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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29

17 위안부 자료 세계기록유산 등재 보류될 듯…일 분담금 협박 탓? : 일본 : 국제 : 뉴스 : 한겨레



위안부 자료 세계기록유산 등재 보류될 듯…일 분담금 협박 탓? : 일본 : 국제 : 뉴스 : 한겨레

위안부 자료 세계기록유산 등재 보류될 듯…일 분담금 협박 탓?

등록 :2017-10-27
일본 언론 “유네스코 IAC가 등재 보류 결정”
일본 정부 분담금 무기 전방위적 압박 통한 듯
제도 변경 등으로 앞으로도 등재 쉽지 않아


평화의 소녀상. <한겨레> 자료사진유네스코 국제자문위원회(IAC)가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의 세계기록유산 등재 여부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기로 결정했다고 <엔에이치케이>(NHK) 방송 등 일본 언론들이 일제히 보도했다. 앞으로도 위안부 기록물 세계기록유산 등재는 쉽지 않아 보인다.

<엔에이치케이>는 27일 세계기록유산 등재 심사를 하는 유네스코 내 기구인 국제자문위원회 관계자 말을 인용해, 26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비공개회의에서 8개국 시민단체가 신청한 자료 등 위안부 자료 2건에 대해 관계국 간의 대화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등재 여부에 대한 판단을 미루기로 했다고 전했다. 이리나 보코바 유네스코 사무총장이 등재 여부에 대해서 최종 판단을 하게 되지만, 이런 상태에서 사무총장이 등재 결정을 내리기는 어렵다.

일본 정부는 지난해 한국과 중국, 일본 등 8개국 시민단체들이 공동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신청하자, “세계기록유산이 정치적으로 이용당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자금 압박과 로비로 등재 저지에 나섰다.

8개국 시민단체는 한반도 출신 군위안부 피해자 중 최초로 피해를 증언한 배봉기 할머니의 육성 증언 테이프 등 2700점 이상의 자료를 기록유산으로 신청했다. 한국 정부는 2015년 12월28일 한-일 위안부 합의 이후 재정 지원을 하지 않다가, 새 정부 출범 이후 지원 재개 의사를 밝혔다.

일본군이 저지른 중국 난징대학살 자료가 2015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데 이어 지난해에 위안부 기록물 등재 신청까지 나오자, 일본 정부는 분담금 지급 보류로 유네스코를 압박했다. 유네스코 예산의 분담 비율은 미국(22%)이 가장 많고, 일본(9.6%)이 뒤를 잇고 있다. 미국이 2011년 팔레스타인이 유네스코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분담금을 내지 않다가 최근 탈퇴 선언까지 한 터라, 현재는 일본이 최대 분담국이 되어 있다. 일본은 한국 정부에 대해서도 위안부 기록물 세계기록유산 등재가 한-일 위안부 합의 취지에 반한다며 압박해왔다. 우리 외교부는 27일 “정부는 이러한 민간의 노력(위안부 기록유산 등재)을 존중하고 지지한다”고 밝혔다.

전망도 어둡다. 유네스코는 지난 18일 집행위원회에서 일본의 주장을 받아들인 세계기록유산 제도 변경안을 채택했다. 

주요 내용은 사실관계나 역사인식 문제에서 관계국 사이에 이견이 있을 때는 심사를 보류한다는 것이다. 내년 신청분부터 새 제도가 적용된다. 스가 요시히데 일본 관방장관은 27일 “일본은 유네스코 모든 관계자가 결의를 존중해, 결의 정신에 입각해 대처해 나가길 강력히 기대한다”고 말했다. 게다가 난징대학살 자료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결정한 보코바 사무총장이 물러나고 다음달에는 프랑스 전 문화장관인 오드레 아줄레가 취임한다. 아줄레는 “유네스코는 대립이 아니라 대화의 장”이라고 말해왔다.

일본군 위안부 관련 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 등재를 위한 국제연대위원회는 “일본 언론 보도 내용이 사실이라면 받아들일 수 없다. 소위원회에서 ‘유일하고 대체불가능한 자료’라는 평가를 받았다. 등재 가치 이외의 것이 고려되었다고밖에 볼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국제자문위원회의 권고에 기록물 등재 가치 이외의 것이 고려되었다고 강하게 의심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도쿄/조기원 특파원, 김지은 기자 garden@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japan/816380.html#csidxff081963648cc0c9872096bdf0e082b

17 [기획연재 평화의 소녀상④] 위안소 현장·이용요금 등 ‘생생’한 재현 – 춘천사람들

[기획연재 평화의 소녀상④] 위안소 현장·이용요금 등 ‘생생’한 재현 – 춘천사람들

춘천사람들 2017년 7월 31일 기획, 기획/특집 Leave a comment 155 Views



경기도 광주시 퇴촌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둘러보기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에 재현된 ‘위안소’ 입구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입구
“원래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은 할머니들의 아픔이 담겨있는 위안소에 설치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한반도 전역 40여 곳에 위안소가 있었지만, 분단 이후 북한쪽 상황은 알 수 없고 남한에 있는 위안소는 경제개발에 밀렸다. 그래서 현재 할머니들이 가장 많이 사는 ‘나눔에 집’에 설치했다.” ‘나눔의 집’ 안신권 소장의 설명이다.

‘나눔의 집’ 앞에 조성된 추모공원에는 소녀상을 중심으로 할머니들의 흉상이 있다. 역사관 입구와 출구에도 각각 3개와 2개의 동상이 있다. 할머니들의 웃음기 없는 차가운 동상에 빗물이 맺힌다. 마치 할머니들의 눈물처럼. 반면, 건물 외벽에 걸려 있는 사진 속의 할머니들은 활짝 웃고 있다.

1관에는 “일본군 위안부는 일본의 침략전쟁에 의한 강간으로 성병이 유행하자 군인과 군 위안부를 군의 감독과 통제 속에 둠으로써 군사적인 효과를 꾀하기 위해 실행됐다”는 설명과 함께 일본 방위성 방위연구소도서관의 위안부 모집에 관한 공문서와 논문의 일부 등 설명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전시돼 있다. 취업알선을 미끼로 사기를 당하거나, 납치나 유괴, 인신매매 등 강제로 위안부가 된 그 당시 소녀들의 사진도 함께 있다.

2관에는 위안부에 대해 최초로 증언한 고 배봉기 할머니에 대한 사진과 설명이 있다. 배 할머니는 김학순 할머니의 첫 증언이 나오기 무려 16년 전인 1975년 ‘교도통신’ 등 일본 언론을 통해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임을 밝혔다. 1914년에 태어난 배봉기 할머니는 머슴의 둘째 딸로 태어나 1944년에 취업사기로 위안소에 끌려가게 됐다.

또한, 위안소로 사용된 중국과 말레이시아 등 세계 각국의 위안소에 대한 설명이 있다. “몸도 마음도 바치는 일본 아가씨의 서비스”라거나 “성전 대승의 용사 대환영”이라는 선전문구가 당시 위안소 문패에 걸려있었다고 한다. 일본군이 사용한 콘돔도 있다. 일본어로 ‘사쿠(サック)’라고 불리는 콘돔 포장지에는 ‘돌격일번(突擊一番)’이라고 적혀있다. 위안소 사용요금표나 주둔지에서 화폐 대신 사용한 군용수표도 전시돼 있다.





3관에는 일본군 위안소를 재현한 방이 있다.

나무로 된 벽에 2평 정도의 방은 침대만 덩그러니 있다. 일본군에 끌려가는 소녀의 모습을 그린 김순덕 할머니의 ‘끌려가는 날’이 인상 깊다.

4관에는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각지의 피해 여성들의 이야기가 전시돼 있다. 1992년 9월에 필리핀 여성으로 처음 위안부 피해를 공개증언한 마리아 로사 루나 헨손(Maria Rosa Luna Henson) 씨는 1942년 생리도 시작하기 전인 만 14세로 일본군에게 윤간을 당하고 2주 후 다시 강간을 당했다. 그 후 그녀는 항일 게릴라 활동에 참여했다가 1943년에 일본군에게 잡혀 다시 9개월 동안 감금과 윤간을 당했다.

뒤편의 할머니들을 위한 추모공간에는 세계 각지에서 보낸 종이학들과 할머니를 위한 응원편지, 그림, 꽃들이 놓여있다. 추모 공간 옆에는 전 일본육군 제33사단 참모가 기록한 책이 있다. 부대 후미에 여자 위문단, 즉 위안부가 따라오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5관에서는 고 김학순 할머니의 생애와 수요시위 사진 및 영상과 오사카·타이완·고베·독일·필리핀 등 각국에서 진행된 수요시위 사진을 볼 수 있다.
김인규 인턴기자, 사진=김예진 시민기자

12 원불교신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 나비되어 날다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 나비되어 날다


 원불교신문 [1628호] 2012년 08월 24일 (금)
 이성심 기자 lss@wonnews.co.kr






올해로 해방 67주년을 맞았다. 이번 광복절은 우연찮게도 수요일이다. 15일 낮12시 굵은 빗줄기가 하염없이 내렸다. 우중임에도 사단법인)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세계연대행동의 날 연대집회'를 개최했다. 이날 서울 일본대사관 앞에서 진행된 수요 집회는 1035차로 특별집회로 열렸다. 매주 수요일 낮 12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과 사과를 요구하는 할머니들의 시위'가 열리는 셈이다.

