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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02

이미숙1970-80년대 ‘일한연대’와 국경을 넘는 기독자들의 정보교환 네트워크

[나의 박사 논문을 말한다] 
> 문화·신학·목회 | (재)기독교서회

  1970-80년대 ‘일한연대’와 국경을 넘는 기독자들의 정보교환 네트워크
  
“トランスナショナルな公共圏とメディアの可能性に関する考察-1970~80年代における「日韓連帯運動」を事例に”
(트랜스내셔널 공론장과 미디어의 가능성에 대한 고찰–1970-80년대의 ‘일한연대운동’을 사례로)ㅣ
이미숙
도쿄대학대학원 학제정보학부,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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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80년대 한국 민주화운동에 대한 해외에서의 지원 및 연대는 한인이 많이 거주하던 미국(북미), 독일(유럽), 일본 등을 중심으로 활발히 이루어졌다. 조국의 민주주의와 인권 회복을 염원하던 재외한인들은 각 지역의 지식인, 활동가, 기독자 등과 연대하며 한국 군사정권을 비판하고 민주화 세력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거나 구속자 석방을 위한 시위 및 데모를 조직하기도 했다. 또한 해외 각 지역의 정부 및 국제 인권단체가 한국 정부를 대상으로 인권침해를 규탄하고 태도 변화를 촉구하는 메시지를 전달하도록 로비 및 청원 활동 등을 통해 압력을 가했다.
필자의 박사논문은 한국 민주화운동에 대한 해외의 지지 및 연대 활동을 특히 일본에서 일어난 ‘일한연대운동’1을 중심으로 파악해보고, 한국의 민주화운동이 갖는 초국가성(transnationality)과 그 정치적 함의를 밝히고자 했다. 한국과 일본은 구 식민지와 구 종주국이라는 관계를 갖고 있고, 냉전체제하 ‘반공’으로 묶인 ‘국가’ 간의 유대 속에서 제국주의 및 식민주의의 유산을 청산하지 못했으며, 이는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필자는 일본에서 ‘헤이트 스피치’ 데모가 한창이던 2010년대 초반, 일본 종합잡지 「세카이」에서 1970-80년대에 연재된 ‘T. K생’의 “한국으로부터의 통신”과 한국 민주화 세력으로부터 일본에 건네진 지하문서 및 일본 연대세력의 지지성명 등을 읽게 되었다. 그 당시에 국가를 넘어선 시민들 간의 교류와 연대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그리고 이러한 경험으로부터 도출할 수 있는 정치적 함의는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은 한국과 일본의 사회사 및 교류사 연구의 측면뿐만 아니라, 글로벌 사회에서 ‘국민국가’의 틀을 넘어선 시민들의 연대에 대한 다각적인 논의와 관심에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글에서는 박사논문 1, 2장에서 다룬 트랜스내셔널 공론장 및 트랜스내셔널 연대와 관련된 이론적 논의와 5장에서의 종합잡지 「세카이」를 중심으로 한 ‘일한연대’ 담론분석은 생략하고, 3장에서 기술한 일한연대운동의 전개를 간략하게 소개한 뒤, 이러한 연대를 가능하게 한 국경을 넘는 기독자들의 정보교환 네트워크 활동과 그 의미에 대해 분석한 4장의 내용을 소개하려고 한다. 이 연구를 위해 필자는 한국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서적, 활동가들의 회고록, 운동 미디어, 성명서, 전단지 등의 자료를 모으고 분석하는 작업을 진행했으며, 이와 더불어 한국, 일본, 미국, 독일 등의 관련 활동가들에 대한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 대상은 박형규, 오재식, 지명관, 쇼지 츠토무, 정경모, 와다 하루키, 폴 슈나이스, 패리스 하비, 도미야마 다에코 등이었으며, 인용하지 않은 예비조사 성격을 가진 인터뷰를 포함해 모두 36명에 대한 인터뷰를 진행했다.

1970-80년대 일한연대운동의 전개

1960년대 일본의 시민사회는 안보투쟁, 베트남전쟁 반대 운동 등으로 정치 및 사회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과 참여가 역사상 가장 높은 시기를 보냈다. 베트남전쟁 반대 운동에서는 미국의 전쟁에 협력함으로써 일본 및 일본 시민들이 ‘가해’에 가담하고 있다는 문제제기가 이루어졌다. 가해에 대한 의식화는 이후 민족 차별에 대한 재일조선인의 고발과 투쟁에 연대하는 일부 지식인들과 활동가들의 움직임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배경에서 1970년대 초 일본에서는 한국의 저항 시인으로 알려진 김지하와 ‘재일교포학생학원침투간첩단사건’(1971)으로 수감되어 고문을 당한 서승·서준식 형제에 대한 ‘구원운동’이 시작되었다. 김지하의 작품집은 1971년 일본에서 번역·간행되었고, 1972년 김지하가 풍자시 〈비어〉로 체포·구속되자 두 개의 ‘김지하구원위원회’가 결성되었다. 4월에 결성된 그룹은 화가 도미야마 다에코, 극단 ‘민예’의 요네쿠라 마사카네 등의 문화인과 국제앰네스티 일본지부를 중심으로 결성된 것이며, 5월에 결성된 그룹은 오다 마코토, 츠루미 슌스케 등 베트남전쟁 반대 운동에 관여했던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한 조직이었다. 한편, 재일한국인 유학생으로 한국에서 유학하다가 간첩 혐의로 수감된 서승·서준식 형제에 대해서는 동창회, 기독자 그룹, 학생 그룹 등에서 구원 활동을 펼치게 되며, 이는 ‘서군형제를 구하는 모임’(1971-90)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렇듯 1970년대 초 일본에서는 한국 군사정권에 의해 탄압받는 한국 민중에 대한 ‘구원’의 측면에서 한국 민주화운동을 지지하는 운동이 시작되었다.
‘구원’으로 시작된 운동은 그러나 운동 내외의 다양한 문제제기 속에 단순히 타자를 ‘구원’한다는 접근방식이 아니라, 일본/일본인의 ‘자기개혁’이 필요하다는 ‘연대’ 운동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러한 문제제기의 한 예로 1972년 5월에 결성된 김지하구원위원회가 김지하의 석방을 요구하는 서명을 한국 정부에 전달하기 위해 방한해 당시 연금 상태의 김지하를 만났던 에피소드를 들 수 있다. 일본의 대표적 지식인으로 알려져 있는 츠루미 슌스케는 당시 김지하를 만난 자리에서 “여기에 당신을 사형하지 말라는 취지로 세계에서 모아 온 서명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김지하는 “Your movement cannot help me. But I will add my voice to help your movement.”(당신들의 운동은 나를 도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들의 운동을 돕기 위해 내 목소리를 더하겠습니다.)라고 답했다.
츠루미 슌스케는 회고록에서 당시 김지하의 “완전히 대등한 인간관계”에 기반한 이와 같은 발언에 놀랐으며,2 이 에피소드는 이후 일한연대운동의 다양한 운동 미디어 및 전단지 등에서 연대의 의미를 성찰하는 계기로 회자된다. 즉, 김지하의 응답은 일본 연대세력에게 “안이한 지원운동에 대한 거절”이며, “일본인 자신을 구해내는 운동으로 나아가야 한다.”라고 해석되었다. 1974년에 결성된 ‘일한연대연락회의’의 사무국장 와다 하루키는 1975년 11월 「세카이」에 실은 “일한연대의 사상과 전망”이라는 글에서 “우리들은 [김지하의 응답을] 반복해서 듣고, 반복해서 말해왔다.”라며 타자(한국 민중)에 대한 억압에 가담하고 있는 일본/일본인의 모습을 발견하고 자기개혁을 통해 이를 바로잡는 것이 연대의 의미라고 논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일본이 한국에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한국의 민주화운동으로부터 배워야 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다.
자기개혁을 수반하는 연대운동으로서의 일한연대운동은 재일한국인정치범구원운동 및 김지하와 김대중 등 한국의 대표적인 민주 인사에 대한 구명운동으로 일어났다. 한편 한국의 군사정권과 결탁해 정치경제적 신식민주의를 통해 한국 민중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데 가담하고 있는 일본 정권과, 이러한 착취 및 가해 구조에 무관심한 일본 대중에 대한 비판의식을 담고 있는 다양한 시민운동으로 전개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74년 1월에는 일본기독교협의회를 중심으로 ‘한국문제기독자긴급회의’가 결성되었다. 결성을 알리는 성명문에는 “한국 기독자들의 신앙에 기반한 투쟁”에 “충격과 함께 날카로운 문제제기와 촉구”를 받았다며, 이는 “그들이 지금 생명을 걸고 싸우고 있는 한국의 정치 정세는 일본의 과거의 식민지 지배와 오늘날의 경제침략이 큰 요인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 외에도 1974년 4월에는 베트남전쟁 반대 운동에 참가했던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일한연대와 관련된 여러 시민 그룹의 연계조직으로 ‘일본의 대한정책을 바로잡고, 한국 민주화 투쟁에 연대하는 일본연락회의’(약칭 ‘일한연대연락회의’)가 결성되었다. 또한, 기생관광반대운동을 기점으로 형성된 여성연대운동(대표적으로 ‘아시아여성의 모임’이 1977년 3월 1일 결성), 공해수출반대운동, 노동운동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한 일한민중연대수도권연락회의(1979년 결성), 민족차별철폐운동 및 전후보상운동 관련 개별활동가 등이 재일한국인 민주세력과 느슨하면서도 긴밀한 연계 속에 일한연대운동을 전개해나갔다. 구체적인 활동으로는 한국과 일본 정부에 태도 변화를 촉구하며 구속자 석방 등을 요구하는 청원 활동, 서명운동, 집회 및 데모, 기도회, 세미나 및 학습 활동, 엽서 보내기 등의 캠페인 및 문화 활동 등이 있었다.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 및 김대중구명운동과 관련된 연대 활동 이후, 일한연대운동은 규모나 열기의 측면에서 축소된다. 그러나 연대 운동을 이끌었던 이들을 중심으로 한국과 일본 사회의 근원적인 문제이자 일본 민주주의를 저해하는 요소로 인식된 전쟁 및 식민지 지배에 대한 과거사 문제가 중점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한다. 1984년 ‘전두환방일반대운동’에서 와다 하루키(일한연대연락회의/연대위원회 사무국장), 요시마츠 시게루(재일한국인 ‘정치범’을 지원하는 모임 전국회의), 도미야마 다에코(김지하구원위원회 및 예술운동을 통한 일한연대운동)가 결의표명자로 등단한 집회에서는 “전두환의 방일은, 한일 양국이 강조하는 ‘신시대’의 시작이 결코 아니다. 또한 천황의 ‘말씀’ 같은 것으로 과거의 식민지 지배와 전쟁의 책임이 정리되는 것이 아니”라며 “식민지 지배와 전쟁 책임의 진정한 해결은 나라의 최고기관인 국회의 결의를 시작으로, 국민의 의사로 전 조선 민중에 대해 사죄를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또한 결의문에서 “우리들은 전두환의 방일을 반대하고, 오늘의 집회를 계기로 일본과 조선(한반도)의 진정한 우호관계 확립을 위해, 민중의 연대를 기초로, 지문날인 제도의 폐지 등 재일조선인(한국인)의 생활과 권리의 획득에 힘쓰고, 조선의 평화통일을 향한 운동을 더욱더 강화할 것이다.”(1984년 전두환방일반대 9·4중앙집회 결의안)라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이후 ‘전후 50년 국회결의를 촉구하는 모임’의 결성 등으로 이어진다. 또한 도미야마 다에코가 마츠이 야요리 등과 함께 1977년 결성한 ‘아시아여성의 모임’은 1980년대 말부터 한국 여성학자 및 활동가들과 연대하며 일본군 위안부(성노예) 문제를 국제사회에서 여론화했다. 이렇듯 초기에 ‘구원’으로 시작한 일한연대운동은 한국 민주화운동과의 연대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한국 민중의 고통에 가담하는 일본/일본인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자기개혁을 촉구하는 움직임으로 나아갔다. 박사논문 3장에서는 이와 같은 일한연대운동의 전개를 사진, 전단지, 성명서 등 여러 1차 자료의 이미지와 함께 정리, 소개했다.

