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0-29

15 우리가 잊어버린 최초의 위안부 증언자…그 이름, 배봉기 : 한겨레



우리가 잊어버린 최초의 위안부 증언자…그 이름, 배봉기 : 일본 : 국제 : 뉴스 : 한겨레


우리가 잊어버린 최초의 위안부 증언자…그 이름, 배봉기

등록 :2015-08-07
[토요판] 커버스토리 / 위안부 최초 증언, 고 배봉기 할머니
오키나와 작은 섬에서 찾은 쓸쓸한 흔적


할머니의 말년을 가족같이 돌봤던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 오키나와 지부의 일꾼이었던 김수섭(74), 김현옥(73)씨 부부와 함께 나들이를 갔다가 찍은 사진. 사진 김수섭씨 부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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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가 기억하지 못하는 배봉기(1914~1991) 할머니는 한반도 출신 여성들 가운데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였음을 처음 밝힌 인물이다. 배 할머니는 1914년 9월 충남 예산군 신례원리에서 태어나 1991년 10월18일 나하시 마에바시 2초메에서 숨졌다. 사진은 할머니의 말년을 가족같이 돌봤던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 오키나와 지부의 일꾼이었던 김수섭(74), 김현옥(73)씨 부부와 함께 나들이를 갔다가 찍은 사진이다. 김씨 부부는 사진을 찍은 정확한 시점은 기억하지 못했다. 

배 할머니는 한국 사회에서 본격적인 위안부 운동이 시작된 계기가 된 김학순 할머니의 첫 증언이 나오기 무려 16년 전인 1975년 <교도통신> 등 일본 언론을 통해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임을 밝혔다. 그러나 배 할머니의 증언은 사회의 폭넓은 반향을 부르지 못했고, 그래서 곧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고 말았다. 우린 왜 할머니를 기억에서 지운 것일까. 그 실마리를 찾기 위해 배봉기 할머니기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했던 오키나와의 작은 섬, 할머니가 살던 작은 헛간, 할머니가 마지막 숨을 거둔 동네를 찾아가 봤다. 그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당했던 피해를 감춘 채 생을 마감해야 했던 수많은 위안부 피해 여성들의 쓸쓸한 뒷모습이었다.

일본군이 져 분하다던 할머니가 일왕의 사죄를 말했다

▶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최초로 밝힌 배봉기 할머니는 1945년 8월15일 일본이 패망한 뒤에도 고국행을 택하는 대신 오키나와에 남았다. 이후 자신의 사연이 알려지게 되는 1975년 10월 무렵까지 말도 통하지 않는 먼 이국땅을 전전하며 홀로 살았다. 할머니는 왜 전쟁이 끝난 뒤 고국으로 돌아가는 대신 낯선 이국땅에 남았을까. 할머니는 생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전쟁터에서의 ‘일’이 창피해서 전후에 본국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배 할머니를 기억하는 이들은 “할머니가 참 깔끔하신 분이었다”고 회상했다.



한국에서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 9월 무렵 배봉기 할머니가 자신을 찾아온 일본 주간지 <여성자신> 기자들 앞에서 자신의 고향인 충남 예산 신례원리의 위치를 표시하고 있다. 지도는 당시 총련 오키나와 지부의 벽면에 걸려 있던 것이다. 배 할머니는 당시 고향에 같이 가자는 일본 기자들의 제안에 서럽게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김수섭씨 부부 제공

“안따, X%$# 돗떼 이루노?”(당신 X%$# 찍고 그래?)

한적한 어촌 골목을 헤집고 다니며 닥치는 대로 사진을 찍고 있는 기자의 등 뒤에서 느닷없이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본어와 오키나와 방언이 섞인 듯한 독특한 문장이어서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었지만, 대략의 뜻은 짐작할 수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7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성난 얼굴로 기자의 얼굴을 쏘아보고 있었다. ‘당신 누군데 남의 집 사진을 함부로 찍느냐’는 항의의 눈빛이었다.

