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29

올곧음과 교조주의 사이에서, 『비운의 혁명가 박헌영. 고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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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곧음과 교조주의 사이에서, 『비운의 혁명가 박헌영』
고준석, 유영구 옮김, 1992

 Naturalist ・ 2021. 1. 11.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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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민지 조선의 사회주의 운동 특히 조선공산당 건설과 재건 과정을 살펴보며, 더욱 더 박헌영의 ’남로당’까지 이어지는 어떤 부정적 종파성의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과연 혁명가로서 박헌영은 어떤 존재인지를 확인해 보고 싶어서 책을 집어 들게 되었다.



- 이 책은 식민지 시기 일본에서 민족해방투쟁을 하다 옥고를 치렀고, 해방 후에는 ‘남로당’ 그리고 월북 이후에는 ‘조선노동당’에서 활동했던 고준석 선생의 회고담에 가까운 박헌영 평전이다. 

다만 박헌영의 일상적 삶보다는 그가 보여주었던 정치 노선에 대한 평가들이 더 많이 담겨 있어 평전이라기보다는 노선에 대한 비판서에 가까운 느낌도 있다. 그렇기에 저자의 정치 노선이 문제가 될 것이다. 내용에 비춰 보면 남로당 시기에는 박헌영 노선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한국전쟁 이전에 이미 북한의 조선노동당과 선을 대고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조선노동당의 남조선정치공작위원회 위원으로 남한에서 활동하다가 일정 시점에 일본으로 탈출해 이후에 조선 사회주의 운동사와 해방 후 좌익 활동에 대한 많은 연구서를 출판하고 있다. 아마도 그런 그의 입장이기에 단순한 평전이 아닌 정치 노선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 개인의 기억에 의존하고, 이 책이 처음 출판된 1991년 상황에서 국내 연구의 결과물 역시 충분하지 않았기에 해방 이전의 조선공산당 건설 투쟁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은 많이 부족하다. 하지만 해방 이후의 개인적 경험들은 꽤나 흥미롭다. 저자가 보기에 해방 이후 박헌영은 한 편으로는 최고 지도자로 자기를 내세우기에 여념이 없었고 (개인 저작을 출판해서 보급하는 등의 활동), 다른 한 편으로는 모든 사회주의자의 통일에 기반한 조선공산당 재건이나, 민족주의자와의 연대를 통한 통일전선의 필요성 모두에 대해서 부정적 태도를 보이며 자신과 함께 했던 ‘경성꼼그룹’ 등의 소수 인원들과 사업을 결정했다고 한다. 이런 태도가 결과적으로 조선공산당 건설 그리고 이후 여운형의 조선인민당, 백남운의 신민당과의 3당 통합에 있어서도 당내 갈등과 분열을 만들어냈으며, 남로당의 고립을 가져왔다고 평가한다. 특히 ‘9월 총파업’과 ‘10월 인민 항쟁’을 시작으로 해서 본격적인 좌편향이 발현되어 결과적으로 한국전쟁 이전 남한의 혁명 세력을 사실상 괴멸로 이끈 책임이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비판한다. 하지만 이런 비판을 내린 저자가 박헌영의 비극적 운명에 대해서도 당연시하는 것은 아니다. 박헌영과 남로당에 대한 북한의 대대적인 숙청에 대해서 저자는 김일성에 의한 경쟁자 제거이자, 한국전쟁의 사실상 패전에 대한 책임 떠넘기기로 평가한다. 그리고 재판에서 말한 그 어떤 범죄도, 박헌영 반대파에 있던 자기의 눈에도 부당한 조작이라는 것을 이야기한다. 그래서인지 저자 자신의 삶에 대한 회한과 박헌영의 최후를 떠올리는 장면들이 묘하게 교차하기도 한다.



