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神明 ]
요약 어떠한 일에 신나게 빠져들거나 즐겁게 일을 할 때와 같이 단기적으로 삶에 만족할 때 사용하는 말
주요용어 한(恨), 정(情), 문화 심리학, 긍정 심리학
목차
1. 개요
2. 신명의 특성
3. 신명의 상태
4. 신명의 기능
5. 신명의 발생
6. 한과 신명의 관계
7. 몰입(flow)과 신명
8. 쟁점 및 한계
9. 현실 응용 및 시사점
1. 개요
신명은 한국의 대표적인 긍정적 정서로서 예부터 한국 문화와 한국 사람들을 이해하는 중요한 개념으로 다루어져 왔다. ‘신명 난다’, ‘신바람 난다’ 등은 한국 사람들이 어떠한 일에 특히 신나게 빠져들거나 즐겁게 어떤 일을 할 때, 즉 단기적으로 삶에 만족하고 있을 때 사용하는 말이다. 이때 ‘신바람 난다’는 말은 주로 어떤 특정한 사건이나 일과 관련하여 쓰이지만, ‘신바람 나게 산다’는 식으로 사용되면 사는 것이 즐거울 정도로 매사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또한 어떤 어려움도 거뜬히 극복할 수 있도록 역동적으로 동기화되어 있는 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2. 신명의 특성
한국인의 신명에 대해서는 다양한 시각과 입장에 따른 많은 견해가 있다. 어떤 연구에서는 신명의 역사적, 문화적 의미에 중점을 두고, 어떤 연구에서는 신명의 동기적인 면이나 상태적인 측면을 부각했으며, 또 다른 연구는 신명이 가진 잠재력을 조직문화의 측면에서 논하기도 했다. 이러한 모든 견해가 신명이라는 개념을 설명하는 데 어느 정도의 역할을 해온 것이 사실이지만, 기존 관점만으로는 신명이 가진 심리적 과정과 의미들을 통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이해하기에 무리가 따른다. 따라서 한민(2008)은 신명을 ‘문화적인 정서’로 간주하고, 신명 상태의 정서와 신명을 경험하게 되는 과정들을 찾아 분석하여 신명에 대한 포괄적인 심리적 과정을 밝히려 시도했다.
3. 신명의 상태
신명은 보통 집단적으로 경험되며 그에 따라 특정한 양상을 띠는데, 그러한 신명의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신명은 강렬한 정서적 경험이다. 한민(2008)에 따르면 신명 상태에 대한 묘사는 또한 전통 예술, 특히 한국무용 연구들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들 연구에서 나타나는 신명의 개념은 민속학, 한국학 분야의 그것과 맥을 같이한다. 그러나 전통 예술 분야에서의 신명 관련 연구들은 무용수들의 개인적, 현상학적 경험의 질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오율자(1994)는 춤에서 나타나는 신명을 인간 본연의 심과 신이 혼연 일체된 인간 체험의 전형이라 보고, 무용가들에 대한 심층 면접을 통해 신명 경험의 요소를 13개 범주로 정리했다.
(1) 전체로서의 세계인식, (2) 완전한 집중, (3) 체험 대상의 본질 자각, (4) 충족한 인식, (5) 일상적 자아의 초월, (6) 자기확신적 체험, (7) 시공의 특별한 인식, (8) 선택성과 당위성의 용해, (9) 완전함의 자각, (10) 자연스러움, (11) 경이로움과 감탄의 체험, (12) 이원론적 인식의 용해, (13) 공포감의 사라짐이 그것이다. 유진과 김장우(2004)는 한국무용수들에 대한 심층 면접을 바탕으로 신명 경험의 차원을 ‘일체감’, ‘몰입’, ‘쾌락’, ‘용해’, ‘초월’ 등으로 보고했다.
