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9-06

* 함재봉의 청일전쟁 평론 요약

함재봉의 청일전쟁 평론 요약 - 

이홍장 암살 미수와 시모노세키 조약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38회
뤼순•웨이하이웨이 전투와 북양함대의 종말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37회
2차 갑오경장과 홍범14조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36회
이노우에의 조선 파견과 대원군의 실각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35회
일본군의 전력과 청군의 선전전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34회
청군, 동학과 내통하는 대원군과 평양전투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33회
청일전쟁의 시작, 풍도해전과 성환전투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32회
대원군은 어떻게 갑오경장을 맡게 되었나?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31회
청일전쟁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30회
청일은 왜 조선에 파병했나?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2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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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강좌 중의 청일전쟁에 관한 부분(29-38회)을 통해 함재봉이 말하고저 한 것들을 1,000 단어로 요약 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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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청일전쟁 편(29~38회) 요약과 평론

함재봉은 <한국인의 탄생>(저서 <한국 사람 만들기>) 강좌 29회부터 38회에 걸쳐 1894년 발발한 청일전쟁을 집중 조명한다. 그는 이 전쟁을 단순히 한반도 패권을 둘러싼 외세의 무력 충돌이나 식민지화의 서곡으로 협소하게 보지 않는다. 대신 수천 년간 동아시아를 지배해 온 중화제국 질서가 해체되고, 서구 근대 국민국가 체제인 베스트팔렌 조약 질서가 동아시아에 이식되는 문명사적 대격변의 기점으로 파악한다. 이 10개 회차를 관통하는 핵심 요지와 이에 대한 비평적 성찰을 정리한다.

강좌의 핵심 요약

첫째, 파병의 배경과 전쟁 발발의 필연성이다(29~31회). 조선 조정은 동학농민운동을 자체 진압하지 못하고 청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는 1885년 톈진 조약에 의해 일본의 즉각적인 개입 명분을 열어주었다. 함재봉은 청나라가 조선을 근대적 국제법상의 독립국으로 인정하지 않고 전통적인 조공-책봉 관계의 속방(屬邦)으로 묶어두려 했던 반면, 일본은 만국공법 체제를 앞세워 조선의 주권을 명분으로 삼고 실질적으로는 중화 세력을 한반도에서 축출하려 했음을 강조한다. 조선 지배층의 국제 정세 오판과 전통적 사대주의적 안일함이 동아시아 패권전쟁의 도화선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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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군사적 전개와 실상의 폭로다(32~36회). 풍도해전과 성환전투, 평양전투, 황해해전, 그리고 여순(뤼순) 함락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청나라와 일본의 전력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청나라는 양무운동을 통해 서구의 최신 군함(정원호, 진원호 등)과 화기를 사들였으나, 지휘 체계의 부패, 통일된 국가 군대의 부재(북양함대 중심의 사병적 성격), 근대적 군사 사상의 결여로 궤멸했다. 반면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제도, 조직, 보급, 국민적 결속력까지 서구식으로 완전히 개혁한 근대 국민군대를 구축하여 압도적 승리를 거두었다. 함재봉은 이를 외형적 물질문명만 도입한 문명 모방(청)국가 체제 및 정신까지 근대화한 문명 전환(일)의 격차가 빚은 결과로 설명한다.

셋째, 조선의 비극적 처지와 권력층의 분열이다. 전쟁터가 된 한반도에서 백성들은 참혹한 전화에 휩쓸렸으나, 대원군과 민씨 척족, 조정 관료들은 외세를 끌어들여 상대를 제거하려는 궁정 암투에 몰두했다. 함재봉은 대원군이 청군 및 동학 세력과 은밀히 내통하고, 민씨 정권은 권력 보전을 위해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구체적 사료로 파헤치며, 주권 의식과 국민 개념이 전무했던 조선 지도층의 자폐적 권력정치를 강하게 질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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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종전과 동아시아 질서의 전복이다(37~38회). 이홍장 암살 미수 사건이라는 돌발 변수를 거쳐 1895년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의 제1조는 "청국은 조선국의 완전무결한 독립자주를 확인한다"였다. 이는 명목상 조선의 독립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조선을 수천 년간 묶어두었던 중화 조공망을 공식 절단하고 일본의 세력권으로 편입시키는 선언이었다. 함재봉은 이로써 친중위정척사파의 이념적 토대였던 소중화 의식이 구조적 사망을 선고받았다고 결론짓는다.

