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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4-30

울 밑에 선 봉선화야 - 홍난파 평전 엔도 키미꼬

울 밑에 선 봉선화야 : 알라딘


울 밑에 선 봉선화야 - 홍난파 평전 
엔도 키미꼬
(지은이),송귀영 (옮긴이)단국대학교출판부2017-04-10







트윈링 노트.타이머.클립보드(공무원.자격증.토익 등 취업 교재 3만원 이상)

정가
10,000원
판매가
9,500원 (5%, 500원 할인)
마일리지
500원(5%) + 285원(멤버십 3%)
+ 5만원이상 구매시 2,000원


Sales Point : 36


책소개
2002년 4월에 일본에서 발행된 도서를 홍난파 탄생 120주년(2017년 4월 10일)을 기념해 단국대 일문과 교수 송귀영의 번역으로 출간하였다. 엔도는 1988년에 한국과 일본의 음악 교과서를 비교 연구하면서 홍난파를 알게 되었고, 당시 일본에서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홍난파 작곡의 '고향의 봄'이 한국의 거의 모든 교과서에 실려 있는 것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엔도는 식민지 청년 지식인 난파에 대한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해 그의 발자취를 따라 그의 조국 한국과, 그가 유학했던 일본 등지를 직접 취재하고 관련자와 면담을 통해 난파의 삶을 현실감 있게 구성하였다. 엔도는 난파를 일제강점기에 한국과 일본, 양국의 경계에서 번민과 고뇌하며 음악적 성과를 거둔 한국 근대음악의 선구자로 평가하고 있다.


목차


난파를 기리며 / 5
한국 독자들에게 / 8
책머리에 / 10

1. 홍난파, 그는 누구인가?
홍난파를 아시나요?… ……………………………………… 21
제2의 국가 「고향의 봄」……………………………………… 21
홍난파 프로필………………………………………………… 25
홍난파의 출생과 생가………………………………………… 26
다감했던 청년 시절…………………………………………… 29
일본 유학과 3·1독립운동…………………………………… 30
문필가로서… ………………………………………………… 33
가곡 「봉선화」의 탄생………………………………………… 34
작곡가로서… ………………………………………………… 39
바이올린 연주가, 그리고 지휘자로서……………………… 40
음악 이론가로서……………………………………………… 43
한국에서의 평가와 문제점…………………………………… 44
난파기념음악관… …………………………………………… 47

2. 홍난파의 생애
홍난파와 기독교 전도사……………………………………… 57
가톨릭 수용의 역사 … ……………………………………… 58
열강들의 침략과 프로테스탄티즘…………………………… 60
기독교 문화의 새로운 전개… ……………………………… 63
민족의식의 각성……………………………………………… 65
자라난 환경이 그 사람을 만든다…………………………… 69
서양음악 수용 경위…………………………………………… 73
초등학교 시절………………………………………………… 77
소년 난파와 주변 사람들… ………………………………… 78

3. 음악가 홍난파의 탄생
조선정악전습소와 김인식…………………………………… 85
연주가 홍난파로서의 출발…………………………………… 89
창가운동의 새 시대 … ……………………………………… 93
도쿄음악학교 입학과 3·1독립운동………………………… 98
엄동의 시기…………………………………………………… 101
연악회 창설과 음악 저널리즘의 서광……………………… 107

4. 일본 그리고 조국에서의 활동
도쿄고등음악학원… ………………………………………… 117
도쿄고등음악학원 와타나베 이사무 초대 학장의
인물상과 교사들의 면모…………………………………… 122
일본에서의 홍난파…………………………………………… 126
조선음악계의 융성…………………………………………… 132
조선동요백곡집… …………………………………………… 135
미국 유학……………………………………………………… 137
난파 트리오 결성……………………………………………… 141

5. 한일 십자가
십자가로 이어진 한일 관계… ……………………………… 147
재혼… ………………………………………………………… 148
<음악만필> 출판… …………………………………………… 153
체포와 투옥…………………………………………………… 156

후기 / 161
난파 집필 기사 일람 / 169
난파 홍영후 연보 / 170
번역 후기 / 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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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엔도 키미꼬 (遠藤喜美子) (지은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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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후쿠오카福岡 출생
후쿠오카 현립 후쿠오카여자전문학교(현 후쿠오카여자대학) 가정과 졸업
학교법인 쿠니타찌음악대학 성악과 졸업
도쿄예술대학대학원 음악교육연구과 수료
모리오카盛岡대학 문학부 교수
동 대학 부속유치원 원장 역임
세이가쿠인대학 인문학부 교수
동 대학 아동학과 주임교수
2003년 고령자복지를 생각하는 모임(주민평화운동) 대표
2004~2017 연 1회 “쿠니타찌 후레아이 콘서트” 주최
현재 성악가로 활발한 자원봉사 활동 중

최근작 : <울 밑에 선 봉선화야>

송귀영 (옮긴이)
저자파일
신간알림 신청

단국대학교 교수 문학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일본어과 및 동 대학원 졸업
일본 문부성 장학생으로 도일
일본 치바千葉대학과 츄오中央대학 박사과정
전 NHK TV 한국어 교육방송 게스트 강사
전 EBS TV 일본어 교육방송 강사

[전자책] 홍난파 수필선집 -東西洋 音樂의 比較 캔사스 역의 봉변

[전자책] 홍난파 수필선집 - 지식을만드는지식 한국수필선집 : 알라딘


[eBook] 홍난파 수필선집 - 지식을만드는지식 한국수필선집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한국수필선집
홍난파 (지은이),김나영 (엮은이)지식을만드는지식2017-08-10 



종이책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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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니다.



전자책종이책 17,100원
전자책정가
14,400원


종이책 페이지수 : 142쪽

책소개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한국수필선집. <봉선화>, <옛 동산에 올라>, <봄처녀> 등으로 유명한 홍난파는 음악뿐 아니라 시, 수필, 평론, 소설 등 다양한 문학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예술가 특유의 섬세한 감수성이 두드러지는 그의 글은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인류가 지향해야 할 보편적 가치 속으로 독자들을 인도하고 각성시킨다.


[전자책] 허영 : 홍난파

[전자책] 허영 : 알라딘


[eBook] 허영 - 희원북스의 행복한 책 읽기  | 희원북스 한국 근대문학 컬렉션 1059
홍난파 (지은이)희원북스2025-01-07





전자책 미리 읽기

전자책정가
2,000원



종이책 페이지수 : 약 162쪽

책소개
“옥지 씨! 이것은 나의 진정이오, 사랑의 응고입니다. 이것을 받아주십시오.”
“네, 참사랑인 줄 알고 받겠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금강석이란 것이지요?”
“네, 그렇습니다. 다이아몬드입니다.”
“아이고, 다이아몬드! 어쩌면 이렇게도 어여쁘고 묘해요? 저는 생전에
이런 것은 처음 가져 봅니다. 바로 전등 불빛처럼 번쩍번쩍 하네요!”



