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몇 번을 지더라도 나는 녹슬지 않아 - 식민지 전쟁 시대를 살아낸 할머니들의 노래
가와타 후미코 (지은이) | 안해룡 | 김해경 (옮긴이) | 바다출판사 | 2016-02-29
식민지 전쟁 시대에 일본으로 건너가 온갖 역경을 지고 살아온 재일 1세 할머니들을 직접 만나 그들의 삶을 선명하게 기록한 르포르타주. 파란만장이라는 단어조차 가벼이 느껴질 만큼 혹독한 세월을 지나온 이들이 여기에 있다. 말도 알아듣지 못하는 낯선 땅, 일본으로 건너가 어린 노동자로, 아내로, 어머니로, 여성으로, 식민지의 설움과 전쟁의 참혹성을 겹겹으로 견뎌낸 재일 1세대 여성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 책의 인터뷰이는 모두 29명. 그중 최고령자인 서맹순(1918년생) 할머니는 어린 노동자로 새벽 5시부터 공장에서 일했다. 안순자(1940년생), 박정란(가명, 1934년생) 할머니는 후쿠시마에서 원전 사고를 당했고, 박남주(1932년생), 김남출(1929년생), 하해수(1924년생) 할머니는 히로시마에서 원폭 피해를 입었다. 전쟁 통에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던 송신도(1922년생) 할머니는 위안소에서 잇달아 다섯이나 아이를 뱄고,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낫겠다 싶어 기차에서 뛰어내린 적도 있었다.
모두 극도의 빈곤을 겪었으며 민족 차별과 가부장제와 가정 폭력에 시달렸다. 대개 성인이 되기 전에 일본으로 건너갔고, 어린 노동자로 극히 낮은 임금을 받고 가내수공업 공장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할머니들의 수는 적었다. 배우고자 하는 열망은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그러나 지금도 글자를 읽지 못하는 할머니들이 꽤 된다.
이들의 이야기는 월간지 「세카이(世界)」에 '할머니의 노래(ハルモニの唄)―재일 여성의 전중.전후'라는 제목으로 2012년 6월 1회를 시작으로 2013년 5월까지 총 12회에 걸쳐(2012년 11월호 한 회를 제외하고) 연재되었다. 이들을 직접 찾아가 작은 것 하나 놓치지 않고 기록으로 남기려 애쓴 저자는 한국인도 재일 코리언도 아닌, 일본 여성 가와타 후미코이다.
서문 알아야 할 역사에 내딛는 첫걸음 9
#1 빨리 태어나서 손해를 봤어 17
길쌈을 배우려던 무렵 일본 공장으로 | 말도 모르면서 아이를 돌보고, 용케 해냈어 | 공장의 어린 노동자, 가혹한 환경 | ‘가난해서’와 ‘여자라서’ | 배우고 싶다, 그때도 지금도
#2 둥둥 떠가는 솥, ‘주워서 살았어’ 41
열일곱에 결혼해서 시동생들을 키웠어 | 가족 넷이 세상을 떠나다 | 장사는 말이지, 맛있으면 오는 거야 | 자식들에게도 하지 않았던 얘기들 | “두 손 든 거잖아” | 막걸리를 만들면 경찰이 잡아갔어 | 술 마시던 시어머니, 마시지 않던 남편
#3 대충 묻었어, 죽으면 죽은 채로 71
한 번이라도 방공호에 들어가지 않고 잠들어보고 싶었어 | 대충 묻었어, 죽으면 죽은 채로 | 빨리 전쟁이 끝났으면 좋겠다 | 흰 저고리에 행선지를 먹물로 써서 | ‘헌병 같은 일’을 하던 집에 얹혀살다 | 셋이 손잡고 도망가는데 왠지 한쪽 손이 무거워 | 알몸으로 어깨를 껴안고 따뜻하게 | 강에서 건진 검은 익사체가 둑 여기저기에