지난달 26일 오전 11시, 오키나와 본섬의 중심도시 나하의 도마린을 출발한 499t(정원 450명)짜리 여객선 ‘페리 도카시키’는 서쪽으로 1시간20분을 달려 오키나와 게라마제도의 가장 큰 섬인 도카시키섬에 도착했다. 사정없이 내리쬐는 오키나와의 뙤약볕 아래, 섬의 중심지인 도카시키 마을은 낮게 엎드려 있었다. 휴일인 탓에 마을의 공공시설은 모두 문을 걸어 잠근 채였고, 손에 쥔 것은 20여년 전에 찍은 흑백사진 한 장뿐이었다. 그곳에서 반드시 찾아야 하는 건물이 있었다.

“이 마을에 예전에 일본군 위안소가 있었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위치를 몰라 한 시간째 헤매고 있습니다.”

“우린 잘 몰라.”

노인이 오키나와의 뙤약볕에 벌겋게 달아오른 기자의 얼굴을 힐끗 쳐다봤다.

“저기 저 공터야. 우린 몰라. 안다고 해야 서너살 때 일이야. 사람들에게 얘기만 들었지. 저곳에 위안소가 있었어.”



1944년 11월부터 1945년 3월 무렵까지 배봉기 할머니가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했던 오키나와현 도카시키섬의 위안소가 있던 자리. 지붕이 빨간 기와로 되어 있어서 ‘빨간 기와집’으로 불렸다. 항구에서 걸어서 3분 정도 거리에 있다. 길윤형 특파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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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가리킨 빈터 앞에 도착해 20년 전의 사진과 현재의 모습을 비춰봤다. 저만치 산의 능선과 옥상으로 향하는 앞집 계단의 위치가 정확히 일치했다. 도카시키 항구에서 걸어서 고작 3분. 1944년 11월부터 1945년 3월말까지 이곳에 있던 ‘빨간 기와집’에서 배봉기(1914~1991) 할머니를 포함한 조선인 여성 7명이 일본군에 의해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했다. 현재 빈터에는 ‘마티즈’와 비슷하게 생긴 폐차 한대가 방치돼 있고, 반대쪽 담장 위엔 “책 안에서는 가족여행도 가능합니다”라는 영문을 알 수 없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한반도 출신 위안부 피해 여성 중
자신의 경험 증언한 최초의 인물
위안부 운동의 결정적인 계기 된
1991년 김학순 할머니 증언보다
무려 16년 전인데 우린 왜 모를까


오키나와가 일본 반환되던 1972년
글자 몰라 서류접수 못해 추방위기
위안부로 오키나와 오게 된 사연
지인에게 털어놓고 탄원서 제출
감추고 싶었던 개인사 알린 계기



빨간 기와집, 그 자리에 가다



위안부 주요 사건 연표한국인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배봉기란 인물은 현재 한-일 관계의 최대 현안이 되어 있는 위안부 문제의 역사를 기록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한반도 출신 위안부 피해 여성들 가운데 자신이 옛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증언한 최초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배 할머니의 존재가 확인된 것은 한국에서 위안부 운동이 시작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 1991년 8월 김학순(1924~1997) 할머니의 ‘역사적인 증언’이 이뤄지기 무려 16년 전이다. 왜 우린 배봉기 할머니를 기억에서 지운 것일까. 또 배 할머니와 김학순 할머니 사이에 존재하는 16년이라는 광막한 공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오키나와의 작은 섬 항구에서 쉽게 답을 내릴 수 없는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배 할머니가 살아온 고단한 삶의 모습은 일본의 독립언론인 가와다 후미코가 1988년 펴낸 저서 <빨간 기와집>(책엔 최봉기라는 가명으로 등장한다)에 자세히 기술돼 있다. 

배 할머니는 1914년 9월 충남 예산군 신례원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다른 농가에 더부살이를 하며 간신히 입에 풀칠만 하는 가난한 농사꾼이었다. 그 때문에 할머니는 만 6살 때 다른 집의 ‘민며느리’가 된다. 명목이 민며느리였을 뿐, 가난한 집에서 입을 하나라도 덜기 위해 사실상 식모로 팔려간 것이었다. 17살에 첫 결혼을 하지만 실패했고, 이후 조선 각지와 만주 등을 정처 없이 헤매며 살았다. 책에 담긴 할머니의 인생사는 너무나 처참해 자주 책장을 덮으며 한숨을 내쉬게 된다.

