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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9

올곧음과 교조주의 사이에서, 『비운의 혁명가 박헌영. 고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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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곧음과 교조주의 사이에서, 『비운의 혁명가 박헌영』
고준석, 유영구 옮김, 1992

 Naturalist ・ 2021. 1. 11.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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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민지 조선의 사회주의 운동 특히 조선공산당 건설과 재건 과정을 살펴보며, 더욱 더 박헌영의 ’남로당’까지 이어지는 어떤 부정적 종파성의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과연 혁명가로서 박헌영은 어떤 존재인지를 확인해 보고 싶어서 책을 집어 들게 되었다.



- 이 책은 식민지 시기 일본에서 민족해방투쟁을 하다 옥고를 치렀고, 해방 후에는 ‘남로당’ 그리고 월북 이후에는 ‘조선노동당’에서 활동했던 고준석 선생의 회고담에 가까운 박헌영 평전이다. 

다만 박헌영의 일상적 삶보다는 그가 보여주었던 정치 노선에 대한 평가들이 더 많이 담겨 있어 평전이라기보다는 노선에 대한 비판서에 가까운 느낌도 있다. 그렇기에 저자의 정치 노선이 문제가 될 것이다. 내용에 비춰 보면 남로당 시기에는 박헌영 노선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한국전쟁 이전에 이미 북한의 조선노동당과 선을 대고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조선노동당의 남조선정치공작위원회 위원으로 남한에서 활동하다가 일정 시점에 일본으로 탈출해 이후에 조선 사회주의 운동사와 해방 후 좌익 활동에 대한 많은 연구서를 출판하고 있다. 아마도 그런 그의 입장이기에 단순한 평전이 아닌 정치 노선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 개인의 기억에 의존하고, 이 책이 처음 출판된 1991년 상황에서 국내 연구의 결과물 역시 충분하지 않았기에 해방 이전의 조선공산당 건설 투쟁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은 많이 부족하다. 하지만 해방 이후의 개인적 경험들은 꽤나 흥미롭다. 저자가 보기에 해방 이후 박헌영은 한 편으로는 최고 지도자로 자기를 내세우기에 여념이 없었고 (개인 저작을 출판해서 보급하는 등의 활동), 다른 한 편으로는 모든 사회주의자의 통일에 기반한 조선공산당 재건이나, 민족주의자와의 연대를 통한 통일전선의 필요성 모두에 대해서 부정적 태도를 보이며 자신과 함께 했던 ‘경성꼼그룹’ 등의 소수 인원들과 사업을 결정했다고 한다. 이런 태도가 결과적으로 조선공산당 건설 그리고 이후 여운형의 조선인민당, 백남운의 신민당과의 3당 통합에 있어서도 당내 갈등과 분열을 만들어냈으며, 남로당의 고립을 가져왔다고 평가한다. 특히 ‘9월 총파업’과 ‘10월 인민 항쟁’을 시작으로 해서 본격적인 좌편향이 발현되어 결과적으로 한국전쟁 이전 남한의 혁명 세력을 사실상 괴멸로 이끈 책임이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비판한다. 하지만 이런 비판을 내린 저자가 박헌영의 비극적 운명에 대해서도 당연시하는 것은 아니다. 박헌영과 남로당에 대한 북한의 대대적인 숙청에 대해서 저자는 김일성에 의한 경쟁자 제거이자, 한국전쟁의 사실상 패전에 대한 책임 떠넘기기로 평가한다. 그리고 재판에서 말한 그 어떤 범죄도, 박헌영 반대파에 있던 자기의 눈에도 부당한 조작이라는 것을 이야기한다. 그래서인지 저자 자신의 삶에 대한 회한과 박헌영의 최후를 떠올리는 장면들이 묘하게 교차하기도 한다.



- 물론 저자의 내용을 모두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소련의 대표적인 한국학 연구자이자 해방 직후 서울의 러시아 대사관에 부영사 아내였던 샤브쉬나의 회고록이나, 식민지 조선의 대표적인 사회주의 운동가 김철수 선생의 회고에서도 박헌영이 개인적 권력욕에 사로잡혔던 인물로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미 소련은 해방 이후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북한 지역 통치, 나아가 한반도를 영향권에 넣으려는 전략을 갖고 있었으며, 그를 위해 적극적 지원을 했다는 걸 생각하면, 박헌영의 개인적 동기라기보다는 남로당의 헤게모니 확보를 위해서도 적극적으로 박헌영에 대한 ‘우상화(?)’ 활동을 할 필요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김철수 선생의 회고록에서도 보이듯 당시 남로당의 집행부가 보여준 과도할 정도의 패권적 태도들, 다른 정파들에 대한 적대성 등을 생각하면 역으로 이것이 자신들에 대한 과도한 정당화로 이어지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 그보다 문제는 박헌영이 보인 정치 노선에 대한 평가다. 전체적으로 가장 중요한 국면에서 네 가지 사건이 이후 남로당의 급격한 파괴로 이어진 것은 사실이다. 1) 해방 후 조선공산당 재건에서 보여준 ‘경성꼼그룹’ 중심의 철저한 배타성. 2) 미군정의 공세에 맞선 ‘신전략’의 좌편향. 3) 3당 합당을 통한 남조선노동당 건설에서 보여준 배타성. 4) 신탁통치라는 ‘모스크바 3상 회의’에 대해 찬탁이라는 방향을 선택한 것.



- 하지만 이 평가에서는 결정적인 몇 가지 외부 조건이 빠져 있다. 예를 들어 스탈린이 보여준 일방적 의사 결정, 김일성 집권, 북한에서 우선적으로 정권을 세운다는 입장, 한국 전쟁 등등. 그리고 한국 정책을 놓고 벌어진 미국 국무부와 국방부의 충돌, 반공 매파였던 맥아더와 하지의 태도 등등. 이런 상황에서 박헌영이 취할 수 있는 전략적 선택의 폭은 좁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몇 가지 평가는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우선 박헌영이 소련과 스탈린에 대해 보여주었던 맹목적인 충성이다. 물론 그렇지 않을 수 있었을까 묻게 되겠지만 조선의 사회주의 운동에서 보여주었던 많은 활동가들의 독립적 성향에 비춰볼 때도 박헌영의 소련 노선에 대한 추종은 절대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샤브쉬나 여사의 회고록에도 등장하는 부분이다) 또 하나는 철저한 배타성이다. 이는 당을 꺾어지지 않는 강철의 대오라 이해하고, 그에 따라 철저하게 볼셰비키적 당규율을 갖춰야 한다는 믿음의 결과일 수 있겠지만, 그 결과 그는 조선공산당의 전통을 철저하게 ‘경성꼼그룹’에 두고, 그와 다른 활동을 했던 이들 혹은 40년대 최악의 상태로 치닫던 일제의 폭압 속에서 전선 이탈하거나 혹은 수동적으로 전향했던 이들에 대한 극단적 배제로 이어진다. 이런 그의 모습은 이후 통일전선 건설에 있어서도 배타적인 모습으로 일관하는데 민족주의 세력에 대해서 보인 그의 모습은 사실상 35년 코민테른 7차 대회에서 나타난 ‘반제 반파시즘 통일전선’ 노선 이전의 코민테른 전략과 유사해 보인다. 철저하게 프롤레타리아트 헤게모니를 관철할 것, 밑으로부터의 통일전선이라는 7차 대회 이전의 전략은 좌편향으로서 국제 사회주의 운동에 큰 해를 끼친 바 있다. 그럼에도 박헌영은 통일전선을 논하면서 철저하게 배타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그가 정황의 변화나 전략 문제에서의 교훈을 충분하게 수용할 수 없었던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니게 된다. (물론 박헌영은 7차 대회 시기 감옥에 있었으나, 감옥 안에서 코민테른 주요 문헌을 보거나 들어 숙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 다행히 박헌영에 대해서는 아홉 권으로 『박헌영 전집』이 출판되어 있으니 이런 평가는 이후 전집을 읽어가면서 확인해볼 문젯거리로 생각해 둘 수 있을 듯.


