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26

고 조승혁 목사 - 운동권을 긍적적으로 평가하지 않은 민주화운동가

연못골 이야기(기획)I will miss your(추모)
고 조승혁목사 10주기 추모 모임
유재무 편집인 | ds2sgt@daum.net



승인 2024.08.24 18:11:57


감리교 목사로 '기사연' 초대 원장 지내



2024년 8월 22일 기독교회관 2층 조에홀에서 고 조승혁목사 10주기 추모행사가 있었다. 별세하신지 10여년이 지나서 공개적으로 열린 추모행사로 준비위원장에 감리교 후배 정명기목사를 위시하여 후진들이 모였다. 조목사님은 해병대 군목 출신으로 일찌기 감리교단 산업선교의 선구자로 조화순목사와 함께 유명하신 분이다. 특히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을 세우시고 초대원장을 지내시며 당시 한국사회의 문제에 대하여 거시적인 접근을 통하여 사회문제 노동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룰 수 없을 때지만 우회적으로 조사 연구를 통한 역사적 사명을 감당한 것이다.

노동상담이나 서구 노동운동 사례연구나 사회운동에 대한 기초적인 연구를 하는 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안다. 윤조덕박사나 이종구, 심상완 교수, 고 황인하등이 이 연구소에서 연구원을 지냈다. 조목사님은 1935년 11월 28일 강화에서 출생하시고, 2013년 8월 27일, 79세로 소천하셨는 데 지난 2022년 부터 고 조승혁 목사 제10주기를 앞두고, 가칭 “추모 사업 준비 위원회” 를 구성하여 오늘에 이른다.

이들은 지난 2023년 8월에는 9주기에는 묘소가 있는 강화도를 참배하였다. 이후 제 10주기 “추모 및 회고하는 글 모음” 을 준비하여 이번에 펴냈다. 한국의 산업선교는 예장이 영등포에서 먼져 시작하고 인천 화수동에서 인천 산선이 사역을 한다. 예장 영등포선선에는 조지송, 인명진목사가 활동을 하였고 감리교는 조승혁 조화순 김동완 박일성 김정택목사가 활동했다. 또 경수산선에 기장의 이규상목사가 활동을 하였고 동서울에서도 이후 성수동에서 기장에서 활동을 한 바 있다.

이날 추모행사에는 감신대 후배 정명기목사가 "조승혁 목사의 선교 신학" 에 대하여 연구물을 발표한 것을 인용한다. 정명기목사는 감신대를 나와 감리교단 최초로 사당동에 희만교회라는 공동체를 통하여 빈민사역을 시작한다. 이후 후배 김달성목사가 이어 사역하다가 지역 개발로 사역지를 옮긴다. 정명기 목사는 이후 안산에서 일반 교회를 개척하여 목회하다가 정년이 되여 은퇴했다 사모 고 강명순사모는 "부스러기선교회" 창립자로 가난한 아동들을 돕는 단체를 설립운영한다. 이런 계기로 한나라당 비례대표 1번으로 추대받아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하였다.




정명기 목사가 회고하는 조지송목사의 사역일기

조승혁목사는 감신 졸업후 해병대 군목을 마치고 인천 대성목대에서 현장노동을 체험하고 산없선교에 투신한다.이후 ‘인천기독교도시산업선교회’와 ‘크리스챤사회행동협의체’ 및 수도권도시선교위원회에서 실무일을 감당하신셨다. 또 감리교본부선교국 총무(1994년 11월-1996년 1월) 일하시다가 ‘한국산업문제연구원’ /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한국기독교산업개발원’/ 노사문제 전문 유관 단체인 ‘사단법인 노사문제협의회’ / 민주시민운동체인 ‘한국사회발전시민실천협의회’/ 가난하고 힘없는 자, 소외자,산업재해자,일하는 여성 노동자를 위한 ‘좋은 친구 산업복지재단’ 그리고 연대운동체인 함께 만드는 ‘아름다운 세상 국민연대’ 출판 운동을 위한 ‘도서출판 정암문화사’ 등을 을 중심으로 47년 동안 10여개 단체에서 주도적으로 선교 운동을 전개하였다고 전해진다.

제대 후 그의 운명을 바꾼 것은 미국감리교 파송 선교사였던 ‘오명걸’(George Ogle, 1929-2020) 선교사와 만나 산업선교에 투신 한 것이다. 그리하여 세계 URM의 룰인 현장노동을 위하여 인천 대성목재에서 노동자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는 목사의 신분이었지만 노동자의 신분으로 그의 위치를 낮추어 새로운 선교현장에 적응을 한 것은 초유의 일이었다.

그런 계기로 당시 카토릭 노동 사목인 가톨릭노동청년회(JOC)도 알게 되고 담당신부들과 교류하게 된다. 그것은 평신도를 중심으로 조직된 소그룹모임이다. 따라서 그는 인천도시산업선교회와 관계된 평신도를 중심으로 모임느헤미야, 카플링 그룹)을 조직하여, 주말마다 열심히 모여서 함께 기도하고, 성경공부를 하고, 노동자들이 겪는 여러 가지 문제를 듣고, 문제가 있을 때에는 함께 해결하려는 노력에 참여하였다.