국경을 넘는 기독자들의 정보교환 네트워크

이와 같은 일한연대운동의 배후에는 국경을 넘는 기독자들의 정보교환 네트워크가 작동하고 있었다. 1972년 츠루미 슌스케 등이 한국을 방문해 김지하와 만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네트워크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방한단은 지학순 주교를 통해 마산에 있던 김지하를 만날 수 있었는데, 이에는 김수환 추기경의 조카사위인 재일한국인 송영순을 중심으로 한 네트워크가 있었다. 송영순은 특히 가톨릭 네트워크를 통해 전달되는 한국으로부터의 다양한 정보를 번역하여 일본 연대세력에게 전하는 등 한국과 일본 및 세계를 잇는 정보교환의 매개자 역할을 했다. 이와 같은 정보교환 네트워크에는 이름을 남길 수도 없던 재일조선인, 재일한국인, 그리고 수많은 해외 한인동포와 현지의 협력자들이 존재했다. 이와 같은 국경을 넘는 정보교환 네트워크의 형성과 활동에 대해 박사논문 4장에서 분석했다.
특히 사회참여를 주창한 개신교의 에큐메니컬 기독교 네트워크는 각 국가와 지역의 교회협의회 및 세계교회협의회로 구성된 국제적인 정보망을 구축하고 있었다. 이는 언론통제 상황에 있던 한국의 다양한 지하정보를 세계로 발신하고 또 세계로부터 한국 민주화운동을 지지하는 연대세력의 정보를 다시 한국으로 보내는 중요한 정보교환의 축을 형성했다.
한국에서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및 인권위원회, 한국기독학생총연맹, 목요기도회, 갈릴리교회 등과 한국 내 외국인 선교사들의 월요모임 등이 활동하고 있었으며, 이는 1971년부터 아시아기독교협의회 도시산업선교회 간사로 일본 동경에 거주했던 오재식, 1972년 유학을 위해 일본에 왔던 지명관(1973-88년에 「세카이」에 ‘T.K생’이라는 필명으로 “한국으로부터의 통신” 연재), 1973년 미국에서 일본으로 온 김용복 등 한국인 기독자들과 개인적 연락망을 통해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오재식은 1973년 아시아기독교협의회 산하에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각국의 정치상황 및 다국적 기업의 활동과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고 민중운동을 지원하는 정보센터로 DAGA(Documentation of Action Group forAsia)를 설립했다. DAGA의 스태프로 오재식의 초청을 받아 1975년 일본에 온 패리스 하비는 1979년 미국으로 돌아간 뒤에는 ‘한국 인권문제를 위한 북미주연합’(The North American Coalition for HumanRights of Korea)의 사무국장으로서 미국 의회를 대상으로 로비 활동 등을 전개했다. 또한 미국, 독일, 캐나다, 일본, 영국 등지의 한국인 기독자들은 캐나다에 있던 김재준 목사를 중심으로 1975년 ‘한국민주사회건설세계협의회’(이후 ‘한국민주화기독자동지회’)를 조직하고 정보를 교류했다. 이러한 국제적인 한국인 기독자들의 정보교환 네트워크는 각 지역의 현지 기독자 및 활동가와의 연계 속에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다양한 연대활동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일본에서는 1974년 1월 일본기독교협의회를 중심으로 결성된 ‘한국문제기독자긴급회의’(이하 ‘긴급회의’)가 한국인 기독자들과의 연계 속에 일본으로 전해오는 정보의 메신저 및 매개점 역할을 했다. 도쿄 니시와세다에 있는 기독교회관 5층에는 오재식의 사무실이 있었으며 그 맞은편에서는 재일대한기독교총회의 사무실이 있었다. 또한 2층에는 일본기독교협의회 사무실이 있었고, 그 사무실의 한쪽에 긴급회의가 있었다. 당시에는 한국으로 가는 직항편이 없던 시절이라, 해외 선교사들은 한국을 가기 위해서 일본을 들러야 했으며 일본에서는 니시와세다의 기독교회관을 방문하는 것이 기본이었다고 한다. 이에 긴급회의 관련자 및 해외 선교사들은 오재식 등으로부터 한국에서 누구를 만나고 어디를 방문할지, 그리고 무슨 정보를 가져가고 가져올 것인지 등의 정보를 얻어 메신저의 역할을 했다. 1975년 독일에서 일본으로 온 선교사 폴 슈나이스는 이러한 정보 메신저의 역할과 더불어, 1977년 말 한국 입국금지 후 1984년까지 정보 메신저 조정 역할을 했다고 한다. 당시는 일본 내에서 한국 정보기관의 활동도 활발했기에 한국에서 정보를 받아 일본으로 들어오면 바로 직접적으로 한국인 기독자들에게 이를 전달하기보다는 기독교회관 2층의 긴급회의 사무실에 전달해 오재식 등 한국인들에게 전달되도록 했다고 한다.
이러한 정보교환 네트워크는 언론통제하에도 불구하고 한국 민주화운동 세력의 문제의식 및 상황에 대한 당사자들의 목소리가 직간접적으로 전달되는 통로를 형성했으며, 일본의 연대세력은 이를 바탕으로 연대와 관련된 담론을 만들고 활동을 형성함과 동시에 당시 리버럴한 언론을 통해 일반 대중에게도 한국 민주화운동과 연대운동을 여론화하는 데 기여했다.3

나가며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한국의 정치사회사이면서 동시에 초국적 사회사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일본에서는 재일한국인 민주세력과 더불어, 이들과 연계하는 형태로 일본의 진보적(혁신적) 지식인, 기독자, 문화인, 활동가들이 일한연대운동이라는 구체적인 움직임을 만들어냈고, 운동 내외의 다양한 문제제기 속에서 자기개혁, 즉 일본의 민주주의 운동으로 나아갔다. 즉, 한국 민중과의 연대를 통해 스스로(연대세력)가 주체가 되는 재귀적 민주화4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1980년대 이후 전개된 과거사 및 역사인식 문제는 따라서 한일 ‘관계’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의 민주주의 운동 속에서 도출된 근원적 과제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1987년 한국의 민주화 이후, 한일 시민사회의 교류가 더욱더 활발해짐에 따라 과거사 및 역사인식 문제와 관련된 다양한 형태의 한일 시민연대 및 협력이 형성되어 왔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전개되고 있는 일본의 역사수정주의 및 우경화는 가해의 망각과 더불어, 피해자로서의 일본/일본인 담론, 그리고 이에 기반한 ‘헤이트 스피치’의 양산으로 이어지는 형국을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은 일본 주류사회의 변동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본의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고 있는 일본의 양심적, 진보적 시민들이 존재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당신들의 운동을 돕기 위해 내 목소리를 더하겠습니다.”라는 김지하의 말처럼, 한일 시민연대는 이제 역사수정주의 태도를 보이는 일본 주류사회에 대항하는 일본 민주주의 세력과 지속가능한 정보교환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목소리를 더해가야 할 시점에 와 있는 것이 아닐까. 또한 한일 간의 공동과제와 더불어 다양한 세계적 과제에 대해 아시아 시민 및 글로벌 시민 수준에서의 연대를 형성하고 이를 타자의 구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개혁을 통해 한국 사회의 변혁을 추진해나갈 시점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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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註)

1 이 글에서 한국 민주화운동에 대한 일본의 지지 및 연대활동을 지칭할 때 ‘한일연대’가 아닌 ‘일한연대’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이는 1970-80년대 일본 내 활동가들이 쓰던 시민운동 조직명이나 집회명, 전단지 등에 사용된 ‘일한연대’라는 용어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2 회고록 『전쟁이 남긴 것』(2004)에서 츠루미는 만약 자신이 김지하였다면 고작 “쌩큐, 쌩큐” 정도밖에 말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김지하의 응답에 대해 인간으로서 감탄했다고 회상한다. 츠루미 외, 『전쟁이 남긴 것』(2004), 337.
3 이와 관련된 구체적인 내용은 박사논문 및 졸저 『‘일한연대운동’의 시대: 1970-80년대의 트랜스내셔널한 공론장과 미디어』(도쿄대학출판회, 2018) 4장과 5장에서 다뤘다.
4 타자와의 연대가 타자와의 ‘관계성’에 대한 성찰을 통해 결국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사회를 수정하고 개혁하고자 하는 민주주의를 향한 움직임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말한다. 미국에서의 사례에 대해서는 Misook Lee, “South Korea’s Democratization Movement of the 1970s and 80s and Communicative Interaction in Transnational Ecumenical Networks,” International Journal of Korean History Vol.19/2 (2004): 241-27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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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숙|일본 도쿄대학대학원 학제정보학부에서 사회정보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릿쿄대학 Global Liberal Arts Program 조교수로 재직하며 한일연대, 한일저널리즘, 미디어와 사회운동, 미디어와 젠더에 관한 연구를 진행 중이다. 저서로 『‘일한연대운동’의 시대: 1970-80년대의 트랜스내셔널한 공론장과 미디어』 등이 있다.

2021-03-20

장신기 손병관 기자님의 <비극의 탄생>을 보고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인데

(5) Facebook

장신기
 
[손병관 기자님의 <비극의 탄생>을 보고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인데

요즘 여성운동을 보면 극단적인 반공국가주의, 반일민족주의의 문제점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 같다.

3가지 모두 이념의 기반이 주어진 혹은 만들어진 집단적 피해의식에 기반한 정체성에 있다는 점이 공통점.
...

여튼 페미니스트들의 대응을 보면 남자인 나는 한일 민족 문제에 있어 마치 일본인이 된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이견 제시는 이단 혹은 피해공감 부재 더 나아가 2차 가해 뭐 이런 식으로 막 번져가기 때문에 참으로 곤란한 입장에 처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손병관 기자는 매우 용기있게 이 책을 쓴 것이다. 그래서 여성문제, 성관련 문제에 대해선 남자인 나는 한일간 민족 문제에 있어서 마치 일본인이 된 듯한 느낌을 받곤 한다. 
평소에 여성 문제 등에 있어 남자 중에선 이에 대한 이해도 비교적 있는 편이고 평소 행동도 신중하게 문제없이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만, 페미니스트들의 입장을 보면 도저히 다가갈 수 없는 벽을 느낀다. 
여튼 그런 식으로 2차가해라고 대응할 것이라면 애초에 이런 류의 사안에 대해선 사적인 해결을 지향하는 것이 맞다. 공인을 상대로 공적인 문제제기를 하면서 관련된 여러 논의 중에서 자신들의 심기에 불편하고 이견이 있는건 모두 2차가해라고 해버리면 왜 공적인 문제제기를 하나? 사적인 문제해결을 했어야지.

