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10-04

사랑하라 분노하라 용기 있게 싸워라 | 마츠이 야요리 | 알라딘

사랑하라 분노하라 용기 있게 싸워라 | 마츠이 야요리 | 알라딘


사랑하라 분노하라 용기 있게 싸워라 - 일본의 여성저널리스트, 여성운동가, 평화운동가 
마츠이 야요리가 전하는 메시지
마츠이 야요리 (지은이),김선미 (옮긴이)모시는사람들2014


책소개
2000년 ‘여성국제전범 법정’을 열어 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도쿄에서 일본 천황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일본인 여성이 있다. 그가 바로 저널리스트이자 여성운동가 그리고 평화주의자인 이 책의 저자인 마츠이 야요리이다. 이 책은 그의 삶의 궤적을 담았다.

이 책의 내용에서 다루고 있는 ‘위안부’문제, 개발문제, 아시아 여성에 대한 인권문제, 성매매관광, 환경문제 등은 일본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돌아보게 한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분노’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실천’방식을 고민하게 해준다.


목차


01 내 인생의 원점
1. 어린 시절과 투병 생활을 통해 길러진 인생관
2. 유학 생활에서 세계를 경험하다

02 신문사에서 여기자로 살아남기
1. 신문사라는 남자 세계에서 - 생존전략
2. 고도 성장의 이면을 폭로하다 - ‘마녀기자’라 불리며
3. 여성의 관점으로 기사를 쓰다 - 페미니스트로의 변신

03 불모지 아시아 보도에 대한 도전
1. 공해수출과 기생관광
2. 멕시코에서 중국으로

04 아시아 곳곳을 누빈 싱가포르 특파원 시절
1. 아시아의 풀뿌리 보도를 꿈꾸다
2. 아시아의 매춘 지대를 가다

05 아시아에서 바라본 일본
1. 개발원조 ODA는 누구를 위하여
2. 개발교육과 NGO의 역할
3. 아시아에서 온 이주 노동자

06 국경을 넘어 세계로
1. 정년퇴임 후 자유를 회복하다 - NGO 활동
2. 어린이 인권과 JFC 지원 활동

07 전쟁과 여성에 대한 폭력에 맞서
1. ‘여성국제전범 법정’의 발자취
2. 정의와 인권의 글로벌라이제이션을 바라며

08 21세기를 어떻게 살 것인가
1. 지금 이 시대에 생각해야 할 것들
2. 21세기를 사는 젊은 여성들에게 보내는 메시지

접기


책속에서


P. 72 내가 주력하여 보도한 탈리도마이드 재앙 취재는 어두운 면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이들과 가족이 캠프에 가서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내며, 아이들이 장애를 떨쳐 버리고 씩씩하게 성장해 가는 모습은 감동이었다. 그리고 사회적인 편견에 굴하지 않고, 장애를 가진 아이들을 잘 교육하려는 어머니들, 그리고 사회적으로 문제를 호소하는 아버지들의 적극적인 삶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접기
P. 120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담당한 여성들과의 추억은 끝이 없다. 작은 몸으로 여성운동을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정치범 구원 활동에 침식을 잊고 뛰어다녔던 이우정 씨는 그 후 국회의원이 되어 남북통일 문제에도 심혈을 기울였지만, 얼마 전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비보에 암담할 뿐이다. 노동자로 공장에 들어가 여성들을 훌륭히 조직하여 과감한 투쟁을 한 조화순 목사의 담력에도 감탄했다. 어느 날 그녀와 저녁 식사를 함께 했을 때, 통역이 사정이 생겨 먼저 돌아가고, 한국어를 할 줄 모르는 나와, 영어와 일본어를 할 줄 모르는 그녀가 손짓 발짓만으로 대화하며 웃고 또 웃던 일이 생각난다. 그러면서 서로 마음이 통하는 것을 느꼈다. 접기
P. 232~233 드디어 다음 날 아침, ‘법정’이 열렸다. 처음에 일본의 나, 한국의 윤정옥 선생님, 필리핀의 인다이 사홀, 세 명의 국제실행위원회 공동대표가 개정 연설을 했다. 너무나 바빠서 나는 문장을 충분히 손질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바쁜 상황 속에서 내 나름대로 최대한의 노력을 다했다. 내가 무엇보다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8개국에서 64명이나 되는 피해자여성들이 고령이고 육체적으로도 쇠약한 몸으로 먼 일본까지 와 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인사였다. 더구나 이 ‘법정’은 피해자가 주인공 아닌가. 사흘간에 걸친 심리는 두 명의 수석 검사인 패트리샤 비자 세라즈와 우스티나 돌고폴의 공동 기소장 낭독으로 시작되었다. 각국 검사단이 자국의 원고와 그 소속 부대, 상관, 지휘관까지 위로 거슬러 올라가 여러 명을 기소하였다. 수석 검사 두 명이 그들 중에서 쇼와(昭和) 천황을 비롯하여 10명의 일본군, 정부의 최고 책임자들을 골라서 피고로서 기소하고, 동시에 국가 책임도 추급했다. 그러면서 “일본군 성노예제 ‘위안부’ 문제를 인도주의에 대한 죄로서 심판한다.”고 분명히 밝히고, 국가책임도 전쟁 중의 국제법 위반 행위만이 아니라 어떤 보상이나 처벌도 하지 않았던 전후 책임까지 명확히 할 것을 요구했다. 접기
P. 245 요지만 해도 300페이지에 가까운, 1094항이라는 방대한 헤이그 판결은 ‘위안부‘ 문제의 집대성, 국제법의 새로운 고전, 페미니즘 사상의 결정판 등, 다양한 방면에서의 평가를 받는 훌륭한 내용이었다. 이 판결의 특색은, 우선 첫째로 ‘민중법정‘의 사상적 실천적 의의를 명기한 것이다. ˝민중법정 같은 건, 어차피 강제력은 없지 않나,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것이냐.˝라는 비판에 ˝이것은 하나의 판단을 나타내는 것이며, 형을 집행시키거나 국가에게 보상하게 하는 강제력이 없다고 해서 이 판단이 무효인 것은 아니다. 민중의 힘으로 일본 정부에 이것을 받아들이도록 압력을 가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민중법정의 사상을 확실히 나타냈다. 접기 - Redman
P. 247 지금까지 남성 중심이었던 국제법에 여성의 관점을 반드시 넣어야 한다는 ‘젠더 정의‘ 사상이 판결문에는 명확하게 들어갔다. 재판관 중에서도 특히 크리스틴 친킨은 국제법을 젠더 관점으로 전면적으로 새롭게 개선하자는 운동을 전개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생각이 판결에 확실하게 녹아들어 갔다고 생각한다. 이제까지의 국제 법정에서는, 전시 성폭력이 피해자 여성의 인권을 침해한 것으로 간주되지 않았고, 여성이 속한 집단의 명예를 더럽히는 것이라고 간주되었다. 극단적인 경우는 적에게 강간당한 딸을 가족의 불명예라고 해서 아버지가 죽이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그러나 이번 판결에서, 전시 성폭력은 피해자 여성 자신의 인권을 침해하는 것이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 접기 - Redman
P. 248 민중법정의 사상, 젠더 정의에 이어서 최종 판결의 세 번째 특색은, 이 ‘법정‘이 국가의 틀을 뛰어넘는 글로벌한 관점을 가졌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성노예제의 책임을 일본 정부에만 부과한 것은 아니다. 우익 등은 ˝왜 일본만 책망하는가?˝라고 했는데, 헤이그 판결은 일본 정부에 주된 책임은 있지만, 구 연합국의 책임까지 확실하게 밝혔다. ‘위안부‘ 제도의 존재를 미국이든 연합국이든 알고 있었다. 압수한 일본군의 방대한 자료, 포로가 된 일본 병사와 일본군이 도주한 후에 남은 ‘위안부‘들과의 인터뷰 등을 통해서, 그들은 ‘위안부‘의 존재를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도쿄재판에서 다루지 않았다. 접기 - Redman
P. 249 판결의 네 번째 특색은, 이 ‘법정‘이 도쿄 재판의 연장이라고 명언한 것이다. 우선 도쿄 재판에서는 최고 책임자인 천황을 소추하지 않았다. 이것이 전후 책임 문제에서 얼마만큼 마이너스의 영향을 주었는가. 그 때문에 천황의 명령으로 움직인 군인, 병사들의 전쟁 책임의 소재도 결국 흐지부지 되어버렸다..... ‘때 늦은 정의‘라는 말이 있듯, 도쿄 재판의 결함을 분명히 한 것은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접기 - Redman
P. 249 헤이그 판결의 다섯 번째 특색은 미래로 이어지는 새로운 사상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전시성폭력의 불처벌을 없애가자.‘는 국제적인 흐름 속에서, 그것을 더욱 전진시키는 데 공헌했다. - Redman
P. 250 그것은 피해자가 침묵을 깨고 목소리를 낸 것으로 시작된다. 또 가해국 여성이 그 목소리에 부응하여, 피해국만이 아니라 제3국 여성의 지지까지 얻어 정말 글로벌한 여성들의 노력이 결실을 맺었다. 국제법을 국가 중심에서 시민의 손으로, 남성 중심에서 여성으로, 현재 중심에서 과거와 미래로 확대한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나는 헤이그판결이 역사를 바꾼 큰 발걸음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접기 - Redman


추천글
마츠이 야요리 씨가 돌아가신 지 10여 년이 지났습니다만, 아직도 ‘일본을 대표하는 국제적인 여성저널리스트’라는 평가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녀는 30여 년간, 신문기자로서, 여성운동의 활동가로서 아시아 각지를 누비며 여성들의 목소리를 전하며, 짓밟히고 있는 ‘지극히 작은 자’ 편에 서서 권력에 저항했습니다. 특히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지지하고 한국 사람들을 위로했으며,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위한 일본의 지지 여론을 끌어 모으려고 온 힘을 다 쏟아 붓기도 했습니다. 또한 ‘위안부’ 문제와 매춘관광 등 일본의 전쟁책임?전후책임도 철저히 파헤쳐, 2000년에는 ‘여성국제전범 법정’을 제안하여 실현시켰습니다. 이 책은 말기 암을 선고받고 돌아가시기까지 2개월 동안, 마츠이 씨가 혼신을 다해 써 내려간 자서전입니다. 많은 한국 분들이 이 책을 읽게 된 것을 아신다면, 그녀가 얼마나 기뻐하실지······! 그것을 생각하니 저 또한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 이케다 에리코 (액티브 뮤지엄「여성들의 전쟁과 평화자료관」(wam) 관장)

