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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김대중 金大中|Kim Dae-jung | |
출생 | |
사망 | |
사저 |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김대중대통령묘소 |
재임기간 | 제15대 대통령 |
서명 | |
공식 초상화 |
- 1933. 덕봉강당[19] 수학
- 1934.4. 하의보통학교 2학년 월반 입학
- 1939.3. 목포제일공립심상소학교 졸업
- 1944. 목포상선 사원
- 1945.8. 목포상선합동조합 위원장
- 1945.8.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선전부원
- 1946.2. 조선신민당 목포지부 조직부장
- 1946.2. 민주청년동맹 목포지부 부위원장
- 1947. 국민보도연맹 운영위원
- 1947. 한국민주당 목포지구당 상무위원
- 1947. 동양해운 사장
- 1948.10. 목포일보 사장
- 1949. 대한청년단 목포해양단 부단장
- 1950. 전남지구 목포해상방위대 부대장[21]
- 1951.3. 흥국해운 사장
- 1951. 전남해운조합 회장
- 1951. 한국해운조합연합회 이사
- 1954.5. 제3대 민의원 선거 전남 2 무소속 후보 (낙선)
- 1955.12. 민정당 발기준비촉진위원회 선전부 간사[22]
- 1956.3. 민정당 발기준비위원회 상임위원[23]
- 1956.7. 전국웅변대회 부회장
- 1957. 대한웅변협회 부회장
- 1957.8. 민주당 중앙상임위원, 노농부 차장
- 1957.9. 민주당 강원도 인제군 지구당위원장
- 1960.7. 제5대 민의원 선거 강원 15 민주당 후보 (낙선)
- 1960.9. 민주당 기획위원 겸 선전부장 (대변인)
- 1963.12. 민주당 원내대책위원
- 1966. 민중당 정책위원회 의장 겸 정무위원
- 1968. 신민당 정무위원
- 1970.9. ~ 1971.4. 제7대 대통령 선거 신민당 후보 (낙선)
- 1973.7.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의장
- 1981. 브루노 크라이스키 인권상 수상
- 1983. 미국 유니언신학대 구제위원회 고문
- 1983. 미국 국제고문희생자구원위원회 고문
- 1983. 미국 Pittsburgh La Roche 대학교 이사
- 1983. 미국 하버드 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 객원연구원
- 1983. 미국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위원회 고문
- 1985.3.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
- 1987. 북미주 한국인권연합 인권상 수상
- 1987.5. 통일민주당 상임고문
- 1987.5. 통일민주당 창당발기인
- 1987.11. 평화민주당 창당발기인
- 1987.11. 평화민주당 총재
- 1987.11. ~ 12. 제13대 대통령 선거 평화민주당 후보 (낙선)
- 1991.4. 신민주연합당 총재
- 1991.9. 민주당 공동대표
- 1992.5. ~ 12. 제14대 대통령 선거 민주당 후보 (낙선)
- 1994.12.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 이사장
- 1995.8. 새정치국민회의 창당발기인
- 1995.9. 새정치국민회의 총재
- 1996.4.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새정치국민회의 전국구 14번 (낙선)
- 1997.4. ~ 1997.12. 제15대 대통령 선거 새정치국민회의 후보
- 1998.2.25. ~ 2003.2.24. 제15대 대한민국 대통령
- 1998.2. 무궁화대훈장 수훈
- 1999. 아시아 태평양 민주지도자회의 명예이사장
- 2000.1. 새천년민주당 총재
- 2000.12. 노벨평화상 수상
- 2006.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
자세한 내용은 김대중/일생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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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헌정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호남 태생 대통령이자 직접 선거를 통하여 선출된 최초의 민주당계 정당 소속 대통령이다.[32] 삼김시대의 일원이다.
본래 해운 회사와 신문사를 경영하던 청년 사업가 출신으로 민주당 신파에서 정계에 입문하였다. 1960년대 제3공화국에서 1980년대 제5공화국에 이르기까지 군사독재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전개한 야당 정치인이었다.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까지 대통령 선거에서 계속 낙선을 거듭해왔으나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종필과 DJP 연합을 통해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꺾으며 네 번의 도전 끝에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는 대한민국 사상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였다. 또한 1998년 대통령 취임 당시 74세로 역대 대통령 중 최고령이었다.
대북 유화책인 햇볕정책을 추진하여 2000년 6월에는 사상 최초로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남북정상회담을 가지기도 하였다. 같은 해 12월에는 '한국과 동아시아의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공로 그리고 남북화해와 평화에 대한 노력'을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2003년에 임기를 마치고 2009년 8월 18일 폐렴으로 인한 다발성 장기 부전과 호흡곤란증후군으로 향년 85세로 서거했다. 사후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본래 해운 회사와 신문사를 경영하던 청년 사업가 출신으로 민주당 신파에서 정계에 입문하였다. 1960년대 제3공화국에서 1980년대 제5공화국에 이르기까지 군사독재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전개한 야당 정치인이었다.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까지 대통령 선거에서 계속 낙선을 거듭해왔으나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종필과 DJP 연합을 통해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꺾으며 네 번의 도전 끝에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는 대한민국 사상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였다. 또한 1998년 대통령 취임 당시 74세로 역대 대통령 중 최고령이었다.
대북 유화책인 햇볕정책을 추진하여 2000년 6월에는 사상 최초로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남북정상회담을 가지기도 하였다. 같은 해 12월에는 '한국과 동아시아의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공로 그리고 남북화해와 평화에 대한 노력'을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2003년에 임기를 마치고 2009년 8월 18일 폐렴으로 인한 다발성 장기 부전과 호흡곤란증후군으로 향년 85세로 서거했다. 사후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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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진보와 보수적인 사상을 둘 다 가진 인물로 볼 수 있는데 구 공산권의 붕괴 이후 트렌드에 따라서 중도개혁주의를 내세웠는데 기본적으로 자유주의적인 개혁을 추구했다.[33] 같은 민주화 운동가 출신인 김영삼 전 대통령과 비교하자면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자유보수주의 성향에 가까웠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사회자유주의에 가까웠다. 그래서 정치나 문화적으로는 자유주의를 추구하려고 노력했고 경제적으로는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신자유주의 노선을 걷되, 경제성장과 복지를 동시에 추구하고자 노력하는 제3의 길 노선을 병행하였다.[34] 민주화 이후 첫번째로 민주당계 정당이 배출한 대통령으로서, 같은 민주당계 정당 출신의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들과 비교하자면 가장 보수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35] 실제로 본인은 스스로의 노선을 전진적 보수주의, 온건보수주의 등으로 표현한 바 있다.#1#2 대외적으로는 한미동맹을 우선시하면서 북한과의 대화와 협력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햇볕정책을 주장했다. 일본 대중문화 개방을 추진하는 등 일본과의 관계도 원만히 했다.
서구권에서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민주인권 투사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 폴란드의 레흐 바웬사 전 대통령, 버마(미얀마)의 아웅 산 수 치 여사와 함께 이름이 잘 알려진 민주화 운동가이기도 하다.
특히 만델라와는 1970 ~ 1980년대 민주 투사로 활동하며 극심한 탄압으로 투옥 및 망명을 거친 행적을 시작으로 대통령 재임, 자신을 투옥하게 만든 전 대통령을 용서한 전적[36], 노벨평화상 수상 이력까지 두 사람의 생애가 겹치는 부분이 많아 한겨레에서 '아시아의 만델라'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원래 김대중 납치 사건을 제외하면, 70년대 ~ 80년대 초반만 해도 김영삼, 김대중 두 민주화 운동가들이 외신에 비슷한 비중으로 다뤄졌지만, 80년대 중반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미국으로 망명간 DJ가 재미교포 및 현지 정치인들의 도움으로 활발하게 대외활동을 함에 따라, 해외 인지도를 크게 쌓게 된 것. 대통령에 당선되고서도 인도네시아의 위협을 받던 동티모르에 파병을 하고, 세계 여론을 움직였으며, 완전한 정계 은퇴 뒤에도 미얀마의 민주화 운동에 후원하는 등 꾸준한 민주화 운동 행보를 보였다.
나중에는 만델라와 개인적인 인연도 닿아, DJ가 대선에 출마하자 만델라 측에서 딸을 통해 수감생활 27년을 함께한 낡은 시계를 선물했고, 김대중도 답례로 지난 20년간 정치활동을 하면서 쓴 낡은 가방을 선물했다고 한다. 만델라가 쓴 책을 DJ와 보좌진들이 번역한 저서가 한국에서 출간되기도 했으며, 2001년 만델라의 두번째 방한 당시 대통령이었던 김대중과 공동 기자 회견을 진행하기도 했다. 위 사진도 당시 사진. 2009년 먼저 세상을 떠난 김대중에 대해 애도했고, 만델라도 세상을 떠나자[37] 이희호 여사가 애도를 표하기도 했다.
또한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보편 민주주의 체제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래서 싱가포르의 리콴유가 주장한 이른바 '아시아적 가치'와 충돌하게 되었고, 이 때문에 김대중과 리콴유 두 사람 뿐만 아니라 각국의 석학들이 참여하는 대규모의 학술 토론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동안의 민주화 운동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0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특히 만델라와는 1970 ~ 1980년대 민주 투사로 활동하며 극심한 탄압으로 투옥 및 망명을 거친 행적을 시작으로 대통령 재임, 자신을 투옥하게 만든 전 대통령을 용서한 전적[36], 노벨평화상 수상 이력까지 두 사람의 생애가 겹치는 부분이 많아 한겨레에서 '아시아의 만델라'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원래 김대중 납치 사건을 제외하면, 70년대 ~ 80년대 초반만 해도 김영삼, 김대중 두 민주화 운동가들이 외신에 비슷한 비중으로 다뤄졌지만, 80년대 중반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미국으로 망명간 DJ가 재미교포 및 현지 정치인들의 도움으로 활발하게 대외활동을 함에 따라, 해외 인지도를 크게 쌓게 된 것. 대통령에 당선되고서도 인도네시아의 위협을 받던 동티모르에 파병을 하고, 세계 여론을 움직였으며, 완전한 정계 은퇴 뒤에도 미얀마의 민주화 운동에 후원하는 등 꾸준한 민주화 운동 행보를 보였다.
나중에는 만델라와 개인적인 인연도 닿아, DJ가 대선에 출마하자 만델라 측에서 딸을 통해 수감생활 27년을 함께한 낡은 시계를 선물했고, 김대중도 답례로 지난 20년간 정치활동을 하면서 쓴 낡은 가방을 선물했다고 한다. 만델라가 쓴 책을 DJ와 보좌진들이 번역한 저서가 한국에서 출간되기도 했으며, 2001년 만델라의 두번째 방한 당시 대통령이었던 김대중과 공동 기자 회견을 진행하기도 했다. 위 사진도 당시 사진. 2009년 먼저 세상을 떠난 김대중에 대해 애도했고, 만델라도 세상을 떠나자[37] 이희호 여사가 애도를 표하기도 했다.
또한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보편 민주주의 체제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래서 싱가포르의 리콴유가 주장한 이른바 '아시아적 가치'와 충돌하게 되었고, 이 때문에 김대중과 리콴유 두 사람 뿐만 아니라 각국의 석학들이 참여하는 대규모의 학술 토론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동안의 민주화 운동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0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이광요(싱가포르 총리) 씨는 서구사회에서 지나친 민주주의와 지나친 개인의 권리가 도덕의 궤멸을 가져왔다고 걱정하고 있다. 그의 이와 같은 주장은 선진 민주국가에서의 도덕의 붕괴현상 때문에 아시아에서 뿐만 아니라 서구사회에서도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있다.(예를 들어 싱가포르에서 자동차를 훼손한 대가로 미국의 10대 소년 마이클 훼이군을 태형에 처한 것을 많은 미국 시민들이 지지하였다.)
그러나 도덕의 붕괴현상은 서구문화의 본질적 단점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산업사회의 단점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이 아시아의 신흥 공업국가 사회에서도 확산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조그마한 도시국가인 싱가포르에서 시민들을 통제하기 위해 전체주의와 흡사한 경찰국가가 필요했다는 사실은 정부가 가족의 사안을 간섭하지 않고 가만히 두기만 하면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는 이광요 씨의 주장을 강하게 반증하고 있다.
산업사회의 병폐를 치유하는 적절한 방법은 경찰국가의 공포에 의한 강요된 침묵이 아니라, 윤리교육을 강조하고 정신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문화예술의 수준을 높이는 정책이다.
사실상 대한민국의 첫 자유주의 성향의 대통령이었으며[38], 사회, 문화의 전반에 있어서 여러 권위주의와 군부독재의 잔재를 타파하려 노력했다. 부정부패 논란은 많았지만 어쨌든 '작고 효율적인 정부'를 지향해 정부 내의 여러 악습들을 사라지게 했다는 평가도 받는다. 또한 여성가족부를 신설하고 페미니스트 운동가 출신 한명숙을 장관으로 임명하는 등 여성주의적 개혁[39]도 시도했다. 또한 햇볕정책 등 당시까지의 대통령들과는 정반대의 외교적 모습을 보여 국제적으로도 알려지게 되었다.
리버럴 성향이라고 평가받을 업적이 많은데, 일본 대중문화 개방, 영화사전심의제 폐지를 비롯한 여러 규제 철폐부터, 권위주의 타파 정책 등 사회문화적으로 자유주의적인 정책을 다수 시행하였다. 또 여러 공기업들을 민영화하고, 대규모 구조조정을 시행하여 IMF 사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여러 경제정책을 시행한 것을 보면 꼭 노동계에 우호적인 성향이었던 것도 아니다. 일각에서는 김대중 정부의 빅딜 조치나 정부주도의 IT산업 진흥에 대해 관치주의라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한 쪽에서는 신자유주의, 다른 쪽에서는 관치주의라는 지적을 한 셈이다.[40]
1996년 연세대 사태 직후 김대중 당시 국민회의 총재가 연세대를 방문하여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을 규탄하며 "과격한 학생운동은 이제 끝이 나야 하고 한총련은 자진해산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북한은 며칠후 "김대중 씨는 신념도 양심도 없고 의리와 도덕도 지킬 줄 모르는 너절한 인간"이라며 맹비난했다.# 당시 안기부장이 국민회의 측에 김대중 총재에 대한 신변위협 가능성이 있으니 조심하라고 했을정도.# 이어 임기 첫해 인 1998년 한총련은 이적단체로 규정되었다. 99년초 한총련 소속 대학생 3명이 청와대 앞에서 `김대중은 퇴진하라'는 문구가 씌어진 유인물을 뿌리며 시위하기도 하였다.# 여담으로 99년 7월 김대중 전 대통령은 미국에서 필라델피아 자유메달을 수여하였는데 이에 대해서도 북한은 김대중을 강하게 비난하였다.#[41][42]
자세한 내용은 국민의 정부/평가 문서로.
리버럴 성향이라고 평가받을 업적이 많은데, 일본 대중문화 개방, 영화사전심의제 폐지를 비롯한 여러 규제 철폐부터, 권위주의 타파 정책 등 사회문화적으로 자유주의적인 정책을 다수 시행하였다. 또 여러 공기업들을 민영화하고, 대규모 구조조정을 시행하여 IMF 사태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여러 경제정책을 시행한 것을 보면 꼭 노동계에 우호적인 성향이었던 것도 아니다. 일각에서는 김대중 정부의 빅딜 조치나 정부주도의 IT산업 진흥에 대해 관치주의라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한 쪽에서는 신자유주의, 다른 쪽에서는 관치주의라는 지적을 한 셈이다.[40]
1996년 연세대 사태 직후 김대중 당시 국민회의 총재가 연세대를 방문하여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을 규탄하며 "과격한 학생운동은 이제 끝이 나야 하고 한총련은 자진해산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북한은 며칠후 "김대중 씨는 신념도 양심도 없고 의리와 도덕도 지킬 줄 모르는 너절한 인간"이라며 맹비난했다.# 당시 안기부장이 국민회의 측에 김대중 총재에 대한 신변위협 가능성이 있으니 조심하라고 했을정도.# 이어 임기 첫해 인 1998년 한총련은 이적단체로 규정되었다. 99년초 한총련 소속 대학생 3명이 청와대 앞에서 `김대중은 퇴진하라'는 문구가 씌어진 유인물을 뿌리며 시위하기도 하였다.# 여담으로 99년 7월 김대중 전 대통령은 미국에서 필라델피아 자유메달을 수여하였는데 이에 대해서도 북한은 김대중을 강하게 비난하였다.#[41][42]
자세한 내용은 국민의 정부/평가 문서로.
한국전쟁 정전(7월) 직후인 1953년 10월 당시 청년 김대중은 언론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고문을 게재했다. 김 전 대통령은 "악독한 공산침략에 직면해 전 자유진영이 그의 생존을 위해 굳게 단결해야 할 상황"이라면서 "태평양반공동맹에 있어서도 같이 중추적 역할을 해야 할 한일 양국의 반목 대립은 아시아 반공세력의 강화는 물론 앞서말한 반공동맹의 추진에도 치명적 지장을 초래할 것"이라고 썼다. 이어 "우리는 단호히 일본의 옳지 못한 태도의 시정을 얻음으로써만이 진실로 영원한 양국 친선의 튼튼한 기초를 닦을 수 있는 것"이라고도 밝혔다.# 이후 1965년 박정희 정부의 한일수교 당시에도 비판적이지만 한일수교 자체는 지지했다. 결사반대 입장이었던 당시 야권의 입장과 달라 갈등을 겪기도 했다.
1971년 대선 당시에는 미·중·소·일 4대국의 한반도 전쟁 억제 보장(소위 '4대국 보장론'),[43] '3단계 통일론'(남북한의 평화적 공존-평화적 교류와 교섭-평화통일), 공산권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과 교역 추진, 남북 동시 유엔 가입 등의 방안을 제시했다.[44] 당시 김 전 대통령은 "다시는 청일·러일 전쟁 같은 한반도를 무대로 한 강대국들의 전쟁을 억제해야 한다"면서 "그러기 위해서는 미·중·소·일의 부전(不戰) 협정을 이끌어내고, 그런 연후에 남과 북이 국제 사회에서 상호 공존함을 인정받는 방안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당시 혁신계(진보계)의 ‘선 통일 후 중립화’, ‘남북 군대의 무장 해제와 외국군 철수’ 등의 요구에 비하면 온건했지만, 평화통일이나 남북교류 주장은 멸공이 국시였던 당시 정권및 미소냉전이 한창인 동북아 및 국제정세와도 상반되는 입장이었다. # 배경을 보면 냉전의 와중에서 베트남 전쟁에 시달린 미국이 1969년 닉슨 독트린을 통해 아시아 지역에 더 이상의 군사적 개입을 피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했으며, 1971년 3월에는 주한미군 1개 사단(2만2000명)을 철수시켰다. 또한 유엔총회는 대만(자유중국)을 축출하고 중공(중화인민공화국)을 가입시켰으며, 71년 키신저-저우언라이 회담과 72년 닉슨-마오쩌둥 회담 등의 미중관계 개선, 그리고 72년 9월에는 일본과 중국의 수교가 있었는데, 이러한 70년대 초부터의 데탕트(냉전 완화)와 함께 우리나라 안보 환경이 급변하는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이로 인해 박정희 정부는 72년에 북한과의 관계 개선에 나서면서 7.4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하게 됐고, 73년 대통령은 <6·23 평화통일 외교정책 선언>을 통해 남북한의 유엔 동시 가입을 반대하지 않으며 사회주의 국가와도 외교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입장을 천명했다. 동시에 이 시기 주한미군 철수로 인한 국방력 감소에 대한 우려로 대한민국의 핵무장을 추진하기도 했다.
김대중 정부 때는 주변국이나 국제관계에서 마찰이 일어난 적은 없었다. 좋은 일본 문화를 받아들이자는 연설로 시작된 일본 대중문화 개방, 김대중-오부치 게이조 선언, 2002 한일 월드컵으로 안정된 일본과의 관계, 햇볕정책으로 대표되는 북한과의 관계, 김대중 전 대통령을 지지하고 도와주고 구명을 요청하는 데에 가장 적극적인 미국과의 관계가 모두 좋았다.
냉전 당시 외교적으로 미국과 소련 사이의 중립을 주장했지만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미국의 도움을 많이 받았기에 집권 당시엔 미국에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같은 정당이었지만 미국과 많은 마찰이 있었던 노무현 정권과 대비되는 부분. 1970년대 지미 카터 정부는 도덕주의, 인권주의를 표방하며 남미, 아시아의 친미국가에서 민주화 운동을 벌이는 인사들에게 힘을 실어주었는데, 김대중이 그 중 한명이었다. 지미 카터는 집권당시 주한미군 철수를 내세워 박정희 정권과 마찰을 빚었는데, 김대중의 민주화 운동 행보를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었다. 따라서 1980년 김대중 구명을 전두환에게 요구하기도 했다. 카터의 후임 레이건 정권은 전두환 정부를 지지해주고 있었지만 정부 차원에서 김대중 석방을 '권고'를 했다.[45] 이로 인해 미국에 잠깐 피신하기도 했고, 그들의 도움을 계속 받아왔기에 김대중은 미국에 개인적인 감사함이 있었다.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에는 당시 대북 포용정책을 펼치던 빌 클린턴 정권과는 밀월 관계였다고 평가받는다. 다만 이후 조지 워커 부시 정권이 출범해 대북강경책을 내세우자 마찰을 빚었다.# 김대중 정부는 이후 민주당 정권에 비해 보수주의를 내세우고 있으나 사실 이것에 대해선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정권에 이르기까지 36년을 이어온 보수정권 시절 진보나 재야 민주화세력들이 그만큼 억눌린채 사회적으로 철저하게 소외되었으므로 진보나 NL반미쪽의 목소리가 1997년 외환 위기로 여야 정권교체가 터지자 조명받기 시작한 것도 있다.[46]
특히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경우에는 클린턴 전 대통령 본인이 학생 시절부터 진보 민주주의 인권운동 사회활동가부터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에 원조 사회운동 활동가인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서 존중하는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고 본인이 말하기도 할 정도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당선되자 곧바로 클린턴 전 대통령이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을 만나고 싶다는 메세지를 밝혔으며[47] 그의 동생 로저 클린턴이 김대중대통령의 고향인 전남 신안군 하의도를 방문하기도 했고[48] 김대중대통령의 방미 당시 청와대 의전 비서관의 증언에도 다른 서구권 지도자와는 달리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경우 김대중 전 대통령이 떠날 때나 도착할 때 차가 도착하거나 떠나는 현장까지 와서 차에 탈 때 까지 배웅하고 지켜보며 고개를 숙이면서 까지 인사를 하는 등 인권운동가가 대통령이 된 끝판왕 테크트리 선배의 대우를 했다는 이야기가 많다. 이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넬슨 만델라와 비슷한 느낌으로 서구권에서 민주진보 계열 세력에서 대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토크쇼 등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을 소개할 때면 아시아의 만델라라고 소개한다. 특히 2000 남북정상회담 당시 클린턴 전 대통령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 문제를 김대중 전 대통령이 김정일에게 제기한 것에 감사를 나타내고 남북 정상회담에서의 합의가 김 대통령 개인뿐 아니라 세계 평화를 위해서도 대단한 승리라고 칭송하기도 했다.[49]
즉, 정치인으로의 행보(외교술)가 곧 그 사람의 사상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셈. 후임이자 같은 민주당계 진영이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미 관계에 있어서 보다 냉정한 모습을 보인 건 맞지만, 김대중은 미국에 우호적인 태도를 견지하던 정치인이었다. 1997년 대선 당시 김대중 후보는 주한미군은 북한의 남침을 억제하고 동북아 균형을 위해 한반도 통일 이후에도 주한미군은 필요하다는 입장을 냈다.[50]
1997년 10월, 미국과 일본이 미일방위협력지침을 개정하고 자위대의 영향력을 해외로 확대하는 법안인 미일가이드라인을 체결하자[51] 당시 미일가이드라인에 대해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후보는 "미일가이드라인의 골자는 유사시 자위대가 한반도에 진출하여 직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려하는 것이 큰 문제"며 "주권국인 대한민국의 동의 없이 이런 법안이 통과된 것과 우리정부의 무관심과 무능에 분노할일"이라고 김영삼 정부 시절 외교부의 무능함을 비판했다.남북정상회담 개최될 것 김대중후보 발언 한겨레 신문이 그 해 10월 20일 대선후보들 응답을 표로 정리한 바에 따르면, 김대중 후보는 통일 후 주한미군 주둔 여부에 대해 "반드시"라 답했고, 유사시 자위대의 한반도 군사개입에 대해 "한국의 사전동의"가 있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97대선 정책대결로(정리 : 한겨레 신문)
또한 1980년 5월 13일에 김대중은 기자회견을 갖고 "북한 공산 집단이 우리의 과도기를 이용하여 남한에 대해 폭력에 의한 그들의 야욕을 성취하려는 음모를 획책하려는 일이 절대 없기를 엄중 경고한다"면서 "국민과 학생, 근로자들은 질서를 지키고 사회 안정을 유지하여 북한공산집단이 오판할 계기를 주지 말하야 한다"라고 발표하였던 적이 있다.