[출처] 올곧음과 교조주의 사이에서, 『비운의 혁명가 박헌영』|작성자 Naturalist

해방일기 이정우 교수 자료 지원에 감사!

해방 직후 회고록 고준석 - Google 검색


해방일기
이정우 교수 자료 지원에 감사!


이 작업 출범 때부터 이 교수의 서재를 눈독들이고 있었으나 처들어갈 틈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1년 반 동안 대구 갈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벼르고 벼르다가 설밑에 다녀오려 했는데, 이 교수가 급한 일로 상경하는 바람에 무산되고, 이제 겨우 다녀왔다.

이 교수가 대단한 애서가라는 사실은 소시쩍부터 알고 있었지만 수서가로서의 수준은 크게 존중하지 않아 왔다. 내 보기에 쓰레기 같은 책의 비중이 커 보여서였다. 그런데 이번에 이틀동안 그의 서재를 뒤지면서 새로운 생각이 들게 되었다.

그의 서재는 세 덩어리로 되어 있다. 전공서적은 학교 연구실에 있고 교양서적을 아파트의 두 방에 쌓아 놓았는데 한 방에는 역사 관계 서적, 그리고 또 한 방에는 문학 등 다른 교양서적이 들어 있다. 내가 쓰레기 운운 하는 것은 역사 관계 서적을 놓고 말하는 것이다. 이번에 내가 뒤진 것도 물론 그 방이다.

그런데 내 작업에 필요한 책을 뽑다 보니 쓰레기 중에 재활용 가치가 컸다. 애초에 내가 눈독들이게 된 것도 그런 책의 존재 때문이었다. 정치적 입장의 왜곡된 서술, 나는 그저 쓰레기로 여기며 들춰볼 생각도 없던 책들인데, 막상 해방공간의 상황을 서술하는 데는 아주 적합한 것이 많았다. 조병옥은 자기 행동을 어떤 식으로 정당화하고 있었나, 극우파의 움직임을 이해하는 데 그렇게 요긴할 수가 없다.

그런 생각을 하며 독서가로서 이 교수의 자세에 새삼 경의를 느낀다. 그는 쓰레기를 알아보지 못하는 바보가 아니다. 그런데 이런 쓰레기스러운 문헌까지 섭렵해 왔다는 것은 쓰레기를 쓰레기로 대하는 자세가 투철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나처럼 글쓴이에 대한 최소한의 신뢰 없이 글읽기를 힘들어하는 사람에 비해 그처럼 어떤 글이든 그 글에 맞는 자세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독서가로서 윗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47권을 대출하고 2권을 기증받았다. 떠나기 전에 대출목록 작성한 시간이 없어서 목록은 내가 작성하기로 했다. 이 글 밑에 목록을 붙일 것이다. 들고 오기에 너무 많아서 동생 같은 조카 재덕에게 택배 발송을 부탁했으니 일간 받으면 목록을 작성하겠다. 박스에 넘쳐서 몇 권 가방에 넣어 온 것부터 목록 작성을 시작한다.

[기증본]
김성칠 <조선역사> (조선금융조합연합회, 1946 초판본)

[대출본]
오소백 편 <우리는 이렇게 살아왔다: 8-15에서 5-16까지 - 해방 17년 일지> (광화문출판사, 1962)
인촌기념회 <인촌 김성수 전> (인촌기념회, 1976)
조세현 <동아시아 아나키즘, 그 반역의 역사> (책세상, 2001)
김학준 <북한 50년사> (동아출판사, 1995)
金贊汀 <조선인 여공의 노래: 1930년 岸和田방적 쟁의> (岩波書店, 1982)

책보따리가 도착했다.

서대숙 (서주석 옮김)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 (청계연구소, 1989)
중앙일보 특별취재반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앙일보사, 1993)
김영삼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백산서당, 2000)
심지연 <대구10월항쟁 연구> (청계연구소, 1991)
<이강국 연구> (백산서당, 2006)
<역사는 남북을 묻지 않는다> (소나무, 1987)
<이주하 연구> (백산서당, 2007)
고준석 (정범구 옮김) <해방 1945-1950: 공산주의운동사의 증언> (한겨레, 1989)
박갑동 <통곡의 언덕에서> (서당, 1991)
<박헌영> (인간사, 1983)
이인모 (신준영 정리) <전 인민군 종군기자 수기: 이인모> (월간 말, 1992)
로버트 T 올리버 (박일영 옮김) <대한민국 건국의 비화: 이승만과 한미 관계> (계명사, 1990)
A 기토비차, B 볼소프 (최학송 옮김) <1946년 북조선의 가을> (글누림, 2006)
이문창 <해방공간의 아나키스트> (이학사, 2008)
소재영 엮음 <중국-시베리아 미공개 기행문 23선: 간도 유랑 40년> (조선일보사, 1989)
미 국무성 비밀외교문서 (김국태 옮김) <해방 3년과 미국 1> (돌베개, 1984)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엮음 <구술자료총서 1: 내가 겪은 해방과 분단> (선인, 2001)
<구술자료총서 3: 내가 겪은 건국과 갈등> (선인, 2004)
안재성 <이관술 1902-1950> (사회평론, 2006)
정병준 <몽양 여운형 평전> (한울, 1995)
짐 하우스만, 정일화 <한국 대통령을 움직인 미군 대위: 하우스만 증언> (한국문원, 1995)
장병혜, 장병초 엮음 <창랑 장택상 자서전: 대한민국 건국과 나> (창랑 장택상 기념사업회, 1992)
전상인 <고개 숙인 수정주의: 한국현대사의 역사사회학> (전통과현대, 2001)
서중석 <배반당한 한국민족주의> (성균관대 출판부, 2004)
이원순 <인간 이승만> (신태양사, 1988)
와다 하루키 (서동만, 남기정 옮김) <북조선: 유격대국가에서 정규군국가로> (돌베개, 2002)
이만열, 정태헌, 한홍구, 서중석, 정영철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묻다> (철수와영희, 2009)
이철승, 박갑동 <대한민국, 이렇게 세웠다> (계명사, 1998)
김지태 <나의 이력서> (한국능률협회, 1976)
브루스 커밍스 (김동노 외 옮김)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 (창작과비평사, 2001)
남재희 <아주 사적인 정치 비망록> (민음사, 2006)
<언론-정치 풍속사> (민음사, 2004)
문명자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 워싱턴에서 벌어진 일들> (월간 말, 1999)
조병옥 <나의 회고록> (?, ?)
조갑제 <한 근대적 혁명가의 비장한 생애: 박정희 1: 불만과 불운의 세월 1917-1960> (까치, 1992)
김창진 등 엮음 <정계야화> (2책, 홍자출판사, 1966)
선우종원 <회고록: 격랑 80년> (인물연구소, 1988)
최장집 엮음 (한국현대사 1 1945-1950> (열음사, 1985)
이경남 <설산 장덕수> (동아일보사, 1981)
정일형 <오직 한 길로: 항일-반독재 투쟁사> (을지서적, 1991)
구경서 <신익희 평전> (광주군-광주문화원?, 2000?)