이 책을 통해 참 리더의 모습을 발견한다.
새로운 영역을 연 리더.
불의에 진심으로 분노할 줄 아는 리더.
억눌린 사람의 편에 용기 있게 서 있는 비전을 가진 리더.
일본의 다수와 맞설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이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일본의 미래를 걱정한 애국자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2000년 독일여성대학(IFU)에서 마츠이 야요리 씨를 만났는데, 그 때 이 자서전을 미리 읽고 만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 장필화 (이화여대 여성학 교수)




저자 및 역자소개
마츠이 야요리 (松井やより) (지은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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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일본 교토(京都)에서 태어났지만, 태어나자마자 목회 일을 하시는 부모님을 따라 도쿄(東京)로 이사한 후 줄곧 도쿄에서 생활했다. 1961년 도쿄외국어대학 영미과(英美科)를 졸업. 재학 중에 미국의 미네소타 대학과 프랑스 소르본대학에서 유학했다. 졸업 후, 아사히 신문사에 입사. 사회부, 싱가포르 특파원, 편집위원 등을 거쳐 1994년에 정년퇴직. 신문사 재직시절, 소비자?복지?환경?개발?여성문제 등의 취재를 통해 경제성장 위주인 일본사회를 냉철히 비판하였으며, 70년대의 ‘기생관광’과 공해수출 문제 취재를 계기로 아시아에 관심을 갖고 활발한 취재활동을 펼쳤다.
정년퇴임 후에는 자유 언론인으로서, 여성과 아시아 문제에 대해 글을 쓰며 활발하게 여성운동에 전념했다. 특히 ‘아시아 여성들의 모임’, ‘아시아 여성자료센터’, ‘VAWW-NET Japan’ 등 크고 작은 단체들을 만들어 연구?활동하였으며, 2000년에는 세계의 여성운동가들과 연대하여 ‘여성국제전범 법정’을 개최하여 일본군 성노예제에 대한 범죄행위와 관련해 히로히토(裕仁) 전 일본 천황 등 공범 25명과 일본 정부에 유죄 판결을 이끌어내었다. 그녀의 마지막 소원은 ‘여성국제전범 법정’을 기념하고 그때 모은 자료들을 전시할 박물관을 설립하는 것이었는데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2002년 간암으로 영면하였다. 그녀 사후, 마츠이 야요리 씨와 함께 활동한 동료들이 그녀의 뜻을 이어받아 2005년 8월 ‘여성의 전쟁과 평화자료관’을 건립하여 전시성폭력을 젠더정의의 관점으로 다시 보게 하였고, 평화와 비폭력활동의 거점으로 만드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접기

최근작 : <사랑하라 분노하라 용기 있게 싸워라>,<여성이 만드는 아시아> … 총 3종 (모두보기)

김선미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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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에서 여성학 박사학위를 받고 서울시립대, 남서울대 등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논문으로는 「마츠이 야요리(松井やより)의 초국적 여성 운동 연구」, 「‘여성국제전범법정’에 있어서 마츠이 야요리가 지니는 의미」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사랑하라 분노하라 용기 있게 싸워라』(마츠이 야요리 지음, 모시는 사람들, 2014), 『빼앗긴 사람들: 아시아 여성과 개발』(공역, 우르와시 부딸리아 편저, 산지니, 2015) 등이 있다.





출판사 제공 책소개
마츠이 야요리의 삶의 궤적
마츠이 야요리는 젊었을 때부터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을 항상 가슴 속에 품고 살아 왔으며, 그것이 그를 지키는 하나의 버팀목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렇다면 그가 바꾸고자 한 세상은 어떠한 세상이었던가? 그것은 힘이 없는 자(저자는 ‘지극히 작은 자’라고 표현)가 핍박과 억압을 받고 있는 세상이며, 경제성장 중심의 ‘개발’이라는 이름을 쫓아 자연과 사람이 무차별하게 훼손되고 상처받는 세상이며, 피해자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 가해자가 책임을 지지 않는 세상이며, 정의라는 이름이 제몫을 하지 못하는 세상이다.

사랑, 분노, 용기
당연한 듯 지속되고 있는 기존 사회 구조에 균열을 일으키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마츠이 야요리는 일생 동안 지치지 않고 정의롭지 못한 세상에 ‘분노’하며, 그만의 방식으로 때로는 홀로 때로는 작은 힘들을 모아 연대하여 ‘용기’ 있게 맞서 싸워나갔다. 그렇게 세상을 바꾸어 나가는 것이 그가 세상을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여성이야말로 이 세상을 바꾸는 힘
지금 이 시대는 강자와 자본 우선의 남성 중심 사회이다. 무한 경쟁 사회에서 무조건 힘 있는 자, 힘 있는 국가만을 우선시하는 세계 군사주의와 세계 경제주의 하에서 지구 환경과 모든 생명들이 병들고 고통에 신음하는 시대이다. 지금 이 시대를 구원할 수 있는 힘은 마이너리티인 여성들에게 있다.
그 가능성을 저자 마츠이 야요리는 ‘위안부’들의 투쟁에서 보았다. 가장 힘없고, 배운 것 없고, 가장 치욕스런 폭력에 시달렸던, 평범한 약자였던 그녀들이 투쟁을 통해 세상과 역사를 바꾸었다. 새 밀레니엄이 시작되던 해, 도쿄에서 열렸던 ‘여성국제전범 법정’에서 위안부들을 비롯한 몇몇 용기 있는 여성들은, 전쟁과 폭력의 책임이 일본의 ‘천황’에게 있음을 증언하였고, 공정한 판결을 이끌어냈다.
마츠이 야요리는 세상을 마치기 전 이 땅의 여성들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한다.
여성들이여! 자신감을 갖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 일어나 투쟁하라! 글로벌 밀리터리, 글로벌 경제시대의 폭력과 환경 파괴에 맞서 행동하라! 여성들, 모든 약자들, 소수자들끼리 연대하여 불의에 대항하라!
사랑과 평화의, 살만한 세상의 미래는 여성들 손에 달려있다.

간암을 선고받고 눈을 감기까지 혼신을 다해 집필한 책
이 책은 간암 말기를 선고받고 사망하기까지 82일이라는 시간밖에 남아 있지 않았지만, 마지막 4일을 제외하고 나머지 기간 동안 혼신의 힘을 다해 집필한 것이다. 그 자신이 경험한, 사회와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을 전하기 위하여 죽음을 맞이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펜을 놓지 않았던 마츠이 야요리의 '생명의 기록'이다.
이 책의 내용에서 다루고 있는 ‘위안부’문제, 개발문제, 아시아 여성에 대한 인권문제, 성매매관광, 환경문제 등은 일본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돌아보게 한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분노’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실천’방식을 고민하게 해준다. 접기








용기 있게 싸운 마츠이 야요리의 열정적인 삶과 저항을 보여 줌. 한 사람의 생애를 통해 여성운동사와 여성사를 읽는다.
nature68 2015-08-29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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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이 야요리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마쓰이 야요리
출생1934년 4월 12일
일본 교토
사망2002년 12월 27일(68세)
일본 도쿄
성별여성
국적일본
직업언론인, 여성운동가, 평화주의자, 여성주의 리더

마쓰이 야요리(松井やより, 1934년 4월 12일~2002년 12월 27일)는 일본의 언론인, 여성주의자이다. 松井やより는 필명으로 본명은 마쓰이 야요리(松井耶依).

1961년 도쿄외국어 대학 영미과를 졸업했다. 재학 중에 미국의 미네소타 대학과 프랑스 소르본 대학에서 유학했다. 졸업 후, 아사히 신문사 입사. 사회부, 싱가포르 특파원, 편집위원 등을 거쳐 1994년 정년퇴임을 했다. 소비자·복지·환경·개발·여성문제 등을 취재하여 경제성장 중심의 일본 사회를 냉철히 비판하였으며, 70년대의 '기생관광'과 공해 수출 문제 취재를 계기로 아시아에 관심을 갖고 활발한 취재활동을 펼쳤다. 정년 퇴임 후에는 자유 언론인으로서, 여성과 아시아 문제에 대해 글을 쓰며 여성운동에 전념했다.

'아시아 여성들의 모임'. '아시아여성자료센터', 'VAWW-NET Japan(Violence Against Women in War Network: 전쟁과 여성에 대한 폭력에 반대하는 일본네트워크)' 등의 단체를 만들어 연구·활동하였다. 특히, 2000년에는 세계의 여성운동가들과 연대하여 '여성국제전범법정'을 개최하여, 일본 천황 등 공범 25명과 일본 정부에 유죄판결을 이끌어 내었다.

2002년 암으로 사망하였고, 2005년 8월 동료들이 그 뜻을 이어받아 '여성의 전쟁과 평화자료관(WAM)'을 건립하였고, 전시 성폭력을 젠더정의의 관점으로 다시 보는, 평화와 비폭력활동을 위한 거점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저서로는 《사랑하라 분노하라 용기 있게 싸워라[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2014)》, 《여성이 만드는 아시아(2005)》, 《women in the new asia: from pain to power(1999)》 등이 있다.

생애

마쓰이는 교토의 기독교 목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후, 도쿄부로 이사했고, 부모님은 야마테 기독교 교회를 설립하여 여섯 자녀들을 길렀다. 마츠이는 결핵 때문에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도쿄 외국어 대학 영미과에 입학했다.

마쓰이가 대학교 3학년에 미국과 유럽을 여행하는 동안, 그녀는 페미니즘 운동에 입문했다. 현대 동아시아 성(Gender) 운동에서, 바바라 몰로니(Barbara Molony), 자넷 테이스(Janet Theiss), 최혜월(Hyeweol Choi)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츠이 야요리는 그 곳에서 뻔뻔스러운 인종차별주의를 경험했고, 이 지역들과 아시아 간의 부와 평등에 대한 불균형에 놀랐다. 이 후에, '범아시아 페미니스트 연대'를 위한 투쟁에서, 페미니즘이 미국에서 운영되는 방식을 비판한다.

1961년 마츠이 야요리는 일본 아사히 신문 기자로 합류하여, 탈리도마이드(Thalidomide)에 의한 선천적 결함 및 수은 중독(미나마타 병)과 같은 공중 보건 및 환경 문제에 대해 글을 썼다. 아사히 신문과 그녀가 설립한 '아시아 여성들의 모임'의 대표자로서, 마츠이 야요리는 1975년부터 1995년까지 모든 유엔 회의에 참석했다.

