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25

1960년대 경제발전과 민족주의 -청맥 지식인 입장을 중심으로 | Baderdene Munkhzul - Academia.edu

1960년대 경제발전과 민족주의 -청맥 지식인 입장을 중심으로 | Baderdene Munkhzul - Academia.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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碩士學位論文
년대경제발전과민족주의
­년대『청맥』지식인들의입장을중심으로­
韓 國 學 中 央 硏 究 院韓 國 學 大 學 院政治學專攻바트에르데네뭉흐졸
 

目 次
국문초록  
제  
제  
제  
 
박정희 정권 및 『청맥』의 민족주의에 대한 입장
년대 박정희 정권 민족주의
박정희 정권 초기 민족주의의 성격
 청맥 이 창간된 시점의 민족주의
 청맥 지식인들의민족주의
 청맥 의민족주의

결론
 
 
국문초록
년대경제발전과민족주의
­ 년대『청맥』지식인들의입장을중심으로­
바트에르데네뭉흐졸
 
본 연구는 년대 세대의 대표적인 잡지 가운데 하나인 청맥 의  경제발전과 민족주의 대한 입장을 비판적으로 재구성하기 위한 것이다 특 히 조국근대화를 목표로 박정희 정권이 추진했던 수출국가 주도 산업화와  청맥 지식인들이 주장했던 민족자립경제의 차별성을 규명하고자 한다 또한 표면적으로 상이한 것으로 보이는 양자의 경제 발전근대화에 대한 입장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정상적 근대화 혹은 정상적 근대 에 대 한 평가도 함께 수행하고자 했다
 청맥 은 박정희 정권과 근대화 그 당시 통치 이데올로기와 정책을 강하 게 비판하는 잡지로써 년대 박정희 정권의 진행하던 수출주도 산업화 즉 외자 외채 미국과 일본에 대한 종속화에 맞서 저항적 민족주의를 보다 직접적으로 표출했다
이에 본 연구의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양자의 차이점을 보면 첫 번째는 자주와 자립이다 청맥 지식인들 은 해방이후 년대까지 종속된 한국의 경제를 비판했으며 외자 및 원조 의 문제점을 분석하고 민족경제를 발전시키고 민족자립을 지향해야 한다고 봤다 청맥 주도 지식인들은 창간사에 나타나듯이 한국의 시급한 과제로 탈후진전략으로서 지주와 자립을 공유하며 자주와 자립의 길과 공 간을 창출하려 했다 그러나 이런 지향성은 박정희 근대화 드라이브의 핵심 인 산업개발 즉 경제문제와 정면으로 대결해야 했다
둘째 식민성과 일본의 재침략의 위험성에 대한 경계이다 한일회담으로 인한 일본 정부의 태도식민통치 無인정 및 無사과와 박정희 정권의 경제 개발을 위한 한일국교정상화와 그 과를 비판하며 일본에게 예속될 경제 와 문화식민성을 지적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년대 후반 청맥 이 한국 사회에서 금기되었던 흐  름을 대표했다면 한국사회는 청맥 이 원하는 방향보다 오히려 박정희 정 권의 원하는 방향으로 갔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이런 면에서 청맥 지식  인들의 이상과 추구하고 있던 지향들이 좌절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년대에는 실패하고 현실화되지 못 했지만 청맥 이 지적했던 일정 부  분의 논의들은 여전히 현재성이 있지 않을까 한편으로는 박정희 정권이 주 도한 국가 주도 산업화가 경제성장으로 이루어졌지만  년대를 넘 어서면서 경제위기를 통해 박정희 정부의 경제개발 델의 한계를 드러 냈던 것은 아닐까 위기 이후에 국가주도 산업화에 대해서 한국에서 회 의적인 시각과 어려 가지 입장들이 있는데 그 중에 근대화와 발전지상주의 적인 시각에 대해서 민족주의와 신식민주의론을 통해서 근본적으로 비판하 는 주장도 있었다 이렇게 보면 청맥 의 논의 중에서 경제성장과 사회발전  적인 측면에서 아직도 주목할 만 한 주장과 의미 있는 지적이 존재했다는 것을 제시했다는 것이 본 논문의 가장 큰 의의라고 할 수 있다 
주제어 경제발전 민족주의 청맥 지식인 근대화 자립경제 종속 식민성



제 1장 서론
제 1 절 연구목적
본 연구는 1960년대 4·19세대의 대표적인 잡지 가운데 하나인 청맥 의  경제발전과 민족주의 대한 입장을 비판적으로 재구성하기 위한 것이다 특. 히 조국근대화를 목표로 박정희 정권이 추진했던 수출국가 주도 산업화와, /  청맥 지식인들이 주장했던 민족자립경제의 차별성을 규명하고자 한다 또 / . 한 표면적으로 상이한 것으로 보이는 양자의 경제 발전근대화에 대한 입장/ 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정상적 근대화 혹은 정상적 근대 에 대한 평가“ ” “ ” 도 함께 수행하고자 한다.
60년대 당시 박정희 정권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지식인들의 입장이 적지, 않았다 이러한 많은 지식인들의 활동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곳은 학. 술지영역이었다. 『사상계』 『, 한양』 『, 창작과비평』 , 청맥 등많은잡지를 통해 지식인들의 입장이 대중에게 전달되었다.
본 논문은 그중 한 흐름인 청맥 지식인들의 입장을 통해  60년대 한국 사 회를 더 살펴보려고 한다 즉. , 60년대 박정희 정권이 주도한 정책과 사회 흐 름을 비판한 지식인들의 주장과 입장 경제발전 및 민족주의 담론을 중심으, 로 다룬 것이다.
『청맥 은민주주의와민족주체성의확립을강조하면서대중 민중 과민족』 ( ) 양자에 깊이 연관되는 방향성을 강조하고자했던 잡지였다.1) 이런 점에서 당 시 지식인 잡지의 확대와 이를 통한 비판적 지식인의 담론 확산은 60년대를 올바로 견인하는 가장 중요한 지향성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1964년 8 월 창간된 청맥 은 바로 이러한 정치사회적 담론이 그 영향력을 점점 넓혀 서가면서 형성된 대표적인 지식인잡지였다고할 수 있다.2) 청맥 은 박정희 정권과 근대화 그 당시 통치 이데올로기와 정책을 강하게 비판하는 잡지로,
 
써 1960년대 박정희 정권의 진행하던 수출주도 산업화 즉 외자 외채 미국, , , 과 일본에 대한 종속화에 맞서 저항적 민족주의를 보다 직접적으로 표출했
다.
즉 조국근대화를 목표로 박정희 정권이 추진했던 수출국가 주도 산업화, / 와 60년대 지식인들이 주장했던 민족자립경제의 차별성을 규명할 때 청맥/  지식인들의 지식 사회내 위치를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다.
또한 박정희 근대화 주도 이데올로기와 4·19이후 1960년대 지식사회 흐름 중 하나인 청맥 지식인들의 근대화를 바라본 이데올로기의 차별성과 공유 된 논리들을 규명함으로써 60년대 경제개발과 민족주의 담론의 시대적 의미 를 밝히고 한다. 그러므로 이 논문에서 주목하는 것은 1960년대 한국 경제발전과 사회 지 향에서 지식인들이 어떤 반응을 보여주었으며 어떤 근거로 비판을 하고 어떤 사회를 추구했는지 또한 양자의 경제 발전근대화에 대한 입장에서 공통적, / 으로 발견되는 정상적 근대화 혹은 정상적 근대 에 대한 평가이다“ ” “ ” . 제 2 절 문제 제기 및 기존연구검토
박정희 시대(1961~1979년 에는 두 가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 존재한다) . 하나는 박정희 체제에서 경제개발이 단기간에 압축적으로 진행되었고 그로 인해 한국 사회의 근대적 전환이 촉진되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박정희, 체제가 아래로부터의 민중적 저항에 의해서 붕괴되었다는 것이다.3) 더불어 지식인들에게 큰 자극을 준 한일국교정상화를 통해 박정희 정권의 민족적 민 주주의의 허구를 인식하게 된 지식인들의 비판적인 목소리들이 많은 언론을 통해 표현되었다 본 연구는 당시. 60년대 젊은 지식인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청맥 잡지를연구대상으로삼았다 특히 청맥 에실었던여러글중에서』 . 『 』 경제발전과 민족주의 담론을 중심으로 쓰인 글 중심으로 연구를 하고자 한
다.
박정희 정권의 집권 첫 해이자 한일회담 운동이 한창인 1964년 창간된 
 
청맥 은 박정희 정권에 대한 가장 비판적인 지식인 잡지였다는 점에서 주목 받았다 청맥 은.  1960년대 지식인 집단의 지형도에서 가장 급진적인 위치 를 점했고 그들의 민족주의 담론 역시 그러했다 청맥 지식인들은, . 4·19 세 대 즉 식민 말기에 태어나 해방기 및 한국 전쟁기에 소년시절을 보낸 침묵, ‘ 하는 세대(silent generation)’가 자기증명에 최초로 성공한 젊은 지식인층 이라 할 수 있다.
 청맥 은 50년대대표적인지식인잡지였던 사상계 에비해상대적으로젊『 』 은 시대 지식인들에게 인기를 끌었고 4·19 세대라고 일컬어지는 새로운 지식 인층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청맥 에 참여하거나 글을 기고한 지식인 그룹은.  4·19의 세례를 받았던 집단 기성필자 그리고 새롭게 대두하고 있는 신진연, , 구자 등으로 대별된다.4) 청맥 은 관심을 끌면서 젊은 전임강사 시간강사 , , 현역기자 대학원생들이 청맥 주변에,  여들어 새로운 필자군을 형성했 다.5) 이들은 사회운동적 전망을 가진 것은 아니었으나, 4·19를 직간접적으· 로 경험한 세대로서 한국의 후진성과 식민성에 대한 다른 감수성을 보이며 기성 정치학계문단 질서에 비판적 입장을 제기했다· · .6)
청맥 지식인 집단은 식민성에 대한 재인식을 통해 민족주의 담론을 급진‘ ’ 화하면서 새로운 저항 담론을 생산 하려고 하였다 즉 청맥 은 박정희 진.  反 영을 대표하는 비판적 그룹으로 저항적 민족주의를 내세웠다.7) 박정희 정권 과 60년대 지식인들은 똑같은 식민성과 민족주의라는 두 담론을 주도적으로 형성하려 했으나 양자가 가고자 했던 과정과 목표는 각기 달랐다.
5·16쿠데타 이후 한국의 지식인 사회는 양극화된 양상을 보였다 지식인이. 란 가장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전문적인 지식을 근거로 생활하는 존재라 할 수 있다 이 때 지식인의 존립근거가 되는 지식은 크게 두 가지 차원으로 나. 눌 수 있다 첫째 전문적기능적 지식이다 이는 학문 행정 문화 예술 등. , · . , , , 각 분야에 관한 전문적인 정보 기술 과학에 대한 지식이라 할 수 있다 둘, , .
황병주 「 년대 비판적 지식인 사회의 민중인식」 『기억과 전망』 쪽 박태순 김동춘 『 년대의 사회운동 까치』 쪽
이동헌 「 년대 청맥 지식인 집단의 탈식민 민족주의 담론과 문화전략」 역 사와 문화 년 제 호 쪽 위의 논문 쪽
째 사회 발전의 방향성에 대한 지식이다 지식인은 전문적기능적 지식의 소, . · 유자로서만 사회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사회의 현실과 역사발전의 총체적 방향성을 고민하는 존재이다.8)
한국사회에서 민족주의의 강력한 영향력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었으나, 1960년대 전반 민족주의 담론의 폭증은 이전 시기와는 구분되는 뚜렷한 특 징 중의 하나였다 민족주의는. 1950년대 일민주의 등에서 드러나듯이 국민 화 담론을 구성하는 주요 요소이기는 하였으나 반공 반일과 결합하여 전, ‘ ’·‘ ’ 쟁과 식민의 기억을 재생하는 위기 담론 이상을 벗어나지 못했다.9) 같은 시 기 대표적인 지식인 잡지였던 사상계 도 반공주의와 자유민주주의 담론『 』 ‘ ’ ‘ ’ 에 경도되어 있었고 민족주의를 주요한 가치로서 강조하기는 하였지만 동양, 적 습속 아시아적 후진성을 강조했다, . 1960년대 중반에 들어서야 민족주의 를 둘러싸고 새롭게 형성된 담론장 속에서 지배와 저항진영의 민족주의 담론 은 재구성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청맥 의 민족주의 담론 분석은 비판적 지.  식인들의 저항성을 확인하는 것을 넘어서 60년대 본격적으로 가시화되었던 민족주의 담론의 재구성 과정을 해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청맥 에 대한 기존 연구는 문학비평사의 맥락에서 접근하는 연구가 주를 이루는 가운데 민중 개념과 같은 개별주제에 대한 연구가 부분적으로 이루, ‘ ’ 어졌다.10) 하상일 전용호 노지승 경우에는 문학비평적인 입장에서 청맥, ,   을 소개하고 문학적인 지향을 언급했으며 김건우 황병주 이동헌 같은 경우, , 에의 기존 논의는 청맥 의 민족주의를 반외세 진보적 제 세계적 민족  ‘ ’, ‘ ’, ‘ 3 ’ 주의로 규정하고 이러한 경향이 민중 개념 문학 담론에서의 주체성논의로, , 어떻게 발현되었는지를 분석하려고 했다.11) 그러나 기존 연구에서는 청맥 
노영기『1960년대 한국의 근대화와 지식인 서울 선인』( ; , 2004), 7쪽.
이동헌 「 년대 국민화담론 연구 道義교육을 중심으로」 『한국학논집』 년 제 호
대표적인 연구는 다음 같다 하상일 「 년대 문학비평과 청맥  」 『국제어문』 국제어문학회 전용호 「 년대 참여문학론과 청맥  」 『국어국문학』 하상일 「 년대 청맥 의 이데올로기와 비평사적 의미  」 『한국문학 이론과 비평』 김건우 「 년의 담론 지형 반공주의 민족주의 민주주 의 자유주의 성장주의」 『대중서사학회』 황병주 「 년대 비판적 지 식인 사회의 민중인식」 『기억과 전망』
의 민족주의 담론이 경제발전과 관련되어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성되었으며, 어떤 전개과정을 거쳤는지 그리고 새로운 민족적 지식의 구축을 위해 어떤, 자원이 동원되고 생산되었는지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이런 면에서 본 연구에서 기존 연구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지 않았던 청맥  정치사회적인 분야 즉 경제개발과 민족주의적인 입장 구체적으로 정부· , , 수출주도 산업화 및 외자 외채 미국과 일본에 대한 종속과 저항적 민족주의, , 를 통해서 비판한 입장을 분석하고자 한다 뿐만 아니라 청맥 의 압축적인.  경제개발과 민족적인 담론을 둘러싼 논의들을 밝히며 국가수출주도 산업화/ 에 대한 대안으로 청맥 지식인들이 외자 및 외채가 최소된 자립경제와 민‘ ’  족경제 그리고 제 세계의 민족주의의 저항성을 강조하면서 신식민주의 종속3 이 60년대 한국정치경제에서 어떻게 지속적으로 유지되었는지 설명하는 논 리를 분석할 것이다.
제 3 절 연구방법 및 범위
본 논문은 1964년에서 1967년 사이 발간된 차 자료 청맥 을 주요 대상1  으로 한다 그 이유는 청맥 은.  60년대 민족주의 및 경제개발에 대한 입장을 그당시출간된 사상계『 』 『, 한양』 『, 창작과비평 보다직접적으로다루고있』 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민족주의와 자립적 경제구조 확립이. 4·19 세대라고 일컬어지는 새롭게 부상한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논의되었고 한국의 후진성, 과 식민성에 대한 다른 감수성을 보이며 기성 정치학계문단 질서에 비판· · 적 입장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청맥 은 문학경제정치민족 등 다양한 글들로 구성되었다 본 논문은 이 · · · . 중에서 경제민족 분야의 글을 중심으로 경제개발과 민족주의에 대한· 입장을 해석할 것이다 청맥 은 출간 된 첫 해 한일국교 정상화를 둘러싼 여러 비.  판과 반대 글들이 청맥 에 실렸다 처음에 정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지  .
 
만 그 이후 1966년 중반부터 문학비판 면이 더 많이 언급되기 시작했다 특. 히 청맥 에서 경제개발과 민족주의 관련된 글을 대다수 다룬 권두언 특집  , 에 글들의 내용을 분석하며 어떤 근거로 이러한 비판들을 했는지를 분석하고 자 한다.
제 1 장에서 본 연구의 목적과 왜 청맥 을 중심으로 분석하고자 했는지  , 기존연구들의 의의와 한계를 다루고 본 논문의 연구방법과 분석대상인 차1 자료에 대해 소개할 것이다 또한 본 논문을 통해 얻을 성과와 의의는 무엇.
인지를 간략하게 언급한다. 제 2 장에서는 1960년 지식 사회 변화의 주요 원인들을 다룰 것이다 지. 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준 4·19와 그 이후 지식 사회의 흐름 지형을 구체적, 으로 서술한다. 4·19이후 5·16군사 쿠데타 과정 속 지식인들의 움직임과 그 이후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식인들 입장을 다루고자 한다 또한 분단국가로. 서 한에게 크게 영향을 준 미국과 일본 관계에서 지식인들의 입장을 살펴 보고자 한다 이 안에서 특히 지식인들에게 큰 자극을 준 한일국교정상화와. 국교정상화 반대운동 이 과정에서 지식인들이 주장했던 저항적 민족주의와, 박정희 정권에 대한 비판적인 담론을 분석할 것이다. 제 장에서는3 1960년 경제발전과 민족주의를 청맥 지식인 중심으로 해  석해 보고자 한다 즉 청맥 글 분석이 다수를 차지할 것이다 청맥 의 필. ,  .  자들 즉, 4·19 세대 지식인들이 정부 수출주도 산업화 및 외자 외채 미국과, , 일본에 대한 종속을 저항적 민족주의를 통해서 비판한 논리 근거를 분석하, 며 어떤 원인으로 박정희 정권과 대립했는지를 분석하고자 한다 구체적으. 로 청맥 의 압축적인 경제개발과 민족적인 담론을 둘러싼 논의들을 언급한
다.
또한 국가수출 주도 산업화에 대한 대안으로 청맥 지식인들이 주장했/ ‘ ’  던 외자 및 외채가 최소된 자립경제와 민족경제 그리고 제 세계의 민족주의3 의 저항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신식민주의 종속이. 60년대 한국정치경제에서 어떻게 지속적으로 유지되었는지 설명할 것이다 즉 그 당시에 사회 지형. , , 경제발전을 토대로 이어진 민족경제 및 자립경제 외국 자본과 원조문제 한, , , 일국교정상을 둘러싼 지식인들의 입장과 주장을 밝히자고 한다. 마지막으로결론에서는 청맥 지식인들의 비판적인 입장을 평가하면서 양 쪽이 표면적으로 수출지도 산업화와 저항적 민족주의 자립경제 측면서 대립, 하고 있지만 동시에 경제발전에 대한 시각에 있어서는 유사한 입장을 보였다 는 점을 분석하고자 한다 즉 표면적으로 상이한 것으로 보이는 양자의 경제. , 발전근대화에 대한 입장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정상적 근대화 혹은/ “ ” “정상적 근대 에 대한 평가도 함께 수행하고자 한다” .
제 4 절 연구자료
 청맥 은 1964년 월에 창간된 종합 월간지로 당시 대학생들을 비롯한 젊8 은 지식인들에게 인기가 높았던 잡지이었다 그러나 청맥 지의 발행인과 편.  집자들이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되어 일부는 사형을 당했다‘ ’ . 1967년 월호를 끝으로 폐간되기까지 청맥 은 발행기간 중 책을 내지 못한6  경우가 많아 실제 발행 통권 수는 총 27권이다.12)  청맥 은비슷한시기발행된 사상계 『 』 『, 한양』 『, 창작과비평 등에비하면』 상대적으로 매우 짧게 존재했던 잡지다 그러나 기성의 관점보다는 젊고 비. 판적인 생각을 수용하고자 하는 의욕으로 조동일 백낙청 김우창 구중서 등, , , 이후 한국 문학사에서 큰 활약을 펼치게 된 젊은 비평가들에게 지면을 내줄 수있었다 조동일의. 「〈팔자소관 골수에찬노예근성 백낙청의 궁핍한시〉 」, 「 대와 문학정신 김우창의」, 「T. S. 엘리오트의 예 는 그들의 대표작에 해당된」
다.
또한 청맥 은 한국의 정치인과 지식인 자본가 등 지배계층의 보수주의가  , 형성된 과정을 분석하면서 그 기본 성격이 외세에 기대어 형성되었음을 비판 했다 이처럼 청맥 은 기성세대와의 차별화를 통해 젊고 비판적인 지식인들.  의 참여를 유도하는 데 성공했고 실제로 1960년대 중반 청맥 은 사상계    보다 진보적인 지식인 잡지로서 대학생 지식인층의 관심을, 았던 것으로 보인다 청맥 은 식민성의 문제를 과거 식민지시기에 국한된 것이 아닌 현. 
 
재 한국의 현실로 인식하고 제국식민 구도를 상정하였다 탈식민 이후 식’ , / . ‘ 민성에 강조는’ 60년대라는 시기에서 분명 이례적인 현상이었다 청맥 초.  기 정치경제적 영역에 국한되었던 식민성 개념은 문화식민지론을 통해· ‘ ’ ‘ ’
‘문화 영역으로 확장되었고 이후 민족문화론으로 이어졌다’ , ‘ ’ .13)  청맥 창간사 일부를 보면 창조 투쟁 발전을 절규하며 유린된 사회정의 , , 를 바로 잡고 민족의 올바른 진로를 재고하며 불패의 정의 편에 서서 민족대 의를 고창하고 주권국민의 긍지를 유지하며 대중과 더불어 호흡할 수 있는 생명력을 평이하게 다루어 레의 욕구를 발표하고 지표를 지시하는데 있음 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14) 이는 월 혁명으로부터 촉발된 세대적 명제에4 온전히 상응하는 것으로 60년대 지식인담론의 지향점에 맞닿아 있다. 물론 청맥 은 문화문학비평도 다루었지만 외자 외채 종속 등 한국 경  / , , 제발전을 여러 면에서 다루는 글들과 일본국교정상화 통일에 대한 정부 입, 장과 재식민지를 주의하는 민족주의 관련된 여러 글들도 실려 있다 오히려. 1964년 창간 당시부터 문화중심으로 출간된 잡지의 흐름이 갈수록 경제발 전 정부정책 민족주의 문제점들을 많이 다루기 시작하는 것은 한일회담이, , 후 민족주의가 강화된 당시 사회 분위기를 반영해 주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청맥 의 역할은 민족주체의식과 반미사상의선전⦁선동의무  기 양심적이고 애국적인 청년 지식인 학생의 결집의 구심력 당내의 지도, ⦁ ⦁ , 적 핵심의 발굴 및 당의 전위적 인자의 포섭 그리고 민심의 방향의 대한 신, 속한 파악과 여론조작에의능동적 참여 등으로 주장하기도 한다.15) 하지만 청맥 은 이런 정치운동의 흐름과 괘를 달리하여 당시 다른 잡지에 비해 비교 적 아카데믹한 분위기를 풍기면서 동시에 매우 비판적이고 참신한 논문을 게 재하였기 때문에 많은 인텔리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게 되었고 이를 통해 글, 을 발표하거나 발표하기를 위한 청년지식인들이 서로 의기투합하였다 이처. 럼 청맥 은 월 혁명 이후의 사회적인 분위기에서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자  4
하상일 「 년대 청맥 의 이데올로기와 비평사적 의미『 』 」 『한국문학이론과 비 평』 년 제 호 쪽
김진환 창간사「 」 청맥 년 월호
김질락 「주암산」 『북한』 본고에서는 박태순 김동춘⦁ 쪽에서 재인용
신의 논리를 설파할 수 있는 장으로써 대단히 매력적인 잡지였음에 틀림없 다.16) 이들대부분은 50-60년대에대학을다니면서후진한국의 경제건설과 사회개혁을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성찰하고 그 결과를 청맥 을 통해서 발표했다.17)
 청맥 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민족의 통일과 민족의 주체성을 확립하는 , 것을 최우선의 목표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주체성의 문제는 대외적. “ 인 문제이며 우리의 독립성과 자립성을 주장하는 행위” (1960년 11월호 권 두사 라는 점을 분명히 함으로써 민족주의가 청맥 의 뚜렷한 정신적 기반이)   되었음을 밝혔다.
물론 청맥 지의 발행인과 편집진 및 몇몇 필자들이  1968년 통일혁명당‘ ’ 사건18)에 연루되어일부는사형을당하고,19) 청맥 은 통혁당서울시지부의 기관지로 알려지면서 이 잡지는 그 동안 한국 지성사에서 잊힌 상태로 아 있었다 그러나 청맥 은 통혁당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수많은 비판적 지.  식인들의 글이 발표되었고 한국 사회와 문화 전반에 걸친 참신하면서 진지,
 청맥 은 발간되자마자 대학생과 지식인들 사이에서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그것은 이 종합잡지가 그 이름처럼 싱싱한 주장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민족이 걸 어가야 할 길과 국가가 취해야 할 자세에 관한 정론들이 실려 있었다 전용호 앞의 글 쪽
김삼웅 「 청맥 에 참여한 년들의 지식인들의 민족의식」  말 년 월 쪽 또한 김삼웅이 설명하기에 명이 검거되어 명의 구속자를 낸 년대 최대 의 공안사건이다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의 발표에 따르면 「주 급인 김종태 金鍾泰가 전후 차례에 걸쳐 북괴 김일성과 면담하고 북괴 대 사업총국장인 허 봉학으로부터 지령과 미화 만 달러 한화 만원 일화 만 엔의 공작금을 받 아 가칭 통일혁명당 을 결성하여 혁신정당으로 위장 합법화하여 반정부 반미데 를 전개하는 등 대정부공격과 반정부적 소요를 유발시키려는 데 주력했다」는 것이다 수사과정에서 밝혀진 통혁당사건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년 월 초 김 종태 김질락 이문규는 마르크스 레닌주의로 무장하고 중앙당의 지도 아래 혁명을 수행하기 위하여 통일혁명당의 창당을 선언한 뒤 각각 위원장 민족해방전선 책임 비서 조국해방전선 책임비서로 자임 지도부를 구성하여 조직 확대에 착수했다 김 질락은 곧 이진영과 신영복을 이문규는 이재학과 오병철을 포섭 전선지도부를 구 성하고 이들 전선지도부는 다시 임중빈김희순 권오창 이종태 노인영 박성준 이영윤 등 학생운동 출신자들로 당소조를 조직 이들로 하여금 새문화연구회 청년문학가협 의회 불교청년회 민족주의연구회 경우회 동학회 기독청년경제복지회 학사주점 년대 학사회 등의 서클을 운영하면서 이를 기반으로 대중활동을 전개토록 했다 김종태 김질락 이문규는 사형되었고 김진환은 년 복역하였다
한 학문적 접근 태도로 당대 지식인 사회에 큰 방향을 일으켰다. 1967년 6 월호를 끝으로폐간되기까지 청맥 에는잡지의 성격과 부합하는 진보적이며 현실 비판적인 문학 작품과 비평문이 거의 매호 수록되었다.20) 이런 점에서  청맥 을 오히려 4·19 젊은 세대들과 넓은 세력들이 참여한 대중적인 잡지라 고 평가할 수 있다.
결국 청맥 은  1960년대 민족주의와 민족 주체성의 확립을 강조하면서 대 중 민중 과 민족 양자에 깊이연관되는 방향성을 강조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 . 런 점에서 당시 비판적인 지식인 잡지의 확대와 저항적 민족주의를 통한 지 식인담론의 확산은 60년대를 올바로 견인하고자 했던 복원되어야할 중요한‘ ’ 지향성 가운데 하나임에 틀림없다.21) 1964년 월 창간된 청맥 은 바로 이8  러한 정치사회적 담론이 그 영향력을 점점 넓혀서가면서 형성된 대표적인 지 식인잡지였다고 할 수 있다.
 
