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29

신영복과 통일혁명당 1968 : 네이버 블로그 차경환

신영복과 통일혁명당 1968 : 네이버 블로그
https://blog.naver.com/quixcha/223013722198


신영복과 통일혁명당 1968
차경환 ・ 2023. 2. 13. 5:04 URL 복사  이웃추가
예전 안철수가 2016년 신영복이 죽었을 때 장례식장에서 「시대의 위대한 지식인」이라고 말을 했다고 하는데 그런 안철수가 국힘당 당
대표선출 과정인 현재 종북 논란에 휩싸이면서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오늘은 바로 그 문제의 신영복에 대해서 알아봅니다.
한마디로 이 사람은 그냥 좌파 정도가 아니고 대한민국에서 공산혁명을 하기 위해 노력했던 그냥 간첩입니다.
대한민국을 공산 하려고 『통일혁명당』이라는 무시무시한 지하 정당을 결성해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20년 감옥에서 살다 나온 사람인
데, 이런 사람들 가장 존경한다고 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문재인」입니다. 그리고 노무현 정부에서 국무총리를 했던 한명숙의 남
편 「박성준」이 바로 통일혁명당 사건 당시 역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박성준은 전향서 쓰기를 끝까지 거부하고
본인에게 내려진 형기를 모두 마치고 출소한 사람입니다.
「조지오웰(George Orwell, 1903~1950)」의 책 『동물농장(Animal Farm)』에 보면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
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보다 더 평등하다.」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특권을 누릴 자격이 있다. 즉, 이 특권을 누
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하는 사람들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것은 아무것도 가진 것도 없는 무산자 노동자·농민들이 그들의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 기존의 세상을 다 뒤
집어엎고, 그들이 독재해야 한다고 주장을 하는 사상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인류가 나아가야 할 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
니다. 바로 신영복도 그중의 한 사람입니다.
신영복은 성공회대에서 교수를 했습니다. 그 학교 뒤편에 가면 「더불어 숲길」이란 곳이 있습니다. 더불어 숲길이란 이름은 신영복이
가 명명한 것입니다. 서울 구로구가 신영복을 기리기 위해서 조성한 산책길 이름이 더불어 숲길입니다. 대한민국을 뒤집어엎자는 주장
을 한 사람을 기리기 위해 국민 세금으로 이런 것을 만들었습니다.
신영복의 대표 저서 중의 하나가 『더불어 숲』 인데 거기서 이름을 따서 대한민국을 공산혁명을 해야 한다고 주장을 하다가 들통이 나
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년 20일 수감생활을 하다가 전향서 쓰고 나온 사람을 기려야 한답니다.
2016년 신영복이 죽자 이제는 급기야 거리낌 없이 대놓고 「두려움 없이 군사독재와 싸웠다」라고 하고 「우리 시대의 지성」 이랍니다. ㅋ 당시 통일부 장관 이인영은 신영복에게 받은 「'국민이 가라는 길을 가겠습니다'란 것을 내 좌우명으로 삼았다」라고 본인 인터뷰에
서 밝혔습니다.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를 했던 박영선은 신영복이 죽은 날 자기 트위터에다 「신영복 선생님의 미소는 달빛 비친 잔잔한 호수의 평온함
을 떠올리게 한다.」라고 추모의 글을 올렸습니다. 「'성공회대 더불어 숲 강의'를 다녔던 나에게 신영복 선생은 「얼마나 힘들어요」 하시
면서 서예를 권하며 붙잡는 법을 가르쳐줬다. 먹을 가는 단아한 마음처럼 제련된 마음을 지녀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기타 등등 뭐 미사여구 찬사가 쏟아지는 안철수가 조문하면서 “주위 사람들 모두 맑게 만드시는 분”이라며 “시대의 위대한 지식인께
서 너무 일찍 저희 곁을 떠나셨다”라고 추모사를 하며 간보며 숟가락 얹었다가 요즘 국민의 힘 당 대표 경선 과정에서 곤욕을 치르는 중
입니다. 아무튼, 이때 대한민국 언론이 다 뒤집혀서 민주화의 어쩌고저쩌고하면서 신영복 띄우기에 혈안이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신영복은 1941년 경남 밀양에서 아버지가 교장인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부산상고를 나왔고 서울대 상대를 졸업했으며 숙명여대에
서 강사를 하다가 석사 장교로 육군사관학교에서 교관을 했습니다.
4년간 교관을 하던 중 『통일혁명당 간첩단 사건』이 1968년 적발되어 체포되었고,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년 20일 동안 수감 되었습니
다. 그래서 1988년 서울올림픽이 열린 해 특별 가석방으로 석방되었습니다. 나오자마자 감옥에서 자기 가족에게 보낸 편지를 묶어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책을 냈는데 책이 엄청나게 팔립니
==
신영복과 통일혁명당 1968
차경환 ・ 2023. 2. 13. 5:04 URL 복사  이웃추가
예전 안철수가 2016년 신영복이 죽었을 때 장례식장에서 「시대의 위대한 지식인」이라고 말을 했다고 하는데 그런 안철수가 국힘당 당
대표선출 과정인 현재 종북 논란에 휩싸이면서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오늘은 바로 그 문제의 신영복에 대해서 알아봅니다.
한마디로 이 사람은 그냥 좌파 정도가 아니고 대한민국에서 공산혁명을 하기 위해 노력했던 그냥 간첩입니다.
