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26

Park Yuha - 비판과 선동 사이 - 이승엽 전우용 저격

Park Yuha - 비판과 선동 사이 이승엽 선생께서 오랜만에 전우용 저격을 하셨기에 40분 넘는 YouTube까지... | Facebook

비판과 선동 사이
이승엽 선생께서 오랜만에 전우용 저격을 하셨기에 40분 넘는 YouTube까지 보고 말았는데, 맞는 이야기도 있지만 자신이 나온 방송을 소개하면서 요약한 얘기가 너무나 엉터리다.
국적논의를 하기 위해서 먼저 알아야 할 중요한 두가지.
*1899년에 만들어진 국적법은 헌법에 나오는 “신민의 요건”을 정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어차피 헌법이 식민지에 적용된 것도 아니지만, 기본은 식민지문제논의가 아니라 일본인여성과 결혼한 외국인이나 외국인과 결혼한 일본 여성문제에 있었다.
외국인과 결혼하면 호적에서 빠지면서 당연한 듯 국적을 잃었는데, 거기서 파생하는 여러가지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인여성들이 결혼해도 국적을 잃지 않게 된 건 패전이후였다.
*일본의 호적은 혈통이나 이름이나 언어 이상으로 “국토“(본적지) 중심주의였다. 조선에 살던 일본인에게 본토호적은 있어도 본토참정권은 없었고, 조선인이 본토(内地)일본인 호적에 들어갈 수 있었던 이유다.
1945년 4월에
일정 자격을 갖춘 조선인남성에겐 참정권(국민의자격)이 부여되었지만(신민이든 국민이든 무늬와 실질을 적절히 나눠 사용하다가 일본인취급을 공식화하기로 한 셈)
일본 여성이 참정권을 갖게 된 건 패전이후였다.
——————————
“일제강점기 '조선인'은 일본인도 아니고 외국인도 아닌 '국적 없는 천민' 취급을 받았습니다.”(전우용)
👉
근대일본에서 국적 관련한 논의의 모든 기본은 호적에 있었다. 일본호적과 조선호적은 구분 되어 있었지만 조선은 식민지가 된 순간부터 구조적으로 일본 제국의 ’신민‘이었다. 한일합방조약6조에 따르자면.
“일본국 정부는 앞에 기록된 병합의 결과로 완전히 대한제국의 시정을 위임하여 해당 지역에 시행할 법규를 준수하는 대한제국인의 신체 및 재산에 대하여 전적인 보호를 제공하고 또 그 복리의 증진을 도모함.”
“신체및 재산보호”란 국가의 기본역할이므로.
이승엽교수 말처럼 중국이나 일본 아닌 서양으로 나간 사람들이 일본여권을 가졌던 이유다.
*일제강점기 '조선인'이 일본국적이었다면, 재일동포는 일본에 '귀화'할 이유가 없었습니다.“(전우용)
👉
무슨 얘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설마 1952년에 재일교포들이 그때까지의 일본 국적을 박탈당했고 그랬기 때문에 이후엔 귀화 또는 영주권이 필요해 졌다는 걸 모르고 있는 걸까.
내건 깃발과 달리 존재한 차별에 대한 비판은 당연히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식의 부정확하고 ‘감정적’인 기술은 정확한 이해와 진짜 필요한 비판을 방해할 뿐이다. 결과적으로 선동만 난무한 사회를 만든다. 전우용의 말과 글들이 지금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 (간간이 한숨이 반주처럼 섞이는 이유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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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Yuha
이승엽교수 포스팅 전문.
길지만 꼭 읽어 보시면 좋겠다.
———-
시도 때도 없이 '무식', '무식'하는 말뽄... 아니 말씀뽄새는 그렇다 치고. 요즘 (의미 없이) 한국 내에서 논쟁이 되고 있는 '식민지통치시기 조선인의 국적' 문제에 대해 나름 역사학적 입장에서 말씀을 해 주셨다고 생각됩니다.
자잘하게 의의(疑義)를 느낀 것은 적지 않지만,
라디오 방송에서 '말'로 표현하다 보니 몇가지가 섞여서 이야기가 이상해진 것도 있으테고, 어떤 부분은 관점의 차이 같은 것도 있으니, 이런 사소한 것은 일단 제외합시다.
말씀하신 중에서 '역사적 사실'과 크게 어긋난 설명은 두 가지를 꼽을 수 있겠습니다.
(1) 첫번째는 "만주국이 건립되었을 때, 일본인(내지인)은 국적법에 의해 이중국적을 가졌지만, 국적법이 적용되지 않는 조선인은 이중국적이 부여되지 않았다" 운운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마침 며칠 전, 이 주제로 다른 분 게시물에 답글을 단 바가 있는데, 전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대충 어떤 프로세스였나 하면,
①애초에는 만주국에 재주하는 모든 사람(5족)을 만주국 국적을 부여하려 했다.
②그런데, 일본의 국적법은 이중국적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국적법을 개정해서 일본인에게 일본-만주 이중국적을 부여하지 않으면 안되는데, 국적법은 개정할 생각이 없었다.
③그렇다면 일본인(내지인)의 일본국적을 박탈하고 만주국 국민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이건 또 일본인(내지인)들이 절대 받아 들일 수 없었다.
④그래 그럼. 내지인은 패스. 만주 국적을 강제하지 않기로 했다.
⑤그럼 조선인은 만주국적으로... 하려고 했는데, "내선일체인데 왜 조선인만 일본국적을 뺏아 버리고 만주국적으로 삼으려 하는가!!! 꽥!!!"하는 반발에 조선인도 포기.
⑥결국 만주국 국적이라는 게 5족 중 '만계(満支蒙)'에게만 적용하는 불완전한 결말로.
(추기. 이렇게 우왕좌왕하던 중, 국적법이 제정되기도 전에 나라가 망해 버린다)
==================
(2) 두번째가 좀 중요한 문제인데,
"일제강점기에 외국으로 많이들 나갔잖아요. 그런데 조선총독부에서 여권발급한 내용을 보면, 일년에 수십명 밖에 안돼요. 일본은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인정하지 않고, 그래서 여권도 안 내 주려 한 거예요"  -- 대충 이런 논지의 말씀을 하셨는데, 이건 완전히 무지에서 비롯한 오해입니다.
일년에도 수만에서 수십만명씩 해외로 나가는데 여권이 없다? 다들 밀항자였단 말인가?
(조선총독부의 여권 발급에 대한 이야기는, 조선인의 여권문제에 관한 세계제일의 전문가 Donghee Kim 선생의 교시를 기다리도록 하자)
일본은 일단 '같은 나라'니까 여권이 필요없었다고 치고(사실, 여권이나 비자보다도 더 까다로운 '도항증명서'라는 걸 받아야 했지만),
그렇다면 중국은?
당시의 중국이 아무리 핫바지라도 육로로 꾸역꾸역 국경을 넘어 오는 조선인 밀입국자를 그대로 놔 두고 있었을까?
정답은, "중국에 갈 때는 여권이 필요 없었다"입니다.
아무리 일본이 중국과 불평등조약을 맺었다고는 해도, 엄연히 외국인 만큼, 도항시에는 여권이 필요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일본 영토에서 (일본영토에 준하는) 관동주 조차지, 거류지, 만철부속지 등으로 이동한다'는 식으로 해서 여권 없이 도항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는데, 결국 일중간의 담판을 통해, 이걸 제도화합니다.
곧 '일본인의 중국 도항시에는 여권을 휴대하지 않아도 된다'는 괴상한, 좀 말도 안되는 협의가 이루어져 버립니다.
이어 1918년에는 일본인의 중국도항과 중국인의 일본도항시, 양쪽 다 여권휴대의무가 없다는 협의가 이루어지고, 이를 공문으로 확인합니다.
「外国人本邦入国規則ノ除外ニ関スル交換公文」
결국, 조선인이 무여권으로 해외, 특히 중국에 갈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이 조선인을 국민으로 보지 않아 여권을 내 주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중국측이 조선인도 일본인이라 인정하여(랄까, 조선인도 일본국민에 속한다고 보고) 여권 휴대를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김학철 선생의 소설 『격정시대』를 보면,

