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k Yuha
홍난파가 시카고의 음악학교에 다녔다는 걸 시카고에 와서야 알았다. 시카고 관련 이런저런 책을 읽다가 알게 된 사실.
체류기를 잠깐 조선일보에 연재한 짧은 글이 전자책으로 나와 있기에 읽었는데, 여러가지로 흥미로웠다. 학비가 부족했다는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다닌 모양.
홍난파는 미국을 두고 연구적 태도가 부족하다면서도 ‘음악에 중독된‘ 곳이자 ‘ ‘신흥국중 주목할 만한‘ 곳이라고 평가한다.
그런 비평적 시각은 그 이전에 다닌 일본음악학교교육과 그 이후 공부의 산물일텐데, 아무튼 일본과 미국이라는 양제국의 영향을 받은 많지 않은 근대 엘리트 조선인이었던 셈.
그의 짧은 글은 중압감보다는 거대 ‘신흥국‘ 을 호흡하고 있는 해방감으로 가득하다.
그런 홍난파, 오늘까지 모두의 가슴에 살아있는 ‘봉선화‘ 나 ’고향의 봄‘의 홍난파를 그저 ‘친일파‘ 로 낙인찍어 사전에까지 올려둔 단순하기 그지없는 폭거를 허용했던 게 90년대 이후 지난 30여년이었다.
하지만, 한사람의 복잡한 생애를 납작하게 만들어 그저 숭상이나 비난의 대상으로 만드는 건 역사를 납작하게 만들어 우리 자체를 왜소하게 만드는 행위다. 지배자가 누구이든 개인의 영혼은 살아 있는 법.
경선토론에서조차 ‘국적’논의가 이어지던데, 홍난파의 국적은 어디였을까.
성급해서 납작한 결론을 내기보다 함께 천천히 생각하는 과정이 훨씬 지적이다. 하여 그런 교육과 공유가 가능한 다음 30년을 다시 꿈꾸지 않을 수 없었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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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난파
| 기본 정보 | |
|---|---|
| 본명 | 홍영후 |
| 출생 | 1898년 4월 10일 |
| 사망 | 1941년 8월 30일(43세) |
| 성별 | 남성 |
| 직업 | 작곡가 지휘자 피아니스트 바이올리니스트 교육인 음악평론가 |
| 장르 | 서양 고전음악 |
| 배우자 | 김상운(사별), 이대형(재혼) |
| 가족 | 홍준(아버지) 전주 이씨 부인(어머니) 밀양 박씨 부인(계모) 홍석후(형) 홍옥임(조카) 홍성유(조카) 홍정임(장녀) 홍종임(차녀) 홍지유(양자) |
| 종교 | 개신교(장로교) |
홍난파(洪蘭坡, 1898년 4월 10일 (음력 3월 19일) ~ 1941년 8월 30일)는 한국의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다. 본관은 남양 홍씨 토홍계이다. 본명은 홍영후(洪永厚)이지만 홍난파로 더 알려져 있다. 아호는 난파(蘭坡)이다. 한동안 음악평론가로 활동하면서 ‘한국의 슈베르트’라고 불리기도 하였다.[1] 작품 중 〈봉선화〉, 〈성불사의 밤〉, 〈옛동산에 올라〉, 〈고향 생각〉등 10여곡의 가곡과 〈고향의 봄〉, 〈나뭇잎〉, 〈개구리〉, 〈무지개〉 등 111개의 동요를 작곡하여 천재 작곡가로 알려졌다.
생애
[편집]생애 초기
[편집]출생과 생애 초기
[편집]난파 홍영후는 경기도 남양군 둔지곶면 활초동(현 화성시 남양읍 활초리)에서 남양 홍씨 토홍계 대호군공파 24세손으로 8남매 중 셋째이자 차남으로 태어났다.[2] 아버지 홍준은 국악에 조예가 깊어서 집안 식구들이 거문고나 퉁소 등 전통 악기를 연주했는데 홍영후는 그 중 앙금을 연주했다고 한다.[3] 아버지 홍준은 국악에 조예가 많았던 관계로 아들에게 금파(錦坡), 난파(蘭坡) 등의 별호를 지어 주었다. 형 금파 홍석후는 구한 말의 양의사이기도 했다. 홍영후의 막내동생 민후는 해방 후 30여년간 경남 합천군 삼가면에서 '백중약국'을 경영하며 인술을 베풀어 약사로서 평생 선업을 쌓아 지역민들의 큰 존경을 받았다. 약사 홍민후는 형편이 어려운 환자들은 약값을 받지 않았고, 공짜로 약을 지어주며 '웬만하면 약 먹지 마셔요'로 처방하여 유명하였다. 또한, 홍난파는 1933년 형 금파와 함께 난파트리오를 결성해 활동했다. 트리오중 일찍 요절한 조카 홍성유(1908 ~ 1936)는 형 홍석후의 셋째 아들이기도 했다.
