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현
29 August ·
'위안부'는 피해자가 한국인이므로 일단은 한국인의 문제다. 그러나 국내 기자들 중에 '위안부 전문기자'는 없다. 같은 선상에서 일제가 강요한 '창씨개명'도 피해자는 한국인인데 연구서는 일본에서 먼저 나왔다. 또 일제말기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학도병'에 관한 연구서는 재일교포 강덕상 선생이 처음 출간했으며, 서울시내 등에 남아 있는 일제잔재 건물들의 답사기를 처음 쓴 사람은 1959년생 일본인 사진작가였다. 일본에는 한국인의 성씨만 연구하는 사람이 20명이 넘는다는 얘기를 80년대 후반에 들은 적이 있다. 우리는 왜 우리 문제 연구에 허술할까? 이래놓고도 우리가 일본을 극복할 수 있을까?
군함도에 위안부가 살았을까
위안부 취재기 | "일본에는 위안부 전문기자가 있다. 아사히신문 마쯔이 야요리 기자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한국에는 위안부 전문기자가 없다. 젊은 기자들이 위안부 취재를 하다가 다른 부서로 발령받으면 위안부 취재를 멈춘다. 깊이 있는 위안부…
BRUNC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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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ni Kim shared 정운현's post.
30 August ·
다양한 연구가 필요하다.
산업위안부는 일본인 여성이 대다수였을거라고 추정된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했을 시기에 이미 신도시인 하얼삔에는 직업을 가진 일본인 여성이 일본인 남성만큼 많았다.
개발도상에 있는 하얼삔과 같은 도시에는 어디에나 일본인 여성이 일을 하고 있었다.
절대적인 인구수에서도 조선인 여성은 적었지만 조선인 여성은 대개 임노동직업을 가지지 않았다.
성매매업에 종사하는 여성의 대부분이 일본인 여성이지만 성매수자는 국적이 따로 없었다.
하얼삔은 성장하고 있는 국제도시였다.
근대 아시아에서 여성에게 가장 흔한 직업은 성매매였다.
첫째 현금을 손에 쥘 수 있는 직업이 흔하지 않았다.
어린 여성이 애보기나 빨래하기로 벌 수 있는 돈은 그냥 자기 한 몸 건사하는 정도의 보수였고 가난한 가족을 돌봐야하는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기술을 배우지 않아도 되는 직업은 성매매가 유일하다시피 했다.
레미제라블의 팡틴을 연상하면 간단하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공장노동은 최소 1920년대 이후의 일이고 적어도 보통교육이 보급된 이후다. 그나마도 보통교육을 받고 공장노동을 할 수 있는 인구는 많지 않았다.
둘째 대부분의 어린여성이 인신매매형식으로 팔려왔기 때문이다.
인신매매로 팔려온 순간 빚더미에 앉아 있는 것이다.
내 한 몸 건사하면 충분한 입장의 여성이라도 빚더미에 앉아 있으면 성매매를 안 할 방법이 없다.
이건 지금 2017년에도 성매매 종사자들이 당하는 일과 동일하다.
여성에게 위안부는 결코 과거가 아니다.
1900년대 초기의 여성이 모두 위안부가 아니었듯이 2017년에 여성이 모두 성매매 종사자가 아니라도 비극이긴 마찬가지인 것이다.
플랫하게 평등하지 않은 세계에서는 끌려간 군위안부든 팔려간 성매매여성이든 성적 폭력에 고통받는 것은 다르지 않다.
근대가 얼마나 약자에게 폭력적인 환경이었는가를 조명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일본이 얼마나 야만적이었는가를 열심히 채집하는 일은 별로 의미가 없다.
그래봤자 그 채집된 정보는 정치인들이 싸우는 도구일 뿐이다.
심지어 근대 아시아에서 서구국가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쏙 빼고 일본과 한국의 대결구도로만 만들면 답은 영원히 나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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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Park Yuha, 오정환 and 25 others
Comments
Jini Kim 참고:1930년대초까지도 조선인 남자의 3,40% 여자의 10%정도만이 보통교육을 받았다. 그 보통학교교육의 총시간은 일본소학교교육의 절반수준이다. 조금씩 교육의 질과 시간은 개선되었으나 취학율은 쉽게 개선되지 않았다. 학교교육을 받아도 얻을 수 있는 질좋은 직업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1940년대 본격적으로 전쟁으로 돌입하자 인간을 자원으로 인식한 일본은 취학율을 올리려고 한다. 1940년대 들어 취학율은 43% 남자의 60% 여자의 25%가 된다.