상해의 윤봉길의거를 계기로 민족의식이 각성된 중학생(고등보통학교 생도) 서선장이가, 집에는 "유도부 합숙을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나와, 그날 밤으로 경성에서 중국(봉천) 가는 기차를 잡아타고 국경을 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권 같은 건 준비할 겨를도 없이 유도복이 든 짐가방 하나를 들고 집을 나온 교복차림의 중학생이 이리도 수월히 국경을 넘을 수 있었던 것. 이것도 당시의 조선인이, 적어도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는 '일본인'으로서 취급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던 겁니다.
(이렇게 '일본인'으로서 여권 없이 국경을 넘어간 이들이 항일운동을 했다는 것도 아이러니합니다)
역사학자님께서 "조선인이 일본국적이 아니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역설한 사례가, 사실은 완전히 그 반대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니 이 참 滑稽랄까요.
第一部 日支間条約、協定及公文等/分割4
JACAR.ARCHIVES.GO.JP
第一部 日支間条約、協定及公文等/分割4
第一部 日支間条約、協定及公文等/分割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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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Yuha
내가 이런 일에까지 끼어든 이유는 2년 전에 발표한 논문에서(일제시대때 조선인과 결혼한) 일본인처 이야기를 다루면서、근대이후 일본국적법의 문제에 대해 알게되었기 때문이다.
관심있으실 분이 계실까 해서 서지사항 적어둔다.
<전후일본의 젠더정치와 국토주의 - 재한일본인 아내와 그 가족>
(『帝国のはざまを生きる--交錯する国境、人の移動、アイデンティティ』みずき書林、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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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기봉
믿고 거르는 전우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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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Yuha
강기봉 문제는 엄청난 숫자의 팔로워와 시청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이죠
5
최승우 replied
 
