고종 즉위년부터 1910년 일제에 강점될 때까지의 편년체 역사서이다. 조선왕조실록·비변사등록·승정원일기·일성록 등의 연대기와 각 관아 기록, 외교 문서 및 개인 저술 등을 자료로 편찬하였다. 일제강점기에 편찬된 고종실록, 순종실록에 오류가 많아 조선왕조실록을 계승한다는 의도로 편찬된 자료집으로 1967~1972년에 6책으로 간행되었다. 날짜별로 중요한 사건을 선별하여 기사를 만들고 이를 요약한 제목을 붙였다. 각종 사진 자료도 함께 제공하고 있다.(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고종시대사.)
- 1933년 작성된 『이강공계제일세이강공족보』는 이강을 ‘제1세 이강공’으로 계속 수록하였다.(출처: 한국학연구원 디지털 장서각)
- 1915년 《조선보안법》 위반 사건에 연루되어 남작 작위를 박탈당하였다.
- 의친왕의 서1자 이건은 1955년 일본으로 귀화하였고 1982년 이전 다시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였지만, 이건과 그 자녀들은 후손들과 교류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서차자 이우·서3자 이방·서4자 이창·서5자 이주는 출계 하였다. 서6자 이곤은 후일 의친왕비의 아들로 입적되었고 의친왕가를 이었다. 이곤의 장자 이수는 조졸하였고, 차자 이준이 실질적으로 장자가 되었다.
- “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털 장서각, 이강공계제이세이건공족보(李堈公系第貳世李鍵公族譜)”.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청 소식지, 국가유산사랑, 일제강점기 선승 만공월면과 의친왕 이강의 인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근현대인물자료, 이강(李堈).
- “국립고궁박물관, 소장품 안내, 의친왕 이강 筆 행서시고.”.
- “국가기록원 조선총독부기록물, 이강공 전하 동정에 관한 건(제10보), 親戚 張寅根 ハ午前十時二十分.”.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고종 43년 4월 8일 양력 1/1 기사 / 1906년 대한 광무(光武) 10년, 의친왕 이강을 육군 부장에 임명하다.
- “매일신보, 1911년 1월 18일, 2면, 陸軍大將 李王澱下, "…(중략)… 陸軍中將 李堈 …(중략)…"”.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 47권, 고종 43년 4월 9일 양력 1/1 기사/ 1906년 대한 광무(光武) 10년, 의친왕 이강에게 대훈위 금척 대수 훈장을 수여하다.
- “国立国会図書館, 朝鮮紳士名鑑, 62/248.”.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매일신보, 1913년 4월 12일, 일한병합 기념장의 도착.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순종실록부록 15권, 순종 17년 1월 10일 양력 2/2 기사/ 1924년 일본 대정(大正) 13년, 이강 공 부부와 이희 공 비에게 훈위를 내린다는 궁내성의 통지가 있다.
- “한국진흥사업성과포털[한국학중앙연구원], 근현대 구(舊) 황실 관련 자료 조사 집성, 各種記念章裁可書・昭和大礼記念章裁可書・巻第一・皇族、京都諸式、外国人, "…(중략)… 왕족과 공족 중에서는 李王垠(영친왕), 李王垠妃 方子女王(이방자), 故李王妃 尹氏, 李堈公, 李堈公妃 金氏, 故李熹公妃 李氏, 故李埈公妃 金氏 등이 대례기념장의 수여 대상이었다.."”.
- “한국진흥사업성과포털[한국학중앙연구원], 근현대 구(舊) 황실 관련 자료 조사 집성(1), 帝都復興記念章授与人名索引・皇族・1,2,3画. "…(중략)… 1923년 9월 1일에 발생한 관동대지진의 피해 복구를 한 뒤, 1930년 8월 13일자 칙령 제148호 帝都復興記念章令에 따라서 관계자에게 수여되었다. 왕공족 중에서는 李王 垠(영친왕), 李鍵公, 李堈이 받았다. …(중략)…"”.
- “国立国会図書館, 官報 1941年 10月 23日, 26/42.”.
- “国立国会図書館, 出版年月日 1911年 1月, 有楽社, 日本之朝鮮, 8/86.”.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주한일본공사관기록·통감부문서, 駐韓日本公使館記錄 25권, 九 本省往機密 一·二, (14) 1905년 2월 17일, 義和宮의 진퇴에 관한 한국 황제(고종)의 의향 보고의 건.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28권, 고종 28년 12월 29일 기미 1/3 기사/ 1891년 조선 개국(開國) 500년, 왕자인 강에게 의화군의 작위를 봉하다.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동아일보 1964년 1월 17일, 영화와 비운의 구름다리 의친왕비의 생애 - 상.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 33권, 고종 32년 6월 2일 신미 2/2 기사/ 1895년 대한 개국(開國) 504년, 의화군 이강을 파견하여 아부리를 송별하게 하다.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 33권, 고종 32년 8월 25일 계사 3/3 기사 / 1895년 대한 개국(開國) 504년, 의화군 이강을 특파 대사에 임명하여 답례 방문을 명하다.
- 국사편찬위원회, 고종실록, 고종 32년 10월 2일 1/1 기사.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사료 고종시대사 21, 1897년(고종 34) 5월 25일, 조선 주재 일본 공사, 고종이 의화군이 박영효 등과 교류하는 것을 싫어하여 도미시킨 것임을 일본 외무성에 보고함.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사료총서, 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3, 1895년(고종 32) 10월 9일(음력 21일) 수요일.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사료총서, 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 3, 1895년(고종 32)10월 8일(음력 20일) 화요일.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주한일본공사관기록·통감부문서, 駐韓日本公使館記錄 25권, 九 本省往機密 一·二, (14) 1905년 2월 17일, 義和宮의 진퇴에 관한 한국 황제(고종)의 의향 보고의 건.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사료총서, 국역 나암수록 제4책, 전국의 백성들에게 보임, "병오년(1906, 고종 43) 3월 13일에 의화군(義和君)이 일본에서 나왔다. 곤전(坤殿)의 상사(喪事)가 난 뒤에 이준용(李駿鎔)과 일본에 들어갔다."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주한일본공사관기록·통감부문서, 駐韓日本公使館記錄 10권, 一. 本省來機密公信, (49) 義和宮·朴泳孝 등의 動靜報告.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독립신문(서재필) 1896년 7월 9일, 의화군 젼하 동경셔 신호 근쳐로 피셔 러 가셧다더라.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독립신문(서재필), 1897년 8월 31일, 의화군 뎐하 미국셔.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독립신문(서재필), 1897년 9월 28일, 와싱돈 신문에 셔광범씨 쟝 지낸 일을.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독립신문(서재필), 1898년 5월 16일, 의화군 뎐화셔 미국셔 나 불구에 일본 동경으로 오신다.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독립신문(서재필), 1898년 5월 28일, 근일에 궐와 의화궁에 젼보가.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사료총서, 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 4, 1897년(광무 1) 8월 17일 목요일, 날씨 변화무쌍.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사료 고종시대사 23, 1899년(고종 36) 3월 2일, "외부, 의화군의 학자금 액수를 확정하고 송금 방법을 알려줄 것을 학부에 요청함."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사료 고종시대사 21, 1897년(고종 34) 5월 9일, 5월 25일.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주한일본공사관기록·통감부문서, 駐韓日本公使館記錄 10권, 二. 和文電信往復控, (225) 日本에서 義和君 召還 件.
- 국사편찬위원회 승정원일기, 고종 37년 경자(1900·광무) 23일(임술·양력 8월 17일) 맑음 2번째 기사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주한일본공사관기록·통감부문서 15권, 三. 各領事館電報往來, (121) 체포된 活貧黨 頭目들의 陳述 內容에 관한 件.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1898년(고종 37) 12월 31일 양력 2번째 기사.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1907년(고종 46) 7월 11일 양력 3/3 기사.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사료 고종시대사, 1904년(고종 41) 3월 11일, "법부 대신 이지용, 황제 폐위를 모의한 일본 유학생 출신 장호익 등의 공술 내용을 보고함."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 44권, 고종 41년 3월 11일 양력 3번째 기사 "피고 장호익, 김형섭, 김희선, 김교선, 방영주 등의 공술을 보고하다."
- 한국사 인물 열전 3(한영우 지음|돌베개|2007) 260쪽.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김란사(金蘭史).
- 한국학중앙연구원, 근대 전환기 알렌 문서, 의화군 이강이 오하이오 대학을 떠나 워싱턴으로 가는 건.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주한일본공사관기록·통감부문서, 駐韓日本公使館記錄 18권, 二. 機密本省來, (1) 義和君의 負債에 관한 건.
- 한국학진흥사업성과포털, 근대 전환기 알렌 문서, 알렌이 조지아에게 델라웨어에 체류 중인 의화군의 재정문제 등에 대해 알리는 건.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주한일본공사관기록·통감부문서, 駐韓日本公使館記錄 26권, 一. 本省往電 一∼四, (50) 義和宮 유학문제에 관한 건.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 베이스, 주한일본공사관기록·통감부문서, 駐韓日本公使館記錄 25권, 九. 本省往機密 一·二, (14) 義和宮의 진퇴에 관한 한국 황제의 의향 보고의 건.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황성신문, 1905년 1월 24일, 義親王歸國.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황성신문, 1905년 2월 10일, 義王到日.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주한일본공사관기록·통감부문서, 駐韓日本公使館記錄 26권, 一. 本省往電 一∼四, (54) 義和宮 유학문제 續報(2).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주한일본공사관기록·통감부문서, 駐韓日本公使館記錄 26권一. 本省往電 一∼四, (58) 義和宮 유학문제 속보(3).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황성신문 1905년 3월 27일, 親王渡美.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대한매일신보(국한문), 1905년 8월 31일, 義王到日.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주한일본공사관기록·통감부문서, 駐韓日本公使館記錄 26권, 一. 本省往電 一∼四, (221) 한국 황제의 義和宮 귀국 一時 연기조치 건.