1976년 아시아의 기생 관광(매춘 관광)에 반대하여, 연대에서 아시아 여성 단체를 창립한다. 1981년에는 2차 세계대전 중 일본 제국군에 의해 매춘을 강요받은 위안부 여성들과 접촉하는 싱가포르 특파원으로 지명되었다. 이로써 마츠이 야요리는, 아사히 신문 아시아 총국 특파원으로 봉사한 최총의 여성이 되었다. 1994년 아사히에서 사퇴 후, 사회운동가로 전임하기로 한 그녀의 결정은 일본 기업인들의 동남아 섹스관광 추세에 영향을 받았다. 은퇴 직후, 그녀는 '아시아여성자원센터'를 창설했다.

1998년에 마츠이 야요리는 '전쟁과 여성에 대한 폭력에 반대하는 일본네트워크(VAWW-NET:Violence Against Women in War Network)'를 창설했다. 또한, 1998년부터 2000년까지 아시아여성자료센터 및 일본-동아시아 여성단체들과 협력하여, 일본 황실군이 위안소에서 범한 범죄에 전념하는 도쿄여성전범재판소를 조직했다.

2001년 마츠이 야요리는 아프가니스탄 페미니스트 운동가들을 만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했고, 후에 간암으로 판정받는 질병에 걸린다. 일본에 복귀 후, 2002년 12월 도쿄 병원에서 사망했다.

도쿄여자전범재판소(여성국제전범법정)

마츠이 야요리는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 여성 연대 회의에서 'VAWW-NET'를 통해, '1998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군의 성노예로 희생된 여성들에 대한 정의 실현을 위해 재판소를 개최한다'는 아이디어를 낸다. 이 아이디어를 지지하고 법원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중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대만, 동 티모르, 말레이시아, 북한과 남한의 여성권리단체들과 옹호자들과 협력했다.

법정준비는 1998년부터 2000년까지 지속되었다. '위안소가 피해자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를 수행한 국제 조직위원회(International Organizing Committee)가 준비를 주도했다. 2000년 12월 8일부터 12월 12일까지 도쿄에서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일본군대가 사용한 위안소 희생자가 증언했으며 동아시아 및 네덜란드 전역의 위안부 여성을 대표하는 변호사와 전문가들도 증언했다.

전쟁 중에 일본군이 저지른 범죄를 다루는 이전 재판소와는 달리, 재판소는 히로히토 황제를 피고인 중 한 명으로 지칭하여 위안부에 위배되는 범죄에 연루되었다고 비난했다. 초청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정부나 천황의 대리인들을 소송 절차에 파견하기를 거부했다.

유산

2001년 10월, 아프가니스탄 페미니스트들을 만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한 동안 마츠이 야요리는 질병에 걸렸다. 일본에 돌아왔을 때, 그 질병은 간암으로 진단받는다. 그녀는 자서전을 쓰기 시작했고, 여성 박물관 설계에 대한 작업을 계속했다. 마츠이 야요리는 2002년 12월 27일 도쿄의 한 병원에서 사망했다.

마츠이 야요리는 자산을 여성의 전쟁과 평화에 관한 인권 기금에 기부했다. 이 여성 기금은 전쟁과 평화의 여성 운동 박물관(WAM: Women's active museum on war and peace) 건설을 위한 기금이다. 2005년 8월 도쿄에서 열린 도쿄여성전범재판소와 관련된 모든 서류를 소장하고 있는 사립 박물관이다. 요시다 다카시(Takashi Yoshida)는 "평화의 문화에서 전쟁의 문화에 이르기까지 'active museum'이라는 용어는 대중을 계몽하고 각 방문객을 사회적으로 활발하게 변화시키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는 위원회의 소원을 상징하기 위해 선정되었습니다."라고 말한다.

죽음을 앞두고, 나카미야가 "투병중인 마츠이 야요리에게 기증된 150만엔의 돈이 그녀의 이기심으로 이기적으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하면서, 마츠이 야요리는 일부 사람들에 의해 비판받는다. 사실, 이 기금은 전쟁과 평화의 여성 운동 박물관을 건설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러한 비판과 공격에도 불구하고 전쟁으로 희생된 위안부 여성들을 위해 싸우는 마츠이의 유산은, 일본인과 동아시아 여성에 관한 그녀의 수많은 작품들에 남겨져,  전 세계적으로 남녀평등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에게 영감을 불어 넣는다.

같이 보기

출처

  • 도서출판 모시는사람들 공식 블로그 https://blog.naver.com/modl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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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井やより

出典: フリー百科事典『ウィキペディア(Wikipedia)』
松井 やより
『月刊婦人展望』1963年3月号より
生誕1934年4月12日
日本の旗 日本 京都府
死没2002年12月27日(68歳没)
職業ジャーナリスト
国籍日本の旗 日本
最終学歴東京外国語大学卒業
ウィキポータル 文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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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井 やより(まつい やより、1934年4月12日 - 2002年12月27日[1])は、日本のジャーナリスト、フェミニスト、元朝日新聞編集委員。本名は松井耶依。

京都府出身[1]。父の平山照次、母の秋子はともに牧師で、東京都渋谷区に東京山手教会を創立した。本名の「耶依」もキリスト教に由来する。父親の平山照次は反核団体原水爆禁止日本協議会(原水協)がまだ共産党の影響力が強くなかった頃に、その常任理事を務め、日本キリスト教婦人矯風会に禁酒運動から平和運動へ活動範囲を広げるよう提言した[2]。松井やよりの弟である平山基生は、平山照次とは逆に無神論者となる日本共産党員で、反米軍基地活動家[3]。

人物

青山学院中等部・高等部を経て[4]、1961年に東京外国語大学外国語学部英米科を卒業し、朝日新聞社に入社。高校時代に結核で4年間療養したため[5]、26歳で大学を卒業して就職した。社会部記者として福祉、公害、消費者問題、女性問題などを取材し、立川支局長、編集委員から1981年11月~85年3月シンガポール・アジア総局員。1994年朝日新聞社定年退職[要出典]。

朝日新聞社在職中の1977年に「アジア女たちの会」を設立し、退職後の1995年にアジア女性資料センターを、1998年に「戦争と女性への暴力」日本ネットワークを設立して代表となる。朝日時代から上智大学・千葉大学・日本福祉大学・日本女子大学・琉球大学の非常勤講師、横浜国立大学大学院の客員教授を務めた[要出典]。

朝日新聞在職中の社会部のトップ時代に慰安婦問題を取り上げた[要出典]。

2000年12月に「戦争と女性への暴力」日本ネットワークなどが自主開催した「模擬裁判」女性国際戦犯法廷で国際実行委員会共同代表の1人となり、日本側主催者の代表となった[要出典]。

2002年8月、韓国ソウルで開催された「軍事主義に反対する東アジア・米国・プエルトリコのネットワーク」に日本代表として参加。米国が展開している「テロとの戦争」が「軍事主義を強化し、女性と子どもへの暴力を増幅させている」と批判する声明を発表した[6]。

2002年10月、渡航先のアフガニスタンにて体の不調を感じ急遽帰国。重度の肝臓ガンと診断され、ガンであることを公表したが、2ヶ月半の闘病後、同月27日に死去。68歳没[1]。葬儀は同年12月30日に東京山手教会で行われた。翌28日、朝日新聞は「私の視点」コーナーに、松井の寄稿文「託す「夢」 女性の平和資料館建設を」を掲載し、韓国の東亜日報が追悼記事を掲載して[7]、その死を悼んだ。

松井の遺志を継ぐ「女たちの戦争と平和資料館」には、松井の蔵書を収めたコーナーがある[8]。

NPO法人「女たちの戦争と平和人権基金」が「愛と勇気に満ち溢れたジャーナリストであった松井やよりの遺志に連なる活動の一助となること」を目的として、2005年に「やより賞」を設立した[9]。選考委員には中原道子や池田恵理子、竹信三恵子、辛淑玉らが名を連ねている[10]。

慰安婦関連の活動

1984年11月2日の夕刊紙上に《邦人巡査が強制連行 21歳故国引き離される》と題した以下の記事を執筆。

「タイ南部の小さな町に、韓国人のハルモニ(おばあさん)を訪ねあてた」「八万人とも十万人ともいわれる従軍慰安婦の多くは、生きて帰れなかった」「十四歳で結婚したが・・婚家を逃げ出し・・各地を転々とした。ある日、釜山郊外で井戸の水を水がめにくんで頭に載せて帰ろうとしたら、日本人巡査が三、四人来た。『待て』と言われて身をかわした瞬間、水がめが落ちて割れ、巡査の服をぬらした。いくら謝っても許してもらえず、殴られたり、けられたりしたうえ、車の中に押し込まれた。それが人生の岐路となった」「この夜から、挺身隊員として地獄の日々が始まった」「慰安婦の生活は、昼間は兵隊の衣類の洗濯や兵舎の掃除、弾薬運びなどの重労働で、夜は兵隊のなぐさみものになった。朝から何十人もの相手をさせられる日もあった。少しでも反抗すると、監督に殴られ、髪を引っ張られ、半裸で引き回された。人間以下の生活だった」[11]

30年後の8月5日、朝日新聞は慰安婦問題検証記事を掲載、朝鮮や台湾では「軍などが組織的に人さらいのように連行した資料は見つかっていません」「女子挺身隊は、・・慰安婦とはまったく別です」と発表したが[12]、この記事は取り消しの対象になっていない[13]。

フリージャーナリストの舘雅子は、1992年にソウルで開かれた『日本軍「慰安婦」問題解決のためのアジア連帯会議』は、松井と福島瑞穂によって仕切られており、台湾人の元慰安婦が日本兵に優しくしてもらったことを話し出すと、松井や福島が慌てて発言を遮ろうとした他、タイの女性が「日本の軍隊ばかり叩くな!」と異論を述べた際も、松井や福島が抑え込んだと証言している[14]。なお、産経新聞の記事では、台湾女性やタイ人女性の発言を封じ込めた人物を、舘は松井ではなく高橋喜久江だったとしている[要出典]。

朝日新聞の元論説委員でジャカルタ支局長も務めた長岡昇[15]は、 慰安婦報道に関わっていた松井について、彼女が退社後に軍政時代のインドネシアの取材のために現地を訪ねてきた時[注釈 1]に情報や資料を用意したが、それらを見ずに彼女は自分の意見と主張を繰り返すだけであったとし、彼女を新聞記者ではなく活動家だったと述べている。そして「こういう人が朝日新聞の看板記者の一人だったのか」「イデオロギーに囚われて、新聞記者としての職業倫理を踏み外した人たち。そういう人たちが慰安婦問題の虚報と混乱をもたらしたのだ、と私は考えています」と批判している [16]。

