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책과 생각
박헌영…‘미국의 스파이’ 꼬리표를 떼다
남북이 함께 버린 공산주의자
편견 걷어낸 ‘무덤 위의 청원서’
“비겁자로 살았다는 증언 없어”
기자이세영수정 2019-10-19 11:23
등록 2009-09-04 19:15
〈박헌영 평전〉
〈박헌영 평전〉
안재성 지음/실천문학사·1만8900원
“혁명은 그를 배신했고 몽상은 깨졌지만, 적과 동지가 모두 그를 반역자라고 부르게 되었지만, 적어도 일제강점기의 그는 제국주의에 온몸을 던져 싸운 애국자였다. 해방 후에는 이승만 파시즘에 맞서 민중이 주인 되는 진정한 민주공화국을 만들어보려고 애쓴 민주주의자였다.”
<박헌영 평전>이란 이름이 붙어 있긴 하지만, 이 책은 단순한 인물 평전에 머무르지 않는다. 박헌영이란 실존 인물의 삶을 풀어내는 데 그치지 않고 그와 사선을 넘나들었던 식민지 조선의 좌익 혁명가들, 그들이 살았던 시대의 정치·사회상을 세밀하게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경성 트로이카> <이관술1902~1950> <이현상 평전>을 통해 잊혀진 토착 공산주의자들의 삶을 복원해온 소설가 안재성씨가 썼다. ‘반란의 수괴’도 ‘미제의 스파이’도 아닌 ‘혁명가 박헌영’의 모습을 편견 없이 보여주는 이 책은, 남과 북 모두로부터 배척받은 비운의 공산주의자를 위한 ‘신원(伸寃) 청원서’다. 박헌영에 대한 글쓴이의 약평은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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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길이 남을 위인이라거나 불세출의 영웅이라 찬양하기는 어렵다. 그는 공산주의 이론에는 탁월했지만 선동력과 포용력 등 대중정치가로서 필요한 정치수완은 거의 갖추지 못한 사람이었다. 근본 성품은 온후하고 지성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입장은 다분히 교조주의적이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글쓴이는 무엇보다 그에게 씌워진 간첩 혐의의 억울함을 벗겨내는 데 공을 들였다. 공산주의 신념을 구현하는 데 평생을 바친 박헌영에게 따라붙은 ‘제국주의 간첩’이란 꼬리표는, 그와 생사를 함께한 ‘조선의 혁명가들’ 전체의 삶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글쓴이는 단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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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은 죽는 그날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단 한 마디라도 공산주의에 대해 회의하는 말을 한 적이 없다. 공산주의 내부의 공격과 달리, 그는 일제의 간첩도 미제의 간첩도 아니었으며, 그 어떤 증언이나 기록에도 그가 비겁자로 굴었다는 내용은 없었다. 오히려 우익의 공격대로 철두철미한 소련파였으며 그것이 그의 치명적인 결함의 출발이었다. 그는 오로지 소련공산당과 스탈린이 나눠준 교과서대로 세상을 보려 했다.”
글쓴이에 따르면 박헌영의 간첩 혐의는 남로당계를 숙청하기 위해 김일성 일파가 날조한 것이다. 그가 일본의 첩자였다는 북한 쪽 주장에 대해 글쓴이는 “20년이나 첩자 노릇을 했는데도 돈 한 푼 없이 3차례에 걸쳐 10년의 감옥살이를 했다면 너무 야박한 보수를 받은 셈”이라고 비꼰다. 미국의 간첩이라는 혐의에 대해서도 “박헌영이 접촉한 미국 쪽 인물로 등장하는 이들은 미군 사령관 하지, 미국 대사관 일등서기관 노블, 선교사 언더우드, 육군대령 로빈슨 등 너무 잘 알려지거나 정보업무와 관련 없는 하급 장교들”이라며 “이 미국인들은 박헌영뿐 아니라 조선의 모든 정치가들과 접촉하는 게 임무였다”고 반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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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 재판 이후 주변국 움직임에 대한 기술도 흥미롭다. 박헌영 구명에 적극적이었던 인물 가운데 하나가 마오쩌둥이었다는 사실, 이것이 북한 연안파(친중파)를 고무해 김일성 축출 기도(8월 종파사건)로 이어지고, 결국 박헌영의 죽음을 앞당겼다는 분석도 주목할 만하다. 비판의 화살은 김일성 등 북한 지도부를 향해 겨눠진다.
“공산주의운동사에는 수많은 종파들이 등장하지만, 김일성의 빨치산 파벌처럼 철저하게 배타적인 종파는 존재한 적이 없었다. 특히 지배권력의 세습과 출신성분 구별, 거주이전 통제, 정보통제와 언론·출판·결사의 자유 제한 등은 명백히 봉건시대의 유물이었다.”
그런데 동구권의 붕괴와 함께 공산주의에 대한 사망선고가 내려진 지 20여년이나 지난 지금, 억울하게 죽어간 비운의 공산주의자들의 삶을 새삼 들춰봐야 할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글쓴이의 답변은 이렇다.
“일제하 공산주의자들의 투쟁 목표 속에는 반드시 하루 7시간 노동, 최저임금제 실시, 국민연금과 의료보험 도입 등의 요구가 들어 있었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와 사형제 반대 등의 요구도 필수적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의 역사적 역할을 부정한다면, 오늘의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를 그들에게 돌려줘야 한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이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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