#4 히로시마 거리가 통째로 사라졌어 101
“엄마, 피 나와” “너도” | 피폭과 동시의 맞은 아버지의 ‘해방’ | 원폭 후유증이 어떤 건지는 몰라 | 의사도 모른다니 말이 돼? | 60년도 더 지나 나타난 원폭 피해
#5 겪을 대로 겪었지, 고생은 나의 힘 131
교실의 ‘오줌싸개 할멈’ | 남편은 도박에 찌들고, 혼자서 출산을 | 궁지에 빠진 남편의 거짓말 | 날마다 새벽 2시에 일어나 70인분의 밥을 짓다 | 중고 삼륜차로 폐품을 모으며
#6 밀항선을 탔다가 인생길이 틀어졌다 157
술렁술렁 안절부절, 재봉틀을 싣고 제주도로 | 내 몸으로 낳은 아이들을 데리고 | 도항 증명서와 전후 법적 위치 | 학교 다니고 싶어서 일본으로 | 죽으면 갈 테니 지금은 괜찮아
P.24 : 급여는 나오지 않았고, 간단한 옷만 제공되었다. 먹을 것이 부족한 빈곤 가정의 식구를 덜어주는 셈이라서 어린아이의 노동 대가는 침식으로 충분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여름 간편복 말고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기 때문에 맹순 씨는 집에서 나올 때 입고 있었던 조선옷이 헤지면 몇 번이나 기우고 기우면서 입고 다녔다. 하지만 한꺼번에 태운 유골을 이름에 맞춰 개인별로 수습할 여유는 없었다.
―서맹순 할머니 이야기
P.58 : “역사란 무서운 거예요. 나이 들어 말년에 아버지가 말했어요. 자식 열둘을 모두 훌륭하게 키우려고 했는데, 나라가 없어서 이 모양이라고.”
―김도례 할머니 이야기
P.73 : “경찰서 앞을 지나가는데 경관이 나와서 말이야. 먹물을 넣은 물총을 확 하고 옷에 쏘는 거야. 먹물은 지워지지 않으니까.” (………) “정신없이 일을 하고 있으면 말이야, 단속이 들어와. 저고리를 면도칼로 찢는 일도 있어. ‘기모노 입어’라면서 말이지. 조선 옷은 금지였어.”
― 박윤경 할머니 이야기
저자 : 가와타 후미코 (川田文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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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
저널리스트. 1966년 와세다대학 문학부를 졸업하고 출판사 근무를 거쳐 전업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일본의 전쟁책임자료센터’에서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오키나와에서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했던 배봉기 할머니에 관한 기록 《빨간 기와집―일본군 위안부가 된 한국 여성 이야기》(1987)는 장기간의 인터뷰를 통해 닫혔던 마음의 상처와 기억들을 올곧이 드러낸 작품이다. 이후 《황군위안소의 여자들》(1993), 《전쟁과 성―근대 공창제도.위안소제도를 둘러싸고》(1995), 《인도네시아의 ‘위안부’》(1997), 《수업 ‘종군위안부’―역사교육과 성교육의 입장에서 어프로치》(1998), 《위안부라 불리운 전장의 소녀》(2005)를 썼고, 공저로는 《‘종군위안부’를 둘러싼 30가지 거짓말과 진실》(1997), 《‘위안부’ 문제를 물어왔다는 것》(2010) 등 일본군 ‘위안부’에 관한 책들을 집필하면서 이 문제를 세상에 알리는 활동을 하고 있다.
