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레로족과 나마족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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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에 현재의 나미비아가 독일 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독일의 개발이 시작되었고 독일령 남서아프리카라는 이름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에 독일인들이 이주하면서 독일인들과 헤레로족과 나마족 등의 토착민 간의 갈등이 생겨났다.
남서아프리카로 이주한 독일인들은 토착민들의 전통적인 영토를 자신의 것이라고 선포하며 토지와 가축 등을 사유화했다. 토착민들은 물론 이러한 상황에 크게 반발했으나 갈 곳을 잃은 헤레로족은 생존을 위해서는 독일인들 소유 농지에서 노동해야 하는 처지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반발하는 이들에게는 가혹한 태형과 고문이 가해졌고 여성에게는 이주자 남성들에 의한 성폭행도 빈번하게 이뤄졌다. 이러한 폭력은 전형적인 식민 이데올로기에 따른 인종차별이었는데 1900년 독일 본국 외교부가 식민지에서의 태형을 금지하려고 하자 이주자들은 "토착민들은 온화함과 관대함을 이해하지 못한다. … 그들은 정신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백인에 비해 너무나도 열등하기 때문에, 복종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내용의 탄원서를 보내기도 했다. #
이러한 억압에 저항하기 위해 헤레로족이 봉기를 일으켰다. 독일군은 헤레로족에게 저항을 중단하라고 경고했으나 그동안의 식민지인 차별 정책으로 많은 피해를 입어 분노가 쌓일 대로 쌓여 있었던 헤레로족은 독일군의 경고를 무시했다.
봉기를 도모한 인물인 사무엘 마하레로의 주도 아래 헤레로군은 독일인 이주민 마을을 습격해 농지를 불태우고 독일군 140여 명을 사살했으나 여성과 어린이, 노약자는 건드리지 않았다. 이 봉기에는 나마족도 가세하였다.
남서아프리카로 이주한 독일인들은 토착민들의 전통적인 영토를 자신의 것이라고 선포하며 토지와 가축 등을 사유화했다. 토착민들은 물론 이러한 상황에 크게 반발했으나 갈 곳을 잃은 헤레로족은 생존을 위해서는 독일인들 소유 농지에서 노동해야 하는 처지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반발하는 이들에게는 가혹한 태형과 고문이 가해졌고 여성에게는 이주자 남성들에 의한 성폭행도 빈번하게 이뤄졌다. 이러한 폭력은 전형적인 식민 이데올로기에 따른 인종차별이었는데 1900년 독일 본국 외교부가 식민지에서의 태형을 금지하려고 하자 이주자들은 "토착민들은 온화함과 관대함을 이해하지 못한다. … 그들은 정신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백인에 비해 너무나도 열등하기 때문에, 복종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내용의 탄원서를 보내기도 했다. #
이러한 억압에 저항하기 위해 헤레로족이 봉기를 일으켰다. 독일군은 헤레로족에게 저항을 중단하라고 경고했으나 그동안의 식민지인 차별 정책으로 많은 피해를 입어 분노가 쌓일 대로 쌓여 있었던 헤레로족은 독일군의 경고를 무시했다.
봉기를 도모한 인물인 사무엘 마하레로의 주도 아래 헤레로군은 독일인 이주민 마을을 습격해 농지를 불태우고 독일군 140여 명을 사살했으나 여성과 어린이, 노약자는 건드리지 않았다. 이 봉기에는 나마족도 가세하였다.
Das Volk der Herero muss jedoch das Land verlassen. Wenn das Volk dies nicht tut, so werde ich es mit dem Groot Rohr dazu zwingen. Innerhalb der deutschen Grenze wird jeder Herero mit oder ohne Gewehr, mit oder ohne Vieh erschossen, ich nehme keine Weiber und Kinder mehr auf, treibe sie zu ihrem Volk zurück, oder lasse auf sie schießen. Das sind meine Worte an das Volk der Herero.
Der große General des mächtigen Deutschen Kaisers.