비평과 평론

함재봉의 해석은 한국 근현대사 연구에서 오랫동안 주류를 차지해 온 감정적 민족주의나 피해자 중심의 서사를 넘어서려는 시도로서 상당한 지적 기여를 한다.

가장 돋보이는 미덕은 지정학적 realism(현실주의)과 문명사적 시각의 결합이다. 조선의 멸망을 단순한 일제의 간계나 침략욕으로만 축소하지 않고, 세계 질서가 '문명(Civilization) 대 야만'의 다원적 제국 체제에서 '주권 국가 간 조약 체제'로 재편되는 거대한 전환 국면 속에서 분석한다. 청나라의 패배 원인을 양무운동의 구조적 한계와 이홍장 개인 권력의 취약성에서 규명한 대목은 서구 및 일본 학계의 방대한 외교 사료를 균형 있게 소화한 결과다.

그러나 그의 논지에는 비판적으로 짚어야 할 지점도 존재한다.

첫째, 제도적 결정론과 승자 편향적 시각이다. 근대적 군사제도와 국민국가 체제를 성공적으로 이식한 일본의 근대화 과정을 다소 규범적인 이상형(ideal type)으로 상정하는 경향이 있다. 일본의 승리를 근대화의 당연한 보상처럼 설명하는 서술일본 제국주의 군대가 자국 내에서조차 민주적 통제를 벗어나 폭주하게 되는 파시즘적 맹아와, 여순 학살 등에서 드러난 반인도적 폭력성을 상대적으로 경시하는 결과를 낳는다.

둘째, 조선 내부의 자생적 변혁 역량에 대한 과도한 폄하이다. 동학농민운동이나 조선 사회 내부에서 분출하던 아래로부터의 반봉건적 에너지를 무기력하거나 맹목적인 복고주의로 단정하고, 오직 서구 문명을 체화한 지식인이나 외부적 충격에 의해서만 진정한 근대화가 가능하다는 '외인론(外因論)'적 시각에 과도하게 치우쳐 있다. 이는 역사를 지배 엘리트와 강대국 외교의 결과물로만 환원하는 한계를 드러낸다.

종합하면, 

함재봉의 청일전쟁 강의는 맹목적 민족주의의 안대를 벗고 냉혹한 국제정치적 파고를 복기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탁월한 각성제 역할을 한다. 조선이 직면했던 비극은 도덕적 정당성의 결여가 아니라, 세계사의 문법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읽어내지 못한 지적·외교적 무능에서 비롯되었다는 통찰은 오늘날에도 유효한 교훈을 던져준다.

청일전쟁의 시작과 외교적 전말을 강의 원본으로 직접 확인해보실 수 있도록 관련 회차 영상을 안내해 드립니다.

청일전쟁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한국인의 탄생 3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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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상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 발발 이후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에 군대를 파병하게 된 외교적 배경과 조약상의 전말을 당시 사료를 바탕으로 상세하게 짚어주는 회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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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29–38회

청일전쟁을 통해 함재봉이 말하고자 한 것 — 1,000단어 요약·평론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29–38회는 표면적으로는 1894~1895년 청일전쟁의 발발과 전개를 설명하는 역사 강의다. 그러나 열 회를 연속해서 보면 그가 정말 말하려는 것은 전투사가 아니다. 핵심 질문은 오히려 다음과 같다.