여튼 페미니스트들의 대응을 보면 남자인 나는 한일 민족 문제에 있어 마치 일본인이 된 듯한 느낌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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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정철승
평소 장 선생님의 진중한 의견을 경청해왔는데, 이 포스팅은 무척 뜻밖입니다. 한일 관계가 과거사 문제로 지난 수년간 갈등과 엇박자가 심화되고 있는 이유를 이영훈류가 지껄이는 반일종족주의 비슷한 우리의 문제(망상적 집단적 피해의식?)때문이라고 말씀하시는 듯한 감이 드는데, 정말 그렇게 인식하고 계시는 겁니까?
1. 일제강점의 인적 제도적 청산이 이뤄지지 않은 후유증이 해방 80년이 다 되어가는 현재에도 갈 수록 심화되고 있다는 사실, 2. 우리에 대한 침략과 가해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일본은 잠재적인 적성국가로 남게 될 수 밖에 없다는 사실 이 두 가지가 일본과 관련하여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국내외의 문제입니다.
이런 단순하고 명백하며 객관적인 문제를 어떻게 망상 비슷한 집단적 피해의식때문이라고 인식할 수 있는지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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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신기
말씀하신 맥락과는 다른 차원입니다. 그래서 '극단적'이라고 제한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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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신기
현재 한국 사회의 여러 문제점을 북한 혹은 일본의 책임에 있다는 식으로 환원론적으로 단정하고 접근하는 시각을 극단적이라고 봅니다. 극단적 환원론, 그것은 현실적으로 맞지 않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시각은 해방과 전쟁 이후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악전고투 끝에 발전을 이뤄낸 우리 국민 우리 민족의 역량에 대한 잘못된 진단과 해석이라고 봅니다. 저는 페미니즘의 접근 태도와 방식이 위에서 거론한 극단적 환원론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고 보기 때문에 그렇게 적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것은 해당이 안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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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승
장신기 굳이 우리 사회에서 가장 예민한 상처인 한일 과거사 갈등, 친일청산의 문제를 부정적인 사회현상의 예로 들면서 극단적이고 비이성적으로 왜곡된 경우로 제한한 것이라고 변명하듯 설명하시는 이유에 대해 석연치 않은 느낌을 갖게 됩니다. 차라리 태극기 부대, 기독교 광신자들, 극우유튜버, 일베 등과 같은 보다 적절한 예들이 얼마든지 있는데 왜 이러시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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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신기
반독재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한국의 민주화 세력을 지지하고 지원하여 한일연대의 위대한 역사를 만들어낸 일본인 지식인 활동가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분들이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해법에 있어선 한국의 활동가들과 미묘한 입장 차이를 보이는 경우가 있고 그것으로 인해 큰 비난을 받는 것을 보고 안타까운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본문의 글은 현재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을 나타낸 것인데, 페미니즘의 태도와 시각을 보면서 평소 위에서 말씀드린 '일본인 지식인 활동가'와 제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습니다. 그래서 글을 그렇게 쓰게 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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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태성
장신기 짧은 생각이냐 장선생은 장선생의 관점에서 정변은 정변의 관점에서 우선하는 사고의 접근방법 우선의 시각들이므로 특별히 신경들을 쓰실 일이 아니지 않을까 해봅니다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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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신기
정철승 평소 여성운동에 대한 이해도 많이하는 남자인데, 현재 여성운동의 기조 등을 보면 결국 남자인 제가 일체화하기 힘든 것으로 보이고 그것이 결국 정체성의 차이에 기반한 것 같고 그러면서 평소 생각했던 일본인 활동가가 생각났다 뭐 이런 것입니다. 저는 친구공개로 단상을 주로 쓰다보니, 그런 배경 설명은 생략된 측면이 있습니다.
 · Reply · 6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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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신기
고태성 정변호사님께서는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서 평소 존중하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다보니 아무래도 좀더 상세한 댓글을 남기게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친구공개로 글을 올리므로 길든 짧든 댓글에 대해선 답을 남기려고 합니다.
 · Reply · 6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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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승
장신기 그렇다면 '극단적'인 경우로 제한했다는 말씀과도 맞지 않는군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개인적 경험을 너무 확장시키신 것 같습니다. 반일민족주의, 집단적 피해의식, 한일 문제.. 이렇게 거칠게 넓혀서 언급할 일이 아닌 것 같은데..
물론 그러고 싶은 마음이 있으니 그렇게 하셨을 것이고, 그에 대해 강한 어조의 반론이 제기되니 이렇게 설명이랄까 해명을 하신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 유쾌하지 않은 대화는 그만 줄이겠습니다만.. 마음이 무척 무겁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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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Reply · 6 d · Edited
고태성
장신기 장선생의 전공 사회학적시각과ㅡ독립유공자후손정변의 시각차는 처지가ㅡ전혀ㅡ다른지라입니다ㅡ괘념치 마세요!
제가
박원순책을 읽어 보지는 않았으냐ㅡ제가ㅡ살아온 연륜을 우선할수밖에 없는 세대라서ㅡ제가ㅡ짧은 생각이냐ㅡ두분다ㅡ처지에 맞게 접근 판단 하셨음에 공감하구 있으므로.. .
 · Reply · 6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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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신기
고태성 이 책에 대해서 여성운동측에서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긴 합니다. 2차가해로 그렇게 몰아부친 것에 대한 자성이 필요할 듯 한데, 가능할지 모르겠네요.
 · Reply · 6 d
Hyuk Bom Kwon
정철승
 · Reply · 5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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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순
존경하는 정철승 변호사님, 장신기 선생님께선 미투운동 또는 페미운동이 지나치게 상대방에 대한 극단적 혐오, 억울한 피해자가 발생할 가능성, 지나치게 정치논리,진영논리화 되어가는점등을 우려하면서 그 문제를 한일관계에 비유하신 것 뿐입니다. 비유가 적절치 않다고 하셨는데, 그러면서 열거하신 정변호사님의 다른 사례도 보는이에 따라서 오해의 소지는 분명 있었을것입니다. 저명하신 변호사님들 조차도 종종 숲은 보지않고 나무만 보고 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을 보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아 유감스러울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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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Reply · 5 d
Write a reply…

김형빈
요새 패미들은 유아적 자기중심주의의 극단이지. 점점 자기들끼리 통하는 옹알이가 늘어나더라
 · Reply · 6 d
장신기
김형빈 공감대 형성을 어렵게 하는 면이 있음
 · Reply · 6 d
김형빈
장신기 페미뿐 아니라 온 나라에 억울한 분 천지삐까리다
 · Reply · 6 d
Hongjung Bae
전체적으로 현재 한국의 페미니즘문화에 대해서 얘기하시는 점 동감이나, 반일민족주의와 동일선상에서 논하는 것은 이 글에 대한 주요논리를 훼손하는 것 같습니다.
 · Reply · 6 d · Edited
장신기
정철승님의 댓글을 보시면 이와 관련해서 제 의견을 드렸습니다.
 · Reply · 6 d
남광우
음~!
 · Reply · 6 d
박진동
여성운동이 마치 토끼가 고양이의 육식을 비난하는 듯한 억지스런 어리광으로 머물러 있기 때문에 위험해지는 것이고
친일파들의 저항 명분이 되는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 Reply · 5 d
박준현
저는 손기자의 추론이 결국 박원순감싸기라는 생각밖에 안들더군요.
진실은 앙상하고 신밖에 모른다. 그러므로 박원순이 잘못이 없었음에도 이런일에 휘말려서 후폭풍이 두려워서 자살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끌어가는데, 그게 진정한 용기였을까요?
저는 이 책이 극단적페미니즘과 과도한 언론에 대한 비판의 탈을 쓴 박원순 감싸기 혹은 물타기로 보였습니다.
 · Reply · 5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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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신기
박준현 전 박시장이 자살하지 않고 대응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매우 무책임한 행동을 했다고 생각했고 이 책을 보고 그 생각을 더 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이 사안의 전개과정에서 여성운동 쪽의 문제점이 있다고 전 생각합니다.
 · Reply · 5 d · Edited
박준현
장신기 저는 이 사건에서 소위 친문분들의 대응이 더 문제라고 봅니다.
 · Reply · 5 d
Hyuk Bom Kwon
많은 분들이 페미니즘에 거부감이 있군요. 그걸 극복해야...
 · Reply · 5 d
장신기
Hyuk Bom Kwon 그런 경향은 있는 것 같습니다
 · Reply · 5 d
Alice Choi
박시장님이 성희롱으로 잘 못 하신 것은 맞는데 그 이후 이 사건을 다루는 모습들이 너무 폭력적이라 완전 질려 버렸어요. 성폭력이라는 단어가 너무 남용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 Reply · 5 d
장신기
Alice Choi 사안의 성격이 그런 면이 있는데다가 정치적 이유까지 더해져서 그런 것 같아요

2021-02-20

정경모 - 위키백과, 시대의 불침번 - 정경모 자서전

정경모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정경모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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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모(鄭敬謨, 1924년 7월 11일 ~ 2021년 2월 16일)는 대한민국의 통일운동가이자 정치평론가, 저술가이다.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의 독재에 반발하여 일본으로 망명,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진력한다. 1989년 문익환 목사와 평양 방문을 결행하여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 허담 위원장과 함께 4·2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이는 2000년 6·15 남북 공동성명의 초석으로 평가받는다.


목차
1 생애
2 저서
3 일역서
4 각주
생애
정경모 鄭敬謨


2018년 삼일절 자택에서의 정경모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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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24년 7월 11일
일제강점기 경기도 시흥군 영등포면 안골마을 (현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당산로2가 이백채길)
사망 2021년 2월 16일 (96세)
거주지 일본국 요코하마시 히요시 (日吉)
성별 남성
국적 대한민국
본관 동래
학력
  • 영등포면 홍화유치원 졸. 
  • 일제감정기 경성부 경기공립중학교 졸 (1937 ~ 1942). 
  • 일본국 게이오대학교 의학부 예과 수료 (1943 ~ 1945). 
  • 대한민국 서울대학교 의학부 중퇴 (1945 ~ 1947). 
  • 미국 에모리대학 문리대 졸업. 동대학원 화학과 중퇴 (1947 ~ 1950 ).

경력
  • 일본국 토쿄 맥아더 사령부 통역관
  • 한국전쟁 휴전회담 판문점 통역관 (1950.10 ~ 1956.5)

종교 무교

형제 2남 1녀 중 장남
배우자 나카무라 지요코 (1924~ )
자녀 2남. 정강헌 (1954~ ) 정아영 (19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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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삼일운동 이전 정경모의 부친 정인환 장로는 영등포에 개척교회를 운영하면서 '홍화유치원'을 설립하였고 아들 정경모가 여기서 수학한다. 이후 정인환은 개척교회를 그만두고 큰 독이나 항아리 같은 것을 만들어 파는 사업을 시작하였는데 을축년 홍수의 수해구제로 받은 자금을 기반으로 '영등포 토기조합'을 조직, 공장을 증설하여 조선 전역을 판로로 삼는다.[1] 시간이 지나 일본의 공업시설이 영등포 지역으로 몰려들면서 지역의 토지 가격이 급상승한 덕에 부동산 거래로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정인환은 이 자금으로 영등포에 최초의 영단주택단지를 조성하는데 주택을 200채 지어 '이백채마을'로 불렸고 이는 현재 영등포구에 위치한 '이백채길' 명칭의 유래이다. 하지만 영단주택의 개념이 미흡한 당시 입주자 대부분이 집세를 내지 않아 사업은 실패하고 집안은 어려워진다.

정경모는 지역에서 소학교를 마치고 중학교 진학을 고민하던 중, 그때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던 평양의 숭실중학교에 지원하려 하였으나 연고지 관계로 포기하고 경성부 경기공립중학교에 입학한다. 이때 민족주의 신학자인 김교신 선생한테 수학한다. 교련 점수가 낙제점으로 졸업 후 조선에서 대학교 진학이 어려워 도일, 1년간 재수 끝에 게이오대 의학부에 합격하였다. 의학부를 선택한 이유는 1942년부터 의학부, 이공학부에 한 해 군입대를 면제해 주었기 때문이다. 
게이오대 수학 당시 학교 인근 요코하마시 히요시에 위치한 민가에서 하숙하였는데 동갑인 주인집 외동딸과 가족처럼 지냈다. 전쟁 말기 토쿄 대공습을 피해 단신 귀국하면서 하숙집 모녀에게 전쟁이 끝나면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한다.  
해방 후 서울대학교 의학부에 편입한다. 당시에는 일본 의과대학 재학중인 자는 한국 의과대학으로 편입이 허용되었다. 서울의대 재학 중 해부학교실 라세진 교수에 끌려 해부학에 심취하지만 조선을 해방시켜 준 미국을 동경하여 1947년 의학공부를 중단하고 이승만 장학금을 받아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떠나기 전 경교장에 머물던 김구 선생을 알현한다.  1950년 미국 에모리대학 문리학부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화학과로 진학한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주미대사 장면의 요청으로 토쿄에 위치한 맥아더 사령부에 통역관으로 지원하여 문익환, 박형규 목사 등과 함께 미국 국무성 직원 자격으로 근무하게 된다. 1951년 7월  과거 게이오대를 다닐 때 하숙했던 집의 딸인 지요코와 재회하여 문익환 목사의 주례로 결혼한다. 결혼 후 부인은 한국 국적을 취득했지만 일본 여성과의 결혼을 보고받은 이승만은 장학금을 끊는다. 1951년 10월 판문점에서 휴전 회담이 시작되면서 이듬해 초부터 판문점에 통역관으로 파견되어 정전 협정에 이르는 역사적인 과정을 목도하게 된다.