또한, 김대중은 공산주의에 비판적인 시각을 많이 나타냈는데, 예를 들어, 조선로동당 규약에서 남조선의 사회주의화 조항을 삭제하라고 발언하던지, 일본에서 반유신 기자회견을 할 때, '공산주의'와 싸워서 자유를 얻어내야 한다고 하던지 그러하였다.
김대중은 김영삼과 달리 대만에는 방문하지 않았지만, 1997년 대선 때 대만 측에게 IMF 차관을 요청하였다. (물론 거절했지만) #
이에 따라 90년대 소련의 해체 및 공산권 붕괴이후 탈냉전시기에 들어선 국제정세 및 객관적 실리적으로 판단을 하는 경향이 대세가 되고 있는데 당장 영화 공작의 경우처럼 1997년 대통령 선거 당시 북한 정권이 공식 우편으로 우체국을 통해 김대중 전 대통령의 당선을 원한다는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는 공작도 있었는데 이런 식의 논란에 대해서도 정말 북한이 자신보다 경제규모가 30배나 큰 대한민국의 대선에 개입해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그럴 수 있는 국가적인 여력이나 자금이나 있는지 이런 얼토당토 않은소리에 넘어갈리도 없는 상식적인 판단을 하는 경우가 늘어난 것, 당연히 위의 우편물 사건도 반 DJ쪽에서 벌인 정치공작이었음이 드러났다.[52]
그의 임기말이던 2002년 12월, 청와대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최근(2002년 당시) 붉어진 반미감정에 대해 공무원 190명을 청와대로 초청한 자리에서 “의정부 여중생 사망사건이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 문제로 비약돼 ‘미군 나가라’고 하는 것은 안된다”고 밝혔다. 김 전 대통령은 “필리핀이 수빅만 해군기지와 클라크 공군기지에서 미군을 나가라고 했을 때 일부에선 설마 나갈까 했지만 미군이 철수, 경제와 국방에 큰 문제가 생겼다”면서 이 같이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어 “우리는 안보를 위해 미군을 있도록 하는 것이고, 미국은 미국대로 동북아 안정을 위해 와 있다”면서 “미국은 우방으로서 국가 이익에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 전 대통령은 “한미SOFA는 일본 독일과 비슷한 수준”이라면서 “운영에 있어서 개선하기로 미국과 합의했으며 얼마든지 개선하면 된다”고 말하며 주한미군의 여전한 중요성을 밝히며 대통령직을 마무리했다.[53]
1971년 대선 당시에는 미·중·소·일 4대국의 한반도 전쟁 억제 보장(소위 '4대국 보장론'),[43] '3단계 통일론'(남북한의 평화적 공존-평화적 교류와 교섭-평화통일), 공산권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과 교역 추진, 남북 동시 유엔 가입 등의 방안을 제시했다.[44] 당시 김 전 대통령은 "다시는 청일·러일 전쟁 같은 한반도를 무대로 한 강대국들의 전쟁을 억제해야 한다"면서 "그러기 위해서는 미·중·소·일의 부전(不戰) 협정을 이끌어내고, 그런 연후에 남과 북이 국제 사회에서 상호 공존함을 인정받는 방안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당시 혁신계(진보계)의 ‘선 통일 후 중립화’, ‘남북 군대의 무장 해제와 외국군 철수’ 등의 요구에 비하면 온건했지만, 평화통일이나 남북교류 주장은 멸공이 국시였던 당시 정권및 미소냉전이 한창인 동북아 및 국제정세와도 상반되는 입장이었다. # 배경을 보면 냉전의 와중에서 베트남 전쟁에 시달린 미국이 1969년 닉슨 독트린을 통해 아시아 지역에 더 이상의 군사적 개입을 피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했으며, 1971년 3월에는 주한미군 1개 사단(2만2000명)을 철수시켰다. 또한 유엔총회는 대만(자유중국)을 축출하고 중공(중화인민공화국)을 가입시켰으며, 71년 키신저-저우언라이 회담과 72년 닉슨-마오쩌둥 회담 등의 미중관계 개선, 그리고 72년 9월에는 일본과 중국의 수교가 있었는데, 이러한 70년대 초부터의 데탕트(냉전 완화)와 함께 우리나라 안보 환경이 급변하는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이로 인해 박정희 정부는 72년에 북한과의 관계 개선에 나서면서 7.4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하게 됐고, 73년 대통령은 <6·23 평화통일 외교정책 선언>을 통해 남북한의 유엔 동시 가입을 반대하지 않으며 사회주의 국가와도 외교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입장을 천명했다. 동시에 이 시기 주한미군 철수로 인한 국방력 감소에 대한 우려로 대한민국의 핵무장을 추진하기도 했다.
김대중 정부 때는 주변국이나 국제관계에서 마찰이 일어난 적은 없었다. 좋은 일본 문화를 받아들이자는 연설로 시작된 일본 대중문화 개방, 김대중-오부치 게이조 선언, 2002 한일 월드컵으로 안정된 일본과의 관계, 햇볕정책으로 대표되는 북한과의 관계, 김대중 전 대통령을 지지하고 도와주고 구명을 요청하는 데에 가장 적극적인 미국과의 관계가 모두 좋았다.
냉전 당시 외교적으로 미국과 소련 사이의 중립을 주장했지만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미국의 도움을 많이 받았기에 집권 당시엔 미국에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같은 정당이었지만 미국과 많은 마찰이 있었던 노무현 정권과 대비되는 부분. 1970년대 지미 카터 정부는 도덕주의, 인권주의를 표방하며 남미, 아시아의 친미국가에서 민주화 운동을 벌이는 인사들에게 힘을 실어주었는데, 김대중이 그 중 한명이었다. 지미 카터는 집권당시 주한미군 철수를 내세워 박정희 정권과 마찰을 빚었는데, 김대중의 민주화 운동 행보를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었다. 따라서 1980년 김대중 구명을 전두환에게 요구하기도 했다. 카터의 후임 레이건 정권은 전두환 정부를 지지해주고 있었지만 정부 차원에서 김대중 석방을 '권고'를 했다.[45] 이로 인해 미국에 잠깐 피신하기도 했고, 그들의 도움을 계속 받아왔기에 김대중은 미국에 개인적인 감사함이 있었다.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에는 당시 대북 포용정책을 펼치던 빌 클린턴 정권과는 밀월 관계였다고 평가받는다. 다만 이후 조지 워커 부시 정권이 출범해 대북강경책을 내세우자 마찰을 빚었다.# 김대중 정부는 이후 민주당 정권에 비해 보수주의를 내세우고 있으나 사실 이것에 대해선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정권에 이르기까지 36년을 이어온 보수정권 시절 진보나 재야 민주화세력들이 그만큼 억눌린채 사회적으로 철저하게 소외되었으므로 진보나 NL반미쪽의 목소리가 1997년 외환 위기로 여야 정권교체가 터지자 조명받기 시작한 것도 있다.[46]
특히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경우에는 클린턴 전 대통령 본인이 학생 시절부터 진보 민주주의 인권운동 사회활동가부터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에 원조 사회운동 활동가인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서 존중하는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고 본인이 말하기도 할 정도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당선되자 곧바로 클린턴 전 대통령이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을 만나고 싶다는 메세지를 밝혔으며[47] 그의 동생 로저 클린턴이 김대중대통령의 고향인 전남 신안군 하의도를 방문하기도 했고[48] 김대중대통령의 방미 당시 청와대 의전 비서관의 증언에도 다른 서구권 지도자와는 달리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경우 김대중 전 대통령이 떠날 때나 도착할 때 차가 도착하거나 떠나는 현장까지 와서 차에 탈 때 까지 배웅하고 지켜보며 고개를 숙이면서 까지 인사를 하는 등 인권운동가가 대통령이 된 끝판왕 테크트리 선배의 대우를 했다는 이야기가 많다. 이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넬슨 만델라와 비슷한 느낌으로 서구권에서 민주진보 계열 세력에서 대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토크쇼 등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을 소개할 때면 아시아의 만델라라고 소개한다. 특히 2000 남북정상회담 당시 클린턴 전 대통령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 문제를 김대중 전 대통령이 김정일에게 제기한 것에 감사를 나타내고 남북 정상회담에서의 합의가 김 대통령 개인뿐 아니라 세계 평화를 위해서도 대단한 승리라고 칭송하기도 했다.[49]
즉, 정치인으로의 행보(외교술)가 곧 그 사람의 사상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셈. 후임이자 같은 민주당계 진영이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미 관계에 있어서 보다 냉정한 모습을 보인 건 맞지만, 김대중은 미국에 우호적인 태도를 견지하던 정치인이었다. 1997년 대선 당시 김대중 후보는 주한미군은 북한의 남침을 억제하고 동북아 균형을 위해 한반도 통일 이후에도 주한미군은 필요하다는 입장을 냈다.[50]
1997년 10월, 미국과 일본이 미일방위협력지침을 개정하고 자위대의 영향력을 해외로 확대하는 법안인 미일가이드라인을 체결하자[51] 당시 미일가이드라인에 대해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후보는 "미일가이드라인의 골자는 유사시 자위대가 한반도에 진출하여 직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려하는 것이 큰 문제"며 "주권국인 대한민국의 동의 없이 이런 법안이 통과된 것과 우리정부의 무관심과 무능에 분노할일"이라고 김영삼 정부 시절 외교부의 무능함을 비판했다.남북정상회담 개최될 것 김대중후보 발언 한겨레 신문이 그 해 10월 20일 대선후보들 응답을 표로 정리한 바에 따르면, 김대중 후보는 통일 후 주한미군 주둔 여부에 대해 "반드시"라 답했고, 유사시 자위대의 한반도 군사개입에 대해 "한국의 사전동의"가 있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97대선 정책대결로(정리 : 한겨레 신문)
또한 1980년 5월 13일에 김대중은 기자회견을 갖고 "북한 공산 집단이 우리의 과도기를 이용하여 남한에 대해 폭력에 의한 그들의 야욕을 성취하려는 음모를 획책하려는 일이 절대 없기를 엄중 경고한다"면서 "국민과 학생, 근로자들은 질서를 지키고 사회 안정을 유지하여 북한공산집단이 오판할 계기를 주지 말하야 한다"라고 발표하였던 적이 있다.
또한, 김대중은 공산주의에 비판적인 시각을 많이 나타냈는데, 예를 들어, 조선로동당 규약에서 남조선의 사회주의화 조항을 삭제하라고 발언하던지, 일본에서 반유신 기자회견을 할 때, '공산주의'와 싸워서 자유를 얻어내야 한다고 하던지 그러하였다.
김대중은 김영삼과 달리 대만에는 방문하지 않았지만, 1997년 대선 때 대만 측에게 IMF 차관을 요청하였다. (물론 거절했지만) #
이에 따라 90년대 소련의 해체 및 공산권 붕괴이후 탈냉전시기에 들어선 국제정세 및 객관적 실리적으로 판단을 하는 경향이 대세가 되고 있는데 당장 영화 공작의 경우처럼 1997년 대통령 선거 당시 북한 정권이 공식 우편으로 우체국을 통해 김대중 전 대통령의 당선을 원한다는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는 공작도 있었는데 이런 식의 논란에 대해서도 정말 북한이 자신보다 경제규모가 30배나 큰 대한민국의 대선에 개입해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그럴 수 있는 국가적인 여력이나 자금이나 있는지 이런 얼토당토 않은소리에 넘어갈리도 없는 상식적인 판단을 하는 경우가 늘어난 것, 당연히 위의 우편물 사건도 반 DJ쪽에서 벌인 정치공작이었음이 드러났다.[52]
그의 임기말이던 2002년 12월, 청와대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최근(2002년 당시) 붉어진 반미감정에 대해 공무원 190명을 청와대로 초청한 자리에서 “의정부 여중생 사망사건이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 문제로 비약돼 ‘미군 나가라’고 하는 것은 안된다”고 밝혔다. 김 전 대통령은 “필리핀이 수빅만 해군기지와 클라크 공군기지에서 미군을 나가라고 했을 때 일부에선 설마 나갈까 했지만 미군이 철수, 경제와 국방에 큰 문제가 생겼다”면서 이 같이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어 “우리는 안보를 위해 미군을 있도록 하는 것이고, 미국은 미국대로 동북아 안정을 위해 와 있다”면서 “미국은 우방으로서 국가 이익에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 전 대통령은 “한미SOFA는 일본 독일과 비슷한 수준”이라면서 “운영에 있어서 개선하기로 미국과 합의했으며 얼마든지 개선하면 된다”고 말하며 주한미군의 여전한 중요성을 밝히며 대통령직을 마무리했다.[53]
70년대부터 대중경제론을 내세웠고, 이후 80년대에는 그의 경제관을 담은 저서 대중참여경제론을 발간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문서 참조.
이후 김대중 정부 당시에는 기초생활보장제도 도입, 건강보험 조합 통합 후 국민건강보험공단을 설립해 현재의 건보체계 구축,[54] 사회보험 제도 확대, 공공근로사업 시행, 노사정위원회 설립 등의 정책을 시행했다.
친박 홍사덕 전 의원[55]은 "좋은 제도는 햇볕과 같다. 누리는 사람들은 당연한 것으로 여길 뿐 감사하지 않는다."면서 김대중 대통령을 '사회복지 원년 대통령'이라고 평가한 기고문을 2009년에 쓰기도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퇴임 이후에는 다음과 같은 발언들을 하였다.
이후 김대중 정부 당시에는 기초생활보장제도 도입, 건강보험 조합 통합 후 국민건강보험공단을 설립해 현재의 건보체계 구축,[54] 사회보험 제도 확대, 공공근로사업 시행, 노사정위원회 설립 등의 정책을 시행했다.
친박 홍사덕 전 의원[55]은 "좋은 제도는 햇볕과 같다. 누리는 사람들은 당연한 것으로 여길 뿐 감사하지 않는다."면서 김대중 대통령을 '사회복지 원년 대통령'이라고 평가한 기고문을 2009년에 쓰기도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퇴임 이후에는 다음과 같은 발언들을 하였다.
부시 정부의 실패는 레이건 대통령 이래 신자유주의 정책, 감세, 규제 해제로 시장 조절에 실패한 데 있다. 중요한 것은 경기 회복, 돈이 돌게 하는 것이다. 재정 건전성이 문제가 아니라 돈을 풀어야 한다. 그 돈이 비정규직 고용 문제, 기초생활보장 등으로 들어가 국민을 먹여살려야 한다.규제 완화와 감세 정책은 레이건 부시 대통령까지 오다가 실패한 정책이다. 돈이 위에서 밑으로 내려가게 할 게 아니라 식품쿠폰, 물품구매권 등 서민 손에 쥐어주는 정책을 통해 밑에서 위로 올라갈 수 있게 해야 한다.#
동시에 경제적 자유주의 성향도 있었는데, 집권기간동안 규제 완화, 공기업 민영화, 고용유연화, 구조조정 등 시장친화적 정책도 상당부분 있었으며, 이때문에 일각에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신자유주의자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틀림없는 건 7대 대선이 있던 70년대에 비해서 대통령이 될 즈음에는 경제적으로는 신자유주의적노선으로 이동했다는 것이다. 7대 대선 당시 수입대체 산업화를 주장하였던 것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성향은 시장경제를 강조한 취임사 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동전의 양면이고 수레의 양바퀴와 같다. 결코 분리해서는 성공할 수 없다... (중략) ... 민주주의를 거부하고 시장경제만 받아들인 나라들은 나치즘 독일과 군국주의 일본에서 보여준 바와 같이 참담한 좌절을 당하고 말았다. 이들 나라도 2차대전후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같이 받아들여 오늘과 같은 자유와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김대중의 대통령 취임사 일부
하지만, 당시의 신자유주의의 기조가 복지축소, 시장개입축소 였던 반면 김대중 전 대통령은 시장자유에 적극적이긴 했으나 복지의 확대에도 적극적인 입장을 취했기에 단순히 신자유주의자라고 정의하기엔 힘들다.
동교동계는 김대중의 자택이 마포구 동교동에 있기 때문에 김대중 계파의 일원들에게 붙여진 이름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동교동계는 김영삼 전 대통령과 상도동계 및 재야 민주화 운동 세력과 연대해서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서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다.
민주화 이후 그의 동지이자 라이벌이었던 김영삼이 먼저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임기 말에는 1997년 외환 위기 등으로 위기에 처한 뒤 정권 교체의 목소리가 강해졌다. 이로 인해서 1998년, 김대중이 정권을 잡게 된다.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에는 정권 재창출을 위해서 각개약진하였다. 권노갑을 비롯한 상당수 동교동계 주류들은 이인제를 지원하였고, 동교동계의 또다른 실력자 한화갑은 스스로 대선후보 경선에 출마했다. 하지만 양쪽 다 노사모를 앞세운 노무현 바람(노풍)에 우수수 떨어지게 되었다.
한 시대를 풍미하던 계파였지만 김대중 퇴임 후, 노무현이 정권을 잡고 난 뒤 열린우리당이 새천년민주당과 분리되고 진보적인 색채를 갖추기 시작하였고, 17대 총선에선 노무현 탄핵 역풍으로 줄줄이 낙선했으며, 구성원들도 세월의 흐름을 피해갈 순 없는지 연로해감에 따라 대부분이 정계에서 자취를 감춘데다 남아있는 정치인도 여러 군데로 흩어져 현재 동교동계를 자처하는 인물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상태다.[56] 그리고 구심축이던 김대중까지 사망함에 따라 동교동계도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세대가 되었다. 그나마 남아있던 사람들도 이념에 따라 친노 - 친문, 비문재인 등으로 갔다.
민주화 이후 그의 동지이자 라이벌이었던 김영삼이 먼저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임기 말에는 1997년 외환 위기 등으로 위기에 처한 뒤 정권 교체의 목소리가 강해졌다. 이로 인해서 1998년, 김대중이 정권을 잡게 된다.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에는 정권 재창출을 위해서 각개약진하였다. 권노갑을 비롯한 상당수 동교동계 주류들은 이인제를 지원하였고, 동교동계의 또다른 실력자 한화갑은 스스로 대선후보 경선에 출마했다. 하지만 양쪽 다 노사모를 앞세운 노무현 바람(노풍)에 우수수 떨어지게 되었다.
한 시대를 풍미하던 계파였지만 김대중 퇴임 후, 노무현이 정권을 잡고 난 뒤 열린우리당이 새천년민주당과 분리되고 진보적인 색채를 갖추기 시작하였고, 17대 총선에선 노무현 탄핵 역풍으로 줄줄이 낙선했으며, 구성원들도 세월의 흐름을 피해갈 순 없는지 연로해감에 따라 대부분이 정계에서 자취를 감춘데다 남아있는 정치인도 여러 군데로 흩어져 현재 동교동계를 자처하는 인물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상태다.[56] 그리고 구심축이던 김대중까지 사망함에 따라 동교동계도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세대가 되었다. 그나마 남아있던 사람들도 이념에 따라 친노 - 친문, 비문재인 등으로 갔다.
