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27

김동춘 나의 글(14) : '반일종족주의' 논란 : 네이버 블로그

나의 글(14) : '반일종족주의' 논란 : 네이버 블로그

나의 글(14) : '반일종족주의' 논란

프로필
면장
2024. 8. 15. 
이 글은 나의 책 <대한민국은 왜> ( 사계절, 2015)의 일본어판을 내기 전에 추가한 내용이다. 이후 <대한민국은 왜> 개정판(2020)을 내면서 한국어판에도 실은 것이다. 

--------------------------------------------------------------------------------

보론, 일본에서의 <반일종족주의> 선풍을 보면서


1. 

이영훈 등이 집필한 <반일종족주의>가 일본 ‘아마존 제팬’에서 베스트 셀러 1위가 되고, 이영훈이 기자회견까지 했다. 한국에서 ‘친일파’로 지목되는 것은 사실 심각한 모욕인데, 이들은 이제 공개적으로 ‘친일파’를 선언하였다. 한국의 노무현 정부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한 뉴라이트 집단은 한국의 교과서가 ‘자학사관’에 기초해 있다는 전제 하에 ‘교과서 포럼’을 창립하였고, 이후 박근혜 정부에서는 이들이 주도해서 집필한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교학사 교과서)가 검정을 통과하기도 했다. 문재인 정부 이후 이영훈 등은 이승만 TV를 개설하여 위안부 시리즈 등 강연을 일본어 자막을 달아 강의 콘텐츠로 제작하였는데, 일본의 조회수가 한국인의 조회수보다 높았다. 이 한일 간의 우익 세력의 연대, 특히 일본과 한국에서 넷 우익의 등장 속에서 일본에서 <반일종족주의>선풍이 분 것이다. 

한국에서 뉴라이트의 등장은 1990년대 일본의 새역모(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와 같은 역사수정주의 운동과 궤도를 같이하는데 그들이 말하는 ‘자학사관’이란 식민지 역사, 국가폭력과 학살, 독재와 파시즘을 반성했던 그 전의 경향을 좌파 사관이라 비판하면서 난징 대학살 등 일본의 전쟁범죄를 아예 부인하고 침략주의를 미화, 찬양하며, 반인권, 반복지를 노골적으로 내세운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한국의 뉴라이트 집단도 그 동안 일제 식민지 지배의 합법성까지 주장하지는 않았으나, <종족민족주의>는 과거의 식민지 근대화론을 훨씬 넘어서서 식민지 지배의 강압성과 폭력성을 부정하는 정도까지 나갔다. 1905년 전후 일본의 조선 병합을 청원한 일진회, 1930년대 이후 일본의 조선지배와 태평양 전쟁개시 이후 전쟁범죄를 찬양한 친일부역세력이후 세 번째 등장한 한국의 공개적인 ‘친일파’들이다.

이들 뉴라이트의 등장은 일본에서는 탈냉전, 중국의 부상, 동아시아 정치적 격변과정에서 위기에 몰린 극우파들의 반격의 성격을 갖고 있다면, 한국에서는 민주화 이후 위기에 몰린 구 냉전/친독재 세력이 신자유주의 논리와 결합하여 역공을 펴게 되어다. 일본과 한국의 극우파의 등장은 1930년대 말 태평양전쟁 시기 일본과 중국, 조선에서의 극우 파시즘 상황과 유사하다. 한. 일 뉴라이트의 논리는 국가주의, 권위주의, 인종주의, 가부장주의와 같은 전통적 극우논리에다, 작은 정부, 시장만능주의 등 신자유주의 논리가 추가되어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정치 노선을 정당화하기 위해 역사를 동원하고 있으며, 명백하게 사실로 확인된 사실을 부인하거나 단편적 사실을 침소봉대하고, 한국 지식사회에서의 민족주의 경향을 과장하여 ‘종족주의’라는 유사 인종주의적 혐오 발언까지 쏟아내기에 이르렀다. 

해리스( Harry B. Harris), 주한 미국대사가 "문재인 대통령이 종북 좌파에 둘러싸여 있다는 보도가 있다"는 언급을 한 이후 일본 외교관도 여당 의원을 만나 같은 발언을 했다는 보도도 있다. 특히 일본의 우익 언론들은 문재인 정부가 친북 좌파 정권이고, 문재인 대통령이 좌파들에게 둘러싸여 있어서 이러난 반일정책이 나왔다고 믿는 사람도 많은 것 같다. 정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민주화 이후 한국의 변화를 전혀 모르고 있을뿐더러 일본의 우익 언론의 선동에 속고 있는 것이다. <종족 민족주의>를 읽은 많은 일본인들은 다수의 한국인들이나 한국학자들이 여전히 샤머니즘과 무지몽매한 ‘종족 민족주의’에 사로잡혀 계속 일본에게 사죄나 배상을 떼쓰는, ‘시끄럽게 구는 꼬마’와 같은 존재로 여긴다면, 이 역시 한국정치나 사회를 모르는 일부 정치인과 지식인들에게 속고 있는 것이다. 

나는 보통의 일본인들의 한국에 대한 지식과 시각은 1990년대 이후 일본의 우경화 경향의 영향을 받아 크게 굴절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책 『대한민국은 왜』가 처음부터 끝까지 강조한 것들은 한국인들이 한국 근현대사, 한일, 한미 관계에 대한 지식과 시각도 30년의 군사독재와 70년의 냉전체제 의 교육 제도의 영향으로 크게 왜곡되어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였다. 