한국무용 전공자들이 밝히고 있는 이러한 신명 경험의 내용은 김열규가 말한 신령과의 일체감, 권능감이라는 종교적 해석 외에 경험적이고 현상학적인 방법에 의해 신명 상태의 질적인 특징을 정리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하지만 한국무용 분야의 연구들은 일반적인 신명 경험이라기보다는 무용수 개인의 경험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적용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닌다. 그러나 신명 상태의 정서는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정서와는 명확히 구분되는 특수하고 강렬한 정서라는 점은 분명하다. 또한 그것은 환희와 감격, 쾌락 등의 긍정적 정서이며, 일체감 또는 초월감 등 이차적 정서를 포함하여 이후의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신명의 두 번째 특징은 신명의 정서가 주변 사람들에게 빠르게 전이된다는 점이다. 김열규(1982)는 이러한 전이를 ‘신명의 감염 현상’이라 말하고 있다. 이 같은 감염 현상은 풍물놀이 현장이나 마을굿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최근의 월드컵 열풍 역시 신명의 감염이라는 특징을 잘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전이의 결과로 신명은 보통 집단적으로 경험된다. 신명이 집단적 양상을 보이는 이유는 우선 한국의 역사, 문화적 배경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김원호(1999)는 집단 신명은 괜히 신이 나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계급적 울타리 속에서, 그리고 나름의 삶의 규율 속에서 일상을 주고받으며 어려운 삶의 조건 내에서도 희로애락의 삶을 공유하는 오랜 인간적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고 했다. 그러한 관계 속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은 곧 공동운명체로서 삶을 함께한다. 특히 삶을 어렵게 하는 고난을 만났을 때, 그것은 공동체의 고난이 되며 이를 함께 헤쳐 나갈 때 신명은 공동의 신명이 되는 것이다(채희완, 1985).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신명이 집단적으로 경험되는 점에 대한 설명이 될 수는 있지만, 한 사람의 신명이 다른 사람에게로 옮겨지는 현상에 대한 설명으로는 미흡한 점이 있다. 신명이 집단적 전이의 어떤 개인으로부터 시작되었든, 집단적으로 경험되었든 간에 신명은 함께 신명을 경험하는 이들에 의해 공감, 공경험(co-experience)되고, 자신의 감정을 상호 확인(mutual confirmation)하는 피드백을 거쳐 더욱 증폭되는 과정을 따를 것이다(한민, 2008).
신명 현상의 세 번째 특징은 ‘난장성’이다. ‘난장’이란 여러 사람이 이리저리 뒤섞여 마구 떠들어대거나 덤벼서 뒤죽박죽이 된 곳, 또는 그러한 현상(『새우리말 큰 사전』 11판, 1993)을 일컫는다. 신명의 난장은 인류학에서 일컫는 ‘오지(orgy)’, 즉 제의적 광란이다. 이상일(1981)은 한국인들은 아무리 즐거운 놀이라 해도 난장을 벌이지 않으면 신명이 나지 않으며, 따라서 의도적으로 난장을 벌이고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린 다음, 혼돈 속에서 신명을 찾으려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견해는 최준식(2002) 등에 의해 뒷받침된다. 그는 전통 예술 전반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한국인의 미의식은 어떤 틀이나 격식을 거부하는 자유분방함이라고 주장하며, 그 원인을 한국인의 토속 종교인 무교(巫敎)에서 찾았다. 신명 역시 무교의 종교적 체험에 그 기원이 있는 만큼, 난장성은 신명 현상의 중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난장을 벌이고 난장판을 피우는 것으로 신명은 걷잡을 수 없이 폭발, 증폭된다. 신명의 상태에서 사람들은 평소에는 감히 할 수 없었던 일, 일상생활의 질서에 억눌렸던 일들을 하게 된다.
신명 상황에서 사람들은 평소 가슴에 맺힌 것들, 억눌려 응어리진 것들을 격식에 얽매임 없이 일시에 발산한다. 월드컵 당시 거리 응원에 나선 이들은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함성을 지르며, 처음 보는 사람들과 거리낌 없이 어울리고, 차량 위에 올라서는 등 평소에는 하기 힘든 행동을 보였는데, 이러한 행동들이 바로 신명의 중요한 특징인 난장성을 구성한다고 할 수 있다.
4. 신명의 기능
신명의 일차적인 기능적 의미는, 평소에는 할 수 없는 감정의 표출이 가능하다는 데 있다. 신명에서의 난장은 아노미적인 혼돈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약속된 무질서로 일상생활에서 쉽게 할 수 없는 감정 표현과 행동들이 허용되는 현장이다. 여기에서 신명의 기능적인 측면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문화적 무질서 상태는 이전의 삶에서 일어났던 여러 갈등 때문에 빚어졌을 욕구 불만의 훌륭한 배출구로 작용한다. 그것은 가난과 핍박의 억눌림에서의 해방을 뜻하며, 맺힌 한(恨)의 상태에서 풀린 자유의 상황으로 전환하게 되는 계기이기도 하다.