이와 관련해 17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이야기가 전시된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을 방문하면서 위안부 삶의 처절함을 알게 됐다.

서울 성산동에 위치한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은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들이 겪었던 역사를 기억하고 교육하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활동하는 공간이다. 또한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전시 성폭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연대하며 전쟁과 여성폭력이 없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 행동하는 박물관이다.

배봉기 할머니를 만나다

박물관 맞이방. 3천 원을 내고 입장권을 구입했다. 입장권 뒷면에는 배봉기 할머니의 사진과 이력이 안내되어 있다.

박물관 측에서는 "요일마다 티켓의 사진이 다르다. 다섯 할머니의 증언이 영상으로 준비되어 있다. 최소 다섯 번은 박물관을 방문해야 한다"고 안내했다.

오늘은 박물관에서 배봉기 할머니의 증언을 듣는 날이다. 그는 1914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다. "남쪽 섬에 가면 돈을 벌게 해주겠다"는 일본인의 취업사기에 걸려들어 1943년에 오키나와 도카시키 섬으로 끌려갔다. '빨간 기와로 된 위안소'에서 일본 군인들의 성노예로 몇 달을 지내던 중, 미군의 공습으로 위안소가 불타면서 산 속으로 피난 다니다가 일본군의 취사반에 투입됐다.

그는 전쟁이 끝난 후 미군에 투항한 일본군과 함께 진지를 나와 미군의 민간인수용소에 수용됐다. 수용소를 나온 후에는 성매매와 온갖 궂은 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간신히 살았다. 1975년 지역신문에 사연이 보도되면서 세상에 알려진 후 1991년 77세에 오키나와에서 생을 마감했다.

쇄석 길. 이 길을 따라 역사 속으로 걸어갔다. 전쟁의 포화소리와 함께 거친 돌길을 걸으며 피해자들이 겪어야 했던 전쟁과 고통의 시기에 들어선 것이다. 양쪽 벽면의 일그러진 얼굴 형상과 살고자하는 손바닥이 몸서리 쳤다. 그 맞은편에는 고개 숙인 검은 그림자가 긴 어둠의 터널을 향해 이끌려 가고 있다.

지하 전시관. 전쟁터와 위안소를 배경으로 피해자들의 고통스런 삶이 녹아있는 곳이다. 전시관 벽면에서 그녀의 증언영상이 상영되고 있었다. 입장권 뒷면에 있는 내용을 그대로 증언한 영상이다. 떨리는 목소리로 때론 울먹이는 목소리로 당시를 기억해 냈었다. 암울하기만 했던 당시의 역사, 그의 목소리를 통해 육중하면서도 힘겨운 역사의 무게감을 느꼈다.

계단을 따라 지하에서 지상으로 오르는 벽, 호소의 공간. 피해자들이 절규하는 고통의 목소리가 사진과 함께 거친 벽 곳곳에서 메아리치고 있다.

▲ 박물관 내부의 추모관.벽돌 사이로 들어오는 밝은 햇살과 사람들의 관심이 그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치유한다.

"내가 바로 살아 있는 증거인데, 일본 정부는 왜 증거가 없다고 합니까." "한마디라도 진실한 사죄의 말을 듣는 게 소원이죠." "그걸 다 기억하고 살았으면 아마 살지 못했을 거예요." "그 놈들 한 걸 생각하면 보상이라는 것으로도 한이 안풀린다." "원통해서 못살겠다 내 청춘을 돌려다오." "나와 같은 아픔을 겪고 있는 여성들에게 희망이 되고 싶어요." 밝은 공간으로 나아갈수록 피해자들의 목소리는 자신과 같은 일을 다시 겪지 않기를 바라는 호소와 함께 희망의 목소리로 변해갔다.

"우리 역사를 보고 배워서 다시는 전쟁 없는 세상, 폭력 없는 세상을 만들어 주세요."

박물관 2층에서는 전쟁이 낳고 키운 기형적 제도인 일본군 위안부의 역사관과 운동사관, 생애관, 평화비 소녀상을 만날 수 있다. 가슴 찡한 눈물이 소리 없이 흐른다.

특히 2층 베란다에는 추모관을 만들었다. 고인이 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얼굴과 사망 날짜가 검은 벽돌을 채우고 있다. 배봉기 할머니에게 꽃 한송이를 바쳤다.

당시 일본군 위안부가 된 여성들은 한국, 대만, 중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미얀마, 동티모르 등 일본에 점령당한 지역과 전선에 동원됐다. 그 수는 20만 명을 비롯해 여러 추정치가 있으나 관련 자료가 전면 공개되지 않아 정확한 수치를 알기 어렵다고 한다. 한국인 생존 여성들의 경우 동원 당시 나이가 11세의 어린 나이에서 27세 까지로 보고되고 있다. 14~19세 때 동원된 경우가 가장 많았다.

정대협 허미례 간사는 "우리나라에 현재 생존자는 60여 명이 있다. 그들이 매주 일본대사관 앞에서 수요시위를 하는 것은 전쟁범죄 인정, 진상규명, 공식사과, 법적배상, 전범자 처벌, 역사교과서 기록, 추모비와 사료관 건립 등 일곱 가지 요구사항이다"고 설명했다.

▲ 일본대사관 앞의 평화비 소녀상.

나비기금, 전시 성폭력 여성 희망

정대협에서는 전시 성폭력 여성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나비기금'을 모금 중이다. 전쟁의 한가운데서 무자비한 성폭력의 피해자가 되어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온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 이제 그들이 세상에 역사의 진실을 증언하며 평화와 여성인권을 외치는 당당한 사람으로 변했다. 이제는 아프리카 내전에서 고통 받고 있는 여성들의 손을 잡아주고 싶어 세상을 향해 외치고 있다. 그들은 "일본 정부로부터 배상을 받으면 그 돈을 전액 콩고의 전시 중 강간 피해 여성들을 돕기 위해 기부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김복동 할머니는 "열다섯 살에 일본군 성노예가 되어 대만, 남양군도 등 여러 전쟁터로 끌려 다녔다. 지금 나보다 더 딱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들을 위해 앞으로 내가 받게 될 배상금을 써 달라"고 호소했다.

길원옥 할머니 역시 "열세 살에 끌려갔다. 내가 아파봤기 때문에 나와 같은 아픔을 당한 여성들이 얼마나 아픈지 알고 있다. 우리와 같은 아픔을 겪는 여성들에게 힘이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들 스스로 '나비'가 된 것이다. 나비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과 함께 모든 여성들이 차별과 억압, 폭력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롭게 날개짓하기를 염원하는 의미를 담은 상징물이다. 나비는 고치를 뚫고 나와야만 세상을 향해 날 수 있다. 마찬가지다. 세상의 편견, 어둠의 공포에 힘겨워하는 여성들이 치유의 과정을 극복하고 벽을 뚫고 세상을 향해 날아오르기를 염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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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동지적 관계’로 담지 못한 젠더와 민족주의, 팩트의 충돌



‘동지적 관계’로 담지 못한 젠더와 민족주의, 팩트의 충돌

‘동지적 관계’로 담지 못한 젠더와 민족주의, 팩트의 충돌
일본에서 환영받는 ‘제국의 위안부’… 전시 강간과 국가적 성폭력 문제 외면, “민간업자도 일본군이 통제”
장슬기 기자 wit@mediatoday.co.kr 2016년 07월 09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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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유하 세종대 교수(일어일문학)가 검찰에 기소된 지난해 11월 서울 프레스센터와 일본 도쿄 프레스센터에서는 각각 기자회견이 열렸다. “공권력이 특정 역사관을 기반으로 학문의 자유를 억압”한 것에 대해 규탄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일본 지식인들의 성명서에 ‘제국의 위안부’를 높이 평가하는 부분이 있다. 단순히 ‘학문의 자유’ 문제로만 볼 수 없는 이유다.

위안부 문제를 바라볼 때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지난 1995년 당시 무라야마 내각이 해결책으로 내놓은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 기금(아시아여성기금)’에 대한 인식이다.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범죄에 대한 배상 책임)’이 해결됐고, ‘도덕적 책임’만 남았다는 관점에 있는 이들에겐 아시아여성기금이 현실적으로 최선의 해결책이다. 지난해 ‘12·28 한일 위안부 합의’ 역시 같은 관점에서 이루어진 외교 협상이다.

보통 아시아여성기금, ‘12·28 한일 위안부 합의’에 우호적인 학자들은 ‘제국의 위안부’에도 호의적인 태도를 취한다. 지난 11월 일본 지식인 성명을 주도한 와카미야 요시부미 전 아사히신문 주필이 대표적이다. 박 교수 역시 아시아여성기금을 ‘화해’의 중요한 수단으로 본다.

▲ 2015년 12월21일 와카미야 요시부미 전 아사히신문 주필의 조선일보 칼럼.





그는 지난해 12월21일 조선일보 칼럼에서 “우리가 박 교수를 평가하는 것은 자신의 모습을 직시하려는 자세가 있기 때문이지 일본의 면책을 바라기 때문이 아니”라며 “한국에서 약 60명의 할머니가 ‘아시아여성기금’을 받았다는 사실까지 무시하는 것은 공평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는 기금을 받은 할머니들을 강조했지만 실제 아시아여성기금을 거부한 할머니가 위안부 할머니의 두 배 가량 많다. 일본 정부가 ‘법적 책임’을 인정하지 않은 채 소위 ‘돈으로 때우려 했기’ 때문이다.

