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암리 사건 수원·화성 지역의 민간인 학살
1919년
파괴된 제암리 마을
국내 독립운동·국가수호 사적지(독립기념관)
1 개요
제암리 사건은 1919년 4월 15일,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 제암리(堤岩里)에서 발생한 일본군의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수원·화성 지역의 3·1 운동은 3월 중순에서 4월 초에 걸쳐 절정에 달하였다. 3월 31일, 향남면 발안리(發安里)의 장날에 1,000여 명의 군중이 모여 만세를 외쳤다. 이 시위에서 분노한 군중에 의해 일본인 순사부장이 사망하였고, 주재소와 일본인 상점도 불에 탔다. 일본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제암리 주민을 교회에 가둔 후 불을 질렀으며, 마을 전체를 불태웠다. 기록에 따르면 교회에서만 23명이 사망하였고, 인근의 고주리 주민도 6명이 사망하였다고 한다.2 수원·화성 지역의 3·1 운동, 일제의 탄압에 폭력으로 맞서다
수원·화성 지역의 3·1 운동 역시 다른 지역과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기독교와 천도교 지도자들에 의해 최초의 만세운동이 계획되었으며, 학생, 농민 등을 비롯한 일반 주민이 이에 결합하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시위 규모는 커졌으며, 일본 군경의 진압 역시 거세졌다. 이로 인해 평화적으로 이루어지던 만세운동은 점차 폭력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를 시계열적으로 정리하되 시위 장소가 비교적 명확한 것만 추리면 다음과 같다.
최초의 모의는 3월 11일 천도교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16일 서장대(西將臺)에서 만세 시위가 있었고, 21일에는 성호면 오산리(鳥山里)에서 박두병과 김재천 등의 주도하에 천도교인과 기독교인의 시위가 진행되었다. 23일에 성호면에서 700여 명의 군중이 시위에 참여하였으며, 20명이 체포되었다. 26일에는 송산면 사강리(沙江里) 주민들이 면사무소 앞에서 만세를 불렀으며, 27일에는 서산면에서 400여 명의 시위가 있었다.
수원·화성 지역의 만세운동이 격해진 것은 3월 28일 송산면 사강리의 시위부터이다. 장날을 기해 주재소 앞에는 700여 명의 군중이 모였다. 이를 주도한 홍면(洪冕)이 일본인 순사의 총에 중상을 입자 분노한 군중은 그를 살해하였다. 29일에는 성호면 오산리에서 장날을 기해 800여 명의 군중이 시위를 진행하였다. 유진홍과 안동순 등 주모자 7명이 체포되자 군중들은 주재소와 우편국, 면사무소를 습격하였으며, 일본인 상점과 가옥에 불을 질렀다. 수원 지역 곳곳에서 야간에 횃불시위가 시작된 것도 이때부터이다. 3월 31일, 1,000여 명이 참가한 발안리 장날의 시위는 군중과 일본 헌병이 매우 격렬하게 충돌하였다. 일본 헌병의 발포로 인해 조선인 3명이 부상을 당하자 격분한 군중은 일본인 순사부장을 살해하였다. 또한 일본인 보통학교와 우편국, 면사무소에 불을 질렀다.
4월 3일, 우정면 주곡리 주민과 장안면 석포리, 수촌리 주민이 합세한 시위도 매우 격렬하였다. 이들은 장안면사무소 앞에서 만세를 외치고, 우정면사무소와 화수리 주재소로 향해 투석전을 벌였다. 이미 1,500명으로 늘어난 시위 인원을 향해 일본 헌병의 진압은 매우 폭력적이었다. 주재소 헌병의 발포에 흥분한 군중은 주재소를 불태우고 가와바타(川端) 순사를 살해하는 등,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일제는 이에 대한 보복을 계획하기 시작하였다.3 사람을 가두고 불을 지르다
3월 31일의 발안리 시위 직후에 경기도장관 등은 조선총독부 경무국(朝鮮總督府 警務局)에 진압 지원을 요청했다. 경성(京城, 서울)의 헌병대장 시오사와(鹽澤義天)와 경무부 경시 하세가와(長谷川部巖)가 주도하여 편성한 헌병과 경찰의 혼성부대가 4월 2일 수원·화성 지역에 파견되었다. 이 부대의 진압 작전은 2차에 걸쳐 매우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4월 2일부터 6일에 걸쳐 진행된 1차 진압은 발안리 시위에 대한 실력 행사에 가까웠다. 4월 3일 장안면 화수리(花樹里)에서 일어난 2,000명 이상의 대규모 시위에서 일본인 순사 1명이 사망하자 진압 작전은 더욱 거칠어졌다. 수촌리(水村里) 출신의 김교철과 백낙열을 비롯해 차인범, 정순영, 이순모 등이 체포되었고, 수십 호의 민간인 가옥이 소실(燒失)되었다. 진압 부대는 4월 6일에 경성으로 철수하였으나 이후 발안리를 중심으로 시위가 계획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4월 9일부터 16일에 걸쳐 2차 진압을 단행하였다. 오산리와 사강리, 발안리 등을 포위하고 주모자를 검거하였으며, 민간인 가옥에 무차별적으로 불을 질렀다.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2일부터 14일까지 이루어진 진압 작전으로 803명이 검거되었고, 1,202명이 훈방되었으며, 10명이 사망하고 19명이 부상당하였다. 또 276호의 가옥이 전소되었다.