이어령(1978, 2003)은 한국의 문화를 ‘푸는 문화’로 규정하면서, 한국 문화에서 한(恨)이 ‘맺히는’ 것이라면 신명은 맺힌 것을 ‘푸는 것’이라 했다. 이규태(1991) 역시 한국 문화는 분풀이, 살풀이 등 응어리를 푸는 문화이며 맺힌 것이 풀어지는 상태를 신바람, 즉 신명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한풀이가 바로 신명이 갖는 첫 번째 기능이라 할 수 있다.
신명의 두 번째 기능은 일차적인 신명 경험에서 비롯된 이차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 신명으로 인해 응어리진 갈등을 풀어낸 뒤 도달하게 되는, 생명 에너지가 그득하게 충전된 상태, 창조적 에너지가 거칠 것 없이 분출하는, 억눌려 있던 잠재력이 극대화되어 나타나는 순간이다(채희완, 1983). 신명을 한국인의 중요한 특징으로 묘사하고 있는 연구자들은 모두 이러한 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규태(1991)는 신바람은 흥으로도 나타나고 희열로도 나타나며 눈물로도 나타나지만 논리적으로 따져지지 않는 저력으로도 나타난다고 했다. 이를테면 정상적인 사람의 노동력은 1+1=2가 되지만 신바람이 난 사람의 노동력은 1+1=3이라는 등식이 성립된다는 것이다. 한국 문화의 신바람에 주목한 요시카와 료조(吉川良三, 2001) 역시 신명 상태에서는 일정 조건만 갖춰지면 ‘평상시의 자기 능력으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불가사의한 힘이 치솟아 오른다’는 점을 강조한다.
신명의 이러한 측면은 잠재적인 에너지라는 측면에서 경영학 분야의 관심을 끌었다. 과거 이면우(1992)나 이장우, 이민화(1997) 등에 의한 ‘신바람 경영’은 기업 조직에서 조직원들의 신명을 이끌어낼 수 있다면 업무의 효율과 직무 만족의 측면에서 엄청난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5. 신명의 발생
‘일반적 의미의 신명’은 많은 학자들에 의해 빈번하게 거론된 것으로 한(恨)과 함께 언급되는 신명이다. 민속학 또는 한국학 분야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의 견해에 따르면, 신명은 한(恨)의 대척점에 서 있는 개념이다(김열규, 1982; 이어령, 1978, 2003; 이규태, 1991; 조동일, 1997 등). 즉 한이 풀림에 의해서 신명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김열규(1982)는 ‘원한(怨恨)-정(情)-신명(神明)’의 역학관계로써 한과 신명의 관계를 설명했다. 김열규는 이들의 관계가 직선적 관계가 아닌 정을 중심으로 하여 양 옆에 원한과 신명이 존재하는 삼각형의 구도로 파악한다<아래 그림>. 즉, 정의 파탄이 원한을 부르고 부서진 정의 회복이 신명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김열규가 말하는 ‘정(情)’의 의미는 명확하지 않다. 그는 한과 신명을 연결하는 정이 대인관계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라고 전제하지만, 한편으로 대인관계에서의 정을 이야기하는 데 상당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정, 원한, 신명의 관계 (한민, 2008)
즉, 정은 가족 중심적인 마을 공동체에서 성립되었으며, 그 정이 파괴되고 회복되는 데에서 한과 신명의 관계를 유추하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한과 신명의 발생을 정에서만 찾는 것은 한계가 있다. 물론 정의 생성과 파탄에 의한 한과 신명도 존재할 수 있겠지만 보다 일반적인 개념화를 위해서는 한에서 신명으로의 전환을 설명하는 또 다른 변인을 고려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또한 조동일(1997)은 진정한 신명이란 한을 극복하는 동기에서 나온다고 보았는데, 즉 한은 그 상태에서 정지된 것이 아니라 ‘풀어야 하는 것’이고 한이 풀리면 신명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한풀이의 요구에서 출발하지 않은 일상적인 맥락에서의 ‘신남’은 진정한 신명이라 할 수 없다. 이와 같이 ‘풀어야 하는 것’이 한이고, ‘풀린 상태’가 신명이라는 생각은, 신명을 연구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인식으로 보인다.