- 국사편찬위원회 승정원일기, 고종 41년 갑진(1904, 광무) 양력 4월 13일 8번째 기사.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사료총서, 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5, 1905년(광무 9) 10월 29일 일요일.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사료총서, 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 1905년(광무 9) 11월 1일(음력 10월 5일) 수요일, 비 오고 쌀쌀함.
- 국사편찬위원회 승정원일기, 고종 42년 을사(1905, 광무) 양력 3월 19일 맑음 3번째 기사.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료총서, 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 5, 1905년(광무 9) 10월 21일.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주한일본공사관기록·통감부문서, 統監府文書 1권, 八. 甲種外務部儀式, (3)統監 謁見의 상황.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고종시대사 6집, 光武 10年 4月 6日, 日本에 多年間 머물러 있던 義親王 堈이 歸國하다.
- 국사편찬위원회 승정원일기, 고종 43년 병오(1906, 광무) 3월 13일(경진, 양력 4월 6일) 맑음 13번째 기사.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고종 43년 4월 8일 양력 1/1 기사, 4월 9일 양력 1/1 기사.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고종 43년 7월 12일 양력 1/2 기사.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대한매일신보(국한문), 1906년 7월 10일, 義王遊覽.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대한매일신보(국한문), 1906년 7월 14일, 義王遊宴.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고종 43년 9월 2일 양력 1/3 기사.
- “国立国会図書館, 朝鮮紳士名鑑, 62/248.”.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대한매일신보(국한문), 1906년 10월 12일, 義王電達.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주한일본공사관기록·통감부문서, 統監府文書 1권, 六. 韓國施政改善에 관한 協議會 一·二·三, (8) 한국의 시정개선에 관한 협의회 제8회 會議錄.
- 국사편찬위원회 승정원일기, 고종 44년 정미(1907·광무) 3월 12일 3번째 기사.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사료 고종시대사 29, 1907년(고종 44) 06월 14일 "경시총감, 통감부 설치 후 고종이 내정 간섭에 불만을 품고 있다는 내용 등을 외무성에 보고함."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규장각원문검색서비스, 일성록 557책, 1907년 6월 29일 무자, 召見內閣大臣 原任議政以下于重明殿 原任議政 李根命 閔泳奎 內閣總理大臣 李完用 宮內府大臣 李允用 內部大臣 任善準 度支部 高永喜 軍部大臣 李秉武 法部大臣 趙重應 學部大臣 李載崑 農商工部大臣 宋秉畯 中樞院議長 徐正淳 副議長 成岐運 掌禮院卿 申箕善 副卿 趙忠夏 侍從院卿 閔丙奭 特進官 李重夏 侍從武官 具然河, …(중략)… 太皇帝敎曰 英王天質岐嶷 孝友夙彰 國人亦皆屬望 今可以建儲也。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순종 즉위년 8월 7일 양력 1/6 기사, 영왕 은을 황태자로 책봉하다.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규장각원문검색서비스, 일성록 557책, 1907년 6월 29일 무자, 召見內閣大臣 原任議政以下于重明殿 …(중략)… 承召也。 朕曰: “朕以宗社大計, 欲爲詢議, 有此召接矣。” 仍敎曰: “近奉太皇帝明命, 踐位聽政, 兢惕日深。 惟在國家長遠之計, 乃在早定國本, 而朕年近四十, 兼又多病, 嗣續之望漸退。 故已稟白于太皇帝, 恭承處分, 將欲建儲, 以定宗社大策矣。 卿等之意何如?” 完用曰: “今此聖敎, 寔由宗社萬億年大計。 而陛下春秋方富, 坤殿德儀彰著, 麟趾螽斯之慶, 顒俟方深。 而今忽承此下敎, 臣等無以仰對矣。 下詢于原任議政, 恐好矣。” 朕曰: “卿等之意, 果何如耶?” 根命曰: “擇賢預建, 歷代及國朝雖多有可稽, 蓋出於不得已也。 今則若過數年, 將有螽斯之慶, 臣民方以是顒祝。 忽伏承意外下敎, 臣等膛然相顧, 不知所以仰對矣。” 泳奎曰: “臣與李特進所奏, 果無異同, 更爲下詢于登筵諸臣, 恐好矣。” 善準曰: “臣之意, 亦無他仰稟矣。” 箕善曰: “建儲必早, 從古伊然。 然今未有皇子, 而下建之命, 則乃非常之典也。 本朝雖有故事, 國初事難以援例, 中葉景宗·英祖時, 固有是擧。 然陛下雖以嗣續之遲爲敎, 而臣民則方仰企螽斯之慶, 此擧恐太早矣。” 朕曰: “朕已有斟量矣, 卿等不必持難也。 謹按國朝古事, 有擇賢之賢。 今二親王中, 當有擇賢以建儲矣。 卿等須擇賢以聞。” 完用曰: “知子知臣, 莫如君父。 陛下仰稟于太皇帝, 簡心下敎, 不勝顒祝矣。” 根命曰: “惟在聖意, 臣等何敢妄對乎?” 泳奎曰: “德量器度之如何, 必先下燭, 擇賢惟在聖簡矣。” 太皇帝敎曰: “英王天質岐嶷, 孝友夙彰, 國人亦皆屬望, 今可以建儲也。” 完用曰: “聖簡已定, 天意允合, 臣等不勝歡忭之沈矣。” 根命曰: “英親王孝悌溫文, 令聞夙著, 聖意攸定, 實爲宗社生靈之福, 不勝萬萬慶幸。” 朕曰: “帝王家國統爲重, 故昔在定宗朝冊太宗大王爲世子, 可懲心法。 而今以英王冊封皇太子, 可也。” 完用曰: “皇統重於倫統, 故列聖朝已有此例, 聖敎至當矣。” 根命曰: “國初事久遠難稽, 莫詳其所以然, 仰惟紹述之義, 何容更達耶?” 箕善曰: “處分雖已定, 下詔則俟卽位行禮之後, 恐爲允合次序矣。” 完用曰: “雖卽位禮式之前, 旣已頒布, 且已改元, 建儲降詔, 恐無不可也。” 太皇帝敎曰: “雖今日降詔, 而冊封則待卽位之後, 宜無不可也。” 朕命完用書詔, 書詔曰: “英王 垠爲皇太子, 冊封儀節, 令宮內府掌禮院照禮擧行。” 仍命宗漢讀詔。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고종시대사 6집, 隆熙 元年 8月 7日, 皇帝가 太皇帝를 陪奉하고 重明殿에. "…(중략)… 황제의 춘추(春秋)가 40이 가까운데도 사자(嗣子·대를 이을 아들)가 없으므로 2명 중에서 후사(後嗣)를 결정할 뜻을 의논한 바 이완용 등이 태황제가 간택(簡擇)할 것을 청하므로 태황제가 영친왕 은(垠)을 지명하여 황태자로 결정하다. 이는 의친왕 파(義親王派)와 영선군 이준용 파(李埈鎔派)의 음모(陰謀)를 방지하기 위하여 이완용 등이 추진한 것이다."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만세보, 1907년 3월 16일, 義王送別統監.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황성신문, 1907년 4월 10일, 義王恤孤.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대한매일신보(국한문), 1907년 4월 18일, 義王出遊.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대한매일신보(국한문), 1907년 5월 10일, 義王別庄.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공립신보, 1907년 7월 12일, 義王義金.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대한매일신보, 1907년 7월 31일, 의친왕 전별.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대한매일신보(국한문), 1907년 12월 10일, 義王入城.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대한매일신보(국한문), 1907년 12월 13일, 義王拜祠.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대한매일신보(국한문), 1908년 1월 14일, 義王渡日.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대한매일신보(국한문), 1908년 3월 1일, 義王陛見.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대한매일신보, 1908년 4월 15일, 의친왕행계.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대한매일신보, 1908년 7월 14일, 의친왕 소창.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공립신보, 1908년 8월 5일, 의친왕 삼천원 연금.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대한매일신보, 1908년 9월 13일, 의친왕 소창.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의성학교(義成學校).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황성신문, 1909년 4월 7일, 義王의 學校賜.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황성신문, 1909년 4월 30일, 義王遠乘會.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황성신문, 1909년 5월 11일, 의왕소창.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황성신문, 1909년 5월 11일, 의왕관화.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대한매일신보(국한문), 1909년 7월 27일, 의왕출유.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대한매일신보(국한문), 1909년 8월 22일, 의왕오유.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대한매일신보(국한문), 1909년 9월 24일, 의왕소창.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대한매일신보(국한문), 1909년 10월 8일, 義王臨葬.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황성신문, 1909년 10월 29일, 義王吊慰.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대한매일신보(국한문), 1909년 11월 23일, 義王有欠.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대한매일신보(국한문), 1909년 12월 8일, 義王陛見.
- “오마이뉴스, 2023년 4월 16일, 매일 신선한 생선 갖다바쳤던 기회주의 처세술의 화신 [김종성의 '히, 스토리']”.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주한일본공사관기록·통감부문서, 統監府文書 6권, 一. 憲兵隊機密報告, (483)義和宮에 관한 件.