서양 음악에 입문하다
[편집]1899년 온 가족이 고향을 떠나 서울로 이사한 후 그는 교회를 다니게 되면서 서양 음악을 접하였고, 그 영향으로 그의 사촌 형 및 조카들이 모두 바이올린 연주자가 되었다. 그 또한 현재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에 속한 장로교회인 새문안교회에 다니면서 1911년에 세례를 받았고 집사로서 성가대 활동을 하는 등 교회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였다. 새문안교회를 비롯하여 많은 교회 음악회 때에도 바이올린 연주를 통한 전도 활동을 하기도 했다.[4]
1910년 중앙 기독교 청년회 중학부에 입학하였다. 중학과 재학 중 그는 장난감 바이올린을 구입하여 숫자보를 사용하여 '도레미법'을 터득하였고,[2] 중학과 재학 중에 고학과 아르바이트로 7원 50전이라는 돈을 모아 바이올린을 구입하여 음악연습을 시작했다. 1912년에 조선 정악 전습소 서양악부 성악과에 입학하여 성악을 전공했고[5], 당시 조선인 최초의 서양 음악 교사인 김인식의 지도를 받으며 공부하였다. 1913년 조선 정악전습소 성악과를 졸업하고 그 해 기악과에 입학, 이듬해에 중앙 기독교 청년회 중학과 졸업 및 기악과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조선정악전습소의 보조교사로 잠시 있었다.[5]
청년기
[편집]본격적 음악 활동의 시작
[편집]1915년 조선 정악전습소 서양악부 교사로 부임하여 <악전대요>, <통속창가집>을 출간하였고, <간이무답행진곡집>을 편찬하는 등 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 해에 김상운과 18세의 나이로 결혼한다. 홍난파의 형은 부친의 뜻에 따라 의학을 전공하게 되었고, 홍난파 또한 부친의 뜻에 따라 세브란스 의전에 입학(1916년)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세브란스 의전에서 열린 성탄 축하 음악회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였는데 이는 그의 첫 공연 무대로서 당시 큰 호응을 얻었다. 그의 음악에 대한 애정 때문에 입학 1년 만에 중퇴하고 1917년 3년간 있던 조선정악전습소 서양악부 교사직을 사임하였다. 이듬해 1월 5일 장녀 홍숙임을 얻었으며 1918년 일본에 유학 도쿄 우에노(上野)음악학교 예과(預科)에 입학하여 이듬해 3월 수료하였다.
이듬해인 1919년 도쿄에서 예술 잡지인 <삼광>을 창간하였으나 삼광은 경영난으로 4호를 끝으로 폐간되었다.
그리고 그 해 홍난파는 본과 진학이 무산되자 귀국하여 경성악우회를 조직하는 등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2] 1919년 3월 그는 3·1 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학업을 중단하고 잠시 귀국하였다. 3·1 운동 직후 그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복학을 신청했으나 받아주지 않자 좌절하고 만다. 다시 귀국 후 그는 첫 작품의 작곡에 몰입한다.
1920년에 <애수>를 작곡했는데 이 작품은 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봉선화>의 원곡이다. 그 해 공식적으로는 처음 독주회를 열었는데, 이는 일제 강점기 시절 조선인 최초이다. 1921년 첫 창작 소설집인 <처녀혼>을 발간하였고, 이듬해에는 연악회를 설립, 음악잡지 《음악세계》를 창간하였다. 1925년에는 잡지 <음악계>를 창간하고 바이올린 독주곡 <애수의 조선>, <로만스>, <동양풍의 무곡>을 작곡하였으며, 연악회 주최로 한국 최초의 바이올린 독주회를 열었다.[6] 한편으로 생업에도 종사해야 했던 그는 1920년 매일신문사에 입사하여 기자생활을 하기도 했다.
1926년 5월 13일 부인 김상운과 사별하였으며 다시 일본으로 유학가서 일본 도쿄 고등음악학원 야간반에 편입학하였다. 도쿄 고등음악학원에 재학하면서 그는 도쿄 교향악단(지금의 NHK 교향악단)의 제1바이올린 연주자로 입단했다. 1929년 고등음악학원을 수료한 뒤 도쿄 교향악단을 사직하고 귀국했다.
봉선화의 작곡과 소개
[편집]1926년 홍영후는 <세계명작가곡선집>을 편찬하였는데 그의 작품 <봉선화>가 여기에 수록되었다. 이듬해 라디오 방송을 통해 봉선화 곡이 소개되었다. 이 노래를 최초로 부르고 널리 퍼지게 한 당시 소프라노 김천애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봉선화라는 소재를 선택한 것이 작사자인 김형준(피아니스트 김원복의 선친)의 영향으로, 김형준이 살던 집 울 안에 봉선화 꽃이 가득했고, 또 김형준씨는 생전의 홍난파와 이웃해 살면서 교분이 두터웠다고 한다. 덧붙여 김형준은 봉선화를 보면 곧잘 '우리 신세가 저 봉선화꽃 같다'는 얘기도 했다고 한다.[7]
그러나 이 노래가 정작 널리 퍼져 모든 사람의 가슴을 울리게 된 것은 1940년대였다. 1942년 봄 히비야 공회당에서 열린 신인 음악회에서 김천애가 <봉선화>를 부른 것이 시초였고, 귀국 후 서울 부민관, 하세가와 공회당, 평양 키네마 등 여러 곳에서 독창회를 가지면서 <봉선화>를 불러 청중들의 눈물을 글썽이게 했다. <봉선화>는 빅터와 콜롬비아 두 레코드 회사에 취입되면서 더욱 크게 히트하였다. 이는 주권을 일본에 침탈당한 국민의 아픔을 달래는 노래였기에 엄청난 인기를 모으게 되었으나, 일본 경찰 당국은 이를 문제 삼아 이 노래를 못 부르도록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천애는 무대에 설 때마다 이 노래를 불러 여러 차례나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봉선화>의 1절이 아름답게 꽃피우던 성하에의 애절함이라면, 2절은 가을 바람에 떨어지는 낙화에의 조사를 뜻하는데, 이어지는 3절이 애절한 민족의 염원을 담고 있다. 곧, 애수 어린 가곡에서 민족의 노래로 승화시키는 모티브 역할을 한다.[7]