와카미야 전 주필은 지난해 12월10일 동아일보 칼럼 “할머니의 명예는 훼손됐을까”에서 “그(박 교수)는 언론의 자유를 외치면서 평화를 사랑했던 사람이었다”며 박 교수가 ‘이시바시 단잔 기념 와세다 저널리즘 대상’, 마이니치신문에서 준 ‘아시아태평양상 특별상’ 등을 받았다고 극찬했다. 또한 “위안부와 일본군이 ‘동지적 관계’에 있었다는 기술이 오해의 표적이 되고 있지만 그런 극한 상황에서는 좋든 싫든 미묘한 동지적 관계도 생겨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 2015년 12월10일 와카미야 요시부미 전 아사히신문 주필의 동아일보 칼럼.





와카미야 전 주필에 대해 길윤형 한겨레 도쿄 특파원은 “그는 박 교수의 저작을 높게 평가하고 한일 양국의 화해를 강조하면서도 위안부 문제가 일본 정부가 책임을 져야 하는 국가 범죄인지 여부에 대해 언급을 피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 내에서 박 교수에 대한 옹호는 광범위하다. 작가 다카하시 겐이치로와 정치학자 스기타 아쓰시는 아사히신문에 서평을 통해 박 교수 책에 대해 호평했다. 지난해 11월 성명에는 여성학자 우에노 지즈코 도쿄대 명예교수, 고모리 요이치 도쿄대 교수(문학), 나카자와 게이 호세이대 교수(문학) 등 문학계 뿐 아니라 야스오 요시노리 전 교도통신 서울특파원, 와카미야 전 주필 등 언론인도 있다.

이들은 12·28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해 대체로 환영한다는 입장 내지는 특별한 반응이 없는 상황이다. 한 예로 아시아여성기금 이사를 맡았던 오누마 야스아키 메이지대 특임교수(국제법)는 “모든 위안부와 이들을 둘러싼 지원 단체, 한일 두 나라, 학자, 나아가 국제사회를 모두 만족시키는 진정한 해결 따위는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오누마 교수는 박 교수의 2005년 저작 ‘화해를 위해서’를 높이 평가했고, 지난해 성명에도 이름을 올렸다. 그는 12·28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해서도 일본의 일방적 승리라고 보면서도 향후 양국이 합의 내용을 잘 이행하길 바란다는 뜻을 밝혔다.

일본 역사학계, 박유하 비판

아시아여성기금 이사를 지낸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역사학)는 아시아여성기금이 한국 위안부 문제해결의 최선책이라는 입장이다. 와다 교수는 일본 진보세력에 대해 “일본 정부가 책임을 회피하는 것에 화가 났지만 (아시아여성)기금을 부정한 뒤 정부로부터 더 바람직한 조처를 끌어낼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와다 명예교수는 지난해 11월 성명서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이는 박 교수에 대한 검찰 기소를 표현의 자유 침해로 보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하기보단 일본군과 위안부 할머니를 ‘동지적 관계’로 보는 박 교수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박 교수는 일본군(혹은 정부)보다 위안부를 모집한 민간업자의 책임을 강조했다. 반면 와다 교수는 “민간업자가 맘대로 여성을 모은 것이 아니고 업자도 국가적 통제의 일부”라고 본다. 또한 조선인 위안부를 모집할 때 “‘나라를 위해’, ‘전쟁에 이기기 위해’라는 이데올로기적 설득이 있었을 것”이라면서도 “이런 생각을 한 것은 조선인 업자일 수는 있지만 모집된 조선인 여성들에게 그런 인식이 있었는지 의문”이라는 입장이다. 즉 일본군과 위안부가 ‘동지적 관계’라고 볼 수 없다는 뜻이다.

와다 명예교수는 12·28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해 “가능한 사죄를 작게 하고 감추되 미국으로부터 승인을 받으려는 아베의 전술에 한국 정부가 당한 것”이라며 “사죄가 불충분하지만 합의를 지렛대 삼아 아베 총리를 압박하는 것 외에는 길이 없다”고 했다. 지극히 현실주의적 입장을 취하면서도 박 교수의 역사 인식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는 박 교수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 일본 다수 역사학계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일본역사학협회, 역사학연구회 등 16개 역사학 단체는 지난해 “위안부 동원 과정의 강제성뿐 아니라 동원된 여성들이 인권을 유린당한 성노예 상태에 놓여있었던 것을 분명히 한다”며 “성매매 계약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배후에는 (식민지배 등의) 불평등·불공정 구조가 존재했다”고 밝혔다. 해당 성명에 1만3800여명의 역사학자가 참여했고, 일본 역사학자의 일반적인 의견으로 봐도 된다는 게 성명을 주도한 구보 도루 역사학연구회 위원장의 설명이다.



김규항·장정일 등 박유하 옹호

박 교수와 위안부 문제 인식을 비슷하게 하는 이는 칼럼니스트 김규항과 소설가 장정일이 대표적이다. 지난 5월 장정일은 “박유하 죽이기-정영환·이명원의 오독”이란 글에서 “박유하를 공격하는 사람들이 학문적 논쟁을 하는 게 아니라 ‘박유하 죽이기’를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지엽적인 부분을 어떻게 독해했느냐에 대한 논쟁이다.

김규항은 ‘더러운 여자는 없다’는 글에서 위안부 할머니 첫 증언자로 알려진 고 김학순 할머니 이전에 1975년 자신이 위안부였다고 밝힌 배봉기 할머니의 이야기를 꺼냈다. 배 할머니가 종종 “일본군이 져서 분하다”는 말을 한 것을 두고 김규항은 “그는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됐고, 민족의식이 없었으며 자신이 일본군과 ‘동지적 관계’에 있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한국 사회가 그간 ‘젠더 의식이 부족한 민족주의’ 관점에 따라 위안부 문제를 ‘순결한 조선 처녀가 일제에 겁탈당한 사건’으로만 이해했다는 지적은 김규항-박유하 등의 주장으로 논리 자체는 타당성이 있다. 실제 이 지적은 소녀상 세우기로 대표되는 정대협 운동방향에 대한 지적으로도 활용됐다.

박 교수 검찰 기소에 대해 성명을 낸 한국 지식인은 연세대 문정인 교수, 유시민 전 장관, 작가 홍세화, 김곰치, 화가 임옥상, 금태섭 변호사 등 각계 지식인 190여명이다. 하지만 해당 성명은 검찰 기소에 대해서만 비판했을 뿐 박 교수 주장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 이들도 다수 있다.

이나영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김규항의 주장에 대해 “배봉기 할머니 이야기가 한국 사회에 공명되지 않은 이유는 ‘순결한 조선처녀라는 위안부상’에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들을 귀와 볼 수 있는 눈을 갖춘 ‘우리’가 부재했기 때문”이라고 반박했다.

김요섭 문학평론가는 “순결한 소녀로, 민족의 상처란 방식으로 위안부의 기억을 단일하게 만들었다는 정대협은 오히려 대다수가 침묵하고 외면한 미군위안소 문제를 공론화했다”고 반박했다. 그는 “오히려 주목해야하는 것은 한국의 위안부 문제가 전시 강간과 국가적 성폭력 공론화에 있어 선도적인 위상을 점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원문보기:
http://www.mediatoday.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130904#csidxe90b8afad0a8ae78d617ae26f173867

16 [김규항] 더러운 여자는 없다 - 경향신문



[김규항의 혁명은 안단테로]더러운 여자는 없다 - 경향신문

[김규항의 혁명은 안단테로]더러운 여자는 없다김규항 |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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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02.01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본격화한 건 1991년 김학순 할머니(1924~1997)의 증언부터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의 첫 증언자는 김 할머니가 아니라 오키나와에 살던 배봉기 할머니(1914~1991)다. 배 할머니는 김 할머니보다 16년 먼저인 1975년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언론에 밝힌다. 가난한 농부의 딸로 태어난 그는 7살 때 식모로 팔려간다. 첫 결혼에 실패하고 조선 각지와 만주 등을 떠돌던 그는 29살이 되던 1943년 “일을 하지 않고도 돈을 벌 수가 있다. 누워만 있어도 입으로 바나나가 떨어지는 곳에 간다”는 위안부 모집 업자의 꾐에 위안부가 된다.



‘전쟁터에서의 일이 부끄러워’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조선말마저 잊은 채 살아가던 그가 증언을 결심한 이유는 일본에서 계속 살기 위해서였다(1972년 오키나와를 되찾은 일본 정부는 1945년 8월15일 전에 일본에 입국한 조선인들에게 신고를 거쳐 특별 영주권을 준다).


일본군 위안부 ‘최초 증언자’인 그가 한국에서 잊혀진 이유는 무엇일까. 일차적으로는 독재정권이 위안부 문제를 덮으려 했다는 것, 증언이 조총련계를 통해서였다는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에도, 위안부 운동이 본격화한 후에도, 파국적 한·일 위안부 협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분노한 현재까지도 그의 존재가 부각되지 않는 데는 다른 정서적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그는 ‘순결한 조선처녀’라는 위안부상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배 할머니를 취재한 기사(한겨레 2015년 8월7일자)에 따르면 그는 위안부였음을 털어놓을 때 “유군가 마케타노가 구야시이사”(일본군이 져서 분하다)라고 거듭 말하곤 했다. 할머니는 일본군이 져서 세상이 변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게 ‘조국 해방’을 뜻하는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말하자면 그는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되었고, 민족의식이 없었으며, 자신이 일본군과 ‘동지적 관계’에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위안부들이 위안부가 되어야만 했던 다양한 사연과 삶의 배경을 그 자체로 이해하고 존중하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가 원하는 위안부상에 얼마나 부합하는가에 좀 더 집중한다. ‘순결한 조선처녀’라 여겨지면 존중심을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구석이 있다면 외면하거나 아예 눈감아 버린다.