- 국사편찬위원회 승정원일기, 순종 3년 기유(1909·융희) 9월 16일 2번째 기사.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주한일본공사관기록·통감부문서, 統監府文書 7권, 一. 安重根關聯一件書類(哈爾賓事件書類 一∼六, 伊藤 公遭難事件書類 一~四, 安重根及合邦關係事類 一~三, 하얼빈事件憲兵隊報告一~三), (81)일본 파견 特使 변경에 관한 件.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대한매일신보, 1910년 1월 8일, 의친왕소창.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황성신문, 1910년 4월 22일, 樂而忘返.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대한매일신보, 1910년 5월 3일 의친왕소창.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대한매일신보(국한문), 1910년 4월 5일, 義王山獵.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황성신문, 1910년 4월 9일, 親王宴樂. 대한매일신보, 1910년 4월 9일 잘노렸군.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정보시스템, 신한국보, 1910년 5월 10일, 의친왕 전하는 일전에 상사동 그 첩의 집에서 창부 김창룡 등을 불러 밤새도록 진탕히 놀았답니다.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대한매일신보(국한문), 1910년 5월 20일, 義王遊歷.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대한매일신보(국한문), 1910년 6월 4일, 義王消暢. 대한매일신보(국한문), 1910년 6월 19일, 義王消暢.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대한매일신보(국한문), 1910년 6월 8일, 消暢江亭.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대한매일신보(국한문), 1910년 7월 15일, 義王消暢.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대한매일신보(국한문), 1910년 7월 26일, 統邸晩餐.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정보시스템, 신한국보, 1910년 8월 2일, 의친왕 전하는 기생 금주를 데리고 신흥사에 나가 소창하신다더라.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근대사료DB, 신한민보, 1910년 8월 3일 면수 3 단수 6, 부끄러운 줄 모르는.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순종실록부록 1권, 순종 3년 8월 29일 양력 1/2 기사/ 1910년 일본 명치(明治) 43년, 대일본 천황이 조서를 내리다.
- 민족문제연구소, 오마이뉴스 2023년 12월 19일, 나라 팔아먹은 임금의 형… 이완용보다 5배 더 받았다.
- “중앙일보, 정치 : 정치일반, 1983년 5월 16일, (9) 대한제국의 최후.”.
- 경향신문, 2010년 07월 15일, 한일병합 대가 친일파가 받은 은사금 얼마?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매일신보, 1911년 1월 18일, 李王大將任命.
- 《日本之朝鮮》. 有樂社. 1911.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매일신보, 1912년 8월 18일, 사진: 李王殿下의 名代로 御大葬에 參列할 李堈公殿下.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매일신보, 1913년 4월 13일, 이강공의 어견학.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매일신보, 1913년 4월 18일, 이강공의 어동정.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매일신보, 1913년 5월 3일, 이강공 전하 관앵.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매일신보, 1913년 7월 18일, 이강공 전하 동상기.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매일신보, 1913년 8월 5일, 동경 특전: 이강공에게 사찬.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매일신보, 1913년 8월 9일, 이강공 금조 입경.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매일신보, 1913년 9월 30일, 이강공 전하 상추.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매일신보, 1914년 10월 25일, 이강공 원산유람.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매일신보, 1915년 8월 20일, 이강공 여주행.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매일신보, 1915년 9월 10일, 이강공전하 소식.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매일신보, 1915년 9월 20일, 이강공 전하의 가정박 관람.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매일신보, 1915년 10월 14일, 대공진회: 이강공전하태림.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매일신보, 1916년 1월 12일, 이강공 전하 김천행.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매일신보, 1916년 1월 12일, 이강공 전하 여행의 어취미: 거창 덕유산에서 수렵을 행하심.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매일신보, 1916년 8월 1일, 이강공 오찬회.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매일신보, 1916년 11월 5일, 이강공어 참내.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매일신보, 1916년 11월 7일, 내지전보: 이강공어관대, 천종간의 오찬회.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매일신보, 1917년 4월 21일, 이강공 함흥 수행.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매일신보, 1917년 7월 4일, 이강공 만찬회.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매일신보, 1917년 12월 20일, 이강공 만찬연.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매일신보, 1918년 1월 22일, 이강공 어초연.
- 대한민국 역사 박물관, 독립신문, 1919년 11월 20일, 義親王의 親書.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관련단체 Ⅱ, Ⅵ. 신한청년당, 8) 新韓靑年黨의 부흥에 관한 건, 皇子의 복수주의.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선민족대동단.
-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운동사, 독립운동사 제4권 : 임시정부사, 제2장 국내외 동포의 지원 활동 445 - 446쪽.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민족독립운동사, 3·1 운동이후의 민족운동 1, Ⅰ. 국내 민족운동(1), 1. 독립운동단체의 조직과 활동, 2) 조선민족대동단의 구성원과 활동상의 특징.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민족 독립운동사 자료집, 大同團事件Ⅰ, 李堈公 신문조서(제1회).
- 중앙일보, 2012년 1월 7일, 상해 임정 향하던 의친왕, 안동현서 잡혀 망명 실패.|https://www.joongang.co.kr/article/7082192
-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운동사자료집 6 : 삼일운동사자료집, 제14장 내외 인사들의 독립 정신이 갈수록 분발하다, 의친왕(義親王)의 피체(被逮) 244 - 245쪽.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외 항일운동 자료 : 일본 외무성기록, 不逞團關係雜件 朝鮮人ノ部 在內地 九, 李堈公事件, 문서번호 高警第33431號;秘受13691號. "大正八年十一月二十四日 高警第三三四三一號 李堈公事件 李堈公ハ居常心平ナラズ又屢屢外遊ノ意ヲ側近ニ洩セル事アリ而シテ不逞ノ徒ハ公ヲ擁シテ國權恢復運動ニ從ヘハ兩班儒生ハ勿論朝鮮內外ノ人民ノ信用ヲ博スルコト大ナルモノアルヲ見密ニ公ヲ誘出スルノ計畫アリ公ハ平素酒色ニ親ミ行動兎角常軌ヲ逸シ又好ンデ市井ノ雜輩ト往來シ殊ニ今春ノ獨立騷擾ノ首魁孫秉凞トハ密ニ會合謀議シ孫ノ逮捕セラルルヤ公ハ頗ル狼狽ノ色アリシト云フ……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大同團事件Ⅰ, 檢察調書(國漢文), 李堈 조서.
- 국사편찬위원회. “李堈公신문조서(제2회)”.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2025년 5월 17일에 확인함.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大同團事件Ⅰ , 警務總監部·警察署 調書(國漢文), 李堈公 신문조서(제1회).
- 공훈전자사료관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선민족대동단사건.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매일신보, 1920년 1월 7일, 李堈公 本邸로 귀환, 지나간 그믐날 저녁에.
-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운동사자료집7 : 임시정부사자료집, 자유 한국 제1권 제3호(1920년 7월호), 이왕자(李王子)[의친왕] 570쪽.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근현대잡지자료, 개벽 제49호, 色色形形의 京城 妾魔窟 可驚可憎할 有産級의 行態(필자 觀相者).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근현대회사조합자료, 한성은행(漢城銀行).
- 디지털정읍문화대전, 동의기념비(同義紀念碑).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매일신보, 1921년 4월 30일, 이강공전하 사령부 부 임명.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매일신보, 1921년 5월 6일, 이강공전하 어출근.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매일신보, 1922년 1월 20일, 이강공 총독 초연.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매일신보, 1922년 7월 23일, 이강공 전하 만찬회 어개최.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매일신보, 1922년 11월 10일, 이강공전하 11일 차미 동상.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매일신보, 1922년 11월 22일, 이강공전하 양폐하께 어대면.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매일신보, 1922년 11월 26일, 이강공전하초대 유길총감배석.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매일신보, 1922년 11월 28일, 이강공어초대 궁중 죽간에서 황후폐하어임어.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매일신보, 1922년 11월 29일, 이강공을 주빈으로 복건궁께서 어초대.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매일신보, 1922년 12월 1일, 이강공 유별의 성연, 각궁을 비롯하여 칠십명 이우공의 학습모양어람.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매일신보, 1923년 2월 22일, 이강공전하 어 초대.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매일신보, 1924년 1월 10일, 이강공전하 승위, 섭정전하께서 고백작에게 어친수.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조선일보, 1924년 1월 21일, 御成婚は剩す所數日心からの喜びを湛へ半島から參列の人人, 李堈公殿下は二十日御東上.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매일신보, 1924년 2월 8일, 목야궁상 이강공 초대.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조선신문, 1924년 2월 9일, 이강공 입락.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조선신문, 1924년 2월 24일, 天機奉伺, 李王李堈兩殿下, 總督總監より.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매일신보, 1924년 8월 3일, 이강공의 초대회.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경성일보, 1925년 4월 30일, 銀婚式に朝鮮側から參列する人人, 李王家から李堈公, 貴族代表は李恒九男.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경성일보, 1925년 5월 15일, 李堈公御招待, 德川宗秩寮總裁自邸に.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매일신보, 1925년 6월 19일, 이강공원승회 래20일.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경성일보, 1926년 3월 7일, 李堈公午餐會, 王世子を朝鮮ホテルに御招待.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경성일보, 1926년 5월 5일, .御陵豫定地御檢分李堈公殿下一行金谷へ.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부산일보, 1926년 10월 29일, 이강공 전하 대연습 배관.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경성일보, 1927년 6월 15일, 御靜養中の李堈公殿下, 典醫安商浩氏箱根に御見舞.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부산일보, 192년 4월 19일, 이강공 전하가 불국사를 시찰.
