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식, “일본 우경화에 리버럴 세력도 책임 있다” – 시사IN
서경식, “일본 우경화에 리버럴 세력도 책임 있다”
최근 펴낸 <다시, 일본을 생각한다>에서 서경식 교수(사진)는 와다 하루키 등 일본의 리버럴 지식인들이 어떻게 변질되어 일본 우익 세력의 준동을 방치했는지 분석했다.
이상원 기자 prodeo@sisain.co.kr
2017년 09월 28일 목요일 제523호
10월 총선 때까지 북풍아 불어다오
ⓒ시사IN 신선영
일본에서 태어나 자랐다. ‘일본 사회의 동향으로부터 직접 영향’도 받았다. 하지만 참정권조차 없는, ‘주변화된 사람’. 지난 8월24일 펴낸 <다시, 일본을 생각한다>에서 서경식 도쿄게이자이 대학 교수는 스스로를 이렇게 일컫는다. 재일조선인인 그가 10여 년 전 주창한 ‘디아스포라(Diaspora:조국을 떠나 흩어진 사람들)’와 뜻이 통하는 소개다.
서 교수의 전작과는 사뭇 다른 책이다. 그는 그동안 재일조선인과 일본의 우경화 문제를 꾸준히 제기하면서도 문학·음악·미술 등을 아교로 써왔다. <다시, 일본을 생각하다>는 논박 자체에 더 집중한다. ‘논객’ 서경식의 칼은 아베 정권이나 ‘재특회(재일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 모임)’ 등 일본 내 극우 세력은 물론이고 진보적 지식인으로 알려진 와다 하루키 도쿄 대학 명예교수도 정면으로 겨누었다. 한 걸음 나아가 그는 일본의 끝 모를 우경화에 와다 교수를 비롯한 일본 내 ‘리버럴’ 세력의 책임이 크다고 진단한다.
9월9일 서경식 교수를 만났다. 한국어가 완벽하지 않은 서 교수는 단어를 신중히 골랐다. 일본 내에서는 배척받고 대한해협 건너에는 낯선, 경계인의 통찰을 들을 수 있었다.
촛불집회부터 대통령 탄핵까지 일련의 과정에 대한 일본 사회 반응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시각이 많다. 대다수는 한국 민주주의가 미성숙하고 후진적이기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본다. 우파뿐만 아니라 소위 ‘리버럴’한 매체나 인사들도 그렇다. 일본 사회가 민주주의를 잘못 이해하고 있어서다. 민중이 경우에 따라 실력을 행사하고 정권을 바꿀 수도 있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기본 전제다. 한국은 그런 역사를 걸어왔다. 10년, 20년마다 대중의 손으로 정권을 교체한 경험이 있다. 일본은 메이지 시대부터 100년 이상 이런 정치적 전복을 겪지 않았다. 패전 이후에도 천황(일왕)제는 존속됐고, 60년간 자민당이 중심이 된 정치판에서 국회의원들은 세습을 한다. 수만명이 거리에 나와 정권이 바뀌고 대통령과 재벌 총수가 구치소에 들어가는 일이 일본에서는 일어나기 어렵다. 이런 ‘가짜 민주주의’를 자랑으로 여기는 곳이 일본이다.
ⓒAP Photo8월15일 도쿄 부도칸에서 열린 전몰자 추도식에 참석한 일왕 부부와(뒷줄)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일본의 민주주의는 왜 한국과 다른가?
일본 민주주의의 역사를 살펴야 한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천황제를 중심으로 한 국가주의 체제였다. 1945년 패전 뒤 들어온 민주주의는 스스로 얻어낸 게 아니라 연합국에게 강요받은 이념이었다. 희생을 치르고 획득한 게 아니었다. 군국주의를 실행한 경찰과 정치인들은 제대로 청산되지 않았다. 당연히 식민지 지배에 대해서도 깊이 성찰하지 않아 내부 모순이 그득한 사회였다. 1960년대 중반 일본이 전후 민주주의 시기일 때 한국과 타이완 등 주변국은 군사독재를 겪고 있었다. “일본은 벌써 민주주의 국가다”라는 자긍심이 퍼졌다. 일본이 지금 보이는 민주주의에 대한 그릇된 우월감이 여기서 태동했다.