음악 활동
[편집]다시 유학길에 오르다
[편집]1931년 그는 조선 음악가 협회 창립 총회에서 상무 이사로 선임되어 활동을 하였다.[4] 그는 더 많은 것을 배우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 해 7월에 성가대를 사임하고 미국의 셔우드 음악학교(Sherwood Conservatory of Music)를 2년간 다녔다. 사실 이 때의 유학길은 미국으로 간 애인을 따라 결심하게 되었다고 한다. 김을한이 지은 《그리운 사람들》(삼중당, 1991)에 따르면 홍영후가 서울에서 음악 활동을 하던 무렵 K라는 애인이 있었는데, 그녀의 수양어머니가 홍난파의 애주를 문제 삼아 결혼을 매우 반대하였고, 그예 미국으로 모녀가 함께 돌아가자 그 뒤를 좇아 급하게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고 한다.[6]
이 기간 동안 홍영후는 도산 안창호가 이끄는 흥사단에 가입하게 되는데, 이 당시 흥사단은 미국에서 활동하던 독립 운동 단체였고, 미국에 있는 조선인의 가입을 이끌며 독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홍영후의 미국 생활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수업을 받으며 내야 하는 납부금을 제 때에 내지 못해 분납을 하며 생활해야 했고, 뜻하지 않은 교통 사고를 당하며 늑골을 다치고 말았다. 이 교통 사고의 후유증으로 늑막염에 시달려야 했고 귀국 후에도 잦은 병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해야 할 정도로 그의 건강이 나빠지게 되었다. 이때 흥사단은 그가 셔우드 음악학교를 수료할 때 그를 축하해 주었고, 홍영후 또한 교통 사고를 당한 이후 "격려를 보낸 것에 대해 감사 드리며 변호사에게 사건을 위임하여 손해금을 받아 볼까 교섭중이다"는 편지로 화답하였다. 마침내 홍영후는 1932년 12월 8일 흥사단에 단우 번호 266번으로 가입하게 된다.[8]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길에 오른 그는 로스앤젤레스의 한인 교회에서 바이올린 연주회를 열었고, 지방 흥사단 대회에도 참가한 후 귀국하였다. 1931년 그는 일본 빅터레코드사 고문으로 위촉되었다.
귀국 후 활동
[편집]국내에 돌아와 그는 경성보육학교 주임교수를 맡았고, 1933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학 강사로도 출강하였다. 1933년 <조선동요백곡집> 하편, <조선가요작곡집>을 발매하였다. 그리고 그 해 최초의 실내 악단이자 바이올린 3중주 악단인 난파 트리오를 결성하였다. 난파 트리오는 홍영후와 그의 조카인 홍성유, 이영세로 구성되어 진고개(현재의 충무로)에 있는 메이지제과홀에서 첫 발표회를 가졌다.[3] 그러나 조카 홍성유가 1936년 8월 병으로 갑자기 사망하면서 난파트리오는 해체되었다.
그는 1934년에는 일본 빅터레코드사 경성지점 음악 주임으로 근무하기도 하고, 현제명과 함께 작곡 발표회를 하는 등 다시 국내에서의 활동을 왕성하게 하였다. 그 해 12월 27일 이대형과 재혼하였고, 많은 영화 음악이나 신민요, 가요 등에 관여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나소운(羅素雲)이라 적었다. 그 밖에 이화여전 강사를 지냈고, 경성중앙방송국 양악부 책임자로서 활동하기도 했다. 한국 최초의 관현악단인 경성방송 관현악단을 조직, 지휘자로 활동하였다. 1938년에는 <음악만필>을 발간하였다.
1936년 그는 박영근, 이승연과 함께 <코리아음악연구소>를 창설하여 음악을 가르쳤고, <특선가요곡집>을 출간하였다. 이 해 8월 18일 조카 홍성유가 29세로 요절하여 난파 트리오는 해체되었지만, 그는 다시 이흥렬, 김태연과 함께 성서 트리오를 결성하였다.[3]
친일 활동
[편집]홍난파는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의 관련자로 지목되어 경성부 종로경찰서 경찰에 의해 검거되었다. 72일 동안에 걸친 옥고를 치른 후에 석방되었으나, 애국가요대회에서 <정의의 개가>, <공군의 가(歌)>를 작곡하였다. 그 후 그는 "사상 전향에 관한 논문"을 제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1939년 당시 변절한 문학가 이광수의 시에 곡을 넣어 <희망의 아침>을 발표하였다. 그런가 하면 매일신보에 <지나사변과 음악> 등을 게재하기도 했다. 또한 1940년에는 국민총력조선연맹의 문화위원에 임명되어 활동하기도 하였다.[3]
일제 말기 전시 체제(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 이후로 일제 총독부는 모든 분야에 발악했었고, 당시 옥중에 갇혔던 정치범들이나 독립운동지사들은 전향서를 써야만 석방을 맞을 수 있었다. 그리고 수양 동우회 사건 이후 수많은 독립운동지사들이 변절하거나 전향하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어났던 시기였다. 그의 딸인 홍정임 여사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아래와 같이 증언하고 있다.
1938년 음악잡지 「음악만필」을 발행하였다. 이는 한국 최초의 음악산문집이자 음악 평론집이기도 했다.
죽음
[편집]홍영후는 미국에서 당한 교통 사고의 후유증으로 늑막염을 앓고 있다가 회복되긴 했지만 수양 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된 후 일본 경찰의 고문으로 재발하면서 크게 악화되었다. 그 상황에서 1941년에는 적십자병원, 경성요양원(지금의 삼육서울병원)을 오가며 치료를 받았지만 그 해 8월 30일에 결핵균이 머리로 들어가게 되면서 뇌결핵으로 이어져 끝내 경성요양원에서 별세하였다.[9]
그는 유언으로 "내가 죽거든 꼭 연미복을 입혀서 화장(火葬)해 달라."는 말을 남겼다.