제 2 장 1960년대 지식 사회의 변화
1960년대지식인 사회의 변화를 이해하기위해서 1950년대와 1960년대 초 반의역사적인사건및흐름을살펴보아야한다 특히 청맥 은주로. 『 』 4·19세 대가 필자와 독자로서 구성되었기 때문에 이 시대의 지식인들의 생각의 변화 와 그 이후의 사회와 정치에 비추어진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 제 장은2 구성되었다.
제 1 절 4월 혁명 이후 변화
1950년대 한국 사회는 분단과 전쟁의 여파로 닫힌 사회 문화의 양상을 보, 여주었다. 1945년 해방이후 민족내부의 서로 다른 이념을 가진 정치 세력이 과 북에 자리를 잡고 갈등하다가 1950년 한국 전쟁을 일으켰다 여기에. 제 차 대전 이후 세계 질서를 재편하려는 미국과 소련의 역학관계와 외세의2 개입이 전쟁을 확대시켰다 한반도는 년 동안 전쟁터가 되었고 분단은 고. 3 , 착화 되었으며 살아 은 민족 구성원들에게 이산의 아픔과 폭력의 기억은, 쉽게 지워질 수 없었다.
1960년 일어났던 월혁명4 22)은 비록 미완의혁명이라할지라도 1950년대 한국 사회가 보여주던 닫힌 문화를 깨뜨리고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 소통의 문을 열어놓았다 사회 각 계층의 정치적 참여가 활발해졌고 혁명의 주도세. 력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학생과 지식인들의 사회적 참여도 매우 높아졌다.23) 2.1.1 4월 혁명 과정에서 지식인의 역할
1960년대는 월 혁명으로 시작된 한국 사회의 격변기였다 이승만 독재정4 . 권으로 표면화된 낡은 세대의 구조적 순을 개혁함으로써 참다운 민주주의
 
의 토대를 마련하고자 했던 월 혁명이란 역사의 흐름은 민중의 의식을 각4 , 성시키는 사회적 실천을 더욱 가속화시키는 적극적인 운동성을 내포하였 다.24) 지식인 소시민등 중간층과도시빈민은 다가오는, 1960년의 정부통령· 선거에 큰 기대를 걸었으나 민주당 조병옥이 사망함으로써 일시적으로 좌절 했다 이런 좌절과 함께 월. 3 15일 선거에서 자유당이 저지른 선거부정을 보 면서 이승만 정권의 대한 민중의 불만은 마침내 폭발했다.25)
4월 혁명의 시기를 2·28 대구학생시위에서 4·26 이승만 하야까지로 볼 때26) 대구시위→1.2차 마산시위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 →4·18와 4·19로 이 어지는 혁명의 전개과정에서 서울이 저항의 핵으로 부상할 때까지 서울의 지 식인과 학생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4·19를 열흘 앞둔 시점까지도 지식 인들과 대학생들사이에 가시적인 움직임은 존재하지 않았다 한태연 사상계. ( 편집위원 은좌담회석상에서) 3·15부정선거와 제 차마산시위이후민주정치1 를 이끌어갈 희망세대는 10대 중고등학생들이지 대학생들이 아니라고 주장 했다.27) 그러나 침묵했던 대학생들이 월 일 신학기를 준비하는 월 중순4 1 3 부터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려대 개 단과대학 운영위원장들이 신학. 5 기 준비차 였는데 이 자리에서 월, 4 16일 신입생환영회를 거사일로 정하였 다 준비 과정에서 시위의 낌새를 눈치 챈 형사들이 학교로 들이닥쳤고 학교. , 측이 신입생환영회를 무기 연기했다 하지만. 18일 아침 간부들은 학교 안으 로 숨어 들어가 평소 뜻을 함께 하던 대의원들을 아 인촌동상 앞에서 집회 를 열고 그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선언문을 낭독했다, .
이제 질식할 듯한 기성 독재의 최후의 발악은 바야흐로 전체 국민의 생명과 자유를 위협하고 있다 만약 이 같은 극단의 악덕과 패륜을 포용하고 있는 이···· 탁류의 역사를 정화시키지 못 한다면 우리는 후세의 영원한 저주를 면치 못하, 리라 우리 고대는과거일제하에는항일투쟁의총본산이었으며 해방후에는···· ,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사수하기 위하여 멸공전선의 전위적 대열에 섰으나 오,
 
늘을 진정한 민주 이념의 쟁취를 위한 반항의 봉화를 높이 들어야겠다.
고려대 학생들은 선언문 낭독에 이어 1) 기성세대는 자성하라, 2) 마산사건 의 책임자를 즉시 처단하라28), 3) 우리는 행동성 없는 지식인을 배제한다. 4) 경찰의 학원 출입을 엄금하라, 5) 오늘의 평화적 시위를 방해치 말라 등 5개 항의 요구조건을 제시하였다 기성세대의자성을 축구하는 세대교체론이. 등장한 것은 이날 고려대 시위에서 처음이었다.29) 선언문 낭독이 끝나자 천3 여 명의 고려대생들은 스크럼을 짜고 가두시위에 나섰다 이들은 경찰의 저. 지선을 뚫고, “3.15선거 무 ”, “마산 사건 책임자 처단”, “기성 정치인 거 부”, “학원자유 보장 등을 요구하며 국회의사당까지 진출해서 그리고 그” 앞에서 연좌시위를 벌었다 학생들이 연좌농성을 벌이는 동안 경찰은 장소가. 국회의사당 앞인 데다가 국내외 보도진과 시민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의 식했음인지 강제 해산조치는 취하지 않고 일반 시민이 합류하는 것만 차단, 시켰다.30)
4·19를 촉발하고 더 많은 학생시민들을 쏟아져 나오게 한 사건은 그 직후· 에 발생했다 월. 4 18일에 시위대가 종로 가 천일백화점 앞에 이르렀을 때4 쇠갈고리와 곡괭이 쇠사슬 등으로 무장한, 100여 명의 정치깡패들이 시위대 를 습격했다 이 습격으로 학생과 그들을 따르던 기자 등. 50여 명이 다쳤다. 깡패들의 테러는 서울의 든대학생들이 다음날 총 궐기하도록 만들었다.31) 4·18 고려대생 시위는 시위의 귀교 길에 발생한 정치깡패들의 습격 때문에 4·19의 기폭제가 됨과 동시에 혁명의 성격과 방향을 더 강하게 선회시켰다. 이제 시위의 성격은 부정선거 규탄에 머물지 않고 독재정권 규탄으로 발 전했고 학생시위 목표는, 1950년대 한국정치사회구조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 즉 이승만 정권의 퇴진으로까지 확장되었다.32) 이래 4·19의 목표는 더 이상
 
부정선거 규탄에 머물지 않았다 독재정권 교체와 함께 독재체제 부패부정. ( · · 특권 정치사회체제 에 대한 개혁을 요구했다 월) . 4 19일 시9 20분경 문리대 생 백여 명이 데 가 이적이냐 폭정이 이적이냐 민주주의 바로잡아 공2 ‘ ’, ‘ 산주의 타도하자’ , ‘대한민국 생명선이 대법원에 달려 있다 이놈 저놈 다’, ‘ 글렀다 국민은 통곡한다 등이 쓰여 있는 플래카드를 들고 교문을 나서자. ’ , 바로 뒤이어 법대 미대 약대 수의대 치대생과 나머지 문리대생들이 데, , , , 에 나섰다. 두 천여 명의 서울대생 데 대는 경찰의 저지선을 돌파하고3 태평로 국회의사당을 목표로 달리기 시작하였다.
뿐만아니라 같은 시간에 동성고생 천여 명이 데 에 나섰다 시1 . 9 30분 서 울대 사대생 천여 명과 상대생 천여 명1 2 , 10시 고려대생 천 명4 , 10시 20 분 건국대 천여 명이 각각 교문을 나섰다 곧이어 시민들이 시위에 합세하2 . 여 시민 10만 명 이상이 대학생들의 시위에 발맞추어 거리에 나섰다.
시위대는 ‘3.15부정선거를 다시 하라 역적을 몰아내자 데 가 이적이’, ‘ ’, ‘ 냐 폭정이 이적이냐 기성층 각성하라 독재정권 타도 이승만 퇴진 등’, ‘ ’, ‘ ’, ‘ ’ 의 구호를 외쳤다 시위대는 이승만 대통령과의 면담을 요구하며 경무대 입. 구에서 경찰과 대치하였다 이러한 사태에 대해 이승만 정권과 경찰은 시위. 자들을 향해 무차별 발포를 하면서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시, 위를 진압하였고 이 과정에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4월 19일 오후 시1 40분 경찰의 발포로 경무대 어귀는 삽시간에 아수라, 장이 되면서 사망 21명 부상, 172명이 발생했다 역사가 피의 화요일로 기록. 한 비참한 사건이 시작되었다.33) 오후 시2 50분 중앙청 옆 경찰 무기고 앞 길에서 연좌시위를 하던 시위대가 무기고를 향해 돌진하자 무기고를 경비하, 던 경찰이 무차별사격을 감행 명이 사망했다 이때, 8 . 200명의 경찰대와 함께 반공청년단의 깡패들이 나타나 쇠망치쇠막대기못을 박은 몽둥이 자전거 체· · , 인 등을 휘두르며 학생들을 위협했다 경찰은 필사적으로 달아나는 시위대를. 뒤쫒아 사정없이 구타하고 끌고갔다. 뿐만아니라 곳에서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덕수궁 파출소 앞 소공동 특무. ,
이날 시위는 전국적인 것이어서 부산에서도 광주에서도 사망자를 냈다 오유석 앞의 논문 쪽
대 건물 앞 서대문 이기붕 자택 앞 등에서 사망자가 다소 발생했다 오후, . 5 시 넘어서면서 을지로 내무부 앞에서 명 시가 지나면서 동대문 경찰서 앞7 , 6 에서 1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리고 시 이후에는 청량리성북동미아. 7 · · 리영등포 등 지역으로 시위와 사상자가 확산되어 갔다 일까지의 집계에· . 1 따르면 서울에서만 사망한 사람이 부상자 사망을 포함하여 2 104명 경찰( 3 명 포함 이었다) .
수많은 무고한 학생들과 시민들의 희생에도 이승만은 이를 일부 불만을 품 은 불순분자들의난동과 정치깡패들의과잉대응으로 치부하고 엄청난유혈시 태를 인정하지 않았다 월. 4 20일 오후 시가되어서야 이승만은5 4·19’에 대 한 담화를 발표했다 그는 어제일어난난동으로 본인과 정부 각료들은 심대. 한 충격을 받았다 나의 전 생애를 바쳐온 애국적인 한 국민으로서 어느 누. 구든지 그러한 행동을 취할 수 있었다고는 거의 믿지 못 할 일이다 라고 적 반하장 격으로 주장하고 불평의 주요 원인이 있으면 다 시정될 것이라고 말, 했다. 4·19를 그저 일부 불순분자들의 불평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치부했
다.34)
4·19에 큰 자극을 받은 대학 교수들은 월4 20일경부터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월. 4 19일 학생들의 엄청난 희생을 지켜본 교수들은 죄 없는 학 생들만 희생시켰다는 자책감 때문에 여간 괴로워하지 않았다 중고교생들은. · ‘선배들은 썪었다 대학생들은 기성세대와 지식인들은 썪었다고 외쳤다 그’, ‘ ’ . 래서 평소 뜻이 통하는 교수들끼리 20일 밤부터 은밀히 만나 행동방향에 대 해협의하였다. 22일정석해 연세대 이종우 고려대 이상은등이 여상의( ), ( ), 를 거듭했다 처음에는 시국을 지켜보기로 했지만 여러 가지 논의 끝에 각. , 대학의 교수들이 한 자리에 여 강력한 내용의 시국수습안을 제시하는 것만 이 학생들의 피해를 보답하는 길이라는데 의견을 았다 이종우 이희승 서. , ( 울대 정석해 조윤제 성균관대 등 주동 교수들은 월), , ( ) 4 25일 오후 시 서울3 대 의대 구내에 있는 서울대 교수회관에서 전체 대학의 교수회의를 열되 비, 밀리에 연락하여 허가 없이 집회를 갖기로 했다.35)
 
마침내 오후 시 전국3 27개 대학교 258명의 대학교수들이 서울대 교수회 관에 여 14개 조항의 시국수습을 위한 선언문을 발표하고 이승만 퇴진, ‘ ’, ‘선거의 재실시 등을 요구하고 나섰다 오후 시’ . 5 50분 교수들은 재경 각, ‘ 대학 교수단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거리로 나섰, ’ 다 기다렸다는 듯이 학생들도 합류하여 종각을 지날 때는 시위에 참여하는. 1만여 명으로 불어났다 시위대가 국회의사당 앞에 도착했을 때는. 4~5만 명 의 인파가 였으며 이날 이기붕 집 앞에서 시위대 수명이 총격에 의해 희생 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교수단 시위는 조금 느 해지는가 싶던. 4·19의 수레바퀴에 급격한 에너지를 불어 넣었다. 4·19가 이런 식으로 끝나서 안 된 다고 하며 무엇인가 계기를 기다리고 있던 학생들과 시민들은 월4 26일 결 정적인 시위를 전개하기로 했으며 월4 25일 민주당은 이승만 하야 및 정부· 통령 재선거 실시안을 긴급동의로 국회에 제출했다.
4월 26일 통금 해제 시간인 오전 시경부터 데 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5 . 서울에서 든 차량의 통행이 금지되었고 계엄군은 중앙청 시청, , , 대문 일 대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삼엄한 경계를 폈다 하지만 학생들과 시민들은 누. 가 이라고 하지 않았는데도 세종로나 국회 쪽으로 여들고 있었다 아침. 6시 가까이 되었을 때 군중은 선거 다시 하라 이승만 정권 물러가라 등‘ ’, ‘ ’ 의 구호를 외쳐댔다 오전. 10시에는 10만여 명의 군중들이 세종로에서 중앙 청까지 길을 메우고 경무대로 가자고 외쳤다 또 한번 유혈사태가 예고되는‘ ’ . 급박한 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이 시점에서 주한 미대사 메카나기로부터. 미국의 입장이 대통령에게 전달되었고 송요찬과 함께 시민학생 대표 명이, · 5 대통령을 만나 사임을 요구했다 사면초가 상황에서 이승만 정권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이승만의 퇴진뿐이었다 마침내 월. 4 26일 오전 10시 30분 이승만 하야 담화가 발표되었다.36)
이어서 월혁명 지식인의 참여를 간략히 정리하면 중고교 학생들이 시위4 · 를 벌인 이후에 대학생들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피의 화요일 월‘ ’ 4 19일이 지 나서야 월4 25일 교수단시위가 최종적 역할을했기에 ‘4·19=지식인론은 더’
오유석 서울에서의 월혁명「 」 『 월혁명과 한국민주주의 한국민주주의연구소』 쪽
욱 현실성을 띠었을 것이다.
4·19는 독재에 대한 부정이면서 한편 구지배질서와 기성세대에 대한 부정 이었다. 4·19가 성공하자 지식인들은 패배의식을 극복하고 자신감이 회복되 었으며 다양한 이념과 가치과 등장했다. 4·19의 중심 가치는 미주주의였지만 혁명이후 민족주의성장주의평등주의적 요구가 분출했다· · .37)
2.1.2 4월 혁명 시기 대학생의 역할
앞서 본바와 같이 대학생은 4·19 마지막 국면에야 본격적으로 등장했고 4 월 26일 이후에는 오히려 4·19가 계속 사건화 될 여지를 차단했다 피의 화. ‘ 요일의 계기를 만들었고 그 날 많은 피를 흘렸지만 이후 한국 현대사에서’ , 당연시된 대학생의 주도적 역할은 월4 19일에 비로소 형성됐다고 말할 수 있다. “ 4·19 당시의 정치적인 데 를 본다면 대학생이 주동이 아니라 고등 학교 학생들이 주동이지요 처음부터 고등학교가 주동이지요 라는 당시 증. ” 언은 이 사실을 잘 보여준다.38) 초기 고등학생 시위에서 기성세대 물러가‘ 라는 플래카드가 등장했을 때 거기에는 괄호 치고 대학생부터라는 문구가’ ‘ ’ 부기되어 있었다고 한다.39) 대학생은 1950년대를 통해 일반화된 이 같은 냉 소와 비판을 뒤집음으로써 비로소 젊은 사자들이 되었다 마치‘ ’ . 3.1운동의 초기 국면을 주도함으로써 근대 학교의 학생들이 사회문화적 주도권을 인정· 받았듯, 4·19에서 대학생은 그 마지막 국면을 압도함으로써 이후의 사회문· 화적 주도권을 획득한 것이다 그 이유는 전쟁이후. 1950년대의 폭발적인 교 육열은 거대한 학생 인구군을 창출해냈다는 점이다 총인구에 대한 학생인구. 의 비율은 1945년의 8.9%에서 1954년에는 16.0%로, 1960년에는 18.1%로 증가했다 이에 따라 중학교 이상의 학생인구 비율도. 1945년에는 총인구의 0.8%에 머물러 있던 것이 1954년에는 3.3%, 1960년 3.6%로 증가했다 또. 한 1945년에는 7919명에 지나지 않던 대학생 수가 1960년에는 드디어 10
 
만 명 선을 돌파했다 이 형성과 발전은. 4·19가 왜 학생과 청년층의 주도로 전개되었는가를 이해하는데 긴요하다 당시 청년들은 미국과 서구에 대한 진. 지한 관심 그리고 서구적 가치관과 세계관과 전면적인 수용 숭미, , ‘ 崇美’라고 표현해야 할 정도로 미국이라는 나라에 고도로 정신적 에너지를 집중시키고 미의 기준에 비추어 한국의 기성 가치 및 규범질서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점이 특징이었다 이는 전면적실제적 친미주의이자 오리엔탈리즘적 친미. ‘ · ’ , ‘ 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0)
실제로 월혁명 이전의 대학생 사회문화적 형상은 고등학생이라면 몰라4 · , 도 대학생에게는 희망을 걸 수 없다 는 인식이 1950년대 내내 일반적이었 고 대학생은 무기력하고 현실적기회주의적이어서 자기희생은 하지 않는, “ · 다” 41)는 부정적 전망도 다수 제출되었다 철학자 안병욱은 사회. “ (······) 멸 시에가까운냉정과불신의마음으로 대학생을대한다 중략 건방지고불신. ( ) 하고 책임 관념이 없다는 등 영화나 다방 출입으로 세월을 보내고 공부는, 꿈도 안 꾼다는 등 미국 도피행만 꾀한다는 등 군대 기피하기 위해서 대학, , 에 온 것인지 공부하러 온 것이 아니라는 등 정열과 양심과 기백이 다 죽어, 버렸다는 등 일언이폐지하면 대학생의 지성의 빈곤과 덕성의 부족과 생활의, 타락을 찌르는 말들이다.”42)라고 비판했다 이는 전후 대학의 사회적 위상이. 급격히 달라진 탓이 컸다 대학에 대한 면세 혜택 및 대학생 징집면제 조치. , 교육 부문의 외국 원조 등으로 대학생 수는 해방 직후 7,000여 명에서 1960 년 10만 명 가까이로 늘어났다.43) 대학이 빠르게 비대화되는 가운데 대학의 ‘질적 저하가 논란이 되었고 흔히 풍기문란하다는 비판을 받는 가운데 대’ , ‘ ’ 학생스스로도 퍼센트넘는숫자가 비난의전적당연 이라는반응을보였10  다.44) 4월혁명 초기 단계의 주역이던 고등학생들이 강한 유대감 속에서 정
 
치사회적 의식을 쌓아온 데 반해 급속하게 팽창한 대학생층은 상호간의 유· 대감 없는 고립분산의 상태에 있었다· . 4·19 이후 젊은 사자들이라는 이름‘ ’ 을 부여받은 영광스런 주체가 되었으나, 1950년대에는 대학생에 대한 목소 리는 비난과 질책 일색이었다 물론 이는 질책과 더불어 기대를 담은 목소리. 였지만 4·19 이전에는 한 번도 기대가 현실화되지 못했던 것이다.45)
1960년 3~4월의 상황에서 대학생이 집단적으로 참여한 것은 월 일 전4 4 북대생 시위가 처음이었다.46) 2·28시위 이후 두 달 가까이, 3·15마산시위부 터 따지더라도 한 달 넘게 지속된 운동의 정점에 4·19가 위치했다고 볼 때, 적지 않은 지역의 중고교 학생들이 시위를 벌인 이후에야 대학생의 첫 움직· 임이 시작된 것이다 월. 4 11일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됨으로써 시위가 확산 후에도 월4 18일 고려대생 시위에 이르기까지 대학생의 집단행동이 등장하 지 않았다 일부 지역의 경우. 19일 오후에 이르도록 시위 학생은 대부분 고 교생들이었다  , 학생은살아있다시민은안심하라 같은위탁의수사는 4·19 마지막국면에가서야현실화되기에이른다.47) 그럼에도 사상계 는『 』 4·19 직 후 4월혁명은자유와민권의선각자인이땅의지식인들의손에의한 혁명 이라고 선언했다.48)
특히 월4 25일 교수단 시위가최종적역할을 했기에 ‘4·19=지식인론은 더’ 욱 현실성을 띠었을 것이다 사건 직후부터 옆으로부터의 혁명. ‘ (Revolution von seiten) 으로규정되는 4·19는 대학생 지식인이 주도적 역할을했다는사실을공인받아 1960년대에구미를휩쓴 스튜던트파워 (student power) 와 동일선상의 사건으로 인식됐다 이런 사후적 평가 속에서. 4·19가 학생, 특히 대학생에 의해 독점됨으로써 한국의 정치사회문화 운동은 대학생이라· · 는 새로운 주체를 맞이하게 된다 어떤 점에서는 대학생이. , 4·19를 만들어냈 다기보다 4·19가 대학생이라는 사회문화적 주체를 탄생시켰다고 할 수 있· 다. 4·19를 통해 대학생들은 비로소 한국 전쟁 이후의 양적 팽창에 걸맞은
 
사회적 역할을 할 수 있었고, 1950년대의 무력과 침묵 수동성을 뚫고 능동, 적인 문화적 주체로 거듭났다. 4·19는 식민 말기에 태어나 해방기 및 한국전 쟁기에소년시절을 보낸 침묵하는세대 (silent generation) 가 자기증명에 성공한최초의사건이었으며 이 사건 이후, 4·19세대 라는이름을 얻은그 들은 다시는 침묵으로 가라앉지 않았다.49)
2.1.3 4월 혁명 이후 지식사회의 변화
일제시기나 해방정국에서 운동에 관여한 경력이 있었던 소수의 사람은 예 외였지만 한국전쟁을 포함한 해방 년사 시기동안 대한민국과 인민공화국의, 8 지배가차례차례뒤바뀌면서 대다수의민중들은아직도 피해의식에서자유롭 지 못하였다 반면 한국전쟁 이후 비로소 근대적인 교육을 받으면서 자라난. 새로운 세대는 4·19를 전후로 한 시기이야 처음으로 운동 혹은 정치라는 것 을 피부로 느끼면서 든 것을 새롭게 맞이했다 하지만 그들의 미숙함과 조. 바심은 복합적인 현실상황을 제대로 판독해내고 있었다고 보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4·19 이후 다양한 영역에서 터져 나오는 자연발생적인 운동의 흐름에 대해 좀 더 신중하고 의식적으로 대응할 여유를 갖지 못했고 4·19혁명 이후 사회가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지에 대해서도 뚜렷 한 방향감각을 갖지 못한 체 5·16 군사쿠데타를 맞게 되었다.50) 그리고 4·19 혁명 과정에서 처음으로 민주화운동을 몸으로 체험했던 새로운 세대, 그중에서 이른바 운동의 선두에 속해 있었던 사람들의 이념적 사상적 분화, 라는 것도 충분히 예상되는 일이었다 정확히 말한다면 이미. 4.26 이승만 하 야 직후부터 분화의 조짐은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단지. 5·16이라는 경험해 보지 못한 군사 쿠데타는 이러한 분화를 가속화 시켰다고 볼 수 있다, . 1960 년 이승만 정권 붕괴 이후 1961년 5·16쿠데타 이전까지 학생운동의 흐름은 크게 학생회를 중심으로 한 학원민주화운동 농촌계몽운동 신생활운동 민주, , , 통일민중운동연합 이하민통련 을 중심으로한통일운동 한미경제협정반대운( ) ,
 
동 대악법 반대운동으로 나눌 수 있다 이 두 부류의 운동은 주도세력과, 2 . 운동방식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이 두 운동에서 학생 운동 주체. 들이 가지고 있던 한국사회 발전 혹은 변혁 지향은 유사한 면이 있었다 당‘ ( ) ’ . 시 학생들은 한국사회의 핵심 순을 후진성에서 찾았고 이를 극복하는 것‘ ’ , 이 혁명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계몽. ‘ 운동과 통일운동이라는 방법론이 각각 색되었지만 그 속에는 자립경제’ ‘ ’ , 수립을 통한 후진성 극복이라는 공통의 한국사회 발전 혹은 변혁 지향이 담( ) 있었다 단 계몽운동에서는 자립경제 지향이 내핍이나 국산품 애용과 같. , 은 수준에서 제기된 반면 통일운동에서는 외세의존 청산, , 북교류 분단극, 복이라는 수준에서 제기되었다 이후. 5·16쿠데타로 군부가 정치경제사회를· · 장악하게 되자 학생들의 한국사회 발전에 관한 지향은 군부의 근대화론민, / 주주의국가주의와한편으로 결합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민족주의와 자립경제/ 등 저항담론으로 전화하여 민주화 운동에서 오랫동안 중요한 역할을 하였
다.51)
1960년대의 지배이데올로기는 시기적으로 그형태가 변화하지만 반공이데 올로기 근대화이데올로기 권위주의이데올로기 민족주의이데올로기 등으로, , , 구성되었다 우선 근대화 이데올로기는 박정희 정권이 취약한 이념적 정당. , 성을 얻기 위해 동원한 이데올로기로서 반공이데올로기와 접합하여 60년대 에 가장 강력한 지배이데올로기를 형성하였다. 60년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지식인의 역할이 강조되었던 시기였다 쿠데타로 인한 정권의 정통성 결핍과. 근대화의 진전에 따른 구조적 순에 맞서는 비판적 지식인의 현실참여가 시 급히 요청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보수적 질서나 구체제에 대한 비판 사회적. , 쟁점에대한주류적인태도나전통적인방식에대한부정을선도했던 청맥『 』, 『창작과비평 등비판적지식인잡지의출현이두드러진것도바로이러한사』 실과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다.52) 4월 혁명 이후 무려 1,400여종의 잡지가
오유석 서울에서의 월혁명「 」 『 월혁명과 한국민주주의 한국민주주의연구소』 쪽
지식인들은 잡지미디어가 일정한 이념이나 쟁점을 중심으로 대중을 동원하는데 과적인 것은 물론이고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으로 발행이 가능하다는 이유로 선호 했다 특히 지식인을 주요 독자로 설정하고 잡지이념을 지식인을 통해 실현하고자
발행되는 매체의 뚜렷한 확대 현상이 있었던 사실 역시 이러한 지식인담론의 확산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작업은 지성주의적이며 엘리트주. “ 의적인 특성 을 지님으로써 구체적인 대중이나 민중에 대한 관심이 결여되” “ 거나 얕은 상태였다 는 점에서” 60년대 지식인 담론과는 뚜렷한 차별성을 지 닌 창백한 인텔리론으로서의 한계를 드러냈다 결국. 60년대 지식인담론은 50년대의 엘리트주의적 관점을 극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감으로써 대중 속에 서 지식인의 역할을 새롭게 색하는 비판적 참여지식인론을 명확히 하였
다.53)
제 2 절 5·16군사 쿠데타 이후 변화54)
2.2.1 5·16군사 쿠데타 과정과 성격
1961년 월5 16일 한강 인도교를 건너 서울을 장악한 쿠데타세력은 새벽 5시 중앙방송국을 통해 친애하는 애국동포 여러분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드‘ ! 디어 금조 미명을 기해 일제히 행동을 개시하여 국가의 행정 입법 사법의, , 3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였습니다로 시작하는 쿠데’ 타 제 성을 발표했다 박정희를 중심으로 김종필 김형욱 이후락 차지철1 . , , , 등 군사쿠데타 주도세력들이 개발독재시대를 여는 순간이었다 당시. 44세이 던 박정희를 제외하고는 쿠데타의 핵심적 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김종필 35세 김형욱, 36세 이후락, 37세 차지철, 27세 등 평균연령 30대의 젊은 군 인들로 이루어져 있었다.55)
하는 잡지를 지식인잡지 라 부를 수 있다면 지식인 잡지는 비판적인 사회의식을 확산시킬 수 있어서 정치 경제 권력의 감시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년대 가장 대표적인 지식인 잡지로는 사상계『 』 『한양』 『청맥』 『세대』 『창작 과비평 등을 들 수 있다』
하상일 앞의 논문
년 월 일에 육군 소장 박정희가 주동이 되어 육군사관학교 기생 출신의 일부 군인들이 제 공화국의 장면張勉 정부를 강압적으로 무너뜨리고 정권을 잡은 군사정변이다 세기 정치학대사전 본 논문에선 군사 쿠데타 군정 를 흔용한다
통상 쿠데타는 말 그대로 헌법에 정해지지 않은 방법으로 권력을 찬탈하‘ ’ 는 행위를 말한다 그만큼 절차적 정당성이 취약하기 때문에 쿠데타를 혁명. ‘ ’ 으로 치켜세우고 국민적 지지를 얻기 위해서 다양한 조치를 취하기 마련이 다. 5·16군사혁명위원회는 반공을 제 의 국시로 내세우면서1 , 4·19혁명 이후 의 혼란과 국가 안보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하겠다는 명분 아래 다양한 조치 들을 발표했다 대표적인 여섯 가지 조치를 소개하면 첫째 부정축재자와 부. , 정선거 관련자들을 처벌하기 위한 일련의 조치를 발표했다 이는. 4⦁19혁명 이후 국민의 공분을 사던 사안이 적절히 처리되지 않은 데서 오는 불만을 군 사 정권이 수용했던 것이다.
둘째 쿠데타세력은 부패하고 무능하다고 규정한 구정치세력에 대한 대대, 적인 정치활동 규제방안을 마련했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월. 5 22일에 든 정당과 사회단체를 23일을 기해 해체한다고 발표한 데 이어 1962년 월3 16 일에는 구정치인의 정치활동을 적극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정치활동 정화법‘ ’ 을 공포했다 이들은 참신한 정치 도의를 정립하기 위해라는 명분을 내세웠. ‘ ’ 으나 이 법을 제정한 실질적인 목적은 쿠데타세력이 군복을 벗고 정치에 참 여하여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는 데 필요한 기간 동안 구정치인들을 정치무대 에서 분리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셋째 사회정화를 지향하는 다양한 국민적 캠페인을 벌였다 쿠데타 이후, . 곧바로 행해진 일이 대대적인 깡패 소탕이었다 월. 5 21일에는 자유당 시절에 정치깡패 두목이었던 이정재를 비롯한 200명의 깡패들이 나는 깡패입니다“ . 국민의 심판을 받겠습니다 깡패생활을 청산하고 바른생활을 하겠습니다 라. ” 는 플래카드를 들고 서울 시내대를 행진했다 또한 공무원의 부패를 척결한. 다는 취지에서 다양한 정화 조치를 시행했으며 월6 10일부터 전국민의 청“ 신한 기풍을 배양하고 신생활체제를 견지하며 반공이념을 확고히 하기 위하 여 라는 명목을 재건국민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
넷째 월, 5 23일에는 사이비 언론인 및 언론기관 정화 방안을 발표했는데‘ ’ , 이후 정기간행물 1200여 종을 폐간시키고 언론사를 통폐합하는 등 대대적인 언론출판 정화 조치를 취했다 그 결과. 916개 언론사 중에서 일간지 39개,
 
