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산항, 열쇠를 쥔 남자
1945년 가을 부산왕에는 이상한 행렬이 있었습니다. 배에 오르는
사람들의 손에는 짐이 거의 없었습니다. 등에 맨배낭 하나 손에든 보다리 하나 그리고 주머니 속에는
1천엔짜리 집회 몇 장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런데이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어제까지 조선에서 공장을 돌리고 상점을 열고 병원을 운영하고 논밭을
소유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경성 한복판에 2층 저택을 가지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남쪽 한구 도시에 정미소를 세 개나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모든 것을 두고 그들은 배에 올랐습니다. 한
남자가 부두에서 잠깐 뒤를 돌아봤다고 합니다. 그의 손에는 아직 열쇠가
쥐여 있었습니다. 자기 집 열쇠였습니다. 그 열쇠로 열 수 있는 문은 이제
바다 건너에 남아 있었습니다. 여기서 질문이 시작됩니다. 사람은 배를 타고 떠났습니다.
그렇다면 그 집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공장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땅은 그 회사는 그 창고에 쌓여 있던 기계와 물건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한반도 남쪽에만 수십만 명의 일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수십년 동안
쌓아올린 재산이 하루 아침에 주인을 잃었습니다. 집은 비었고 공장은
광복 당시 한반도의 일본인들
멈췄고 금고는 열린 채였습니다. 그 순간 그 재산은 누구의 것이었을까요?
떠난 사람의 것이었을까요? 그 땅에 남은 사람들의 것이었을까요? 아니면
새로 들어온 군대의 것이었을까요? 놀랍게도이 질문의 답은 그날 바로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몇 달 동안 한반도에서는 아무도 답을 모르는 상태로 거대한 재산이 사람 손에서
사람 손으로 흘러다녔습니다. 빈집을 먼저 차지한 사람이 주인이 되기도 했고 헐값에 도장을 찍어 준
계약서가 밤새 오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종이 한 장이 그 모든 것을 뒤집어 버립니다.
1945년 12월 6일 법령 하나가 공포됩니다. 그 법령은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조선 안에 있는 일본인의 재산은 국가의 것이든 개인의 것이든 전부
넘어간다. 그것도 그의 12월이 아니라 8월 9일로 거슬러 올라가서
넘어간다. 즉 8월 9일 이후에 이루어진 모든 거래는 없던 일이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몇 달 동안 사람들이 사고 팔고 도장을 찍었던 그 모든 계약이 종이 한 장으로 무효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이 재산에는 이름이 붙습니다. 적산. 적국의 재산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곧 바른 이름으로 불립니다. 귀속재산.
주인이 바뀌어 국가에 귀속된 재산이라는 뜻이었습니다.이 재산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나만에 있던 공장과 광산과 은행과 철도와 항만과 주택과 농지의 상당
부분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연구자에 따라 추사는 다르지만 당시
남한 전체 산업 시설의 절대적인 비중이이 목록 안에 들어 있었다는 점에는 큰 이견이 없습니다. 말하자면
한 나라의 경제 전체가 한 장의 목록 위에 올라간 셈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목록은 곧 팔리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진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누가 그것을 샀을까요?
어떤 값에 샀을까요? 왜 어떤 사람은 아무것도 얻지 못했고 어떤 사람은
공장을 통째로 얻었을까요? 훗날 대한민국의 이름난 기업들 가운데
상당수가 바로이 목록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까?
그리고 더 선늘한 질문이 남습니다. 일본으로 돌아간 사람들은 그 재산을
순순히 포기했을까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20년 가까이 그 재산을 돌려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일본 정부까지 나서서 한국의 두고운 재산에 대한 권리를 공식적으로
추장했습니다. 식민지 지배를 받은 나라가 배상을 요구하는데 지배했던 나라가 오히려
재산을 돌려 달라고 맞선 것입니다.이 이 기묘한 대치가 한일 국교 정상화
협상의 판을 어떻게 흔들었는지 그리고 그 결말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지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가 보겠습니다.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구독과 좋아요 부탁드립니다. 여러분의 작은 클릭 하나가 이런 긴 호흡의 역사 이야기를 계속 만들어 갈
수 있는 큰 힘이 됩니다. 알림 설정까지 해 두시면 새로운 이야기를 가장 먼저 만나 보실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1945년 여름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광복
당시 한반도에 살던 일본인이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흔히 그들을 뭉뚱그려 일본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 집단은 하나의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먼저 숫자부터 정리해 보겠습니다. 흔히 90만 명이라는 숫자가 알려져
있습니다.이 숫자는 종전 무렵 한반도에 있던 일본인 민간인과 군인을 모두 합한
추정치에 가깝습니다. 조금 더 단단한 기록을 보면 조선 총독부가 남긴
마지막 인구 조사인 1944년 자료에서 한반도에 거주하던 일본인은
대략 71만 명 수준으로 나타납니다. 여기에 종전 측전 급격히 늘어난 주둔
병력과 만주와 북쪽에서 밀려내려온 피난민을 더하면 숫자는 더 커집니다.
그래서 자료마다 70만에서 90만 사이의 숫자가 오가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정확한 소수점이
아닙니다. 한반도라는 땅 위에 한 도시 인구에 만먹는 규모의 집에
집단이 통째로 얹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어디에 살았을까요?
압도적으로 도시에 몰려 있었습니다. 경성, 부산, 대구, 인천, 평양,
원산, 함, 목포, 군산, 진남포 같은 도시의 중심부에는 일본인 거리가
있었습니다. 넓은 도로와 벽돌 건물, 백화점과 은행과 극장, 상수도와
전기가 들어오는 주택가. 그 바로 옆골목에는 조선인들이 사는 좁고 낮은
집들이 이어졌습니다. 같은 도시 안에 두 개의 세계가 겹쳐져 있었던 셈입니다. 직업 구성도
흥미롭습니다. 일본인 인구 가운데 관리와 경찰, 교사, 회사원, 기술자의 비중이
대단히 높았습니다. 식민지 통치기구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직장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상인과
공장주, 지주, 의사, 변호사가 더해집니다. 한마디로 이들은 식민지 사회의 중간층
이상을 통째로 차지하고 있던 집단이었습니다. 물론 모두가 부자였던 것은 아닙니다.
일본에서 살기 어려워 건너온 가난한 이주민도 있었고 작은 자파점을 겨우
꾸리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조차 조선인보다는 유리한 위치에서
출발했습니다. 법과 행정과 금융이 그들 편에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8월 15일, 무너진 세계와 투매의 날들
지점이 있습니다. 토지입니다. 일제 강점기 동안 진행된 토지 조사
사업과 이후의 개발 과정에서 조선의 알자 토지 가운데 상당한 면적이
일본인과 일본계 회사의 손으로 넘어갔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동양 척식 주식 회사였습니다.이
회사와 일본인 지주들이 소유한 농지는 남쪽 지역만 따져도 전체 농지에
상당한 몫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전라도와 충청도의 기름진 평야에는
일본인 대지주의 농장이 줄지어 있었습니다. 군산 앞에 넓은 들판,
김재와 만경의 평야, 나주와 영산강 뉴욕이 그러했습니다. 그 땅에서 나온
쌀은 한구로 실려나갔습니다. 공업 쪽은 더 극단적이었습니다.
발전소, 화학 공장, 제철소, 방직 공장, 시멘트 공장, 광산, 근대적
생산 시설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은 거의 예외 없이 일본 자본의 것이었습니다. 조선인 자본이 성장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성장할 수 있는 자리 자체가 좁았습니다. 허가와 자금과 원료 배분이 모두
총독부와 일본계 은행을 통과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광복은 단순한
정치적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통치자가 사라지는 사건이었지만 경제적으로는 소유자가
사라지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소유자가 사라진 재산은 저절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새 주인을 기다립니다. 1945년 8월 15일 정호 무렵
라디오에서 일본 천왕의 방송이 흘러나왔습니다. 잡음이 심했고 문장은 어려운 옛
문트였습니다. 조선인들 가운데 그 방송의 내용을 그 자리에서 정확히 알아들은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즉시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들의 세계가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날 오후부터 관공서에서는 연기가 피어올랐습니다. 문서를 태우기 시작한 것입니다.
경찰서와 헌병대와 총독부 각국에서 서류가 불에 던져졌습니다. 무엇을 태웠는지는 지금도 완전히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태워야 할 만한 것들이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같은 시각 일본인 주택가의 분위기는 공포에 가까웠습니다. 지배자였던 사람들이 하루 아침에
소수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보복에 대한 두려움이 도시를 덮었습니다.
실제로 일부 지역에서는 충돌과 습격이 있었고 상점이 약탈당하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다만 오늘날의 연구는 한반도 남쪽에서 일본인 민간인에 대한 대규모 학살
수준의 폭력은 상대적으로 드물었다는 점도 함께 지적합니다. 혼란은 컸지만
그 혼란의 성격을 하나로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일본인들은 곧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조직을 만듭니다. 각 도시마다 일본인 세화회라는 이름의 단체가 꾸려졌습니다.
세화라는 말은 돌본다는 뜻입니다.이 단체는 일본인들의 신변 보호, 식량
확보, 귀환 등록, 재산 처리 문제를 도맡았습니다. 그리고이 세화회 사무실에서 광복 이후
가장 기묘한 시장 하나가 열립니다. 일본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곧
떠나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렇다면 남은 선택은
하나였습니다. 팔 수 있을 때 팔아치우는 것. 그래서 8월 하순부터 가을까지
한반도의 도시에서는 유래 없는 투매가 벌어집니다. 값을 따질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2층집이 쌀 몇 가마 값에 넘어가기도 했고 제봉틀과 추금기와 도자기가
길거리에 쏟아져 나왔습니다. 가구와 옷과 책이 헐값에 팔렸습니다.
어떤 조선이는 그때 산 물건으로 평생 장사를 했다고 회고했습니다.이시기
경성의 풍경을 잠깐 그려 보겠습니다. 당시 경성에는 일본인 상점이 밀집한
거리가 있었습니다. 지금의 충무호와 명동일때였습니다.이 지역은 진고개라는 옛 이름으로도
불렸습니다. 밤이면 전등이 화나게 켜지고 백화점 진열창의 물건이 빛나던 거리였습니다.
식민지 조선에서 가장 화려한 소비 공간이었습니다. 그런데 폐전 소식이 전해진 뒤이
거리의 표정이 바뀝니다. 셔터가 내려가고 진열창이 비워졌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다시 문이 열렸을 때 그것은 장사가 아니라 처분이었습니다.
가게 안에 물건이 헐값에 쏟아져 나왔습니다. 시계와 만년필과 양복과
그릇이 길가에 늘어섰습니다. 값을 흥정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어제까지 그 가게에 들어가 본 적
없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거리에 주인이 바뀌는 순간을 사람들은
물건값을 먹기며 지켜보았습니다. 같은시기 관공서 앞에도 사람이 몰렸습니다.
일본인 관리들이 짐을 싸고 있었고 조선인 직원들이 사무실을 이어받고 있었습니다. 서류 캐비닛의 열쇠가
넘어갔고 도장이 넘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캐빈이 단이 텅 비어 있는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사라졌는지는 이제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 이런
장면들은 훗날 여러 회고록과 신문 기사에 조각조각 남았습니다. 기록마다
세분은 조금씩 다르고 과장된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다만 반복해서
등장하는 이미지는 같습니다. 한 시대가 물건과 서류의 형태로 정리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거창한 선언이나 조약보다 먼저 사람들은 그 변화를
손으로 만졌습니다. 열쇠와 계약서와 짐보다리의 무게로 실감했습니다.
역사의 전화는 대게 이런 방식으로 시작됩니다. 부동산은 더 복잡했습니다.