배 할머니의 인생에 결정적인 불행이 찾아온 것은 그가 29살이 되던 1943년 늦은 가을이었다. 그는 함경남도 흥남에서 “일을 하지 않고도 돈을 벌 수가 있다. 누워만 있으면 입으로 바나나가 떨어지는 곳에 간다”는 위안부 모집 업자의 꾐에 속아 위안부 모집에 응하고 만다.

1943년 말이면 이미 태평양전쟁의 전황은 미국 쪽으로 기울어진 상황이었다. 미군 잠수함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일본의 병참선은 이미 무너져 있었다. 할머니가 흥남, 서울, 부산, 일본의 모지, 가고시마 등을 거쳐 나하에 도착한 것은 위안부 모집에 응한 지 1년이나 지난 1944년 11월이었다. 당시 할머니가 목격한 나하는 미군이 1944년 10월10일 오키나와 각지를 집중 공습한 이른바 ‘10·10 공습’으로 폐허가 되어 있었다. 배 할머니는 이후 다른 조선인 여성 6명과 함께 오키나와 본섬이 아닌 도카시키섬으로 배치돼 ‘빨간 기와집’이라 불린 일본군 위안소에서 아키코라는 가명으로 일본군을 상대하는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했다. 

이후 일본이 패전한 뒤엔 미군 수용소에서 이번엔 미군을 상대로 똑같은 일을 했다고 한다.



배봉기 할머니를 16년간 돌봤던 총련 일꾼 김수섭씨가 1975년 10월 할머니와 처음 만났던 난조시 사시키에 있던 헛간의 위치를 설명하고 있다. 현재 헛간 건물은 철거됐고, 그 위치엔 창고로 보이는 건물이 들어서 있다. 길윤형 특파원
 charisma@hani.co.kr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이하 총련) 오키나와 지부의 ‘일꾼’이었던 김수섭(74)씨가 배 할머니를 처음 만난 것은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인 1975년 10월이다. 당시 할머니는 오키나와 동남부의 난조시 사시키에 살고 있었다. 지금은 주변이 반듯한 택지로 구획돼 있지만, 김씨는 “예전에 이 주변은 온통 사탕수수밭이었다”고 말했다. 당시 배 할머니는 수수밭의 안쪽에 있던 ‘가스도 없고 수도도 들어오지 않는’ 2~3평 정도의 헛간에 살고 있었다. 헛간은 이미 오래전에 헐려 이젠 2층 건물 높이의 창고가 들어서 있다.

김씨는 “배 할머니는 당시 오랜 방랑생활로 심신이 극도로 피폐해진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같은 총련의 일꾼이었던 아내 김현옥(73)씨와 할머니를 찾아가면 “어느 날은 잘 맞아주다가도 기분이 바뀌면 ‘만나기 싫다’며 문전박대를 하기 일쑤였다”고 말했다. 할머니가 두통, 신경통, 신경쇠약 등으로 작은 헛간에서 계속 소리를 지르다 보니 동네 아이들이 할머니에게 “미친 할머니”라고 돌을 던질 정도였다.

당시 배 할머니는 우리말을 이미 잊은 상황이었다. 그런 배 할머니가 일본말로 김씨 부부에게 자주 하던 말은 “유군가 마케타노가 구야시이사”(일본군이 져서 분하다)는 얘기였다. 김현옥씨는 “할머니 입장에선 일본군이 이겨야 (위안부인) 자신도 살 수 있었으니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일본군이 져서 세상이 변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게 ‘조국 해방’을 뜻하는지는 이해하지 못했고, 한국전쟁으로 조국이 남북으로 분단됐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면서 “내가 가난했으니까”, “그게 내 팔자다”라며 자신에게 일어난 불행을 모두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일본 출입국정책에 의해 강제 커밍아웃

배 할머니가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밝히게 된 계기는 1972년 5월 이뤄진 ‘오키나와의 일본 복귀’였다. 오키나와의 시정권을 회복한 일본 정부가 1945년 8월15일 전에 일본에 입국한 사실이 확인되는 오키나와현 거주 조선인들에게 특별영주를 허가한다는 조처를 발표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신고 기간을 3년으로 제한했다.