일간통신 11개 주간지, 31개만 우 게 되었다. 다섯째 일련의 개혁조치에는 경제 개혁에 관한 것도포함되었다 경제개혁, . 조치와 더불어 부패에 연루된 기업인의 숙청도 이루어졌다 월. 6 14일에는 ‘부정축재 처리법이 공포되었고’ , 10월 21일에는 부정축재처리법 중 개정법‘ 률 부정축재 환수절차법 등이 차례로 공포되었다 그 핵심 내용은 국가재’, ‘ ’ . 건에 필요한 공장을 부정축재자들이 건설하되 그 주식 중 일부를 부정축재, 에 대한 벌금 대신으로 정부에 헌납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부정축재자를 엄. 벌하는 정책에서 그들을 경제재건에 이용하는 정책으로 바뀌었다는 의미였
다. 여섯째 국가폭력의 제도적 장치로서 반공법을 전격적으로 제정했다 반공, . 법의 제정은 혁명공약 제 항에서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반공태세를 재1 ‘ 정비 강화할 것임을 천명한 쿠데타세력이 반공주의를 명시적으로 내세운 선’ 언이었다.56)
그들은 5·16이 4·19정신의 계승이라고 자처했다 실제로. 5·16주체세력은 쿠데타 이후 내내 자신들이 4·19정신을계승한 것이라고주장했다. 5·16주체 세력은 4·19의 긍정적 이미지만을 차용해 자신들을 정당화하고 미화하기 위 해사용하고자하였다 그래서그들은. 4·19를 4·19의거 로격하시키면서그 수준으로만 묶어 두려고 하였다. 1962년 4·19 2주년을 맞아 박정희는 다음 과 같은 기념사를 했다.
4·19의거는 국민의 용기와 지혜와 양식의 발전이다 도탄에 빠진 민생과 각박. 한 민심도 아랑곳없이 불법과 폭력으로 권력을 유지하려던 민족의 폭도들을 시 대적 양심으로 추방한 민족사상의불멸의 금자탑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4·19 의거 주체세력과 조직이 없음으로 해서 그 정신을 구현하지 못 한 채 민주주의 를 가장한 새로운 부패세력에 횡취된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었다. ·····새로운 부패세력은 쓰러진 젊은 영령들을 독하고 그네들이 내세운 소외 혁명과업을 조리 구두탄으로 그치고 구악을 주장하는 한편 새로운 병균을 배양 번식시키 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국가 기강과 시회 질서의 추락을 공산 침공의 소지를. 제공하기에 이르렀고 몰지각한 용공분자들은 이에 편승하여 ·····5·16혁명은
조희연 앞의 책
4·19의거의연장이며조국을 위기에서 구출하고멸공하고민주수호로서국가를 재생하기 위한 긴급한 비상조치였던 것이다 도의와 경제의 재건은 바로 여러. 분들이 월 의거 때 품었던 염원이었으며 우리는 지금 이것을 계승 실천 하자4 , 는 것이다.57)
군사정권은 4월혁명정신의계승 을계속판매하기위한차원에서 1963 년 4·19 3주년엔 355명의상이자및 140명의 4·19 지도자 에게건국포장 을 수여했다 박정희는. 63년 월 일에 낸 국가와 혁명과 나 에서9 1 『 』 “4·19 학생혁명은 표면상의 자유당 정권을 타도하였지만 5·16 혁명은 민주당 정권 이란 가면을 쓰고 망동하려는 내면상의 자유당 정권 뒤엎은 것이다 고 주장” 하였다.58)
5·16의성공이 4·19 계승일수 없다는 주장은 1964-1965년 한일회담 반대 시위에서도 자주 등장한 구호이기도 했다 예컨대. , 1964년 월4 20일 청주공 고생은 “5월 혁명의 자랑은 월혁명의4 독이다 는 플래카드를 월” , 4 21일 성균관대생은 “5·16은 4·19의 연장일 수 없다 는 플래카드를 내세웠다” .59) 이에 대해 지병관씨는 「5·16은 4·19정신의 계승이 아니다 에서」 “4·19를 역 시 역사의 방향이라고 보고 그것으로 결단하여야만 세계사적인 심판에서 살 아 을 수 있다고 믿는다. 5·16이 하나의 정신사적인 후퇴이며 세계사적 방 향에 대한 상극이었다는 슬픈 판단 밑에서 오늘의 정치적 경제적 혼란도 이, 러한 정신의 갈등에서 오는 것이라 거의 체념하는 마음으로 우리는 나의 조, 국의 역사와 현실을 바라본다”60)고 군부 정권을 비판했다.
2.2.2 5·16군사 쿠데타와 지식인: 대학교수의 정치참여
5·16 군사 쿠데타 이후 월혁명에 참여했던 대학생교수 지식인 중 많은4 · ( )
 
사람들은 군부 정권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다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오히려. 민주당 정부의 몰락은 있어야 할 일이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쿠데타를 일으‘ ’ . 군인들은 스스로가 월혁명의 적자라고 주장했다4 .61)
쿠데타에 참여한 주체세력의 71%가 농촌 출신 중하층이었다. 30~40대의 쿠데타 주체세력이 혁명이라는 이름 하에 사회 각 분야에 대한 전면적 물갈‘ ’ 이를 시도함으로써 엄청나게 많은 기회가 창출되었다 동시에 이상우는‘ ’ . 5·16군정은 군인의 정치인 동시에 대학교수의 정치였다고 말해도 과언이‘ ’ ‘ ’ 아닐 정도였다는 평가를 내린다.62)
군정 동안은 군인과 대학교수라는 두 개의 아마추어그룹이 이 나라 정치를 좌 우했던 시기였다 군인들은 앞장을 서고 그 뒤에 교수들이 머리를 제공했다 대. . 소의 국가정책으로부터 정당 조직 새 헌법 제정등 든 작업이 고문 자본‘ ’, ‘ ’, ‘기획위원 정책위원 등등의 타이틀로 층층이 구축된 대학교수 그룹들에 의해’, ‘ ’ 이루어졌다 군인과 교수들의 아마추어 세력에 의해 추진된 국가 정책은 많은. 실적과 함께 시행착오를 겼다 그리고 어용이라는 달갑잖은 풍조를 낳기도. ‘ ’ 했다.63)
흥미로운 것은 ‘4·19에 적극 참여했던 교수들의 상당수가 쿠데타 정권에 적극 참여하거나 비판적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서울대김증한’ . 64)은 쿠데타 정권에서문교부 차관을맡았으며 이항녕, 65)도쿠데타에협조적이었다.66) 이
오유석 앞의 논문 쪽 한용원 『한국의 군부정치 대왕사』 쪽 이상우 『박정희 년 그 권력의 내막 동아일보사』 쪽 김증한金曾漢 년 월 일 년 월 일은 대한민국의 법학자이자 교육 자다 년 당시 월 서울대학교 법대 교수로 임용되어 있었으며 쿠데타 이후 년 문교부 고등교육국장으로 취임했고 년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 법제사법 위원회 자문위원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년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장으로 취임 되었다가 년 월 일 문교부 차관으로 년 월 일까지 일을 했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항녕李恒寧 년 월 년 월 일은 대한민국의 법철학자와 교 육자다 이전 년 경향신문 논설위원을 지내고《 년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으로 선임되어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으며 같은 해 문교부차관을 지냈다 그밖 에 년 고려대학교 교양 학부장이었다
두산백과사전
런 많은 지식인들이 협조했던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 군사정권의. , 지배 이데올로기가 된 근대화론이다 로스트 같은 미국의 근대화론자들은‘ ’ . ‘ ’ 일찍부터 제 세계의 경제개발을 위해서 군부와 지식인의 결합이 필수적이라3 고 주장했다. 1950년대 제 세계에서 일어난 군사쿠데타는 대부분 민족주의3 적이고 개혁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집트의 나세르 마얀미의 네원 이라. , , 크의 꽁레 등의 쿠데타가 대표적인 사례였다 두 번째 중요한 결합의 요인은. 지식인들의 민족주의적 현실인식이었다 수입대체와 내자 동원을 통해 자립. 경제와 균형 성장을 지향한 군사 정권 초기의 경제개발계획은 민족주의적 지 식인들의 생각과 일치하는 것이었다.67) 이즈음 많은 지식인들이 경제개발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 개인의 자유가 희 생될 수 있다는 군사정권의 선건설 후민주론에 동조하고 있었다 홍석률의‘ ’ . 여론조사를 따르면 지식인의, 33%가 찬성했고 이런 견해를 적극 반대한 지, 식인은 24%에 불과했다.68)
뿐만아니라 군사정권은 월5 22일 국가재건최고회의 자문단체로 기획위원 회를 두고 교수들을 발탁했다. ① 정치분과위원회에 고려대 교수 윤천주 나( 중에 서울대 총장과 문교부장관 역임 오병헌 동국대 교수 김운태), ( ), ② 경 제분과위원회에 고려대 교수 조기준 중앙대 교수 최호진 탁희준, , , ③ 사회문화분과위원회에서울대 교수 이해영 박종홍, ④재건 기획분과위원회에 서울대 교수 이만갑 현신규 우병규, , ⑤ 법률분과위원회에 서울대 교수 김증한, 국민대 교수 박일경 등이었다.69) 이 기획위원회 조직에 참여한 학자 언론인, 등 지식인의 수는 470여 명으로 대부분 저명한 교수를 망라했다.70)
쿠데타 세력은 자신들의 취약점을 보완하고 저변 확대를 꾀하기 위해 지식
임대식 「 년대 초반 지식인들의 현실 인식」 『역사비평』 통권 제 호 쪽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한국민주화운동사『 』돌베개 쪽 홍석률 「 년대 지성계의 동향 산업화와 근대화론의 대두와 지식인사회의 변동
」 한국정신문화연구원편 『 년대 사회변화연구 』백산서당 쪽에서 재인용
조갑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국가개조 조선일보사』 쪽 홍석률 「 년대 지성계의 동향 산업화와 근대화론의 대두와 지식인사회의 변동
인들을 적극 동원하였지만 든 지식인들이 쿠데타에 대해 긍정적인 자세를 취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군사정권은 지식인들에 대해 이중적 자세를 취. 했다 자신들에 대해 우호적인 지식인은 참된 지식인이고 비판적인 지식인. , 들은 나라 망칠 사람이라는 논리였다 한 가지 사례를 제시하면 박정희 정권. 의 국가재건최고회의는 1961년 월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을 만들어 입법사6 ‘ ’ · 법행정 권을 두 장악했다 정부권한을 거머쥔 다음에는 김종필을 부장으· 3 . 로한한국중앙정보부(KCIA)를만들었다 처음에 천명의특무부대요원으로. 3 구성했던 중앙정보부는 1964년에 직원이 37만 명이나 될 만큼 비대해졌다. 이들의 핵심적인 임무는 반혁명 분자의 색출과 제거 안정적인 권력 창출을‘ , ’ 위한 기획과 활동했다 이어서 최고회의는 혁명재판소 및 혁명감찰부 설치. ‘ 에 관한 법률을 공포하여 약 주 동안 만 천여 명을 잡아들였고 월에는’ 2 7 6 , 7 반공법을 만들어 정부에 비판적 세력을 통제하려고 했다 또한 한 달 동안. 무려 1,170종류의 신문과 잡지를 폐간시켰다 월 혁명 뒤 창간한 민족일. 4 『 보 사장 조용수도 이때 사형당했다』 .71)
실제로 5·16 쿠데타 일어나자 대표적야당잡지대표였던장준하, 72)는『사 상계』 1961년 월호권두언6 「5·16혁명과민족의진로 를 통해 누란의 위기」 “ 에서 민족적 활로를 타개하기 위하여 최후 수단으로 일어난 것이 다름 아닌 5·16 군사혁명이다 라고 규정했다 심지어” . “4월혁명이 이번 정치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민주주의혁명이었다면, 5·16혁명은 부패와 무능과 무질서와 공산주의 책동을타피하고 국가의 진로를 바로잡으려는 민족주의의 군사혁명 이다 라고 주장하면서 쿠데타를 사실상 지지했다” .73)
역사학연구소 지음 『함께 보는 한국근현대사 서해문집』 쪽 장준하 ∼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언론인 정치가 민주화운동가다 대한민 국 정부 수립 이후 제 공화국에서 공무원에 채용되어 서기관으로 임용되었고 년 문교부 국민정신계몽 담당관 년 문교부 국민사상연구원 기획과장 서 무과장 사무국장 등을 지내고 사상계 를 창간하였으며《 》 년 동인문학상을 제 정하였다 혁명 이후 제 공화국에서 장면내각의 문교부 대학교육심의회 의원 국토 건설단 기획부장 국토건설단장 등을 지냈다 쿠데타 이후 한일회담 반대운동 베트 전쟁 파병반대운동에 가담했다 년 대통령명예훼손 혐의로 검거되어 복역하였다 이듬해 년 서울 동대문 을구에서 신민당 공천으로 옥중 출마해 제
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
뿐만 아니라 장준하는 월호 권두언 긴급을 요하는 혁명과업의 완수와 민7 「 주정치에로의 복귀」에서는 공산당의 전체주의 세력을 분쇄할 수 있는 최대의 사상적 무기는 민주주의적 자유의 선용에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의 주된 관. 심은시종일 반공 이었다 그는 우리는군사정권지도자들의용기와총명과  . 견실을 높이 사려 하며 한편 그들의 관용성을 기대하는 바이다 라고 말했,  
다.74)
그러나 월호에서는 동시에쿠데타를 비판하는 서북출신 문학민족주의자이7 자 종교인인 함석헌75)의 글도 실렸다 함석헌은. 「5·16을 어떻게 볼까 라는」 글에서 민중만이 혁명을 할 수 있다 군인은 혁명을 못 한다 고 비판했다“ . ” . 함석헌은 4·19와 5·16을 이렇게 비교 평가 했다.
그때는 믿은 것이 정의의 법칙 너와 나 사이에 있는 다 같이 있는 양심의 권, 위 도리였지만 이번은 믿은 것이 탄알과 화약이다 그만큼 낮다 그때는 민중, , . . 이 감격했지만 이번은 민중의 감격이 없고 무표정이다 묵인이다 그때는 대, , . . 낮에 내놓고 행진을 했지만 이번에 밤중에 몰래 갑자기 했다 그만큼 정신적으, . 로도 낮다.·····혁명은 민중의 것이다 민중만이 혁명을 할 수 있다 군인은 혁명. . 을 못 한다 아무 민중의 전적 찬성지지 전적 참가를 받지 않고는 될 수 없. · , 다.·····그럼으로 민중을 내놓고 꾸미는 혁명은 참혁명이 아니다 반드시 어느. 때에 가서는 민중과 버그러지는 날이 오고야 만다 즉 다시 말하면 지배자로서. , 의 본색을 드러내고야 만다 그리고 오래 속였으면 속였을수록 그 죄는 크고.
그 해는 깊다.76)
임대식 「 년대 지성계의 동향 산업화와 근대화론의 대두와 지식인사회의 변동
」 한국정신문화연구원편 『 년대 사회변화연구 』백산서당 쪽
노영기 『 년대 한국의 근대화와 지식인』 현대사총서 선인
함석헌 대한민국의 기독교 문필가 민중운동가다 년부터 사상『
계 에 자신의 글을 발표하면서 정치적 사회적 문제들을 기탄없이 비판하였고』 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면서 자유당정권에 도전하였다 년 군사정변 직후에는 을 어떻게 볼까로 군사혁명정권에 도전하였다 년 미국무성 초청으로 방미하였을 때 퀘이커교 敎와의 친밀관계를 굳혔 다 년 장준하張俊河의 국회의원 옥중출마를 지원하기도 하였다 민족문화대 백과사전
서중석 『비극의 현대지도자 그들은 민족주의자인가 반민족주의자인가 성균관대』 학교 출판부
또한함석헌은 사상계『 』1965년 월호에쓴 세번째국민에게부르짖는말5 「 」 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처음부터 5·16에 반대하였습니다 언론인도 밉지만 또 더 미운 것은 대. 학교 교수들입니다 오늘날은 사실 신부 목사는 그리 힘 있는 것이 아닙니다. . 신부목사는 감정의 분야에서 세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보다도 지성적인 현대인 을 지배해 가는 것은 대학 교수 층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교수들이 적지. 않게 자기의 자리에 내버리는 칼자루에 몰려 혹은 돈에 팔려 군사정권에 고문 이랍시고 나왔습니다. ·····그래 고문으로서 이 날의 일에 이바지한 것이 과연 뭐냐 한다면 양심을 가진 사람은 아마 대답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77)
나름대로 좋은 뜻이 있어서 정권에 참여한 지식인들이 많겠지만 그들마저, 도 힘의 논리에 따른 결정을 내렸다는 건 부인하기 어려웠다 달리 말해 박‘ ’ . 정희가 한국인의 인간성을 개조해야 한다고 외치는 논리에 따라 움직인 혐의 가 있다는 것이다.
장면 정권 시절에 그 무 일에건 목숨 걸 듯이 반대했던 인사들이 박정권 하에선 침묵하거나 지지를 보내는 것도 바로 그런 힘의 행사방식에 민감하게 적응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런 지식인의 집단적인 적응의 원인으로는 첫. 번째 지식인들의 근대화의 욕망 때문이었다 로스토의 주장에 의하면 군부, . , 는 근대적 조직과 기술을 운영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진 집단이며 전통적 기, 반이 없어 민간 지도자 보다 개혁에 능동적이고 무엇보다 사회적 안정을 확, 보할 힘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저개발국가의 근대화 과정에서 핵심적인역할을 맡을 수 있었다 그리고 군부가 근대화를 수행하는 사회에서 요구되는 기술. 과 자세 면에서 종종 취약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근대화를 위해 경제학자, , 엔지니어 농업학자 법률가 행정가 의사 교수 언론인 등 지식인들이 군부, , , , , , 와 결합하여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을 제공해야할 필요가 있었다.78)
두 번째, 4·19의 완성으로 5·16혁명 일어났다는 사고이다. 4·19혁명 당시
 
시위 중에도 군대는 우리 편‘ ’79)이라는 주장이 강했다 특히 월. 4 25일 밤 군 인과 시민 대치 상황의 공감과 눈물은 신화처럼 유포되었으며 이승만 하야, 성명 직후에는 국군 만세‘ !’, ‘국민의 군인 환영 등의 구호도 터져 나왔!’ 다.80) 이렇게 5·16을 4·19의 계승으로 받아들인 것은 쿠데타 주체세력도 본 래 4·19혁명 주년 기념일에 거사를 계획했을 정도로 스스로를1 4·19와 동일 시하려 했고, 4·19 와중에 구축된 군인의 이미지를 활용했기 때문이다.81) 마지막으로 군부 쿠데타 세력의 민족주의에 대한 기대이다 당시 많은 지식. 인들은 구정치와 구세대 그리고 서구적 민족주의에 대한 실망이 있었다 쿠, . 데타 직후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83%가 한국에서 서구식 민주주의가 부적합하다고 답변했다 이러한 지식인들의 현실이식은. 1963년 대통령 선거에서 지식인들이 박정희의 민족적 민주주의에 많은 관‘ ’ 심을 보인 근본 이유가 되었다.82)
1965년 월8 356명의 교수들이 한일협정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을 때 박정희는 그들을 학생 데 를 영웅시하고 그들을 선도함으로써 자기가 입, “ 신출세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를 은근히 바라는 기회주의 학자 학생의, 주장에 아부하고 그 감정에 영합하여 값싼 인기를 얻지 않고서는 자기의 무 식과 무능을 감출 수 없는 사이비 학자 신분이 보장됨을 기화로 삼아 책임, 도 지지 못 할 망언으로 국민을 우롱하는 무책임한 학자들 이라고 일반적으
로 매도하였다.83)
2.2.3 박정희 정권 초기 민족주의의 성격
1961년 월5 16일 군사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는 오랜 기간 독재를 유지하면서 경제발전을 이룩했고 그 과정에서 정치적 억압체제와 경 제발전이라는 우연적 조합을 만들었다 이 우연적 조합의 밑바탕에는 민족주.
 
의가 놓여 있었는데 그는 민족주의를 한편으로 경제발전의 도구로 다른 한, 편으로 정치적 억압체제의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활용했다 여기서 말하는. 민족주의의 도구성이란 민족주의가 다른 무엇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됨을 의 미하는데 특히 민족주의가 정치적 목적으로 활용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 다 이 경우 민족주의는 우리와 타자 사이의 경계선을 분명히 하고 우리. ‘ ’ ‘ ’ ‘ ’ 내부의 결속성을 강화시키는 수단으로 활용된다 민족주의가 우리 내부의. ‘ ’ 단결과 단합을 강화함으로써 정치적 경제적 목적을 위한 민중의 동원을 쉽게 이루게 하는 경우 이러한 습을 쉽게 확인된다.84) 박정희가 제시한 도구적 민족주의 전략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경제발전 을 위한 민족주의 담론이다 정권 확보의 정통성 결여를 만회할 수 있는 최. 선의 전략으로 박정희 정권의 내세운 것은 경제발전이었다. 5·16쿠데타 직후 ‘군사혁명위원회가 발표한 성명서에서 군부의 궐기 이유를 몇 가지로 제시’ 했다 이 성명서에서 구악일소. (舊惡一掃), 반공통일 등과 더불어가장 현실적 이고 대중적 호소력을 가진 것으로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는 국가자주경제재건에 총력을 경주 하겠다는 주장이 제시되었” 다.85) 이의 실현을 위해 박정희는 거사 일 만에 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3 위원회로 개칭하고 같은 내용의 메시지를 중요한 정치적 고비마다 반복하였 다 조국 근대화. 86)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존재이유를 뚜렷이 하려는 그의 의 도는 여러 곳에서 쉽게 확인된다 그의 한 가지 사례는. 1962년 월1 13일 ‘제 차경제개발 개년계획의 발표였다 그 계획의 기본목표는1 5 ’ . “ 든 사회경 제적 악순환을 과감히 시정하고 자립경제의 달성을 위한 기반을 구축한다 는” 데에두었다.87) 박정희정권이추진한근대화의 핵심은산업화였고 구체적으
김동노 한국의 국가 통치전략으로서의 민족주의「 」 쪽 김동노 한국의 국가 통치전략으로서의 민족주의「 」 『현상과 인식 제 권 제 호』 통권 호 쪽에서 재인용
박정희 정권은 조국근대화를 민족의 당면의 과제로 민족주의 를 민족의 지도이념 으로 국가를 조국중흥의 주체로 반공에 입각한 통일을 민족의 지상과제로 내세 웠다 자립경제의 달성 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화 자주국방과 총력안보 국적 있는 교육 국민총화 국민교육현장 국기에 대한 충성 민족정기 민족주체성⦁ 의 확립 민족사적 정통성 등 유신체제를 전후해 화려하게 등장한 슬로건은 박정 희의 대중동원이 민족주의를 매개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로 자본주의적 산업화였다 이것은 근대 세계체제의 핵심이 자본주의 시장경. 제라는 맥락에서 보면 그리고 분단과 한국 전쟁을 전후해 미국 주도의 자본, 주의 세계체제에 편입된 조건하에서 어쩌면 선택의 문제가 아닐 수 있었,
다.88)
박정희는 이와 같은 논리로 자신의 정권 전략을 경제발전을 통한 조국근 대화로 포장하려 했는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가 조국 근대화를 성취하는, ‘ ’ 도구로 활용한 것은 전통 가운데 찾아낸 민족의 담론이었다 경제발전은 박‘ ’ . 정희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민족의 과업이었으며 이는 민족의 구성원 전체가 나누어 가져야 할 도덕적 선(善)이었다 결국 그에게 주어진 통치의 과제는. 어떻게 개인을 민족의 일원으로 만들어 이러한 도덕적 선을 수행하는 주체로 전환시킬 수 있는 여부였다 이를 위해 그는 민족주의의 담론에 근거해서 개. 인을 근대화 과업으로 불러들이고자했다 그는 민족을 개인과 국가의 상위. 개념으로 설정하고 개인을 민족에 통합하는 정치체제를 구상했는데 이를, 민족적 민주주의 라는 개념으로 제시했다 .89) 1963년대통령선거유세에서 처음나타난 민족적민주주의 였다 그러나박정희가제시한 민족적민주  . 주의 이념은 선거 전략의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실제로 그는 이 이념을 통 . 해 서구 자유민주주의와는 다른 정치체제를 구상했고 개인을 독립된 정치, 주체로 설정하지 않은 채 민족이라는 상위 집단에 통합된 하위 개념으로 설 정하려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개인이 개인으로 존재하기 이전에 민족의 일. 원으로 존재하기를 요구하고 개인의 이익보다는 민족이라는 전체의 이익을 추구하도록 요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이러한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
山本剛士 「 차 경제개발계획과 고도성장의 문제점」 년대 거름 신서
황병주 박정희 제제의 지배담론과 대중의 국민화「 」 『근대를 다시 읽는다 』역 사비평사
쿠데타로 집권한 이후 최초로 박정희가 제시한 정치체제의 개념은 행정적 민족주 의였으나 이는 곧 민족적 민주주의로 대체되었다 여기서 민족적 민주주의는 정치 적 이념을 넘어 민족적 통합을 추구하는 민족적 민족주의와 전혀 다른 의미이며 단순히 민주주의가 민족주의와 결합되는 측면이 있음혹은 민주주의가 민족주의에 의해 제한될 수 있음을 강조하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김동노 한국의 국가 통치「 전략으로서의 민족주의」『현상과 인식』 제 권 제 호 통권 호 쪽 인용 
할 때 제기되는 문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민족의 문제가 되고 민족의, 위기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90) 그러므로 그는 민주주의 자체보다는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전제로서 민족적인 것에 더 강조점을 두었던 것이다.
들이 그렇게도 좋다는 민주주의 또 우리가 가져보려고 그렇게도 애쓰던 자, 유민주주의가 왜 이 나라에서 꽃피지 않는 것인지 아십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 니다 자주와 민주를 지향한 민족적 이념이 없는 곳에서는 결코 자유민주주의는. 꽃피지 않는 법입니다 민족의식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자유민주주의는 항상 잘. 못 해석되고 또 잘 소화되지 않은 법입니다.91)
이상의 논의를 정리하면 4·19도 그러했지만 5·16은 지식인들에게 더 다중 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 상당수의 지식인 심지어 대학생들과. , 혁신계 인사들조차 5·16과 쿠데타권력에 기대하는 바가 있었고 한동안 일말 의 미련을 버리지 못 했다 이러한 성격으로 인해 많은 지식인들은. 4·19와 5·16을 나름대로 해석했고 또 자신의 참여와 저항을 합리화했다, . 5·16에 대 한 인식이 더 복잡한 양상을 보였던 것은 쿠데타권력의 성향이 다중적이었고 지식인들의 이념이 아직 정립되지 못하고 미분화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1960년대 초반은 권력의 다중적 성격이 노정되고 각종 이념이 족출하여 분 화 정립되는 전환기였고 격동기였다.
1960년대 중반 무렵에 이르러서야 근대화에 따라 사회적 순이 점차 가 시화 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이 권력의 다중적 성격이 단순화 되면서 지식인. 들이 애매하고 다중적이던 자기 이념과 정체성을 정립해가고 또 참여와 저, 항의 어느 한편에 설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런 대립구도는 성장주의를 한편으. 로 하고 민족주의민주주의평등주의를 다른 한편으로 했다 이는 구체적 현· · . 실에서 결국 조국근대화와 만족민주민중으로 정립되었다 저항진영은 다‘ ’ ‘ · · ’ . 양한 성향의 세력이 연대한 것이므로 내부의 다양한 이념이 공존하고 있었지 만 극단적 반공체제하에서 민주주의가 부각되었고 주도권을 행사했다 독재.
 