위안부를 대상화하는 그런 위선적 태도는 위안부 문제가 국제 사회에서 폭넓은 설득력을 갖지 못한 주요한 이유이기도 했다. ‘위안부는 모두 강제로 끌려간 소녀였다’는 우리의 강변은 ‘위안부는 모두 자발적 매춘부였다’는 일본 우익의 강변과 쌍을 이루어왔다.

배봉기 할머니는 전쟁이 끝나고도 한동안 미군을 상대로 같은 일을 해야 했다. 위안부 문제는 단지 ‘일본놈들의 만행’이 아니라, 가부장제 국가에서 언제나 여성에게 존재하는 폭력 구조의 일부다. 폭력 구조는 나치의 유대인 수용소에도 남성 수용자를 위한 위안부가 존재했을 만큼 일반적이며 뿌리 깊다. 우리는 위안부 문제의 그러한 본질을 직시하려 하지 않는다.

2014년 6월 미군 위안부 122명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그들이 위안부가 된 경로 역시 다양했다. 인신매매로 끌려온 소녀도 있고 가족에 의해 팔려온 사람도 있고 돈을 벌기 위해 온 경우도 있다. 그들에게 ‘애국교육’을 하고 미군의 건강을 위해 성병관리를 하고 도망치면 경찰을 통해 잡아오기까지 했던 한국 정부는 그 모든 사실을 부인한다. 우리 가운데 일본군 위안부와 그들을 동등하게 지지하거나 연대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들은 순결한 처녀들이 아니라 ‘양갈보들’인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우리에게 말한다. “저희가 괜히 나섰다가 일본 우익들만 좋은 일 시키는 거 아닐까, 고민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연대 요청을 거부하고 위안부 소녀상에 온전히 자신을 일치시키는 걸 비판하거나 사실 여부를 따지려 드는 건 인간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행동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위안부 문제를 위안부 소녀상으로 단일화하는 건 다른 차원의 일이다. 우리가 우리의 알량한 역사의식과 지배체제로부터 주입된 민족의식과 전근대적 여성관을 위안부 소녀상을 내세워 은폐하려 드는 건 말이다.

“여성이 성을 파는 것은 자유의사에 의한 ‘자발적’인 일 같아 보여도, 결코 그렇지는 않다. 그것은 여성이 국가와 남성에게 봉사하게 되어 있는 가부장제 구조 속의 일이다. 위안소가 ‘인정된’ 장소였고 ‘합법적’이었다는 그들의 주장은 그 ‘법’이 국가와 군이 만든, 남성을 위한 ‘법’이었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다른 일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자원’한 처녀들이었건, ‘매춘’을 하게 될 것을 알고 간 여성들이었건, 그 구조적인 강제성은 결코 희석되지 않는다.”

위안부는 ‘자발적 매춘부들’이라는 일본 우익의 주장을 반박하는 박유하의 말이다.
과연 위안부 할머니들을 더러운 여자들로 모욕하는 건 누구인가. 더러운 여자는 없다. 더러운 게 있다면 여성을 깨끗한 여자와 더러운 여자로 구분하고 억압하는 가부장제의 폭력, 그에 기반을 둔 우리의 싸구려 정의일 것이다.

(박유하의 책 <제국의 위안부>는 전문을 인터넷에서 다운로드할 수 있다. http://parkyuha.org/)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2012048395#csidx58af09a00c97155b05aef7fe7dfd234

15 우리가 잊어버린 최초의 위안부 증언자…그 이름, 배봉기 : 한겨레



우리가 잊어버린 최초의 위안부 증언자…그 이름, 배봉기 : 일본 : 국제 : 뉴스 : 한겨레


우리가 잊어버린 최초의 위안부 증언자…그 이름, 배봉기

등록 :2015-08-07
[토요판] 커버스토리 / 위안부 최초 증언, 고 배봉기 할머니
오키나와 작은 섬에서 찾은 쓸쓸한 흔적


할머니의 말년을 가족같이 돌봤던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 오키나와 지부의 일꾼이었던 김수섭(74), 김현옥(73)씨 부부와 함께 나들이를 갔다가 찍은 사진. 사진 김수섭씨 부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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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가 기억하지 못하는 배봉기(1914~1991) 할머니는 한반도 출신 여성들 가운데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였음을 처음 밝힌 인물이다. 배 할머니는 1914년 9월 충남 예산군 신례원리에서 태어나 1991년 10월18일 나하시 마에바시 2초메에서 숨졌다. 사진은 할머니의 말년을 가족같이 돌봤던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 오키나와 지부의 일꾼이었던 김수섭(74), 김현옥(73)씨 부부와 함께 나들이를 갔다가 찍은 사진이다. 김씨 부부는 사진을 찍은 정확한 시점은 기억하지 못했다. 

배 할머니는 한국 사회에서 본격적인 위안부 운동이 시작된 계기가 된 김학순 할머니의 첫 증언이 나오기 무려 16년 전인 1975년 <교도통신> 등 일본 언론을 통해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임을 밝혔다. 그러나 배 할머니의 증언은 사회의 폭넓은 반향을 부르지 못했고, 그래서 곧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고 말았다. 우린 왜 할머니를 기억에서 지운 것일까. 그 실마리를 찾기 위해 배봉기 할머니기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했던 오키나와의 작은 섬, 할머니가 살던 작은 헛간, 할머니가 마지막 숨을 거둔 동네를 찾아가 봤다. 그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당했던 피해를 감춘 채 생을 마감해야 했던 수많은 위안부 피해 여성들의 쓸쓸한 뒷모습이었다.

일본군이 져 분하다던 할머니가 일왕의 사죄를 말했다

▶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최초로 밝힌 배봉기 할머니는 1945년 8월15일 일본이 패망한 뒤에도 고국행을 택하는 대신 오키나와에 남았다. 이후 자신의 사연이 알려지게 되는 1975년 10월 무렵까지 말도 통하지 않는 먼 이국땅을 전전하며 홀로 살았다. 할머니는 왜 전쟁이 끝난 뒤 고국으로 돌아가는 대신 낯선 이국땅에 남았을까. 할머니는 생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전쟁터에서의 ‘일’이 창피해서 전후에 본국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배 할머니를 기억하는 이들은 “할머니가 참 깔끔하신 분이었다”고 회상했다.



한국에서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 9월 무렵 배봉기 할머니가 자신을 찾아온 일본 주간지 <여성자신> 기자들 앞에서 자신의 고향인 충남 예산 신례원리의 위치를 표시하고 있다. 지도는 당시 총련 오키나와 지부의 벽면에 걸려 있던 것이다. 배 할머니는 당시 고향에 같이 가자는 일본 기자들의 제안에 서럽게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김수섭씨 부부 제공

“안따, X%$# 돗떼 이루노?”(당신 X%$# 찍고 그래?)

한적한 어촌 골목을 헤집고 다니며 닥치는 대로 사진을 찍고 있는 기자의 등 뒤에서 느닷없이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본어와 오키나와 방언이 섞인 듯한 독특한 문장이어서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었지만, 대략의 뜻은 짐작할 수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7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성난 얼굴로 기자의 얼굴을 쏘아보고 있었다. ‘당신 누군데 남의 집 사진을 함부로 찍느냐’는 항의의 눈빛이었다.

지난달 26일 오전 11시, 오키나와 본섬의 중심도시 나하의 도마린을 출발한 499t(정원 450명)짜리 여객선 ‘페리 도카시키’는 서쪽으로 1시간20분을 달려 오키나와 게라마제도의 가장 큰 섬인 도카시키섬에 도착했다. 사정없이 내리쬐는 오키나와의 뙤약볕 아래, 섬의 중심지인 도카시키 마을은 낮게 엎드려 있었다. 휴일인 탓에 마을의 공공시설은 모두 문을 걸어 잠근 채였고, 손에 쥔 것은 20여년 전에 찍은 흑백사진 한 장뿐이었다. 그곳에서 반드시 찾아야 하는 건물이 있었다.

“이 마을에 예전에 일본군 위안소가 있었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위치를 몰라 한 시간째 헤매고 있습니다.”

“우린 잘 몰라.”

노인이 오키나와의 뙤약볕에 벌겋게 달아오른 기자의 얼굴을 힐끗 쳐다봤다.

“저기 저 공터야. 우린 몰라. 안다고 해야 서너살 때 일이야. 사람들에게 얘기만 들었지. 저곳에 위안소가 있었어.”