배 할머니는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탓에 일본어와 우리말 모두를 읽고 쓰지 못했다. 서류를 내지 못해 강제추방의 공포에 시달리던 배 할머니는 예전에 함께 일한 적이 있는 식당 주인에게 자신이 ‘위안부로서 오키나와에 와서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얘길 털어놓는다. 식당 주인은 이러한 사연을 담은 탄원서를 오키나와현 입국관리사무소에 제출했다. 이를 통해 할머니는 추방당하지 않고 특별영주 자격을 얻을 수 있었지만, 감추고 싶었던 쓰라린 개인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1975년 10월 일본 언론을 통해 배 할머니의 사연이 기사화됐기 때문이다. 그 무렵 나온 1975년 10월22일 <고치신문>의 기사 속에서 뒷모습의 할머니는 “전쟁터에서의 ‘일’이 부끄러워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1972년 5월 오키나와가 일본에 반환된 뒤 총련은 1972년 8월15일 오키나와에서 이뤄진 조선인 강제동원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조선인 강제연행 진상조사단’(이하 조사단)을 만들게 된다. 또 한달 뒤인 9월6일엔 김씨 부부 등을 중심으로 오키나와 총련 지부도 결성했다. 그해 10월 조사단이 발표한 A4용지 60쪽 분량의 ‘진상조사 보고서’를 보면, 조선인 위안부와 관련해 “10월10일 공습 무렵 일본군 어떤 부대의 사기 고무를 위해 위문대원으로 보내졌다. 전쟁에 내팽개쳐진 이들은 말도 통하지 않고 지리도 모르는 전쟁터를 떠돌 뿐이었다”는 기술을 싣고 있다. 김씨 부부는 “당시엔 배 할머니와 같은 생존 위안부들을 직접 만나지 못했지만, 오키나와인들의 여러 증언과 기록을 통해 조선인 위안부의 실체는 확인한 상태였다”고 말했다.



총련 일꾼이었던 김수섭씨가 할머니의 사연을 듣게 된 것도 이케다라는 이름의 <교도통신> 기자를 통해서였다. 배 할머니는 처음엔 김씨 부부를 차갑게 내몰았다. 그러나 2~3년이나 꾸준히 할머니를 찾아오는 김씨 부부의 정성에 할머니는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게 된다.

배 할머니의 ‘커밍아웃’은 자발적인 선택이었을까. 재일 조선인 2세인 김미혜 도쿄대학 특임연구원은

“김학순 할머니는 ‘위안소를 만든 것은 민간업자’라는 일본 정부의 거짓말에 분노해 직접 투쟁을 결심한 것인 데 비해, 

배봉기 할머니는 일본의 출입국 정책에 의해 강제로 ‘커밍아웃’을 강요당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 때문에 배 할머니는 원치 않은 외부의 취재 요청에 적잖은 고통을 받게 된다.

배 할머니의 사연은 한국 사회엔 본격적으로 전해지지 않는다.

김씨 부부는 그 이유에 대해 “배 할머니가 우리(총련의 활동가)와 가깝게 생활하다 보니, 남쪽에선 이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니냐. 한국 언론과 만난 것은 이번 <한겨레> 취재가 처음”이라고 말했다. 1977년 4월 총련 기관지인 <조선신보>가 배 할머니의 사연을 대대적으로 보도하자 이런 경향은 더 강화된다. 윤정옥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1990년 1월 <한겨레> 기고에서 배 할머니를 둘러싼 이런 상황에 대해 “할머니는 몸도 성치 않고 여전히 인간기피증에 걸려 있어 조총련계의 김(김현옥씨)이라는 여성의 요청에만 응해 준다고 했다”는 한 문장으로 정리하고 있다.

한국 언론이 배 할머니의 사연을 적극 보도했다 해도 그 영향력은 크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배 할머니의 거주지가 한국이 아닌 오키나와였던데다, 1980년 말까지 한국의 군사정권은 일본에 대한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들의 배상·보상 요구를 강하게 억눌렀기 때문이다. 김학순 할머니의 용기있는 증언이 나오게 된 것도 1987년 6월항쟁 이후 일제 피해자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형성된 뒤다.