현장 노동으로 시작한 노동자 선교

그래서 노동자의 현장 속에서 성서의 내용을 새롭게 해석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산업현장에 깊이 관계를 하다보니, 노동자와 기업인을 모두 이해해야 할 필요성도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서강대학교 산업문제연구원, 한국생산성 본부, 그리고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경영학과에 입학하여 노동문제, 노사문제, 경영학 등에 대하여 공부하였다.

나아가 당시 해외교회(일본, 세계교회협의회, 아시아교회협의회 등)와의 교섭과 각종 선교정책협의회에 참여하여 세계교회의 신학적인 동향과 도시산업선교 정책 및 방향 등을 배울 수 있게 된 것이다. 독일의 빌링겐 컨퍼런스(Willingen Conference)이후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개념이 형성되었는대 <교회의 전도>대신 <하나님의 선교>의 개념을 받아들여 산업선교에 선교신학적 이론을 채용하게 되었다(방콕 ‘오늘의 구원’정책협의회, 호캔다이크의 신학 등).

이후 종로 5가로 와 에큐메니칼 선교단체를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하며 미국에도 가 약 10개월 정도 노동사목에 관한 훈련을 한다. 여기서 시카코의 조직운동가인 SD. 알린스키를 만나게 된다. 당시 미국에서 SD. 알린스키가 중심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현장을 돌아보고, 알린스키의 조직방법론을 공부하면서 그는 조직운동가로서 해야 하는 역할의 중요성을 더욱 느낄 수 있었다.




에큐메니칼운동과 조승혁목사

당시 1970년 전후의 상황 톡히 정치 경제적인 상황은 매우 급박하게 돌아갔다. 특히 민중 들이 겪게 되는 사회경제적, 정치적인 상황은 매우 억압적이고 열악했던 때였다. 조승혁 목사는 서울로 오기전 동일방직 에서 여성 노조위원장이 선출된다. 인천 산선은 조화순목사를 중심으로 이창식선생등이 동일방직 노동자운동을 전국화하고 연대 투쟁으로 만든다.

조승혁목사는 종로에서 선배들과 에큐메니칼 조직인 ‘크리스챤 사회행동협의체’ 사무총장을 맡아 신구교의 노동자, 빈민, 청년, 농민, 여성 학생운동 단체를 망라해 13개 단체가 참여하는 조직활동을 한다. 그후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체’ 로 변경하고 사임후 권호경목사가 총무를 맡았을 때 부미방사건에 관여하게 된다.

또 해방후 개신교 최초로 사회적 사건이 된 ‘남산부활절연합예배사건’과 긴급조치 그리고 ‘민청학련사’등으로 수많은 성직자와 학생들이 투옥되는 일들이 많았는 데 이들을 뒷바라지 하기 위하여 한국교회협의회(총무 김관석 목사)와 같이 1975년 4월 5일 "수도권도시선교위원회 선교비 횡령사건"으로 구속되는 시련을 겪게 된다. 또 이후에도 1976년 6월16일 소위 "반공법위반사건"으로 박형규목사와 이규상목사와 함께 감옥에 재차 수감되었다.

이후 ‘한국기독교산업문제연구원’을 창립하여 2년 반 동안 열심히 연구하고 노동자들과 상담하고 노사문제 등에 개입하면서 열심히 운동하고 있을 때, KNCC총무인 김관석 목사와 지도급 인사들이 재정지원단체인 EZE(독일개신교회)의 의견을 따라서 그가 원장으로 있는 ‘한국기독교산업문제원’과 고 ‘김용복 박사’ 가 원장으로 있는 ‘한국기독교학술원’과 통합하여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으로 출범할 때 반대가 있었지만 조목사는 미래를 보고 적극추진했다.

1968년부터 KNCC선교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그러고 NCC의 각종 회의, 연구위원회에 참석하였다. 그리고 1973년부터는 NCC도시산업선교위원회, 인권위원회, KNCC선교위원회 위원장 등 NCC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모임에 참석하여 선교 운동에 관한 자식을 넓혀 갔다. 1974년에는 NCC총회 서기에 피선되기도 했다. 조승혁 목사는 NCC와 관련하여 일본/미국/독일 등의 교회들과 관계를 갖게 되었고, 더 나아가 아시아교회협의회(CCA)와 세계교회협의회(WCC)에서 주최하는 많은 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다.




세계교회와 조승혁목사

1968년에는 아시아교회협의회가 태국 방콕에서 개최한 도시산업선교정책협의회에 참석하였다. 1970년 9월~1971년 5월까지 미국에 가서 시카코에 있는 미국 성공회 도시문제훈련센터(Urban Training Center), 미국 맥코믹신학교(노동과 교회과정), 그리고 루즈벨트대학 노동교육원의 사회변화를 위한 지도자훈련 (Leadeship Training for Social Changing), 알린스키의 지역사회운동기관인 OBA 등에서 이론과 실습 연수를 받게 되었다.