작품
[편집]23세 때 작곡한 〈봉선화〉와 〈성불사의 밤〉, 〈옛동산에 올라〉, 〈고향의 봄〉, 〈고향 생각〉등 십 여곡의 가곡을 남겼고, 이 중 〈봉선화〉와 〈사공의 노래〉를 제외한 대부분의 가곡은 이은상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 곡이다. 후세의 많은 사람들에게도 친숙한 〈나뭇잎〉, 〈개구리〉를 비롯하여 111개의 동요를 작곡하였고, 〈애수〉, 〈로망스〉 등 8개의 기악곡을 발표하였으며 여러 곡의 영화 음악을 작곡하는 천재적 재능을 발휘하였다. 저서에는 《세계의 음악》, 《조선 가요백곡집》과 단편 소설집 《처녀의 혼》, 《향일초》, 《폭풍우가 지난 후》 등이 있다.
사후
[편집]1954년 난파기념사업회가 설립되어 '조선동요 100곡집'을 재간행하였다.[5]

1965년 10월 25일 대한민국 정부는 홍난파에게 문화 훈장을 추서하였다. 1968년 수원 팔달산에 노래비가 세워졌고, 1969년 8월 30일 홍난파의 추모일을 맞아 예총 경기도지회가 ‘난파음악제’를 연 이래 해마다 계속되고 있다.[6] 또한 그가 살던 집(종로구 홍파동 소재)이 2004년 9월 4일 등록문화재 90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홍난파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집 앞에는 그의 흉상이 서 있다. 수양동우회 사건 이후에 있었던 친일 행적으로 인해 홍난파는 친일파 708인 명단,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에 포함되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될 예정이었지만 2009년 11월 26일 홍난파의 유족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를 상대로 낸 친일행위조사결과 통지처분 효력정지 신청이 서울행정법원에서 받아들여지면서 유보 결정되었다. 당시 재판부는 "홍난파의 행위를 일본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것으로 볼 수 있는지 더 따져봐야 하기 때문에 본안 소송 결과가 나올 때까지 해당 처분의 효력을 중지한다"고 말했다.[10] 2010년 11월 4일 홍난파의 유족이 행정안전부 장관을 상대로 낸 소송의 선고(2010년 11월 5일)를 하루 앞둔 상황에서 돌연 소송 취하 의사를 밝혔고 행정안전부가 이에 동의하면서 재판이 종결되었다. 이에 따라 홍난파의 유족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를 상대로 낸 친일행위조사결과 통지처분 효력정지 신청을 받아들인 법원의 결정이 무효가 되었고 홍난파는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실리게 되었다.[11] 2017년 12월에는 대한민국 행정안전부 과거사 관련 업무 지원단에 의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보유편》이 출간되었다. 여기에는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이유서, 김성수·방응모에 관한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에 관한 판결문이 수록되어 있다.
기념관에 대한 논란
[편집]홍난파가 1897년에 남양 활초리에서 태어나 기념사업 권리문제로 논란을 빚었던 화성시는 이번에는 단국대학교와 유품을 놓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2006년부터 181억 5천만원을 들여 활초동 4만5천270m2 부지에 지하 1층, 지상2층 규모의 기념관, 야외음악당, 공원 등을 갖춘 홍난파 꽃동산 조성사업을 추진해왔는데 연고권을 들어 단국대학교 측에 유품을 넘겨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6] 하지만 단국대 측은 "홍난파의 유품을 화성시에 넘겨줄 계획이 전혀 없다"고 했다. 단국대 관계자는 "2009년에 화성시가 한 차례 공문을 보내온 바 있지만 거절했다"며 "유품을 기증받아 지금까지 전시·보존을 해 왔고, 죽전캠퍼스에 박물관 증축이 끝나면 다시 정상적으로 전시할 계획"이라고 밝혔는데 논란이 가중되자 단국대학교에서는 "기증받을 때 계셨던 학교 관계자 대부분이 세상을 떠났거나 학교에 남아있지 않기에 기증자 몇명이 언제 어떤 이유로 유품을 학교에 전달한 것인지 확인하기 어렵다"라고 밝히면서 유품들은 모두 학교 재산으로 등록되어 있다고 못을 박고 어이없는 요구에 적극 대응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12] 또한 1984년 단국대학교 한남동 캠퍼스내 난파기념 음악관에서 유품을 전시할 때 홍난파 선생의 따님도 참석했었다고 전하면서 유품은 2007년 8월 30일 서울시 용산구 한남동에서 용인시로 이전되어 옮겨진 음악관이 확장되는대로 전시하기로 하였는데 단국대학교는 2013년 3월 13일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죽전동에 있는 신축한 캠퍼스에 전용 난파음악관을 마련하고 별실의 홍난파의 유품을 전시한 '난파 홍영후 전시실'을 개관했다. 유족으로 난파 선생의 조카인 홍건유 전 포스코 부회장, 외손자 홍익표 전 연성대학 부총장 등이 참석하였다.[12][13][14] 난파음악관의 전시실에는 2011년 문화재청으로부터 등록문화재 제 479호로 지정된 동판 동요악보원판 51개를 비롯, 홍난파가 생전에 사용하던 바이올린 등 그의 음악적 삶이 담긴 수필 등 약 420여 점이 전시되었다.[14]
사치품 논란
[편집]홍난파는 자신의 형 이비인후과 의사 홍석후 외에도 조선의 계몽사상가, 사회사업가 윤치호가 다달이 송금하는 100원으로 학비와 용돈을 조달하였다.