1956년 사상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미군으로부터 기피인물로 지목 받아 해직 당한다. 따라서 미국 비자 발급이 불가해져 에모리 대학에서 학업을 이어갈 계획은 무산되고 자리가 잡히면 부인과 큰아들을 불러들일 계획으로 혼자 한국으로 귀국한다. 이후 서울에서 노모와 함께 셋방살이를 하며 대학 시간강사나 이 회사 저 회사의 임시직원으로 전전하는 어려운 생활을 하다가 1969년 울산에 석유화학단지 건설이 시작될 무렵 기술고문으로 상공부에서 근무하였다. 당시에는 일본과는 정식교류가 없었기에 일본에 거주하는 부인과는 수삼년에 한번 사흘간의 통과비자를 얻어야만 겨우 만날 수 있었다. 도일날과 귀국날을 제외하면 일본 집에는 하루 정도만 체류할 수 있었다.

1970년 9월 박정희 대통령의 독재에 반발하여 처음으로 6개월 짜리 여권을 발급받아 일본으로 간다. 여권 만료 기한이 지난 후 일본에서 불법체류자로 지내다 자주 투고하던 아사히 신문사가 신원을 보증해주는 조건으로 일본에서는 망명에 해당하는 ‘특별재류허가’를 취득하였다. 이후 한국의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진력한다.

1972년 10월 유신이 선포될 무렵 일본에 체류 중이던 김대중 당시 신민당 국회의원을 토쿄에서 만나 교유한다. 둘은 갑자생 동갑내기다. 1973년 8월 8일 벌어진 이른바 김대중 납치사건 때 일본에서 적극적인 구명활동을 벌인다. 
당시 일본의 대표적인 시사비평지인 '世界 [세카이]'는 납치사건이 벌어진 당일판을 마침 한국특집으로 꾸몄는데 정경모가 기고한 ‘한국 제2의 해방과 일본의 민주화’와 납치 직전 이뤄진 김대중과 세카이 편집장 야스에와의 대담문 ‘한국 민주화에의 길 ‘이 실리면서, 납치사건과 연관되어 잡지가 전무후무하게 100만부 이상 팔리며 일본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킨다. 이에 일본 지식인들이 김대중 구출운동을 위해 ‘일한연대연합’이라는 단체까지 조직하였다.  
1973년 '한국 민주회복 통일촉진국민회의 [한민통]' 결성에 참여하고 '민족시보'에서 주필로 일하면서 한일 지식인, 정치인들과 함께 김대중 사건 해결과 김지하 석방 운동을 벌였다. 또한 영문으로 '코리아 뉴스레터'를 펴내 외신 기자와 외교관들에게 한국 정세를 알렸다. 
1979년 토쿄에 '씨알어학숙'이라는 글방을 개설하여 한국어와 한국사 강좌를 시행하였다. 1980년 5월 광주항쟁 당시 성명서를 발표하고 시위를 전개하였고 '한국민주 통일연합 [한통련]' 활동에 참여하였다. 
1980년대 초 정경모가 일본에서 발행한 '씨알의 힘'에는 한국과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들의 정치평론 글들도 다수 게재되었지만 황석영의 ‘한씨연대기’나 송기숙, 현기영의 소설같은 한국문학도 일본어로 번역되어 게재되었다. 
특히 1983년 6월 여운형, 김구, 장준하 세 선각자가 만나서 대화를 나눈다는 일종의 픽션집인 ‘雲上經綸問答 [운상경륜문답]'이 정경모 작으로 실렸는데, 이 내용이 한국에서 '찢겨진 산하'라는 제목의 해적판으로 번역, 출간되어 당시 대학생들 사이에 큰 반향을 일으킨다. '씨알의 힘'은 1991년부터 '씨알 粒'로 이름을 바꿔 2004년까지 발간되었다.

1989년 문익환 목사와 함께 평양 방문을 결행하여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 허담 위원장과 9개 항의 공동성명을 발표한다. 이것이 문익환-허담의 4.2 공동성명으로 정경모는 성명문의 작성을 주도한다. 4.2 공동성명을 통해 북한은 점진적 혹은 단계적 연방제로의 통일 방식도 수용할 의사가 있음을 내비쳤으며 이어 1991년 김일성 주석은 외교와 국방권을 일정 기간 지역 정부에 위임하고 점차로 이를 중앙 정부에 귀속시키는 단계적인 연방제를 정식으로 협의할 용의가 있음을 밝힌다. 따라서 4.2 공동성명은 북한의 완고한 연방제 통일안을 완화토록 한 최초의 합의서이며 이는 2000년 남북 정상이 조인한 6·15 남북 공동성명의 선행단계로서의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1992년 9월 재독음악가 윤이상 선생의 초청을 받아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민족 문제 강연회’에 참석하였다. 1995년 7월 평양 금수산기념궁전에서 열린 김일성 주석 1주기 추모식에 문익환 목사의 부인 박용길 장로와 함께 참석하여 김정일 위원장을 접견하였다. 국민의 정부시절인 2001년 문익환목사 기념사업회가 수여하는 제6회 '늦봄통일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나 이전 국가보안법 위반을 이유로 한국 정부에 의해 귀국이 불허되어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는 매우 섭섭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2003년 참여정부 시절에도 정부가 예산을 지원하는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가 해외 민주인사 초청행사를 열어 정경모를 초청하였으나, 주일 한국영사관 면접에서 과거 평양에 간 것은 실정법을 어긴 범죄였음을 인정하는 일종의 자수서를 작성하라는 요구를 거부하여 또다시 귀국이 불허된다.  
2009년 한겨레신문에 '한강도 흐르고 다마가와도 흐르고'라는 회고록을 연재하였다. 이후 한일 고대사에 관한 저술 작업에 몰두하였다.

2020년 가족들의 노력으로 한국 귀국이 거의 성사단계에 갔으나 이 또한 코로나 바이러스의 창궐로 무산되고 2021년 2월 16일 게이오대 유학 당시 하숙하던 요코하마시 히요시의 그 하숙집에서 부인과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폐렴 합병증으로 영면에 든다.

저서

[ある韓国人のこころ- 朝鮮統一の夜明けに] 朝日新聞社  1972 [어느 한국인의 마음-조선통일의 새벽에]
[日本人と韓国] 新人物往来社 1974 [일본인과 한국]
[韓国民衆と日本] 新人物往来社 1976 [한국민중과 일본]
[岐路に立つ韓国 : 中間決算(朴射殺)後の行くすえ] 未来社 1980 [기로에 선 한국 : 중간결산 (박사살) 후의 미래]
[日本を問う] 径書房 こみち双書 世界の本 [일본에 묻다] 1985
한국어판 [일본의 본질을 묻는다] 창비교양문고09  정경모 저 이호철 역  창작과비평사 1989
[南北統一の夜明け 朝米関係の軌跡をたどる] 井上澄夫編 技術と人間 2001 [남북통일의 새벽 조미관계의 궤적을 더듬다]
[찢겨진 산하] 거름 1992
[이제 미국이 대답할 차례다] 한겨레신문사 2001
[찢겨진 산하]  한겨레출판 재판 2002
[시대의 불침번]  한겨레출판 2010
일본어판 [歴史の不寝番(ねずのばん) 亡命 韓国人の回想録] 鄭剛憲訳 藤原書店 2011
일역서
[深夜 金芝河+富山妙子詩画集] 土曜美術社 1976 [심야 김지하 도야마 시화집]
[夢が訪れる夜明け 文益煥獄中書簡集] 監訳 シアレヒム社 1986 [꿈이 방문한 새벽. 문익환 옥중서간집]
ブルース・カミングス [朝鮮戦争の起源 解放と南北分断体制の出現] 全2巻 林哲、加地永都子 共訳 シアレヒム社 1989‐91 のち明石書店 브루스 커밍스 저 [조선전쟁의 기원. 해방과 남북분단체제의 출현]
ギャヴァン・マコーマック[侵略の舞台裏 朝鮮戦争の真実] 金井和子共訳 シアレヒム社 1990. 가번 맥코맥 저  [침략의 무대뒤 조선전쟁의 진실]
李炳注 [クーデター 朴正煕とその時代] 吾郷洋子共訳 シアレヒム社 1993‐96. 이병주 저 [쿠데타 박정희와 그 시대]
黄晳暎 [張吉山] 全3巻 シアレヒム社 1994‐96. 황석영 저 [장길산.]
黄晳暎 [客人] 岩波書店 2004. 황석영 저 [손님]
각주
 “동아일보 1928년 11월 30일자 4면”.
분류: 1924년 태어남2021년 죽음대한민국의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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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敬謨

出典: フリー百科事典『ウィキペディア(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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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 敬謨(てい けいも[1]、チョン・キョンモ[1]1924年7月11日[1] - 2021年2月16日[2])は、在日韓国人評論家[1]政治活動家翻訳家

生涯[編集]

日本統治下京城に生まれる。1942年京畿中学(現京畿高校)卒業。1945年慶應義塾大学医学部予科修了。1947年渡米、1950年エモリー大学文理大卒業。朝鮮戦争勃発と同時に当時の駐米大使張勉の勧めで米国防総省職員となり、板門店での休戦会談にも参加。韓国政府技術顧問、会社役員就任。

朝鮮戦争を米国の侵略と断じ、朴正煕など韓国独裁政権を批判して金芝河を支援した。1989年に文益煥英語版とともに北朝鮮を訪問し、金日成と会談。祖国平和統一委員会と共同で南北統一に関する声明を発表した[2]

2021年2月16日、老衰のため神奈川県横浜市内の自宅で死去。96歳没[2]

著書[編集]

  • 『ある韓国人のこころ 朝鮮統一の夜明けに』朝日新聞社 1972
  • 『日本人と韓国』新人物往来社 1974
  • 『韓国民衆と日本』新人物往来社 1976
  • 『岐路に立つ韓国 中間決算(朴射殺)後の行くすえ』未来社 1980
  • 『断ち裂かれた山河 雲上鼎談・韓国現代史』影書房 1984
  • 『日本を問う』径書房 こみち双書 世界の本 1985
  • 『南北統一の夜明け 朝米関係の軌跡をたどる』井上澄夫編 技術と人間 2001
  • 『歴史の不寝番(ねずのばん) 「亡命」韓国人の回想録』鄭剛憲訳 藤原書店 2011

翻訳[編集]

脚注[編集]

  1. a b c d 鄭敬謨』 - コトバンク
  2. a b c “在日評論家の鄭敬謨氏死去 89年に訪朝、金日成氏と会談”共同通信社. (2021年2月16日) 2021年2月16日閲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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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우리 모두 시대의 증인이 되자




찢겨진 산하의 저자로만, 멀게만 느껴졌던 정경모.

우리나라에 살지 못 하고 일본에 살고 있어서일까.

그와 동시대를 살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그가 살아온 시대를 우리도 살고 있는데.

그가 바라본 시대의 모습과 우리가 바라본 시대의 모습이 같지 않음에 놀라게 된다.

시대를 바라보는 눈. 그냥 있는 그대로 본다고 보이는게 아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바른 눈, 그 눈을 지니고 있어야 시대를 바라볼 수 있고, 시대의 불침번, 증인이 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지녀야 할 자세는 무엇일까?