배 할머니는 김씨 부부와 왕래가 잦아지며 사탕수수밭 한가운데 있던 사시키의 헛간을 나와 나하 시내로 이사를 오게 됐다. 김씨 부부와 배 할머니의 공존은 그렇게 16년 동안 이어졌다. 할머니가 기분이 좋아져 ‘오늘은 드라이브를 가자’고 하면 셋이 모여 근처의 온천에 다녀오곤 했다. 김수섭씨는 “매달 5일이 할머니의 생활보호금이 나오는 날이었다. 그럼 할머니가 사무실로 와 ‘니꾸 갓떼 기나사이”(고기 좀 사와)라고 말하면 집사람이 슈퍼에 가서 불고기와 맥주를 사왔다. 할머니가 한달에 한번씩 우리에게 한턱을 낸 셈”이라고 말했다.



고향 예산 떠나 만주 등 떠돌다
29살 되던 1943년 업자 꾐에 넘어가
아키코라는 가명으로 일본군 상대
전쟁터에서의 일이 부끄러워
고국에 돌아갈 수 없었다고 한다

헛간서 살며 두통과 신경쇠약으로
“미친 할머니” 소리까지 들었지만
총련 김수섭씨 부부와 교류하며
인생 말년을 아주 값지게 보내다
91년 10월18일 영원히 잠들어



배봉기 할머니의 사연을 일본에 전한 <고치신문> 1975년 10월22일 기사. 할머니는 얼굴을 공개하지 않고 뒤를 돌아본 채 증언하고 있다. 김미혜씨 제공

“원수를 갚아달라”

김씨 부부와의 교류를 통해 배 할머니는 사회를 바라보는 나름의 안목을 키워갔던 것 같다. 김현옥씨는 “할머니와 얘기하면서 ‘아지매가 그렇게 된 것은 아지매의 팔자가 아니다. 우리가 일제의 식민지가 되어서 그렇게 된 것이다’라고 말했다. 처음엔 그런 말을 듣기 싫어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할머니가 마음속에 의문을 품게 되고, 그러면서 나름대로 여러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오키나와엔 동포들이 별로 살지 않았기 때문에 총련 지부의 주요 사업은 미군기지 반대운동을 하는 오키나와 민중들과의 ‘연대 사업’이었다. 당시 오키나와에선 한-미 연합 군사훈련인 팀스피릿 훈련(1976년부터 1993년까지 실시. 현재는 키리졸브로 대체)에 대한 반대운동이 치열하게 이뤄지고 있었다. 이 훈련에 참여하는 미 공군이 오키나와 가데나 기지를 활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김씨는 팀스피릿 훈련에 반대하는 가데나 기지 앞 반대 집회에 자주 연대 연설을 갔다. 김현옥씨는 “할머니가 ‘바깥사람은 어디 갔냐’고 하면 ‘반대 집회에 갔다’, ‘그것은 뭐 하는 거냐’ 그러면 ‘그건 이러저러한 것이다’라고 설명을 하곤 했다”고 말했다. 특이한 차림새의 할머니가 총련 관련 집회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다 보니 한번은 다이라 료쇼 나하시장(1968~1984년 재임)이 배 할머니의 사연을 듣고 “오랜 시간 고생하셨습니다. 원래 일본 정부가 책임을 지고 보상해야 하는데 생활보호밖에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사죄를 한 적도 있었다.

1989년 1월의 일이었다. 텔레비전으로 히로히토 일왕이 숨졌다는 뉴스를 보던 배 할머니가 갑자기 “왜 사죄도 안 하고 죽었냐”고 말했다. 배 할머니가 그런 말을 할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김현옥씨는 할머니에게 ‘일왕이 구체적으로 뭘 해줬으면 좋았겠냐’고 물었다. 그러자 배 할머니는 “사죄를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배 할머니가 이 무렵엔 자신에게 닥친 불행의 원인에 대해 나름의 견해를 갖게 됐음을 짐작하게 한다. 배 할머니는 김씨 부부에게 종종 “원수를 갚아 달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김씨 부부에겐 만년의 배 할머니를 생각하면 잊을 수 없는 사연이 많다. 한국에서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 9월, 일본의 주간지인 <여성자신>(조세이지신)의 기자들이 할머니를 찾아왔다. 일본 기자들이 할머니에게 고향이 어디인지를 지도에 표시해보라고 했다. 할머니는 충남 예산 신례원리를 가리켰다. 마침 사진기자인 후지이가 근처에 산 적이 있었다. 흥분한 일본 기자들은 배 할머니에게 “우리들이 여비를 댈 테니 고향에 한번 가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했다. 배 할머니는 “글쎄, 가고 싶지, 한번 가야지” 하면서도 확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 한참을 엉엉 울고 만다. 김수섭씨는 “할머니와 오래 지내면서도 그렇게 서럽게 우는 모습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라고 말했다.