와 민주체제와 반체제의 대립은 5·16과 4·19를 전유하려 했다.92)
제 3 절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변화
쿠데타 개월 후인2 1961년 월7 19일 박정희는 한일관계가 지금까지 부, “ 자연한 상태로 진행되어온 것은 두 나라에게 다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혁명 정부는 한일회담을 연내에 일괄 해결할 방침으로 든 노력을 다 하고 있다”93) 라고 밝히면서 외무 장관 최덕신을 단장으로 하는 사절단을 통하여 중단된 한일회담을 조속히 재개할 것을 희망하는 친서를 전달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1961년 10월 20일에 중단되었던 한일회담이 재개되었고 11월 11 일부터 15일에 걸쳐박정희는 일본의 이께다 수상과 케네디대통령을 방문하 고 한미일 국의 현안문제를 논의하였다 특히 한국의 경제개발 개년계획· · 3 . 5 은 미국과 일본으로부터의 원조에 자신감을 가진 후 성안되기에 이르렀다.
2.3.1 한일국교정상화와 6 · 3시위
1964~1965년 분출했던한일협정반대투쟁을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미국 의 동아시아 지역통합전략과 그에 따라 진행된 한일회담에 대해 알아야 한 다 차 세계대전 종전 후 미국은 공산주의 확산을 봉쇄하고 미국 주도의 자. 2 본주의를 공고히 하기 위해 유럽과 동아시아에서 각각 지역통합을 시도했다. 동아시아의 경우 일본을 중심으로 한 지역통합전략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한. 국은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의 일본중심정책에 반발하면서 반일을 강조하였‘ ’ 다 무엇보다 과거사를 바라보는 양국의 인식 차이가 너무 켰다 그 결과 한. . 국과 일본의 관계정상화를 위한 한일회담은 처음부터 난항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1952년 월2 15일 제 차 회담이 시작되었지만 한국과 일본은 청구1 , 권과 어업 문제 등에서 예한 대립을 보였다. 1953년 월 제 차 회담도 큰4 2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리고. 1953년 10월 제 차 회담에서 나온 일본 수석3 대표 구보타의 “36년간 일본의 한국 지배가 한민족에 유익했다 라는 망언으” 로 한일회담은 장기간 중단되었다 한일회담 과정에서 양국 사이에 논란이. 되었던 핵심 쟁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기본조약문제, ②청구권 문제,
③평화선 문제이다.94) 이어서 년 뒤5 1958년 월4 14일 제 차 한일회담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제4 . 4차 회담은 청구권과 평화선 문제를 둘러싼 양측의 입장 차이 때문에 진전을 보지 못 했다 이승만 정권은. 1959년 년 내내 전국 각지에서 반공주의와1 결합한 반일운동을 일으켰다 일본에 대한 불신과 경계심은. 1960년대에도 여전히 강고하게 이어졌다. 1960년 월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한 후4 허정과도 정권과 거쳐 7·29 총선을 통해 장면 정권이 탄생했다 이에. 1960 년 10월 25일 제 차 한일회담의 예비회담이 시작되었고 제 차 회담에서는5 5 이전과 달리 각 분과에서 심도 있는 논의가 이루어졌다. 1961년 월5 16일 쿠데타가 일어난이후 1961년 10월 20과 11월 12일일 제 차 한일회담이 시6 작되었다 두 차례에 걸친 회담에서 두 사람은 유명한 김종필오히라 메. , ‘ · ’ 를 통해 최종 합의를 끌어냈다.95)
이 메 를 더 자세히 언급하면 “① 10년에 걸쳐 억 달러 무상원조를 일본3 이 제공한다. ② 7년 거치 20년 동안 상환되는 조건으로서 연리 3.5%인 일 본정부 ODA차관 억 달러를 한국에 공급한다2 . ③ 상업차관의 형태오 억1 달러 정도 원조한다. ④ 무상원조와 기타 차관내용에 대한 지급방식으로는 일본 국내의 상품과 용역으로 한다”96) 등이었다.
1964년 월 김종필과 이께다의 회담에서 대체적인 윤곽이 확정된 한일회3 담은 국민들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1965년 월 정식으로 조인되었다6 . 한일회담에서 가장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던 문제는 크게 ①한일국교 정상 화의 의의와 그 기본적 방향을 담은 기본관계조약, ②대일 재산청구권과 경 제협력에 관한 협정, ③ 재일교포의 법적 지위나 대우에 관한 협정, ④한일
 
어업협정에 관한 협정 등 네 가지였다.97)
한국의 주요 사회정치 세력들도 한일회담에 대한 찬반 여부에 따라 두 개· 의 집단으로 뚜렷이 갈라졌다 학생 지식인 언론 야당 종교단체 등은 굴. , , , , 욕적인 한일회담을 강행하는 박정희 정권의 반대편에 섰고 박정희 정권과, 그 후원을 받은 기득권 집단은 그 맞은편에 서게 되었다.
1964년 월3 24일 하오 시1 30분쯤 서울대 문리대 대학생 300여 명은 교 정에서 이께다 및 이완용의 마네킹을 만들어놓고 제국주의자 및 민족반역자‘ 의화형식을 거행하였다 학생들은 화형식에서 제국주의자의 상징으로 한’ . 일국교정상화를 추진하는 일본 측 수상인 이께다와 공화당의 김종필 의장을 은유하는 이완용의 우상에 불을 지름으로써 한일국교정상화에 반대하는 학생 들의 의지를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 같은 자리에서 학생들은 민주양심세력. “ 의 엄숙한 의무룰 수행하기 위해서 일본 독점자본의 교활한 음 를 분쇄하여 민족해방과 자주독립을 쟁취하는 새로운 투쟁대열 가운데 자신을 발견하려 한다 라는 내용의 선언문을 발표하여 자신의 거사의 명분을 밝혔으며 결의” , 문에서는 1) 민족 반역적 한일회담을 즉각 중지하고 동경 체제 매국정상배는 일로 귀국하라, 2) 평화선을 침범하는 일본어선을 해군력을 동원하여 격침하 라, 3) 한국의 상륙한 일본 독점자본의척후병을 축출하라, 4) 친일 추구하는 국내 매판자본가를 타살하라, 5) 미국은 한일회담에 관여하지 말라, 6) 제국 주의 일본 자민당 정권은 너희들의 파렴치를 신의 양화를 입어 속죄하라, 7) 박정권은 민족 분노의 표현을 날조 공갈로 봉쇄치 말라, 8) 오늘 우리의 궐 기를 역사는 증언하려니와 우리의 행동이 신제국 주의자에 대한 반대투쟁‘ ’ 의 기점임을 만천하게 공포한다 라는 격렬한 논조로 박정권이 추진하던 대일” 협상과 국교정상화 작업을 비판했다.98) 같은 날 고려대 1,000여 명의 학생들도 교내에서 집회를 마친 다음 동대 문을 거쳐 국회의사당 앞에까지 진출하여 시7 30분경에야 해산하였다 연세. 대 학생들도 그날 교내에서 열린 함석헌과 장준하의 대일외교반대 강연을 들 은 후 교외로 진출하였으나 경찰의 저지를 받으면서 이대 입구에서 연좌데
 
를 벌이다가 일부가 국회의사당까지 진출하여 고대생들과 합류하였다 그리. 고 고대생들 데 를 응원하던 대광고교생들도 시6 30분부터 반도 호텔 앞에 서 연좌데 를 벌이다가 해산하였다 이. 3·24 데 는 4·19와 5·16 이후 최 대의 반정부 데 였다.99)
이에 월3 26일 박 대통령은 학생들의 애국충정은 이해되나 시위는 외교“ 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일회담 협상에는 추호의 흑막도 없으며 만약 있다면 역적으로 처단되어야 한다 는 내용의 특별 담화를 발표하였다” .100) 이 날 부산 수원 대전 대구 등 지방 도시에서도 시위가 발생하였으며 이것이, , , ‘ 민족적 민주주의냐하는 새로운 구호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학생들’ . 의 요구가 단순한 정책상의 오류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박정권의 정책 전반에 대한 비판으로 확대되어가고 있었으며 박정권 역시 자신의 존립 을 도 하기 위해서는 학생들과의 어떠한 타협도 할 수 없는 처지였으므로, 이러한 다소 우호적 대치선은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학생들 역시 박정권.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 공격의 화살을 돌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101)
1964년 월5 20일 서울대 문리대 캠퍼스에서 축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 치러졌다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통해 드러난 학생들의 인식 차이는 이. 후 학생과 박정희 정권 사이의 충돌이 격화되면서 점차 박정희 정권을 반대 하는 방향으로 수렴되었다. 1965년 월6 22일 한일협정 조인 이후에도 학생 들의 시위는 계속되었다 월. 6 23일 이화여대 숙명여대 성균관대 서강대, , , , 국민대 서라벌예대 학생들이 한일협정 조인 무 와 비준 반대를 외치며 학, 교별로 가두시위와 성토대회를 가졌다 한일협정 조인을 규탄하고 비준을 반. 대하며 1965년 월 하순을 뜨겁게 달군 학생들의 투쟁은 월 말 정치방학이6 6 든 대학으로 확대되면서 일단 잦아들었다 정치방학으로 개별 학교 단위의. 투쟁이 어려움을 겪자 투쟁 주도 학생들은 개별 대학을 뛰어넘은 조직적인 연합운동을 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치방학 한창 진행 중이던. 1965년
7월 학생운동은 이전과 같은 활력을 유지할 수 없었다.102)
 
반면에 지식인들도 한일협정 조인 이후에도 반대 입장을 드러났다 월. 6 22 일 한일협정이 조인되자 범국민투쟁위원회와 민중당 당원 400여 명은 민주 당사 옥상에서 조기를 달고 간단한 성토대회를 가진 후 충정공 민영환의 동, 상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야당과 더불어 사회 각계의 지도층 인사들도 비준. 반대에 동참했다. 1965년 월6 26일 이화여대와 연세대 교수 300여 명 월, 7 1일 한경직 등 개신교 목사 100여 명은 영락교회에서 한일회담비준반대성‘ 토대회를 개최한 뒤 성명서를 채택하였다 개신교 목사들은 이후에도 서울’ . , 군산 대전 등지에서 한일 협장 비준을 반대하는 구국기도회를 계속 개최했, 다 보수개신교세력까지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매우 드문 사례였다. .103) 이어서 월 일에는 법조인들이 나섰다 일에는 문인7 3 . 9 84명이 전체 국민“ 의 단결과 궐기 를 호소하고 민족의 자주자존과 국가의 영원한 주권과 권” , “ 익의 웅호를 위해서 투쟁하는 문화전선의 대열 에 적극 참여할 것임을 선언” 했다.
1965년 월7 12일 한일협정 비준을 위한 임시국회가 열리자 서울 시내, 18 개 대학교수 354명은 서울대에 여 한일협정 비준 반대를 선언하고 국회가, 여야를 막론하고 당파적 이해를 초월하여 치욕적인 불평등협정을 거부할 것 을 추구했다. 14일에는 김홍일 김재춘 송요찬 손원일 등 예비역 장성 명, , , 1 이 한일협정반대 성명서 를 통해 정부 국가의 장례를 위해 한일협정 비준“ ” “ 을 즉시 보류하고 혼란한 민심을 안정 시키라는 내용의 권유문을 대통령과” 국회의장에게 보내는 등 서울뿐 아니라 지방에서도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비 준 반대 요구가 계소되었다.104)
결국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가 발족된‘ ’ 1964년 월 일부터3 6 15개월여에 걸쳐 치열한 반대 시위가 벌어졌지만, 1965년 월6 22일 오후 5 시 동경의 일본 수상 관저에서 양국 외무장관 이동원과 시이나가 서명을 함 으로써 한일협정은 정식으로 조인되었다 이 협정에 의해 평화선. 105)이 철폐
 
되었으며 한국 측의, 40해리 전관수역 주장이 철회되고 일본의 주장대로 12 해리 전관수역이 설정되었다 재일교포의 법적 지위 및 영주권 문제 등도 일. 본 정부의 임의적 처분에 맡 지게 되었다 뿐만아니라 문화재 및 문화협력. 에 관한 협정은 일제가 35년간 불법으로 강탈해간 든 한국 문화재를 일본 의 소유물로 인정해 버렸으며 종군위안부 사할린 동포 원폭 피해 등의 문제, , 는 아예 거론조차 하지 못했다 당시 한일협정 비준 반대를 외친 단체로는.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 투쟁위원회 비준반대서명교수단 무궁화애국총’, ‘ ’, ‘ 연합회’, ‘6.3동지회 등 여러 개가 있었으나 가장 핵심적인 단체는 조국수호’ 국민협의회였다 그 핵심 멤버들이 같이. 1961년 5·16쿠데타에 참여했기 때 문이다.
8월 14일 오후 조국수호국민협의회가 주최하는 강연회가 을지로 가에 있2 는 대성빌딩에서 개최되었다 오후 시경 강연회를 마친 시민들과 학생. 5 300 여 명은 한일협정의 국회비준은 완전무 를 선언하고 을지로입구를 통해“ ” 국회 앞으로 행진하였다 이 수위대의 선두에 선 인물은 함석헌 전 외무부장. , 관 김홍일 그리고 김재춘 등이었다, .
2.3.2 한일국교정상화 반대를 둘러싼 지식사회의 변화
한일협정의 체결 과정에서 박정희 정권은 일본에 대해 저자세를 보였다. 미국은 한일관계의 정상화를 종용하면서 미국의 자금줄을 봉쇄하는 작전을 구사했다 결국 한국정부가 대일청구권자금에 집착하게 된 배경에는 미국의. 압력과 함께 내부적인 필요 때문이었다 한국정부당국들에게 한일국교정상화.
서부터 평균 마일약 해리에 달하는 이 평화선을 선포한 이유는 ①한 일간의 어업상의 격차 ②어업자원 및 대륙붕자원 보호 ③세계각국의 영해확장 및 주권적 전관화 추세 ④일본 주변에 선포된 해역선인 맥아더 라인 철폐에 따른 보완책 등이다 한편 평화선을 포함한 어업문제에 예한 이해관계가 걸려 있던 일본은 한 일회담을 통해 지속적으로 그 철폐를 주장했고 회담의 성사에 급급하던 우리 측의 일방적인 양보로 한일협정의 체결과 함께 폐지되었다 역사학연구소 지음 『함께
보는 한국근현대사 서해문집』
를 통한 자금조달은 경제정책과 불황에 대한 하나의 단기적인 타개책으로 인 식되었다 제 차 경제개발 개년계획 기간 동안 지속된 외자 의존적 발전전략. 1 5 을 수행하기 위해서 미국의 경제원조에 대신할 새로운 자금원을 확보하는 것 이 필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일본자금의 동원이었다. 1960년의 무상원조액은 2억 2,500만 달러였으며 1962년 억1 6,500만 달러에서 1963년 억1 1,900 만 달러로, 1964년에는 8,800만 달러에서 급기야 한일 협정이 체결된 1965 년에는 7,100만 달러로 줄어들었던 것이다.106) 이러한 상황 속에서 당시 한 국정부는 경제계획을 추진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차관을 도입할 것을 결정하 고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조치를 통해 일본으로부터 차관 도입의 길을 열 었다. 1966년 외자도입법을 제정해 외자에 대한 우대를 보장해 외자를 유치 하는 법적 테두리를 마련했다. 1965년 일본과의 관계정상화와 수출지향적 경제성장은 원조의 중요성을 감소시켰다.107) 즉 한일회담과 경제개발을 거, 치면서 군사정권은 세계자본주의 경제가 요구하는 논리 보다 직접적으로는, 미국의 제 세계 경제개발 논리와 근대화를 노선을 적극적으로 수용해갔다3 . 따라서 현실적인 외교군사경제 정책 면에서 강대국의 영향력 내지는 개입· · 을 거부하는 민족주의 논리와 대립의 가능성은 늘 존재했다.
지식인과 박정희 정권이 한일회담을 바라보는 문제의식은 각각 달랐다. 한국정부에게 한일국교정상화는 평화조약 조에 기초한 청구권 처리4 108) 문 제뿐만 아니라 한국의 반공안보와 경제건설을 위한 자금 도입의 문제로 인식 되고 있었다 따라서 박정희 정권에 필요한 것은 지식인들의 문제로 삼았던. 청구권 문제의 처리를 위한 법과 자료에 기초한 충분한 실무적 토의가 아니 라 경제건설에 필요한 자금 도입의 신속한 실현이었다 따라서 박정희 정권. 하에서 한일간 경제협력문제의 해결은 그 방식으로 인해 식민지 지배의 청산
합동통신사편 『합동연감 합동통신사』 쪽 김일영 「 년대의 정치지형 변화수출지향형 지배연합과 발전국가의 형성」 한 국정신문화연구원편 『 년대의 정치사회변동』 백산서당
배상에서 청구권으로 변화되는 과정이 이승만 정권이라는 동일한 정권하에서 일 어난 일이었다 그러나 동 피해보상의 처리문제가 바로 배상에서 청구권문제로 바 뀌게 됨에 따라 그 변화 자체를 일종의 질적인 단절로 보게 됨은 자연스러운 귀 결이었다 장박진 한일회담에서의 피해보상 교섭의 변화과정 분석「 」『정신문화연
구』 봄호 제 권 제 호
이 불가능해졌다는 등의 단절적 변화를 낳은 것이 아니라 배상요구 시부터 이미 내포되고 있었던 식민지 지배 청산에 관한 한계 내에서의 변화에 불과
했던 것이었다.109)
또한 지식인들의 가장 큰 문제로 삼았던 것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죄의 명문화 여부였다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 “ ” (이하 기본조약 은 한국과 일본 사이의 과거 현재 미래관계를 규정한 조약) , , 이었으며 한일 조약의 핵심 부분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지식인들은 기. 본조약의 전문과 제 조 및 제 조 세 가지를 비판했다2 3 . “<기본관계조약 은> 한일국교정상화의 의의와 그 기본적 방향을 명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그렇다면 전문에서는 국교를 정상화하여 앞날의 새로운 친선관계를 맺음에“ 있어 과거의 제국주의 통치관계를 사과는 못할망정 이것은 영원히 청산한다 는 의미의 어떤 구절이 응당 삽입되어야 했을 것 이다” .110)
한일회담반대운동은 두 가지 점에서 비판했다 우선 반대운동은 일본경제. , 노후시설의 쓰레기장이 된다는 점에서 경제협력 노선을 비판하며 다음으로‘ ’ 한일조약 반대운동은 한국경제가 일본경제에 종속될 가능성이 있다는점에서 비판했다. 일본경제에 대한 종속화에 관한 논의의 밑바닥에는 신식민주의론‘ ’ 의 이론적인 뒷받침이 있었다 당시 사상계에서 문형선은 제 차 세계대전. , 2 이후 선진 자본주의국들은 여러 경제협력을 통해서 제 세계에 대해 원료자‘ ’ 3 원 및 해외시장으로서의 경제적 이익을전략적으로 확보했고제 세계각국은3 종속화라는 새로운 식민지 체제에 휩쓸려 들기 시작했으며 선진자본주의국, ‘ ’ 들의 경제개발에는 표면적으로는 경제개발이 목적이지만그 밑바닥에는 후진 국의 개발을 매개로 한 선지자본주의와 후진국의 경제적 통합이라는 원대한 옥적이 숨어있다고 말하고 신식민주의론을 일반대중에게 소개했다‘ ’ .111) 즉 ‘선진자복주의국의 새로운 대외경제정책인 경제개발이나 경제협력은 장기적 인 원료자원 해외시장의 확보를 목적으로 한 것이고 제 세계 경제는 당연히3
 
부등가교환이라는 수탈을 받고 선진자부주의권에 종속된다는 것이었다 또‘ ’ . 한 송건호는 일본정부와 지식인들이 일본의 활로가 아시아에 엔화지역을 만 드는데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고 지적했다.112) 학생들은 한일조약 체결로 일 본이 노리 것은 한국에 자본재를 투자함으로써 한국의 값싼 노동력과 원료’ 를 이용하여 일본 대기업을 위한 반제품을 생산하는 예속관계를 구축하고 일 본 상품을 판매함으로써 민간기업을 진출케 하고 연불 방법을 통하여 산업, 금융 외환 제 부분에 압력을 증가시킬 수 있는 자국본위의 경제팽창을 기도, 하고 있다 고 비판했다” .113)
1965년 사상계 지식인들의 한일회담반대운동의 핵심적 논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한일국교정상화가 일제의 식민지 지배사를 청산하는 조. , 약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한일조약에. “日本軍國主義와 帝國主義의 對韓 侵略行爲를 깨끗이 청산한다는 기본적 목적이 명문화되었어야 했음에도 불구하” 고 이 문구가 제거되었다는 것이다.114) 둘째는 박정희 정권의 저자세에 대‘ ’ 한 비판이었다 이 비판은 청구권문제와 어업문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 청구권문제에서는 한국이 대일 배상문제를 규정한 대일평화조약 서명국이, 될 수 없었던 점 식민지지배에 대한 근본적이고 전면적인 배상을 요구할, “ 권리는 부당히 폐쇄되고 재산 및 채권에 대한 청구권만 인정 되었다는 점이” 비판되었다 또 어업협정과 관련해서는 민족의 생명선이며 주권선인 평화선. “ 을 사수하라 고 주장했다 셋째는 신일본제국주의에 대한 경계였다 무상” . ‘ ’ . ‘ 원조 유상원조 상업차관 등을 매개로 일본자본이 다시 한국에 침입해’, ‘ ’, ‘ ’ 옴에 따라 한국경제가 일본경제에 종속될 위험성을 강조했다 한국의 지식인. 들과 학생들은 신식민주의론과 신제국주의 경제침략에 대한 인식을 바탕‘ ’ ‘ ’ 으로 일본자본과 상품의 침식 으로 일본의 중화학공업제품의 수업과 한국“ ” “ 의 일차산업의 수출이라는 전형적인 수직적 분업과계가 더욱 더 확립되면 한 국경제는 일본자본 지배하의 영원한 종속적 구조를 면치 못할 것”115)이라고
 
주장하고 일본에 대한 경제종속의 위험성을 호소했다. 이와 같이 박정희 정권은 동아시아 반공블럭과 경제건설을 위한 일본의 자 금 도입에 집중하고 있었으며 지식인들은 경제적인 종속 및 일본 침략에 대 한 위험을 느끼고 있었으며 더구나 한일회담에 참여하는 태도 즉 일본정부, 가 한반도에 대한 제국주의 정책과 식민주의 통치를 사실대로 시인하고자 의 사가 없다는 점에서 비판했다 이런 면에서 지식인들이 한일회담을 응 했던. 박정희 정권을 태도를 비판하며 한일회담을 굴욕적인 일이라고 봤다.116) 한일협정반대투쟁을 거치면서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성장하였다 집단 단식. 농성 대학연합 시위 화형식장례식마당극 같은 퍼포먼스 투쟁가 등 새로, , · · , 운 운동양식과 문화가 만들어져 계속 이어졌다 무엇보다 운동 주체의 역량. 이 강화되었다 한일협정반대투쟁에는 많은 국민들의 참여하였다 그중에서. . 도 야당과 학생이 투쟁을 주도했다 그들은 박정희 정권의 실정 전반을 비판. 하는 방식으로 투쟁을 임했다 학생들의 경우. 1964년 처음 투쟁이 시작될 때에는 다양한 습을 보였다 굴욕적저자세 한일회담 반대 차원에서 투쟁. · 에 나선 경우가 있었지만 이 수준을 넘어 이념적 지향이 강한 민족주의를, 주장한 경우도 있었다 민족적 민주주의의 장례식에서 잘 드러난 듯 박정희. 정권을 바라보는 입장도 큰 차이가 있었다 학생들의 다양한 습은 투쟁이. 발전하면서 민족민주 이념과 박정희 정권 반대라는 방향으로 수렴되었다· . 1965년에 들어와 투쟁의 이념적 수위가 낮아졌지만 투쟁의 저변은 더욱 확 대되었다 비록 한일협정반대투쟁은 외형적으로 실패했지만 이후 학생들은. , 저항의 원동력을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의 결합에서 찾았다.117)
 
제 3 장 박정희 정권과 『청맥』의 경제발전 대한 입장
제 1 절 외자, 외채, 종속, 식민성 논의
1945년 해방 이후에 한국경제는 일본경제와의 단절로 인한 생산 위축과 북분단으로 인한 산업구조의 파행성 심화로 경제적 혼란을 겪게 되었다. 그리고 그나마 아 있던 생산은 설비와 사회간접자본마저도 한국전쟁으로 인해 파괴되었다 이런 상황 때문에 한국은 국내축적 기반이 취약하여 해외. 로부터 자본을 도입하는 것이 불가피했다 더욱이 한국 경제가 크게 의존하. 였던 미국원조가 1950년대 후반 이후 점차 축소됨에 따라 외자도입의 필요 성은 증대하였다 이런 현상으로 이후. 1960년대 외자정책이 미국과 일본에 편중되어 양국의 경제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었다 외자도입은 개도국. 이 안고 있는 저축부족과 외환부족이라는 두 가지 갭(gab)을 동시에 완화시 킴으로써 경제성장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에 반해 외자118) 도입이 국내 저축을 감소시키고 경제의 이중구조를 심화 시켜 경제성장을 저해한다는 부정적인 견해도 함께 존재했다.
1950년대는 한국경제가 미국경제원조에 의존해 국민경제수준을 유지하면 서 수입 대체적 공업화를 추진하는 시기였다 그러나 경제원조는. 1957년의 3억 천만 달러를 고비로 하여 점차 감소되기 시작했으며8 1959년부터 차관 으로 넘어갈 조짐이 보였으며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원조의 감소추세는 더 욱 현저해졌고 가까운 시일 내로 종결될 것이 예고되었다 한국정부로서는. 진지하게 그에 대한 대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1950년대 말에 이르러 서유럽의 부흥으로 인한 미국 지위의 상대적 하락현상은 매년 30억 달러에 달하는 미국의 국제수지적자 누적과 금유출 중대현상을 유발했다 이에 미국. 은 달러위기에 봉착해 이제까지의 대외원조정책의 전환을 색했는데무상원 조를 더 이상 지속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것이 대한원조 감액의 배경이.
다.119) 미국은 1950년대 중반부터 한국에서 장기적인 경제개발전략이 시급
 
하다고 역설했다.120)
이런 배경 속에서 박정희 정권은 경제개발을 위해 제 차 경제개발 개년계1 5 획을 개시했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개년계획은 다음과 같은 일반적 성. 5 격을 가지고 있다 첫째 그것은 물량적 차원에서의 성장우선계획이었다 동. , . 시에 그것은 광공업을 성장주도산업으로 하여 전략부문과 사회간접자본의 집 중적 개발에 중점을 둔 불균형 성장 형이었다 둘째 자원 동원과 배분의 중. , 점을 공업화에 둔 공업화 계획이었다 셋째 공업화에 필요한 투자재원의 조. , 달을 경제협력을 통한 적극적인 외자도입에 의존한 계획이었다 제 차 경제. 1 개발 개년계획 기간 동안 지속된 외자 의존적 발전전략을 수행하기 위해서5 미국의 경제원조에 대신할 새로운 자금원을 확보하는 것이 필요했는데 그것 이 바로 일본자금의 동원이었다. 1960년의무상원조액은 억2 2500만 달러였 으며 1962년 억1 6500만 달러에서 1963년 억1 1900만 달러로, 1964년에 는 8800만달러에서급기야 한일 협정이 체결된 1965년에는 7100만 달러로 줄어들었던 것이다.121) 이러한 상황 속에서 당시 한국정부는 경제계획을 추 진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차관을 도입할 것을 결정하고 1965년 한일국교정상 화 추진으로 일본으로부터의 차관 도입의 길을 열었다.122)
이처럼 한일국교정상화와 차관도입이 가시화된 시점인, 1964년 월에 청8 맥 이 첫 호를 발행하면서 한일국교정상화와 박정희 정권의 근대화 그 당시 , 통치 이데올로기와 정책을 강하게 비판하고 등장했다 특히. 1964년과 1965 년에는 한국 외자를 둘러싼 여러 문제점을 지적하며 비판적인 입장들을 밝혔 다. III장에서는 청맥 지식인들의외국자본을비판한논의들을크게『 』 ①원조
 
및 외자로 인한 국내 경제성장 침체, ② 한일국교정상화로 인한 일본 재침략 가능성, ③ 외채 종속과 식민성이라는 세 가지 차원에서 다루고자 한다, .
3.1.1 원조 및 외자로 인한 국내 경제성장 침체
『청맥 창간된』 1964년 월 특집 에김성두는 미국원조와한국경제 라8 ≪ ≫ 「 」 는 글을 통해 60년대 이전 한국의 원조의 성격과 도입이 한국경제 및 자본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분석했다 그는 하루 빨리 경제 자립을 이뤄야 한다. 고 주장하며 이것을 위해 과거의 원조에 매달린 습에서 벗어나 체계적인 정책을 통해 공업화를 이루고 자본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제 줄. 어드는 원조를 믿고는 살아갈 수 없게 되었고 따라서 원조 없이도 제 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경제자립을 하루속히 이룩해야 된다고 지적했다.
한국은 너무나 오랫동안 미국원조에 의존했고 그것뿐만 아니라 나라의 경제 체제나 생산구조마저도 원조를 받아야만 움직이고 돌아가게 되어 있다 박정. 희대통령은 지난 월6 29일자진해서국회에나와 시국수습에관한대통령『 교서 속에서 우리는 자립하는날에 맞아하여야 하겠습니다 우리의원조도』 “ . 한정이 있는 것이다 영원토록 우리는 외원에 의존할 수 없다 자립이 없다. . 면 진정한 독립이 있을 수 없다.123)
김성두는 원조가 지속적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내부적인 공업발전이 지체되 고 출보다 수입의 규 가 커졌다고 주장했다. “1953년부터 1962년에 이르는 10년 동안 우리나라 수출입무액이 실적을 보면 수입은 연평균 억 천만불에3 6 달하고 있는데 반하여 수출은 평균 천 백만불에 불과했다2 6 . 1/14에도 미달 했다 이유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수출을 하지 않더라도 수입을 위한 외환이. 풍부하게 있었던 까닭이.”124)라고 밝혔다 그는 국내산업 발전이 저하된 이. 유를 원조로 인한 수입증가라고 주장했다. 1945년부터 1960년까지 40억불 이라는 커다란 원조가 들어왔는데 그것을 완제품 식료품 성냥 캔디 등 외, , ,
 
국상품을 구입하는데 대부분을 썼을 뿐 자립경제수립에 일부분만을 썼다.
1945년에서 1961년까지 31억 천 백만불에 달하는 원조총액을 계획사업부3 7 문과비계획사업부분으로나누어보면계획사업부문을총도입액의 19%에해 당하는 억 백만불에 불과하고 나머지1 8 81%인 25억 천 백만불은 비계획사3 1
업원조로 제공되었던 것이다.125)
이는 지난 10년간 대한원조에 있어서 경제건설보다 경제안정을 우선적으로 하는 정책을 실시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청맥 편집실 경제부에서 집필. 한 외자도입의 현황과 문제점 이란 자료에서도 민족 고유자본이 없고 자본「 」 “ 축적이 미약한 후진국에 있어 외자도입이 경제건설의 관건”126)이라고 하며, 외자도입상의 문제점을 방지하기 위한 제도와 정책의 정비를 요구했다. 두 번째로 1957년부터 본격화된 외국자본 문제에 관해 살펴보자 이규동. 은 「외자도입과 국내경제」에서 외자도입의 이해관계는 정부와 정부 간의 문 제와 기업 간의 문제 및 국민간의 문제로 집약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외자. 도입을 무조건 환영할 수도 없고 무조건 반대할 수도 없는 입장에 서게 된 다 그 하나는 현재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후진국개발이론이라 할 수 있. 다 즉 후진국은 일반적으로 저소득국이며 과소자본국이다 뿐만 아니라 저. . 위기술상태에 있기 때문에자원개발능력이 낮다 선진국경제학자들은 일정한. 기간에 외자를 도입하여 자본형성을 하면 후진국의 소득수준이 향상될 것이 며 향상된 소득수준에서 파생되는 저축의 증가로 결국 후진국은 자립하게 된 다는 비교적 낙관적인 견해를 취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R·넉시는 후진국의 개발이 국내적 균형성장을 지향하여야 하며 후진국은 해외부문의 발전으로 경제성장을 실현시키는 어렵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도입을 하는 나라에서는. 자본유입속도보다도 유출숙도가 빨라지는 결과를 자초하고 있다는 것이
다.127)
이런 이규동의 주장처럼 외자도입은 각국의 경제 정치 사회 상황 따라 상, ,
 
이한 결과를 낳으며 외자도입만이 한국의 자본축적에 도움이 된다고 볼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대한 원조가 60년대 한국 경제에 미친 영향은 무엇인가 신복영? 이 미국원조가 한국경제에 미치는 작용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었다 먼저 증. 여형식으로 무상공여되는 물자를 도입함으로써 국내의 물자공급량을 증대시 다 다음으로 도입된 물자를 판매하여 그에 해당하는 우리나라 국내통화를. 대충자금계정에 적립시킴으로써 통화량을 감축시키고 나아가 총적립금을 정 부적자재정의 보전으로 충당하여 수원국이 통화가치의 안정과 그에 따른 경 제발전의 달성을 초래한다.128) 이처럼 신복영129)은 1960년대 원조 미친 영 향을 언급하고 한국의 상황과 외자 도입의 구조분석을 재확인하면서 원조의 문제점들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이런 한미관계에 있어서 가장 실질적인 단면은 뭐니 해도 원조 면이다 경. 제에 미친 영향에 있어서도 거의 결정적인 힘을 미쳐왔다 사실 미국의 원조. 는 경제적 혼란이 극심하였던 해방직후 그리고 무참하게 황폐되었던 직후 이 후 끊임없는 만성적 인플레 하에서 이 나라의 경제적 안정과 성장에 적지 않 게 기여했다 그러나 반면에 미국의 원조가 장기적으로 가져 온 제반 부작용. 도 있었다 현재 미국의 대외원조의 근간적 법. FAA(Foreign Assistance Act of 1961), 동법에 의거한 미국의 대외원조의 근본적인 특색은 경제원조 와 군사원조를 명백히 구분하고 경제 원조를 군사원조 못지않게 cnd실하고 있다는 점 즉 미국의 대외원조는 후진국 개발을 목적하고 있는 점도 사실이. 나 어디가지나 미국 자신의 안전보장을 위해서 행해진다는 것이다.130)
이런 원조의 문제점에 이어서 나기영은 「한국의 소비구조의 분석」에서 한
신복영 미국의 대한원조정책비판 추의「 – ⦁ 과 문제점⦁ 」 청맥 년 월호 쪽
신영복 년 대한민국의 작가 대학교수이며 진보적 학자이다 년 서울 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숙명여자대학교와 육군사관학교에서 경제학 강사로 있다가 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년 동안 수감 생활을 하다가 년에 특별가석방으로 출소하였다 우리 두의 백과사전
신복영 미국의 대한원조정책비판 추의「 ⦁ 과 문제점⦁ 」 청맥 년 월호
국에 원조는 국내산업의 발전에 방해가 되어 국내시장이 해외상품으로 가득 차서 수출을 위한 많은 제품을 수입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서 한국 경제를 더욱 외자에 의존하게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원료 화학제품 및 기계류는 매년 일정한 양이 수입되어야 하고 이들의 수입에 의하여 국민경제가 원활하게 움직이기 때문에 이들의 긴급도는 상당히 높다. 이러한 현상은 이들의 국내 생산이 불가능하다는 현실 때문에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 경제구조를 실행하고 있다.131)
이어서 대부분의 국민소득이 민간소비에 지출되고 있으며132) 이것은 다른 말로 해외에서 들어온 물품소비에 국민소득 대부분을 쏟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습을 비판하며 정병수도 미국외자가 해외투자자본의 초과이윤획득을 위한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지적 했다.
미국의 거대 기업에 의한 민간 자본의 해외 진출의 본질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 없이 자본 수입국의 경제 발전보다는 해외 투자 자본의 초과 이윤의 획득을 위 한 현지 자원의 무자비한 축출에 있고 자체 역량에 의한 개발의 기회와 투자 수 익률을 잠식하고 있는 것이다.133)
이런 외자를 매개로한 한미간 불균등한 관계를 박준규는 해마다 한미 간· “ 에 체결되는 잉여농산물협정을 통해 설명했다 매해 도입되는 농산물의 품목. 별 금액과 농업 총액이 미국측 주관으로 결정되고 그로써 취득될 판매대금 (圖貨)의 용도별 배정도 미국측이 결정했다 한국에서 잉여농산물 판매. 代錢 이 재정수입에 편입되는 대충자금의 주요 부분을 형성하여 왔으며 그것이 한 국의 방위태세유지에 불가결한 국방 예산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은 주지 의 사실”134)이란 불가피성을 제시한다. 이동규는 외자도입은 자본축적과 경제개발과 거리가 있음을 주장했다 즉.
 