역자 : 안해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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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
사진가이며 다큐멘터리 감독이다. 전시기획자 등 텍스트와 사진, 영상을 넘나들면서 작품을 만들고 있다. 1995년부터 한국, 중국, 일본 등에 있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사진과 영상에 담는 기록 작업을 했다. 다큐멘터리 영화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 <다이빙벨>을 감독했다. 현재는 일본에 있는 재일 한국인의 역사, 조선인이 관계한 일본 현지의 전쟁 유적을 사진과 영상으로 기록하고 있다. 저서로는 《북녘 일상의 풍경들》(현실문화, 2005), 역서로는 《몇 번을 지더라도 나는 녹슬지 않아》(바다출판사, 2016), 《가부키초》(눈빛, 2014), 《공습》(휴머니스트, 2008), 《미디어 리터러시》(커뮤니케이션북스, 2001) 등이 있다.
역자 : 김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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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
서울에서 태어났고, 1999년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프리저널리스트 집단 아시아프레스에 소속된 저널리스트로, 다큐멘터리 <조국을 바라보며―러시아 연해주 고려인 소녀의 여름>(NHK, 2006) 등을 발표했으며 <한국 저널리스트가 본 북한>, <동북아시아 교류를 어떻게 넓힐까> 등 일본 방송에 출연해 한반도 문제를 주제로 발표했다. 2004년부터 2010년까지 마이니치 신문사가 발행하는 시사주간지 <선데이 마이니치>의 ‘반도를 읽는다’ 코너에 한반도 관련 기사를 기고했다. 옮긴 책으로 《공습―인류가 하늘을 날면서 공습은 시작되었다》(2008)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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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야 에헤- 진 재판 괜찮아 좋아 그렇지만
몇 번을 지더라도 나는 녹슬지 않으니
여기 모인 분들 잘 들어요 두 번 다시 전쟁은 하지 말아주세요
도시코(송 씨의 일본 이름)는 지금도, 100년 살아도, 내일 죽어도
할 때는 한다. 돈이 없어도, 입을 것이 없어도, 장식품이 없어도
해내겠어. 이 정치가 거지들. 아, 힘내고, 아, 힘내고, 힘내
― 서문에서(송신도 할머니가 부른 노래)
일본군 ‘위안부’를 비롯한 재일 1세 할머니 29인의 목소리
어린 노동자, 아내, 어머니, 여성으로 겹겹의 고통을 견뎌낸 삶의 기록
이 책은 식민지 전쟁 시대에 일본으로 건너가 온갖 역경을 지고 살아온 재일 1세 할머니들을 직접 만나 그들의 삶을 선명하게 기록한 르포르타주이다.
파란만장이라는 단어조차 가벼이 느껴질 만큼 혹독한 세월을 지나온 이들이 여기에 있다. 말도 알아듣지 못하는 낯선 땅, 일본으로 건너가 어린 노동자로, 아내로, 어머니로, 여성으로, 식민지의 설움과 전쟁의 참혹성을 겹겹으로 견뎌낸 재일 1세대 여성들이 바로 그들이다.
고생 자랑 가난 자랑, “잘 견뎌왔어요”
전쟁을 겪은 세대는 80~90대 노년층이다. 일제 식민지 전쟁을 몸소 체험한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역사가 곧 우리의 역사이자 살아 있는 역사이다. 그러나 피해 당사자로서 직접 용기 있게 나선 ‘위안부’ 할머니들도 하나둘씩 세상을 등지고 기억해야 할 역사들도 말없이 사라지고 있다.
설사 이들이 살아 있어도 우리는 전쟁과 식민지 시대의 참상을, 사람의 입이 아니라 권력이 쓴 문자를 통해서 한 줄의 사건으로 접한다. 실상을 알리는 목소리가 외면당한 자리에 엉뚱한 발언들이 나서서 뒤덮는다. 그런데 이 책은 그렇게 눈감아왔던 ‘남성들이 말하지 않은’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자고, 특히 ‘일본인이야말로 반드시 알아야 할’ 역사를 기록하고 기억하자고 되뇐다.