옳음을 찾으려는 노력, 사물의 본질을 꿰뚫으려는 노력, 시대의 흐름에 휘둘리지 않는 의지.

그가 살아온 시대, 우리나라의 격변기.

우리가 잊고 있었던 것, 모르고 있었던 것을 이 책에서는 이야기 하고 있다.

본인이 직접 경험한 일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기에, 한국현대사의 여러 숨어있던 일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지금 이 시대,무엇이 옳은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비교할 수 있다.

전기문을 읽은 이유.

그 사람 멋있다. 훌륭하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지금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무엇이 올바른 삶인가를 성찰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지금도 우린 격변기를 살고 있다. 정경모의 삶을 통해 우리의 삶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는 기회를 가지면 좋을 듯하다.
- 접기
kinye91 2010-12-27 공감(2) 댓글(0)



[마이리뷰] 시대의 불침번

문익환 목사님과 함께 평양을 방문하여 4.2공동성명을 탄생시킨 정경모 선생님의 자서전. 민족주의자이자 반제국주의자로서 살아온 일생의 이야기가 오롯이 담겨 있다. 이름난 논객인 만큼, 여전히 경청해야 할 여러 역사적 사실들도 많이 담겨 있다. 어쩌면 가시밭길이었던 자신의 생을, 웃으며 ˝아무 유한이 없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삶의 기품이 아름답다. 시대의 불침번이라는 제목에서 느껴지는 패기와 자신감이 인상적이다.
ENergy flow 2015-08-16 공감(1) 댓글(0)








2021-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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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시아 비핵지대 | 살림지식총서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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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모두가 평화롭게 살아갈 아시아를 향해
『동북아시아 비핵지대』의 출판을 축하합니다
핵무기 없는 세계가 평화를 지킨다
비핵지대란 무엇인가?
동북아 비핵지대: 한반도평화와 동아시아 공동안보
비핵지대와 ‘공동의 평화’
식민, 피폭, 전쟁의 기억에서 연대의 미래로- 비무장지대(DMZ)에서 히로시마까지
한반도 핵문제와 동북아시아 비핵지대
비핵지대와 검증체제의 과제
모델 「동북아시아 비핵지대 조약」의 의미와 쟁점
모델 ‘동북아시아 비핵무기지대 조약’(2004.7)
모델 ‘동북아시아 비핵무기지대 조약’에 관한 메모



저자 및 역자소개
이삼성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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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와 서울대학교 대학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예일대학교 대학원 정치학과에서 정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통일연구원 연구위원, 가톨릭대학교 국제학부 교수, 일본의 리쓰메이칸대학교 객원교수를 지냈다. 현재는 한림대학교 정치행정학과 교수로 재임 중이며, 한림대학교 학술상(2010)ㆍ백상출판문화상(저작 부문, 1999)ㆍ단재상(1998)을 수상했다. 주요 저서로는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1ㆍ2』(한길사, 2009), 『세계와 미국: 20세기의 반성과 21세기의 전망』(한길사, 2001), 『20세기의 문명과 야만: 전쟁과 평화, 그리고 인간의 비극에 관한 정치적 성찰』(한길사, 1998) 등이 있다. 또한 주요 논문으로는 박사학위 논문인 「American Political Elites and Changing Meanings of the Vietnam War: The Moral Dimension in Congressmen's Foreign Policy Perspectives」(1988)와 「한국전쟁과 내전:세 가지 내전 개념의 구분」(『한국정치학회보』, 2013), 「제국과 식민지에서의 '제국'」(『국제정치논총』, 2012), 「'제국' 개념의 고대적 기원:한자어 '제국'의 서양적 기원과 동양적 기원, 그리고 『일본서기』」(『한국정치학회보』, 2011), 「'제국' 개념과 19세기 근대 일본:근대 일본에서 '제국' 개념의 정립 과정과 그 기능」(『국제정치논총』, 2011), 「'제국' 개념과 근대 한국:개념의 역수입, 활용, 해체, 그리고 포섭과 저항」(『정치사상연구』, 2011)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분단생태계와 통일의 교량자들>,<한반도의 전쟁과 평화>,<공동체의 삶> … 총 15종 (모두보기)

정욱식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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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군사안보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2006년 9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 조지워싱턴 대학교 방문학자로 한미 동맹과 북핵 문제를 연구했습니다. 1999년 평화네트워크를 설립해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 《MD본색》, 《말과 칼》, 《사드의 모든 것》, 《핵과 인간》, 《비핵화의 최후》, 《한반도의 길, 왜 비핵지대인가?》 등이 있습니다.


최근작 : <흥미진진 핵의 세계사>,<한반도의 길, 왜 비핵지대인가?>,<한국사회논쟁> … 총 37종 (모두보기)

우메바야시 히로미치 (梅林宏道)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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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일본 효고(兵庫) 현 출생. 1965년 도쿄대학 수물계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으며 공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80년 대학 교원 사임 후 반핵 평화 운동가로서 NPO(비영리)법인 피스데포를 설립, 대표를 역임하고 현재는 특별고문을 맡고 있다. 2012년 나가사키대학 핵무기폐기연구센터장으로 취임한 후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핵군축을 목표로 하는 국제 NGO 중견국가구상(MPI) 운영위원 등을 맡고 있다. 저서로 《주일 미군》(이와나미 신서), 《미군 재편 ―그것이 노리는 것은》, 《아시아 미군과 신 가이드라인》(이와나미 부클릿), 《정보공개법으로 파악한 주일 미군》(고분켄) 등이 있고, 한국에는 한국, 미국 저자들과 함께 쓴 《동북아시아 비핵지대》, 《한반도의 선택》 등이 출간되었다. 접기


최근작 : <비핵무기지대>,<동북아시아 비핵지대>,<한반도의 선택> … 총 4종 (모두보기)

강정민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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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원자핵공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동경대학 시스템양자공학전공에서 핵공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한국원자력연구원 연구원을 거쳐, 미국 프린스턴대학 과학국제안보프로그램과 스탠퍼드대학 국제안보협력센터에서 객원연구원을 지냈다. 현재는 스탠퍼드대 경제정책연구소에서 객원연구원으로 머물면서 북핵 문제와 원자력 문제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국내외 매체에 활발한 기고 활동도 병행하고 있다.


최근작 : <핵무기>,<동북아시아 비핵지대> … 총 2종 (모두보기)

이준규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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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연대 코디네이터. 민주노동당 평화군축운동본부 정책위원으로서 평화운동을 시작했으며, 일본의 평화운동단체인 피스데포에서 활동한 바 있다.


최근작 : <동북아시아 비핵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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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골든 시크릿>,<춘추전국시대의 고민>,<신데렐라와 유리 천장>등 총 1,438종
대표분야 : 요리만화 13위 (브랜드 지수 3,517점), 성공 24위 (브랜드 지수 73,458점), 일본소설 26위 (브랜드 지수 40,359점)




6자 회담을 넘어 동북아 비핵평화체제로


지난 10월 9일 북한의 핵실험 이후 동북아시아에서의 핵확산 위협이 대두되었고 군사적 긴장 또한 고조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은 역설적으로 동북아시아 비핵평화체제 구축의 과제가 더욱 더 시급한 것으로 떠오르는 계기가 되었다. 궁극적으로 동북아시아 비핵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것은 지난한 과정을 밟을 수밖에 없지만, 그 과정을 단축하기 위한 구체적인 대안의 모색과 실천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되었다.

이 책은 한국의 ‘평화네트워크’와 일본의 ‘피스데포’가 중심이 된 ‘동북아시아 비핵지대’ 설립에 관한 협의의 결과물이다. 전반부에서는 현존하는 4개의 비핵지대에 대해 개괄하면서 동북아시아 비핵지대의 필요성을 도출하고 있고, 후반부에서는 구체적으로 ‘동북아시아 비핵지대 조약’의 모델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동북아시아 비핵지대'의 구축은 '공동안보(common security)' 개념에 기초한 동북아 지역안보 협력체의 구성으로 나아가기 위한 커다란 일보임이 분명하므로 적극적인 검토와 논의의 확산이 필요하다. 한국사회당도 '3+3' 체제에 기초한 '동북아시아 비핵평화체제' 구축을 밝히면서 이러한 모델에 대한 기본적인 지지 입장을 표명한 바 있다.

동북아시아 비핵지대 혹은 평화체제 구축 방안으로는 여러 가지 제안들이 존재했으며, 지금도 다양한 제안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그 중에서도 가장 현실적인 방안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의하고 있다. '3+3' 구상에 관련된 국가들이 6자회담의 당사국들과 일치하고 있는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이 제안의 현실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6자회담의 성공이 곧바로 이러한 체제로의 전환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북한의 핵실험 이후 6자회담 재개가 합의된 상태이긴 하지만, 이제까지의 경과를 보면 재개될 6자회담 자체의 성공 여부는 매우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실천해야 할 목표는 명확하다. 6자회담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동북아시아 비핵지대 논의가 진전되기 위해서 동북아시아 시민사회의 적극적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한 때이다.

2020-03-11

11 한석정 만주국 시기 조선인의 사회적 지위

만주국 시기 조선인의 사회적 지위

Ⅰ. 머리말

본 연구는 광복 당시 거의 200만 명에 육박했으나, 광복 후 그 존재가 억제 혹 은 과장된 1) 만주국 거주 조선인들의 지위를 살핀다. 동서양의 근대 식민국가 들은 토착인들을 대상으로 통합(화폐·지역·언어상의), 혹은 분리 2) 실험(의 약 분야의), 3) 조사와 분류 등을 행했다. 그리고 以夷制夷의 목적으로 일부 민 족을 보호, 그 정체성 형성을 도와주기도 했다. 예컨대 영국인의 해외 파병을

※ 투고일: 2011년 1월 9일, 심사일: 2011년 2월 7일, 게재 확정일: 2011년 2월 28일.
1) 한석정, 2008, 「만주의 기억」, 한일연대21 편, 『한일역사인식논쟁의 메타히스토리』, 뿌리와 이파리, 272~274쪽.
2) 예컨대 하우사랜드(Hausaland)를 오늘날 니제르(Niger)와 나이지리아(Nigeria)로 분할한 경우. William Miles, 1994, Hausaland Divided: Colonialism and Independence in Nigeria and Niger, Ithaca: Cornell University Press, pp. 42~46.
3) David Arnold, 1993, Colonizing the Body: State Medicine and Epidemic Disease in  Nineteenth-Century India,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pp. 108~115.
---

