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0-24

이종만 삼척탄광 1946년 5월 군정청은 노동자 자주관리가 이루어지던 삼척탄광에도 이종만 사장을 해임



[기획]에너지 산업의 민영화 어떻게 볼 것인가 2 : 에너지, 석탄 편 – 수다피플 – 수다피플 :: SUDAPEOPLE

[기획]에너지 산업의 민영화 어떻게 볼 것인가 2 : 에너지, 석탄 편 – 수다피플





석탄

2014년 우리나라는 829만 4천 톤의 무연탄과 1억 1787만 3천 톤의 유연탄을 수입했다. 이 중 3382만 7천 톤은 산업 원료로 쓰였고 9705만 8천 톤은 연료로 사용했다. 들여오는 나라는 호주와 중국, 인도네시아, 캐나다, 미국, 러시아 등이며, 수입은 자유화 되어 있다. 발전소나 제철소 같이 대량으로 소비하는 곳은 직접 구매에 나선다.

우리나라에서 석탄에 관한 첫 이야기는 <삼국사기>에 나오는 진평왕 31년(609년) 모자와 동토함 산지가 불에 탔다는 기록이다. 여느 산불과는 달리 노두탄이 산불로 인하여 불이 붙어 오랫동안 탔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하며, 동토함 산지는 지금의 경상북도영일군의 갈탄지역으로 추정한다. 본격적인 기록은 1590년 평양관찰사 윤두수가 편찬한 <평양지>에 나온다. “평양성 동쪽 10리 지역 문수봉에 석탄소가 있다. 불이 붙어도연기가 나지 않으니 무연탄이라 한다.” 그 뒤 1730년 <속평양지>에는 “평양부 동쪽30리쯤 미륵현에 흑토가 있다. 도관찰사 허관이 말하기를 이것이 이른바 석탄이다. 우리가 이것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한탄스러운 일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영조 임금때까지도 석탄은 산지 주민들이나 간혹 흙에 개어 연료로 사용하는 정도였음을 알 수있다.

1800년대에 이르면 채굴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 생겨났다고 한다. 1885년에는 평양감사가 양단탄전 개발권을 빌려주고 임차료를 받아 국고 수입으로 잡음으로써 국내에서도 석탄산업이 태동하였음을 알렸다.

본격적인 개발은 개항기 제국주의 국가들에 의해서다. 1891년 조선 왕실은 영국의 경비정을 사오기 위해 평양탄전 채굴권을 담보로 독일 마이어사의 세창양행으로부터 은10만냥을 빌렸다. 고종은 1896년 4월 러시아인 니시첸스키에게 함경도 경성과 경원지방의 석탄 채굴권을 주었다. 채굴에 실패한 니시첸스키는 1899년 조선인 김우성과김익승에게 채굴권을 넘겼으나 이들도 성공하지는 못했다. 이 지역의 갈탄은 한일병탄이후 일제에 의해 개발된다.

아관파천으로 러시아에 나라의 운명을 맡겼던 고종은 함경도의 석탄 채굴권을 러시아인에게 주었다.

그 해 10월 민영환과 함께 입국한 러시아 푸차타 대령 일행.

1896년 11월 독립신문에는 “The best quality Pengyang and Japanese coal on hand for sale”(최상품 평양 및 일본 석탄 입하)라는 영문 광고가 실렸다. 우리나라에서 석탄의 첫 소매 판매는 정동에 있는 서양인의 ‘고샬기상회’로 일본탄을 수입 판매했다. 진고개에 있던 ‘야마이치상회’에서도 평양과 수입 일본탄을 서울에 들어와 있던 외국인과 재빨리 신문물의 혜택을 누리고자 하는 소수의 조선인 부유층에게 팔았다.

1903년 왕실은 직접 탄광 개발에 나섰다. 궁내부 내장경 이용익은 프랑스의 용동상회와 평양 사동탄광을 합동 개발하여 중국 산동지방으로 수출하였다. 그러나 왕실 수입이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채굴 과정에서 평양성곽을 훼손하여 1905년 2월 해지하였다. 1906년에는 광업법을 제정하여 근대적 광업 개발의 제도를 갖추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사실상 조선 지배를 시작한 일제는 1907년 평양무연탄을 개발하여 해군함의 연료로 사용했다. 당시 평양탄광의 운영권은 왕실에서 평리원 재판장이었던 민병환의 풍고회사(실제로는 일인 메가다가 운영)로 넘어왔다가 정부 직영(총재는 농상공부 대신 송병준, 메가다 재정 고문)을 거쳐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조선총독부가 직영하였다.