1971년 1월부터 그는 미국 30여 지역의 산업선교, 도시선교기관을 시찰하였고 유럽의 불란서(노동신부), 독일. 이태리 등의 도시와 산업 문제를 다루는 기관, 그리고 아시아지역(싱가포르, 태국, 필리핀 등) 등의 도시산업선교기관과 지역사회운동기관올 시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1973년 12월 28일-1974년 1월 5일까지 태국 방콕에서 셰계교회협의회가 주관한 ‘오늘의 구원’이란 선교정책협의회에도 참여하였다. 1975년 6월애 싱가포르에서 개최한 아시아교회협의회 제5차 총회에 참석하였다-

이 총회에서 얖킴하오 주교 (Bishop Yap Kim Hao)가 상임총무로 선출되었고, 동아시아기독교협의회(EACC)라는 이름이 아시아기독교협의회(CCA)로 변경되었다. 총회 주제는 “아시아인의 투쟁 안에서 크리스찬의 실천”이었다. 그리고 1995년 5월, 스리랑카에서 개최된 CCA총회에 참석하였다. 조승혁 목사는 1978년도부터 아시아 기독교사회단체협의회(ACISCA)의 회원으로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처음에는 서기에서 출발하여 부회장, 회장의 책임을 감당하면서, 1994년까지 활동하였다. 조승혁 목사가 해외 교회와 수행한 연대활동은 1980년 스위스 제네바 세계교회협의회 상호 협조국 탐방올 비롯하여, 1983년 WCC 캐나다 뱅쿠버 제16차 총회(주제: 예수 그리스도 -세상의생명-) 참석, 1991년 WCC 호주 캔버러 제7차 종회(주제 : 오소서, 성령이여- 만물물 새롭게 하소서) 참석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더 나아가 1982년부터 2002년까지 일본에서 개최되었던 ‘평화통일남북기독자대회(2-6차 회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민중통일론’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한국기독교산업개발원’과 회원교회

조승혁 목사는 1984년 10월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을 사직하였다. 이제부터 그가 지금까지 다양한 경험과 선교운동을 통하여 쌓아 올린 역량을 총동원하여 필생에 남을만한 일을 추진하였다. 즉, 정의를 전제로 한 평화와 사랑의 운동체인 ‘한국기독교산업개발원’(이하개발원)을 창립하게 되었다. 개발원 운동의 내용은 민중운동에 역점을 두었다. 개발원의 운동은 민중 속에서 민중과 함께 민중이 주체가 되도록 하였다. 그의 운동의 중심신학은 ‘민중신학’이 되었다. 그리고 구체적 목적은 민중들의 인간화, 민주화, 공동체주의의 실현에 있었다. 개발원 운동은 비기독교사회(교회 밖)에 있는 노동자, 농민, 일하는 여성, 가난하고 힘없는 소외자, 서민, 민주 시민, 즉 민중을 그 대상으로 삼았다.

그는 개발원만 중심으로 운동을 추진하지 않고 함께 연대운동을 할 수 있는 단체, 즉 ‘예산농촌사회발전협의회’, ‘소녀와 일하는 여성운동’, ‘사단법인 노사문제협의회’,‘한국사회발전시민실천협의회’, ‘재단법인 좋은 친구 산업복지재단’, ‘함께 만드는 아름다운 세상 국민연대’등 6개 단체를 조직하여 함께 연대운동을 하였다. 그가 개발원을 중심으로 민중 선교 운동을 전개할 때도 감리교회에 소속한 목회자의 정체성을 가지고 이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기관 목회자로서 특별 파송을 받아 이 사역을 감당하였던 것이다.

그는 교회를 설립하여 목회를 함께 했던 시기도 있었다. 이것이 바로 ‘회원교회’에서 한 목회이다. 회원교회는 감리교단에 정식으로 등록된 교회였다. 여러가지 이유로 기성교회에 적응하여 신앙생활을 하기 어려운 교인들이 회원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는 신앙생활을 함께하였다. 한동안 회원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렸던 한승헌 변호사의 글을 인용해 본다. “내가 이런 저런 망설임 끝에 마음(신앙》에 닻을 내린 곳은 기성교회가 아닌 한 개척교회였는데, 바로 조승혁 목사님이 인도하시는 회원교회(Members Church)였다.

아직은 예배공간으로서의 교회당도 없어서 남대문 근처의 상동교회의 방 하나를 빌려서 예배드렸다. 교인들도 좀 특이해서 해직 기자, 구속된 전력이 있는 ‘빵잽이’들, 운동권 젊은이들, 그들의 가족, 친지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교인수가 많지 않은 대신 열정과 신앙심으로 넘쳐 있었다. 동아일보 해직기자인 서권석, 운동권 인쇄물 제작의 위험을 도맡다시피한 강은기, 기독청년운동의 중심이던 황인성, 노동운동으로 고생하던 황영환 그 밖에 여러분들의 얼굴이 떠오른다.”위의 인용문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조승혁목사는 일반 목회자로서도 손색이 없는 목회를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던 것이다.