“원조는 직접적인 한국 자본에 투자하는 것이 아니고 오늘 내일의 문제만 해 결하는 일시적이며 진정한 자본의 육성과 경제개발을 가로막는 것 이었다” . 결과적으로 급속한 성장을 원하여 도입한 외자가 장래 성장을 저해시 다는“ 아이러니를 감수하지 않으려면 외자도입은 정밀한 계산 하에서 최소한으로 그쳐야할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외자. 도입을 서두르기 전에 다시 한번 우리의 내부를 들여다보아야 할 여유가 있
어야 할 것 이다” .135) 외자 문제에 대해 최근덕도 해결점은 간단하다 한미행정협정이라는 정, “ . 치적 해결점을 찍어버리면 그만이요 불순한 문물을 교습 과정에 있는 이 가, , 녀린 나라에 흘려보내지 않으면 될 것이다 아무리 원조방식이 어떠니 여건. , 이 어떠니 하고 항변을 시도한대도 그건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의 무능. 은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가난에서 헤어나려는 노력에 달려 있다고 봐 줘야. 할 것이다.136)”라고 한미 행정협정의 개정을 통한 자립경제를 웅호했다. 하지만『청맥』에서는냉전아래에서미국의영향력으로부터한국이자유로울 수 없음을 지적하기도 했다 박준규는 한미관계를 국가대 국가 간의 외교 관. · 계로서 고찰할 때 한국은 미국에 대하여 경우에 따라서는 지나친 기대를 걸 고 있는 것이 아닌가를 재삼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제사. 회란 도덕사회도 자선사회도 아니며 그 곳에서는 힘의 서열에 따라서 응분의 지위가 규정되며 각자의 지위에 따라서 응분의 대우를 받기 마련이다 일본. 이 한국 보다 월등한 비중의 대우를 미국으로부터 받고 있는 것도 그러한 원 리로 부터 연유하는 것이며 어느 의미에서 한국은 미국의 대우를 탓하기 전 에 스스로의 무력함을 한탄해야할 입장인지도 른다는 것이다 한국이 일본. 이 받고 있는 정도의 대우를 미국으로부터 받지 못 한다고 반미적 감정에 흐 른다거나 한미 관계의 역사적 의의를 망각하고 미국 이외의 다른 강국 예컨· ( 대 일본 과 새로운 관계를 형성 하려고 덤벼드는 것은 두가 한국의 국가이) 익에 배치되는 처사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것이란 것이다 이것을 대미일변도. 니 사대주의니 하고 비판할 수 있는지 르나 세계정치의 현세 하에서 소위
 
중립국가를 제외한 국가로서 미국 혹은 소련과의 기준에 크고 작고 간에 의 존하지 않는 나라가 몇 개나 되는지 따져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137) 이처럼 약소국으로써 원조도입이 필수적이었지만 차 대전이 끝난 이후 냉2 전하에서 미국과 소련이라는 강대국의 이념 대립이 강화되었다 한국은 그. 대립의 결과로 분단국가로 독립을 찾았다 그 이후 한에는 미군원조가 경. 제적 정치적 사회적 차원에서도 꽤 중요한 부분이 되어버렸다는 점도 미국, , 원조의 필요성을 강화시켜 주고 있다 이러한 외자도입에 기반을 둔 국가주. 도 경제개발에 대해 정병수 이태근은 미국 대외원조를 극동지역의 군사원조, 정책으로 분석했다.
먼저 정병수는 우리에게 제시하여 주는 바는 미국의 대외원조가 군사원조“ 이건 경제원조이건 간에 대외원조형식에 불과하고 군사적 목적을 제일로 하 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한국의 국방력은 대충자금의 전액이 다회계로 전출되지 않고 국방자원에만 충당된다고 가정하면 전투력이나 병력유지의 든 면에서 미국의 지원에 의하여 지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사실은. 한국군대가 전적으로 미국에 의존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며 자 체방위의 목적이 없었던들 외국의용군이라는 딱지를 면치 못하였을 것이다” 라고 주장했다.138) 정병수는 이런 문제점에서 벗어날 방법으로 종속상태를“ 미리 방지하기 위해서 우리의 자립적인 군수산업 체제를 건설하여야 하고 한 국군은 한국산업생산력의 뒷받침으로 지지 되지 않으면 안 된다”139)며 한국 산업생산력이 발전되어야 국방문제가 해결된다고 보았다.
이런 미국의 원조 성격에 대해서 이태근도 미국의 전략은 중국의 태평양 진
출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기에 미국은 한국과 대만 및 월 을 지점으로 하여 한반도를 통한 중공의 대일외협 및태평양지역에의 진출을막고대만으로부터 중공본토에대한위협 으로 중공심장부를 제압하고 월 은 자유 지역내에 확보함으로서 「인도지나」 등지로의 중공의 진출을 억제하려는 극동정책의 일변을 엿볼 수 있는 것이
박준규 조약협정으로 본 한미관계「 」 청맥 년 월호 쪽 정병수 미대한군원정책분석「 」 청맥 년 월호 쪽 위의 논문 쪽
다.140)
이상에서 원조와 외자의 경제적 과를 보면 해방 이후 한국경제는 미국 원조에 의존했으며 외국 자본을 도입했지만 기대 이하의 성과를 거두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물론 한국에서 자본주의 경제가 발전하기 위해 외자 도입이. 필요하지만 반대로 외자로 인한 국내 경제성장 침체되고 있다는 점을 청맥 지식인들이 지적하고 있었다 즉 이들은 원조와 외자 도입 자체를 부정하지. 않지만 이를 적용하는 제도에 문제가 있으며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자율적, , 인 구조를 갖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3.1.2 일본 재침략 가능성
1964년 월 청맥 이 창간되던 당시 한일회담 반대데 를 통해 민족주의8  가 확산되고 있었다. 5.16쿠데타 세력은 민정이양 후 한일국교정상화 추진에 매달렸다 이 과정에서 한일 회담의 굴욕적 내용이 알려지면서 대학을 중심. 으로 반대시위가 일어났고 급기야 6.3사태를 빌미로 정부는 계엄을 선포하기 에 이른다 청맥 창간호는 이런 분위기에서 준비되었고 계엄해제 다음날인.  8월 일자로 발간되었다 청맥 의 잡지 이념을 당대 다른 잡지들과 대비해1 .  규정하자면 반외세 민족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청맥 이 반외세 민족‘ ’ .  주의라는 기조를 갖고 있다는 것은 창간호의 구성에서 잘 드러난다 청맥.  창간호는 특집으로 아아 이 민족 이 수난이라는 기획을 통해 두 여섯 편‘ ’ 의 글을 실었다 이 글들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구한말 일제시대로 나누어. , , 외세에 의해 고통 받아야 했던 민족사를 환기시키고 있다 기획 논문이 역사. 적 고찰에 해당된다면 별도의 논문으로 발표된 미국원조와 한국경제「 」 「, 한 일회담의 기본적 문제점」은 청맥 의 반외세 민족주의가 당대적 과제를 대상 으로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청맥 의 민족주의는 당시의 사상적 지평에서.  
반외세적 성격이 강했다고 할 수 있다.141)
 
 
『청맥 에서는한일국교정상화를통해드러났던경제적종속 일본재침략의』 , 가능성에 관해 비판했다 먼저 이갑성은 대일청구권은 우리가 당연히 일본. “ 으로부터 받아야 할 자금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마치 원조자금을 받는 것이 나 되는 것처럼 되어버렸다.”142)고 비판했다 더 나아가서 얼핏 보기. “ 에 한 일 두 나라의 경제적 여건은 서로 보완적인 관계를 갖는 듯 하지만 그러나, 그 것은 속단에 지나지 않고 이러한 경제적 배경이나 기본적 조건을 전제로 하여 더욱 따져야 할 문제이다 일본자본을 도입함으로써 일본자본이 또한. 우리나라에 진출할 수 있고 우리의 시장을 지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러니 한일 경제관계는 단순히 보완적인 것이라. 기보다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를 재현할 수 있는 요소가 없다고만 말할 수 없 는 것이다”143) 이들은 한일회담을 민족의 원수들에게 엎드려 절 받는 경제“ 협조를 빙자한 차관이란 이름의 고리채”144), “일본의 막대한 상품시장이 되 거나 그 개척의 발판”145)이라고 새로운 경제침략을 받아들였다 또한 김대상. 은 「일제무단통치의 본질 –그 탄압의 제양상」에서 일제통치를 다시 돌아보 며 뒤늦게 자체의 자본주의적 전형을 이루고 제국주의화한 일본이 한국을, , 식민지화하여 통치함에 있어서 나타난 탄압과 수탈의 가혹함을 인류역사상 일찌기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고 일제의 억압을 평가했던 반면146) 김책 은 「일제의 경제침략」을 통해 일본이 한국을 경제침략을 해서 자본축적이 이 루어졌다고 강조했는데 “...일제는 우리에 대한 식민지지배로서 그들의 경제 발전에 후기적인 무단통치를 본질로 하는 군국지배를 강요실천함으로서 그· 들의 소기한 바를 잔인무도하게 집행하여 나갔다는 사실은 천후에 씻을 수 없는 민족의 회한인 것이다.”147) 이를 이어서 안무순의 「보이지 않은 「히노 마루」」에서 지금도 일본의 경제침략이조용히 한국수입구조에 지속되어 있다
 
고 아래와 같이 주장했다.
특히 일본상품은 최고급 사치품으로부터 기초공업품에 이르기까지 전상무역, , 재산반입 자본도입 심지어는 밀수등의방법으로국내시장의해외상품에 대한, , 수요를 석권하고 있다해도 과연 아니다 원조수입을 제외한 일반수입의 태반을. 일본이 차지하는 한국수입구조의 특징을 만들어온 요인들이라고 하겠다 일국. 의 과세전과 과세대상이 된 일인상사에 대한 국내에서의 영업허가와는 별개문 제일 뿐만 아니라 외교협상과는 더더구나 별개문제라고 여 진다 따라서 정부. 는 한일회담을 납득시킬 설득력을 행사함에 두려워함이 없어야 할 것이며 사실 을 토대로 한 국가과세권의 발동에 과감하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148)
뿐만 아니라 같은 해 12월 「1965년 치욕의 한해 에서는– 」 6.3사태 직후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그토록 캄캄한 칠흑 같은 나락이었다. ··· (중략) ··· 한일우호조약 체결과 그 비준 거리를 휩쓴 학생들의 데, , 학원난입 위수령 정치교수와 정치학생의, , 新語 創造 , 일부야당의원의 의원직사퇴 정부의강경책 일변도와 검거선풍 일, , 부야당의원의의원직 복귀 사퇴의원 정치부재의 암흑도양당인과언론인에대, , 한 테러사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반국가음, , 여기에 무 꿈이 있고 여기에 무 근대화가 있으며 내일이 있단 말인가?149)
이처럼 한일국교정상화는 일본자본이 본격적으로 도입되는 계기라고 『청 맥 지식인들은 전달했다 또한 이로 인해 한국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일본에』 . 다시 종속될지도 른다는 일본침략의 위기를 느끼게 되었다.
3.1.3 외채, 종속과 식민성
이렇게 무상 원조에서 유상 차관으로 전환되어 가고 있는 현실에서 한국 경 제에 공업을 발전시킬 차관의 필요성이 커지고 있었다 박정희도 국내 공업. 발전을향상시켜야지 경제개발이 이루어진다는것을 보고 있었으며 국가주도 수출드라이브는 1965년 한일 회담 타결을 전후한 시기에 본격적으로 추진되 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65년 차관 급증 현상에 관해 김성열은 다음과 같 이 비판했다;
5.16군사혁명 주년 월4 5 26일부터 10일동안 박정희대통령의 방미에 일억오「 천만불개발차관 을 새로얻게 된 것이며 이것을 한국이 흭기적인 성과」 「 」 「, 일급 선물」 「, 큰선물 로 받아드렸다 이때 박대통령이 사천만불규 의제 제 비료」 . 3, 4 공장 건설계획을비롯해서, 844만불 짜리 볏짚팔프공장 이백여만불의 씨멘「 」, 「 트」공장 등등을 합해서 약 육천만불어치의 차관 신청을 미국에 내놓고 추진중 에 있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월 에 파병을 해서 국제적으로 곤경에 빠. 져있는 미국의 체면을 크게 세워주었고 또 미국 동방정책의 뼈다귀라고 볼수, 있는 한일국교정상화에도 가진 애를 쓰고 있는 한국에 박대통령을 맞이해서 「 죤 대통령은 당장에 어떠한 실속 있는 선물」 ..... 돌아온 박 대통령이 돌아와 본 AID차관 중에서 1/3에 해당한 일억불을 금년내 사용하고 나머지는 내년 6 월말까지 쓰도록 하라는 기한부 사용지시를 한데 대하여 「버스틴」주한 「유솜」 처장은 일억불을 연내에 사용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150)
뿐만아니라 외자 문제는 경제 성장뿐만 아니라 종속과 국내 빈부격차의 원, 인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는데 임종철은 내일은 있는가 에서 한국경제의 대, 「 」 미 예속성과 이를 통한 빈부격차에 대해서 언급한다 외원이 전비 조달을. “ 위한 소비재 위주였던 것을 기화로 소비성향만 높이는 비생산적 활동만 계 속 되었으며 원조물자를 실은 배가 며칠만 늦게 와도 공장이 문을 닫고” , “ , 원조비 배정이 며칠만 늦어도 시중물가가 천정부지로 뛰는 취약한 의존경제 를 만들어 놓은 것 이라고 주장하며 이 원조조차도 매판자본에 의해 독점되” , 어 빈부간에 뛰어넘을 수 없는 소득차가 발생했다고 했다 더하여 이러한. , “ 추세가 현재에 분쇄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는 파멸의 심연만이 앞길에 놓여
있을 따름 이라고 주장했다” .151) 하지만 외자는 오직 경제적인 부분에만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미국원조나.
 
일본 차관은 한국 사회 한국인들의 사상에도 큰 영향을 주고 있었다 특히, . 이런정신적인종속문제를 청맥 필자들이비판하고있었다 최근덕은 우『 』 . “ 리는 지금 미국 속에서 살고 있다 한국의 미국이 아니라 미국 속의 한국에. , 살고 있다며 이를 문화를 두고 하는 말”152)이라고 표현했다 최호도 한국에. 서 가장 큰 외인부락은 미군부대를 들 수 있으며 도덕기준이 희박해진 요즘 서양 사회와 접촉하여 무조건 방하다보면 내 것은 잃어 버리고 의 것으 로 겉치레를 하려하는 것이 좋지 않다고 주장했다.153) 이어서 서석규의 글 속에서도 미국을 바라보는 한국인들의 습을 확인할 수 있다 근대화는 곧 서구화이다 서구화되려면 우선 인간개체부터 서구화 되. “ . 어야 한다 어린애를 키울 때 우유와 빵을 먹이고 미국의 육아 방식대로 엎. 어 재워 머리통이 망치처럼 앞뒤로 튀어나온 짱구가 되도록 키워야 한 다”154)라는 미국에서 돌아온 박사의 「조국근대화의 길」에서 언급하며 이런 인식을 가진 신세대들이 한국 사람들이 참으로 많아졌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어서 젊은 여성들이나 혹은 학생들이 미국인들과 함께 다니고 다방에라도“ 같이 가고하는 것을 무 자랑으로 아는 것 같다 라는 미국에서 돌아온 교포” 의 말에 동의하고 있었다.155) 이런 위대한 미국에 대한 사대적인 의식과 외 자를 따라온 어두운 문화와 인식들을 비판했다.
1960년대 한국의 식민성 문제가 경제적인 분야뿐만 아니라 문화에서도 이 루어가고 있었다 특히 탈식민 민족주의 담론의 확장인 문화의 식민성 즉 문. 화식민지론이었다. 1966년 중반 이후 청맥 의 민족주의 담론 내에서 문화『 』 담론의 비중이 증가했다 여기서 문화 담론이란 민족문화에 대한 언급과 논. , 설이 구체적으로늘어났다는 것이다 이 시점을 기점으로 청맥 의민족주의. 『 』 담론은 정치적 경제적 식민성으로부터 문화와 일상의 식민성으로 확장되‘ ’ ‘ ’ 었다 이를 문화식민지론으로 부를 수 있겠다. ‘ ’ .156)
죄근덕 한국인이 본 미국과 미국인「 」 청맥 년 월호 쪽 최호 한국판 에덴의 동쪽「 」 청맥 년 월호 쪽 서석규 어두운 아케리카니즘「 」」 청맥 년 월호 쪽 서석규 어두운 아케리카니즘「 」」 청맥 년 월호 쪽 허은 『미국의 해게 니와 한국 민족주의냉전시대 문화적 경계의 구 축과 균열의 동반』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문화식민지론이 본격적으로 다뤄졌다는 것은 1966년 월호 특집 문화식6 ‘ 민론을 통해서였다 월호에는 특집 외에도 문화식민지론과 관련된 편의’ . 6 3 논문이 실려있다.157) 문화식민지론은 일상과문화의 식민성을 가장근본적인 지표로이해했다 문화식민지론은 청맥 창간호에서부터등장하였는데 문제. 『 』 , “ 는 타국에 점령되는 군사적인 면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화의 식 민지화에 있었다”158)라는 대목이 그것이다 그 외에도 특집에서 고병익은. “문화 식민지 현상을 더 깊이 사적인 생활면에까지 즉 의복 식사 주택의” “ , , , 생활에도 들어오고 가족윤리대인 관계에도 들어온다는 점이다 에서 찾았· ” 다.159) 김동영 역시 현재의 상황을 신식민주의로 바라보고 일상생활의 식‘ ’ “ 민화 를 식민지 지배의 최고형태 라고 지적했다 그의 식민주의론은 잠시” “ ” .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현대의 신식민주의는 정신적 무형의 간접지배의 형태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일 상생활에 있어서의 식민화가 문제시되고 있다 이미 식민성에 젖어 든 사람은. 무엇이 식민성인가를 판단할 기준을 상실하기 때문에 생활의 식민화야 말로 식
민지 지배의 최고형태라 할 수 있다.160)
『청맥 주도지식인들의문화식민지론은서구문화의주체적수용등문화수』 용에 대한 태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들의 기본적 관심은 제국주의. 적인 서구문화로부터 토착문화 민족문화의 고유성과 독자성을 확보하는 것, 이었다 이진영이 지엽적이고 유행적인 소비문회유형 의 천박성을 지적하거. “ ” 나 김동영이 이미 대량소비단계에 들어선 부국에 대한 지각없는, “ 방 을” ‘사치라고 규정했던 맥락은 서구 소비문화의 무분별한 방에 대한 비판처’ 럼 보이기도 하지만 서구문화의 식민화의 유입을 식민화의 병이나 위장된, 식민주의 정책으로 인식하였다는 점에서 서구문화에 대한 거부였다.161)
년 월호에는 특집 외에도 문화식민론과 관련된 편이 더 실려있다 이는 김 철순 우리문화 서구문화 김도영 문화식민의 경우 생활 방 임중빈「 」 「 ① 」 「 방 문학의 한계와 창조 등이다」
이철범 민족적 수난과 한국인의 병리「 」 『청맥』 년 월호 쪽 고병익 식민지 문화와 문화 식민지「 」 『청맥』 년 월호 쪽 김동영 문화식민의 경우 생활 방「 ① 」 『청맥』 년 월호 쪽
세계문화란이름 아래 민족주권이침탈되고토착문화가 압살되는경우가 얼마 나 많은가 세계의 제 약소민족의 식민화과정에서 후진국가를 노략질함으로써. 일등기수로서 선진화의 선두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던 강대국은 언제나 자기네 의 우월한 입장 지도적 사명 그리고 타민족 지배에 대한 역사적 불가피성을 강 변하는 국제문화의 대변자를 의례 갖는다.··· 한국 대중문화형성의 기조는 세계 문화를 표방하는 외국의 고도문명이나 자본주의적 소비구조이다 대중문화는. 원래 비생산의 향락문화이며 빈곤과 무지에 허덕이는 한국민중이 그러한 문화 에 젖을 때 그것을 과도한 기대와 소비 수준을 초래하고 그것은 드디어 민중의 창조적 역사의식을 마비시키고 민족의 주체성과 절박한 현실감각을 상실하게 한다.··· 대중문화는 후진경제의 종속화를 강화하며 자본축적을 방해하여 외국 자본 및 매판자본에 봉사하지만 민족자본의 육성에는 방해하는 역할을 한
다.162)
더 나아가 청맥 주도지식인들은근대화의정도에따른 문화의 선진후진『 』 / 구도를 문명문화 물질정신 구도로 변화시켜서 후진성의 굴레라는 곤경으/ , / 로부터 벗어나려 했다 이같은 인식은 김질락의 글. 1966년 월호에서 실린7 「문화는 차용할 수 없다 을 통해 분명히 드러난다 그는 문명을 우리가 사」 . “ 용하는 기구 전체 즉 정치 경제 기술로 표현 되는 물질문명으로 문화” “ , , ” ‘ ’ , 를 문명을 고무하고 창조하는 정신적인 작업 즉 예술 문학 종교 도덕“ ’‘ “ , , , 으로 표현 되는 정신문화로 구분하여 문화를 민족의 고유성의 지표로 설” ‘ ’ ‘ ’ 정했다.163)
김질락의 문화론은 서구에 대한 후진성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한 선택인 동시에 현실적으로는 박정희의 근대화론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의 문화론은, . ‘근대화 서구화를 거부하고 문명을 문화의 도구로 설정함으로써 산업화를= ’ 핵심으로 하는 박정희 근대화론을 상대화할 수 있는 논리였다.164)
이동헌 「 년대 청맥 지식인 집단의 탈식민 민족주의 담론과 문화전략」 역사와 문화 년 제 호 족
이진영 해방과 소비문화의 침투「 」『청맥』 년 월호 쪽 이동헌 「 년대 청맥 지식인 집단의 탈식민 민족주의 담론과 문화전략」 역사와 문화 년 제 호 쪽
위의 논문
이상에서간단히검토한것처럼『청맥』지식인들은문화식민지론을통해서 구문화를 상대화시키고 민족문화의 고유성을 옹호했지만 그 민족문화는 주, 체성 민중성 등 새롭게 구성되어야 할 민족문화의 지향을 밝히고 있을 뿐이, 었다 이런 청맥 지식인들에게 민족문화는 새롭게 발견되고 구축되어야 할. 과제였던 것이다.
이런 과제로서 민족문화를 반영하듯이‘ 1966년 월 문화식민론을 시작6 ’ 으로 1966년 월부터 월까지 민족문화론 학문의 소작지 한국 민족문7 1 ’, ‘ ’, ‘ 화의 문제점들 우리 말 우리 글 현대와 유교 등 민족문화와 학문에서의’, ‘ ’, ‘ ’ 주체성을 촉구하는 내용의 특집이 계속 다뤄졌다 이 같은 특집의 배치는 새. 롭게 창조되어야 할 민족문화를 탐구하기 위한 의식적인 배치로 해석된‘
다.165)
이상에서살펴본제 절의 분석을 요약하면1 , 『청맥 지식인들은 이런외자』 , 외채 종속 문제에 관해, ① 원조 및 외자로 인한 국내경제성장이 침체됨, ② 한일국교정상화를 인해 일본 재침략 가능성, ③ 외채 종속과 식민성이라는, 세 가지 문제를 일으켰다고 주장을 했다 즉 외자도입은 한국 국내경제의 이. 중구조화를 일으켜 국내산업 발전을 위축시키며 외자를 수입능력 이상으로 도입함에 따라 외채가 누증될 현상을 일으켜 경제의존도를 더 증대시켰다는 것이다 더구나. 1960년대 외자정책이 미국과 일본에 편중되어 양국의 경제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었다 이것은 이미 한국은 미국에 경제적으로. 종속된 보습을 보여주며 한일국교정상화로 인해 일본의 경제적인 침략이 가 능하게 된다며 식민성이 크게 들어나 있다는 주장을 강하게 제시하고 있었
다.
제 2 절 민족경제와 자립경제
1950년대에서 1960년대로 넘어오면서 한국의 경기는 점차 하강하기 시 작했다 그 원인들로는 그간 한국경제를 지탱해 왔던 미국의 원조가. 1958년
8.7%에서 점차 둔화되어 1960년에는 1.9%로 거의 제로성장 상태에 직면하
 
였기 때문이었다 이 상황에서 박정희는. 5.16군사쿠데타 이후 조국근대화를 주장하면서 경제적 자립을 이룩하여 민족적 주체성을 확보하자고 주장하였 다 군사 정권은 조국근대화를 운영할 자금과 근대화를 수행해야 할 자금이. 크게 필요 했었다 특히 산업화를 위한 원조가 지속되어야 했고 투자 및 차. 관을 최대한 많이 받아들여야 했다 특히. 1945년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지 원됐던 40억불의 원조가 한국경제에 안전성을 유지했으나 경제개발에 투자 가 되지 못했고 오히려 여러 가지 국내 산업개발과 차 차 산업에 피해를2 , 3 주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자 박정희 정권은 산업화를 통해 수출의 적극. 적인 확대를 주장했다 군사 정권 제 차 경제개발 개년계획의 목표는. 1 5 1962 년에서 1966년까지 주요 과제는, ① 농업 생산력 증대, ② 전력석탄 등의· 에너지 공급원 확충, ③ 기간산업 확충과 사회간접자본 충족, ④ 유휴자원 활 용, ⑤ 수출증대로 국제수지 개선, ⑥ 기술진흥 등이었다 정유비료화학전. · · · 기기계 등의 기간산업과 사회간접자본 확충에 집중적인 투자를 했다 초기에. 는 어려웠지만 한일회담의 성사와 배상금 지급 경제개방화 조치로 인해 외, 국자본의 대대적인 유입에 성공하여 경제성장의 기틀을 다지며 고도성장의 궤도로 진입했다 경제개발 개년계획 결과로 원래 목표인 연평균 경제성장. 5 률 7.1%를 넘는 8.5%의 성장을 이어가는 가운데 인당 국민소득도1 83달러 에서 123달러로 높아졌다.166) 그렇다면 과연 1960년대 박정희의 경제정책은 성공이었다고 말할 수 있‘ ’ 을까 정치적인 측면에서 목표를 달성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목표? . 를 달성하기에 어떤 과정을 걸쳤는지 그 당시 지식 사회가 박정희 정권의 경 제개발을과연 성공으로받아들였는지가중요하다‘ ’ . 『청맥 필자들은박정희』 경제개발을 어떻게 생각하고 평가하고 있는지 또한 그들의 주장한 자립경제 와 민족경제가 무엇인지를 원조경제 정경유착 일본자본진출 등을 통해 차, , 례로 살펴보고자 한다.
『청맥 에서』 한국경제문제는여러차례특집으로기획되었는데, 1965년 3 월 한국의 독점산업‘ ’, 1965년 월 한국의 민족자본 등이 그 예이다 그 외6 ‘ ’ . 개별 논문에서 원조 경제에 관한 내용이 두드러졌다 특집과 개별 논문의.
 