돕기 위해 ‘용맹한’ 시크인들(Sikhs)이나 구르카인들(Gurkhas)이 만들어졌
다.  ) 재만 조선인들은 1920년대에 일본의 만주 침식을 위한 삼투적 팽창으로  ) 인식되어 만주 군벌의 박해를 겪었지만 만주국 건국 후 공식 이념인 오족협화 속에서 일본 지배자들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조선인들의 이주와 사회적 지위에 관해서 근자에 중요 연구들이 나오고 있
으나,  ) 공통적으로 1940년까지의 분석에 그치고 있다.
그간 재만 조선인의 거주 추계는 다소 혼란스런 상태에 있었다. 우선, 신뢰
성이 떨어지는 자료의 인용이 있다. 예컨대 리하이옌의 경우, 1944년치 인구는 중국 둥베이[東北]의 항일 빨치산 지도자인 저우바오중[周保中]의 보고에 의 존한다. 그 결과, 1940년 재만 조선인 인구(1,309,053명)가 만주국 센서스의 것(1,450,384명)과 약 14만 6천 명의 차이가 난다.  )  두루 인용되는 만주국 공 식자료들도 신뢰할 만한 것이 그리 많지 않다. 예컨대 Japan-Manchukuo Yearbook  )은 1940년 만주국 인구를 센서스의 것보다 100만 명이나 적은 42,233,000명으로 기재했다. 조선인에 대해 만주국의 유일정당 격인 協和會 가 펴낸 중앙본부의 자료도  ) 1940년 센서스나 1940년 통계연감을 언급하지 않는다. 공식자료는 일본 외무성 자료, 만주국 민정부의 『統計年報』, 총무청 통계처의 『滿洲帝國年報』 등 부처별로 따로 발간되었는데, 이것들의 차이가 많다. 예컨대 1933년 연보는 일본인 인구를 317,646명, 조선인 인구를 582,143명으로 추정, 일본 외무성의 것(각 333,912명, 673,794명)과 큰 차이 가 난다[滿洲國 國務院 總務廳(1934), 『滿洲帝國年報』(이하 『연보』), 52~53쪽]. 1940년 센서스도 만주국 총인구를 페이지에 따라 달리 발표한다.  ) 또한 지나친 의욕으로 정밀성이 희생된 경우들이 있다. 예컨대 방대한 만
주국 내 민족 분포의 추이를 만들고자 했던 미야가와 젠조[宮川善造]의 것에 흠결이 더러 발견된다. 예컨대 1918년 조선인의 전년도비 인구 증가분(24,311명) 이 이주인구(33,400명)보다 적다. 또한 1935~1936년 센서스를 무시, 1935년 신징[新京]의 조선인과 일본인 인구를 각 6,764명과 54,367명으로, 무려 두 배로 기재했다. 센서스에 따르면 각 3,807명과 22,129명이다.   ) 여러 일본 자 료를 통해 한국인 이민사를 다룬 현규환의 방대한 연구도 광복 직전 재만 조선 인을 2,163,115명으로(혹은 그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라) 추정했다. 또한 당시 만주국 인구를 3,500만 명으로 추정, 1940년 센서스의 수치(43,233,954명)와 무려 800만 명 이상 차이가 난다.  )
이런 자료들이 범람한 것은 오랫동안 만주에 관한 국외 원자료를 얻기 힘들 었던, 그 결과 발견되기만 하면 무조건 신뢰하게 된 여건에 기인한다 할 것이
다. 이제 중국, 일본의 일부 만주 자료들이 국내 학자들에게 드러나는 시점에 이르렀다. 이 글도 현존하는 총량적 자료만을 나열하는 기술적인(descriptive) 한계, 혹은 중간 점검의 성격을 띤다. 이 글은 그간 여과 없이 사용되었던 원자 료들에 대한 판정과 함께 제한적인 자료를 통해 만주국 후기까지로 넘어가보 고자 한다. 1940년까지는 만주국의 센서스 두 가지(1935~1936년 것과  ) 1940년 의 것14))를, 그 이후는 만주국 정부공보를15) 사용한다. 인구역동과 사회적 지위 와의 관계, 즉 조선인의 거주 양식이 어떻게 사회적 지위에 반영되었으며, 특 정 계기(중일전쟁) 이후 인구이동이 사회적 지위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검 토할 것이다.   

Ⅱ. 재만 조선인의 거주 특성

먼저 중일전쟁 이전 재만 조선인을 재만 일본인과 비교하면 비적의 침입에서 보호장치가 없는 농촌 지향의 특성이 두드러진다. 다음 표 1은 단일기관의 조 사에 의한 재만 조선인과 일본인의 인구이다. 이것은 일본 외무성이 만주 영사 관의 조사를 취합한 것으로서 1910년에서 1936년까지 단일기관에 의한 것이라 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조선인, 일본인 양 민족의 거주 양식의 중요 차이는 후 자의 관동주[다롄(大連)과 그 주변], 만철부속지(만주국 내의 남만주철도 연변) (이 두 지역은 1937년까지 만주국의 치외법권 지역), 商埠地(자율적 개방지)의 인구비율이 꽤 높다는 것이다. 즉 일본 군경 보호하의 안전지역이라는 뜻이다. 省별 인구(표 1)에서도 일본인들은 가장 도회적인 펑티엔[奉天省]과 關東州에, 특히 쾌적한 항구 다롄과 신징[新京]을 16) 포함, 안전한 도시들에 밀집하고 있
다. 일본인들의 약 90%의 도회 집중률은 국제적인 비교에서 본다면, 예컨대 20세기 초 도시 거주율이 약 7할이었던 알제리의 유럽인들(pied noirs)에 비해 매우 높은 편이다. 17) 조선인들의 경우, 도회지역 거주는 매우 낮고, 지엔타오

14) 滿洲國 國務院 總務廳 統計處, 1942, 『康德7年 臨時國勢調査, 全國編』(이하 『1940년 센서스』)와 『康德7年 臨時國勢調査: 在滿洲國 日本人調査結果表, 全國篇』(이하 『1940년 센서스 일본인편』)을 이름.
15) 滿洲國 國務院 總務廳, 1940~1945, 『滿洲帝國政府公報』(이하 공보).
16) 1942년 신징의 공원녹지 비율은 12.2%로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越澤明, 1988, 『滿洲國の首都計劃』, 東京: 日本經濟評論社, 142쪽.
17) Benjamin Stora (tr. by J. Todd), 2001, Algeria: 1830~2000, Ithaca: Cornell
<표 1>  중일전쟁 이전 재만 조선인, 일본인의 인구
연도 일본인 조선인
만주 전체 관동주 만주국 도회 비율
(%)* 만주 전체 관동주 만주국 도회 비율
(%) 지엔타오 지엔타
오 거주 비율(%)
1915 101,586 50,197 51,389 83.5 282,070 65 282,005 0.3 198,492 70.4
1920 160,062 73,896 86,166 97.3 459,427 396 459,031 3.4 281,766 61.3
1925 187,988 90,542 97,446 98.3 531,973 834 531,139 6.9 346,194 65.1
1930 228,784 116,052 112,732 98.7 607,119 1,794 605,325 8.6 394,937 65.1
1931 233,320 119,770 113,550 98.7 630,982 1,747 629,235 10.1 409,412 64.9
1932 268,982 125,935 143,047 97.0 596,373 2,002 594,571** 16.6 388,147 65.1
1933 333,912 139,016 194,896 93.6 673,794# 2,259 671,535 15.1 415,458 61.7
1934 407,884 149,492 258,392 89.9 761,593# 2,708 758,885 13.7# 461,775 60.6
1935 492,604 159,599 333,005 90.8 826,570# 3,251 823,319 15.3# 469,461 56.8
1936 551,937 166,369 385,568 87.4 888,181 4,025 884,156 12.6 476,072 53.6
* 만주국 내 만철부속지와 상부지 거주 인구 비율.
** 약 15만 명으로 추산되는 지엔타오 거주 조선인은 포함되지 않음.
# 특별시 인구 추가 출처:  日本 外務省 亞細亞局, 『滿洲國及中華民國在留本邦人及外國人統計表』; 木村健二·幸野保
典 解題(2004), 『戰前期中國在留日本人統計』, 東京: 不二出版, 1卷 5回 24·25쪽, 7回 34쪽, 2卷 11回 表1 3쪽, 17回 表1 26쪽, 表2 64·65쪽, 3卷 19回 표1 30쪽, 21回 表1 32쪽, 表3 80쪽, 4卷 23 回 表1 31쪽, 24回 表2 86쪽, 表3 90·91쪽, 5卷 26回 表4 110쪽, 6卷 29回 表9 1쪽, 7卷 28回 表1 1쪽, 表6 70쪽, 29回 表1 157쪽.18)
[間島], 혹은 농촌에 집중되었다.
또한 재만 조선인 像의 불확실성은 1930년대 대규모 만주행 이주 수치의
부정확성에 기인한다. 1930년대의 도만 인구에 대한 마쓰무라 다카오[松村高夫]의 연구(표 2)는 한국·일본 학계에서 자주 인용되는데, 1940년 센서스의

University Press, p. 22.
 18) 이 중 1930년대는 滿洲國 國務院 統計處, 『大同元年末現住戶口統計』(1933), 『第一次臨時人口調査報告書』(1937)를 수집한 것이다.
<표 2>  마쓰무라의 1930, 1940년대 조선인 해외 인구이동 추계
1931~1940 1941~1945 합계
일본행 249,916 363,327 613,243
만주행 255,991 64,887 320,878
중국행 66,491 13,027 79,518
합계 572,398 441,241 1,013,639
출처:  松村高夫, 1970, 「日本帝國主義下における滿洲への朝鮮人移動について」, 『 三田學會雜誌』
63卷 6號, 87쪽.
것(표 3 참조)과 무려 두 배의 차이가 난다.
1940년 센서스에 따르면 1930년대 도만 조선인은 약 70만 명에 이르며, 그 78%가 후반에 이루어져 당시 조선 사회를 강타했던 만주 붐을 실감나게 한다.
1940년 한 해에만 무려 약 17만 명이 만주로 갔다. 이 강력한 흐름은 만주국 후
<표 3>  1930년대 조선인과 일본인의 도만 인구
연도 조선인 일본인
1931 11,383 5,888
1932 16,876 19,122
1933 19,937 30,213
1934 49,145 37,071
1935 57,757 41,047
1936 66,497 37,478
1937 84,071 50,542
1938 87,718 106,850
1939 141,284 142,899
1940 169,726 193,025
1936~1940 합계 544,796 520,794
1931~1940 합계 699,894 654,135
출처: 『1940년 센서스 일본인편』, 422쪽.
<표 4>  1940년 조선인 도만자의 도착지
첫 도착 지역(省) 이민 숫자 비율(%)
지린 25,774 15.2
룽장 1,250 0.7
베이안[北安] 9,346 5.5
허이허 447 0.3
싼장 3,783 2.2
둥안[東安] 3,865 2.2
무단장[牧丹江] 18,839 11.1
빈장 9,879 9.8
지엔타오 35,045 21.3
퉁화[通化] 11,193 6.6
안둥 9,791 5.8
쓰핑[四平] 6,089 3.6
펑티엔 18,791 11.1
진조우 4,653 2.7
러허 438 0.3
씽안서 75 0.04
씽안남 4,321 2.5
씽안동 332 0.2
씽안북 289 02
출처: 『1940년 센서스 일본인편』, 422쪽.
기 조선인의 사회적 지위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30년대 일본인들의 도만도 상 당한 규모(약 65만 명. 후반에 무려 약 80%)로 양국에 공통적인 만주 바람이 일었음을 알 수 있다.
1940년에 이르러 조선인들의 도만 경로도 다양해졌다(표 4 참조). 조선인 들이 첫발을 디딘 곳은 지엔타오성을 넘어 광범위한 곳이다. 지엔타오(21%), 지린성(15.2%), 펑티엔성(11.1%)에 이어 몽골 지역까지 펼쳐졌다.
<표 5>  만주국시대(1932~1945)의 조선인 인구
연도 인구 연도 인구
1930 602,495 1938 1,106,181
1931 623,048 1939 1,264,504
1932 650,072 1940 1,450,384
1933 680,898 1941 1,573,556
1934 745,116 1942 1,653,181
1935 818,566 1943 1,714,166
1936 901,152 1944 1,777,423
1937 1,002,021 1945 1,948,375
출처: 박경숙, 2009, 「식민지 시기 조선의 인구동태와 구조」, 『한국인구학』 32권 2호, 47쪽.
만주국 시대 조선인 인구도 정리할 시점에 왔다. 여러 연구 중에서  )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것은 박경숙의 것이다. 그간 1945년 조선인 인구가 200만 명 을 상회하는 것으로 간주되었지만, 그녀는 전문적인 추계를 통해 이것을 200만 명 이하로 계산, 이 방면의 업적을 이루었다(표 5 참조). 동아시아 근대사 분야 에서 운위되었던 “광복 당시 재만 조선인 인구가 200만 명 이상”이라는 표현은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다만 재만 조선인의 이동성, 즉 쉽고 잦은 귀환, 예컨대 1930년대 초의 정 치적 격변  ) 등을 고려, 단선적 인구 증가를 보정하는 것이 미래 과제가 될 것 이다. 펑티엔 등 대도시의 조선인들 중에는 일확천금을 꿈꾸며 목돈을 쥐면 귀
<표 6>  만주국 1940년 센서스 상의 민족구성
민족 인구 성비 젊은 인구(16~30세)
만인총수 40,858,473(95%) 123.8 24.7%
 한족 36,870,978(85.3%)
 만주 치런[旗人] 2,677,288
 몽골 1,065,792
 회교인 194,473
 기타 49,942
일본인 2,271,495
 내지인 819,614(1.9%) 142.1 45.0
 조선인 1,450,384(3.4%) 119.5 30.1
 기타 1,497
제3국인 3,732
무국적인 69,180
합계 43,202,880
출처: 『1940년 센서스』, 3~11쪽.
국한다는 생각을 가진 부랑자가 많았다.  ) 광복 전 일본제국은 경계의 붕괴를 초래, 조선인들의 일본, 만주행 이동과 귀환을 용이하게 만들었다.
만주국의 1940년 센서스는 불완전한 것이나 일본제국 전체에서 타이완
(1905), 일본(1920), 조선(1930년. 그 후 1935년, 1940년 후속조사)에 이은 네 번째의 본격 인구조사인데,  ) 조선인들의 기본 특징이 드러난다. 이들은 만주 국 전체 인구(세계 9위)의 3.4%를 차지하며(표 6), 만주국의 평균(도시 168.0, 농촌 119.8)과 비교해서 성비가 안정적이며, 젊은 인구가 많은 특징이 있다. 조선인들의 省별 분포(표 7 참조)는 1934년까지 60%대에, 1935년 56.8%
<표 7>  조선인의 省별 분포(1940)
지역 숫자 비율(%)
신징특별시 16,424 1.1
지린성 167,620 11.6
룽장 7,595 0.5
베이안 28,319 2.0
허이허 2,196 0.2
싼장 35,085 2.4
둥안 33,195 0.2
무단장 118,571 8.2
빈장 66,032 4.6
지엔타오 616,029 42.5
퉁화 95,433 6.6
안둥 66,422 4.6
쓰핑 45,391 3.1
펑티엔 115,536 8.0
진조우 22,864 1.6
러허 1,399 0.1
씽안서 781 0.05
씽안남 8,981 0.6
씽안동 1,692 0.1
씽안북 909 0.06
합계 1,450,384 100
출처: 『1940년 센서스』, 174~197쪽.
였던 지엔타오성 비율이 40%대로 감소했다. 조선인들은 씽안북성을 포함, 전 지역에 걸쳐 살았다. 19개 시(특별시 포함)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은 144,296명 (조선인의 9.9%), 10만 명 이상 14개 도시에는 99,966명(조선인의 6.9%)에 이 른다. 이것은 만주국 초기 9대도시의 조선인 거주 비율 3.5%와  ) 비교하면 장 족의 발전이다. 3대도시 거주에도 약간의 성장이 있었다. 1935년에 조선인의 2.3%가 이 도시들에 살았으나, 1940년 4%로 늘었다. 1940년 신징 인구의 조 선인 비율은 1935년 도시의 1.5%에서 1940년 3%로 늘었다(표 10a 참조).