조목사는 평생을 노동자 선교를 통해서 민중을 새롭게 발견하였다. 그리고 그들을 섬기고 함께 나누는 삶을 살기를 힘썼다. 조승혁 목사의 민중 이해에 영향을 준 사람 중의 하나가 알린스키(Saul D. Alinsky)였다. 알린스키는 어느 사회든지 ‘가진 자’, ‘못 가진 자’, ‘덜 가진 자’의 세 가지 계급이 있다고 하였는데, ‘못 가진 자’가 민중에 해당되었다. 조승혁 목사의 나눔과 섬김의 삶은 민중 선교로 연결되었다. 민중 선교의 기독교적 배경으로는 제이차 세계대전 후에 세계교회협의회가 지향한 “책임사회론”에서 영향을 받았다. 기독교는 사회속에서 책임적인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1973년 12월 28일-1974년 1월5일 태국 방콕에서 개최된 “오늘의 구원”이란 선교정책협의회의 내용도 조승혁 목사에게 영향을 미쳤다.




조승혁목사의 "뚝심과 리더십"

이종구교수(성공회대 은퇴, 대구경북과기원 겸직교수. 전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연구위원 )

1. 행정력과 뚝심
필자가 기사연(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과 인연을 맺게 된 시점은 1979년 4월 무렵이었다. 서경석 목사의 소개로 기사연에 상근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조승혁 원장, 김용복 부원장, 윤관덕 간사가 있었다. 기독교학술원(김용복), 한국기독교산업문제연구원(조승혁)을 통합 하여기사연이 출범한 직후였으므로 서울 종로3가 초동교회 건물 1층의 작은 사무실은 두조직에서 넘어온 자료로 가득 차 있었다. 조목사와 인사동에 가서 간판 새겨 오고, 낙원동에서 중고가구를 구입해 비치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기사연이 공개적으로 추진한 최초의 대외 프로그램은 “한국내 다국적 기업의 현상과 이해” 를 주제로 이대 인터내셔날 하우스에서 가진 세미나(1979.5.29.)였다. 세미나의 내용은 기독교사상 1979.9월호에 게재했다, 이 프로그램은 김용복 부원장이 제안했으며 발표자는 반병길(서강대), 송기철(고대) 교수였다. 준비 과정에서 필자는 조목사와 같이 강사 섭외를 하러 서강대를 방문했다가 한국노총 출신의 박영기 교수가 주도한 서강대 산업문제연구소의 노동교육, 박홍 신부도 참여한 신구교 연합 사회선교 조직인 크리스챤사회행동협의체의 얘기를 처음 들었다.

처음 진행하는 대외 행사를 관리하며 조목사는 모든 회의 내용의 기록과 문서화, 현장 직접 확인, 사후 정산, 기독교 사상 게재 등의 모든 절차를 조직적 체계적으로 이행할 것을 강조했다. “일은 사무적으로 끝나야 끝나는 것이다” 는 것이 조목사의 일관된 방침이었다. 당시의 민주화 운동권에서는 드물게 조목사는 행정적인 완벽성을 강조했다. 최초의 세미나를 성공시키기 위해 조목사는 직접 목회자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참석을 독려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기사연 발족 초기에 조목사의 지론은 “빤쓰 벗고 뛰어서라도 이 기관을 성공시켜야 한다” 는 것이었다. 즉, 열성을 가지고 몸으로 때울 각오로 일에 몰두하자는 뜻이었다. 실제로 원장, 부원장, 실무자 모두가 기사연의 일상 업무 이외에도 민주화 운동권에서 수시로 발생하는 각종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될 수밖에 없었으니 경황이 없었고 긴장 속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더구나 해외에 국내 정세와 민주화 운동 상황을 전파하는데 사용하도록 각종 영문자료를 만들어야 했다. 물론 해외 교회로부터 에큐매니칼 연대에 입각한 지원을 확보하는데 필요한 영문 서류 작업도 많았다. 결국 초기 기사연 활동이 궤도에 오르려면 조목사의 뚝심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2. 노동상담
1979년에는 아직 예산이 충분하게 확보되지 않아 전담 실무자를 두지 못한 상태에서 조목사가 직접 노동상담 프로그램을 챙기며, 노동 동향을 분석하는 작은 위원회를 운영했다. 이 위원회에는 사용자단체인 조00로 기억되는 한국경영자협의회 간부도 참가했다. 윤관덕 간사가 신문과 통신사 자료를 스크랩하며 정리했다. 노동계의 거목인 김말룡 선생도 기사연의 노동관계 사업을 도왔다. 1979년 초에 간사들이 일제 검거되어 사건으로 초토화된 크리스찬 아카데미에 재직하던 후일에 인하대 교수를 거쳐 노동부 장관을 역임한 이영희 박사도 감당이 안되는 산재 피해 노동자를 기사연으로 보낸 적이 있었다.