그러나 헤레로인들은 이 땅에서 물러나야 한다. 만일 헤레로인들이 이주하지 않을 경우, 나는 그들이 물러나게끔 총으로 압박할 것이다. 무장했건 비무장했건, 가축을 가지고 있건 아니건, 독일 국경 내의 모든 헤레로인들은 총살될 것이다. 나는 여성과 아이들도 더이상 받아주지 않을 것이며, 동족들에게 돌려보내거나 총살해버릴 것이다. 이것이 내가 헤레로 인민들에게 전하는 바이다.
위대한 독일 황제의 대장군이 고함.- 독일 진압군 사령관 로타르 폰 트로타의 성명문
이에 독일군은 즉각 반격을 시작했다.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로타르 폰 트로타(Lothar von Trotha)를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14000명의 독일군을 병력으로 보내 헤레로족을 진압하였다. 트로타는 헤레로족이 “더 이상 독일 제국의 신민이 아니다”라고 선언하며 눈에 보이는 헤레로족은 무기를 손에 들고 있지 않아도, 그리고 여성과 어린이들일지라도 절멸할 것을 명령했다.
독일군에 의해 물 보급로가 끊기고 보이는 대로 사살당하던 헤레로족 측에서는 어마어마한 피해자가 나왔으며 이에 봉기 주도자들이 항복을 위해 접근했으나 역시나 사살당하는 등 독일군은 항복 의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독일군은 헤레로족을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않고 보이는 대로 모두 무참하게 죽였으며 독일군의 진압 과정에서 1904년부터 1907년까지 8만 5천 명이었던 헤레로족이 1만 5천 명까지 줄었다. 헤레로족의 80%가 몰살되었고 나마족은 절반이 몰살당했다.
살아남은 부족인들은 노예 수용소에 수감되어 비위생적이고 열악한 복지에 기아나 질병에 시달려서 죽었다.
당시 독일에서 유행하던 우생학의 실험 대상으로 해부되어 죽은 부족들도 부지기수였는데 훗날 나치 독일이 저지른 악행의 전초전이 독일령 아프리카에서 가해졌다고 볼 수 있다. 아돌프 히틀러와 요제프 멩겔레 등에게 우생학적 영향을 준 오이겐 피셔(Eugen Fischer) 역시 독일령 아프리카에서 소위 연구 활동을 했다. 이는 '나마쿠아 헤레로족 대학살'이라는 이름으로 20세기 최초의 제국주의 국가에 의한 학살로 기록되었다.
이 즈음의 나마족, 헤레로족에 대한 대량 학살에 저항한 나마족 추장인 치프(추장) 헨드릭 위트부이(1830 ~ 1905. 10. 29)는 나미비아의 전설적인 인물로 불리며 그의 초상은 모든 금액의 나미비아 달러에 새겨져 있다. 헨드릭 위트부이의 손자인 "캡틴(대장)" 헨드릭 사무엘 위트부이(1906. 06. 01 ~ 1978. 07. 29)는 나미비아 사람으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항한 인물이다.
지금도 나미비아에선 이 문제로 이를 갈고 있다. 헤레로 부족은 명확한 사과와 나미비아에서 소수민족인[1] 자신들에 대한 직접 배상을 요구했다. 결국 헤레로족의 후손들은 독일 정부와 당시 식민 정책으로 이득을 본 독일 기업들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미국 법정에 제출했다. 그에 대해 법률 전문가들은 헤레로족의 승소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봤지만 인권단체들은 "독일 정부는 이 소송을 자신들의 범죄행위에 대해 값싼 변명을 하는 기회로 삼지 말라"며 배상 책임 인정을 요구했다. 그래서 독일 정부를 상대로 집단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
독일은 "이 사건은 유대인 배상과는 다른 문제"라며 만만한 나미비아에 공식 배상을 거부하고 있었으며 홀로코스트와 달리 (바이마르 공화국을 계승한) 나치 독일보다 훨씬 더 이전의 독일 제국이 자행한 일이라는 입장을 견지했다.[2] 2004년에는 독일 대외원조개발부 장관이 독일은 나미비아에 특별한 책임이 있다며 최초로 사과를 언급했으나 이는 헤레로 부족이 미국 법정에 독일 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제기한 손배배상 소송 취하를 요구하는 과정에서 나온 말이며 독일 정부도 장관 개인의 견해라며 선을 그었다. #
대신 독일은 피해 부족이 아닌 오밤보족이 이끄는 나미비아 정부에 배상이 아닌 경제원조라는 명목으로 지원하였는데 1990년 이후 5억 유로를 지원해 왔다. 그나마도 2003년과 2004년에는 2천 300만 유로로 줄었다.