집과 땅은 등기가 필요했지만 행정은 마비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단 계약서부터
썼습니다. 도장을 찍고 돈을 건내고 열쇠를 받았습니다. 그 종이가 나중에
어떤 취급을 받게 될지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또 다른 흐름도 있었습니다. 빈집 정거였습니다.
일본인이 떠난 집에 사람이 들어가 사는 일이 곳곳에서 벌어졌습니다. 갈 곳 없는 사람이 들어가기도 했고
발 빠른 사람이 먼저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들어간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훗날 그 집의 정식 주인이 됩니다. 공장에서는 또 다른 장면이
펼쳐졌습니다. 일본인 사장과 기술자가 사라진 공장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이 스스로
관리 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기계를 지키고 원료를 확인하고 생산을
이어가려 했습니다. 이것을 자주 관리 운동이라고 부릅니다. 노동자들은이
공장이 우리 손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식민지 시절 내내이 기계를 실제로
돌린 사람은 자신들이었기 때문입니다.이시기 한반도에는 사실상 세계의 논리가
동시에 존재했습니다. 먼저 떠나는 자의 논리입니다. 내 재산인이 팔아서 조금이라도 챙기겠다는
미군정 상륙과 법령 제2호
것이었습니다. 다음은 남은 자의 논리입니다. 수십년 동안 빼앗긴 것을
되찾는 것이니 당연히 우리 것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마지막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자의
논리였습니다. 곧 상륙할 군대는이 재산 전체를 전혀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됩니다. 그런데이
세계의 논리 말고 거의 알려지지 않은네 번째 움직임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물러가는 총독부 자신의
움직임이었습니다. 폐전이 확정된 순간 조선 총독부는 이미 통치 능력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총독부에는 아직 손에 준 것이 하나 남아 있었습니다.
돈을 찍어내는 권한이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조선은행이라는 발권 기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광복 전후
몇 주 동안이 발권 기관에서 화폐가 폭발적으로 발행됩니다. 이유는 여러 가지로 설명됩니다.
먼저 일본인 관리와 회사원 군인에게 퇴직금과 급여을 미리 지급해야 했습니다. 물러가는 사람들 손에 돈을
쥐어 주려는 조치였습니다. 또한 일본인들이 은행에서 예금을 대거 인출했습니다.
돌아가기 전에 현금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이었습니다. 여기에 군 관련 대금의 정산도
겹쳤습니다. 결과적으로 짧은 기간에 엄청난 x의 집회가 시중에 풀렸습니다.이
조치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해석이 갈립니다. 한쪽에서는 단순한
행정 처리와 혼란 수습의 결과로 봅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떠나는 자들이 마지막까지 자기 몫을 챙긴
행위로 봅니다. 더 나아가 조선 경제를 흔들어 놓으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보는 시각도 존재합니다.
의도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결과만큼은 분명했습니다.
물가가 폭등했습니다. 가뜩이나 생산이 멈추고 물자가 부족한 상황에서 돈만 넘쳐나게 된 것입니다.
쌀값이 몇 배로 뛰었고 화폐 가치는 빠르게 무너졌습니다. 광복 직후 조선 사람들이 겪은 극심한
물가난의 배경에는 이런 사정이 깔려 있었습니다. 그리고이 인플레이션은
앞서 말씀드린 귀속 재산 불라와도 연결됩니다. 분할 상환금의 실질
가치를 녹여 버린 그 흐름이 바로이 시기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총독부의 마지막 나날에는 또 하나 유명한 장면이 있습니다. 폐전이 인박하자 총독부 고위 관리들은 조선인
지도자들과 접촉을 시도했습니다. 목적은 분명했습니다. 일본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안전하게
지켜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치한 유지에 협조해 준다면 행정 권한의 일부를 넘기겠다는 제한이었습니다.이
교섭 과정에서 조선인 측은 정치범 석방과 식량 확보, 집회의 자유보장
등을 조건으로 내걸었습니다.이 접촉을 계기로 광복 직후 자치 조직이
빠르게 만들어집니다. 전국 곳곳에서 치한대와 자치 위원회가 조직되었습니다.이
이 조직들이 실제로 일본인에 대한 무차별 보복을 상당 부분 억제했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다만이 교섭의
성격과 의미를 두고는 연구자마다 평가가 다릅니다. 권력 이항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일본인 보호를 위한 임시 조치로 볼 것인가? 여기에는
지금도 해석의 폭이 존재합니다. 한편 38도선 북쪽에 있던 일본인들의
사정은 남쪽과 크게 달랐습니다. 북쪽에는 소련군이 진주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일본인들은 곧바로 송환되지 못했습니다. 이동이 통제되었고 상당수가 억류 상태에
놓였습니다. 겨울이 왔습니다. 식량과 연료가 부족했습니다.
수용된 사람들 사이에서 전염병이 돌았습니다. 특히 어린아이와 노인의
희생이 컸습니다. 일본으로 돌아가기 위해 38도선을 몰래 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산길을 걸어 남쪽으로 내려온 뒤 부산으로 향하는 경로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도 적지 않았습니다.이시기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일본인
피남민의 규모는 상당했습니다. 그래서 나만의 송환 업무는 남만 거주자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만주와 북한에서 내려온 사람들까지 처리해야 했습니다. 부산왕에 사람이 몰린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당시
부산에는 임시 수용 시설이 여러 만들어졌습니다. 학교 건물과 창고가 수용소로
쓰였습니다. 위생 상태는 좋지 않았습니다. 발진티푸스와 콜레라 같은
전염병이 발생했고 방역을 위해 소독과 격리가 이루어졌습니다.
배를 기다리는 시간은 사람마다 달랐습니다. 며칠 만에 오르는 사람도 있었고 몇
주을 기다린 사람도 있었습니다. 승선 직전에는 소지품 검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현금 한도가 적용되는 지점이었습니다. 검사대 앞에서 벌어진 신랑이에 대한
기록들이 남아 있습니다. 아이의 인형 속에서 나온 반지, 옷기단에 꿰맨
집회, 이중 바닥으로 만든 가방, 압수된 물건은 따로 보관되었습니다.이
이 물건들의 최종 행방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많습니다. 일부는 기록에 남았고 일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이 대목에서 우리는 조금 서늘한 사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거대한 재산 이동의
시기에는 언제나 기록되지 않는 몫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법과 제도가 정한
길이 있고 그 옆으로 흐르는 다른 길이 있습니다. 역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대게 앞에 길 뿐입니다.
한 가지 더 짚어야 할 집단이 있습니다. 일본인과 조선인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들 그리고 일본인과 결혼한
조선인들입니다. 이들에게 귀환은 단순한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가족 가운데 누구는
남고 누구는 떠나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배를 앞에 두고 갈라진 가족의 이야기가 여러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또한 식민지 시기에 일본으로 건너갔던 조선인들의 문제도 있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가
법령 제33호, 소급된 소유권
광복 후 돌아왔지만 여러 사정으로 일본에 남은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들이 오늘날 제일 동포 사회의 뿌리가 됩니다. 사람의 이동은 이렇게 여러 방향으로 얽혀 있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광복을 하나의 선명한 장면으로 기억합니다. 만세를 부르는
군중과 태극기의 물결입니다. 그러나 같은시기 한구에는 다른 장면이 있었습니다. 배를 기다리는 줄
수용소의 불빛 검사대 앞에 침묵 하나의 사건이 사람마다 전혀 다른
얼굴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역사를 정직하게 본다는 것은이 여러 얼굴을
함께 본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오가는 동안 그들이 두고 간
재산은 그 자리에 남아 있었습니다. 문이 잠긴 채 먼지가 쌓인 채 주인을
기다리면서 1945년 9월 8일 미군이 인천에 상륙했습니다.
다음날 총독부 청사 앞에서 일장기가 내려가고 성조기가 올라갔습니다.
일본의 통치는 그날로 공식적으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조선인들이 기대했던 장면은 아니었습니다. 미군은
해방군의 자격이 아니라 점령군의 자격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곧 이렇게 선언합니다.
나만에서 유일한 합법 정부는 미군정이다. 그 말은 여러 의미를 담고 있었지만 재산 문제에 관해서는
아주 분명한 뜻이 있었습니다. 일본인 재산을 어떻게 할지 결정할 권한이
미군에게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미군정 사령관하지 중장은 9월 중순 시정
방침을 밝히면서 조선이 독립하면 조선 안의 재산은 조선인의 것이 될
것이라는 취지를 언급했습니다. 일본인이 그 재산에 대해 계속 권리를 추장할 수는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방향은 그렇게 정해졌습니다. 문제는 속도와 방법이었습니다. 9월 25일 미군정은 법령 제2호를
공포합니다. 이름은 폐전국 정부 등의 재산권 행사 금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내용의 핵심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 8월 9일 이후 일본 정부와 일본인이 소유하거나 관리하던 재산의
거래를 사실상 동결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둘째, 그럼에도 일본인 개인의 사유
재산 자체는 일단 인정한다는 것이었습니다.이 두 번째 부분이 지금 보면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식민지 지배자의 재산을 왜 인정해 주었을까요?
여기에는 두 가지 배경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국제법이었습니다.
1907년 해그에서 만들어진 육전법규는 점령지에서도 사유재산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담고 있었습니다. 미군은 국제법을 지키는 군대라는 형식을 갖춰야 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훨씬 현실적인 계산이었습니다. 일본인 재산은 앞으로 연합국이 일본의
물릴 전쟁 배상의 재원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함부로 흩어지게
두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초기 방침은 절묘한 절충이었습니다.
일본인이 자기 재산을 파는 것 자체는 막지 않 신고하게 했습니다. 신고 후
60일 안에 금지 명령이 없으면 거래는 성립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대금은 조선은행에 예치하게
했습니다. 일본인 매도자는 그 예치금 가운데 생활에 필요한 금액만 찾아쓸
수 있었습니다. 돈을 통째로 들고 나가지는 못하게 한 것입니다.이
조치는 아주 중요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8월 15일부터 9월 하순까지 폭발적으로 벌어졌던 그 모든
거래가 법의 그물 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밤새 도장을 찍은 그
계약서들이 갑자기 심사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도 사람들은 계속 떠나고 있었습니다.
송화는 단계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먼저 군인이었습니다. 무장해제된 일본군은 9월부터
순차적으로 한구로 이동해 일본으로 보내졌습니다. 민간인의 본격적인 송환은 10월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가장 큰 통로는 부산왕이었습니다. 인천과 목포에서도 배가 떴지만 부산이
압도적이었습니다. 그해 가을부터 이듬의 봄까지 부산왕은 거대한 이별의 무대가 되었습니다.
부산으로 향하는 열차는 언제나 만 원이었습니다. 기차 지분까지 사람이 올라탔습니다.
그리고 부산에 도착한 사람들은 곧바로 배를 타지 못했습니다. 수용소에
머물며 순서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이때 그들에게 적용된 규정이 앞서 말씀드린 한도였습니다.
민간인은 한 사람당 현금 1천엔 군인은 500엔 수화물도 등해지고
손에 들 수 있는 정도로 제한되었습니다. 천엔이라는 돈은 당시 기준으로도 큰
재산은 아니었습니다. 집 한채 값에도 한참 못 미쳤습니다.
수십년 동안 축적한 자산을 가진 사람에게는 사실상 몰수나 다름없는 조치였습니다.