Ⅲ. 조선인의 사회적 지위

조선인들의 사회적 지위는 단순하지 않다. 전·후반기 통틀어 인구상, 산업분 포상 소수자의 위치에 있었으나, 중일전쟁 발발 후 공적 분야와 일부 전문직, 나아가 전방위적인 진출이 있었던 점이 드러난다. 그간 만주국의 조선인이 일 본인 지배자와 한족 사이의 중간자적 소수자(middlemen minority)와 같은 존 재로 인식되었다. 중간자란 동남아시아의 화교같이 부를 갖춘 소수민족이다.   ) 나아가 일본-조선-만주국의 3자 관계가 유명한 월러스타인(Wallerstein)의 세계체계론의 비유(즉 핵심-반주변부-주변부의 지역체계로서의)를 받기도 했다. 25)
이런 인식의 근거로 조선인과 중국인 간에 임금과 양곡배급의 차등이 거론 되었다. 2등국민론은 어느 정도 타당할까? 우선, 윤휘탁이 논구했듯 식량의 비 유는 과장된 것으로서, 특히 만주국 말기에 양자는 공통적인 곤경을 겪었다.  ) 노동자의 하루 임금에서는 조선인이 중간적 특성이 있다(표 8 참조). 그러나 1930년대 말 여러 지역과 부문의 일일 평균임금에서 극명한 차이는 일본인과 기타 민족들의 것이다. 일본인 남녀 평균임금(2.56위안)은 만주인(0.7위안)과
<표 8>  만주국 노동자의 하루 임금(1939년 5월)(단위: 만주국 위안)

부문 만주인 일본인 조선인 전체평균

공업 0.9 0.5 3.51 1.61 1.45 0.65 1.62 1.51
광업 0.94 0.64 3.38 0.87 1.01 3.24
토건 1.27 4.16 2.43 2.5
운수 1.34 3.13 1.3 2.85
교통 1.38 0.89 2.74 1.7 0.85 2.62 0.7
평균 1.0 0.51 3.5 1.6 1.38 0.65 2.14 1.12
출처: 공보 1939. 9. 18.
조선인(1.05위안)의 두세 배를 상회한다. 또한 조선인 남성의 임금은 만주인 남성의 것보다 약 40% 많다(1.38 대 1.0). 그러나 20세기 초 아시아 사상 최대 의 이주인 중국 노동자의 만주행 홍수(1890년에서 1945년까지 2,500만 명, 1920년대에는 두 번씩 한 해 100만 명 이상)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만주국 건 국으로 약간 주춤했으나 공업화의 수요로 한 해 평균 76만 명(1932년에서 1942년까지)이 유입,  ) 노동시장의 덤핑을 초래했다.
그러나 총량적인 통계에서 조선인은 주변적인 위치에 있다. 한 자료에 따 르면, 만주국 초기(1935) 조선인들은 2·3차산업에 불과 11%가, 대신 1차산업 에 약 3분의 2가 몰려 있었다. 자유업과 官吏, 교육 부문에서 7%를 차지, 다소 약진한 편이다(표 9). 그런데 이것은 부인의 직업을 가장에 따라 계산, 무업 비 율이 낮다. 개인별로 직업을 물었던 1935~1936년 센서스와 1940년 센서스 등 과 비교 불가능한 단점이 있다.
<표 9>  만주국 세 민족의 산업구성(1935년 말)(%)

출처: 만주국 민정부, 1936, 『2차통계연보』(이하 『2차연보』), 46쪽.
다음은 1935~1936년 센서스, 1940년 센서스에 나타난 3대도시의 조선인
과 일본인의 산업구성이다(개인별로 직업을 물었으므로 표 9와 비교 불가능함).
<표 10a>  신징의 민족별 산업구성(1935년 말과 1940)(%)

출처: 『1935~1936년 센서스』(1차), 107쪽; 『1940년 센서스』, 55~65·110~120·143~153· 253~259·288~294·309~315쪽.


신징, 하얼빈, 펑티엔 등 3대도시에서 1935년 조선인은 세 민족, 즉 만주인 (중국인), 일본인, 조선인 중 1차산업 비율이 가장 높으며, 대신 2·3차산업에 서 거의 최하위에 있다. 무업도 가장 높다. 예외는 펑티엔인데 상업에 다수가 종사하고 있다. 1940년에는 1935년에 비해 조선인의 2·3차산업 종사자가 현 격하게 늘었다(펑티엔의 상업은 예외). 신징의 공무·자유업이 거의 두 배로 증가한 것은 조선인 관리들의 증가를 의미한다(표 10a 참조).
1935~1936년 센서스(인구 1만 명이 넘는, 만주국 전체 인구의 약 11%를 차 지하는 지역만 대상으로 함)(표 11)에 따르면 조선인은 1차산업 비율이 10% 이 하에, 상업·교통에 12%로 약진하고 있으나 무업 비율은 굉장히 높다.
<표 11>  만주국 1935~1936년 센서스(3대 도시 포함, 78개 지역), 두 민족의 산업구성
(1935년 말에서 1936년)

다음 표 12는 만주국 중기(1937)의 불완전한 조사이다. 2·3차산업, 공무,
자유업 분야에 조선인은 12%에 지나지 않고 1차산업에 대거 몰려 있다. 이 통 계는 JMY의 1941년판을 포함, 두루 유포되었으나 유업자의 배우자를 유업으 로 합산했으므로 1940년 센서스와 비교가 불가능한 한계가 있다.
<표 12>  만주국 중기 세 민족의 산업구성(1937년 말)(%)

출처: 만주국 국무원 총무청 통계처, 1940, 『만주제국 통계연감』, 25쪽.
드디어 1940년 센서스에 조선인과 일본인의 전반적인 산업구성이 파악되
었다(대상자에게 개별적으로 물어 전기의 어느 자료와도 비교가 불가능함)(표 13 참조). 이것에 따르면, 조선인 1차산업 종사자(조선인의 42%)는 만주국 전 체(약 38%)에 비해 다소, 일본인(약 5%)에 비해 매우 높다. 조선인 2차산업 종 사자(약 4%)는 만주국 전체(3.6%)에 비해 약간 높으나, 일본인(13.4%)과는 비 교가 되지 않는다. 2·3차산업 전체의 조선인 종사자(조선인의 9.5%)는 만주 국 전체 평균(10.1%)에 뒤진다.
특기할 만한 것은 조선인 공무·자유업 종사(조선인 전체의 1.4%)가 만주
국 평균(2.6%)과 일본인(9.5%)에 비해 낮지만, 약 1만 명의 관공리, 3,000명의 교사, 2,300명의 의사 등 화이트칼라, 혹은 전문직 조선인들이 존재했다는 점 이다. 비록 대부분이 일용직이나 촉탁 등 하급직이었지만, 조선인 관공리는 만 주국 전체 관리들 숫자(175,422명)의 5.9%에 이른다.  ) 일본인과 중국인들의 공무원 직위의 묵시적 비율(중앙관리들의 경우 대략 1 : 1)이 있었으므로, 조선 인 관공리들의 증가는 일본인 관리들의 배려(혹은 양보) 하에서, 혹은 중일전쟁
<표 13> 만주국 1940년 센서스 상의 일본인과 조선인의 산업분포(괄호 안은 %)

출처: 『1940년 센서스 일본인편』, 61~71·281~287쪽.
후 징집된 재만 일본인 관료들의 공백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중일전쟁 후 의 만주국은 특히 고학력 조선인들에게 실로 새로운 취업 공간이 되었다. 31) 만 주국 후반기에 재계에서 조선인들의 존재는 미미했으나, 관공리를 포함한 화이 트칼라와 전문인 계층이 막 성장하던 중에 만주국이 패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29) 山中峰央, 2005, 「滿洲國人口統計の推計」, 『東京經大學會誌』 245號, 186쪽.
30) 농업·목축·임업·어업 합계.
31) Carter Eckert, 1996, “Total War, Industrialization, and Social Change in Late
Colonial Korea,” in Peter Duus, Ramon Myers, and Mark Peattie(ed.), The
Japanese Wartime Empire, 1931~1945,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p. 33.