그는 윤치호에게 250원의 바이올린을 사도록 돈을 더 부쳐달라고 요청했다가 거절당했다.[15] 홍난파는 다시 편지를 써서 구두쇠의 죄악에 대해 내게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그는 조선의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자기 재능을 계발할 만한 아무런 수단이 없는 조선의 천재들과 영웅들의 운명을 비관했다. 그는 볼셰비키들과 공산주의자들이 정당한 약탈자들이라고 강변하고 부자들이 혼자서 자기 재산을 누릴 수 없는 때가 곧 올 것이라 했다.[15]
| “ | 홍영후(洪永厚 · 난파)의 편지를 읽고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작년 1~2월쯤 도쿄에 가서 음악공부를 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그가 간청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에게 100원을 주었다. 9월 언제쯤인가 또 다시 수표로 100원을 주었다. 나중에 50원을 더 주어서, 유학비용으로 모두 250원을 대주었다. 한 달 전 그가 다시 편지를 보내와 바이올린을 사게 250원을 보내달라고 청했다. 공부하는 중에 250원짜리 바이올린을 사는 건 내 아들이나 동생이라도 절대 승낙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부탁을 들어줄 수 없다고 답장을 썼다. 남에게서 돈을 받아 공부하면서 생활비 전액을 대달라고 하는 것이나, 고학생이 250원짜리 바이올린을 갖고 싶어한다는 건 도저히 말도 안 되는 발상이었다. 그런데 오늘 배달된 편지에서, 그는 구두쇠의 죄악에 대해 내게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그는 조선의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자기 재능을 계발할 만한 아무런 수단이 없는 조선의 천재들과 영웅들의 운명을 비관했다. 그는 볼셰비키들과 공산주의자들이 정당한 약탈자들이라고 강변하고 부자들이 혼자서 자기 재산을 누릴 수 없는 때가 곧 올 거라고 협박까지 했다. 조선 청년들의 수준과 은혜에 보답하는 그들의 마음이 어떤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녀석이었다.[16] | ” |
윤치호는 이를 협박으로 받아들이고, 조선 청년들의 사치, 허영심을 개탄하였다.
저서
[편집]- 《조선동요 100곡집》
- 음악산문집, 《음악만필》
일화
[편집]일화 하나, 계몽운동가 겸 교육자 윤치호는 그를 후원하던 후원자들 중의 한명이었다. 홍영후는 그의 형 홍석후를 통해 윤치호를 알게되었다. 당시 상황에 대해서 1921년 2월 6일(일요일)에 쓴 윤치호의 일기내용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홍난파는 윤치호에게 계속 후원을 받았는데, 하루는 윤치호에게 바이올린을 살 비용을 달라고 하였으나 거절하였다. 윤치호는 '남에게서 돈을 받아 공부하면서 생활비 전액을 대달라고 하는 것이나, 고학생이 250원짜리 바이올린을 갖고 싶어한다는 건 도저히 말도 안 되는 발상'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자 홍영후는 윤치호에게 구두쇠의 죄악에 대한 설교를 하며 볼셰비키들과 공산주의자들이 정당한 약탈자들이라고 강변하고 부자들이 혼자서 자기 재산을 누릴 수 없는 때가 곧 올 거라고 주장했다. 분개한 윤치호는 홍영후를 가리켜 '조선 청년들의 수준과 은혜에 보답하는 그들의 마음이 어떤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녀석'이라고 혹평하였다.[16]
그러나 홍영후는 이때 느꼈던 구두쇠의 죄악과 부자에게 제한적으로 받았던 감정을 잊지못해 훗날 유언까지 남겨 유족은 생전의 약속대로 연주하던 바이올린과 대표작들의 악보 등 총 116종 900여점의 유품을 단국대학교에 기증하였다. 홍난파의 유품 대부분은 단국대학교가 소장하고 있다.[12]
일화 둘, 홍난파가 경성중앙라디오방송국 양악부(洋樂部)의 총책임자로서 경성교향악단의 지휘자로 있을 때, 그는 <조선동요100곡집>이라는 악곡집을 만들면서 음악운동에 최선을 다하였다. 그러나 1937년 흥사단 사건의 관련자로서 수감되고, 1941년에서야 비로소 꿈에 그리던 교향악단의 초연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초연 전 긴 옥살이와 병약한 심신에 건강이 나빠져 몸져 누워 숨을 거두기 직전 사경을 헤맬 때, 그는 자신의 부인에게 "얼른 연미복을 가져오라"고 했다고 한다. 결국 그 일이 무리임을 알자, "자신은 연미복을 입혀 화장하라"고 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미디어
[편집]같이 보기
[편집]참고 자료
[편집]- 반민족문제연구소 (1993년 4월 1일). 〈홍난파 : 민족음악개량운동에서 친일음악운동으로 (노동은)〉. 《친일파 99인 3》. 서울: 돌베개. ISBN 978-89-7199-013-1.
각주
[편집]- ↑ 김은신 (1995년 11월 1일). 《이것이 한국 최초》. 삼문. 79~80쪽쪽. ISBN 978-89-85407-35-9.
- ↑ 가 나 다 홍난파 기념관 자료 발췌
- ↑ 가 나 다 라 평화의 집/명곡해설 홍난파[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 가 나 교회음악의 선구자 홍난파[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 가 나 다 홍난파 - Daum 백과사전
- ↑ 가 나 다 라 이창식 (2003년 8월 15일). 〈수원이 낳은 양악의 거성 홍난파〉. 《수원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수원문화원.