1944년 11월부터 1945년 3월 무렵까지 배봉기 할머니가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했던 오키나와현 도카시키섬의 위안소가 있던 자리. 지붕이 빨간 기와로 되어 있어서 ‘빨간 기와집’으로 불렸다. 항구에서 걸어서 3분 정도 거리에 있다. 길윤형 특파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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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가리킨 빈터 앞에 도착해 20년 전의 사진과 현재의 모습을 비춰봤다. 저만치 산의 능선과 옥상으로 향하는 앞집 계단의 위치가 정확히 일치했다. 도카시키 항구에서 걸어서 고작 3분. 1944년 11월부터 1945년 3월말까지 이곳에 있던 ‘빨간 기와집’에서 배봉기(1914~1991) 할머니를 포함한 조선인 여성 7명이 일본군에 의해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했다. 현재 빈터에는 ‘마티즈’와 비슷하게 생긴 폐차 한대가 방치돼 있고, 반대쪽 담장 위엔 “책 안에서는 가족여행도 가능합니다”라는 영문을 알 수 없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한반도 출신 위안부 피해 여성 중
자신의 경험 증언한 최초의 인물
위안부 운동의 결정적인 계기 된
1991년 김학순 할머니 증언보다
무려 16년 전인데 우린 왜 모를까


오키나와가 일본 반환되던 1972년
글자 몰라 서류접수 못해 추방위기
위안부로 오키나와 오게 된 사연
지인에게 털어놓고 탄원서 제출
감추고 싶었던 개인사 알린 계기



빨간 기와집, 그 자리에 가다



위안부 주요 사건 연표한국인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배봉기란 인물은 현재 한-일 관계의 최대 현안이 되어 있는 위안부 문제의 역사를 기록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한반도 출신 위안부 피해 여성들 가운데 자신이 옛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증언한 최초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배 할머니의 존재가 확인된 것은 한국에서 위안부 운동이 시작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 1991년 8월 김학순(1924~1997) 할머니의 ‘역사적인 증언’이 이뤄지기 무려 16년 전이다. 왜 우린 배봉기 할머니를 기억에서 지운 것일까. 또 배 할머니와 김학순 할머니 사이에 존재하는 16년이라는 광막한 공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오키나와의 작은 섬 항구에서 쉽게 답을 내릴 수 없는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배 할머니가 살아온 고단한 삶의 모습은 일본의 독립언론인 가와다 후미코가 1988년 펴낸 저서 <빨간 기와집>(책엔 최봉기라는 가명으로 등장한다)에 자세히 기술돼 있다. 

배 할머니는 1914년 9월 충남 예산군 신례원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다른 농가에 더부살이를 하며 간신히 입에 풀칠만 하는 가난한 농사꾼이었다. 그 때문에 할머니는 만 6살 때 다른 집의 ‘민며느리’가 된다. 명목이 민며느리였을 뿐, 가난한 집에서 입을 하나라도 덜기 위해 사실상 식모로 팔려간 것이었다. 17살에 첫 결혼을 하지만 실패했고, 이후 조선 각지와 만주 등을 정처 없이 헤매며 살았다. 책에 담긴 할머니의 인생사는 너무나 처참해 자주 책장을 덮으며 한숨을 내쉬게 된다.

배 할머니의 인생에 결정적인 불행이 찾아온 것은 그가 29살이 되던 1943년 늦은 가을이었다. 그는 함경남도 흥남에서 “일을 하지 않고도 돈을 벌 수가 있다. 누워만 있으면 입으로 바나나가 떨어지는 곳에 간다”는 위안부 모집 업자의 꾐에 속아 위안부 모집에 응하고 만다.

1943년 말이면 이미 태평양전쟁의 전황은 미국 쪽으로 기울어진 상황이었다. 미군 잠수함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일본의 병참선은 이미 무너져 있었다. 할머니가 흥남, 서울, 부산, 일본의 모지, 가고시마 등을 거쳐 나하에 도착한 것은 위안부 모집에 응한 지 1년이나 지난 1944년 11월이었다. 당시 할머니가 목격한 나하는 미군이 1944년 10월10일 오키나와 각지를 집중 공습한 이른바 ‘10·10 공습’으로 폐허가 되어 있었다. 배 할머니는 이후 다른 조선인 여성 6명과 함께 오키나와 본섬이 아닌 도카시키섬으로 배치돼 ‘빨간 기와집’이라 불린 일본군 위안소에서 아키코라는 가명으로 일본군을 상대하는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했다. 

이후 일본이 패전한 뒤엔 미군 수용소에서 이번엔 미군을 상대로 똑같은 일을 했다고 한다.



배봉기 할머니를 16년간 돌봤던 총련 일꾼 김수섭씨가 1975년 10월 할머니와 처음 만났던 난조시 사시키에 있던 헛간의 위치를 설명하고 있다. 현재 헛간 건물은 철거됐고, 그 위치엔 창고로 보이는 건물이 들어서 있다. 길윤형 특파원
 charisma@hani.co.kr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이하 총련) 오키나와 지부의 ‘일꾼’이었던 김수섭(74)씨가 배 할머니를 처음 만난 것은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인 1975년 10월이다. 당시 할머니는 오키나와 동남부의 난조시 사시키에 살고 있었다. 지금은 주변이 반듯한 택지로 구획돼 있지만, 김씨는 “예전에 이 주변은 온통 사탕수수밭이었다”고 말했다. 당시 배 할머니는 수수밭의 안쪽에 있던 ‘가스도 없고 수도도 들어오지 않는’ 2~3평 정도의 헛간에 살고 있었다. 헛간은 이미 오래전에 헐려 이젠 2층 건물 높이의 창고가 들어서 있다.

김씨는 “배 할머니는 당시 오랜 방랑생활로 심신이 극도로 피폐해진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같은 총련의 일꾼이었던 아내 김현옥(73)씨와 할머니를 찾아가면 “어느 날은 잘 맞아주다가도 기분이 바뀌면 ‘만나기 싫다’며 문전박대를 하기 일쑤였다”고 말했다. 할머니가 두통, 신경통, 신경쇠약 등으로 작은 헛간에서 계속 소리를 지르다 보니 동네 아이들이 할머니에게 “미친 할머니”라고 돌을 던질 정도였다.

당시 배 할머니는 우리말을 이미 잊은 상황이었다. 그런 배 할머니가 일본말로 김씨 부부에게 자주 하던 말은 “유군가 마케타노가 구야시이사”(일본군이 져서 분하다)는 얘기였다. 김현옥씨는 “할머니 입장에선 일본군이 이겨야 (위안부인) 자신도 살 수 있었으니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일본군이 져서 세상이 변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게 ‘조국 해방’을 뜻하는지는 이해하지 못했고, 한국전쟁으로 조국이 남북으로 분단됐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면서 “내가 가난했으니까”, “그게 내 팔자다”라며 자신에게 일어난 불행을 모두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일본 출입국정책에 의해 강제 커밍아웃

배 할머니가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밝히게 된 계기는 1972년 5월 이뤄진 ‘오키나와의 일본 복귀’였다. 오키나와의 시정권을 회복한 일본 정부가 1945년 8월15일 전에 일본에 입국한 사실이 확인되는 오키나와현 거주 조선인들에게 특별영주를 허가한다는 조처를 발표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신고 기간을 3년으로 제한했다.

배 할머니는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탓에 일본어와 우리말 모두를 읽고 쓰지 못했다. 서류를 내지 못해 강제추방의 공포에 시달리던 배 할머니는 예전에 함께 일한 적이 있는 식당 주인에게 자신이 ‘위안부로서 오키나와에 와서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얘길 털어놓는다. 식당 주인은 이러한 사연을 담은 탄원서를 오키나와현 입국관리사무소에 제출했다. 이를 통해 할머니는 추방당하지 않고 특별영주 자격을 얻을 수 있었지만, 감추고 싶었던 쓰라린 개인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1975년 10월 일본 언론을 통해 배 할머니의 사연이 기사화됐기 때문이다. 그 무렵 나온 1975년 10월22일 <고치신문>의 기사 속에서 뒷모습의 할머니는 “전쟁터에서의 ‘일’이 부끄러워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1972년 5월 오키나와가 일본에 반환된 뒤 총련은 1972년 8월15일 오키나와에서 이뤄진 조선인 강제동원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조선인 강제연행 진상조사단’(이하 조사단)을 만들게 된다. 또 한달 뒤인 9월6일엔 김씨 부부 등을 중심으로 오키나와 총련 지부도 결성했다. 그해 10월 조사단이 발표한 A4용지 60쪽 분량의 ‘진상조사 보고서’를 보면, 조선인 위안부와 관련해 “10월10일 공습 무렵 일본군 어떤 부대의 사기 고무를 위해 위문대원으로 보내졌다. 전쟁에 내팽개쳐진 이들은 말도 통하지 않고 지리도 모르는 전쟁터를 떠돌 뿐이었다”는 기술을 싣고 있다. 김씨 부부는 “당시엔 배 할머니와 같은 생존 위안부들을 직접 만나지 못했지만, 오키나와인들의 여러 증언과 기록을 통해 조선인 위안부의 실체는 확인한 상태였다”고 말했다.



총련 일꾼이었던 김수섭씨가 할머니의 사연을 듣게 된 것도 이케다라는 이름의 <교도통신> 기자를 통해서였다. 배 할머니는 처음엔 김씨 부부를 차갑게 내몰았다. 그러나 2~3년이나 꾸준히 할머니를 찾아오는 김씨 부부의 정성에 할머니는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게 된다.

배 할머니의 ‘커밍아웃’은 자발적인 선택이었을까. 재일 조선인 2세인 김미혜 도쿄대학 특임연구원은

“김학순 할머니는 ‘위안소를 만든 것은 민간업자’라는 일본 정부의 거짓말에 분노해 직접 투쟁을 결심한 것인 데 비해, 

배봉기 할머니는 일본의 출입국 정책에 의해 강제로 ‘커밍아웃’을 강요당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 때문에 배 할머니는 원치 않은 외부의 취재 요청에 적잖은 고통을 받게 된다.