▲ 이랬던 그들이 |
▲ 이렇게 되고 말았다. |
김대중 씨는 아주 쉬운 문제를 대단히 어렵게 생각한다.김대중은 숨쉬는 것 빼고는 다 거짓말.ㅡ 김영삼
이른바 양김이라 불리면서 민주화 정치인의 쌍두마차였지만 제13대 대통령 선거와 3당 합당 때문에 둘은 사이가 무척 나빠졌다.[58]
그리고 그때부터 통일민주당과 평화민주당으로 별도의 노선을 굳히게 된다. 특히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노태우의 민주정의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이 90년 3당 합당을 하자 그 둘의 간격은 더욱 더 벌어지게 되었다. 그 후 1992년 대선에서 김대중을 누르고 대권을 차지한 김영삼은 아이러니하게도 1997년 대선에서 다음 정권을 김대중에게 넘겨주는데 일조하게 된다. 헌데 당시에는 아이러니하게도 김영삼이 신한국당 대선후보인 이회창과 갈등이 심했던지라, 이인제의 독자 출마를 용인하고 선거 중립을 선언하는 등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을 암묵적으로 동의해준 측면이 있다. 15대 대선이 끝난 1997년 12월 20일, 김영삼 당시 대통령은 이 대선에 대해 "어려움 속에서 선거의 명예혁명을 이뤄낸 국민들의 용기와 지혜에 경의를 표한다. 김대중 당선자의 대통령 당선을 축하하며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에 힘을 모아 협조하자"는 성명을 발표했다.[59][60]
이에 호응했는지 이후 DJ 정부도 YS 차남 김현철에 대한 사면복권[61]이 거론되면서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는 듯 했으나, 당시 사면에 부정적인 국민여론을 거스르지 못한 DJ는 결국 자신의 임기 동안 김현철의 사면 카드를 꺼내지 못했다. 김현철의 사면이 이루어진 것은 노무현 정권 말인 2007년. 둘의 관계는 YS가 김대중에 대해 '내 뒷조사를 엄청 한다'거나, 노벨평화상을 수상할 당시 "노벨상의 가치가 땅에 떨어졌다"라 비난했을 만큼 2000년대 초반만 해도 거리가 먼 상태였다. 다음은 DJ정부 출범 후 지난 4년간 YS가 한 반(反)DJ 독설 가운데 정책 및 상황 인식에서 DJ와 차이나는 주요 대목을 정리한 것이다. 많은 부분에서 YS의 자기합리화와 궤변도 읽히지만, 한편으론 YS의 확고한 신념도 읽을 수 있다. 노무현 딜레마, YS의 '反DJ 독설 4년'
사실 DJ는 먼저 화해를 요청하기도 했지만 이때만 해도 김영삼은 화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부터 통일민주당과 평화민주당으로 별도의 노선을 굳히게 된다. 특히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노태우의 민주정의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이 90년 3당 합당을 하자 그 둘의 간격은 더욱 더 벌어지게 되었다. 그 후 1992년 대선에서 김대중을 누르고 대권을 차지한 김영삼은 아이러니하게도 1997년 대선에서 다음 정권을 김대중에게 넘겨주는데 일조하게 된다. 헌데 당시에는 아이러니하게도 김영삼이 신한국당 대선후보인 이회창과 갈등이 심했던지라, 이인제의 독자 출마를 용인하고 선거 중립을 선언하는 등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을 암묵적으로 동의해준 측면이 있다. 15대 대선이 끝난 1997년 12월 20일, 김영삼 당시 대통령은 이 대선에 대해 "어려움 속에서 선거의 명예혁명을 이뤄낸 국민들의 용기와 지혜에 경의를 표한다. 김대중 당선자의 대통령 당선을 축하하며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에 힘을 모아 협조하자"는 성명을 발표했다.[59][60]
이에 호응했는지 이후 DJ 정부도 YS 차남 김현철에 대한 사면복권[61]이 거론되면서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는 듯 했으나, 당시 사면에 부정적인 국민여론을 거스르지 못한 DJ는 결국 자신의 임기 동안 김현철의 사면 카드를 꺼내지 못했다. 김현철의 사면이 이루어진 것은 노무현 정권 말인 2007년. 둘의 관계는 YS가 김대중에 대해 '내 뒷조사를 엄청 한다'거나, 노벨평화상을 수상할 당시 "노벨상의 가치가 땅에 떨어졌다"라 비난했을 만큼 2000년대 초반만 해도 거리가 먼 상태였다. 다음은 DJ정부 출범 후 지난 4년간 YS가 한 반(反)DJ 독설 가운데 정책 및 상황 인식에서 DJ와 차이나는 주요 대목을 정리한 것이다. 많은 부분에서 YS의 자기합리화와 궤변도 읽히지만, 한편으론 YS의 확고한 신념도 읽을 수 있다. 노무현 딜레마, YS의 '反DJ 독설 4년'
사실 DJ는 먼저 화해를 요청하기도 했지만 이때만 해도 김영삼은 화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2000년 6월 전직 대통령 입장으로 김영삼이 청와대 오찬장에 들어섰을 때 김대중은 화해를 요청했지만 YS는 IMF 문제에 대해서 먼저 사과하지 않으면 화해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거절했고, 김대중 역시 더이상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다고 한다.
둘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시도는 2005년에도 있었다. 당시 언론보도를 종합하면 2005년 11월 6일 오후 YS는 DJ의 동교동 자택으로 전화해 5분 가량 통화했다고 한다. 김대중이 그해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했을 당시 병문안을 가려 했으나 병원 쪽의 면회 사절 방침에 가지 못하게 되자 퇴원 이후 위문전화를 한 것이다. 이때 김영삼은 "건강은 어떠시냐"고 먼저 물었고, 김대중은 "좋지는 않지만 괜찮다. 전화해줘 감사하다."고 답하며 "김 대통령은 어떠시냐, 손(명순) 여사는 어떠냐, 대만은 잘 다녀오셨나"고 안부를 건넸다고 한다. 이에 김영삼 역시 "괜찮다."며 이희호 여사의 안부를 물으며 화답했다. 전화 후 김영삼은 측근들에게 "병원에 가보지도 못했는데 뒤늦게나마 통화하니 마음이 편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때문에 둘이 드디어 화해를 한 것이냐는 관측이 나오기도 했지만 두 사람은 다시 연락을 주고 받진 않았다.
그러나 김대중 서거 직전에 김영삼이 병원에 찾아와서 화해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고 하는데, 혼수상태였던 김대중에게 김영삼은 화해하자는 의견을 전달했다고 한다. 더욱 자세한 내용은 김영삼 문서에서 서술.
그리고 2015년 11월 22일에 김영삼이 향년 87세로 서거하면서, 파란만장한 정치 인생을 보낸 양김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김대중 서거 직전에 김영삼이 병원에 찾아와서 화해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고 하는데, 혼수상태였던 김대중에게 김영삼은 화해하자는 의견을 전달했다고 한다. 더욱 자세한 내용은 김영삼 문서에서 서술.
그리고 2015년 11월 22일에 김영삼이 향년 87세로 서거하면서, 파란만장한 정치 인생을 보낸 양김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정치적 동지이자 대통령 선·후임자로서 궂은 일, 좋은 일도 많았고, 서로 사이가 나빴던 적도 없진 않았다. 가장 나빴었던 시절은 노무현 정부 초기 자신의 심복이었던 박지원이 불법대북송금 사건으로 감옥에 갔던 시기다.[62]
하지만 그럼에도, 사적으로는 김대중은 노무현을 굉장히 아꼈으며, 노무현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자 크게 충격을 받았고 장례식에도 일가족들과 직접 참석해 노무현의 영정 앞에서 직접 분향할 때 엄청나게 통곡을 했고, 노무현의 죽음을 두고 "내 몸의 반쪽이 무너진 느낌이었다."고 말했을 정도였다.[63] 고문 후유증 등으로 병치레는 많았어도 기본적으로 강골이어서 어느 정도는 건강했던 그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로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으며, 결국 폐렴으로 병원에 입원했다가 8월 18일에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적으로는 김대중은 노무현을 굉장히 아꼈으며, 노무현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자 크게 충격을 받았고 장례식에도 일가족들과 직접 참석해 노무현의 영정 앞에서 직접 분향할 때 엄청나게 통곡을 했고, 노무현의 죽음을 두고 "내 몸의 반쪽이 무너진 느낌이었다."고 말했을 정도였다.[63] 고문 후유증 등으로 병치레는 많았어도 기본적으로 강골이어서 어느 정도는 건강했던 그가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로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으며, 결국 폐렴으로 병원에 입원했다가 8월 18일에 세상을 떠났다.
김대중은 신변이 심각하게 위협받았으며, 반정부 투쟁과 민주화의 중심이었으므로 박정희의 여식인 박근혜와도 당연히 껄끄러운 관계일 수밖에 없다. 박정희와 김대중은 평생에 걸쳐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사이였고 악연이 깊었고,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1997년 박근혜는 정계에 입문하여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지지했다.[64] 김대중은 취임 후 화합과 용서 정신을 펴면서 자신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박정희에 대한 예우의 자세를 보이고, 1999년 박정희기념관의 명예고문직을 맡기도 했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2004년 8월 12일, 김대중도서관에서 이루어졌다. 박근혜는 이 날 면담에서 "아버지 시절 여러 고초를 겪으신 데에 대해 딸로서 사과말씀 드립니다." 라는 말을 남기며, 유신 시절 김대중이 겪었던 피해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의 뜻을 표했다. 김대중은 사과를 받아들이며 "동서화합의 적임자가 되달라" 는 답을 했다. 이때 박근혜의 사과를 상당히 감명깊게 받아들인 모양인지, 2010년 사후 출간된 자서전에서 "박정희가 환생해 화해의 악수를 청하는 것 같았다." 고 당시의 심정을 표현하기도 했다. 다만 덕담수준이었지 보수정당 박근혜가 대통령이 돼야한다는 말은 아니었다.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낸 박지원도 박근혜를 지지한 한화갑, 한광옥을 비판했고,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는 동교동계 일부 인사가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후보를 지지한 데 대해 "변절자"라며 섭섭한 마음을 표시했다고 민주통합당 박지원 원내대표가 밝혔다.
14일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박 원내대표는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 이 여사가 지난 12일 만찬을 함께한 자리에서 "하나님이 계시는데 어떻게 유신을 한 박 후보가 될 수 있겠느냐"라며 "정권교체를, 민주정부를, 남북관계를 위해서 반드시 문 후보의 당선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그는 "이 여사가 딱히 거명하지는 않았으나 '유신을 겪어본 사람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하는 섭섭함을 표시하면서 이런 일이 있을 때는 항상 변절자가 나오기 마련이다. 그러한 것을 커버하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하라"고 당부했다고 전했다. 박 원내대표는 2004년 한나라당 대표였던 박 후보가 김 전 대통령을 찾아 사과한 것에 대해, "김 전 대통령은 그런 마음으로 국민통합을 이끌어가면 좋은 지도자가 될 것이라는 의미를 전한 바 있으나 박 후보가 대통령이 돼야 한다는 것은 생전에 한 번도 말씀한 적 없다"고 말했다.# 이희호여사가 박근혜를 지지한 동교동계 소수를 변절자라고 하기도했고, 김옥두도 박근혜를 지지한 동교동계를 비판하였다.# 권노갑도 박근혜를 지지한 동교동계를 비판하였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2004년 8월 12일, 김대중도서관에서 이루어졌다. 박근혜는 이 날 면담에서 "아버지 시절 여러 고초를 겪으신 데에 대해 딸로서 사과말씀 드립니다." 라는 말을 남기며, 유신 시절 김대중이 겪었던 피해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의 뜻을 표했다. 김대중은 사과를 받아들이며 "동서화합의 적임자가 되달라" 는 답을 했다. 이때 박근혜의 사과를 상당히 감명깊게 받아들인 모양인지, 2010년 사후 출간된 자서전에서 "박정희가 환생해 화해의 악수를 청하는 것 같았다." 고 당시의 심정을 표현하기도 했다. 다만 덕담수준이었지 보수정당 박근혜가 대통령이 돼야한다는 말은 아니었다.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낸 박지원도 박근혜를 지지한 한화갑, 한광옥을 비판했고,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는 동교동계 일부 인사가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후보를 지지한 데 대해 "변절자"라며 섭섭한 마음을 표시했다고 민주통합당 박지원 원내대표가 밝혔다.
14일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박 원내대표는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 이 여사가 지난 12일 만찬을 함께한 자리에서 "하나님이 계시는데 어떻게 유신을 한 박 후보가 될 수 있겠느냐"라며 "정권교체를, 민주정부를, 남북관계를 위해서 반드시 문 후보의 당선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그는 "이 여사가 딱히 거명하지는 않았으나 '유신을 겪어본 사람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하는 섭섭함을 표시하면서 이런 일이 있을 때는 항상 변절자가 나오기 마련이다. 그러한 것을 커버하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하라"고 당부했다고 전했다. 박 원내대표는 2004년 한나라당 대표였던 박 후보가 김 전 대통령을 찾아 사과한 것에 대해, "김 전 대통령은 그런 마음으로 국민통합을 이끌어가면 좋은 지도자가 될 것이라는 의미를 전한 바 있으나 박 후보가 대통령이 돼야 한다는 것은 생전에 한 번도 말씀한 적 없다"고 말했다.# 이희호여사가 박근혜를 지지한 동교동계 소수를 변절자라고 하기도했고, 김옥두도 박근혜를 지지한 동교동계를 비판하였다.# 권노갑도 박근혜를 지지한 동교동계를 비판하였다.#
- 개명 전 이름의 한자 표기는 金大仲이다. 이름의 '중'은 원래 '버금 중(仲)'이었으나 제5대 국회의원 선거 직후 '가운데 중(中)'으로 개명한 것이다.
- 죽을 고비만 다섯 차례[65] 겪어 본 흔치 않은 이력의 정치인이다. 군사 정권 시절에는 친정부 성향의 언론들로부터 온갖 마타도어에 시달렸으며, 시국사건에 얽혀 징역을 살았다. 이런 DJ 옆에서 같이 정치 생활을 했던 측근들도 고통 분담(?)에 동참, 연혁이 오랜 측근일수록 감옥에 다녀오지 않은 사람이 드물며[66], 김옥두, 한화갑 같은 경우는 김영삼의 측근 김동영과 더불어 고문까지 받은 대표적인 측근 정치인으로 꼽히고 있다. 정치인으로서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인 대통령직까지 수행했지만, 그 도달 과정은 한창 능력을 발휘할 40대 ~ 50대 시기에 정권 차원에서 가한 박해를 감내하는 가시밭길이었던 것이다.[67]
- 김대중의 사생아라고 주장했던 사람이 있다. 김?영. 1970년 당시 7대 국회의원 김대중과 여비서였던 김○애씨(당시 24세) 사이에서 낳은 혼외자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생아라고 주장했던 사람은 2006년 문화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김 전 대통령이 자신의 아버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박정희 정부 시절 인사가 내 어머니에게 (자신을 DJ딸이라고 주장하라고) 시켰다고 생각한다”고 중언부언하며 입장을 번복하였으며, 당사자가 유전자 검식 요청이나 법적 대응 요청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흐지부지되어 사실 여부를 아무도 알 수 없을 듯 하다.
- 평소 반 걸음만 앞서가는 글쓰기를 강조했다. "아무리 하고 싶은 말이 있더라도 너무 앞서가지 마라. 따라오지 않으면 잠시 멈춰서서 들어라. 이해해줄 때 까지 설득하라. 그래서 의견을 맞추라"고 강조한다.
- 그 밖엔 "손을 놓지 마라. 2 ~ 3걸음 앞으로 나서면 마주 잡은 손이 떨어질 것이고, 따라올 수가 없다. 늘 그들 안으로 들어가 읽는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들의 생각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나란히 가서도 안된다. 발전이 없다."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 상고를 졸업하고 일본 대학 진학을 계획했지만, 재정 문제로 장학제도가 매우 잘 갖춰진 만주 건국대학으로 방향을 바꾸어 입학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징병될 가능성이 높아지자, 진학을 포기했다. 건국대학에 진학해도 병역 혜택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으며, 만주 건국대는 오히려 평소에도 학업과 무술 연마, 군사 훈련을 병행했던 터라, 재학생들의 징병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2차 대전 말기 무렵, 미국은 만주에 주둔한 일본 관동군을 견제하기 위해 소련군을 끌어들였으며, 이때까지 만주에서 철수하지 못하고 남아서 부역한 일본인, 한국인 생존자는 대부분 소련군의 포로가 되었다. 이 때문에 대학 진학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평생 한이 남았다고 밝힌 바가 있다. 대선 공보에는 경희대학교 대학원 수료로 표기되어 있는데, 경희대 대학원에서 비학위 과정 1개를 수료하고 1개의 석사 정식 학위 과정을 수료하였다. 다만 논문은 통과하였지만 학위는 받지 못해서 수료 처리가 되었다.[74] 이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2000년에 평화의 전당에서 열린 "경희가족의 날" 행사에서 축하패를 건네기도 했다.
- 평생 정치만 해왔다고 알고있는 사람이 많지만, 소싯적에는 선박 회사와 신문사를 경영한 사람이었다. 덕분에 처음부터 전업 정치인으로 나선 동지 YS(김영삼)보다 경제 현안 파악측면에서 우위에 설 수 있었고, 여기에 DJ 본인이 꾸준한 공부[75]로 시대 조류를 면밀히 파악하고 대응하고자 남다른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76] 그리고 전쟁 후 모든 게 부족하던 시절에 신문사를 운영했기에, 사장(김대중)이 직접 기사를 작성해 올리는 경우도 많았던 덕분에, 상대방 말을 받아적는 습관이 몸에 배었다고 한다. 김영삼이 선친 김홍조 옹의 장례식장에서 "받아적는 것 하면 김대중 아이가?"라며 옛일을 회상했을만큼, 젊은 시절 국회의원 김대중의 상징적인 모습이었다는 후문이다.
- 훗날 미국의 제46대 대통령이 된 조 바이든과 친분이 있었다. 1981년 김대중이 미국으로 망명했을 때부터 인연을 맺었으며, 김대중이 대통령이었던 2001년에 상원 외교위원장 자격으로 방한하여 오찬 자리에서 넥타이를 교환하며 친밀함을 과시했다.[77] 이때 김대중이 준 넥타이에는 국물이 튄 자국이 있었으나, 바이든은 개의치 않고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의 상징으로 받아들이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2009년 김대중 서거 당시 뉴스, 2020년 뉴스 바이든은 한국의 귀빈들을 만날 때마다 이 넥타이를 꼭 맨다고 알려져 있다.
- 기네스북에 이름을 올린 사람이기도 하다. 초선 의원 시절 법안 통과를 저지하기 위해서 표결 직전 의사 진행 방해 발언 필리버스터로 원고 한 장도 없이 무려 5시간 19분 동안 연설했는데, 이는 '세계 최장 시간 국회 연설'로 기록되었다. 반대로 의회 연설 쪽에서는 미국의 상원의원 '제임스 스트롬 서먼드(James Strom Thurmond)'가 24시간 18분 동안이나 연설을 해 최장 시간을 기록했다. 그러나 서먼드는 처음부터 끝까지 관련 내용에 대해서만 연설한 것이 아니라, 할머니의 비스킷 레시피같은 쓸데없는 말로 온갖 꼼수를 총동원해 시간을 끈 것이었다.[78] 후에 더불어민주당이 테러방지법 처리를 최대한 늦춰보려고 필리버스터 카드를 꺼내들었을 때 (기네스북에 등재된 건 아니지만) 김광진 → 은수미 → 정청래 → 이종걸 순으로 이 최장 기록을 갱신했다.
- 2001년 3월, 김대중 전 대통령 방미 당시 갓 취임한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매우 어색한 분위기를 보이며 부시 전 대통령과 대북 관계에 대해 심한 의견 충돌을 보이기도 하였다.[81] 부시 전 대통령은 미국과 합의한 내용을 북한이 지키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 나는 김대중 대통령의 구상을 지지하지만(북한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갖고 있다, 나는 북한의 지도자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라고 하였고, 이에 김대중 전 대통령은 미국이 북한하고 협상하는 문제는 미국이 결정할 문제로써 우리는 지금 당장 해야 한다든가 그런 의견을 표시한 바 없다, 부시 대통령께서는 북한에 대해서 생각을 솔직하게 저한테 말씀해 주셨는데, 그 점은 참고하겠다라고 답하며 서로간의 격한 입장 차만 표명한 채 둘의 어색한 만남은 마무리되었다.[82][83]
- 고향 음식인 홍어를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14대 대선에서 패배하고 1993년 영국으로 떠났을 때에는 동교동계가 흑산도 홍어를 영국으로 공수하는 정성까지 들였다고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홍어를 좋아했던 것과 관련해 일화가 하나 있다. 야당 총재 시절 당직자가 김대중의 심부름으로 목포시의 수산물 시장에서 홍어를 샀는데, 그 당직자가 계산을 한 다음 혼잣말로 "선생님께서 이거 보시면 참 실하다고 좋아하시겠네"라고 말하자 돈을 세던 주인이 깜짝 놀라 혹시 김대중 총재를 이야기한 거냐고 되물었다. 이에 당직자가 맞다고 얘기하자 주인이 황급히 가게 안으로 들어가더니 더 큰 홍어를 가져왔다고.[84]
- 바닷가에서 자라서 어류 요리는 웬만한 미식가 수준으로 잘 알고 있었는데, 상술되었듯 제일 좋아하는 해산물이었던 홍어는 맛만 보고도 신선도를 알아 맞추는 수준이었다고 한다.[85] 또 입맛도 까다로운 편이어서, 홍어가 영 신선하지 않다거나 해서 본인 입에 안 맞으면 관련 담당자들에게 '오늘 홍어는 별로였다'고 꼭 짚고 넘어가곤 했다고 전해진다. # 이 밖에도 설렁탕을 먹을 때는 깍두기 국물을 넣어서 한 그릇을 말끔히 비우곤 했고, 청와대에 들어갔을 때에는 종종 야식으로 라면을 즐겨 찾았다고 한다. 그래서 김 전 대통령의 건강을 염려한 이희호 여사가 김 전 대통령에게 잔소리를 해 야식 메뉴를 견과류로 바꾸었다는 후문이 전해진다. # 그 외에는 중국 요리도 좋아했는데 방우영 조선일보 회장이 자신의 사직동 자택으로 초대했을때도 특별히 중국 음식을 대접했다고 한 걸 보면 정말 좋아한 것 같다. 이유는 종류가 다양하고 맛과 양도 만족스러워서라고 할 만큼 대식가적인 면모도 있었다. 그런데 김정기 전 경호원의 말로는 정작 식사량이 많지는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군것질을 매우 좋아해서, 음식을 조금씩 자주 먹는 성향의 사람이었다고 한다.
- 이러한 식사에 대한 의견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던 박지원 전 국정원장의 경우 조금 다르게 소회하였는데, 김대중 전 대통령을 '대식가'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묘사하였으며, 일례로 빠르게 식사를 마치고 대화를 나누길 원했던 김영삼 전 대통령과 영수회담 당시 식사에 대한 기호가 달랐는지, 면전에서는 칼국수로 식사를 때운 후, 만남이 끝난 다음에는 추가로 식사를 하고 가야겠다며 복국 등의 같은 거한 식사를 '정신없이' 먹을 정도로 대식가의 면모가 있었다고 한다.[86]
- 김정기 전 경호관의 증언에 따르면 아이스크림인 빵빠레를 엄청나게 좋아했다고 한다. 오죽하면 건강 문제 때문에 이희호 여사가 빵빠레를 못먹게 하려고 청와대 인사들에게 남편 빵빠레 금지령을 내렸는데, 당연히 몰래 잘만 먹었다고 한다. 가끔씩은 이희호 여사 앞에서 '나 오늘 빵빠레 먹었다~~!'이러면서 놀리기도 했다고 한다.
- 스트레스 받는 날은 아이스크림 메뉴가 비비빅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스트레스가 풀릴 때 까지 비비빅을 2~3개까지 우적우적 씹어먹었다고 한다. 팥을 좋아해서 비비빅 말고 붕어빵도 좋아했다고 한다.
- 장옥추 전 비서의 음식 일화에 따르면, 식사량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으며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95년도에 프라이드 치킨을 처음 접했을 때 치킨을 처음 맛보고선 점심과 저녁에도 치킨을 찾았다고 한다. 그리고는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 있다며 치킨을 비서진들에게도 하나씩 권했다고 한다. 치킨을 나눠 주면서 꺼내던 말이 '아까운 건데, 정말 맛있다'라며 치킨을 찬양했다고 한다.[87] 퇴임 이후에는 배달 음식을 자주 시켜먹었다고 했는데, 어김없이 치킨은 물론이고 족발도 자주 시켰다고 한다. 라면도 좋아해서, 남편이 라면 먹는 것을 싫어하여 이희호 여사가 외출하는 날이면 오늘은 라면 먹는 날이라고 몰래 라면을 끓여먹었다고 한다. 청와대 입성 이후 주치의가 건강 문제로 라면을 먹지 말라고 한 이후로 라면을 끊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대통령 시절에도 라면을 좋아했다는 말이 있는 걸 보면 계속 즐겨 먹은 듯하다.