- ↑ 가 나 홍난파의 <봉선화>[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 가 나 재미있는 홍영후 이야기7[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화성신문》 2007년 2월 2일 작성, 2009년 11월 12일 19:45 확인
- ↑ 재미있는 홍난파 이야기9 - 홍난파의 죽음 보관됨 2014-02-25 - 웨이백 머신 《화성신문》 2007년 3월 3일, 2009년 11월 12일 20:31 확인
- ↑ 법원 "홍난파 친일명단 포함 유보" 결정 《연합뉴스》 2009년 11월 26일
- ↑ 홍난파 친일명단 오를듯…후손 행정소송 취하 《연합뉴스》 2010년 11월 9일
- ↑ 가 나 다 김충령 기자 (2011년 10월 8일). “화성市와 단국대, 홍난파 유품 놓고 신경전 벌인다는데…”. 조선일보. 2012년 2월 17일에 확인함.
- ↑ 박동신, 채진근 PD (2013년 3월 15일). “단국대 죽전캠퍼스, ‘홍난파’ 유품 한 자리에..”. 파이낸셜뉴스. 2013년 3월 15일에 확인함.
- ↑ 가 나 김창욱 (2010년 10월 30일). 《홍난파 음악연구》. 민속원. ISBN 9788928500406.
- ↑ 가 나 윤치호일기 1921년(신유년) 2월 6일 《일요일》자 일기
- ↑ 가 나 다 조성관 편집위원 (2013년 1월 7일). “그는 왜 친일의 길을 걸었나(윤치호 일기로 본 일제강점기 지식인의 내면)”. 주간조선. 2013년 3월 15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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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난파 (洪蘭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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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음악
인물
일제강점기, 「봉선화」, 「고향의 봄」 등을 작곡한 작곡가이자 바이올린 연주자, 지휘자, 음악 평론가, 문필가, 편집인.
이칭필명나소운(羅素雲), Y·H생(生), 도례미(都禮美), 도레미생(生), 도뤠미생, ㄷㄹㅁ, 솔·파생(生), ㅎㅇㅎ본명홍영후(洪永厚)
인물/근현대 인물성별남성출생 연도1898년사망 연도1941년본관남양(南陽)출생지경기도 화성군 남양면(현, 남양읍) 활초리 또는 경성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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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난파는 일제강점기 「봉선화」, 「고향의 봄」 등을 작곡한 작곡가이자 바이올린 연주자, 지휘자, 음악 평론가, 문필가, 편집인이다. 작곡가로서 가곡, 동요, 기악곡, 신민요, 영화 음악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썼고, 특히 100여 곡이 넘는 동요와 17곡의 가곡을 작곡하여 동요 및 가곡 작곡가로서 이름을 남겼다. 또한 홍성유, 이영세와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실내 악단인 난파트리오를 결성해 실내악 보급에 힘썼다. 편집자로서 예술지 『삼광』과 음악 잡지 『음악계』를 창간하였으며, 그 외 소설가로도 활동했다.
키워드봉선화
난파 트리오
음악계
동우회 사건
접기/펼치기정의
일제강점기, 「봉선화」, 「고향의 봄」 등을 작곡한 작곡가이자 바이올린 연주자, 지휘자, 음악 평론가, 문필가, 편집인.
접기/펼치기인적사항
본관은 남양(南陽)(현, 경기도 화성시). 본명은 홍영후(洪永厚)이고, 필명으로 나소운(羅素雲), Y · H생(生), 도례미(都禮美), 도레미생(生), 도뤠미생, ㄷㄹㅁ, 솔 · 파생(生), ㅎㅇㅎ 등을 사용하였다. 아버지는 홍준(洪埻)이고 어머니는 전주 이 씨이다. 형은 한국에서 안이비인후과 영역을 개척한 홍석후(洪錫厚)이다.
생애 및 주요 활동
탄생일은 1898년 3월 19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날짜를 음력으로 보아 4월 9일로 보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 또한 탄생지는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 활초리라는 여러 기록이 있으나, 자필 이력서에는 경성에서 태어난 것으로 적혀 있어 현재까지 탄생지에 관한 논란이 있다.
아버지 홍준은 미국 장로교 목사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가 설립한 새문안교회에서 1892년에 세례를 받았고, 언더우드와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를 비롯한 외국 선교사의 한글 성서 번역 작업에 참여하였으며, 언더우드의 조선어 선생이기도 하였다. 홍난파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새문안교회에 다니면서 교회 음악을 접했고 이를 통해 서양 음악에 입문하였다. 어렸을 때 한학주1을 배웠고 사립 영신 소학교(1905~1910)를 다녔다.
1910년 9월에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학관 중학과에 입학해 1914년 3월 졸업하였다. 학관에 다니면서 1912년 최초의 전문 음악기관인 조선정악전습소(朝鮮正樂傳習所) 서양악부 성악과에 입학하여 김인식의 지도로 음악 공부에 전념하여 1913년 4월 제2회로 졸업하였다. 다시 같은 해 조선 정악 전습소 서양악부 기악과(사현금 전공)에 들어가 1914년 졸업하고, 이후 1915년 1월부터 1917년 12월까지 조선 정악 전습소 서양악부 교사로 근무하였다.
1918년 4월에 도쿄(東京) 우에노(上野)에 있는 관립 동경음악학교(현, 동경예술대학 음악학부) 예과에 입학해서 1919년 3월에 수료하였다. 재학 중이었던 1919년 2월에 예술지 『삼광(三光)』을 창간하여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 활동하였다. 이 잡지는 재동경 조선 유학생 악우회의 기관지 성격으로 음악 · 미술 · 문학 3개 분야를 다루었으나 음악 분야가 주를 이루었다.
1919년 봄에 귀국하여 매일신보사주2에 입사하여 다음 해인 1920년 1월까지 기자 생활을 했다. 1919년 10월에는 경성 악우회주3 제1회 음악 연주회를 개최하여 김영환, 김형준 등과 함께 출연했다. 1920년 1월, 2번째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음악학교 본과에 진학하려 했으나 거절당했고, 동경의 사립 일본대학 문과에서 음악 강의를 하였다. 이후 귀국하여 그 해 9월부터 11월까지 매일신보에 가정 소설주4 『허영』을 60회 연재하였고, 1921년 4월~6월 소설 『최후의 악수』주5를 40회 연재하였다.