이 책의 인터뷰이는 모두 29명. 그중 최고령자인 서맹순(1918년생) 할머니는 어린 노동자로 새벽 5시부터 공장에서 일했다. 안순자(1940년생), 박정란(가명, 1934년생) 할머니는 후쿠시마에서 원전 사고를 당했고, 박남주(1932년생), 김남출(1929년생), 하해수(1924년생) 할머니는 히로시마에서 원폭 피해를 입었다. 전쟁 통에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던 송신도(1922년생) 할머니는 위안소에서 잇달아 다섯이나 아이를 뱄고,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낫겠다 싶어 기차에서” 뛰어내린 적도 있었다. 박수련(1925년생) 할머니는 재일 코리언에게 특히 발병 비율이 높았던 한센병에 걸려 고생했다. 박정숙(가명. 1919년생) 할머니는 시집간 첫날부터 매를 맞았고, 남편이 유곽에서 만든 아이까지 대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며 살았다. 세 살 때 일본에 간 김분란(1927년생) 할머니는 혼자 아이를 낳고 직접 실로 양쪽을 묶어 탯줄을 잘랐다. 모두 극도의 빈곤을 겪었으며 민족 차별과 가부장제와 가정 폭력에 시달렸다. 대개 성인이 되기 전에 일본으로 건너갔고, 어린 노동자로 극히 낮은 임금을 받고 가내수공업 공장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할머니들의 수는 적었다. 배우고자 하는 열망은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그러나 지금도 글자를 읽지 못하는 할머니들이 꽤 된다.
이들의 이야기는 월간지 [세카이(世界)]에 ‘할머니의 노래(ハルモニの唄)―재일 여성의 전중·전후’라는 제목으로 2012년 6월 1회를 시작으로 2013년 5월까지 총 12회에 걸쳐(2012년 11월호 한 회를 제외하고) 연재되었다. 이들을 직접 찾아가 작은 것 하나 놓치지 않고 기록으로 남기려 애쓴 저자는 한국인도 재일 코리언도 아닌, 일본 여성 가와타 후미코이다.
직접 대면해 귀 기울여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의 소중함
가와타 후미코는 보육과 주택 문제, 농어촌 여성과 일본군 성폭력 피해자의 인생을 기록하고 취재하는 일본의 언론인으로서, 특히 빈곤과 성노예제 문제에 천착해왔다. 최초의 일본군 ‘위안부’ 증언자이자 지금은 고인이 된 배봉기 할머니를 오랜 세월 동안 만나 소통하며 그 이야기들을 꼼꼼히 기록하기도 했다. (그 기록의 결과물은 1987년 《빨간 기와집》이라는 단행본으로 출판되었으며 한국에도 번역되었다.)
일찌감치 노인들의 인생담을 경청하면서 깨달음을 경험했다는 저자는 글자를 읽지 못하는 할머니들이야말로 오히려 죽지 않은 생생한 언어를 쓴다고 말한다. 문자로 기록되지 않은 할머니들의 세계를 고스란히 담아내려 애쓴 흔적은 책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책이 보여주는 또 다른 미덕은 저자의 이런 태도와 연결되어 나타난다. 한 사람의 이야기마다 각각 한 권의 책으로 담을 수 있을 만큼 이 책에 실린 29인의 할머니들은 아주 솔직하고 상세히 인생담을 털어놓고 있는데, 이것은 이야기를 듣는 상대가 감응하지 않으면 쉽게 나올 수 없는 이야기들이다. 어떤 면에서는 ‘식은땀을 흘려가며’ 들을 만큼 같은 여성으로서 느끼는 연대감과 우정이 인터뷰에 응한 할머니들의 마음을 여는 온기로 작용했을 것이다.
저자는 조선어 표현을 포함해 재일 할머니들이 쓰는 입말을 가능한 한 그대로 옮기려 했음은 물론이고, 그들이 이야기하는 시점을 되짚어 정확한 사건 자료들을 찾아냄으로써 개인사의 기억이라는 씨줄과 역사상 사건이라는 날줄을 하나의 그물망으로 엮어낸다. 그렇게 생생함과 객관성을 동시에 담보한다.