배 할머니의 사연은 한국 사회엔 본격적으로 전해지지 않는다.

김씨 부부는 그 이유에 대해 “배 할머니가 우리(총련의 활동가)와 가깝게 생활하다 보니, 남쪽에선 이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니냐. 한국 언론과 만난 것은 이번 <한겨레> 취재가 처음”이라고 말했다. 1977년 4월 총련 기관지인 <조선신보>가 배 할머니의 사연을 대대적으로 보도하자 이런 경향은 더 강화된다. 윤정옥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1990년 1월 <한겨레> 기고에서 배 할머니를 둘러싼 이런 상황에 대해 “할머니는 몸도 성치 않고 여전히 인간기피증에 걸려 있어 조총련계의 김(김현옥씨)이라는 여성의 요청에만 응해 준다고 했다”는 한 문장으로 정리하고 있다.

한국 언론이 배 할머니의 사연을 적극 보도했다 해도 그 영향력은 크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배 할머니의 거주지가 한국이 아닌 오키나와였던데다, 1980년 말까지 한국의 군사정권은 일본에 대한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들의 배상·보상 요구를 강하게 억눌렀기 때문이다. 김학순 할머니의 용기있는 증언이 나오게 된 것도 1987년 6월항쟁 이후 일제 피해자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형성된 뒤다.

배 할머니는 김씨 부부와 왕래가 잦아지며 사탕수수밭 한가운데 있던 사시키의 헛간을 나와 나하 시내로 이사를 오게 됐다. 김씨 부부와 배 할머니의 공존은 그렇게 16년 동안 이어졌다. 할머니가 기분이 좋아져 ‘오늘은 드라이브를 가자’고 하면 셋이 모여 근처의 온천에 다녀오곤 했다. 김수섭씨는 “매달 5일이 할머니의 생활보호금이 나오는 날이었다. 그럼 할머니가 사무실로 와 ‘니꾸 갓떼 기나사이”(고기 좀 사와)라고 말하면 집사람이 슈퍼에 가서 불고기와 맥주를 사왔다. 할머니가 한달에 한번씩 우리에게 한턱을 낸 셈”이라고 말했다.



고향 예산 떠나 만주 등 떠돌다
29살 되던 1943년 업자 꾐에 넘어가
아키코라는 가명으로 일본군 상대
전쟁터에서의 일이 부끄러워
고국에 돌아갈 수 없었다고 한다

헛간서 살며 두통과 신경쇠약으로
“미친 할머니” 소리까지 들었지만
총련 김수섭씨 부부와 교류하며
인생 말년을 아주 값지게 보내다
91년 10월18일 영원히 잠들어



배봉기 할머니의 사연을 일본에 전한 <고치신문> 1975년 10월22일 기사. 할머니는 얼굴을 공개하지 않고 뒤를 돌아본 채 증언하고 있다. 김미혜씨 제공

“원수를 갚아달라”

김씨 부부와의 교류를 통해 배 할머니는 사회를 바라보는 나름의 안목을 키워갔던 것 같다. 김현옥씨는 “할머니와 얘기하면서 ‘아지매가 그렇게 된 것은 아지매의 팔자가 아니다. 우리가 일제의 식민지가 되어서 그렇게 된 것이다’라고 말했다. 처음엔 그런 말을 듣기 싫어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할머니가 마음속에 의문을 품게 되고, 그러면서 나름대로 여러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오키나와엔 동포들이 별로 살지 않았기 때문에 총련 지부의 주요 사업은 미군기지 반대운동을 하는 오키나와 민중들과의 ‘연대 사업’이었다. 당시 오키나와에선 한-미 연합 군사훈련인 팀스피릿 훈련(1976년부터 1993년까지 실시. 현재는 키리졸브로 대체)에 대한 반대운동이 치열하게 이뤄지고 있었다. 이 훈련에 참여하는 미 공군이 오키나와 가데나 기지를 활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김씨는 팀스피릿 훈련에 반대하는 가데나 기지 앞 반대 집회에 자주 연대 연설을 갔다. 김현옥씨는 “할머니가 ‘바깥사람은 어디 갔냐’고 하면 ‘반대 집회에 갔다’, ‘그것은 뭐 하는 거냐’ 그러면 ‘그건 이러저러한 것이다’라고 설명을 하곤 했다”고 말했다. 특이한 차림새의 할머니가 총련 관련 집회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다 보니 한번은 다이라 료쇼 나하시장(1968~1984년 재임)이 배 할머니의 사연을 듣고 “오랜 시간 고생하셨습니다. 원래 일본 정부가 책임을 지고 보상해야 하는데 생활보호밖에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사죄를 한 적도 있었다.

1989년 1월의 일이었다. 텔레비전으로 히로히토 일왕이 숨졌다는 뉴스를 보던 배 할머니가 갑자기 “왜 사죄도 안 하고 죽었냐”고 말했다. 배 할머니가 그런 말을 할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김현옥씨는 할머니에게 ‘일왕이 구체적으로 뭘 해줬으면 좋았겠냐’고 물었다. 그러자 배 할머니는 “사죄를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배 할머니가 이 무렵엔 자신에게 닥친 불행의 원인에 대해 나름의 견해를 갖게 됐음을 짐작하게 한다. 배 할머니는 김씨 부부에게 종종 “원수를 갚아 달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김씨 부부에겐 만년의 배 할머니를 생각하면 잊을 수 없는 사연이 많다. 한국에서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 9월, 일본의 주간지인 <여성자신>(조세이지신)의 기자들이 할머니를 찾아왔다. 일본 기자들이 할머니에게 고향이 어디인지를 지도에 표시해보라고 했다. 할머니는 충남 예산 신례원리를 가리켰다. 마침 사진기자인 후지이가 근처에 산 적이 있었다. 흥분한 일본 기자들은 배 할머니에게 “우리들이 여비를 댈 테니 고향에 한번 가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했다. 배 할머니는 “글쎄, 가고 싶지, 한번 가야지” 하면서도 확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 한참을 엉엉 울고 만다. 김수섭씨는 “할머니와 오래 지내면서도 그렇게 서럽게 우는 모습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라고 말했다.

또 한번은 배 할머니를 주인공으로 <오키나와의 할머니>라는 다큐영화를 만든 야마타니 데쓰오라는 영화감독이 상영회에서 모은 성금을 할머니에게 전달한 일이 있었다. 배 할머니는 처음엔 이 돈을 김씨 부부에게 주면서 받지 않으려 했다. 잠시 실랑이가 일다 김현옥씨가 예전에 “여자는 결혼해서 가정을 꾸려 애 낳고 잘 사는 게 행복”이라고 했던 할머니 말을 떠올려 “함께 반지를 하러 가자”고 제안했다. 김씨 부부는 할머니와 함께 오키나와의 중심가인 국제로에 있는 제일 유명한 금은방에 가 금반지를 샀다. 김현옥씨가 배 할머니에게 “아지매, 이거 갖고 갈래요, 하고 갈래요?”라고 물었다. 할머니는 기쁜 얼굴로 “하고 갈래”라고 답했다.

할머니가 숨을 거둔 것은 1991년 10월18일이다. 그해 오키나와에선 예년보다 무더운 날들이 이어졌다. 배 할머니의 건강을 걱정했던 김씨 부부는 10월초 할머니에게 “함께 병원에 가자”고 했다. 그로부터 며칠 뒤, 김씨 부부는 “할머니 방문을 두드려도 답이 없다”는 나하시 사회복지 담당 직원의 연락을 받게 된다. 복덕방에서 열쇠를 빌려 방문을 열었더니 배 할머니는 침대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 것처럼 편안히 누워 숨져 있었다.

배 할머니의 49재를 겸해 추도식이 열리는 날 그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김씨 부부가 공개한 당시 추도식 사진을 보면 추도식 제단 앞에 나하시장과 오키나와현 지사가 보내온 화환도 찾을 수 있다. 할머니가 살던 나하시 마에바시 2초메 주민들은 할머니를 김씨 부부의 친척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나중에 할머니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알게 된 주민들은 적잖이 놀랐다고 한다. 지난달 24일 오후 할머니가 만년을 보낸 2초메 골목을 찾아가 봤다. 25년 전 할머니의 뒷모습을 담은 사진에 찍혀 있는 ‘쇼와 부동산’ 간판이 여전히 거리를 지키고 있었다. 서민들이 사는, 어느 도시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한적하고 쓸쓸한 거리였다. 김수섭씨는 “할머니가 위안부로 엄청 고생해서 불쌍한 사람처럼 되어 있지만, 나는 할머니를 불쌍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할머니가 인생 말년을 아주 값있게 살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1991년 12월6일, 배봉기 할머니의 49재를 겸해 오키나와 나하에서 열린 추모식 모습. 할머니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그의 죽음을 추도했다. 사진 뒤쪽으로 오키나와현 지사, 나하시장 등이 보낸 화환도 보인다. 김수섭씨 부부 제공

김학순 할머니의 조위금 1만엔

할머니의 49재가 열리던 1991년 12월6일은 우연히도 김학순 할머니가 도쿄지방재판소에 최초의 위안부 피해보상 소송을 청구한 날이었다. 김 할머니가 어디서 알았는지 배 할머니의 추모식에 1만엔의 조위금을 보내왔다. 배봉기 할머니가 김학순 할머니와 같은 ‘투사’였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할머니는 자신이 위안부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것을 그리 원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어쨌든 배 할머니는 김 할머니와 역사적인 ‘바통 터치’를 하고 저세상으로 갔다. 그리고 김학순 할머니도 숨지고, 많은 시간이 흘렀다. 할머니들은 계속 숨져 이제 48명이 남았다.