저자 및 역자소개
홍난파 (지은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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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노래 부르며>

최근작 : <나팔 불어요>,<월광곡>,<노래 노래 부르며> … 총 22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 희원북스의 한국 근대 문학 컬렉션은 우리 근대 소설사에 있어서
그 선구적 역할을 담당했던 홍난파의 문학세계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일반 독자들에게 널리 소개하고자 하는 데에 그 목표를 둡니다.

* 희원북스의 한국 근대문학 컬렉션은 발표 당시의 원전에 충실해야 한다는 원칙 아래
발표 당시의 신문?잡지의 원문과, 단행본 간행 당시 초판본을 대조하여
고어, 사어(死語)를 최대한 살렸고, 방언의 경우에도 손대지 않았습니다.

또 현행 한글 맞춤법에 따라 어려운 옛말은 쉬운 현대말로 풀어 썼으며
이해를 돕기 위해 한자 및 주석을 병기하였습니다.

* [전자책] 홍난파 소설집 1 : 바람과 빚 최후의 악수 허영

[전자책] 홍난파 소설집 1 : 알라딘


[eBook] 홍난파 소설집 1 
홍난파 (지은이)키메이커2020-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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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정가
3,000원
판매가
3,000원
쿠폰할인가
2,700원


종이책 페이지수 : 약 258쪽


책소개
홍난파는〈봉선화〉와 〈성불사의 밤〉, 〈옛동산에 올라〉, 〈고향의 봄〉, 〈고향 생각〉등 십 여곡의 가곡을 남겼고, 이 중 〈봉선화〉와 〈사공의 노래〉를 제외한 대부분의 가곡은 이은상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 곡이다. 후세의 많은 사람들에게도 친숙한 〈나뭇잎〉, 〈개구리〉를 비롯하여 111개의 동요를 작곡하였고, 〈애수〉, 〈로망스〉 등 8개의 기악곡을 발표하였으며 여러 곡의 영화 음악을 작곡하는 천재적 재능을 발휘하였다. 

홍난파는 음악뿐 아니라 수필, 평론, 소슬 등 다양한 문학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는데, 그의 저서에는 《세계의 음악》, 《조선 가요백곡집》과 단편 소설집 《처녀의 혼》, 《향일초》, 《폭풍우가 지난 후》 등이 있다. 

매일 신보에 연재된 소설 <허영>, <최후의 악수> 등의 작품을 통해 작가의 섬세한 감수성을 엿볼 수 있다.


* [전자책] 마지막 노래 : 홍난파 - 시카고광상곡(市俄古狂想曲)

[전자책] 마지막 노래 : 알라딘


[eBook] 마지막 노래  | 현대문학 짧은 이야기
홍난파 (지은이)문학일독2023-10-20





전자책 미리 읽기

전자책정가
4,500원
종이책 페이지수 : 약 41쪽

책소개
홍난파의 에세이다.
짧은 이야기들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내게 되었다.

개화기를 분수령으로 고전문학과 현대문학으로 나누어진다.

현대 문학은 개인에 대한 집중, 마음의 내적 작용에 대한 관심, 전통적인 문학적 형태와 구조에 대한 거부하며 작가들은 종종 정체성, 소외, 인간의 조건과 같은 복잡한 주제와 아이디어를 탐구하는 게 특징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는 없다'는 말이 있듯, 과거의 현대문학을 보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투영된다.



[전자책] 음악만필 : 홍난파 이탈리아 소녀~외

[전자책] 음악만필 : 알라딘


[eBook] 음악만필 - 우리나라 최초 산문집 
홍난파 (지은이)온이퍼브2020-05-17





전자책 미리 읽기

전자책정가
8,000원
종이책 페이지수 : 약 266쪽

책소개
우리나라 최초 산문집~!!
나는 과거 4반세기 동안 여행을 하였다.
그리고 이 여행은 연전에 일어나던 세계대전 이상의 큰 변동이 내 몸에 생기지 않는 한, 나의 일생을 두고 계속될 장기의 여행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말하는 여행이란 기차 타고 화륜선(火輪船)을 타고 다니는 그러한 여행은 아니다. 그렇다고 낙타를 타고 다니는 사막의 여행도 아니다. 

말하자면 끝도 밑도 없는 세계에의 여행이다. 나는 이 여행 중에서 듣고 보고 한 모든 것을 어떤 때는 적어두기도 했고, 어떤 때는 오려 두기도 했고, 어떤 때는 친우와 노변(爐邊)에 앉아서 이야기했고, 또 어떤 때는 신문이나 잡지에 단편적으로 기고(寄稿)도 했던 것이다. 그러한 것을 조각조각 주워 모아 한 책에 골라 베낀 것이 곧 이것이다.

<중략, 본문 중에서>


목차


프롤로그(PROLOGUE)
제1부 35 야화
1. 이탈리아 소녀~외
제2부 논초(論抄) 1속(束)
제3부 한시한필(閑時閑筆)
? 문호 시성(詩聖)의 음악관~외
제4부 노변(爐邊) 백화(百話)
제5부 악성(樂聖) 연사(戀史)
제6부 광상소곡
? 광상소곡
? ALOHA OE
? 난파(蘭坡) 연보



저자 및 역자소개
홍난파 (지은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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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노래 부르며>

최근작 : <나팔 불어요>,<월광곡>,<노래 노래 부르며> … 총 22종 (모두보기)

[전자책] 전쟁의 곡 : 홍난파

[전자책] 전쟁의 곡 : 알라딘


[eBook] 전쟁의 곡  | 현대문학 짧은 이야기
홍난파 (지은이)문학일독2023-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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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정가
5,000원

Sales Point : 10

[eBook] 현대문학 짧은 이야기
선택한 도서 총 1권 / 구매가 4,500원


종이책 페이지수 : 약 52쪽 
책소개

홍난파의 에세이다.
짧은 이야기들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내게 되었다.

개화기를 분수령으로 고전문학과 현대문학으로 나누어진다.

현대 문학은 개인에 대한 집중, 마음의 내적 작용에 대한 관심, 전통적인 문학적 형태와 구조에 대한 거부하며 작가들은 종종 정체성, 소외, 인간의 조건과 같은 복잡한 주제와 아이디어를 탐구하는 게 특징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는 없다'는 말이 있듯, 과거의 현대문학을 보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투영된다.