이 때문에 나미비아 및 과거 독일의 식민 지배를 겪었던 탄자니아, 토고, 카메룬 등 아프리카의 국가에서 독일의 UN 상임이사국 진출을 반대하고 있으며[3] 독일을 비롯해 프랑스, 영국 등 서유럽 지역 3강들이 튀르키예에게 오스만 제국 시절에 있었던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비판하면 나미비아를 위시한 옛 독일 제국의 식민지였던 이들 아프리카의 4개국들과 이외 프랑스, 영국의 식민지배를 겪었던 여타 아프리카의 국가들은 이 헤레로족, 나마족 학살과 프랑스와 영국 등 여타 서유럽 제국주의 열강들이 저지른 여러 크고 작은 아프리카 식민지인 학살 사건들을 언급하며 독일과 서유럽 강대국들은 튀르키예가 중동 지역에서 저지른 만행을 비판하고 튀르키예에게 아르메니아에 대한 사과를 요구할 자격이 없다며 독일과 프랑스, 영국 등 다른 서유럽 국가들을 비난하고 있다.
독일은 "이 사건은 유대인 배상과는 다른 문제"라며 만만한 나미비아에 공식 배상을 거부하고 있었으며 홀로코스트와 달리 (바이마르 공화국을 계승한) 나치 독일보다 훨씬 더 이전의 독일 제국이 자행한 일이라는 입장을 견지했다.[2] 2004년에는 독일 대외원조개발부 장관이 독일은 나미비아에 특별한 책임이 있다며 최초로 사과를 언급했으나 이는 헤레로 부족이 미국 법정에 독일 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제기한 손배배상 소송 취하를 요구하는 과정에서 나온 말이며 독일 정부도 장관 개인의 견해라며 선을 그었다. #
대신 독일은 피해 부족이 아닌 오밤보족이 이끄는 나미비아 정부에 배상이 아닌 경제원조라는 명목으로 지원하였는데 1990년 이후 5억 유로를 지원해 왔다. 그나마도 2003년과 2004년에는 2천 300만 유로로 줄었다.
이 때문에 나미비아 및 과거 독일의 식민 지배를 겪었던 탄자니아, 토고, 카메룬 등 아프리카의 국가에서 독일의 UN 상임이사국 진출을 반대하고 있으며[3] 독일을 비롯해 프랑스, 영국 등 서유럽 지역 3강들이 튀르키예에게 오스만 제국 시절에 있었던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비판하면 나미비아를 위시한 옛 독일 제국의 식민지였던 이들 아프리카의 4개국들과 이외 프랑스, 영국의 식민지배를 겪었던 여타 아프리카의 국가들은 이 헤레로족, 나마족 학살과 프랑스와 영국 등 여타 서유럽 제국주의 열강들이 저지른 여러 크고 작은 아프리카 식민지인 학살 사건들을 언급하며 독일과 서유럽 강대국들은 튀르키예가 중동 지역에서 저지른 만행을 비판하고 튀르키예에게 아르메니아에 대한 사과를 요구할 자격이 없다며 독일과 프랑스, 영국 등 다른 서유럽 국가들을 비난하고 있다.