그래서 각까지 방법이 동원되었습니다. 옷속에 집회를 꿰매 넣었고 아이의
인형 속에 보석을 숨겼습니다. 금부치를 녹여 단추처럼 만들어 달기도 했습니다. 건문에서 적발되면 모두
압수되었습니다.이시기 부산왕의 풍경을 전하는 기록에는 비슷한 장면이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구두 한쪽에 압수된 물건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놓치기 쉬운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이동은 한 방향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같은시기 반대
방향으로도 거대한 인파가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만주와 일본과 사알린에
흩어져 있던 조선인들이 돌아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수는 200만 명 안팎으로 추선됩니다. 부산왕에서는
배가 들어오고 나가는 일이 동시에 벌어졌습니다. 일본인은 배에 오르고 조선인은 배에서
내렸습니다. 같은 부두에서 두 개의 역사가 교차한 것입니다. 돌아온
조선인들은 집이 없었습니다. 일자리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눈을 돌린 곳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일본인이 비운 집과 공장이었습니다. 여기서 갈등의 씨앗이 자랍니다. 빈
재산은 하나인데 그것을 원하는 사람은 여럿이었습니다. 원래 그 땅에서 소작을 붙이던 농민이
있었고 그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가 있었습니다. 돌아온 귀환 동포가
있었고 북쪽에서 내려온 피난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돈과 정보를 가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행정 경험이 있는 사람, 일본어를 잘하는 사람,
미군정과 줄이 닿는 사람. 이들은 남들보다 먼저 움직였습니다.
어느 시대든 혼란기에 가장 크게 버는 사람은 정보를 먼저 아는 사람이었습니다.이
시기를 두고 사람들은 모리베의 시대라는 말을 썼습니다. 모리라는 말은 이익을 도모한다는 뜻입니다.
빈집을 사고 팔고 서류를 만들고 관리인 자리를 얻고 물자를 빼돌리는
일이 횡행했습니다. 일본인 명의를 그대로 둔 채 실질적으로 재산을 차지하는 방법도
귀속재산의 규모와 관리인 제도
쓰였습니다. 가짜 매매 계약서를 소급해서 만드는 일도 있었습니다.
미군정은이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됩니다. 일본인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정책을 유지하는 한 재산은 계속 흩어질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익을 챙기는 것은 되게 힘 있는 소수였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계산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미군정은이 재산의 성격을 다르게 보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부동산 목록이 아니었습니다. 나만이라는 사회를 어떤
방향으로 재편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물적 토대였습니다. 당시 남한에서는 좌우 대립이 격화되고
있었습니다. 한쪽에서는 공장을 노동자가 관리하고 토지를 무상으로
분배하자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었습니다. 북쪽에서는 실제로 그 방향의 조치가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미군정 입장에서이 재산이 그런 방식으로 처리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였습니다. 먼저 국가가 전부 거두어들이는 것.
그리고 그 뒤에 국가가 정한 방식으로 개인에게 파는 것. 무상분배가 아니라
유상 매각.이 이 원칙이 이후 10여년 동안 한국 경제의 뼈대를 만들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1945년 12월 6일 법령 제3호가 공포됩니다.
정식 명칭은 조선 내에 있는 일본인 재산권 취득에 관한 건이었습니다.이
법령은 짧았지만 위력은 엄청났습니다. 핵심 조항은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8월 9일 이후 일본 정부와 그 기관, 일본 국민과 회사와 단체가
소유하거나 관리하던 모든 종류의 재산은 9월 25일자로 조선 군정청이
취득한다. 여기서 두 개의 날짜를 눈여겨 보셔야 합니다. 먼저 8월
9일입니다.이 날짜가 왜 등장할까요? 8월 9일은 소련이 대일 선전 포고를 하고 만주로
진공한 날이며 두 번째 원자 폭탄이 떨어진 날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일본
지도부가 사실상 항복을 결정하는 회의에 들어간 날입니다. 미군정은
바로 이날을 기준선으로 잡았습니다. 그날 이후 일본인이 한 재산 처분은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었습니다. 다음은 9월 25일입니다.
법령이 나온 것은 12월인데 소유권 취득 시점은 9월로 되어 있습니다.
9월 25일은 앞서 말씀드린 법령 JO가 공포된 날이었습니다.
즉 미군정은 자신들이 이미 9월에 그 재산을 손에 넣은 것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법이 뒤늦게 나왔지만
효력은 과거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이것을 소급 적용이라고 부릅니다.
법의 세계에서 소급 적용은 아주 예외적인 일입니다. 오늘 만든 규칙으로 어제의 행동을 처벌하거나
무효로 만드는 것은 원칙적으로 금지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예외가 대규모로 일어났습니다. 결과는 즉각적이었습니다.
광복 직후 넉달 동안 이루어진 일본인 재산 거래가 원칙적으로 전부 무효가
되었습니다. 집을 샀다고 믿었던 사람은 하루 아침에 아무것도 아닌 종이를 손해 준샘이 되었습니다. 돈을
치르고 열쇠까지 받은 사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물론 예외를 다투는 절차는
있었습니다. 자신이 원래 조선인 소유였음을 입증하거나 정당한 절차를
밟았음을 추장해 심사를 청구할 수 있었습니다.이를 위해 재산소 절차가 마련되었습니다.
그러나 서류와 증인과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가진 것이 적은 사람일수록 그 벽은 높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적산이라는 이름은 귀속 재산이라는 이름으로 바뀝니다. 적국의
재산에서 국가에 귀속된 재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는 것은 성격이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빼앗은 재산이 아니라 관리하고 처분해야 할 국가
자산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이 재산은 정치가 됩니다.
여기서 귀속 재산의 목록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 보겠습니다. 우리는
흔히 적산이라고 하면 집과 공장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실제 목록은 훨씬
넓었습니다. 먼저 금융입니다. 식민지 조선에는 일본계 은행과 금융 조합, 신탁
회사와 보험 회사가 촘촘히 자리잡고 있었습니다.이 기관들이 통째로 귀속 대상이
되었습니다. 은행 건물과 금고만 넘어간 것이 아닙니다. 대출 채권과
예금 채무 담보로 잡혀 있던 토지와 건물까지 함께 넘어갔습니다. 이것이
왜 중요할까요? 당시 조선인 상공업자와 농민 가운데 상당수가이
금융 기관에 빚을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빚을 준 쪽이 사라지자 그 채권 관계를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여기에 인플레이션이 겹치면서 상황은 더 복잡해졌습니다.
빚의 실질 가치가 빠르게 줄어드는 현상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재앙이었고 누군가에게는
뜻밖에 해방이었습니다. 다음은 지하자원입니다. 광사는 식민지 경제의 핵심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금과 은, 철과 텅스텐, 흑연과 석탄이 채굴되었습니다.이
광산들의 채굴권과 시설이 귀속 재산이 되었습니다. 일부는 국가가 계속
보유했고 일부는 민간에 넘어갔습니다. 전쟁 이후 국제 정세 속에서 특정
광물의 가격이 급등하면서 광산 불화를 받은 이들이 큰 이익을 얻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바다도 있었습니다.
어업권과 수산 가공 시설, 어선과 냉동 창고가 넘어갔습니다.
해안 도시의 어항 시설 상당수가 일본 자본의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교통도
마찬가지입니다. 철도와 역사, 궤도와 차량, 버스 회사와 운수 회사가 대상이
되었습니다. 전기와 가스 같은 공급 시설도 포함되었습니다.
그리고 조금 다른 성격의 재산도 있었습니다. 문화와 기록에 관한 것들입니다. 박물관과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던 유물과 도서 총독부가 축적한 방대한 행정 기록 지적도와
등기부 각종 조사 자료가 남았습니다.이 가운데 상당량은 그대로 인수되어
오늘날 우리 역사 연구의 기초 자료가 되었습니다. 지적도와 토지대장이 대표적입니다.이
문서들이 없었다면 이후에 토지 행정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반대로
사라진 것들도 많았습니다. 폐전 직후 소각된 문서가 있었고 혼란기에 흩어진
자료가 있었으며 일본으로 반출된 물건도 있었습니다. 문화재 반환 문제가 훗날 한일 회담에 의제가 된
배경에 이런 사정이 있습니다. 이제 실제로 재산을 파는 절차를 살펴보겠습니다.
귀속 재산의 매각은 몇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원칙은 공개 경쟁 입찰이었습니다.
값을 정하고 공고를 내고 응찰을 받아놓은 값을 부른 사람에게 넘기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우선권을 가진 사람에게 먼저 기회가 주어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임차인과 관리인, 종업원 조직 등이
여기에 해당했습니다. 또한 경쟁이 성립하지 않는 경우에는 수위 계약으로
넘기는 일도 있었습니다. 즉 특정인과 직접 협상에 파는 방식입니다. 바로이
지점에서 잡음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값을 매기는 평가가 측정했는가? 공고
기간이 충분했는가? 응찰자가 실제로 경쟁했는가? 이런 질문들이 계속
제기되었습니다. 당시 신문에는 특정 재산이 터문이 없이 싼 값에 넘어갔다는 기사가
반복해서 실렸습니다. 국회에서도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의원들은 불라 대상자 선정 과정과
가격 산정 근거를 따져 물었습니다. 특정 인물과 정치권의 관계를 지적하는
발언도 나왔습니다. 조사위원회가 꾸려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안은 명확한 결론에 이르지 못한 채 흐지부지되었습니다. 전쟁과 정치적 격변이 계속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같은 시기에 또
하나의 청산 작업이 시도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친일 행위자에 대한 조사와
처벌 문제였습니다. 정부 수립 직후 특별법이 만들어지고 조사 기구가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이 활동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여러 정치적 충돌 끝에 조사 기구는
사실상 무력화되었습니다.이 두 가지 흐름을 나란히 놓고 보면 흥미로운 대비가 드러납니다.
한쪽에서는 식민 지배의 물적 유산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가 논이되고 있었습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식민
지배의 협력한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논의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대조적이었습니다. 물적 유산의 분배는 신속하게 진행되었습니다.
민적 청산은 지지부진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그 두 흐름이 만나기도 했습니다. 식민지 시기에
축적한 자본과 인맥과 행정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새 질서에서도 유리한
신한공사와 귀속농지
위치를 차지하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두고 학계에서는 오랫동안 논쟁이 이어져 왔습니다.
한쪽에서는이를 청산 실패의 대표적 사례로 봅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당시의 극심한 인력 부족과 전쟁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고 봅니다. 행정과 산업을 아는 사람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현실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이 논쟁 역시 어느 한쪽으로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 시기의 선택들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사회적
감정의 뿌리를 만들었다는 사실입니다. 공정에 대한 한국 사회의 유별란
민감함은 어쩌면이 시기의 기억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출발선이
어떻게 그어졌는지를 목격한 사회는 그 뒤로 오랫동안 출발선을 의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한편이 시기의 기록을 살펴보면 예상밖에 장면도 발견됩니다.
불화를 받은 사람이 곧바로 되아 차익을 남기는 일이 흔했다는 점입니다. 공장을 운영할 의사가 없는
사람이 우선권만 확보해 권리를 넘기는 경우였습니다. 그래서 정부는 일정 기간 전매를
제한하는 규정을 두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규정을 우회하는 방법은 늘 존재했습니다.
명의를 빌리거나 형식상 임대차로 처리하거나 회사 지분을 넘기는 방식이
쓰였습니다. 제도가 만들어지면 그 제도의 틈을 찾는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이것은 특정 시대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만 그 시대에는 걸린 자산의 규모가 유난히 컸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미군정이 손에 넣은 재산의 규모는 도대체 어느 정도였을까요?
숫자를 하나하나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당시 통계 자체가 불완전했고 조사 주체마다 기준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다만 연구자들이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그림은 이렇습니다. 나만에 존재하던 근대적
생산 시설의 대부분이 여기에 포함되었다는 것입니다. 발전소와 변전소가 그러했습니다. 방직 공장과
제사 공장이 그러했습니다. 재분소와 정미소, 양조장과 재과 공장이 그러했습니다. 시멘트 공장과
유리 공장, 고무 공장과 제지 공장이 그러했습니다. 광산과 채석장이 그러했습니다.
은행과 보험 회사와 신탁 회사가 그러했습니다. 철도와 항만 시설,
창고와 하역장이 그러했습니다. 여기에 병원과 학교 건물, 신사와 사찰
부지, 관사와 사택 그리고 수많은 개인 주택이 더해졌습니다.