元毎日新聞記者でジャーナリストの徳岡孝夫は、「故松井やより記者は、従軍慰安婦の強制連行は事実であり、元凶は昭和天皇だと信じて疑わなかった。朝日は彼女に好きなように書かせ、社の説とした」[17]と述べている。

太平洋戦争時のマレーシアにおける「華人虐殺」報道への批判

太平洋戦争時、日本陸軍第5師団が英領マレーシアで指揮した抗日ゲリラの掃討作戦を、松井は「民衆虐殺」と報道したが、松井と朝日新聞社同期入社の長谷川煕によると、松井の取材を受けた現地の華人女性が次のように証言した――「シンガポールにいるという日本の朝日新聞の女性の記者が、虐殺は日本軍がやったことにしておきなさい、かまわない、と言ったんです」。また松井が1984年8月15日付朝日新聞に書いた「日本兵が赤ん坊をほうり上げて突き殺し、妊婦のおなかを切り裂くのも見た」という記事も、事件当時8歳の証言者の話を裏付けも取らずに書いたと長谷川は批判した[18]。

松井のこの取材は全くの新発掘事件の取材ではなく、多数の虐殺事件が当時マレーシアで既に再認識・発掘調査され出しており、長谷川の取材が松井の裏付け取りの性格ももっていたのと同様に、松井の取材自体がそれら現地証言の裏取りの確認取材でもあったことを見落としており、長谷川のこの主張はおかしい。(ただし、松井が取材したシュク招テイの話は他の証言集によれば、自分で見たわけでなく、目撃した叔母から聞いた話となっている。通訳ミスではないかと思われるが、そういった間違いを防ぐと意味であれば、長谷川の主張もたまたまであろうが成り立つ。)また、1984年11月2日朝日新聞で、松井がタイで会った朝鮮人女性が、朝鮮で日本人巡査に呼び止められて驚いて水がめを落した拍子に巡査の服を濡らしてしまい、謝ったものの赦されず、殴る蹴るの上、留置され、まずシンガポールに送られ、慰安婦にされたと証言するのを報道したことを、水を跳ねさせたぐらいで、謝ってもなお巡査が殴る蹴るした上で留置、海外に送って慰安婦にするのは、(常識的に)おかしいとする[19]が、長谷川は当時は日本本土でさえ治安維持法で警官が恣意的に人間をいったん逮捕留置でき、拷問も横行しており、朝鮮にも同様な法があったこと[20]、また、朝鮮の慰安婦問題で論争となっているのは当局者や軍が直接明らかな形で違法・暴力的に慰安婦狩りをしたかどうかであって、権力を悪用して当局者らが慰安婦集めをしていたこと自体は認められている[21]ことを知らないか、無視しているものと思われる。[独自研究?]

著書

単著

  • 『女性解放とは何か』未來社、1975年
  • 『人民の沈黙』すずさわ書店、1980年
  • 『魂にふれるアジア』 朝日新聞社、1985年
  • 『女たちのアジア』岩波書店、1987年
  • 『アジア・女・民衆』新幹社、1988年
  • 『市民と援助』岩波書店、1990年
  • 『アジアに生きる子どもたち』労働旬報社、1991年
  • 『魂にふれるアジア』朝日新聞社、1992年
  • 『アジアの観光開発と日本』新幹社、1993年
  • 『日本を問うアジア』部落解放研究所、1994年
  • 『アジア・女性・子ども』NCCキリスト教アジア資料センター、1995年
  • 『女たちがつくるアジア』岩波書店、1996年
  • 『北京で燃えた女たち』岩波書店、1996年
  • 『アジアの女たち』旬報社、1998年
  • 『グローバル化と女性への暴力』インパクト出版会、2000年
  • 『若い記者たちへ 松井やよりの「遺言」』樹花舎、2003年
  • 『愛と怒り闘う勇気』岩波書店、2003年

共著・編著

  • 『日本の医療. 5』(朝日新聞社編)朝日新聞社、1973年
  • 『講座おんな. 2』(吉武輝子ほかとの共著)筑摩書房、1973年
  • 『新国際秩序と平和』(日本平和学会編集委員会編)早稲田大学出版部、1986年
  • 『アジアから来た出稼ぎ労働者たち』(内海愛子と共編)明石書店、1988年
  • 『NGO,ODA援助は誰のためか』(R.ルプレヒトと共編)明石書店、1992年
  • 『フェミニズムはだれのもの?』(共著)増進会出版社、1996年
  • 『日本のお父さんに会いたい』(編著)岩波書店、1998年
  • 『あしたを拓く女たち』(監修)アジア女性資料センター、1998年
  • 『地球をめぐる女たちの反戦の声』(編著)明石書店、2001年
  • 『女性国際戦犯法廷の全記録. 1』(編著)緑風出版、2002年
  • 『女性国際戦犯法廷の全記録. 2』(編著)緑風出版、2002年
  • 『20人の男たちと語る性と政治』(編著)御茶の水書房、2002年

脚注

注釈

  1. この時長岡はジャカルタ支局長

出典

  1. “松井やよりさん死去 「戦争と女性への暴力」日本ネットワーク代表”. 47NEWS. 共同通信社. 2002年12月27日. 2014年9月11日時点のオリジナルよりアーカイブ. 2012年11月11日閲覧.
  2. 神山美奈子「敗戦後の日本キリスト教婦人矯風会と大韓基督教女子節制会 : ―キリスト教宣教理念の比較―」『名古屋学院大学論集 人文・自然科学篇』第56巻第1号、名古屋学院大学総合研究所、2019年7月、34頁、CRID 1390290699726587520、doi:10.15012/00001185、ISSN 0385-0056。
  3. 平山基生「何が常識だったのか―65年前の夏」(法学館憲法研究所サイト内)。平山基生『米軍違憲 「憲法上その存在を許すべからざるもの」』(本の泉社、2009年)135頁。長尾龍一(東京大学名誉教授。平山基生の高校時代の友人)サイト「OURANOS -ウーラノス」内、 April 12, 2015。平山基生はロシア科学アカデミーの元客員研究員で、日本ユーラシア協会(ソ連邦崩壊後の日本・ロシア協会となった旧日ソ親善協会から1992年に分離した)の下部組織であるユーラシア研究所(旧ソビエト研究所)事務局長・運営委員を務めたこともあり、渋谷区宇田川町の東京山手教会の隣にある山手マンション内に事務局を置く「沖縄・日本から米軍基地をなくす草の根運動」を拠点に反米軍基地活動を展開している。日本ユーラシア協会は日ソ協会時代、60年安保時に鶴見俊輔らの「声なき声の会」のデモの指揮を行ったほか(「回想・日ソ協会のあゆみ」編纂委員会編『回想・日ソ協会のあゆみ』日ソ協会、1974年、96頁)、現在は「戦争法の廃止を求める統一署名」運動を展開している。ロシアのウクライナ侵攻ではウクライナ支持をとる。平山基生の妻知子は弁護士(あかしあ法律事務所所属。公益財団法人いわさきちひろ記念事業団理事)で、夫の基生とともに反米軍基地活動に従事しているほか、衆議院議員総選挙に、中選挙区時代の東京都第1区から、1979年、1980年、1983年の3回にわたって、日本共産党の公認候補として立候補している。平山知子の父菊池(小林)邦作も小林多喜二ゆかりの共産党員(藤田廣登「小林多喜二周辺研究 試論 Ⅰ「伊勢崎事件資料集」補追(産別会議記念・労働図書資料室サイト内))。
  4. 『月刊婦人展望』1963年3月号、財団法人婦選会館出版部、8-11頁。
  5. 松井やよりさんについてアジア女性資料センター
  6. “米の軍事主義強化反対 東アジア、米らの女性たちが声明 ソウルで会見”. しんぶん赤旗. 2002年8月22日. 2010年3月15日閲覧.
  7. 従軍慰安婦問題追求 松井やよりさんの美しい人生 DECEMBER 12, 2002 21:57 by 李英伊
  8. 青木玲子、赤瀬美穂『女性と図書館』日外アソシエーツ、2024年、229-230頁。ISBN 9784816929960。
  9. 朝日新聞 1984年11月2日記事
  10. 朝日新聞 2014年8月5日記事
  11. 産経新聞 2014年10月11日記事
  12. 週刊新潮 2014・7・3号
  13. 山形大学 | 実践教育プログラム | グローバルスタディーズ
  14. 長岡昇 (2014年). “慰安婦報道、32年後の記事取り消し”. NPO法人「ブナの森」. 2022年12月6日時点のオリジナルよりアーカイブ。2014年8月31日閲覧。
  15. 『諸君!』2005年11月号
  16. 長谷川煕『崩壊 朝日新聞』(ワック、2015年)76頁、84頁。
  17. 長谷川煕『崩壊 朝日新聞』(ワック、2015年)76頁、84頁、98-99頁。
  18. 荻野富士夫『朝鮮の治安維持法』 Ⅳ、六花出版〈治安維持法の歴史〉、2022年1月22日。
  19. 秦郁彦『昭和史の謎を追う』 下、文藝春秋〈文春文庫〉、1999年12月10日、496頁。

関連項目

外部リン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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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무료 백과 사전 "Wikipedia (Wikipedia)"
마츠이 야요이
『월간부인 전망』 1963년 3월호부터
탄생1934년 4월 12일 일본 교토부
일본의 국기
사망2002년 12월 27일 (68세)
직업기자
국적일본의 국기 일본
최종 학력도쿄 외국어대학 졸업
위키 포털 문학
템플릿 보기

마츠이 야요이 (마츠이 야요이, 1934년 4월 12일 - 2002년 12월 27일 [ 1 ] )는 일본의 저널리스트 , 페미니스트 , 모토 아사히 신문 편집 위원. 본명은 마츠이 야의.

교토부 출신 [ 1 ] . 아버지의 히라야마 테루지 , 어머니의 아키코는 함께 목사 로, 도쿄도 시부야구 에 도쿄 야마테 교회 를 창립했다. 본명의 '야의'도 기독교에서 유래한다. 아버지의 히라야마 테루다는 반핵단체 원수폭금지 일본협의회 (원수협)가 아직 공산당의 영향력이 강하지 않았을 무렵, 그 상임이사를 맡아 일본 그리스도교부인 교풍회 에 금주 운동에서 평화운동으로 활동범위를 넓히도록 제언했다 [ 2 ] . 마츠이나 보다의 동생인 히라야마 기생은 히라야마 테루지와는 반대로 무신론자가 되는 일본 공산당원 으로 반미군 기지 활동가 [ 3 ] .