한국과 일본의 보통사람들의 역사 인식과 현실인식이 이렇게 굴절된 이유는 
1] 전후 독일과 달리 동아시아의 냉전이 식민지 과거를 제대로 청산하지 않은 채, 미국 주도의 샌프란시스코 체제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며, 
일본에서는 전쟁범죄 세력을 포함한 우익이, 그리고 
한국에서는 일제 말 식민지 파시즘에 부역한 세력이 반공체제의 기둥으로 지금까지 한국의 주류로 행세를 해 왔기 때문이다. 

잘못된 정치는 국민을 오도하고, 오도된 국민의 의식은 그러한 정치를 재생산한다. 과거 일본의 전쟁범죄자나 극우 세력들은 일본의 과거의 잘못을 제대로 인정하지도 않았고, 아랫세대에게 가르치지도 않았지만, 한국의 보수 우익 세력역시 식민지 과거사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고, 특히 한국전쟁기에 한국의 군과 경찰이 저지른 학살사건과 군사독재 하의 인권침해 사실을 가르치지 않았다. 

즉 한일의 시민들은 동아시아 침략사와 지배사, 한국전쟁사,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 등에 대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아보지 못했다. 독일의 메르켈 수상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가서 “과거에 대해 사죄하는 것은 독일 국가 정체성의 일부다”라고 말을 했는데, 식민지 과거를 부인하는 일본의 우익과 아베 정권, 그리고 한국의 과거 박정희, 전두환, 이명박, 박근혜 정권의 친일, 친미 노선도 다른 방식으로 일본과 한국의 반민주적인 국제정체성이 표현된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한국인들은 독일과 일본을 비교해서 왜 일본은 독일처럼 과거를 정리하지 못하고 부인으로 일관하는가라고 묻는다. 사회과학자인 나는 민족성 등의 초역사적인 개념을 들고서 독일과 일본의 차이를 가져온 사실을 설명하고 싶지는 않다. 무엇보다도 1945년 이후 미국의 대일정책과 동아시아 정책, 그리고 식민지 지배에 대한 면죄부를 주고 천황제를 그대로 유지한 미국의 정책, 68 혁명으로 과거를 새롭게 정리하게 된 독일을 포함한 유럽과 일본.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가 크게 달랐다는 점을 주목하고 싶다. 

미국은 1905년 카츠라 테프트 조약 이후 동아시아 정책에서는 언제나 일본의 우군이었고, 과거 제국주의 진영의 중요한 파트너였으나 한국은 일본과는 격이 다른 단순한 식민지, 혹은 부차적인 파트너였을 따름이다. 20세의 세계사가 제국주의와 냉전에 의해 진행되었으므로 개항과 서구화의 길에서 앞선 일본이 아시아의 주역으로 역할을 해 온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명예 백인’, 혹은 아시아라는 지리 공간 위의 ‘예외적인’ 탈아시아(脫亞) 국가로 자임한 일본이 서구, 백인의 시선으로 한국 등 다른 아시아 국가를 바라본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한국의 추격과 중국의 부상으로 일본의 아시아 내의 지위는 크게 흔들리게 되었고, 이러한 위기의식에서 우익세력의 국가주의가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 

40년 동안의 일본의 강압적 통치의 사실을 배웠거나, 학교에서나 (조)부모들에게 들어서 알고 있는 한국인들이 일본에 대해 극도의 반일감정을 갖거나 최소한 우호적 감정을 갖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의 역대 정치세력이 그러한 감정을 적절히 부추겨 정치적으로 활용해 왔다는 점이다. 일본과 독도 문제가 불거지자 헬기타고 독도로 날아간 이명박 전대통령 같은 사람들이 대표적이다. 실제로는 미국을 의식하여 일본에게 재대로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지도 못하면서도 겉으로는 반일 언사를 마구 내뱉어 일본과 긴장관계를 조성한 이승만도 그런 사람이다. 한국 정치가들의 반일선동은 일본의 극우 정치세력이나 언론이 북한을 악마화하거나 비하하여 대중의 지지를 확보하는 것과 동일하다. 양국의 극우 세력은 사실상 국민들을 속이고, 한.미.밀 관계와 동북아의 역사에 대해 매우 굴절된 의식을 주입하여 지난 70년 동안 권력을 유지하고 있고,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일본에서는 남북한 모든 한국인에 대한 혐오이고 한국에서는 반일주의라 할 수 있다. 

즉 한국인들의 의식의 지층에 자리 잡고 있는 식민지 지배의 굴욕과 그것에서 나온 반일주의가 분명히 있지만, 실제로는 대일 과거사 청산을 가로막아온 이승만, 박정희 정권이 오히려 민족주의 감정을 부추기거나 조장하기도 했다. 그런데 민족감정을 조장하면서도 물밑에서는 일본과 협상을 산 그들이 바로 <반일종족주의> 저자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세력들이아닌가? 즉 겉으로 반일이나 실제로는 ‘친일’세력이 70년 동안 일본 정치를 움직이는 자민당 우익 세력과 함께 미국의 전후 동아시아 냉전 정책, 즉 국제적 반공주의의 틀 내에서 권력을 유지해 온 것이 아닌가? 