『청맥 필자들의바라보는박정희경제개발주요정책에대한비판들은크게』 ① 원조경제 비판, ② 재벌독점기업의 기형성 및 정경유착 폐해· , ③ 일본의 자본 진출과 경제침략, ④ 수출주도 산업화 비판 ⑤ 중산층 육성 및 빈부격 차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리고 이런 비판들의 대안으로 자립적 민족경제를. 주장했다.167) 한국 경제에 대한 이들의 생각은 권두언과 이들이 집필한 논설 을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지금부터. 『청맥 필자들이』 어떤근거에 서 이런 비판들을 했는지를 분석해보려고 한다.
3.2.1 원조경제 비판
위에 절에 서술한 것처럼1 『청맥 필자들은 여러 면에서 미국에서 들어온』 무상원조가 한국사회와경제개발에 문제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청맥 필자』 들은 원조경제가 민족경제 및 자립경제 측면에서 크게 두 가지 문제를 일으 키고 있다고 보았다.
첫째 예속성과 대의 의존으로 인해 국내 경제를 개발할 기회를 마련해 주, 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박희범. 168)은 한국경제의 대외 의존도를 국내뿐만 아니라 무역구조에서도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자립경제自立經濟 대외적인 경제거래 없이 자기경제에 필요한 재화와 용역을 자 기 경제단위내에서 생산 공급하는 경제를 의미한다
민족경제民族經濟 민족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외세의 간섭 없이 온전히 살아갈 수 있는 민족 단위의 자립경제를 운영해 나가는 이론으로서 외자의존형 경제개발이 한국경제의 종속을 심화시킬 것이라는 점을 강력히 비판하면서 자립경제를 중시 하는 정치경제학의 한 흐름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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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범 년∼ 년 대한민국의 경제학자이다 경북대학교 법정대학 교수
∼ 를 거쳐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교수 ∼ 로 봉직하면서 경제연 구소 소장과 학장을 지냈다 문교부차관 경제과학심의회의 상임위원 충 대학교 총장 을 역임한 뒤 년 이후 계명대학교 교수로 후진양성에 여생을 바쳤다 그는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경제계획을 지지하였으나 사회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경제발전이론을 한국경제학계에 처음으로 도입하고 년대 한국 경제학계를 주도한 경제학자들 중에서 가장 진보적이면서도 민족주의적이었던 경 제학자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국내 경제활동이 미원조를 뒷받침 한 소비재 공업을 기반으로 하여 제 차 산업3 을 중심으로 발전되고 안위되어 온 사실은 한국의 무역구조에도 그대로 나타난 다. 1953-63년간의평균치를 보면 우리나라의 수출 원조도는 GNP의 4.3%이 나 수입의존도는 13.9%로서 그 여조인 9.5%는 원조에 의존한 몫이 8.9%이고 해외차입이 0.6%로 나타났다.169)
이렇듯 당시 한국 사회에는 외국 자본의 도입을 해외 투자 자본의 초과“ 이윤의 획득 을 위한 자본 침투라는 차원에서 사고하는 흐름도 존재했다 이” . 규종도 선진국가의 이론가가 작성한 개발 형에 따라 경제개발을 하면 개발 계획의 집행과 더불어 의존성이 증가 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170) 따라서 “선진국에 후진국을 원조하는 방법은 아직도 민족자본개념을 유 하게 하는 이유를 형성시키고 있다.”171)고 외국 자본의 성격과 현상을 지적하고 있다. 이창렬도 이러한 대외적 예속에서 벗어날 때 민족자본을 육성해 나갈 수 있다고 주장하며 민족자본의 육성은 정치적으로는 독립하였지만 경제적으로 선진국에 대한 경제적 예속에서 벗어나고 그러한 경제적 예속의 내생적 요인 인 매판적 요소를 불식하는데 있음을 밝혔다.172)
이렇게 경제적 예속을 우려하는 목소리는 외자도입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측에서도찾아 볼 수 있다 당시 청맥 편집실 경제부에서 집필한 외자도. 『 』 「 입의 현황과 문제점 이라는 자료를 보면 민족 고유자본이 없고 자본축적이」 , “ 미약한 후진국에 있어서 외자도입이 경제건설의 관건173)”이라면서 외자도입 의 당위성을 인정하고 있었음에도 외자도입상의 문제점을 방지하기 위한 제, 도와 정책이 반드시 정비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던 것은 이러한 흐름을 단적으 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둘째 원조의 핵심으로 국내자본건설보다 국내안전을 더 우선으로 하였다, . 박희범은 미국원조의 대부분이 소비재이고 투자의 주요대상이 소비재가공업
 
인 데다가 투자방법이 재정적자지출이 아니면 금융면에 있어서의 적자를 의, 미하는신용창조로 말미암은 인플레이션은 관료적 상업자본의 원시적축적의 절호의 터전을 마련하며174) 국민의 생활수준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주 장했다. 셋째로 원조는 한국의 제 차 산업발전을 저하 시켰다 원조로 들어온 해외1 . 물자는 국내에서 생산된 물자보다 가격이 싸기 때문에 한국의 차 산업의, 1 원료는 수입으로 들어온 수입물자로 생산과정에 소요되는 비용이 높기 때문 에 가격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이 현상은 점점 이농을 확산시키고 도시집중. 화와 수입의존도를 지속시키고 빈부격차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이런 현. 성은 미국원조 주요도입 상품을 통해 정확하게 볼 수 있다 신복영은 미국. 「 의 대한원조정책비판 추이 과문제점 에서 다음과 같이 원조의 단계를 구– · · 」 분하고 있다;
미국의 원조는 크게 보아서 대체로 개의 단계로 나눌 수가 있다4 .
(1) GARIOA원조기 (1945년~1949년): 1945년미군의진주와더불어미군정 기간 동안 공여된 원조로서 명칭 그대로 구호적 성격의 원조이었다 따라서. GARIOA원조의 주요도입물질은 식료품 농업용품 피복 기존시설유지용품 및, , , 의료품등의 소비재였다.
(2) ECA원조기 (1949년~1950년): ECA원조는원래「1946년 경제협조법 에」 의거한 유럽 경제부흥을 위한 원조로 개시되었던 것이나 한국도「 」 1946년 12 월 10일에 대한민국과 미합증국간의 원조협정 에 의거 동원조를 받게 되었「 」 다 이 원조는 동란후 구호원조로 성격이 변한. SEC원조를 포함하여 동합 202 백만불 상당액이 도입되었는바 SEC 원조를 저한 주요도입물자는 식량비료 석, 유류 원료 및 반제품 공업 시설 등이었다, , .
(3)전후긴급구호원조기 (1950~1953년 전후긴급구호원조로주축을이룬것은): 소위 CRIK원조로서 있는 북괴의 침에 의한 전재민구호 질병방지를 위하여, 설립된 국제연합한국민간국민간구호사정부(UNCACK 1953년 7월 1일로 KCAC로 개편됨 가 담당하였던 원조이다 주로 식료품 의류 의약품 석유 제) . , , , 품과 같은 완전소비자와 원면비료와 같은 원자재로 구성되어 있었다.
(4)사변후의대한원조(1953년~): 이원조는한국휴정협전이개시되자전재로부 터 부흥이 긴급한 과제로 요청되자 1950년 월의 제 차 총회는 한국의 경제를2 5
 
전전수준으로 부흥시킬 것을 결의하고 동결의 따라 발족한 것으로서 원칙적으 로 경제부흥원조이었다 인천의 판초자공장과 문경의 씨멘트 공장 건설이었. 「 」 으며 이밖에도 농업 공업 광업 전력 수송 보건부분에 현저한 업적을, , , , , 놓
았다. 175)
여기서 보면 원조도입 주요 물자의 첫째로 식량품과 농업용품들이 차지하 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원조를 통해 국내 경제적 생산이 어떠한 방. 향으로 나아갔지를 재벌 문제를 통해 다음으로 살펴보자.
3.2.2 재벌·독점기업의 기형성 및 정경유착 폐해
『청맥 필자들은재벌및독점기업에 대해서 발호하는 매판자본에짓눌려』 “ 날로 영세화하는 민족자본”176)이라는 대목에서 알 수 있듯이 자립경 제의 입장에서 비판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1966년 삼성의 소위 사카린 밀수사‘ 건에 대해서는 반민족적 망국재벌이라고 격렬히 비난했다’ “ .177) 또한 1953년 휴전 후 한국의 자본축적 과정은 극히 짧은 기간에 소수의 독점자본 을 출현시켰고 특히 한국의 독점자본은 자주적인 민족자본으로서가 아니라, 해외의존적인 매판자본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고 비판했다.178)
특히 지배적 위치에 있는 대자본가들은 정부와 유착해서 부정한 수단을 통 해 금융과 외환배정상의 특혜를 받아서 소비성물자의 수입에 앞장섰고 그 가 격을 일반상품이나 또는 수출상품의 가격보다 높게 했다.179) 실제 1965년 국제 가격의 변화 폭이 기껏해야 50%상승이었음에 반하여 국내 설탕 가격은 실로 여섯 배 이상이나 상승하였다.180) 또한 대부분 주요산업이 정부소유였 던 한국에서 자본축적은 자연히 재정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아온 재정독주형 의 축적방식에 의존하고 있었다.181)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제도 형성의 측면에서 보면 기업가가 국민경제 속에 서 수행하여야 할 역할은 본래 돈벌이하자는 데 있지 생산하자는 것이 아‘ ’ 니 라는 것이다” .182) 이윤의 획득이 약속되지 않는 기업은 성립될 수 없다. 그러나 기업가들만의 독단적인 이익만이 있다면 이것역시 문제였다 기업가. 들의 성격과 정부가 내주는 특혜로 죄를 짓고 악을 행하지 않기 위해 즉 이, 두 가지의 균형을 잡는 것이 올바른 경제 제도이며 정치권력이 해야하는 일, 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1960년대 자본주의제도 안에서 이런 역할을 행사 해야 할 정치제도가 대기업가들과 손을 잡고 국민경제 발전은커녕 국민의 생 활에 큰 악이 되고 있으며 부패 특혜 독재 부정의 세금부과는 많고 재정적, , , 질서는 파동과 문란을 거듭하며 사회문제에 대해 무책임하다는 것이다.183) 더구나 정부가 막대한 경상적자로 운영되고 있으면서도 국민에게자본축적 을 위한 내핍을 요구하고 있었다.184) 이런 국민에 대한 정부의 내핍강요는 국가 개발의 수준을 상승시키기커녕 일부 세력들의 부를 극대화시키는 결과 를 낳았다. 『청맥』 필자들은 이것은과연누구를위해내핍인가라고 질문하 면서 이러한 과정 속에서 희생자들은 국민들임을 지적하고 있었다.
기업의 순저축은 1957년도까지에는 평균 1.6%이었던 것이 1961년에서 63년 평균은 19.2%로 대폭 증가된 것이다 이와 같은 기업저축의 비중이 비약적으. 로 증가한 이면에는 기업의 성장률이 빨랐다는 데에도 그 원인이 있는 것이지 만 4·19와 5·16이라는 정치적 변혁과도 무관계하지 않다 이 때 기업의 치부는. 가능했으며 이러한 탈락된 내핍의 예는 한 때 원가의 근 열 배를 받아도 무난 히 견딜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185)
이런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에도 한국경제가 정상적으로 발전하지 않고 오 히려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부패 특혜 독재 재정적 질서가 파괴되는 현상은, , ,  청맥 지식인들에게 일제본의 경제침략의 대한 두려움을 커지게 만들었다 .
이만기 한국 민족자본의 생성과정「 」 청맥 년 월호 쪽 김성두 제도적 순과 악덕재벌「 」 청맥 년 월호 쪽 위의 논문 쪽 이규동 누구를 위한 내핍인가「 」 청맥 년 월호 쪽 위의 논문 쪽
3.3.3 일본의 자본 진출과 경제침략
『청맥 필자들은국교정상화이후일본자본이한국으로침입해들어올것이』 예상했으며 이것을 일본자본의 도입아니라 침입으로 보고 있었다‘ ’ ‘ ’ . 1965년 한일회담 전후로 뚜렷하게 전개된 주제는 매판민족자본 논쟁이었다 이는‘ · ’ . 외자도입에 따른 경제개발이 가져올 수 있는 예속성의 문제를 가장 직접적으 로 비판했던 점에서 주목되었다 이규동은 토착민의 이익이 되거나 토착민. “ 의 이익을 위하여 의존하는 자본을 민족자본이라 규정하는 것이며 그렇지, 못한 자본은 비민족적인 자본으로 구별 한다는 관점에서 자본의 국적 에 따” “ ” 라 매판 자본과 민족 자본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186) 이는 당시 매 판 민족 자본 논의가 매판 자본 외국 자본 민족 자본 한국인 자본이라는⦁ = , = 차원의 논리 하에서 전개된 것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자본의 성격 특. , 히 민족경제의 자립적 토대 확립에 대한 기여도를 중심으로 한 개념이었 다.187) 다소 길지만 이창렬의 매판자본화에 대한 글을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상업 자본은 물론 산업 자본도 그것이 국내 자원의 개발보다는 외국의 중간, 재품의 판매를 대리하는 경우 또는 국내 기계 공업의 육성에 도움을 주기보다, 는 외국제 기계를 100% 도입하여 시설하는 경우 혹은 국내 가공이 가능한 원, 자재를 해외에 반출하여 외국 공업의 구매 대리인 노릇을 하는 민간 자본들은 실질적인 의미에서 매판 자본이다. ... (중략) ... “식민지화니 또는 매판이란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국내의 시장이 또는 우리 국내의 기업들이. 외국 상품의 판매시장 또는 그 대리화되는 경우 이것이 곧 식민화요 매판자본 인 것이다 외국의 자본과 기술과 원자재를 도입하되 어떻게 하면 식민지화를. 막아내고 매판으로 어지지 않도록 할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다 우리는 단순. 히 그와 같은 형용사를 가지게 됨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 관념적이고 추상. 적인 형용사보다는실질적으로형이하학적으로우리들의경제적 실리가 식민지
이규동 민족 자본과 산업구조「 」 청맥 년 월호
홍석률 「 년대 한국 민족주의 두 흐름 한국사회사학회편」 『사회와역사』
통권 제 집
 
화 또는 매판 밑에도 극도로 손실 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이것을 방어 하 자고강조함에지나지않는다... (중략)... 외국자본의도입이우리나라의대외의 존성을격화시키기구걸형각의 만성화를베푼다고할때 비록 20세기후반에는 식민주의는 없다는 주장이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결코 아니하게 외국자본도 입에 열중할 수 없음을 느끼는 것이다.188)
이창렬의 글은 매판 자본이 외국 상품 판매와 외국으로 자원 유출을 대리하 는 어원적인 의미의 매판성을 갖기는 하지만 단순히 상업 자본은 매판 자본 이고 산업자본은 매판 자본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는 논리를 보여준다 즉, . 매판과 민족의 구분을 민족 경제의 자립적인 토대의 형성에 기여하느냐 아니 면 이를 파괴하느냐라는 차원의 자본의 성격 문제에서 접근하고 있음을 보‘ ’ 여준다.189) 이런이창렬의주장에『청맥』에서경제학과관련한가장많은글 을 실었던 박희범도 과거의 식민지시대와 달라진 것은 무엇인가 국내산업구, 조의 식민성 매판성 내지 예속성은 그 본질에 있어서 조금도 다를 바 없다며 그것은 미국원조가 국내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면 클수록 이러한 성격 은 더욱 현저하게 나타나게 된다고 주장을 했다.190)
하지만 1960년대의 정치적 현실은 매판자본과 민족자본에 대한 논의를 자 유롭게 전개할 수 있는상황이아니었다 그럼에도 청맥 은 다른 매체보다. 『 』 도 이 문제에 깊숙이 천착함으로써 반외세 민족주의의 노선을 일관되게 주창 해 나갔다.
3.3.4 수출주도 산업화 비판
박정희 정권의 근대화 정책에서 빼놓을 수가 없는 것이 수출주도 경제개발 이다 제 차경제개발 개년계획에서 중요한 자리를 수출이 차지하고 있었으. 1 5 며 1967년부터 제 경제개발 개년계획에서는 수출만 살 길이라고 주장됐2 5 ‘ ’ 다 다른 말로 하면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에 있어서 수출은 키포인트였. ‘ ’
다.
반면 청맥 필자들은단기적으로 보면 수출이많은문제를가지고있다고『 』 ‘ ’ 보았다 즉 현실에서 한국의 수출구조가 예속적 내지는 매판적인 성격을 지. 니고 있다고 주장하며 결국은 수입을 위한 수출이 필요한 구조가 되어버렸다 고 하였다.191) 정병수는 「누구를 위한 수출인가」란 글을 통해 다음과 같이 정부의 수출정책을 비판했다.
수출입상의 격차는 한국의 산업이 그의 판매시장을 해외에서 구하는 비용보다 도 외국의 산업이 우리나라를 판매시장으로 이용하는 비욜이 훨씬 더 높은 것 을 의미하며 단적으로 이러한 관계는 최근에 수출신장에서도 불구하고 우리나 라가 수출국가가 아니라 수입국가임을 명시해 준다.192)
한 마디로 후진국이 수출국가가 되기 위해 대부분 기계와 원료 등을 수입 하게 되면서 이것으로 인해 한국은 수출보다 수입이 제 차적 과제가 된 수입1 국가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즉 소비재가공중심의 근본적인 한계를 지닌 성. ‘ 장의 한계를 지적했던 것이다 비록 수출이 늘어났지만 현재 종속적 상황’ . , 하에서 원금 및 이윤상환조차 충당하기 어려울 것이고 한국 공업이 소비재가 공이란 매판적 성격을 지속할 수밖에 없다는 한다.193) 현대화부문에 있어서 의 고정자본 형성에서 상업자본이나 고리대자본이 거의 기여하지 못하고 있 음을 알 수 있다.194) 정병수가 「누구를 위한 수출인가」에서 이 문제를 정확 히 지적하며 더 나아가 국내산업의 성장에 큰 걸림돌이 된다고 주장했다.
우리나라의수출구조가본질적으로는원시상품에수출에근거를 두고근대화의 외형을 띤 제 차 산품조차도 저임금을 기반으로 한 해외원자재의 가공수출의2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수출을 통한 성장이나 국내수지의 개선에는 크, 게 이바지 하지 못할 것이며 ··· (중략) ··· 수출 편중의 우대 조치를 통하여 수 입수요를 증대시키고 국제수지의 역조를 더욱 조장하며 국내산업의 성장을 저 지 억제하는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더 크다.195)
이어서 정병수는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갈방법으로해외수출보다는국내시장 확대를위한내수산업의 육성정책으로 전환을축구했다.196) 따라서 내수산업 의 개발을 위한 수출입무역의 재조정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지시해 주면 서 이것을 통해 국내 자원과 국내 산업의 육성을 통해 자립적 경제성장의 달 성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첫째 수출구조에 있어서는 수출액이 많든 적든 간에 원료의 국내조달이 가능하 고 외화가득율이 높은 특수산업에 특화시켜야 할 것이다 둘째로 수입구조에. 있어서는 각종의 소비재 완성품 및 반가공의 원자재수입을 대폭적으로 줄임으 로써 국제수지역조의 큰 요인을 제거하고 수입물자의 국내대체를 강력히 추진 하여야 한다 셋째로 외자의 도입에 있어서는 외국의 사적직접투자에 의한 국. 내 원료자원의 채취나 판매시장 확대를 위한 투자와 해외 원자재의 국내가공으 로 그치는 수입대체산업을 위한 외자도입은 규제되어야 하고 국내자원의 개발, 과 외자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국내자력에 의한 개발이 불가능한 생산재 자본시 설의 도입에 국한되어야 한다.197)
3.3.5 중산층 육성 및 빈부격차
그렇다면자립경제를 이끄는주도세력은누구인가 청맥 은이를중소민?『 』 / 족자본이라고 설정하고 중산층육성을 둘러싼 논쟁을 지면에 실었다 중산층, . 시비라는주제로글을 실었던 청맥 필자들인 박희범 배성동 김영 는중『 』 , , 산층 육성론의 약점을 여러 입장에서 비판했다 김영 는 그 당시. 1966년의 대통령연두교서와 민중당 및 공화당의 정책기조연설을 바탕으로 이를 비판 했다 그는 대다수 국민이라 할 수 있는 사회계층을 육성하는 것이 타당하. 다198)고 했지만 한국의 중간계급은 기껏해야 30%미만으로 말할 수 있으며 나머지는 대부분 가난한 농민이거나 노동자199)이기 때문에 중산층육성만으 로는 한계가 있다고 비판했다. 반면 배성동은 한국의 중산층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했으며 더구나 정치면 에서 혁신적인 기운은 신중간층의 지도와 협조로 일어날 수 있는 것인데 한 국에서 그들이 정치적으로 완전히 거세당하고 있는 형편이며 우수한 지식층 은 두 정치적 활동영역에서 제외되어 있다고 지적했다.200) 그는 중산층의 범위와 기준으로, ① 그 사회에 있어서의 중정도의 재산소유자, ② 중정도의 수입층, ③ 직업에 있어서의 자립성, ④ 중도정도의 생활수준 바꿔 말하면, 시민적 생활양식과 교양 및 소비성향, , ⑤ 중간층적 기질 즉 경제적 사회적, , 안전의 추구 저축의욕 자기책임 상승노력 등을 지적했다, , , .201)
박희범도 대통령의 연두교서와 야당의 정책기조연설을 바탕으로 중산층육 성을 강조했다 특히 대기업계열화에 의하여 중소기업은 육성되어야 하며. , 정부는 입으로 계열화를 부르짖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그것에 역행하고 있다
고 지적했다.202)
또 이창렬은 한국의 민족자본 형성 과정 원조경제 비판, 재벌독점기업의· 기형성 및 정경유착 폐해 일본의 자본 진출과 경제침략 수출주도 산업화 비, , 판인 등 네 가지 문제점으로 인해 국민의 생활수준이 더욱 악화되었다고 주 장했다 즉 독점과 기업가들이 특혜금융으로 인플레가 조성되면서 물고가라. 는 형태로 국민이 희생되며 원조로 인한 제 차 산업의 저하 이로 인한 이농1 , 과 인구 밀도가 도시중심으로 되어 실업자 및 노동시간의 최대 임금수준의, 최저한 현상이 이루어져 빈부격차를 급격히 강화시켰는 것이다.203) 바로 갈 수록 강화되는 빈부격차에 대해 박희범도 후진국의 무정견하고 무능한 정부 가 그 정책의 초점을 농촌보다는 도시 생산자본보다는 소비자 위조로 맞춤, 으로써 이러한 도시와 연합한다고 비판했다.204)
 
이러한 결과로 한국은 이미 부익부와 빈익빈현상의 누적속에서 중산계급이 줄어들고 영세대중의 실질소득이 저하됨으로써 대중구매력이 극도로 체멸되 는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이다.205)
그 밖에도 빈부격차의 한 가지 원인인 과잉인구현상을 김성두는 한국자본, 주의의 특수한 메카니즘의 전개 과정에서 내외적으로는 일제의 지배 하에, “ 서 비롯된 식민지적 구조를 벗어나지 못하고 오랫동안 원조의존체제하에서 오히려 그 타율성이 확대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대내적으로는 외국원조물자, 의 배분관계에서 누적된 빈부의 분극화로서 집약될 수 있을 것”206)이라고 보았다.
결국 자립경제의 관련해서 청맥 은 한국의 정치인과 지식인 자본가 등,  , 지배 계층의 보수주의가 형성된 과정을 분석하면서 그 기본 성격이 외세에 기대어 형성되었음을 비판했다 또한 한국경제가 갖는 구조적 왜곡성과 지나. 친 대외의존적 요소가 갖는 고용배제작용을 주목해야 하며207) 대외의존적 경제로부터 조속한 탈피를 위한 방책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또한 한국은. 든 사회체제의 발전방향을 서구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문제를 해결한 방식도 서구적점을 문제로 지적했다.208)
이상에서 살펴본 제 절을 정리하면2 , 1950년대 한국 경제는 미국의 원조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1950년대 한국이 미국으로부터 공여 받은 원 조액은 30억 달러에 달했는데 이는 당시 한국 국내총생산의 배에 가까운, 2 막대한 규 였다 하지만 이러한 미국의 원조가. 1957년을 정점으로 급감하 면서 한국 경제는 침체에 빠지게 된다 즉 경제원조는. 1957년의 억 천만3 8 달러를 고비로 하여 점차 감소되기 시작했으며 1959년부터 차관으로 넘어갈 조짐이 보였으며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원조의 감소추세는 더욱 현저해졌 고 가까운 시일 내로 종결될 것이 예고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박정희가. 5.16 군사 쿠데타를 일으킴으로써 조국근대화를 주장하며 제 차 경제개발 개년계1 5 획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한국정부는 초기에 재정위기 때문에 한일국교정상.
 