인물

아오야마 학원 중등부·고등부 를 거쳐 [ 4 ] , 1961년 에 도쿄 외국어 대학 외국어 학부 영미과를 졸업해, 아사히 신문사 에 입사. 고등학교 시절 결핵 으로 4년간 요양했기 때문에 [ 5 ] 26세에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했다. 사회부 기자로서 복지, 공해, 소비자 문제, 여성 문제 등을 취재, 다치카와 지국장, 편집 위원으로부터 1981년 11월~85년 3월 싱가포르 ·아시아 총국원. 1994년 아사히신문사 정년퇴직 [ 요출전 ].

아사히신문사 재직 중인 1977년 '아시아 여자들의 모임'을 설립, 퇴직 후 1995년 아시아 여성 자료 센터 를, 1998년 ' 전쟁과 여성 폭력' 일본 네트워크 를 설립하여 대표가 된다. 아사히 시대부터 카미치 대학 · 지바 대학 · 일본 복지 대학 · 일본 여자 대학 · 류큐 대학 의 비상근 강사, 요코하마 국립 대학 대학원의 객원 교수를 맡았다 [ 요출전 ].

아사히 신문 재직중인 사회부의 톱 시대에 위안부 문제 를 다룬 [ 요출전 ].

2000년 12월에 「전쟁과 여성에의 폭력」일본 네트워크 등이 자주 개최한 「모의 재판」여성 국제 전범 법정 에서 국제 실행 위원회 공동 대표의 1명이 되어, 일본측 주최자의 대표가 되었다 [ 요출전 ].

2002년 8월 한국 서울 에서 개최된 '군사주의에 반대하는 동아시아·미국·푸에르토리코의 네트워크'에 일본 대표로 참여. 미국이 전개하고 있는 ' 테러 와의 전쟁'이 '군사주의를 강화하고 여성과 아이에 대한 폭력을 증폭시키고 있다'고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 6 ] .

2002년 10월, 도항처의 아프가니스탄 에서 몸의 부조를 느끼고 급거귀국. 심한 간암으로 진단되어 암임을 공표했지만 2개월 반 투병 후 같은 달 27일 사망했다. 68세몰 [ 1 ] . 장례식은 같은 해 12월 30일 도쿄 야마노테 교회에서 열렸다. 다음 28일 아사히신문은 '내 시점' 코너에 마츠이의 기고문 '탁탁하는 '꿈' 여성의 평화자료관 건설을'를 게재하고 한국의 동아일보가 추도기사를 게재하고 [ 7 ] 그 죽음을 들었다.

마츠이의 유지를 이어주는 「여자들의 전쟁과 평화 자료관」에는 마츠이의 장서를 담은 코너가 있다 [ 8 ] .

NPO법인 ‘ 여자들의 전쟁과 평화인권기금 ’이 ‘사랑과 용기로 가득한 언론인이었던 마츠이나 보다의 유지에 이어지는 활동의 도움이 되는 것’을 목적으로 2005년에 ‘야상’을 설립했다 [ 9 ] . 전형위원에는 나카하라 미치코 와 이케다 에리코 , 타케노부 미에코 , 신숙타마 등이 이름을 짓고 있다 [ 10 ] .

위안부 관련 활동

1984년 11월 2일의 석간지상에 《방인 순사가 강제 연행 21세 고국 떼어진다》라고 제목을 붙인 이하의 기사를 집필.

“태국 남부의 작은 마을에 한국인의 할머니(할머니)를 찾아왔다” “8만명 모두 10만명이라고도 불리는 종군 위안부 의 대부분은, 살아 돌아갈 수 없었다” “14세로 결혼했지만··혼가를 도망쳐 어느 날, 부산 교외에서 우물의 물을 물에 넣고 돌아가려고 했더니, 일본인 순사가 3, 4명 왔다 '기다려'라고 말해져 몸을 피해 순간, 물이 떨어지고, 순찰의 옷을 적셔도 용서했다. 받지 못하고, 때리거나, 쳐진 뒤, 차 안에 밀려났다. 그것이 인생의 기로가 되었다」 「이 밤부터, 정신 대원으로서 지옥의 날들이 시작되었다」 , 탄약 운반 등의 중노동으로, 밤은 병대의 속삭임이 되었다. 아침부터 수십명의 상대를 시킬 수 있는 날도 있었다. [ 11 ]

30년 후인 8월 5일, 아사히 신문은 위안부 문제 검증 기사를 게재, 조선이나 대만에서는 「군 등이 조직적으로 사람처럼 연행한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 여자 정신대는, ·· 위안부와는 전혀 별개입니다」라고 발표했지만 [ 12 ] , 이 기사 는

프리 저널리스트의 칸 마사코 는 1992년 서울에서 열린 '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아시아 연대회의 '는 마츠이와 후쿠시마 미즈호 에 의해 구분되어 있어 대만인 전위안부가 일본병 에 상냥하게 받은 것을 말하자 마츠이나 후쿠시마가 당황해서 발언을 막으려고 한 것 외에 태국의 여성이 「일본의 군대만 두드리지 마라 ! 14 ] . 덧붙여 산케이 신문의 기사에서는, 대만 여성이나 태국인 여성의 발언을 봉쇄한 인물을, 칸은 마츠이가 아니라 타카하시 키히사에 였다고 한다 [ 요출전 ].

아사히 신문 의 전 논설 위원으로 자카르타 지국장도 맡은 나가오카 승 [ 15 ] 은 위안부 보도에 관여하고 있던 마츠이에 대해, 그녀가 퇴사 후에 군정 시대의 인도네시아의 취재를 위해 현지를 방문해 왔을 때 [ 주석 1 ] 에 정보나 자료를 준비했지만, 그들을 보지 않고 그녀는 자신의 의견과 주장을 반복할 뿐이라며 그녀를 신문 기자가 아니라 활동가였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이 아사히 신문의 간판 기자 중 한 명이었는가” “이데올로기에 얽매여 신문 기자로서의 직업 윤리를 밟은 사람들. 그러한 사람들이 위안부 문제의 허보와 혼란을 가져왔다고 생각한다”고 비판 하고 있다 .

전 매일 신문 기자로 저널리스트의 도쿠오카 타카오 는, 「고마츠이야 보다 기자는, 종군 위안부의 강제 연행은 사실이고, 원흉은 쇼와 천황이라고 믿고 의심하지 않았다. 아사히는 그녀에게 좋아하게 쓰게 하고, 사의 설이라고 했다」[ 17 ] 라고 말하고 있다.

태평양 전쟁시 말레이시아에서 '화인 학살' 보도에 대한 비판

태평양 전쟁시 일본 육군 제 5 사단이 영국령 말레이시아에서 지휘한 항일 게릴라의 소토 작전을 마츠이는 「민중 학살」이라고 보도했지만 마츠이와 아사히 신문사 동기 입사의 하세가와 희에 따르면 마츠이의 취재를 받았다. 현지의 화인 여성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싱가포르에 있다고 하는 일본의 아사히 신문의 여성의 기자가, 학살은 일본군이 한 일로 해 두십시오, 상관없다, 라고 말했습니다」. 또 마츠이가 1984년 8월 15일자 아사히 신문 에 쓴 "일본병이 아기를 끌어올려 찌르고 임산부의 배를 찢는 것도 봤다"는 기사도 사건 당시 8세의 증언자의 이야기를 뒷받침하지 않고 썼다고 하세가와는 비판했다 [ 18 ] .

마츠이의 이 취재는 전혀 신발굴 사건의 취재가 아니고, 다수의 학살 사건이 당시 말레이시아에서 이미 재인식·발굴 조사되어 나와 있어, 하세가와의 취재가 마츠이의 뒷받침의 성격도 갖고 있던 것과 같이, 마츠이의 취재 자체가 그들 현지 증언의 뒷받침의 확인 취재이기도 했다. (단, 마츠이가 취재한 시크 초등의 이야기는 다른 증언집에 의하면, 스스로 본 것은 아니고, 목격한 이모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되고 있다. 통역 실수가 아닐까 생각되지만, 우연한 실수를 막는다면 의미라면 하세가와의 주장도 되겠지만 성립한다. 본인 순찰에 불려 놀라서 물이 떨어진 박자에 순찰의 옷을 적시고, 사과했지만 용서되지 않고, 때리는 차기 위, 유치되어 우선 싱가포르에 보내져 위안부에게 되었다고 증언하는 것을 보도한 것을, 물을 튀게 한 정도로, 사과해도 여전히 순찰이 때리는 걷어차는 뒤에 유치, 해외에 보내 위안부로 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상하다고 한다 [ 19 ] 하지만 하세가와는 당시에는 일본 본토조차 치안 유지법으로 경찰이 자의적으로 인간을 일단 체포 유치할 수 있어 고문도 횡행하고 있어 조선에도 같은 법이 있었던 것 [ 20 ] 또, 조선의 위안부 문제로 논쟁이 되고 있는 것은 당국자나 군이 직접 분명한 형태로 위법·폭력적으로 위안부 사냥을 했는지 여부이며, 권력을 악용해 당국자들이 위안부 모으고 있던 것 자체는 인정되고 있다 [ 21 ] 것을 알지 못한다. [ 독자 연구? ]



著書

単著

  • 『女性解放とは何か』未來社、1975年
  • 『人民の沈黙』すずさわ書店、1980年
  • 『魂にふれるアジア』 朝日新聞社、1985年
  • 『女たちのアジア』岩波書店、1987年
  • 『アジア・女・民衆』新幹社、1988年
  • 『市民と援助』岩波書店、1990年
  • 『アジアに生きる子どもたち』労働旬報社、1991年
  • 『魂にふれるアジア』朝日新聞社、1992年
  • 『アジアの観光開発と日本』新幹社、1993年
  • 『日本を問うアジア』部落解放研究所、1994年
  • 『アジア・女性・子ども』NCCキリスト教アジア資料センター、1995年
  • 『女たちがつくるアジア』岩波書店、1996年
  • 『北京で燃えた女たち』岩波書店、1996年
  • 『アジアの女たち』旬報社、1998年
  • 『グローバル化と女性への暴力』インパクト出版会、2000年
  • 『若い記者たちへ 松井やよりの「遺言」』樹花舎、2003年
  • 『愛と怒り闘う勇気』岩波書店、2003年