-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으로 수감되었을 때도 밥 대신 과자, 빵 등 군것질을 하기도 했다. 후원금이 넉넉했을 것이니 사먹는 것은 문제가 없었을 듯 하다. 그런데 좁은 감방 안에서 달콤한 고칼로리 식품을 많이 먹기만 하니, 정치참여 불이행 서약으로 석방되어 미국으로 출국할 때는 살이 엄청나게 쪄버렸다. 이를 두고 부인 이희호와 동교동계 당원들은 ''(세간에서는) 감옥갔다 오면 고생해서 야위어보이는게 정상이라 여길텐데, 이렇게 살이 쪘으니 호의호식 한줄 알겠다."고 놀리곤 했다고.[88]
- 일각에서는 김대중이 군사정권에게 밉보인 이유가 이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김대중이 박정희에게 맞서 선거에 출마했을 때 유세를 이렇게 해서였다고 한다.군인이 병권을 장악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지금 유럽이나 미국을 보십시오. 그런 선진국들은 민간인이 국방장관이 되어 군대를 지휘합니다.[90] 한국도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 뉴욕한인회장이자 성공한 사업가였던 박지원 전 의원은 1983년 미국 워싱턴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만난 이후 인생이 변하게 되었다. 박지원 전 의원은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큰 감명을 받고는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선생님. 제가 잘못 살아왔습니다. 저의 삶이 부끄럽습니다. 민주화를 위해서 벽돌 하나라도 놓는 그런 생각으로 살겠습니다." 이후 박지원은 국민의 정부가 출범한 뒤 청와대 비서실장을 맡기도 했고 다선 국회의원, 민주당 원내대표, 비대위원장을 거쳐 국민의당 원내대표, 비대위원장, 당대표 등 굵직한 정치 경력을 추가해 왔다.
- 시대적인 배경으로 인해, 그 시절을 산 어르신들이 그렇듯 일본어에 능숙했다. 대통령 재직시절 일본인사와 공식 통역관의 통역을 거쳐 이야기 했는데, 대담이 끝난 후 그 통역관에게 오역한 부분을 지적했다는 후문이 있다. 영어는 감옥에서 영문법 책을 읽으며 독학해, 미국 방송사 ABC의 나이트라인에[91] 봉두완 아나운서와[92] 함께 출연할만큼 실력을 쌓았다. 외국어 어휘를 늘리는 데는 그 나라 문학 작품을 읽는 게 매우 도움된다는 외국어 공부 지론도 갖고 있었다고. 2차례의 외국 망명을 거치며 외국의 주요 인사들을 만났는데, 덕분에 DJ는 대통령 당선 전부터 풍부한 외교 경험을 쌓으며 일가견을 갖게 되었으며, 수십 년에 걸친 민주화 투쟁으로 쌓은 세계적인 지명도를 바탕으로 미국, 중국, 일본 등과 역대 최고의 협력 관계를 유지하였다. 해외 순방을 그리 많이 다닌 것은 아니었지만, 한국 역대 대통령들 중에 김대중만큼 미국, 중국, 일본의 행정수반과 두루 원만한 관계를 가지면서도 주도적인 포지션을 가졌던 자는 없었을 정도로 능수능란한 외교를 했다. 하지만 시대적 한계 때문인지 영어 발음은 그다지 좋지 않고 영어에서 사투리 억양이 나온다. #7분 20초경 부터
- 젝키 팬덤 이야기와 관련해서 나무위키에 조작질 해놓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도 그렇다. 아래와 같이 써놨다.
대통령이었던 시절 손녀가 청와대에서 뮤지컬 '알리바바와 도적들' 를 공연하러 왔던 젝스키스의 매니저에게 맞은 적이 있다. 정작 본인은 못 봤다고 한다.[93] 사실 당시 젝스키스의 소속사는 문제가 많은 기획사로 지금은 망해가는 중이다.
사실관계를 보면 청와대에 공연하러 왔을 때 일도 아니고, 젝키 영화 개봉 때 극장에서 팬들이 저지선을 무너뜨려 제지하는 도중 매니저한테 맞았다고 한다. 매니저 본인이 밝힌 이야기다. 기사
그리고 때린 것이 분명 잘못된 행동이지만, 당시 젝키 팬덤의 행동이 막장인 측면이 컸다. 젝키 멤버의 불알을 잡고 자기 것인 마냥 안 놓은 일도 있고, 달리는 차 뒤에 매달려서 대형사고가 날뻔 한 적도 있고, 한 멤버는 팬들이 계속 쫓아와 울면서 경찰서로 들어가 도와달라 한 적도 있다.[94] 팬들은 막장으로 굴고 그걸 매니저는 때려서 막고 미개했던 시절이다. "문제가 많은 기획사"라고 하는 얘기도 사실관계를 보면 허위 루머가 태반이다. 애초에 망조가 들었다는 것도 소위 말하는 젝키 악성 팬덤이 그리도 싫어하는 창업주 이호연이 사망한 후의 일이고. 자세한 사항은 해당 문서로.
- 역대 대통령 중에 가장 최고령인 나이로 대통령에 취임했다. 취임 당시 나이는 만 74세 1개월. 다만 재임 시점 기준으로 최고령이었던 대통령은 1960년 4월 하야 당시 만 85세였던 이승만 전 대통령이다.[95]
- 2017년 10월, 대한민국 검찰청이 이명박 정부 시절 국정원 심리전단 직원과 보수 단체 관계자가 서로 주고받은 이메일을 입수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뒤에 작성된 이 이메일에는 불법 대북송금 사건을 빌미로 노르웨이 노벨위원회에 김 전 대통령을 폄훼하며 고인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취소해달라는 청원을 넣을 계획이 담겼다고 한다. YTN 보도 게다가 노벨평화상 수상 취소를 위한 사전 공작으로 반독재 인권상이기도 한 라프토상의 수상 취소도 획책했다.경향 보도 이 사실이 알려지자 김 전 대통령의 유지를 잇는 민주당과 국민의당 호남계의 반응은 당연히... 민주당은 "이명박이야말로 정치 보복의 화신이다"라며 비난을 퍼부었고, 박지원 의원은 본인 페이스북에 "천하의 못된 짓은 다 모아 자행한 이명박과 이명박 정부 주동자, 그리고 가담자는 철저히 발본색원해서 처벌해야 한다. 이명박을 당장 구속 수사해야 한다"고 격정적으로 주장했다. # 사실 김영삼 정부 때도 김영삼의 노벨평화상을 위해 김대중의 노벨평화상 수상 반대 공작을 벌인 적이 있다. #
- 전 노벨위원회 위원이었던 군나르 스톨셋(Gunnar Stålsett)을 인터뷰한 2016년 노르웨이의 언론 보도 및 한국의 전 국정원 직원 김기삼 변호사, 미국인 단 커크의 공동 저작물을 노르웨이어로 번역한 오이빈트 스테넬센(Oibind Stenersen)을 인터뷰한 내용에 따르면, 스톨셋 위원장은 김기삼-단 커크의 김대중 노벨상 수상 운동"설"에 대해 "매우 우수한 스파이 스릴러(Exellent spy thriller)"이며 반신반의하면서도, 만약 당시 노벨위원회가 불법 대북송금 사건을 알았더라면 김대중 대통령에게 노벨상은 절대 수여되지 않았을 것이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물론 책 속에 나온 국정원의 노벨상 캠페인들이 김대중의 노벨상 수여에는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97]고 확인사살을 박은 것은 덤이고. 아울러 올라프 노르슈타트 노벨위원회 사무총장은 책 내용에 대해 공상적(Fantastic)이라는 반응을 보였다는 후문이었다.
- 선거 후에 가장 많이 언급되는 대통령이다. 수많은 선거에서 지고, 정계은퇴 선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대통령이 되어서 그런지, 선거 후에 가장 많이 언급이 된다. 이는 보수, 진보정당 가릴 것 없다. 최근에는 장제원이 황교안에 대해 평가하면서 언급하기도 했다.
- 2022년 기준 유일하게 정권 재창출에 성공한 민주당계 정당 출신 대통령이다.
- 서예, 작문, 영화 등 예술에 조예가 깊었던 것과 별개로, 노래는 못 부르는 음치였다.
- 버락 오바마과 닮은 점들이 매우 많다. 우선 김대중이 첫 전라도 + 민주당계 정당[105] 출신 대통령이듯이, 오바마 또한 첫 흑인 출신 대통령이다. 야당 후보로서 자국의 경제위기가 닥친 해의 선거에서 집권 보수여당에 대한 심판론으로 정권교체에 성공했다는 것도 공통적이다. 또 두 사람 모두 각각 종북좌파, 무슬림이라는 의혹에 시달렸지만, 그러한 의혹을 감수하고 각각 북한에 대한 대북 지원과 이슬람 국가 이란에 대한 경제제재 해제를 감행했다는 점도 유사하다. 둘 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이며, 임기 내내 입법부가 여소야대 정국이었다는 점도 공통적이다. 두 사람을 상대한 야당들 또한 각각 전라도인 김대중과 흑인인 오바마에 대한 경상도와 백인들의 전반적인 반감을 이용한 것도 유사하다. 또 두 사람 모두 한차례 더 정권을 연장시키는 데에는 성공하지만[106], 그 다음 대선에서는 기업인 출신의 보수 후보에게 정권을 내어주었다는 점도 동일하다.
-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엄청나게 좋은 몸을 타고났다. 술, 담배를 다 즐긴 데다가 대식가에 추가적으로 대통령 당선 전에도 각종 성인병을 달고 다녔고, 위에 언급된 수감생활과 각종 고문 후유증에 1920년대에 태어났음에도 거의 구순까지 살았으며 심지어 사망 원인의 주는 노무현 전 대통령 자살 이후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은 것이다.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 도전과정 중, DJ에게 의미가 있었던 문화계 사건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 당시 인기가도를 달리는 MBC의 예능 프로그램 일요일 일요일 밤에에 출연한 것. '이경규가 간다' 코너에서 이경규는 예고도 없이 DJ의 자택(동교동 자택이 아닌 일산 자택)을 기습 방문했다. 김대중의 회고에 따르면 아침 운동을 하러 집 대문을 열었더니 이경규와 제작진들이 있었다고.무릎팍도사에서 김영희와 이경규가 밝힌 후기 김대중은 그동안 자신에게 심어졌던 이미지를 180도 바꾸는 데 성공한다. 당시만 해도 기성 정치인들의 예능 프로그램 출연은 대단히 생소한 편이었고, 특히 DJ는 언론에 줄곧 과격, 투쟁, 사상가, 마키아벨리의 이미지로 비춰졌었다. 이 프로그램에서 그는 특유의 유머 감각을 발휘하여 프로그램이 끝날 때까지 옆에서 김영희의 웃는 모습이 그치지 않을 정도로 이경규를 들었다 놨다 했다.[107] 몰래카메라를 의심하는 부분이 백미. 이로 인해 김대중은 앞서 말한 강한 이미지를 희석하고 인간적이고 유머있는 이미지를 만들 수 있었다. DJ는 이게 고마웠는지 나중에 <이경규에서 스필버그까지>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DJ의 재택근무 비서였던 장성민의 증언에 따르면, 김영희가 사고를 친 것을, 이경규가 일산의 DJ 자택까지 동행해 방송이 나갈 수 있도록 도운 것이라고 한다. 방송이 나간 후 박지원 대변인이(훗날 청와대 비서실장)이 “DJ의 정치인생 40년 가운데 웃는 모습이 TV로 나간 것은 처음”이라며 고마워 했다는 후문이다.
둘째, KBS에서 절찬리에 방영되는 사극 용의 눈물에서 "이방원"이 탄 말에 DJ라는 인장이 지워지지 않은채 방영되는 방송사고가 일어났다. 사실, 진짜 방송사고가 맞았지만[108], 언론들이 한 마디씩 하는 바람에.. → 파장이 갈수록 커졌다. 배추머리 김병조 같은 거물도 말 한 마디(망한나라당)에 방송인 생활이 끝나는 등 '오독고'가 아직 과한 시대였던터라, 언론에서 주목할수록 드라마 관계자의 속이 바싹 타들었다고 한다.
한편 1997년에는 체험 삶의 현장에 출연해서 직접 일한 적도 있었다. 일의 종류는 남대문시장에서의 옷 판매.
임기 첫해인 1998년, 한국관광공사의 대한민국 홍보영상에 직접 출연하기도 하였다.
첫째, 당시 인기가도를 달리는 MBC의 예능 프로그램 일요일 일요일 밤에에 출연한 것. '이경규가 간다' 코너에서 이경규는 예고도 없이 DJ의 자택(동교동 자택이 아닌 일산 자택)을 기습 방문했다. 김대중의 회고에 따르면 아침 운동을 하러 집 대문을 열었더니 이경규와 제작진들이 있었다고.무릎팍도사에서 김영희와 이경규가 밝힌 후기 김대중은 그동안 자신에게 심어졌던 이미지를 180도 바꾸는 데 성공한다. 당시만 해도 기성 정치인들의 예능 프로그램 출연은 대단히 생소한 편이었고, 특히 DJ는 언론에 줄곧 과격, 투쟁, 사상가, 마키아벨리의 이미지로 비춰졌었다. 이 프로그램에서 그는 특유의 유머 감각을 발휘하여 프로그램이 끝날 때까지 옆에서 김영희의 웃는 모습이 그치지 않을 정도로 이경규를 들었다 놨다 했다.[107] 몰래카메라를 의심하는 부분이 백미. 이로 인해 김대중은 앞서 말한 강한 이미지를 희석하고 인간적이고 유머있는 이미지를 만들 수 있었다. DJ는 이게 고마웠는지 나중에 <이경규에서 스필버그까지>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DJ의 재택근무 비서였던 장성민의 증언에 따르면, 김영희가 사고를 친 것을, 이경규가 일산의 DJ 자택까지 동행해 방송이 나갈 수 있도록 도운 것이라고 한다. 방송이 나간 후 박지원 대변인이(훗날 청와대 비서실장)이 “DJ의 정치인생 40년 가운데 웃는 모습이 TV로 나간 것은 처음”이라며 고마워 했다는 후문이다.
둘째, KBS에서 절찬리에 방영되는 사극 용의 눈물에서 "이방원"이 탄 말에 DJ라는 인장이 지워지지 않은채 방영되는 방송사고가 일어났다. 사실, 진짜 방송사고가 맞았지만[108], 언론들이 한 마디씩 하는 바람에.. → 파장이 갈수록 커졌다. 배추머리 김병조 같은 거물도 말 한 마디(망한나라당)에 방송인 생활이 끝나는 등 '오독고'가 아직 과한 시대였던터라, 언론에서 주목할수록 드라마 관계자의 속이 바싹 타들었다고 한다.
한편 1997년에는 체험 삶의 현장에 출연해서 직접 일한 적도 있었다. 일의 종류는 남대문시장에서의 옷 판매.
임기 첫해인 1998년, 한국관광공사의 대한민국 홍보영상에 직접 출연하기도 하였다.
"한국이 변하고 있습니다. 오셔서 새로운 한국을 만나십시오."
위의 프로필에서 봤듯이 생전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세례명은 토마스 모어. 원래는 특별한 종교를 두지 않았고, 김대중의 부모 역시 그 시대 여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유교(성리학)를 신봉했기에 김대중도 그 영향을 따랐으나,[109] 정치 신인이던 1957년, 은사이자 독실한 가톨릭 정치인이었던 장면 세례자 요한과의 인연으로 가톨릭 세례성사를 받게 되었고,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당시 장면의 세력이었던 민주당 신파 정치인들은 보스 장면의 영향을 받아 가톨릭 신자가 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김대중도 이 중 1명이었다.
참고로 세례를 서울대교구 약현성당에서 받았는데, 당시 세례를 주었던 신부가 "교회를 위해 순교할 마음으로 정치하며 살아가시오!"라며 토머스 모어를 세례명으로 정해주었다고 한다.[110] 김대중 본인은 처음 세례명을 전해들은 순간 "하필 목 잘린 사람 이름을 지어주시나...?'' 싶어 깜짝놀랐다고 한다.[111] 이 세례명대로 김대중은 이후 파란만장한 정치 여정을 걷게 됐다.
군사독재 시절에는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 정의구현사제단 등 민주화 운동에 동참했던 가톨릭 인사들과 교류하며 지냈고, 미국 망명을 떠난 이후에도 미국 성당에 꾸준히 출석했다. 1997년 대통령 당선 이후에는 김수환 추기경이 직접 명동성당에서 축하미사를 봉헌했다. 당시 대선에서 함게 경쟁했던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도 함께 참석했는데, 이 두 사람이 함께 미사에 나온 건 김수환 추기경의 요청 때문이었다고 한다. 청와대에 있는 와중에도 신부가 꾸준히 방문하여 미사를 집전했고, 퇴임한 이후에는 자택 근처 서교동 성당에 다니며 신앙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다보니 2009년 사망 당시 장례 방식도 거의 가톨릭식으로 치러졌다. 이외에도 가톨릭계에서 직접 각 성당에 빈소를 마련했고,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의 집전으로 명동성당에서 장례 미사를 치러주기도 했었다.[112] 참고로 김대중은 임종 직전 자신이 다니던 서교동성당 신부로부터 병자성사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원불교와도 인연이 깊은데, 제13대 대통령 선거 후보 시절인 1987년 11월 24일에 익산시에 위치한 원불교 중앙총부를 내방하여 당시 종법사인 대산 김대거로부터 '중산(中山)'이라는 호를 받기도 했다. 그 외에도 1994년 3월 17일에는 원광대학교에서 한국 대학 첫 명예정치학박사를 받았다. 또한 총무처에 지시해 원불교 교정원장을 15대 대통령 취임식 단상으로 올려 의전해줬다. 즉, 원불교가 정부 행사에서 4대 종교로 참여할 수 있도록 큰 협력을 해준 셈이다. 대통령 취임 후 2001년 8월에는 부산원음방송, 9월에 서울원음방송[113]을 개국하도록 협력해줬다. #1 #2
참고로, 영부인 이희호 여사의 종교는 개신교(감리회)이다. 혼인성사를 받을 당시 특별히 관면을 본 듯 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살아생전 같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서로의 신앙을 존중하며 살아왔고, 김대중은 이희호의 교회 행사나 기도회 등을 같이 다녔다. 또한 매년 열린 김대중의 도쿄 납치 사건 생환 기념 미사때도 두 부부는 늘 함께 참석해서 기도했다. 김대중과 김홍일, 김홍업은 가톨릭, 이희호와 김홍걸은 창천교회에 다녔다. 에큐메니컬 운동의 가장 모범적인 가족의 예.[114]
이러한 김대중의 영향으로 민주당계 정당 정치인들은 가톨릭 신자가 상당히 많다. 박지원, 정동영 등이 동교동계 합류 이후 김대중을 따라 가톨릭에 입교한 대표적인 경우다. 또한 가톨릭이 1970-80년대 민주화 운동을 지원했기 때문에 이에 영향을 받아 세례를 받은 민주/진보 정치인들이 많다.
반면 보수정당에는 개신교 신자가 많은데, 이는 민주당 구파의 수장이었던 조병옥과 그를 계승한 김영삼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현재 한국 최대 보수정당인 국민의힘에는 김영삼 손을 잡고 정계에 진출한 정치인이 매우 흔하다. 한편 보수정당에는 불교 신자도 흔한데, 이는 보수정당이 불교색이 강한 영남을 기반으로 두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보수정당에도 이회창, 오세훈, 이준석 등 가톨릭 신자가 존재한다.
참고로 세례를 서울대교구 약현성당에서 받았는데, 당시 세례를 주었던 신부가 "교회를 위해 순교할 마음으로 정치하며 살아가시오!"라며 토머스 모어를 세례명으로 정해주었다고 한다.[110] 김대중 본인은 처음 세례명을 전해들은 순간 "하필 목 잘린 사람 이름을 지어주시나...?'' 싶어 깜짝놀랐다고 한다.[111] 이 세례명대로 김대중은 이후 파란만장한 정치 여정을 걷게 됐다.
군사독재 시절에는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 정의구현사제단 등 민주화 운동에 동참했던 가톨릭 인사들과 교류하며 지냈고, 미국 망명을 떠난 이후에도 미국 성당에 꾸준히 출석했다. 1997년 대통령 당선 이후에는 김수환 추기경이 직접 명동성당에서 축하미사를 봉헌했다. 당시 대선에서 함게 경쟁했던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도 함께 참석했는데, 이 두 사람이 함께 미사에 나온 건 김수환 추기경의 요청 때문이었다고 한다. 청와대에 있는 와중에도 신부가 꾸준히 방문하여 미사를 집전했고, 퇴임한 이후에는 자택 근처 서교동 성당에 다니며 신앙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다보니 2009년 사망 당시 장례 방식도 거의 가톨릭식으로 치러졌다. 이외에도 가톨릭계에서 직접 각 성당에 빈소를 마련했고,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의 집전으로 명동성당에서 장례 미사를 치러주기도 했었다.[112] 참고로 김대중은 임종 직전 자신이 다니던 서교동성당 신부로부터 병자성사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원불교와도 인연이 깊은데, 제13대 대통령 선거 후보 시절인 1987년 11월 24일에 익산시에 위치한 원불교 중앙총부를 내방하여 당시 종법사인 대산 김대거로부터 '중산(中山)'이라는 호를 받기도 했다. 그 외에도 1994년 3월 17일에는 원광대학교에서 한국 대학 첫 명예정치학박사를 받았다. 또한 총무처에 지시해 원불교 교정원장을 15대 대통령 취임식 단상으로 올려 의전해줬다. 즉, 원불교가 정부 행사에서 4대 종교로 참여할 수 있도록 큰 협력을 해준 셈이다. 대통령 취임 후 2001년 8월에는 부산원음방송, 9월에 서울원음방송[113]을 개국하도록 협력해줬다. #1 #2
참고로, 영부인 이희호 여사의 종교는 개신교(감리회)이다. 혼인성사를 받을 당시 특별히 관면을 본 듯 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살아생전 같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서로의 신앙을 존중하며 살아왔고, 김대중은 이희호의 교회 행사나 기도회 등을 같이 다녔다. 또한 매년 열린 김대중의 도쿄 납치 사건 생환 기념 미사때도 두 부부는 늘 함께 참석해서 기도했다. 김대중과 김홍일, 김홍업은 가톨릭, 이희호와 김홍걸은 창천교회에 다녔다. 에큐메니컬 운동의 가장 모범적인 가족의 예.[114]
이러한 김대중의 영향으로 민주당계 정당 정치인들은 가톨릭 신자가 상당히 많다. 박지원, 정동영 등이 동교동계 합류 이후 김대중을 따라 가톨릭에 입교한 대표적인 경우다. 또한 가톨릭이 1970-80년대 민주화 운동을 지원했기 때문에 이에 영향을 받아 세례를 받은 민주/진보 정치인들이 많다.