한일합방으로 거칠 것이 없어진 일제는 광업권을 판매했다. 1915년에는 조선광업령을제정하여 한국의 자원수탈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완비했다. 이 법의 시행으로 일제는이미 외국인에게 허가한 광업권(1885년 미국인 모스에게 운산금광을 허가한 것이 최초)은 인정하되 새로운 광업권 취득은 금지하여 일본인의 광업권 취득이 급증한다. 1911년부터 1925년까지 탄광은 443개의 허가가 나갔는데 이 중 조선인이 취득한 건10% 미만인 41건이었다. 1907년 2천톤에 불과했던 석탄 생산량은 한일합방 당시엔7만 8천 톤으로 약 40배, 1930년엔 88만 4천 톤으로 400배 이상 늘었다. 수요도 늘어 생산량보다 많은 양의 석탄이 중국과 일본으로부터 수입되었다.

이 때의 탄광은 덕대광업으로 채굴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시대 광산에서 형성된 덕대제는 자본과 인력을 가진 덕대가 광업권자와 계약하여 개발하는 방식이다. 덕대는 자기자본으로 하기도 하지만 물주가 따로 있는 경우도 있는데, 1905년 이후 일본인 광산주와 물주가 늘어나면서 덕대는 독립경영자의 지위에서 하청업자로 굳어졌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제는 국내 탄광에 대한 본격 개발에 나서 수입을 밑돌던 국내석탄 생산량이 1934년에는 169만 7천 톤으로 수입량을 넘어섰다. 1937년 중일전쟁으로 군수품 수요가 늘자 조선총독부는 배급통제규칙을 제정하여 석탄도 포함시켰다. 1938년에는 조선중요광산물증산령을 발동하여 강제 개발 명령을 내리고 이행하지 않으면 광업권의 양도를 지시했다. 이는 조선인의 광업권을 박탈하는 구실로도 쓰였다.


일제는 여성도 탄광으로 몰아넣었다.

평안북도 지역에 여자 갱부가 1200명에 달한다는 1941년 10월31일자 <매일신보>.

일제의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그야말로 ‘혼이 비정상’이라고 볼 수밖에…

중일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1939년 총독부는 총동원법에 근거하여 국민징용령을 공포하고, 1940년에는 석탄조합연합회를 통해 전표배급제를 시행하였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4년 2월에는 전면 징용을 실시하고 조선인의 거주 이전을 제한하였다. 수많은 조선인들이 일본과 국내의 탄광으로 징용되었다. 어린 학생들까지 소나무 관솔을수집하라고 산으로 내몬 일제의 수탈도 그러나 1945년 8월 패전으로 막을 내렸다.


일제 말기 전쟁 막노동꾼으로 끌려간 조선인들이 하시마(군함도) 탄광에서 혹사당하는모습

일본인이 철수하여 무주공산이 된 광산은 강제징용되었던 광부들의 대다수가 귀향하고생활물자 공급이 중단되어 생산활동이 사실상 중단되었다. 혼란과 무질서 속에 적산을차지하려는 모리배들의 술수가 난무하고, 각 탄광에서는 자치위원회가 자생적으로 구성되었다. 좌우를 막론하고 광산 근로자들의 지지를 받는 이들이 위원장을 맡았다. 삼척탄광의 민족자본가 출신 이종만(일제 때 대동공전과 대동농촌회 등 설립. 1949년 월북하여 광업부 고문 역임), 화순탄광의 강대호(건국준비위원회 화순탄광지역 자치위원장)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일제를 대신하여 조선을 접수한 미군정은 1945년 11월 2일 일본인이 소유했던 모든재산을 9월 25일자로 소급하여 조선군정청 소유(귀속재산 속칭 적산)로 전환했는데, 일본인이 조선인에게 권리는 넘겼거나 조선인 종업원에 의해 자체적으로 관리가 이루어지는 경우엔 이를 부정하고 귀속시켰다. 이에 따라 일본인 소유였던 광업권과 광업재산 일체도 군정청으로 이관돼 귀속탄광이 되고, 군정청은 귀속탄광에 지배인이나 관리인을 임명해 운영하였다.
1946년 5월 군정청은 노동자 자주관리가 이루어지던 삼척탄광에도 이종만 사장을 해임하고 하경용을 관리인으로 임명하였다. 이에 노동자들이 쟁의를 일으켰으나 이종만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모리배들에게 밀려난다.