출처: https://orunkim.tistory.com/865 [페리스코프:티스토리]

좌우합작의 실패, 대한민국 운명을 바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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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합작의 실패, 대한민국 운명을 바꾸다!

[장석준의 '적록 서재'] <조선혁명론 연구>
장석준 진보신당 정책위원회 의장 | 기사입력 2012.06.29. 18:26:00 최종수정 2014.06.10. 22:47:14






'적록 서재'의 지난 번 글(☞바로 가기 : 그들이 김일성 주체사상에 취한 이유는?)에서 나는 주체사상의 역사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일제하 사회주의 운동사를 다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글의 요지는 남북한 국가의 등장 및 발전 과정에서 패배자의 깃발 정도로 치부되어버린 좌파 민족해방운동과 일제하 민중운동의 염원을 되살려야 한다는 것이었으며, 이들의 이상과 지금 우리의 과제를 잇는 역사의 물줄기를 확인하고 이 연결 고리를 중심으로 현대사를 재구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다시 짚어봐야 할 것이 일제하 사회주의 운동사만은 아니다. 이 탐색 작업은 반드시 해방 공간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식민지 시대 운동의 성공과 실패가 중간 결산된 역사의 커다란 매듭이 바로 이 시기, 즉 해방 직후부터 한국전쟁에 이르는 5년간이었고, 현재 남북한 국가의 기원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해방 전후사를 둘러싸고 역사학계에서 요란한 논쟁이 벌어졌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해방 전후사는 일제하 운동사보다 훨씬 더 긴장되는 작업 주제다. 남북한 국가의 시원이 해방 후 5년사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에 두 분단 국가는 이미 이 시기의 역사 평가를 둘러싼 '정통'과 '이단'의 분류를 분명히 해놓은 상태다. 국가 이데올로기의 어두운 그림자가 이 시기를 재검토하려는 우리의 시야를 가린다.

물론 만주 항일 빨치산이라는 좌파 민족해방운동의 한 분파로 거슬러 올라가는 북한의 순혈주의적 계보에 비해서는, 좌우합작 정부였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따지는 남한 쪽이 좀 더 창조적인 역사 재해석의 여지를 열어놓고 있기는 하다. 뉴라이트는 인정하기 싫겠지만, 이것이 대한민국 헌법 전문의 논리다.

문제는 국가 이데올로기만이 아니다. 분단 국가 내부에서 이를 비판하는 세력들도 해방 전후사에 대해서는 저마다 선과 악의 계보학적 기준을 갖고 있다. 그래서 가령 우리 시대에 중도파를 자처하는 이들은 해방 전후사 평가에서도 그 시대에 '중도'로 분류되던 이들의 손을 들어준다. 비슷하게, 좀 더 급진적인 좌파는 해방 공간에서 '혁명'을 부르짖던 이들을 자신의 정신적 뿌리로 바라보는 경향이 강하다.

간단명료하게 말하면, 중도파는 김규식, 여운형의 좌우합작에서 그 시원을 찾고 좌파는 박헌영의 비극적 실천에 동지애를 느낀다는 것이다. 주체사상파와의 관계에서 보자면, 김일성 편이냐 아니면 박헌영 편이냐가 주체사상파와 다른 좌파 경향을 나누는 기준 중 하나가 된다.

그러나 이런 족보론은 이제 냉정한 역사적 평가에 길을 내주어야 한다. 적어도 좌파의 역사 재해석에서는 이것이 필수 전제다. 역사적 자본주의의 어느 시기에나 항상 가장 '좌'의 입장에 서는 것이 곧 좌파의 올바른 실천 방향이기나 한 것처럼 역사 (재)해석을 이러한 '좌'의 계보도를 그리는 일쯤으로 여기는 것은 전혀 비역사적인 사고방식이다. 이런 사고방식을 그 극단까지 밀어붙인다면, 레닌이나 로자 룩셈부르크조차 족보에서 삭제되고 오직 극소수의 초(ultra)좌익들만 남게 될 것이다.

어쩌면 해방 전후사 인식에서 이렇게 족보학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 점이 주체사상파에 맞선 남한 좌파의 한계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박헌영과 남조선노동당의 계보는 결코 북한 국가의 계보에 맞선 역사 재해석의 대안적 근거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둘은 사실 분단 정권의 수립과 한국전쟁을 정점으로 완전히 수렴된다. 따라서 전자를 토대로 후자와의 차이를 주장한다거나 이를 비판하는 것은 결국 불임의 노동이 되고 만다.

여운형 노선과 박헌영 노선 - 전자가 옳았다

이런 시각에서 나는 1946년~47년, 분단으로 이어지기 직전 2년간 좌파가 추구했어야 할 올바른 실천 방향은 좌우합작이라고 본다. 좌우합작으로 남북통일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미소 양군이 철수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야 했었다. 즉, 박헌영 노선이 아니라 여운형 노선이 옳았다.

'급진' 좌파보다는 '중도' 좌파가 바람직하다는 논리 때문이 아니다. 이 시기의 상황이 이러한 실천을 요구하고 있었다. 당시 한반도 사회를 규정하고 있던 가장 큰 힘은 미국과 소련의 국제관계였다. 이미 1946년이 되면 이 두 나라가 자기네 군대 주둔 지역에 위성 분단국가로 만들려 한다는 정황이 드러나고 있었다. 미군과 소련군의 협상 창구인 미소공동위원회는 공전을 거듭했고, 나름 유능했던 두 정치가인 이승만과 김일성은 각각 분단 정권의 주역이 될 가능성을 저울질하고 있었다.

좌 혹은 우로 치우친 두 국가의 수립은 사회 내부의 계급 갈등이나 좌우 대립을 국가 대 국가의 투쟁으로 전환시킨다는 것을 뜻했다. 국가 대 국가의 투쟁이란 곧 전쟁이었다. 즉 일단 한반도에 두 국가가 수립된다면, 전쟁은 필연이었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이승만과 김일성은 이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결국 실제로 전쟁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참혹했던 전쟁이 '휴전' 상태로 일단락되고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한반도는 준전시체제 아래 있다.

1946년~47년에 인민당의 여운형은 우파의 김규식과 함께 이러한 숙명의 강요에 맞서 마지막 기회를 부여잡으려 했다. 이들은 신탁통치 찬반 문제로 등장한 좌우의 팽팽한 대립 구도를 좌우합작 찬성 세력과 반대 세력의 대립 구도로 바꾸고 미소공동위원회가 좌우합작 찬성 세력들을 중심으로 한 통일 임시정부 수립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려 했다. 그래서 어렵사리 협상을 거듭하여 좌우합작 7원칙을 이끌어냈고 좌우합작위원회를 결성했으며 이러한 노선을 추구하는 새 정당(사회노동당-근로인민당)으로 좌파 전체를 재편하려 시도했다.