이러한 인식은 전통 예술 분야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조향(1987)은 무속에 근간을 둔 전통 춤 살풀이의 춤사위를 분석하여 춤 동작에서의 한과 신명의 구조를 언급하고 있으며, 나윤선(1991)은 살풀이, 무속춤, 탈춤 등을 예로 들면서, 그 형식과 내용서 한과 신명이 어떻게 표현되는가를 분석했다. 또한 활자나 영상매체 등을 통해 자주 접하게 되는 전통 예술인들이나 연구자들의 구술 등을 통해서도 한과 신명에 대한 공통적인 인식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에서, 한과 신명의 관계가 단지 몇몇 학자들의 통찰에 근거한 주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인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문화적인 인식이라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한민(2008)은 한이 발생하는 상황이 통제감의 상실을 의미하며, 통제감의 상실은 자기 가치감의 손상 및 그에 따르는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진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많은 사람들은 한과 더불어 한국이 겪어 온 수난의 역사를 언급한다. 한국인들이 과거 역사 동안 수천 회에 이르는 외국의 침략과 탐관오리들의 수탈, 신분제도의 불합리성 등으로 수난을 겪어 왔기 때문에, 한은 한국인의 심리에 깊숙이 뿌리 박힌 민족 정서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6. 한과 신명의 관계
6.1 직접적 한의 해소
그렇다면 한과 관련 있다고 여겨지는 신명의 의미 역시 파악할 수 있다. 한국인들에게 한이 자기 가치의 손상을 의미한다면 신명은 손상을 입은 자기 가치가 회복되는 상황과 관련될 것이다. 일차적으로, 신명은 외부로부터의 억눌림이 사라지거나 부당하게 당했다는 억울한 감정들이 해소되었을 때 발생한다. 이를테면, 오랜 일제의 지배를 벗어나 광복을 맞이한 사람들의 마음 상태나 마침내 이도령을 상봉한 춘향이의 심정을 신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혀 온 억울함과 부당함을 일거에 해소할 전환적 사건이 발생하는 때가 한과 관련된 신명의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이때는 자기 자신의 절박하고 불행한 상황에 대한 자기 인식이 전제된다. 바꾸기 어려운 불행한 상황이 전환적 사건을 만나 일시에 역전되었을 때 경험되는 환희의 감정이 바로 신명이다. 이러한 감정은 전환적 사건 자체가 주는 일차적 기쁨과, 그러한 기쁨의 감정이 과거 불행했던 시절의 자신의 모습과 겹쳐지며 자기의 입장에서 재조망되는 이차적 감정(예를 들어, 뿌듯함)이 혼재되어 있다. 이러한 전환적 사건의 예로, 부당한 피해의 원인 제공자의 소멸(광복, 소송에서의 승소 등)이나, 오랫동안 염원하던 소원의 성취(시험 합격, 승진 등)를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상황, 맥락에서 경험되는 신명의 경우에 있어서 ‘한의 해소→신명’이라는 도식은 쉽게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도식이 모든 경우에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한이라고 말할 수 있는 부당한 피해의 기억과 억울함을 일거에 해소해줄 전환적 사건이 발생할 확률은 사실상 극히 작으며 일상적으로 쉽게 또 자주 경험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하지만 역사, 문화적 맥락 또는 한국의 전통적 언어 관습에 비추어 볼 때, 신명은 반드시 전환적 사건이 전제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자주 경험되는 것처럼 보인다.
대표적으로 전통적인 축제(마을굿)에서의 신명이 그 예이다.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마을굿은 전통적으로 신명을 언급하는 중요한 상황으로 묘사된다(채희완, 1983; 김원호, 1999 등). 그러나 마을굿에서 신명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모두 자신들의 한이 해소되어서 신명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전환적 사건의 발생을 통한 한의 해소 이외에도 신명이 발현될 수 있는 경로가 존재한다는 가정이 가능하다.