共著・編著

  • 『日本の医療. 5』(朝日新聞社編)朝日新聞社、1973年
  • 『講座おんな. 2』(吉武輝子ほかとの共著)筑摩書房、1973年
  • 『新国際秩序と平和』(日本平和学会編集委員会編)早稲田大学出版部、1986年
  • 『アジアから来た出稼ぎ労働者たち』(内海愛子と共編)明石書店、1988年
  • 『NGO,ODA援助は誰のためか』(R.ルプレヒトと共編)明石書店、1992年
  • 『フェミニズムはだれのもの?』(共著)増進会出版社、1996年
  • 『日本のお父さんに会いたい』(編著)岩波書店、1998年
  • 『あしたを拓く女たち』(監修)アジア女性資料センター、1998年
  • 『地球をめぐる女たちの反戦の声』(編著)明石書店、2001年
  • 『女性国際戦犯法廷の全記録. 1』(編著)緑風出版、2002年
  • 『女性国際戦犯法廷の全記録. 2』(編著)緑風出版、2002年
  • 『20人の男たちと語る性と政治』(編著)御茶の水書房、2002年

脚注

注釈

  1. この時長岡はジャカルタ支局長

出典

  1. “松井やよりさん死去 「戦争と女性への暴力」日本ネットワーク代表”. 47NEWS. 共同通信社. 2002年12月27日. 2014年9月11日時点のオリジナルよりアーカイブ. 2012年11月11日閲覧.
  2. 神山美奈子「敗戦後の日本キリスト教婦人矯風会と大韓基督教女子節制会 : ―キリスト教宣教理念の比較―」『名古屋学院大学論集 人文・自然科学篇』第56巻第1号、名古屋学院大学総合研究所、2019年7月、34頁、CRID 1390290699726587520、doi:10.15012/00001185、ISSN 0385-0056。
  3. 히라야마 기생 「무엇이 상식이었는지―65년 전의 여름」 (법학관 헌법 연구소 사이트내). 히라야마 기생 “미군 위헌 “헌법상 그 존재를 용서할 수 없는 것””(책의 샘사, 2009년) 135페이지. 나가오 류이치 (도쿄대학 명예 교수. 히라야마 기생의 고교 시대의 친구) 사이트 「OURANOS -우라노스」내, April 12, 2015 . 히라야마 기생은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 의 전 객원 연구원으로, 일본 유라시아 협회 (소 연방 붕괴 후의 일본·러시아 협회가 된 구일 서 친선 협회로부터 1992년에 분리했다)의 하부 조직인 유라시아 연구소 (구 소련 연 사무국장·운영위원을 맡은 적도 있고, 시부야구 우다가와마치의 도쿄 야마노테 교회 옆에 있는 야마노테 맨션 내에 사무국을 두는 “오키나와·일본에서 미군 기지를 없애는 풀뿌리 운동” 을 거점으로 반미군 기지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일본 유라시아 협회는 닛소 협회 시대, 60년 안보 시에 쓰루미 슌스케 등의 「목소리 없는 소리의 회」의 시위의 지휘를 실시한 것 외(「회상·일소협회의 아유미」편찬위원회편 「회상·일소협회의 아유미」일소협회, 1974년, 96쪽), 현재는 「전쟁법의 폐지 .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서는 우크라이나 지지를 취한다. 히라야마 기생의 아내 치코는 변호사( 아카시아 법률 사무소 소속.공익 재단법인 이와사키치히로 기념 사업단 이사)로, 남편의 기생과 함께 반미군 기지 활동에 종사하고 있는 것 외에, 중의원 의원 총선 에 중선거구 시대의 도쿄도 제1구 부터 1979년, 1980년, 1983년 3회에 걸쳐 일본 공산당의 공인 후보로 입후보하고 있다. 히라야마 토모코의 아버지 기쿠치(고바야시) 일본작도 고바야시 타키지 연고의 공산당원( 후지타 히로토 “코바야시 타키지 주변 연구 시론 Ⅰ “이세자키 사건 자료집” 보추 (산별 회의 기념·노동 도서 자료실 사이트내)).
  4. 『월간부인 전망』 1963년 3월호, 재단법인부 선회관 출판부, 8-11페이지.
  5. 마츠이 야요시에 대해 아시아 여성 자료 센터
  6. “미의 군사주의 강화 반대 동아시아, 미국 등 여성들이 성명 서울에서 회견” . 신분 적기 . 2002년 8 월 22일 .
  7. 종군 위안부 문제 추구 마츠이 야요시의 아름다운 인생 DECEMBER 12, 2002 21:57 by 이영이
  8. 아오키 레이코, 아카세 미호 「여성과 도서관」일외 어소시에이츠, 2024년, 229-230페이지. ISBN 9784816929960.
  9. 아사히 신문 1984년 11월 2일 기사
  10. 아사히 신문 2014년 8월 5일 기사
  11. 산케이 신문 2014년 10월 11일 기사
  12. 주간 신조 2014·7·3호
  13. 야마가타 대학 | 실천 교육 프로그램 | 글로벌 스터디
  14. 나가오카 승 (2014년). “ 위안부 보도, 32년 후의 기사 취소 ”. NPO 법인 “너도밤나무의 숲”. 2022년 12월 6일 시점의 오리지널 보다 아카이브. 2014년 8월 31일에 확인함.
  15. 『제군! 』2005년 11월호
  16. 하세가와 煕『붕괴 아사히 신문』(왁, 2015년) 76쪽, 84쪽.
  17. 하세가와 煕『붕괴 아사히 신문』(왁, 2015년) 76쪽, 84쪽, 98-99쪽.
  18. 오기노 후지오 『조선의 치안 유지법』 Ⅳ, 롯카 출판〈치안 유지법의 역사〉, 2022년 1월 22일.
  19. 진진히코 『쇼와사의 수수께끼를 쫓는』 아래, 문예춘추 <분춘문고>, 1999년 12월 10일, 496쪽.

관련 항목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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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yori Matsui

From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Yayori Matsui
BornApril 12, 1934[1]
DiedDecember 27, 2002 (aged 68)
Tokyo, Japan
Known forWomen's rights in Asia

Yayori Matsui (松井やより Matsui Yayori) (April 12, 1934 – December 27, 2002) was a Japanese journalist and women's rights activist noted for her work to raise awareness of sex slaves and sex tourism in post-war Asia.[2] In 1961 she began work as a journalist for the newspaper Asahi Shimbun, retiring in 1994 to work as a full-time social activist, founding numerous women's organizations and writing on gender inequality in Japan and on sex crimes committed by the Japanese Imperial Army, namely against the comfort women of the Second World War.[3] Her work culminated in the 2000 Tokyo Women's War Crimes Tribunal, a tribunal held to gain some form of justice for the victims of Japanese military sexual slavery.[4]

Biography

Matsui was born in Kyoto, Japan, to a family of Christian ministers.[5] Her family moved to Tokyo where her parents founded the Yamate Christian Church and raised their six children.[5] Unable to graduate from high school due to a severe case of tuberculosis, she was nonetheless admitted to the Department of British and American Studies at the Tokyo University of Foreign Studies.[6] Matsui was introduced to the feminist movement while on a trip to the United States and Europe during her junior year in college. In their work Gender in Modern East Asia, Barbara Molony, Janet Theiss, and Hyaeweol Choi state that she experienced revulsion at the blatant racism she encountered there and surprise over the disparity in wealth and equality between these regions and Asia.[3] In later years, well-into her fight for "Pan-Asian feminist solidarity", Matsui criticized the way feminism operated in the United States, stating that she was "suspicious about the American model of empowerment, which means the right to grasp for power just as men do."[4] In 1961, Matsui joined the Japanese newspaper Asahi Shimbun as a reporter, writing on public health and environmental issues, such as birth defects cause by Thalidomide and mercury poisoning (Minamata disease).[6][7] As a representative of Asahi Shimbun and of the Asian Women's Association which she founded, Matsui attended all United Nations conferences from 1975 to 1995.[8]

In 1976, she founded the organization Asian Women in Solidarity in opposition to sex tourism in Asia. In 1981, she was posted as a correspondent in Singapore, where she came into contact with comfort women, women who were forced into prostitution by the Japanese Imperial Army during the Second World War.[7] She became the first woman to serve as the Asian General Bureau Correspondent for the Asahi Shimbun.[9] In 1994, she resigned from Asahi to work full-time as a social activist, her decision influenced by the trend of Southeast Asian sex tourism among Japanese businessmen. Shortly after retiring, she founded the Asia-Japan Women's Resource Center,[4] which continues to operate today.[10]

In 1998, Matsui helped create the Japanese branch of Violence Against Women in War Network (VAWW-NET).[4] Working with the Asia-Japan Women's Resource Center and other Japanese and East Asian women's organizations, she organized the Tokyo Women's War Crimes Tribunal from 1998 to 2000, devoted to crimes committed by the Japanese Imperial Army in the comfort system.[11] In 2001, Matsui visited Afghanistan to meet with Afghan feminist-activists. While there, she was struck by illness, which was later diagnosed to be liver cancer.[5] She died in a hospital in Tokyo in December 2002.[5]

Tokyo Women's War Crimes Tribunal

In 1998, the Violence Against Women in War Network, Japan, presented to the Asian Women's Solidarity Conference in Seoul the idea of holding a tribunal in order to achieve justice for the women victimized by the Japanese military's practice of sexual slavery in the Second World War.[12] Matsui supported this idea and worked with women's rights organizations and advocates from China, Indonesia, the Philippines, Taiwan, East Timor, Malaysia, and North and South Korea in order to make the tribunal a reality.[12] Preparation for the tribunal took place in Tokyo and Seoul and lasted from 1998 through 2000; preparation was headed by the International Organizing Committee which conducted research on the comfort system and its effects on victims.[12] The tribunal was held from December 8 to December 12, 2000, in Tokyo, during which victims of the comfort system employed by the Japanese military in the 1930s and 1940s gave their testimony, as did lawyers and experts representing former comfort women from across East Asia and the Netherlands. Unlike previous trials dealing with the crimes committed by the Japanese military during the war, this tribunal named Emperor Hirohito as one of the defendants, accusing him of being complicit in the crimes committed against comfort women. Though invited, the Japanese government refused to send representatives from either the government or the emperor to the proceedings.[12]