1922년 9월에는 민간 음악기관인 연악회(硏樂會)를 창립하였다. 주요 사업은 개인 레슨이었지만, 그 외에도 음악회 개최, 악보집 발간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음악 영역 확대에 기여했다. 1925년 4월, 연악회의 기관지로 우리나라 최초 음악 잡지인 『음악계(音樂界)』를 창간하였으며, 『세계명작가곡선집』(등사본, 1926), 『조선동요백곡집』 제1편(등사본, 1929), 『조선가요작곡집』 제1집(1933), 『조선동요백곡집』 하편(1933), 『특선가요곡집』(1936) 등을 출판했다.
이 기간 동안 바이올린 연주자로서도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1924년 1월 19일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제1회 바이올린 독주회를 개최하였으며, 6월 14일 경성의전(京城醫專) 음악부의 음악회에 출연하였다. 1925년 9월 26일에는 제2회 바이올린 독주회를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연악회 주최로 개최하였고, 1926년 2월 11일 조선일보사 후원 그랜드 콘서트에서 바이올린 독주를 담당하는 등 다수의 음악회에 출연하였다.
1926년 9월에 사립 동경고등음악학원 선과(選科)에 바이올린 전공으로 입학하였다. 동경고등음악학원에 재학 중이던 1927년 동경심포니오케스트라, 1928년 동경신교향악단(東京新交響樂團, NHK교향악단의 전신)에 입단해 제1바이올린 연주자로 활동하였다. 1929년 3월 동경고등음악학원 본과(本科)를 졸업하고, 이후 곧바로 귀국하여 같은 해 5월 활동이 중단되었던 연악회 활동을 다시 시작하고 9월 중앙보육학교 음악과 주임 교유주6로 취임하였다.
1931년 7월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그 해 9월 미국 시카고 셔우드(Sherwood) 음악학교 연구과에 입학하였고, 1932년 6월에 졸업하여 음악 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셔우드 음악학교 재학 중이던 1931년 12월에 미주 흥사단(興士團)에 가입하여 단번 266번을 부여 받았다.
1933년 2월에 미국에서 귀국한 후 3월 중앙보육학교 주임 교유직을 물러나고, 4월 경성보육학교 음악 주임 교유를 맡아 1937년 8월까지 일했다. 한편, 홍성유(洪盛裕) · 이영세(李永世)와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실내 악단인 난파 트리오를 결성해서 실내악 보급에 힘썼다. 난파 트리오는 1933년 6월 4일 메이지(明治) 제과홀에서 첫 시연회를 가졌고, 9월 15일 정동 모리스홀에서 제1회 실내악의 밤, 11월 4일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연주회를 갖는 등 1936년까지 4년간 활발하게 활동하였으나 1936년 홍성유의 죽음으로 해체되었다. 1934년 6월 일본 빅타(Victor) 축음기 주식회사 경성 지점 음악 주임으로 취임하였고, 1935년 9월부터 1936년 3월까지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에 출강하였다.
1937년 ‘동우회(수양동우회) 사건’으로 6월 11일에 검거되고, 8월 21일에 송치되어주7 70여 일의 감옥 생활을 했다. 그 사이 빅타 축음기 주식회사 음악 주임과 경성보육학교 음악 주임 교유를 사임하였다. 같은 해 11월 ‘사상전향에 관한 논문’을 제출한 후 친일 활동을 하게 되었다. 논문 제출 직후인 11월 경성중앙방송국 방송관현악단 지휘자로 취임하였다. 1938년 6월 사상 전향자들을 회원으로 하는 ‘대동민우회’에 동우회 사건 관련자들과 함께 가입하면서 성명서를 발표하였고, 7월 『음악만필』을 발간하였다.
1941년 1월 25일 조선음악협회 결성식주8에서 평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월 29일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문화위원에 선임되었다. 같은 해 8월 30일 서울 서대문구 홍파동 2-16번지 자택에서 44세로 세상을 떠났다.
작품
홍난파는 작곡가로서 가곡, 동요, 기악곡, 신민요, 영화 음악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썼다. 특히 100여 곡이 넘는 동요와 17곡의 가곡을 작곡하여 동요 및 가곡 작곡가로 이름을 남겼다.
그의 대표적 가곡인 「봉선화」는 원래 바이올린곡으로, 1920년 홍난파의 단편소설집인 『처녀혼』에 「애수」(哀愁)라는 제목으로 처음 실린 곡인데, 후에 가사를 붙여 1925년 출판된 『세계명작가곡집』에 성악곡으로 수록되었다. 「봉선화」 외에 노산 이은상(李殷相, 1903-1982)의 신작 시조에 곡을 붙인 『조선가요작곡집』 제1집에 실린 15곡의 가곡과 「사공의 노래」(1932) 등 총 17편의 가곡을 작곡했다.
한편, 바이올린 연주자로 바이올린 독주곡 「로만스」(1931), 「애수의 조선」(哀愁의 朝鮮, 1931), 「동양풍의 무곡」(東洋風의 舞曲, 1931), 「하야의 성군」(夏夜의 星群, 1931) 등을 작곡 · 출간했다. 그의 유일한 관현악곡으로 「관현악 조곡」(Orchestral Suite)이 있는데, 이 곡은 ‘즉흥곡’, ‘론도’, ‘동양풍의 무곡‘ 등 3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외 경성중앙방송국 방송관현악단 지휘자로 활동하면서 레코드 청취자들을 위한 작품인 신민요, 「방아 찟는 색씨의 노래」(931), 「녹쓴 가락지」(1931), 「압록강」(1934), 유행가 「백마강의 추억」(1935), 「님의 향기」(1935), 영화 「애련송」의 주제가 「서곡」과 「방랑곡」(1938) 등을 작곡했다.