제일 1세대는 식민지 지배로 인한 나라 없는 설움과 전쟁으로 인한 참혹상을 동시에 겪은 세대다. 말도 통하지 않은 곳에서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고 여성 노동자로 살았다.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으면, 오죽하면 고생도 가난도 자랑을 한다고 할까. 언뜻 들으면 처연하기만 한 이 표현을 다시 되새겨보면, 그 무엇도 날 어쩌지 못한다는 삶의 의지와 강인함이 배어 있다.
저자는 이 표현에 대해 말 그대로 자랑스럽다는 뜻인지, 지나온 척박한 현실을 하소연해봐야 소용없음을 자조하는 뜻인지 알 수 없지만, 어딘지 그 고생과 가난을 훌훌 털어버리는 듯한 할머니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해서 속이 시원하다고 말한다. 잘 견뎌왔다며 스스로도 놀랄 정도인 극한 상황을 이제는 웃으면서 말할 수 있는 재일 할머니들은 꿋꿋하게 삶을 이어왔으니, ‘고생 자랑’ ‘가난 자랑’을 하고 싶어 하는 마음도 알 것 같다고 말이다.
동시에 저자는 이 표현을 일본의 정치와 뒤틀린 일본 사회를 일본인보다 혹독하게 감내하면서 살아온 재일 할머니들의 자랑으로 받아들인다. 우리는 그런 할머니들에게서 씩씩함과 당당함을 읽을 수 있다.
재일 여성의 개인사를 통해 드러나는 일본 사회의 민낯
일본인들에게 이방인으로 살면서 온갖 차별을 받은 재일 코리언들의 삶은 그 자체로 일본 사회의 민낯을 보여주기도 한다.
어린이와 여성의 노동, 그리고 노동 시간을 규제하는 법은 있지만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놓은 공장법이 그렇고, 임시노동이나 중노동의 기회만 얻을 수 있었던 조선인은 그나마도 동일 노동을 하고도 일본인보다 60~70퍼센트 정도의 임금을 받았다.
조선옷을 입으면 경찰들이 “기모노 입어!”라면서 먹물을 넣은 물총을 쏘아댔고, 학교에 가도 조선어를 쓸 수 없었다. 조선어를 말한 학생에게는 자기가 지니고 있던 표를 건네주었다.
“마지막에 ‘아무개가 가장 많았다’고 말해요. 그러니까 말을 안 하게 되는 거야. 일본어로 말하라고 해도 모르지, 다들 긴장이 되니까 아예 서로 이야기를 안 해요. 그래도 선생님에게 불만을 얘기할 수는 없었어.” ― 115쪽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일본군이 여성에게 범했던 중대한 인권유린인데도 반세기 가까이 방치되어 있었다. 피해 당사자에게 침묵이 강요되었다. 송신도 할머니의 옆구리에는 칼자국이 10센티 크기로 나 있고, 허벅지 안쪽에는 총검에 찔린 상처와 총탄이 스친 흉터가 있다. 오른쪽 귀는 난청이다.
“군인이 조선말을 쓰지 못하게 하겠다면서 말이야. 조선말을 쓰면 귀싸대기를 때려. 엄청났어. 저 솥뚜껑 같은 손으로 후려쳤지. 귀 고막이 터져버렸어.” ―239쪽에서
재난은 사람을 골라 오지 않는다. 히로시마 원폭이 터졌을 때 일본인도 조선인도 똑같이 희생되었다. 그러나 재난 피해를 똑같이 겪었어도 그 이후의 양상은 다르다. 당시 재일 코리언은 국민건강보험에 가입할 수 없었고 치료를 받지 못했다. 피폭 이후 ABCC(원폭피해조사위원회)에서 혈액 검사, 심전도 같은 검사를 몇 가지 받기는 했지만, 결과는 알려주지 않았다. 결국 연구 조사의 대상만 되었을 뿐 치료는 방치되다시피 한 것이다.