한국인들의 반일주의는 일본의 태도여하에 따라 이미 오래 전에 사라질 수도 있었다. 
이것이 유지 강화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 한국의 분단, 그 배경인 미국의 동아시아 냉전전략이며, 
  • 일본의 전범과 극우 세력이 천황제의 우산 아래에서 계속 집권을 한 사실과 
  •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동아시아 전후 반공체제란 곧 대소, 대중 방어기지로서 일본의 전후 경제발전, 일본과 남한 구 친일세력과 군사정권의 연결을 의미한다. 
일제 식민지 과거 극복의 과제는 동아시아 반공체제의 틀, 미, 일, 한으로 연결된 전후 경제 분업구조, 일본과 한국 고도성장을 거치면서 실종되었다. 한국에서 이 유산된 식민지 극복, 즉 일본의 과거 부인에 대한 분노는 그러한 전후 질서를 사실상 관장한 미국을 자유롭게 비판할 수 없는 냉전, 분단 상황의 한국에서 허용된 정치 이데올로기 지형에서, 반미 대신에 오직 반일주의로만 향하게 된 결과인 것이다. 
즉 반일주의는 분단의 산물이다
즉 1945년 8.15 이후 일본을 점령한 미국이 일본을 민주적인 국가로 탄생시켜 독일처럼 과거사를 정리할 수 있을 정도로 새로운 정치세력을 등장시킬 공간을 열어주었다면, 전범을 제대로 처벌했더라면, 그리고 한반도에 분단과 전쟁이 없었다면, 한국 내의 정서적 반일주의는 사라졌을 수도 있다. 

2. 

여기서는 <반일 종족주의>의 논리적 문제점 몇 가지를 지적하고자 한다.

<반일종족주의>에서는 종족주의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가 없다. 책 여러 곳에서 사용된 예를 보면 아마 종족주의를 ethnicism 보다는 tribalism와 유사하게 사용하는 것 같다. 이것은 과거 제국주의 침략의 첨병이었던 인류학자, 미국이나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 지역의 원주민, 제3세계나 중국의 민족주의를 비하할 때 주로 사용되는 용어다. 서구 = 보편, 비서구 = 야만의 문명론적 도식, 오리엔탈리즘의 사고가 여기에 깔려 있다. 미주에서 활동하는 한국학자들도 가끔 한국 민족주의를 시민적 민족주의와 대비하여 혈연적 유대를 강조하는 ethnic nationalism 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자기 종족, 자기민족중심의 사고는 분명히 각 나라에서 실재한다. 종족주의 혹은 종족적 민족주의는 탈냉전 후 구소련 진영에 속했던 지역에서 전형적으로 드러난 현상이다. 이것은 사회해체의 위기에 대한 본능적이고 방어적인 대응의 방식으로 드러났고, 일부 지역에서는 폭력과 학살을 야기하였다. 특히 유고 연방이 해체된 이후 세르비아인인가, 크로아티아인인가, 보스니아인인가는 삶과 죽음을 구분하는 경계선이 되었다. 종족적 정체성과 유대를 강조하는 종족 민족주의는 언어, 지역, 종교와 대체로 중첩되어 있는데, 사회 내부의 위기의식을 외부의 적, 표적을 찾아서 해소하는 반동적인 양상으로 표출되었다. 이들 구동구권 지역의 분리주의가 종족적 민족주의에 가까운 것인데,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면 이스라엘의 시오니즘도 전형적인 종족 민족주의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민족이 반드시 혈연적 동질성에 기초하는 것은 아니고, 공통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일종의 감정 정서의 공동체인 점이 있다. 이 민족주의 정서는 주로 구성원들이 겪은 억압 등 공통의 정치적 경험이 가장 중요하게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시오니즘은 바로 2,000년 동안 유대인들이 겪은 이주와 차별의 역사에서 생겨난 것이다. 우리는 이 시오니즘이 이스라엘 건국의 동력으로 작용했으면서, 동시에 거꾸로 팔레스타인인을 자기가 살던 땅에서 추방하고, 중동에서 끊임없은 폭력과 갈등의 진원지가 되고 있는지를 목격하고 있다. 

종족주의도 폭력과 학살을 가져오지만, 백인들의 인종주의는 그보다 훨씬 심각한 폭력과 학살을 불러온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일부 극우 일본인들의 북한, 재일조선인에 대한 혐오도 일종의 인종주의에 가까운 것이고, 태평양 전쟁기 일본의 군국주의과 침략주의는 전형적으로 일본인 우월주의와 인종주의에 기초한 것이었다. 태평양 전쟁기 일본이 5족협화(五族協和)의 기치를 내걸고, 아시아 각 민족을 서열로 매긴 것이야말로 인종주의라기보다는 종족주의에 가까운 것이다. <반일종족주의> 저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오늘의 한국 민족주의가 종족주의적이라면 같은 종족인 북한과 오히려 친밀감을 가져야하는데 친북정서는 한국의 극이 일부에만 실재한다. 한국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혐오의 정서가 있으나 일본 극우세력인 재특회(재일특권을용납하지않는시민모임)가 재일조선인들에게 부분적으로 가하는 것처럼 그러한 혐오 감정을 폭력행위로 표현하는 일은 아직까지는 없다. 