스텐리스 양식기 공장에서 일하다가 발을 다친 노동자였다. 기사연도 실무 역량이 모자라므로 필자가 그 노동자를 명동성당 구내에 있는 김말룡 선생이 운영하는 상담소로 안내했다. 그 때 연로한 김선생이 개별 노동자를 직접 챙기며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았다. 유신 말기의 한계 상황에서도 김선생은 할 수 있는 최대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회사 간부에게 성폭행을 당한 버스 여차장의 사건을 조목사가 맡아 가해자를 구속시키고 배상을 받도록 도운 사례도 있었다. 특히 기억에 남는 사건은 장항제련소 노동자들의 집단 납중독 사건이었다. 조목사는 이 사건을 언론에도 알렸으나 대형 정치 사건이 잇달아 발생하는 1979년 후반의 시국에서 여론화는 되지 못했다. 이 노동상담 프로그램 실무자는 출판노련위원장, 한국노총 사무차장을 지낸 조선원 선생, 한국베아링 노동자 출신의 노동운동가인 고 황영환 선생으로 이어졌다.

3. 시국 대응과 국제연대
1979년 4, 5월 어느 날, “국제섬유노련이 동일방직 사건 진상조사단을 파견한다는 소문이있다. 내용을 알아보라”는 조목사 얘기가 있었다. 섬유노련 김승호 교선부 차장에게 도움을 청하자 산업선교 측으로 정보를 흘려보내고 있으니 원풍 방영석 지부장을 만나보라고 귀띔해 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4인으로 구성된 국제섬유노련 조사단이 입국해 조사 활동을 벌이며 동일방직 노동자들도 만났다. 직후에 일본에서 활동하는 하비목사가 기사연 사무실에서 이총각 지부장을 비롯한 동일방직 노동자들을 만나 국제섬유노련 조사단과 주고 받은 얘기를 다시 들으며 내용을 확인했다. 통역을 맡은 필자도 동일방직 사건의 전모를 상세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조목사는 필자에게 해외 선교단체와 주고 받는 연락의 번역이나 외국인방문객의 안내를 맡기게 되었다. 기사연은 국내 민주화운동과 해외의 지원 운동을 연결하는 중요한 접점의 하나였으므로 영어 의사소통 능력만이 아니라 다루는 사안의 내용을 이해하면서도 신뢰할 수 있는 실무자가 필요하였다. 특히 서울대 불문학과를 나오고 장기간 조목사를 보좌한 최선영 선생은 눈에 띠지 않게 해외 연락 업무을 빈틈없이 수행하였다. 최선생은 공식적으로는 기사연에서도 자료실 관리를 맡았으며 수없이 찾아오는 민주화 운동권 활동가, 학생들에게 자료를 제공하는 어려운 일을 무난하게 처리했다.

신민당사 농성 YH여공 강제 해산과 김경숙 열사 사망 사건(1979.8.11.)과 함께 기사연도 대응 활동에 바빠졌다. “YH의 배후는 도산(도시산업선교)이다”, “도산은 용공이다”, “도산이 들어오면 도산한다”는 박정희 정권의 흑색 선전이 각종 언론을 뒤덮고 있는 상황에서 기독교 민주화운동 측도 반론을 펴야 했다. 우선 급한 일은 급변하는 정세를 파악해 기독교 운동권내부에서 정보를 공유하는 일이었다. 기사연 간사들은 경찰에 연행돼 시달리다가 풀려나온 산업선교 회원들을 만나 심문 방향과 진술 내용을 파악하고, 언론사를 통해 정권의 움직임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이때 민주화 운동의 입장을 이해하는 소수의 현직 언론인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헌신적으로 도와 주었다.

또한 산업선교와 관련된 노동문제에 대한 사례집을 기사연이 주도적으로 만들었다. 이 자료가 공식적으로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도시산업선교문제 대책위원회”가 발행한(1979.9.15.) “도시산업선교문제 조사보고서 – 불순세력 운운 문제를 중심으로-”이다. 이 대책위원회는 사실상 조목사가 주도해 조직했다. YH사건은 김영삼 신민당 총재 제명, 부마항쟁, 10·26으로 이어져 박정희 정권의 붕괴로 이어졌다. 민주화 운동권은 축제 분위기였다. 그러나 10·26 직후에 열린 기사연 내부 업무회의서 조목사는 “정세가 간단하지 않다. 박정희 덕분에 잘살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교회는 겸손해야 한다.”는 냉정한 판단을 제시했다.

김용복 부원장이 연행되어 곤욕을 치른 YMCA 위장결혼식 사건(1979.11.24.)이 발생했을 때도 조목사는 “교회가 현실 정치에 지나치게 개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신중한 입장이었다. 12·12, 5·17로 이어지는 격동은 조목사의 시각이 현실적이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기사연은 시국 대응 활동을 하면서도 본업을 챙겨야 했다. 1979년 후반기에는 장동찬 선생이 고향인 충남 예산군 오가면 구억말 지역에서 시작한 농촌운동에 대한 독일 교회의 지원을 확보하기 위한 기획서를 작성하는 일이 있었다. 장선생은 인천제철 노조지부장, 한국노총교선부 차장을 지냈으며, 1973년에 발생한 고대 노동문제연구소 김낙중 사건의 여파로 한국노총에서 해직된 이후 조목사의 권유로 귀향하여 농촌운동을 시작했다.