6.2 간접적 한의 해소
한의 직접적인 해소에서 기인하지 않는 또 다른 유형의 신명은 우리 의식, 공동체 의식에서 비롯된다. 한국인들에게 ‘우리’는 나와 타인의 경계가 약화되는 탈자기적인 의미가 강하다(최상진, 최수향, 1990; 조윤경, 2002). 즉 저마다 독특한 개성을 지닌 개인들의 집합으로 이해되는 서구의 우리나, 집단에 귀속되어 개인의 개성이 약화되는 일본의 우리와는 달리, 한국인의 우리 의식은 정과 일체감을 기본으로 한 인간관계성 우리라고 할 수 있다(최상진, 1993). 한국 문화에서 신명의 예로 자주 인용되는 명절 등에 흔히 접할 수 있는 한국의 전통 놀이나 전통 예술은 바로 이러한 우리 의식과 관련된다. 어떠한 집단에 속했다는 소극적 안도감과 성원들의 처지와 상황을 공감하는 데서 오는 동병상련(同病相憐)의 감정, 우리는 하나라는 일체감에서 오는 기쁨 등은 신명을 위한 전제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우리 의식이 바로 신명으로 이어진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경우에는 어떠한 계기가 필요하다. 물론 우리 의식을 가진 이들에게 공통되는 전환적 사건과 같은 계기가 있다면 신명이 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특별히 불행의 원인 자체가 제거되는 전환적 사건이 일어나지 않아도 어떠한 계기(명절이나 절기)에 의해 ‘우리’라는 정체성을 확인하게 될 때, 신명이 발생한다. 이러한 경우, 개개인 또는 집단적으로 가지고 있을 한의 원인은 직접적으로 해결되지 않지만, 대신에 마을굿이나 가무, 놀이와 같은 방식으로 간접적인 방식으로 한의 감정을 정화하는 과정이 뒤따른다.
이때, 사람들은 주위 사람들과의 동질감과 소속감 및 그들과 함께한다는 기쁨 등을 표출하게 된다. 보통 우리 의식을 재확인하기 위한 계기는 일상적인 날이 아닌 명절이나 잔치 등의 특별한 날이 되기 쉽다. 그런 날에는 상대적으로 감정과 행동의 표현이 자유롭다. 사람들은 그러한 계기를 통해 평소에 쌓인 자신의 감정을 해소하게 된다. 이렇게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는 데에 신명의 기능이 있다. 앞서 논의한 전환적 사건의 발생에 의한 신명의 경우에서도 억눌린 감정(한)의 해소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조동일(1996, 1997)은 이러한 신명의 특징을 ‘신명풀이’라 이름하고 한국의 전통 예술, 특히 탈춤에서 나타나는 신명 풀이의 원리를 카타르시스와 비교했다. 카타르시스는 문학이나 극(비극)에서 주로 언급되는 개념으로 관객의 마음에 쌓인 부정적 감정들을 배설하여 정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감정의 배출에 따른 해소 또는 정화라는 측면에서 카타르시스와 신명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마광수(1984, 1988) 역시 문학이나 연극에 국한된 의미에서가 아닌, ‘스트레스를 푼다’ 등 일상적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는 카타르시스의 실제적인 기능, 즉 축적되고 억압된 정서의 대리적 배설이 갖는 신체적, 정신의학적 효용을 주장한 바 있다. 그렇다면 신명에 대한 논의에서 공통적으로 언급되고 있는 한은 신명을 통해 분출되는 억압되고 축적된 부정적 정서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그것이 직접적인 사건의 발생을 통해 표출되는가, 아니면 또 다른 과정(우리의식을 통한 특정한 계기의 조성)에 의해 표출되는가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첫 번째는 한의 원인을 제거하는 전환적 사건의 발생과 그에 뒤따르는 신명이고, 두 번째는 한의 원인은 변하지 않은 상태에서 한과는 다른 차원의 동기와 계기에 의해 신명이 조성되는 경우이다. 후자에서 한은 우리 의식의 재확인 또는 강화라는 목적에 의해 의도적으로 조성된 신명에 의해 정화된다. 이 경우, 한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할 수는 없지만 강렬한 한의 감정들은 신명에 의해 파생된 긍정적인 감정들에 의해 순화되거나 약화되고, 한에 집중되었던 마음이 다른 곳으로 분산됨으로써 사람들은 마음의 고통을 덜고 새로운 생활에 집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7. 몰입(flow)과 신명
한민(2008)은 신명에 대한 전통 예술, 특히 한국무용 전공자들의 경험을 다룬 연구들을 통해 이들에게 신명이 무용수 개인에 초점이 맞춰진 경험이라는 점과 행위자의 숙련도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점 등에서 긍정 심리학의 주제 중 하나인 몰입(flow)과 유사한 특성을 보인다고 정리했다. 또한 최초로 몰입을 개념화한 칙센트미하이(Csikszentmihalyi, 1975)가 예로 든, 운동선수들이 느끼는 ‘몰아일체의 상태’, 신비주의자들이 말하는 ‘무아지경 또는 황홀경(ecstasy)’, 예술가들이 경험하는 ‘미적 환희(aesthetic rapture)’ 등의 몰입 경험에 대한 묘사는 김열규(1982)가 말한 접신 상태와 유사한 경험 및 한국무용 전공자들이 밝히고 있는 신명 상태에 대한 묘사(오율자, 1994; 유진, 김장우, 2004)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주장했다.