즉 한국인들의 반일정서와 반일 민족주의는 기본적으로 종족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반일종족주의>는 실재하지 않는 허구다. 일제 식민지 시절 항일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아니라, 일제에 투항했던 최남선 같은 지식인들이 오히려 반일종족주의의 주요 사례로 거론하고 있는 단군과 민족의 신화에 빠진 사람들이었다. 1919년 3.1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조선인들은 선언문에서 일본에 대한 적대와 반감을 전혀 표현하지 않았고, 아시아 평화를 위해 함께 힘을 합치자고 제안했다. 일제에 가장 강하게 저항했던 사회주의 계열 항일운동가들은 일본의 지배 자체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한국 민중들과 일본 민중을 모두 ‘개 돼지’로 취급한다는 점을 강조했었다. <반일종족주의>에서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신채호와 같은 학자가 ‘강도 일본’을 죽여야 한다고 민족혁명론을 주장했으나 그는 그것에 그치지 않았으며 국가나 민족을 넘어서는 자유로운 인간들 간의 세상을 꿈꾼 사람이었다. 당시 한국인들에게 제국주의 지배의 폭력과 강압에 대한 민족주의적 저항이야 말로 자유와 민주로 가는 관문이라고 생각했고, 민족의 자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어떤 문명과 근대의 논리도 지지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과거 일본의 천황제나 국가주의가 오히려 인종주의, 종족주의의 성격을 가졌고, 주변 아시아 인민들을 큰 고통에 빠트렸으나, 일제 시기는 물론 그 이후의 한국의 민족주의는 피압박 민족의 자주와 독립, 그리고 통일된 국가 건설을 주장했고, 그것은 종족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일제 하에서는 조선인들의 자유로운 생활을 차단하는 일본 제국주의 체제에 저항하는 것이 바로 자유의 출발점이다. <반일종족주의>의 저사인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자유’는 오직 제국주의 국가들이 강조했던 것처럼 투자할 자유, 토대를 상품처럼 매매할 자유, 상업활동을 할 자유만을 의미하는 것이지, 조선인들이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자유,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 선택권을 말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반일종족주의>야 일본의 극우세력이 주장하는 자유야 말로 실제로는 자유의 가치와는 거리가 멀고 과거의 파시즘과 훨씬 친화력을 갖고 있다. 일제하에는 물론 반독재 투쟁 시기 한국의 민족주의에는 다른 모든 피억압 주민의 처지를 대변하는 것, 주권확보라는 보편적 요소를 갖고 있다.

한국인들에게 반일정서, 민족주의 정서가 강하게 남아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1945년 이후 분단과 전쟁,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동아시아의 탈식민화 프로젝트가 좌절된 것에서 주로 기인하는 것으로서 이들 동구의 분리주의, 종족(언어, 종교) 민족주의와는 성질을 달리한다. 그리고 한국인들에게 이러한 반일주의나 민족주의는 일본의 식민지 침략에 대한 부인, 반성의 결여에서 상당부분 기인한 것이기 때문에, 설사 한국인들이 그런 점을 보여주고 있더고 하더라도 그것은 다른 조건에 의한 종속변수이지 그 자체가 독립변수가 아니다. 

 

3. 

<반일종족주의>의 주요 주장들은 사실 이미 수많은 일본 관변 학자나 지식인들이 일제의 조선 강점 당시부터 했던 이야기다. 더 정확히 말하면 18,19세기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과 그 지식인들이 식민지 주민들 대상으로 설파했던 논리다. 그들은 ‘문명’의 이름으로 식민지를 야만시하였는데, 그 논리는 자신을 인류의 보편, 즉 글로벌 스탠다드의 위치에 놓고, 식민지 백성들의 저항을 편협하고 근시안적이며, 야만적이고 자기 울타리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행동이라 공격했었다. <반일종족주의> 주장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식민지 지배의 강압성과 폭력성을 부인하고, 조선인들이 일본의 지배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였다거나 환영했다는 논리다. 물론 이러한 논리는 일부 제국주의의 현지 파트너였던 식민지 관료나 엘리트들도 지지했고, 일본의 태평양 전쟁을 지지 했던 조선인 부일협력자들의 논리이기도 하다. 

제국주의의 입장에서 식민지 정복은 억압이 아니라 이들을 문명개화로 이끄는 은총이다. 샌프란시스코 강좌조약을 이끈 미 국무장관 덜레스(John Foster Dulles)가 서구의 식민지 지배는 ‘투자’라고 강조했듯이 일본역시 대만과 한국 식민지 지배에 대해 그렇게 생각했고, 미국과 영국은 당연히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과정에서 일본이 과거 식민지 지배에 대해 배상하거나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탈리아가 자신의 국가이익을 위해 리비아에 대해 배상금을 지불한 것 외에 구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 지배에 대해 배상을 한 사례가 없으니 일본사람들은 한국인들의 요구가 국제적인 기준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이다. 과거 식민지 지배를 받았던 나라들 중에서, 지금 국제사회의 주역으로서 역할을 하는 나라가 없고, 이들 나라끼리의 연대도 없으며, 자신의 피해 사실을 국제적으로 알리거나 담론으로 정립할 지적인 담론이나 그것을 주창하는 학자들도 만들어내지 못했으니, 국제법과 국제규범은 한국 측이 줄곧 제기하는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사과와 보상 요구, 강제동원 보상요구가 오히려 별종인 셈이다. 더욱이 제국주의의 식민지 침략과정에서 원주민에게 저지른 수 많은 학살 문제를 지금시점에서 꺼내면서 구제국주의 국가에 사과를 요구하는 나라도 없으니 말이다. 