결국 나미비아가 끊임 없이 과거사 사과를 요구하고, 독일 제국 시기 나미비아에서 저지른 헤레로족, 나마족 등 식민지인 학살 불인정과 사과를 거부하려는 이러한 독일의 태도가 전세계적으로 알려지는 등 이로 인해 제2차 세계대전과 유태인 학살에 대해서는 인정,사과하고, 양차 대전 이전 식민지였던 나미비아 등 아프리카 국가들에서 자행된 식민지인 학살을 외면하고 있다는 국제적인 비난 여론이 빗발치게 되자 2016년 독일 정부는 헤레로족 학살 행위를 인정하고 사과하였다. 이후 독일은 나미비아를 식민지배했던 당시 연구에 사용하겠다는 명목으로 가져갔던 두개골을 2018년 8월 29일 3번째로 열린 행사를 통해 나미비아로 되돌려주었다. 2019년 5월 17일에 독일 정부는 120여년전에 약탈해간 유물을 나미비아에 반환했다. 그뤼터스 독일 문화부 장관은 “이번 유물 반환은 우리가 식민지배 역사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안드레아스 귀벱 주독일 나미비아 대사는 “우리에게도 피지배의 역사와 굴욕의 흔적, 조직적인 불의와 화해하기 위한 중요한 과정”이라며 “고통스러운 과거를 마주하고, 받아들이는 것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어 미래를 대면하도록 할 것”이라고 전했다.#
2019년에 재건된 프로이센 왕궁에 헤레로족 학살을 비롯한 식민지에서 자행된 만행을 반성하는 전시 공간을 마련한다고 전해졌다. 독일과 나미비아 정부가 독일 제국 당시 있었던 나미비아 학살 사건을 집단학살(genocide)로 명확하게 규정하는 공동 선언을 놓고 양자 회담을 하기로 했으며 이를 2016년 연말까지 마무리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독일 측 대변인이 밝힌 바에 따르면 사과로 인한 배상 조처나 법적 결정이 도출될 가능성을 부정하고 있어 한계가 있었다. 2021년 5월 학살한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보상차원에서 11억 유로를 인프라 개발을 위해 지원할 것을 합의했으나 피해 부족들은 자신들이 아닌 나미비아 정부 집권당에게 이익이 될 뿐이라며 반발했고 언론 매체들도 독일의 이러한 목적이 옛 식민지였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2019년에 재건된 프로이센 왕궁에 헤레로족 학살을 비롯한 식민지에서 자행된 만행을 반성하는 전시 공간을 마련한다고 전해졌다. 독일과 나미비아 정부가 독일 제국 당시 있었던 나미비아 학살 사건을 집단학살(genocide)로 명확하게 규정하는 공동 선언을 놓고 양자 회담을 하기로 했으며 이를 2016년 연말까지 마무리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독일 측 대변인이 밝힌 바에 따르면 사과로 인한 배상 조처나 법적 결정이 도출될 가능성을 부정하고 있어 한계가 있었다. 2021년 5월 학살한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보상차원에서 11억 유로를 인프라 개발을 위해 지원할 것을 합의했으나 피해 부족들은 자신들이 아닌 나미비아 정부 집권당에게 이익이 될 뿐이라며 반발했고 언론 매체들도 독일의 이러한 목적이 옛 식민지였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1] 독일 제국의 학살 때문에 줄어든 인구 수를 현재까지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2] 이는 튀르키예 공화국이 아르메니아인 대학살과 그리스, 불가리아 등 발칸반도 국가 주민들에게 벌인 여러 학살의 책임이 오스만 제국의 것이라며 회피하는 논리와 비슷하다. 그래서 독일에서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비판할 때마다 튀르키예에서 헤레로족과 나마족 학살을 들먹이며 독일을 규탄한다.[3] 사실 독일은 굳이 이 문제가 아니어도 제2차 세계 대전과 스페인 내전 당시 나치로부터 전쟁 및 침략 피해를 입었던 네덜란드, 폴란드, 오스트리아, 그리스, 불가리아, 체코, 덴마크, 노르웨이, 스페인 등 여타 유럽 국가들에서도 상임이사국 진출을 반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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