물론 좌우합작 시도에도 많은 한계가 존재했다. 가령 1946년 초에 폭발한 우파 진영의 반탁운동에 상응하는 대중적 흐름을 만들어내지 못한 것은 치명적인 한계였다. 좌우합작을 둘러싼 좌파 내부의 논쟁 때문에 1946년 말의 자생적 대중 봉기에 정치적 구심점을 제시하지 못한 것도 뼈아픈 오류였다. 또한 합작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좌파를 분열시키려는 미 군정의 책략, 좌파 지도자들인 여운형, 박헌영, 김일성 사이의 경쟁 등 '불순한' 요인들이 복잡하게 작동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1946년 이후의 박헌영 노선에 비하면 분명 더 올바른 입장이었다. 사실은 1946년 벽두에 반탁운동이 폭발하고 5월에 미 군정의 조선공산당 탄압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조선공산당의 노선 역시 좌우합작에 의한 임시정부 수립이었다. 박헌영 노선과 여운형 노선이 갈린 것은 전자가 도중에 입장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1946년 하반기 이후 박헌영파의 조선공산당과 그 후신인 남조선노동당은 사실상 남북 통일 임시정부 수립을 포기하고 남한 지역의 무장 혁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것이 국민 국가가 이미 존재하는 상황에서 그 내부 사회 세력 간 투쟁의 한 형태로 등장한 무장 항쟁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한반도에는 아직 국민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두 개의 분단국가를 수립하려는 국제적 힘이 작동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남조선노동당은 실질적 지도부를 북한 지역에 두면서 남한의 당원, 지지자들에게 비합법 투쟁을 지령했던 것이다. 이것은 북한의 '인민민주주의' <국가>가 '식민지' 상태의 남한 <인민>을 해방시킨다는 '민주기지론'의 원형을 구축하는 정치 행위였다. 즉, 좌파의 다수파가 분단의 외부 동학에 호응하여 그 내부 동학을 형성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반해 여운형 등의 좌우합작 추진파는 당시 한반도를 지배하던 주요 모순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것은 미소 두 강대국의 세력권 논리와 통일된 국민국가 건설 논리 사이의 대결 구도였다. 이들은 어떻게든 다수의 좌우합작 세력을 구축해 하루빨리 과도정부를 수립해야만 한반도로부터 두 강대국의 지배력을 차단할 수 있다는 것을 절감했다. 비록 실패로 끝나기는 했지만, 이들의 실천은 이러한 올바른 정세 판단과 역사 인식에 따른 것이었다.

여운형 노선의 실상을 파악하는 가장 생생한 방법은 1946년~47년 당시의 1차 자료들을 접하는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좌우합작 노선을 일목요연하게 서술한 문서 자료를 찾기가 쉽지 않다. 여운형 노선의 가장 중요한 대변자라면 결국 여운형 자신이겠는데, 이 사람은 대중 정치가였지 학자나 논객, 저술가가 아니었다. 그래서 남아 있는 1차 자료란 게 다 대담 기록이거나 연설문들이다. <몽양 여운형 전집>(함양여씨대종회 옮김, 한울 펴냄)에 이런 자료들이 망라돼 있다.

하지만 역사학 전공자가 아닌 바에는 이런 번쇄한 자료 뭉치를 읽어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차라리 해방 이후 여운형의 정치적 실천을 자세하게 다루고 있는 정병준의 <몽양 여운형 평전>(한울 펴냄) 한 권을 읽는 게 더 낫다. 저자의 정치적 견해가 너무 깊이 개입되어 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는 있지만 이정식의 <여운형>(서울대학교출판부 펴냄)도 읽어볼만하다.

그러나 여전히 여운형 노선에 대한 당대의 이론적 논설이 아쉽다. 내가 아는 한 이런 성격의 문서로 우리가 구해 읽을 수 있는 것은 백남운의 논설 '조선민족 진로'(1946년 4월 발표)와 '조선민족의 진로 재론'(1947년 5월 발표)뿐이다. 이 글들의 요지는 방기중의 <한국근현대사상사연구>(역사비평사 펴냄)을 통해 접할 수 있다.

2차 자료에 만족 못한다면, 직접 원문을 읽어볼 수도 있다. 심지연이 엮은 <조선혁명론 연구>(실천문학사)에 이 두 글이 실려 있다.

백남운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조선혁명론 연구>는 마치 박현채와 조희연이 엮은 <한국사회구성체 논쟁>(죽산 펴냄)이 1980년대~90년대 초 한국 좌파의 논쟁들을 총망라한 것처럼, 해방 정국의 좌파 논쟁 자료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박헌영의 그 유명한 '8월 테제'도 실려 있고, 근로인민당 강령도 수록돼 있다. 또한 책 앞부분에는 당시의 논쟁 구도를 정리한 논문들이 실려 있는데, 특히 '해방 후 좌익진영 내부의 노선투쟁 분석 ― 조선혁명단계론을 중심으로'가 도움이 된다.

위에 소개한 두 논설의 저자 백남운은 한국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다. 일제 시대에는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있었고, 역사유물론에 바탕을 둔 첫 번째 한국 경제사 <조선사회경제사>(심우성 옮김, 동문선)를 집필했다.

그런 그가 해방 직후 정계에 직접 뛰어들었다. 마르크스주의자이지만 조선공산당에 합류하지 않고 남조선신민당 결성에 함께 했다. 남조선신민당은 일제 말 연안에서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과 함께 일본군에 맞서 싸웠던 독립동맹 세력(일명 연안파)이 1946년에 만든 좌파 정당이다. 독립동맹의 주력은 북한 지역으로 들어와 북조선신민당을 만들었는데, 그 일부가 남한 지역의 정치 사업을 위해 남조선신민당을 따로 창당한 것이다.

백남운이 조선공산당이 아니라 남조선신민당을 선택한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도 당시 조선공산당을 이끌던 박헌영 파에게 거리를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신탁통치를 둘러싼 논란이 일면서 그랬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모스크바 3상 회의 결과를 존중해야 한다는 조선공산당의 입장 자체는 합리적인 것이었다. 당시 여운형의 인민당도 같은 입장이었다. 하지만 박헌영 파는 남한 군중의 정서에 대해 너무 무감각했다. 좌파에 우호적이었던 여론이 하루아침에 반탁과 찬탁으로 양분되는 것을 손 놓고 바라보기만 했다.

반면 신탁통치 문제가 처음 불거졌을 때 백남운이 취한 입장은 좀 독특했다. 3상 회의의 신탁통치 결정이 서울에 알려진 직후인 1945년 12월 30일 명동에서 열린 강연회에서 백남운은 탁치 문제에 대한 연설을 했다. 조선공산당의 반 박헌영 파 활동가였던 고준석은 자신의 회고록 <해방 정국의 증언 : 어느 혁명가의 수기>(사계절 펴냄)에서 이 날 백남운의 연설이 참으로 감동적인 것이었다고 회고한다. 그 요지는 이렇다.

"동포 여러분! 우리 민족은 미국 사람이 먹다 남은 비프스테이크가 아무리 영양 많은 것이라 할지라도 그걸 먹고 싶어 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우리 민족은 소련 사람이 먹다 남은 보드카가 아무리 맛있다 하더라도 그걸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 우리에게는 신탁통치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 우리에게는 미국이나 소련의 감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민족의 자주적인 힘으로 새로운 독립 국가를 건설할 수 있습니다." (<해방 정국의 증언>, 94쪽)

백남운이 보기에는 8·15 이후에도 일본 제국주의와는 또 다른 맥락에서 외세와 한반도 민중 사이에는 모순이 작동하고 있었다. 더구나 그것은 1946년의 한국 사회를 규정하는 가장 중대한 모순이었다. 명동의 연설이 있고 나서 4개월 뒤에 쓴 '조선민족 진로'에서 백남운은 연설의 어조를 반복한다. "조선 민족이 요청하는 정치, 경제, 문화는 연합국의 원수들보다도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조선의 평민이 더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문제를 다음과 같이 정식화한다.