김미혜 특임연구원은 “배봉기 할머니를 통해 위안부 할머니들이 전쟁 뒤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우리가 조금은 알 수 있게 됐다. 배 할머니는 전쟁이 끝나고 위안부 여성들이 어떤 삶을 감당해야 했는지를 보여주는 창문 같은 존재가 아니었나 싶다”고 말했다.

도카시키·나하·사시키(오키나와)/길윤형 특파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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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빨간 기와집 - 일본군 위안부가 된 한국 여성 이야기 가와다 후미코 (지은이)

알라딘: 빨간 기와집 - 일본군 위안부가 된 한국 여성 이야기

가와다 후미코 (지은이) | 오근영 (옮긴이) | 꿈교출판사 | 2014-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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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가 된 한국 여성 이야기. 배봉기 할머니(1914~1991)는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힌 주인공이다. 가난한 집의 딸로 태어나 남의집살이를 전전하던 중에 '일하지 않고 돈을 벌 수 있는 데', '나무 밑에 누워 입을 벌리고 있으면 저절로 바나나가 떨어지는 데'가 있다는 '여자 소개꾼'의 말에 속아 자신도 모르는 새 위안부의 길에 들어섰다.

'대일본제국'의 신민으로서 1944년 가을 도카시키 섬으로 끌려가 '빨간 기와집'이던 위안소에서 성노예가 되었으며 패전 후 일본에서 잘려 나간 오키나와에서 아메리카 세상이라 불리던 시대를 살았는데, 1972년에 오키나와가 일본 땅으로 복귀되자 불법체류자 취급을 받고 강제퇴거 대상이 되었다.

3년의 유예기간 안에 신청하면 특별 체류 허가를 내주는 조치가 취해져 배봉기 할머니는 그것을 신청했다. 그래서 출입국관리사무소 담당관의 취조를 받았다. 그 과정에 위안부로 끌려갔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말하자면, 특별 체류 허가를 받는 대가로 '전 위안부'의 증언자로서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이다.

배봉기 할머니는 '칼로 목을 콱 찌르고 싶은 심정'을 참고 살았다. 때로 언론을 기피했다. 뼈저리게 호소하고 싶은 것이 없었다면 몇 년에 걸쳐 반복된 취재 작업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배봉기 할머니의 이야기는 70여 시간분의 테이프로 남았다. <빨간 기와집>은 과장 없이, 꾸밈도 없이 배봉기 할머니의 고지식할 정도로 솔직한 증언에 힘입어 만든 작품이다.





머리말 과장도, 꾸밈도 없는 최초의 증언 … 5

1. 방랑의 세월
만남 … 14
소녀 시절 … 23
흥남에서 오키나와로 … 49
빨간 기와집 … 71
전쟁 … 94
황군皇軍의 신발 … 124
도카시키 섬으로 … 141

2. 세 섬에 설치된 위안소
도카시키 섬 … 156
하츠코의 체험.징용병의 도망.가즈코의 그 후
자마미 섬 … 219
아카 섬 … 253

3. 신례원으로
신례원으로 … 274

해설 근대화의 미로 속으로 … 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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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6-7 : 많은 피해자가 봉기 씨보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고통을 전쟁 중에 겪었다. 그리고 현재 가난하게 혼자 살고 있다. 이들이 홀로 살아야만 하는 이유는 바로 위안소가 낳은 피해의 결과였다. 어떤 사람은 결혼 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자궁이 파괴되었고, 어떤 사람은 무수한 일본군 장병에게 유린당한 몸으로 결혼한다는 것은 상대에게 못할 짓이라며 독신을 고집했다. 결혼을 해도, 위안소에 있었던 사실을 남편이 언제 알게 될지 몰라 두려움에 떨고, 그러면서 과거를 감추고 있다는 사실을 견디다 못해 진실을 밝힌 뒤 부부 관계가 어그러지기 시작해 이혼에 이른 사람도 있었다. 봉기 씨처럼 전쟁이 끝난 뒤에도 무서운 고통의 세월을 살아온 것이다.

P.171 : 수류탄으로 자결한 사람, 수류탄이 터지지 않자 갖고 있던 톱이나 쇠스랑.칼 등을 사용한 사람, 그것조차 없어 나무토막으로 서로를 때린 사람, A고지에서 날아온 박격포를 맞고 폭사한 사람 등 그리 넓지도 않은 계곡 기슭에 약 300명의 시체가 첩첩이 쌓여 있었다.

P.302-303 : 아버지 최부기 씨는 지주로부터 소작지조차 얻지 못하고 농가에 고용되어 일했다. 어머니 이정순 씨는 친정에서 세 아이를 키우다 친정 부모가 돌아가신 뒤 가족이 모여 살 형편도 안 되는 빈곤을 견디지 못해 마을을 떠났다. 봉기 씨는 열일곱 살에 신례원에서 나온 뒤 방랑의 세월을 살았다. 남동생 용갑은 행방불명. 신례원 부근 마을에서 농사꾼으로 살면서 노쇠한 언니 봉선 씨도 지금은 안주할 곳이 없다. 50여 년 전에 뿔뿔이 흩어진 봉기 씨의 가족은 지금까지도 서로 행방을 모르는 채 긴 세월을 살아왔다.




윤미향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상임대표)
: 배봉기 할머니의 삶에서는 식민지 한국 사회, 전쟁, 딸들의 굴레가 보인다. 식민지 한국의 여성들이 일본이 저지른 전쟁 속으로 어떻게 끌려 들어갔으며 그 전쟁 속에서 인권을 유린당한 그들의 고통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가슴으로 알 수 있다. 전쟁이 끝나고 70년 가까이 세월이 흘렀지만 “우리는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하는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들의 절규가 배봉기 할머니의 삶에 절절하게 스며 꿈틀거리고 있다.
이 책을 추천한 다른 분들 :
동아일보
- 동아일보 2014년 8월 16일자 '새로나온 책'
조선일보
- 조선일보 북스 2014년 8월 15일자 '한줄읽기'
한겨레 신문
- 한겨레 신문 2014년 8월 17일자





저자 : 가와타 후미코 (川田文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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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몇 번을 지더라도 나는 녹슬지 않아>,<빨간 기와집>,<빨간 기와집> … 총 5종 (모두보기)
소개 :
저널리스트. 1966년 와세다대학 문학부를 졸업하고 출판사 근무를 거쳐 전업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일본의 전쟁책임자료센터’에서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오키나와에서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했던 배봉기 할머니에 관한 기록 《빨간 기와집―일본군 위안부가 된 한국 여성 이야기》(1987)는 장기간의 인터뷰를 통해 닫혔던 마음의 상처와 기억들을 올곧이 드러낸 작품이다. 이후 《황군위안소의 여자들》(1993), 《전쟁과 성―근대 공창제도.위안소제도를 둘러싸고》(1995), 《인도네시아의 ‘위안부’》(1997), 《수업 ‘종군위...




역자 : 오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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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살아있는 112가지 원소에 얽힌 재미있는 화학상식>,<안경을 쓴 용,중국> … 총 152종 (모두보기)
소개 : 일본 문학 전문 번역가. 소설과 에세이 등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여러 작품들을 번역해왔다. 《포르투나의 눈동자》 《랫맨》 《생명의 릴레이》 《명탐견 마사의 사건 일지》 《유레루》 등 다양한 장르의 소설을 번역하였으며, 특히 《밤은 가득하다》 《욕망》 《소문》 《유리정원》 《아내의 여자 친구》 등 고이케 마리코의 작품들 중 다수를 한국에 소개했다. 그 밖에 옮긴 책으로는 《남들처럼 결혼하지 않습니다》 《나답게 살 용기》 《내가 공부하는 이유》 등이 있다.




과장도, 꾸밈도 없는 최초의 증언
배봉기 할머니(1914~1991)는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힌 주인공이다. 가난한 집의 딸로 태어나 남의집살이를 전전하던 중에 ‘일하지 않고 돈을 벌 수 있는 데’, ‘나무 밑에 누워 입을 벌리고 있으면 저절로 바나나가 떨어지는 데’가 있다는 ‘여자 소개꾼’의 말에 속아 자신도 모르는 새 위안부의 길에 들어섰다.
‘대일본제국’의 신민으로서 1944년 가을 도카시키 섬으로 끌려가 ‘빨간 기와집’이던 위안소에서 성노예가 되었으며 패전 후 일본에서 잘려 나간 오키나와에서 아메리카 세상이라 불리던 시대를 살았는데, 1972년에 오키나와가 일본 땅으로 복귀되자 불법체류자 취급을 받고 강제퇴거 대상이 되었다. 3년의 유예기간 안에 신청하면 특별 체류 허가를 내주는 조치가 취해져 배봉기 할머니는 그것을 신청했다. 그래서 출입국관리사무소 담당관의 취조를 받았다. 그 과정에 위안부로 끌려갔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말하자면, 특별 체류 허가를 받는 대가로 ‘전 위안부’의 증언자로서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이다.
배봉기 할머니는 ‘칼로 목을 콱 찌르고 싶은 심정’을 참고 살았다. 때로 언론을 기피했다. 뼈저리게 호소하고 싶은 것이 없었다면 몇 년에 걸쳐 반복된 취재 작업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배봉기 할머니의 이야기는 70여 시간분의 테이프로 남았다.
《빨간 기와집》은 과장 없이, 꾸밈도 없이 배봉기 할머니의 고지식할 정도로 솔직한 증언에 힘입어 만든 작품이다.

