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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새마을운동 55주년… 발상지는 도대체 어디?
입력2025.04.27. 오전 5:00 기사원문
이용규 기자 TALK경북 청도 신도리 VS 방음리

4월은 가문 달이다. 1970년에도 그랬다. 지금도 봄 가뭄은 종종 있는 일이지만 농업국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당시로서는 큰일이었다. 1970년 4월 22일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부산에서 한해(旱害·가뭄피해)대책 지방장관회의를 열고 '유시(諭示)'를 했다. 대통령은 그 자리에 나와 있던 도지사, 시장, 군수들 앞에서 "왜 비가 오기만을 기다리나"로 시작해 "타성적인 사고방식으로는 발전할 수 없다"는 연설을 이어갔다.
가뭄 문제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요컨대 농촌 개발 전반에서 농민들의 자조정신을 일깨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훈시 끝에 나온 단어가 '새마을'이다. "그 운동을 '새마을 가꾸기 운동'이라고 해도 좋고 '알뜰한 마을 만들기'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박정희 유시 중) 2011년 제정된 '새마을의 날'은 그래서 4월 22일이 됐다.
그런데 여기에는 이런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직전해인 1969년 여름은 반대로 수해가 심했다. 그해 8월 4일 박 전 대통령은 경부선 열차를 타고 영남 수해복구 현장을 시찰하러 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창밖으로 유달리 말끔한 마을이 보였다. 주민들이 마을 안길과 제방을 복구하는 모습이 보였다. 대통령은 기차를 '신거역'에 세우고 마을을 방문했다. 그곳은 경북 청도군 청도읍 신도1리, '신도마을'이었다.
주민들이 합심해 이 소읍을 정비하는 모습에 대통령은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이듬해인 1970년 4월 22일 지방장관회의를 열고 이 마을을 소개하며 새마을운동의 모범사례로 삼았다는 것이다. 경북도와 청도군은 이런 서술을 계속 재생산하며 신도마을을 '새마을운동의 발상지'로 소개하고 있다. 윤석열 전 대통령까지도 파면 이전인 지난해 6월 신도마을을 직접 언급할 정도였다.

'모범 마을' 맞지만, 朴이 내린 적은 없다
사실일까.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신도마을이 새마을운동의 '모범 마을' 사례로 소개되어 온 선구자 격 마을인 것은 맞는다. 신도마을이 일찍이 '모범부락'으로 알려졌고 정부에서 본보기로 삼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1970년 대통령비서실이 펴낸 '국토보존'에는 '잘 보존되어 있는 마을의 본보기'로 소개돼 있고, 전국 각지의 새마을지도자들이 1970년 9월부터 12월까지 신도마을을 견학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통령이 신도마을을 직접 방문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먼저 박 전 대통령의 지방장관회의 연설에서 '신도마을'은 소개되지 않았다. 국가기록원에 남아있는 당시 대통령의 연설문 전문을 보면, 박 전 대통령은 "모범적인 부락도 여러 군데 있는데 특히 경산, 청도 같은 데를 한번 보십시오"라면서 "그리고 천안, 대전 부근에 있는 뻘건 농촌하고 비교를 해보십시오, 같은 농촌인데 왜 이렇게 달라지겠습니까"라고 말한다. 구체적인 마을 이름을 언급한 적은 없다.
상황 묘사도 계속 바뀐다. 박 전 대통령과 신도마을을 엮은 에피소드가 처음 대중매체에 등장하는 것은 1972년, 새마을운동이 본격적으로 추진될 무렵이다. 1972년 2월 5일 자 경향신문에는 이런 기사가 실려 있다.
"박 대통령은 경북 청도역 남쪽 신도새마을 모범부락을 지날 때 차를 서행시키라고 지시, '이 마을이 잘살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고 김 농림부 장관(당시 김보현 장관)에게 묻자 김 장관은 '밤과 감단지를 만들어 팔아 이익금을 마을금고로 하여 부촌이 되게 했다'고 설명, 박 대통령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1972년 3월 공화당출판사가 펴낸 '우리 대통령'에는 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지방관서 연두순시 때의 일이었다. 박 대통령은 광주에서 기동차(기차) 편으로 대전을 경유하여 부산으로 가는 7시간 반을 꼬박 자리에 앉아, 줄기차게 변화해가는 농촌의 모습을 내다보고 있었다.… 기동차가 청도역 근방에 이르자 박 대통령은 차를 천천히 가도록 하고 '새마을' 모범부락인 '신도마을'의 풍요하고 아름다운 모습에 흡족한 표정을 짓고, 농림부 장관으로부터 이 마을의 성공담을 귀담아듣기도 했다."
그런데 2019년에 이르면 '박정희의 신도마을 방문' 에피소드는 이렇게 그려진다.
"그때였다. 청도군 청도읍 신도리를 지날 무렵이었다. "임자, 잠깐 기차 세워!" "예?" 수행원은 갑작스러운 대통령의 말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내가 뭐 좀 봐야겠어. 뒤쪽으로 후진시켜" 박정희 대통령은 거침없었다. 멈춘 기차는 서서히 뒤로 움직였다. "여기가 어디야?" "청도군 신도리라는 곳입니다." ('청도 사람들의 새마을운동', 2019년 청도군 새마을과 발행)
살에 살이 붙은 것으로 봐야 옳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통령이 실제 이곳을 방문했다면 청와대의 '대통령비서실 동정일지'의 행적이나, 공보실 사진기자들의 수행에 의해 기록이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없다.
1969년 8월 3~4일에 대통령이 신도마을을 찾았다는 기록도 없다. 경북 청도군에 소재한 '새마을발상지기념관'에는 이런 '일화'를 토대로 박 전 대통령의 모습을 합성한 컴퓨터그래픽 사진만 남아있을 뿐이다. 무엇보다 이런 에피소드들이 모두 전언처럼 소개돼 1차적 출처가 불분명하다.