화를추진했고이 시점에 『청맥』은 한국경제 문제를 여러 차례 특집으로 기 획하면서 박정희 경제개발에 대한 비판을, ① 원조경제, ② 재벌독점기업의· 기형성 및 정경유착 폐해, ③ 일본의 자본 진출과 경제침략, ④ 수출주도 산 업화, ⑤ 중산층 육성 및 빈부격차로 크게 나누어 실었다 그리고 이런 비판. 들의 대안으로 자립적 민족경제를 주장했다 즉 외세로부터 경제적인 자립을. 통해서만이 1960년대 한국경제가 안고있는 문제점들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자립적 국민국가로 일어설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제 4 장 박정희 정권과 『청맥』의 민족주의에 대한 입장
제 1 절 1960년대 박정희 정권의 민족주의
4.1.1 박정희 정권 초기 민족주의의 성격
1961년 월5 16일 군사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는 오랜 기간 독재를 유지하면서 경제발전을 이룩했고 그 과정에서 정치적 억압체제와 경 제발전이라는 우연적 조합을 만들었다 이 우연적 조합의 밑바탕에는 민족주. 의가 놓여 있었는데 그는 한편으로 민족주의를 경제발전의 도구로 다른 한, , 편으로 정치적 억압체제의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활용했다 여기서 말하는. 민족주의의 도구성이란 민족주의가 다른 무엇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됨을 의 미하는데 특히 민족주의가 집권을 위한 정치적 목적으로 활용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이 경우 민족주의는 우리와 타자 사이의 경계선을 분명. ‘ ’ ‘ ’ 히 하고 우리 내부의 결속성을 강화시키는 수단으로 활용된다 민족주의가‘ ’ . ‘우리 내부의 단결과 단합을 강화함으로써 정치적경제적 목적을 위한 민중’ · 의 동원을 쉽게 이루게 하는 경우 이러한 습은 쉽게 확인된다.209) 박정희가 제시한 도구적 민족주의 전략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경제발전 을 위한 민족주의 담론이다 정권 확보의 정통성 결여를 만회할 수 있는 최. 선의 전략으로 박정희 정권의 내세운 것은 경제발전이었다. 5·16쿠데타 직후 군사혁명위원회가 발표한 성명서에서 군부의 궐기 이유를 몇 가지로 제시했 다 이성명서에서 구악일소. (舊惡一掃), 반공통일 등과 더불어 가장 현실적이 고 대중적 호소력을 가진 것으로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는 국가자주경제재건에 총력을 경주 하겠다는 주장이 제시되었” 다.210) 이의 실현을 위해 박정희는 거사 일 만에 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3 고위원회로 개칭하고 같은 내용의 메시지를 중요한 정치적 고비마다 반복하
 
였다 조국 근대화. 211)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존재이유를 뚜렷이 하려는 그의 의도는 여러 곳에서 쉽게 확인된다 그 한 가지 사례는. 1962년 월1 13일 ‘제 차 경제개발 개년계획의 발표였다 그 계획의 기본목표는1 5 ’ . “ 든 사회 경제적 악순환을 과감히 시정하고 자립경제의 달성을 위한 기반을 구축 하는” 것이었다.212) 박정희정권이 추진한근대화의핵심은 산업화였고 구체적으로 자본주의적 산업화였다 근대 세계체제의 핵심이 자본주의 시장경제라는 맥. 락와 분단과 한국 전쟁을 전후해 미국 주도의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한국이 편입된 조건하에서 이는 어쩌면 선택의 문제가 아닐 수 있었다, .213)
박정희는 이와 같은 논리로 자신의 정권 전략을 경제발전을 통한 조국근 대화로 공식적으로 내세웠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가 조국 근대화를 성취하. ‘ ’ 는 도구로 활용한 것은 전통 가운데 찾아낸 민족의 담론이었다 경제발전은‘ ’ . 박정희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민족의 과업이었으며 이는 민족의 구성원 전체 가 나누어 가져야 할 도덕적 선(善)이었다 결국 그에게 주어진 통치의 과제. 는 어떻게 개인을 민족의 일원으로 만들어 이러한 도덕적 선을 수행하는 주 체로 전환시킬 수 있는가 여부였다 이를 위해 그는 민족주의의 담론에 근거. 해서 개인을 근대화 과업으로 불러들이고자했다 그는 민족을 개인과 국가의. 상위 개념으로 설정하고 개인을 민족에 통합하는 정치체제를 구상했는데 이, 를 민족적민주주의 라는개념으로제시했다  .214) 1963년대통령선거유세
박정희 정권은 조국근대화를 민족의 당면의 과제로 민족주의 를 민족의 지도이 념으로 국가를 조국중흥의 주체로 반공에 입각한 통일 을 민족의 지상과제로 내 세웠다 자립경제 의 달성 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화 자주국방과 총력안보 국 적 있는 교육 국민총화 국민교육현장 국기에 대한 충성 민족정기 민족주체⦁ 성의 확립 민족사적 정통성 등 유신체제를 전후해 화려하게 등장한 슬로건은 박 정희의 대중동원이 민족주의를 매개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山本剛士 「 차 경제개발계획과 고도성장의 문제점」 년대 거름신서 
황병주 박정희 제제의 지배담론과 대중의 국민화「 」 『근대를 다시 읽는다 』역 사비평사 년 쪽
쿠데타로 집권한 이후 최초로 박정희가 제시한 정치체제의 개념은 행정적 민족주 의였으나 이는 곧 민족적 민주주의로 대체되었다 여기서 민족적 민주주의는 정치 적 이념을 넘어 민족적 통합을 추구하는 민족적 민족주의와 전혀 다른 의미이며  단순히 민주주의가 민족주의와 결합되는 측면이 있음혹은 민주주의가 민족주의에 의해 제한될 수 있음을 강조하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김동노 한국의 국가 통치전「
에서처음나타난 민족적민주주의 였다 그러나박정희가제시한 민족적  . 민주주의 이념은 선거전략의이상의의미를가졌다 실제로 그는이 이념을 . 통해 서구 자유민주주의와는 다른 정치체제를 구상했고 개인을 독립된 정치, 주체로 설정하지 않은 채 민족이라는 상위 집단에 통합된 하위 개념으로 설 정하려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개인이 개인으로 존재하기 이전에 민족의 일. 원으로 존재하기를 요구하고 개인의 이익보다는 민족이라는 전체의 이익을 추구하도록 요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이러한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 할 때 제기되는 문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민족의 문제가 되고 민족의, 위기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215) 그러므로 그는 민주주의 자체보다는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전제로서 민족적인 것에 더 강조점을 두었던 것이다. 이는 1963년 박정희의 아래와 같은 연설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들이 그렇게도 좋다는 민주주의 또 우리가 가져보려고 그렇게도 애쓰던 자, 유민주주의가 왜 이 나라에서 꽃피지 않는 것인지 아십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 니다 자주와 민주를 지향한 민족적 이념이 없는 곳에서는 결코 자유민주주의는. 꽃피지 않는 법입니다 민족의식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자유민주주의는 항상 잘. 못 해석되고 또 잘 소화되지 않은 법입니다.216)
이상의 논의를 정리하면 4·19도 그러했지만 5·16은 지식인들에게 다중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 상당수의 지식인 심지어 대학생들과 혁. , 신계 인사들조차 5·16과 쿠데타권력에 기대하는 바가 있었고 한동안 일말의 미련을 버리지 못 했다 이러한 성격으로 인해 많은 지식인들은. 4·19와 5·16 을 나름대로 해석했고 또 자신의 참여와 저항을 합리화했다, . 5·16에 대한 인식이 더 복잡한 양상을 보였던 것은 쿠데타 권력의 성향이 다중적이었고 지식인들의 이념이 아직 정립되지 못하고 미분화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1960년대 초반은 권력의 다중적 성격이 노정되고 각종 이념이 족출하여 분
 
화 정립되는 전환기였고 격동기였다.
1960년대 중반 무렵에 이르러서야 근대화에 따라 사회적 순이 점차 가 시화 되고 정권의 반민족적 성격이 들어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이 권력의 다. 중적 성격이 단순화 되면서 지식인들이 애매하고 다중적이던 자기 이념과 정 체성을 정립해가고 또 참여와 저항의 어느 한편에 설 수밖에 없게 된다 이, . 런 대립구도는 성장주의를 한편으로 하고 민족주의민주주의평등주의를 다· · 른 한편으로 했다 이는 구체적 현실에서 결국 조국근대화와 만족민주민. ‘ ’ ‘ · · 중으로 정립되었다 저항진영은 다양한 성향의 세력이 연대한 것이므로 내’ . 부의 다양한 이념이 공존하고 있었지만 극단적 반공체제하에서 민주주의가 부각되었고 주도권을 행사했다 군부독재와 반체제간의 대립은 각각. 5·16과
4·19를 전유하려고 했다.217)
4.1.2 『청맥』이 창간된 시점의 민족주의
『청맥 이창간되었던』 1964년은 1960년대민족주의담론의전개에서중요 한 분기점이었다 이 국면에서 민족주의 담론을 선점하는 이는. 1963년 대선 에서 민족적 민주주의 슬로건을 내세운 박정희였다 집권과 함께 박정희는‘ . ‘근대화 담론을 지배담론으로 전면화하면서 경제발전을 위한 시책의 하나로’ 서 한일국교정상화를 서둘렀다. 1964년 월 한일희담 반대 투쟁 소용돌이의8 한가운데서 창간한『청맥』은 근대화 담론과 민족주의 담론이 지배와저항을 교차하는 새로운 담론 지형과 맞닥뜨려야 했다 여기서 청맥 이 선택했던. 길은민족주의담론을급진화하는방식이었다 그것은직접적으로는 청맥 창. 』 간을 주도한 통혁당과 연관된 지식인 그룹의 이념적 급진성을 반영했던 것이 기도 하지만 한일회담 반대운동을 계기로 민족주의 담론이 급진화될 수 있, 는 조건이 마련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1950년대에 서구 민주주의와 문화 적민족주의에경도되어있었던 사상계 진영역시『 1964년을경과하면서민 족주의를 부분적으로 저항담론으로 수용하는 경향을 보였다.218)
 
분단국가의 지도자였던 박정희에게 통일은 피할 수 없는 목표였지만 일차, 적 관심사라기보다는 조국근대화라는 중간단계를 거쳐 먼 미래에 성취되어야 하는 이차적 관심이었다 그에게 통일보다 앞서는 것은 경제발전이었다 경. . 제발전을 통해 한편으로 한 내부의 단결을 이루고 다른 한편으로는 북한을 따라잡은 상태에서 통일만이 의미가 있었다 이 점에서 그의 통일론은 선건. ‘ 설 후통일 또는 경제개발을 통한 승공통일이라는 단계 통일론이었다⦁ ’ ‘ ’ ‘2 ’ .
1965년 초반 담화문에서 박정희는 이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안전과 평화를 위협하는 것은 비단 밖으로부터의 침략만이 아니다‘ ’ .··· 더 무 서운 적은 우리 안에 있음을 명심해야하겠다 내부에 이 빈곤을 두고서 반공.··· 이나 승공을 할 수 있다고 생각에는 것은 얼마나 무용한 도로이며 그러기에··· 정부는 승공이나 반공의 관건이 빈곤의 추방에 있음을 누누이 역설하였으며, 온 국민이 경제적 번영을 이룩하는데 총력을 기울여 줄 것을 호소해왔던 것이
다.219)
이러한 단계 통일론에 입각하여 박정희는‘2 ’ 1967년 지방기자회견에서 ‘ 한의 경제력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가는 1970년대 후반에 가서야 통일 을 논의할 수 있다는 입장을 피력했고 그 후로도 비슷한 말을 계속 했다’ , . 박정희의 경제발전 전략인 선성장 후분배의 논리 및 수출지향산업화의 논‘ ⦁ ’ 리는 경제발전이 궁극적으로 달성해야 하는 목표로 제시되는 자립경제와도‘ ’ 만나게 된다. 1970년 노조간부들에게 수출증대와 성장동참할 것을 다음과· 같이 역설했다.
노임이 비싸서 상품가격이 올라 수출이 적어지면 어떤 결과가 이러나겠는 가?···노임이 적정 수준에서 유지되어야 물건을 값싸게 생산하여 많이 수출 할 수 있으며 수출증대가 공업발전과 고도성장을 촉진하여 고용증대와 임금, 향상을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220)
김건우 「 년의 담론 지형 반공주의 민족주의 민주주의 자유주의 성장주의 」 대중서사학회 대중서사연구『 』 제 호 쪽 김건우는 년을 경과하 면서 사상계 가 저항적 민족주의 담론으로 견인되는 양상을 보였다고 주장했다『 』  
박정희 자유의 날 담화문「 년 월 일 박정희 각 노조간부들에게 보낸 친서「 년 월 일
한편 박정희 정부가 경제발전과 같은 비중으로 중요시한 것이 국가안보
였다 이것은 반공의 이름으로 그의 집권 초기부터 나타났지만 북한의 대. 공세가 적극화된 1968년 이후 보다 강화되었다.221) 이런 북한의 공세에 대 한 미국의 미약한 반응과 미온적 태도 그리고 중국과 화해하고 주한미군까지 철수시키려 하자 박정희 정부는 1972년 연두기자회견을 통해 자주국방을‘ ’ 선포했다.
자기 나라의국방을 어떤강대국에의지해 오던그런시대는 지났다 앞.··· 으로는 전적으로 미국에만 의지하겠다는 그런 생각은 깨끗이 버려야 하 는 것이다.222)
이 무렵 잠시 뒤로 물러나 있던 민족주의가 정부에 의해 다시 강조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국가와 민족과 개인을 무매개적으로 연결시키면서 개인을. 국가와 민족 속에서 용해시켜버리려고 했다는 점에서 유기체적 성격을 띠었 다.223) 1973년 연두기자회견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민족과 국가라는 것은 이것은 영생하는 것이다 특히 하나의 민족이라는, . 것을 영원한 생명체입니다 따라서 민족의 안태와 번영을 위해서는 그 민족. 의 후견인으로서 국가가 반드시 있어야 하겠습니다 국가는 민족의 후견인. 입니다 국가 없는 민족의 번영과 발전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
다.224)
정리하면 분단된 후발산업화 국가인 한국의 민족주의가 직면한 근 대화 통일 자주화의 과제 중 박정희가 주목한 것은 경제적 근대화, , (산업화 와 국가 안보였다 그는 한국 민족주의의 과제를 자립경제와) .
 
자주국방으로 표현하면서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한국 민족주의의 또 다른 과제인 자주성에 다가설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와중에 정치적. 근대화 민주주의 와민족국가의완성 통일 은 선성장 후분배 선건( ) ( ) ‘ ⦁ ’, ‘ 설 후통일이란 구호가 보여주는 것처럼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릴 수⦁ ’ 밖에 없었다.225)
제 절에서 다루겠지만 이에 반해 청맥 지식인들은 분단구조에 한국의 식민2 주의적 순이 응축되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민족의 주체성과 자주성을, 회복하는 것이 빈곤과 후진성을 극복하는 첩경으로 인식되었다. 1964년 권「 두언 조국을 통곡 한다 을 보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 ;
두 동강이 난 잔등 우엔 세기의 비극이 얼룩졌고 소용돌이 치는 세계사는 수 혜와 맹방의 이름아래 강대국과 약소국 사이에 제 나름으로 주종의 묵계를 강 요하였고 번지레한 호혜와 자주의 이름 뒤엔 언제나 굴욕과 맹종을 우의와 미 덕으로 몰아치는 신판 상전의 고뼈가 오대야 육대주의 구석구석마다 ···· 사치 스례 덥쳐있다 ,····· 우리의빈곤과후진성을초극하는첩경은 경제개발 개년계5 획에 앞서 민족통일 개년계획이어야 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연지리학적 제5 . 여건이 이제 제 구설을 다 할 때 우리도 우리 땅에서 들과 같이 배불러 잘 살 수 있기 때문이다.226)
1960년대 박정희 정권에 의해서 주도된관 주도 민족주의는 근대화론과 민 족의 정서적문화적 유대 관계와 우수성을 강조하는 민족주의 요소의 결합이· 라는 특징을 갖는다 민족주의라는 측면에서는. 1960년대 후반 국민교육현장 과 제 경제론에서 확인되듯이 주권 국가의 확립 민주주의 이나 통합된 국가2 ( ) 의 수립 민족통일 같은현실적인 문제보다는민족 정신민족문화의우수성( ) · 을 강조하는 속성을 기본적으로 갖고 있었다.
반면 이것과 차별성을 보여주고자 했던 지식인의 민족주의는 민족경제의 자기 완결성을 주장하는 내포적 공업화론을 주장했고 이는 자본주의 세계,
 
경제가 강요하는 예속성에 대한 경계 내지는 저항의 논리를 담고 있었다 그. 리고 이러한 민족주의론은 민족의 정서와 문화적 측면을 강조하기보다는 민 족이라는 정치 경제적인 공동체가 당면한 현실적인 문제를 주로 제기했고, 민족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민족적 특수성과 우월성보다는 세 계사적 보편성을 강조했다.
박정희 정권은 자신이 주도한 민족주의 담론을 억압적인 정치 환경 속에 서 관철시켜나갔으며 정권에 반대되는 민족주의 담론을 체제 밖으로 배제해, 나갔다 때문에 이러한 민족주의는 저항 세력과 결합되어 독특한 저항적 민. 족주의 담론을 형성해 나갔다.
이처럼 박정희 정권은 한편으로 비판적 지식인들과 대립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그들의 성과를 차용하여 역사와 문화를 지배정책의 일환으로 적극, 적으로 활용했다. 1960년대 후반 박정희는 정신문화 민족주체성을 강조‘ ’, ‘ ’ 하면서 대규 문화재 정비사업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227) 한 가지 사례로 1966년에 시작된 현충사 종합정화사업은 이후의 대규 문화재정화사업의 시를 이루는 것으로 충의정신의 귀감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사당을 성, 역화한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박정희 정권 시기 한국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 한 영웅으로 추 되고 위기의 상황에 놓인 민족과 국가를 구한 애국충정의, 군인으로서 한국인의 역사적 델로 상징되었다고 할 수 있다.228)
박정희 정권의 문화정책은 당시 정치적 사회적 현실로부터 분리해서 생각, 할 수 없으며 이 시기 문화정책의 성격과 지향성은 분단체제에서 북한정권, 과 대립 그리고 정권유지를 위한 내부적 동기라는 양면성에서 찾아야 할 것, 이다 우선 주목되는 것은 본격적인 문화정책들 예를 들어 문예진흥법의 입. , 법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의 창설 문예진흥 개년계획의수립 대규 문화재보, , 5 , 수정화사업의 착수 등이었다 박정희 정권의 문화정책은 국민의 자발적 동의. 를 끌어낼 수 있는 대중동원체제의 부드러운 수단으로 간주되었다.229) 정부 는 스스로를 민족중흥의 역사적 소명을 담당하는 주체로 자임함으로써 이를
 
통해 정권의 역사적 정당성을 국민들에게 선전하고자 하였다. 1960년대의 경제개발정책에서 강조된 것이 경제적 근대화였다면 민족문화의 중흥은 경, 제개발의 정신적 원동력이 된다는 식으로 해석되었고 실용주의적인 경제개, 발과 이념적인 민족문화중흥은 국력의심장과 조국근대화를 위한 쌍두마차로
평가되었다.230)
이렇게 1960년대 후반을 거치면서 역사 문화를 매개로 민족주의를 둘러싼,
새로운 담론 투쟁이 시작된 것이다.231)
제 2 절 청맥 지식인들의 민족주의
4.2.1 청맥 의 민족주의
 청맥 의 민족주의는 지식인에 관한 다양한 논의를 통해서 철학과 학문에 서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서구 특히 미국의 관점으로. , 현실을 인식하는 기존 지식인들의 시각을 매판적이라고 비판하고 학문적 식, 민지 상태를 비판하는 기획을 통해 민족주체적 관점의 수립을 요구하였다. 이처럼 청맥 은 한국의 정치인과 지식인 자본가 등 지배 계층의 보수주의  , 가 형성된 과정을 분석하면서 그 기본 성격이 외세에 기대어 형성되었음을 비판했다 이런 기성 세대와 차별화를 통해 청맥 은 젊고 비판적인 지식인.  들의 참여를 유도하는 데 성공했고 실제로 1960년대 중반 청맥 은 사상  『 계』보다 진보적인 지식인 잡지로서 대학생들 관심을 았던 것으로 보인 다.232) 청맥 은 한국지식인의 정체성과역할에대한 기획논문을게재하고 ‘ ’ , 사회변화를 이끌어갈 실천적 지식인론을 꾸준히 전개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오명석, 1960-70「 년대의문화정책과민족문화담론」 , 비교문화연구 제 4 호, 1998. 146~147쪽 참조. 이동헌 앞의 논문 쪽
통혁당 사건이 당대 지식인들에게 특히 충격적이었던 것은 바로 지식인들이 즐
읽던 청맥 과 지식인들이 즐  찾던 『학사주점』이 이와 관련돼 있었다는 점이 었다 당시 신문사설 역시 이러한 사실에 주목 하고 있다 동아일보 년 월 일자 사설 지하 간첩단사건 전용호 위의 논문에서 재인용「 」
1963년은 군사 정권이 민정이양을 통해 합법성을 획득했으므로 청맥‘ ’ ,  이 창간될 무렵은 민족적 민주주의의 위력이 건재할 때였다 이미‘ ’ . 1966년 경에는 포장만 요란한 민족적 민주주의에 등을 돌린 지식인들의 저항력이 탄 탄해지고 있었다 여기에 정권의 친재벌 수출 위주 경제개발계획은 지지를. , 철회하는 증폭제가 되었고 대학가와 진보적 지식인들은 공공연하게 정부에, 맞섰다 이는 자립경제와 민족 주체성을 강조하며 아시아 민족주의의 이상을. 공유하는 듯 보였던 초기 군사 정권이 돌변하여 한일국교정상화를 통해 빠르 고 쉬운 길을 가려는 데 대한 반감이었지만 애초에 미국의 반공 블럭에 속, 했던 한에서 미국의 범위에서 벗어난 민족주의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시도 였으므로 청맥 의 필자들이 민주주의 보다 경제발전에 매료된 정황을 비판 할 수만은 없다 적어도 현재 시점에서는 자립 경제가 민주주의보다 더 지난. 한 과제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즉 문제는 민주주의 유보라기보다 경제 발.
전의 내용이었던 것이다.233)
1950년 이래 지식인들에게 한국의 위치는 후진성으로 상징되었다 박정‘ ’ . 희의 탈후진 근대화전략이 손쉽게 지배담론으로 채택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담론 지형에서 가능한 것이었다.234) 청맥 지식인들과 박정희는 후진성이 ‘ ’ 라는 한국상을 공유하고 있었다 청맥 은 창간사에서 해방이후 한국 사회의.  과제를 조국통일과 빈곤에서 탈퇴 또는 완전자주와 자립으로 규정했다‘ ’ ‘ ’ ‘ ’ .
1964년 창간호에 실린 김진환 글을 보면 이를 확인 할 수 있다.
이 땅의 고질인 빈곤과 후진성을 축출하는 핵심적 요체를 색하고 구래의 인습 에 얽매인 낡은 역사의 단에서 새로운 역사 창조의 전위적 기치를 꽂는 교차 적 사명을 담당해 보겠다는 웅지를 품고 과감히 여명의 가종공을 잡았다. ···· 19년이란 오래 세월 동안 레의 한결같은 염원은 조국통일과 빈곤에서 탈피로 집약되었으나 완전자주와 자립을 치자와 피치자 사이에서 그 어의와 가치판단에 현격한 차이가 있었음을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235)
 
후진성에 대한 공유에도 청맥 주도 지식인들은 치자와 피치자 사이에는“ 그 어의와 가치판단에 현격한 차이 즉 박정희 정권과 차이를 분명히 하고”, 있었다.236) 그 차이를 명백히 상징하는 것은 통일이었다 창간사에서는 우‘ ’ . “ 리는 하루 빨리 국민의 주권을 앞세워 조국을 통일해야 할 역사적 한 시점에 놓여 있음을 잠시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 고 통일의 시급함을 강조했다 청” . 맥 이 창간되는 1964년은 민족적 민주주의를 통해 민족주의 담론을 선점, ‘ ’ 한 박정희가 조국 근대화를 앞세우며 근대화 담론을 본격적으로 제기하는‘ ’ ‘ ’ 시점이었다 청맥 주도 지식인들은 창간사에 나타나듯이 한국의 시급한 과제. 로 탈후진전략으로서 자주와 자립을 공유하면서도 완전이라는 표현에‘ ’ ‘ ’ ‘ ’ , ‘ ’ 서 나타나듯이 박정희의 근대화 노선과는 거리를 두었다 그들은 피치자의. ‘ ’ 입장에서 자주와 자립의 길과 공간을 창출하려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박‘ ’ ‘ ’ . 정희 근대화 드라이브의 핵심인 산업개발 즉 경제문제와 정면으로 대결해야, 했다.
특히 박희범 같은 내포적 공업화론자들은 당시 경제학자로서는 매우 드물 게 경제 개발 문제를 나름대로 민족의 통합이라는 과제와 연관시켜 사고한 흔적도 보이고 있다. 1965년에 청맥 에 실린 박희범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이를 잘 보여준다.
오히려 오늘의 한국의 비극은 북한이 양대 이데올로기에 휘말려 자주성을 못 찾고 매판적 성격을 날이 갈수록 심화해 가며 따라서 자주적 통일 노선으로 부터 더욱더 멀어져가는 데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에게 주의가 있다면 한국. 주의 이외에 아무것도 있을 수 없다. ··· (중략) ··· 만일 한과 북한이 소비재 공업과 생산재 공업이란 이질적 요소를 중심으로 성장하였다고 가정한다면 통 일에 의한 민족 경제의 형성 과정에서 그렇게 큰 난관이 없을 것이고 이러한 상호 보완적 성격을 보다 합리적인 경제 개발을 기약할 것이다.237)
앞서 살펴본 1960년대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 전개된 매판민족 자본· 논쟁은 내포적 공업화론보다 근본적이고 직접적으로 박정희 정권이 주도하,
 
는 경제개발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이었다 매판민족 자본을 둘러싼 논의는. · 주로 1965년 한일 회담 전후에 표출되었다 한일회담 반대운동 과정에서 학. 생들은 반민족 매판 자본을 몰수하여 경제 발전을 선용하자 라는 등의 구호“ ” 를 위치며 매판 자본의 발호를 경계했다 매판 자본의 대한 비판은 단순히. 정서적문화적 차원의 민족주의가 아니라 외국 자본의 의한 예속 등 현실적· 인 문제를 제기하는 민족주의의 흐름으로 주목될 수 있다 정병수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이러한 흐름을 대변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미국의 거대 기업에 의한 민간 자본의 해외 진출의 본질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 없이 자본 수입국의 경제 발전보다는 해외 투자 자본의 초과 이윤의 획득을 위 한 현지 자원의 무자비한 축출에 있고 자체 역량에 의한 개발의 기회와 투자 수 익률을 잠식하고 있는 것이다.238)
이렇듯 당시 한국 사회에는 외국 자본의 도입을 해외 투자 자본의 초과“ 이윤의 획득 을 위한 자본 침투라는 차원에서 사고하는 흐름도 존재했다 한” . 편 이규동은 선진국가의 이론가가 작성한 개발 형에 따라 경제개발을 하면 개발계획의 집행과 더불어 대외 의존성이 증가 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 다.239) 매판민족 자본 논쟁은 외자 도입을 통한 경제 개발이 가져올 수 있· 는 연속성의 문제를 가장 직접적으로 제기한 지식인의 담론이었다.240)  청맥 에서 매호마다실렸던 특집들이 청맥 지식인들의 전달하고자 하는   목소리를 가장 뚜렷하게 들을 수 있는 부분이다. 특집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정을 보였다.241) 첫째 전체적으로 민족주의 담론의 틀에서 이해, 될 수 있는 글들이 다수를 차지했다 민족주의 담론과 뚜렷이 구분되는 정. 당선거 교육 한국경제 사회 병리현상 둥을 지적하는 글들이 있지만 소수· , , , 에 불과했다 주목되는 현상은 정당정치를 비롯하여 민주주의 담론의 비중. ‘ ’ 이 현저히 낮다는 점이다 이는. 1960년대 이후에도 자유민주주의를 자기‘ ’
 
 
정책으로여겼던 사상계 와뚜렷이구분되는것으로『 』 , 청맥 의주된정체성 이 민족주의였음을 잘 보여준다 두 번째 특징은 식민성에 대한 강조이다. ‘ ’ . 앞서 언급하였듯이 1950년대 식민성에 대한 인식은 식민지배의 부정적 유‘ ’ 산이나 일본의 부상을 비판하는 반일민족주의적인 태도가 주를 이루었다 하. 지만 이런 식민성에 대한 인식은 과거의 식민지배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 .  청맥 은 식민성의 문제를 1960년대 현재 한국의 현실로 인식했다 탈식민‘ ’ . 이후 식민성에 대한 강조는 다른 지식사회 흐름과 비교해 볼 때 분명 이례‘ ’ 적인 현상이었다 마지막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1966년 중반 이후 문화 에 대한 뚜렷한 강조이다 청맥 초기 정치 경제적 영역에 국한되었던 식민.『 』 ‘ 성 개념은 문화식민지론을 통해 문화 영역으로 확장되었고 이후 민족문’ ‘ ’ ‘ ’ , ‘ 화론으로 이어졌다’ .242) 그럼에도 청맥 주도 지식인들이 집중했던 핵심적 인 문제점들은 한국 경제의 기형성 종속성을 재생하는 식민주의이었다, .
1964년 11월 권두언을 보면 다음과 같다.
낡은 제국주의의 시대는 가도 새로운 제국주의의 가능성은 완전히 봉쇄되지 못 했다 우리도이러한열강의 팽창세력에희생된 민족이었다.··· 민족해방을 위한 海內外의 피어린 투쟁이 우리 혁명전사들에 의해 추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치 패전국의 경우와도 같은 수 를 면치 못했다 해방 직후 전국에 걸쳐 일어났.
던 외병에 의한 린치 폭행 부녀강간 약탈 등 일련의 사건들은 아직도 우리들의, , , 기억 속에 생생하며 말하자면 우리들의 조국은 사고능력과 행위능력을 송두··· 리째 상실한 금치산자였다. 든 문제는 우리들의밖에서일어나서요리되었고 우리들의 의사표시와 든 행위는 숨은 대리인에 의하여 임의로 처리되었다.243)
국제질서를강대국약소국 제국 신 식민관계로이해했던 청맥 지식인들/ , /( ) 』 은1960년대를 세계사적 전환기로 바라보았다 그 전환의 핵심은 제 세계의‘ . 3 발흥과 국제질서의 다극화였다.244) 이들은 국제질서의 다극화가 가져온 아“
 
시아인의 아시아 는 자유와 반자유 독립과 반독립이란 신용어를 가져왔’” “ , 고 그 결과 국제정세는 역동적으로 재편될 것으로 전망했다”. .245) 이 전환기 적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이들이 제시했던 이념이 민족주의였고 민족주의‘ ’ 의 정치적 과제는 통일이었다‘ ’ . 청맥 주도 지식인들은 분단구조의 중심에 한국의 신식민주의적 순이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통일은 민족, 의 주체성과 자주성을 회복하는 동시에 빈곤과 후진성을 극복하는 첩경으로 인식되었다.246) 다시 64년 11월 권두언을 보면 거듭 민족통일을 강조하고 있다.
두 동강이 난 잔등 위엔 세기의 비극이 얼룩졌고 소용돌이치는 세계사는 수혜와 맹방의 이름아래 강대국과 약소국 사이에 제 나름으로 주종의 묵계를 강요하였 고 번지레한 호혜와 자주의 이름 뒤엔 언제나 굴욕과 맹종을 우의와 미덕으로 몰아치는 신판 상전의 고삐가 오대양 육대주의 구석구석 마다··· 사치스레 덮쳐 있다.··· 우리의 빈곤과 후진성을 초극하는 첩경은 경제개발 개년계획에 앞서5 민족통일 개년계획이어야 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연지리학적 제 여건이 이제5 . 제 구실을 다할 때 우리도 우리 땅에서 들과 같이 배불리 잘 살 수 있기 때문
이다.247)
제 세계의 부상에서 식민성 극복의 가능성을 발견한 청맥 지식인들은 통3 ‘ ’ ‘ 일을 통해 빈곤과 후진성을 극복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들의 저항의 무기’ ‘ ’ . ‘민족주의의 콘텐츠는 빈약했다 청맥 주도 지식인들에게 시급한 과제는 민’ . 족적 콘텐츠의 발견과 구성이었던 것이다.248)
전후 지식인들의 일본 인식은 식민지 경험에 의거해 일정하게 조절되었지 만 대체로 경제 대국 일본에 대한 심리적 열패감을 상쇄하는 문화적 민족주 의가 우세했다 청맥 역시 이러한 우월주의가 없지 않았지만 향후 일본의.  경제력이 대외 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좀더 거시적으로 진단하려는 태도가 보
 
인다.249)
이상에서 살펴본 것을 정리해 보자면 청맥 을 포함한,  1960년대 중반 지 식인들의 민족적 지식의 생산은 민족주의를 둘러싼 담론 지형의 변화를 의미 했다 이 시기 지식인들은 한국사 민속 문학 철학 분야 대한 연구를 통해. , , , 전통과 역사에서 근대성의 맹아와 이행의 가능성 새로운 주체로서의 민중을, 확인하려 했다 이러한 결과는. 1950년대 이래 지식인들의 열망과 학문적 성 취를 반영하는 동시에 민족주의에 깊이 경도된 새로운 학문 세대의 등장을, 알리는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변화는. 4.19를 통해 등장하여 청맥 을 통해  재생된 급진적 민족주의가 운동적 민족주의 단계를 넘어서 학적 민족주의‘ ’ ‘ ’ 단계로 전화하고 있음을 반영한다 따라서 향후. 1970년대 민족주의 담론을 둘러싼 담론투쟁을 넓은 의미에서 문화 구체적으로는 역사 문학 철학 등, , , 학문적 영역에서 전개될 것임을 보여준다.
 청맥 민족주의가 가진 저항담론으로서 가능성과 한계를 정리해 보면 , 청맥 주도 지식인들은 빈곤과 후진성의 원인을 제국 주의 에서 찾았고 이에( ) 대한 해결책을 통일로 이해했다 그러나‘ ’ . 1960년대 순을 끊임없이 제국‘ 주의로 환원하는 이들의 논리만으로 변화하는 한국 사회의 구체적 현실은’ 이해되지 못했다 이들의 저항 논리는 빈곤과 후진성이 극대화 되면 될수록. , 신식민주의는 더욱 강화되고 해결책으로서의 통일의 당위성은 더욱 커져가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1960년대 중반은 박정희 경제발전계획과 함께 자본임/ 노동의 생산관계가 새롭게 확산되었던 국면이었다 청맥 이 발간되던 시점.  이 경제개발의 과가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이전시기였다는 점을 고려하더라 도 경제개발의 기형성과 종속성에 주목하고 과거속의 민중의 재현에만 그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청맥 지식인들의 인식의 한계라고 볼 수 있다.250)
4.2.2 청맥 지식인들과 박정희 정권의 엇갈림
 김주현 「 청맥 지 아시아 국가 표상에 반영된 진보적 지식인 그룹의 탈냉전 지향 
 
마지막으로 서론에서 언급한 것처럼 조국근대화를 목표로 박정희 정권이 추진했던 수출국가 주도 산업화와 청맥 지식인들이 주장했던 민족자립/  / 경제의 차별성을 앞의 연구와 해석들을 통해 검토해보려 한다 단순히 보면. 1960년대 지식인들의 사회적 활동을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박정. 희 정권이 동원하는 지식인과 다른 하나는 그 정권을 비판하는 지식인이다. 1960년 월 혁명으로 지식 사회에 큰 변화가 일어났고 예비 지식인으로4 자리 잡았던 대학생들은 앞으로 한국 사회에 중요한 세력이 되었다 당시 학. 생들은 한국사회의 핵심 순을 후진성에서 찾았고 이를 극복하는 것이 혁‘ ’ , 명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월 혁명 이후 지식 사회가 자기 입장. 4 을 찾고 있는 사이에 5·16군사 쿠데타가 이러났다 흥미로운 것은. 4·19에 적극 참여했던 교수들의 상당수가 쿠데타 정권에 참여했다는 사실이다 이. 렇게 5·16쿠데타로 군부가 정치경제사회를 장악하게 되고 군부의 근대화· · 론민주주의국가주의를 내세워 많은 지식인들과 대학생들의 관심을 끌었/ /
다.251)
여기서 지식인 가운데 일부가 군사 쿠데타를 받아드린 데에 세 가지 이유 가 있다 첫 번째 군사정권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된 근대화론이다 이와. , ‘ ’ . 같이 60년대 지식인들과 학생들도 한국이 후진성을 탈퇴하고 근대화의 욕망 이 컸었다.
군정 동안은 군인과 대학교수라는 두 개의 아마추어그룹이 이 나라 정치를 좌 우했던 시기였다 군인들은 앞장을 서고 그 뒤에 교수들이 머리를 제공했다 대. . 소의 국가정책으로부터 정당 조직 새 헌법 제정등 든 작업이 고문 자본‘ ’, ‘ ’, ‘기획위원 정책위원 등등의 타이틀로 층층이 구축된 대학교수 그룹들에 의해’, ‘ ’ 이루어졌다 군인과 교수들의 아마추어 세력에 의해 추진된 국가 정책은 많은.
실적과 함께 시행착오를 겼다.252)
두 번째 중요한 결합의 요인은 지식인들의 민족주의적 현실인식이었다 수.
 