우경화 역시 1960년대부터 시작됐나?
내가 겪은 1960년대 일본도 온전치는 않았으나 민주주의를 지향하기는 했다. 학교를 예로 들어보자. 학창 시절 선생님은 “천황제는 당연히 없어질 것이다. 인간 사회는 신분제가 아니다. 군주제는 미래가 없다”라고 말했다.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학교에서 일장기 게양과 기미가요 제창이 법제화되지 않았다. 이것들이 제국주의의 상징이라는 교사들이 꽤 있었다. 교원노조만의 목소리가 아니라 의회에도 3분의 1 정도 반대 세력이 있었다. 변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90년대라고 봐야 한다.
1990년대 이전에는 우익의 목소리가 없었나?
이전에도 일본 민중 속에 극우파가 없지는 않았다. 그들의 주장은 수면 위로 떠오를 수 없었다. 우익이라는 단어를 일본인들은 ‘너무나 수상한 소수자’ ‘남의 앞에서 입에 올릴 수 없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 정도로 여겼다. 극우파들은 본인 생각을 <아사히신문>이나 <요미우리신문>에 실명을 걸고 쓸 수 없던 시절이었다. 우익은 분명 있었으나 견제하는 힘이 제 기능을 발휘하던 사회였다. 지금은 ‘조선인을 죽여라’ ‘조선인 여성을 강간하라’는 공공연한 주장을 시민들이 용인한다. 1990년대 이후 반동기에 접어들면서 이전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계기가 된 사건이 있나?
1995년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가 발표한 ‘전후 50년의 종전기념일을 맞아’라고 본다(무라야마 담화). 1990년대 초반, 반동기에 들어가기 전 일본 사회는 희망이 있었다.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위안부’ 증언 이후 과거사를 성찰하자는 목소리가 나왔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도 압력을 가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1993년 고노 담화가 발표됐고, 1995년에는 무라야마 담화도 나왔다. 일본 우익의 대반격은 이때 시작됐다. 아시아의 총공세가 일본인을 모독한다는 식의 선전이 전국적으로 이뤄졌다. “전쟁이 잘못됐다면, 전장에서 죽은 우리 선조들은 개죽음(犬死に)을 당했다는 말인가?”라는 레토릭이 유행했다. 공세는 먹혀들었다. 1997년부터 ‘위안부’를 기술한 교과서가 나오기 시작했는데, 우익 세력이 꾸준히 압력을 가한 결과 지금은 한 종류밖에 남지 않았다.
사죄 담화에 대한 반작용이라는 말인가?
맞다. 단순히 ‘우익의 힘이 너무 세져서’라는 해석은 불충분하다. 우익을 견제하던 ‘리버럴’이 퇴락했다. 1990년대가 그 기점이 된 까닭은 동서 대립 구도와 냉전의 종언이다. 어떤 나라에서든 한 사회의 내부에 있는 진보파는 동서 대립 구도에 터 잡았다. 정신적으로는 사회주의라는 이상을 대안으로 삼았고, 물질적으로는 중국·소련 등지에서 지원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냉전 구도가 무너지자 일본 리버럴의 사상적 기반도 뒤따라 사라졌다. 휴머니즘이 바로 서 있는 나라였다면 소련이 붕괴되더라도 ‘노동 해방’ 이외의 가치를 견지해나갈 수 있다. 앞서 말한 대로 일본은 민주주의를 연합국에게서 받은 데다 천황제 등 구체제가 그대로 남았다. 진보라는 게 무엇인지, 어떤 힘으로 관철해나가야 하는지를 깊이 성찰하지 못한 채 반동기에 들어갔다. 뿌리가 나약한 리버럴파는 우익의 총공세 앞에 버티기가 어려웠다. 가장 중요한 가치를 타협했고,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끝났다”라는 상투어만 남았다.