"연합군의 위대한 전승으로 인하여 우리의 민족혁명이 대행된 것은 감사한 일이나 아직 정치 자유를 갖지 못한 이상 완전한 민족해방을 수행한 것으로 볼 수 없으며 그만큼 국제 정치의 영향을 받고 있는 만큼 민족적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뿐만 아니라 정치적, 기술적 방면으로 보아서 자주 독립과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는 현 단계에 있어서는 군사적인 민족혁명의 대상[일본 제국주의 - 인용자]이 해소되어 버린 대신에 정치적인 민족해방의 과제[통일 독립 정부 수립 - 인용자]가 그대로 남아 있다고 보는 것이 가할 듯하다." (<조선혁명론 연구>, 165쪽)

이러한 정세 판단에 따라 백남운이 제출하는 대안은 '연합성 신민주주의'다. '신민주주의'라는 명칭에서 드러나듯, 이 이론은 당시 중국공산당의 마오쩌둥이 제시한 신민주주의 혁명론으로부터 일정한 영향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그 기반은 어디까지나 당시 한반도의 현실이었다. 백남운은 민족해방을 지지하는 일부 유산계급까지 포함하는 좌우익 합작을 통해('연합성') 진보적인 통일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미소 양국군을 철수시키는 것('신민주주의')이 당면 과제라고 제시했다.

이러한 백남운의 연합성 신민주주의론은 곧바로 좌우합작운동의 이론적 기반이 되었다. 현실정치가 여운형이 추진한 좌우합작에 백남운이 이론을 제공해주었던 것이다. 따라서 좌우합작에 반대한 조선공산당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론과는 치열하게 대립했다. <조선혁명론 연구>에는 당시 남조선신민당과 조선공산당 사이에 오간 날선 논쟁이 그대로 실려 있다.

1946년 하반기에 좌우합작을 둘러싸고 남한 좌파는 두 개의 구심으로 양분됐다. 한쪽에는 조선공산당의 박헌영 파가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인민당의 여운형과 남조선신민당의 백남운이 있었다. 여운형과 백남운은 좌우합작 노선, 그러니까 백남운 편에서 보면 연합성 신민주주의 노선에 따라 좌파를 재편하기 위해 공산당 내 반 박헌영 파와 함께 사회노동당을 창당했다. 이 시도가 박헌영 파를 중심으로 한 남조선노동당 창당을 통해 무력화되자 이들은 1947년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를 앞두고 근로인민당을 출범시켰다.

1947년이라면 이미 남한에서나 북한에서나 단정 수립을 피할 수 없다는 절망과 체념이 퍼져가던 시기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때 발표된 백남운의 '조선민족 진로의 재론'은 1년 전의 글보다 훨씬 더 다급한 어조를 띤다.

그는 남한만의 단정 수립이 남한 사회를 제국주의의 경제적 수탈지, 즉 신식민지로 내모는 길이 될 것이라 내다봤다. 이제 좌우합작을 통한 통일 임시정부 수립의 노력은 한반도 민중의 운명을 놓고 신식민지화의 거대한 힘과 막판 경주를 벌이는 형국이었다. 좀 길지만, 백남운 자신의 인식을 그대로 옮겨본다.

"조선의 지정학적 위치와 미, 소 양국의 동양 정국에 대한 정치적 지도권의 제약성과 연결된 점으로 보아서 3상 결정에 의거한 남북통일의 민주정권을 수립하는 것이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민주독립의 길인 것이고, 남조선 단독정권을 수립한다는 것은 '민주독립'의 길이 아니라 특권층이 외래독점자본과 결탁하는 '경제적 지배제' 유도의 확립에 불과한 자본 지배의 독립을 꿈꾸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의 '자본 독립'은 외래독점자본과 결탁함으로써 신형 제국주의 형태인 '경제적 지배제'를 법률화하는 정치 태세임으로 민주사회의 건설에 충용할 '경제 원조'를 특권적으로 영입 악용함으로써 전기한 일련의 반동분자가 신흥 부르조아지로 육성됨을 따라 민족 분열과 내란 유발을 감행하는 팟쇼 정권을 더욱 강화하게 될 것이며 그것은 남북통일의 민주 독립과는 완전히 배치되는 것이다." (<조선혁명론 연구>, 245쪽)

이 글이 발표되고 2개월 뒤인 7월에 여운형이 암살당한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는 성과 없이 끝났고, 분단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근로인민당의 다른 지도자들, 가령 장건상은 이후 남한의 제도 정치에 뛰어들어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기도 하지만, 백남운은 1948년 남북협상을 계기로 월북한다.

결과적으로 박헌영, 백남운 모두 월북한 셈이다. 다만 박헌영이 1946년 '신전술'의 논리적 결론에 따라 분단국가 건설에 적극 참여했다면, 백남운은 연합성 신민주주의 변혁론이 최종적으로 실패했음을 자인하고 분단국가 중 한 쪽을 선택했다고 하겠다.

백남운은 박헌영 계와는 달리 북한에서 숙청되지 않았고, 학계 원로 대접을 받다가 1979년에 사망했다. 하지만 이것은 또 다른 이야기다.




▲ 1948년 8월, 황해도 해주에서 열린 '인민대표자 대회'에 참여한 백남운. (맨 왼쪽) 그 옆으로는 차례로 허헌,박헌영,홍명희다. ⓒko.wikipedia.org

잃어버린 역사적 가능성의 기억

백남운의 글을 통해 우리는 1946년~47년의 좌우합작운동이 흔히 이야기되는 실용적 '중도' 정치의 한 사례만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이것은 당시 한반도 정세의 구체적 분석에 기반한 구체적인 정치 실천이었다. 비록 이 시도도 박헌영 노선과 마찬가지로 실패로 끝났지만, 우리에게 좌파 정치에 필요한 덕목들에 대해 여전히 많은 것을 시사해주는 풍부한 참고 사례임에 분명하다.

더구나 분단 체제의 이후 전개 과정을 돌이켜 보면, 여운형-백남운 노선이 대변했던 역사적 가능성이 더욱 부각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도 전쟁의 상처가 너무 컸고, 지금까지 우리를 내리누르는 그 역사적 짐이 너무나 무겁다. 연합성 신민주주의의 구상은 노동자-민중 세력이 국민국가 건설을 주도하는 그람시적 전망을 얼핏 보여주기까지 했지만, 반세기 넘게 지난 지금 한반도에서는 오히려 노동계급이 독자적인 정치 주체로 등장하기에도 힘에 벅차 하는 형편이다.

너무나 큰 지체다. 너무나 아픈 역사적 가능성의 유실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은 아니다. 역사의 틈이 다시 열리고 있다. 미국 주도 자본주의 질서가 70여 년 만에 그 막바지를 향해 치닫고 있다. 또 다른 전환 시대의 도래다. 이 시대를 제대로 읽어내고 그 항해법을 익히기 위해서도 우리는 우선 지난번 잃어버린 역사적 가능성의 기억을 되살리는 일, 거기에서부터 다시 출발해야 한다.