숫자로 표현하면 귀속 사업체는 3,000 곳곳에 가까웠다는 칩계가 있고 귀속 부동산 건수는 수십만 건에
이르렀다는 자료도 있습니다. 기준에 따라 편차가 크로 정확한 숫자로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방향은
분명합니다. 한 나라의 산업 기반이 통째로 하나의 목록 위에 놓였습니다. 이런 상황은
세계사에서도 흔치 않습니다. 전쟁에서 진 나라의 재산이 승전국에 넘어가는
일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식민지였던 땅에서 지배자 집단 전체의 재산이
한꺼번에 국가 자산으로 전환되고 그것이 다시 그 땅의 주민들에게 되리는 과정이 벌어진 사례는
드웁니다. 한국 현대사의 출발점이 유별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제
미군정 앞에는 현실적인 문제가 놓였습니다.이 어마어마한 재산을 누가 관리할
것인가? 미군은 군인이었습니다. 방직 공장을 돌릴 줄 아는 사람도
아니었고 조선말을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채택된 방식이
관리인 제도였습니다. 각 공장과 건물마다 관리인을 임명에 맡기는 방식이었습니다.
문제는 누구를 관리인으로 앉치느냐였습니다. 여기서 첫 번째 균열이 생깁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광복 직후 많은 공장에서는 노동자들이 스스로 관리
위원회를 꾸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관리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기계를 아는 사람도 공정을 아는 사람도 자신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군정의 선택은 달랐습니다.
미군정은 대체로 기존의 경영진과 사무직, 자산가와 지역 유지 그리고
미군정 행정에 협조하는 인물들을 관리인으로 임명했습니다. 노동자 자주 관리 조직은 정치적으로
불론하게 여겨졌습니다. 당시 남한의 좌우 대립 구도 속에서 공장 관리권은 곧 정치적 진영의
문제로 읽혔습니다. 결과적으로 여러 공장에서 자주 관리위원회는 해산되거나
배제되었습니다.이 과정에서 충돌도 적지 않았습니다. 파업이 일어났고 경찰이 투입되었고
노동운동은 위축되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인사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앞으로 그 공장을 누가 소유하게 될지를 예고하는 신호였습니다. 왜냐하면 이후의 매각 과정에서
관리인과 임차인에게 우선권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관리인이 된다는 것은
훗날 그 공장의 주인이 될 자리를 미리 확보한다는 뜻이었습니다.이
사실이 알려지자 관리인 자리를 둘러싼 경쟁이 치열해졌습니다. 로비가 벌어졌고 소개장이 오고 뒷돈이
움직였습니다. 미군 장교와 통역을 낀 연주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식이 통역관의 위세를 두고 통역 정치라는 말까지 생겨났습니다. 영어를 할 줄 아는 소수가 정보와
결정의 길목을 차지했기 때문입니다. 관리 실태도 좋지 못했습니다. 원료가
부족했고 전력이 끊겼고 부품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일본인 기술자가
빠져나간 자리는 쉽게 매워지지 않았습니다. 식민지 시절 조선인은 고급 기술직에서 체계적으로 배제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많은 공장이 제대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가동률은 광복 이전에 비해 크게 떨어졌습니다. 여기에 남북 분단이 결정타를
날렸습니다. 한반도의 공업은 남과 북이 한 몸처럼 짜여 있었습니다. 전력과 화학과
1948년, 땅문서를 받아 든 농민들
중공업은 북쪽에 몰려 있었고 경공업과 소비제는 남쪽에 많았습니다.
38도선이 그어지면서이 연결이 끊어졌습니다. 특히 1948년 북쪽의 송전 중단은
남한 산업에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전기가 없으면 기계는 고철이었습니다.
그래서 귀속 재산은 이중적인 물건이었습니다. 장부상으로는 엄청난 자산이었지만
현실에서는 멈춰 선설비였습니다. 그 사이 다른 종류의 사건도 벌어졌습니다.
멈춰 선 공장에서 물건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기계 부품이 떼어져
팔려 나갔고 구리선이 뜯였고 창고의 원료가 밤 사이라졌습니다.
이것을 두고 당시 신문들은 귀속 재산의 도난이라고 보도했습니다. 관리인이 직접 개입한 사례도
적발되었습니다. 재산을 지키라고 앉힌 사람이 재산을 빼돌리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이
시기에 혼란을 상징하는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어떤 공장은 서류상으로는
정상 가동 중이었지만 실제로 [목을 가다듬음] 가보면 지붕만 남아 있었다는 기록입니다. 행정은 종이
위에서만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주택 문제는 또 다른 양상으로 흘렀습니다. 일본인이 남긴 집을 흔히
적산 가혹이라고 불렀습니다.이 집들은 대게 목조 2층이거나 바다위방과 텐마루를 갖춘 일본식
구조였습니다. 도시 중심에 좋은 자리에 있었고 상하수도와 전기가 들어왔습니다.
당시 기준으로는 최고급 주택이었습니다.이 집들에는 이미 사람이 살고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광복 직후 들어간 사람들, 계약서를 쓰고 들어간
사람들, 관리를 맡아 들어간 사람들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미군정은 이들에게
임대료를 물리는 방식으로 일단 상황을 정리했습니다. 즉 그 집에 사는 사람을 임차인으로
만든 것입니다.이 이 조치 역시 훗날 결정적인 결과를 낳습니다. 임차인에게
우선 매수권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먼저 들어가 산 사람이 결국 그 집에
주인이 되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래서 광복 직후 며칠 사이에 발
빠른 선택이 한 집안에 이후 수십년을 갈라놓기도 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복잡해집니다. 누군가는 그것을 운이라고 부를 것이고 누군가는 그것을 불공정이라고 부를
것입니다. 역사는 대게 그 둘이 섞여 있습니다. 이제 농지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당시 인구의 절대 다수는 농민이었고 농민의 절대 다수는
소장농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공장이 아니라 논이었습니다.
일본인과 일본계 회사가 소유했던 농지는 미군정으로 넘어갔습니다.이
땅을 관리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 신한공사였습니다. 신한공사는 1946년에 설립되어 옛
동양 척식 주식 회사의 자산을 비롯한 귀속 농지를 관리했습니다. 그 규모는 실로 컸습니다.
1947년 기준으로 신한공사가 보유한 농지는 남한 전체 농지의 15%를
넘는 수준이었다는 집계가 있습니다. 소작 관계로 얽힌 농가는 수십만 호에
달했습니다. 문제는 신한공사가 사실상 지주 노릇을 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농민들은 광복이 되었으니 소장료가 사라질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지주의 이름만 바뀌었을뿐
소장료는 그대로 거쳤습니다. 일본인 대신 미군정이 받아갔습니다.
농민들의 실망은 컸습니다. 여기에 쌀 정책이 겹쳤습니다. 미군정은 초기에
쌀의 자유거래를 허용했다가 물가가 폭등하자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쌀을 강제로 걷는 미국 수집 정책이 시행되었습니다. 농민의 입장에서 이것은 공출의
재판처럼 느껴졌습니다. 식민지 시절 그토록 원망하던 공출이
이름을 바꿔 돌아온 것처럼 보였습니다.이 불만은 1946년 가을 대규모 소요로
폭발합니다. 대구를 시작으로 남한 곳곳에서 충돌이 일어났습니다.이
사건의 배경에는 식량난과 실업 그리고 토지 문제가 겹겹이 깔려 있었습니다.
미군정은 여기서 깨닫습니다. 토지 문제를 그대로 두면 나만의 정치적
안정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게다가 비교 대상이 바로 위에 있었습니다.
북쪽에서는 이미 1946년 봄에 토지 개혁이 단행되었습니다.
무상몰수 무상분배라는 방식이었습니다. 그 소식은 38도선을 넘어 남쪽
농민들에게 전해졌습니다. 남쪽 농민들이 왜 우리는 아직인가라고 묻기 시작했습니다.
미군정은 압박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무상 분배를 택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사유재산 질서를 흔들지 않으면서 농민의 지지를 얻어야 했습니다. 그
해법이 유상 매각이었습니다. 돈을 받고 팔돼 오랜 기간에 걸쳐
나누어 갚게 하는 방식이었습니다. 1948년 3월 미군정은 결단을
내립니다. 법령 제173호와 제174호가 이따라 공포되었습니다.
하나는 중앙 토지 행정처를 세우는 내용이었고 다른 하나는 신한공사를 해산하는 내용이었습니다.이
두 개의 법령으로 귀속 농지의 매각이 시작되었습니다. 시점을 눈여겨 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두 달 뒤인 5월에 남한 단독 선거가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농민의 표가 어디로 향하느냐가 대단히 중요한
시점이었습니다. 토지 분배는 정치적 계산과 떼어놓고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외곽 조건은
이러했습니다. 대상은 원칙적으로 그 농지를 실제로 붙이던 소장농이었습니다.
한 농가가 가질 수 있는 면적에는 상한이 있었습니다. 대체로 두 수준이었습니다.
값은 그 땅에서 나는 주된 작물의 한해 생산량의 세 배로 매겨졌습니다.
그리고 그 값을 매년 수학량의 1분의씩 15년에 걸쳐 현물로 갚게 했습니다. 즉 돈이 없어도 농사만
정부 수립과 귀속재산처리법
지으면 갚을 수 있는 구조였습니다. 농민에게 이것은 엄청난 변화였습니다.
소장농이 자기 땅을 가진 자장농이 되는 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수백년
동안 이어져온 소작 관계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땅문서에 자기 이름이 올라간다는 것은
그 시대 농민에게 인생 전체가 바뀌는 사건이었습니다. 한해 수학의 5분의을 15년 동안내는
일은 결코 가볍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15년이 끝나면 땅은 온전히 자기
것이 되었습니다. 끝이 보이는 부담과 끝이 없는 소작은 완전히 다른
것이었습니다.이 귀속 농지 매각은 이후 대한민국 농지 개혁의 예고편이 되었습니다. 정부
수립 뒤 재정된 농지 개혁법은 조선인 지주의 땅까지 대상으로 사마 같은 원리를 확장했습니다.
유상 매수 유상 분배라는 방식이었습니다. 그 결과 한국 사회에서 전통적인 지주
계층은 급속히 힘을 잃습니다. 이것이 훗날 한국 사회의 성격을 결정하는 큰
요인이 됩니다. 토지에 묶여 있던 부가 흩어졌고 대신 교육과 사업으로
신분을 바꾸려는 열망이 폭발했기 때문입니다. 다만이 과정이 매끄럽기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농지 개혁이 다가온다는 소문이 퍼지자 지주들은
미리 땅을 팔았습니다. 소작권을 거두고 자기가 직접 짓는 것처럼 꾸미기도 했습니다. 친척 이름으로
땅을 나누어 놓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분배된 면적은 애초 예상보다
줄었습니다. 또한 상환 부담을 감당하지 못해 결국 땅을 되판 농가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큰 흐름은 되돌릴 수 없었습니다. 땅의 주인
지도가 바뀌었습니다. 한편 공장과 상점과 주택 같은 이름바
귀속 사업체와 귀속 부동산은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미군정은 1947년
무렵 재산의 매각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대규모 처분에는 신중했습니다.
정치적으로 민감했기 때문입니다. 곧 한국인의 정부가 세워질 예정이었고 그
정부가 처리해야 할 몫이라는 인식도 있었습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그리고 한 달도 지나지 않은 9월 11일 한미 사이에 재정과 재산에
관한 협정이 체결됩니다.이 이 협정으로 미군정이 가지고 있던 귀속 재산은 대한민국 정부로 넘어갔습니다.
이제 남은 일본인 재산의 주인은 대한민국이 되었습니다.이 장면은 상징적이었습니다.