대한민국을 공산 하려고 『통일혁명당』이라는 무시무시한 지하 정당을 결성해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20년 감옥에서 살다 나온 사람인
데, 이런 사람들 가장 존경한다고 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문재인」입니다. 그리고 노무현 정부에서 국무총리를 했던 한명숙의 남
편 「박성준」이 바로 통일혁명당 사건 당시 역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박성준은 전향서 쓰기를 끝까지 거부하고
본인에게 내려진 형기를 모두 마치고 출소한 사람입니다.
「조지오웰(George Orwell, 1903~1950)」의 책 『동물농장(Animal Farm)』에 보면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
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보다 더 평등하다.」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특권을 누릴 자격이 있다. 즉, 이 특권을 누
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하는 사람들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것은 아무것도 가진 것도 없는 무산자 노동자·농민들이 그들의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 기존의 세상을 다 뒤
집어엎고, 그들이 독재해야 한다고 주장을 하는 사상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인류가 나아가야 할 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
니다. 바로 신영복도 그중의 한 사람입니다.
신영복은 성공회대에서 교수를 했습니다. 그 학교 뒤편에 가면 「더불어 숲길」이란 곳이 있습니다. 더불어 숲길이란 이름은 신영복이
가 명명한 것입니다. 서울 구로구가 신영복을 기리기 위해서 조성한 산책길 이름이 더불어 숲길입니다. 대한민국을 뒤집어엎자는 주장
을 한 사람을 기리기 위해 국민 세금으로 이런 것을 만들었습니다.
신영복의 대표 저서 중의 하나가 『더불어 숲』 인데 거기서 이름을 따서 대한민국을 공산혁명을 해야 한다고 주장을 하다가 들통이 나
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년 20일 수감생활을 하다가 전향서 쓰고 나온 사람을 기려야 한답니다.
2016년 신영복이 죽자 이제는 급기야 거리낌 없이 대놓고 「두려움 없이 군사독재와 싸웠다」라고 하고 「우리 시대의 지성」 이랍니다. ㅋ 당시 통일부 장관 이인영은 신영복에게 받은 「'국민이 가라는 길을 가겠습니다'란 것을 내 좌우명으로 삼았다」라고 본인 인터뷰에
서 밝혔습니다.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를 했던 박영선은 신영복이 죽은 날 자기 트위터에다 「신영복 선생님의 미소는 달빛 비친 잔잔한 호수의 평온함
을 떠올리게 한다.」라고 추모의 글을 올렸습니다. 「'성공회대 더불어 숲 강의'를 다녔던 나에게 신영복 선생은 「얼마나 힘들어요」 하시
면서 서예를 권하며 붙잡는 법을 가르쳐줬다. 먹을 가는 단아한 마음처럼 제련된 마음을 지녀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기타 등등 뭐 미사여구 찬사가 쏟아지는 안철수가 조문하면서 “주위 사람들 모두 맑게 만드시는 분”이라며 “시대의 위대한 지식인께
서 너무 일찍 저희 곁을 떠나셨다”라고 추모사를 하며 간보며 숟가락 얹었다가 요즘 국민의 힘 당 대표 경선 과정에서 곤욕을 치르는 중
입니다. 아무튼, 이때 대한민국 언론이 다 뒤집혀서 민주화의 어쩌고저쩌고하면서 신영복 띄우기에 혈안이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신영복은 1941년 경남 밀양에서 아버지가 교장인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부산상고를 나왔고 서울대 상대를 졸업했으며 숙명여대에
서 강사를 하다가 석사 장교로 육군사관학교에서 교관을 했습니다.
4년간 교관을 하던 중 『통일혁명당 간첩단 사건』이 1968년 적발되어 체포되었고,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년 20일 동안 수감 되었습니
다. 그래서 1988년 서울올림픽이 열린 해 특별 가석방으로 석방되었습니다. 나오자마자 감옥에서 자기 가족에게 보낸 편지를 묶어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책을 냈는데 책이 엄청나게 팔립니
==
이것뿐만 아니라 드디어 문재인이 2018년 2월 9일 평창 올림픽이 개최되어 개회식 당시 국내외 귀빈 리셉션 있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문재인은 세계에서 한국에 온 VIP들 앞에서 「제가 존경하는 한국의 사상가 신영복 선생은 겨울철 옆 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나가
는 것을 정겹게 일컬어 '원시적 우정'이라고 했습니다」라고 발언을 해서 엄청난 논란이 된 바도 있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한국의 사상가 신영복 선생. 즉. 사상가를 존경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사상을 본받고 따르겠다는 의향이 들어있는 발언
입니다. 그럼 신영복이 어떤 인물일까요? 대한민국 대통령이 존경하는 한국의 사상가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 년 형을 살고도 그 후 자기는 단 한 번도 공산주의에서 전향한 적이 없다고 주장을 하는 그런 사람을 매우 존경한답니다.
또 대통령이 되기 전인 2017년 1월 15일 문재인은 추도사에서 「혼자서는 약하고 바꿀 수 없지만 많은 사람이 더불어 함께 하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촛불 집회가 보여줬다.」 「신영복 선생의 뜻대로 많은 촛불과 함께 더불어 정권을 교체하고 내년 2주기 추도식 때
는 선생이 강조하신 더불어 숲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보고 드릴 수 있도록 하겠다」라고 다짐했는데 그 다짐을 제 마음껏 실
천했습니다.
바로 이래서 평창 올림픽의 전 세계 VIP들 앞에서 제가 존경하는 사상가가 신영복 선생입니다. 라고 커밍아웃을 했고, 또 더불어 하는
소리가 「더불어민주당의 당명은 신영복 선생의 더불어 숲에서 나온 말이다. 나는 요즘 민주당이 그런대로 꽤 잘하고 있는 것이 '더불
어'라는 이름 덕분이라는 생각이 든다.」라고 했습니다. 『더불어민주당』의 '더불어'는 신영복에게서 왔는데, 그 신영복이 누구냐 바로
김일성의 지시를 받고 그 공작금으로 대한민국을 전북 시키려고 했던 사람이 쓴 글입니다.
