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한국에 상륙한 과학적 회의주의 - 주간경향
2015.03.10
ㆍ미국서 태동한 유사과학 검증 운동… 스켑티시즘 계간지 ‘코리아 스켑틱’ 창간
TV 인기드라마 <엑스파일>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들이 다루는 FBI 요원 폭스 멀더와 데나 스컬리가 주인공이다. FBI의 사건파일 중 코드넘버 X로 분류된 사건들은 기존 세상의 법칙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초자연적인 원인에 의해 벌어진 것으로 보고된 사건이다.
초자연적인 것을 ‘믿고 싶은’ 멀더와 과학적 논리를 통해 그것을 풀려고 하는 신참요원 스컬리의 대립이 드라마를 끌고 가는 핵심축이다. 결론은? 대부분 멀더의 승이다. 사건은 스컬리의 추리를 넘어선 그 어딘가에서 결말지어진다. 드라마는 드라마다. 초자연적인 사건을 다뤘던 대부분의 픽션이 취하는 형식이다.
왼쪽부터 故 칼 세이건, 마틴 가드너, 리처드 도킨스 | / NASA / skepticism.org / RichardDawkins재단
스켑티시즘(skepticism). 조금 생소할 수도 있다. 직역하면 회의주의다. 철학의 한 유파인 회의주의와 상통하는 면이 없지는 않지만, 보다 정확하게는 최근 미국에서 일어난 한 지적운동을 지칭하는 용어다. ‘합리적 또는 과학적인’이라는 수사를 붙이면 보다 정확한 뜻이 될 수 있다. 스켑티시즘은 하나의 방법론 또는 태도다. “논리적이고 비판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우리를 미혹하는 수많은 것을 조사하고 검증하는 태도”를 말한다. 미혹하는 것들? UFO, 유령, 초자연적인 현상과 믿음, 점성술이나 대체의학 등 과학적인 조사나 학설과 배치되는 온갖 주장들이 포함된다. 인터넷의 발명 이래 계속되는 논쟁의 한 축인 ‘창조설’(creationism)도 비평 대상에 포함된다. 스켑티시즘의 비평 대상은 초자연적 대상만이 아니다. 이를테면 “나치에 의한 600만 유태인 학살은 조작되었다”는 주장도 검증 대상이다. 서구권에서는 이런 주장을 ‘역사수정주의’라는 범주로 다루고 있다.
“유태인 학살은 조작” 주장도 검증 대상
스켑티시즘의 선구자로 알려진 이는 타계한 칼 세이건 박사다. 타계하기 직전에 출판된 그의 저서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 (1996)은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사이비과학(pseudo science)들의 창궐이 어떻게 현대인들의 ‘과학문맹’으로 이어졌는지를 분석한 책이다. 마술사 제임스 랜디의 <폭로> (1996)도 대표적인 스켑티시즘 저서로 거론되는 책이다. 초능력자들이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 실행하는 단골메뉴-숟가락 구부리기, 투시, 염력, 원격투시, 텔레파시 등이 어떻게 조작되는지 그 과정을 ‘폭로’한 책이다. 제임스 랜디는 1996년 재단을 만들어 초능력을 증명한 사람에게 100만 달러를 주는 챌린지 프로젝트를 진행했지만, 현재까지 랜디의 검증을 통과한 초능력자는 없다. 우리에게는 <이야기패러독스>로 유명한 수학자 마틴 가드너 역시 스켑티시즘 운동을 대표하는 인사다. 제일 유명한 사람은 <만들어진 신>으로 ‘전투적 무신론자’로 알려진 리처드 도킨스다.
도킨스와 <총,균,쇠>로 알려진 재레드 다이아몬드 UCLA 의대 교수, <無로부터의 우주>의 로렌스 크라우스 등이 편집진으로 참여해 만들어진 잡지가 <스켑틱>(skeptic)이다. 지난 1992년부터 발간되고 있는 계간지다. 편집 총책임자는 마이클 셔머. <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와 같은 대표적인 스켑티시즘 저서를 썼다. <스켑틱>의 한국판 <코리아스켑틱>이 창간됐다.(상자기사 참조)
제임스 랜디, 마이클 셔머(스켑틱 편집장). | / wikipedia / www.michaelshermer.com
한국에선 황우석 스캔들이 대상
그러나 스켑티시즘은 방법론이나 태도를 제외하고 사회주의와 같은 단일한 이념에 기반한 운동이 아니다. ‘미혹하는 대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두고도 미묘한 입장차가 드러난다. 스켑티시즘 운동의 기원으로는 초자연적 주장에 대한 과학적 검증위원회(Committee for the Scientific Investigation of Claims of the Paranorma, CSICOP)의 발족과 함께 시작되었던 것으로 거론된다. 1972년이다. 당시 이 단체를 설립하고 이끌던 사람은 철학자 폴 커츠(2012년 타계)와 사회학자 마르셀로 트루지(2003년 타계)였다. 단체에서는 1976년부터 <스켑티컬 인콰이어러>라는 격주간 잡지를 내고 있다. 그러나 초창기 스켑티시즘 운동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났다. 크게는 유사과학 주창자들을 논쟁 내에 끌어들이려 했던 트루지와 나머지 회원들 사이의 대립이었다. 비난하는 쪽에서는 “사기꾼인 것이 명확한 유리 겔러와 같은 인사들과 트루지의 친분관계는 도를 넘어선 것이었다”는 공격도 나왔다. 별도로 떨어져 나온 트루지는 <제테틱>(zetetic)이라는 잡지를 창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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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어떨까. 한국의 스켑티시즘 운동의 역사도 개인 활동은 1970~80년대로 거슬러올라간다. 숙명여대 교수를 역임하고, 정신과학학회 등에 맞서 언론 기고 등의 활동을 하던 강건일 박사가 한국의사과학문제연구소(kopsa) 사이트를 개설한 것이 2000년이다. 조직적으로는 15년 넘는 역사를 갖고 있는 셈이다. 그는 <신과학은 없다>(1998), <강박사의 초과학 산책>(2001), <초자연의 세계>(2007) 등 10권이 넘는 스켑티시즘 저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연구소 활동은 현재 정체상태에 머무르고 있다. 강 박사는 “한때는 대학교수나 의사 등 전문 저자들을 모아서 토론회도 개최하고 무크지를 발행하는 등의 시도를 했지만, 지속적으로 계속되진 못했다”며 “결국 내 능력의 문제”라고 말했다. 갈등도 없지 않았다.