입대체와 내자 동원을 통해 자립경제와 균형 성장을 지향한 군사 정권 초기 의 경제개발계획은 민족주의적 지식인들의 생각과 상당히 일치하는 것이었 다.253) 당시 많은 지식인들은 구정치와 구세대 그리고 서구적 민족주의에, 대한 실망이 있었다 군사 정권 즉 박정희 정권이 당시 사회적 필요와 이상. , 을 정확히 파악했기 때문에 근대화와 경제발전을 정부의 핵심 정책으로 내세 웠다 이어서 그를 위해 민족적 민족주의를 소개하면서 지식인들의 많은 관. 심을 이끌어 냈다 이것을 통해 지식인들이 군부 쿠데타 세력의 민족주의에. 대한 기대를 가지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4·19의 완성으로 5·16혁명 일어났다는 사고이다. 4·19혁명 당 시 시위 중에도 군대는 우리 편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로 했다‘ ’ .254) 특히 이승만 하야 성명 직후에는 국군 만세‘ !’, ‘국민의 군인 환영 등의 구호도!’ 터져 나왔다.255) 이렇게 5·16을 4·19의 계승으로 받아들인 것은 쿠데타 주 체세력도 본래 4·19혁명 주년 기념일에 거사를 계획했을 정도로 스스로를1 4·19와 동일시하려 했고, 4·19 와중에 구축된 군인의 이미지를 활용했기 때 문이다.256)
1963년 박정희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이후 경제건설을 위한 자금을 해결하려는 방법으로 한일국교정상화를 추진했다 이것은 한편으로 미국에. 서 들어온 원조와 자금이 급감하고 정권을 운영할 자금이 필요한 상태에서 박정희 정권에 한일 회담이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이런 박정희 정권의 경제발전을 향한 실제적 방법이 많은 지식인들 과 학생들에게 반감을 주었다 지식인들은 대일 종속 및 일본의 경제적인 침. 략에 대한 위험을 느끼고 있었으며 더구나 박정희 정권의 한일회담에 참여하 는 태도 즉 일본정부가 한반도에 대한 제국주의 정책과 식민주의 통치를 사, 실대로 시인하고자 의사가 없다는 점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어서 한일국교정. 상화를 반대하는 시위와 운동들이 이어져 5·16군사쿠데타 직후와 달리 박정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한국민주화운동사『 』돌베개 쪽 『호 지역 년사』 혁명부상자회 광주전라지부 쪽 편집자 편『 의 민중사 학민사』
권보드래 천정환 『 년을 묻다박정희 시대의 문화정치와 지성 천년의상상』 쪽
희 정권의 정책을 비판하는 규 와 횟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1964년 월8 에 창간된 청맥 도 박정희의 조국근대화와 수출주도 산업화와 민족적 민주 주의 담론을 행사하는 방법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등장했다. 그럼 청맥 지식인들은 근대화와 경제발전에 대해 어떤 입장을 추구했는 가 청맥 지식인들이 민족자립경제를 육성시켜야 한국 사회의 빈곤과 후?  / 진성에서 빗어날 수 있다고 봤다 청맥 지식인들이 박정희 정권의 정책의.  가장 문제점을 종속과 예속성 식민성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청맥 지식인들은 박정희 대통령의 연설 때 언급한 바와 같은 257) 자립경 제를 키워야 한다고 보았지만 그를 향한 방향이 달랐다 박정희는 자립경제. 를 이루기보다 근대화를 성취하기 위해 먼저 미국과 일본의 원조나 차관 도입으로 어떤 방법으로든 수출국가 주도 산업화를 발전시키려고 했다 그/ . 러므로 미국과 일본 등 외국 자본을 직접적으로 한국에 도입했다. 이와 달리 청맥 지식인들의 주장은 하루 빨리 온전한 자립경제를 이뤄야 한다며 이것을 위해 과거의 원조에 매달린 습에서 벗어나 내부 공업화 발 전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었다.258) 또한 일본 자본이 본격적으로 도입되자 이로 인해 한국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일본에 다시 종속될지도 른다는 일본 침략의 위기를 경고했다.259) 이어서 이런 외자는 오직 경제적인 부분에만 영 향을 미치지 않는다며 미국원조나 일본 차관은 한국 사회와 한국인들의 사상 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보았다 특히 미국이나 일본을 향한 정신적인 종속. 문제를 청맥 필자들은 지속적으로 비판하고 있었다 더불어 가장 중요한  . 것은 예속성과 대의 의존으로 인해 국내 경제를 개발할 기회를 마련해 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창렬은 이러한 대외적 예속에서 벗어날 때 민족자 본을 육성해 나갈 수 있다고 주장하며 민족자본의 육성은 정치적으로는 독립 하였지만 경제적으로 선진국에 대한 경제적 예속에서 벗어나고 그러한 경제
년 월 일 제 차 경제개발 개년계획의 발표였다 그 계획의 기본목표는 든 사회경제적 악순환을 과감히 시정하고 자립경제의 달성을 위한 기반을 구축 한다 는 데에 두었다 山本剛士 「 차 경제개발계획과 고도성장의 문제점」 년대 거름신서
김성두 미국원조와 한국경제「 」 청맥 년 월호 쪽 「 년 치욕의 한해– 」 청맥 년 월호 쪽
적 예속의 내생적 요인인 매판적 요소를 불식하는데 있음을 밝혔다.260) 이어 서 정병수도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갈 방법으로 해외수출보다는 국내시장확대 를 위한 내수산업의 육성정책으로 전환을 요구했다.261) 이런 측면에서 보면 박정희 정권과 청맥 지식인들이 근대화와 자립경제 를 이루려는 목적이 같지만 실행하고자 하는 방법이 다르다고 볼 수 있다. 박정희 정권은 원조와 차관을 통한 수출주도 산업화를 통해 자립경제를 세우 려고 했다 반면 청맥 지식인들은 원조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오히려 국.  내시장확대와 내수산업 발전이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단적인 예로 청맥.  필자 이창렬은 한국의 민족자본 형성 과정 원조경제 비판, 재벌독점기업의· 기형성 및 정경유착 폐해 일본의 자본 진출과 경제침략 수출주도 산업화, , 비판인 네 가지 문제점으로 인해 국민의 생활수준이 더욱 악화되어 있었다 고 주장했다.262) 또한 김성두와 배성동도 한국경제가 갖는 구조적 왜곡성‘ 과 지나친 대외의존적 요소가 갖는 고용배제작용을 주목해야 하며263) 대 외의존적 경제로부터 조속한 탈피를 위한 방책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또한. 한국은 든 사회체제의 발전방향을 구미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문 제를 해결한 방식도 구미적임을 문제로 지적했다.264)
정리하면 박정희 정권의 수출국가 주도 산업화를 통한 근대화를 위해/ 미국과 일본 자금을 받으며 자본을 도입했던데 비해 청맥 지식인들의 주 장은 민족자립경제를 주장했으면 이것을 위해 수출주도가 아니라 국내시/ 장확대를 위한 내수산업의 육성정책이 필요하다고 봤다 또한 미국과 일본. 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은 예속성과 식민성 문제를 낳는다고 생각했던 점에서 박정희 정부와 차별성을 볼 수 있다 결국 청맥 지식인들은 급속.  한 경제발전보다 시간이 오래 결리지만 완전자주 즉 민족자립경제를 이루/ 는 것이 중요하다고 봤다고 볼 수 있다.
이창렬 민족 자본과 매판자본「 」 청맥 년 월호 쪽 정병수 누구를 위한 수출인가「 」 청맥 년 월호 쪽 이창렬 민족자본과 매판자본「 」 청맥 년 월호 쪽 김성두 한국자본주의의 과잉인구「 」 청맥 년 월호 쪽 배성동 중상층의 정치적의의「 」 청맥 년 월호 쪽
제 5 장 결론
 청맥 은 민족주의와 민족 주체성의 확립을 강조하면서 대중 민중 과 민족 ( ) 중심의 경제체제와 사회를 구성하려는 방향성을 강조하고자 했던 잡지였 다. 1960년대 통치 이데올로기와 정책을 강하게 비판했던 잡지로서 청맥  은 박정희 정권이 진행하던 수출주도 산업화 즉 외자 외채 미국과 일본, , , 에 대한 종속에 맞서 저항적 민족주의를 보다 직접적으로 지향했다 다시. 말해서 조국근대화를 목표로 박정희 정권이 추진했던 수출국가 주로 산업/ 화와 60년대 지식인들이 주장했던 민족자립경제의 차별성을 규명할 때/ 청맥 지식인들의 지식 사회 내 위치를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었다 양자 . 의 차이점을 보면 첫 번째는 자주와 자립이다 청맥 지식인들은 해방이후. 1960년대까지 종속된 한국의 경제를 비판했으며 외자 및 원조의 문제점을 분석하고 민족경제를 발전시키고 민족자립을 지향해야 한다고 봤다. 청맥 주도 지식인들은 창간사에 나타나듯이 한국의 시급한 과제로 탈후진전략‘ ’ 으로서 지주와 자립을 공유하며 자주와 자립의 길과 공간을 창출하려‘ ’ ‘ ’ ‘ ’ ‘ ’ 했다 그러나 이런 지향성은 박정희 근대화 드라이브의 핵심인 산업개발. , 즉 경제문제와 정면으로 대결해야 했다. 김성두의 미국원조와 한국경제「 」, 편집실 경제부의 자료 외자도입의 현황과 문제점 이규동의 외자도입과「 : 」, 「 국내경제 및 민족 자본과 산업구조 박희범의 우리경제의 새지표 김」 「 」, 「 」, 성두의 제도적「 순과 악덕재벌 등 대표적인 글들에서 이런 논의를 찾」, 아볼 수 있다.
두 번째는 식민성과 일본의 재침략의 위험성에 대한 경계이다 한일회담으. 로 인한 일본 정부의 태도 식민통치 인정 및 사과 와 박정희 정권의 경- 無 無 제개발을 위한 한일국교정상화와 그 과를 비판하며 일본에게 예속될 경제 와 문화식민성을 지적했다 대표적인 글로는 이갑성의 한일국교의 경제적. 「 배경 김책의 일제의 경제침략 안무순의 보이지 않은 히노마루」, 「 」, 「 「 」」, 김동 영의 문화식민의 경우「 ①-생활 방 고병익의 식민지 문화와 문화 식민지」, 「」, 김철순의 우리문화 서구문화 등을 들수 있다「 」 .
 청맥 지식인들은 잡지 초기 1964~65년까지 한일국교정상화가 이뤄질 때까지 여러 특집과 글을 통해 한국의 경제성장과 박정희 정권의 예속성을 비판했다 잡지 후반. 1965년~1967년까지는 민족주의 담론을 둘러싼 담론 투쟁을 넓은 의미에서 문화 구체적으로는 역사 문학 철학 등 학문적 영, , , 역에서 보여주고 있었다.
현재 시각에서 청맥 을 보면 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출간 되었고 당시  3 1960년대 정권 탄압을 받았던 잡지라고 볼 수 있다 북한과 연관이 있다는. 혐의 때문에 상당 기간 동안 금기시되었던 청맥 은  1960년대 중반 특히, 한일국교정상화 시점에서 정부와 다른 경제발전 구상과 신식민지 자율적, 인 민족주의 내세웠던 잡지이다 이런 맥락에서 청맥 은 민족주의라는 콘. 『 텍스트에서 1960년대를 바라볼 수 있는 중요한 텍스트 가운데 하나이다. 또한 1960년대와 1970년대 당시 근대화와 경제발전을 둘러싼 흐름을 가 장 집약적으로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잡지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1970년대 들어서 유신체제 등장이후 박정희 정권을 반 대하는 운동이 많았지만 1960년대는 한일국교정상화를 반대하는 운동이 주류를 이뤘다 이것은. 1960년 중반에 박정희 정권을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운동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는 것이다. 청맥 은 오랫동안 사상계 와 창    작과비평 사이에서 불우하게 잊힌 잡지였으나 청맥 이 제기했던 문제제  기는 상당 부분 창작과비평 에 흘러들어  1970년대의 진보적 지식장에 큰
영향을 끼쳤다.265)
1960년대 후반 청맥 이 한국 사회에서 금기되었던 흐름을 대표했다면 결  과적으로 볼 때 한국사회는 청맥 이 원하는 방향보다 오히려 박정희 정권의 원하는 방향으로 갔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이런 면에서 청맥 지식인들의.  이상과 추구하고 있던 지향들이 좌절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1960년대 에는 실패하고 현실화되지 못 했지만 청맥 이 지적했던 일정 부분의 논의들 은 여전히 현재성이 있지 않을까 한편으로는 박정희 정권이 주도한 국가 주. 도산업화가 경제성장으로이루어졌지만 1980~1990년대를넘어서면서 IMF 경제위기를 통해 박정희 정부의 경제개발 델의 한계를 드러냈던 것은 아닐
 
까? IMF위기 이후에 국가주도 산업화에 대해서 한국에서 회의적인 시각과 어려 가지 입장들이 있는데 그 중에 근대화와 발전지상주의적인 시각에 대해 서 민족주의와 신식민주의론을 통해서 근본적으로 비판하는 주장도 있었 다.266) 이렇게 보면 청맥 의 논의 중에서 경제성장과 사회발전적인 측면 에서 아직도 주목할 만 한 주장과 의미 있는 지적이 존재했다는 것을 제시 했다는 것이 본 논문의 가장 큰 의의라고 할 수 있다.
정상환 지구화 시대 자립경제 민족경제 경상대학교사회과학연구원 사회과학연「
구 제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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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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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맥』 1964년 8월호부터 1967년 6월호까지 특집 제목
<표1>
정문분야 주제 저자 페이지 날짜
창간사
창간사 김진환

 
아아이민족 이수난 임진왜란과 한민족의 수난 난으로 인한 우리의피해를중심으로 이현종  

병자호란과우리의수난 
심우준
열강경쟁하의구한말 
이종린
일제의경제침탈 그자본주의적성장과정을통해서본 김책
일제무단통치의본질 그강압의제양상
김대상
민족적수난과한국민의병리 
이철범
☆한국민족수난사연표 
윤경자
미국원조와한국경제 
김성두  

 
한국정당의 체질 ①한국적집권정당의병리 
신상초  

②아쉬운공동광장 빈번한헌정중단이의미하는것 구범
③한국정당의전근대성 파오손면
진혜숙
④혁신정당은가능한가 한국에있어서의 혁신정당의실상과허상 원문불량 이정식  

 
이사는내
나라 의안문학의비극 
김열규  

버리고가시는님국악 
성경린
대화속의「노랑머리」 
강신항
「 」신 없는종교시장 
장병길
「프레스콜로니 의현실」 한국신문의외신보도는얼마나공정한가 김준길
「생각하는 방 의권장」  
이영희
서세에몰리는윤리 가치기준은 자본 과 성「 」 「 」 박정자
내나라를「유행」하는「 의것」  전통의현재적생명 김현옥
 
폭력시대는 갔는가 ①강국정치의폭력성 순에얽힌 강『 「 국정치」의이율배반성』 김홍철  

②공포정치와추상물조작 이봉희
③현대사회와매스콤의폭력
오정렬
  미국극동전략의전개 이태근  
한미 관계의 현단계 미대한군원정책분석 정병수

미국의대한원조정책비판 추이 과문제점
  신복영
대한원조자금의부대조건 박필수
조약협정으로본한미관계 박준규
한국인이본미국과미국인 최근덕
한국소비구조의분석 나기영
한국양곡정책의재검토 이봉원
특집 한국의 타부들
〈 〉재벌 난공불락의제국 이덕주
〈 〉융자 너무나높은은행문 지동욱
〈 〉언론 비판권외의권부 반영환
〈밀수루트 없고도있는길〉 윤해
〈외인부락 한국판 에덴의동쪽〉 최호
〈일인상사 보이지않는 히노마루〉 안무순
〈 〉통일론 핑계만찾는신주 이재학
한국대의정치사 반추하는역사의휼계
서병조
 
국제권력의 재편성 종막으로가는양극시대
국제권력의재편성과정
최종기  

신생강대국의대두가의미하는것 북한 시대의도래와사나운후진의바람 서동구
자유진영의다극화 다극화의소지와그영 향
조순환
신식민주의와민족주의의갈등 전후두물 결의기원적고찰 이기원
도전받는한국의좌표 변화의감각에서변 화의인식으로 임방현
미소사상논쟁 존쏘머빌 데일리이 프 김상기
〈 〉특집 한국독점산업 의 분석 ①한국재벌의시회적책임 임종철
②한국독점산업의특질 구석
③독점폭리의규 제당폭리
문동하
사고의혁명 현대물리학의논리
박봉렬
특집
일본은 다시온다 일본의재벌 배한경  

일본재벌의개념과범주  일본재벌의형성과실태  전후일본재벌의성격과해외진출
한일경제관계의전망
한일국교의경제적배경 이갑섭
일본인의대외의식 이정식
일본인이보는한국인 왜곡된침략자의시 선
송건호
미국은무엇을투자해왔나 미국대외수출 자본의생태를분석한다 정병수
맥나마라전쟁의새국면 조순환
신생민족국가의기본동향 박철한
군의 정치학 군엘리뜨론 김규택
군은 최고의 권력정당  
  이택휘
후진국과그군대들 쟈노빗쯔 이식
 
군사제도와정치형태  
 
민병천
현실과인간성의기로에서 대학생 군에게 보내는편지 고명식
특집
한국의 민족자본 민족자본육성의길 박희범  

한국민족자본의생성과정 원문불량
이만기
민족자본과산업구조 이규동
민족자본과매판자본 이창렬
한국자본주의의특징 임종철
한국사회의 집단자살분석 ◇사회통계적인 분석을통한집단자살 파오손면◇ 이도암
 
특집 와 해
병대 「라틴아메리카 의포성」
조순환  

검은대륙의분노 정연권
동 아의반작용 전 석
고독한미국인 정종식
일본의군대 일본자위대의성격과목표
파오손면
이진영
중공의핵실험 심재훈
〈 〉특집 한국매스 콤 의 반사회성 한국언론의가치의식 정명환
한국언론의후진성 오정렬
신문을고발한다 이호철
한국매스콤체제의반사회성
오갑환
소비성향과매스콤
유득준
범죄문제와매스콤
박재윤
  통일의조건과전망 통일을위한국민적자
박동운  
북통일 세와국제적여건

통일의당위성과필연성 민족주의의고차 원과통일 임종철
통일론은타부인가 적막과공허에찬통일 론 
최서영
통일방안
한국정부의통일방안
국내각정당의통일방안
「 」유엔 의통일방안
기타통일방안
북분단의전말서 선획정의시비문제
이용희 조 원 조순승
특집 해방
년의
풀지못한 과 제들 정치 제도와상황의거리 한국의두정치 제도에대한역사적비판 배성동
관료 전근대와근대의기로 한국관료제의근대화문제 박동서
경제 소득구조의 재조정 일체경제지표의 시작과전부 문형선
사회 인구정책의실 화 인구증가와사회 변동 김진균
문화 자아발견의주체성 수입기의진통과 자주의식의농도 진홍섭
윤리 시장성인격의지양 비윤리만이인 격척도가되는윤리관 장병길
◇ 현지르뽀 농민농촌실향 체념하다◇ 절망도잊어버린농민 김성두
특집
이것이 매판이다 매판시민 민준기  

매판지식인 한배호
매판학자 이숭녕
매판정치인 이덕주
매판경제인 구석
매판문학 김경민
매판예술 여석기
매판윤리 서윤택
특집
한국의 민족주의 한국민족주의의역사적배경 송건호  

한국의민족주의와엘리뜨 구범
민족운동의담당자 이진영
한국민족주의전망 임방현
특집
우방개념의현대적의미 한국적상황을중
김홍철  
현대우방론 심한일검토

강약국의우방정책비교분석 강대국의독 립적대외정책과약소국의종속적외교관계 를중심으로 이용필
우방으로서의미국 한계우방론과냉전체제 속의한미관계 정경희
일본은우방인가 대중공관계를위한수단 과「 북문제」로보려는일본인의대한우
방관 권오기
특집 한국지식인 지식인의한국적과제 황성  

지식인과역사의식 이진영
소외된지식인과대중 김철순
사회변화와지식인 이정식
지식인의변 바지저고리와넥타이 이기영
기와개미 김수영
손발이제멋대로 김광섭
다잃어갑니다 강위석
허울좋은관사 윤항렬
철 와지성 이동희
「아 」 「 」이냐 인 이냐
강창웅
변혁기의중국지식인 츄왕
 
특집 세대론 한국세대론 도전없는세대응전없는세 대
보수의자세와전진의자세 신구세대의가 치관의차이현실관의차이 김태길  

새세대의형성과교체 후진국가의격렬한 세대교체와전개 김영
도전과응전의철학 신세대를바르게키우 는철학은 최창규
세대교체는왜실패했는가 정치풍토와실 천방책의문제상황 박동운
세대항변 불신과반목의얼굴들 장병칠
아버지세대의노이로제 김준길
왜이렇게되었는가 이수정
실의와좌절의젊음들 김동영
윤리철학의빈곤세대
이재학
보아온것은비정상뿐 박실
세대교체와농촌 농촌세대의현실분석
김일철
농촌의 젊은 세대 농촌 새세대의 형성과
류달영
문제점
 
한국교육론 교육비는얼마나드나 천연수  

학교제도는합리적인가 정재철
경제발전과교육투자 성하원
『어떤교육 이어야하는가』 황정규
교육정상화를위한탄원서 신세호
대학생의현실과교육 진위교
교육과정의문제점 김신일
참고서의교육적영향 한명희
다부제교육의실태 김윤태
 
문화식민론 식민지문화와문화식민지 고병익  

문화사대와지배자철학 사대주의의개념규 정및사대주의의과거와현재 한영우
해방과소비문화의지배 이진영
일제의문화식민정책 오세창
우리문화와서구문화 토착화세계화를위한 문제점 김철순
문화의변용역사의제약
서양화의역정
오늘의상황
확립되는주체성
내일의한국문화
세계화의길
 
민족문화론 문화우열과그상관성 윤 한  

민족문화의전개과정 전통의계승에관한 몇가지문제 민두기
민족문화의담당계층 이동극
문화수입과수용태세 전통속에용해하려는몸부림 장기근
외형적서구화에탐닉한일본 정재각
민족자존이선행되었던한국 김용덕
삼분값은왜오르나 하진오
 
한국민족문화 의 문제점들 한국민족의성립과민족어의성립 김완진  

한자사용이끼친공적과해독 강신항
민족문화의형성과중국문화의수용 함홍근
귀족문화와평민문화의대립과극복 김동욱
민족생활문화에나타난자연과학 전상운
고유음악의전승과현대화노력 이혜구
고전미술의승화와재창조작업 김원룡
대학가반세기 해방후격동하는혼란속 의대학 반영환
특집
우리말의어휘는풍부한가 우리말어휘의
심재기  
우리말  우리글 규 및빈곤의극복책

논리표현에정확한가 우리말의어휘와문 장구조에서의고찰 이숭녕
얼마나세련되어있는가 문학어로서의우 리말의가치와자격 김열규
국어는과연발달안된언어인가 서구어처 럼되어야만과학적이고발달한언어인가 안병희
가장아름다운우리말열개 김성환 김윤
경 김종필 재희 노영숙 박 수
서석규 송건호 신석정 오경 유광렬 이용선 이정식 조약돌 주충자 최길 서 최서영 최현배 최신해 김수영
특집  추악한 재벌들 제도적 순과악덕재벌 김성두  

특집 현대와 유교 유교사상속의역사의식 민두기
유교사상속의진보관 함홍근
유교사상속의복고의식 황원구
유교속의경제사상 한영우
현대인이보는유교사상
특집
어떻게 되어가고 있 나 통독으로가는서독외교 정경희  

「검은안개 스쳐간일본」 정종식
정치적해결찾는월 전 이재승
「수카르노 없는 인도니지어」 「 정종욱
뉘른 그의교수대 나치독일원흉들의최후
  조화유
비경제적요인의근대화 한국의근대화를 저해하는비경제적요인들과그해결의방 향 정창기
지식인과준지식인 한국의지식인 준지식 인및주변적지식인에관한성격과반성 김석훈
특집
왜우리당이 야하나 공화당 신동준  

신민당 김대중
대중당 서민호
『청맥』 1964년 8월호부터 1967년 6월호까지 권두언 제목
<표2>
〈권두언〉 역사에살아야한다
민족적양심에의복귀를촉구하면서
 

아카데미즘의위기 황산덕
〈권두언
조국을통곡한다

냉전의벽을뚫어라 조동필
새로운젊은이가나와야한다 김기두
지성의사회참여 송건호
시사만평 안의섭
〈권두언
저무는갑신년에부친다

시련받는후진민주주의 후진제국에 있어서의 권위주의적 지배의 유행은무엇을의미하는가 우병규
조국은금치산자
지금내조국은 나 에의한 나 를위한「 」 「 」
「 」나 의국인가내용누락
김질락
우리는어느시점에서있는가
우리는 낡은 과거로 새로운 눈물을 흘릴 것인가 내용누락 이재학
권두언
년에부친다 동해물과백두산이마르 고닳도록  

새로운에리뜨의육성방안 시급한지배세 력의교체 김영
〈권두언
대화앗아간 월의거리를향하여
김주열 김중배

민족지도이념의 색 권윤혁
우리경제는기로에있다 박희범
지식인은시녀인가 김기두
〈권두언
우리는왜싸움터가되었는가

우리에게내나라를 김질락
소시민적 지성의 반동성 아쉬운 정치 및 사회의식의성숙과조국에대한역사의식의 빈곤 강신표
아시아는변형하고있다
전개될아시아의새양상 원문불량
여정동
아시아인의아시아 심재훈
아아회의와아시아의진로 강범석
〈권두언
역사의방향타를돌리자

우리경제의새지표 우리경제의현황과무 역의장기적전망에서본새지표 박희범
헌정은어디로 이방석
내일은있다있어야한다 김성두
〈권두언
역사적전진을위하여 스무번째맞는광복 절과본지창간 주년에즈음하여

와 원은 다른가 와 원에의 이중예속의 가능성이미지참조 정병수
〈권두언
이시점에서

「 」엣쎄 사회정의의구현과자세 최명관
 
자주문화의확립을위하여 구동태
〈권두언
이길로가자

「청과맥 누구의나라인가」 김질락
제방안
변혁을위한새방안 박희범
한국정치의새구도 김영두
일인의 한국사관 비판「 」  김용덕
〈권두언
년치욕의한해

〈권두언〉 여생동하는가
 

무죄세대와교육 제세대의교육
황정규
〈권두언〉
민족교육은사치가아니다

몰락하는의무교육 박승평
〈권두언〉
재벌이나라망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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