재일 코리언들은 또한 감염과 발병이 위생과 영향 상태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 한센병 발병률이 높다. 이는 건강한 환경에서 생활하는 비율이 낮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한 분씩 진중하게 알아야만 하는 ‘기억을 만나다’
어릴 적 뜻도 모르고 외워야 했던 [황국신민의 서사]를 수십 년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기억하는 부분에서도 그렇지만, 히로시마 피폭을 묘사하는 부분을 보면, 할머니들의 기억력은 신기하리만큼 비상하다. 60년도 더 된 오래된 일들의 순간순간을 그렇게 자세히 기억한다는 것은 살아남아야 했던 처절함이 그만큼 또렷하게 각인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이 마음으로 몸으로 새긴 하나하나의 기억은 동아시아 역사가 영원히 껴안고 짊어져야 할 트라우마로 남을 것이다.
피폭 직후 아무런 증상도 없었던 사람이 가을이 되자 원인도 모르게 잇달아 죽어갔다. 돌연 잇몸에서 피가 나오거나, 코피를 쏟거나, 머리카락이 빠지는 증상이 나타났다.
남주 씨는 설사가 끊이지 않았다. 의식불명에 빠지기도 했다. 가족은 포기했다. 하지만 와카야마의 친척들이 문병을 오면서 가지고 온 말린 양귀비 잎을 달여 마시자 설사는 멈췄다. 양귀비가 한동안 후쿠시마초 이곳저곳에서 아름다운 꽃을 피웠다. 그 후 양귀비를 따러 갔다가 두세 그루를 뽑고 더 이상 심지 않았다. ―111쪽에서
역사란 생활을 부여잡고 살아내는 이들의 흔적이다. 어린 나이부터 노동 착취와 차별 속을 헤쳐 간, 척박한 삶에 내던져졌던 재일 할머니들이 살아온 생생한 역사 현장을 재일 1세 할머니들의 기억과 함께 만날 수 있다. 그 기억들을 외면하지 않고 대면해야만 비극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할머니들은 “지금도 아무것도 필요 없으니 전쟁만 없으면 된다”라고 말한다.
조선에서 일본으로 시집간 첫날부터 폭행을 당하고, 남편은 도박과 여자에 빠져 혼자 탯줄을 끊어가며 아이를 낳고, 돈벌어주는 사람이 없어서 출산 직후부터 일거리를 찾아나서며 장사를 하고, 이산의 아픔을 겪고, 그것도 모자라 재해를 당하고…. 재일 할머니들이 겪어온 세월은 그야말로 다중의 고통으로 점철된 삶이었다.
하지만 아픈 인생살이를 토로하는 중에도 할머니들이 드러내는 표현과 생각에는 유연성과 서정이 깃들어 있다. 그래서인지 무겁고 우울하기만 할 것 같았던 이들의 이야기는 오히려 때론 익살스럽게 다가오고, 때론 강인한 기운이 전해지기도 한다. 재일 1세 할머니들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이렇게 노래해본다. “아, 힘내고, 아, 힘내고, 힘내!”
총 : 1편
[마이리뷰] 몇 번을 지더라도 나는 녹슬지 않아 ENergy flow ㅣ 2016-04-14 ㅣ 공감(3) ㅣ 댓글 (0)재일 코리안 여성들과의 인터뷰 모음. 가난과 고생을 당당하게 자랑하는 할머니들의 삶에 대한 자신감이 감동적이다. 일제 강점기 여러 복합적인 이유로 일본에서 살게된 이들이 겪은 민족적 계급적 성적 차별은 실로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다. 의도한 구성인지는 모르겠으나 송신도 할머니 편까지는 주로 민단과 연관된 분들이고, 그 이후로는 총련과 연관된 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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