연금저축가입하고상품권받세(~10/31)
ⓒEPA8월15일 일본 우익 단체들이 도쿄 야스쿠니 신사 앞에서 시위를 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리버럴’은 누구를 뜻하나? 왜 ‘진보’가 아니라 ‘리버럴’인가?
‘리버럴(Liberal)’은 사회적 맥락에 따라 다르게 쓰이는 말이다. 우선 책에서는 ‘사회당·총평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계 그룹, 신문을 예로 든다면 <아사히신문> <마이니치신문> <도쿄신문>과 그 독자층’ 정도 의미로 썼다. 예전에는 리버럴에 ‘진보적’이라는 어감이 강했다. 진짜 리버럴이라면 프랑스 혁명 이후의 보편적 가치관을 지향해야 마땅하다. ‘일본 리버럴파 지식인’ 진영도 일본 헌법의 민주주의 가치들과 헌법 9조로 상징되는 평화주의를 옹호하는 견해이긴 하다. 그런데 이들은 천황제나 미·일 안보조약에 대해서는 용인론·옹호론을 펴고, 식민지배 책임 문제에 대한 인식은 결여되어 있거나 부족하다. 천황제와 법 앞의 평등은 양립할 수 있는가? 평화주의와 미국의 ‘핵우산’은 어떤가? 이런 질문들 앞에 리버럴 진영의 태도는 전반적으로 애매하다. 이 ‘애매함’은 과도기적 현상이 아니라 일본 리버럴의 특성이다.
진보적 지식인으로 알려진 와다 하루키 도쿄 대학 명예교수를 공개 비판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1980년대 한국이 군사독재를 겪고 있을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 구명 운동에 발 벗고 나선 분이다. 내 개인적으로는 형들(서승·서준식)이 감옥에 있을 때 연대 운동도 해주었다. 실제로 그 글이 공개되고 나서 일본 리버럴 주류에서는 “서경식 일가는 와다 하루키의 은혜를 많이 입었는데 예의가 없다”라는 비판을 받았다. 논점을 흐리는 비난이라고 여겨 반론하지 않았다. 내 비판은 한·일 간 과거사를 어떻게 풀어갈지에 대한 와다 교수의 견해에 맞춰져 있다. 그게 본질이다. 그는 1995년 발족한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국민기금(아시아여성기금)’에서 전무이사를 지냈다. 국가 차원의 진상 규명이나 진실한 사죄 없이, 오해의 여지가 있는 보상금만으로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였다. 와다 교수는 2015년 12월28일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해서도 “백지 철회가 아니라 개조·개선”을 주장한다. 와다 교수의 이러한 견해는 일본 극우파에게 정치적 이용 가치가 높다.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 일본어판 후기에 와다 교수의 이름이 실렸다고 썼다.
<제국의 위안부>는 학문적으로나 문학적으로나 문제가 많은 책이지만, 여기서 반복해 말하지는 않겠다. 어떻게 와다 하루키와 우에노 지즈코, 다카사키 소지 등 리버럴파 지식인들의 이름이 이 책에 들어갔는지, 일본 내에서 상까지 받고 대중적 인기를 얻게 되었는지가 중요하다. 나는 박유하 교수의 저작이 일본 리버럴파의 숨겨진 욕구와 합치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들은 비합리적인 우익 국가주의와 선을 그으면서도, 동시에 식민 지배로 획득한 일본 국민의 특권도 지키고 싶어 한다. [?] 이성적 민주주의자와 옛 종주국 국민의 지위를 모두 놓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한국인이면서 여성인 박유하 교수의 언설은 이런 일본 리버럴 지식인들에게 매력적이다. 그녀는 시종 한국의 과잉 내셔널리즘을 문제 삼는다. 한·일 관계가 악화된 데에는 그 사람들의 책임이 크다는 논지다. 일본에서는 ‘<제국의 위안부>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한국 내 구식 내셔널리스트’라는 구도가 짜였다.