반면 보수정당에는 개신교 신자가 많은데, 이는 민주당 구파의 수장이었던 조병옥과 그를 계승한 김영삼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현재 한국 최대 보수정당인 국민의힘에는 김영삼 손을 잡고 정계에 진출한 정치인이 매우 흔하다. 한편 보수정당에는 불교 신자도 흔한데, 이는 보수정당이 불교색이 강한 영남을 기반으로 두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보수정당에도 이회창, 오세훈, 이준석 등 가톨릭 신자가 존재한다.
생전에 모은 책들이 있는 서재가 통째로 도서관이 될 정도로 독서를 즐겼고, 이를 바탕으로 적지 않은 수의 책들을 집필했다. 이를 두고 김종필은 김대중을 김영삼과 비교하며 '김영삼이 읽은 책보다 김대중이 쓴 책이 더 많을 것이다'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자신의 생각을 쓴 책부터 맨 마지막 자서전까지 차곡차곡 저서들을 썼지만 그중에서도 자서전이 주목할 만한데, 일부 다른 대통령의 그것처럼 변명으로 일관되지도 않았고, 심지어는 본인의 치부가 될 수 있는 출생 이야기까지[115] 솔직하게 꺼냈다. 물론 정치인의 자서전이니만큼 각도의 문제가 있지만 매우 솔직한 것에는 틀림없다.
- <분노의 메아리> (1967년)
- <내가 걷는 70년대> (1970년)
- <독재와 나의 투쟁> (1973년, 일본어판)
- <김대중 옥중 서신> (1984년)
- <행동하는 양심으로> (1985년)
- <대중경제론> (1986년, 한•영어판)
- <민족의 새벽을 바라보며> (1987년)
- <공화국 연합제> (1991년)
- <한국 : 민주주의의 드라마와 소망> (1992년)
- <세계 경제 8강으로 가는 길> (1992년)
- <한국의 통일> (1993년)
-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1993년)
- <나의 길 나의 사상> (1994년)
-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넬슨 만델라 자서전)(1994년) - 번역서
- <김대중의 21세기 시민 경제 이야기> (1997년)
- <나의 삶 나의 길> (1997년)
- <대중참여경제론> (1997년)
- <내가 사랑한 여성> (1997년)
- <이경규에서 스필버그까지> (1997년)
-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1998년)
- <김대중 자서전 - 역사와 함께 시대와 함께> (1999년)
- <경천애인> (2002년)
- <21세기와 한민족> (2004년)
- <통일지향의 평화를 향하여> (2007년)
- <김대중 자서전> (2010년)
- <김대중 육성 회고록> (2024년)[116]
DJ는 당대의 일류 달변가이며 연설가였다. 직설적이고 강하게 정의를 호소하는 연설에도 뛰어났으며 독재 정권에 아부하는 관료를 주례 서는 신부에 비유한다거나, 미국이 아폴로 호를 발사할 때 그런 사람들도 달나라에 보냈으면 좋겠다는 발언 등 재치있는 유머를 사용해서 시사를 비판하는 연설 방식도 사용했으며 굉장히 호평을 받았다. 아래의 글을 보듯이 수많은 숱한 어록을 남겼다. 대표적인 명언을 제외하고는 연도 순으로 정리한다.
실사구시(實事求是)
DJ: (시간이)얼마나 걸립니까?비서실장: 한 3 ~ 4시간 걸립니다.DJ: 책이 한 권이요, 책이! 그걸로 책을 한 권 읽을 수 있어요.골프를 배워보라는 권유에 답한 말.
삼촌네 호떡도 맛있어야 사먹는 법입니다.
논리의 검증을 거치지 않은 경험은 잡담이며, 경험의 검증을 거치지 않는 논리는 공론이다.[119]
통합을 하려면 상대에게 내 것을 다 준다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70%를 주고 30%를 갖는다는 마음으로 해야 가능하다.[120]
행동하는 양심이 됩시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입니다.2009년 연세대 김대중 도서관에서 열린 '6.15 남북 공동성명' 9주년 기념 행사 연설 中[121][122]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의 연설.
내가 정권을 잡으면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 세금을 많이 내고 적게 버는 사람은 적게 내는 동시에 돈이 많다고 해서 나라나 사회의 형편도 생각지 않고 사치와 낭비하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부유세와 특별세를 받는 일대 조세혁명을 단행할 것을 공약합니다.1971년 4월 18일 김대중 신민당 대통령 후보 장충단 공원 연설 중
“민주주의는 쿠데타나 암살로 되는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국민의 힘으로 이뤄야 진정한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는 결코 이기주의나 무질서가 아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법을 무시하고 남의 자유와 권리를 해치는 일이 용인될 수 없다."2001년 3.1절 기념식 연설에서 #
봉두완: (토론 종료 직전에) 지금까지 김대중 씨가 말한 인권 유린은 박정희 정권 때의 일이다. 전두환 정권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 전두환 정권은 모든 인권을 보장하고 있다. 어떤 형태의 인권 유린도 없다.김대중: 지금까지 한국 정부의 인권 유린에 관해 내가 한 말은 나의 개인적인 주장이 아닙니다. 국제사면위의 82년도 보고서에 있는 것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리고 또 정부의 미국 국무성 82년도 인권 보고서에도 그대로 적혀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은 당신네 정부가 보증합니다.1983년 10월, 감옥 복역(80~82) 당시 영어를 독학[126],테드 카풀이 진행하는 심야 뉴스 프로그램 <나이트라인(Nightline)>에서 5공 정부를 대표한 패널 봉두완과 영어로 토론을 하기도 했다. 1994년 미 의회에서 이북측에서도 신뢰할만한 대북 특사 파견 필요성을 설득하는 연설도, 영어로 원고를 작성해 40여분간 진행한 것이었다고.
민주주의는 절대 공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어느 역사를 보나 민주화를 위해서는 희생과 땀이 필요하다.저서 '옥중서신'(1984년) 중에서.
전진해야 할 때 주저하지 말며 인내해야 할 때 초조하지 말며 후회해야 할 때 낙심하지 않아야 한다.옥중서신 중에서.
두렵지 않기 때문에 나서는 것이 아닙니다. 두렵지만,나서야 하기 때문에 나서는 것입니다. 그게 참된 용기 입니다.1987년 9월 8일 광주 그랜드 호텔 간담회에서.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127] 자유가 들꽃처럼 만발하고, 통일에의 희망이 무지개같이 떠오르는 나라를 만들 것입니다.
국민은 언제나 승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마지막 승리자는 국민입니다.1993년 출간된 저서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중에서
과거 독재 정권의 통치를 받으면서 반독재투쟁을 하다가, 갓 해방된 나라의 지도자들과 대화를 해보면 (...중략...) 아마도 독재 치하에서 하도 억압을 받으며 할 말을 못하고 살았기 때문에 자기 주장을 먼저 피력하려는지도 모릅니다. 대화란 아예 존재할 수도 없는 환경에서 살아온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보아 왔습니다.
(...중략...)
노태우 대통령은 한때는 말을 많이 듣는 편이었으나, 차츰 자신이 말을 더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세 사람 중에 제일 나은 편이었을 것입니다.
군사정권 사람뿐만 아닙니다. 그들과 싸운 재야인사나 학생들과 대화를 해보거나, 그들의 회의 장면을 보면, 정말 말을 많이 합니다. 한 번은 10여 명의 재야인사들과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한 분이 말을 하기 시작하더니 장장 한 시간을 계속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내가 매우 좋게 생각하는 사람이어서 허물없이 농담을 했습니다. "무슨 말을 그렇게 길게 합니까? 나 같으면 그 말을 10분이면 하겠소. 그리고 민중 민중 하는 분들이 왜 그렇게 민중이 알아먹기 힘든 어려운 말을 사용합니까?"해서 유쾌한 폭소가 터진 일이 있습니다.김대중의 저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중
가장 대화가 힘든 상대는 운동권 학생이나 노동자 대표들입니다. 매우 이성적이고 이쪽 말을 경청하는 사람도 많지만, 상당수는 자기 주장만이 옳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사람은 타락했고 반동이라는 식으로 단정하곤 하여 참 어이가 없었던 경우가 많습니다. (중략) 민주주의를 위해서 독재와 싸운다는 사람들이 남에게 말할 권리를 주지 않고, 내 주장만 한다는 것은 하나의 비극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김대중의 저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중
(1) 토인비는 도전과 응전의 틀을 가지고 인간의 역사를 해석했습니다. (중략) 살다 보면 역경도 만나고 순경도 만나는 게 인생입니다. 늘 고난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역경이라도 잘 대처하면 득이 되고, 순경이라도 잘못 사용하면 독이 됩니다. 일반적으로 볼 때는 아무리 힘들고 감당하기 벅찬 삶이라 하더라도 극복하지 못할 역경은 없는 법입니다. (중략)(2) 나는 주역에 대해 왈가왈부할 만큼 잘 알지는 못합니다. 다만 만물은 음(陰)과 양(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음(陰)이 있고 양(陽)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음(陰) 속에 양(陽)이 있고 양(陽) 속에 음(陰)이 있으며 그것이 음양설의 핵심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가만히 살펴보면, 도저히 헤쳐 나갈 수 없어 보이는 역경도, 지나고 나면 그렇게 힘든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3) 그리고 대응 여하에 따라서는 오히려 그것이 큰 이득을 가져오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가 하면 커다란 행운이 굴러 들어온 것으로 알고 기뻐했던 일이 오히려 불행의 씨를 잉태하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대응을 잘못해 복이 화근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말일 것입니다.(4) 결국 우리의 대응 여하에 따라 행과 불행이 결정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삶으로 찾아오는 순경과 역경을 마음대로 선택하여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어떠한 경우라도 슬기롭게 대처하여 역경을 순경으로 만들거나 그 피해를 최소화 하는 것입니다. 또 순경을 잘 활용하여 성공의 길로 나가며 좋은 환경의 유혹에 끌려 자기 자신이 타락하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자세는 항상 이러한 마음의 자세와 최선의 준비를 갖추고 기다리는 것 뿐입니다.저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1993)> 내용 중[128]
(1) 미국이 다른 나라는 그냥 두고 대한민국만 경제적 식민지로 만들 계획을 세운 걸까요? 만일 우리가 미국에 예속되어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 책임은 우리에게 더 많이 있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 기업인들이 외자와 시설재를 도입할 때, 정부와 결탁하여 외국의 시설재 판매 기업에 요구하여 도입 가격을 늘리고, 허술한 물건을 불리한 조건으로 반입해 온 경우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2) 1천만달러짜리 시설을 1천3백만 달러로 늘려 계약해 가지고 3백만 달러를 빼돌리는 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계를 싸게 사올 수도 없고, 애프터 서비스도 제대로 못 받고, 로열티도 비싸게 주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러니 물건 값을 깎을 대로 깎고 좋은 시설을 유리한 조건으로 사들인 나라들과 경쟁해서 못 이길 것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중략...)(3) 어찌하여 여러분은 우리 정부와 기업인의 잘못은 덮어두고 일방적으로 미국이나 일본을 비난할 수 있습니까? 국민 다수는 나의 이러한 주장에 전적으로 공감하고 있습니다. 국민이 받아들이는 주장을 해야 합니다.1993년 회고록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174쪽 ~ 175쪽. 일부 재야 인사들의 과격한 반미 주장에 대해 답한 말.
정치 안해요, 제가 안해요. 이건 내 문제니까 내가 안하는거요 누가 날 강제로 시킨다는거요.
우리나라(한국)가 외세의 침략을 많이 받았는데, 그 요인 중 하나가 내부 분열 때문이에요. 구한말을 보세요. 서재필 박사는 개화로 가자, 녹두장군 전봉준은 외세를 배제하자 했지만, 두 분 다 봉건 체제를 타파하자고 했어요. 개혁을 하자는 입장에서 보면 서재필과 전봉준이 다르지 않아요. 그리고 서로 비슷한 시대를 살았어요. 그런데 한 번도 서로 만나 생각을 교환하지 못했어요. 만일 두 사람이 만났더라면, 우리의 역사가 달라졌을지도 몰라요. 나는 김일성 주석이 살아 있을 때 꼭 대좌를 해서 우리 민족의 진운을 논의해 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안 돼서 안타까운 심정이에요.
죄송합니다. 그 부분은 제가 할 말이 없습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지, 거짓말을 한 적은(= 상대를 속이려 든 적은) 없습니다.거짓말쟁이라는 비난에 대해 DJ가 답한 요지.[134]
국민이 주인대접을 받고 주인역할을 하는 참여민주주의가 실현되어야 하겠습니다. 저는 '국민에 의한 정치' '국민이 주인되는 정치' 를 국민과 함께 반드시 이루어내겠습니다.1998년 2월, 제15대 대통령 취임사 연설 중
올 한 해 동안 물가는 오르고 실업자는 늘어날 것입니다. 소득은 떨어지고 기업의 도산은 속출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지금 땀과 눈물과 (머뭇) 고통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중략) 잘못은 지도층들이 저질러놓고 고통은 죄 없는 국민이 당한 것을 생각할 때 한없는 아픔과 울분을 여러분과 같이 금할 길이 없습니다.1998년 2월, 제 15대 대통령 취임사 연설 중
대한민국 건국은 공산주의자들의 극단적인 반대 속에 이루어졌습니다. 그 당시 우리 국민은 상상 이상으로 침착하게 대응해서 압도적인 투표율로 대한민국의 제헌 국회의원을 선출시켰습니다. 그때 UN에서는 한국의 선거를 시찰하러 왔습니다. 시찰단은 전국을 돌아본 결과 국민의 압도적인 참여와 질서정연한 선거를 보고 어떠한 문제도 제기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남한만 선거하는 데 대해 별로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던 사람들도 국민의 의사가 우선 가능한 지역에서 정부수립을 하겠다는 데에 일치했습니다. UN은 대한민국 수립의 과정이 모두 합법이고 국민의 의사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보고함으로써 우리는 UN의 승인을 받고, 공산권을 빼놓고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던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출발부터 이렇게 가혹한 도전에 성공적으로 응전해서 세워진 것입니다.
(중략)
우리는 이렇게 닥쳐오는 시련을 극복해 나라를 세우고, 위기에서 조국을 지키고, 폐허에서 경제를 재건하고, 권위주의로부터 민주정부를 세우는 위대한 일을 한 것입니다. 도전에 훌륭하게 응전한 역사를 가진 우리 국민이 얼마나 자랑스럽습니까.1998년 8월 14일, '대한민국 50년 - 참으로 위대한 50년만의 민주적 정권교체' 연설문 일부.
용 그려놓고 눈 안 그린 격입니다.
민주주의는 공것이 없습니다. 민주주의는 대가없이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토마스 제퍼슨이라는 사람이 미국 3대 대통령인데, 그 사람이 "민주주의는 국민의 피와 땀을 먹고 산다." 이런 말을 했어요. 땀도 내가 붙인 거 같네요. 피라고 했어요. 여러분들한테 질문 공세를 받고 나니까, 좀 머릿속에 흐릿해진 거 같아요. 아무튼 그것이 바로 우리나라에서 증명되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까. 광주에서, 전국 도처에서 그랬습니다. 나도 사형언도를 받아가지고 집행 직전에 살았습니다. 감옥살이도 한 6년 했습니다. 망명, 연금생활도 10년 이상 했습니다. 이건 자랑도 아닙니다. 얼마나 이 많은 분들이 이 광주에서 또 목숨을 바쳤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한국 민주주의는 뿌리가 튼튼한 겁니다. 이제는 어떤 군부의 사람도, 어떤 독재자도 한국서 민주주의를 안 하고는 못 배깁니다. 다시 군사 쿠데타 하는 것은 꿈도 못 꿉니다. 우리는 3번 독재자를 극복했습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을 상대로 투쟁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결국 민주주의 반석에 올랐습니다. 최근에 일본을 보면 일본이 급격히 우경화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일본 사람들이 자기 손으로 민주주의를 안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전후에 군국주의를 하다가, 갑자기 항복을 하고 나서 맥아더가 들어와서 민주주의를 하라고 하니까 민주주의를 한 겁니다. 그래서 일본은 민주주의의 주체세력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과거의 군국주의 시대의 세력이 다시 부활한 겁니다. 그래서 지금 보면 그런 군국주의 세력들이 판을 치고 있고 "민주주의를 지켜야 한다, 군국주의 방향으로 가서는 안 된다. 이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오늘에 이르러서야 그런 거는 말도 안 먹힙니다.
전쟁을 일으키고 전쟁범죄를 한 것을 국민한테 교육을 안 시켰습니다. 그래서 국민들은 지금 5, 60대 이하의 사람들은 과거를 전혀 모릅니다. 그러니까 우리 조선반도를 점령해가지고 조선 사람들을 도와줬다. 중국에서 남경대학살을 했던 것은 다 거짓말이다. 우리는 대동아 전쟁을 해가지고 아시아 사람들을 서구 식민지로부터 해방시켜줬다. 지금만이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가 더 문제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앞으로 한국하고도 중국하고도 동남아시아 나라들하고도 갈등을 할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 "민주주의가 공것이 없다" 는 것을 일본을 볼 때 참으로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우즈베키스탄 학생이 그 질문하는 심정을 이해하고, 참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데 우즈베키스탄도 민주주의 하는 것은 결국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이 해야 합니다.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거기에는 민주주의를 위해서 희생을 바칠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국민의 권위를 유도해야 합니다. 우리도 4.19혁명, 학생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국민이 전부 합세했습니다. 또 우리가 그 87년 민주항쟁 때도, 처음에는 학생, 정치인들이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결국 국민 전체가 참여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국회가 보는 눈도 달라져서 독재자들에게 압력을 가해서 "이박사 이승만 전 대통령 보고 하야해라. 전두환한테 계엄령 선포 못 한다." 이렇게 해서 압력이 가해진 것입니다. 결국 시작은 우리가 해야 하고 희생을 우리가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국민이 전부 참여하고 세계가 우리를 도와주게 됩니다. 우즈베키스탄도 그럴 것입니다. 중앙아시아 모든 나라가 그럴 것입니다. 또 그것은 반드시 그렇게 하리라고 봅니다.
경제가 발전되면 중산층이 생깁니다. 중산층이 생기면 중산층은 자유를 요구하고 참정을 요구합니다. 투표권을 요구하고 또 피선거권을 요구하게 됩니다. 안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영국은 산업혁명을 하고 나서 중산층이 생겼습니다. 중산층들이 그런 요구를 하니까 영국 귀족들이 선선히 내줬습니다. 그래서 영국은 평화혁명이 되었습니다. 프랑스는 귀족들이 말을 안 듣다가 대혁명이 일어나서 전부 몰살당했습니다. 이거는 어디서든지 같습니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공것이 없다는 것. 피와 땀과 눈물을 흘려야 한다는 것. 그리고 마침내 국민이 동조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 그렇게 하면 민주주의는 성공한다는 것. 그렇게 해서 이룩한 민주주의는 결코 흔들림 없이 뿌리를 박을 수 있다는 것. 그러지 않고 외세나 우연에 의해서 민주주의를 하면, 그런 것은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 이것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중공의 근대화 목표는 20세기 말까지 경제적 선진 국가의 대열에 끼는 것이라 하지만 그들의 참 내심은 21세기에 가서 미국과 소련을 앞서 문자 그대로 중화대국이 되는 것일 것입니다. 이것은 중국의 역사와 중국 사람의 의식 구조에 비추어 능히 추측할 수 있는 말입니다."1982년 9월 23일에 밝힌 중국의 장래에 대한 의견. #
한국은 국민들의 피와 땀으로 민주주의를 일궜습니다. 한국은 이제 민주주의의 튼튼한 뿌리 위에서 세계의 큰 봉우리가 될 것입니다. 반면 일본은 민주주의를 스스로 일구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일본은 군국주의에 사로잡혀 급격히 우경화되고 주변국과 큰 갈등을 일으킬 것입니다.
2009년 1월1일 동교동 김대중 도서관에서 열린 신년인사회에서.
인생은 생각할수록 아름답고 역사는 앞으로 발전한다.2009년 1월 7일 그의 마지막 일기장에서.
우리 모두 우리의 '위대한 지도자', '영웅', '쾌남아' 노무현 대통령을 역사에 영원히 살리도록 노력합시다.
전쟁은 40대 이상의 장년층이 일으키고, 전쟁터에서는 20대가 죽는다. 앞으로 전쟁이 일어나면 40대 이상을 전선으로 보내자.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 연설 중에서[139]
그에 비해 역사적으로 일본과 한국의 관계가 불행했던 것은 약4백년전 일본이 한국을 침략한 7연간과 금세기 초 식민지배 35연간 입니다. 이렇게 50년도 안되는 불행한 역사 때문에 1천5백년에 걸친 교류와 협력의 역사 전체를 무의미하게 만든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또한 이는 그 장구한 교류의 역사를 만들어 온 우리 두 나라의 선조들에게, 그리고 장래의 후손들에게 부끄럽고 지탄받을 일이지 않겠습니까.
...(중략)...
우리 양국이 좋은 이웃, 좋은 친구로서 함께 손잡고 21세기를 개척해 나가는데 극복하지 못할 장애는 없을 것입니다. 오직 두 나라 정부와 국민들의 강력한 실천의지가 요청될 뿐입니다. 1,500년에 걸친 한, 일 교류의 역사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우리 양국은 깊고도 오랜 교류의 역사만큼이나 폭넓고 활발한 협력의 역사를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세계화를 지향하는 우리 모두의 미래는 양국 국민의 우호와 친선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번 나의 일본방문이 이러한 양국의 국민적 기대와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여, 21세기의 한, 일 동반자관계를 구축하는 튼튼한 초석이 될 것을 바라 마지 않습니다.1998년 10월 8일, 일본 국회 연설서.
빌 클린턴: 햇볕정책이 무엇입니까?
DJ: 햇볕정책은 우리가 독창적으로 만든 게 아닙니다. 미국에서 이미 검증된 정책입니다. 중국이 화해-협력을 하니깐 개방을 하고 나왔습니다. 러시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주의 국가는 강공으로 몰아칠수록 꽁꽁 빗장을 닫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햇볕을 쬐면 국제 사회로 나옵니다. (햇볕정책은)미국이 이미 검증을 한 정책입니다.
