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사람들 2017년 7월 31일 기획, 기획/특집 Leave a comment 155 Views
경기도 광주시 퇴촌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둘러보기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에 재현된 ‘위안소’ 입구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 입구
“원래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은 할머니들의 아픔이 담겨있는 위안소에 설치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한반도 전역 40여 곳에 위안소가 있었지만, 분단 이후 북한쪽 상황은 알 수 없고 남한에 있는 위안소는 경제개발에 밀렸다. 그래서 현재 할머니들이 가장 많이 사는 ‘나눔에 집’에 설치했다.” ‘나눔의 집’ 안신권 소장의 설명이다.
‘나눔의 집’ 앞에 조성된 추모공원에는 소녀상을 중심으로 할머니들의 흉상이 있다. 역사관 입구와 출구에도 각각 3개와 2개의 동상이 있다. 할머니들의 웃음기 없는 차가운 동상에 빗물이 맺힌다. 마치 할머니들의 눈물처럼. 반면, 건물 외벽에 걸려 있는 사진 속의 할머니들은 활짝 웃고 있다.
1관에는 “일본군 위안부는 일본의 침략전쟁에 의한 강간으로 성병이 유행하자 군인과 군 위안부를 군의 감독과 통제 속에 둠으로써 군사적인 효과를 꾀하기 위해 실행됐다”는 설명과 함께 일본 방위성 방위연구소도서관의 위안부 모집에 관한 공문서와 논문의 일부 등 설명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전시돼 있다. 취업알선을 미끼로 사기를 당하거나, 납치나 유괴, 인신매매 등 강제로 위안부가 된 그 당시 소녀들의 사진도 함께 있다.
2관에는 위안부에 대해 최초로 증언한 고 배봉기 할머니에 대한 사진과 설명이 있다. 배 할머니는 김학순 할머니의 첫 증언이 나오기 무려 16년 전인 1975년 ‘교도통신’ 등 일본 언론을 통해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임을 밝혔다. 1914년에 태어난 배봉기 할머니는 머슴의 둘째 딸로 태어나 1944년에 취업사기로 위안소에 끌려가게 됐다.
또한, 위안소로 사용된 중국과 말레이시아 등 세계 각국의 위안소에 대한 설명이 있다. “몸도 마음도 바치는 일본 아가씨의 서비스”라거나 “성전 대승의 용사 대환영”이라는 선전문구가 당시 위안소 문패에 걸려있었다고 한다. 일본군이 사용한 콘돔도 있다. 일본어로 ‘사쿠(サック)’라고 불리는 콘돔 포장지에는 ‘돌격일번(突擊一番)’이라고 적혀있다. 위안소 사용요금표나 주둔지에서 화폐 대신 사용한 군용수표도 전시돼 있다.
3관에는 일본군 위안소를 재현한 방이 있다.
나무로 된 벽에 2평 정도의 방은 침대만 덩그러니 있다. 일본군에 끌려가는 소녀의 모습을 그린 김순덕 할머니의 ‘끌려가는 날’이 인상 깊다.
4관에는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각지의 피해 여성들의 이야기가 전시돼 있다. 1992년 9월에 필리핀 여성으로 처음 위안부 피해를 공개증언한 마리아 로사 루나 헨손(Maria Rosa Luna Henson) 씨는 1942년 생리도 시작하기 전인 만 14세로 일본군에게 윤간을 당하고 2주 후 다시 강간을 당했다. 그 후 그녀는 항일 게릴라 활동에 참여했다가 1943년에 일본군에게 잡혀 다시 9개월 동안 감금과 윤간을 당했다.
뒤편의 할머니들을 위한 추모공간에는 세계 각지에서 보낸 종이학들과 할머니를 위한 응원편지, 그림, 꽃들이 놓여있다. 추모 공간 옆에는 전 일본육군 제33사단 참모가 기록한 책이 있다. 부대 후미에 여자 위문단, 즉 위안부가 따라오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5관에서는 고 김학순 할머니의 생애와 수요시위 사진 및 영상과 오사카·타이완·고베·독일·필리핀 등 각국에서 진행된 수요시위 사진을 볼 수 있다.
김인규 인턴기자, 사진=김예진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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