The tribunal was conducted using standard criminal trial procedures, though it held no power of law, and over 75 victims were present, with 35 former comfort women testifying during the proceedings.[13] Documents were presented that implicated the Japanese government and emperor in the atrocities committed throughout the Japanese Empire against these women - kidnapping, rape, sexual abuse and assault, and even murder ranked in the indictments.[12] The judges presiding over the tribunal found that the Japanese government and Emperor Hirohito were guilty of crimes against humanity in the form of the military policy that was the comfort system; later, a more complete ruling was issued in 2001 which cemented the preliminary ruling.[12] Though the tribunal possessed no true legal power and those guilty of participating in the comfort system received no punishment for their crimes, it brought a form of justice to former comfort women and, in the process, revealed historical documents and records previously unavailable to the people of Japan and the world.[13] The tribunal represented the power of civil society in terms of justice and law and showed the value of societal involvement in uncovering and preserving history, though not without criticism and attacks. Japanese mainstream media ignored the trial and the only coverage of the event, a broadcast by NHK (Nippon Hōsō Kyōkai), a Japanese television broadcaster, was altered due to pressure by conservative leaders, including the prime minister of Japan at the time, Shinzo Abe.[14] Detractors to the tribunal, such as Takashi Nakamiya, a "leftist watcher," labeled it a mock tribunal in an attempt to discredit the value of the proceedings and of Matsui's work in general.[11] An edition of the Takarajima Magazine's "Real" series features an article on "exceptionally stupid women," naming Matsui as one of these women. Nakamiya wrote the portion on her, calling her a "sinful woman" and criticizing her activism as being motivated by greed and ego.[11] The article was mainly written by right-leaning men and was created to attack prominent leftist and feminist women.[11]

Legacy

While visiting Afghanistan in October 2001 to meet with Afghan feminists, Matsui became ill.[5] Upon her return to Japan, she was diagnosed with liver cancer, at which point she began working on an autobiography and continued her work on designing a women's museum; Matsui died in a hospital in Tokyo on December 27, 2002.[6] Her will granted her assets to the Human Rights Fund on Women's War and Peace which funded the building of the Women's Active Museum of War and Peace, a private museum based upon the focuses of her life's work and housing all documentation relating to the Tokyo Women's War Crimes Tribunal that opened in Tokyo in August 2005.[15] In the words of Takashi Yoshida in From Cultures of War to Cultures of Peace, "the term 'active museum' was chosen to symbolize the committee's wish that the museum would play a pivotal role in enlightening the public and transforming each visitor into a socially active citizen."[6][15] Even in death, she was criticized by some, Nakamiya claiming that the 1.5 million yen donated to Matsui during her illness was used selfishly by her, when, in fact, the money had been used to build the Women's Active Museum of War and Peace.[11] Despite such criticisms and attacks, Matsui's legacy of fighting for former comfort women and women victimized by war lives on in her numerous works on Japanese and East Asian women and in the inspiration her life and works give to those working towards gender equality worldwide.

Literary works

Books

  • Women's Asia (1989) which deals with Asian women's economic perspectives and details the role they play in the economies of Asia.
  • Women in the New Asia: From Pain to Power (2000) in which Matsui deals with the effects of globalization on human rights, focusing on the women of Japan, Thailand, the Philippines, Taiwan, China, Nepal, and Korea.

Articles

  • Japan Becoming a War State-Let Us Cry Out against War with Women around the World (2002)
  • Women's International War Crimes Tribunal on Japan's Military Sexual Slavery - Success Brought by the Power of Women's Transnational Solidarity (2001)
  • Women's International War Crimes Tribunal on Japan's Military Sexual Slavery - An NGO Attempt to Restore Justice for Victimized Women and to Prevent Future Wartime Violence against Women (2001)

See also

References

  1. Magnier, Mark (January 8, 2003). "Yayori Matsui, 68; Japanese Journalist Became Noted Women's Rights Activist". Los Angeles Times. Retrieved 16 June 2012.
  2. Dales, Laura (2009). Feminist movements in contemporary Japan. London: Routledge. pp. 16–19. ISBN 9780415459419. OCLC 289070723.
  3. Molony, Barbara (2016). Gender in modern East Asia : an integrated history. Theiss, Janet M., 1964-, Choi, Hyaeweol (1st ed.). Boulder, CO: Westview Press. p. 425. ISBN 9780813348759. OCLC 947808181.
  4. Setsu, Shigematsu (2012). Scream from the shadows : the women's liberation movement in Japan.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pp. 175–176 and 203. ISBN 9780816667581. OCLC 794492284.
  5. Saxon, Wolfgang (2003). "Yayori Matsui Dies at 68; Championed Asian Women". The New York Times. ISSN 0362-4331. Retrieved 2018-02-09.
  6. "Asia-Japan Women's Resource Center - Yayori Matsui". www.ajwrc.org.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18-03-15. Retrieved 2018-02-09.
  7. Buckley, Sandra (1997). Broken silence : voices of Japanese feminism.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pp. 131–133. ISBN 978-0-520-08514-5. OCLC 42855048.
  8. Mackie, Vera (2003). Feminism in modern Japan : citizenship, embodiment, and sexualit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pp. 152 and 202. ISBN 9780521820189. OCLC 667084879.
  9. "Feminist forum". Women's Studies International Forum. 13 (1–2): I–XVI. 1990. doi:10.1016/0277-5395(90)90093-d.
  10. "Yayori Matsui « Who we are « ABOUT AJWRC « AJWRC". www.ajwrc.org. Retrieved 2026-01-04.
  11. Brasor, Philip (2003-03-09). "Yayori Matsui's legacy lives on — as intended". The Japan Times Online. ISSN 0447-5763. Retrieved 2018-02-09.
  12. Chinkin, Christine (April 2001). "Christine Chinkin - The Tokyo Tribunal 2000". www.iccwomen.org. Retrieved 2018-02-09.
  13. Dolgopol, Ustinia (2006). The challenge of conflict : international law responds. Gardam, Judith Gail. Leiden, the Netherlands: Martinus Nijhoff Publishers. pp. 488–496. ISBN 9789004145993. OCLC 235291712.
  14. Morris-Suzuki, Tessa (2007). Auer, James E. (ed.). "Who is Responsible? The Yomiuri Project and the Legacy of the Asia-Pacific War in Japan". Asian Perspective. 31 (1): 177–191. doi:10.1353/apr.2007.0033. JSTOR 42704581.
  15. Takashi, Yoshida (2014). From cultures of war to cultures of peace : war and peace museums in Japan, China, and South Korea. Portland, Maine. pp. 100–106. ISBN 9781937385446. OCLC 8335740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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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이 야요리(松井やより, 1934~2002)의 인물 및 사상적 배경과 핵심 내용 정리입니다.

마쓰이 야요리(松井やより)의 생애와 인물 개요

마쓰이 야요리는 일본의 저명한 언론인이자 반전 평화주의자, 초국적 페미니즘 운동가이다. 1961년 아사히 신문사에 기자로 입사하여 사회부 기자, 싱가포르 아시아총국원, 편집위원 등을 지내며 여성 문제, 공합(환경 오염), 복지, 소비자 문제, 아시아 민중 문제를 집중 취재하였다. 퇴사 후에는 아시아여성자료센터를 설립하고, <전쟁과 여성에 대한 폭력> 일본 네트워크(VAWW-NET Japan)를 조직하여 2000년 도쿄에서 열린 '여성국제전범법정'의 공동대표로 활동하는 등 행동하는 지식인이자 운동가로서 활동하였다.

주요 사상적 배경과 핵심 사상

<1. 기독교적 평화주의와 전쟁 책임 의식>

  • 기독교 목사 부부 밑에서 성장하며 군국주의 시기 핍박을 경험한 가정환경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 부친으로부터 평화주의와 철저한 전쟁 책임 의식을, 모친으로부터 여성의 주체성과 자립을 배웠으며, 이는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성과 국가 폭력을 직시하는 윤리적 출발점이 되었다.

<2. 초국적 연대와 교차성(가부장제·제국주의·자본주의의 결합 비판)>

  • 서구 중심의 페미니즘이나 자국 중심주의를 넘어, 침략과 착취를 겪은 아시아 민중 여성의 관점에서 구조를 파악하였다.

  • 일본 남성들의 아시아 '기생관광' 실태 고발을 시작으로, 일본의 경제적 풍요가 아시아 여성과 민중에 대한 수탈 및 성 착취 구조와 연결되어 있음을 폭로하였다.

  • 여성 억압을 단순한 남녀 갈등으로 보지 않고, 식민지 지배·자본주의적 개발주의·군사주의가 결합된 복합적인 구조적 폭력으로 규정하였다.

<3. 군사주의 반대와 국가 폭력 고발>

  • 전쟁과 군사주의가 여성과 아동에 대한 성폭력 및 인권 유린을 제도화한다고 보았다.

  •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단순한 과거사가 아니라 국가 권력과 군사주의가 자행한 심각한 인도에 반한 죄로 인식하였다.

  •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 등 현대 군사 행동에 대해서도 군사주의를 강화하고 민간인 폭력을 심화시키는 구조라고 강하게 비판하였다.

<4. 당사자 중심주의와 민중 법정(여성국제전범법정) 구상>

  • 국가 사법체계가 가해자 중심이거나 침묵할 때, 억압받고 배제된 피해 당사자의 목소리를 법과 정의의 중심에 두어야 한다고 보았다.

  • 2000년 민간 차원에서 주최한 '여성국제전범법정'을 통해 쇼와 천황(히로히토)과 일본 정부의 전쟁 책임을 단죄하며, 국가를 초월한 시민사회의 도덕적·법적 심판 가능성을 실천으로 증명하고자 하였다.

<5. 언론인의 사회적 책무와 실천적 저널리즘>

  • 객관이라는 미명 아래 권력이나 대중에 영합하는 기계적 중립을 거부하였다.

  • 사회적 약자와 고통받는 현장에 직접 찾아가 진실을 드러내고, 부조리를 기록하는 것을 언론인의 본질적 책무로 삼았다.

사상적 의의와 평가

마쓰이 야요리는 자국(일본)의 침략 범죄와 가해 책임을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아시아 각국의 피해 여성들과 연대망을 구축한 대표적인 '초국적 평화·여성주의' 사상가이다. 국가 권력이나 국민국가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세계인의 관점에서 보편적 인권과 탈군사주의를 지향했던 인물로 평가받는다. 반면, 일본 내 보수·우익 진영에서는 그녀의 보도 및 활동 방식이 이념적이고 운동가적 성향이 강해 사실 검증보다 주장을 앞세웠다는 비판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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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井やより(마쓰이 야요리, 1934–2002): 삶과 사상

마쓰이 야요리(松井やより)는 전후 일본의 여성운동·아시아연대운동을 이해할 때 매우 중요한 인물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는 <일본 여성의 해방>만을 주장한 페미니스트라기보다, 일본의 식민주의와 전쟁책임, 아시아의 여성 인권, 성폭력, 경제적 착취를 하나의 문제로 연결해서 생각한 <아시아 연대형 페미니스트>였습니다.