조목사는 장선생을 여러 농촌 전문가 및 독일교회에 소개하여 지원네트워크를 만들었다. 구억말 사업은 협업농방식을 도입하여 산업화 과정에서 해체되는 농촌의 재활성화를 추진하는 내용을 가지고 있었다. 독일의 지원기관도 성공적인 농촌 개발 모형을 찾고 있었다. 현지의 홍성찬 교수를 비롯한 예산농전 교수들도 사업에 협력하였으며 농업경제학을 전공한 건대 김병태 교수도 자문에 참가하였다.

3. 신군부와 공개 운동 현장
1980년 5월 17일 밤에 전두환의 신군부는 계엄령을 확대하여 정권을 탈취하고, 이에 항거하는 광주 시민을 학살하였다. 기사연도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이미 토요일인 5월 17일 오후부터 이상한 조짐이 있었다. 오후 3~시쯤에 걸려온 전화를 받으니 어느 젊은 남성이 급한 목소리로 이대에 학생회장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있다가 경찰이 습격해 흩어졌다면서 이 소식을 널리 알려 달라는 부탁을 했다. 이 소식을 몇 곳에 전하고 있는데 갑자기 이상한 일이 생겼다. 전화를 받으니 어느 여자가 두서없는 넋두리를 퍼붓고 있었다. 아무리 끊으라고 해도 끊지 않았다.

수화기를 내려놓았다가 다시 들어보면 여전했으니 전화를 사용할 수 없었다. 그날 자정에 선포된 계엄령 확대 조치와 함께 이종원 간사는 연행되었고 김용복 부원장은 잠적했다. 자문위원으로 협력하던 교수들도 곤경에 처했다. 한완상, 유인호, 이문영 교수는 구속되었다. 변형윤, 탁희준, 서광선, 현영학, 장을병, 이만열, 이효재 교수 등은 해직되었다. 기사연과 관계가 있는 교수들은 대부분 해직 교수가 되었다. 서울대에서 해직된 김진균 교수는 당시에는 기사연과 관계가 없었지만 1982년부터 많은 사업을 같이하게 되었다. 보안사와 정보부 요원들은 출근하다시피 드나들었다.

광주 항쟁 직후의 엄혹한 한계 상황에도 불구하고 조목사는 ”이 기관이라도 지키는 것이 지금 할 일이다“라고 독려하며 버티었다. 그해 2월에 기사연은 초동교회에 있던 옹색한 사무실을 떠나 평창동에 큰 2층 양옥집을 네델란드 교회가 주선한 원조 자금으로 구입해 사옥을 마련했는데 아직 입주식도 못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조목사는 네델란드 대사를 비롯한 내빈들을 초대하여 입주식을(1980. 6. 17.) 가졌다. 어차피 사회 현실을 직접 다루는 일은 할 수 없으므로, 기사연은 “한국교회100년 종합조사”에 주력하기로 했다.

신변 문제가 일단 정리된 김용복 부원장이 업무에 복귀하고, 미국 교회협의회를 통해 연구비를 주선한 재미 사회학자 김병서 교수가 방한하여 조사연구 작업의 윤곽이 확정되었지만 문제는 실행이었다. 계엄사
검열반에 설문지를 가지고 가서 “검열필” 스탬프를 받아 경찰이 방해할 여지를 없앴지만 전국에 산재한 교회와 목회자의 협조를 얻는 일이 남았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가맹하지 않은 교단도 조사연구의 대상이었으므로 조목사는 일단 모든 개신교 교단에 공문을 보내고 설명회를 개최했다.

교단 대표들이 모여 회의를 열자 치안본부부터 시작해 여러 단위의 정보 경찰들이 몰려 왔으나 조목사는 계엄사에서 허락받은 일이라고 버티며 돌려보냈다. 조사 과정은 간사들이 지역을 나누어 설문지를 가지고 전국의 교회에 배부하고 회수하는 수밖에 없었다. 여러 교단의 신학교도 직접 찾아가 커리큘럼을 비롯한 현황 자료를 입수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사실상 한국에서 개신교 교회, 목회자, 평신도를 대상으로 실행된 조사의 결과는 후일에도 종교 연구자들이 참조하는 기초 자료가 되었다.

기사연은 당시의 경험을 기반으로 1981년에는 비기독교인의 교회에 대한 태도를 알아보는 조사도 실시했다. 기사연은 정보기관의 주요 감시 대상이었다. 조목사는 수시로 드나드는 각종 기관원을 상대해야 했다. 당시에 기관원 가운데는 무조건 감시와 탄압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극한 대결을 회피하기 위해 민주화 운동권과 최소한의 대화 통로를 유지하면서 의중을 탐색하는 작업을 하는 부류가 있었다. 이들은 공개 활동을 하는 재야 운동, 기독교 민주화 운동 조직에 접근했다.