3월 31일의 시위 이후, 일본 군경은 발안리 주변을 진압의 거점으로 삼았다. 발안리와 “그 이서(以西)의 인후부”에 해당하는 제암리·고주리를 확보하면 시위의 확산을 막을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4월 12일, 진압 부대가 발안리를 떠나자 이튿날 중위 아리타(有田俊夫)가 이끄는 육군 보병 79연대가 이곳의 치안을 맡기 위해 도착하였다. 15일 오후 2시경에 발안리 장터에서 400명 규모의 만세 시위가 재차 일어났고, 이를 해산시킨 아리타는 기독교와 천도교가 문제의 화근이라고 보았다. 오후 4시경에는 제암리에서도 시위가 발생하였다. 아리타 중위를 필두로 한 11명의 보병은 조선인 순사보 조희창(趙熙彰)과 발안리에 살던 일본인 사사카(佐坂)의 협력을 얻어 제암리 주민의 도주로를 막고, 주민 20여 명을 교회당에 소집하였다. 교회당 안에서 훈계를 끝낸 아리타는 곧바로 사격 명령을 내렸다. 사격이 끝나자 교회당에 석유를 끼얹고 불을 질렀다. 몇몇 사람이 탈출을 시도했지만 밖에서 대기하던 군인들에게 죽임을 당했으며, 노경태(盧慶泰) 한 사람만 살아남았다. 군인들은 고주리에서도 천도교도 김흥렬(金興烈) 등 6명을 살해하고 민가에 불을 질렀다.
1926년 11월에 발행된 『천도교회월보(天道敎會月報)』와 유족의 증언 등을 통해 희생자의 면면을 파악하면 다음과 같다.
강태성(姜泰成), 김씨(강태성의 부인), 김씨(홍원식의 부인), 김덕용(金德用), 김성렬(金聖烈), 김세열(金世烈), 김정헌(金正憲), 김주남(金周男), 김주업(金周業), 김흥렬(金興烈), 김흥복(金興福), 안경순(安慶淳), 안관순(安官淳), 안명순(安命淳), 안무순(安武淳), 안봉순(安鳳淳), 안상용(安相溶), 안유순(安有淳), 안정옥(安政玉), 안종락(安鍾樂), 안종린(安鍾麟), 안종엽(安鍾燁), 안종환(安鍾煥), 안종후(安鍾厚), 안진순(安珍淳), 안필순(安弼淳), 조경칠(趙敬七), 홍순진(洪淳晋), 홍원식(洪元植)
희생자 중에 6명은 종교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안명순, 안무순, 안유순, 안종락, 안종엽, 안필순), ‘자신은 기독교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화를 피할 수 있었다’는 생존자의 증언과 당초 아리타가 기독교와 천도교를 시위의 화근으로 보았던 점 등을 고려하면, 기독교인이거나 천도교인일 가능성이 크다. 종교를 확정할 수 있는 이들 중에 기독교인은 강태성, 김씨 2명, 김덕용, 김정현, 안봉순, 안종후, 안진순, 조경칠, 홍원식 등 총 10명이며, 나머지 13명은 천도교인이다.4 선교사가 제암리 사건의 진상을 기록하다
당시 조선에서 활동하던 많은 선교사들은 3·1 운동에 가담하였다. 미국인 선교사 노블(M. W. Noble)은 미국영사관에 일제가 교회당을 불태우고 선교사를 박해한 사건을 조사하고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했다. 부영사 커티스(R. S. Curtice)는 선교사 언더우드(H. H. Underwood), AP통신원 테일러(A. W. Taylor), 운전수 중국인 임(Yim)과 함께 4월 16일 수원 지역을 방문하였다. 원래는 4월 6일 발생한 수촌리 방화사건을 조사하려 했지만, 이 과정에서 우연히 제암리 사건 현장을 발견하였다. 이들은 이에 대한 조사보고서를 작성하여 4월 21일에 미국 총영사 버그홀츠(L. A. Bergholz)에게 보고하였다.