박유하 교수는 한국 검찰에 기소되어 항소심이 진행되고 있다. <아사히신문>은 “표현의 자유 침해”라고 비판했다. 국내에서도 비슷한 지적이 나왔다.
기소 소식을 듣고 처음 든 생각은 ‘국가가 나서서 검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였다. 과거 군사독재 시절의 기억 때문이다. 표현의 자유는 최대한 지켜져야 한다. 가능하면 법이 아니라 인민이 판단하는 게 옳다고 본다. 그런데 반드시 생각해봐야 할 지점이 있다.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가 자신의 명예와 권리를 침해받았을 때 누가 그것을 지켜줄 것인지의 문제다. 많은 국가가 명예훼손죄나 헤이트스피치(혐오 발언) 금지를 규율로 삼는 이유는, 반격 수단이 없는 약자가 스스로를 방어하게 해주기 위해서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자신의 명예가 훼손당했다고 판단해 박유하 교수를 고소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지니는 권리다. 피해자가 자기 존엄을 지키기 위해 최후의 저항 수단을 택한 일을 마냥 잘못이라고 할 수 없다. ‘개인이 지닌 표현의 자유를 국가가 침해했다’는 주장은 귀에 잘 들어오고 끌리기 쉽다. 이 말은 재특회를 비롯한 극우 세력이 전가의 보도로 삼는 주장이기도 하다. 박 교수가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려면 자신의 책이 무엇을 표현했는지, 어떻게 헤이트스피치와 다른지 설득해야 한다.
스스로 재일조선인이기에 일본 리버럴의 변질이 더 잘 보인다고 생각하나?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 없다. 재일조선인이지만 잘 안 보이는 사람도 많다. 한 사회의 주류로 살면서 그 사회밖에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잘 안 보이는 지점이 분명 있다. 일본 주류나 한국 주류, 다수자가 잘 볼 수 없는 것들이 내게는 보인다. 가난하거나 직업이 없었다면, 고립되어 아무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면 이야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강하거나 훌륭해서가 아니라 우연히 이런 위치에 서게 되어 말할 수 있었다. 누구나 그렇지는 않다. 소수자는 힘이 없고 늘 불안하다. 마음에 얼룩이 져 있지만 잘 이야기하지 않으려 한다. 다수자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모델 마이너리티(model minority:모범적인 소수민족), 사랑받을 수 있는 소수자를 연기한다. 일본에서도 널리 알려진 재일조선인 지식인이나 배우나… 꽤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 재일조선인이나 오키나와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스스로 긍정하는 이야기를 듣고 “용기를 얻었다” “치유 받았다”라고 말하는 일본인 다수자들을 종종 본다. 맞았는데 괜찮다고 웃는 사람들을 보고 ‘아 좋았다!’ 하는 격이다. 때리지를 말아야지.
세대가 교체되면 재일조선인 문제가 나아지지 않을까?
내가 젊었을 때도 나왔던 주장이다. 그때도 한국 역사도 모르고 문화도 모른 채 일본에 사는 재일조선인들이 많았다. 2세, 3세를 넘기면 재일조선인이라는 말 자체가 없어질 것이라고 했다. 일본인뿐만 아니라 재일조선인들 스스로도 그랬다. 풍화될 것이라고 봤다. 그래서 일본인이 되어야 한다는 사람도, 민족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양쪽 다 민족 개념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고 생각한다. 북아일랜드나 스코틀랜드를 보라. 영국에 얼마나 오래 지배받았나. 그렇다고 아일랜드인, 스코틀랜드인이라는 인식이 완전히 없어졌나? 민족의식은 그런 게 아니다. 민족의식이라는 실체가 있고, 그게 외부로 발현되는 게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에서 끊임없이 생긴다. 재일조선인 다수는 자기 한국 이름도 모르고 한국어로 말도 못한다. 그런데도 재일조선인은 없어지지 않는다. 지금 느끼는 억압이나 차별, 불안감이 없어지면 민족의식도 없어질지 모른다. 하지만 일본인들이 계속 식민 지배를 추종하고 미화하고 피해자인 우리를 차별하는 한, 재일조선인도 없어지지 않는다.