목차


전쟁의 곡(曲)
리스트의 국제적 연애
황금
악성(樂聖) 연사(戀史)



저자 및 역자소개
홍난파 (지은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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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노래 부르며>

최근작 : <나팔 불어요>,<월광곡>,<노래 노래 부르며> … 총 22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미국에서 유명하던 피아니스트가 자기 생전에 가장 많은 환영을 받은 때는 자작(自作)한 〈전쟁의 곡〉을 연주하던 때입니다. 그는 그 후 어느 지방에 연주 여행을 하든지, 반드시 이 악곡을 연주해 달라는 간망이 끊기지 않았을이만큼 이 곡조는 유명했던 것입니다. 그 자신은 무슨 이유인지 이것을 연주하고 싶어하지 않았으나, 그러나 청중측에서는 다른 곡조는 다 집어치워도 좋으니, 이 〈전쟁의 곡〉만은 꼭 연주해 달라고 열망하였던 것입니다. 이 한 곡조만 연주 곡목 중에 넣는다면, 그는 도처에서 무조건하고 초만원의 호성적을 얻게 된 것도 사실입니다.

도회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어떤 광산동(鑛山洞), 이 곳은 노동촌인 위에 교통이 몹시 불편하여, 음악가의 내방이라고는 있을 까닭이 없었고, 또 설혹 가끔 연주회가 있댔자 그것은 5류, 6류 이하의 연주가들인 까닭에 그 동네 사람들은 실로 음악에 몹시 굶주렸던 것입니다. 이 때에 의외의 보도는 온 동네 안을 물끓듯이 만들어 놓았습니다.
--- “ 전쟁의 곡(曲)” 중에서

돈 돈 하는 사람이나 돈부터 내세우는 사람을 보면 우스운듯 하지마는 이것이 또한 사회의 진상인즉, 돈 빼놓고 어찌하랴. 돈이란 대체 무엇인데 세 살된 어린아이라도 돈 돈 하는가? 생명이 중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라도 돈 모르는 자는 없으니 과연 돈이란 생명보다 더 귀할까. 물론 귀하지 않음은 아니다.

이 세상은 돈이 있어야 먹고 돈이 있어야 사는 소위 금전시대이다. 아니다. 금전시대라 함보다는 금전 전횡시대(專橫時代)라 함이 더욱 적당한 말일 것이다. 그런즉 돈만 있고 보면 못할 것이 없으니 어찌 귀하지 않으랴.
--- “황금” 중에서 접기


2025-04-29

Park Yuha - 홍난파가 시카고의 음악학교에 다녔다는 걸 시카고에 와서야 알았다.

Park Yuha - 홍난파가 시카고의 음악학교에 다녔다는 걸 시카고에 와서야 알았다. 시카고 관련 이런저런 책을... | Facebook




Park Yu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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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난파가 시카고의 음악학교에 다녔다는 걸 시카고에 와서야 알았다. 시카고 관련 이런저런 책을 읽다가 알게 된 사실.
체류기를 잠깐 조선일보에 연재한 짧은 글이 전자책으로 나와 있기에 읽었는데, 여러가지로 흥미로웠다. 학비가 부족했다는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다닌 모양.
홍난파는 미국을 두고 연구적 태도가 부족하다면서도 ‘음악에 중독된‘ 곳이자 ‘ ‘신흥국중 주목할 만한‘ 곳이라고 평가한다.
그런 비평적 시각은 그 이전에 다닌 일본음악학교교육과 그 이후 공부의 산물일텐데, 아무튼 일본과 미국이라는 양제국의 영향을 받은 많지 않은 근대 엘리트 조선인이었던 셈.
그의 짧은 글은 중압감보다는 거대 ‘신흥국‘ 을 호흡하고 있는 해방감으로 가득하다.
그런 홍난파, 오늘까지 모두의 가슴에 살아있는 ‘봉선화‘ 나 ’고향의 봄‘의 홍난파를 그저 ‘친일파‘ 로 낙인찍어 사전에까지 올려둔 단순하기 그지없는 폭거를 허용했던 게 90년대 이후 지난 30여년이었다.
하지만, 한사람의 복잡한 생애를 납작하게 만들어 그저 숭상이나 비난의 대상으로 만드는 건 역사를 납작하게 만들어 우리 자체를 왜소하게 만드는 행위다. 지배자가 누구이든 개인의 영혼은 살아 있는 법.
경선토론에서조차 ‘국적’논의가 이어지던데, 홍난파의 국적은 어디였을까.
성급해서 납작한 결론을 내기보다 함께 천천히 생각하는 과정이 훨씬 지적이다. 하여 그런 교육과 공유가 가능한 다음 30년을 다시 꿈꾸지 않을 수 없었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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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gsoo Lim
市俄古 표기에 눈이 멈추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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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na Roh
맞아요 거기서 유학했어요. 그리 긴 기간은 아니었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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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Yuha
Anna Roh 역시 알고 계신.👍😊
찾아보니 2년이라는 얘기도, 1년반이라는 얘기도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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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철
가슴아픈것은 일제에 투옥당했을때 너무 혹독한 옥살이를 당하셔. 돌아가실때까지
고문 후유증을 앓으셨다는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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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Yuha
신인철 늑막염이었다죠. 흥사단에 가입한 적이 있었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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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 Sungsoo
돌아가신 저희 어머니가 생전에 국민학교때 베프가 그립다고 하셔서 얘길 들어보니 홍난파 선생님 따님이셨습니다. 인터넷을 뒤져 따님이 미국에 사신다는 것을 알아내 연락을 취하고 어머님과 통화가 70년만에 되었었습니다. 70년이지만 한 일주일만에 만난듯 두 분 대화가 한참이 이어지시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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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Yuha
Kim Sungsoo 오 그러시군요.
유족이 친일인명사전 만든 민족문제연구소 상대로 소송제기했다가 포기했다는 기사가 보이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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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ul Huh
거기서 공직에 있었으면서도 홍난파에 대해선 모르고 지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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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Yuha
허철 학교가 경력에 나오긴 하더군요. 그런데 큰 관심은 없었을지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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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Yuha
지금은 커뮤니티 컬리지가 된 곳인 듯 했습니다. 여기가 맞다면요.
Sherwood Community Music School · Chicago, Illinois
GOOGLE.COM
Sherwood Community Music School · Chicago, Illinois