7.1 몰입 경험
몰입(flow)이란 외부적인 보상이 없더라도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autotelic)’ 행동을 통해 얻는 경험을 의미하며, 그 행동에 시간과 공간을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푹 빠져 있는 상태를 지칭하는 개념이다. 이러한 몰입은 크게 세 가지 개념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구체화되었다(노준석, 2003). 첫째는 하위징아(Huizinga, 1955)의 ‘놀이(play)’ 개념이다. 하위징아는, 놀이란 참여자를 열렬히, 완전히 몰입하게 만드는 황홀하고 매력적인 것으로, 사람들은 놀이 자체가 보상이 될 때 자신의 잠재력을 활용하게 되고 자유로움을 느낀다고 했다(칙센트미하이, 1975).
둘째는 데시(Deci, 1975)의 내재적 동기 이론이다. 그는 인간 행동의 기저에 있는 동기를 내재적 동기와 외재적 동기로 나누는데, 내재적 동기는 행동 자체가 목표가 되고 거기서 즐거움을 얻으려는 동기를 의미하고, 외재적 동기는 행위 자체의 즐거움이 아니라 외적인 보상이나 처벌에 의한 것을 뜻한다(한성열, 1995). 칙센트미하이(2000)는 이러한 내재적 동기의 목적이 개인 내적인 경험이며, 행위 자체에 완전히 몰입한 ‘최적 경험 상태’라고 말하고 있다.
몰입 개념에 영향을 미친 세 번째 개념은 매슬로(Maslow, 1970)의 욕구 위계 이론의 마지막 단계인 자아 실현, 최고 성취, 초월성이다. 자아 실현 및 최고 성취는 자아의식(self-consciousness) 없이 완전하게 집중하고 몰두하게 되는 개인적 경험의 순간이라는 측면에서, 초월성은 몰두하거나 매혹되거나 어딘가에 집중할 때 자기 의식을 하지 않게 된다는 측면(Maslow, 1970)에서 몰입 경험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7.2 몰입과 신명의 공통점과 차이점
몰입과 신명의 일차적인 유사성을 찾을 수 있는 곳은 바로 몰입 경험의 특징과 신명 경험에 대한 묘사 부분이다. 최적 경험인 몰입의 상태와 신명 경험을 묘사하는 글들은 여러 부분에서 유사한 성격으로 판단할 소지가 많다. 우선, 한국의 신명은 엑스타시에 가까운 경험으로 이해되고 있는데 이는 칙센트미하이(1975)가 묘사한 ‘무아지경 또는 황홀경’이라는 표현과 유사하다. 그 밖에도 전통 예술 분야에서 신명 경험을 묘사한 부분들을 보면 몰입 경험과의 관련성이 더욱 두드러진다.
오율자(1994) 및 유진과 김장우(2004) 등이 제시한 신명 경험의 특징인 초월성이나 이원론적 인식의 용해, 자기확신적 체험 등도 칙센트미하이가 밝힌 몰입의 상태와 유사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더욱이, 오율자(1994)는 전통 춤에서 경험되는 신명은 무용수의 개인적 경험이며 신명 경험을 위해서는 기술적 숙련도가 전제되어야 함을 덧붙였는데, 신명의 이러한 점은 과제의 난이도와 숙련도의 함수로 표현되는 몰입의 성격과 매우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몰입과 신명은 동일한 심리상태를 나타내는 것인가? 쉽게 그렇다고 단정지을 수 없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 이유는 몰입과 유사한 성격을 갖는 신명에 대한 묘사는 주로 전통 무용 전공자들에게서 보고되는 것으로 민속학, 한국학 분야에서 언급되는 한과 관련한 신명과는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전통 무용 전공자들이 경험하는 신명은 어떠한 도전 과제(무용 작품)를 수행하는 개인의 경험이라는 측면에서 몰입과 유사한 면이 많다. 하지만 다른 맥락에서의 신명은 몰입과는 구분되는 다른 특징들을 지닌다. 가장 극명한 예로, 전통 무용수들의 신명에 대한 묘사에서는 일반적으로 신명 현상의 대표적 특징이라 생각되는 집단적 전이나 약속된 무질서 등과 같은 특징이 나타나지 않는다.