<왜 같은 시기에 조선·청·일 세 나라가 서양의 충격을 받았는데 일본은 근대국가로 변신하여 승자가 되었고, 청은 패배하여 제국 해체의 길로 들어섰으며, 조선은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나라가 되었는가?>

따라서 함재봉에게 청일전쟁은 <근대 동아시아의 힘의 질서가 뒤집힌 결정적 사건>이며 동시에 <조선이라는 국가가 왜 무너져 갔는가를 보여주는 시험대>다.

29회 <청일은 왜 조선에 파병했나?>에서 시작하여 30회 <청일전쟁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31회 <대원군은 어떻게 갑오경장을 맡게 되었나?>를 거쳐, 풍도·성환·평양·황해·뤼순·웨이하이웨이 전투와 갑오경장, 시모노세키조약까지 이어지는 구조 자체가 이를 보여준다.

1. 동학은 청일전쟁의 ‘원인’이라기보다 이미 진행 중이던 청일 경쟁의 폭발점이다

함재봉은 동학농민봉기 때문에 갑자기 청일전쟁이 생겼다는 식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이후 조선에서는 이미 청과 일본이 정면으로 경쟁하고 있었다. 청은 조선을 전통적인 종속관계 속에 묶어 두려 했고, 일본은 조선을 청의 영향권에서 떼어내 근대적인 독립국가로 재편하려 했다.

1894년 조선정부가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청군을 요청하자 일본도 톈진조약을 근거로 파병한다. 그러나 농민군과 정부가 전주화약을 맺어 청·일 양군의 파병 명분이 약화된 뒤에도 일본은 철수하지 않는다. 여기서부터 일본의 목적은 단순한 교민 보호가 아니라 <청의 조선 지배권을 제거하고 조선정치를 재편하는 것>으로 명백해졌다고 함재봉은 본다.

따라서 동학은 불을 붙인 성냥이지 화약 자체가 아니다. 화약은 이미 수십 년 동안 축적된 <중화질서의 붕괴와 새로운 근대 국제질서를 둘러싼 청·일 경쟁>이었다.

2. 함재봉의 가장 강력한 명제: 청일전쟁은 <전근대국가와 근대국가의 전쟁>이었다

32~34회에서 함재봉이 가장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군함이나 총의 단순한 성능 차이가 아니다. 그는 청과 일본의 전쟁 수행 방식 자체가 달랐다고 본다.

청에는 북양함대라는 당시 아시아 최강 수준의 함대가 있었고 최신 군함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휘체계, 군수, 훈련, 인사, 국가재정, 정보전 등에서 근대적 통합국가로서의 능력이 부족했다. 반대로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징병제, 중앙집권적 군대, 근대적 참모체계, 수송·통신·군수체계를 구축하였다.

풍도해전과 성환전투, 평양전투와 황해해전을 거치면서 이러한 차이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함재봉은 이를 <봉건국가와 근대국가의 국력 차이>로 해석한다. 34회에서는 청이 연이은 패전을 선전과 허위보고로 덮으려 한 반면 일본은 근대적 군사·정보체계를 활용했다고 대비시키며, 청일전쟁 이후 서구가 청을 약체로 보고 본격적으로 중국 분할에 뛰어들게 되었다고 강조한다.

이 대목은 함재봉 역사관의 핵심이다.

<근대화란 서양 옷을 입고 서양 무기를 사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사람·돈·정보·군사력을 하나의 목표를 향해 조직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청의 양무운동은 충분하지 않았다. 반면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통해 제도와 국가 전체를 바꾸었다. 청일전쟁은 그 차이를 실전에서 확인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3. 그런데 전쟁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 <누가 조선을 개혁할 것인가>

31회부터 36회까지를 보면 흥미롭게도 전쟁 이야기와 갑오경장 이야기가 계속 교차한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함재봉에게 청일전쟁의 진짜 쟁점은 단지 <청과 일본 가운데 누가 이기는가>가 아니라 <조선을 어떤 국가로 만들 것인가>였다.