제암리 사건은 일제의 기독교 탄압의 대표적인 사례로 선교사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적지 않은 선교사들이 직접 제암리를 방문했다. 4월 18일에는 선교사 스코필드(F. W. Schofield)가 현장을 방문하였다. 19일에는 스코필드와 영국 대리영사 로이즈(W. M. Royds), 테일러, 노블, 케이블(E. M. Cable), 벡(S. A. Beck), 빌링즈(B. W. Billings), 헤론 스미스(F. Herron Smith)가 방문하였다. 스코필드는 20일에도 방문하였다. 이들 선교사들은 제암리사건을 기록으로 남기고 이를 국제사회에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특히 스코필드는 제암리와 수촌리 곳곳을 조사하고 이를 사진과 함께 보고서로 남겼다.
제암리 사건이 국내외에 알려지자 일본은 사건 처리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총독부와 조선군 사령부는 학살과 방화를 부인하는 대신에 진압 방법에 문제가 있었다면서 아리타를 30일 간의 중근신(重謹愼)에 처하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이 외교문제로까지 불거질 기미를 보이자 “일단 심문하여 사실을 명료히 하기” 위해 아리타를 군법회의에 회부하였다. 당시 조선군 사령관이던 우쓰노미야(宇都宮太郞)는 군법회의에 붙여진 아리타를 적극 옹호하였다. 결국 8월 21일 군법회의에서는 “피고(아리타)는 임무 수행에 필요한 수단으로서 당연히 해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범죄의 의도가 없다”며 무죄가 언도되었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제암리 사건은 1919년 4월 15일,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 제암리(堤岩里)에서 발생한 일본군의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수원·화성 지역의 3·1 운동은 3월 중순에서 4월 초에 걸쳐 절정에 달하였다. 3월 31일, 향남면 발안리(發安里)의 장날에 1,000여 명의 군중이 모여 만세를 외쳤다. 이 시위에서 분노한 군중에 의해 일본인 순사부장이 사망하였고, 주재소와 일본인 상점도 불에 탔다. 일본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제암리 주민을 교회에 가둔 후 불을 질렀으며, 마을 전체를 불태웠다. 기록에 따르면 교회에서만 23명이 사망하였고, 인근의 고주리 주민도 6명이 사망하였다고 한다.2 수원·화성 지역의 3·1 운동, 일제의 탄압에 폭력으로 맞서다
수원·화성 지역의 3·1 운동 역시 다른 지역과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기독교와 천도교 지도자들에 의해 최초의 만세운동이 계획되었으며, 학생, 농민 등을 비롯한 일반 주민이 이에 결합하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시위 규모는 커졌으며, 일본 군경의 진압 역시 거세졌다. 이로 인해 평화적으로 이루어지던 만세운동은 점차 폭력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를 시계열적으로 정리하되 시위 장소가 비교적 명확한 것만 추리면 다음과 같다.
최초의 모의는 3월 11일 천도교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16일 서장대(西將臺)에서 만세 시위가 있었고, 21일에는 성호면 오산리(鳥山里)에서 박두병과 김재천 등의 주도하에 천도교인과 기독교인의 시위가 진행되었다. 23일에 성호면에서 700여 명의 군중이 시위에 참여하였으며, 20명이 체포되었다. 26일에는 송산면 사강리(沙江里) 주민들이 면사무소 앞에서 만세를 불렀으며, 27일에는 서산면에서 400여 명의 시위가 있었다.