여전히 국제사회에 통용되는 언어는 영국 제국주의의 최대의 성과라 할 수 있는 영어이며, 전 세계 지식사회의 주류 담론은 과거 제국주의 국가가 설정했던 근대화와 발전의 표준, 즉 주로 경제성장에 맞추어져 있다. 세계의 모든 뉴스는 과거 제국주의 국가였던 나라들의 미디어가 생산한 것들이고, 국제사회에 통용되는 학술연구의 90 퍼센트도 모두 미국과 유럽의 역사, 그들의 사례에 기초한, 영어, 독어, 불어로 쓴 것들이다. 그렇게 보면 한국이 제국주의 일본의 사죄나 반성을 촉구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해 보인다. 그래서 국제법, 국제 학문사회, 그리고 국제 미디어에서는 오히려 한국이 근대화와 경제성장에 큰 혜택을 준 일본의 은혜를 망각하고 무리한 요구를 하는 나라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게다가 같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았던 대만은 일제 식민지에 대해 비교적 우호적 태도를 갖고 있고. 필리핀이나 다른 아시아 국가들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제기하지도 않는다. 대만은 중국의 공산화를 피해 온 사람들이 세운 나라이고, 원래 살던 사람들은(내성인) 외세의 일종인 본토의 중국인을 제국주의 일본인보다 더 미워하고, 또 미국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갖고 있으니, 오직 한국만 일본을 비판하는 나라라고 볼 수도 있다. 

박정희 전두환 정권이 일본의 경제원조나 기술협력에 목을 매달고 있었고, 지금까지 한국에서 상류층과 일부 지식인들이 과거 식민지 시절을 미화하거나 일본 문화를 찬양해 왔으니[?] 일본인들이 보면 노무현 정부 이후의 한국이 ‘좌경화되어’ 정말 이상해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런 모든 생각은 사실의 한 면만 보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왜 대만인들은 일본의 식민지 통치가 대만의 근대화에 크게 기여하였고, 그래서 일본의 식민통치에 비교적 좋은 기억을 갖고 있는데 비해 한국인들은 그렇지 않는가라고 묻을 수 있다. 그런데 그 해답은 한국인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일제 식민통치의 강압성과 폭력성의 차이, 그리고 조선과 대만이라는 나라의 역사와 정체성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기 이전에 이미 천년 이상 단일 국가를 형성, 유지해 온 나라였으며 대만은 중국 본토에 시달려온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일본의 지배에 대해 그다지 강하게 저항하지 않았다. 따라서 대만에 대한 일본의 지배도 헌병 경찰과 폭력을 동원할 필요가 없었다. 

1905년 이후 조선 왕조나 관료들은 일본의 조선 주권 박탈에 순순히 응했지만, 재야의 지식인들과 백성들은 그렇지 않았다. 조선의 재조 재야 지식인들은 오랑캐인 청나라가 중원을 장악한 이후에 조선은 중화의 적통을 이어받고 있다고 생각했고(물론 그것은 비뚤어진 사대주의이지만), 이러한 화이(華夷)적 세계관에서는 일본은 변방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들은 서구의 문물을 빨리 받아들이고 내부 개혁에 성공한 일본이 비록 군사력과 경제력에서는 우세하더라도 일본을 문명국이 아닌 서구 물질주의의 압잡이라 보았고, 그들의 조선 지배를 도저히 정신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물론 조선 농민들도 일본의 지배를 받아들일 수 없었었는데, 일본의 자본과 상품이 조선에 진출한 이후 그들의 생활이 더욱 악화되어, 일본을 물리치는 것은 그들의 생존을 위한 일차적 과제라 보았기 때문이다. 이들 농민들과 재야 지식인들의 무장 항의가 근대적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게는 전혀 적수가 되지 못해 완패했지만, 그들이 대만사람들처럼 일본이 추진한 근대적 개혁을 환영한 것은 아니었다. 

다른 식민지의 경우도 그렇지만, 지주, 부르주와, 관료 등 조선의 상층부의 사람들은 제국주의의 기득권 유지 전략에 대체로 호응하여 식민지 지배의 하수인이 된다. 조선 신분제도에서 차별받았던 사람들 중 일부도 일본의 조선 지배를 환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대다수 조선인들이 경찰력을 앞세운 외국인 일본의 지배를 환영할 이유가 없었다. 1919년 거국적인 3.1 운동에서 드러났지만 전 세계 식민지 백성 중에서 조선인들처럼 제국주의의 지배에 완강히 저항한 백성들은 그리 많지 않다. 단지 조선은 땅이 좁고, 무장 투쟁을 할 여건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동네마다 파출소를 설치하여 주민의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하는 조선총독부의 군사주의, 경찰 통치에 맞서서 무력으로 저항하기 힘들었을 따름이다. 일본은 조선인을 내지(內地)인, 즉 일본인과 동등하게 취급한다는 구호를 내걸고, 그런 동화 정책을 폈지만, 학교 입학, 관료 채용, 임금과 승진 모든 면에서 조선인을 동등한 존재로 취급하지 않았다는 것은 바보가 아닌 이상 모든 조선인이 알고 있었던 사실이다. 따라서 일본의 통치에 협력한 같은 조선 사람들을 ‘개 돼지’와 같은 존재로 취급하면서 증오하였다. 
===
많은 일본인들이 알고 있는 것과 달리, 한국은 1987년 민주화 이후 냉전의 그늘에서 벗어난 새로운 국가가 되기 시작했으며, 일본은 오히려 거꾸로 갔다는 점이 오늘 한일 갈등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다. 민주화 이전의 한국이 오히려 비정상적인 상태였으며, 민주화 이후의 한국이 정상국가의 길로 가게 됨으로써 생긴 일본과 한국 간의 심각한 거리감, 즉 한국에서는 민주화로 냉전이 흔들리면서 냉전질서에서 당연시되던 생각이 도전을 받기 시작하고, 냉전과 식민지 미청산으로 억압되었던 사실이 들추어지기 시작했으나 일본은 그 반대로 진보적 리버럴이 해체되기 시작하면서 양국 간의 거리감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었다. 
===
제2차 대전 후 많은 구식민지 국가가 독립을 쟁취했지만, 사실 과거 제국주의에 근접한 수준의 경제력, 군사력, 민주주의를 성취한 국가가 한국 외에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서 한국은 과거 제국주의 지배의 폭력성과 인종차별주의 등의 과거사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과 문제제기를 할 수 있는 세계 거의 유일한 나라다. 중국은 원래가 반식민지 상태이기도 했지만, 2000년대 이후 이미 미국과 겨루는 강대국이니 공개적으로 그런 주장을 할 필요가 이미 없어졌고, 아마 베트남이 경제적으로 좀 더 성장하고 민주화된다면 그런 역할을 할 것이다. 1960년대 이후 일본의 많은 양심적인 지식인들이 외롭게 외쳐온 사실을 민주화 이후 한국인들에게는 상식이 되었다. 민주화로 인한 변화를 두려워하는 한국과 일본의 극우세력들이 이는 친북, 좌익 사고라고 공격하고 있으나 그것은 사실을 완전히 오도한 것이다. 