일본군은 경복궁을 장악하고 고종의 정치적 행동을 제한한 상태에서 대원군을 다시 전면에 내세운다. 이어 군국기무처가 설치되고 갑오경장이 시작된다. 그러나 대원군은 일본이 기대했던 근대개혁의 지도자가 되기보다 자신의 정치적 권력을 회복하려 하고, 청군 및 동학세력과도 접촉하면서 일본을 몰아내려 한다는 것이 함재봉의 설명이다. 33회가 아예 <청군, 동학과 내통하는 대원군과 평양전투>라는 제목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평양전투에서 청군이 패배하여 한반도에서 밀려나자 일본은 조선개혁에 더욱 직접 개입한다. 이노우에 가오루가 공사로 와서 대원군을 실각시키고 박영효 등 개화파를 중심으로 제2차 갑오경장을 추진한다. 홍범14조는 청에 대한 사대관계 단절, 문벌과 신분 차별 폐지, 재정통일, 근대적 사법·교육·행정제도 확립 등을 선언한다.

여기서 함재봉의 중요한 문제의식이 드러난다.

<조선 내부에서 스스로 해내지 못한 근대국가 개혁을 일본이 강제로 추진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함재봉이 ‘친일개화파’를 이해하는 기본틀이기도 하다. 그에게 김옥균·박영효 등은 단순한 ‘친일파’가 아니라 <조선을 청의 종속에서 떼어내고 근대적 독립국가로 만들기 위해 일본의 힘과 제도를 이용하려 했던 개혁파>다.

4. 청일전쟁의 결과는 동아시아의 서열을 완전히 뒤집었다

뤼순과 웨이하이웨이에서 북양함대가 붕괴하면서 전쟁은 사실상 끝난다. 함재봉은 특히 웨이하이웨이에서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 이토 스케유키와 청의 정여창이 교환한 항복 권고 서신을 길게 소개한다. 적장끼리의 존중을 보여주는 장면을 통해 그는 이 전쟁을 단순한 ‘일본의 야만적 침략전쟁’만으로 보지 않고 근대 국가들 사이에서 벌어진 새로운 형태의 국제전쟁으로 묘사한다.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에서 청은 조선의 ‘완전무결한 독립’을 인정하고 대만·펑후 등을 일본에 양도하며 거액의 배상금을 부담한다. 함재봉에게 이것은 수천 년 지속된 동아시아 문명질서의 역전이다.

<중국이 중심이고 일본이 주변이라는 오래된 질서가 무너지고, 일본이 중국을 압도하는 새로운 동아시아가 탄생한 것이다.>

그는 더 나아가 오늘날 중국이 말하는 ‘백년국치’의 출발점을 청일전쟁 패배에서 찾는다. 즉 청일전쟁은 1894년의 사건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오늘날 중국의 민족주의적 세계관에도 기억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평론

함재봉의 설명이 강력한 이유는 <1894년을 한국사 내부에 가두지 않는다>는 데 있다.

동학농민전쟁 → 청군 파병 → 일본군 파병 → 경복궁 장악 → 갑오경장 → 청일전쟁 → 시모노세키조약이라는 사건들을 한 줄로 연결하면서, 조선의 정치개혁과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화를 동시에 보여준다. 특히 ‘왜 북양함대가 좋은 군함을 가지고도 졌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근대화란 기술의 수입이 아니라 국가제도의 변혁>이라는 점을 설명하는 부분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바로 이 장점에서 함재봉 해석의 가장 큰 약점도 생긴다.

그는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 대 근대화에 실패한 청·조선>이라는 대비를 너무 강하게 설정한다. 그러면 일본의 승리가 역사적 능력의 증명처럼 보이고, 일본이 조선에서 행사한 군사적 강압의 성격이 상대적으로 희미해질 위험이 있다.