기억해야 하는 삶, 끝나지 않은 이야기

눈 밝은 독자라면 《빨간 기와집》에서 이상한 점이 보일 것이다. 언론을 통해 최초의 위안부 증언자로 ‘배’봉기 할머니가 알려졌는데, 저자가 할머니의 고향을 찾아가서 확인한 호적에는 할머니 부친의 이름이 ‘최’부기로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질렀다고 오해할 수 있지만, 이 의도적인 오기에는 그간 말하지 못한 사정이 있다. 일본이라는 국가가 저지른 범죄 행위를 세상에 드러낸 배봉기 할머니는 바로 일본 땅에 살고 있었다. 한국에서도 위안부 할머니들이 당당히 고개를 들고 산 지 얼마 안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배봉기 할머니가 느꼈을 불안과 두려움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지금은 모두 고인이 되어 사실대로 밝히지만, 《빨간 기와집》을 처음 출간할 무렵 저자는 배봉기 할머니와 그 가족에 대한 보호 장치로 ‘성姓’을 감출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책이 처음 나온 1987년 이래 세상이 얼마나 달라졌을까? 위안부 할머니들이 일본대사관 앞에서 여는 수요집회는 1992년에 시작되어 1100회를 훌쩍 넘긴 지금까지 끝을 보지 못하고 있다. 피해 당사자인 할머니들이 살아 있는데도 일본은 사죄와 배상은커녕 역사를 부정하는 억지를 쓰고 있다. 전쟁이 끝나고 70년 가까이 흘렀지만 할머니들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우리가 배봉기 할머니의 삶을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힘없는 이들에게 강요된 전쟁: 오키나와 집단 자살 사건과 군 위안부

배봉기 할머니가 끌려간 오키나와는 2차세계대전 당시 일본에서 유일하게 지상전을 겪은 곳이다. 미군이 상륙한 1945년 3월부터 약 3개월 동안 벌어진 전쟁에서 희생된 사람이 약 20만 명이고, 그중 오키나와 주민이 15만 명이다. 당시 오키나와 인구의 3분의 1이 희생된 것이다. 이 어마어마한 희생 중에는 ‘집단 자살’이라는 믿지 못할 사건도 있다.
명예나 충절을 위한 죽음을 뜻하는 ‘옥쇄玉碎’를 완수하라는 군 사령부의 명령, 미군에게 잡히면 능욕과 잔혹하게 죽임을 당할 거라는 불안이 수많은 사람을 자살로 이끈 것이다. 섬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위안부가 필요하다는 말에 군 위안소의 설치를 받아들이고 집과 땅과 농작물과 노동력을 내준 오키나와 사람들 중 수백 명이 목숨까지 바친 사정을 보면, 배고픔이라도 면하고 싶다는 바람밖에 없이 순종하며 살다 전쟁의 참혹함을 온몸으로 겪어야 했던 위안부의 처지와 다르지 않다.
배봉기 할머니를 비롯해 군 위안소과 관련된 사람들의 목소리가 차곡차곡 담긴 《빨간 기와집》은 단순히 ‘일본으로 끌려간 한국인 위안부’의 이야기만 들려주는 것이 아니다. 전쟁의 상처가 국경을 넘어, 힘없는 사람들에게 더 참혹하게 남는다고 말하고 있다. 군 위안부 문제에 우리가, 전 인류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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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 2편




오끼나와에서(2)- 배봉기 할머니를 생각하며 rosa ㅣ 2015-12-13 ㅣ 공감(7) ㅣ 댓글 (2)







나하시 토마리항에서 페리를 타고 도카시키섬으로 떠났다. 도카시키섬에 살았던 분들을 떠올리며, 그곳에 있는 특별한 위령비를 찾아가보기 위해서였다.

1943년, 29살의 배봉기는 "과일이 지천이어서 나무 밑에 누워 입을 벌리면 절로 바나나가 떨어지는 곳"에서 먹고 살 수 있다는 말에, '돈 많이 벌면 뭐할거냐'는 말에 괜히 설레어하며 모집인을 따라나섰다. 그가 도착한 곳은 도카시키섬.

선착장에서 천천히 걸어도 3~4분이면 도착하는 빨간 기와집. 그곳에서 그녀보다 어린 다섯 명의 한국인 여성들과 일본군 '위안부'의 삶을 강요당했다.

도카시키섬 관광 안내도에는 물론 이 집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지 않다. 우연히 본 한겨레 기사를 근거로 구글지도를 클릭해가며 대략의 위치를 찾아갔다. <빨간기와집(가와다 후미코, 꿈교출판사)>을 보면, 미군 공습 때 원래 집은 파괴되었고 전쟁 후 콘크리트로 튼튼하게 다시 집을 지었다고 한다. 혹시라도 그곳에 사는 분께 폐가 될까봐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과거' 때문인지 한때는 누군가에게 임대해줬었다는 집이 잡초만 무성한채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줬다.




한국어로 된 관광안내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은 위령비를 찾아 걷기 시작했다.

처음 여기를 가려고 하자, 내 일본인 동료는 더운 날씨에 걸어가기엔 너무 오르막이라며 걱정했다. 그곳으로 가는 버스가 없기 때문이다. 도카시키섬의 버스는 선착장과 아하렌비치 사이를 운행하는데 이마저도 배 운행시각에 맞춰서 타야 한다.




도카시키섬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딱 두 가지였다. 빨간 기와집과 아리랑 위령비. 그리고 시간은 넉넉했다.

아하렌비치로 가는 차도 왼편으로 구불구불한 도로가 펼쳐진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길 위에는 내 거친 숨소리와 까마귀 소리만 들렸다. 맞은편에서 누군가가 나타났다면 오히려 무서웠을 것이다. 관광포인트와 멀어서인지 차량도 거의 다니지 않는 도로 위를 30분 넘게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걷고 또 걸었다. 조금만 더 힘내서 가자고 생각했을 때, 오른 편에 나타난 아리랑 위령비.

위령비에 도착하자마자 갑자기 후두둑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리랑 위령비는 1997년 마을 주민들의 성금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꽃다운 나이에 끌려온 한국인 위안부들을 추모하는 뜻에서였다고. 안타깝게도 돌보는 이가 없는 탓인지 잡초가 무성하고 비문은 군데군데 읽을 수 없을 만큼 훼손되어 있다. 비도 오고 바람이 불고 마음은 쓸쓸하고 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이 위령비가 만들어질 때 도카시키섬 어린이들도 직접 그림을 그려 동참했었다고 한다. 그때의 마음과 뜻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했다.






금방 내려가버리면 할머니들이 서운해하실까봐 가만히 앉아서 한참을 책을 읽다 내려왔다.





배봉기 할머니는 최초로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밝힌 분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할머니가 위안부였음을 스스로 밝힐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추방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1972년 오끼나와가 일본정부에 반환될 때, 할머니의 체류자격이 문제가 되었고, 할머니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정체를 밝혀야 했다.

아리랑 위령비에서 내려오다 전망대에 올랐다. 선착장과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마을 한복판에 빨간기와집이 있었다. 가난하고 힘없는 식민지 조선의 여인들이 이 먼 외딴 섬까지 끌려와 일본군의 성노예로 살았다. 세월이 아무리 흐른대도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700명 정도 밖에 살지 않는 도카시키섬에 1000명의 일본군이 들어왔을 때, 마을 주민들은 감격했다고 한다. "우리 같은 작은 섬 사람들을 지켜주기 위해 군대를 보내줬다"고. 물론 이런 감격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초등학생 아이들까지 강제노역에 동원당하고 식량을 빼앗기고 마지막 순간에는 '옥쇄'를 위해 자결할 것을 명령받는다. 도카시키섬 주민 가운데 300명 이상이 일본군의 집단자결 명령/강요로 사망했다고 한다.

오끼나와 사람들은 지금도 오끼나와 전투때 일본군이 주민의 집단 자결을 강제했다는 내용을 교과서에 기술하라고 일본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여행 혹은 방랑 - 오끼나와로 떠나기 전전날 rosa ㅣ 2015-11-17 ㅣ 공감(4) ㅣ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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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 다 가는 휴가를 일이 밀려 못 가고 뒤늦게 휴가를 가겠다고 덤비고 있다.

망설이다 조금 더 가격이 올라버린 항공권을 손에 쥐고, 여행일정을 짜고, 게스트하우스를 예약하고, 책도 두 권을 사고, 일정을 다시 조정하고, 그리고 또 야근에 야근...

휴가라고 떠나야 근 7주만에 겨우 한숨 돌릴 수 있을 듯......

휴양지에서 띵가띵가 보내는 건 내 체질에 안맞나 보다.

렌트카는 필수라는 오끼나와를 버스와 배, 도보로 움직여보기로 한다.

오랫동안 가보고 싶었던 곳, 오끼나와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어느새 하루하루 일정을 잡아가며(꼭 해야하는, 가장 중요한 일을 매일 하나씩 정해놨다. 사실 제일 중요한 밑그림은 완성된 셈.) 오끼나와로 떠날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그 전에 베트남에 발송할 공문도 준비하고, 예약도 진행하고... 숨가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