첨부하신 자료에서도 그를 단순히 언론인으로 소개하지 않고, 아사히신문 기자이면서 아시아여성자료센터, <전쟁과 여성에 대한 폭력> 일본네트워크 등 여러 단체를 창설하고 국제적 여성운동을 이끈 인물로 제시합니다. 松井やより

1.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여성 언론인

마쓰이는 1934년 교토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히라야마 데루지(平山照次)는 목사였고, 어머니도 목회자였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아버지가 전쟁 중 군국주의에 반대하여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될 정도로 반전적 성향을 가졌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가정환경은 훗날 마쓰이가 일본의 전쟁책임과 국가폭력 문제를 집요하게 추적하게 되는 하나의 정신적 배경으로 볼 수 있습니다. 松井やより

도쿄외국어대학 영어과를 졸업한 뒤 1961년 아사히신문사에 입사했습니다. 당시 여성 기자에게는 매우 제한된 역할만 허용되던 시기였지만, 그는 사회부를 거쳐 싱가포르·아시아 총국원까지 활동했습니다. 1994년 퇴직한 뒤에는 오히려 사회운동에 더욱 본격적으로 뛰어듭니다. 松井やより

그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기자 → 운동가>라는 단순한 전환이 아닙니다. 기자 시절부터 이미 취재와 운동의 경계가 상당히 가까웠습니다. 마쓰이에게 저널리즘은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는 직업이라기보다, 보이지 않는 피해자의 목소리를 사회에 드러내는 실천에 가까웠습니다.


2. 사상의 첫 번째 축: 여성문제를 ‘아시아’에서 보아야 한다

그의 대표 저서 제목들을 보면 사상의 방향이 매우 선명합니다.

<女たちのアジア 여성들의 아시아>,
<アジア・女・民衆 아시아·여성·민중>,
<日本を問うアジア 일본을 묻는 아시아>,
<女たちがつくるアジア 여성들이 만드는 아시아>,
<アジアの女たち 아시아의 여성들>

등입니다. 松井やより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세 가지입니다.

<아시아–여성–민중>입니다.

마쓰이는 일본 여성의 지위를 일본 국내의 남녀 불평등 문제만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일본 여성이 일본 사회에서는 남성에게 차별받지만, 동시에 경제적으로 부유한 일본의 국민으로서는 동남아시아 여성에 대해 우월한 위치에 놓일 수도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것은 당시 일본 페미니즘 내부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문제제기였습니다.

즉,

“여성은 언제나 피해자인가?”

라는 질문입니다.

일본 여성은 일본 남성중심사회에서는 피해자일 수 있지만, 일본의 경제적·식민주의적 관계 안에서는 아시아 여성에 대해 가해 구조에 참여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지점 때문에 그의 페미니즘은 <국민국가 내부의 남녀평등>을 넘어섭니다.


3. 두 번째 축: 일본 제국주의와 여성의 전쟁 경험

마쓰이 사상의 중심에는 일본의 전쟁책임 문제가 있습니다.

그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여한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자료에는 1977년 아사히신문 재직 중 이미 위안부 문제를 다루었으며, 이후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아시아연대회의에도 깊숙이 참여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松井やより

그에게 위안부 문제는 단순한 과거사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 구조는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일본 제국주의
→ 군사주의
→ 식민지배
→ 남성중심주의
→ 여성의 신체에 대한 지배
→ 성폭력

따라서 전쟁책임과 여성해방은 별개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 관점은 1998년 그가 만든 <戦争と女性への暴力 일본ネットワーク — 전쟁과 여성에 대한 폭력 일본 네트워크>에서 가장 명확하게 표현됩니다. 松井やより

2000년 도쿄에서 열린 <여성국제전범법정>에도 공동대표로 참여했습니다. 이 법정은 법적 강제력이 있는 국가 법정이 아니라 시민법정이었지만, 마쓰이에게 중요한 것은 국가가 충분히 심판하지 않은 전시 성폭력의 책임을 여성들이 스스로 역사적 기록으로 남기는 일이었습니다.


4. 세 번째 축: 전쟁 성폭력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구조다

마쓰이가 위안부 문제에 집중했다고 해서 그의 관심이 1930~40년대에 머물렀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핵심적인 생각은

<전쟁과 여성폭력은 지금도 계속된다>

는 것이었습니다.

2002년 한국·동티모르·아프가니스탄 여성운동가들과 함께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군사행동 등을 비판하면서, 군사주의가 강화되면 여성과 아동에 대한 폭력이 증가한다고 주장했습니다. 松井やより

따라서 위안부 문제 역시 하나의 역사적 예외가 아니라,

전쟁 + 군대 + 국가권력 + 성별 위계

가 결합할 때 나타나는 구조적 현상으로 이해했습니다.

이 점에서 그의 여성주의는 강하게 <반군사주의적 페미니즘>입니다.


5. 네 번째 축: 일본의 경제적 아시아 지배에 대한 비판

마쓰이에게 일본의 아시아 지배는 1945년에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군사적 제국주의가 끝난 뒤 경제적 우위가 새로운 형태의 지배관계를 만들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관광, 성산업, 일본 기업의 해외진출, 아시아 여성 노동자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의 책

<アジアに生きる子どもたち 아시아에서 살아가는 아이들>,
<アジアの観光開発と日本 아시아의 관광개발과 일본>,
<グローバル化と女性への暴力 글로벌화와 여성에 대한 폭력>

이라는 제목만 보아도 문제의식이 드러납니다. 松井やより

마쓰이에게 세계화는 반드시 여성에게 해방을 가져오는 과정이 아니었습니다.

값싼 여성노동, 성산업, 관광산업, 이주노동을 통해 부유한 국가의 소비가 가난한 국가 여성의 노동과 몸에 의존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그의 비판 대상은 단순히 <일본 남성>이 아니라

<남성주의 + 자본주의 + 군사주의 + 일본 중심주의>

가 결합된 구조였습니다.


6. 중요한 특징: ‘피해자로서의 일본’보다 ‘가해자로서의 일본’을 묻는다

전후 일본에서는 히로시마·나가사키, 도쿄대공습 등을 중심으로 일본인이 전쟁의 피해자였다는 기억이 강했습니다.

마쓰이는 이 기억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질문의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일본인은 아시아에서 무엇을 했는가?>

입니다.

그의 저서 제목 <日本を問うアジア — 일본을 묻는 아시아>가 이 태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松井やより

일본인이 아시아를 연구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아시아 사람들의 눈으로 일본을 바라본다>

는 발상의 전환입니다.

이것이 마쓰이 사상의 가장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7. 그러나 논쟁적인 인물이기도 했다

첨부 자료에서도 이것을 숨기지 않습니다.

특히 일본군 위안부 관련 보도와 말레이시아에서의 일본군 ‘화인 학살’ 보도를 둘러싸고 사실관계와 취재 방법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습니다. 자료는 위안부 관련 아사히신문 보도의 일부가 후일 취소된 문제와, 말레이시아 학살 보도에 대한 비판 및 이에 대한 마쓰이 측의 반론을 모두 소개합니다. 松井やより

여기에는 마쓰이라는 인물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긴장이 있습니다.

그는 순수한 의미의 <중립적인 관찰자형 기자>가 아니었습니다.

피해자의 증언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사회적 행동으로 연결하려 했던 <참여적 저널리스트>였습니다.

그 결과 장점과 위험이 동시에 생깁니다.

장점은 기존의 언론이 무시했던 여성·식민지 피해자의 목소리를 매우 일찍 공론화했다는 것입니다.

반면 위험은 운동의 목적과 역사적 사실검증 사이의 긴장이 생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마쓰이를 평가할 때에는 그의 주장 하나하나를 모두 역사적으로 확정된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과, 그의 문제의식을 전부 부정하는 것 양쪽 모두를 피할 필요가 있습니다.


8. 마쓰이 야요리의 사상을 다섯 단어로 정리하면

저는 그의 사상을 다음 다섯 축으로 정리하는 것이 가장 이해하기 쉽다고 봅니다.

  1. <페미니즘> — 여성에 대한 구조적 차별과 폭력의 비판
  2. <아시아주의> — 일본 중심이 아니라 아시아 여성의 관점에서 일본을 바라봄
  3. <반식민주의> — 일본 제국주의와 식민지배의 책임 추궁
  4. <반군사주의> — 군대와 전쟁이 성폭력을 구조화한다는 비판
  5. <반세계화적 여성주의> — 세계화와 자본 이동이 가난한 여성의 노동과 몸을 착취할 수 있다는 문제의식

그래서 마쓰이의 페미니즘은 단순한 <남녀평등론>이라기보다 <전쟁·식민주의·자본주의·민족·성별을 서로 연결해서 보는 페미니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9. 한국에서 읽을 때 특히 흥미로운 점

마쓰이는 한국 독자에게 상당히 특이한 일본 지식인입니다.

그는 일본인이면서 의도적으로 <일본을 비판하는 아시아 여성의 시선>을 자신의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박유하처럼 <식민지 관계 내부의 복잡성>을 강조하는 접근과는 상당히 다른 위치에 놓입니다. 마쓰이는 우선적으로 권력의 비대칭, 국가와 군대의 책임, 피해 여성의 증언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앞으로 비교해 보면 매우 흥미로운 네 사람이 생깁니다.

<마쓰이 야요리 — 우에노 지즈코 — 박유하 — 이은선>

입니다.

네 사람 모두 <여성·일본·식민주의·위안부·전쟁기억>이라는 문제와 접하지만, 출발점이 크게 다릅니다. 특히 마쓰이의 <가해국 여성도 가해 구조 안에 들어갈 수 있다>는 문제의식은 이은선의 여성신학적·관계론적 접근이나 박유하의 <제국 내부의 복합적 관계>론과 비교하면 차이가 아주 선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그리고 마쓰이가 죽기 직전까지 준비했던 <女たちの戦争と平和資料館 —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 자료관(WAM)>은 그의 사상을 물질적으로 남긴 일종의 유산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첨부 자료 역시 이 자료관이 그의 유지를 계승한 활동 가운데 하나라고 설명합니다. 松井やより

원하시면 다음으로 <마쓰이 야요리·우에노 지즈코·박유하의 일본군 위안부 문제 인식 비교>를 1,500단어 정도로 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세 사람을 비교하면 일본 여성주의 내부의 큰 차이가 상당히 잘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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