가장 중요한 사례가 1894년 7월 23일 경복궁 사건이다. 최근 연구들은 이것을 단순한 ‘개혁 추진을 위한 정치적 개입’이 아니라 일본군이 무력으로 궁궐을 장악하고 조선군을 무장해제한 사건, 나아가 청일전쟁을 만들어내기 위한 계획적 군사행동으로 본다. 일본 측 자료를 이용한 일본 아시아역사자료센터의 설명조차 일본군이 경복궁에 강제로 진입하고 고종을 확보한 후 대원군 정권을 세웠음을 인정한다.

더구나 최근 <건건록> 연구는 ‘조선의 독립’과 ‘조선의 내정개혁’이라는 일본의 명분 자체가 청과 전쟁하고 조선에 개입하기 위한 외교적 도구였다는 점을 강조한다.

따라서 함재봉이 강조하는

<일본이 청의 종주권으로부터 조선을 독립시켰다>

라는 명제는 법적 의미에서는 일정 부분 맞지만, 반드시 다음 문장과 함께 읽어야 한다.

<그 독립은 조선이 스스로 결정한 독립이 아니며, 일본군이 궁궐을 장악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독립이었다.>

실제로 시모노세키조약에서 조선의 독립을 규정한 당사자는 조선이 아니라 청과 일본이었다. 조선은 자기 자신의 독립을 결정하는 조약의 당사자가 아니었다.

또 하나 보완되어야 할 것은 동학농민군이다. 함재봉의 29–38회에서는 동학이 청일전쟁을 촉발한 국내 혼란이자 대원군과 일본의 정치게임에 얽힌 세력으로 등장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제2차 봉기는 일본군의 경복궁 장악과 내정개입 이후 명백하게 <항일전쟁>의 성격을 강화하였다. 최근 연구도 1차 봉기의 중심이 ‘안민’과 반봉건 개혁이었다면 2차 봉기는 일본군을 몰아내려는 ‘보국’ 운동으로 변했다고 본다.

이 점까지 넣으면 1894년의 구도는 함재봉이 제시하는

<전근대 조선·청 ↔ 근대 일본>

이라는 두 항의 대립보다 훨씬 복잡해진다.

실제로는

<청의 종주권>

<조선왕조의 생존>

<일본의 근대적 제국주의>

<개화파의 독립·근대화>

<동학농민군의 민중개혁과 항일>

이라는 여러 힘이 동시에 충돌하고 있었다.

결론

결국 29–38회를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다음과 같다.

<청일전쟁은 일본이 청을 이긴 전쟁이라기보다, 근대국가로 전환한 일본이 전통적인 동아시아 질서를 무너뜨리고 조선과 중국의 운명을 강제로 새로운 국제질서 속에 편입시킨 사건이었다.>

함재봉의 가장 중요한 공헌은 <왜 일본이 이겼는가>를 도덕적 선악이 아니라 국가제도·군사조직·정치적 결단·국제질서라는 차원에서 묻는 데 있다. 반면 그의 가장 큰 약점은 바로 그 ‘근대화’의 렌즈가 너무 강하기 때문에 <근대적 일본이 행사한 폭력과 제국주의> 그리고 <조선인들이 그 폭력에 맞서 보인 독자적 저항>이 상대적으로 작아진다는 데 있다.

그래서 나는 이 29–38회를 이렇게 읽는 것이 가장 생산적이라고 본다.

<함재봉에게서 ‘왜 조선이 패배했는가’를 배우되, 나카츠카 아키라에게서 ‘그 승리를 일본은 어떻게 정당화했는가’를 묻고, 동학 연구에서 ‘그 과정에서 조선 민중은 실제로 무엇을 했는가’를 다시 복원하는 것>이다.

이 세 시각을 합쳐야만 청일전쟁은 단순한 <일본의 근대화 성공담>도, 단순한 <일본 침략사>도 아닌, <조선·청·일 세 사회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근대와 충돌한 동아시아 전체의 역사>로 보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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