또 한번은 배 할머니를 주인공으로 <오키나와의 할머니>라는 다큐영화를 만든 야마타니 데쓰오라는 영화감독이 상영회에서 모은 성금을 할머니에게 전달한 일이 있었다. 배 할머니는 처음엔 이 돈을 김씨 부부에게 주면서 받지 않으려 했다. 잠시 실랑이가 일다 김현옥씨가 예전에 “여자는 결혼해서 가정을 꾸려 애 낳고 잘 사는 게 행복”이라고 했던 할머니 말을 떠올려 “함께 반지를 하러 가자”고 제안했다. 김씨 부부는 할머니와 함께 오키나와의 중심가인 국제로에 있는 제일 유명한 금은방에 가 금반지를 샀다. 김현옥씨가 배 할머니에게 “아지매, 이거 갖고 갈래요, 하고 갈래요?”라고 물었다. 할머니는 기쁜 얼굴로 “하고 갈래”라고 답했다.

할머니가 숨을 거둔 것은 1991년 10월18일이다. 그해 오키나와에선 예년보다 무더운 날들이 이어졌다. 배 할머니의 건강을 걱정했던 김씨 부부는 10월초 할머니에게 “함께 병원에 가자”고 했다. 그로부터 며칠 뒤, 김씨 부부는 “할머니 방문을 두드려도 답이 없다”는 나하시 사회복지 담당 직원의 연락을 받게 된다. 복덕방에서 열쇠를 빌려 방문을 열었더니 배 할머니는 침대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 것처럼 편안히 누워 숨져 있었다.

배 할머니의 49재를 겸해 추도식이 열리는 날 그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김씨 부부가 공개한 당시 추도식 사진을 보면 추도식 제단 앞에 나하시장과 오키나와현 지사가 보내온 화환도 찾을 수 있다. 할머니가 살던 나하시 마에바시 2초메 주민들은 할머니를 김씨 부부의 친척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나중에 할머니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알게 된 주민들은 적잖이 놀랐다고 한다. 지난달 24일 오후 할머니가 만년을 보낸 2초메 골목을 찾아가 봤다. 25년 전 할머니의 뒷모습을 담은 사진에 찍혀 있는 ‘쇼와 부동산’ 간판이 여전히 거리를 지키고 있었다. 서민들이 사는, 어느 도시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한적하고 쓸쓸한 거리였다. 김수섭씨는 “할머니가 위안부로 엄청 고생해서 불쌍한 사람처럼 되어 있지만, 나는 할머니를 불쌍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할머니가 인생 말년을 아주 값있게 살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1991년 12월6일, 배봉기 할머니의 49재를 겸해 오키나와 나하에서 열린 추모식 모습. 할머니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그의 죽음을 추도했다. 사진 뒤쪽으로 오키나와현 지사, 나하시장 등이 보낸 화환도 보인다. 김수섭씨 부부 제공

김학순 할머니의 조위금 1만엔

할머니의 49재가 열리던 1991년 12월6일은 우연히도 김학순 할머니가 도쿄지방재판소에 최초의 위안부 피해보상 소송을 청구한 날이었다. 김 할머니가 어디서 알았는지 배 할머니의 추모식에 1만엔의 조위금을 보내왔다. 배봉기 할머니가 김학순 할머니와 같은 ‘투사’였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할머니는 자신이 위안부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것을 그리 원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어쨌든 배 할머니는 김 할머니와 역사적인 ‘바통 터치’를 하고 저세상으로 갔다. 그리고 김학순 할머니도 숨지고, 많은 시간이 흘렀다. 할머니들은 계속 숨져 이제 48명이 남았다.

김미혜 특임연구원은 “배봉기 할머니를 통해 위안부 할머니들이 전쟁 뒤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우리가 조금은 알 수 있게 됐다. 배 할머니는 전쟁이 끝나고 위안부 여성들이 어떤 삶을 감당해야 했는지를 보여주는 창문 같은 존재가 아니었나 싶다”고 말했다.

도카시키·나하·사시키(오키나와)/길윤형 특파원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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