Sherwood Community Music School · Chicago, Illino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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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병찬
한국 재즈 100 년사 라는 책에서도 홍남 파일 미국 유학 뉴올리언스 방문 상황을 기록 하고 있습니다 조선
최초의 재즈 밴드의 악장을 마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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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Yuha
도병찬 그렇군요. 이 책에서도 재즈에 대해서 언급했더군요.
김승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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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투사가 친일파 친구의 아들인 일본육사 출신 제국육군 대위에게 자기 딸을 시집보내고, 친일파 제국육군 대위는 육군대신의 승인도 없이 결혼을 감행하고,
광복군 출신 사단장은 50년 12월 중공군 2차 공세때 민간인 복으로 갈아입고 서울로 도망쳐서 대통령이 진노해서 포살형을 명하기도 하고,
그 광복군 출신 사단장이 육본 근무하면서 일본육군 헌병 오장 출신 김창룡을 중용하고, 남로당원으로 적발된 박정희를 살려주는 데 앞장 서기도 하구요.
누군가는 독립군 군자금을 대주고는 일경의 탄압을 피하려 강도가 들었다고 신고하고, 무기헌납운동에 돈을 내기도 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구요.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의 잣대로 그 당시를 판단하기에는 너무나 무리가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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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Park Yuha
김승규 그랬군요. 특히 군인의 경우 더 복잡한 수많은 경우가 있겠지요. 박정희라는 인물이 그 대표적 인물일 거구요.
2
황경
사람의 복잡한 생을 납작하게 만들다..
인상적인 표현입니다
Park Yuha
황경 말씀 듣고 다시 보니 너무 여러번 썼네요.^^
복잡한 대상을 일원적으로만 보면서 모순되는 나머지는 지우거나 잊으려 하는 경향아 거의 강박수준인 듯 해서 써 봤습니다.
황경
박유하 전 여러번 쓰신 것도 좋았습니다^^
“연미복 입혀 화장해 달라” 그는 죽는 순간까지 예술가였을 뿐이다 - 주간조선
WEEKLY.CHOSUN.COM
“연미복 입혀 화장해 달라” 그는 죽는 순간까지 예술가였을 뿐이다 - 주간조선

“연미복 입혀 화장해 달라” 그는 죽는 순간까지 예술가였을 뿐이다 - 주간조선

Dojae Ko
그러게요
생각이 영세하기 그지 없어요
Park Yuha
고도재 ㅎㅎ 영세. 멋진 표현입니다.
Jong S. Kim
홍난파의 딸이 같은 교회를 다녔었는데 그 권사님이 지금은 돌아가셨겠네요... 우리 어머니 또래 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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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Yuha
김종수 그럴수도 있겠네요. 저 글이 1932년 글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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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난파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홍난파
기본 정보
본명홍영후
출생1898년 4월 10일
조선 조선 경기도 남양군 둔지곶면 활초동
사망1941년 8월 30일(43세)
일제강점기 일제 강점기 경기도 경성부 휘경정 경성요양원
성별남성
직업작곡가
지휘자
피아니스트
바이올리니스트
교육인
음악평론가
장르서양 고전음악
배우자김상운(사별), 이대형(재혼)
가족홍준(아버지)
전주 이씨 부인(어머니)
밀양 박씨 부인(계모)
홍석후(형)
홍옥임(조카)
홍성유(조카)
홍정임(장녀)
홍종임(차녀)
홍지유(양자)
종교개신교(장로교)

홍난파(洪蘭坡, 1898년 4월 10일 (음력 3월 19일) ~ 1941년 8월 30일)는 한국의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다. 본관은 남양 홍씨 토홍계이다. 본명은 홍영후(洪永厚)이지만 홍난파로 더 알려져 있다. 아호는 난파(蘭坡)이다. 한동안 음악평론가로 활동하면서 ‘한국의 슈베르트’라고 불리기도 하였다.[1] 작품 중 〈봉선화〉, 〈성불사의 밤〉, 〈옛동산에 올라〉, 〈고향 생각〉등 10여곡의 가곡과 〈고향의 봄〉, 〈나뭇잎〉, 〈개구리〉, 〈무지개〉 등 111개의 동요를 작곡하여 천재 작곡가로 알려졌다.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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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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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과 생애 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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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파 홍영후는 경기도 남양군 둔지곶면 활초동(현 화성시 남양읍 활초리)에서 남양 홍씨 토홍계 대호군공파 24세손으로 8남매 중 셋째이자 차남으로 태어났다.[2] 아버지 홍준은 국악에 조예가 깊어서 집안 식구들이 거문고나 퉁소 등 전통 악기를 연주했는데 홍영후는 그 중 앙금을 연주했다고 한다.[3] 아버지 홍준은 국악에 조예가 많았던 관계로 아들에게 금파(錦坡), 난파(蘭坡) 등의 별호를 지어 주었다. 형 금파 홍석후는 구한 말의 양의사이기도 했다. 홍영후의 막내동생 민후는 해방 후 30여년간 경남 합천군 삼가면에서 '백중약국'을 경영하며 인술을 베풀어 약사로서 평생 선업을 쌓아 지역민들의 큰 존경을 받았다. 약사 홍민후는 형편이 어려운 환자들은 약값을 받지 않았고, 공짜로 약을 지어주며 '웬만하면 약 먹지 마셔요'로 처방하여 유명하였다. 또한, 홍난파는 1933년 형 금파와 함께 난파트리오를 결성해 활동했다. 트리오중 일찍 요절한 조카 홍성유(1908 ~ 1936)는 형 홍석후의 셋째 아들이기도 했다.

서양 음악에 입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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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온 가족이 고향을 떠나 서울로 이사한 후 그는 교회를 다니게 되면서 서양 음악을 접하였고, 그 영향으로 그의 사촌 형 및 조카들이 모두 바이올린 연주자가 되었다. 그 또한 현재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에 속한 장로교회인 새문안교회에 다니면서 1911년에 세례를 받았고 집사로서 성가대 활동을 하는 등 교회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였다. 새문안교회를 비롯하여 많은 교회 음악회 때에도 바이올린 연주를 통한 전도 활동을 하기도 했다.[4]

1910년 중앙 기독교 청년회 중학부에 입학하였다. 중학과 재학 중 그는 장난감 바이올린을 구입하여 숫자보를 사용하여 '도레미법'을 터득하였고,[2] 중학과 재학 중에 고학과 아르바이트로 7원 50전이라는 돈을 모아 바이올린을 구입하여 음악연습을 시작했다. 1912년에 조선 정악 전습소 서양악부 성악과에 입학하여 성악을 전공했고[5], 당시 조선인 최초의 서양 음악 교사인 김인식의 지도를 받으며 공부하였다. 1913년 조선 정악전습소 성악과를 졸업하고 그 해 기악과에 입학, 이듬해에 중앙 기독교 청년회 중학과 졸업 및 기악과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조선정악전습소의 보조교사로 잠시 있었다.[5]

청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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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 음악 활동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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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파동 월암공원에 있는 홍난파가 살던 집

1915년 조선 정악전습소 서양악부 교사로 부임하여 <악전대요>, <통속창가집>을 출간하였고, <간이무답행진곡집>을 편찬하는 등 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 해에 김상운과 18세의 나이로 결혼한다. 홍난파의 형은 부친의 뜻에 따라 의학을 전공하게 되었고, 홍난파 또한 부친의 뜻에 따라 세브란스 의전에 입학(1916년)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세브란스 의전에서 열린 성탄 축하 음악회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였는데 이는 그의 첫 공연 무대로서 당시 큰 호응을 얻었다. 그의 음악에 대한 애정 때문에 입학 1년 만에 중퇴하고 1917년 3년간 있던 조선정악전습소 서양악부 교사직을 사임하였다. 이듬해 1월 5일 장녀 홍숙임을 얻었으며 1918년 일본에 유학 도쿄 우에노(上野)음악학교 예과(預科)에 입학하여 이듬해 3월 수료하였다.