빌 클린턴 : (경청 후..) 제가 조수석에 앉겠습니다. 남북관계는 김 대통령께서 운전석에 앉으십시오.1998년 6월, 한-미 정상회담 자리에서[140]
"지금 북한은 변화의 방향으로 가고 있다. 우리는 개혁·개방을 향한 북한의 변화 노력을 적극 지원해야 한다. 올해는 한반도의 냉전구조를 해체하고 평화를 구축하기 위한 전기를 마련해야 한다. 이를 위해 미국과의 협력을 강화하고 한·미·일 3국 공조를 더욱 긴밀하게 유지하며 중국·러시아와의 우호관계를 확고히 지속해 나갈 것이다"2001년 3.1절 기념식 연설에서 #
박복한 민족이고, 천추의 한이다.대통령 퇴임 후 예방한 민주당 의원들에게 했던 말. 미국-북한, 일본-북한 수교 지원을 시작으로, 종래에는 북한의 핵 불능화, 남북불가침선언, 정전협정의 평화협정 전환, 남북철도를 연결하는 것을 최종 목표로 했던 김대중-클린턴 구상이, 조지 워커 부시 대통령의 당선으로 무산되었던 일에 대한 아쉬운 심정을 토로한 것이다.[141]
“동북아 정세는 제2차 냉전시대를 지향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1차 냉전이 미·소 대립이었다면 2차 냉전은 미·일 대(對) 중·러인데 그 사이에 한국이 1차 냉전 때와 같이 주무대가 되는 상황으로 가는 게 아닌가, 또 한번 우리가 시련 속에 있지 않나 걱정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북한 핵을 둘러싼 북한과 미국의 대치, 일본의 우익 아베 정권 출범, 중국의 동북공정 등으로 한반도 주변정세가 어지럽습니다. 최근의 동북아 정세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라는 기자의 질문에 대한 대답. 경향신문. 2006년 10월 DJ “美·中과 협력하되 할말은 제대로 해야”
미국은 악을 행한 자와는 대화할 수 없다고 하지만, 아이젠하워는 1953년 북한과 전쟁중에 대화를 해서 휴전협정을 성립시켜 오늘날까지 한반도에서 50년의 평화를 유지하게 만들었습니다. 닉슨은 중국을 찾아가 모택동을 만났습니다. 그 결과 중국을 개혁, 개방으로 유도해 오늘날 변화를 가져오게 만들었습니다. 레이건은 소련을 악마의 제국이라고 비판했지만, 그 악마와 대화해 소련을 개혁·개방으로 유도하여, 오늘의 민주화를 실현시켰습니다. 대화는 친구를 사귀는 것이 아닙니다. 국가 이익이나 세계평화에 필요하면 악마와도 대화를 해야 합니다. 오늘의 한반도 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당사자는 미국과 북한입니다. 그 당사자가 대화하지 않고 어떻게 이 문제가 해결 되겠습니까?2006년 10월 18일, 세계지식포럼에서, 내용전문(11번째 문단부터)
북한의 핵야욕에 대한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는 세 가지의 선택 가능성이 있다. 첫째, '군사력'을 사용하는 방법이 있다. 그러나 중국, 한국, 러시아뿐 아니라 일본조차도 이에 대해 반대하고 있고, 북한이 군사적 공격에 대해 저항할 경우 한반도에서는 한국전쟁 이후 또다시 참혹한 재앙을 겪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한국 국민들은 이 같은 재앙을 겪을 가능성에 대해 확고히 반대하는 입장이다. 두 번째로는, '경제적 징계'조치로 평양정권의 숨통을 죄어서 넘어뜨리는 방법이다. 그러나 북한은 궁핍함도 견딜 수 있음을 입증해 보였다. 그리고 그 경우 중국이 원조를 거부한 채 북한을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궁지에 몰린 북한이 군사 기술을 팔아 넘기려는 유혹을 느끼게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징계의 효율성은 의문의 여지가 있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대화'만이 유효한 선택 가능성으로 남는다... 좋든 싫든 북한체제는 중국 또는 베트남의 자취를 따라 변화해 가고 있다. 지금까지 '속도는 느리지만 돌이킬 수 없는 변화의 움직임'이다. 대화를 하며 접촉 및 교류 기회를 확대하는 것만이 신뢰의 분위기를 만듦으로써 개방을 촉진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외부로부터 강요될 수 없다. 북한에서든 다른 어느 곳에서든.2007년 프랑스 르몽드지와의 인터뷰에서.#
국난극복과 재도약의 새 시대를 엽시다오늘 저는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에 취임하게 되었습니다. 정부수립 50년만에 처음 이루어진 여야간 정권교체를 여러분과 함께 기뻐하면서 온갖 시련과 장벽을 넘어 진정한 `국민의 정부'를 탄생시킨 국민 여러분께 찬양과 감사의 말씀을 드리는 바입니다.
그리고 저의 취임을 축하하기 위해 이 자리에 함께 해주신 김영삼 전임 대통령, 폰 바이체커 독일 전대통령, 코라손 아키노 필리핀 전대통령,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IOC위원장 등 내외 귀빈을 비롯한 참석자 여러분께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오늘 이 취임식의 역사적인 의미는 참으로 크다고 할 것입니다. 오늘은 이 땅에서 처음으로 민주적 정권교체가 실현되는 자랑스러운 날입니다. 또한 민주주의와 경제를 동시에 발전시키려는 정부가 마침내 탄생하는 역사적인 날이기도 합니다.
이 정부는 국민의 힘에 의해 이루어진 참된 `국민의 정부'입니다. 모든 영광과 축복을 국민 여러분께 드리면서 제 몸과 마음을 다바쳐 봉사할 것을 굳게 다짐하는 바입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우리는 3년후면 새로운 세기를 맞게 됩니다. 21세기의 개막은 단순히 한 세기가 바뀌는 것만이 아니라 새로운 혁명의 시작을 말합니다. 지구상에 인간이 탄생한 인간혁명으로부터 농업혁명, 도시혁명, 사상혁명, 산업혁명의 5대혁명을 거쳐 인류는 이제 새로운 혁명의 시대로 들어서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는 지금 유형의 자원이 경제발전의 요소였던 산업사회로부터 무형의 지식과 정보가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지식정보사회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정보화혁명은 세계를 하나의 지구촌으로 만들어 국민경제시대로부터 세계경제시대로의 전환을 이끌고 있습니다. 정보화 시대는 누구나, 언제나, 어디서나, 손쉽고 값싸게 정보를 얻고 이용할 수 있는 시대를 말합니다. 이는 민주사회에서만 가능합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문명사적 대전환기를 맞아 새로운 도전에 전력을 다하여 능동적으로 대응해야 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중차대한 시기에 우리에게는 6.25이후 최대의 국난이라고 할 수 있는 외환위기가 닥쳐왔습니다.
잘못하다가는 나라가 파산할지도 모를 위기에 우리는 당면해 있습니다. 막대한 부채를 안고 매일같이 밀려오는 만기외채를 막는데 급급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나마 파국을 면하고 있는 것은 애국심으로 뭉친 국민 여러분의 협력과 국제통화기금, 세계은행, 아시아개발은행, 그리고 미국, 일본, 캐나다, 호주, EU국가 등 우방들의 도움 덕택입니다.
올 한해 동안 물가는 오르고 실업은 늘어날 것입니다. 소득은 떨어지고 기업의 도산은 속출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지금 땀과 눈물과[142] 고통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도대체 우리가 어찌해서 이렇게 되었는지 냉정하게 돌이켜 봐야 합니다. 정치,경제, 금융을 이끌어온 지도자들이 정경유착과 관치금융에 물들지 않았던들 그리고 대기업들이 경쟁력없는 기업들을 문어발처럼 거느리지 않았던들 이러한 불행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잘못은 지도층들이 저질러놓고 고통은 죄없는 국민이 당하는 것을 생각할때 한없는 아픔과 울분을 여러분과 같이 금할 길이 없습니다. 이러한 파탄의 책임은 장래를 위해서고 국민 앞에 마땅히 분명하게 밝혀져야 한다고 저는 이 자리에서 강조해서 마지 않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오늘의 어려움 속에서도 국민 여러분께서는 놀라운 애국심과 저력을 발휘하셨습니다. 우리는 IMF시대의 충격속에서도 여야간 평화적 정권교체의 위업을 이룩하였습니다.
국민 여러분은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금 모으기'에 나섰고 이미 20억달러가 넘는 금을 모아 주셨습니다. 저는 황금보다 더 귀중한 국민 여러분의 애국심을 한없이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한편 우리 근로자들은 자기 생활의 어려움도 무릅쓰고 자발적으로 임금을 동결하는 등 고통분담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기업은 수출에 전력을 다함으로써 지난 3개월간 연속해서 큰 규모의 경상수지 흑자를 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한국인의 애국심과 저력에 대해 세계가 경탄하고 있습니다.
노동자와 사용자 그리고 정부는 대화를 통해 대타협으로 국난극복의 주춧돌을 놓았습니다. 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입니까. 저는 이 일을 이루어낸 노.사.정 대표 여러분께 국민과 함께 큰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국회의 다수당인 야당 여러분에게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오늘의 난국은 여러분의 협력없이는 결코 극복할 수 없습니다. 저도 모든 것을 여러분과 같이 상의하겠습니다. 나라가 벼랑끝에 서있는 금년 1년만이라도 저를 도와주셔야 하겠습니다. 저는 온 국민이 이를 바라고 있다고 믿습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지금 이 나라는 정치, 경제, 사회, 외교, 안보 그리고 남북문제 등 모든 분야에서 좌절과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총체적인 개혁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무엇보다 정치개혁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국민이 주인대접을 받고 주인역할을 하는 참여민주주의가 실현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만 국정이 투명하게 되고 부정부패도 사라집니다.
저는 `국민에 의한 정치' `국민이 주인되는 정치'를 국민과 함께 반드시 이루어내겠습니다.
`국민의 정부'는 어떠한 정치보복도 하지 않겠습니다. 어떠한 차별과 특혜도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다시는 무슨 지역 정권이니 무슨 도 차별이니 하는 말이 없도록 하겠다는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정부가 고통분담에 앞장서서 효율적인 정부를 만들겠습니다. 중앙정부에 집중된 권한과 기능을 민간과 지방자치단체에 대폭 이양하겠습니다.
그러나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데에는 더욱 힘쓰겠습니다. 환경을 보존하고 복지를 증진시키는데 적극 노력하겠습니다.
`작지만 강력한 정부', 이것이 `국민의 정부'가 지향하는 목표입니다.
`국민의 정부'가 당면한 최대의 과제는 우리의 경제적 국난을 극복하고 우리 경제를 재도약시키는 일입니다. `국민의 정부'는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 병행시키겠습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동전의 양면이고 수레의 양바퀴와 같습니다. 결코 분리해서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다같이 받아들인 나라들은 한결같이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거부하고 시장경제만 받아들인 나라들은 나치즘 독일과 군국주의 일본에서 보여준 바와 같이 참담한 좌절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들 나라도 2차대전후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같이 받아들여 오늘과 같은 자유와 번영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조화를 이루면서 함께 발전하게 되면 정경유착이나 관치금융, 그리고 부정부패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저는 우리가 겪고 있는 오늘의 위기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병행해서 실천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먼저 물가를 잡아야 합니다. 물가안정 없이는 어떠한 경제정책도 성공할 수 없습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똑같이 중시하되 대기업은 자율성을 보장하고 중소기업은 집중적으로 지원함으로써 양자가 다같이 발전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철저한 경쟁의 원리를 지켜나갈 것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품질좋고 가장 값싼 상품을 만들어 외화를 많이 벌어들이는 기업인이 존경받는 나라를 만들겠습니다.
기술입국의 소신을 가지고 21세기 첨단산업시대에 기술강국으로 등장할 수 있는 정책을 과감히 추진해 나가겠습니다.
벤처기업은 새로운 세기의 꽃입니다. 이를 적극 육성하여 고부가가치의 제품을 만들어 경제를 비약적으로 발전시켜야 합니다. 벤처기업은 많은 일자리를 창출해서 실업문제를 해소하는데도 크게 이바지할 것입니다.
`국민의 정부'가 대기업과 이미 합의한 5대 개혁, 즉 기업의 투명성, 상호지급보증의 금지, 건전한 재무구조, 핵심기업의 설정과 중소기업에 대한 협력, 그리고 지배주주와 경영자의 책임성 확립은 반드시 관철될 것입니다.
이것만이 기업이 살고 우리의 경제가 다시 도약할 수 있는 길입니다. 정부는 기업의 자율성을 철저히 보장하겠습니다. 그러나 기업의 자기개혁 노력도 엄격히 요구할 것입니다.
`국민의 정부'는 수출 못지않게 외국자본의 투자유치에 힘쓰겠습니다. 외자유치야말로 외채를 갚고 국내기업들의 경쟁력을 강화하며 우리 경제의 투명성을 높이는 가장 효과적인 길입니다.
농업을 중시하고 특히 쌀의 자급자족은 반드시 실현시켜야 합니다. 농어가 부채경감, 재해보상, 농축수산물 가격의 보장, 그리고 농촌 교육여건의 우선적 개선 등 농어민의 소득과 복지를 향상시키기 위한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겠습니다.
애국심과 의욕에 충만한 자랑스러운 국민 여러분과 같이 올바른 경제개혁을 추진해 나간다면 우리 경제는 오늘의 난국을 반드시 극복하고 내년 후반부터는 새로운 활로를 개척해 나갈 수 있다고 저는 확실히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저를 믿고 적극 도와주십시오. 국민 여러분의 기대에 반드시 부응해내겠습니다.
국민 여러분!
건강한 사회를 위한 정신의 혁명이 필요합니다. 인간이 존중되고 정의가 최고의 가치로 강조되는 정신혁명 말입니다. 바르게 산 사람이 성공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실패하는 그런 사회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합니다. 고통도 보람도 같이 나누고 기쁨도 함께 해야 합니다. 땀도 같이 흘리고 열매도 함께 거둬야 합니다.
저는 이러한 정신혁명과 바른 사회의 구현에 모든 것을 바쳐 앞장서겠습니다. 노인이나 장애인들도 일할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일을 주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따뜻하게 감싸주어야 합니다. 저는 소외된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한숨짓는 사람에게 용기를 북돋아주는 그런 `국민의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우리 민족은 높은 교육수준과 찬란한 문화적 전통을 가진 민족입니다. 우리 민족은 21세기의 정보화사회에 큰 저력을 발휘할 수 있는 우수한 민족입니다.
새 정부는 우리의 자라나는 세대가 지식정보사회의 주역이 되도록 힘쓰겠습니다. 초등학교부터 컴퓨터를 가르치고 대학입시에서도 컴퓨터 과목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세계에서 컴퓨터를 가장 잘 쓰는 나라를 만들어 정보대국의 토대를 튼튼히 닦아나가겠습니다.
교육개혁은 오늘날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는 핵심적인 과제입니다. 대학입시제도를 획기적으로 개혁하고 능력위주의 사회를 만들겠습니다. 청소년들은 과외로부터 해방되고 학부모들은 과중한 사교육비로부터 벗어나게 하겠습니다. 지식과 인격과 체력을 똑같이 중요시하는 지.덕.체의 전인교육을 실현시키겠습니다.
이러한 교육개혁은 만난을 무릅쓰고라도 반드시 성취하겠다는 것을 저는 이 자리를 빌려 굳게 다짐합니다.
우리는 민족문화의 세계화에 힘을 쏟아야 합니다. 우리의 전통문화속에 담겨있는 높은 문화적 가치를 계승 발전시키겠습니다. 문화산업은 21세기의 기간산업입니다. 관광산업, 회의체산업, 영상산업, 문화적 특산품 등 무한한 시장이 기다리고 있는 부의 보고입니다.
중산층은 나라의 기본입니다. 봉급생활자, 중소기업 그리고 자영업자 등 중산층이 안정되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겠습니다.
`국민의 정부'는 여성의 권익보장과 능력개발을 위해서 적극 힘쓰겠습니다.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직장에서나 남녀차별의 벽은 제거되어야 합니다.
청년은 나라의 희망이자 힘입니다. 그들을 위한 교육과 문화, 그리고 복지의 향상을 위해서 정부는 아낌없는 지원대책을 세워 나가겠습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21세기는 경쟁과 협력의 세기입니다. 세계화 시대의 외교는 냉전시대와는 다른 발상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21세기 외교의 중심은 경제와 문화로 옮겨갈 것입니다. 협력속에 이루어지는 무한경쟁시대를 헤쳐나가기 위해 무역, 투자, 관광, 문화교류를 확대해 나가겠습니다.
우리의 안보는 자주적 집단안보가 되어야 합니다. 국민적 단결과 사기넘치는 강군을 토대로 자주적 안보태세를 강화하겠습니다. 동시에 한미안보체제를 더욱 굳건히 다지는 등의 집단안보를 결코 소홀히 하지 않겠습니다. 한반도에서의 평화구축을 위해 4자회담을 반드시 성공시키는데 적극 노력하겠습니다.
남북관계는 화해와 협력 그리고 평화정착에 토대를 두고 발전시켜 나가야 합니다.
분단 반세기가 넘도록 대화와 교류는 커녕 이산가족이 서로 부모형제의 생사조차 알지 못하는 냉전적 남북관계는 하루빨리 청산되어야 합니다. 1천3백여년간 통일을 유지해온 우리 조상들에 대해서도 한없는 최책감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남북문제 해결의 길은 이미 열려 있습니다. 1991년 12월 13일에 채택된 남북기본합의서의 실천이 바로 그것입니다. 남북간의 화해와 교류협력과 불가침, 이 세가지 사항에 대한 완전한 합의가 이미 남북한 당국간에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것을 그대로 실천만 하면 남북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하고 통일에의 대로를 열어나갈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북한에 대해 당면한 3원칙을 밝히고자 합니다.
첫째, 어떠한 무력도발도 결코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둘째, 우리는 북한을 해치거나 흡수할 생각이 없습니다. 셋째, 남북간의 화해와 협력을 가능한 분야부터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갈 것입니다.
남북간에 교류협력이 이루어질 경우 우리는 북한이 미국, 일본 등 우리의 우방국가나 국제기구와 교류협력을 추진해도 이를 지원할 용의가 있습니다.
새 정부는 현재와 같은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경수로 건설과 관련한 약속을 이행할 것입니다. 식량도 정부와 민간이 합리적인 방법을 통해서 지원하는데 인색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북한 당국에 간곡히 호소합니다. 수많은 이산가족들이 나이들어 차츰 세상을 떠나고 있습니다. 하루빨리 남북의 가족들이 만나고 서로 소식을 전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 점에 관해서 최근 북한이 긍정적인 조짐을 보이고 있는 점을 예의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문화와 학술의 교류, 정경분리에 입각한 경제교류도 확대되기를 희망합니다.
저는 남북기본합의서에 의한 남북간의 여러 분야에서의 교류가 실현되기를 바랍니다. 우선 남북기본합의서의 이행을 위한 특사의 교환을 제의합니다. 북한이 원한다면 정상회담에도 응할 용의가 있습니다.
새 정부는 해외동포들과의 긴밀한 유대를 강화하고 그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서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우리는 해외동포들이 거주국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다하면서 한국계로서 안정과 긍지를 가질 수 있도록 적극 돕겠습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지금 우리는 전진과 후퇴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고난을 딛고 힘차게 전진합시다. 국난극복과 재도약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갑시다.
반만년 역사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조상들의 얼이 우리를 격려하고 있습니다.
민족수난의 굽이마다 불굴의 의지로 나라를 구한 자랑스러운 선조들처럼 우리 또한 오늘의 고난을 극복하고 내일에의 도약을 실천하는 위대한 역사의 창조자가 됩시다. 오늘의 위기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읍시다.
우리 국민은 해낼 수 있습니다. 6.25의 폐허에서 일어선 역사가 그것을 증명합니다. 제가 여러분의 선두에 서겠습니다. 우리 다같이 손잡고 힘차게 나아갑시다. 국난을 극복합시다 재도약을 이룩합시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의 영광을 다시 한 번 드높입시다.
감사합니다.1998년 2월 25일 대한민국 대통령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처럼 파란만장한 한국 현대사를 장식한 인물이기 때문에 그를 다룬 드라마도 많다. 다만 삼김시대를 제외하면 모두 그가 야인이거나 야당 총재 시절에 방영된 작품이어서 그런지 JP, YS와는 달리 전문 배우가 없다.