2018년 10월 「위대한 백두혈통」의 한 사람인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을 비롯한 북한 고위급 대표단이 청와대를 방문했습니다. 그때
바로 김여정과 문재인이 찍은 뒷배경에 이상하게 생긴 통(通) 글자를 누가 썼느냐 하면 또 역시나 신영복의 글씨였습니다.
신영복은 1968년 반체제 지하조직인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 구속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습니다. 20년 수감 생활하다가 전향서를 쓰
고 1988년에 가석방되었는데, 당시 통일혁명당에 당국의 수사망이 좁혀져 오니 김일성이가 통일혁명당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해 무장
간첩을 침투시켰는데 그 무장간첩이 침투하는 과정에서 우리 군에 의해 체포되어 전부 일망타진 되었습니다. 그리고 통일혁명당 중 핵
심 멤버들은 사형당했습니다. 당시 사형당한 사람들은 북한에서 영웅 칭호를 받았습니다. 그 외 사형당하지 않고 무기징역을
==
이것뿐만 아니라 드디어 문재인이 2018년 2월 9일 평창 올림픽이 개최되어 개회식 당시 국내외 귀빈 리셉션 있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문재인은 세계에서 한국에 온 VIP들 앞에서 「제가 존경하는 한국의 사상가 신영복 선생은 겨울철 옆 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나가
는 것을 정겹게 일컬어 '원시적 우정'이라고 했습니다」라고 발언을 해서 엄청난 논란이 된 바도 있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한국의 사상가 신영복 선생. 즉. 사상가를 존경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사상을 본받고 따르겠다는 의향이 들어있는 발언
입니다. 그럼 신영복이 어떤 인물일까요? 대한민국 대통령이 존경하는 한국의 사상가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 년 형을 살고도 그 후 자기는 단 한 번도 공산주의에서 전향한 적이 없다고 주장을 하는 그런 사람을 매우 존경한답니다.
또 대통령이 되기 전인 2017년 1월 15일 문재인은 추도사에서 「혼자서는 약하고 바꿀 수 없지만 많은 사람이 더불어 함께 하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촛불 집회가 보여줬다.」 「신영복 선생의 뜻대로 많은 촛불과 함께 더불어 정권을 교체하고 내년 2주기 추도식 때
는 선생이 강조하신 더불어 숲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보고 드릴 수 있도록 하겠다」라고 다짐했는데 그 다짐을 제 마음껏 실
천했습니다.
바로 이래서 평창 올림픽의 전 세계 VIP들 앞에서 제가 존경하는 사상가가 신영복 선생입니다. 라고 커밍아웃을 했고, 또 더불어 하는
소리가 「더불어민주당의 당명은 신영복 선생의 더불어 숲에서 나온 말이다. 나는 요즘 민주당이 그런대로 꽤 잘하고 있는 것이 '더불
어'라는 이름 덕분이라는 생각이 든다.」라고 했습니다. 『더불어민주당』의 '더불어'는 신영복에게서 왔는데, 그 신영복이 누구냐 바로
김일성의 지시를 받고 그 공작금으로 대한민국을 전북 시키려고 했던 사람이 쓴 글입니다.
2018년 10월 「위대한 백두혈통」의 한 사람인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을 비롯한 북한 고위급 대표단이 청와대를 방문했습니다. 그때
바로 김여정과 문재인이 찍은 뒷배경에 이상하게 생긴 통(通) 글자를 누가 썼느냐 하면 또 역시나 신영복의 글씨였습니다.
신영복은 1968년 반체제 지하조직인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 구속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습니다. 20년 수감 생활하다가 전향서를 쓰
고 1988년에 가석방되었는데, 당시 통일혁명당에 당국의 수사망이 좁혀져 오니 김일성이가 통일혁명당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해 무장
간첩을 침투시켰는데 그 무장간첩이 침투하는 과정에서 우리 군에 의해 체포되어 전부 일망타진 되었습니다. 그리고 통일혁명당 중 핵
심 멤버들은 사형당했습니다. 당시 사형당한 사람들은 북한에서 영웅 칭호를 받았습니다. 그 외 사형당하지 않고 무기징역을
==
그런데 봉건이면 자기들이 봉건제도이지 어떻게 대한민국이 봉건사회라는 것입니까? 대한민국은 하늘이 개인에게 준 천부적인 인권
이 보장되는 그런 나라입니다. 북한은 말 한마디 잘못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청산가리 황산가리 먹여 죽이거나 고사포로 쏴 죽이는 나
라입니다. 여기에 무슨 개인의 자유가 있습니까? 그런데도 이러한 대한민국을 뒤집어엎어서 자기네들은 항상 민주제도, 민주사회를 수
립한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렇게 위장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의 특징은 항상 핵심인사들은 모두 지하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바깥에 나와서 떠드는 사람들은 합법적인 지위(교수 학
자, 변호사, 국회의원, 대통령) 가지고 있어서 의심받지 않는 인물들을 겉으로 내세웁니다. 따라서 문재인 정권 때도 그렇고 이상한 이
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습니다. 예를 들면 문재인 정권 시절 외교특보라는 문정인 교수나 통일부 장관 했던 정세현 따위의 그런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그들의 세계에서 볼 때 너는 열심히 짖으면 이러 저러한 자리를 보장해 줄 테니까 열심히 떠들어! 짖어! 이런 역할이 아닌가 생
각됩니다. 핵심이자 본질들은 절대 드러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나 짖어대는 사람들을 보고 공분을 일으키고 하는데, 사
실 겉으로 드러나서 스피커 노릇을 하는 사람들은 사실상 모두 다 찌꺼기들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이것은 과거 주체사상 등을 직접 교육받은 핵심 운동권 사람들도 그렇게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쟤네 얘기하는 거에 흥분할 필요 없
다. 쟤네들은 자리 하나 보장받기 위해서 저런 짓을 하는 거다」
항상 좌익투쟁 경력의 남로당 출신들은 「정수조직」이라고 해서 지하에 잠복하여 지령만 내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겉으로 드러나 날뛰
는 무리를 아무리 잡아다 법으로 처벌 해봤자 그 아래에 숨어있는 지하 핵심을 일망타진하지 않는 한 언제든지 다시 복원된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지금이라고 그것이 달라졌겠습니까?