- 국가기록원 조선총독부 기록물, 李堈公殿下隱居問題並遺產分配問題ニ關スル件 (이강 공 전하 은거 문제 및 유산 분배 문제에 관한 건 - 제28호) 京警秘 第834號 (경경비 제834호 - 경기도 경찰부 비밀문서), 昭和 5年(1930) 5月 27日, 公殿下隱居問題ノ起因ハ、曩ニ殿下ト關係アリタルニーナーカ、豫テ殿下ヨリ約束ヲ賜ハリシ慰籍料一萬元ノ要求ヲナシタルニ、公家ニ於テ拒絶セラレ、遂ニ本人ハ神奈川縣知事ニ陳情スルニ至リタル爲、宮內省ニ於テモ殿下ノ御行動ヲ憂慮シ、內査ノ結果、既報ノ如キ各國ホテル婦人關係アルコト明トナリ、加フルニ帝國ホテル賣店女小林アヤ子等トノ御懇居。 結果、遂ニ宮內省ニ於テモ殿下ノ御隱居問題ヲ考慮スルニ至リタル所ニシテ、其結果、曩ニ兒玉政務總監ヨリ公殿下ニ對シ勸告、 [公子 啓 昨年成年ニ達セラレタルモ、規定上殿下] ノ尊稱ヲ奉ルコト能ハサル爲、宮中ノ特遇甚ダ遺憾ナレハ、此際御隱居樣ニト進言セラレシ由ナルカ、殿下ニハ尙御承認ナキノミナラス、內地へ御旅行七ヶ月ニ亘リ、御歸鮮ノ模樣ナク、解決ニ至ラ.
- 국가기록원 조선총독부 기록물, 李堈公殿下隱居問題並遺產分配問題ニ關スル件 (이강 공 전하 은거 문제 및 유산 분배 문제에 관한 건 - 제28호) 京警秘 第834號(경경비 제834호 - 경기도 경찰부 비밀문서), 昭和 5年(1930) 5月 27日, 費消アラセラレタルカ 今後ハ絕對ニ右金額範圍內ニテ 御整理被遊ルコト 一、 公殿下ハ 李王家ヨリ 三十萬圓ヲ受ケ 修仁堂 金興仁、第五公子 壽吉、第六公子 錕、修德堂 李善春、第一公女 鍊、第二公女 錦 及 妾 梁龍喜、金今玉等ノ 御整理費ニ 充ツルコト 一、 公殿下ハ 別府永住ノ御思召ニテ 李王家ヨリ 三萬五千圓ヲ受ケ 御家屋ヲ 御建築被遊ルコト 健公子 御相續後ノ御豫算ハ 漁場收入 其他ヲ以テ 充テラル、コト 一、 香椎トノ現契約ハ 旣ニ滿期トナリ 新ニ御契約被遊ル筈ニテ 現在ヨリモ 七八萬圓ノ御增收アル御見込ナリト.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조선일보, 1930년 6월 17일, 李堈公殿下軍司令部附をも免ぜられた.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조선일보, 1930년 6월 14일, 이강공전하 어은거칙허.
- “오마이뉴스, 박수진·백외준·김혜리(편집), 2019년 6월 19일, '성락원'의 원래 주인은 의친왕이 아닌 '고종의 내시'였다.”.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경성일보, 1930년 6월 3일, 李堈公殿下フオード工塲へ御微行.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조선신문, 1930년 8월19일, 李堈公殿下今朝御歸城.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매일신보, 1931년 12월 27일, 李鍝公殿下 三十日御歸省 오시는길에 별부들리시어 李堈殿下問候.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경성일보, 1933년 5월 1일, 李堈公殿下明一日御入城.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매일신보, 1933년 5월 3일, 李堈殿下 三年만에 御歸城 朝鮮호텔에 御投宿.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경성일보, 1933년 5월 2일, 李堈公殿下昨夕御歸城遊ばす.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조선일보, 1933년 9월 3일, 李堈殿下, 五日御歸城.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조선일보, 1933년 9월 5일, 이강전하 백천온천 어행.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조선신문, 1934년 5월 6일, 李堈殿下今夜東上.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경성일보, 1934년 6월 15일, 李堈殿下十七日御歸城.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매일신보, 1934년 6월 18일, 李堈殿下 釜山에 御上陸.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조선신문 1935년 5월 31일, 李堈殿下三日御歸城.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부산일보, 1936년 7월 29일, 이강[李堈] 전하 조선으로 돌아와.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동아일보, 1940년 4월 2일, 이강 전하 어동상.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조선일보, 1940년 4월 2일, 이강 전하 어귀경.
- “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털 장서각, 고후작박공묘갈명(故侯爵朴公墓碣銘).”.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자유일보, 1945년 10월 28일, 舊韓 義親王 李박사에 메시지.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신조선보, 1945년 11월 24일, 臨時政府要人昨日凱旋!!, 九先生以下十五人, 昨日午金浦飛行場에 到着.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동아일보, 1945월 12월 6일, 이강공 임시 정부 내방.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대한독립신문, 1946년 10월 4일, 啓蒙과 民生을 主劑 愛國協會新發足.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한성일보, 1946년 10월 20일, 愛國協會를 結成 ; 李堈(舊義親王)會長을 推戴.
- “사기에 걸린 이강공”. 《한성일보》. 1947년 4월 2일.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대한일보, 1948년 9월 14일, 義親王宮은 어대로, 謀利輩의 私有?國有?, 無慘!建築地로 伐採된 王宮古木.
- 국사편찬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친일파관련문헌, 民族正氣의 審判, 民族正氣의 審判 서문.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친일파관련문헌, 民族正氣의 審判, 第2部, 王族及公族.
- “代書料(대서료)만十萬餘圜(십만여환)”. 2024년 10월 27일에 확인함.
- “전락의 왕손갱생의 출감”. 경향신문. 1953년 7월 22일.
- 장면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장면박사 회고록》 (가톨릭출판사, 1967) 558쪽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중앙일보(이북), 1945년 8월 18일, 이강 공 훙서.
-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의친왕묘.
- 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털 장서각, 王家忌辰 및(王家忌辰 및) "李鍵公邸 尊號 鄭氏 陽曆忌辰日 明治四十五年一月十一日."
- 다음 카페 우리황실사랑회, 2014년 1월 25일, [의견] 의친왕비 서거 50주년을 추모하며, 二十一男妹子女名單表.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근대사료DB,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大同團事件(대동단사건)Ⅰ, 金興仁 訊問調書(第1回)(김흥인 신문조서 제1회), 성명은 김흥인. 연령은 36세. 신분은 상민. 호주 김영욱의 동생. 출생지는 경성부 동대문 밖. 나는 11세 때 여관女官으로 의화궁義和宮에 들어가 전하를 모셨고 관계가 된 것은 10년 전부터이다.
- 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털 장서각, 양공가공족보자료(兩公家公族譜資料), 162/258, 金興仁 明治十七年 八月五日生(陰曆 五月十四日) 父 金一善 母 李氏 身分 平民.
- 국가기록원 조선총독부 기록물, 李堈殿下東京御滞在中御動静ニ関スル件 昭和六年一月二十九日, 一 修仁堂別邸ハ弟金永昌.
- 국가기록원 조선총독부 기록물, 이강전하 별부체제 중의 동정에 관한 건, 소화6년 7월 3일, 一、九月七日 滯在中ノ修仁堂別邸一行八名ハ(公子 金命吉、兄 金永旭、弟 金永昌、母 金氏、金永旭ノ長女 金熙東).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기록유산DB, 가현록(加現錄), 1916년 7월 7일, 朴英喜 開國五百年 十月五日生, 父 薪炭商 朴永祿 開國四百六十四年 四月十八日生, 母 姜氏 開國四百六十七年 七月十二日生.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大同團事件, 警務總監部·警察署 調書(國漢文), 金貞完 신문조서, 아버지는 김성환(金聖煥)이고 어머니는 주세창(朱世昌)이다. 신분은 상민이고 11세에 덕수궁 지밀나인으로 입궁했다. 1914년에는 이미 의친왕의 측실이었다.
- 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털 장서각, 집무일지, 大正七年十一月二十二日 李堈公 御 李堈公殿下 ニハ本日午後五時出入 十五分公家 監務 李光宇 及 修仁堂別邸 金興仁 ヲ隨ヘ 始興邑內 修正堂別邸 鄭垶鉁.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매일신보, 1914년 5월 15일, 사진: 기생 錦珠.
-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대한매일신보, 1910년 6월 30일, 의친왕 소창.
-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사료총서, 국역 윤치호 영문 일기 3, 1896년(고종 33), 2월 5일 수요일 포근하고 맑음, (윤치호의) 사촌은 의화군에게 첩을 돌려보내라고 진언 했는데 그 첩은 의화군이 가기 몇 달 전 사촌의 아내와 함께 먼저 일본에 가 있었다.
-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대한매일신보, 1909년 8월 22일, 의친왕 풍류.
-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국내보도기사, 1920년대, 262. 梁大鉉 鄭永源 2명 가정부와 연락하여 군자금모집, 李堈公 애첩 이연연을 협박하고 50원을 강탈(『동아일보』, 1921.3.8)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경향신문, 1974년 9월 25일.
- 1918년 조선미인보감.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경향신문, 1974년 9월 25일.
- 천지일보, 2021년 6월 18일, [문화칼럼] 독립운동가 김응집을 알게 된 비하인드 스토리(1).
- 국가기록원 조선총독부 기록물, 이강공전하 동정에 관한 건(제6보) 224 - 226, 一、昭和三年×月八日 殿下ニハ午後六時御出邸 恩平面李堈公家別莊ニ御到着 先着ノ 前別邸藤田昌子ヲ相手ニ御酒宴ヲ開 カレ藤田前別邸ハ翌日午後一時半退出ス.
-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大同團事件 Ⅰ, 警務總監部·警察署 調書(國漢文), 金春基 신문조서(제2회), 修和堂은 전부터 東京의 어머니를 만나고 싶다.
- 공훈전자사료관, 고등경찰요사, 제7장 병합 이후 본도에서 관련된 주요 범죄(第七章 併合以降ニ於ケル本道關係主要犯罪) 256 - 257쪽, …(중략)… 修仁堂(公ノ邸內ノ家屋ノ名公ハ本邸內ニ妃ノ外五名ノ妾ヲ居住セシム)居妾 金興仁 …(중략)… 里門洞(妾金貞完ノ住宅附近)…(중략)…
- 국가기록원 조선총독부 기록물, 이강공전하 동정에 관한 건(제6보) 224 - 226, 一、昭和三年×月八日 殿下ニハ午後六時御出邸恩平面李堈公家別莊ニ御到着 先着ノ 前別邸藤田昌子ヲ相手ニ御酒宴ヲ開 カレ藤田前別邸ハ翌日午後一時半退出ス.