화순탄광사건을 다룬 뮤지컬 ‘화순’의 한 장면.

1945년 11월 화순 탄광에 진주한 미군은 자치위원회의 탄광 운영을 불법화하고 화순탄광을 접수하였다.

미군은 이듬해 8월 15일 광주에서 열린 광복1주년 기념식에 참석하려던 광부들에게발포하여 100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1946년 3월에는 석탄생산위원회를 설치하고 국내 주요 탄광을 상무부가 직영하며 석탄광업자금을 조성하여 증산을 지원하였다. 그 해 5월에는 광무국에서 직영하는 조선석탄배급회사를 설립하여 직영탄광에서 인수한 석탄의 수송과 배급을 담당했다.

그러나 분단의 고착화는 남한에 심각한 에너지난을 초래했다. 당시 남한의 석탄 생산은전국의 20%밖에 되지 않았다. 북한의 석탄 반입이 어려워지자 땔감 조달로 인해 산림훼손이 급증하고, 철도용과 발전용 석탄 공급이 수요의 30% 이하로 떨어져 1947년11월엔 연료 부족으로 철도 운행이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1948년 5월 10일 남한단독 정부 수립을 위한 선거가 실시되자 북한은 5월 14일 남한으로의 송전마저 중단했다.


1948년 8월 출범한 대한민국 정부는 막대한 탄광 복구비를 투입하여 석탄 증산에 나섰다. 석탄 생산은 1948년 86만 9천 톤, 1949년엔 113만 톤으로 늘어 해방 전 남한생산량인 144만톤을 어느 정도 회복하였다. 그러나 생산량이 수요를 따라잡지 못하자국유 탄광을 민간에 불하하여 개발을 촉진하자는 의견이 대두하였다. 새로 구성된 이승만 정부의 상공부 광무국은 각 도의 귀속광산을 중앙정부로 이관하여 관리인 제도를 폐지하고 덕대인 제도를 도입하였다. 당시 운영되는 탄광은 20여 개에 불과했는데, 민간업자가 소정의 덕대료를 내고 광산을 개발하는 방식이 도입되자 1951년 전국 121개광산에 200여 광구가 덕대 허가를 받아 개발되었다.

한편 정부에서 직영하는 탄광의 효율성이 지적을 받으면서 생산과 공급을 담당하는 국영기업체로서 대한석탄공사가 1950년 11월 설립되었다. 당초 6월 말에 출범시키려던석탄공사는 한국전쟁의 발발로 늦어졌다. 석탄공사는 11개 직영탄광과 조선석탄배급회사, 3개의 연탄제조회사로 출범하여 이듬해 문경 등 6개 탄광을 추가하였다. 1951년 3월에는 석탄공사의 모든 재산을 국유재산으로 지정하고 광업권을 ‘국(國)’으로 등록하였다.


연탄 출하를 소달구지로 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공사를 만든 2년 후인 1952년 5월 이승만 정부는 국가 재정을 증강하고 경영합리화를 도모한다며 국영기업의 불하를 결정했다. 민영화는 17개 연탄공장을 민간에불하하는 것에서 시작하였다. 1954년엔 일본인 소유 광산의 광업권과 시설을 국유로전환했던 국무원 고시를 폐지하고 1956년 광업권 처분령을 개정하여 광업권과 시설의동시 매각을 추진하였다. 1957년부터 본격화한 석탄공사 매각은 1961년까지 공사가개발하던 장성 등 6개 탄광을 제외한 모든 귀속탄광을 민간에 불하하였다. 20~30개에불과하던 민영탄광은 200개를 넘어섰다. 1956년 석탄공사 생산량의 절반 수준이었던민영탄광의 생산은 1961년 공사를 넘어섰다. 이후 석탄의 공급체계는 석탄공사의 주도로 각 연탄공장을 비롯한 수요처에 분배하는 방식에서 판매로 변경되었다.




해방 후의 진통과 전쟁으로 얼룩진 1950년대 우리나라의 국민들이 가정에서 주로 사용한 에너지원은 나무였다. 전쟁 시기에는 80% 이상이었으며 1950년대 후반에도70% 이상을 임산자원에 의존했다. 도시와 시골 마을의 주변 산은 민둥산이 되어 홍수나 가뭄의 피해를 가속하였다.