앞서 ‘역사수정주의’로 칭한 스켑티시즘의 비평 대상 영역은 유태인 학살 ‘조작’ 음모론에 국한되지 않는다. 정치·경제적 이해관계나 파당적 이념이 미묘하게 얽혀 있는 현대사의 영역, 이를테면 냉전체제 경쟁과 결부된 미국의 달착륙 음모론이나 9·11 테러를 누가 일으켰는가 등의 이슈도 스켑티시즘의 주요한 관심영역이다. ‘음모론’은 스켑티시즘이 예의주시하는 주제다.
3월 1일 발매된 <코리아스켑틱> 창간호. / 바다출판사 제공한국으로 넘어오면 어떨까. 단적으로 참여정부 시기 벌어졌던 황우석 논문 조작 스캔들이 대상이 된다. 황우석 박사를 옹호하는 쪽에서는 연구성과를 가로채려는 국제적 음모가 있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스캔들을 파헤쳤던 ‘PD수첩’은 한동안 곤혹스러운 입장일 수밖에 없었다. ‘음모설’을 지지하는 쪽에서는 지금도 정교한 황우석 박사 옹호론을 구축해놓은 상태다. 간단치 않은 것은 그 후다. 정권이 바뀌고 벌어진 광우병 논란, 천안함 사건을 둘러싼 생물학연구정보센터(Bric)의 게시판 논쟁에서 과학적 회의주의적 태도를 주장하는 쪽은 광우병 위험성을 주장하는 쪽과 천안함 사건에 대한 정부 공식 발표에 의혹을 제기하는 쪽을 배제하는 것으로 기울었다. 정치지형에서 소위 ‘진보좌파’와 반대쪽에 선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과학적 회의주의가 보다 친화력을 가진 것은 자유주의적 좌파 쪽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이런 문제를 ‘극우매체’로 찍힌 쪽에서 하는 것도 정말 특이한 현상이고….” 황의원 과학중심의학연구원 원장의 말이다. 처음에 그가 만든 사이트의 이름은 ‘스켑티컬 레프트’였다. 과학적 회의주의와 자유주의적 좌파 이념을 결합한 과학·사회비평을 미션으로 생각하고 만들어진 토론 사이트다. 논쟁을 거치면서 ‘스켑티컬 레프트’는 우파 쪽으로 기울었다. 일각에서는 “‘좌파활동에 대해 회의(skeptic)’하는 것이 사이트의 성격이 아니냐”는 비아냥까지 나왔다. 스켑티컬 레프트는 현재 폐쇄를 앞두고 있다. 과학중심의학연구원과 황 원장의 활동은 변희재씨가 대표를 맡고 있는 미디어워치를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
회의주의와 한국의 진보
과학중심의학연구원의 ‘회의주의’ 활동은 한의학 비판으로 모아지고 있다. 황 원장은 “미국과 한국의 상황 차이이기도 하지만 스켑티시즘의 활동이 정치적 비난을 당하지 않을 민감하지 않은 주제에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과학적 회의주의적 사고는 유사과학이 장악하고 있는 은폐된 권력관계에 대한 폭로가 중요하며, 그런 의미에서 ‘과학의 외피를 쓰고 제도권에 들어와 있는’ 한의학의 실체를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는 주장이다. 스켑티시즘에서 여러 테라피들과 함께 ‘동양의학적 접근을 포함한 대체의학’에 대해 대체적으로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강건일 박사는 “회의주의적 접근은 과학적 사고로 사실적 증거와 올바른 추론을 통해 어떤 문제든 생각을 해보자는 것을 모토로 삼아야 하는데, 정치적으로 경도된 접근이나 경제적 이해단체의 지원을 바탕으로 하는 것은 올바른 접근이라고 할 수 없다”고 과학중심의학연구원의 활동을 비판했다.