「다크 엔젤(원제 Fallen)」이라는 제목의 미국 영화가 있습니다. 그레고리 호블릿과 덴젤 워싱턴 주연의 범죄 스릴러 장르의 작품인데, 이 영화에 인간의 육체를 옮겨 다니며 연쇄살인 범행을 저지르는 악마가 등장합니다. 경찰이 살인범을 체포해도 범죄가 계속될 수밖에
없는 까닭이듯 대한민국에서 종북세력을 뿌리 뽑는다는 것이 마치 이것과 비슷해 보입니다.
그리고 무장투쟁 혁명전략이라는 것을 수립해서 통일혁명당은 모택동식이나 베트콩 게릴라전법 및 동학 농민봉기방식 무장투쟁 혁명
적 역량을 수립합니다. 무장투쟁 혁명전략은 주자 성리학 위정척사파들이 즉, 수구 쇄국 세력들이 항상 내세우는 일종의 종교와도 같
은 것입니다.
북한과 합의로 농촌에서는 테러 투쟁을 하고 도시에서는 폭발물을 이용해 주요 시설과 청와대를 폭파하고 무력 투쟁으로 사회 혼란을
조성하기로 하고 이를 위해 조직원 이진영과 오병현을 특수 전술 교관 후보로 선발합니다. 이들은 1968년 4월 월북시켜 무기 조작, 폭
발물을 취급하는 특수교육을 받습니다. 또 유사시에 대비해 각 지역 무기고 획득과 무기 비축방법 등을 연구하고, 지형 정찰을 시행, 유
격전에 대비한 신체훈련과 더불어 사상토대 강화훈련을 합니다.
1946년에 대구에서 폭동 일어날 때, 1948년 제주에서 폭동이 일어났을 때, 1948년 10월 여수·순천 반란 사건이 벌어질 때 거의 비슷하
게 가장 먼저 무기고를 공격하고 총기를 획득합니다. 1980년 광주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통일혁명당원인 이진영과 오병현을 월북시켜 거기서 무기 조작법, 폭발물 취급 훈련을 받던 중, 남한에서는 통일혁명당 사건 터
져서 주모자들이 모두 체포되니 이 사람들은 그냥 북한에 눌러앉아 통일전선부로 들어가서 대남방송 요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남한에서 잡힌 통일혁명당 주범 「김질락」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김질락은 위의 테스 형 「김종태」의 친조카입니다. 이 사람이
「내가 알고 보니까 이 공산당한테 속았구나, 나는 죽더라도 나는 공산당으로 죽기는 싫다」라고 하면서 통일혁명당 관련돼 본인이 체험
하고, 북한에 가서 간첩 교육을 받고 어떤 활동을 했으며, 자신들의 사상은 무엇이었고 돈은 누구한테 받았는지 하는 것을 상세하게 쓴
『어느 지식인의 죽음』이라는 책을 남겼습니다.
이 책을 통해 통일혁명당이 이런 조직이었구나 하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의 책에 보면 「통일혁명당이 북한의 지령을
받은 비밀 지하당 조직이라는 데는 이의가 있을 리 없고, 통일혁명당 조직 사항과 활동상이 김일성에게 직접 보고되었다는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반미 반제국주의를 전면을 내세우는 것은 공산주의자의 ABC다. 나는 『청맥』 지면을 통해 광범위한 반미. 반 괴뢰 투
쟁을 선동했다.」
그리고 이 사람은 변호인 심문도 거부하고, 나는 대한민국이란 국가에 큰 죄를 지은 사람이 이기 때문에 내가 무슨 얘기할 자격도 없다
면서 마지막 진술에서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지은 죄가 얼마나 큰지 뉘우칠 뿐이며 정당함을 주장할 것이 없다. 그동안 공산주의를 위
해 싸워왔으나 이제는 공산주의자로서 죽고 싶지 않다. 나는 순수한 인간으로 돌아가 죽고 싶다」 이 사람은 정말로 참회를 한 것입니
다. 공산당 폭력혁명 활동이 얼마나 무지막지한 엉터리였는지 이 사람은 죽기 전에 깨달은 것
==

==
『어느 지식인의 죽음』이라는 책을 보면 무시무시합니다.