정부는 연료원을 바꾸기 위해 석탄 증산에 총력을 기울였다. 1957년 3월엔 문경과 삼척 일대의 철도가 완전 개통되어 수송난을 해결하였다. 1956년 ‘석탄개발 5개년 계획및 연료 종합 5개년 계획’, 1957년 ‘탄전종합개발 10개년 계획’, 1958년 ‘석탄증산 8개년 계획’이 잇달아 수립되고 1961년 5월12일 민주당 정부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도 반영되었다.








1954년 임금체불에 항의하는 광부들의 파업을 겪은 뒤 이승만은 육군 지원단을 공사에 파견했다.

전쟁을 거치면서 우리 사회의 인적, 물적 자원이 군에 집중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런 정부의 증산 노력으로 1950년대 100만톤 수준이었던 수입을 대체하게 되었으니, 1955년 53.1%이었던 석탄 자급률은 1966년 99%로 거의 자급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연탄 보급도 확대되어 연료원에서 신탄(장작과 숯)이 차지하는 비율은1961년 56.5%, 1966년 35.3%까지 줄고 대신 석탄의 비율이 절반을 넘어섰다.

1965년 수송난으로 연탄파동이 일어나자 석탄수송 차량은 통행에서 특별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석탄의 시대는 그리 길지 않았다. 박정희 정부는 1966년 11월 ‘주유종탄(主油從炭)’으로 에너지 정책을 바꾸어 무연탄 위주의 난방 연료를 유류(벙커C유)로 대체키로 결정하였다. 주유종탄에 빌미를 제공한 건 연탄파동이었다. 1965년 성수기를 앞둔가을 소비지의 저탄량은 40여만톤에 불과했고 연탄 가격이 폭등하였다. 그러자 이듬해비수기인 여름에도 연탄 수요가 급증한데다 10월 초 한파가 급습하자 서울에서조차 연탄을 구입하기 어려운 지경이 되었다. 원인은 철도 수송이 부진한 탓이었다. 당시 생산지엔 85만톤이 저탄되어 있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전 강원산업 회장 정인욱의 전기에는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1964년에건립한 울산석유화학 공장은 (박정희) 대통령의 첫 작품이나 석유의 판매 부진으로 계속 경영난을 겪게 되자 그 타개 방편으로 1966년 가을 극비리에 철도청에 화차 배정의감축을 지시하여 연탄파동을 발생케 하고 이를 구실로 연료정책을 전환하여 석유소비증대를 도모했다”는 것이다. 석유가 가진 장점으로 이미 선진국에서는 석유와 가스가주요 연료원으로 등장한 때이므로 정인욱의 진술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워도정책 변경을 촉진한 계기가 연탄파동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주유종탄으로 연료정책이 바뀌면서 상공부 광무국의 보일러도 석유보일러로 교체했다.

연료정책의 변화는 1967년 7월부터 석탄 수요의 감소로 현실화되었다. 산지의 저탄량은 200만톤으로 늘었지만 성수기에도 판매가 어려웠다. 1967년 초 200여개에 이르던탄광은 2년 뒤 50개소로 감소했다. 석탄공사 탄좌도 감산과 감원을 해야 하는 상황이되어 1969년 9월 37,800명이었던 근로자는 두 달 만에 32,200명으로 줄었다. 산업용 및 공공용 석탄 수요는 급감하였으나 가정용 연탄 수요는 유지되어 연탄공장은 그나마 계속 호황을 누렸다. 1960년대 후반 삼표연탄의 제조원인 강원산업 정인욱 회장은‘국내에서 현금을 가장 많이 가진 사람’이라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구미와 일본은 1940~50년대에 이미 석탄산업의 사양화를 경험하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1946년 석탄산업을 국유화하여 영국은 석탄청, 프랑스는 석탄공사가 관장했다.(영국의 석탄산업은 1980년대 초 대처 수상에 의해 민영화 된다) 독일은 민영체제를 유지하며 후에 합영 개발 체제로 전환하였다. 일본도 민영 체제를 유지했는데 1958~59년230일간의 장기 파업 이후에 막대한 정부 지원을 투입하였다.








영국의 국영 탄광을 민영화하려는 대처 수상의 정책에 반대한 광부들의 파업은 정부의무타협과 강경 진압에 밀려 363일만에 실패로 막을 내렸다. 2016년의 유럽연합 탈퇴국민투표와 더불어 소선거구제에 기반한 영국의 정치 제도가 후진적임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1965년 박정희 정부의 경제과학심의위원회는 ‘에너지 수급 전망과 개발계획’을 수립하여 전력의 국유화, 석탄의 점진적 국유화, 석유의 민영화를 제안하였다. 1969년 8월정부는 석탄산업육성에 관한 임시 조치법을 제정하여 시장 축소의 충격을 완화해줄 보조금 지급을 시행하였다. 재원은 석탄 대신 주 연료원으로 등장한 벙커C유에 대한 세입의 10%를 갹출하여 조성하였다.