 

4.

<종족민족주의>의 논리는 과거 일본 우익과 보수언론의 북한 때리기처럼 일본들에게 달콤한 즐거움을 줄 수 있으나, 그것은 일본인들에게는 태평양 전쟁 기 전범세력들의 전쟁선동만큼이나 위험한 것이다. 왜냐하면 <반일종족주의> 논리는 통계와 실증의 이름으로 정작 가장 중요한 사실들은 은폐하고 있기 때문이며, 학문의 형식을 빌리고 있으나 거의 모든 내용이 매우 정치적이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가장 심각한 결함은 일제의 조선 침략과정에서 발생한 폭력과 대량학살에 대한 무시 혹은 부인이다. 저항이 완전히 진압되었거나, 저항의 동력이 소진된 상황에서 조선 백성들이 현실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게 된 것을 평화나 지배에 대한 동의라 말할 수는 없다. 일본이 러일전쟁 후 1905년 을사보호조약, 1910년 강제병합을 통해 조선의 주권을 박탈하는 과정에서는 1896년 동학 농민군에 대한 진압, 그리고 잔류 동학군에 대한 대량의 학살, 1905년 이후 전국 각지의 의병 운동에 대한 진압과 거주지에 대한 초토화 작전 등이 선행되었다. 이러한 폭력적 진압과 극히 잔인하고 비인도적인 학살의 역사를 생략한 식민지 지배의 합법성을 주장하는 모든 논리는 근거가 없는 것이다. 

조선의 마지막 왕인 고종과 그 관료들이 일제의 주권 박탈 문서에 도장을 찍었다고 해도, 당시 조선은 국민주권 최소한의 입헌 군주국가라고 볼 수 없으므로, 일본의 강제병합의 합법성은 인정될 수 없다. 그리고 1910년 이후에는 사실상 헌병 경찰에 의한 강압적 지배였기 때문에 설사 보통의 조선인들이 대규모로 저항하지 않았다고 해서, 조선인들이 일제의 지배에 동의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1919년 3.1 운동 당시의 수천명의 조선인에 대한 학살, 1920년 만주에서의 경신대참변,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 자경단 등에 의한 조선인 학살 등의 역사를 무시하고, 30년대 이후 조선인들이 국내에서 공개적인 저항을 하지 않았던 점이나, 강제동원과 일본군 위안부 동원의 자발성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반일종족주의>의 한 필자는 조선인들이 일본은 로망이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정확히 말하면 1930년대 조선인들에게 만주가 ‘로망’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런데 일본의 탄광이나 건설현장에 ‘돈 벌기 위해’ 자발적으로 간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탄광이나 노동현장의 노동이 시장주의 계약관계라고 볼 수 없으며, 더욱이 수 없이 여러 번 탈출을 시도하다가 잡혀서 무자비한 구타를 당해 거의 죽음 당하거나 불구자가 된 조선인들이 엄연히 존재하는데 이들이 ‘강제연행’을 당한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식민지 상황에서 경제적 강제와 경제외적 강제는 결합되어 있다. 30년대 조선 농촌 소작인들의 처참한 빈곤역시 북한 지역의 전시 공업화와 동시에 진행된 일이었으며, 이러한 농촌 경제의 몰락이 이들을 일본으로의 자발적 이주와 동원에 응하게 된 ‘경제적’ 강제였는데, 이 경제적 강제를 ‘로망’을 실현한 자유로운 선택이라고 말하는 것은 경제학밖에 모르는 학자들의 ‘훈련된 무지’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일본군 성노예가 된 조선 여성들을 자발적 매춘이라 하고 군의 위안소 운영을 공창제와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은 사실에 대한 부인을 넘어서 나치의 학살 부인과 같은 ‘범죄’에 가까운 것이다. 일본 군부가 위안소를 운영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반일종족주의>저자들은 한국 학자들이 한국전쟁기 위안소를 운영한 것을 환호하여, 일본만 탓할 일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한국전쟁기 한국 군부가 일부 위안소를 운영한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그러나 바로 일제말 일본군에 복무했던 한국군 출신들 장교들이 그런 발상한 것이므로, 이것이야말로 한국의 군사주의가 일본 제국주의와 연속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다. 
일제에 복무했던 경찰과 군인들이 해방 후 동족에게 같은 방법의 고문과 학살을 자행한 일은 이미 충분히 드러났는데, 이것은 한국정부의 큰 과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군부의 위안소 운영의 죄악이 면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동아시아 전쟁, 폭력 체제가 어떻게 일본과 한국의 현대 정치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지를 실증해주는 것이며, <반일종족주의>의 저자들이 일본 극우세력과 함께 그런 퇴행적 질서를 옹호하고 있는가를 드러내줄 따름이다. 