수원·화성 지역의 만세운동이 격해진 것은 3월 28일 송산면 사강리의 시위부터이다. 장날을 기해 주재소 앞에는 700여 명의 군중이 모였다. 이를 주도한 홍면(洪冕)이 일본인 순사의 총에 중상을 입자 분노한 군중은 그를 살해하였다. 29일에는 성호면 오산리에서 장날을 기해 800여 명의 군중이 시위를 진행하였다. 유진홍과 안동순 등 주모자 7명이 체포되자 군중들은 주재소와 우편국, 면사무소를 습격하였으며, 일본인 상점과 가옥에 불을 질렀다. 수원 지역 곳곳에서 야간에 횃불시위가 시작된 것도 이때부터이다. 3월 31일, 1,000여 명이 참가한 발안리 장날의 시위는 군중과 일본 헌병이 매우 격렬하게 충돌하였다. 일본 헌병의 발포로 인해 조선인 3명이 부상을 당하자 격분한 군중은 일본인 순사부장을 살해하였다. 또한 일본인 보통학교와 우편국, 면사무소에 불을 질렀다.
4월 3일, 우정면 주곡리 주민과 장안면 석포리, 수촌리 주민이 합세한 시위도 매우 격렬하였다. 이들은 장안면사무소 앞에서 만세를 외치고, 우정면사무소와 화수리 주재소로 향해 투석전을 벌였다. 이미 1,500명으로 늘어난 시위 인원을 향해 일본 헌병의 진압은 매우 폭력적이었다. 주재소 헌병의 발포에 흥분한 군중은 주재소를 불태우고 가와바타(川端) 순사를 살해하는 등,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일제는 이에 대한 보복을 계획하기 시작하였다.3 사람을 가두고 불을 지르다
3월 31일의 발안리 시위 직후에 경기도장관 등은 조선총독부 경무국(朝鮮總督府 警務局)에 진압 지원을 요청했다. 경성(京城, 서울)의 헌병대장 시오사와(鹽澤義天)와 경무부 경시 하세가와(長谷川部巖)가 주도하여 편성한 헌병과 경찰의 혼성부대가 4월 2일 수원·화성 지역에 파견되었다. 이 부대의 진압 작전은 2차에 걸쳐 매우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4월 2일부터 6일에 걸쳐 진행된 1차 진압은 발안리 시위에 대한 실력 행사에 가까웠다. 4월 3일 장안면 화수리(花樹里)에서 일어난 2,000명 이상의 대규모 시위에서 일본인 순사 1명이 사망하자 진압 작전은 더욱 거칠어졌다. 수촌리(水村里) 출신의 김교철과 백낙열을 비롯해 차인범, 정순영, 이순모 등이 체포되었고, 수십 호의 민간인 가옥이 소실(燒失)되었다. 진압 부대는 4월 6일에 경성으로 철수하였으나 이후 발안리를 중심으로 시위가 계획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4월 9일부터 16일에 걸쳐 2차 진압을 단행하였다. 오산리와 사강리, 발안리 등을 포위하고 주모자를 검거하였으며, 민간인 가옥에 무차별적으로 불을 질렀다.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2일부터 14일까지 이루어진 진압 작전으로 803명이 검거되었고, 1,202명이 훈방되었으며, 10명이 사망하고 19명이 부상당하였다. 또 276호의 가옥이 전소되었다.
3월 31일의 시위 이후, 일본 군경은 발안리 주변을 진압의 거점으로 삼았다. 발안리와 “그 이서(以西)의 인후부”에 해당하는 제암리·고주리를 확보하면 시위의 확산을 막을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4월 12일, 진압 부대가 발안리를 떠나자 이튿날 중위 아리타(有田俊夫)가 이끄는 육군 보병 79연대가 이곳의 치안을 맡기 위해 도착하였다. 15일 오후 2시경에 발안리 장터에서 400명 규모의 만세 시위가 재차 일어났고, 이를 해산시킨 아리타는 기독교와 천도교가 문제의 화근이라고 보았다. 오후 4시경에는 제암리에서도 시위가 발생하였다. 아리타 중위를 필두로 한 11명의 보병은 조선인 순사보 조희창(趙熙彰)과 발안리에 살던 일본인 사사카(佐坂)의 협력을 얻어 제암리 주민의 도주로를 막고, 주민 20여 명을 교회당에 소집하였다. 교회당 안에서 훈계를 끝낸 아리타는 곧바로 사격 명령을 내렸다. 사격이 끝나자 교회당에 석유를 끼얹고 불을 질렀다. 몇몇 사람이 탈출을 시도했지만 밖에서 대기하던 군인들에게 죽임을 당했으며, 노경태(盧慶泰) 한 사람만 살아남았다. 군인들은 고주리에서도 천도교도 김흥렬(金興烈) 등 6명을 살해하고 민가에 불을 질렀다.