이듬해인 1919년 도쿄에서 예술 잡지인 <삼광>을 창간하였으나 삼광은 경영난으로 4호를 끝으로 폐간되었다.

그리고 그 해 홍난파는 본과 진학이 무산되자 귀국하여 경성악우회를 조직하는 등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2] 1919년 3월 그는 3·1 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학업을 중단하고 잠시 귀국하였다. 3·1 운동 직후 그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복학을 신청했으나 받아주지 않자 좌절하고 만다. 다시 귀국 후 그는 첫 작품의 작곡에 몰입한다.

1920년에 <애수>를 작곡했는데 이 작품은 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봉선화>의 원곡이다. 그 해 공식적으로는 처음 독주회를 열었는데, 이는 일제 강점기 시절 조선인 최초이다. 1921년 첫 창작 소설집인 <처녀혼>을 발간하였고, 이듬해에는 연악회를 설립, 음악잡지 《음악세계》를 창간하였다. 1925년에는 잡지 <음악계>를 창간하고 바이올린 독주곡 <애수의 조선>, <로만스>, <동양풍의 무곡>을 작곡하였으며, 연악회 주최로 한국 최초의 바이올린 독주회를 열었다.[6] 한편으로 생업에도 종사해야 했던 그는 1920년 매일신문사에 입사하여 기자생활을 하기도 했다.

1926년 5월 13일 부인 김상운과 사별하였으며 다시 일본으로 유학가서 일본 도쿄 고등음악학원 야간반에 편입학하였다. 도쿄 고등음악학원에 재학하면서 그는 도쿄 교향악단(지금의 NHK 교향악단)의 제1바이올린 연주자로 입단했다. 1929년 고등음악학원을 수료한 뒤 도쿄 교향악단을 사직하고 귀국했다.

봉선화의 작곡과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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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홍영후는 <세계명작가곡선집>을 편찬하였는데 그의 작품 <봉선화>가 여기에 수록되었다. 이듬해 라디오 방송을 통해 봉선화 곡이 소개되었다. 이 노래를 최초로 부르고 널리 퍼지게 한 당시 소프라노 김천애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봉선화라는 소재를 선택한 것이 작사자인 김형준(피아니스트 김원복의 선친)의 영향으로, 김형준이 살던 집 울 안에 봉선화 꽃이 가득했고, 또 김형준씨는 생전의 홍난파와 이웃해 살면서 교분이 두터웠다고 한다. 덧붙여 김형준은 봉선화를 보면 곧잘 '우리 신세가 저 봉선화꽃 같다'는 얘기도 했다고 한다.[7]

그러나 이 노래가 정작 널리 퍼져 모든 사람의 가슴을 울리게 된 것은 1940년대였다. 1942년 봄 히비야 공회당에서 열린 신인 음악회에서 김천애가 <봉선화>를 부른 것이 시초였고, 귀국 후 서울 부민관, 하세가와 공회당, 평양 키네마 등 여러 곳에서 독창회를 가지면서 <봉선화>를 불러 청중들의 눈물을 글썽이게 했다. <봉선화>는 빅터와 콜롬비아 두 레코드 회사에 취입되면서 더욱 크게 히트하였다. 이는 주권을 일본에 침탈당한 국민의 아픔을 달래는 노래였기에 엄청난 인기를 모으게 되었으나, 일본 경찰 당국은 이를 문제 삼아 이 노래를 못 부르도록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천애는 무대에 설 때마다 이 노래를 불러 여러 차례나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봉선화>의 1절이 아름답게 꽃피우던 성하에의 애절함이라면, 2절은 가을 바람에 떨어지는 낙화에의 조사를 뜻하는데, 이어지는 3절이 애절한 민족의 염원을 담고 있다. 곧, 애수 어린 가곡에서 민족의 노래로 승화시키는 모티브 역할을 한다.[7]

음악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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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유학길에 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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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그는 조선 음악가 협회 창립 총회에서 상무 이사로 선임되어 활동을 하였다.[4] 그는 더 많은 것을 배우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 해 7월에 성가대를 사임하고 미국의 셔우드 음악학교(Sherwood Conservatory of Music)를 2년간 다녔다. 사실 이 때의 유학길은 미국으로 간 애인을 따라 결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김을한이 지은 《그리운 사람들》(삼중당, 1991)에 따르면 홍영후가 서울에서 음악 활동을 하던 무렵 K라는 애인이 있었는데, 그녀의 수양어머니가 홍난파의 애주를 문제 삼아 결혼을 매우 반대하였고, 그예 미국으로 모녀가 함께 돌아가자 그 뒤를 좇아 급하게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고 한다.[6]

이 기간 동안 홍영후는 도산 안창호가 이끄는 흥사단에 가입하게 되는데, 이 당시 흥사단은 미국에서 활동하던 독립 운동 단체였고, 미국에 있는 조선인의 가입을 이끌며 독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홍영후의 미국 생활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수업을 받으며 내야 하는 납부금을 제 때에 내지 못해 분납을 하며 생활해야 했고, 뜻하지 않은 교통 사고를 당하며 늑골을 다치고 말았다. 이 교통 사고의 후유증으로 늑막염에 시달려야 했고 귀국 후에도 잦은 병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해야 할 정도로 그의 건강이 나빠지게 되었다. 이때 흥사단은 그가 셔우드 음악학교를 수료할 때 그를 축하해 주었고, 홍영후 또한 교통 사고를 당한 이후 "격려를 보낸 것에 대해 감사 드리며 변호사에게 사건을 위임하여 손해금을 받아 볼까 교섭중이다"는 편지로 화답하였다. 마침내 홍영후는 1932년 12월 8일 흥사단에 단우 번호 266번으로 가입하게 된다.[8]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길에 오른 그는 로스앤젤레스의 한인 교회에서 바이올린 연주회를 열었고, 지방 흥사단 대회에도 참가한 후 귀국하였다. 1931년 그는 일본 빅터레코드사 고문으로 위촉되었다.