공개 활동을 해야 하는 기사연 원장인 조목사는 기관원들을 마냥 물리칠 수는 없었으며, 때로는 사태의 악화를 막기 위해 정부 측과 대화를 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 하소연하기도 어려운 악역까지 해야 하는 조목사의 애로 사항을 이해하지 못하는 원칙주의자들이 민주화 운동권 내부에는 당연히 많았다. 조목사의 민주화 운동을 정당하게 평가하려면 이와 같은 거북한 측면도 얘기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조목사도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면서 상대해야 하는 기관원들의 연락을 부담스러워 했으며, 만나고 온 다음에는 대부분 언쟁으로 끝났다는 얘기가 많았다.

반면에 중앙정보부에서 1970년대에 남북대화를 관장하는 국장을 지내고, 김대중 정부에서 통일부 장관을 역임한 강인덕 박사와 조목사는 각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해병대 군종 장교 시절에 조목사는 외대 러시아어과를 졸업한 간부후보생 동기로 정보장교였던 강박사와 평생 신뢰 관계를 유지하는 친구가 되었다. 중앙정보부 시절에 강박사는 조목사가 사소한 일로 사상적 시비에 걸렸을 때 오해를 풀어준 적도 있었다.

인천산선 시절에 조목사가 산재 관련 포스터 문제로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었을 때 빨갱이로 몰며 구타하는 수사관에게 “강인덕국장에게 물어보라”고 항변하자 잠시 후에 풀려났다. 군사정권과 재야 민주화 운동 내부에서 중요한 실무적 책임을 맡고 있던 두 사람은 양측의 극한 대립이 초래할 파국을 막으려면 민주적 질서를 복원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공유하고 있었다. 유신 시절에 조목사는 강박사와 대화하며 대국적인 정세의 흐름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4. 현장 중심 사고와 민주주의 지향
기사연에는 교수 등 전문가와 현장 활동가들이 함께 참석하는 각종 회의가 많았다. 험악한 시국에 무거운 주제를 가지고 격론이 벌어져 마무리가 잘되지 않으면 조목사는 의례 실무자 얘기를 듣자고 제안하였다. 즉, 조목사는 현장을 기준으로 판단하자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으며, 민주화 운동을 논의할 경우에도 명분보다 실제 상황을 중시했다. 황영환 선생에 대해서 도 공식적인 상담 활동보다 눈에 띄지 않게 노동자를 만나 소집단을 조직하고 다니는 일을 높게 평가했다.

크리스찬 아카데미 사건에 대해서도 “현장에 들어가지 않고 머리로만 운동을 하려고 했다”는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투쟁보다 조직 건설을 중시하는 현장 중심 사고 때문에 조목사는 정권과 직접 대결하는 정치투쟁을 회피하는 온건론자 또는 타협론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이러한 시각과 입장의 차이는 민주화 운동에 대한 인식이 사회 상황과 세대에 따라 달라지고 있었다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조목사는 시민의 기본권이 보장될 수 있도록 의회민주주의를 복원하는 것을 민주화 운동의 목표로 생각하고 있었다.

교단, 정당, 공개활동을 하는 각종 사회조직의 리더십을 민주화 운동 세력이 장악하는 것을 중시한 조목사와 비합법 지하활동을 강조하는 1980년 5월의 광주항쟁 이후에 형성된 운동권은 대화가 통하기 어려웠다. 
광주항쟁을 계기로 민주화 운동권 내부에는 미국이 군사정권을 용인하는 상황에서 평화적 방법에 의한 민주 회복은 무망하며 통일이 먼저라는 주장이 퍼지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기층 민중의 투쟁에 의한 사회체제의 근본적 변혁을 지향하는 세력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반면에 조목사는 1980년대에 학생운동 출신 활동가들이 대거 노동운동에 참여해 전개한 사회변혁적 노동운동만이 아니라 1987년 이후에 급속하게 확산된 민주노동운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았다.

실제로 조목사가 1984년 10월에 기사연을 사직하고 새로 시작한 기독교산업사회개발원을 비롯한 사회 활동은 민주화 운동권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진행되었으며, 오히려 한국노총 계열 노동계 인사들과 연계되는 경향도 나타났다. 반면에 군사정권은 조목사를 여전히 경계하고 있었다. 필자의 개인적 체험을 소개하면 1990년 11월에 노동부 산하 국책연구기관인 한국노동연구원에 지원했다가 채용을 거부당한 일이 있었다. 노동법 교수인 손모 원장이 거론한 중대 결격 사유의 하나가 조승혁 목사와 같이 활동한 전력이 있다는 것이었다.

5. 선각자와 역할 모델
필자는 1982년 연말까지 기사연에서 일하다가 1983년 1월에 일본으로 떠나 대학원 과정을 시작했다. 1984년 3월 초에 일시 귀국해 기사연에 들르니 마침 통일문제 세미나 사건으로 구속되었던 조목사의 석방을 축하하는 회식이 있는 날이었다. 조목사는 건강한 상태였다. 출판 책임자인 최민화 선배는 석방 운동을 하느라 오랜만에 몸을 풀었다고 농담을 던지고 있었지만 새해 첫날부터 험한 일을 해내느라 동분서주하며 고생한 티가 역력했다. 유학을 마치고 1990년 9월에 귀국했을 때 이화동에 있는 노사문제협의회 사무실에 찾아가 인사한 다음에는 한동안 조목사와 연락이 뜸했다.