- 국가기록원 조선총독부 기록물, 이강공전하 동정에 관한 건(제6보) 224 - 226, 一、忠清道生レ東京淺草ニ居住セル金應淑ハ昨七年來殿下ト關係アリシガ情夫ヲ作リタルコト判明シタル爲毎月送金ヲ中止サレタル爲メ金ハ目下京城ニ來リ殿下トノ面會ヲ待チ居ルモ殿下ニハ面會拒絶ノ意思ニシテ後日問題ヲ惹起スルモノノ如シ.
- 국가기록원 조선총독부 기록물, 李堈 公 殿下 隱居問題 並遺產分配 問題ニ關スル件(이강 공 전하 은거 문제 및 유산 분배 문제에 관한 건 - 제28호), 京警秘 第834號 (경경비 제834호 - 경기도 경찰부 비밀문서), 昭和 5年(1930) 5月 27日, 費消アラセラレタルカ 今後ハ絕對ニ右金額範圍內ニテ 御整理被遊ルコト 一、 公殿下ハ 李王家ヨリ 三十萬圓ヲ受ケ 修仁堂 金興仁、第五公子 壽吉、第六公子 錕、修德堂 李善春、第一公女 鍊、第二公女 錦 及 妾 梁龍喜、金今玉等ノ 御整理費ニ 充ツルコト 一 …….
- 국가기록원 조선총독부기록물, 1929년 경무국 동경 체재 중의 이강 전하 동정 보고, 754, 昭和四年夏、家庭教師トシテ雇入レ、京城府外三清洞李鍝公家別莊ニ於テ關係シタル金今玉ハ、兄共ニ殿下ノ子ナリト云フ女児ヲ連レ、午後一時、未邸廣御用掛ヲ訪問シテ、午後四時過キ退出シタリ。 訪問ノ要件ハ、殿下ヨリ毎月相當ノ送金ハ受ケ居ルモ、他ノ別邸等(妾)ハ家屋ヲ購入シテ貰ヒ居ル故、自分ニモ家屋ヲ購入シテ貰ヒタシト云フ要求ナリシモ、昨年ナレバ何トカナリシガ、目下ノ狀態ニテハ當分如何トモ出來難キ旨、廣御用掛ヨリ論シタレハ、漸ク承諾シテ退邸シタリト云フ。
- 사단법인 대한황실문화원, 황실계보, 의친왕비, …(중략)… 해청(이광)은 이미 죽었으니 그 남은 26인은 남녀를 물론하고 다들 잘 되길 바라는 바이다.
- 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털 장서각, 승녕부일기, 隆熙 二年 七月十六日(陰六月十八日) 同三時二十五分 義親王宮阿只氏 以宿患夭逝 上皇陛下紙貨三百円 下賜于本宮.
- 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털 장서각, 1916년 가현록, 李堈公殿下 侍女朴英喜 七月 二日 午前五時三十分 同公邸內附屬第宅ニ於 テ分娩男子出生.
- 한국학중앙연구원 디지털 장서각, 집무일지, 大正 七年 十月 八日 火曜日 李堈公 家 李堈公 家侍女 朴英喜 本月七日 侍女女子分.
Yi Kang
| Yi Kang | |
|---|---|
Yi on his uniform as Lieutenant General in Imperial Korean Army | |
| Born | 30 March 1877 Hanseong-bu, Joseon |
| Died | 15 August 1955 (aged 78) Andong Palace, Anguk-dong, Jongno-gu, Seoul, South Korea |
| Burial | Hongyu-reung, Namyang-ju |
| Spouse | Kim Deok-su, Princess Imperial Ui (m. 1892; died 1964)Concubines:
|
| Issue Detail | Prince Yi Geon (Later Kenichi Momoyama) Prince Yi U Yi Bang Yi Hae-wan Yi Chang Yi Ju Yi Hae-won Yi Gon (Successor of Yi Kang) Yi Hae-chun Yi Hae-suk Yi Gwang Yi Hyun Yi Haegyeong Yi Gap Yi Seok Yi Hoe-ja Yi Hwan Yi Hae-ran Yi Jung Yi Hae-ryeon Yi Chang-hui |
| House | House of Yi |
| Father | Emperor Gojong of Korea |
| Mother | Empress Myeongseong(legal) Lady Jang of the Deoksu Jang clan(birth) |
| Religion | Roman Catholic Church |
| Yi Kang | |
| Hangul | 이강 |
|---|---|
| Hanja | 李堈 |
| RR | I Gang |
| MR | I Kang |
| Royal title | |
| Hangul | 의친왕; 의왕; 의화군 |
| Hanja | 義親王; 義王; 義和君 |
| RR | Uichinwang; Uiwang; Uihwagun |
| MR | Ŭich'inwang; Ŭiwang; Ŭihwagun |
Yi Kang, Prince Imperial Ui (Korean: 의친왕 이강; 30 March 1877 – 15 August 1955), also known as Prince Uihwa (1891–1900) or King Ui (1900–1955) was the second son of Emperor Gojong of Korea and his concubine, Lady Jang, who was a court lady-in-waiting.
In 1891, his father King Gojong issued a decree naming Yi "Prince Uihwa" with the style of Royal Highness. Yi married Lady Kim Deok-su, the daughter of court official Kim Sajun.
Upon declaration of Korean Empire in 1897, Yi was enthroned as King Ui or Prince Imperial Ui by his father Emperor Gojong of Korea in 1900 along with his younger brother, Yi Un.
Biography
Education and early life
Despite being born as a son of Gojong of Korea, there are not many official records about his early life, which may be a result of having been borne by Lady Jang, a court lady-in-waiting of King Gojong but not the king's official consort or concubine during her lifetime. Lady Jang came from the Deoksu Jang clan, and Queen Inseon (Hyojong of Joseon's queen consort) was her distant relative.[i] According to the tradition, the half-brothers of the crown prince, in this case, Yi Cheok (future Sunjong of Korea), needed to move out from the palace until the latter reached the age 10, so there were some years that Yi Kang lived with Pak Yung-hio, the son-in-law of King Cheoljong.[2] During the Kapsin Coup in 1884, Yi Kang and his mother were taken by Pak Yung-hio to the palace; contemporary rumors claimed that the coup d'état tried to replace the king with Yi Kang;[3] but after the coup ended, Yi left the palace again.
Later, Queen Min, Gojong's wife, asked her husband to grant Yi Kang a title, so Yi Kang became Prince Uihwa (의화군) in 1891.[4] After three rounds of choosing in 1893,[5] the daughter of an official Kim Sa-jun, Lady Kim Deok-su, was chosen to be the spouse of Yi Kang, which was arranged by Queen Min.[6] Lady Kim, also known as "Lady Kim of Deokindang", was a distant relative to Queen Inmok, the queen consort of Seonjo of Joseon in the early 17th century;[ii] Yi Kang did not have children by her. Even after getting married, Yi Kang got involved in debt and lawsuit problems.[6]
Prince Yi Kang was appointed special ambassador to the Empire of Japan for the celebration ceremonies for Japan's victory in the First Sino-Japanese War of 1894–1895.[8] Yun Ch'iho, who met Yi before going Europe, assessed him as a smart 18-year-old who had a good personality like his father but who was anxious to study abroad.[9] In August 1895, Yi was appointed as special ambassador and visited European countries including the United Kingdom, Germany, France, Russia, Italy and Austria-Hungary.[8] In 1899, he visited Japan. According to Japanese records, 3,000 Won were sent to Yi.[10] While he was not in Korea, Yi Kang was promoted to the rank of Prince Imperial Ui, and styled His Imperial Highness in 1900.[11] At the same year, he went to the United States and began studying at Roanoke College in Salem, Virginia from March 1901, where he majored in mathematics.[12] While he was in the United States, the Korean Government gave him 30,000 Won in 1902.[13] While in America, Yi was beaten by some Americans in 1903.[14] In 1904, some Korean foreign students tried to dethrone Gojong and make Yi the emperor.[15] After graduation, he spent a brief period at the Ohio Wesleyan University in Delaware, Ohio, and then traveled to San Francisco and Hawaii, returning to Korea on 15 March 1906.[12][16] The same year, he got Order of the Golden Ruler.[17] On 8 April 1906, Yi was appointed as Lieutenant General (부장).[18] He was appointed as Chanmogwan and was ordered to participate in a military parade in the Empire of Japan.[19] He received the 1st class of the Order of the Paulownia Flowers from the Japanese government while he was in Japan.[20]