Like · Reply · 3 · 30 August at 19:40 · EditedManage
Bum Choi 한국인 연구자가 없는 이유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죠. 위안부의 아픔을 느낀다, 이런 말들은 전부 거짓말이고 그냥 일본 욕하기 위해서만 흥분하는 거죠
Like · Reply · 3 · 30 August at 18:00Manage
Jini Kim 그 시대를 통틀어서 설명하려는 노력이 정말 적어요.
Like · Reply · 1 · 30 August at 18:08Manage
Bum Choi 제국과 식민지의 어쩔 수 없는 차이를 뼈저리게 느낍니다
Like · Reply · 30 August at 18:09Manage
Jini Kim Bum Choi 그렇게까지 위악적으로 말씀하실 거까지야;;;;;;
Like · Reply · 30 August at 18:14Manage
Bum Choi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서요
Like · Reply · 30 August at 19:57Manage
Jini Kim Bum Choi ㅠㅠ
Like · Reply · 30 August at 21:16Manage
박은하 Bum Choi 초면에 실례하지만...위안부 전문기자가 없는 것은 맞지만 연구자가 없다는 단언을 그렇게 자신있게 하시면 최신의 지적동향 탐구에 무관심한 걸 인증하시는 결과 밖에 되지 않습니다. 현재 괜찮은 젊은 위안부 연구자들이 대부분 비정규직, HK교수들이고, 그들의 연구성과가 대중매체에 반영되는 방식에 상당한 괴리가 있다는 것이 지금 문제적 상황의 원인이겠죠. 어쨌거나 이들은 대부분 역사학자, 사회학자고 저는 선생님이 크리틱칼에서 소녀상 글 관련, 좀 더 조형적 의미에서 제대로 비판해주길 바랬는데, 미술계 정치지형 정리만 하셔서 너무나 아쉬웠습니다. 이 문제에 관심 있는, 정말 다른 방향으로 논의가 전개되길 바라는 사람으로서 제대로 된 다음 글을 기다립니다.
Park Yuha Bum Choi연구자가 없지 않지만, 최근에야 여러명 나왔지요. 그 전에는 정대협관계자로 구술채록 도운 사람들중 박사학위자가 두어명. 최근에야 몇 사람 보입니다. 특히 반성해야 할 건 최소 20년 동안 남성 연구자는 거의 없었다는 거.
@박은하 그런 의미에선 " 연구자가 없다"는 건 위안부문제 사반 세기 봤을 때 틀리지 않는 말씀입니다. 90퍼센트 이상이 일본인 연구자. 부끄러운 일입니다.
Like · Reply · 1 September at 06:05Manage
Park Yuha 전에는 기업위안부하라고 했는데 이름이 바뀌었네요. 아무튼, 그곳에 조선인 기업 위안부 경우는 조선인 노동자가 있었기 때문에 필요시한 게 분명해 보입니다.
Like · Reply · 1 September at 06:09
29 August ·
'위안부'는 피해자가 한국인이므로 일단은 한국인의 문제다. 그러나 국내 기자들 중에 '위안부 전문기자'는 없다. 같은 선상에서 일제가 강요한 '창씨개명'도 피해자는 한국인인데 연구서는 일본에서 먼저 나왔다. 또 일제말기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학도병'에 관한 연구서는 재일교포 강덕상 선생이 처음 출간했으며, 서울시내 등에 남아 있는 일제잔재 건물들의 답사기를 처음 쓴 사람은 1959년생 일본인 사진작가였다. 일본에는 한국인의 성씨만 연구하는 사람이 20명이 넘는다는 얘기를 80년대 후반에 들은 적이 있다. 우리는 왜 우리 문제 연구에 허술할까? 이래놓고도 우리가 일본을 극복할 수 있을까?
군함도에 위안부가 살았을까
위안부 취재기 | "일본에는 위안부 전문기자가 있다. 아사히신문 마쯔이 야요리 기자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한국에는 위안부 전문기자가 없다. 젊은 기자들이 위안부 취재를 하다가 다른 부서로 발령받으면 위안부 취재를 멈춘다. 깊이 있는 위안부…
BRUNC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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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August ·
다양한 연구가 필요하다.
산업위안부는 일본인 여성이 대다수였을거라고 추정된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했을 시기에 이미 신도시인 하얼삔에는 직업을 가진 일본인 여성이 일본인 남성만큼 많았다.
개발도상에 있는 하얼삔과 같은 도시에는 어디에나 일본인 여성이 일을 하고 있었다.
절대적인 인구수에서도 조선인 여성은 적었지만 조선인 여성은 대개 임노동직업을 가지지 않았다.
성매매업에 종사하는 여성의 대부분이 일본인 여성이지만 성매수자는 국적이 따로 없었다.
하얼삔은 성장하고 있는 국제도시였다.
근대 아시아에서 여성에게 가장 흔한 직업은 성매매였다.