일본에서 미군정으로 미군정에서 대한민국으로 세 번째 주인이 등장한 것입니다. 새
정부에게이 재산은 축복이자 시험이었습니다. 축복인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정부는 돈이 없었습니다. 세금을 거둘 체계도 미비했고 산업 기반도 무너져 있었습니다. 그런
정부에게 팔 수 있는 자산이 통째로 굴러들어온 것입니다. 시험인 이유도 분명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나누느냐에 따라 새 나라의 경제 질서가 결정될 것이었습니다. 공정하게 나누면
광범위한 중산층이 생길 것이고 소수에게 몰리면 특권 계층이 생길 것이었습니다.이
문제는 재헌 국회에서도 뜨거운 쟁점이었습니다. 국유화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핵심 산업은 국가가 소유해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실제로 재헌원법에는 주요 자원과 기관 산업의 국유 또는 공유 원칙을 담은 조항이 들어 있었습니다. 반대편에는
조속한 민간 매각을 추장하는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정부가 운영하면 비효율적이며 민간에 넘겨야 생산이
살아난다는 논리였습니다. 또한 정부 재정을 메우려면 팔아야 한다는 현실론도 강했습니다.
논쟁 끝에 1949년 12월 귀속 재산 처리법이 재정됩니다. 이법의
뼈대는 이러했습니다. 원칙적으로 귀속 재산은 민간에 매각한다. 다만 국가 기관 산업과
공공성이 큰 재산은 국유 또는 공유로 남긴다. 그리고 매각할 때는 우선권을
준다. 우선권을 받는 사람이 누구였을까요? 그 재산을 임차하고 있던 사람,
관리하고 있던 사람, 그 기업의 주주였던 사람, 그리고 그 사업체에서
올해 일한 종업원 등이 거론되었습니다. 여기에 독립운동가와 그 유가족,
전몰경 유족 등을 배려하는 조항도 논의되었습니다. 법의 문장만 보면 나쁘지 않아
보입니다. 실제로 그 안에는 상당한 사회적 고민이 담겨 있었습니다.
문제는 언제나 문장이 아니라 현실에서 벌어집니다. 우선권의 맨 앞줄에 선
사람은 결국 관리인과 임차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관리인과 임차인은 누가
정했습니까? 미군정 시기에 정해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즉 광복 직후 힘과 정보와 연주를
가졌던 사람들이 몇 년 뒤 소유권의 문앞에 가장 가까이서 있었던 것입니다.이 구조를 이해하면 이후
벌어지는 일이 자연스럽게 보입니다. 매각 가격도 문제였습니다.
귀속 재산의 값은 시가보다 낮게 매겨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평가 기준이 불명확했고 평가하는 사람의
재량이 컸습니다. 게다가 대금은 한 번에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러 해에 걸쳐 나누어내는 분할 상환 방식이 널리 쓰였습니다. 여기에 결정적인 변수가 하나 끼어듭니다.
인플레이션이었습니다. 1940년대 후반부터 50년대에 걸쳐
물가는 무섭게 올랐습니다. 전쟁까지 겹치면서 화폐 가치는 급격히
떨어졌습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처음에 큰 금액으로 보였던 분할
상황금이 몇 해가 지나자 우수운 액수가 되어 버렸습니다. 공장 하나
값이 몇 년 뒤에는 트럭 몇대 값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도
이런 말이 돌았습니다. 귀속 재산을 받은 사람은 사실상 공짜로 받은
것이나 다름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물론 모든 경우가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멈춰 선 공장을 되살리기
위해 빚을 찌고 설비를 고친 사람도 있었습니다. 전쟁으로 공장이 제더미가
되어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큰 흐름에서 보면 귀속 재산의 불하는 자산을
극적으로 이전시킨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전의 방향은 대체로 위쪽을 향했습니다.
1950년 6월 전쟁이 터졌습니다. 귀속 재산 처리는 순식간에
멈췄습니다. 서류가 불탔고 담당 관청은 남쪽으로 피난했고 공장은 전선에 삼켜졌습니다.
무엇이 어디에 있고 누구의 것인지 확인할 방법 자체가 사라졌습니다. 전쟁은 재산의 물리적 실체를
파괴했습니다. 폭격으로 공장이 무너졌고 기계가 녹아내렸습니다.
전선이 오르내리면서 같은 도시가 여러 번 주인을 바꾸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남아 있던 설비마저 뜯겨
나갔습니다. 그런데 전쟁은 동시에 정반대의 효과도 만들어냈습니다.
전쟁, 그리고 임시수도 부산의 불하
정부가 돈이 절실해진 것입니다. 전쟁을 치르려면 재정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세금은 거치지 않았습니다. 국토의 상당 부분이 전장이었고 인구는
흩어졌습니다. 정부가 손해 준 팔 수 있는 물건은 사실상 귀속 재산뿐이었습니다.
그래서 1951년 임시수도 부산에서 불라 업무가 다시 시작됩니다. 전쟁
중에 재산을 팔았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절 정부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많지
않았습니다. 동시에이 상황은 위험한 조합이기도 했습니다. 감시가 느슨한
전시, 다급한 재정, 그리고 헐값에 나온 거대한 자산 목록. 부정이
잘하기에 이보다 좋은 토양은 없었습니다. 부산 시절의 이야기 가운데는 지금도 회자되는 장면들이
있습니다. 임시 수도의 좁은 거리에는 관청과 요리집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공무원과 사업가와 정치인이 같은 골목에서 마주쳤습니다. 거래는 종종 사무실이 아니라 술상
앞에서 이루어졌다고 전해집니다. 물론 이런 이야기는 회고와 소문이 섞여
있어 하나하나 사실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당시 국회와 언론이 귀속 재산
불라의 불공정을 반복해서 문제 삼았다는 기록은 분명히 남아 있습니다. 휴전 이후 불안은 더욱
속도를 냅니다. 1950년대 중후반에 걸쳐 귀속 재산의 대부분이 민간의
손으로 넘어갔습니다.이시기 한국 경제에는 또 하나의 거대한 변수가 있었습니다. 원조였습니다.
미국의 원조 물자가 대량으로 들어왔습니다. 밀가루와 설탕과 면화가 대표적이었습니다.이
원료를 배정받는 것은 곧 돈을 버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이 세
가지를 흰 산업이라고 불렀습니다. 밀가루도 희고 설탕도 희고 면화도
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귀속 재산이 결합합니다. 공장은 귀속 재산
불화로 확보하고 원료는 원조 배정으로 확보하고 자금은 정부 관리은행의
융자로 확보하는 구조였습니다. 세 개의 문이 모두 정부 쪽에 있었습니다. 그 문을 지나는 사람은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지나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출발선에 서지 못했습니다.
한국형 정경 유착이라는 말의 뿌리가 여기에 다 있습니다.이 시기에 성장의
훗날 대기업으로 이어진 사례들이 있습니다. 몇 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일제 강점기 조선에는 일본 자본의 맥주 회사가 두 곳 있었습니다. 광복
이후이 두 회사는 귀속 재산이 되었고 뒤에 각각 민간에 불화되어 한국의
대표적인 맥주 기업으로 이어졌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국내 맥주 산업의
개보가 여기서 시작됩니다. 직물 분야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수원 지역에 있던 일본계
직물 공장이 귀속 재산으로 관리되다가 민간에 넘어갔고 그 회사는 훗날 큰
기업 집단으로 성장했습니다. 화약과 화학 분야에서도 옛본 회사의
공장이 불화되어 현재까지 이어지는 기업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재분과
재당 방직 분야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이어집니다. 여기서 오해를 피하기
위해 분명히 해둘 것이 있습니다. 귀속 재산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그 기업의 이후 성취가 전부 설명되지는
않습니다. 폐허가 된 설비를 다시 세우고 기술을 익히고 시장을 개척한
노력은 별개의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불화를 받고도 몇 년 만에 무너진 기업도 많았습니다. 다만
출발선이 같지 않았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역사학과 경제학의 논쟁은 대체로이 지점에서
갈립니다. 한쪽에서는 귀속재산 불화가 한국 자본주의에 왜곡된 출발점이었다고
봅니다. 특해와 유착의 관행이 이때 굳어졌다는 것입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그것이 자본이 전무했던 사회에서 산업 자본을 형성한 불가피한 통로였다고 봅니다. 누군가는 공장을 맡아야 했고
그럴 자원과 경험을 가진 사람은 소수였다는 것입니다. 두 해석은 완전히 상반되어 보이지만 서로를
완전히 배제하지도 않습니다. 같은 사건이 외곡의 출발점이면서 동시에
형성의 출발점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이 이 대목에서 국사 편찬 위원회를 비롯한 여러 기관의 서술은
비교적 신중한 표현을 씁니다. 귀속 재산 처리는 남한 경제 체제를 형성한
첫 단추였으며 동시에 그 과정에서 발생한 부정과 유착은 이후 경제
발전에 부담으로 남았다는 것입니다. 빛과 그늘을 함께 적어둔 것입니다.
한편 모든 귀속 재산이 팔려 나간 것은 아닙니다. 국가 기관 산업으로 분류된 곳들은 국유 또는 공유로
남았습니다. 전력과 철도, 통신과 항만, 일부 광산과 제철 관련 시설이
그러했습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훗날 공기업으로 이어집니다.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몇몇 공기업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 출발점에 귀속 재산이 놓여 있습니다. 학교와
병원 부지도 특별한 경로를 밟았습니다. 일본인이 세운 학교 건물과 부지가 한국의 교육 기관으로
전환된 사례가 많습니다. 신사가 있던 자리에는 다른 건물이 들어섰습니다.
도시의지도 자체가 재편된 것입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걷고 있는
도시의 골격 가운데 상당 부분이 그 시기에 결정되었다는 점입니다.
관공서의 위치 큰 병원의 자리 오래된 은행 건물 도심의 학교 부지 식민지
시기에 만들어지고 광복 이후 귀속 재산으로 넘어가고 다시 세주인을 만난
자리들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근대문화 유산이라고 부르며 찾아가는 건물들
가운데 다수가 바로이 개보 위에 있습니다. 군산의 오래된 거리 목포의
언덕길, 인천의 개양장 일대, 대구와 부산의 옛도심, 그곳에 남은 일본식
건물들은 대게 같은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 지어진 시기가 있고 비워진
순간이 있고 국가에 귀속된 시간이 있고 세주인이 들어온 날이 있습니다.
한채의 집이네 개의 시대를 통과한 셈입니다.이 집들을 두고 오랫동안
논쟁이 있었습니다. 식민 지배의 잔재인이 없애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반대로 그 시대를
증언하는 물증인이 남겨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많은 건물이 흘렸고 일부는 보존되었습니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지울 것인가?이 이 질문은 지금도 끝나지 않았습니다.이
문제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전국에는 일본식 건물이 집중적으로
남은 지역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곳이 군산입니다. 군산은 곡창지대의 쌀이 모여 일본으로
실려 나가던 한구였습니다. 그래서 한구 주변의 은행과 참고 회사 사무실과 일본인 주택이 밀집해
있었습니다. 오늘날 군산의 예시가지를 걸으면 그 시절의 골격이 그대로
보입니다. 넓은 도로와 낮은 건물 그리고 한구를 향해 뻗은 길 목포도
비슷합니다. 목포는 개항 이후 급격히 성장한 도시였습니다.
언덕 위에는 일본인 주택가 있었고 아래쪽에는 조선인 마을이 있었습니다.
도시의 높낮지가 곧 신분의 높낮지였습니다. 인천의 개양장 일대도
마찬가지입니다.이 이 지역에는 여러 나라의 조개가 있었고 그 흔적이 건물의 양식으로
남아 있습니다. 포항의 구룡포에는 일본인 어 이주민들이 만든 거리가 남아 있습니다. 동해에서 잡히는
고기를 노리고 건너온 사람들이 만든 마을이었습니다. 대구와 부산의 옛도심에도 유사한
흔적이 이어집니다.이 건물들은 광복 이후 모두 같은 절차를 통과했습니다.