하지만 석유를 전적으로 수입해야 하는 우리나라에서 석탄의 역할이 그렇게 쉽게 끝날수는 없었다. 1973년 10월에 발생한 1차 석유파동은 중화학공업으로 전환을 시도하던한국경제에 직격탄을 날렸다. 수 개월 사이에 4배나 폭등한 유가는 1974년 우리나라물가상승률을 24.8%나 상승시켰으며, 성장률은 전년에 비해 5%가 떨어졌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정부는 모든 석탄 생산에 대해 톤당 300원씩, 증산분에 대해서는400원의 보조금을 지급하였다. 1974년 1월14일에는 긴급조치 3호를 발령하여 에너지 정책을 ‘주유종탄’에서 ‘주탄종유’로 변경하고 국내 자원 및 대체에너지 자원의 개발을 적극 지원하기로 하였다. 3월에는 석탄 생산 보조금을 톤당 800원으로 올렸다. 8월에는 면세제도를 마련하여 이듬해부터 탄광 법인세와 소득세, 영업세를 면제하고, 재투자분은 종합소득세 과세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석유파동으로 수요가 크게 늘자 생산 증가에도 불구하고 1974년 ‘석탄기근’ 현상이 발생했다. 서민 가정을 울린 저질탄을 수사하던 정부가 연탄업자들의 생산 중단 엄포에굴복하여 수사를 중지할 정도였다. 정부는 가정용 연탄 공급의 확보를 위해 목욕탕과다방, 음식점 등의 연탄 사용을 금지하는 한편 1가구당 1회 20장 이상 판매 금지, 연탄구매카드제 실시, 연탄판매기록장제 등을 시행하였다.

국내 무연탄 생산이 연탄 수요를 따라잡지 못하자 1978년 정부는 석탄공사로 하여금연탄제조용 석탄수입업무를 개시하도록 하였다. 당시 발전용 석탄은 한국전력, 비축용은 조달청에서 수입하고 있었는데 1982년 모든 석탄 수입을 석탄공사로 일원화하였다.


1978년 말에 발생한 2차 석유파동은 석탄의 증산을 가속화하였다. 연탄의 탄질은 양질의 수입 무연탄을 국내 저질탄과 혼합하여 유지하였다. 1982년 2천만톤을 넘어선국내 석탄 생산량은 1988년에 2430만 톤으로 최고점을 찍었다.


박정희 정권이 무너지자 저임금으로 경제성장을 일구어온 현장 노동자들의 불만이 표출되었다.

1980년 4월21일부터 나흘간 사북읍을 장악했던 광부파업은 전두환 군부 세력의 계엄사에 의해 진압되고

마녀사냥을 거쳐 81명이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그러나 1986년 이후 국제유가가 하향 안정세를 유지하고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개최를계기로 대기환경 개선에 대한 정책이 강화되면서 석탄은 주 연료원의 자리를 석유와 가스에게 내주었다. 1986년 4월 정부는 직할시급 이상 대도시의 대규모 건물, 일정 규모이상의 신축 주택에 연탄 사용을 금지하고 1989년 12월에는 연탄을 사용하는 가구가LNG로 전환할 경우 지원을 해주었다. 1986년 가정과 상업용 에너지 소비에서 64.7%를 차지하던 연탄은 20세기가 저무는 1999년 2%로 떨어졌다. 반면 도시가스를 사용하는 가구 수는 1986년 0.5%에서 1999년 24.4%로 늘었다.


자다가 연탄가스를 마신 쌍문동의 성씨 일가.

스스로 기어 나와 김칫국 한 사발 때리고 살아난 우리의 덕선양!


석탄업계는 발빠르게 가스 산업으로 옮겨 탔다. 1978년 봉명의 대한도시가스 합작 투자를 시작으로 1980년 삼천리, 1982년 부산지역 연탄공장들, 1983년 대성, 1985년강원산업, 1986년 대전지역 연탄업자들이 지역도시가스공급업에 뛰어들었다. 1986년까지 허가된 18개 도시가스업체 중 석탄관련 회사가 10개였다.