「우리는 마르크스 레닌주의에 입각하여 반제, 반봉건 반식민의 민주사회를 거쳐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목적이며…. 우리 당
은 비단 이북의 노동당 만이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의 공산당과도 형제당이 되는 것이며 국제 공산당원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남반부를 불법 강점하고 조국 통일을 방해하는 원수 미제와 그 주구들을 몰아내고 사회주의 낙원을 건설함에 있어서 마르크스 레닌주
의 이론으로 무장하고 중앙당(북한노동당)의 지도아래 혁명은 수행하기 위하여 통일혁명당 창당을 선언한다.」
이렇게 어느 지식인의 죽음을 쓴 김질락이 바로 문제의 신영복을 지도하는 지도원이었고, 그리고 신영복이 한명숙 국무총리의 남편 박
성준을 포섭했는데, 1968년 8월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일망타진되어 모두 체포됐습니다
한명숙의 남편 박성준은 1967년 6월 신영복에게 포섭되었고 한명숙도 당시 징역 1년에 집행유예를 선고받았습니다. 박성준은 끝까지
전향서를 쓰지 않고 형 만기를 채우고 나온 본질적인 공산주의자입니다. 신영복은 빨리 출소하기 위해 전향서를 썼습니다. 전향서로
써 놓고는 나중에 말을 바꾸고 변명을 합니다.
신영복은 민족해방전선 책임비서였습니다. 수사발표에 따르면, 맨 위에 북한에 북한노동당 대남사업 총국이 있고 그 아래에 김종태를
당수로 하는 남한 지하당인 통일혁명당이 있고 통일혁명당 내에는 <민족 해방 전선>, <조국 해방 전선> 양대조직으로 지도부가 구성되
어 있는데 <민족해방전선>이 책임비서, 신영복이 조직책임, 이진영이 교양책임비서 였습니다. 한명숙의 남편 박성준이 주도한 기독청
년 경제복지회등 8개 서클을 통혁당의 민족해방전선 산하조직 가운데 하나라고 발표합니다.
이런 통일혁명당에 대한 수사망이 좁혀오다 보니 북한에서는 얘들을 빨리 구출해야 하겠다 해서 무장간첩을 남파했는데 그 무장간첩
단을 싣고 북한 753부대 소속 무장공작선이 1968년 8월 20일 제주도에 들어왔는데, 우리 군경이 이 공작선을 격침했습니다.
모두 14명 중 12명을 사살하고 2명을 체포해서 심문해 보니까 「우리는 김종태와 김질락 같은 통일혁명당의 위대한 전사들을 구출해
서 북한으로 데려가 가지고 북한 정권 수립 20주년 기념일인 9.9절에 남한 대표로 김일성 앞에서 연설시키기 위해 내려왔다」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대한뉴스 제 690호-간첩단 체포 https://youtu.be/BQa8ijWVoK0
그런데 위에서 이야기한 무기 조작 등 교육을 위해 월북했다가 통일혁명당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북한에 눌러앉아 대남방송을 했다고
하던 그 이진영 이란 사람은 통일전선부에서 대남공작 업무를 수행하던 중 말 한마디 잘못해서 숙청당합니다. 「이진영」이 김일성의 사
진을 보고 「아 정말 잘~생겼다」 이렇게 말을 했는데 그것이 「민족의 태양 위대한 수령 동무를 모욕한 죄」라고 해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버렸다고 합니다. 대한뉴스 제 685호-지하간첩 일망 타진 https://youtu.be/85_74uzJEOc

==
신영복은 민족해방전선 책임비서였습니다. 수사발표에 따르면, 맨 위에 북한에 북한노동당 대남사업 총국이 있고 그 아래에 김종태를
당수로 하는 남한 지하당인 통일혁명당이 있고 통일혁명당 내에는 <민족 해방 전선>, <조국 해방 전선> 양대조직으로 지도부가 구성되
어 있는데 <민족해방전선>이 책임비서, 신영복이 조직책임, 이진영이 교양책임비서 였습니다. 한명숙의 남편 박성준이 주도한 기독청
년 경제복지회등 8개 서클을 통혁당의 민족해방전선 산하조직 가운데 하나라고 발표합니다.
이런 통일혁명당에 대한 수사망이 좁혀오다 보니 북한에서는 얘들을 빨리 구출해야 하겠다 해서 무장간첩을 남파했는데 그 무장간첩
단을 싣고 북한 753부대 소속 무장공작선이 1968년 8월 20일 제주도에 들어왔는데, 우리 군경이 이 공작선을 격침했습니다.
모두 14명 중 12명을 사살하고 2명을 체포해서 심문해 보니까 「우리는 김종태와 김질락 같은 통일혁명당의 위대한 전사들을 구출해
서 북한으로 데려가 가지고 북한 정권 수립 20주년 기념일인 9.9절에 남한 대표로 김일성 앞에서 연설시키기 위해 내려왔다」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대한뉴스 제 690호-간첩단 체포 https://youtu.be/BQa8ijWVoK0
그런데 위에서 이야기한 무기 조작 등 교육을 위해 월북했다가 통일혁명당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북한에 눌러앉아 대남방송을 했다고
하던 그 이진영 이란 사람은 통일전선부에서 대남공작 업무를 수행하던 중 말 한마디 잘못해서 숙청당합니다. 「이진영」이 김일성의 사
진을 보고 「아 정말 잘~생겼다」 이렇게 말을 했는데 그것이 「민족의 태양 위대한 수령 동무를 모욕한 죄」라고 해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버렸다고 합니다. 대한뉴스 제 685호-지하간첩 일망 타진 https://youtu.be/85_74uzJEOc
이 사람들이 추구하는 세상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개인의 자유? 김정은이가 자기의 이복형 김정남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독극물로 암살하는 것을 다들 TV로 봤을 겁니
다. 북한은 그런 세상입니다. 재판이고 뭐고 없습니다. 즉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이 말이 곧 법이고 현재는 김정은이가 곧 신이므로 지
시하면 곧바로 고사포로 쏴 버립니다.