10월 총선 때까지 북풍아 불어다오
ⓒ시사IN 신선영
일본에서 태어나 자랐다. ‘일본 사회의 동향으로부터 직접 영향’도 받았다. 하지만 참정권조차 없는, ‘주변화된 사람’. 지난 8월24일 펴낸 <다시, 일본을 생각한다>에서 서경식 도쿄게이자이 대학 교수는 스스로를 이렇게 일컫는다. 재일조선인인 그가 10여 년 전 주창한 ‘디아스포라(Diaspora:조국을 떠나 흩어진 사람들)’와 뜻이 통하는 소개다.
서 교수의 전작과는 사뭇 다른 책이다. 그는 그동안 재일조선인과 일본의 우경화 문제를 꾸준히 제기하면서도 문학·음악·미술 등을 아교로 써왔다. <다시, 일본을 생각하다>는 논박 자체에 더 집중한다. ‘논객’ 서경식의 칼은 아베 정권이나 ‘재특회(재일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 모임)’ 등 일본 내 극우 세력은 물론이고 진보적 지식인으로 알려진 와다 하루키 도쿄 대학 명예교수도 정면으로 겨누었다. 한 걸음 나아가 그는 일본의 끝 모를 우경화에 와다 교수를 비롯한 일본 내 ‘리버럴’ 세력의 책임이 크다고 진단한다.
9월9일 서경식 교수를 만났다. 한국어가 완벽하지 않은 서 교수는 단어를 신중히 골랐다. 일본 내에서는 배척받고 대한해협 건너에는 낯선, 경계인의 통찰을 들을 수 있었다.
촛불집회부터 대통령 탄핵까지 일련의 과정에 대한 일본 사회 반응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시각이 많다. 대다수는 한국 민주주의가 미성숙하고 후진적이기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본다. 우파뿐만 아니라 소위 ‘리버럴’한 매체나 인사들도 그렇다. 일본 사회가 민주주의를 잘못 이해하고 있어서다. 민중이 경우에 따라 실력을 행사하고 정권을 바꿀 수도 있다는 것은 민주주의의 기본 전제다. 한국은 그런 역사를 걸어왔다. 10년, 20년마다 대중의 손으로 정권을 교체한 경험이 있다. 일본은 메이지 시대부터 100년 이상 이런 정치적 전복을 겪지 않았다. 패전 이후에도 천황(일왕)제는 존속됐고, 60년간 자민당이 중심이 된 정치판에서 국회의원들은 세습을 한다. 수만명이 거리에 나와 정권이 바뀌고 대통령과 재벌 총수가 구치소에 들어가는 일이 일본에서는 일어나기 어렵다. 이런 ‘가짜 민주주의’를 자랑으로 여기는 곳이 일본이다.
ⓒAP Photo8월15일 도쿄 부도칸에서 열린 전몰자 추도식에 참석한 일왕 부부와(뒷줄)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일본의 민주주의는 왜 한국과 다른가?
일본 민주주의의 역사를 살펴야 한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천황제를 중심으로 한 국가주의 체제였다. 1945년 패전 뒤 들어온 민주주의는 스스로 얻어낸 게 아니라 연합국에게 강요받은 이념이었다. 희생을 치르고 획득한 게 아니었다. 군국주의를 실행한 경찰과 정치인들은 제대로 청산되지 않았다. 당연히 식민지 지배에 대해서도 깊이 성찰하지 않아 내부 모순이 그득한 사회였다. 1960년대 중반 일본이 전후 민주주의 시기일 때 한국과 타이완 등 주변국은 군사독재를 겪고 있었다. “일본은 벌써 민주주의 국가다”라는 자긍심이 퍼졌다. 일본이 지금 보이는 민주주의에 대한 그릇된 우월감이 여기서 태동했다.