주인이 떠났고 국가에 귀속되었고 임차인이 들어갔고 결국 매각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그 집에 등기부를 거슬러 올라가면 어느 지점에서 낯선 이름을 만나게 됩니다. 수십년 전 그 집을
지은 사람의 이름입니다. 한편이 집들은 광복 이후 심각했던 주택란을
상당 부분 흡수하는 역할도 했습니다. 당시 도시로는 사람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해외에서 돌아온 동포가 있었고 북쪽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있었으며 일자리를 찾아온 농촌 인구가 있었습니다. 서울의 인구는 몇 해
사이에 급격히 불어났습니다. 그런데 집은 늘지 않았습니다. 건축
자재도 없었고 자금도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비계된 수만
채의 주택은 귀중한 자원이었습니다. 문제는 그 집이 원래 한 가족을 위해
지어졌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래서 한채의 집에 여러 가구가 나누어 사는 방식이 널리 퍼졌습니다.
방마다 다른 가족이 살고 부엌과 화장실을 함께 쓰는 형태였습니다.
일본식 다담다미 방에 온도를 놓고 텐마루를 막아 방으로 만드는 계조도 이루어졌습니다.
건축 양식이 생활 방식에 맞춰 변형된 것입니다. 지금 남아 있는 옛식
가혹들을 살펴보면 이런 계조의 흔적이 겹겹이 쌓여 있습니다. 한 체의 집에
두 나라의 생활사가 층층히 남은 셈입니다. 이제 조금 더 큰 그림에서이 사건의 무게를 가음해
보겠습니다. 경제사 연구자들은 귀속 재산이 광복 직후 남한 자산에서
차지한 비중을 여러 방식으로 추정해 왔습니다. 추정 기준과 대상 범위에 따라 수치는 크게 달라집니다. 다만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것은 제조업 시설과 대규모 자산에서 그 비중이 압도적이었다는 점입니다. 특히 종업원
규모가 큰 공장일수록 일본 자본의 비중이 높았습니다. 작은 가게와
소규모 작업장은 조선인의 것이 많았지만 규모가 커질수록 이야기가 달라졌습니다.이
구조가 의미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광복 직후 한국에는 근대적 산업을
소유해 본 경험을 가진 사람이 대단히 적었다는 것입니다. 경영과 회계와
기술과 팔로를 모두 다뤄본 조선이는 소수였습니다. 그래서 불라 이후 초기에는 시행
착오가 컸습니다. 공장을 받았지만 원료를 구하지 못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기계를 돌렸지만 팔곳을
찾지 못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기술자를 구하지 못해 설비를 놀린 경우도 있었습니다.이
시기의 실패담은 성공담만큼이나 많습니다. 다만 기록으로 남는 것은
되게 성공한 쪽입니다. 이건 역시 역사를 볼 때 주의해야 할 지점입니다. 살아남은 자의 기록만
보면 그 시대가 실제보다 훨씬 매끄러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반드시 함께 기억해야 할
사실이 하나 더 있습니다.이 모든 재편의 시기에 대다수 사람들의 삶은
여전히 고단했다는 점입니다. 물가는 취소샀고 일자리는 부족했으며 식량은
모자랐습니다. 귀속 재산 불화로 인생이 바뀐 사람은 전체 인구에서 보면 극히
일부였습니다. 절대 다수는 그 목록의 이름을 올려볼 기회조차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광복
이후에 몇 해는 해방의 기쁨과 생존의 고통이 뒤엉힌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이 이야기를 기업의 창업 신화로만 소비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습니다. 같은시기 훨씬 많은
사람들이 다른 종류의 시간을 견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이 시기가 중요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한 사회가 무너진 질서 위에서 새 질서를 세울 때 무엇을 기준으로 삼는지가 결정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세워진 기준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국가가 먼저 거두어들인다.
그리고 개인에게 판다. 먼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사람에게 우선권을 준다. 값은 낮게 먹기고
오래 나누어 갚게 한다.이 원칙들은 당시로서는 나름의 합리성이 있었습니다. 생산을 빨리 제개하려면
그 시설을 아는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효율적이었습니다. 돈이 없는 사회에서 자산을 팔려면
분할 상황은 불가피했습니다. 그러나 같은 원칙이 다른 결과도 만들었습니다. 이미 유리한 자리에
있던 사람을 더 유리하게 만든 것입니다. 정책은 종종 이렇게 두 얼굴을 가집니다. 의도한 결과와
의도하지 않은 결과가 같은 문에서 함께 걸어나옵니다.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그 두 얼굴을
동시에 보는 훈련일지도 모릅니다. 이제 바다 건너로 시선을 옮겨 보겠습니다. 배를 타고 돌아간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은 일본에서 인양자라고 불렸습니다.
바깥에서 끌어올려진 사람들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조선뿐 아니라 만주와
대만과 사알린과 남양의 여러 지역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여기에 포함되었습니다.
그 수는 수백만 명에 달했습니다. 폐전 직후에 일본은 그들을 받아들릴
여력이 없었습니다. 도시는 폭격으로 제더미가 되어 있었고 식량은
부족했으며 일자리는 없었습니다. 고향에 돌아왔지만 반겨 주는 사람이
없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수십년 만에 돌아온 친척은 낯선 사람이었습니다.
바다 건너에서 지배자로 살던 사람들이 본국에서는 짐스러운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들은 곧 단체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정부를 향해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두고운 재산을 보상하라는
요구였습니다.이 요구는 일본 국내 정치에서 상당한 힘을 발휘했습니다.
수백만 명의 유권자가 걸린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일본 정부는 여러 차례에
걸쳐 인양자에게 급부금을 지급합니다. 다만 그것은 잃어버린 재산의 시가를
보상하는 성격은 아니었습니다. 일종의 위로와 정착 지원에 가까운 성격이었습니다.
그래서 불만은 계속 남았습니다. 그리고이 불만이 외교 무대로 옮겨갑니다.
1950년대 초과 일본은 국교를 정상화하기 위한 회담을 시작했습니다.
한국은 식민 지배로 인한 피해에 대한 청구권을 제기했습니다. 강제동원과 미지급 임금, 공탁금,
문화재 반환 그 밖에 여러 항목이 논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일본 측은 놀라운 주장을 들고
나옵니다. 한국에 두고 온 일본인의 재산에 대한 권리, 즉 대한 청구권을
추장한 것입니다. 논리는 이러했습니다. 국제법상 사유 재산은
존중되어야 하며 미군정이 그것을 몰수한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일본도 한국에
대해 청구할 것이 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식민 지배를 받은 나라가 배상을 요구하는 자리에서 지배했던 나라가
재산을 돌려 달라고 맞선 셈입니다. 회담장의 공기가 어땠을지 짐작이 가실
것입니다. 한국 측은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법령 제3호에 의해 제한 일본인
재산은 이미 8월 9일자로 소급해 처리되었으며 그 처리는 정당하다는 입장이었습니다.
나아가 그것은 식민 지배의 결과물이므로 애초에 정당한 사유 재산으로 볼 수 없다는 논리도
제기되었습니다.이 대립은 회담을 여러 해 동안 교착 상태에 빠뜨립니다. 여기에 회담
자체를 얼어붙게 만든 발언도 있었습니다. 1953년 일본측 대표가 일본의 조선
통치가 조선의 이로운 면도 있었다는 취지에 발언을 했습니다.이 발언으로
회담은 결렬되었고 이후 오랜 기간 중단되었습니다. 이식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미국의 해석이었습니다. 1951년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에는 재산 처리에 관한 조항이 있었습니다. 그 조항은 일본이 분리된
지역에 남긴 재산의 처리를 그 지역의 당국과 일본 사이의 협의에 맡기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문장이
모호했기 때문에 양측은 각자 유리하게 해석했습니다. 결국 미국이 견해를 밝히게 됩니다.
미국의 해석은 제한 일본인 재산이 이미 미군정과 한국 정부로 이전되었으므로 일본은 그에 대한
유효한 청구권을 추장할 수 없다는 취지였습니다. 다만 그 재산이 한국의 대일 청구권을
얼마나 상쇄하는지는 양국이 협의할 문제라고 덧붙였습니다. 1950년대 후반 일본은 결국
대한국권 주장을 철회합니다. 이로써 회담의 가장 큰 장애물 하나가
치워졌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해석에는 뼈 아픈 부분이 함께 있었습니다.
한국이 이미 상당한 재산을 넘겨 받았다는 사실이 이후 청구권 협상에서
한국의 요구를 깎는 논리로 착용할 여지를 남겼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후 협상에서 일본 측은이 점을 거듭
언급했습니다. 회담은 오랜 진통 끝에 1965년 타결됩니다.
한일 기본 조약과 함께 청구권 협정이 체결되었습니다. 일본은 무상 자금과 유상 차관 그리고
민간 신용을 제공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양국과 그 국민 사이의 청구권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는 문구가 들어갔습니다.이
문구는 이후 수십년 동안 논쟁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개인 청구권이
소멸되었는가를 두고 지금까지도 해석이 갈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확인할 것은 이것입니다. 광복 직후 한반도에 남겨진 일본인의 재산 문제는 단순히 집과 공장의
소유권 문제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20년 뒤 두 나라의 외교
협상 테입을 위에 그대로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그 협상의 결과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갈등의 법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재산의 역사가 외교의 역사가 된 것입니다. 한편 일본으로
돌아간 사람들 가운데는 조선을 잊지 못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태어난 도시를 그리워했습니다.
경성에서 학교를 다닌 사람, 부산의 바닷가에서 자한 사람, 하흥의 겨울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남긴 회고록에는 향수와 자기 연민이
짓게 배어 있습니다. 동시에 그 글에서 자주 빠져 있는 것이 있습니다. 자신들이 그 땅에서 무엇을
딛고서 있었는가에 대한 성찰입니다. 물론 모든 회고가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식민 지배의 구조를
정직하게 마주한 기록도 존재합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잃어버린
재산에 대한 기억이 빼앗았던 시간에 대한 기억보다 훨씬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기억이라는
것은 늘 자기 자리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일 것입니다.이 대목에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짚어야 합니다. 떠난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자기 자신을 피해자로 인식했다는 점입니다. 전쟁을
일으킨 것은 자기가 아니고 집을 잃은 것은 자기라는 감각이었습니다.
역사는 여러 층위의 고통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고통이 있다고 해서 구조에 대한 책임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식민 지배라는 구조 위에서 형성된 재산이 그 구조가 무너질 때
함께 무너진 것. 그것이이 사건의 본질에 가깝습니다. 다시 국내로 돌아오겠습니다.
1950년대가 끝나갈 무렵 재산의 대부분은 이미 민간의 손에 넘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여기서부터 아주 긴 뒷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첫 번째 문제는 아직 처리되지 못한
재산이었습니다. 전쟁으로 서류가 사라진 재산이 있었습니다. 소유 관계가 복잡해
매각이 미뤄진 재산도 있었습니다. 값이 나가지 않아 아무도 사려하지 않는 자투리 땅과 낡은 건물도
남았습니다. 두 번째 문제는 훨씬 심각했습니다. 이른바은 귀속 재산이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광복 직후의 혼란기에 일본인 명의로 되어 있던 재산을 슬쩍 자기 이름으로
바꿔 놓은 경우가 있었습니다. 등기부가 불타거나 사라진 틈을 이용해 새로 서류를 만든 경우도 있었습니다.