귀국 후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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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 돌아와 그는 경성보육학교 주임교수를 맡았고, 1933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학 강사로도 출강하였다. 1933년 <조선동요백곡집> 하편, <조선가요작곡집>을 발매하였다. 그리고 그 해 최초의 실내 악단이자 바이올린 3중주 악단인 난파 트리오를 결성하였다. 난파 트리오는 홍영후와 그의 조카인 홍성유, 이영세로 구성되어 진고개(현재의 충무로)에 있는 메이지제과홀에서 첫 발표회를 가졌다.[3] 그러나 조카 홍성유가 1936년 8월 병으로 갑자기 사망하면서 난파트리오는 해체되었다.

그는 1934년에는 일본 빅터레코드사 경성지점 음악 주임으로 근무하기도 하고, 현제명과 함께 작곡 발표회를 하는 등 다시 국내에서의 활동을 왕성하게 하였다. 그 해 12월 27일 이대형과 재혼하였고, 많은 영화 음악이나 신민요, 가요 등에 관여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나소운(羅素雲)이라 적었다. 그 밖에 이화여전 강사를 지냈고, 경성중앙방송국 양악부 책임자로서 활동하기도 했다. 한국 최초의 관현악단인 경성방송 관현악단을 조직, 지휘자로 활동하였다. 1938년에는 <음악만필>을 발간하였다.

1936년 그는 박영근, 이승연과 함께 <코리아음악연구소>를 창설하여 음악을 가르쳤고, <특선가요곡집>을 출간하였다. 이 해 8월 18일 조카 홍성유가 29세로 요절하여 난파 트리오는 해체되었지만, 그는 다시 이흥렬, 김태연과 함께 성서 트리오를 결성하였다.[3]

친일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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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난파는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의 관련자로 지목되어 경성부 종로경찰서 경찰에 의해 검거되었다. 72일 동안에 걸친 옥고를 치른 후에 석방되었으나, 애국가요대회에서 <정의의 개가>, <공군의 가(歌)>를 작곡하였다. 그 후 그는 "사상 전향에 관한 논문"을 제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1939년 당시 변절한 문학가 이광수의 시에 곡을 넣어 <희망의 아침>을 발표하였다. 그런가 하면 매일신보에 <지나사변과 음악> 등을 게재하기도 했다. 또한 1940년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의 문화위원에 임명되어 활동하기도 하였다.[3]

일제 말기 전시 체제(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 이후로 일제 총독부는 모든 분야에 발악했었고, 당시 옥중에 갇혔던 정치범들이나 독립운동지사들은 전향서를 써야만 석방을 맞을 수 있었다. 그리고 수양 동우회 사건 이후 수많은 독립운동지사들이 변절하거나 전향하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어났던 시기였다. 그의 딸인 홍정임 여사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아래와 같이 증언하고 있다.

제가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나던 날, 저의 아버지는 종로경찰서에 갇히셔서 옥고를 치르고 계셨습니다. 이름을 지어줄 아빠가 안 계신 저는 姙(임)자 돌림에다 정축년(丁丑年)에 태어났다고 丁(정) 자를 붙여서 丁姙(정임)이라는 이름을 받게 되었습니다. 감옥을 드나드시면서 아버지께 흰 옷을 넣어드리는 어머니는 번번이 피투성이 되어 나오는 아버지의 옷을 받아들면서 이렇게 애청을 하셨다고 합니다. "이 분은 몸이 약하신데 제가 대신 감옥에 들어가면 안 되느냐고." 일본 경찰은 조롱된 어조로 "당신도 콩밥이 먹고 싶어?" 하며 반문을 했다고 합니다.
감옥살이에 시달리신 저의 아버지는 '늑막염'이라는 무서운 병을 재발 시키면서 72일 만에 석방이 되셨습니다. 석방을 시킨다는 조건부로 "일본에 협조한다는 글과 곡을 지으라는" 명령을 받았고 그 압력의 쇠사슬에 묶이신 나의 아버지는 최후의 3년을 (석방 이후) 병마에 시달리면서 강제에 못 이겨 한 두 차례 일본에 협조하는 글을 쓰셔야만 했습니다. 기억을 더듬으시는 어머니의 가슴 아픈 사연들 이었습니다...(이하 생략)...[8]

1938년 음악잡지 「음악만필」을 발행하였다. 이는 한국 최초의 음악산문집이자 음악 평론집이기도 했다.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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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후는 미국에서 당한 교통 사고의 후유증으로 늑막염을 앓고 있다가 회복되긴 했지만 수양 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된 후 일본 경찰의 고문으로 재발하면서 크게 악화되었다. 그 상황에서 1941년에는 적십자병원, 경성요양원(지금의 삼육서울병원)을 오가며 치료를 받았지만 그 해 8월 30일에 결핵균이 머리로 들어가게 되면서 뇌결핵으로 이어져 끝내 경성요양원에서 별세하였다.[9]

그는 유언으로 "내가 죽거든 꼭 연미복을 입혀서 화장(火葬)해 달라."는 말을 남겼다.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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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세 때 작곡한 〈봉선화〉와 〈성불사의 밤〉, 〈옛동산에 올라〉, 〈고향의 봄〉, 〈고향 생각〉등 십 여곡의 가곡을 남겼고, 이 중 〈봉선화〉와 〈사공의 노래〉를 제외한 대부분의 가곡은 이은상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 곡이다. 후세의 많은 사람들에게도 친숙한 〈나뭇잎〉, 〈개구리〉를 비롯하여 111개의 동요를 작곡하였고, 〈애수〉, 〈로망스〉 등 8개의 기악곡을 발표하였으며 여러 곡의 영화 음악을 작곡하는 천재적 재능을 발휘하였다. 저서에는 《세계의 음악》, 《조선 가요백곡집》과 단편 소설집 《처녀의 혼》, 《향일초》, 《폭풍우가 지난 후》 등이 있다.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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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난파기념사업회가 설립되어 '조선동요 100곡집'을 재간행하였다.[5]

홍난파 노래비

1965년 10월 25일 대한민국 정부는 홍난파에게 문화 훈장을 추서하였다. 1968년 수원 팔달산에 노래비가 세워졌고, 1969년 8월 30일 홍난파의 추모일을 맞아 예총 경기도지회가 ‘난파음악제’를 연 이래 해마다 계속되고 있다.[6] 또한 그가 살던 집(종로구 홍파동 소재)이 2004년 9월 4일 등록문화재 90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홍난파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집 앞에는 그의 흉상이 서 있다. 수양동우회 사건 이후에 있었던 친일 행적으로 인해 홍난파는 친일파 708인 명단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에 포함되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될 예정이었지만 2009년 11월 26일 홍난파의 유족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를 상대로 낸 친일행위조사결과 통지처분 효력정지 신청이 서울행정법원에서 받아들여지면서 유보 결정되었다. 당시 재판부는 "홍난파의 행위를 일본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것으로 볼 수 있는지 더 따져봐야 하기 때문에 본안 소송 결과가 나올 때까지 해당 처분의 효력을 중지한다"고 말했다.[10] 2010년 11월 4일 홍난파의 유족이 행정안전부 장관을 상대로 낸 소송의 선고(2010년 11월 5일)를 하루 앞둔 상황에서 돌연 소송 취하 의사를 밝혔고 행정안전부가 이에 동의하면서 재판이 종결되었다. 이에 따라 홍난파의 유족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를 상대로 낸 친일행위조사결과 통지처분 효력정지 신청을 받아들인 법원의 결정이 무효가 되었고 홍난파는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실리게 되었다.[11] 2017년 12월에는 대한민국 행정안전부 과거사 관련 업무 지원단에 의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보유편》이 출간되었다. 여기에는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이유서, 김성수·방응모에 관한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에 관한 판결문이 수록되어 있다.