일본의 식민지 경영이 결과적으로 조선의 공업발전과 근대 교육에 기여한 점이 있고, 그것이 이후 한국 산업화에 기여한 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일본이 조선을 도와주기 위해서 식민지 경영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상식적인 사실이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에 부역한 한국인들을 처벌할 수 없었던 것은 1945년 8.15 아휴 반공주의 정치국면이 일본에서 전범을 처벌할 수 없었던 사정과 같이 오늘의 일본과 한국을 뒤틀리게 만들었다. 즉 전후 천황제를 유지하기로 한 미국의 결정이 일본인 다수의 의사가 아니라 전쟁범죄자들과 극우세력의 집요한 요청과 결합된 것처럼, 한국에서 일본 제국주의에 부역한 사람들을 단죄하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지 못한 것도 바로 미국의 반공주의 한국 점령정책, 그리고 공산주의의 위협을 빌미로 미국으로 하여금 이들과 손을 잡지 않을 수 없도록 한 이들의 정치력이었다.

제국주의 시절의 일본사람이 하나의 일본인이 아니었던 것처럼 식민지 하의 조선인들도 하나의 운명체는 아니었다. “성곽같이 높은 돌담 안에 경회루같은 누각을 가진 백만장자의 조선인들과 초막집에서 덮을 이불도 없이 추위에 언 발을 녹이지도 못하고 잠을 자야 했던” 조선인들이 같은 조선인이 아닌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렇게 극심한 빈부격차를 가져온 것은 일본의 식민지 근대화 정책인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일본은 한국의 지주, 자본가들과 손을 잡고 그들의 권력과 부를 크게 보장해주는 정책을 취했으니 보통의 조선인들 중 일제의 공업화의 혜택을 본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대다수는 극빈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일제 하 조선인들을 하나의 동등한 처지에 있었던 운명체라 볼 수 없었고, 특히 당시 조선은 주권이 없었으므로 조선의 일본 미곡 반출을 수탈이 아니라 수출이라 말하는 것은 언어의 유희에 속한다. 농민에 대한 수탈은 조선인 지주들이 한 것이 맞고, 그런 지주들에게 권력을 부여한 것은 일본이었으며, 그 수탈로 축적된 미곡이 일본으로 간 것이다. 그러나 쌀을 ‘수출’한 주체는 조선의 농민들이 아니고, 총독부 당국이나 지주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는 정치, 국가 없니 작동하지 않는다. 과거 제국주의 지배 체제 하에서는 과거 봉건시대처럼 정치가 경제에 우선하고 경제외적 강제가 경제적 강제에 앞선다. 일제의 통치권력, 즉 총독부의 압도적 힘에 의한 식민지 지배체제를 전제하지 않는 어떤 경제논리, 그리고 조선인들의 행동방식에 대한 설명도 완전히 허구다. 

5. 

전쟁으로 인한 희생의 범위와 정도에서 한국이 겪은 것은 일본보다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태평양 전쟁기의 고통과 빈곤을 여전히 염두에 두는 일본인들도 있겠지만 20세기 한국인들이 당한 고통은 그와 비교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6.25 한국전쟁 3년 동안 남북한 인구의 10%가 넘은 300만 이상이 사망했고, 수십만의 부상자가 발생했으며, 수십만의 이산가족이 다시 만나지 못한 채 영원히 헤어졌다. 일본인들은 코리안들이 어리석어 6.25와 같은 내전의 고통을 겪은 것이 아닌가 반문할 것이다. 분명히 그런 점이 있다. 그러나 6.25 한국전쟁은 일본의 제국주의 지배, 전후 일본을 살리기 위한 정책적 고려와 결합된 미국의 남북한 분할점령 정책이 없었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사건이었다. 

남북한 코리안들끼리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싸운 전쟁이 왜 일본 제국주의 탓이냐고 묻을 수 있다. 분명히 북한의 침략으로 시작되어 미군과 중국군이 개입한 한국전쟁은 일본과는 현상적으로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러나 북한이 침략한 명분이나, 이승만 정권이 북침을 강조했던 명분 모두는 통일된 국가의 건설이었고, 특히 북한은 남한을 식민지 체제의 연장으로 보았다. 모든 코리안들에게 분단은 식민지 체제의 연장이었으며, 이 식민지 체제를 끝내기 위해, 외세에 편승한 세력을 없애자고 북한이 먼저 전쟁을 시작했다. 일본은 통치의 필요성 때문에 조선인의 현지협력자를 포섭하였지만, 그들은 일본이 전쟁에 패해한 이후 일본을 따라 갈 수 없었고, 한반도에서는 식민지 청산을 둘러싼 내전 상태에 돌입한 것이다.