정당한 절차를 밟지 않고 사실상 차지해 버린 재산이 곳곳에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정부는이 문제를
정리하기로 합니다. 1963년 귀속 재산 처리에 관한 특별 조치법이
제정되었습니다.이 이 법의 취지는 남은 귀속 재산의 처리를 마무리 짓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핵심은 기한을 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정해진 기한까지 정당한 권리를 신고하고 절차를 받지 않으면 그
재산은 국기로 넘어가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1964년 말을 기점으로
처리되지 않은 귀속 재산은 원칙적으로 국가 소유가 되었습니다.이 조치로 큰 줄기는 정리되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법의 기한처럼 깔끔하게 끝나지 않습니다. 이후에도 수십년
동안이 문제는 계속 튀어나왔습니다. 땅을 사려고 등기부를 떼어봤더니
소유자가 일본식 이름이더라는 사례가 있었습니다. 오래된 마을길과 하천
부지의 소유자가 확인되지 않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조상이 물려준 줄 알았던
땅이 사실은 귀속 재산이었던 사례도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정부는 오랜 기간에 걸쳐 이런
부동산을 조사하고 국가 명의로 정리하는 사업을 이어갔습니다. 일본식 이름으로 남아 있는 등기를
찾아내고 실제 권리 관계를 확인하고 국기로 귀속시키는 작업이었습니다.이
정리 작업은 20세기가 끝나갈 무렵까지도 계속되었고 그 뒤에도 관련
조사와 소송은 이어졌습니다. 여기서 상당히 복잡한 법적 다툼들이
벌어집니다. 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광복 직후 일본인에게
집을 사고 대금을 다치었다고 합시다. 그런데 법령 제3호에 따라 그 거래는
무효가 되었습니다. 그 사람과 그 자손은 수십년 동안 그 집에 살았습니다. 세금도 냈고 수리도 했고
아이들이 그 집에서 자랐습니다. 그렇다면 그 집은 누구의 것일까요?
이런 사건들이 실제로 법정에 올라왔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오랜 점유를 근거로
소유권을 인정받는 경우도 있었고 국가 소유가 확인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각 사건의 사정이 달랐기 때문에 결론도 달랐습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헌법 재판까지 이어졌다는 사실입니다. 비교적 최근에도 법령 제2호와
제33호의 소급 적용이 헌법에 어긋나는지가 다투어졌습니다.
핵심 쟁점은 이것이었습니다. 법이 만들어지기 전에 이루어진 거래를 뒤늦게 무효로 만들고 재산을 국가가
취득하도록 한 것이 재산권 치매가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헌법 재판소는 해당 조항이 헌법에
위반되지 않는다고 판단했습니다. 식민 지배의 청산이라는 특수한 역사적
상황 그리고 재산의 유출을 막아야 할 필요성이 고려되었습니다.
70년이 훨씬 넘게 지난 뒤에도 그 겨울에 나온 종이 한 장이 여전히 법정에서 다투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재산의 역사가 가진 특징입니다. 사람은 죽고 세대는 바뀌지만 땅과
건물은 그대로 남아 계속 질문을 던집니다. 이제 조금 다른 각도에서이
시기를 바라보겠습니다. 거대한 제도와 법령 이야기를 했으니 그 아래에서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광복 직후 어느 도시의 골목을 상상해 보겠습니다. 한쪽에는
일본인이 급하게 내답한 산림사리가 쌓여 있습니다. 거울과 재봉틀과
자전거와 도자기가 널려 있습니다. 값을 부르는 사람도 값을 먹기는
사람도 어리둥절합니다. 어제까지 감히 넘볼 수 없던 물건이 오늘은 헐값입니다. 그 골목 끝에는
짐수레가서 있습니다. 만주에서 돌아온 가족이 앉아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살
집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비어 있는 2층집이 보입니다. 문은 잠겨
있지만 안에 사람은 없습니다.이 순간 그 가족이 무엇을 선택했을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 시절 수많은 가족이 비슷한 갈림길 앞에 섰다는 사실은 알 수 있습니다.
먼저 들어간 사람은 임차인이 되었고 훗날 우선 매수권을 얻었습니다.
망설린 사람은 다른 곳으로 갔습니다. 몇 해가지나 그 차이는 재산의 차이가
되었습니다. 또 다른 장면도 있습니다. 어느 공장의 조선인 반장이었던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10수년 동안 그 공장에서 일했습니다. 기계의 소리만 듣고도 어디가 고장났는지 알았습니다. 그러나
승진은 없었습니다. 기술 책임자는 늘 일본인이었습니다.
광복이 되자 그 일본인들이 사라졌습니다. 공장에 남은 사람들 가운데 기계를
아는 사람은 그가 유일했습니다. 그는 관리인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관리인 자리는 사무실에 있던 다른 사람에게 돌아갔습니다. 행정 서류를 다룰 줄 알고 관청에 아는
사람이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몇 해 뒤 그 공장은 불화되었고 세주인의 이름은 관리인이었던 그
사람이었습니다. 기계를 아는 사람은 계속 기계를 만졌고 서류를 아는 사람은 공장을
가졌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특정 개인의 기록이라기보다 여러 회고와 연구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전형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더 뼈 아픕니다. 한 사람의
부른이 아니라 구조의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농촌에서는 다른 종류의 장면이 펼쳐졌습니다.
땅문서를 받아둔 소장농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평생 남의 땅을 붙였습니다. 아버지도 그랬고
할아버지도 그랬습니다. 수학의 절반 이상을 지주에게 바치는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15년만 갚으면 그 땅이 자기 것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
종이를 받아들고 밤새 잠을 못 잤다는 회고가 여러 곳에 남아 있습니다.
물론 그 뒤에 삶이 순탄했던 것은 아닙니다. 전쟁이 왔고 흉년이 있었고
상황은 무거웠습니다. 빚을 못 이기고 땅을 판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이름이 적힌
땅 문서를 한 번이라도 가져본 경험은 그 세대의 생각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내 노력으로 내 것을 만들 수 있다는 감각이 생겨난 것입니다.이 감각이 이후 한국 사회의 강렬한 상승
욕구와 교육열의 밑바탕이 되었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땅에서 벗어난 부가
학교로 흘러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 하나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 시기에
무언가 근본적인 것이 바뀌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수백년을 이어온 신분과 토지의 질서가
10년 남짓한 기간에 뒤집혔습니다. 식민 지배의 종식, 귀속 재산의
재분배, 농지 개혁, 그리고 전쟁.이네 이네 가지가 겹치면서 한국
사회는 세계사에서 보기 드물게 평평한 출발선을 갖게 되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동시에 그 평평함 위에서
먼저 출발한 소수가 압도적으로 앞서 나갔다는 사실도 함께 기억해야 합니다. 여기서 잠시 38도선 북쪽을
보겠습니다. 같은시기 북쪽에서도 일본인 재산 문제는 똑같이 존재했습니다.
평양과 하문과 원산에도 일본인이 살았고 흑남에는 거대한 화학 공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처리 방식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북쪽에서는
1946년에 주요 산업의 국유화가 단행되었습니다. 일본인과 친일 인사가 소유했던 공장과
광산과 철도와 은행이 국가 소유가 되었습니다. 토지 역시 무상으로
몰수에 무상으로 분배하는 방식이 채택되었습니다. 남쪽이 국가가 거두어 개인에게 파는
길을 택했다면 북쪽은 국가가 거두어 국가가 소유하는 길을 택한 것입니다.
같은 문제 앞에서 두 개의 답이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답의 차이가
이후 두 사회의 경제 구조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이끌었습니다. 한반도의 분단은 흔히 정치와 이념의
분단으로 이야기됩니다. 그러나 그 밑바닥에는 재산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라는 아주 구체적인 문제가 놓여
있었습니다. 누가 공장을 갖는가, 누가 땅을 갖는가? 그 답이 갈리는
순간 두 사회는 다른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이제 전체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1945년 8월 한반도에는 수십만 명의 일본인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도시와 산업과 토지의 상당 부분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폐전과 함께
그들은 떠나야 했습니다. 현금은 한 사람당 천엔 짐은 등에지고 손에 들
수 있는만큼 제한되었습니다. 떠나기 전 그들은 재산을 헐값에 팔았고 사람들은 그것을 샀습니다.
미군정은 처음에는 일본인의 사유 재산을 일정 부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몇 달 뒤 방침을 바꾸어
일본인의 모든 재산을 8월 9일로 소급에 접수했습니다. 그렇게 적사는
귀속 재산이 되었습니다. 귀속 농지는 소장농에게 유상으로 매각되어 농지
개혁의 앞기를 열었습니다. 귀속 사업체는 관리인과 임차인에게 우선권이
주어진 채 민간에 불화되었습니다. 기관 산업은 국유와 공유로 남아 훗날
공기업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정부 수립과 함께이 재산은 대한민국의 것이
되었고 전쟁을 거치며 대부분 매각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기업과 계층이
태어났습니다. 동시에 특해와 유착이라는 그림자도 함께 태어났습니다.
일본으로 돌아간 사람들은 재산을 돌려 달라고 요구했고 일본 정부는 그것을
외교 협상 카드로 들고 나왔습니다. 그 주장은 결국 철해되었지만 그
흔적은 청구권 협상의 결과에 남았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지금도 두 나라 사이에서 논쟁이 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적산과 귀속 재산의 역사는 광복 이후 한국 사회가
통과한 거의 모든 문제를 압축해 담고 있습니다. 식민 지배의 청산 문제가
있습니다. 분단과 이념 대립의 문제가 있습니다. 국가와 시장의 관계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공정과 특해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한일
관계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집 한 채와 공장 한 곳의 소유권 문제가이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여기서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칩고 싶습니다. 우리는 흔히 광복을 이렇게
상상합니다. 일본이 물러가고 빼앗겼던 것을 되찾고 새 출발을 했다고. 그런데 실제로
벌어진 일은 그보다 훨씬 복잡했습니다. 빼앗겼던 것은 저절로 되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일단 미군정이라는 제3자의 손에 들어갔고 그 손을 거쳐
국가로 다시 개인에게 흘러갔습니다. 그 흐름의 길목마다 누군가는서 있었고
누군가는서 있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 차이가 이후 수십년의 격차를
만들었습니다. 역사를 볼 때 우리는 되게 큰 사건에 주목합니다.
전쟁과 조약과 선언의 눈길이 갑니다. 그러나 사람의 삶을 실제로 바꾸는
것은 종종 아주 건조한 서류입니다. 관리인 임명장 한 장, 임대차 계약서
한 장, 우선 매수권을 규정한 조문 하나.이 종이들이 한 세대의 운명을
갈랐습니다. 오늘날에도 그 흔적은 우리 곁에 있습니다. 오래된 도심의
좁은 골목에 남은 목조 2층집, 붉은 벽돌로 지은 옛은행 건물. 한구
근처의 창고와 세관 건물, 관사로 쓰이던 기화지붕의 관사촌. 그
건물들은 대게 같은 시간을 통과했습니다. 지어졌고 비워졌고 국가에 귀속되었고
새주인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카페가 되기도 하고 박물관이 되기도
하고 그냥 낡은 집으로 남아 있기도 합니다. 그 앞을 지날 때 우리는
되게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갑니다. 그러나 그 벽 안에는 1945년에
여름이 들어 있습니다. 떠나던 사람의 발소리와 들어오던 사람의 숨소리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한 사람은 열쇠를 들고 배에 올랐고 다른 한
사람은 그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그날의 선택과 그날의 우연이 겹쳐
오늘의 지도가 만들어졌습니다. 사람의 역사는 국경을 넘으면서 끝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재산의 역사는
그렇지 않습니다. 땅은 옮겨지지 않고 건물은 따라가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그 자리에 남아 새로운 주인을 만나고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도이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일본인은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남긴 재산은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 재산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출발선 한가운데 놓였습니다.