- 물론 저자의 내용을 모두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소련의 대표적인 한국학 연구자이자 해방 직후 서울의 러시아 대사관에 부영사 아내였던 샤브쉬나의 회고록이나, 식민지 조선의 대표적인 사회주의 운동가 김철수 선생의 회고에서도 박헌영이 개인적 권력욕에 사로잡혔던 인물로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미 소련은 해방 이후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북한 지역 통치, 나아가 한반도를 영향권에 넣으려는 전략을 갖고 있었으며, 그를 위해 적극적 지원을 했다는 걸 생각하면, 박헌영의 개인적 동기라기보다는 남로당의 헤게모니 확보를 위해서도 적극적으로 박헌영에 대한 ‘우상화(?)’ 활동을 할 필요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김철수 선생의 회고록에서도 보이듯 당시 남로당의 집행부가 보여준 과도할 정도의 패권적 태도들, 다른 정파들에 대한 적대성 등을 생각하면 역으로 이것이 자신들에 대한 과도한 정당화로 이어지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 그보다 문제는 박헌영이 보인 정치 노선에 대한 평가다. 전체적으로 가장 중요한 국면에서 네 가지 사건이 이후 남로당의 급격한 파괴로 이어진 것은 사실이다. 1) 해방 후 조선공산당 재건에서 보여준 ‘경성꼼그룹’ 중심의 철저한 배타성. 2) 미군정의 공세에 맞선 ‘신전략’의 좌편향. 3) 3당 합당을 통한 남조선노동당 건설에서 보여준 배타성. 4) 신탁통치라는 ‘모스크바 3상 회의’에 대해 찬탁이라는 방향을 선택한 것.



- 하지만 이 평가에서는 결정적인 몇 가지 외부 조건이 빠져 있다. 예를 들어 스탈린이 보여준 일방적 의사 결정, 김일성 집권, 북한에서 우선적으로 정권을 세운다는 입장, 한국 전쟁 등등. 그리고 한국 정책을 놓고 벌어진 미국 국무부와 국방부의 충돌, 반공 매파였던 맥아더와 하지의 태도 등등. 이런 상황에서 박헌영이 취할 수 있는 전략적 선택의 폭은 좁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몇 가지 평가는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우선 박헌영이 소련과 스탈린에 대해 보여주었던 맹목적인 충성이다. 물론 그렇지 않을 수 있었을까 묻게 되겠지만 조선의 사회주의 운동에서 보여주었던 많은 활동가들의 독립적 성향에 비춰볼 때도 박헌영의 소련 노선에 대한 추종은 절대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샤브쉬나 여사의 회고록에도 등장하는 부분이다) 또 하나는 철저한 배타성이다. 이는 당을 꺾어지지 않는 강철의 대오라 이해하고, 그에 따라 철저하게 볼셰비키적 당규율을 갖춰야 한다는 믿음의 결과일 수 있겠지만, 그 결과 그는 조선공산당의 전통을 철저하게 ‘경성꼼그룹’에 두고, 그와 다른 활동을 했던 이들 혹은 40년대 최악의 상태로 치닫던 일제의 폭압 속에서 전선 이탈하거나 혹은 수동적으로 전향했던 이들에 대한 극단적 배제로 이어진다. 이런 그의 모습은 이후 통일전선 건설에 있어서도 배타적인 모습으로 일관하는데 민족주의 세력에 대해서 보인 그의 모습은 사실상 35년 코민테른 7차 대회에서 나타난 ‘반제 반파시즘 통일전선’ 노선 이전의 코민테른 전략과 유사해 보인다. 철저하게 프롤레타리아트 헤게모니를 관철할 것, 밑으로부터의 통일전선이라는 7차 대회 이전의 전략은 좌편향으로서 국제 사회주의 운동에 큰 해를 끼친 바 있다. 그럼에도 박헌영은 통일전선을 논하면서 철저하게 배타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그가 정황의 변화나 전략 문제에서의 교훈을 충분하게 수용할 수 없었던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니게 된다. (물론 박헌영은 7차 대회 시기 감옥에 있었으나, 감옥 안에서 코민테른 주요 문헌을 보거나 들어 숙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 다행히 박헌영에 대해서는 아홉 권으로 『박헌영 전집』이 출판되어 있으니 이런 평가는 이후 전집을 읽어가면서 확인해볼 문젯거리로 생각해 둘 수 있을 듯.


[출처] 올곧음과 교조주의 사이에서, 『비운의 혁명가 박헌영』|작성자 Natural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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