기념관에 대한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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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난파가 1897년에 남양 활초리에서 태어나 기념사업 권리문제로 논란을 빚었던 화성시는 이번에는 단국대학교와 유품을 놓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2006년부터 181억 5천만원을 들여 활초동 4만5천270m2 부지에 지하 1층, 지상2층 규모의 기념관, 야외음악당, 공원 등을 갖춘 홍난파 꽃동산 조성사업을 추진해왔는데 연고권을 들어 단국대학교 측에 유품을 넘겨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6] 하지만 단국대 측은 "홍난파의 유품을 화성시에 넘겨줄 계획이 전혀 없다"고 했다. 단국대 관계자는 "2009년에 화성시가 한 차례 공문을 보내온 바 있지만 거절했다"며 "유품을 기증받아 지금까지 전시·보존을 해 왔고, 죽전캠퍼스에 박물관 증축이 끝나면 다시 정상적으로 전시할 계획"이라고 밝혔는데 논란이 가중되자 단국대학교에서는 "기증받을 때 계셨던 학교 관계자 대부분이 세상을 떠났거나 학교에 남아있지 않기에 기증자 몇명이 언제 어떤 이유로 유품을 학교에 전달한 것인지 확인하기 어렵다"라고 밝히면서 유품들은 모두 학교 재산으로 등록되어 있다고 못을 박고 어이없는 요구에 적극 대응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12] 또한 1984년 단국대학교 한남동 캠퍼스내 난파기념 음악관에서 유품을 전시할 때 홍난파 선생의 따님도 참석했었다고 전하면서 유품은 2007년 8월 30일 서울시 용산구 한남동에서 용인시로 이전되어 옮겨진 음악관이 확장되는대로 전시하기로 하였는데 단국대학교는 2013년 3월 13일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죽전동에 있는 신축한 캠퍼스에 전용 난파음악관을 마련하고 별실의 홍난파의 유품을 전시한 '난파 홍영후 전시실'을 개관했다. 유족으로 난파 선생의 조카인 홍건유 전 포스코 부회장, 외손자 홍익표 전 연성대학 부총장 등이 참석하였다.[12][13][14] 난파음악관의 전시실에는 2011년 문화재청으로부터 등록문화재 제 479호로 지정된 동판 동요악보원판 51개를 비롯, 홍난파가 생전에 사용하던 바이올린 등 그의 음악적 삶이 담긴 수필 등 약 420여 점이 전시되었다.[14]

사치품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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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난파는 자신의 형 이비인후과 의사 홍석후 외에도 조선의 계몽사상가, 사회사업가 윤치호가 다달이 송금하는 100원으로 학비와 용돈을 조달하였다.

그는 윤치호에게 250원의 바이올린을 사도록 돈을 더 부쳐달라고 요청했다가 거절당했다.[15] 홍난파는 다시 편지를 써서 구두쇠의 죄악에 대해 내게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그는 조선의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자기 재능을 계발할 만한 아무런 수단이 없는 조선의 천재들과 영웅들의 운명을 비관했다. 그는 볼셰비키들과 공산주의자들이 정당한 약탈자들이라고 강변하고 부자들이 혼자서 자기 재산을 누릴 수 없는 때가 곧 올 것이라 했다.[15]

홍영후(洪永厚 · 난파)의 편지를 읽고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작년 1~2월쯤 도쿄에 가서 음악공부를 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그가 간청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에게 100원을 주었다. 9월 언제쯤인가 또 다시 수표로 100원을 주었다. 나중에 50원을 더 주어서, 유학비용으로 모두 250원을 대주었다. 한 달 전 그가 다시 편지를 보내와 바이올린을 사게 250원을 보내달라고 청했다. 공부하는 중에 250원짜리 바이올린을 사는 건 내 아들이나 동생이라도 절대 승낙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부탁을 들어줄 수 없다고 답장을 썼다.
남에게서 돈을 받아 공부하면서 생활비 전액을 대달라고 하는 것이나, 고학생이 250원짜리 바이올린을 갖고 싶어한다는 건 도저히 말도 안 되는 발상이었다. 그런데 오늘 배달된 편지에서, 그는 구두쇠의 죄악에 대해 내게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그는 조선의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자기 재능을 계발할 만한 아무런 수단이 없는 조선의 천재들과 영웅들의 운명을 비관했다. 그는 볼셰비키들과 공산주의자들이 정당한 약탈자들이라고 강변하고 부자들이 혼자서 자기 재산을 누릴 수 없는 때가 곧 올 거라고 협박까지 했다. 조선 청년들의 수준과 은혜에 보답하는 그들의 마음이 어떤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녀석이었다.[16]

윤치호는 이를 협박으로 받아들이고, 조선 청년들의 사치, 허영심을 개탄하였다.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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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동요 100곡집》
  • 음악산문집, 《음악만필》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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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화 하나, 계몽운동가 겸 교육자 윤치호는 그를 후원하던 후원자들 중의 한명이었다. 홍영후는 그의 형 홍석후를 통해 윤치호를 알게되었다. 당시 상황에 대해서 1921년 2월 6일(일요일)에 쓴 윤치호의 일기내용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홍영후의 편지를 읽고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작년 1~2월쯤 도쿄에 가서 음악을 공부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그가 간청한 적이 있다. 그래서 그에게 100원을 주었다. 9월 언제쯤인가 또다시 수표로 100원을 주었다. 나중에 50원을 더 주어서, 유학비용으로 모두 250원을 대주었다.
한 달 전 그가 다시 편지를 보내와 바이올린을 사게 250원을 보내달라고 청했다. 공부하는 중에 250원짜리 바이올린을 사는 건 내 아들이나 동생이라도 절대로 승낙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부탁을 들어줄 수 없다고 답장을 썼다.
남에게 돈을 받아 공부하면서 생활비 전액을 대달라고 하는 것이나, 고학생이 250원짜리 바이올린을 갖고 싶어 한다는 건 도저히 말도 안 되는 발상이었다. 그런데 오늘 배달된 편지에서, 그는 구두쇠의 죄악에 대해 내게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그는 조선의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자기 재능을 계발할 만한 아무런 수단이 없는 조선의 천재와 영웅들의 운명을 비관했다.(이하 생략)[16]