Prince Yi Kang served as the president of the Korean Red Cross from 1906 to 1907.[20] On 15 January 1907, Yi persuaded civilians and military personnels to raise a Righteous army.[21] When Emperor Gojong abdicated and Sunjong succeeded him as Emperor, Yi was not appointed as the crown prince, but instead his younger brother, Yi Un; this was because Yi did not receive public support and Gojong was not fond of him. Also, Imperial Consort Sunheon bribed Itō Hirobumi, who was the Japanese Resident General of Korea, to appoint her son as the crown prince.[22] When Itō Hirobumi was assassinated by An Jung-geun, Yi was ordered to participate in the funeral as the deputy of the Korean Imperial House.[23] The order, however, was canceled and the Minister of the Imperial Household Min Byeong-seok was sent instead.[24]
Under Japanese rule

Following the abdication of Emperor Gojong in 1907, and the Japan-Korea Treaty of 1910 through which Korea was annexed to the Empire of Japan, Prince Yi Kang grew increasingly dissatisfied with his status, even though the Japanese provided him with a huge annual allowance. At the same time, the title "Prince Imperial Ui" was abolished and Yi received a reduction in rank to Duke by Japanese until 1930.[25]
During the March 1st Movement, Yi participated as one of the representatives of Korea.[26] Since Yi had studied abroad and knew much about the world,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wanted Yi to join the government. After the escape of Gim Ga-jin, an Imperial Korean official before, the Provisional Government's objective was Yi's refuge in Shanghai.[27] On 9 November 1919, he collaborated with Choe Ik-hwan, a member of Daedongdan, who attempted to support him as the new leader of Korea. Prince Yi Kang then tried to escape to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Korea based in Shanghai, only to be discovered in Dandong from Manchuria and returned to his home country.[28] Lee Jong-Wook had received orders from Ahn Changho to accompany Yi and help him escape. With the help of Cheon Un-boek, who was an employee of the Japanese General Government Building, Yi successfully met Lee Jong-Wook, who came to rescue him. Yi disguised his face by attaching a mustache on his face. However, Yi was caught near the Dandong Station, which is located in Zhenxing District.[29] On 13 November 1919, Yi was sent back to Keijō by Japanese police force.[30] After this, the Japanese government claimed that Yi Kang was "abducted" and "wanted to escape to live profligately again".[31] Later, Yi Kang asked to be deprived of his title multiple times, but this wasn't approved. Yi's home became part of Deoksugung.[30]
On 20 November 1919, Yi had an interview with Tongnip Sinmun. He said that he would rather be a peasant of the independent Korea than a noble of Empire of Japan.[32] His exile promoted a positive view towards the Imperial family, and the Japanese attempted to devalue the exile as a trivial issue.[33]
During the tenure of Saitō Makoto, Saitō met Yi many times and tried to change his stance on independence.[34]
As of 10 November 1925, a law for defining the status of the former Korean imperial family was made. In 1930, due to Yi's continuous independent movement activities against Japan, Yi was stripped of his Duke rank by Japan and became a commoner. On 12 June 1930, Yi officially retired and his eldest son Yi Geon succeeded him as duke. Yi Kang's styles and allowances still remained until the end of World War II.[35][36]
Throughout the Japanese rule, there were only few members of Yi Kang family recognized by Japan: Yi Kang himself, his wife Kim Deok-su (Duchess Consort of Yi Kang), his eldest son Duke Yi Geon with his family, and his second son Duke Yi U (adopted as the heir to Duke Yi Jun-yong in 1917) with his family.[37]
After independence
After the independence of Korea, he continued to live in Seoul, but in increasing poverty.[38] On 9 August 1955 he was baptized a Roman Catholic, given the Christian name "Pius"; Lady Kim was also baptized and given the name of "Maria".[39] Yi said that the reason why he was baptized a Roman Catholic was to apologize for the anti-Catholicism of Joseon led by Heungseon Daewongun.[40] Yi Kang died a week later on 15 August 1955, at the age of 78, in his mansion "Seongrakwon" Manor (now Seongnagwon Garden, in Seongbuk District, Seoul); he was buried at the Hongneung and Yureung imperial tombs in Namyangju near Seoul,[41] where his father and brothers are also buried.[42] His official heritor was chosen as his third son, Yi Bang on 30 June 1970.[43]
Family
Prince Imperial Ui, Yi Kang married Kim Deok-su (22 December 1880 – 14 January 1964) in 1892; however, the couple had no children. Therefore, all children Yi Kang had, 12 sons and 9 daughters, were born by 13 of his various concubines. Since his first son Yi Geon was naturalized to Japan, and his second to fifth sons were adopted by royal relatives, his sixth son, Yi Gon became the successor of Yi Kang. Currently Yi Gon's first son, Yi Jun(1961~) is the current heir of Prince Imperial Ui and is the chairperson of Prince Imperial Ui Memorial Foundation.[38]
Wife
李堈
| 李堈 | |
|---|---|
| 宗親十世 | |
| 義王 | |
李堈 | |
| 本貫氏派 | 全州李氏 |
| 初諱 | 李平吉 |
| 雅号 | 晩悟 |
| 爵号 | 義和公→義和君→義王→公 |
| 出生年 | 光緖3年2月16日(1877年3月30日) |
| 出生地 | |
| 没死年 | 1955年8月17日(78歳没) |
| 没死地 | |
| 現墓所 | 洪陵・裕陵隷下の義親王墓 |
| 実父 | 高宗 |
| 実母 | 貴人張氏 |
| 配偶者 | 金修德、他 |
| 子女 | 下記参照 |
| 李堈 | |
|---|---|
| 各種表記 | |
| ハングル: | 이강 |
| 漢字: | 李堈 |
| 発音: | イ ガン |
| 日本語読み: | り こう |
| ローマ字: | I Gang |
| 英語: | Yi Kang |
李 堈(り こう、朝鮮語: 이강〈イ・ガン〉、1877年3月30日 - 1955年8月16日)は、大韓帝国の皇族(王)、のち大日本帝国の公族。朝鮮第26代国王・大韓帝国初代皇帝高宗の五男。
生涯
韓国併合以前
朝鮮国王高宗の五男として誕生する。母は内人(ナイン、女官)出身の後宮・貴人張氏(クィイン チャンシ)(出産時点では、高宗の承恩尚宮だった)。異母兄に純宗、異母弟に皇太子・李王となった李垠、異母妹に徳恵翁主がいる。幼名は平吉(ピョンギル)[1]。朝鮮王朝の慣例では、国王の庶子は世子が10歳になるまで宮中に入ることはできなかったため、哲宗の女婿朴泳孝のもとで育てられた[1]。その後も興宣大院君の反対でなかなか王子として認知されず、庶民的な生活を強いられた[2]。素行は荒れ、市中の無頼とも付き合うようになったという[2]。