우경화 역시 1960년대부터 시작됐나?
내가 겪은 1960년대 일본도 온전치는 않았으나 민주주의를 지향하기는 했다. 학교를 예로 들어보자. 학창 시절 선생님은 “천황제는 당연히 없어질 것이다. 인간 사회는 신분제가 아니다. 군주제는 미래가 없다”라고 말했다.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학교에서 일장기 게양과 기미가요 제창이 법제화되지 않았다. 이것들이 제국주의의 상징이라는 교사들이 꽤 있었다. 교원노조만의 목소리가 아니라 의회에도 3분의 1 정도 반대 세력이 있었다. 변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90년대라고 봐야 한다.
1990년대 이전에는 우익의 목소리가 없었나?
이전에도 일본 민중 속에 극우파가 없지는 않았다. 그들의 주장은 수면 위로 떠오를 수 없었다. 우익이라는 단어를 일본인들은 ‘너무나 수상한 소수자’ ‘남의 앞에서 입에 올릴 수 없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 정도로 여겼다. 극우파들은 본인 생각을 <아사히신문>이나 <요미우리신문>에 실명을 걸고 쓸 수 없던 시절이었다. 우익은 분명 있었으나 견제하는 힘이 제 기능을 발휘하던 사회였다. 지금은 ‘조선인을 죽여라’ ‘조선인 여성을 강간하라’는 공공연한 주장을 시민들이 용인한다. 1990년대 이후 반동기에 접어들면서 이전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계기가 된 사건이 있나?
1995년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가 발표한 ‘전후 50년의 종전기념일을 맞아’라고 본다(무라야마 담화). 1990년대 초반, 반동기에 들어가기 전 일본 사회는 희망이 있었다.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위안부’ 증언 이후 과거사를 성찰하자는 목소리가 나왔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도 압력을 가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1993년 고노 담화가 발표됐고, 1995년에는 무라야마 담화도 나왔다. 일본 우익의 대반격은 이때 시작됐다. 아시아의 총공세가 일본인을 모독한다는 식의 선전이 전국적으로 이뤄졌다. “전쟁이 잘못됐다면, 전장에서 죽은 우리 선조들은 개죽음(犬死に)을 당했다는 말인가?”라는 레토릭이 유행했다. 공세는 먹혀들었다. 1997년부터 ‘위안부’를 기술한 교과서가 나오기 시작했는데, 우익 세력이 꾸준히 압력을 가한 결과 지금은 한 종류밖에 남지 않았다.
사죄 담화에 대한 반작용이라는 말인가?
맞다. 단순히 ‘우익의 힘이 너무 세져서’라는 해석은 불충분하다. 우익을 견제하던 ‘리버럴’이 퇴락했다. 1990년대가 그 기점이 된 까닭은 동서 대립 구도와 냉전의 종언이다. 어떤 나라에서든 한 사회의 내부에 있는 진보파는 동서 대립 구도에 터 잡았다. 정신적으로는 사회주의라는 이상을 대안으로 삼았고, 물질적으로는 중국·소련 등지에서 지원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냉전 구도가 무너지자 일본 리버럴의 사상적 기반도 뒤따라 사라졌다. 휴머니즘이 바로 서 있는 나라였다면 소련이 붕괴되더라도 ‘노동 해방’ 이외의 가치를 견지해나갈 수 있다. 앞서 말한 대로 일본은 민주주의를 연합국에게서 받은 데다 천황제 등 구체제가 그대로 남았다. 진보라는 게 무엇인지, 어떤 힘으로 관철해나가야 하는지를 깊이 성찰하지 못한 채 반동기에 들어갔다. 뿌리가 나약한 리버럴파는 우익의 총공세 앞에 버티기가 어려웠다. 가장 중요한 가치를 타협했고, “이데올로기의 시대가 끝났다”라는 상투어만 남았다.