모든 제국주의 국가들은 지배할 때 언제나 원주민들 간의 분열을 조장하였는데, 종교, 인종, 지역 등 내부의 분열의 틈을 활용하여 서로 간에 대립을 하도록 조장한다. 그리고 제국주의가 떠나면 사실 평화롭게 지내왔던 내부 세력들 간에 내전이 시작된다. 이것이 1945년 이후 아시아 아프리카 등지의 탈식민지 국가에서 벌어진 내전, 학살의 배경이다. 한국은 세계에서 그 예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동질성이 매우 강한 민족이었으나, 일본에 협력한 사람들에 대한 증오감, 특히 온 가족이 파괴될 것을 각오하고 항일운동을 한 사람들이 이들 부일협력자들에 대해 갖는 적대감은 종교, 인종의 분열이 만연한 국가이상으로 심각했다. 일본이 강권으로 통치했던 40년 동안에는 조선인들 간의 갈등과 내전이 일어날 수 없었으나, 일본이 떠나면서 그 잠재되어 있던 갈등이 폭발한 것이고, 6.25 한국전쟁도 그러한 내부의 적대들이 세계적인 차원에서의 미소 냉전과 맞물려 폭발한 것이다. 일본인들에게 한국전쟁은 강 건너 불이지만, 그 불씨는 세계의 거의 모든 제국주의 국가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일본이 던져 놓은 것이다. 

물론 19세기 말에 일본의 조선을 침략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조선인들 간의 근대화를 둘러싼 갈등, 봉건적 토지소유와 신분차별의 극복을 향한 반란과 진압 등의 내전적 갈등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식민지 지배 하에서 지주, 자본가, 그리고 부일협력자들을 적극 육성하여 조선인들을 탄압하는 일에 현지의 대리인으로 활용하지 않았다면, 8.15 이후의 그러한 내전적 갈등, 그리고 6.25 한국전쟁과 같은 전면적인 내전은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 인도나 파키스탄, 르완다 등의 갈등과 내전은 모두가 탈식민화 과정에서 제국주의가 뿌려놓은 균열과 갈등의 선을 따라 진행되었는데, 한국의 경우는 그것이 민족/반민족의 갈등으로 표출되었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일은 일본 제국주의 군대에서 훈련받는 한국 군 장교, 경찰이 동족을 살해하거나 고문하는 데 동원되었다는 점이다. 일본이 조선에 들어오기 이전에도 고문이나 태형과 같은 잔인한 폭력은 있었으나, 일본의 점령에 저항하는 조선인들에게 가한 일본 헌병 경찰의 폭력은 전근대 시절에는 볼 수 없었던 잔인한 것들이었다. 물론 프랑스, 독일 영국 등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도 식민지 점령과정에서 폭력과 학살을 저질렀다. 

그러나 일본군이 조선의 동학군을 토벌하거나 의병부대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가한 학살과 폭력은 유럽 국가들의 그것과 유사하거나 그것을 능가하는 잔혹한 것이었다. 근대 자유민주주의 제도의 문턱에 간 유럽 제국주의도 식민지 주민들에게는 그 민주주의를 실행하지 않았지만, 군국주의 방식으로 위로부터 근대화를 추진했고 민주주의 제도를 무시한 천황제의 일본은 독일 황제가 아프리카 나비비아에서 자행했던 학살과 유사한 학살[??]을 조선에 실행했다. 

<반일종족주의>의 저자들이 강조하는 역사적 사실은 학문적 객관성을 갖는 것이라기보다는 저자들의 정치적 편향을 입증할 수 있는 내용을 취사선택한 것들이다. 
단지 이것이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의 입으로, 그것도 한국에서 가장 우수한 경제사학자들의 목소리로 나온 점이 아마 오늘 우경화된 정치지형에 익숙한 일본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했을 것이다. 
이제 한국과 일본의 과거를 제대로 읽는 한국인들이 나왔다고 기뻐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책의 논리는 수많은 일본 청년들은 전쟁터로 몰아넣어 죽고 다치게 만들고, 수십만의 일본인들을 공습과 원자폭탄의 희생자로 만든 과거 일본의 전범들의 논리만큼이나 위험하다. 

한국의 시민과 일본 시민이 깨어나야 그동안의 국가주의, 속임수 논리에서 벗어나야 세상을 바로 볼 수 있다. 한국과 일본이 진정으로 협력하여 우호적인 관계를 맺은 것은 양국의 모든 시민들에게는 물론, 아시아에게 좋은 것이고 세계 전체에도 좋은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일본과 한국의 보통사람들의 생명과 안전, 그리고 인권과 복지를 지켜 줄 것이다. 잘못된 과거를 정리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일본과 한국이 빠른 시간에 경제발전을 성취하고 서구 의 수준을 따라잡은 것은 매우 자랑할만한 일이나 노동자 여성 등 약자의 권리, 정치가들의 책임성, 보편적 사회복지, 삶의 질 보장 등의 차원에서는 여러 유럽국가에 비해 매우 뒤쳐져 있는 이유도 이러한 어처구니 없는 정치적 논리가 여전히 활개를 치기 때문이다. 

====
李昇燁

potedsrSon3lm2iii35i2hcuuu3l15h3031060h75056ih6l4ul7hm811c16 ·

이 양반조차도
이리 어설픈 지식에 기반해
역사를 보고 있었다니

어처구니가 없다기보다는, 좀 놀랍다.
문제 설정은 합당하나 하겠으나
사실을 찾아 볼 생각은 하지 않고
의도를 투영해 역사를 만들어 버리는구나.

자민족의 민족감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타민족을 밸도 없는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건 덤.



===
정승원

제가 만든 대부분의 좌파 진보 성향의 지식인들은 일본 문제에 대해서는 팩트 찾아보지 않고 대부분 고정관념으로 말하고 글 쓰는 것 같습니다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