그런 세상이 좋답니다. 그럼 그렇게나 좋은 지상낙원에 가서 행복하게 잘 살면 되는 건데, 왜 여기에 와서 그렇게나 복잡하고 힘들게시
리 국가보안법까지 철폐 투쟁까지 하면서 무리하게 왜 대한민국에서 살려고 하는 것일까요? 대한민국이라는 세상마저 북한과 같은 그
런 세상으로 만들기 위한 특별한 사명을 부여받은 사람이 아니고서야 달리 이런 사람들을 무엇이라고 이해해야겠습니까?
일망타진된 통일혁명당 주범 중 김종태 김질락같이 직접 북한에 가서 조선 노동당에 입당해서 간첩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사형당했습
니다. 그런데 신영복은 북한에 가서 노동당 가입은 하지 않았다고 해서 무기징역을 받습니다. 그런데 북한 김일성이가 감옥에 있는 신
영복을 구출하기 위해 별짓을 다 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살펴봐야 신영복이라는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대용 장군」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6·25 때 춘천 전투에서 대한민국을 구한 위대한 전쟁영웅이고 베트남이 멸망할 때인 1975년 사이공 주재 대한민국 공사로서 마지막까
지 한국인들을 모두 철수시키고 본인은 미처 빠져나오지 못해 월맹군에게 체포되어 5년 동안 억류 생활을 했던 그 유명한 분이 이대용
공사입니다. 이대용 공사는 77년 7월에 어렵게 뚫은 비밀루트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밀서를 보낼 수 있었습니다. 유언이나 다름없는 편
지내용을 본 박 대통령은 눈물을 흘리면서 『이 사람은 꼭 귀환시켜야 한다.』라고 몇 번이고 강조했다고 합니다.
당시 우리 외교부가 베트남 억류 공관원 석방 교섭 회담(뉴델리 3자회담)을 했는데 2016년 그에 관련된 외교문서가 비밀이 해제되어
일반에 공개되었습니다. 공개된 내용에 의하면 월남 패망 당시 사이공 대사관의 우리 외교관 이대용 공사, 안희완 영사, 서병후 경무관
3명이 체포되었는데 이 세 명을 북한이 어떡하던지 북한으로 끌고 가려고 별짓을 다 합니다. 그러나 전 세계의 외교관들은 모두 면책
특권이 있으므로 강제납치하면 심각한 국제외교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북한으로 데려가려는 한국 외교관들에게 압력을 넣고 협박 공갈을 하고 이 사람들에게 내가 스스로 북한에 간다는 서약서를 쓰
도록 수없이 강요했습니다. 그러나 이대용 공사는 내가 죽으면 죽었지 절대 못 간다고 끝까지 버텼습니다
우리 정부는 박정희 대통령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대한민국의 외교관을 구출하라고 특명을 내립니다. 그래서 우리 정부는 옛날 베트남
을 식민 통치를 한 바가 있어 영향력이 있는 프랑스 정부의 중재를 요구해서, 대한민국의 감옥에 있는 북한 간첩과 사이공에 현재 억류
중인 우리 공관원을 서로 맞바꾸자고 하는 비밀회담을 1978년 7월 24일 뉴델리에서 시작했습니다.
==
당시 우리 외교부가 베트남 억류 공관원 석방 교섭 회담(뉴델리 3자회담)을 했는데 2016년 그에 관련된 외교문서가 비밀이 해제되어
일반에 공개되었습니다. 공개된 내용에 의하면 월남 패망 당시 사이공 대사관의 우리 외교관 이대용 공사, 안희완 영사, 서병후 경무관
3명이 체포되었는데 이 세 명을 북한이 어떡하던지 북한으로 끌고 가려고 별짓을 다 합니다. 그러나 전 세계의 외교관들은 모두 면책
특권이 있으므로 강제납치하면 심각한 국제외교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북한으로 데려가려는 한국 외교관들에게 압력을 넣고 협박 공갈을 하고 이 사람들에게 내가 스스로 북한에 간다는 서약서를 쓰
도록 수없이 강요했습니다. 그러나 이대용 공사는 내가 죽으면 죽었지 절대 못 간다고 끝까지 버텼습니다
우리 정부는 박정희 대통령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대한민국의 외교관을 구출하라고 특명을 내립니다. 그래서 우리 정부는 옛날 베트남
을 식민 통치를 한 바가 있어 영향력이 있는 프랑스 정부의 중재를 요구해서, 대한민국의 감옥에 있는 북한 간첩과 사이공에 현재 억류
중인 우리 공관원을 서로 맞바꾸자고 하는 비밀회담을 1978년 7월 24일 뉴델리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북한 측에서는 끝없이 북한 간첩이 아니고 지금 감옥에 수용된 남조선 혁명가들까지도 포함 시켜달라고 요구합니다. 이때 남조
선 혁명가란 바로 통일혁명당 관련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수감된 통일혁명당 관련자 중에서 가장 고위층이 신영복이었습니다. 김일성은 바로 신영복을 데려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교환비율도 우리 정부는 1대1이었지만 북한은 1대 70을 요구해서 4개월간 끝없는 논쟁 끝에 우린 외교관 1명당 대한민국 감옥에 수감
되어있는 간첩 7명 비율로 즉, 우리나라 외교관이 3명이니까 북한 간첩 21명을 교환하는 회담을 했습니다. 우리 정부에서는 북한에 너
희들이 석방을 요구하는 사람이 누구누구인지 명단을 내놓으라 했더니 바로 여기에서 신영복이 똭 등장합니다. 우리 정부가 이걸 받아
보고 「이 자식들이 지금 신영복을 데려가기 위해 이 짓거리를 하는구나….」
하지만 신영복은 그 당시에 이미 『전향서』를 썼습니다. 「내가 그동안 통일혁명당에 가입 했지만 저는 이제 공산주의를 버리고 온전한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겠습니다. 그러니 선처를 바랍니다」 하고 전향서를 썼으니까 신영복은 이제 남파간첩이 아니고 대한민국 국민입
니다.