연금저축가입하고상품권받세(~10/31)
ⓒEPA8월15일 일본 우익 단체들이 도쿄 야스쿠니 신사 앞에서 시위를 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리버럴’은 누구를 뜻하나? 왜 ‘진보’가 아니라 ‘리버럴’인가?
‘리버럴(Liberal)’은 사회적 맥락에 따라 다르게 쓰이는 말이다. 우선 책에서는 ‘사회당·총평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계 그룹, 신문을 예로 든다면 <아사히신문> <마이니치신문> <도쿄신문>과 그 독자층’ 정도 의미로 썼다. 예전에는 리버럴에 ‘진보적’이라는 어감이 강했다. 진짜 리버럴이라면 프랑스 혁명 이후의 보편적 가치관을 지향해야 마땅하다. ‘일본 리버럴파 지식인’ 진영도 일본 헌법의 민주주의 가치들과 헌법 9조로 상징되는 평화주의를 옹호하는 견해이긴 하다. 그런데 이들은 천황제나 미·일 안보조약에 대해서는 용인론·옹호론을 펴고, 식민지배 책임 문제에 대한 인식은 결여되어 있거나 부족하다. 천황제와 법 앞의 평등은 양립할 수 있는가? 평화주의와 미국의 ‘핵우산’은 어떤가? 이런 질문들 앞에 리버럴 진영의 태도는 전반적으로 애매하다. 이 ‘애매함’은 과도기적 현상이 아니라 일본 리버럴의 특성이다.
진보적 지식인으로 알려진 와다 하루키 도쿄 대학 명예교수를 공개 비판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1980년대 한국이 군사독재를 겪고 있을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 구명 운동에 발 벗고 나선 분이다. 내 개인적으로는 형들(서승·서준식)이 감옥에 있을 때 연대 운동도 해주었다. 실제로 그 글이 공개되고 나서 일본 리버럴 주류에서는 “서경식 일가는 와다 하루키의 은혜를 많이 입었는데 예의가 없다”라는 비판을 받았다. 논점을 흐리는 비난이라고 여겨 반론하지 않았다. 내 비판은 한·일 간 과거사를 어떻게 풀어갈지에 대한 와다 교수의 견해에 맞춰져 있다. 그게 본질이다. 그는 1995년 발족한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국민기금(아시아여성기금)’에서 전무이사를 지냈다. 국가 차원의 진상 규명이나 진실한 사죄 없이, 오해의 여지가 있는 보상금만으로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였다. 와다 교수는 2015년 12월28일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해서도 “백지 철회가 아니라 개조·개선”을 주장한다. 와다 교수의 이러한 견해는 일본 극우파에게 정치적 이용 가치가 높다.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 일본어판 후기에 와다 교수의 이름이 실렸다고 썼다.
<제국의 위안부>는 학문적으로나 문학적으로나 문제가 많은 책이지만, 여기서 반복해 말하지는 않겠다. 어떻게 와다 하루키와 우에노 지즈코, 다카사키 소지 등 리버럴파 지식인들의 이름이 이 책에 들어갔는지, 일본 내에서 상까지 받고 대중적 인기를 얻게 되었는지가 중요하다. 나는 박유하 교수의 저작이 일본 리버럴파의 숨겨진 욕구와 합치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들은 비합리적인 우익 국가주의와 선을 그으면서도, 동시에 식민 지배로 획득한 일본 국민의 특권도 지키고 싶어 한다. [?] 이성적 민주주의자와 옛 종주국 국민의 지위를 모두 놓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한국인이면서 여성인 박유하 교수의 언설은 이런 일본 리버럴 지식인들에게 매력적이다. 그녀는 시종 한국의 과잉 내셔널리즘을 문제 삼는다. 한·일 관계가 악화된 데에는 그 사람들의 책임이 크다는 논지다. 일본에서는 ‘<제국의 위안부>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한국 내 구식 내셔널리스트’라는 구도가 짜였다.
박유하 교수는 한국 검찰에 기소되어 항소심이 진행되고 있다. <아사히신문>은 “표현의 자유 침해”라고 비판했다. 국내에서도 비슷한 지적이 나왔다.