첫째 현금을 손에 쥘 수 있는 직업이 흔하지 않았다.
어린 여성이 애보기나 빨래하기로 벌 수 있는 돈은 그냥 자기 한 몸 건사하는 정도의 보수였고 가난한 가족을 돌봐야하는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기술을 배우지 않아도 되는 직업은 성매매가 유일하다시피 했다.
레미제라블의 팡틴을 연상하면 간단하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공장노동은 최소 1920년대 이후의 일이고 적어도 보통교육이 보급된 이후다. 그나마도 보통교육을 받고 공장노동을 할 수 있는 인구는 많지 않았다.
둘째 대부분의 어린여성이 인신매매형식으로 팔려왔기 때문이다.
인신매매로 팔려온 순간 빚더미에 앉아 있는 것이다.
내 한 몸 건사하면 충분한 입장의 여성이라도 빚더미에 앉아 있으면 성매매를 안 할 방법이 없다.
이건 지금 2017년에도 성매매 종사자들이 당하는 일과 동일하다.
여성에게 위안부는 결코 과거가 아니다.
1900년대 초기의 여성이 모두 위안부가 아니었듯이 2017년에 여성이 모두 성매매 종사자가 아니라도 비극이긴 마찬가지인 것이다.
플랫하게 평등하지 않은 세계에서는 끌려간 군위안부든 팔려간 성매매여성이든 성적 폭력에 고통받는 것은 다르지 않다.
근대가 얼마나 약자에게 폭력적인 환경이었는가를 조명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일본이 얼마나 야만적이었는가를 열심히 채집하는 일은 별로 의미가 없다.
그래봤자 그 채집된 정보는 정치인들이 싸우는 도구일 뿐이다.
심지어 근대 아시아에서 서구국가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쏙 빼고 일본과 한국의 대결구도로만 만들면 답은 영원히 나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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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ni Kim 참고:1930년대초까지도 조선인 남자의 3,40% 여자의 10%정도만이 보통교육을 받았다. 그 보통학교교육의 총시간은 일본소학교교육의 절반수준이다. 조금씩 교육의 질과 시간은 개선되었으나 취학율은 쉽게 개선되지 않았다. 학교교육을 받아도 얻을 수 있는 질좋은 직업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1940년대 본격적으로 전쟁으로 돌입하자 인간을 자원으로 인식한 일본은 취학율을 올리려고 한다. 1940년대 들어 취학율은 43% 남자의 60% 여자의 25%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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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m Choi 한국인 연구자가 없는 이유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죠. 위안부의 아픔을 느낀다, 이런 말들은 전부 거짓말이고 그냥 일본 욕하기 위해서만 흥분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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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ni Kim 그 시대를 통틀어서 설명하려는 노력이 정말 적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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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m Choi 제국과 식민지의 어쩔 수 없는 차이를 뼈저리게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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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ni Kim Bum Choi 그렇게까지 위악적으로 말씀하실 거까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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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m Choi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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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ni Kim Bum Choi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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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하 Bum Choi 초면에 실례하지만...위안부 전문기자가 없는 것은 맞지만 연구자가 없다는 단언을 그렇게 자신있게 하시면 최신의 지적동향 탐구에 무관심한 걸 인증하시는 결과 밖에 되지 않습니다. 현재 괜찮은 젊은 위안부 연구자들이 대부분 비정규직, HK교수들이고, 그들의 연구성과가 대중매체에 반영되는 방식에 상당한 괴리가 있다는 것이 지금 문제적 상황의 원인이겠죠. 어쨌거나 이들은 대부분 역사학자, 사회학자고 저는 선생님이 크리틱칼에서 소녀상 글 관련, 좀 더 조형적 의미에서 제대로 비판해주길 바랬는데, 미술계 정치지형 정리만 하셔서 너무나 아쉬웠습니다. 이 문제에 관심 있는, 정말 다른 방향으로 논의가 전개되길 바라는 사람으로서 제대로 된 다음 글을 기다립니다.
Park Yuha Bum Choi연구자가 없지 않지만, 최근에야 여러명 나왔지요. 그 전에는 정대협관계자로 구술채록 도운 사람들중 박사학위자가 두어명. 최근에야 몇 사람 보입니다. 특히 반성해야 할 건 최소 20년 동안 남성 연구자는 거의 없었다는 거.
@박은하 그런 의미에선 " 연구자가 없다"는 건 위안부문제 사반 세기 봤을 때 틀리지 않는 말씀입니다. 90퍼센트 이상이 일본인 연구자. 부끄러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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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Yuha 전에는 기업위안부하라고 했는데 이름이 바뀌었네요. 아무튼, 그곳에 조선인 기업 위안부 경우는 조선인 노동자가 있었기 때문에 필요시한 게 분명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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