- 극장판 짱구는 못말려: 폭발! 온천 부글부글 대작전(한국판 기준 2000, 2008)
- 1983년 에모리 대학교 명예 법학 박사
- 1992년 미국 가톨릭 대학교 명예 법학 박사
- 1994년 원광대학교 명예 정치학 박사
- 1995년 포틀랜드 주립 대학교 명예 인문과학 박사
- 1996년 시드니 대학교 명예 법학 박사
- 1998년 조지타운 대학교 명예 인문과학 박사
- 1998년 경희대학교 명예 경제학 박사
- 1998년 고려대학교 명예 경제학 박사
- 1998년 워시번 대학교 명예 인문과학 박사
- 2001년 케임브리지 대학교 명예 법학 박사
- 2002년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명예 문학 박사
- 2006년 영남대학교 명예 정치학 박사
- 2006년 전남대학교 명예 인문과학 박사
- 2006년 공주대학교 명예 교육학 박사
- 2007년 전북대학교 명예 법학 박사
- 2007년 리츠메이칸대학 명예 법학 박사
- 2008년 포틀랜드 대학교 명예 인문과학 박사
- 2008년 말라야 대학교 명예 인문과학 박사
- 1981년 - 브루노 크라이스키 인권상
- 1987년 - 미국 노동총연맹산업별회의(AFL-CIO) 인권상(조지 미니상)
- 1987년 - 북미주 한국인권연합 인권상
- 1993년 - 한국애서가클럽 애서가상
- 1994년 - 미국 유니온신학대학교 유니온메달
- 1998년 - 국제인권연맹 인권상
- 1998년 - 무궁화 대훈장
- 1998년 - UN 인권협회 인권상
- 1999년 - 미국 필라델피아 자유의 메달
- 2000년 - 라프토 인권상
- 2000년 - 국제평화상
- 2000년 - 노르웨이 라프토 인권상
- 2001년 - 세계정치지도자상
- 2002년 - 국제행동을 위한 의원연합의 민주주의 수호자상
- 2003년 - 늦봄통일상
- 2003년 - 제7회 만해상
- 2003년 - 칠레 대십자 훈장
- 2006년 - 코리아 소사이어티 선정 밴플리트상
- 2007년 - 제1회 자유상(베를린 자유대학)
- 2011년 - 제1회 동학농민혁명대상
자세한 내용은 노벨상/한국의 분야별 현황 문서
를
참고하십시오.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54 | 전남 2[168] | 3,391 (9.98%) | 낙선 (공동 3위) | |||
1959 | 강원 15[169] | 8,483 (28.13%) | 낙선 (2위) | |||
1960 | 6,538 (30.98%) | |||||
1961 | 7,698 (36.50%) | 당선 (1위) | 초선[171] | |||
1963 | 전남 3[172] | 22,513 (56.10%) | 재선[173] | |||
1967 | 29,279 (56.28%) | 3선 | ||||
1971 | 5,395,900 (45.25%) | 낙선 (2위) | ||||
4,969,050 (44.28%) | 당선 (2번) | 4선[174] | ||||
1987 | 6,113,375 (27.04%) | 낙선 (3위) | ||||
1988 | 3,783,279 (19.26%) | 당선 (11번) | 5선 | |||
1992 | 6,004,578 (29.17%) | 당선 (1번) | 6선[175] | |||
8,041,284 (33.82%) | 낙선 (2위) | |||||
1996 | 4,971,961 (25.30%) | 낙선 (14번) | ||||
1997 | 10,326,275 (40.27%) | 당선 (1위) |
역대 선거 벽보[178] |
소속 | 기간 | 비고 |
1945 | 입당 | |
1945 - 1946 | 정당 해산 | |
1946 | 입당 | |
1946 - 1947 | 탈당[183] | |
1947 - 1949 | 입당 | |
1949 | 탈당 | |
1949 | 입당 | |
1949 - 1956 | 정계 입문 | |
민정당 ( 무소속 ) | 1956 | 창당준비위원회 |
1956 | 이탈 | |
1956 - 1961 | 입당 | |
1961 - 1963 | 정당 해산[184] | |
1963 - 1965 | 창당 | |
1965 - 1967 | 합당[185] | |
1967 - 1969 | 합당[186] | |
1969 | 자진 정당 해산 | |
1969 - 1972 | 정당 재등록 | |
1972 - 1987 | 탈당[187] | |
1987 | 창당[188] | |
1987 | 탈당[189] | |
1987 - 1991 | 창당 | |
1991 | 당명 변경 | |
1991 - 1995 | 합당[190] 정계 은퇴 정계 복귀 | |
1995 | 탈당[191] | |
1995 - 2000 | 창당 | |
2000 - 2002 | 합당[192] | |
2002 - 2009 |
[A] 의원직 상실[B] 홍천군·인제군[3] 1923년 음력 12월 1일. 신분상 공식적으로 아직까지는 1926년 1월 6일인데 사망 당시 생년월일이 기사마다 제각각으로 보도하여 김대중 측근에서 1924년 1월 6일로 통일적으로 표기해달라고 부탁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통계시스템에는 1925년 12월 3일생으로 되어 있는데, 음력 1925년 12월 3일이 양력으로 1926년 1월 16일에 해당하므로 양음력 변환 과정에서 어떤 이유로 오류가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943년 당시 강제 징용을 피하기 위해 아버지와 상의 끝에 생년월일을 1925년 12월 3일로 정정했다고 자서전에 기록되어 있었던 걸 보면 1924년생(음력으로는 1923년생)임이 거의 확실시된다.[4] 원적은 신안군 하의면 대리. 인근의 오림리와 함께 김해 김씨 집성촌이며 이곳에 선영이 있다.[5] 생전 거주지. 동교동계의 뜻이 바로 이 집이다.[6] 안경공파 14세손. 증조부 김태현(金台鉉), 조부 김제호(金濟浩), 아버지 김운식(金雲植)이 각각 경파(京派) 17세손, 18세손, 19세손 항렬자를 사용한다.[7] 개명전 이름은 장노도(張鹵島)다.[8] 1927년 4월 28일생으로, 1945년 김대중과 결혼하였으나 1959년 6월 25일 지병으로 사망했다.[9] 2019년에 사망했다.[10] 차용애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로 어린 나이에 요절했다.[11] 지금의 목포북교초등학교.[12] 경희대학교 창립자 및 초대총장의 특별 배려로 학사 학위 동등의 수준을 인정받고 동 대학원 정식 석사 학위 과정에 진학하여 1969년 학위 논문을 제출하고 1970년 수료하였으나 학위는 취득하지 못하였다. 다만 대중경제론 논문은 정식 접수되어 수료처리 되었다. #[13] 경희대 석사 수료 논문을 기반으로 모스크바대 박사과정에 바로 진학해 러시아 외무부 산하 아카데미에서 논문을 제출하고 심사 통과 후 정치학 박사 학위를 정식 취득했다. 엄연히 명예 성격이 아닌 정식 학술 박사 학위에 해당한다. ##[14] 일제강점기 강제징집을 피하기 위해 해운회사에 입사하여 근무하면서 광복 이후에도 '고령으로 인한 징집면제' 판정을 받을 수 있었다. 면제 판정 시점에는 이미 중견 해운사의 대표로 재직하고 있었다.[15] 6.25 전쟁 당시 해군목포경비부 예하의 해상방위대 전남지구 부대장으로 전투 일선에 참여했다고 본인이 주장했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전역 후 신민당에 입당했다가 미국으로 이민을 간 송인명 예비역 해병준장의 증명서가 있다. 링크의 첫번째 사진 참조. 그리고 김대중의 해상방위대 근무 및 청년단 활동에 대한 증언을 종합한 기사에서 송인명 준장의 증언에 따르면, 김대중은 당시 목포상선회사 대표로 재직 중이라 배를 여러 척 가지고 있어 해상방위대 부(副)대장으로 참여했다고 한다. 상기 링크에 나온 증명서도 송인명 준장이 직접 서명 후 전달했으며, 김대중은 신문사도 운영하는 등 목포 주민들과 다방면으로 협조 중이던 해군경비부와 우호적인 관계였다고 한다. 송인명 준장은 해병대 창설 멤버이나, 6.25 전쟁 당시엔 목포경비부사령관 직위에 있었으므로 이 증언은 신빙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 해군은 김대중이 해군에서 복무한 기록이 없었으며, 해당 증명서가 해군 내에서 작성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그리고 해군역사기록관리단을 통해 확인한 결과, 목포해상방위대에 대해 보관 중인 내용이 없어서 창설 시기, 규모, 지휘관, 기타 등을 찾을 수 없다고 답변했다. 이는 본부 직할인 해군역사기록관리단을 통해 얻은 결과이므로 해군본부 및 민원처리담당자 개인의 단독적인 의견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러나 위의 기사 내용처럼 목포경비부 연혁사 39쪽에 그 기록이 나왔다는 것과, 당시 사령관이었던 송인명 해병준장이 직접 증언했다는 점에서 실존하는 조직일 가능성이 크며, 목포경비부 조직도 내에 표기되지도 않았고, 해군으로 공식 보고가 올라갈 정도의 큰 활동(전공)도 없었으나, 엄연히 목포 현지에서 해군에 협력을 했던 의용 선박대인 것으로 추정된다.[16] 김대중의 대부가 바로 장면 전 국무총리이었다. 김대중은 비교적 늦은 나이인 33세에 가톨릭에 입문하였으며,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일부 민주당계 의원들 및 그의 대부분의 측근들은 그에 대한 존경심으로 가톨릭으로 개종하거나 가톨릭을 접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현재의 더불어민주당의 약 30% 이상 되는 의원들이 가톨릭 신자이다.[17] 출처[18] 호는 '후광(後廣)'으로 그의 고향인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에서 따와 지은 것이다.[19] 초암 김연 선생이 차린 서당으로, 소학, 천자문 등을 가르쳤다고 한다.[20] 입학 당시 수석으로 입학했다. 입학 당시 기사[21] 군 논란에 중심에 서기도 했고 한때 아예 없는 단체라고 거짓말을 했다는 주장이 나왔으나 실제로 목포해상방위대가 한국전쟁 개전후 약1년간 존재하긴 했었다. 해병대장교 송인명이 목포경비부 사령관으로 부임했을 당시 군과 경찰만으로 9월 인천상륙작전이 시행된 이후 갓 수복된 전남지역의 치안유지와 공산잔당들의 소탕에 어려움이 있다고 판단되어 여성단체와 일반민간단체를 징발했었는데 그중엔 김대중이 운영했었던 상선업체도 포함되어있었다. 때문에 지역 유지였던 오재균에 지시하여 오재균이 목포해상방위대 대장을, 김대중을 부대장에 임명하고 목포해안내 치안유지와 공산잔당 소탕이라는 공산세력의 후방교란차단 임무를 맡게되었다. 징발된 단체라는 점에서 군조직이 아닌 민간자경단에 가까운 조직이었고 조선시대로 치면 의병에 가까운 조직이라고 보면될거같다. 이후 51년 3월자로 후방해상이 안정이되자 목포경비부는 해상방위대가 쓰던 건물을 인수하고 자경단조직을 징발해제하여 단체가 1년정도 존재하다가 해체되었다.[22] 당시 기사[23] 당시 기사[24] 인제군[25] 61.05.13~05.15 임기 3일 5.16 군사정변으로 국회 강제해산[26] 목포시.[27] 비학위과정[28] 비학위 과정. #[29] 경희대 창립자이자 초대회장의 특별 배려로 1967년 상술한 경희대 대학원 비학위 최고위과정을 수료한 후 1969년 김대중은 경희대 대학원 학위 취득을 위한 논문으로 「대중경제의 한국적 전개를 위한 연구 - 한국경제의 구조개혁을 위한 서설」 을 제출하여 1969-1970년 석사를 수료했다. 조갑제의 주장에 의하면, 김대중은 1987년 관훈클럽 토론회 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경희대 경영대학원을 나왔고 경희대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쳤습니다. 다만 대학을 정식 졸업 안 했기 때문에 석사 학위는 받지 못했습니다.” # # # #[30]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외교대학원에서 논문(한국 사회에서의 민주주의, 진보원칙의 발생 및 발전에 관하여(1945~1991))을 제출하고 구두시험을 거쳐, 정식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출처: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1993)>, 203 ~ 210쪽). 명예박사가 아니고 엄연히 정식 박사이다. 다만 조갑제의 주장에 의하면, 당시 그 ‘논문’이라는 것은 정식 학위 논문의 요건을 갖춘 것이라기보다는, 광복 후 한국정치에 대한 김대중의 생각을 적은 책자였고, 모스크바대학 측은 ‘평생을 한국 민주화에 헌신해온 세계적인 인권운동가’로서의 김대중의 업적을 감안해 학위를 수여했다고 한다. #[31] 직전 대통령[32] 최초의 민주당계 정당 소속 대통령은 제4대 대통령 선거에서 국회의 간접 선거로 선출된 윤보선이다. 다만 이때는 의원내각제라서 윤보선은 상징적 국가원수에 불과했다. 대통령제에선 김대중이 최초이다.[33] 김대중이 일본으로 잠시 피신가 있었을 때의 인터뷰를 보면 민주주의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자유가 필요하다고 언급했기에 김영삼과 같이 자유주의를 지향했었다.[34] 92년 대선 패배 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수학하면서 3가지 주제(제3의 길, 지리와 국가 발전의 상관관계, 영국 명예혁명사)를 고민해보았다고 한다. 무엇보다 제3의 길을 주창한 영국 석학 앤서니 기든스(1938년생)가 한창 활동 중이라 관련 자료, 정보를 구하는 것도 쉬웠다.[35] 다만 문재인은 사회·문화 정책을 보면 실제로는 인터넷 검열감시법 시행 사태, 마인크래프트 미성년자 이용 불가 사태 등 김대중보다 더 사회보수주의적인 성향이 짙었다.[36] DJ 본인만 용서하는 게 아니라, 영국 명예혁명 사례를 들어 지지자들을 설득하려 노력하기도 했다. 영국인들은 쫓겨난 제임스 2세의 망명길을 사실상 막지 않았고, 프랑스에 거점 세력을 마련해 손자대까지 왕권 수복을 꾀했는데도, 이를 손대지 않고 자연스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도록 놔두었다는 것. 그러면서 정치 보복 대신 당사자가 명예 회복을 하는 게 더 낫다는 것과, 악행을 저지른 이들은 그에 상응하는 명예의 손상이 이뤄지는 정도면 된다는 일종의 선까지 제시하였다.[37] 2013년 12월 5일 2014 브라질 월드컵 조 추첨식 하루전에 세상을 떠났다.[38]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자유주의적 성향도 보였으나 보수주의적 성향이 더 부각된다. 물론 김대중 대통령은 평소 스스로를 온건보수주의자로 규정한 만큼 일각의 오해와 달리 진보 정치인이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시대 보수 정치인 중에서는 자유주의적 행보를 보였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39] 여성정책의 법적 근거가 되는 여성발전기본법 제정과 여성발전기금 설치, 여성할당제(여성채용목표제) 등은 앞선 문민정부 때에 만들어졌다.[40] 물론, IT산업 진흥 덕분에 나중에 대한민국이 IT산업 상위권에 올라갈 수 있도록 초석을 마련해주었었다.[41] 99년은 남북관계의 전환점인 2000년 베를린선언과 남북정상회담 이전이었다.[42] 반(反)김대중 파벌 중 왜곡론자들이 색깔론으로 김대중을 자주 공격했지만 정작 김대중은 자신을 몇 번이나 구해준 미국과의 관계를 우선시했었다. 그래서 한총련과 같이 종북관을 가진 시민단체들에게는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으며 본인도 과거 한국전쟁 당시에 인민군에게 죽을 뻔한 경험이 있었고, 해군 조직에 협력해 한국전쟁을 지원한 사실이 있었으므로 평화주의를 선호하기는 했으나 공산주의는 절대로 좋아하지 않았다. 이는 한국논단에서 주최한 대선후보 토론회에서 잘 드러났다. 햇볕정책을 펼쳤다고 무조건 북한에 우호적일 거라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김대중은 6.25 전쟁을 회상하며 남한 사람들이 공산당의 실체를 알고 정말 반공의식을 갖게 된 것은 6.25 전쟁 때문이라고 북한의 만행을 지적했으며, 박정희랑 대선싸움 당시에도 국민들 앞에서 말한 연설문을 보면 "남북관계 문제도 북한이 파괴공작원을 보내지 않는다면 우리 민족끼리 스포츠 관람도 하고..."라고 밝힌 점을 보면 김대중도 김영삼과 같이 반공주의자였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그의 특유의 평화주의적이고 실리적인 성향 탓에 북한과의 대화를 주장한 것이며, 이는 북한뿐 아니라 일본에도 일관적인 태도를 보여 한일 간에 화해를 지향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43] 2000년대의 6자회담이 비슷한 다자외교의 사례.[44] 이후 80년대말부터의 노태우 정부 때에 북방정책을 통해 상당부분 추진되었다.[45] 임기 말 레이건은 전두환에게 직선제 개헌을 권고했다.[46] 그러나 이런 보수쪽의 불신과는 별개로 그의 임기말이던 2002년 12월, 청와대에서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최근(2002년 당시) 불거진 반미감정에 대해 공무원 190명을 청와대로 초청한 자리에서 “의정부 여중생 사망사건이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 문제로 비약돼 ‘미군 나가라’고 하는 것은 안된다”고 밝혔다. 김 전 대통령은 “필리핀이 수빅만 해군기지와 클라크 공군기지에서 미군을 나가라고 했을 때 일부에선 설마 나갈까 했지만 미군이 철수, 경제와 국방에 큰 문제가 생겼다”면서 이 같이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어 “우리는 안보를 위해 미군을 있도록 하는 것이고, 미국은 미국대로 동북아 안정을 위해 와 있다”면서 “미국은 우방으로서 국가 이익에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 전 대통령은 “한미SOFA는 일본 독일과 비슷한 수준”이라면서 “운영에 있어서 개선하기로 미국과 합의했으며 얼마든지 개선하면 된다”고 말했다. 김대중 대통령 반미감정 반대 메세지[47] 클린턴,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 만나고 싶다[48] 미국 빌 클린턴 대통령 동생 로저 클린턴 하의도 방문[49] 김 대통령 핵,미사일 등에 대해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전화[50] 김대중 후보 1997.7.31. 대선토론회 연설[51] 미국.일본 방위협력지침 개정, 주변국들의 우려 높아져[52] 안기부의 야당후보 낙선공작 청와대 반응[53] 김대중 대통령 반미감정 반대 메세지[54] 전국민 대상으로 확대된건 노태우 정부때 이지만 수백개의 개별 조합에서 운영하는 상태로 여러 문제가 있었다. 건강보험 문서에서 역사 문단 참조.[55] 과거 함께 활동한 적이 있다.[56] 예외적인 사람이 있다면 박지원 국정원장.[57] 재미있게도 김영삼에 대한 평가와는 정반대였다.# 썰전에서 일화를 분석한 바 있는데,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김영삼과는 달리 궁핍했던 삶 때문에 매사에 신중한 자세가 생긴 것이라고 보았다.[58] 이것은 김영삼에 의해 정치에 입문했다가 3당 합당 기준 동교동계로 간 노무현에게도 영향을 미쳤다.[59] 선거 명예혁명을 이룬 국민들 지혜와 경의, 1997.12.20 동아일보[60] 김대통령 담화 의미 1997.12.20 동아일보[61] 보석 석방으로 징역에서는 석방된 상태였다.[62] 그러나 질병치료로 인한 형집행정지 때문에 형량에 비하여 실질적으로 박지원이 감옥에 있던 기간은 짧았고, 최종적으로 박지원의 형집행정지 기간에 노무현이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박지원을 풀어주면서, 김대중과 노무현은 화해를 하게 된다. 기자들이 보도한 풍문의 후일담으로는 사면 후 김대중이 청와대에 사람을 보내 감사의 뜻을 전했다고도 하고,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는 설도 있다. 참고로 박지원은 형집행정지 기간에도 김대중의 자택에 자주와서 살다시피하며, 당시 80대가 되어 건강이 많이 상한 김대중을 사실상 모셨다.[63] 여담으로 노무현의 영결식에서 하려던 추도사는 이명박 정부의 반대로 인해 현장이 아닌 한 책의 기념문으로만 남게 되었다.#[64] 반대로 이 당시 박근혜의 남동생 박지만, 이복언니 박재옥, 사촌언니 박영옥, 작은이모 육예수는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를 지지했다.[65] 전쟁, 교통사고, 납치, 사형선고.[66] 심지어 김대중 정부 때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낸 박지원도 대북송금 사건으로 인해 감옥에 갔다왔다.[67] 그나마 김대중의 역량과 사람보는 안목을 높이 평가한 노태우가 집권한 1988년(60대 중반)부터 상황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한다.[68] 김대중 전 대통령의 창씨개명한 이름은 '도요타 다이쥬'다.[69] 여담으로 해당 성씨는 오우치 씨와 더불어 백제 임성태자의 후손들이 사용하는 상씨로 알려져 있다.[70] 김대중(金大中(김대중))전 대통령은 8일 오후 숙소인 영빈관에서 목포상고 재학시절 은사였던 무쿠모토 이사부로(椋本伊三郎(양본이삼랑)·80)와 20여분 동안 만났다., 김 대통령 일본인 은사 모쿠모토 해후(MBC), [김대통령] 일본서 60년전 은사와 해후(조선일보)[71] 무쿠모토는 8.15 광복 직후 귀국하여 외교관으로 변신, 에티오피아와 터키, 우루과이 대사를 역임하고 1983년 외교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2002년 허혈성 심부전으로 인해 11월 28일 0시 34분 도쿄도 메구로(目黒)구의 병원에서 향년 84세를 일기로 사망했다.[72] 정동영이 일산의 총재 자택으로 출근하면, 전날까지 이런저런 사람들과 술을 마셨던 박지원이 차 안에서 운전사와 졸고 있는 모습을 종종 보았다고 한다.[73] 정가에서는 흔히 "기름칠한다"는 은어를 쓴다. 언론인들과 시간을 내어 소식을 주고받거나, 관계개선의 소통창고로 이용된다고 한다. 동아일보를 제외한 기존 보수언론들과 관계가 껄끄러웠던 DJ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기도 했다. 하단에도 나와있지만, 박지원은 원래 미국에서 사업을 하며 뉴욕 한인회장까지 맡을만큼 확실하게 기반을 다졌던 사람이라, 그 사업가 경험을 활용하고자 한 인사로 추정.[74] 이렇게 경희대학교와 인연이 닿아 자신의 아들 김홍일과 김홍업을 경희대에 진학시켰다. 게다가 이들의 아내, 즉 김대중의 두 며느리도 모두 경희대 출신이다. 당시의 CC였던 셈. #[75] 읽은 책만 2만권에 달했다고 한다. DJ의 자택을 방문한 사람들이, 서재에 소장된 수많은 책 대부분이 하나하나 손때가 묻어있는 걸 보고 놀라곤 했다는 일화가 있다.[76] 박태준을 영입하는 대 공들인 주된 사유 중 하나가 "기업체를 운영해본 덕분에, 규모가 큰 실물 경제에 매우 밝은 인물이기 때문"이었다는 후문이다.[77] 국민의 정부 초대 국정상황실장을 지낸 장성민이 밝힌 사실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은 넥타이를 매우 좋아했으며 기분이 좋으면 자신의 넥타이를 풀어 선물하는 버릇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때 조 바이든이 받은 녹색 넥타이는 본래 장성민이 2001년 1월에 생일선물로 준 것이었다고 한다.[78] 사실 아예 원고 한 장도 없이 일장연설한 김대중이 특별한 케이스지, 일반적인 필리버스터의 형태는 이렇다.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된 원고뿐만이 아니라 연설자가 지금까지 머릿속에 담은 모든 지식을 총동원하기 때문에 별의별 내용이 다 나오게 되며, 어떻게든 관련 현안과 연계할 만한 내용을 고르는 것 또한 연설자의 역량을 볼 수 있는 중요한 요소. 2013년 미국 버락 오바마의 의료보험 개혁에 맞서고자 21시간 동안 연설한 테드 크루즈 의원의 경우 쓸 만한 소재가 떨어지자, 동화책 내용부터 영화 스타워즈의 잡다한 대사까지 끄집어내기도 했다. 사실 한국의 필리버스터와는 다르게, 미국에서는 현안과 별 관련이 없더라도 성경책을 읽든 전화번호부 번호를 읊어대든 상관이 없어서 가능했던 이야기다. 한국의 필리버스터에서는 관련없는 내용을 1분 동안 언급하거나 아예 연설을 멈추면 자동으로 다음 주자에게 넘겨야 하고, 화장실같은 개인 용무 해결도 일일이 의장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등 제약이 많다.[79] 김대중 平民黨 총재가 9일 상오 駐韓일본대사관저의 히로히토日王의 분향소를 찾아 조문하고 있다[80] 전두환 정권 당시에도 천황은 사과 의지를 표명해왔다.