1926년 11월에 발행된 『천도교회월보(天道敎會月報)』와 유족의 증언 등을 통해 희생자의 면면을 파악하면 다음과 같다.
강태성(姜泰成), 김씨(강태성의 부인), 김씨(홍원식의 부인), 김덕용(金德用), 김성렬(金聖烈), 김세열(金世烈), 김정헌(金正憲), 김주남(金周男), 김주업(金周業), 김흥렬(金興烈), 김흥복(金興福), 안경순(安慶淳), 안관순(安官淳), 안명순(安命淳), 안무순(安武淳), 안봉순(安鳳淳), 안상용(安相溶), 안유순(安有淳), 안정옥(安政玉), 안종락(安鍾樂), 안종린(安鍾麟), 안종엽(安鍾燁), 안종환(安鍾煥), 안종후(安鍾厚), 안진순(安珍淳), 안필순(安弼淳), 조경칠(趙敬七), 홍순진(洪淳晋), 홍원식(洪元植)
희생자 중에 6명은 종교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안명순, 안무순, 안유순, 안종락, 안종엽, 안필순), ‘자신은 기독교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화를 피할 수 있었다’는 생존자의 증언과 당초 아리타가 기독교와 천도교를 시위의 화근으로 보았던 점 등을 고려하면, 기독교인이거나 천도교인일 가능성이 크다. 종교를 확정할 수 있는 이들 중에 기독교인은 강태성, 김씨 2명, 김덕용, 김정현, 안봉순, 안종후, 안진순, 조경칠, 홍원식 등 총 10명이며, 나머지 13명은 천도교인이다.4 선교사가 제암리 사건의 진상을 기록하다
당시 조선에서 활동하던 많은 선교사들은 3·1 운동에 가담하였다. 미국인 선교사 노블(M. W. Noble)은 미국영사관에 일제가 교회당을 불태우고 선교사를 박해한 사건을 조사하고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했다. 부영사 커티스(R. S. Curtice)는 선교사 언더우드(H. H. Underwood), AP통신원 테일러(A. W. Taylor), 운전수 중국인 임(Yim)과 함께 4월 16일 수원 지역을 방문하였다. 원래는 4월 6일 발생한 수촌리 방화사건을 조사하려 했지만, 이 과정에서 우연히 제암리 사건 현장을 발견하였다. 이들은 이에 대한 조사보고서를 작성하여 4월 21일에 미국 총영사 버그홀츠(L. A. Bergholz)에게 보고하였다.
제암리 사건은 일제의 기독교 탄압의 대표적인 사례로 선교사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적지 않은 선교사들이 직접 제암리를 방문했다. 4월 18일에는 선교사 스코필드(F. W. Schofield)가 현장을 방문하였다. 19일에는 스코필드와 영국 대리영사 로이즈(W. M. Royds), 테일러, 노블, 케이블(E. M. Cable), 벡(S. A. Beck), 빌링즈(B. W. Billings), 헤론 스미스(F. Herron Smith)가 방문하였다. 스코필드는 20일에도 방문하였다. 이들 선교사들은 제암리사건을 기록으로 남기고 이를 국제사회에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특히 스코필드는 제암리와 수촌리 곳곳을 조사하고 이를 사진과 함께 보고서로 남겼다.
제암리 사건이 국내외에 알려지자 일본은 사건 처리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총독부와 조선군 사령부는 학살과 방화를 부인하는 대신에 진압 방법에 문제가 있었다면서 아리타를 30일 간의 중근신(重謹愼)에 처하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이 외교문제로까지 불거질 기미를 보이자 “일단 심문하여 사실을 명료히 하기” 위해 아리타를 군법회의에 회부하였다. 당시 조선군 사령관이던 우쓰노미야(宇都宮太郞)는 군법회의에 붙여진 아리타를 적극 옹호하였다. 결국 8월 21일 군법회의에서는 “피고(아리타)는 임무 수행에 필요한 수단으로서 당연히 해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범죄의 의도가 없다”며 무죄가 언도되었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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