단지 이제 대한민국을 뒤집어엎기 위해 통일혁명당에 가입,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감옥에 갔지만, 「과거의 죄를 뉘우치고 앞으로 대한
민국 국민으로 열심히 살도록 선처를 바랍니다」 해서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는데 대한민국 국민을 어떻게 월북시키느냐 그것은 말이
안 된다. 그래서 대한민국 정부가 신영복은 절대로 안 된다고 해서 보내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렇게 한 것이 당시 우리 정부의 큰 실수
였던 것 같습니다. 「출신지와 관계없이 전향 좌익수를 본인 의사에 반하여 인도하는 것은 절대 불가」라는 훈령을 내렸던 것입니다.
북한이 교환비율을 결정한다면서 4개월을 끌고, 명단 선정하는 데만 7개월을 끌어가면서도 끝까지 요구한 것은 남한 출신 혁명가 신영
복을 송환 고집이었습니다. 바로 위에 신영복의 이름이 있습니다. 이것이 비밀 해제된 우리 외교부 기밀문서에서 나온 사실입니다.
북한이 계속 뜻을 접지 않고 대한민국 국민인 신영복을 요구하니까 우리 정부는 안 되겠다 하고, 북한과 협상 없이 대한민국 억류 외교
관을 다른 루트로 석방할 방법이 있다고 하며 1978년 회담을 깨버렸습니다. 이래서 우리의 그 위대하시고 고매하신 간첩 신영복 선생
이 대한민국의 은총이란 은총을 다 받으면서 여기서 살 수 있게 됐고, 급기야는 문재인의 극진한 추앙까지 받으면서 대한민국에서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때 우리 정부가 김일성이가 그렇게 원하니까 그래 보내주자고 했으면 여생을 본인이 그렇게나 원하던 사회
==
아무튼, 그렇게 되어 박정희 대통령이 이 판은 깨버리고 중앙정보부에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대한민국을 위해 열심히 일한 우리 외교
관 3명을 구하라」라고 해서 중앙정보부는 이스라엘 모사드와 접촉 해서 「아이젠버그(Shoul Eisenburg)」라는 아주 유명한 유대인 거상
을 만납니다. 이 사람은 모사드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사람이고, 우리가 핵무기 만들려고 캐나다로부터 중수로형 원자로를 도입
할 때 우리가 돈이 없어서 해외차관단을 만들어 캐나다의 원자로 살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이 아이젠버그라는 사람입니다.
이 아이젠버그가 모사드와 접촉해 이대용 공사 등 3명의 외교관은 5년의 수감생활 끝에 전두환 대통령 때인 1980년 4월 12일 아이젠버
그의 개인 비행기를 타고 귀국했습니다.
김일성이 그렇게나 북한으로 데려가려고 했던 신영복은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20년 20일을 감옥에서 살다 1987년 8월 14일 광복절 특
사로 나왔습니다. 그랬으면 좀 정신 차리고 살 만도 하지 않습니까?
통일혁명당 사건의 주범 중 하나인 김질락은 『어느 지식인의 죽음』이라는 책에서 신영복을 포섭하는 과정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9월 중순에 접어들면서 나는 이진영과 신영복을 우리 집으로 끌어들였다. 육군 중위 신영복은 이미 육사 교수부에 근무하고 있었다. 나는 이진영과 신영복을 교양(공산주의 사상주입)하면서 여러 가지로 그들의 인품과 사고의 특수성을 간파하는 데 상당히 신경을 썼
다.」
「적어도 이들 두 사람은 나를 만나기 전에 이미 사회주의에 대한 ABC를 알고 있었고, 자진해서 내가 이끄는 방향으로 따라 왔다. 나는
그들의 의식 수준이 어느 정도 사회주의의 단계에 들어갔다고 생각한 후에야 비로소 종태 삼촌으로부터 불온 문서를 받아 신영복에게
는 『청춘의 노래』, 이진영에게는 『제야의 종소리』를 주며 읽어보라고 했다. 자진해서 내가 이끄는 방향으로 왔다. 」즉, 다시 말하면 공
산주의 세계로 아주 쉽게 따라왔다는 말입니다.
「신영복은 나를 만나기 전부터 기독교 학생단체인 CCC 내의 경제복지회와 서울 상과대학 내의 경우회에 관련 하고 있었고, 구성원의
대개가 이화여대 학생으로 이루어진 여학생 서클 하나를 지도하고 있었다.」
「될 수 있으면 기존 서클에 당원을 침투시킨다는 지하당 조직 방법은 신영복에 있어서 손바닥을 뒤집는 거나 다름없었다. 나는 신영복
을 향해 조직하면서 너무 덤벼서는 안 된다고 수차례에 걸쳐 당부했다.」 빨갱이 공산당 윗대가리가 말릴 정도로 열심히 공
==
「신영복은 나를 만나기 전부터 기독교 학생단체인 CCC 내의 경제복지회와 서울 상과대학 내의 경우회에 관련 하고 있었고, 구성원의
대개가 이화여대 학생으로 이루어진 여학생 서클 하나를 지도하고 있었다.」
「될 수 있으면 기존 서클에 당원을 침투시킨다는 지하당 조직 방법은 신영복에 있어서 손바닥을 뒤집는 거나 다름없었다. 나는 신영복
을 향해 조직하면서 너무 덤벼서는 안 된다고 수차례에 걸쳐 당부했다.」 빨갱이 공산당 윗대가리가 말릴 정도로 열심히 공산주의 활동
을 했다는 뜻입니다.