[81] 워싱턴 한미 정상회담[82] 부시 대통령 '북한 믿을 수 없어'[83] 부시는 이때 좋지 않은 앙금이 남았는지 이후 공식 석상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을 'this man', 노무현 전 대통령을 'easy man'으로 부르는 외교적으로 큰 결례를 저질러 구설수에 올랐다. 하지만 이명박 전 대통령과는 보수 성향이라는 공통점 때문인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84] 자료에 따라선 먼저 흑산도 산이 아닌 수입산을 내놓았고, 김대중의 이름을 언급하자 그제서야 흑산도 산이 아님을 고백했다는 이야기도 있다.[85] 대통령 임기 시절에는 가끔씩 고향의 해산물을 공수해 왔다.[86] 2022년 9월 10일 KBS 방영 다큐멘터리 '한식연대기 1부 - 정치의 맛'에서 나온 인터뷰 영상[87] 물론 김대중이 1924년생이니 원래 치킨을 접할 수 없었던 나이라고 치더라도, 보통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소화기관의 소화력 저하 등의 이유로 기름진 음식은 피하게 마련임을 생각하면 나름 놀랄 노릇이다. 참고로 김대중은 1995년 당시에도 상당한 고령인 71세였다.[88] 사실 그시절 재소자에게 주는 식사는 쌀과 콩 등 잡곡을 섞어 오늘날 봉구스밥버거 같이 생긴 동그란 틀에 찍어 주었는데(그래서 재소자들은 이를 가다(形)밥이라 불렀다), 다섯가지 종류로 나뉘어 교도소 내 작업을 나가는 재소자에게는 가장 큰 사이즈를, 그렇지 못하는 정치범이나 흉악범은 가장 작은 사이즈를 주었다. 김대중은 예의주시 해야 하는 정치범인데다 전두환에게 찍혀 있었으니 다른 재소자들과 달리 가장 작은 사이즈를 받을 수박에 없었고, 대식가였던 김대중은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 군것질을 할수밖에 없었다.[89] 극우 커뮤니티에서 자주 고인드립으로 써먹는 그 유명한 멘트인 "정치 안 해요. 내가 안 해요. 이건 내 문제니까 내가 안 하는 거요. 누가 날 강제로 시키는 거요." 그러나 이 발언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복귀했다.[90] 여기서 말하는 '민간인'이란 장성급 장교출신이 아닌 사람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군 복무 경험이 아예 없는 사람(모병제 국가) 또는 최소한의 군복무만 한 사람(징병제 국가)을 뜻한다.[91] 테드 카플이 진행하는 미국 ABC 나이트라인[92] 70년대의 대표적인 언론인으로 능변으로도 그 실력을 인정받고 있었다.[93] 젝스키스의 당시 매니저는 소녀팬들을 때리는 걸로 유명했다.[94] 전부 다 멤버 본인들이 증언한 내용들이다. 141218일자 해피투게더, 160423일자 무한도전, 160601일자 라디오스타 등 방송에 나온다.[95] 김대중의 퇴임시 나이는 만 79세 1개월.[96] 김대중의 목표는 모든 사형수의 감형이었지만 사법당국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밝힌 바 있다.[97] 사실 김대중은 남북정상회담 훨씬 전인 1987년부터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의 추천으로 14년째 노벨평화상 후보로 선정된 인물이었다. 남북정상회담 하나만으로 김대중이 노벨평화상을 받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98] 홍준표가 정계에 입문한 이유가 검사 시절 당시 본인과 가족들을 위협하던 자들로부터 가족을 지키기 위함이었는데, 당시 김대중이 이끌던 야당의 세력이 여당에 비하면 많이 약했기 때문에 들어가지 못했다고.[99] 사실상 사표로 버려버리기로 했다.[100] 1세대 초기형 VS450 트림.[101] 당시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지시로 방탄 기능을 탑재한 다이너스티 리무진 3대를 특수 제작해 각각 정주영 전 명예회장, 그리고 여야 대권 후보였던 김대중과 이회창에게 각각 제공했다고 한다. 대통령 당선 후 해당 차량은 김대중의 측근인 한화갑 전 의원이 타고 다니다가 아태평화재단에 기증됐다. 이후 한동안 근황이 알려지지 않다가 2013년 아태평화재단 측에서 해당 차량을 전시용으로 목포시에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목포시에서 거절했고#, 폐차 위기에 놓였다가 2016년 간신히 영암군에 기증됐다.#[102] 2008년식 마지막 출고분으로 알려져 있으며, 서거 이후에는 박지원 전 의원이 물려받아 운행하였다가, 현재는 목포에 위치한 김대중 노벨평화상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103] 권노갑 회고록[104] 마이클 잭슨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 참석 위해 방한[105]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민주당계 대통령은 윤보선이다. 그러나 윤보선은 장면 내각 하에서 간접 선거로 선출돼 실권이 거의 없었고 그마저도 5.16 군사정변이 터지며 1년 남짓이었다. 그러므로 실질적인 최초의 민주당계 대통령은 김대중으로 여겨진다.[106] 다만 오바마의 경우 본인이 직접 나서서 재선에 성공한 것이었다. 미국은 4년 중임제라서 두 번 대통령을 할 수 있다.[107] 김영희 PD는 나중에 20대 대선 때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의 선거운동을 도와주기도 했다. 하지만 이때는 10년 전 나는 가수다를 기획했을 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은 구시대적 감각으로 홍보를 했고, 홍보 포인트를 잡는 것도 서툴러져, 지지자들에게도 좋은 평가를 듣지 못했다는 차이점이 있다.[108] 호주 말 목장주를 취재한 기자가 이를 확인.[109] 알려진 사실이지만 김대중은 어린 시절 서당을 다녔었다.[110] 공교롭게도 약현성당은 한국 가톨릭 순교자들이 순교한 순교터 위에 세워진 성당이다.[111] 토머스 모어는 헨리 8세의 이혼 문제에 대해 반대 입장을 표현하다 참수형을 당했다.[112] 다만, 장례 미사에서 김대중의 시신은 국장을 위해 국회에 안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관 없이 미사를 진행했다.[113] 이 당시에는 원음방송 본사가 익산에 있었다.[114] 다만 감리회가 한국 개신교의 주류 교단 중 가톨릭과의 관계가 가장 원만한 편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비주류 교단을 포함하면 대한성공회가 가톨릭과의 관계가 가장 원만하다고 볼 수 있다.[115] 모친 장수금 여사가 원래는 소실이었다는 요지[116] 2006년 7월부터 2007년 10월까지 15개월 동안 41회에 걸쳐 구술한 내용을 2023년 4월부터 10월까지 중앙일보 더중앙플러스에서 연재했고 2024년 8월 출판되었다.[117] 2000년 6월에는 국정 공동운영자인 JP도 이 사자성어를 휘호로 발표해 언론에서 그 의미를 유추해보기도 하였다.[118] 역시 달변이었던 JP(김종필) 역시 비유법과 사자성어 활용을 깊이 연구하였다. '상대를 논리적으로 설득하고자 진력'한 DJ와는 좀 다르게 VS 중요한 행보 결정 순간마다 '시의적절한 짧은 문구'를 올린 모습이 많이 비춰졌으며, 나중에는 중화권 국가 지도부 인사들이 JP의 이런 면모에 호감을 표할만큼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119] 칸트의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라는 말을 참고한것으로 보인다.[120] 설령 이쪽의 세가 더 강할지라도 마음가짐은 그런 것이어야 한다는 말. 1990년, 여권의 3당합당에 합류하지 않은 통일민주당 소속 의원 6명(이기택, 김상현, 김광일, 장석화, 노무현, 김정길, 이철, 박찬종)이 DJ의 옛 평화민주당과 동등한 비중으로 민주당을 창당할 수 있었던 것도 이기택 의원의 완고한 "지분" 요구를 DJ가 양보하고 수락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121] 4분 15초~~. 본인이 추진했던 일에 대한 기념행사였지만, 발언 서두부터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덕담으로 시작해 노 전 대통령을 추모하였다. 위의 발언도 "양심이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의로운 사람들이 계속 희생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122] 84년 12월 미국에서 귀국 하기 전에 열린 송별 자리에서도 행동하는 양심이란 표현을 썼다. 늘 새로운 표현을 강구하고자 한 노무현과 달리, DJ는 유권자가 기억하기 좋도록 사전에 심사숙고한 어구를 꾸준히 반복하고자 노력했다고 한다. 연설문 비서관 강원국이 DJ가 사례로 제시한 일화 대신 다른 이야기로 바꿔오면, 다시 이전의 것으로 내용을 고쳐 활용했다는 에피소드가 있을 정도다.[123] 15분 23초 즈음부터 나온다. 당시 시대가 시대인지라 음질은 다소 좋지 않지만, 들리기는 다 들린다.[124] 연설 전문은 여기에 있으며, "마지막으로~" 부분은 거의 연설 끝에 있다.[125] 실제로 이 선거 이후 박정희가 10월 유신을 선포해버려 결론적으로는 맞는 말이 되었다. 한편 그 시기 박정희 당시 대통령도 거짓말은 아닌 말을 했는데, 그게 바로 유명한 "이번에 다시 저를 뽑아주신다면 다음 부터는 국민에게 표 달라고 안하겠습니다."였다.[126] 외국어 공부를 하려면, 그 나라 문학작품을 읽는 게 가장 낫다는 나름의 철학이 있었다고 한다. 다만 문법을 정확하게 준수하며 말할 경우, 상대방도 호의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문법 공부에도 공을 들였다고[127] 성경 아모스 5,24("다만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서로 위하는 마음 개울같이 넘쳐 흐르게 하여라.")에서 발췌한 것으로 보인다.[128] 역시 토인비를 접해본 다른 정치인의 수사와(맨 밑에서 2번째 문단) 비교해보도록 하자. 단, 원 발언이 경어로 이루어졌음을 감안하여 볼 필요가 있다.[129] 하지만 이듬해 5월 전국 1회 지방선거(6월)를 앞둔 시점에서 같은 질문을 받았을 때는, 지방선거 결과가 정계 복귀 여부를 가늠할 기준점이 될 거라는 암시를 남긴다.[130] 이건 정확히 말하자면 김대중도 사람인지라 한 발언에 가깝다. 1994년 기준으로 김대중은 정계복귀 여부와는 상관없이 지쳐서 이 말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131] 출처, 장성민-김종혁 공저 <김대중 다시 정권교체를 말하다>[132] 위의 '거짓말장이' 프레임과 결합, DJ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공통관심사로 굳혀진 파괴력 강한 단어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구도를 고안하고 + 87년 대선 당시 DJ에게 직접 질문하며 몰아세운 사람의 이름도 김대중(기자).[133] 실제로 '논리'의 DJ가 가장 염두에 둔 것이 저 번복에 대한 대응 논리였다. 그런데 그 점에 대해 조언해준 교수그룹(임혁백, 강정인)의 반응이 걸작이다. “아니, 정치 안 한다고 하다가 다시 하면서 무슨 구차한 변명을 합니까. 언제 국민이 은퇴하라고 해서 했나, 본인이 알아서 한 거 아닌가요. 그럼 복귀도 마찬가지지. 무슨 변명은.” "자꾸 이상한 논리 앞세워 국민을 설득하려 들지 말라는 것이었다. 결국 정리된 기조는 ‘죄송하다. 할 말 없다. 앞으로 잘 하겠다’였다." # 장성민의 회고[134] 80년대 YS의 비난에 대해(46번째 문단), 97년 DJT 연합(김대중 + 김종필 + 박태준)을 성사하고자 김대중 - 박태준 두 사람이 대담을(9번째 문단) 하는 자리에서, 그리고 동년 10월 관훈 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모두 이런 요지로 답변하였다.[135] 행정(김영남)-국방(김정일) 2원화 체제로 통치되는 북한의 행정수반이다.[136]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06년 10월 11일 전남대에서 ‘한반도의 현실과 4대국’이라는 강연회에서 스스로 민주주의 일군 한국과 달리 일본은 민주주의 주체세력이 없어 군국주의가 부활할 것이라며 일본의 우경화에 대해 예언을 한 적이 있었다.[137] 노무현 전 대통령이 생전에 줄곧 언급하고 재단 명칭(사람사는세상 노무현 재단)으로까지 썼던 문구이다. 참고로 이때가 2009년 6월로 DJ가 세상을 떠나기 2달 전이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이 기력을 짜내어 고인의 특징과 바라던 바를 정확하게 짚어내고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2017년 1월, 반기문 UN 사무총장이 노 전 대통령의 고향 봉하마을(김해)에서 묘역 참배를 하고 방명록에 이 문구를 언급했지만, 기억착오로 실수가 나와 묘한 대조를 이루기도 하였다.[138] 자료의 영상은 일부분인 2분 54초로 편집된 것이다. 당초 장례식 현장에서 읽고자 했으나 여권에서 반대의사를 표명해 시일이 지나 공개되었다고.[139] 장폴 사르트르의 명언과 비슷하다. 2020년 시점, 한국은 "유사시 국무총리령에 의거, 50세 남성까지 현역으로 동원 가능"하다. 20대 대선 정국에서 신세계그룹 정용진 SNS 멸공 발언 게시 논란과 윤석열의 대북 선제 타격 발언 논란이 터지자 다시 화제가 되고 있다.[140] 클린턴 행정부가 유화적이기만 한것은 아니었다. 유럽 코소보 사태에는 무력 공습(코소보 전쟁)을 감행했으며, 한반도 문제에 있어서도 한때 대북 선제 타격을 계획했으나 한국의 막대한 피해가 우려되어 그만뒀다고 자서전에서 언급한바 있다.[141] 2002년 일본과 북한간에 국교정상화 기조로 정상회담과 '북일평양선언'이 있었는데, 고이즈미와 김정일의 협력에 DJ가 상당한 영향을 준것으로 알려져있다. 북일평양선언에는 국교정상화 교섭 재개, 일본의 식민지 지배 사과와 경제협력, 일본인 납북 문제 재발 방지 등이 담겨있다. 기사[142] 울컥하며 5초 정도의 침묵[143] 제15대 대통령 선거 전날인 1997년 12월 17일 오후에 지병인 간질환 때문에 향년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유력 대선후보의 가족이 세상을 떠났음에도 이 사실은 투표 종료 후에 알려졌다. 이는 고인의 유언이자 당시 이회창 후보 측의 공격 프레임에 말려들지 않기 위한 전략이었다. 이회창 후보는 "김대중 후보는 나이가 많고 건강 문제도 있어서 안정적 국정 운영이 불가능하다"는 논리를 지속적으로 폈고 김대중 후보 캠프는 이 부분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 김대중 후보의 건강함을 적극 어필했다. 김대의 씨 역시 "내 건강 문제 때문에 형님의 선거에 영향을 주는 것은 싫다. 내가 세상을 떠나더라도 내 부음을 알리지 말아달라"고 캠프 측에 요청했다. 김 씨의 부음은 고인의 유언대로 투표 종료 후에 알려졌고 김대중-이희호 부부의 조문도 투표를 마친 후 이뤄졌다.[144] 독립운동가 윤경빈의 딸.[145] 호남에서도 가장 서쪽인 신안군 출신이라 생긴 기록으로, 훗날 서해 5도 또는 북한 지역의 황해도, 평안도 서부 지역이나 해외의 중국, 유럽 등지에서 태어난 대통령이 나오면 갱신될 기록이다.[146] 동남 방언 미구사자는 총 3명이다. 서남 방언 구사자 김대중과 서울 토박이 출신 윤석열 두 명뿐으로 오해하기 쉬우나 사실 박근혜도 해당한다. 대구에서 출생했지만 정작 대구에서 자란 기간은 길지 않다. 현역 군인이었던 아버지 박정희의 부임지에 따라 대구와 광주 등으로 이사를 다녔고 결국 초등학생 때 서울 장충동에 정착한 뒤 11세가 되던 해에 청와대로 들어갔고 성인이 될 때까지 서울에 살았다. 그래서 박근혜는 서울말을 구사했다.[147] 물론 끝까지 같이 가지 못하고 임기 중 대북문제를 놓고 시각차를 보여 자민련과는 결별한다.[148] 초선기준 한정으로 재선까지 전부 포함시키면 이승만이 81세로 이 타이틀을 갖게된다.[149]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김영삼과 동반 입문했는데 김영삼은 민의원으로 당선되고 김대중은 낙선했다. 그 이후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까지 43년이 걸렸다.[150] 반대로 최단기간이 걸린 대통령은 전두환으로 정계입문 3개월 만에 당선되었다. 민주화 이후로 따지면 최단기간 당선자는 윤석열로, 정계 입문한지 1년도 안된 8개월차에 당선되었다.[151] 7대 대선, 13대 대선, 14대 대선에서 세 번 낙선.[152] 다만 1904년 대한제국 부산에서 출생한 미국인 찰스 피더슨이 여덟살때까지 살다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돌아가 호스트게스트화학 분야의 연구 실적을 인정받아 1987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노벨상 위원회 홈페이지상 출생지가 한국으로 표기돼 있다.[153] 장남 김홍일이 3선 의원, 차남 김홍업과 삼남 김홍걸이 초선 의원 출신이다.[154] 광주 도시철도 1호선의 김대중컨벤션센터역.[155] 이승만과 박정희도 재혼 경험이 있기는 하지만, 이들은 사별 이후 재혼이 아닌 이혼 이후 재혼이다.[156] 궐위에 의한 선거가 생기지 않는 이상 이 기록은 최소 2032년은 되어야 깨지는 기록이다.[157] 지체장애가 있다. 제7대 대통령 선거 이후에 교통사고를 당해서 다리가 골절되었다. 그러나 당시 우리나라 의료 수준이 열악해서 제대로 치료를 못했고 그래서 그때부터 다리를 약간 절뚝거리며 걸어 다녔다. 10월 유신 이후 정부의 탄압을 피하고 이걸 치료할 겸해서 일본에 망명했는데 그때 일어난 것이 김대중 납치 사건.[158] 20대 대선때 이재명이 당선 되었다면 이 타이틀은 깨질 뻔했다. 이재명은 신체부위 다중 장애 및 일부 영구 손상으로 인한 6급 장애가 있기 때문.[159] 향년 85세로 현재 대한민국 남성 평균수명보다도 오래 산 편이지만, 자연사한 다른 대통령들인 이승만, 윤보선,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전부 80대 후반~90대 초반까지는 생존하였기 때문이다. 타살이나 자살까지 포함하면 박정희(61세)가 최단명이다.[160] 현재 생존해있는 전현직 대통령 전원이 이 나이가 아직 안되어있기 때문에, 한 사람이라도 이 나이 이전에 자연사한다면 이 타이틀은 깨지게 된다. 전현직 대통령 중 최고령인 이명박이 현재 82세이기 때문.[161] 1972년 김대중은 교통사고 후유증을 치료하고 일본 정치인들을 만날 목적으로 일본에 방문했는데, 10월 유신이 터져서 국내 정치에 돌아갈 수 없게 되자 그대로 일본에 망명했다. 망명 중이었던 1973년에 김대중 납치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이후 1981년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미국의 도움으로 사형은 피한 대신 전두환 측의 요구대로 미국으로 또 한 번 망명했다. 처음으로 김대중이 국내로 귀국한 건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직전이었다.[162] 민주화 이전에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 미국에 오랜 기간 망명해 있었다.[163] 윤석열이 재임 기간 중 2026년에 2026년 북중미 월드컵을 맞이한다면 유일 기록이 깨지게 된다.[164] 당연히 김정일은 평양 옥류관에서 기다렸고 김대중은 남한에 있는 '평양 옥류관'이란 식당에서 기다렸다.[165] 작가의 전작 야인시대에서 김형사 역을 맡았다.[166] 전작인 제4공화국에서는 김영삼 역으로 출연했다.[167] 재임 당시 스크린 쿼터제를 지지하고 영화진흥기금 1500억원 조성을 통해 한국영화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로 수상했다. 실제 한국영화의 경쟁력을 키워준 영화라고 평가받는 쉬리는 국민의 정부 시절인 1999년에 개봉했다.[168] 목포시.[169] 인제군.[170] 전임자 나상근 당선 무효.[171] 전임자 전형산 반민주행위자 공민법 제한법(자유당 독재 부역)으로 자격 상실.
5.16 군사정변으로 자격정지. 당선 통보 후 실제 임기는 약 12시간이었다.[172] 목포시.[173] 1965년 민중당으로 신설 합당.[174] 1972.10.17. 자격 박탈. (10월 유신)[175] 1992.12.19. 사퇴. (대선 패배 후 정계 은퇴 선언)[176] 딱 13번까지가 당선권이었다. 이듬해에 대선에서 맞붙은 이회창은 신한국당 전국구 1번으로 당선되었다.[177] 자유민주연합과 선거연대. (DJP연합)
2002.5.6 탈당.[178] 1967년 이전의 선거 벽보는 확인되지 않는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정보도서관에서 김대중으로 검색해도 확인할 수 없다. 이는 김영삼, 김종필도 마찬가지.[179] 목포시[180] 자세히 보면 상대 후보 기호 7번 김병삼이 겹쳐 보인다.[181] 제2공화국 내각제 시절 이후 민주당계 정당이 최초로 원내 제1당을 차지한 선거는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다.[182] 1971년 이전까지는 기호를 추첨제로 정했다. 1961년 재보궐선거에서는 기호 1번을 달고 당선되었으며, 그 외에 3번(5대 총선), 6번(7대 총선), 8번(6대 총선), 9번(3대 총선) 등을 달고 선거에 나왔다. 기호 1번을 달아보지 못한 것은 후임 대통령인 노무현도 마찬가지다. 한편 문재인은 2012년 총선(사상구)과 같은 해 대선에서는 기호 2번을 달았지만, 2017년 대선에서는 기호 1번을 달았다.[183]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184] 5·16 군사정변으로 인한 정당 해산.[185] 민정당과 신설 합당.[186] 신한당과 신설 합당.[187] 납치 사건
내란음모 조작 사건
미국 망명
정치활동 금지[188] 사면복권 후 김영삼과 통일민주당을 창당하여 입당하였다.[189]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190] 민주당과 신설 합당.[191]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을 위한 탈당.[192] 새천년민주당에 흡수 합당.[193] 대통령 임기 말인 2002년 5월 6일자로 탈당.
5.16 군사정변으로 자격정지. 당선 통보 후 실제 임기는 약 12시간이었다.[172] 목포시.[173] 1965년 민중당으로 신설 합당.[174] 1972.10.17. 자격 박탈. (10월 유신)[175] 1992.12.19. 사퇴. (대선 패배 후 정계 은퇴 선언)[176] 딱 13번까지가 당선권이었다. 이듬해에 대선에서 맞붙은 이회창은 신한국당 전국구 1번으로 당선되었다.[177] 자유민주연합과 선거연대. (DJP연합)
2002.5.6 탈당.[178] 1967년 이전의 선거 벽보는 확인되지 않는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정보도서관에서 김대중으로 검색해도 확인할 수 없다. 이는 김영삼, 김종필도 마찬가지.[179] 목포시[180] 자세히 보면 상대 후보 기호 7번 김병삼이 겹쳐 보인다.[181] 제2공화국 내각제 시절 이후 민주당계 정당이 최초로 원내 제1당을 차지한 선거는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다.[182] 1971년 이전까지는 기호를 추첨제로 정했다. 1961년 재보궐선거에서는 기호 1번을 달고 당선되었으며, 그 외에 3번(5대 총선), 6번(7대 총선), 8번(6대 총선), 9번(3대 총선) 등을 달고 선거에 나왔다. 기호 1번을 달아보지 못한 것은 후임 대통령인 노무현도 마찬가지다. 한편 문재인은 2012년 총선(사상구)과 같은 해 대선에서는 기호 2번을 달았지만, 2017년 대선에서는 기호 1번을 달았다.[183]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184] 5·16 군사정변으로 인한 정당 해산.[185] 민정당과 신설 합당.[186] 신한당과 신설 합당.[187] 납치 사건
내란음모 조작 사건
미국 망명
정치활동 금지[188] 사면복권 후 김영삼과 통일민주당을 창당하여 입당하였다.[189]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190] 민주당과 신설 합당.[191]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을 위한 탈당.[192] 새천년민주당에 흡수 합당.[193] 대통령 임기 말인 2002년 5월 6일자로 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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