과거 인기 방영 드라마 ‘X파일’이 다루는 초자연적 현상은 스켑티시즘의 대표적인 과학비평 대상이다. 사진은 드라마 ‘X파일’에 사용된 “나는 믿고 싶다” 포스터. / 경향자료
“한국사회 유사과학 비판이 과제”
‘대체의학으로서의 한의학 비판’에 대체적으로 동의하면서도 정치적으로 경도된 주장에 대해 우려를 표시하는 경우도 있다.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경도되면서 설혹 올바른 비판을 하더라도 다시 정치적으로 특정 진영과 업계 이해에 경도된 주장으로 역공격을 받을 수도 있다.” 한국의 스켑티시즘 운동이 우파에 경도되거나 활성화가 안 되어 왔던 이유에 대해 김진만씨는 “한마디로 돈이 안 되기 때문”이라고 단언한다. 김씨는 2000년대 중반 ‘합리주의자의 도’라는 이름의 스켑티시즘 사이트를 운영하다 현재는 운영을 접었다. 녹십자에서 그린진에프라는 단백질 신약을 개발하고 퇴사한 김씨는 “개발팀장을 맡으면서 다른 일을 할 시간이 없어 접게 되었다”고 말했다. “한국은 실패를 통해서 배우려 하지 않는 풍토가 있다. 스켑티시즘은 말하자면 잘못으로 판명난 문제를 되짚어보고 왜 그런 오류가 나타났는지를 찾아보는 것인데, 성공사례가 아니기 때문에 기존 학문에서도 거의 취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강석하 사이언티픽 크리틱스 편집장은 한국에서 스켑티시즘이 활성화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아무래도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이공계 연구원 출신이 많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공계 연구원 출신 사람들은 자기 주제와 연관된 과학적 이슈에만 관심을 가졌지 사람을 조직화한다든가 하는 능력을 배울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이번에 창간한 스켑틱 코리아는 일단은 미국에서 발행되는 <스켑틱>에 실린 기사를 번역하는 것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편집진은 일단은 외부편집진보다는 잡지를 출판한 바다출판사 내부 인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김인호 바다출판사 대표는 “스켑티시즘이라는 방법론은 미국에서 나왔지만, 결국 해결해야 할 문제는 우리 사회의 과제가 아니겠느냐”며 “(앞으로의 편집방향은) 일부 마니아를 중심으로 끌고가기보다는 보편적인 합리성을 기반으로 학계나 전문가 필진이나 편집진을 차차 확보해나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코리아스켑틱’ 창간한 김인호 바다출판사 대표
“창조설 논란 등 종교 문제 건드리지 않을 수 없을 것”
“스켑티시즘은 유별난 것이 아니다. 과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나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상식적인 입장이다. 대안적인 다른 관점이 성립 가능한가, 재현 가능성이 있는가와 같은 과학에서 사용되는 기본적인 철학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과학적 회의주의는 어떤 고정된 이념이 아니라 하나의 태도나 입장, 방법론이다.” <코리아 스켑틱>을 낸 김인호 바다출판사 대표의 말이다. 철학과 출신인 김 대표는 84학번. 전형적인 386 출신이라고 할 수 있다. 대학시절 그가 생각했던 과학적 세계관은 마르크스주의적 유물론이었다. “과학적 세계관이라고 주장했지만 어느 순간 그것 역시 하나의 사변철학, 관념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코리아 스켑틱> 창간호의 커버스토리는 다중우주론이다. 한국의 독자들에게는 조금 생소한 주제다. “조금 어려울 수도 있다. 다중우주설은 아직 다수설이나 정설로 확립된 이론은 아니다. 다중우주론이 왜 생겼고, 어디까지 왔는지 해설기사가 필요해 박병철 대진대 물리학과 초빙교수에게 해설을 맡겼다. 미국에서 발간된 <스켑틱>과 다른 부분이다.”
김 대표의 설명에 따르면 <코리아 스켑틱>의 저본은 미국에서 발간된 계간지를 바탕으로 한다. 다만 이번 주제처럼 다소 어려운 경우 해설을 포함하거나, 1993년 이후에 실린 주요한 기사 중 의미가 큰 경우 번역해서 포함시키기도 하는 식이다. 계간지이다 보니 다음호 발간은 3개월 후다. 다음호의 주제는 ‘식이요법의 허와 실’이다. 미국에서 발간된 잡지를 순차적으로 번역하기 때문에 식이요법 문제를 다룬 영문판 잡지는 이미 미국에서는 발매되어 있다. 역시 이번호와 마찬가지로 한국적 현실에 맞는 내용을 편집과정에 포함할 계획이다. 비영리성·비당파성을 표방하고 있기 때문에 보수나 진보와 같은 정치적 입장과는 선을 긋는 것이 원칙이지만 “예컨대 창조설 논란 등과 같은 종교문제를 건드리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김 대표는 덧붙였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원문보기:
http://m.weekly.khan.co.kr/view.html?med_id=weekly&artid=201503101059331&code=116#csidx95ccaef0bb4264790f28567610ca37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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