우리가 오늘 살고 있는 도시와 산업과 기업의 상당 부분이 그 출발선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출발이 공정했는가? 기회는 모두에게 열려 있었는가? 가장 큰
몫을 가져간 사람은 누구였는가?이 이 질문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리고
이런 질문을 던지는 일이야말로 역사를 기억하는 가장 실질적인 방법일 것입니다. 과거를 다시 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다음 출발선을 어떻게 그을 것인지는 언제나 지금
사는 사람들의 몫입니다.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끝까지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이 주제에 관한 대표적인 서적을 알려주세요. 역사관에 의해 해석이 크게 달라지나요?
===
귀속재산(적산)과 초기 자본 형성을 다룬 대표적인 연구 서적들과, 역사관에 따른 해석의 차이를 정리한 내용이다.
대표적인 핵심 서적
<해방전후 귀속재산처리의 성격> (김기원, 1990 / <해방전후사의 인식 5> 수록)
귀속재산 불하 문제를 한국 경제사학계의 핵심 논쟁으로 끌어올린 고전적 논문이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에 걸친 귀속재산 불하 과정이 생산적 자본의 건전한 육성이 아니라 특혜, 정경유착, 투기적 상업자본의 비대화를 낳았다고 실증적으로 분석한다.
<한국 자본주의 발전사론> (김기원, 1990)
귀속재산의 매각과 원조물자 배분, 은행 융자가 결합하여 한국 초기 독점자본(재벌)이 형성되는 메커니즘을 마르크스주의·구조주의적 시각에서 체계화한 저작이다.
<적산연구: 해방 후 귀속재산의 처리과정> (이대근, 2004)
귀속재산 연구에서 가장 방대한 기초 통계와 행정 자료를 집대성한 역작이다. 미군정 법령, 공장 관리인 선임, 귀속농지 처리 및 1950년대 민간 매각 전 과정을 실증적으로 복원하며, 이 자산들이 전후 한국 산업 기반의 물리적 모태가 되었음을 꼼꼼하게 입증한다.
<한국 현대사 60년: 경제의 시각에서> (조석균 외 / 한국경제연구원 등 실증 경제사 연구들)
일제강점기 자본 축적과 해방 후 귀속재산 처리를 식민지 근대화론 및 시장경제 형성 관점에서 다룬 연구들이다. 제도적 단절 속에서도 설비와 기술, 조직 양식이 어떻게 대한민국 산업화로 이어졌는지를 제도주의 경제학 시각에서 분석한다.
<농지개혁 연구> (장상환 외 / 한국농어촌사회연구소)
귀속농지의 유상 매각과 1949년 농지개혁을 집중 분석한 연구이다. 봉건적 지주제를 일거에 해체하고 자영농 체제를 확립함으로써, 한국 사회가 계급적 유동성을 확보하고 교육열과 산업 인력을 공급하게 된 구조적 전환점을 밝힌다.
역사관에 따른 해석 차이
귀속재산 처리와 초기 자본 형성은 한국 근현대사 연구에서 역사관(이념 및 경제학적 접근법)에 따라 평가가 극단적으로 갈리는 분야 중 하나이다. 사실관계(팩트) 자체는 상당 부분 공유되지만, 그 성격 규정과 역사적 귀결에 대한 평가는 정반대에 가깝다.
1. 민중사학·비판적 정치경제학 (내재적 발전론 및 종속이론 계열)
핵심 시각: <왜곡된 출발선과 특혜형 재벌 체제의 태동>
관리인 제도 평가: 노동자들의 자주관리 노력을 탄압하고, 친일 관료·식민지 협력자·영어를 구사하는 일부 친미 엘리트에게 경영권을 넘겨줌으로써 식민지 청산의 기회를 박탈했다고 본다.
불하 과정 평가: 전시 혼란, 살인적인 인플레이션, 수의계약을 악용해 공적 자산을 헐값에 사유화한 <부정 축재>의 과정으로 규정한다.
결론: 이 과정에서 형성된 자본은 건전한 기업가정신보다는 권력과의 유착에 의존하는 체질을 갖게 되었고, 오늘날 재벌 중심 경제 구조와 불공정한 계급 격차의 근원이 되었다고 비판한다.
2. 제도주의 경제학·근대화론 (식민지 근대화론 및 실증 경제사 계열)
핵심 시각: <산업 자본 형성을 위한 불가피한 현실적 선택>
관리인 제도 평가: 식민지 해방 직후 기술과 경영 능력을 갖춘 인력이 극도로 부족했던 현실에서, 최소한의 공장 가동과 기술 보존을 위해 기존 사무직이나 경험자를 선임한 것은 생산 붕괴를 막기 위한 실용적 조치였다고 본다.
불하 과정 평가: 자본 축적이 전무했던 신생 독립국에서 민간에 산업을 이양하기 위한 유일한 경로는 저가 분할 상환과 정책 금융뿐이었으며, 이는 '특혜'라기보다 '자본 형성의 마중물'이었다고 해석한다.
결론: 비록 유착과 비리가 수반되었으나, 이들이 전쟁의 폐허 속에서 설비를 복구하고 기술을 학습하여 제조업 기반을 지탱했기에 1960~70년대 압축 성장의 발판이 마련될 수 있었다고 본다.
3. 농지개혁에 대한 상대적 합의
사업체(공장) 불하와 달리 귀속농지 매각 및 농지개혁에 대해서는 좌우를 막론하고 비교적 긍정적인 평가가 우세하다. 지주 계급을 해체하고 대다수 농민을 자영농으로 전환시킴으로써 사회적 평등성을 획기적으로 높였고, 북한의 공산화 압력을 차단하는 동시에 자녀 교육열을 폭발시켜 산업화의 양질 노동력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는 양측의 해석이 크게 일치한다.
귀속재산 문제는 결국 "원초적 불공정과 정경유착의 기원인가", 아니면 "폐허 위에서 산업 자본을 일구어낸 고육지책인가"라는 두 시선이 팽팽하게 맞물려 있는 주제이다.
이 중 특정 저작의 상세한 실증 데이터나, 당시 농지개혁과 사업체 불하가 각 계층에 미친 영향에 대해 더 깊이 살펴보고 싶은 부분이 있으십니까?
===
네. 이 주제는 해방 직후 한국 경제사를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분야이고, 역사관에 따라 해석이 꽤 크게 달라집니다. 특히 <식민지 유산을 어떻게 볼 것인가>, <귀속재산 불하가 한국 자본주의 형성에 어떤 의미였는가>, <미군정의 역할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에서 차이가 납니다.
우선 가장 직접적인 대표서는 이대근의 <귀속재산 연구: 식민지 유산과 한국경제의 진로>입니다. 2015년에 나온 600쪽이 넘는 연구서로, 일본인 재산이 어떻게 귀속재산이 되었고, 미군정과 대한민국 정부를 거쳐 어떻게 관리·불하되었는지를 체계적으로 다룹니다. 이 주제를 한 권으로 읽으려면 가장 먼저 볼 책입니다. 예스24
그 다음으로 중요한 책은 김기원의 <미군정기의 경제구조: 귀속기업체의 처리와 노동자 자주관리운동을 중심으로>입니다. 귀속기업의 처리만 보는 것이 아니라, 해방 직후 공장을 실제로 운영하려 했던 노동자들의 자주관리운동과 미군정의 정책을 함께 봅니다. 그래서 귀속재산을 “누가 불하받았는가”의 문제보다 <해방 직후 어떤 경제체제를 만들 수 있었는가>라는 정치경제적 문제로 확장합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도 귀속재산 연구의 핵심 참고문헌으로 이대근과 김기원의 책을 함께 제시합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금 더 넓게 읽는다면 Carter J. Eckert의 <Offspring of Empire: The Koch'ang Kims and the Colonial Origins of Korean Capitalism, 1876–1945>도 매우 중요합니다. 한국어로는 대략 <제국의 후예: 고창 김씨와 한국 자본주의의 식민지적 기원>이라고 옮길 수 있습니다. 경방과 김성수 일가를 중심으로, 한국 자본주의가 1945년에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식민지기 산업화와 일본 제국의 제도·금융·시장 속에서 형성되었다고 주장합니다. 바로 이 주장 때문에 이후의 <식민지 근대화론> 논쟁과 긴밀하게 연결되었습니다.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역사관에 따라 무엇이 달라지는가
같은 사실, 예를 들어 “일본인이 남긴 공장을 한국인이 인수했다”는 사실을 놓고도 해석은 상당히 달라집니다.
첫 번째는 전통적인 민족주의·수탈론적 관점입니다. 이 관점에서는 일본인 재산 자체를 식민지 수탈과 특혜의 결과로 봅니다. 따라서 일본인이 남긴 재산은 정상적인 시장경제에서 축적된 사적 재산이라기보다는 식민지 권력이 만들어낸 불평등한 소유구조의 산물이라는 데 초점을 둡니다. 귀속재산 불하는 그런 식민지 재산이 해방 후 특정 기업가나 권력층에게 다시 집중되는 과정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마르크스주의 또는 정치경제학적 관점입니다. 여기서는 “일본인 대 한국인”이라는 민족 구분보다 <누가 생산수단을 소유했는가>가 중심입니다. 일본인 자본가가 떠난 뒤 공장을 노동자가 직접 관리할 수도 있었는데, 미군정과 대한민국 정부가 이를 국가 관리와 민간 불하 방식으로 재편하면서 새로운 자본가 계급이 형성되었다는 문제를 강조합니다. 김기원의 연구가 이 방향에 비교적 가깝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세 번째는 식민지 근대화 또는 제도적 연속성을 강조하는 관점입니다. 여기서는 일본 제국이 남긴 공장·철도·전력·금융·기술인력·관료제 등이 해방 이후 한국 경제 성장의 물적 기반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고 봅니다. Eckert의 연구가 대표적으로 이 문제를 제기합니다. 그는 일본 식민지배를 정치적으로 정당화하지 않으면서도, 현대 한국 자본주의의 일부 기원이 식민지기에 형성되었다고 주장합니다.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네 번째는 최근에 비교적 설득력이 커진 <단절과 연속을 함께 보는 관점>입니다. 이 관점에서는 “일제 유산이 한국 발전의 토대였다”와 “일제가 모든 것을 수탈했기 때문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라는 두 극단을 모두 피합니다. 실제로 일본인이 남긴 공장과 기반시설은 중요한 자산이었지만, 1945년 이후의 소유권 재편, 농지개혁, 한국전쟁의 파괴, 미국 원조, 정부 금융, 1960년대 이후의 산업정책을 거치면서 전혀 다른 경제체제가 만들어졌다고 봅니다.
이 점에서 미군정 법령도 중요합니다. 미군정은 1945년 법령 제33호를 통해 일본 정부·일본인·일본 법인의 재산을 미군정에 귀속시켰고, 이후 이 재산은 대한민국 정부로 넘어갔습니다. 즉 일본인 개인의 집을 한국인이 그냥 차지했다는 식의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법적·행정적 이전 과정이 있었습니다.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제가 보기에는 이 주제를 읽을 때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귀속재산이 한국 자본주의를 만들었다>와 <귀속재산은 중요하지 않았다>라는 두 문장을 모두 피하는 것입니다.
귀속재산은 해방 직후 경제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자산이었지만, 오늘날의 재벌이나 한국 경제성장을 그것 하나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식민지기의 자산, 해방 후의 재분배, 전쟁, 미국 원조, 정부정책이 차례로 겹쳐졌다고 보는 편이 역사적으로 더 정확합니다.
세진님이 방금 보신 <광복 직후 떠난 일본인 71만 명의 재산은 어디로 갔는가>와 가장 직접적으로 연결해서 읽는 순서를 고른다면, <이대근 ― 김기원 ― Eckert>의 세 권이 좋습니다.
- 첫 책은 “재산이 어디로 갔는가”,
- 두 번째는 “그 과정에서 어떤 사회세력이 경쟁했는가”,
- 세 번째는 “그 재산 자체가 어디에서 왔으며 한국 자본주의와 식민지 경험은 어떤 관계인가”를 각각 보여줍니다.
===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