이런데도 신영복은 자기가 전향서를 쓰고 석방되고 나서도 자기는 누명을 썼다고 주장합니다.
「제가 학생 서클 운동의 1세대입니다. 당시엔 통일혁명당이라는 게 없었어요.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감옥에 들어간 후에 만들어졌다
는 걸 들었죠. (날조되었다는 뜻입니다) 아무튼 감옥에 가게 되고 무기징역까지 받을 줄 전혀 몰랐죠. 당시 서울대 학생 서클 간부 하나
를 사형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고 해요」 즉, 자기는 누명을 뒤집어썼다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신영복은 출소한 후 자신의 국가반역 행위에 대해 단 한 번도 국민에게 사과하거나 사상전향을 했다는 얘기를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
다. 출소 이후 그는 시간 날 때마다 각종 인터뷰에서 통일혁명당 사건에 억울하게 연루되었다고 주장하기 시작합니다. 김질락에게 포섭
되었다는 것은 공안 당국의 누명이고, 통일혁명당은 조선 노동당과는 무관한 조직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사람이 전향서를 쓴 이유는 감옥에서 빨리 나가고 싶어서 쓴 것이지 결코 공산주의 사상을 포기해서 쓴 것이 아닙니다. 전향서 쓴 것이 들통나자 뭐라고 주장하느냐 하면 「사상을 바꾼다거나 그런 문제는 아니고, 밖에서 사회 활동을 하는 가족들이 그게 좋
겠다고 권해서 한 겁니다. 전향서를 썼느냐 안 썼느냐가 문제의 본질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 1998년 《월간말》 지와의 인터뷰」 대체 뭐
하자는 인간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태블릿 PC 따위는 필요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하던 손석희의 오마쥬 입니까?
이후 좌파언론들이 일제히 달려들어 신영복이 억울하게 간첩으로 몰렸다는 기사와 인터뷰를 마구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한겨레신
==
남한에서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처형된 김종태는 북한에서 영웅이 되었습니다. 북한이 〈기념 우표〉도 발행합니다. 김종태에게 〈공화
국 영웅 칭호〉를 수여하고 최고훈장인 금성메달과 국기훈장 제1급을 내리며 〈대규모 추모 집회〉를 열어 주었고 김종태를 기념하기 위
해 평양에 〈김종태 전기기관차공장〉이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해주사범학교는 이름을 〈김종태 사범대학〉으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김일성을 추종하고 공산주의를 위해 투쟁하다가 사랑 당하면 북한에서 영웅이 되는 것입니다. 이쯤 되면 남한 정권이나 북한 정권이나
똑같이 통일혁명당 핵심인물을 더불어 존경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영복 역시 돌아다니며 그의 사상이 변함이 없음을 과시하고 다닙니다.
한민족의 세계와의 관계방식에서 2개의 축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주체성입니다. 민족의 내부결속과 단결을 통하여 주체성을 강화하는 방식이었다고 보입니다. 북한의 경우에는 주체성을 강화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또 하나의 축은 개방성입니다.…
남한의 경우는 개방을 통해서 문화적, 물질적으로 성장했지만, 민족의 주체성을 잃고 종속화되어있다고 할 수 있지요.
- 『황해문화』 2003년 가을호 인터뷰
북한 체제에 대해 살펴보면 자본주의 제국의 적대와 봉쇄, 그리고 중·소의 간섭에도 불구하고 민족자주, 자력갱생의 기초 위에서 사회
정치적인 안정과 전후의 경제적 회생을 이룩한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 『통일, 그 바램에서 현실로』(1995년 경실련 총서 5)에 게재된 신영복의 글
나는 전향을 일찍 했어요.
(신영복은 1970년 9월 안양교도소에서 전향서를 작성했다) 물론 사상을 바꾼다거나 그런 문제는 아니고 밖에서 사회 활동을 하는 가족들이 그게 좋겠다고 권해서 한 겁니다.
- 『월간 길』, 1993년 5월호
(20대에 통일혁명당에 가담하게 된 이유에 대해) 저도 곰곰이 생각했어요. 감옥 안에 있으면서 내가 왜 그토록 어려운 일에 뛰어들었는가. 상당히 진지하게 고민해봤는데 결론은 양심문제였어요.
- 『월간 말』 1996년 8월호 인터뷰
신영복의 인터뷰 내용을 볼 때 그는 출소 후에도 자기가 가진 주체 사상적 공산주의 신념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다만 본인 사상을 전파
하는 방식이 사람들 보기에 온건하고 휴머니즘적으로 보이는 저술과 강연 활동으로 바뀐 것일 뿐입니다…. 위에 기술한 인터뷰 내용이
실린 잡지들은 신영복에게 우호적인 성향을 지닌 것들이어서 그의 사상이 더 확실히 드러납니다. 즉 사실상 전향 사실을 부인한 것이
며, 이는 사상전향서가 가석방을 위해 거짓으로 작성되었음을 확인해주는 것입니다.
1968년 간첩 신영복을 검거했던 중앙정보부의 후신이 국정원입니다. 그런 국정원 앞마당에 신영복의 간첩체로 원훈석을 제막한 이유
가 무엇일까요? 명백히 국가정보수사기관인 국정원의 정체성을 모욕하고 능멸하려는 상징성을 내포한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신영복이 죽자 좌파언론들은 이제 완전히 드러내놓고 커밍아웃을 하기 시작합니다. 한겨레신문이 「그는 본디 붉은 경제 역사학자였다」라고 기사를 씁니다. 그래 우리 빨갱이질했다 그래서 어
==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