다시 조목사와 일 관계로 만나게된 시점은 2002년 6월이었다. 성공회대 노동사연구소가 노동부의 지원을 받아 수행한 “1970년대 산업화 초기 한국노동사 연구-노동운동사를 중심으로-”라는 과제 때문에 협력을 요청하자 조목사는 기꺼이 승락하고 성공회대를 방문해(2002.6.21.) 상세한 구술 증언을 제공했다. 2004년 2월에는 처음 들어보는 “한국사회발전시민실천협의회”라는 곳에서 원고 청탁을 하는 전화를 받았다. 단체의 성격을 묻자 조승혁 목사가 책임자로 있는 시민단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즉시 전화를 바꾸게 해 오랜만에 인사를 나누었다. 조목사는 “개혁시대”의 편집위원을 맡아 달라는 요청을 했다. 방송통신대 근처에 있는 사무실에 갔다가 기사연에 근무했던 최선영 선생과 오랜만에 재회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필자 겸 편집위원으로 조목사의 여러가지 일을 돕게 되었다. 편집회의를 마치고 식사를 할 때 조목사는 기사연 시절에 교수들과 같이 활동하던 시절을 자주 회상했다. 2008년 5월에 “개혁시대” 마지막 호를 발행하며 종간사 집필을 맡은 필자는 “한 시대가 마감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군사독재의 후유증을 설거지하는 개혁 과제를 찾기 어렵게 된 것은 분명히 좋은 일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듯이 새로운 운동과 새로운 사람이 등장해야 한다”고 마무리했다.

이 글에서 돌이켜 본 바와 같이 목회자, 노동운동가, 사회운동가로서의 조승혁 목사는 산업화 초기와 군사정권 시절에는 분명히 선각자이며 기독교 민주화 운동의 리더였다. 조목사의 신앙, 사회의식, 행동방식은 민중을 존중하는 민주사회라는 이상향을 지향하고 있었다. 
  • 1980년대에 분단이라는 민족 모순과 격화되는 계급 갈등의 해결을 지향한 사회변혁적 사회운동과 조목사 사이에는 간격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신앙과 신념에 충실하며 사회개혁에 평생을 매진한 조목사의 발자취는 한국 교회와 사회가 존중해야 할 중요한 유산으로 남아있다. 특히 엄혹한 군사정권 시대에 조목사가 발휘한 뚝심과 의지의 리더십은 정체성 위기에 빠져들고 있는 현재 한국의 개신교 지도자들이 본받아야 할 역할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고 조승혁목사 기념사업회 발기 취지문


고 조승혁 목사님은 1935년 11월 28일 강화도 내가면에서 출생하여 2013년 8월 27일 79세에 소천하셨다. 살아생전에 노동자, 도시빈민의 인간다운 삶을 위한 노력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정의와 민주회복을 위해 헌신과 희생, 섬김과 나눔의 삶으로 일관하셨다. 이와 같은 실천을 하기 위해 군 제대 직후인 1962년 9월부터 인천 대성목재공업(주) 미건 조장에서 1년 4개월간 성직자가 아닌 노동자로서의 삶을 시작하였다.

이 실천 경험을 바탕으로 인천도시산업선교회 총무로 1973년 3월까지 10년간 산업 현장 노동자들의 삶 그것도 가난하고 힘없는 노동자들이 기업의 횡포에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상황에서 삶의 질의 향상과 하나님의 의를 실현하는 노동 사역을 하셨다. 이후 인천 지역을 떠나 서울에서 1973년 3월부터 크리스챤사회행동협의체 사무총장, 수도권 도시선교회 총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도시산업선교위원회 위원장, KNCC 인권위원회 부위원장, 노동법개악반대투쟁위원회 위원장, 회원교회 담임목사 등의 소임을 맡아 도 시주민 판자촌 철거반대 및 이주 정착지 마련, 유신체제 하에서 정의와 민주회복, 언론탄압 반대, 구속자 석방, 노동법 개악 반대 운동 등을 조직화하는 과정에 75년〜76년에 두 차례의 옥고를 치르셨다.

기독교계 측면에서 사회문제의 체계적인 연구와 대책 강구를 위해 1979년 한국기독교사회 문제연구원 설립, 등 소천하실 때까지 여러 기구의 설립‧운영을 통해 전문가들을 양성하여 사회변화에 대응하셨다. 고 조승혁 목사님의 10주기(2024년 8월 26일)에 이상과 같은 커다란 섬김과 나눔의 삶에 대해 고인과 관련이 있었던 사람들이 모여 회상하고 고인의 뜻을 기리는 추모사업을 조직하 기 위한 발기인 모임을 발족하고자 한다.

2023년 5월 24일
발기인 일동 (실명 서명)
※ 발기인(18명): 강은식, 김기석, 김정택, 문석진, 박경진, 박병섭, 박효원, 송광용, 윤조덕,
이래경, 이종구, 임화진, 정명기, 정창균, 최선영, 한정화, 허상수, 황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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