남북에서 저주받은 박헌영, 이제는 복권할 때

남북에서 저주받은 박헌영, 이제는 복권할 때




남북에서 저주받은 박헌영, 이제는 복권할 때

[손호철의 발자국] 36. 충남 예산 : '한반도의 저주받은 자' 박헌영
손호철 서강대학교 명예교수 | 기사입력 2021.05.28. 09:18:53 최종수정 2021.05.28. 16:54:29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 아프리카 등 식민지를 경험한 사회에 대해 프란츠 파농이 쓴 역사적인 대작의 제목이다. 이 표현을 한반도에 적용해 볼 때, '한반도에서 저주받은 자', '한반도에서 가장 저주받은 자'는 누구일까?

남북한의 적대적 상황 때문에, 남한에서 '빨갱이'로 저주하는 사람을 북한에서는 '혁명열사'로 칭송하고 있다. 반대로 북한이 '반동분자'로 저주하는 사람을 우리 사회에서는 '반공열사'로 칭송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남한에서도, 북한에서도, 저주받은 사람이 있다. 그는 조선공산당의 상징인 박헌영이다. 그는 당연히 우리사회에서 '빨갱이의 괴수'로 저주받고 있다. 헌데 북한도 그를 '미제국주의의 간첩'이라고 저주하며 사형시켰다.


▲ 광화문에 있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박헌영 사진과 설명 ⓒ손호철








한반도에서 가장 저주받았으며, 한반도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복권될 비극적인 인물, 그가 바로 '조선의 레닌'이라고 불렸던 박헌영이다. 한국전쟁 당시 전설적인 지리산 빨치산 부대인 <남부군>을 쓴 이태는 김일성의 남로당 숙청과 관련해, 휴전 후인 1953년 9월 모든 권한을 박탈당하고 지리산을 내려오다가 사살 당한 남부군사령관 이현상을 남북 모두에게 버림받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고독한 사람"이라고 썼다('손호철의 발자국' 17. 전북 남원 지리산, <한국일보> 2020년 11월 30일자). 하지만 이현상은 죽은 뒤에라도 북한으로부터 혁명영웅 대접을 받은 반면, 박헌영은 미제간첩이라는 오명을 썼다. 이 점에서 그는, 한 연구자의 표현대로 '남과 북 모두의 역사적 트라우마'다.



충남 예산군 신양면 의용소방소 옆길로 들어가면 커다란 주차장과 면사무소가 나타난다. 20세기와 함께(즉 1900년에) 가까운 예산군 광시면에서 양반집 서자로 태어난 박헌영이 어릴 때 자란 곳이다. 바로 앞 소시장에서 어머니는 이곳에 오는 사람들을 상대로 엄청나게 큰 국밥집을 운영했다고 한다. 소시장 뒤로 돌아가면 박헌영이 소를 몰고나와 풀을 먹이며 책을 읽던 뚝방길이 나타난다. 여기에서 30리길을 걸어 다닌 대흥초등학교에는 그가 독립운동을 위해 상해로 떠나며 심은 소나무들이 나를 맞았다.




▲ 박헌영이 태어난 충남 예산의 생가 ⓒ손호철
▲ 박헌영이 상해로 독립운동을 하러 떠나며 자신이 다녔던 대흥초등학교에 심은 것으로 알려진 소나무 ⓒ손호철



그는 경성고보(경기고등학교)로 진학해 <상록수>를 쓴 심훈과 동기로 가깝게 지냈고, 3‧1운동에 참가했다. 그는 민족해방과 사회혁명을 위해 사회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 조선공산당 창당 등에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로 인해 구속됐지만, 그가 모진 고문에도 철저하게 조직의 비밀을 지켰고 감옥에서 자신의 대변을 먹는 등 미친 사람 흉내를 내서 병보석으로 석방된 것은 전설이 됐다.



그는 병 요양 차 두만강 근처에 머무르다 국경을 넘어 소련으로 도주, 모스크바에서 체계적인 공산주의 교육을 받았고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그는 혹독한 고문에도 해외로 나간 이유가 정신병 치유를 위해서였다고 버텨 상대적으로 가벼운 형량을 받았다. 1939년 살인적인 감옥생활을 버텨 만기출소한 뒤 그는 광주 벽돌공장 노동자로 위장해 생활하며 자하조직 재건을 모색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 감옥에서 미친 척을 해 석방된 뒤 해외로 도주, 독립운동을 하다가 1933년 상해에서 잡혀 서울로 압송되는 박헌영



해방과 함께 조선공산당이 재건되자, 당연히 박헌영은 최고지도자인 책임비서에 선출됐다. 박헌영은 당대 최고의 이론가이자 조직가였지만 대중적 정치인 스타일은 아니어서, 일반 대중들에게는 이승만, 김구와 같은 명성이나 여운형과 같은 인기를 얻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해방 1년 뒤인 1946년 8월 미군정이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 중 자본주의 지지는 14%에 불과한 반면 70%는 사회주의를, 7%는 공산주의를 지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박헌영이 이끄는 조선공산당은 노동자들과 농민들의 조직인 전평과 전농을 거느리는 등 가장 잘 조직된 대중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그 결과 미군정은 1947년 사회주의를 저지하지 않으면, 그가 남한의 대통령이 될 우려가 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아니 그는 남한만이 아니라 남북을 포괄하는 조선공산당의 최고지도자였다. 해방 직후 김일성이 박헌영과 처음 만났을 때, 38선 북쪽에 공산당 분국을 만들고 싶다고 부탁할 정도로 김일성보다 위에 있었다.


▲ 해방정국에 박헌영이 여운형과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 1948년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한 박헌영이 김일성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그러나 이 모두는 거대한 역사적 흐름을 거스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이승만과 김일성은 승자로, 박헌영은 비극적인 패자로 귀결되고 말았다. 물론 이렇게 된 데에는 격동하는 해방정국의 정세를 잘못 판단하는 등 그의 주체적인 대응에 일정한 책임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구조결정론'이란 비판을 받을지 모르지만, 미국과 소련이 각각 남한과 북한을 분할 점령하고 체제 대립으로 치닫기 시작할 때, 그의 혁명은 시작부터 실패하도록 결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예전에는 '역사에 가정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요즘 들어서는 우연적 사건이 역사의 방향을 바꾸는 중요한 계기들이라는 시각에서 역사적 가정을 내세운 분석들이 유행하고 있다. 만일 북한을 미국이 점령하고 남한을 소련이 점령했다면 어찌 되었을까? 당연히 남한의 승자는 박헌영이, 북한의 승자는 조만식 등 우파인사 누군가가 됐을 것이다.



한반도에서 미국의 목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한 혁명을 막고, 좌파지지 여론이 근 80%에 달하는 남한의 민심을 분쇄해 친미적인 우익정부를 세우는 것이었다. 미국의 공식적인 군정사는 "질서 있고, 효율적으로 움직이며, 정치적으로 우호적인 한국이 한국민들을 기쁘게 하고 이들의 적극적인 협력을 얻어내는 것보다 중요했다"고 쓰고 있다. 따라서 박헌영이 이끄는 좌파운동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자신들이 신탁통치를 주장하고 분단을 주도했으면서도 소련이 이를 주도했다는 '가짜 뉴스'를 퍼트려 여론을 오도했고, 박헌영과 조선공산당을 소련의 지시를 받는 신탁통치 찬성론자로 몰아갔다. 또 많은 사람들이 조작이라고 주장하는 위조지폐(정판사) 사건 등을 통해 탄압을 받게 된 그는 북한으로 올라갔지만, 그곳은 소련이 지도자로 선택한 김일성이 지배하는 세계였다.