편집자로서 예술지 『삼광』과 음악잡지 『음악계』를 창간하였으며, 『악전대요』(1916), 『창가교수법』(1923년 이전), 『음악만필』과 같은 음악 관련 서적을 출판하였고, 그 외 다수의 작곡집을 발간하였다. 또한 1921년 첫 창작소설집인 『처녀혼』을 발표하였고, 번역서로 도스토예프스키(Fyodor Mikhailovich Dostoevsky) 원작의 『가난한 사람들』을 번역한 『청춘의 사랑』(1923)과 에밀 졸라(Emile Zola) 원작의 『나나』(1924) 등을 출간하였다. 이외에도 신문과 잡지에 다수의 글과 평론을 발표하였다.
단행본
김양환, 『홍난파 평전: 일제 강점기의 삶과 예술』 (남양, 2009)
난파연보공동연구위원회 편, 『새로 쓴 蘭坡 홍영후 연보』 (한국음악협회경기도지회·민족문제연구소, 2006)
엔도 키미꼬 지음, 송귀영 역, 『울 밑에 선 봉선화야: 홍난파 평전』 (단국대학교출판부, 2017)
논문
김창욱, 「홍난파의 가계와 그 문화」 (『음악과 민족』 24, 민족음악학회, 2002)
김창욱, 「홍난파 음악연구」 (동아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4)
김창욱, 「홍난파에 대한 사회적 접근」 (『수원문화사연구』 7, 수원문화사연구회, 2005)
나진규, 「홍난파의 가곡들에 적용된 음악기법들에 대한 이해」 (『음악이론포럼』 8, 연세대학교 음악연구소, 2001)
접기/펼치기주석
주1
한문을 연구하는 학문. 우리말샘주2
대한 제국 광무 8년(1904)에 베델과 양기탁이 서울 전동에 세운 신문사. 우리말샘주3
우리나라 최초의 오케스트라. 1919년 10월 13일 종로 쳥년 회관에서 제1회 음악 연주회를 개최하였다. 우리말샘주4
가정에서 읽을 수 있도록 통속적이면서도 건전한 내용으로 쓴 소설. 우리말샘주5
홍난파가 지은 소설. 1921년 ≪매일신보≫에 연재되었고, 1922년에 단행본으로 간행되었다. 우리말샘주6
일제 강점기에, 정식 자격을 가진 중등학교의 교원을 이르던 말. 우리말샘주7
수사 기관에서 검찰청으로, 또는 한 검찰청에서 다른 검찰청으로 피의자와 서류가 넘겨져 보내어지다. 우리말샘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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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난파 기념비에 나란히 세운 친일 행적 단죄문 읽어보니
입력 2015.09.21
https://www.daejon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186859
민족문제硏 "독립운동가에 모독… 만천하 폭로"
민족문제연구소에 따르면 천안 목천면 독립기념관 진입로 왼쪽 숲에 꾸며진 광복의 동산에 놓인 홍난파(일본 창씨명 모리카와 준 森川 潤) 기념비가 철거되지 않자 이날 오전 그의 잘못을 열거한 단죄문을 기념비와 나란히 세우고 제막식을 열었다. 단죄문은 높이 170㎝, 가로 100㎝, 세로 80㎝ 크기로, 민족문제연구소 충남지부 천안아산지회가 설치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2009년 `친일인명사전`을 제작하면서 홍난파를 그 명단에 올렸다. 일제강점기 친일단체인 `국민총력조선연맹`에서 문화부 문화위원을 지내는 등 친일행적이 확인된 때문이다.
단죄문에는 `사상전향을 결의하고 나의 그릇된 생각과 마음가짐을 바꿔 과거를 청산하고, 금후는 일본제국의 신민으로서 본분을 다하고, 온건한 사상과 정당한 시대관찰로써 국가에 대해 충성을 꾀하며, 민중에 대해서는 훌륭한 지도자가 될 것을 맹세하는 바이다`라는 내용이 명시돼 있다.
1938년 6월 사상전향자 단체인 대동민우회에 가입하면서 `조선 민중의 행복은 내선(內鮮) 두 민족을 하나로 하는 대일본 신민이 되어 신동아건설에 매진함에 있다`는 취지의 전향성명을 발표한 사실도 적혀 있다.
경성방송 교향악단을 이끌면서 1938년 7월 9일 `동요와 합창` 방송에서 `애국행진곡`을 지휘했으며, 이 곡은 일본인이 작곡한 일본 전통의 전형적인 2박자 풍의 곡으로 일본의 제2국가로 불리던 노래라는 사실도 지적했다.
홍난파 비가 있는 광복의 동산은 1987년 독립기념관 개관 당시 천안시(당시 천원군)가 만들었다.
이곳에는 유관순 열사의 감나무, 윤봉길 의사의 은행나무, 한용운 선생의 향나무 등 독립운동가들을 기리는 나무가 심어져 있어 방문객들은 이 공원도 독립기념관 일부로 알고 있다.
홍난파 기념비는 `홍난파 선생과 감나무`라는 큰 글귀 아래 `봉선화`, `고향의 봄`을 비롯한 수많은 겨레의 노래로 나라 잃은 슬픔을 달래주면서 희망과 용기를 북돋워 준 작곡가 난파 홍영후 선생의 고향인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 활초리 옛 동산에 자라던 감나무, 상수리나무를 옮겨 심어 선생의 높은 뜻을 기린다"고 적고 있다. 이찬선 기자
대전일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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