1986년 정부는 석탄개발임시조치법과 석탄광업육성법, 석탄수급조정법을 통합하여석탄산업법을 제정하고, 이듬해 석탄산업합리화 대책을 수립하여 1988년부터 한계 탄광 통폐합과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광업권자와 조광권자에게 폐광대책비를 지원하고, 구조조정으로 이직하는 광부에게는 퇴직금의 75%와 2개월분 임금, 1개월분 실직위로금과 생활안정금, 이사 및 구직활동비 등을 지원하였다. 이에 따라 1988년 347개였던탄광이 1996년에는 11개로 축소되고, 68,500명이었던 근로자는 1만명으로 줄어들었다.




30~40년에 걸쳐 완만하게 진행된 선진국의 석탄산업합리화에 비해 우리나라는 수 년사이에 석탄산업의 구조조정이 이뤄짐에 따라 탄광 경제는 급격하게 위축되었다. 마침내 1995년 2월 고한과 사북에서 주민들의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고, 4월에 정부는 석탄산업종합대책 추진 계획을 발표하였다. 정부는 적정 생산 규모를 430만톤으로 설정하고 장성, 도계 등 장기 육성 탄광을 지정하여 생산량을 유지하기로 하였다. 또한 폐광지역개발지원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고 정선에 내국인 카지노를 허가하여 2000년 10월에 개장하였다.




현재 가행 탄광은 석탄공사에서 운영하는 장성광업소(2014년 생산량 50만2천톤), 도계광업소(29만8천톤), 화순광업소(23만7천톤) 등 3개소와 민간으로는 ㈜경동의 상덕광업소(86만2천톤), ㈜태백광업(13만2천톤) 2개소이다.








현재 운영 중인 대한석탄공사 장성광업소 갱구.

2016년 11월2일 입구로부터 3700여 미터 지하 갱도에서 발파사고가 일어나

1명이 죽고 2명이 크게 다쳤다. (사진 출처: 참뉴스)


해방 이후 우리나라 석탄산업은 국가주도기(1945~56), 고속성장기(57~66), 침체기(67~73), 안정발전기(74~86), 정책수요기(87~현재) 5기로 나뉜다. 주에너지원으로서 석탄의 안정 공급이 정부의 핵심 과제였던 국가주도기 후반에 민간자본의 참여가본격화하고, 1960년 민영 생산이 국영 생산을 넘어선 뒤 사실상 석탄산업은 민간 영역으로 넘어왔다.

산업용 유연탄의 수입은 제1차 석유파동 이후 제철용에 한정되어 시작되었다. 이후 유연탄을 사용하는 화력발전소의 건설이 늘어나면서 유연탄 수입도 늘었다. 1982년 발전용과 비축용의 수입까지 석탄공사로 일원화했던 정부는 1997년 수입을 자유화했다. 석탄 수요는 해마다 늘고 있지만 해외 석탄의 공급이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기에 가능했다.

우리나라 석탄산업의 역사를 돌아보면 공기업(대한석탄공사)의 역할은 국가주도기에만 시장지배적이었을 뿐 1960년 대 이후엔 민간부문으로 주도권이 넘어왔고, 현재는비축업무와 국내 생산 유지 보호 업무, 해외 탄광 개발로 제한되고 있다. 그러나 석유파동 등 공급 위기 시에는 증산과 수급 조정을 위해 공기업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주었다.

세계 최대의 석탄 수출항 남아공의 리차드베이. 우리나라는 연간 1억2600톤의 석탄을수입한다.

현재 정부는 2017년 전남 화순광업소, 2019년 태백 장성광업소, 2021년 삼척 도계광업소를 폐광한 뒤 석탄공사를 폐업하는 방안을 검토한다고 한다. 2016년 6월13일 낙동강의 발원지 황지연못에는 1000여명이 태백시민이 모여 ‘대책 없는 석탄공사 폐업반대 및 강원랜드 책임 이행’을 촉구하는 대정부 투쟁 선포 및 출정식을 열었다.

정부의 이 같은 정책 방향은 세계 석탄 시장의 수급이 장기간 안정적으로 유지될 것이라는 판단에 근거한 것이다. 하지만 에너지 위기는 언제든 닥칠 수 있다. 우리는 석탄산업을 축소하다가 에너지 위기로 다시 증산에 나선 경험을 이미 두 차례나 한 바 있다. 국내 탄광은 경제성이 떨어져 더 이상 유지하기가 어렵다면 최소한 북한과 해외 석탄자원 개발을 시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조직은 유지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공기업이든 민간기업이든 간에.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