1 reply
about an hour ago
최승우
강기봉 미친놈이죠.
최병현 
Follow
이미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왜곡된 도착적 사고에 찌든 분이죠..
진작에 전우용의 전 자만 봐도 쳐다보지도 않게 됐지만
특히 조국 사태 초기에 정경심 교수의 하드디스크 밀반출에 대해 검찰이 증거인멸 혐의를 적용하려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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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Active
Park Yuha replied
 
1 reply
4 hours ago
Park Yuha
200만 구독자 오마이뉴스TV가 호사카 유지 교수를 자주 등장시킬 때도 우려했던 일인데, 앞으로는 전우용을 내세워 이어갈 모양.
오마이뉴스TV는 이런 방송을 계속하려면 李昇燁 교수님이나 Donghee Kim
교수님을 함께 초청해서 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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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昇燁
朴 裕河 앗, 그러다간 집중 공격의 표적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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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Yuha
李昇燁 공격따위 캔디캔디 자세로!^^
4
Park Yuha
방송에서도 문제적인 발언이 많다.
이하에 간단히 기록.
해설은 생략한다.ㅠ
———-
”일제 강점기 보다 지금이 자발적친일파가 더 많다“
”비국민“(그저 ‘국민이 아니라’는 뜻으로 오용. )
”화폐가 달랐으니 같은 국민이 아니다“
“집단 노예처럼 부리기 위해서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다”
“(군대에서) 구타로 저항할 능력을 없앴다“
“(조선인을) 국민으로 만들 생각이 없었다”
”식민지인들을 분열시키는 게 제국의 통치 방식“
“역사 발전이란 인간의 발전,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
“물질발전만 보니까 사람이 물질화된다”“동물적/물질주의적“
“자기가 물질화 돼서 다른 사람도 물질로 보인다”(뉴라이트 역사관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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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mmy Ohyun Kwon
교수님이 팩트 체크를 잘 해주셔서 많이 배우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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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Yuha
Tommy Ohyun Kwon 독립기념관장논란 때는 귀찮아 가만히 있었는데, 이승엽 교수님 덕분에 쓰게 되었네요.^^
Jaetae Lee
왜 이런부류들이 패거리의 박수를 받으며 득의양양할 수 있는지.. 이해난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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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ive
Park Yuha replied
 
1 reply
4 hours ago
アン ジェウ
오, 며칠 전 NHK 다큐에서 일본 여성의 참정권을 비롯해서 여러가지 진보적 변화가 맥아더에 의해 이뤄졌다는 걸 봤어요. 일본을 떠나던 날 20만 인파가 몰려서 환송을 하는 장면도 인상적이었구요. 맥아더는 일본에서 진짜 중요한 인물이었다는 걸 이제서야 새삼 깨달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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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Yuha
アン ジェウ 오 그런 방송을 했군요.
네. 패전과 함께 민주주의가 시작됐으니까요.
Jung Rak Kim
이씨 왕공족이 미국 유럽으로 다닐때 무슨 여권이였는지만 생각해도 알만한 일.
유럽 순방, golf같은 자료도 안보나 봅니다.
올림픽이 국가 대항전인데 손기정은 국적이 어디?
일장기 지우기는 국뽕의 최대 이야기 거리로 만들면서?
Jung Rak Kim
유일 감사합니다. 따라가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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