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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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기 조선인 국적이 뭐냐는 질문은 그 자체로 국적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길을 차단하지 않나? 조선인에게 일본 국적이 부여되면서 나타나는 여러 모순점에 대한 이해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애초에 차단하고 던지는 질문이라 이런 난리를 치는 것 자체를 이해하기 어려운..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유대인 문제에 관하여>에서부터 깊이 파고 들었던 게 바로 근대사회에서의 '식민' 문제였다. 식민지란 무엇인가?
경제적 의무는 지우면서도 정치적 권리는 박탈한, 달리 표현하자면 인간을 경제적 동물로 대하면서 정치적 주체화, 인간화의 계기는 부정하는 시공간을 의미한다.
인간이 동물화되는 시공간이 바로 식민지다. 그리고 식민지 체제를 무너뜨리는 모순도 결국 이 지점에서 나온다. 결국 시민권을 부여하여 완전히 포섭하든 아니면 독립시키는 수밖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제국주의는 둘다에 반대했기에 이 모순의 진행을 가로막으려 최대한 섬세하게 시민권의 부여를 배제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제국주의를 '잉여수탈'의 관점에서만 바라보고 접근하는 일부의 입장이 통용되기 어려운 지점이 바로 여기서 나타난다. 제국주의적 지배란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속의 교환을 매개로 작동하는 질서라 수탈이 적용될 여지가 적다.
오히려 근대 자체가 '식민주의'적인 지점이 있다는 걸 인정하고 그러한 배제와 포섭의 반복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아야 한다. 내셔널리즘의 포섭과 배제가 정치적 주체의 섬세한 주조과정이라는 걸 드러내면서 인간의 동물화라는 그 이면까지 폭로해야 한다.
국적이 어디냐, 는 질문은 이런 맥락에서 분명 한계가 크다. 친일파에 대해서도 달리 생각할 여지가 많다. 진지하게 조선인이 일본인이 되어야 한다고, 그래서 조선인에게 똑같은 시민권이 부여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친일파는 독립운동가 이상으로 식민체제를 위협하는 존재였다. 제국주의에 내재한 '모순'상 그리 될 수밖에 없었다.
친일파에 대한 비판은 이런 맥락에서 좀더 섬세하게 조정될 필요가 있다. 친일파를 오늘날의 이민정책의 맥락 속에서 읽어낼 필요가 있다. 국적에 대한 논의도 그런 방향으로 가면서 식민체제를, 근대를 좀더 복합적으로 이해하도록 해야 된다. 정치가 개입한 이상 그렇게 되기는 글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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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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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타니 고진을 좋아하지 않지만, 아니 싫어하지만 그의 주장 중에 크게 공감하는 바가 하나 있다. 내셔널리즘은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에 설 때 비로소 상대화할 수 있다는 것. 아무리 래디컬해도 한 공동체 안에 속해 있으면서 공동체 전체를 낯설게 보기 쉽지 않다는 그의 논지는 그의 이론체계 전반에 걸쳐 관철되고 있다. 그 점에서 분명 가라타니는 사상적 일관성을 지니고 있는 탁월한 사상가라 할 수 있다. 아무튼 그의 말에 공감하면서도 그걸 경험적으로 느낄 기회가 많지 않았는데 이번 여행에서 그걸 좀 체감한다. 내가 어디에 속해 있었는지, 어떤 걸 제대로 보지 못했는지 등등을 좀 많이 보게 되어서 재밌었다. 정치적 좌파는 아무래도 자신이 속해 있는 공동체의 부정적인 측면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는데 바깥에서 보니 여러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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