数え年16歳となった1892年の1月28日にようやく義和君(ウィファグン)の称号を与えられ、宮中に伺候できるようになった[2]。翌1893年に金思濬の娘と結婚する。1894年に日清戦争の祝賀使として日本に訪問した。1895年8月にはヨーロッパに対する特派大使に任じられていたが、10月2日に依願免官していた。10月8日に乙未事変が発生すると、翌日李堈はアメリカ人宣教師の家に避難した。10月13日には再び特派大使に任じられ、10月27日に日本に向けて出国した[2]。父の高宗によれば、李堈は閔妃を殺したのは大院君の一家の陰謀によるものだと考えており、大院君一家への陰謀を企てていたのが露見したためであったという[2]。朝鮮政府は帰国を命じたが、李堈は勅命でなければ応じないと抵抗し、大使の任を解かれて留学生の身分で日本に滞在することとなった[3]。
日本での李堈の生活は模範的なものではなく、朝鮮の伝統的な服装で訪問した朝鮮の官僚の髷をいきなり切り落とすという行動に出ることもあった[4]。1896年1月26日には高宗の依頼で福沢諭吉が監督役となったが、夜遊びや散財を繰り返すなどその生活は改まることなく、アメリカ留学が命じられた[4]。
1897年5月22日に日本を出国し、翌年に一旦帰国して再度渡米した。1900年に朝鮮は大韓帝国となり、義王に封じられた[5]。さらに1901年にはロアノーク大学に入学した。アメリカでも3人の女性との恋愛沙汰が報じられ、1903年3月1日には「アメリカ人の自由とアメリカの独立に魅了され、祖国の王冠を放棄する」という声明を『ニューヨーク・ヘラルド』紙に公表した[6]。
1905年2月には日本に戻ったが、高宗はアメリカ留学中の評判が極めて悪かったことから、伊藤博文か井上馨の監督でもう3~4年留学させられないかと要請している[5]。1906年4月に帰国し、大韓帝国最高位の勲章である大勲位金尺大綬章が授与された。翌年に兄の純宗が即位した際も、皇太子には任ぜられなかった。
公
韓国併合により1910年8月、「公」位を受けて恩賜公債84万円を賜り、日本の公族の身分となった。李堈家は、併合前の財産と恩賜公債の利子、慶尚南道や咸鏡南道の漁業権を貸与することで年間4万円の収入があったが、用途については李王職が監督を行っていた。李堈はそれに反発し李王職の干渉を廃するよう要求している[7]。一方で李堈は李王職の承諾を得ないまま借金をして遊興費に当てる、漁業権の二重貸与で手付金を騙し取るなどの行為を行っていた[7]。また屋敷に妓生を呼んで宴会を行ったり、気に入らない事務官に銃口を向けて威嚇するなど乱行が目立った[7]。
1914年には李王職が李堈の品行を是正するための協議を行ったが、李完用らは李王職の日本人官吏が考えた手ぬるい方法では公家は破産すると反発し、公家の財産を保全するためには李堈を隠居させるしか方策がないと結論づけた。ところが当時、王公族には隠居の法的根拠がなく、民法の規定である満60歳に達していない李堈を隠居させることはできなかった[8]。また兄の李王が王家の祭祀を代行するよう頼んでも病気と称して拒絶し、王家の行事についてもたびたび欠席した[9]。一方で皇室の行事には積極的に参加した[9]。明治天皇が崩御した際は、王公族の中でただひとり、一年間喪服と喪章をつけて喪に服していたという[9]。
1919年11月、朝鮮独立運動組織「大同団」が李堈に「金は出すから、朝鮮から出て独立運動の象徴となってほしい」と彼を騙し、上海に拉致しようとした[9]。李堈は国境付近の中国安東県で保護されたが、特に処分などは行われなかった[9]。しかし監視が厳しくなったことには耐えられず、一ヶ月後には生活が保証されるのであれば公の身分を捨てて平民になりたいと朝鮮総督府に要望し、1925年5月15日には摂政宮裕仁親王に同様の趣旨を述べた陳情書を提出している[10]。李王職と李王は始末書を書かせてことを収めようとするが、李堈は不満を漏らしてこれを受け入れなかった。12月4日には朝鮮総督府に呼び出され、陳情書を取り下げるよう促された。この時李堈は素直に非を認め、陳情書の取り下げに応じている[10]。
一方で私生活の乱行も収まらず、1925年頃には7名の妾のために毎年9200円の支出を行い、1927年には李王家から8万円の経費を支出してもらうことでようやく家政を維持する有様であった[11]。恩賜公債も債務整理のために全て売却されている[11]。
王公家軌範制定後の1930年6月12日に隠居し、公位は長男の李鍵が継承した。隠居しても公族の身分はそのままであり、殿下の敬称で呼ばれた。また、李王家から年間12万円の生活費が支給されている[11]。
栄典
- 1906年4月9日(光武10年) - 大勲位金尺大綬章[12]
1924年(大正13年)1月8日 - 大勲位菊花大綬章[13]
1930年(昭和5年)12月5日 - 帝都復興記念章[14]- 1940年(昭和15年)8月15日 - 紀元二千六百年祝典記念章[15]
- 李堈妃金氏
家族
父は高宗。母は貴人張氏(出産当時は承恩尚宮だった)。異母兄に純宗、異母弟に李垠(妻は梨本宮家方子女王)、異母妹に徳恵翁主(夫は宗武志)。
妃は金修德(金思濬長女、1880年1月21日 - 1964年1月14日)である。1893年12月6日に結婚した。この他に数多くの側室や妾[17](鄭氏、金興仁、鄭雲石、曺秉淑、李喜春、金貞完、朴英喜、宋氏、金昌煕、金今德、咸開鳳、金蕙洙、洪貞順など)がいる。1958年に行われた調査では、夫人が18名、子女は28人いたというが、子供のうち、公族として認知されたのは李鍵と李鍝の2名のみであった[5]。
- 長男 李鍵(り けん、1909年 - 1990年)
- 次男 李鍝(り ぐう、1912年 - 1945年)
- 三男 鎊(パン、1914年 - 1951年)
- 四男 鎗(チャン、1915年 - )
- 五男 鑄(チュ、1918年 - 1982年)
- 六男 錕(コン、1920年 - )
- 七男 鑛(クァン、1921年 - 1952年)
- 八男 鉉(ヒョン、1922年 - 1996年)
- 九男 鉀(カプ、1938年 - 2014年) 李源の父。
- 十男 錫(ソク、1941年 - )全州李氏宗親会会長
- 十一男 鍰(ファン、1944年 - )
- 十二男 錠(チョン、1947年 - )
- 長女 海琬(ヘワン、1915年 - 1981年)
- 次女 海瑗(ヘウォン、1919年 - 2020年)
- 三女 海珺(ヘチュン、1920年 - 2009年) 夫:朴賛汎(離縁)
- 四女 海璛(ヘソク、1920年 - )
- 五女 海瓊(ヘギョン、1930年 - )
- 六女 恵子(ヒジャ、1940年 - )
- 七女 海珃(ヘラン、1944年 - )
- 八女 海瑢(ヘリョン、1950年 - )
- 九女 昌恵(チャンヒ、1950年 - )
系図
李堈の親類・近親・祖先の詳細
脚注
- 新城道彦, 2015 & Kindle版、位置No.全266中 121 / 46%.
- 新城道彦, 2015 & Kindle版、位置No.全266中 121 / 47%.
- 新城道彦, 2015 & Kindle版、位置No.全266中 123 - 124 / 47%.
- 新城道彦, 2015 & Kindle版、位置No.全266中 125 / 47%.
- 新城道彦, 2015 & Kindle版、位置No.全266中 127 / 48%.
- 新城道彦, 2015 & Kindle版、位置No.全266中 126 / 48%.
- 新城道彦, 2015 & Kindle版、位置No.全266中 128 / 49%.
- 新城道彦, 2015 & Kindle版、位置No.全266中 129 / 50%.
- 新城道彦, 2015 & Kindle版、位置No.全266中 130 / 50%.
- 新城道彦, 2015 & Kindle版、位置No.全266中 130 / 51%.
- 新城道彦, 2015 & Kindle版、位置No.全266中 132 / 51%.
- “의친왕 이강에게 대훈위 금척 대수 훈장을 수여하다”. 고종실록. 국사편찬위원회 (1906年4月9日). 2016年2月25日閲覧。
- 『官報』第3411号、「叙任及辞令」1924年1月9日。p.53
- 『官報』第1499号、「叙任及辞令」1931年12月28日。p.742
- 『官報』第4438号・付録「辞令二」1941年10月23日。
- 『官報』第3411号「叙任及辞令」1924年1月9日。p.54
- 彼女らは全て朝鮮人というわけでなく、内地人(日本人)の妾も確認されるだけで2人いた。
- 新城道彦, 2015 & Kindle版、位置No.全266中 132-133 / 51%.
参考文献
- 新城道彦『天皇の韓国併合 王公族の創設と帝国の葛藤』2011年、法政大学出版局
- 新城道彦『朝鮮王公族 ―帝国日本の準皇族』中公新書、2015年3月。ISBN 978-4-12-102309-4。
- Kindle版:ASIN B0191356D2, 朝鮮王公族 ―帝国日本の準皇族 (2015年3月25日)
李堈
| 李堈 | |
|---|---|
| 종친 10세 | |
| 의왕 | |
李堈 | |
| 본관씨파 | 전주 이씨 |
| 初諱 | 이평길 |
| 가호 | 만오 |
| 작호 | 요시와 공 → 요시와 군 → 요시오 → 공 |
| 출생년 | 光緖 3 년 2 월 16 일 ( 1877 년 3 월 30 일 ) |
| 출생지 | |
| 몰사년 | 1955년 8월 17일 (78세) |
| 몰사지 | |
| 현묘소 | 홍릉·유릉하의 의친왕묘 |
| 친아버지 | 고종 |
| 어머니 | 貴人張씨 |
| 배우자 | 金修德, 그 외 |
| 자녀 | 아래 참조 |
| 李堈 | |
|---|---|
| 각종 표기 | |
| 한글 : | 이강 |
| 한자 : | 李堈 |
| 발음: | 이건 |
| 일본어 읽기: | 리코 |
| 로마자 : | I Gang |
| 영어 : | Yi Kang |
李堈(리강, 조선어: 이강<이강>, 1877년 3월 30일 - 1955년 8월 16일 )은 대한제국 의 황족(왕), 이후 대일본제국 의 공족 . 조선 제26대 국왕·대한 제국 초대 황제 고종 의 다섯 남자.
평생
한국 병합 이전
조선 국왕 고종 의 오남으로 탄생한다. 어머니는 내인(나인, 여관) 출신 후궁 귀인 장씨(퀴인 찬시)(출산 시점에서는 고종의 승은상궁이었다). 이모형에 순종 , 이모동생에게 황태자·이왕이 된 이창 , 이모여동생에게 덕혜봉주 가 있다. 유명은 평길(평길) [ 1 ] . 조선왕조의 관례에서는 국왕의 서자는 세자가 10세가 될 때까지 궁중에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철종 의 여사 박영효 의 밑에서 자랐다 [ 1 ] . 그 후에도 흥선대원군 의 반대로 좀처럼 왕자로 인지되지 않고 서민적인 생활을 강요받았다 [ 2 ] . 소행은 거칠어져, 시중의 무뢰와도 사귀게 되었다고 한다 [ 2 ] .
수년 16세가 된 1892년의 1월 28일에 드디어 요시와군(위화군) 의 칭호를 주어져 궁중에 징후할 수 있게 되었다 [ 2 ] . 다음 1893년에 김사반의 딸과 결혼한다. 1894년에 일청 전쟁 의 축하사로서 일본에 방문했다. 1895년 8월에는 유럽에 대한 특파 대사로 임명되었지만, 10월 2일에 요청 면관하고 있었다. 10월 8일에 을미사변이 발생하자 다음날 이방은 미국인 선교사의 집으로 피난했다. 10월 13일에는 다시 특파대사로 임명되어 10월 27일에 일본을 향해 출국했다 [ 2 ] . 아버지의 고종에 의하면, 이호는 민비 를 죽인 것은 대원군의 일가의 음모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대원군 일가에의 음모를 기획하고 있던 것이 노견했기 때문이었다 [ 2 ] . 조선정부는 귀국을 명령했지만, 이방은 칙명이 아니면 응하지 않는다고 저항하고, 대사의 임을 풀어 유학생의 신분으로 일본에 체재하게 되었다 [ 3 ] .
일본에서의 이승의 생활은 모범적인 것이 아니고, 조선의 전통적인 복장으로 방문한 조선의 관료의 귀를 갑자기 잘라낸다고 하는 행동에 나오기도 했다 [ 4 ] . 1896년 1월 26일에는 고종의 의뢰로 후쿠자와 유키치 가 감독 역이 되었지만, 밤 놀이와 산재를 반복하는 등 그 생활은 개조하지 않고, 미국 유학이 명령되었다 [ 4 ] .
1897년 5월 22일에 일본을 출국해, 다음 해에 일단 귀국해 다시 도미했다. 1900년에 조선은 대한제국이 되어 의왕 에 봉쇄되었다 [ 5 ] . 게다가 1901년에는 로어노크 대학 에 입학했다. 미국에서도 3명의 여성과의 연애 사태가 보도되어 1903년 3월 1일에는 「미국인의 자유와 미국의 독립에 매료되어 조국의 왕관을 포기한다」라는 성명을 「뉴욕 헤럴드」지에 공표했다 [ 6 ] .