발상지가 어디 있으랴
박 전 대통령이 1970년 당시 언급했듯, 경북 일대에서는 자발적 재건운동에 나선 농촌 마을들이 여럿 두드러졌다. 대표적인 것이 같은 경북 청도군 운문면 방음리의 '살고파마을'이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뒤 1960년 소령으로 예편한 홍영기 선생이 이곳을 개척했는데, 자갈밭을 개간해 농지를 만들었다고 해 '쇠똥소령'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벽돌조의 현대식 농민회관을 짓고 공동 목욕탕, 구판장, 도정공장(정미소)을 짓는 등의 성과를 거뒀다.
홍 선생의 아들인 홍택정 문명고등학교 이사장은 "물레방앗간 정미소를 할아버지가 운영했음에도 불구, 선친은 마을 사람들을 위해 정미소를 만들었다"고 전했다. 이 마을 역시 새마을운동의 성공사례로 전국적 지명도를 얻었다.
홍영기 선생은 이런 노력을 인정받아 1968년 박 전 대통령이 총재로 있던 '5·16민족상' 재단에서 '5·16민족상'을 수상한다. 시기로 따지자면 신도마을이 주장하는 1969년보다 이른 것이다. 이때 상패에는 '영농의 근대화, 생활의 합리화, 농가수익증대'라는 공로가 적혀 있다.
이 방음동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방문했다. 기록과 사진이 명백하다. 박 전 대통령은 1972년 3월 24일 이곳을 찾아 "쇠똥소령 이야기는 서울에서도 들었다"고 '치하'했다고 전한다. 홍 이사장은 "대통령이 '동리 골목길을 너무 넓힌 것 아닌가'라고 물었는데, 선친이 '지금 현실에서 리어카가 다니고 경운기가 다니는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앞으로 마이카 시대가 될 것이다'라고 대답해 대통령이 흡족해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1996년 이곳 일대가 운문댐이 준공돼 수몰되며 홍 선생이 일군 마을의 업적은 모두 사라졌다. 홍 선생은 수몰된 마을이 건너 보이는 곳에 자비로 '방음동 새마을동산'을 조성했다. 2001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국회의원 시절 이곳을 방문하기도 했다. 홍 이사장은 "가뭄이 되면 가끔 수몰된 마을에 들어가 당시의 증거가 될 만한 것을 찾아본다"면서 '방음동 농업협동조합'이라고 적힌 머릿돌은 하나 건졌다"며 웃었다.
경북에만 그런 인물이 있는 것도 아니다. 1969년 장호원단위조합을 창설한 이재영씨는 경복고를 졸업하고 농촌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경기도 이천 장호원 출신으로 서울시학도연맹회장까지 맡았을 정도로 모범생이었지만, 2학년 때 모친이 세상을 떠나자 대학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문맹 퇴치, 도박 근절, 협동조합운동 등을 펼친다.
이처럼 이미 곳곳에서 1960년대를 기점으로 농촌재건운동이 펼쳐지고 있었던 것을 고려하면 '발상지'를 찾는 게 무의미하다는 시각도 있다. 새마을운동의 이념 자체에 농민의 '자조'가 들어가 있는데, 박 전 대통령을 지나치게 신격화하면서 농촌지도자들의 노력을 격하하는 꼴이 되는 소모적인 논쟁이라는 것이다.
사실 청도 신도마을을 둘러싼 발상지 논쟁은 일찍이 소송전으로도 비화된 바 있다. 2009년 경북도가 새마을운동의 발상지를 청도 신도리라고 주장하자, 포항시가 '포항 문성리가 새마을운동의 발상지'라고 반발하고 나섰다. 급기야 문성리 주민들이 '새마을발상지'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대구지방법원에 사용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는데, 법원은 이를 기각했다.
'그들의 새마을운동'을 펴낸 김영미 국민대 교수는 2011년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발상지 논란에 대해 "그게 뭐가 중요한가. 그렇게 되면 새마을운동은 정말 (민중이 아닌) 박정희의 역사가 된다"고 지적했다.
홍택정 이사장은 "신도리가 정말 발상지라면 지도자가 누군가 있었을 거고, 그 사람이 어떤 화제의 중심에 섰어야 하는데 그게 전혀 없다"며 "지난해 윤 전 대통령도 영남대를 방문해 신도마을을 발상지라고 운운했는데, 역사를 왜곡하다 보니 대통령까지 바보로 만들게 된다"고 꼬집었다.
홍영기 선생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만나서 했던 말도 새마을운동의 '자조'를 강하게 시사한다. 그는 "새마을 사업이 아니었더라면 대대로 이어온 가난의 때가 적셔진 초가지붕을 영원히 개량할 길이 없었다"고 말하면서도, 박 전 대통령이 "귀관은 새마을 지도자를 자원했는가"라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제가 새마을 지도자가 된 것은 자원도 아니고 선임된 것도 아닙니다. 나도 모르고 동민도 모르는 사이에 새마을 지도자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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