홍난파는 윤치호에게 계속 후원을 받았는데, 하루는 윤치호에게 바이올린을 살 비용을 달라고 하였으나 거절하였다. 윤치호는 '남에게서 돈을 받아 공부하면서 생활비 전액을 대달라고 하는 것이나, 고학생이 250원짜리 바이올린을 갖고 싶어한다는 건 도저히 말도 안 되는 발상'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자 홍영후는 윤치호에게 구두쇠의 죄악에 대한 설교를 하며 볼셰비키들과 공산주의자들이 정당한 약탈자들이라고 강변하고 부자들이 혼자서 자기 재산을 누릴 수 없는 때가 곧 올 거라고 주장했다. 분개한 윤치호는 홍영후를 가리켜 '조선 청년들의 수준과 은혜에 보답하는 그들의 마음이 어떤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녀석'이라고 혹평하였다.[16]

그러나 홍영후는 이때 느꼈던 구두쇠의 죄악과 부자에게 제한적으로 받았던 감정을 잊지못해 훗날 유언까지 남겨 유족은 생전의 약속대로 연주하던 바이올린과 대표작들의 악보 등 총 116종 900여점의 유품을 단국대학교에 기증하였다. 홍난파의 유품 대부분은 단국대학교가 소장하고 있다.[12]

일화 둘, 홍난파가 경성중앙라디오방송국 양악부(洋樂部)의 총책임자로서 경성교향악단의 지휘자로 있을 때, 그는 <조선동요100곡집>이라는 악곡집을 만들면서 음악운동에 최선을 다하였다. 그러나 1937년 흥사단 사건의 관련자로서 수감되고, 1941년에서야 비로소 꿈에 그리던 교향악단의 초연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초연 전 긴 옥살이와 병약한 심신에 건강이 나빠져 몸져 누워 숨을 거두기 직전 사경을 헤맬 때, 그는 자신의 부인에게 "얼른 연미복을 가져오라"고 했다고 한다. 결국 그 일이 무리임을 알자, "자신은 연미복을 입혀 화장하라"고 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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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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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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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민족문제연구소 (1993년 4월 1일). 〈홍난파 : 민족음악개량운동에서 친일음악운동으로 (노동은)〉. 《친일파 99인 3》. 서울: 돌베개. ISBN 978-89-7199-013-1.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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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은신 (1995년 11월 1일). 《이것이 한국 최초》. 삼문. 79~80쪽쪽. ISBN 978-89-85407-35-9.
  2. ↑ 이동:   홍난파 기념관 자료 발췌
  3. ↑ 이동:    평화의 집/명곡해설 홍난파[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4. ↑ 이동:  교회음악의 선구자 홍난파[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5. ↑ 이동:   홍난파 - Daum 백과사전
  6. ↑ 이동:    이창식 (2003년 8월 15일). 〈수원이 낳은 양악의 거성 홍난파〉. 《수원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수원문화원.
  7. ↑ 이동:  홍난파의 <봉선화>[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8. ↑ 이동:  재미있는 홍영후 이야기7[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화성신문》 2007년 2월 2일 작성, 2009년 11월 12일 19:45 확인
  9.  재미있는 홍난파 이야기9 - 홍난파의 죽음 보관됨 2014-02-25 - 웨이백 머신 《화성신문》 2007년 3월 3일, 2009년 11월 12일 20:31 확인
  10.  법원 "홍난파 친일명단 포함 유보" 결정 《연합뉴스》 2009년 11월 26일
  11.  홍난파 친일명단 오를듯…후손 행정소송 취하 《연합뉴스》 2010년 11월 9일
  12. ↑ 이동:   김충령 기자 (2011년 10월 8일). “화성市와 단국대, 홍난파 유품 놓고 신경전 벌인다는데…”. 조선일보. 2012년 2월 17일에 확인함.
  13.  박동신, 채진근 PD (2013년 3월 15일). “단국대 죽전캠퍼스, ‘홍난파’ 유품 한 자리에..”. 파이낸셜뉴스. 2013년 3월 15일에 확인함.
  14. ↑ 이동:  김창욱 (2010년 10월 30일). 《홍난파 음악연구》. 민속원. ISBN 9788928500406.
  15. ↑ 이동:  윤치호일기 1921년(신유년) 2월 6일 《일요일》자 일기
  16. ↑ 이동:   조성관 편집위원 (2013년 1월 7일). “그는 왜 친일의 길을 걸었나(윤치호 일기로 본 일제강점기 지식인의 내면)”. 주간조선. 2013년 3월 15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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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난파 (洪蘭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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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음악
인물
일제강점기, 「봉선화」, 「고향의 봄」 등을 작곡한 작곡가이자 바이올린 연주자, 지휘자, 음악 평론가, 문필가, 편집인.
이칭필명나소운(羅素雲), Y·H생(生), 도례미(都禮美), 도레미생(生), 도뤠미생, ㄷㄹㅁ, 솔·파생(生), ㅎㅇㅎ본명홍영후(洪永厚)
인물/근현대 인물성별남성출생 연도1898년사망 연도1941년본관남양(南陽)출생지경기도 화성군 남양면(현, 남양읍) 활초리 또는 경성더보기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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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난파는 일제강점기 「봉선화」, 「고향의 봄」 등을 작곡한 작곡가이자 바이올린 연주자, 지휘자, 음악 평론가, 문필가, 편집인이다. 작곡가로서 가곡, 동요, 기악곡, 신민요, 영화 음악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썼고, 특히 100여 곡이 넘는 동요와 17곡의 가곡을 작곡하여 동요 및 가곡 작곡가로서 이름을 남겼다. 또한 홍성유, 이영세와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실내 악단인 난파트리오를 결성해 실내악 보급에 힘썼다. 편집자로서 예술지 『삼광』과 음악 잡지 『음악계』를 창간하였으며, 그 외 소설가로도 활동했다.
키워드봉선화
난파 트리오
음악계
동우회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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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봉선화」, 「고향의 봄」 등을 작곡한 작곡가이자 바이올린 연주자, 지휘자, 음악 평론가, 문필가, 편집인.

접기/펼치기인적사항


본관은 남양(南陽)(현, 경기도 화성시). 본명은 홍영후(洪永厚)이고, 필명으로 나소운(羅素雲), Y · H생(生), 도례미(都禮美), 도레미생(生), 도뤠미생, ㄷㄹㅁ, 솔 · 파생(生), ㅎㅇㅎ 등을 사용하였다. 아버지는 홍준(洪埻)이고 어머니는 전주 이 씨이다. 형은 한국에서 안이비인후과 영역을 개척한 홍석후(洪錫厚)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