두 번째는 몰입과 신명이라는 두 개념이 파생된 역사, 문화적인 배경이 다르다는 점이다. 칙센트미하이 (1997)는 몰입 개념이 어떠한 배경에서 출발하고 있는가를 언급한 바 있는데,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서구 문화에서는 전통적으로 일은 하지 않을수록 좋은 것이라는 문화적 관념이 있었는데, 산업혁명과 그로 인한 기술의 발달 등으로 인해 일의 성격이 변화했고, 그로 인해 생활 방식 및 일에 대한 관념 자체가 변화하여 현대로 올수록 일 자체에서도 즐거움을 찾으려는 시도가 나타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일과 여가에 대한 전통적인 생각에 변화가 왔고, 그러한 시점에서 제기된 것이 몰입 개념이라는 것이다. 즉, 전통적으로 기피의 대상이었던 일에서 즐거움을 발견하게 되고 그에 대한 설명을 하기 위한 것이 몰입 이론인 것이다.
하지만 신명은 전혀 다른 맥락에서 파생된 개념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신명은 기원적으로 종교적 체험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김열규, 1982), 사람들의 집단적인 동기(한풀이 등)와 관련하여 역사, 문화적으로 경험되어 왔다. 따라서 몰입과는 달리 그 발생 조건에서도 명확한 목표나 도전과 기술의 균형 등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집단적인 동기와 같은 또 다른 조건에 의해 발생하는 것으로 보인다.
세 번째로 발현 형태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몰입은 어떠한 일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을 전제로 한다. 물론 어떠한 집단이 동시에 몰입 경험에 이르는 경우도 있을 수 있겠지만, 몰입을 경험하는 과정과 그 결과는 개인적으로 경험되는 성질의 것이다. 그러나 신명은 반드시 집단적인 경험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집단적으로 전이되기 쉽다는 특성이 있다. 전통 무용 전공자의 경험을 제외한 신명 경험이 풍물 놀이판이나 월드컵의 거리 응원에서처럼 강렬한 정서적 경험과 역동적인 행동 양식을 수반하는 반면, 몰입은 체스 선수나 의사 등의 경험에서처럼 상대적으로 정적(靜的)인 정서 및 행동으로 나타난다.
몰입과 신명은 그 기원과 발현 양태 등으로 미루어 서로 다른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전통 무용 전공자들의 경험에 대한 연구들에서 유추하건대, 한국인들이 ‘신명’이라 부르는 현상 및 경험 중에는 몰입과 유사한 성격을 가지는 유형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 또한 문헌으로 나타난 신명 외에도 일반인들이 경험하는 수준에서는 더욱 다양한 상황이 있을 수 있다. 따라서 몰입과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고 여겨지는 신명을 비롯한 신명의 유형에 대한 더 구체적인 논의는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8. 쟁점 및 한계
신명이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개념인 데 반해 다양한 상황 맥락에서 나타나는 신명에 대한 연구는 아직 많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다. 따라서 전통 문화나 전통 예술, 문학 등의 맥락이 아닌 실생활에서 사람들이 경험하는 신명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들이 더 필요하다.
또한 몰입과 유사한 양상이 있는 신명을 비롯해 다양한 현상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가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9. 현실 응용 및 시사점
신명에 대한 연구는 한국인이 한을 해소하는 과정과 한국인의 행복 경험에 대한 이해를 도움으로써 한국인의 삶의 질과 관련된 연구들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조직 장면이나 교육 현장 등에서 동기 부여를 위한 전략 개발이 도움이 될 것이다.
집필 : 모상현(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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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제공처 정보
심리학용어사전 2014. 4.
제공처 한국심리학회 http://www.koreanpsychology.or.kr
[네이버 지식백과] 신명 [神明] (심리학용어사전, 2014. 4., 한국심리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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