한국전쟁에서 박헌영의 기반인 남한을 '해방'하는 데 실패하자, 김일성은 이에 대한 희생양으로 그를 숙청하고 처형했다. 그것도 '미제국주의의 간첩'이라는 말도 되지 않는 죄명을 씌워서 말이다. 물론 박헌영은 동지들이 이승만에게 죽어가고 많은 민중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 인민군이 남하하면 "이에 맞춰 20만 명의 지하남로당원들이 들고 일어날 것"이라고 하는 등 '남침'을 적극 주장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점에서, 그는 김일성과 함께 한국전쟁의 비극에 많은 책임이 있다. 그 동기는 이해가 되지만, 한국전쟁은 있어서는 안 되는 민족적 비극이었다.



그러나 그 같은 책임이 '미제의 간첩'이라는 누명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는 '실패한 혁명가'이지 간첩은 아니다. 못된 것만 배운다고, 김일성은 트로츠키를 '서구제국주의의 스파이'로 몰아 숙청한 스탈린에게 배운 것이다. 게다가 이승만은 최대 정적이었던 진보당의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아 죽였으니, 남북한이 똑 닮은 것이다.



'나는 이 자리에 오기 훨씬 전부터 살아 나갈 수 없는 신세임을 느끼고 있었다. 이 재판은 요식일 뿐, 어떠한 최후진술도 너희들의 각본을 뒤집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결론부터 말하겠다. 너희들의 주장대로 나는 미제의 간첩이다. 그러나 너희들이 주장하는 미제 간첩과 내가 주장하는 미제 간첩은 엄격히 다르다. 나는 남조선에 있을 때, 아니 그 훨씬 전부터 미국사람들과 교분이 있었다. 그 교분은 조국의 해방과 독립 통일을 위한 차원이지 결코 간첩 행위가 아니다. 남조선에서 나는 미군정 고위 장성들을 만나 내가 통일조국의 최고책임자가 되면 미국과도 국가정책을 협의할 수 있다고 분명히 밝혔다.'



다양한 경로를 거쳐 전해진 박헌영의 최후진술의 핵심 부분이다. 그러나 북한은 이 중 "너희들의 주장대로 나는 미제의 간첩이다"만 잘라내서 박헌영이 미제의 간첩임을 시인했다고 호도했다.



박헌영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를 따라 북한으로 올라간 남로당(남조선노동당) 계열은 줄줄이 처형을 당해야 했고, 토벌군의 끈질긴 토벌작전에도 살아남은 전설적인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도 지리산에서 박헌영계라는 이유로 사령관직을 박탈당하고 버려져 토벌군에 사살당해야 했다. 그의 아들도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속세를 떠나야한다는 주변의 권유에 따라, 어린나이에 머리를 깎아야 했고, 스님이 된 뒤에도 오랫동안 가족사를 숨기고 살아야 했다(그가 이제는 조계종 원로 의원이자 최고품계인 대종사에 오른 원경스님이다). 게다가 우리 일부 운동권까지도 북한의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해, 박헌영을 미제의 간첩으로 매도하는 한심한 사태가 벌어졌다.


▲ 어머니가 박헌영을 낳은 뒤 독립을 해 큰 국밥집을 하며 박헌영을 키운 신양면 옛 집터를 설명하고 있는 박헌영의 아들 원경스님 ⓒ손호철



박헌영은 조선의 레닌이라고 불리는 공산주의자였지만, 동시에 치열한 독립투사였다, 한 중립적 연구에 따르면, 일제 때 독립운동으로 구속된 사람을 이념적으로 분류하자 90%가 '좌파'일 정도로 독립운동을 주도한 것은 좌파였다. 아니 그는 일제 강점기에 김구, 이승만처럼 외국이 아니라 국내에 남아 활동한 운동가, 특히 일제에 체포되어 혹독한 취조와 고문을 당하고 형을 살고 나온 운동가 중, 끝까지 변절하지 않고 치열하게 투쟁하고도 해방 때까지 살아남은 몇 되지 않는 항일투사 중의 한 명이었다.



박헌영의 평가와 관련, 기이한 사실이 있다. 서슬 퍼런 유신 시절, 갑자기 박헌영의 측근 중 한 명으로 일본에 살고 있었던 박갑동이 <중앙일보>에 남로당과 박헌영 이야기를 연재해 독자들을 의아하게 만들었다. 나중에 박갑동이 밝힌 바로는, 자신의 좌익 경력 때문인지 아니면 김일성을 비판하기 위해서인지, 박정희가 박갑동을 직접 청와대로 불러들여 "박헌영 선생 이야기를 써 달라"(박정희는 '박헌영 선생'이라고 존칭을 썼고 박헌영이 해방 후 발표한 '2단계혁명론'인 '8월 테제'에 감동을 받아 자신의 세계관이 됐다고 말했다고 한다)고 부탁한 뒤 그 앞에서 이건희를 불러 지면을 주고 최고대우를 해주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세상이 민주화되면서, 노무현 정부는 조선공산당도 독립운동에 크게 기여한 것을 인정하고 박헌영의 부인이었던 주세죽, 동지였던 김단야에게 훈장을 줬다. 하지만 박헌영은 자발적 월북, 한국전쟁의 책임 등을 이유로 훈장추서가 무산됐다. 북한의 주장대로 그가 미제의 스파이였다면 훈장을 줬을 것인데 그렇지 않은 걸 보면, 북한의 스파이 주장을 우리 정부도 믿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박헌영과 마찬가지로 자진 월북해 한국전쟁 당시 북한에서 고위직을 지낸 의열단장 김원봉의 예가 보여주듯이, 그의 '법적인 복권'과 서훈은 실증법과 국민정서상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나 영화 '암살'의 흥행과 그가 만든 조선의용대가 국군의 뿌리라는 문재인 대통령의 현충일 추념사, 그리고 그의 고향에 지어진 의열기념관이 보여주듯이, 김원봉은 역사적으로는 복권이 됐다고 볼 수 있다. 박헌영에게 필요한 것은 이 같은 '역사적 복권'이다. 그의 '역사적 복권'은 단순히 박헌영 개인의 복권이 아니라 일제와 해방 공간에서 생명을 걸고 민족해방과 사회혁명을 위해 투쟁했던, 수많은 남로당원 등 '비(非)김일성 계열' 공산주의자들과 '역사적으로 화해'하고 이들을 '역사적으로 복권'시켜주는 것을 의미한다.



북한도 그에게 덧씌운 누명에 사과하고 그를 복권시켜야 한다(참고로, 우리 정부는 이승만 정권이 북한 간첩으로 몰아 죽인 조봉암에 대해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하고 복권시켜 줬다.) 박헌영이 남북한 모두에서 '역사적으로' 복권될 때, 해방 정국의 비극적인 이데올로기 전쟁은 비로소 끝나고 평화가 찾아왔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원수는 갚지 말고 은혜는 갚아라.' 한 때 "북한으로 쳐들어가 김일성의 목을 따서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며 해병대 특수부대인 UDT에 지원했던 원경스님이 주지로 있는 평택 만기사에 들어서면 이 같은 글이 우리를 맞는다. 이곳에는 이정(박헌영의 호)을 추모하는 추모탑이 있다. 탑 뒤편에는 원한을 푸는 탑이라는 의미로 '해원탑'이라고, 좌우에는 '세계일화(一和)', '남북통일'이라고 쓰여 있다.


▲ 조계종 원로 의원에 오른 원경 대종사가 주지로 있는 평택 만기사에 있는 이정 박헌영 해원탑 ⓒ손호철



"손 교수, 이정 선생과 여운형 선생, 이승만 선생 기일이 모두 같은 7월 19일 인 거 아세요?"