기소 소식을 듣고 처음 든 생각은 ‘국가가 나서서 검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였다. 과거 군사독재 시절의 기억 때문이다. 표현의 자유는 최대한 지켜져야 한다. 가능하면 법이 아니라 인민이 판단하는 게 옳다고 본다. 그런데 반드시 생각해봐야 할 지점이 있다.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가 자신의 명예와 권리를 침해받았을 때 누가 그것을 지켜줄 것인지의 문제다. 많은 국가가 명예훼손죄나 헤이트스피치(혐오 발언) 금지를 규율로 삼는 이유는, 반격 수단이 없는 약자가 스스로를 방어하게 해주기 위해서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자신의 명예가 훼손당했다고 판단해 박유하 교수를 고소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지니는 권리다. 피해자가 자기 존엄을 지키기 위해 최후의 저항 수단을 택한 일을 마냥 잘못이라고 할 수 없다. ‘개인이 지닌 표현의 자유를 국가가 침해했다’는 주장은 귀에 잘 들어오고 끌리기 쉽다. 이 말은 재특회를 비롯한 극우 세력이 전가의 보도로 삼는 주장이기도 하다. 박 교수가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려면 자신의 책이 무엇을 표현했는지, 어떻게 헤이트스피치와 다른지 설득해야 한다.
스스로 재일조선인이기에 일본 리버럴의 변질이 더 잘 보인다고 생각하나?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 없다. 재일조선인이지만 잘 안 보이는 사람도 많다. 한 사회의 주류로 살면서 그 사회밖에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잘 안 보이는 지점이 분명 있다. 일본 주류나 한국 주류, 다수자가 잘 볼 수 없는 것들이 내게는 보인다. 가난하거나 직업이 없었다면, 고립되어 아무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면 이야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강하거나 훌륭해서가 아니라 우연히 이런 위치에 서게 되어 말할 수 있었다. 누구나 그렇지는 않다. 소수자는 힘이 없고 늘 불안하다. 마음에 얼룩이 져 있지만 잘 이야기하지 않으려 한다. 다수자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모델 마이너리티(model minority:모범적인 소수민족), 사랑받을 수 있는 소수자를 연기한다. 일본에서도 널리 알려진 재일조선인 지식인이나 배우나… 꽤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 재일조선인이나 오키나와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스스로 긍정하는 이야기를 듣고 “용기를 얻었다” “치유 받았다”라고 말하는 일본인 다수자들을 종종 본다. 맞았는데 괜찮다고 웃는 사람들을 보고 ‘아 좋았다!’ 하는 격이다. 때리지를 말아야지.
세대가 교체되면 재일조선인 문제가 나아지지 않을까?
내가 젊었을 때도 나왔던 주장이다. 그때도 한국 역사도 모르고 문화도 모른 채 일본에 사는 재일조선인들이 많았다. 2세, 3세를 넘기면 재일조선인이라는 말 자체가 없어질 것이라고 했다. 일본인뿐만 아니라 재일조선인들 스스로도 그랬다. 풍화될 것이라고 봤다. 그래서 일본인이 되어야 한다는 사람도, 민족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양쪽 다 민족 개념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고 생각한다. 북아일랜드나 스코틀랜드를 보라. 영국에 얼마나 오래 지배받았나. 그렇다고 아일랜드인, 스코틀랜드인이라는 인식이 완전히 없어졌나? 민족의식은 그런 게 아니다. 민족의식이라는 실체가 있고, 그게 외부로 발현되는 게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에서 끊임없이 생긴다. 재일조선인 다수는 자기 한국 이름도 모르고 한국어로 말도 못한다. 그런데도 재일조선인은 없어지지 않는다. 지금 느끼는 억압이나 차별, 불안감이 없어지면 민족의식도 없어질지 모른다. 하지만 일본인들이 계속 식민 지배를 추종하고 미화하고 피해자인 우리를 차별하는 한, 재일조선인도 없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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