1905년 2월에는 일본으로 돌아왔지만, 고종은 미국 유학중의 평판이 지극히 나빴기 때문에, 이토 히로부미 나 이노우에 루 의 감독으로 이제 3~4년 유학시킬 수 없는지 요청하고 있다 [ 5 ] . 1906년 4월에 귀국해 대한제국 최고위의 훈장인 대훈위 금척대선장이 수여되었다. 이듬해에 형의 순종이 즉위했을 때도 황태자에게는 맡겨지지 않았다.
공공
한국 병합 으로 1910년 8월 '공'위를 받고 은사공채 84만엔을 받으며 일본 공족 의 신분이 됐다.李堈家는 병합 전 재산과 은사공채의 이자, 경상남도 와 함경남도 의 어업권을 대여함으로써 연간 4만엔의 수입이 있었지만 용도에 대해서는 이왕직이 감독을 했다. 이방은 그것에 반발하여 이 왕직의 간섭을 폐지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 7 ] . 한편 이승은 이왕직의 승낙을 얻지 않은 채 빚을 지고 유흥비에 해당하는 어업권의 이중 대여로 수부금을 속이는 등의 행위를 하고 있었다 [ 7 ] . 또 저택에 요생을 불러 연회를 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무관에게 총구를 향해 위협하는 등 난행이 눈에 띄었다 [ 7 ] .
1914년에는 이왕직이 이방의 품행을 시정하기 위한 협의를 했지만, 이완용 등 은 이왕직의 일본인 관우가 생각한 수수한 방법으로는 공가는 파산한다고 반발하고, 공가의 재산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이방을 은거 시킬 수밖에 방책이 없다고 결론지었다. 그런데 당시 왕 공족에게는 은거의 법적 근거가 없었고, 민법 의 규정인 만 60세에 이르지 않은 이방을 은거시킬 수 없었다 [ 8 ] . 또 형의 이왕이 왕가의 제사를 대행하도록 부탁해도 병으로 불리며 거절했고, 왕가의 행사에 대해서도 종종 결석했다 [ 9 ] . 한편 황실 의 행사에는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 9 ] . 메이지 천황 이 붕괴했을 때는, 왕 공족 속에서 단 한 사람, 일년간 상복과 상장을 붙여 상으로 옷을 입고 있었다고 한다 [ 9 ] .
1919년 11월 조선독립운동 조직 ' 대동단 '이 이승에게 "돈은 내기 때문에 조선에서 나와 독립운동의 상징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그를 속이고 상하이 에 납치하려 했다 [ 9 ] . 이방은 국경 부근의 중국 안동현 에서 보호되었지만, 특히 처분 등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 9 ] . 그러나 감시가 엄격해진 것에는 견딜 수 없고, 한 달 후에는 생활이 보장된다면 공공의 신분을 버리고 평민이 되고 싶다고 조선총독부 에 요청하고, 1925년 5월 15일에는 섭정궁 유인친왕 에게 같은 취지를 말한 진정서를 제출하고 있다 [ 10 ] . 이왕직과 이왕은 시말서를 썼다는 것을 담으려고 했지만, 이방은 불만을 새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2월 4일에는 조선총독부에 불려 진정서를 철회하라는 촉구를 받았다. 이때 이방은 솔직히 비를 인정하고 진정서의 취하에 응하고 있다 [ 10 ] .
한편 사생활의 난행도 맞지 않고, 1925년경에는 7명의 녀석을 위해 매년 9200엔의 지출을 실시하고, 1927년에는 이왕가로부터 8만엔의 경비를 지출받는 것으로 드디어 가정을 유지하는 유양이었다 [ 11 ] . 은행공채도 채무정리를 위해 모두 매각되고 있다 [ 11 ] .
왕공가 궤범 제정 후인 1930년 6월 12일에 은거해, 공위는 장남의 이키가 계승했다. 은거해도 공족의 신분은 그대로 있었고, 전하의 경칭으로 불렸다. 또 이왕가로부터 연간 12만엔의 생활비가 지급되고 있다 [ 11 ] .
영전
- 1906년 4월 9일 ( 광무 10년) - 오훈 위 금척 대선 장
1924년 (다이쇼 13년) 1 월 8일 - 오훈위 국화 대선 장
1930년 (쇼와 5년) 12월 5일 - 제도 부흥 기념장 [ 14 ]- 1940년 (쇼와 15년) 8월 15일 - 기원 2천6백년 축전 기념장 [ 15 ]
- 李堈妃金 씨
가족
아버지는 고종 . 어머니는 貴人張씨(출산 당시는 승은상궁이었다). 이모형에게 순종 , 이모동생에게 이가라 (아내는 리모토미야 가타 코 여왕 ), 이모여동생에게 덕혜 봉주 (남편은 소부시 ).
비는 김수德(김사환 장녀, 1880년 1월 21일 - 1964년 1월 14일)이다. 1893년 12월 6일에 결혼했다. 이 밖에 수많은 측실 과妾[ 17 ] (정씨, 김흥인, 정운석, 曺秉淑, 이희춘, 김정완, 박영희, 송씨, 김창희, 김현덕, 함개봉 등 김환수, 홍貞). 1958년에 행해진 조사에서는 부인이 18명, 자녀는 28명이었다고 하지만, 아이 중, 공족으로서 인지된 것은 이열쇠와 이금의 2명만이었다 [ 5 ] .
- 장남이 열쇠 (리켄, 1909년-1990년)
- 어머니는 사무라이 정 씨. 1930년 이보 은거에 따라 공위를 계승, 1947년 5월 3일 일본 헌법 시행 전후로 공족 신분을 상실. 일본으로 귀화하고 모모야마 도이치 를 자칭한다.虔一의 회상에 의하면 어머니와는 만난 적이 없고, 어린 시절에는 이승에게 “빨리 일본에 가버려” “조선에 오랫동안 있구나”라고 폭언을 토하고 있었다고 한다 [ 18 ] .
- 키 공비 마 코코 (요시코, 1911-2006)
- 백작 히로 바시 진광 의 여동생. 다카마쓰 마츠다이라 가분가의 마츠다이라 장녀. 1931년 결혼, 1951년 이혼. 2남 1녀 중 1남 1녀는 어머니가 잡는다.
- 次男李鍝(리 구, 1912-1945년)
- 三男鎊 (빵 빵, 1914-1951년)
- 四男鎗 (장 찬, 1915년 경)
- 五男鑄 (주, 1918-1982)
- 六男錕 (콩 경, 1920년 경)
- 七男鑛 (광, 1921-1952년)
- 八男鉉 (현 형, 1922-1996)
- 九男鉀(캡, 1938-2014) 이원 의 아버지.
- 十男錫(석 석, 1941 연) 전주 이씨 종친회 회장
- 十一男鍰 (팬 기, 1944년 경)
- 12남정 (정, 1947년 -)
- 장녀 海琬 (헤완, 1915년 - 1981년)
- 次女海瑗(혜원 원, 1919~2020)
- 三女海珺(혜춘, 1920년 - 2009년) 남편:박찬범(離縁)
- 四女海璛 (혜석, 1920 년)
- 五女 海瓊 (혜경 경, 1930 세)
- 육녀 케이코(히자, 1940년-)
- 七女海珃 (헤란, 1944 년)
- 八女海瑢 (혜령 현, 1950 세)
- 九女 昌恵 (창희 1950-)
계도
李堈의 친척·근친·조상의 상세
각주
- 신조 도히코, 2015 & Kindle 버전, 위치 No. 전체 266 중 121 / 46 % .
- 신조 도히코, 2015 & Kindle 버전, 위치 No. 전체 266 중 121 / 47 % .
- 신조 도히코, 2015 & Kindle 버전, 위치 No. 전체 266 중 123 - 124 / 47% .
- 신조 도히코, 2015 & Kindle 버전, 위치 No. 전체 266 중 125 / 47 % .
- 신조 도히코, 2015 & Kindle 버전, 위치 No. 전체 266 중 127 / 48 % .
- 신조 도히코, 2015 & Kindle 버전, 위치 No. 전체 266 중 126 / 48 % .
- 신조 도히코, 2015 & Kindle 버전, 위치 No. 전체 266 중 128 / 49 % .
- 신조 도히코, 2015 & Kindle 버전, 위치 No. 전체 266 중 129 / 50 % .
- 신조 도히코, 2015 & Kindle 버전, 위치 No. 전체 266 중 130 / 50 % .
- 신조 도히코, 2015 & Kindle 버전, 위치 No. 전체 266 130 / 51 % .
- 신조 도히코, 2015 & Kindle 버전, 위치 No. 전체 266 중 132 / 51 % .
- “ 의친왕 이강에게 대훈위 금척 대수 훈장을 수여한다 ”. 고종실록 . 국사편찬위원회 (1906년 4월 9일) .
- 「관보」 제3411호, 「서임급 사령」1924년 1월 9일. p.53
- 「관보」 제1499호, 「서임급 사령」 1931년 12월 28일. p.742
- 『관보』 제4438호・부록 「사령2」 1941년 10월 23일.
- 『관보』 제3411호 「서임급 사령」 1924년 1월 9일. p.54
- 그녀들은 모두 조선인이라는 것이 아니라 내지인 ( 일본인 )의 녀석도 확인될 뿐 2명이었다.
- 신조 도히코, 2015 & Kindle 버전, 위치 No. 전체 266 중 132-133 / 51% .
참고문헌
- 신성도히코 『천황의 한국병합 왕공족의 창설과 제국의 갈등』2011년 호세이 대학 출판국
- 신성도히코『조선왕 공족 ―제국 일본의 준황족』중공 신서 , 2015년 3월. ISBN 978-4-12-102309-4.
- Kindle 판:ASIN B0191356D2 , 조선왕 공족 ―제국 일본의 준황족 (2015년 3월 25일)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