탑 앞에서 원경스님이 물었다. 해방 정국에서 좌파, 중도좌파, 우파를 대표하는 세 정치인이 같은 날에 세상을 떠났다니, 놀라운 이야기이다.



"그게 정말이에요?"

"예. 게다가 세 분이 9년 터울로 돌아가셨어요."



여운형이 1947년, 박헌영이 1956년, 이승만이 1965년에 죽었으니, 맞는 이야기이다.



미제의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원통하게 죽어간 박헌영의 해원탑을 올려다보고 있자, 흘러간 옛 노래 '눈물 젖은 두만강'이 들려오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박헌영은 일제시대 정신병자 흉내를 내서 감옥에서 풀려나 부인 주세죽의 고향인 두만강가에서 요양을 하다가 기회를 틈타 강을 건너 소련으로 도주했다. 이 소식이 크게 보도되자, 김용환 시인이 그를 '내 님'으로 은유해서 만든 것이 바로 이 노래라고 한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싣고

떠나던 그 배는 어디로 갔소.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 마침 오늘이 양력으로 박헌영이 태어난 지(1900년 5월 28일) 121년 되는 날이다.


▲ 원경 대종사가 평생 모은 자료에 기초해 최근 출판한 해방정국의 박헌영과 원경스님의 이야기




손호철 서강대학교 명예교수


화가를 꿈꾸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로 진학했다. 독재에 맞서다 제적, 투옥, 강제 징집을 거쳐 8년 만에 졸업했다. 어렵게 기자가 됐지만, '1980년 광주 학살'에 저항하다 유학을 갔고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일하며 진보적 학술 활동과 사회운동을 펼쳐왔다. <국가와 민주주의>, <한국과 한국 정치>,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 등 이론서와 <마추픽추 정상에서 라틴아메리카를 보다>, <레드 로드-대장정 13800KM 중국을 보다> 등 역사 기행서를 냈다.

박헌영…‘미국의 스파이’ 꼬리표를 떼다

박헌영…‘미국의 스파이’ 꼬리표를 떼다

문화책과 생각
박헌영…‘미국의 스파이’ 꼬리표를 떼다
남북이 함께 버린 공산주의자
편견 걷어낸 ‘무덤 위의 청원서’
“비겁자로 살았다는 증언 없어”
기자이세영수정 2019-10-19 11:23
등록 2009-09-04 19:15

〈박헌영 평전〉

〈박헌영 평전〉
안재성 지음/실천문학사·1만8900원

“혁명은 그를 배신했고 몽상은 깨졌지만, 적과 동지가 모두 그를 반역자라고 부르게 되었지만, 적어도 일제강점기의 그는 제국주의에 온몸을 던져 싸운 애국자였다. 해방 후에는 이승만 파시즘에 맞서 민중이 주인 되는 진정한 민주공화국을 만들어보려고 애쓴 민주주의자였다.”



<박헌영 평전>이란 이름이 붙어 있긴 하지만, 이 책은 단순한 인물 평전에 머무르지 않는다. 박헌영이란 실존 인물의 삶을 풀어내는 데 그치지 않고 그와 사선을 넘나들었던 식민지 조선의 좌익 혁명가들, 그들이 살았던 시대의 정치·사회상을 세밀하게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경성 트로이카> <이관술1902~1950> <이현상 평전>을 통해 잊혀진 토착 공산주의자들의 삶을 복원해온 소설가 안재성씨가 썼다. ‘반란의 수괴’도 ‘미제의 스파이’도 아닌 ‘혁명가 박헌영’의 모습을 편견 없이 보여주는 이 책은, 남과 북 모두로부터 배척받은 비운의 공산주의자를 위한 ‘신원(伸寃) 청원서’다. 박헌영에 대한 글쓴이의 약평은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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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길이 남을 위인이라거나 불세출의 영웅이라 찬양하기는 어렵다. 그는 공산주의 이론에는 탁월했지만 선동력과 포용력 등 대중정치가로서 필요한 정치수완은 거의 갖추지 못한 사람이었다. 근본 성품은 온후하고 지성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입장은 다분히 교조주의적이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글쓴이는 무엇보다 그에게 씌워진 간첩 혐의의 억울함을 벗겨내는 데 공을 들였다. 공산주의 신념을 구현하는 데 평생을 바친 박헌영에게 따라붙은 ‘제국주의 간첩’이란 꼬리표는, 그와 생사를 함께한 ‘조선의 혁명가들’ 전체의 삶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글쓴이는 단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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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은 죽는 그날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단 한 마디라도 공산주의에 대해 회의하는 말을 한 적이 없다. 공산주의 내부의 공격과 달리, 그는 일제의 간첩도 미제의 간첩도 아니었으며, 그 어떤 증언이나 기록에도 그가 비겁자로 굴었다는 내용은 없었다. 오히려 우익의 공격대로 철두철미한 소련파였으며 그것이 그의 치명적인 결함의 출발이었다. 그는 오로지 소련공산당과 스탈린이 나눠준 교과서대로 세상을 보려 했다.”

글쓴이에 따르면 박헌영의 간첩 혐의는 남로당계를 숙청하기 위해 김일성 일파가 날조한 것이다. 그가 일본의 첩자였다는 북한 쪽 주장에 대해 글쓴이는 “20년이나 첩자 노릇을 했는데도 돈 한 푼 없이 3차례에 걸쳐 10년의 감옥살이를 했다면 너무 야박한 보수를 받은 셈”이라고 비꼰다. 미국의 간첩이라는 혐의에 대해서도 “박헌영이 접촉한 미국 쪽 인물로 등장하는 이들은 미군 사령관 하지, 미국 대사관 일등서기관 노블, 선교사 언더우드, 육군대령 로빈슨 등 너무 잘 알려지거나 정보업무와 관련 없는 하급 장교들”이라며 “이 미국인들은 박헌영뿐 아니라 조선의 모든 정치가들과 접촉하는 게 임무였다”고 반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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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 재판 이후 주변국 움직임에 대한 기술도 흥미롭다. 박헌영 구명에 적극적이었던 인물 가운데 하나가 마오쩌둥이었다는 사실, 이것이 북한 연안파(친중파)를 고무해 김일성 축출 기도(8월 종파사건)로 이어지고, 결국 박헌영의 죽음을 앞당겼다는 분석도 주목할 만하다. 비판의 화살은 김일성 등 북한 지도부를 향해 겨눠진다.

“공산주의운동사에는 수많은 종파들이 등장하지만, 김일성의 빨치산 파벌처럼 철저하게 배타적인 종파는 존재한 적이 없었다. 특히 지배권력의 세습과 출신성분 구별, 거주이전 통제, 정보통제와 언론·출판·결사의 자유 제한 등은 명백히 봉건시대의 유물이었다.”

그런데 동구권의 붕괴와 함께 공산주의에 대한 사망선고가 내려진 지 20여년이나 지난 지금, 억울하게 죽어간 비운의 공산주의자들의 삶을 새삼 들춰봐야 할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글쓴이의 답변은 이렇다.

“일제하 공산주의자들의 투쟁 목표 속에는 반드시 하루 7시간 노동, 최저임금제 실시, 국민연금과 의료보험 도입 등의 요구가 들어 있었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와 사형제 반대 등의 요구도 필수적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의 역사적 역할을 부정한다면, 오늘의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그들에게 돌려줘야 한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이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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