Ⅳ. 1940년대의 조선인 산업분포

만주국의 마지막 시기에 중일전쟁의 효과(즉 1940년 센서스에서 발견된 화이 트칼라 조선인들의 존재)의 추세를 추적하는 것은 지난한 작업이다. 제한적 자 료를 통해서 본다면,  ) 야심만만한 조선인 청년들이 관공리, 변호사, 의사, 교 사, 그리고 명문 국립교육기관들을 포함, 틈새 인가증까지 꾸준히 만주국의 문 을 두드린 사실이 드러난다. 조선인 화이트칼라와 교육기관 합격자들을 통해 서 보자.
조선인 고위관리로는 초기(1935)에 지엔타오성 민정청장 김병태, 학무과장 윤태동, 시학관 김춘학 정도이나, 후기(1940)에 이르러 지방법원 차장, 판사 2명, 총영사 2명(박석윤 포함), 중앙·지방부서 과장급 10명, 국장급 1명, 사무 관급 16명,  ) 기좌(技佐) 9명 등에 이른다.  )
1935년 지린성공서의 옌볜[延邊] 담당 직원 31명 중 조선인이 7명, 지엔타 오성공서 직원 169명 중 조선인 51명이 근무했다. 지엔타오성 전 기간(1933년~ 1942년 말)에 264명의 관리(천임관 이상)가 거쳐 갔는데, 이 중 조선인은 성장 이범익(1937년 11월~1940년 5월)과 차장 유홍순(후일 강원지사), 시학관 이인 기를  ) 포함, 29명 정도가 파악된다.  ) 그리고 협화회에 조선인 회원 약 6만 명이 가입했고, 펑티엔을 비롯한 6개 지역에 조선인보도분과위원회가 설치되 었다.  ) 조선인 간부도 약간 있었다. 1941년 협화회 인사에서 중앙본부에 최소
6명, 지역간부에 24명이 사령장을 받았다.   ) 그리고 중앙·지방 공무원 시험에도 다수 합격자를 배출했다(표 14). 이것
은 센서스 이후 만주국 공보에 발표된 중앙행정부의 민생부, 경제부, 사법부, 제사부, 치안부, 수도경찰, 문교부, 외교부, 총무청, 흥농부, 지적총국 행정과, 대동학원, 官需局 등의 위임관, 고등관, 기술관, 교관과 지방관서 위임관, 위 임기술관 등의 채용, 전형, 적격, 등격고시 등의 합격자를 이른다. 전체 합격자 수는 약 1만 9,000명인데 조선인은 289명으로 1.5%를 점한다.
<표 14>  1940년대 만주국 관리 합격자
1940 1941 1942 1943 1944 1945 합계
전체 3,255 5,387 4,880 3,000 2,525 74 19,121
조선인 79 6339) 73 70 4 289
출처: 공보 1940. 11. 27~1945. 2. 7.           
만주국에서 율사(변호사) 개업을 한 조선인은 적어도 4명이 파악된다(표 15).
<표 15>  만주국 율사 명부(괄호 안은 조선인)
1941 1942
10(2) 28(2)
출처: 공보 1941. 9. 3, 1942. 3. 12.
조선인 의사들에게도 만주국은 기회의 땅이었다. 만주국 정부는 의사법
(1936), 국민의료법(1943), 의료단체법(1944) 등을 제정, 전시의 의료 통제를 강화했는데,  ) 이런 수요가 조선인 의사들을 불러들였다. 1938년 말, 1939년 초 조선인 의사 등록이 급증하는데(2,155명 중 255명으로 전체의 11.8%)(표 16 참조),  ) 이때가 거의 최초로 조선인 의사들을 받아들인 시점인 듯하다. 이 시 기의 미미한 중국인 의사(치과의사 포함) 시험 합격자 숫자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 센서스 이후에도 조선인 의사들은 꾸준히 증가, 만주국 패망까지의 총합은 전체 2,064명 중 261명으로 약 13%에 이른다. 만주국 인구에서 차지하 는 조선인 인구비율(3.4%)과 비교한다면 매우 높은 비율이다. 이것은 미미한 조선인 한의사 등록자(전체 3,602명 중 4명)(1939~1944)와는 큰 대조를 이룬
다. 만주국 정부는 한의사 인가는 중국인에, 양의사 인가는 조선인에 배려한 듯하다.
<표 16>  만주국 의사 등록자(1938~1945)
1938~1940 센서스 1940~1945 센서스
전체등록자 조선인 조선인 비율(%) 전체 조선인 조선인 비율(%)
일반의사 3,589 293 8.2 1,669 243 14.6
치과 649 15 2.3
약사 105 5 4.8
수의사 64 5 7.8 395 18 4.6
합계 4,407 318 7.2 2,064 261 12.6
출처: 공보 1938. 9. 24~1945. 2. 24.
그리고 조선인 교사들도 다수 존재했다. 센서스 이후 패망까지 교사자격 합격자는 모두 약 2만 4,000명이며 그중 조선인은 316명(1.4%)이다. 1940년 말에서 1941년까지 초등교사 허가증 획득에 조선인들도 약간의 기회(0.7%)를 얻었다. 1945년 조선인 중등교사 자격증 획득자는 무려 18%에 이른다.
<표 17>  만주국 1940년대 교사 허가증
1940년 말~
1941 1942 1943 1944 1945 합계 조선인
비율(%)
초등 19,898(139) 19,898(139) 0.7
중등 1,663(55) ) 96(11) 368(26) 72(2) 444(80) 2,643(174) 6.6
직업교육 ) 50 3 4 5(1) 10(2) 72(3) 4.2
출처: 공보 1940. 12. 9~1945. 7. 7까지.       
센서스 이후 패망까지 만주국 유수의 정부직할 고등교육기관과 유학 인가 시험에도 조선인들이 지원, 약 155명 정도의 합격자를 냈다(표 18).  ) 이 중에 서 변경 개척지에 보낼 의사들을 속성으로 양성한 하얼빈, 치치하얼, 룽징[龍井] 의 개척의학원의 조선인 합격자(25명)는 전체 213명 중 무려 11.7%를 점한다.

<표 18>  만주국 1940년대 정부직할 고등교육기관과 유학 인가 합격자(괄호 안은 조선인)
1940. 12~ 1941 1942 1943 1944 1945 조선인 숫자
하얼빈의대 97 73(3) 107(2) 5
신징의대 51 43(3) 3
신징의대 약학과, 수의학과 103 34(2) 2
자무쓰[佳木斯]의대 5(1) 1
신징공대 58(4) 4
펑티엔공대 27(2) 150(7) 9
하얼빈공대 90(1) 50(2) 3
하얼빈농대 74(4) 66(10) 14
펑티엔농대 111(4) 4
신징법정대 195(11) 200(13) 24
중앙사도(師道)훈련소 88(5) 40(4) 60(1) 10
사도대학 164(6) 265(15) 150(11) 32
하얼빈개척의학원 20 24(1)
치치하얼[齊齊哈爾] 개척의학원 21 50(3) 23(2)
룽징개척의학원 52(17) 23(2)
도일유학인가 101(7) 87(6) 30(6)
출처: 공보 1940. 12. 20~1945. 1. 31.

일부 조선인은 다퉁[大同]학원, 지엔구어[建國]대학, 군관학교 등 만주국 
명문 교육기관을 졸업했다. 다퉁학원은 만주국 건국에서 패망까지 고급 공무
원을 선발, 훈련시킨 기관이다. 정규코스 1기(1932년 10월 졸업) 96명을 비롯, 
19기(1945년 8월 졸업) 졸업생 52명까지의 2,629명과, 연구소 1기(1944. 7), 2기 (1945. 8) 합계 66명, 중견지도자 코스 1기(1938. 7)에서 5기(1941. 9)까지의 합 계 241명, 총합 2,936명의 졸업자 중에서 조선인 졸업자는 신기석(9기), 이충 환(13기), 최규하, 서정귀, 조기준(이상 15기) 등 최소 28명이다.  ) 중일전쟁 후 창설된 만주국 최고의 국립대학인 지엔구어대학은 1기(1938년 입학) 145명 을 비롯, 8기(1945년 입학)까지 도합 1,068명의 졸업자를 배출했는데 이 중 조 선인은 강영훈, 민기식(3기)을 포함, 최소 50명이다.  ) 또한 만주국의 중앙육군훈련처(펑티엔군관학교)는 1932년 개교 이래 1938년 까지 매년 200~300명 정도를 뽑았는데 조선인은 정일권(5기)을 포함, 87명이  졸업했다. 1939년 출범한 본격적인 육군군관학교(신징군관학교)는 1945년까 지 일계 1,086명, 만계 1,590명을 내었는데 조선인 졸업자는 김동하, 박임항, 이주일(이상 1기), 박정희 전 대통령(2기) 등을 포함, 48명이 있었는데, 그중 24명은 1941년부터 일본 육군사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지엔타오 지역의 항일유격대를 진압하는 용도로 1939년 창설되어 1945년 7기까지 모집된 지 엔타오특설대의 746명의 병력(일본 지휘관을 포함) 중 조선인은 690명을 차지 했다. 48)
중일전쟁 후 조선인 화이트칼라의 가시적 성장은 중국인들에게 불만거리
가 되어 중국인 사이에서 ‘조선인은 만주국의 2등공민’이라는 담론의 유포를 초래했을 것으로 보인다.  ) 이것에는 일본인들의 은근한 유포 가능성, 일부 조 선인들의 도취 등 여러 사정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듯하다. 조선인 스스로 이런 인식을 소유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일부 조선인들 사이에서도 호가호위적 태 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인과 중국인들의 거주가 분리된 지역들(특 히 북만주)이 있었고,  ) 일부 조선인들은 일본인과 기타 민족집단 사이에서 후 자를 멸시, 폭력을 행사한 일화들이 발견된다.  )

Ⅴ. 맺음말

총량적인 지표에서 보면 만주국 시대 조선인들은 2등국민 담론과는 달리 전기 에 주로 지엔타오 지역과 농업에 집중한 주변적 위치에서 후기에 부지런히 2·3차산업에 다소 진출한, 그러나 전체 평균에 뒤지는 소수자였다. 무엇보다 이렇다 할 조선인 자본과 파워(사업가와 고관들)가 없었다. 국제적으로 괴뢰국 이라는 규탄을 받았으나 독립국적 제스처에 열중한 만주국의 지도자들은 이 ‘독립국’의 국민인 ‘만주국인’(대부분 중국인)의 존재를 의식해서 공직, 기업 분 야의 상당한 자리를 이들에게 할애했다.  ) 이런 사정에서 조선인은 애매한 존 재였다. 이들은 만주국의 공식이념인 오족협화와 조선총독부의 만선일여(1937년 이후 사용) 담론 사이에 끼어(즉 이들의 소속, 정체성이 만주국과 조선 사이에 서 일정치 않은) 거주지역에 따라 사용 언어와 교육체계가 달라지는 큰 불편함 을 겪게 되었고, 이들을 위한 국적법이 일제의 패망까지 제정되지 않았다.  ) 재만 조선인 중에는 만주국에 대한 협력자, 실업자, 아편밀매자 등 별별 종류 가 다 있었다.  )
그러나 중일전쟁 후 일본인들의 배려, 혹은 공백으로 인한 조선인들의 공 적 부문과 전문직의 성장, 遍在성을 간과할 수 없다. 조선인들은 만주국 막바 지에 공적 분야에 두루 志願했다.  ) 그 의미는 다수의 고학력 조선인들이 만주 국을 기회의 땅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만주국에서의 중하급직 관료, 군인, 노 무관리자, 기술자, 혹은 기업활동 등 실전 경험들은 후일 신생국 한국에서의 약진에 중요 자산이 되었다. 1947년 7월까지 재만 조선인들 약 80만 명이 귀국 했는데,  ) 이 중에서 식민주의가 초래한 근대와 현장 경영을 겪은 일부가 섞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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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e Social Status of Koreans in the Manchukuo Period
Han, Sukjung
Through the population dynamics, this paper approaches the social status of Koreans in Manchukuo while checking the validity of the previous data. Their status refuses simple categorization. The Koreans were peripheral minority who clustered around unsafe rural area and urban amusement quarters in the early period, and became partially represented  in the secondary and tertiary sectors in the late period. However, after the outbreak of the Sino-Japanese War, there arose a stratum of Koreans in white collar and public sector positions due to the consideration by or the vacuum of Japanese rulers who were conscripted for the final stage of the Sino-Japanese War and the Pacific War. Furthermore, Koreans were visible and omnipresent in almost all the posts and job opportunities in Manchukuo. This conspicuity had the seed of the persecution by Chinese right after the demise of Manchukuo.
keywords
Koreans in Manchukuo, demographic dynamics, social status, Sino-
Japanese W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